삼각산 응봉능선에서 탕춘대능선을 가로지르며...
(1) 준비
삼각산의 수많은 능선과 등산로 중
가보지 못한 곳 탐방코저
오늘은(2012/10/21/ 구처장과
응봉능선에서 사모바위로 올라 향로봉을 거쳐
탕춘대 능선으로 향.
(2) 진관사 - 응봉(323m, 조망바위)
(08:50-09:40, +50=50분)
진관사로 들어가는 길에도
가을을 짙어가고 북한산 둘레길을 안내하는
이정목이 어지럽다.
진관사 일주문에서 좌측 응봉능선에 달라붙어
완만한 능선을 올라
몇 개의 소봉을 넘으니
커다란 바위를 머리에 인 조망봉이 나타남.
진관사는 아득히 발 아래 있고
좌측 의상능선과 우측 비봉능선에도
가을이 짙게 물들어가고 있다.
(3) 응봉(조망바위) - 사모바위
(09:40-10:30, +50=100분, +2.5=2.5km)
아쉬운 점은 단풍이 어우러진 깊은 계곡과 능선이
오늘은 짙은 가스로 잠겨있다는 점인데,
사모바위에 다가갈수록
기암들이 연이어 나타나며
아름다운 손을 내밀어 반겨줌에
인수, 백운, 노적봉은 희미할지라도
그들과의 악수는 즐겁기만하다.
(4) 사모바위 - 비봉(560m) - 향로봉(535m)
(10:30-11:10, +40=140분, +1.1=3.6km)
사모바위는 오늘도 만원.
차가운 가을바람에도 사모의 중턱에 오른 일원이 되어
발아래 승가사며, 가야할 비봉, 향로봉을 일별.
비봉은 우회.
향로봉도 우회.
(5) 향로봉 - 탕춘대능선- 탕춘대공원지킴터
(11:10-12:10, +60=200분, +2.0=5.6km)
향로봉에서 이어져 곤두박질친
탕춘능선도 우회.
탕춘성곽에 다다르니
엄청난 인파.
족드리봉 방향도 만원.
(6) 탕춘대공원지킴터 - 탕춘성곽- 상명대
(12:10-12:50, +40=240분, +0.8=6.4km)
이 곳에 성을 쌓은 목적?
그저 완만하게 내려오는 성곽 끝에 다다르니
철책이 버티고 있어
옆길로 내려오니 상명대 후문.
6.4km, 4시간여, 천천히, 이야기하며...
배달9209/개천5910/단기4345/서기2012/10/2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진관사 입구(이곳이 김신조루트, 사모바위로 향하는 길)
2. 진관사 일주문(사모바위 2.5, 비봉,향로봉 2.4km)
3. 첫 번째 조망처에서 본 의상능선
4. 단풍터널
5. 우측 비봉능선
6. 지나온 길
7. 좌측 의상능선
8. 사모바위 직전 기암지대
9. 그 암벽에 핀 구절초
10. 사모바위 이정목(대남문1.3, 향로봉1.1, 진관사2.5, 삼천사2.7km)
11. 사모바위
12. 비봉능선 사모바위 아래 김신조일당 마지막 비박동굴(못가봄)
13. 비봉능선 단풍
14. 비봉능선
15. 비봉능선에서 본 의상능선, 백운대방향
16. 향로봉
17. 향로봉 오르는 깔딱고개
18. 등로상의 기암
19. 탕춘대성곽을 내려가며 본 족두리봉의 변화
20. 탕춘대성곽(무원마을 촬영)
21. 탕춘대성 암문 이정목(향로봉2.0, 상명대0.8km)
22. 내림길에 본 단풍과 댕댕이덩굴열매
23. 내려와 본 비봉, 보현봉(사자능선), 형제봉 아래 구기동일대
24. 오늘의 산행지도
진관사 [津寬寺]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삼각산 북쪽에 있는 사찰. 신라 진덕왕 때 원효가 삼천사(三川寺)와 함께 창건하여
신혈사(神穴寺)라 했다. 고려 현종이 어릴 적에 자신을 왕태후의 암살기도(企圖)로부터 구해준 신혈사의 승
(僧)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사라 했다. 그뒤 1463년(세조 9)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 1) 벽운(碧雲)이 중건했다. 이후에도 몇번의 중수가 있었으며, 6·25전쟁 때 나한
전등 3동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1964년 재건을시작해 현재 대웅전·명부전·나한전·독성각(獨聖閣)·칠성
각·홍제루(弘濟樓)·종각·일주문·선원·대방(大房) 등이 있으며 비구니의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1968 -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침입
1968년 1월 21일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침투한 북한의 특수부대원 31명이 김일성의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서울에 잠입했다. 자하문을 통과하던중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도주하
자 우리측 군경은 비상경계에 들어가 북한 124군부대소속 무장공비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함으로서 사
건을 마무리지었다. 이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현장에서비상근무중이던 종로경찰서 최
규식 총경이 순직했다. 이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귀순했다. /조선
1.21청와대기습테러와 팬텀기 도입
1월 21일은 유명한 김신조의 청와대기습이 있었던 1.21사태의 바로 그날입니다. 1.21사태는 1968년 북괴 124
특수군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청와대를 기습한 사건입니다. 굳이 비교하여 예를 들자면 우리가 겪
은 1.21사태는 미국이 겪은 911사태와 그 성격이 같습니다. 1.21사태를 계기로 하여 한국의 국방정책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일종의 비정규전(테러)에 대한 대응체제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비군제도입니다.
북괴의 청와대 기습테러인 121사태를 겪고나서 우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그 향토예비군은
그후 일련의 테러전인 울진삼척지구무장공비토벌에 일등공신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박대통령의 불같은 응징
의 의지를 달래고자한 미국의 약점을 간파하여 우리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팬텀기를 토입하였던 것입니다. 당
시 일본조차도 F-104를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F22랩터를 도입한것이라고 해
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 였습니다. 1969년에 우리가 팬텀기 1개대대(18대)를 운영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미국
외에는 영국만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전략적 전폭기 역할을 수행하는 팬텀기를 도입하기 위해
서 박대통령은 월남파병에 반대급부적 조건으로까지 이용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측 협상 대표인 최규하 외무
부장관을 불러 “팬텀기 지원을 보장받지 못하면 회담을 깨고 나오라”고 지시까지 했던 것입니다.그렇게 해
서 우리는 팬텀기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특기할 만한 것으로, 미국 이외로서는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F-4 운용국가가 된 것 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 최강의 항공전력을 보유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한
편 일본의 항공자위대는 1970년도입을 결정하여 1973년에 F-4E를 도입개시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미
국으로부터 무상군사원조 1억달라를 추가로 받아내었습니다. 이것의 내막은 북괴의 연이은 테러에도 미적지
근한 반응을 보인 미국에대한 한국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미국의 고육지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무상원조 1억달라의 용처에 대해서 박대통령은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다들 들으시오. 최규하 - 밴
스 장관의 회담 내용인데 군사원조 지원액 1억 달러 중 팬텀기 1개대대(18대) 구입비와 비행장 개선비(500만
달러)를 포함해 6800만 달러를 공군이 쓰고 나머지 3200만 달러는 육군·해군, 해병대와 경찰이 쓰라는 지시
요.” 당시 우리의 경제를 감안하면 1억달라는 천문학적 금액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미국에 대한 엄포로서
1억달라 공짜로 받아냈다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 돈인 1억달라중에 무려 6800만 달라가 공군에 사용되었
습니다. 그래서 한때나마 아시아 최강의 공군전력을 유지할수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가장 공군을 우선한 정
책이기도 합니다. 그 후 미국에 의해 Peace Spectator로 명명된 프로그램의 제1진으로 1969년 8월25일 F-4D
Block 24형 4대, 25형 13대, 26형 1대, 총 18대의 F-4D를 인도 받게 되며 이 기체들은 제11전투비행단 제151
전투비행대대가 창설되어 배치되었습니다.1972년에 제2진으로 공군 보유 F-5A 36대와 RF-5A 8대의 베트남 공
여에 대한 대여분으로 주한미공군 제3전투비행단 (3rd TFW) 소속 F-4D 18기 (Block 26형 7대, 27형 6대, 28형
5대)가 이관되어 공군제110전투비행대가 재편성되었다. 제2진은 미국으로부터의 대여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몇
대가 일시 사용 후 반려되었을 뿐 대부분은 그대로 공군의 보유기가 되었다. (한때는 막강 공군이었는데 ...)
그리고 우리는 방위성금을 모아서 팬텀기를 추가로 구입하여 공군력을 확충하였습니다. 지금처럼 말로하는 것
이 아니라 온국민이 한마음으로 공군력을 강화한 결실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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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버님으로 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전해 드립니다.1968년1월 21일 당시 저의 아버님
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은 바데로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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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신조일당은 주로 미군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과 일부 미군과 국군의 경계지역 접경만을 골라서 침투하
였습니다. 그만큼 당시 미군의 경계태세가 허술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아군 복장이었
기 때문에 미군의 의심을 회피할수 있었기도 합니다. 어쨌든 김신조일당의 청와대 습격조는 아주 유유히 휴전
선을 넘어서 서울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후 미군경계지역을 벗어나서 검문다운 검문을 한 것이 바로 세검정에
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시던 최 규식 총경이었습니다. 김신조 일당이 최규식총경을 총격하고 그곳에서 총격전
이 벌어 졌습니다. 물론 그전에 신고가 접수되어서 우리의 군경이 대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북
괴 특수침투요원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던 상황이었습니다. 68년 1월21일 저녁 7~8시경이었습니다. 당시 기온
은 영하 20도를 헤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규식총경의 검문에막힌 김신조일당의 총격으로 콩볶는 듯한 소
리가 효자동 세검정 그리고 청와대까지들렸습니다. 우리의 군경과 북괴침투조간의 격렬한 총격이 벌어지고 있
었습니다.그러자 상황실에는 청와대 외곽 경비초소로부터 다급하면서도 지원을 요청하는 경비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 외곽 초소경비요원은 거의 울음 썩인 목소리로 긴급지원(실탄등) 을 요청하는 그런 상
황이었다고합니다.계속 다급한 지원요청은 들어오고 총격전의 소리는 더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당시 저의 아버
님은 경비대 본부에서 근무를 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그 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고 지금도
당시 말씀을 하실때는 마치 당시로 돌아가서 서 있는듯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그중에서도 박대통령의 모습은
지금도 너무나도 생생하다고 하십니다. 무선과 유선으로 날라오는 상황에 대해서 박대통령께서는 조금도 흐트
러짐 없이 진두지휘를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 특수부대를 최규식 총경보다 먼저 조우한
사람은 서대문경찰서장이었습니다. 소속을 묻자 특수수부대훈련 마치고 귀대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바람에 의심
을 가지면서도 그냥 통과 시키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무래도 미심쩍으니까 서대문 경찰서장은 뒤따라가면서 무
전을 날렸습니다. "미상의 부대 이동중, 재 검문요망" 이 무전은 바로 당시 중앙 정보부에 잡혔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선 바로 종로경찰서에 알렸고 그래서 최규식 총경은 부관과 함께 "빽차(당시 경찰차는 새하얀 백
색의 찦)" 를 타고 자하문 밖 세검정으로 달려 간 것입니다. 허리에 권총만 찬 총경이 북괴 특수부대를 가로
막고 검문을 하였습니다."소속을 말하시오" "방첩부대야! 저리 비켜"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리는 수법)"난 종
로서장이요. 소속을 확인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세검정 고개길로 77번 시내버스가 헤드라이트를 키고 올라오
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특수부대원들은 77번 시내버스를 최규식총경을 지원하러오는 지
원부대인 줄 착각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총격을 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시내버스라는 것을 알았다면 최
규식총경(부관,운전병)일행을 무혈 진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후 김신조 일당을 잡은 군경은 승진과 포
상을 받았지만 제일 처음 김신조일당과 조우하였으나 미처 검거치 못하고 놓친 서대문서는 그 어떤 포상도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서대문서장의 자조섞인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죽은 총경보다 산 순경이 낫
지 않은가?"어째든 그 후 김신조 외에 1명을 더 생포 했습니다만 그 한명은 후송중에 자폭하였습니다. 이 사건
으로 한국은 대테러전까지 가미한 국가안보 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분명 121사태(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는 국가의 심장부를 노린 테러였고 또 그 테러의여파는 대한민국을 변화시켰습니다. 대테러전 능력까지 겸비하
게 된 대한민국을 보고 당시 김일성은 통탄해마지 않았습니다. "앗 뿔사! 내가 실수 했구만" 바로 김일성이가
박대통령이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상대를 잘 못 골른 결과입니다.(발췌) /고성혁의 역사추적이야기 2006/01/23
09:44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2979&menuId=11249&listType=2&from
=&to=&curPage=4&logId=863221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서 북한산 서남쪽의 향로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약5.1km의 산성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
기 위한 산성으로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
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
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 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붕괴되어 50여년 동안이나 방치되
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이 홍지문 현판은
고 박정희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
(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26.72m, 폭6.8m, 높이5.23m, 수구 폭3.76m, 수구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
로 복원하였다. 이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것은 현재 세검정이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현재
세검정초교)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
쳐 숙종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
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
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
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
을 짐작할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 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의
축성과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
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
로 성구(城口)를 뚫어놓았다.
45년 전, 1·21 사태 때 전사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유족
"박정희 살해하려던 김신조 기억되고, 그를 막은 아버지는" 사건 직후 향토예비군 만들고, 자주국방을 최우선으로 추진
수방사, 21일 공비 침투로 걷기 등 대규모 행사 개최
'1·21 사태' 때 유일하게 생포됐던 무장공비… 김신조 목사
"김일성, 박정희 산업화 인정… 그래서 죽이려 했다"
"北, 내가 죽었으면 발뺌했을 것… 천안함도 마찬가지"
"김일성은 당시 남한의 산업 발전이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라는 걸 인정했어요.
더 시간이 지나면 한국의 공산화가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 빨리 죽이려고 한 겁니다.
"1968년 1월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던 북한 특수부대원 김신조(71)는
45년이 흐른 뒤 노(老) 목사가 돼..
"김신조는 기억되고 공비 막은
Koen De Wolf / Asian Morning
| 인회 | | 응봉능선은... 사계를 보기 좋은코스지요. 옆의 북한산의 허리인 의상봉능선과.. 비봉등을 비롯해 모두한눈에 볼수 있으니깐요.. 2012/10/25 09:5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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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없는풀뿌리 | | 이번주엔 중성문-궁성지-남장대지--문수봉-보현봉-형제봉능선-팔각정-삼청각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2012/10/25 20:34:26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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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없는풀뿌리 | | [만물상] 1·21 사태의 기억(2013.01.18) 68년 1월 10일 새벽 황해북도 사리원 인민위원회에 괴한 31명이 나타났다. 건물 주변에는 무장한 노농적위대와 사회안전원 수십 명이 지키고 있었다. 괴한들은 총격을 퍼부으며 건물 1·2층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12명이 죽고 40여명이 다쳤다. 괴한들은 트럭을 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날이 밝자 남한 특공대 소행이라는 소문이 좍 퍼졌다. 괴한들은 북한이 남한 침투 게릴라전을 벌이려고 키운 124군 부대 2400명 중에서 뽑은 최정예 대원이었다. 청와대 습격을 앞두고 건물이 비슷하게 생긴 자기네 인민위원회를 상대로 실전 훈련을 한 것이다. 이들은 극한 훈련을 겪어낸 살인 병기였다. 40㎏ 군장 메고 한 시간에 12㎞ 달리기, 무덤 파고 들어가 시체와 함께 숨어 있기, 혀를 문 채 자기 턱을 올려쳐 자결하기…. ▶1월 21일 일요일 밤 10시 15분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경복고 후문 앞길에서 총성이 울렸다. 북한 게릴라를 가로막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곧이어 출동한 수도경비사령부 장병과 게릴라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은 민간인이 탄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까 넣었다. 조명탄으로 하늘이 대낮처럼 밝았다. 시민들은 콩 볶는 총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격전 끝에 게릴라 29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했고 한 명은 북으로 달아났다. 우리 쪽에선 민간인 5명을 포함해 30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부상했다. ▶1968년은 6·25 이후 한반도에 전쟁 위험이 한껏 치솟았던 해였다. 1·21 사태 이틀 뒤 미군 정보수집함(艦) 푸에블로호가 납북돼 미 항공모함이 동해로 출동했다. 10월엔 124군 부대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으로 침투해 양민을 학살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오늘 1·21 사태를 기억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북한에 대한 복수를 벼르며 훈련시켰던 실미도 특수부대원을 반공 정권의 희생자로 묘사한 영화는 있어도 1·21 사태를 되비춰본 영화는 없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같은 일이 벌어져도 북한을 비난하면 오히려 낡은 사람 취급받는 세상이다. 1·21 사태를 겪었던 세대는 그 공포스러운 기억이 세월에 풍화(風化)돼 바랬다. 젊은 세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주도 세력들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던 그 순간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애쓴 탓일 것이다. 위기에서 배우지 못한 국민은 언젠가는 다시 위기의 시간을 맞고야 만다. 2013/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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