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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산과 내사산을 잇는 하늘길 탐방기 ②산영루-대성문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7. 14:47
외사산과 내사산을 잇는 하늘길 탐방기 ②산영루-대성문 (북한산성입구-중성문-행궁지-남장대지-대성문-형제봉-하늘길-삼청각) (3) 산영루-행궁지-남장대지-715봉-청수동암문(694m) (10:45-12:00, +75=140분, +2.3=5.6km) 산영루 아래 예쁘게 흐르는 잔잔한 폭포를 바라보며 아침햇살에 더욱 색감을 뽐내는 단풍잎 아래 대남문 방향 등로를 오르니 경리청상창지인데 19C말까지도 존재했던 주둔 군부대 양곡창고였다고 입간판이 말한다. 다시 내려와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오르니 행궁지이다.(11:00) (대남문1.4, 청수동암문1.5, 입구4.1km) 행궁지에서 直進하는 대남문길은 쉬울 테지만 오늘은 처음 가보는 남장대지를 알현코자 계획했으므로 오른쪽 청수동암문 방향을 잡는다. 정궁은 입간판이 있는 곳에서 한참을 올라야 그 주춧돌을 볼 수 있었다. 행궁지도 1910년대 까지는 온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주춧돌만 나뒹굴고 내년까지 1차 발굴을 실시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울타리를 치고 여기저기 파헤쳐진 가운데 기와등 발굴 유물을 군데군데 積置 해놓았다. 남장대지로 오르는 길의 비알이 꽤 가파른데 그 많던 인파는 간데없고 더구나 오솔길이 낙엽에 푹 파묻혀 가늠조차 안 되고 다리 힘은 倍加되는데 행궁지 주변의 현란한 늦단풍으로 피곤한 줄은 모르겠다. 행궁지 발굴 울타리를 비잉 돌아가니 급경사인데 거기를 견디자 시원한 조망바위가 나타나며 처음으로 삼각산과 염초능선이 조망된다.(11:30) 잠깐 휴식을 취하고 몇 개의 오르내림을 견디니 남장대지가 나타난다(11:50) 여기에 올라서니 드디어 의상능선이 저 아래서 마구 달려온다. 그리고 비봉능선이 산성 쪽으로 달려오며 뾰쪽한 문수봉을 일구어 놓았다. 다시 오르내리는 암봉 몇 개를 지나니 의상능선과 행궁지 길이 합쳐지는 715봉인데 (의상봉2.4, 입구5.2, 행궁지1.1, 대남문0.4km) 바로 그 直下가 청수동암문이다.(12:00) (의상봉2.5, 입구5.6, 비봉1.9, 대남문0.3km) 이 곳 청수동암문까지 오르며 보니 행궁지까지는 아직 늦단풍이 그런대로 가을의 中心을 잡고 있는데 그 이후로 능선길은 거의 사위어가는 추세이고 아쉬운 점은 비 온 뒤라 조망이 좋을 줄 알았는데 기온차가 심하여 가스가 잔뜩 끼어 조망이 별루인 점이다. (4) 청수동암문(694m)-문수봉-대남문(683m)-대성문(620m) (12:00-12:45-점심-13:10, +70=210분, +0.6=6.2km) 청수동 암문에서 문수봉을 한번 올라 보았다. 암릉의 각도가 대단하여 다리가 떨려오는데 문수봉에서 비봉능선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항상 우회한 문수봉에 대한 미안함이라기보다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표현이 맞으리라. 장쾌하게 뻗어 올라오는 비봉능선, 족두리봉-향로봉-비봉-사모바위-횃불바위(똥바위), 잊지 못할 것이다. 문수봉을 내려오니 대남문인데 대남문은 오늘도 만원. 그런데 대남문 밖 안내판을 보니 보현봉, 형제봉 일원은 휴식년제 실시로 입산금지. 참으로 난감. 형제봉을 오를 수 없단 말? 그러나 우회로는 있을 터... 보현봉의 날카로운 위세를 바라보며, 보현봉 아래 문수사 풍경소리에 편한 마음으로 대성문에 安着. (형제봉1.8, 비봉2.5, 보국문0.6, 대동문1.2, 대남문0.3km) 이정목에 분명 형제봉 거리가 표기되어 있는 걸 보니 대성문에서 보현봉을 우회하여 형제봉으로 가는 길이 있슴이 분명하다. 안심하고 대성문 문루에 앉아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 점심 먹으며 대성문 아래를 살피니 등산객은 쉼 없이 올라오는데 아름다운 단풍은 계곡 아래로 내려갈수록 농염하여 길고 긴 하산길이 기대된다. 배달9209/개천5910/단기4345/서기2012/10/28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9C말 행궁의 모습 - 1915년 8월 대홍수로 유실) (북한산성 유구의 대부분은 1915홍수, 1925乙丑대홍수에 상당부분 유실되었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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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을축년 한반도에는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졌다. 7~9월 네 차례 내린 큰 비로 전국의 강이 흘러넘쳐 647명의 사망자를 냈다. 가옥·농경지 같은 재산 피해액은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인 1억300만원에 달했다. 이런 재앙이 아이로니컬하게도 고고학에는 두 가지 선물을 가져다줬다. 홍수가 휩쓸고 간 광주군 암사리 한강변에서 신석기인들의 주거지가 발견됐다. 그보다 하류 쪽 풍납리에선 땅속에 묻혀 있던 백제 토성(土城)이 허리를 잘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인 온조에 의해 기원전 18년 한강 가에 세워졌다. 백제는 한성·웅진(공주)·부여 등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된 시대는 한성백제였다. 678년 백제 역사 중 웅진시대는 63년, 부여시대는 122년에 불과했지만 한성시대는 493년이나 됐다. 한성백제는 또 최근 사극으로도 인기를 모은 근초고왕의 영광이 아로새겨진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시대 백제의 왕성(王城)이었다는 하남 위례성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1997년 아파트를 짓기 위한 터파기 공사를 하던 중 풍납토성 내부 4m 깊이 지층에서 백제 초기 토기(土器)가 출토됐다. 주변을 파보니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의 유물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왔다. 20평이 넘는 건물터는 기와, 주춧돌, 서까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민가가 아니라 관공서 자리가 분명했다. 한성백제의 왕성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유물들이 3만여점에 달했다. 어느 고고학자는 풍납토성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땅속에 묻혔다가 어느 날 17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로마 폼페이 유적에 비유해 '한국의 폼페이'라고 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풍납토성 해자(垓子·성 주변에 둘러 판 연못)를 발굴했더니 온통 쓰레기 더미였다고 한다. 토성 남쪽 지역 8400㎡(2540평) 넓이의 땅에 3m 깊이로 각종 산업폐기물, 생활 쓰레기가 수천t 불법 매립돼 있다는 것이다.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 왕성으로 국민적 관심을 모아가는 시점에서도 누군가 계속 쓰레기를 갖다 버린 것이다. ▶풍납토성은 우여곡절 끝에 발견돼 뒤늦게 가치를 인정받았다. 토성에 대한 발굴·보존과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그런데 우리는 2000년 만에 깨어난 백제 건국 설화의 현장을 10년도 안 돼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지하의 백제인들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현대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입력 : 2013.02.03

 

 

3-1) 행궁, 군량미창고 안내 3-2) 행궁지 주변의 단풍(계곡 건너 왼쪽이 행궁 발굴지) 3-3) 행궁지를 지나 급경사를 오르니 단풍은 사위어 가고... 3-4) 기도터-이 바위 위가 조망바위 3-5) 기도바위에서 바라본 염초, 백운, 노적, 만장(인수는 뒤로 숨고...) 3-6) 문수, 보현, 의상도 고개를 내밀고 3-7) 남장대지(19C말 소멸) 3-8) 의상 능선의 파노라마 3-9) 715봉, 문수, 보현 라인의 파노라마 3-10) 원노인백만의 파노라마 3-11) 715봉 이정목(의상능선과 남장대능선 합류봉) 3-12) 715봉에서 본 문수봉 3-13) 청수동암문 주변 풍광 4-1) 문수봉-비봉능선 라인 파노라마 4-2) 대남문 주변 풍광(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은 1990-1995 서울시 복원) 4-3) 보현능선 파노라마 4-4) 칼바위 능선 들여다보기 4-5) 대성문 주변 풍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