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에서 걸어가 본 준공 1일후의 숭례문 모습
(1) 가까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데 몰랐다.
항상 찾던 보배, 그리던 것
왜 몰랐던가?
멀리를 보아야만 했기 때문은 아닐까?
(2) 멀리
그리하여 멀리는
가까움을 뜻한다.
멀리를 멀리하고 가까움을 가까이할 줄 알아야
우리의 짧은 生이
더욱 먼 곳을 진정으로 바라기할 수 있슴을 자각하며...
(3) 여정
[성수역 → 서울숲 → 응봉산팔각정 → 대현산 →
배수지공원/호당공원 → 금호산/맨발공원 → 생태다리 →
매봉산팔각정 → 성곽마루 → 국립극장 → 남산N서울타워 → 숭례문]
숭례문 어제(어린이날 전일) 준공.
그리고 실로 몇 십년 만에 근처의 남대문 시장 둘러보다.
가까운 곳을 소중이 하기 위하여
소중한 숭례문을 일주일만에 서울숲에서 걸어서
순례의 심정으로 다시 찾다.
약11km, 3시간여, 아내 동행, 천천히 이야기하며...
배달9210/개천5911/단기4346/서기2013/05/0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살곶이 다리를 건너니 천변에 봄까치꽃, 뱀딸기꽃이 반겨주고...
2. 응봉산 팔각정과 박태기나무꽃
3. 금호산 북면의 아름다운 돌단풍과 남산 전경
4. 철쭉에 둘러쌓인 매봉산팔각정과 한강 전경(고정 포토포인트)
5. 반얀트리 구내의 금낭낭자
6. 남산 성곽을 오르며 본 신록과 큰앵초
7. 남산타워 팔각정 광장은 오늘도 인산인해
8. 복원된 힐튼근처 한양 성곽
9. 말끔하게 복원된 아름다운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
10. 숭례문 자세히 들여다보기
11. 인산인해인 숭례문 남측과 북측의 모습 (2층 누각은 예약해야 관람가능)
12. 실로 몇 십년만에 둘러본 휴일의 남대문 시장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정문이다.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1396년(태조 5년)에 창건되었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이 있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의 중앙통로가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2008년 2월 10일 8시 40분 전후 화재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2시경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붕괴되었다.
세종 30년(1448년)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년)에 중수.
1907년 -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5]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1963년 - 해체 중수공사 완료.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2005년 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
2006년 3월 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11]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만을 남겨놓고 완전히 타 버림
숭례문의 현판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썼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남겨져 있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의 현판들은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완전히 타 무너진 사건이다.
방화범으로는 69세의 채종기로 밝혀져 2008년 현재 범행을 시인, 구속 수감된 상태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붕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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