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국립현충원을 호위하는 서달산 (2013/06/23 Stories - Chyi Yu -)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7. 15:17
국립현충원을 호위하는 서달산 (1) 서울살이 30여년 서울 살면서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 가운데 한 곳.. 그러고 보니 서울서 아직 못 가본 곳이 많다. 전쟁기념관, 비원, 경복궁, 청와대, 63빌딩수족관 등등... (2) 현충원 정문을 지나 분향소에 다다르니 이른 아침 대청소중이라 어수선 그래도 묵념을 올리고 무명용사탑을 지나 사병들의 무덤을 지나 이승만, 김대중,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차례로 뵙고 묵념을 올렸다. 동작동의 원주인 창빈안씨의 묘소에도 들렀다. (3) 육관 손석우의 神眼 김일성 사망 예언 적중으로 世間을 놀라게 한 육관도사 손석우씨에 의하면 박대통령 내외분 쌍분 묘소 중 육영수여사 쪽은 水脈이 지나고 있어 시신이 편안치 못해 아들이 방황하고 자매가 불화하는 등 후손이 평탄치 못하여 移葬하여야 한다고 生前에 주장하였는데 凡人의 눈으로는 병풍같은 서달산이 호위하는 국립묘지 상단부에 자리한 아주 좋은 명당으로만 보이더라. (4) 14명의 임금을 배출한 창빈 안씨 이승만 대통령 묘소와  
 
김대중 대통령 묘소 중간에 위치한 선조의 할머니,
 
그러니까 이곳의 원주인인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 묘소에도 들렀다. 9세의 어린 나이로 궐에 들어가
 
궁녀의 신분에서 빈까지 올라
 
중종의 총애로 2남 1녀를 낳았다.
 
2子인 덕흥대원군이 바로 선조의 아버지로
 
그의 핏줄을 이은 하성군(선조)을 비롯한
 
14명의 君王을 배출한 사람의 무덤치고는 아무리 궁녀출신이라지만 너무 검소하다.
 
 
장군 묘역, 박대통령 운구차를 관람하고 상도 출입문을 지나 동작충효길로 들어섰다. (5) 서달산 국립현충원을 전체적으로 감싸안은 서달산(179m)은 동작동에서 노들역까지 동작 충효길이 조성되어 인근 주민들로 붐볐다. 흑석동쪽으로 500여m 가다가 다시 달마사를 지나 서달산에서 동작역 방향으로 내려가다. 구처장동행, 5km정도 천천히... 2시간 정도, 이야기하며... 배달9210/개천5911/단기4346/서기2013/06/23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정문들어서면 맨 먼저 충성분수대 조각상이 맞이하고... 2. 현충문과 분향소, 분향소에는 박정희 대통령 글씨가 들어오고... 3. 무명용사탑 4. 병사의 무덤 5. 동작동의 풍수학적 地氣의 흐름 6. 이승만 대통령 묘소 7. 14명의 조선 임금을 배출한 중종 후궁 창빈 안씨지묘(선조 직계 할머니) 창빈은(1499∼1547) 연산군(燕山君) 5년(1499) 증우의정(贈右議政) 안탄대(安坦大)의 따님으로 태어 나서,9세에 입궁(入宮)하여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勤儉節約)하는 생활 태도로 궁내에서의 덕망 또한 높았다. 중종과의 사이에 2남(영양군(永陽君) 거(거), 덕흥대원군(德興大阮君) 초(초)) 1녀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두었으며 이 중 덕흥대원군은 바로 선조(宣祖)의 아버지이다.처음에는 양주 (楊州) 장흥(長興)땅에 예장(禮葬)하였으나 풍수상의 문제로 다음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8. 김대중 대통령 묘소 9.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묘소 10. 박대통령 묘소에서 장군묘역 방향을 내려다 본 모습 11. 박대통령 묘소의 모감주나무 12. 박대통령 운구차 13. 박대통령 묘소 앞의 장군묘역 14. 2012년 준공한 달마사 15. 달마사 뒤편 거북바위 서달산은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 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 으로 그야말로 명당중에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인간이 이 산자락에 깃들어 살기 훨씬 이전부터 서달 산을 지켜온 바위들이 이곳을 장엄하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위중에 거북의 형상을 이루고 있 는 바위를 일러 어느때 부터인가 사람들은 거북바위라고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거북 바위는 일년에 한 두 번씩 한강에 나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추정하건데 정월대보름과 백 중 (음력7월보름)이 아닌가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거북바위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셨다. 거북바위 아래는 성스러운 샘이 솟고 있었다. 1970년 이곳에 동굴을 파서, 용왕상을 봉안하고 영천 (靈泉)이라 하였다. 예부터 이 고을 사람들은 이 터를 용왕궁터라고 일컫고 용왕 또한 마을을 지켜준 다고 믿어 왔다. 16. 서달산(179m) 17. 동작충효길(동작역 -> 서달산 -> 노들역 : 총5.8km, 110분) 제1코스 : 고구동산길 (배수지공원 -> 현충원 상도출입문 : 3.2km, 60분) 노들역4출-쉼터(상도터널)-쉼터(노량진근린공원/고구동산)-정자- 중대후문-정자-잣나무길-쉼터-숲속유치원(야생초화원)-쉼터- 생태다리-쉼터(동작대/달마사)-쉼터-정자(서달산정상)-상도출입문 제2코스 : 현충원길(상도출입문 -> 동작역 : 2.6km, 50분) 상도출입문-학수약수터갈림길-쉼터-정자(남묘)-사당출입문-극동A- 쉼터-정금마을갈림길-쉼터-이수갈림길-정자-쉼터-동작역 현충원내부순례길 : 상도출입문-호국지장사-박대통령묘역-사당출입문 : 1.5km, 30분 18. 충효길 게이트에 서 있는 방명록과 숲 숲 속의 큰까치수영 군락 참고자료1) 국립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4-7번지(동작구 현충로 65번 길)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은 조국의 수호와 발전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국가의 성역 으로 국난을 극복해 온 민족의 얼과 호국의 의지가 가득히 서려 있는 곳이다. 이곳은 관악산 기슭 의 공작봉을 주봉으로 하여 정기어린 동작의 능선이 병풍치듯 3면을 감싸고 앞쪽으로는 한강이 굽이 쳐 흐르는 143만㎡의 아늑하고 쾌적한 호국공원이다. 여기에는 구한말의 항일의병을 비롯하여 조국 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애국지사, 나라의 발전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평생을 바친 국가유공자, 적의 침략에 의한 전쟁의 위기에서 나라를 위해 분투하다 산화한 국군장병, 경찰관, 향토예비군과 전직 대 통령 3위를 포함한 16만 8천여 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국지적 도발과 여수, 순천사건 및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 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설치 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 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서울근교에 묘 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으로 묘지설치 문제는 중단 되었고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 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 봉안하여 육군병참단 묘지 등록 중대에서 관리하였다. 계속된즌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육군에서는 다시 육군 묘지설치 문치가 논의되고 인사참모부 주관하에 묘지 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 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한 결과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대 안 일대를 육군묘지 후 보지로 선정하고 추진하던 중 군 고위층에서 현지를 답사하여 검토한 결과 지역적으로 편재되어 있 고, 침수의 우려가 고려되어 타 지역에서 후보지를 재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져 중단 되었다. 1952년 5월 6일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설치 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육군묘 지를 설치하게 되면 육,해,공군의 통일성 등 여러 가지 폐단이 우려되어 육군묘지설치 문제는 보류 되었고 3군 종합묘지설치를 추진하되 묘지 명칭은 국군묘지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2년 5월 26일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합동 답사반을 편성하고 동년 11월 3일 군 묘지 설치 위원회를 구성한 후 11월 부터 1953년 9월까지 7차례에 걸쳐 10곳을 답사하여서 동작동 현 위 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1953년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1954년 3월 1일 정지공사를 착공하여 3년에 걸쳐서 묘역 238.017㎡를 조성하고 그 후 196 8년 말까지 광장 99.174㎡, 임야912.400㎡ 및 공원 행정지역178.513㎡ 를 조성하였다. 1955년 7월 15일 군 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년 4월 13일 대통령령으로 군 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어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 무원 등이 안장되고 덧붙여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들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서 안장이 이루어지 게 되었고 6.25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 장병 처리를 위하여 지금까지 군인 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군 묘지 안장업무가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령으로 재 정립 되어 애국지사, 결찰관, 향토예비군 까지 대상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삶을 희생하고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어 그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존, 계승 시킬수 있는 겨레의 성역으로서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2005년 7월 29일 국회에서 의원 입법으로 제정되어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이 법률 제7649호, 시행 2006년 1월 30일 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 으로 변경되었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 장 대상자에 포함 되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에 모셔져 있는 54,000여 위의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 중 32,000여 위는 6.25 전쟁과 월남전에서 전사하신 분들이고 이 분들은 20대 초반의 청년기에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 전투와 작전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되는 분 들로서 대부분 부모 형제가 유족 이 었으며 후손이 거의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지 어언 60년이 넘은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부모님들 은 돌아가셨고 형제들은 80대 이상으로 연로하여 묘소를 찾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 의 참배발길도 해가 갈수록 뜸해지고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국립현충원에서는 호국영령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거룩한 희생을 기리고 높이 받들고자 국민들과 함께 묘역 돌보기를 전개하고 있는 데 자발적으로 참여를 희망하는 여러 사회단체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정기적으로 돌보도록 하고 있으 며, 이 외에 여러단체 및 개인들이 참여를 신청할 경우 묘역 돌보기 활동을 돕도록 하고 있다. 참고자료2) 국립서울현충원 연혁 - 1955년 7월 15일 -- 국립묘지 창설 - 1956년 1월 16일 -- 전몰장병 안장(최초) - 1956년 6월 6일 --- 제1회 현충일 추념행사 - 1964년 3월 11일 -- 애국지사 안장(최초) - 1965년 3월 30일 -- 국립묘지로 승격 - 1965년 7월 21일 -- 경찰관 안장(최초) - 1967년 9월 30일 -- 현충탑 및 위패봉안관 건립 - 1969년 4월 30일 -- 현충문 건립 - 1993년 8월 10일 -- 임시정부 요인 안장 - 1996년 6월 1일 --- 국립현충원으로 변경 - 2006년 1월 30일 --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 변경 - 2006년 3월 1일 --- 충혼당(봉안당) 운영 참고자료3) 동작동 국립묘지와 박정희 대통령 묘소 서울 동작구 동작동(銅雀洞)에 있는 국립묘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이 묻혀있는 장소로 1955년 7월 한국전쟁이 끝나자 전쟁 중에 희생된 수많은 장병들을 안장할 데가 없자 국립묘 지 설치 위원회를 발족하여 지관 지창룡씨가 선정한 장소를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현지를 돌아본 후 결정하여 조성하였다. 국립묘지에는 국가원수 묘역, 애국지사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군인 군무원 묘역, 경찰관 묘역, 일반묘역, 외국인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공작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는 형국 이라고 하는 이 곳은 본래 조선 11대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대왕의 할머니 창빈안씨(昌嬪安氏)의 묘 인 동작릉이 있어 지명이 유래된 곳이다. 애국 선열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이 최근에 더욱 유명해진 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묘에 물이 들었다고 주장하는 지관들 사이의 논쟁 때문이다. 자칭 신안(神眼)이라고 주장하는 육관 손석우씨가 육영수 여사 묘에 물이 들어 시신이 썩지 않고 머리는 길게 자랐고 손톱과 발톱 또한 무서우리 만치 흉하게 자라는 등 어둡고 찬 냉혈에 있기 때 문에 자손이 안 좋은 일을 당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다. 묘지 선정을 했던 지창룡씨는 평소 자신을 아껴주었던 육영수 여사 서거 소식에 고통스러워 인사불성으로 술을 마시고 고향집으로 내려갔는데 다음 날 아침 비서실의 전화를 받고 묘지에 가보니 다른 풍수를 불러 이미 자리를 잡아 광중 작업 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고 변명하였다. 자신도 청룡 백호는 뚜렷한데 내려오는 용이 너무 빈약 해 자리를 잘못 잡았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룡이 다소 빈약할 뿐 흉지는 아니기 때문에 이 묘 때문에 자손이 잘 되지 못한다는 건 억설이라고 주장한다. 지관들 사이의 이러한 논쟁은 옛 날이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있어오는 일로 이것은 풍수지리가 아직까지 객관성 있는 학문으로 발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택지나 묘지를 선정했으면 그 목적과 이유를 기록한 장택기(葬擇記)를 남겨 후에도 참고가 되게 해야 하는데 대략 주변 산세만 설명하고 무조건 후손들이 잘될 것이라는 말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풍수지리가 자연 지리의 현상을 인간 생활에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과학적인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미신으로 격하 되어오는 것은 풍수가들의 무책임한 행 동에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묘는 국립묘지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국립묘지 전체를 굽어 볼뿐 아니라 남산이 있는 서울을 바라볼 수 있어 전망으로는 대통령이 있을 만한 자리다. 그 러나 이 자리는 혈이 아니고 용이 지나가는 과룡처(過龍處)이며 그것도 용맥이 비껴간 사맥(斜脈) 으로 묘에 생기가 들어가지 않는 절맥지(絶脈地)다. 용은 관악산에서 내려왔다. 한남금북정맥이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분맥하여 북으로 거꾸로 올라와 칠현산에서 한남정맥이 되어 김포 계양산 까지 가는 중간에 수원 광교산에서 한 맥을 뻗어 백운산(564.2M)과 한국정신문화원 뒷산인 국사봉 (582M)과 청계산(492.7M)을 거쳐 과천을 지난 다음 화기 충천한 염정(廉貞) 화성체(火星體)인 관악 산을 만들었다. 태조산인 관악산을 출발한 용은 사당동 고개에서 과협한 다음 총신대 뒤 능선으로 행룡하여 상도 여자중 고등학교가 있는 곳에 봉우리를 하나 기봉한다. 이 봉우리가 국립묘지 박정 대통령 묘 뒤 산이며 지도상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지만 주산인 동작봉(銅雀峰)이다. 마치 장막을 쳐놓은 것 같은 수성체(水星體) 주산이 양팔을 넓게 벌려 국립묘지 전체를 끌어안고 있는데 청룡 백호가 된다. 이 모습이 공작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것과 같다하여 공작장익형(孔雀張翼形)이라고 도 하며 공작의 머리는 주산인 동작봉이다. 동작봉에서 개장천심(開帳穿心)한 주룡은 박정희 대통령 묘 우측에 있는 능선으로 길까지 급하게 내려와 길에서 과협 한 다음 다시 위로 솟구쳐 탐랑 목성 체인 귀인봉(貴人峰)을 기봉(起峰) 하는데 장군묘역이 있는 봉우리로 동작능의 현무봉이 된다. 현무 봉은 다시 양팔을 벌려 청룡 백호를 만들고 주맥은 중출로 내려가 위이( )하다가 살짝 주저앉듯이 혈을 결지하는데 바로 동작능이다. 이 모습이 마치 공작이 주변을 살피고 살그머니 둥지로 들어가 는 것과 같다 하여 공작귀소형(孔雀歸巢形)이라고도 부른다. 동작능에서 보았을 때 내청룡은 이승만 대통령 묘가 있는 능선으로 혈을 잘 감아 주면서 길 아래까지 내려갔고 외백호는 우측의 낮은 능선 으로 혈에 비해 너무 낮은 편이나 외백호가 높게 있어 보완을 해주고 있다. 동작능을 지관에 따라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이라 하는 것은 주산인 동작봉이 공작처럼 양 날개를 펴 국립묘지 입구까지 감아주었고 그 아래 장군묘역이 있는 현무정이 알처럼 둥그렇게 생겨 마치 공작이 가슴에 알을 품고 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국립묘지에 혈은 이 동작능 하나 뿐이다. 이 산소의 발복(發福) 때문일까?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위 에 오른 중종에게는 단경왕후와 장경왕후, 문경왕후등 왕비와 후궁을 합쳐 10명의 부인과 9남11녀 의 자녀를 두었다. 후궁인 창빈 안씨와는 2남1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이초(덕흥대원군)는 중종의 9남중 막내였다.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이초의 셋째 아들 화성군 균이 즉위하여 조선 14대 왕인 선조가 된 것이다. 그러나 국립묘지를 감싸고 있는 청룡 백호에는 살이 많고 한강 물이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혈장을 향해 쏘듯이 들어오기 때문인지 선조대왕과 광해군이 재위중 임진왜란과 인조반 정등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묘는 왜 물이 나고 안 좋다고 하는 것일까? 몇 해전 자연지리학회 회 원들과 답사를 했을 때였다. 회원들 대부분이 나이 많은 분들이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있 어서인지 일국의 대통령을 물구덩이에 장사 지내는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며 흥분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육영수 여사와 인척이 된다는 묘지 관리책임자가 나서 묘지 조성 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광중을 팔때 물이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병대를 동원하여 파이프를 박아 배수로를 냈기 때문에 시신에 물이 들어 갈리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분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이제 더 이상 물이 나느냐 안 나느냐에 대해서 시끄럽게 논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왜 물길이 그 쪽으로 생겼을까 궁금하여 묘지 뒤의 능선을 올라가 보았다. 용맥은 묘지 뒤 볼록한 곳까지는 힘있게 내려 왔는데 거기서 맥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계곡 쪽으로 내려간 것이 보 인다. 박정희 대통령 묘는 용맥이 비껴간 그 아래에다 쓴 것이다. 이것은 팔 뒤꿈치에 해당되는 곳으로 생기를 전혀 받을 수 없는 무맥지(無脈地)일뿐 아니라 용맥을 보호하면서 따르는 수기(水 氣)가 닿는 곳이고 산 능선 따라 흐르는 물길 인 것이다. 이러한 곳을 풍수지리 화복론(禍福論)에 서는 자손을 관장하는 용맥이 없기 때문에 절손지지(絶孫之地)라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속기 쉬운 장소였다. 왜냐하면 묘 바로 뒤가 볼록하여 마치 생기를 정축 해놓은 정랑 주머니인 입 수도두와 같이 생겼기 때문에 그 아래에는 혈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맥은 그 볼록한 곳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가 결국 혈을 맺지도 못하고 기세가 약해지면서 계곡의 물을 만나 끝나버렸다. 사격론을 말할 때 수성체 아래에 귀인봉이 있으면 장하귀인(帳下貴 人)이라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묘 뒷산은 마치 장막을 쳐놓은 것 같은 산이고 그 아래 장군 묘역이 있는 산은 귀인봉으로 장막 아래 귀인이나 장군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국립묘지에 장군대좌형(將軍 對坐形)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귀인봉 아래에 병사를 상징하는 많은 묘지들이 도열하여 있기 때문이 다. 이러한 곳에 혈이 있으면 금의옥대(錦衣玉帶)하고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데 박정희 대통령 묘 나 장군묘역은 아니고 동작능이 해당된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가난을 구제한 지도자와 민 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로 엇갈리는 가운데 묘지까지 시비 거리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 이다. 그러나 본인이 국립묘지를 원했고 국립묘지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대통령 묘를 선정하자니 어 쩔 수 없이 제일 높은 곳에서 모두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그러면 손석우씨가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 묘 위나 아래는 어떠할까?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묘는 동작능의 좌측 청룡에 해당되는 능선에 있다. 이 능선은 주룡이 아니고 동작능의 생기를 보호 하기 위한 보호사에 불과하다. 이 묘가 혈이 되려면 용이 변화를 기세 있게 해야하는데 변화없이 허약하게 내려갔기 때문에 혈을 결지 할 수 없는 용이다. 언제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묘소 뒤 의 능선을 흙으로 보토하여 용을 만들어 놓은 흔적이 있다. 용의 생기가 흐르지 않는 곳에 겉으로 치장하여 눈속임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주룡이 무기력하면 이 역시 절손지지 인데 자손이 없는 이승만 박사에게는 어울리는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묘 앞 한강을 보면 불 길하다. 왜냐하면 물은 금성환포(錦城環抱)라 하여 묘를 둘러 감아주어야 하는데 한강은 반배(反背) 하였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한강은 국립묘지 전체를 등지고 달아나는 형상이며 이승만 대통령 묘 에서는 강물이 직충(直庶)하여 똑바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마치 화살이 혈장을 찌르면서 날아드는 것처럼 들어오는 물은 인상재패(人傷財敗) 가 우려되므로 풍수지리에서 제일 꺼리는 것이다. 손석 우씨는 어떤 근거로 이쪽이 명당이라고 주장했는지 궁금하다. 풍수지리는 풍수지리서를 전혀 읽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고 한 눈에 알아서 훈훈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혈을 찾는 초능력적 인 학문은 결코 아닌데 말이다.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있는 동작동 국립묘지. 옛날 논밭이었을 땅에 한줌 재가되어 묻혀 있는 일반 묘역을 바라보면서 이 분들이 어찌 개인의 영 달을 위해서 귀중한 목숨을 바쳤을까! 그 큰 뜻을 기리는데 한 평도 되지 않는 땅의 가치로 판단해 서는 안될 것이다. 참고자료4) 창빈 안씨는 누구인가? / 창빈 안씨묘지의 연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창빈 안씨 묘역(昌嬪安氏墓域)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1544)의 후궁으로 선조(1552∼1608) 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 안씨(昌嬪安氏, 1499∼1549)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창빈안씨의 세계는 안산 (安山)에서 나왔는데, 아버지 안탄대(安坦大)는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 되어 적순부위(迪順副尉)가 되고 나중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황씨(黃氏)는 정경부인에 증직 되었다. 1499년(연산군 5년) 7월 9일 출생으로 아홉 살 때인 1507년(중종 2) 궁녀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각별한 후의로 1518년(중종 13년) 왕의 총애를 받았고, 22세에 상궁(尙宮), 31세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마침내 42세에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 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이고, 둘째는 나중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특명으로 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1549 년(명종 4년)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1568년 덕흥부원군 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제1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1577년(선조 10년)에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의 사당(덕흥궁)에 향사되었다.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1683년(숙종 9) 12월 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묘소의 서쪽 비탈10여 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 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했다. 대좌(臺座)·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구성되는데, 정사각형의 2단 대좌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비신도 사각기둥 모양이며, 개석 또한 4각 지붕 모양으로 꼭대기에 연꽃 봉우리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 1628∼1687)이 지었고, 글씨는 판 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며 머리전서[頭篆]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묘소는 원래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으나,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 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묘소에는 담장이 둘려져 있고 묘 앞에는 묘 갈ㆍ석등ㆍ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다. 「창빈(昌嬪)안씨(安氏)는 중종 2년(1507)에 아홉 살의 나이로 궁녀가 되었다. 중종의 총애를 입 어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고, 31세에 숙원(淑媛), 이어 숙용(淑容)까지 품계가 올랐다. 그녀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덕흥대원군의 셋 째 아들인 하성군이 후손이 없는 명종을 이어 제 14대 임금인 선조로 등극하자 선조 10년(1577)에 창빈으로 추존되었다.」 조선 제 11대 왕인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祖母)인 창빈안씨 묘역 앞에 있는 문화재 안내판 의 내용 중 일부이다. 궁중 계급이 나오는데 궁녀, 상궁, 숙원, 숙용, 빈 등이 그것이다. 상궁은 익히 들어서 알겠는데 숙원과 숙용은 어떤 계급이고 미천한 궁녀가 어떻게 국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시대에는 궁중 여성들을 위한 조직 체계가 있었나보다 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계급 체제, 즉 ‘내관’, ‘여관’ 등으로 불리던 궁녀 조직인 내명부(內命婦)가 존재 하였다. 국가 최고의 통치기관인 동시에 국왕이 거주하는 궁중의 운영에는 자연히 많은 여성이 필요 하였다. 궁중의 여성 조직은 국왕의 배우자로서 품계를 초월한 왕비와, 직임을 가진 내명부, 그리고 품계가 없는 궁인인 잡역궁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자로서, 위로는 국왕과 왕비를 모시고 궁중 내의 일정한 직임을 맡아보며 아래로 잡역궁인을 부렸는데 『경국대전』에 의하 면 크게 두 계층이 있었다. 정1품 빈(嬪)부터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 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종4품 숙원(淑媛)까지는 왕의 후 궁으로 내관(內官)이라 하고, 정5품 상궁부터 종9품 주변궁(奏變宮)까지는 상궁계열로 궁관(宮官)이 라 하였다. 내관 즉 후궁은 신분이 좋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맞아들인 후궁과 미천한 집안 출신의 궁녀로 승은 (承恩)을 입은 후궁으로 나눌 수 있다. 후궁은 왕의 총애와 공로에 따라 예우를 받았다. 신분이 높 은 가문 출신의 후궁으로는 태종(太宗) 대 정의궁주(貞懿宮主), 정조(正祖)의 후궁 원빈(元嬪)과 순 조(純祖)의 생모 수빈(綬嬪) 등이 있다. 궁관은 궁중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상궁은 궁관의 가장 높 은 위치에서 궁내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상궁의 신분은 양인(良人)에 속하며, 원칙으로는 내관과 엄 격히 구분되었으나 왕의 승은을 입게 되면 내관으로 승격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경종(景宗) 의 모친 희빈(禧嬪)장씨(張氏)와 영조(英祖)의 모친 숙빈(淑嬪)최씨(崔氏) 등이 궁녀 출신이다.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내에 있는 창빈안씨(昌嬪安氏 : 1499~1549)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 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무덤을 만든 이후 풍수지리에 의거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명종 5년(1550) 3월 이곳으로 옮겨졌다. 묘 입구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숙종 9년(1683)에 세운 것이다. 신도비 는 묘소 동남향 이른바 귀신이 다니는 길에 세우는 비석으로서, 아무나 세울 수 없는 국가가 허락하 는 기념물이다. 그 자격은 조선시대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고위 관료이고 뚜렷한 업적과 학문이 뛰 어나 후세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에 국한한다. 전국에 각 문중과 집안을 대표하는 이들의 신도 비가 산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처럼 후궁의 묘소에 신도비를 세운 예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격 적인 것이다. 비를 세우게 된 경위로는 창빈에 대한 숙종(肅宗)의 마음에서 연유된다. 창빈이 별세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세웠다는 것인데 이는 실록이나 각종 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창빈의 바른 인품과 현숙함에 더하여 그의 현손이 선조 이후 역대 임금을 계 승하고 있는데 대한 업적이 지대하므로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부터 순종까지 14명의 왕 배출 명당여부, 5년 뒤 역사가 가려줄 것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방귀 꽤나 뀐다는 풍수가들은 저마다 박정희 대통령 묘역 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묘역이 왕을 배출할 자리인 가 아닌가, 그것이 핵심이었다. 이때마다 반드시 거론되는 또 한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중종 후궁 창빈안씨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묘가 국립현충원에서도 창빈안씨의 묘 바로 옆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창빈안씨는 살아생전 숙용안씨였다. 안씨가 죽은 뒤에 창빈으로 승격된 것은 그의 손자 하성군이 선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창빈의 묘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명당 발복(明堂發福)’이라고 소문이 난 곳이었다. 관악산 공작봉에 서 내려온 산줄기가 한강수에 가로막혀 더 이상 기운이 나가지 못하는 지점이 국립현충원 자리인데, 그 맨 꼭대기에 창빈안씨 묘소가 위치해 있다. 창빈안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손들이 조선후기 왕조를 계승했으니, 이 자리에서 배출된 왕은 선조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14명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이 결코 명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풍수가들은 창빈의 묘를 ‘흉지 중의 흉지’라고 설명 한다. 청룡과 백호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다, 이곳의 기운을 막아주어야 할 내당수가 한강으로 직선으로 빠지고 있어, 그 영향으로 인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고,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 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처럼 적통도 아니고, 서열 1순위도 아닌 방계 왕손이 보위에 오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 이었다. 후사가 없던 명종은 살아생전 조카들을 눈 여겨 보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총애하던 왕손 이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었다. 어느 날 하루는 명종이 왕친의 자제들을 궁궐에 불러 모아놓고 왕 이 쓰는 익선관을 내놓았다. 조카들에게 익선관을 써보라고 하자 저마다 머리에 맞는지 안 맞는지 올려보고 있는데, 가장 나이가 어린 하성군은 머리에 쓰려다 말고 익선관을 내려놓았다. 명종이 왜 그러냐고 묻자,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가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하성군의 영특함을 일찌감치 알아본 명종은 임종 직전 하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 겼다. 방계 왕자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머니를 추숭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위차를 중시하는 유교식 방법으로는 추숭이 거의 불가능했다. 종통 상으로 볼 때 선조는 덕흥군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명종의 뒤를 이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조가 자신의 할머니와 아버지를 추 숭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불교식 추숭, 즉 원당의 설치였다. 선조는 살아생전 숙용이었던 할머니 안씨를 창빈으로 추숭하는 한편 창빈묘 부근에 위치한 갈궁사를 화장사로 개칭하고 창빈의 원당 으로 삼았다. 이 절이 현재 국립현충원 안에 위치한 호국지장사이다. 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양분된다. 조선 최대의 국란을 불러온 무능한 임금, 붕당정치를 조장해 국가를 양분시킨 장본인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스스로 방계 출신이었던 만큼 훈척세력 대신 뛰 어난 유학자들을 등용함으로써 사림정치를 본격화한 학자적 군주라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그렇 다면 공작봉이 배출한 또 한 명의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으로 인해 국립현충원 꼭대기가 ‘왕을 배출하는 명당’임은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수 승한 왕을 배출하는 자리인지, 백성을 도탄에 빠트릴 왕을 배출하는 자리인지는 5년 뒤의 역사가 답해줄 것이다. [불교신문 2895호/2013년 3월 13일자] 참고자료5) 국립묘지, 더 이상 묻힐 곳이 없다 입력 : 2012-11-22 21:53:02 / 경향신문 ㆍ전북 임실호국원서 마지막 매장묘역 안장 국립묘지에 안장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예다. 1954년 첫 국립묘지가 조성된 이후 마지막 국립묘지 매장묘역 안장이 22일 전북 임실호국원에서 이뤄졌다. 34만8000㎡(10만평)인 이곳 안장기수는 모 두 2만2141기다. 이 가운데 매장묘는 1만6242기다. 1만6242번째 묘역 안장자는 참전용사인 충남 논산의 송모씨였다. 앞으로 임실호국원에서 6000여기 안장능력을 가진 납골당인 충령당에만 봉안 이 가능하다. 임실군 강진면에 자리잡은 임실호국원은 한국 국립묘지 중 한 곳이다. 2002년 개원 돼 재향군인회에서 관리하다 2006년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국가보훈처 소속이 됐다. 국립묘지는 명당 중의 명당을 골라 조성된다. 임실호국원 입지 배경에는 ‘생거부안(生居扶安) 사후임실(死後任實)’이란 말이 있다. 생전에는 전북 부안이 살기가 가장 좋고, 죽어서는 임실에 묻혀야 한다는 의미다. 임실호국원에 들어서 묘역 맨 윗자리에 올라 보면 기막힌 광경이 들어온다. 정면으로 병풍처럼 둘러친 산이 운해에 휩싸여 있고 좌우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야산이 포진해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 남단인 전북 장수 영취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금남정맥과 호남정맥 중간 지점 이다. 쉽게 말해 마이산과 내장산의 중간쯤이라 할 수 있다. 호국원 정면에 보이는 산은 영산(靈 山)으로 소문난 백련산(白蓮山)이다. 마치 흰 연꽃 모양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이 바로 조선 8대 명당자리라는 곳이니 호국원의 풍수 또한 일품일 수밖에 없다.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만으로 도 영예인데 명당 풍수까지 갖췄으니 호국원에 묘를 쓴 이들은 명당운까지 누리는 셈이다. 22일 마지막 매장묘역 안장이 이뤄진 임실호국원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불린다. 멀리 보이는 산이 조선 8대 명당자리가 있다는 백련산이다. | 박용근 기자 ▲ 1954년 서울현충원이 효시, 전국 8곳… ‘명당 중의 명당’매장 아닌 납골당만 가능… 산청 등 3곳 추가 조성 계획 ■ 한국 국립묘지는 8개 국립묘지는 모두 8개에 이른다. 효시는 국립서울현충원이다.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로 알려진 곳이 다. 전후인 1954년 조성된 이곳은 한국전쟁과 여순사건 등에서 발생한 국군 전사자나 순직자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면서 국립묘지의 출발이 됐다. 정부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전사자 수가 급 속하게 늘어나자 육군묘지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1952년 5월 국방부 회의에서 국군묘지를 만 들기로 결정하고 11개월간 답사를 거쳐 동작동이 최종 부지로 낙착됐다. 당시는 풍수지리를 따 질 형편이 아니었다. 사실 서울현충원 자리는 내로라할 명당이다. 서울현충원에는 ‘창빈안씨 묘 소’가 있다. 창빈안씨는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후궁이면서 선조의 할머니다. 원래 경기 양주 에 있던 묘를 선조가 왕위에 오른 뒤 명당을 찾아 이 자리로 이장한 것이다.한국전쟁 전사자가 많은 서울현충원은 8개 국립묘지 중 유일하게 국방부가 관리하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국가보훈처가 관리한다. 국립대전현충원이 1985년 문을 열었고 이어 국립 4·19 민주묘지(4·19혁명)와 5·18민주묘지(광주민주화운동), 3·15민주묘지(3·15마산의거)가 개장됐 다. 호국원은 3개가 있다. 2000년 경북 영천호국원에 이어 2002년 임실호국원이 개원했고, 2007년 에는 이천호국원이 문을 열었다. ■ 묘지 안장은 모두 끝나 서울현충원은 면적이 143만㎡(43만평)에이른다. 7만5426기를 안장하는 이곳의 매장 여유는 이미 없어졌다. 배우자가 사망하면 합장만 가능하다. 대전현충원도 만장이 됐으나 넓은 부지를 활용해 추가로 묘역을 조성할 계획을 갖고 있다. 호국원은 매장이 가능한 임실호국원을 마지막으로 매 장은 모두 종료됐다. 정부는 경남 산청과 충북 괴산, 제주에 호국원을 추가로 조성할 계획이지만 매장묘역이 아닌 납골당으로 만들어진다.국립묘지에는 군인과 경찰, 항일애국지사, 민주투사 등이 묻히지만 예외도 있다. 베를린올림픽 영웅 손기정 옹과 동요작가 윤석중씨 등이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 사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공로로 현충원에 묻혔다. 임실호국원에 안장된 원로가수 신카나리아씨와 도성아씨, ‘하 숙생’ 작곡가 김호길씨 등도 문선대 활동을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 국민 공원으로 자리잡은 국립묘지 지난 6월 임실호국원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초·중·고교생 500여명이 참석해 참전 유공자 체험학습의 장이 마련된 것이다. 학생들은 한국전쟁에 대해 이해하고 호국영령들이 있었 기에 현재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조국이 있음도 깨달았다. 학생들은 나라사랑 사생대회를 통해 애국심도 기른다. 묘역에 태극기 꽂기 행사를 펼치며 국가관을 고취하기도 한다. 2002년 개원된 임실호국원은 한 해 평균 3900여명의 학생들이 체험학습을 위해 찾는 명소가 됐다. 최기용 임 실호국원장(53)은 “국립묘지가 엄숙하고 경건한 곳이지만 많은 국민과 학생들이 편하게 찾아 호국영령들에 대해 애도하고 국가관을 기르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면서 “참배객과 청소년들 이 공원을 찾는 마음으로 추모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자료6) 국립묘지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입력 ㆍ한국전 후 급히 조성 동작동 부지ㆍ선조가 할머니 묘소 이장한 ‘명당’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210번지.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로는 관악산 공작봉이 호위하듯 펼쳐져 있다. 이곳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 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 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渴形象)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은 어디일까. 바로 국립서울현충원,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라고 부르는 곳이다. 요즘은 공원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서울현충원은 여전히 일반 국민들에게는 엄숙 하고 어려운장소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검은옷을 입고 비장한 표정으로 참배를 하곤 하 는 현충탑, 전쟁의 아픔을 여전히 간직한 채 비석을 어루만지는 유족, 충혼당(납골당) 등 무거운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서울 현충원은 알고 보면 그리 무거운 곳만은 아니다. ‘호국 공원’이란 또 다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들의 휴식처로도 활용도가 높다. 1948년 국군 전 사·순직자 묘지로 출발한 국립서울현충원은 64년째 순국 선열들의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광 복절 다음날인 16일 서울현충원 묘역에 까치들이 앉아 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 국립묘지의 시작 서울현충원은 국내에 조성된 8개 국립묘지 중 한 곳이다. 서울현충원과 동급인 대전현충원이 있고 민주화 운동 유공자 등이 잠들어 있는 경남 마산 3·15 묘지(1960년 3·15 마산의거), 서울 수유동 4·19묘지(1960년 4·19 민주혁명), 광주 5·18묘지(1980년 광주민주화운동)도 모두 국립묘지다. 경 북 영천과 전북 임실, 경기 이천의 ‘호국원(군경 묘역)’은 2006년 1월30일부터 국립묘지로 승격 됐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생긴 곳은 서울현충원이다. 1948년 북한군과의 국지적 충돌, 여순사건 등에 서 생긴 국군 전사·순직자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기 시작한 것이 현충원의 시초가 됐다. 국립 묘지 조성의 필요성이 급속하게 대두된 것은 역시 전쟁 때문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전사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육군은 내부적으로 육군묘지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1952년 5월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만의 묘지보다는 국군묘지를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의견이 채 택됐다. 11개월간의 답사를 거쳐 1953년 9월 지금의 동작동이 최종 부지로 결정됐다. 묫자리를 결 정할 때 따져보는 풍수지리는 당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다른 기준이 우선이었기 때문이 다. 5만명 이상이 묻힐 묘지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가급적 민가와 부락이 없는 곳’이어야 했고, 전방에서 너무 멀거나 가까워도 안됐다. 무엇보다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배수가 잘되는 지형이 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을 따져서 선택한 서울현충원 자리는 나중에 알고 보니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서울현충원이 들어서기 한참 전부터 자리를 하고 있던 ‘창빈 안씨 묘소’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 다. 서울현충원 중턱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 묘소에서 이승만 대통령 묘소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있는 창빈 안씨 묘소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54호다. 후궁의 묘소지만 꽤 규모가 있고 봉분과 호석 등 형식도 모두 갖췄다. 창빈 안씨는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후궁이기도 하면서 조선 14대 왕 선조의 할머니이다. 원래 묘소는 경기 양주에 있었지만 선조가 왕위에 오른 뒤 명당을 찾아 현재 의 자리로 이장했다. 당초 국군묘지로 출발한 서울현충원은 1965년 대통령령에 따라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이어 베트남전으로 안장묘역이 급격히 소진되면서 1979년 8월에는 지금의 대전현충원인 대전국립묘지도 만들어졌다. 1996년 국립묘지 대신 ‘현충원’이란 이름이 붙었고, 2006년 1월에 는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현재의 위상이 완성됐다. ■ 국립묘지에는 누가 묻히나 국군묘지에서 출발했기에 군인과 경찰, 항일 애국지사 등이 가장 많다. 그러나 이종욱 전 세계보건 기구(WHO) 사무총장, 베를린 올림픽 영웅인 마라토너 손기정옹, 동요작가 윤석중 선생 등 다른 형 태로 국가에 공헌한 분들도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이러한 예우는 한국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한국명 석호필), 중국 화교 장후이린(姜惠霖), 위쉬팡(魏緖舫) 열 사는 외국 국적이지만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 대 의대의 전신) 교수로 재직 중 1919년 3·1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탑골공원에서 함께 만세운 동을 펼쳤다. 장후이린 열사와 위시팡 열사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무공을 세웠다. ■ 국립묘지에 잠들 수 있는 기한은 60년 총면적이 143만㎡에 이르는 서울현충원의 매장 구역은 이미 만장 상태다. 납골당인 충혼당에는 아 직 자리가 있지만 매장 구역은 더 이상 여유가 없다. 납골당이 아니면 배우자가 사망한 경우 부부 합장만 가능한 상태다. 대전현충원도 올해로 기존 묘역(6만6327기)은 만장이 된다. 다만 대전현 충원은 일찌감치 서울현충원의 2배가 넘는 부지(322만㎡)를 확보해 올해 1만4000기, 2015년 1만 7000기, 2019년 1만9000기 자리를 더 만들 예정이다. 이에 최종 만장은 2024년까지 연장됐다. 호 국원도 현재 3곳 외에 경남산청과 충북괴산, 제주노형동 등에 더 들어설 계획이라 걱정을 덜었다. 국립묘지 안장 기한은 60년이다. 60년이 지난 뒤에는 심의를 거쳐 영구 안장 또는 위패 봉안 여 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유족들이 아직까지는 이장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안장 기간은 사 망일부터 기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망한 분들은 소급 대상이 아니 다. 60년을 규정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2006년 1월에 제정됐다. 최소 2066 년까지는 강제 이장될 우려가 없다. 배우자와 합장하는 경우에는 합장일을 기준으로 다시 계산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안장 기한이 60년을 넘길 수도 있다.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서울현충원은 도심 속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을 계절마다 연출한다. 봄 전시행사, 가을 단풍, 겨울 설경(위 쪽부터) 등 사계의 풍경을 2011년 국립현충원 사진 공모 입상작들이 담고 있다. | 국립현충원 제공 ■ 국립묘지와 대통령 국립묘지에 안장된 한국의 전직 대통령은 4명이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는 서울 현충원에, 최규하 전 대통령 묘소는 대전현충원에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고향인 충남 아산 선 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안장됐다. 서울현충원의 대통령 묘역은 방문객들 의 필수 참배 코스다. 현충원 최정상에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나란히 안장되어 있고 그 아래쪽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의 봉분이 차례로 있다. 서울현충원 관계자는 “왜 돌아가신 순서대로 배치되지 않았냐고 항의하는 분들도 있는데, 예정에 없이 당시 상황에 따 라 조성된 묘역이라 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며 “대전현충원에는 국가원수 묘역이 따로 조성되어 총 8분이 들어가실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 부부와 박 전 대통령 부부 봉분은 쌍분이다. 봉분이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서울현 충원 관계자는 “먼저 사망한 육 여사가 국가유공자 자격으로 묻혔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 했다. 육 여사는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뒤 국가유공자로 선정돼 국 립묘지행이 결정됐다. 이후 박 대통령이 사후에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국립묘지에 들어와 나란히 묻혔다. 반면 이 전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직 대통령의 배우자 자격으로 기존 이 전 대통령의 묘소에 합장됐다. 최근에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사후 현충원에 안장될 가능성이 남아있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지난 1일 개정 국립묘지법 시행으로 내란죄를 저지른 전 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국가보훈처 주관 국립묘지안장심의위원회 심의대상에 올라갈 수 없게 돼 일단락이 된 듯하다. 하지만 안장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다. 국가장법에 따르면 전 직 대통령이 사망하는 경우 유족 등 의견을 고려해 행정안전부 장관 제청으로 국무회의 심의를 마 친 후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장을 치를 수 있다. 국가장으로 장례된 사람은 국립묘지 에 안장될 수 있다. ■ 현충원 관리는 어떻게 하나 서울현충원 직원은 원장까지 포함해 76명에 불과하다. 전체 면적 143만㎡에 묘역만 56개인 서울 현충원 전역을 관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서울 현충원 관계자는 “직원 1명당 1개 묘 역씩을 할당해 업무시간 외에 관리를 맡기고 있다”며 “학생과 군인 등 자원봉사자에게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울현충원을 방문하면 각 비석 옆 꽃병에 한결같이 무궁화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꽃들은 모두 ‘조화’다. 무연고 묘지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2005년 부터 모든 비석 앞에 조화를 놓아두고 있다. 조화도 퇴색되기 때문에 매년 현충일과 추석을 앞 두고 교체 작업을 한다. 서울현충원 관계자는 “전체 유해의 60%를 차지하는 한국전쟁 전사자 묘 역을 찾는 유가족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며 “1인 1헌화 운동 등으로 이분들이 쓸쓸함을 느 끼지 않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참고자료7)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 를 조직해 독립사상을 전파하고 민족계몽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펼치던 중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1948 년 제헌국회의장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거치면서 해방직후의 혼돈을 극복하고 자유민주국가로 서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의 국난을 극복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반공 포로를 석방하 였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을 구축 하였다. 그러나 4·19민주혁명으로 대통령 직에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생활하다 1965년 7월 19일 서거하여 동년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 식을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최초로안장된 국가원수이다. 영부인 프 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는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 체스카 여사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 1934년 10월 8일 뉴욕시에서 결혼하고 1948년 영부인이 되었다.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향년 93세로 서거하여 3월 23일 가족장으로 이 곳에 합장되었다. 묘비 - 전 면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내외분의 묘 묘비 - 후 면 - 大韓民國 建國 大統領 雩南 李承晩博士는 本貫이 全州이며 朝鮮朝 太宗王子 讓寧大君의 十五代孫인 敬善公과 어머니 金海金氏의 외아드님으로 1875년 3월 26일 黃海道 平山郡 馬山面 大慶里 ?內洞에 서 탄생 하시었다. 1919년 三一독립운동후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初代 大統領에 추대되어 조국의 독 립운동에 헌신하셨고 1945년 민족해방 후에는 美蘇양군의 분할점령과 강력한 국제간섭속에서 민족 을 領導 국토분단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자결의 자율적 정부수립운동과 탁월한 외교 끝에 19 48년 制憲國會의장으로 民主憲法을 제정하고 初代 大統領에 당선 정부를 수립하여 大韓民國의 건국 을 세계에 선포하시었다. 1950년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며 1960년까지의 대통령 재임중 나 라의 안보를 공고히 하고 국가발전의 大本을 확립하여 民族史上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창업을 이 룩하시고 1965년 7월 19일 美洲 호놀룰루市 마우날라니 병원에서 享年 91세로 천수를 다하시니 전 국민의 애도속에 7월 27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시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女史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市에서 1900년 6월 15일 루돌프 도너 公과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女史의 셋째따님으로 태 어나시어 李承晩 博士와 1934년 10월 8일 뉴욕市에서 혼례를 올리셨으며 독립운동가와 大統領의 아내로서 극진한 내조와 근검절약의 귀감이시더니 1992년 3월 19일 梨花莊에서 享年 93세로 서거 3월 23일 夫君 곁에 안장되시다. 유족으로 嗣子 仁秀 子婦 曺惠子 孫子 丙久 丙朝가 있다. 1998년 光復節에 政府와 國民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세계를 움직이신 웅대한 기상이시여 거룩한 나라사랑 민족의 은인이시여 아무도 범할수 없던 순수하고 고결한 영원한 한국인이시여 반도산하 읊으신 민족시인이시여 오늘도 임 그리며 오가는 동작의 성지에주님의 은총중 영복을 누리소서 一九九八년 광복절에 정부와 국민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기념비 - 전 면 - 大韓民國 初代大統領雩南 李承晩博士 紀念碑 우남 이승만박사는 1875년에 탄생하여 1965년 91세로 서거한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시니 어려서 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1895년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워 개화기 언론과 독립협회의 개혁 운동을 주도하다가 1899년부터 옥고를 치렀으며 1904년 출옥후에는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가서 활 약하시었다. 1905년부터 5년간 조지 워싱턴대학 하바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 을 모두 마치고 1910년에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시었다. 1919년 三一독립운동 후 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어 1945년 민족해방 후까지 그 법통을 지키며 해외 에서 광복을 위한 외교와 민족교육 및 홍보활동으로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었다. 해 방후에는 미소양군의 분할점령과 강력한 국제 간섭속에서 민족을 영도하여 국토분단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 자율적 정부수립운동과 탁월한 외교로 1948년 총선거를 시행 제 헌국회의장이 되어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대통령에 당선 정부를 수립하여 8월 15일 대한민 국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시었다. 1950년에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힘썼 으며 1952년에 해양주권을 선언하여 국익을 수호 1953년에는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한미상호방위조 약을 체결하여 국가안보를 강화하시었다. 1960년까지의 재임중 농지개혁 교육진흥과 민족문화창달 경제부흥과 산업육성 민주제도 실시와 복지향상 등 국가발전의 대본을 확립하여 우리 민족사상 처 음으로 자유민주국가 창건에 대업을 이룩하시었다. 기념비 - 후 면 - 유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 복된 날을 누리게 해주 셨거니와 모진 바람서리 시련의 시기에는 모세와 같은 일꾼을 보내시어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셨으니 조선왕조말에 태어나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고 자유민주국가를 창건하여 우리에게 건전한 생존과 원대한 발전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어른이 이승만 박사이시다. 공은 총명이 뛰어나 일찍부터 한학 을 공부하여 한시와 서예에 능하였고 젊어서 신학문을 배워 개화기 언론의 선구자로서 독립협회 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출옥후에는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가 대한의 주권보전을 요청하시었다. 공은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수학 동서의 학문에 통달하였으며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후에는 미국에서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 여 광복을 위한 외교와 민족교육 및 홍보에 힘쓰며 독립운동을 주도하시었다. 三一독립운동 후에 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 독립운동을 통할 하고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 상해에 부임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하였으며 그 직을 떠난 후에는 전 권대사로서 국제연맹과 열강을 상대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추진하시었다. 일제의 야망을 간파한 공 은 태평양전쟁을 예언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의 국제승인에 주력 하며 조국해방을 위한 특공부대를 편성하게 하는 등 한국인의 대일 참전을 선도하시었다. 해방된 고국의 땅을 三三년만에 밟은 공은 민족의 대동단결을 일깨우며 승전한 연합국에 우리의 완전독립 과 三八선 장벽의 철폐 신탁통치의 반대와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그리고 자유 선거를 통한 민족 자결을 요구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과 건국 노선을 천명하시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결정과 미 소의 부당한 국제간섭 속에서 북한이 공산화되고 나라의 독립이 어렵게 되자 공은 온 민족을 영 도하며 자율적 정부수립운동을 추진 유엔으로 하여금 총선거를 실시하게 하여 제헌국회를 소집하고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 대통령에 취임하여 오천년 민족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을 건국 하시었다. 공은 건국초에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고 국가안보를 강화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 축하였으며 교육입국의 실현과 민족문화의 창달 민주제도의 시행으로 나라 발전의 대본을 확립하여 국가창건의 위업을 이룩하시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공의 생애는 바로 우리 민족 고난의 역사이니 중첩된 수난속에서 공의 거룩한 독립정신과 나라사랑 그리고 민족의 앞날을 투시하는 예지와 암흑 을 이겨낸 인내심과 우리를 지키신 대영단의 용기와 신뢰하는 경륜은 민족의 삶을 희망과 광명의 길로 영도하여 주시었다. 세계를 움직이신 웅대한 기상이시여 거룩한 나라사랑 민족의 은인이시여 아무도 범할수 없던 순수하고 고결한 영원한 한국인이시여 반도산하 읊으신 민족시인이시여 오늘도 임 그리며 오가는 동작의 성지에 주님의 은총중 영복을 누리소서 一九九八년 광복절에 정부와 국민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헌시비 - 전 면 -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우리를 나라있는 백성되게 하시고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안녕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거룩한 나라사랑 불멸의 한국인우리의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 헌시비 - 후 면 - 한국의 큰 별세계를 움직였던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이곳에 고요히 잠드시다구십평생 을 자주와 독립으로나라위해 몸 바치신 박사의위대한 모습을 추모하는 마음간절하여 하와이 동지들 정성을모아 눈물을 마시며 삼가 이 비를 세운다 ※ 이 비는 하와이 한인동지회가 하와이 근해바다에서 채취한 돌로 건립되었다. 참고자료8)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다. 1963년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취임해 연이어 9대 대통령까지 역임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산 업입국을 다지는 한편,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여 가 난을 극복하고 '하면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움으로서 우리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 여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 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율곡계획을 집념 있게 추진하여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서 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온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 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저격으로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이 곳에 안장되었다. 묘비 - 전 면 -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영부인 묘 묘비 - 후 면 -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은 본관이 고령이며, 직강공의 26세손이신 박성빈공과 수원 백남의 여사의 네째 아드님으로 1917. 11. 14.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나시어 1945년 건군과 함 께 입대 1961년 5.16혁명을 주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시고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1963년 제5대로부터 1978년 제9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하시는 동안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오천년 이래의 가난을 물리치시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으시어 세계속의 풍요한 한국 으로 부각시키셨으며,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시는 등 민족중흥을 이룩하신 영도자로서 민족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고 1979. 10. 26. 서울에서 향년 61로 서거, 삼천칠백만 온 국민의 애도 속에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시다. 대 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관성 육종관공과 경주 이경령 여사의 둘째 따님으로 1925년 11월 29 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시어 1950년 12월 대구에서 혼례를 올리셨으며 1974. 8. 15. 서울에 서 향년 49로 순국, 8월 19일 국민장으로 박정희 대통령묘 왼편에 쌍분으로 안장되시다. 1980년 2월 2일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세우다 박대통령 헌시비 - 전 면- 박정희 대통령 영전에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이 가을 어인 광풍 낙엽지듯 가시어도가지마다 황금열매 주렁주렁 열렸소이다.오천년 이 겨레의 찌든 가난 몰아내고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기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외다.자유와 평화통일, 그게 님의 이상과 소원착한 국민되라시고 억센나라 만들다가 십자가 지신 오늘 붉은 피 흘리셔도피의 값 헛되지 않아 보람 더욱 찾으리다.육십년 한평생 국민의 동반자였고오직 한길 나라사랑 그길에 바친이여굳센의지 끈질긴 실천 그 누구도 못지을 업적민족사 의 금자탑이라 두고두고 우러보리라.우리는 슬기론 겨레 어떤 고난 닥쳐와도끼치신 뜻을 이어 어김 없이 가오리다.몸 부디 편히 쉬시고 이 나라 수호신되어못다한 일 이루도록 큰 힘 되어 주소서 박대통령 헌시비 - 후 면 -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시어 1963년 제5대로부터 1978년 제9대까지대통령을 역임하시다가 1979년 10월 26일 서울에서 서거 11월 3일 국장으로 안장되시다 1980년 2월 2일 국민의 뜻을 모아 세우다 제 작 이 일 영비 문 한 갑 수글 씨 서 희 환헌 시 이 은 상글 씨 김 기 승 육영수 여사 헌시비 -전 면-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영전에 박꽃으로 마을 길이 눈부신 밤하얀 몸매로 나타나신 이여 조용한 걸음을 옮기시어우리 서로 만나던 그때부터당신을 고운 아씨로 맞이했읍니다. 흰 샘물의 미소로이 땅의 갈증을 풀어주시고 길잃은 늙은이들과 상처입은 군인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를 껴안아 그 삶은 보람차고 또 벅찼읍니다. 때로는 무르익은 포도송이들과 장미와 난초들의 향기로 이룬 즐거운 모임의 주인으로 임하여부덕과 모성의 거울이 되시었거니 당신의 장미는 아직 시들지 않았고 뽕을 따서 담으시던 광우리는 거기 있는데 저기 헐벗은 고아들과 외로운 사람들이 당신의 어루만짐을 기다려 서 있거늘 홀연 8월의 태양과 함께 먹구름에 숨어 버리신 날 하늘과 땅으로 당신을 찾았읍니다. 우리 한목소리 되어 당신을 불렀읍니다. 쓰라린 상처와 오한에 쫓기는당신을 구하려 검은 숲을 헤맸읍니다. 사무쳐 그리운 여인이시여 돌아서 당신의 삶을 끝내고 가시는 길 이토록 다 버리고 가시는 길에 비옵니다 꽃보라로 날리신 영이시여 저 먼 신의 강가에 흰 새로 날으시어 수호하소서 이 조국 이 겨레를 육영수 여사 헌시비 - 후 면 - 육영수 여사께서는 1925년 11월 29일 나시어 1974년 8월 15일 돌아가심 아들 박지만 딸 근혜 근영 헌시 모윤숙 글씨 이철경 온 국민의 정성을 모아여기에 이 비를 세우다 1974년 11월 22일 참고자료9)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하여 1961년 민의원, 1963년 제 6대 국 회의원을 시작으로, 7, 8, 13,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세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를 딛고 1997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오랜 기 간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킨다는 일념으로 헌신했다. 취임 후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의 극복을 위해 금융, 기업, 공공, 노동 4대 분야 개혁을 단행하고 정보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과 자율적 문화정책을 통해 우리나라를 복지, 문화국가가 되게 했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55년만에 처음으 로 남북정상회담을 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으며, 그해 12월에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에 헌 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 8월 19일 서거하여 8월 23일 국장으로 국립서울현충 원에 안장되었다. 묘비 - 전 면 -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 묘비 - 후 면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김해(金海)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공이 시고 어머니는 장수금여사이시며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나시었다. 1952 년 정계에 입문하신 후 낙선을 거듭하다 1961년 인제에서 첫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으나 5.16 군사정 변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셨다. 이때부터 행동하는 양심의 정치인으로 민주주의, 인권, 평화 통일을 위해 매진하셨고 일생 동안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셨다. 6년의 감옥생활과 수십년 동안의 망명, 연금, 감시를 당하는 고난 속에서도 의회주의 원칙에 충실하며 지방자치 실현과 국민통합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다. 1956년 토머스 모어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으시고 깊은 신앙심으로 평생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시었다.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몸 소 실천하셨다. 1998년 첫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로 대통령에 취임한 후 경제위기의 국난을 극복 하였고 우리나라를 민주주의와 인권국가, 경제와 사회복지 선진국, 정보화 강국으로 이끌었고 자 주 외교를 펼쳐 국격(國格)을 높였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반세기 동안의 적대감을 녹이고 지속적인 햇볕정책으로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하는 평화의 시대를 여셨다. 같은 해 12월 에는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3년 2월 퇴임하 신 후 세계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해 헌신하던 중에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로 서거하셨다. 온 겨레와 세계지도자들의 애도속에 8월 23일 국장의예로 현충원에 드시어 하느님의 품에안기셨다. 묘비 - 측 면 - 1943. 목포상업고등학교 졸업 1963. ~ 72. 6, 7, 8대 국회의원 1988. ~ 92. 13, 14대 국회의원 1987. 평화민주당 총재1992. 러시아 외교아카데미 정치학 박사 1994. 중국 사회과학원 명예교수1994.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1994.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창설, 공동의장1995.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1998. 2. 제15대 대통령 취임 2000. 6. 남북정상회담 2000. 12. 노벨평화상 수상2006.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 상 훈 1981. 오스트리아 부르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7. 미국 조지 미니 인권상 1998.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1998. 무궁화 대훈장 1999.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수여, 바스 명예 대십자 훈장 1999.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2000. 이탈리아, 대십자 기사훈장 2000.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대십자 훈장 2003. 칠레,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대십자 훈장 2003. 만해 평화상2005. 독일, 일등 대십자 공로훈장 2007. 베를린 자유대학 자유상 현충원 창빈안씨,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대통령 風水 http://www.jpungsu.com/board/view.php?bbs_id=travel&doc_num=170 박정희 대통령 묘소 해부 / 백달
http://blog.naver.com/tklim1/52850103
백달(白達) 창빈 안씨지묘 / 호국지장사 cafe.daum.net/moonhawje/DjXU/8118   옛님의 정취. 그 향기를 따라
 
 
 
 
 
 

Stories 

 

Chyi Yu

 

I remember quite clearly now when this story happened
The autumn leaves were floating and measured down to the ground
Recovering the lake where we use to swim like children
On the sun would dare to shine
이 이야기가 언제 일어난 일인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낙엽이 흩날리면서 거리에 쌓이고 태양이 강렬히 내리쬐던 날,
어린 아이들처럼 물놀이를 했던 호수를 뒤덮고 있었던 때였지요

That time, we used to be happy
Well, I thought we were
But the truth was that you had been longing to leave me
Not daring to tell me
우리는 행복했답니다
글쎄요, 그랬던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은 당신을 나에게서 떠날준비를 하고 있었던거지요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On that precious night watching the lake vaguely conscious
You said  "Our story was ending"
그날 밤,
호수를 아무생각없이 바라보면서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이제 우리 헤어져요,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끝이에요
Now I'm standing here
No one to wipe away my tears
No one to keep me warm
And no one to walk along with
No one to make me feel
No one to make me hold
Oh, What am I to do?
난 지금 이렇게 여기게 서있어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함께 그렇게 하고픈 사람도 없고,
안기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
오, 난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I'm standing here alone
It doesn't seem so clear to me
What am I supposed to do about this burning heart of mine
Oh.. What am I to do?
Or how should I react?
Oh. Tell me please..
난 지금 혼자 이렇게 서 있어요
아무것도 분명한게 없네요
이렇게 타는 마음을 어찌해야할까요

오..무엇을 해야할까요?
어떻게 행동을 해야할까요..
오.. 제발 나에게 알려주세요


The rain was killing the last days of Summer
You had been killing my last breath of love
Since a long time ago
비가 내려
마지막 여름이 지나가듯이.
당신이 나의 마지막 사랑의 숨결을 앗아갔지요
이미 오래전 이야기지요

I still don't think
I am gonna make it through another love story
You took it all away from me
하지만 난 아직 다른 사랑을 할 수 없을것 같아요
당신이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 버렸어요

And there I stand,
I knew I was gonna be
The one left behind.
But still I'm watching the lake vaguely conscious
And I know
My life is ending.
남겨지게 될 사람이 나란걸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난 아직도 아무생각 없이 그 호수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리고 난 알고 있어요..
나의 삶이 끝난다는걸...


Now I'm standing here
No one to wipe away my tears
No one to keep me warm
And no one to walk along with
No one to make me feel
No one to make me hold
Oh.. What am I to do?
난 지금 이렇게 여기게 서있어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함께 그렇게 하고픈 사람도 없고,
안기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
오, 난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I'm standing here alone
It doesn't seem so clear to me
What am I supposed to do about this burning heart of mine
난 지금 혼자 이렇게 서 있어요
아무것도 분명한게 없네요
이렇게 타는 마음을 어찌해야할까요

Oh, What am I to do?
Or how should I react?
Oh, Tell me please..
오..무엇을 해야할까요?
어떻게 행동을 해야할까요..
오.. 제발 나에게 알려주세요

ah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