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2004 유럽 여행 시조[31-33] 플라멩고 –31. 플라멩고①
인도에서 이집트로, 또 다시 구라파로
핍박을 피해보려 떠돌다 당도한 곳!
다리 편 안달루시아는 샹그릴라 였을까?
32. 플라멩고②
사람들은 우리 보고 유랑자(流浪者)라 하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연극(演劇)이라 했던가?
차라리 그럴 바엔 비극(悲劇)일랑 안 쓸걸?
33. 플라멩고③
애절한 소리가락 일비장(一悲場) 펼쳐놓고
개다리 춤사위에 고단함 달래보는
집시여! 그대의 눈빛, 내 마음을 찌른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8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하몽
1-1. 어디서나 하몽을 판다.
1-2. 음식점에는 어디든 하몽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1-3. 하몽을 썰어 놓은 모습.
2. 플라멩고
2-1. 무희 하나가 손뼉을 치며 슬슬 분위기 유도.
2-2. 특유의 빠른 발 박자도 서서히 등장하고...
2-3. 다른 여성 무희가 나서고...
2-4. 또 다른 여성 무희-발 동작 주의
2-5. 템포는 절정에 다다르고...
2-6. 힘찬 남성무희도 등장 - 여성과는 차원이 다름, 힘, 박진감 절정
2-7. 전체가 나와서 열광의 도가니
덧붙임)
(1)
저녁 식사는
에스파냐 음식 전문식당에서 했는데 입구에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곰팡내까지 나는 돼지 뒷다리가
주렁주렁 걸려 있고 포도주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에스파냐에서 대중적으로 발달한 요리인 하몽이라는데
하몽은 생후 20개월된
이베리아 고원에서 기른 신선한 돼지를 잡아
피를 뺀 후 절여
곰팡이가 피도록 그늘에 말린 고기라고 한다.
스페인의 고유 음식 중 하나인 하몽(jamon)은
이를 먹어보지 못한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는
페넬로페 크루즈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하몽하몽>(1992년) 때문이다.
하몽은 도토리를 먹고 자란 멧돼지의 뒷다리를 소금에 절인 뒤
2∼4년간 냉동 숙성해 발효시킨 햄 또는 소시지와 비슷한 음식이다.
스페인에서는 올리브나무 다음으로 많은 게 도토리나무인데,
이곳 사람들은 도토리를 먹지 않기 때문에
대신 돼지들이 먹는다고 한다.
하몽은 원래 먹을거리가 부족한 겨울철을 위해 고안된 음식인데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스페인의 하몽을 꼽기도 한다.
하몽 덕에 오랜 기간 항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몽 전문식당에 들어서면
그런 돼지 다리를 진열해 두는데,
그 모습이 마치 목욕탕에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 다리짝을 보는 듯하다.
그 맛이 아주 독특하고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고 설명하지만
차마 입에 댈 수 없어 애써 하몽을 외면하고
해물 요리에 빵을 곁들여 저녁을 겨우 때웠다.
(2)
저녁 후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밤 10시에 플라멩고를 보러가기로 했다.
낮에 하는 공연보다 저렴하고
마드리드의 밤거리도 볼 겸 심야의 시간으로 예약한 것이다.
보통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플라멩고를 감상할 수 있게 업소가 꾸며져 있는데
심야의 손님은 대신 맥주에 안주를 곁들여 먹으면서 테이블에 앉아 감상한다.
플라멩고는 집시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데
집시는 원래 인도의 엄한 카스트제도를 피해 온
아리안종에서 출발한 유랑집단을 말하는데
초기에 유럽 사람들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생각하여
Egyptian->Gypsy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집시에 대하여 알아보자.
왜냐면 집시들의 춤인 플라멩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춤을 발전시킨 집시들에 대하여 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이집트인들이라고 생각한 집시들은
실재로는 인도의 북부지방이 고향이라는 것이 최근 알려지고 있다.
즉 이민족의 침입(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과
엄격한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피하여
이집트로, 동유럽으로 전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여기에 그들이 인도가 고향이라는 증거가 있다.
1763년, 한 집시 출신의 학생이
비엔나의 신문에 기고를 했는데 그 내용은...
그가 네덜란드에서의 학생 시절,
인도에서 온 세 명의 힌두교도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자기 고향 언어와 비슷한 것 같아,
발음을 받아 적어 고향에 가서 보여주자
그것을 이해하더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독일의 언어학자 그렐만이 그 집시의 언어를 수집하여,
산스크리트어 및 다른 인도어와 비교 연구를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집시들의 기원이
인도 북서부 펀잡 지방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숫자나 친족과 관련된
단어, 신체 구조와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힌두어와 일치했다.
결국 정체불명의 집시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리아계 민족이었다는 사실이 현재 널리 인정되고 있다.
마치 태국 치앙마이에 소수민족들인 리수, 리후, 아카족들이
우리와 비슷한 말을 쓰고 풍습도 비슷하다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으로
당으로 끌려간 우리 선조들 중 일부가 탈주하여
태국국경지대의 심산유곡에서
여태까지 우리의 풍습과 말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론해보는 것과 같은 맥이라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일부 여행객에 의하여 그렇게 발견되고 추측할 뿐
누구도 그사실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려 하지 않는데
우리도 그들에 대하여 정확한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4)
각설하고
11세기 경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이들은
15세기 초에는 이베리아 반도에,
16세기 경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18세기에는 러시아에까지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유럽을 비롯하여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등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는
이들의 인구를 정확히 조사하는 것은 힘들다.
집시에 대한 인구센서스 조사가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을 뿐더러, 혼혈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스로 당할지 모르는 정치적, 경제적인 불평등을 우려해
집시라고 밝히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국의 인구조사를 통해서 볼 때,
전 세계적으로는 2천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유럽에 거주하고 있다.
집시들이 세계적으로 살고 있지 않은 나라는 단 3곳,
그린란드, 일본 그리고 한국뿐이라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감정이 매우 거센 탓에
이들은 정착할 생각조차 않는데다가
분단 상황이라는 것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런데 집시들은 자신들이 집시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들은 집시라는 단어가 인종차별적이고 그들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들을 집시라 부르며 매우 차별하고 경멸했다.
그러면 집시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부를까?
집시들은 자기 민족을 롬(Rom) 혹은 로마(Roma)라고 부른다.
이는 집시어로 ‘인간’,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평등한 인간으로 대해주기를 원한다.
국제집시 연맹(IRU, Inter-national Romani Union)은
자기 민족의 명칭을 로마(Roma)로 통일시켰고,
1995년에는 유럽의회가 공식 서류상에서 로마(Roma)의 사용을 승인했다.
(5)
물 흐르는 듯한 집시들은 가족들끼리 집단을 이루어 이동한다.
몇 가족에서 몇 십 가족,
혹은 100명 정도의 무리가 유랑생활을 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천막이나 포장마차 등에서 생활한다.
예전에는 말을 타거나 걸어서 이동했으나 19세기 이후에는 마차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이동생활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수천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싸피엔스싸피엔스가
세계각지로 흩어져 수많은 민족과 언어를 탄생시킨 동인(動因)은
바로 그 이동본능(移動本能)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곳에 정주하였다면
온갖 악조건의 환경은인간을 쉽게 멸종시켰을지도 모른다.
집시들은 여러 곳을 이동하면서
그 지역의 종교를 받아들이기도 하여,
이동한 지역의 주민들과 종교적인 이유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래의 주술적인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어
영혼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을 품고 있다.
유럽에 사는 집시들은
그들 특유의 전통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았다.
곡예와 음악 연주 같은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만든 바구니와 목공예품을 팔거나
이동 지역 사람들을 위해 점을 쳤다.
흔히 타로트 점으로 불리는 카드점을 많이 치는데,
이들이 치는 점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미국이나 여타 나라들에서도 지대하다.
집시들은 정착된 땅에 조직을 형성하지 않으며
타민족과의 통혼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여태껏 집시로서 종족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영토의 소유권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정착민족과 달리,
유랑하는 집시는 토지 소유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또한 이들은 나무, 풀, 물고기, 새 등은
인류에게 동등하게 부여된 공유 재산이라고 인식한다.
그런 탓에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물건도
모두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집시 중에는 도둑질이나 사기를 상습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헝가리에서는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한 집시들이
범죄의 50%를 저지른다고 한다.
이는 집시들이 정착민들의 생각과 달리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시 이외의 사람을 대상으로 도둑질을 하는 것을
‘합법적인 경제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집시들이 단순히 물건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라
정착민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다른 민족에 동화 흡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집시들은 유럽 전역에서 배척을 당해야 했다.
16세기 중엽 영국의 메리 1세는 ‘집시라는 것 자체가 죽을 죄’라는 법령까지 선포했다.
18세기 중엽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에도
집시들에게 카톨릭으로의 강제 개종,
강제 정착생활 유도, 강제 국외 추방 등 강력한 박해가 가해졌다.
그저 집시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죽어야 했고,
악마의 상징이나 마녀 사냥의 대상으로 몰려
화형이나 생매장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최악의 박해는 독일 나치에 의한 집단 학살이었다.
나치 정권에 학살당한 이들은 600만 유태인뿐만이 아니었다.
나치는 집시, 동성애자, 병역 기피자 등도 가스실로 보냈다.
특히 집시들에 대해서는 ‘유럽계가 아니면서
반사회적인 노동 기피자 집단’으로 규정하고 모조리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1944년 8월 1일, 4천 명의 집시들이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을 당했다.
지금도 집시들은 이 날을 ‘집시의 밤’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나치에 의해 50만∼70만 명의 집시들이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집시 연구가인 이안 한콕(Ian F. Hancock)은 직·간접적으로 학살된 숫자가
500만∼15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에서만도 2만여 명의 집시들이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집시들에 대한 독일의 차별은 끝나지 않았다.
1956년 서독에서는 전후 보상 대책이 제정되어
나치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법령을 채택했다.
하지만 떠돌이 생활로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집시들은 보상의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강제 정주 정책과 여전한 차별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유럽인들의 집시에 대한 차별과 박해는 멈출 줄 몰랐다.
유럽 집시들의 2/3는 동유럽에 거주했는데,
당시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은 이들에 대해 강력한 정주 정책을 추진했다.
구 체코슬로바키아나 헝가리 등에서는 경찰들이 집시들의 야영지를 습격하고
말을 죽이거나 마차를 불태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반면 정부는 이들에게 아파트를 제공하고 직업을 주기도 했다.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집시들의 혈연관계가 약화되고
생활양식도 점차 해체되어 갔다.
원치 않는 직장에 강제 취업되는 바람에
전통 공예 문화도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반면, 동유럽 정권은 집시 고유의 음악이나 문화를 계승하도록 장려하여,
집시 중에서는 음악가들이 상류 계급을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후 암거래 상인이 되어 부를 축적한 사람,
사업가가 되어 번성한 사람도 있었고,
소수이지만 정계에 진출하는 집시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소수의 일이고
대부분의 집시들은 여전히 열악한 생활 속에 살고 있다.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민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민족 동질성이 가장 약한 집시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압박이 가해졌다.
폴란드나 루마니아 등에서는 많은 집시 촌락들이 피습, 방화를 당해
주거 공간이 사라지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떠돌이 생활로 돌아가기도 했다.
갈 곳이 없는 집시들은 서유럽 국가로 망명을 신청하기도 했지만,
그 숫자가 늘어나면서 점차 외면당했다.
(6)
대표적인 집시 문화라고 하면 음악,
그 중에서도 스페인의 플라멩코를 연상하게 되는데
플라멩고가 탄생하게된 배경을 알아보자.
인도에서 이집트로, 다시 동유럽으로 전전하다 그 중 일부가
스페인 안달루시안 지방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렇게 전전하는 과정에서
스페인의 독특한 풍토와 결합하여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내는데
일상의 소리를 담아 만든 노래들이고
화려하고 즉흥적이며 기교적 성향을 가지면서
아랍문화와 카톨릭과 유대문화와의 융합을 이루는
스페인남부지방의 성향과 아주 밀접한 관게가 있다.
플라멩고의 어원은 아랍어인 "felag"(농부)나 "mengu(도망자 또는 피난민)라는
단어의 잘못된 발음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며
18세기에 "안달루시아의 집시"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스페인인들이 국토탈환운동의 일환으로
그라나다(Granada)지방을 회복하게 되고
이때 가톨릭 영주들과 교회의 핍박으로
수많은 집시들이 쫓겨 다니며 되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당시 지배계층에 대한 불만을 담은 내용이 많이 담겨져 있었다.
당시의 플라멩고 악보는
이탈리아 오페라 ("The lucky Mask"-Neri, 18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플라멩고는 그 시초로부터
즉흥적 연주로 말미암아 확립된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멩고 연주는 노래, 춤, 기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최초에는 노래와 손뼉치기(박수:palmas)가 주요 연주수단이고
기타는 그 이후에 추가되었고 발 구르기도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전형적인 악기로 연주하는 플라멩고는 대표적으로 기타연주를 꼽을 수 있다.
플라멩고의 리듬은 여러 개의 마디를 단위로 하는
12박자 이상의 진행 속에
몇 개의 강박을 가진 구조로 리듬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이뿐 아니라 러시아의 집시들은
가수나 노래반주에 쓰이는 악기를 다루기도 한다.
여자들은 노래 부르는 파트에서는 리더가 되고
춤추는 파트에서는 춤을 춘다.
이들은 집시 고유의 음악보다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농요 등을 많이 다루었고,
현재는 러시아의 로맨틱한 노래들을 주로 부른다.
이들 집시 음악가들은 일반 대중들에게 여흥을 제공하는 것이다.
(7)
이러한 사전지식을 되뇌며 무대를 응시하는데
무희들이 테이블로 다가서더니
업소 측에서 단체별로 폴로라이드를 찍어준다.
드디어 무대에 대여섯 명의 남녀무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뒤에 앉아 애잔한 기타 연주에 맞추어
신나게 손뼉을 치고 있는데
여성 무희 하나가 무대에 나서서 천천히 춤사위를 이어간다.
절도있는 다리동작이 이 순간만큼은
모든 생각을 단절시키고 시선을 잡아 모은다.
처음에는 서서히 춤동작으로 움직이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폭포수처럼 빨라지며 혹은 느려지며 강물이 흐르듯 이어간다.
점점 기타뿐이 아니고 다른 악기들이 등장하고
앉아있는 무희들의 손뼉치기도 점점 빨라지고
어께를 들썩이며 추임새를 넣는지 이따금 기쁨의 소리를 지른다.
여성 무희는 열정으로 얼굴에 번지르르 땀이 흐른다.
이어 앉아있던 남자무희가 나서더니
남성특유의 파워와 절도로 좌중의 시선을 잡았다.
구두에는 징을 박았는데
꺾어지는 고비고비마다의 다리 동작은 정열을 불사르는듯 하다.
남자무희의 웃옷은 곧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마치 물에 헹군 빨래처럼 되고
머리칼마저 흐르는 땀으로 헝클어져
이어가는 춤동작에 더욱 역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어 차례차례 다른 무희들이 등장하더니
각자 특유의 동작을 선보였다.
손뼉치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처음 등장했던 남녀가 한데 어우러져 관능적인 춤을 자랑한다.
얼마나 춤으로 단련이 되었는지
정강이에 힘줄이 동아줄처럼 역어져있다.
반면에 애잔한 노랫가락과
마치 내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하듯
무희의 쏘아보는 눈빛은 내 마음을 찌른다.
그렇게 플라멩고를 감상하는 사이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고
그러한 감정을 가슴에 가득 안은 일행은
정적이 깃든 심야의 마드리드를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왔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8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