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2004 유럽 여행 시조[34-37] 투우장, 마요르 –34. 마드리드 아침달리기②
커튼이 닫혀있는 주택가 골목길에
정적을 깨트리는 거친 숨 미안하여
달리다 멈추어 서서 정원 속을 들여다본다.
35. 투우장 전경
하얀 눈 번뜩이며 어둠이 덮쳐올 때
빨간 꿈 펼쳐들어 정열(情熱)이 파도치면
단칼에 이마를 찔러 광란(狂亂)을 잠재웠지.
36. 마요르 광장
광장의 청동기마상 살아서 움직였다.
사방의 벽돌 벽에 구령소리 울렸다.
철갑의 기사들 위세(威勢)에 옴짝달싹 못했다.
37. 마드리드 왕궁정원
세계를 제패하던 호령은 간곳없고
왕비가 거닐던 정원에 공작새만 노니는데
우거진 숲길 따라서 사라져간 소실점(消失點)!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9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마드리드 시내
1-1. 다시 만난 어제 마드리드에서 톨레도로 가던 길에 보았던 알깔라문
1-2. 마드리드 거리와 교차로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청동기마상
1-3. 마드리드 시민들의 망중한
2. 투우장을 찾아서
2-1. ENEX 구태완이사와 함께
2-2. 광장의 투우사 동상을 뒤로하고...
2-3. 1930년 지어진 라스 벤따스 투우장(Las Ventas) 정면
2-4. 들어가 보지 못한 투우장면(자료에서...)
3. 레알 마드리드 구장을 찾아서
3-1. 레알 마드리드 두장 외관
3-2. 레알 마드리드 구장 내부
4. 스페인 광장
4-1. 1916년 지어진 스페인 광장 - 로마의 스페인 광장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름.
5. 마요르 광장
5-1. 1620년 지어진 이곳에서 마녀화형식이 치뤄졌다니 믿어지지 않음
5-2. 저 베란다에서 귀족들이 그 화형식을 내려다 보았단다.
5-3. 지금은 이렇게 축제와 휴식의 공간
5-4. 화가들은 그림도 그리고...
5-5. 펠리페3세의 호령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
5-6. 마요르 광장의 펠리페3세 청동기마상 앞에서...
6. 꼴론 광장
6-1. 꼴론 광장의 콜롬부스 동상 -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향하고 있다 함.
6-2. 광장 지하는 콜롬부스 박물관
7. 마드리드 왕궁
7-1. 마드리드 왕궁 -지금도 사용,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함 - 다른 분 사진
7-2. 마드리드 왕궁정원 앞에서...
7-3. 왕궁정원에서 공작이 깃털을 펼치자
사람들이 탄성을 질러 셧터를 눌렀는데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7-4. 한참 돌다 보니 이 알칼라 문이 또 나타났다.
덧붙임)
(1)
바쁜 일정에 곤한 잠을 자고 나니
현지시간 4월 19일 이른 아침이다.
오늘은 마드리드 시내를 더 둘러보고
리스보아(마드리드에서 630km)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결심한 조깅은 절대 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일찍 일어났다.
숙소는 약간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어제와는 다른 방향인 언덕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 양편으로는 주택가였는데
썸머타임 시행으로
새벽 6시인데도 집집마다 커튼조차 열리지 않고
불도 켜지지 않아 정적만 감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저벅저벅 골목길을 달리기가 미안할 정도이다.
집집마다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는데
때로는 멈추어서서 들여다 보았다.
이 곳 사람들도 이태리 사람들처럼
느긋하게 출근하고 아침잠을 즐기는가 보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니 바로 마드리드 중심가인데 별천지였다.
이른 아침 노동시장으로 가는 사람들과
출근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이제야 사람 사는 세상에 온 것 같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바삐 오가는 사람들,
때로는 정장을 한 신사들이
버스와 전철을 기다리며 편의점에서 빵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대부분 노동자들로 보였는데
동남아 사람들, 흑인들, 아랍계 사람들로 짐작되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스페인 사람같이 보이는 사람보다
이방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시내 방향으로 30여분 달리다 호텔로 돌아오다.
(2)
조식 후 호텔을 나서는데
일단의 삼도(일본) 관광객팀이 조용히 로비에 모여 있다.
또한 한 편에는 스페인 노인 관광단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한국인 관광단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민족성은 극명하게 나타난다.
스페인 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은 떠들고 웃고 꺼리낌이 없는데
삼도(일본) 관광객들만 수업을 하러 온 학생들 처럼
귀엣말로 조용조용 말하고
정숙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투우 시즌은 아니지만 여기까지와
투우 경기는 못 볼망정
경기장은 봐야 된다고 하여 경기장을 찾기로 했다.
라스 벤따스(Las Ventas)투우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투우장으로
약 23,000개의 관중석을 가지고 있는 아랍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란다.
이곳은 1930년대에 지어졌으며,
이곳이 생기기 전에는 마요르 광장이나 솔 광장 등에
간이 투우장을 지어놓고 투우를 진행 했었다고 한다.
이 투우장은 네오 무데하르(아랍풍) 양식으로
다양한 색깔의 세라믹 타일 장식과
안달루시아로부터 공수해온 금빛 모래 등을 이용하여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을 완성하였다.
보통 투우 경기는 5월부터 10월까지 꾸준히 열리며
산이시드로 페스티발 기간에는 매일매일 다양한 투우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세계적인 추세가 점점 투우를 동물학대로 간주하고
주변의 많은 유럽 국가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투우시즌이 시작되는 5월이면
어김없이 이곳은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서구 사람들이 우리가 개고기를 먹는다고 난리인데
그들이 선한 소를 대상으로 경기장까지 지어 즐기는 것은
과연 사람다운 짓인지 묻고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여성들의 결혼 대상 일순위는 투우사이며
이순위가 축구선수일 정도로
투우사는 고액의 연봉을 받는데
유명 투우사의 일거수 일투족이 매스컴의 제일 큰 가십거리란다.
일반 소와 투우용 소는 종자부터 다르다 하며
족보까지 작성될 정도로 관리된다는데
막상 투우장에 투입되고 죽은 소는
그 살코기가 일반 소의 것보다 고액으로 팔린다고 한다.
그런 투우용 소에 대하여
정작 에스파냐 사람들은 행복한 일생이라고 생각한단다.
일반 소는 태어나서 죽어라고 일을 하고
우유를 제공하고 도축당하지만
편히 놀고먹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정열을 불사르고 죽는 투우용 소야말로
멋진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냐는 것인데
그 생각에 대하여는 글쎄올시다 이다.
(3)
이어서 유명한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레알 마드리드 구장에 들러
구내 기념품점에서 기념품도 사고 축구 전용구장도 구경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협소하게 보였는데
막상 내부에 들어와 보니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우리의 경우 경기장 입구의 공원과
주변 여유부지 때문에 거창하게 보이는데
시내 한복판에 건물들 사이에 지어서 그런지 왜소하게 보일 뿐
내부의 시설은 아주 훌륭했고 넓었다.
설명에 의하면 구장을 세울 때
바로 이 자리는 마드리드의 교외였고
땅값도 헐값이었는데 지금은 시내 중심가의 제일 비싼 땅으로 변하여
구단에서는 이 땅을 담보로 얼마든지 금융 로온이 가능하여
세계적인 선수들을 많이 스카우트하고 구단 재정도 넉넉하단다.
기념품점에서 아이에게 주려고 축구공을 샀는데
나중에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두고 내린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쉽다.
스페인 광장은
마드리드를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누는 기준로인
그란비야 대로의 끝 쪽에 위치한 광장으로
1916년,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이란다.
광장은 별로 크지 않은 아담하고 고즈넉한 장소였다.
광장에는 야외 공연으로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다.
광장의 중앙에는 말을 타고 있는 돈키호테와
나귀 위에 올라탄 산초 판사의 상이 세워져 있고
마치 자신이 만든 소설의 주인공들을 내려보기라도 하는 듯
그 윗부분에는 세르반테스의 상이 있다.
광장 후면으로 보이는 건축물은
1950년대에 Otamendi 형제에 의해 설계된 Edificio Espana와
Torre de Madrid로, 총 27층으로 이루어진 이 곳은
현재 아파트 및 호텔로 이용되고 있단다.
(4)
점심 후에는 마요르 광장(Plaza Mayor)으로 갔다.
마요르 광장은 초기 마드리드 성채가 세워진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색창연한 건물들로 들어차
마드리드가 구식과 신식이 적절히 어우러진 도시임을 실감케 한다.
스페인의 마요르 광장은 폭 94m, 길이 122m의 장방형으로
규모면에서나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고 있는 광장이란다.
펠리페 2세가 수도의 중앙에다 이와 같은 광장을 만들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지어진 것은 그의 아들인
펠리페 3세가 재위에 있었던 때(1619)에나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1620년,
스페인의 다섯 성인을 기리는 시성식 행사를 이 곳에서 치름으로써
마요르 광장은 공식적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단다.
17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이 광장은
각종 공연장, 마녀재판과 사형 집행장, 왕가의 결혼행사장,
투우장 등 다양하고 이채로운 행사의 장으로 이용되었고
이에 광장 주변에 위치한 가옥의 발코니들은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왕가를 비롯한 귀족들이
사용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고 한다.
광장 북쪽 시계탑이 있는 건물 중앙에
‘Plaza Mayor’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 벽에는 세르반테스 등
마드리드 대표적 문인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1970년대부터 마요르 광장은 차량 통제를 실시,
오늘날까지 이 곳은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활기로운 광장으로서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일요일 오전이면 우표 등을 판매하는
벼룩시장이 서기도 한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에는
이탈리안 조각가 Giovanni de Bologna에 의해 세워진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대왕의 호령소리가 광장의 벽면에 반향 되어 울릴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구경하면서
마요르광장에 있는 바(Bar)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광장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관광거리였다.
카이제르 수염을 기른 스페인인이
갱단의 보스인양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핸드폰을 귀에 대고
눈을 부라리며 전화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광장 건물 사이사이로는
주변으로 출입할 수 있는 방사선형으로 길이 나 있었는데
그 일대에는 오래된 값싼 술집과 바, 그리고 상점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런데 시에스터 시간인지 대부분 문이 닫혀져 있다.
밤이 되면 마드리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기타와 합창으로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어
누구나 부담 없이 끼어들어서
엉덩이를 흔들며 플라멩고를 출 수 있다는데
그러한 분위기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5)
이동 중 마드리드의 또 하나의 중심점의 하나인
꼴론광장(Colon : 콜럼버스)을 지났다.
이 광장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콜럼버스 탑이 중앙에 놓여져 있으며
이것은 1885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 거대한 기념물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을 기념한 것이며,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꼭대기에 있는 콜럼버스 상은 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광장 아래 반지하에는 콜롬부스가 배 3척을 끌고 출발하여
1척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그 항로와 함께 부조로 조각되어있고
그 당시 지구의 끝은 낭떠러지라는 세계관을 형상화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건축물이 특이한 기억으로 남는다.
(6)
이 참에 콜럼버스에 대하여 알아볼까?
이탈리아명은 Cristoforo Colombo로 제노바 출생이다.
1477년에 포르투갈 리스보아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지만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海圖製作)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地圖)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484년 포르투갈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獻策)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계약내용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토지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를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免罪)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의 와틀링섬(추정)을 발견하였다.
이어,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핀손과 사이가 나빠져,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자는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人)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들에게는 공납(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고,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 문책 당하였다.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河口)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코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504년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1506년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된 채 죽었는데,
자기가 발견한 토지를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서양 사람에 의한 아메리카대륙 발견은
1000년경 노르만인(人)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의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한
신대륙 식민지 경영의 발단(發端)을 구축하게 된 점에서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7)
이어서 왕궁 정원을 방문했다.
왕궁(Placio Real de Madrid)은 동방의 궁이라고도 불리며
1738년 펠리페 5세의 지시로
이탈리아의 건축가인 사케티에 의해 1764년에 완성되었다 하며,
전체 길이가 131m로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마드리드에서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란다.
왕궁 내부에는 2,800여개의 화려하게 장식된 방이 있으며,
왕궁 앞뜰과 안뜰에는 스페인 왕, 스페인 태생의 로마 황제의 동상이 서있었다.
현재도 왕이 거주하여
보안상 관광객들이 마음대로 관람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가이드가 동반하는 관람은 가능하다고 한다.
이곳은 원래 무어인들이
기독교도들과 싸울 때 아랍의 성채로 쓰였던 곳인데
그들은 이곳을 베이스 켐프로 지정하고
깜뽀 델 모로(무어인의 캠프)라 이름 지었단다.
왕궁의 반대편인 정원은 공원으로 개방되어
자유 관람 할 수 있었는데
그림 같은 서양 잔디밭과 식물원, 그리고 담장들을
정원사들은 끊임없이 관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돌아 나오는데 공작새 한 마리가
잔디밭에서 부챗살 같은 깃털을 펼쳐들자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의 탄성을 질러대고
셔터가 터지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9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