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2004 유럽 여행 시조[22-25] 프라도, 레티로 –22. 프라도(PRADO)미술관 고야
제국이 무너지는 격랑이 휘몰아쳐
액자 속, 포로가 된 고야(GOYA)가 살아 온 듯
물감이 마르지도 않아 묻어날까 두려워
23. 라스트로(RASTRO)시장
여기서 소매치기 조심하라 했던가?
서민의 애환(哀歡)깃든 얼굴들 마주치니
차라리 주머니 열어 못살 것도 살까봐!
24. 레티로(RETIRO)공원
우거진 숲 사이로 펼쳐진 공원길에
무명의 악사들과 연극인의 공연들이
한 편의 소설 같아서 주저앉아 읽었다.
25. 마드리드 한국식당
절대로 외국까지 와 한국음식 안 먹겠다고
힘들어도 현지식(現地食) 맛보겠노라 다짐했건만
그것참! 하루도 못가 고추장, 된장 그리워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8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프라도 미술관 외관과 고야
1-1. 프라도 미술관 외관과 고야 동상
1-2.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harles Ⅳ, 1800,
고야는 1798년에 수석궁중화가가 되었는데 왕실에 대한 존경심이 별로 없었던 고야가
왕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나는 그림으로, 왕이 옆으로 비껴서고 왕비가 왕의 중심자리를
차지한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각 인물들의 표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1-3. 옷을 입은 마하 Maja vestida/The Clothed Maja, 1798~1805 캔버스에 유채 95*19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당시에는 "집시여인"이라는 제목이었으며, 왕비의 애인이었던
한 재상을 위해 그려졌다. 조심스러운 붓의 터치와 섬세한 색채. 50대에 들어선 고야는
여성미의 관능적인 볼륨감보다 표면적인 인상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1-4. 나체의 마하 Maja desnuda/The Naked Maja(1798∼1805) 캔버스에 유채 97*19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808년 5월 3일”과 “나체의 마하”로 고야는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기소되어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다. 고야가 남긴 유일한 나체화이며,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에 누운 비너스”를 제외한 유일한 나체화이다. 같은 모델을 옷을
입은 모습과 나체의 모습이라는 두 가지로 그린 점에서는 세계 회화상 유일하다.
1-5. 1808년 5월 3일, 1814~15 캔버스에 유채 266*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808년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그 해 5월 2일 점령군에 대한
민중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5월 2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결과는 고야의 붓에 의해
재현되었다. 체포된 스페인의 민중들은 마드리드 시의 동부에 있는 어느 언덕으로 끌려가
연달아 총살되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무차별 처형은 이튿날 새벽가지 계속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은 1814년까지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고야는 침략군의 부정과 전쟁의 부조리,
스페인인의 애국을 보여준다. 하지만 고야는 이 같은 역사적 진실성보다 인간을 죽이는
잔인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무지가 가져온 악과 오만, 난폭성을 그는 숨김없이 폭로하고
고발한다. 나폴레옹이 조직적으로는 스페인을 점령했을지 모르지만, 스페인 인들의 정신을
약탈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1-6. 눈보라, 1786 캔버스에 유채 275*293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786년 궁정화가로
임명된 고야는 같은 해에 궁의 식당을 장식하기 위한 타피스트리 제작을 위한 밑그림을
준비했다. 이는 각각 사계절을 나타내는 4점으로 그 중의 하나가 "눈보라"였다.
1-7. 이사벨 코보스 데 포르셀 부인의 초상, 1806 캔버스에 유채, 런던 국립미술관, 이 여인은
스페인 중부 카스틸랴 지방의 관리의 부인인데 고야의 눈으로 그녀의 품위 있는 미모를 잡은 것이다.
1-8. 양분된 투우장, 1814년경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고야는 높은 좌석에서 양면에 전개되고 있는 투우의 장면을 구경시켜 주고 있다.
1-9. 거인
1-10. Francisco Goya, Saturn Devouring One of Sons (1819-1823)
2. 기타 작품들
2-1. Guernica, Paris, 1 May to 4 June 1937, Oil on canvas, 349.3 x 776.6 cm
Zervos IX, 65,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1937년 스페인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는
나치 독일 공군기들에 의해 3시간동안 무려 32t의 폭탄세래를 받았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장군의 우익 쿠데타에 가담해 이같은 참변을 당한것이다. 이 폭격으로
게르니카는 폐허로 변했고 독일 공군기들은 피신하는 주민들까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에 있던 피카소는 조국에서 벌어진 학살행위를 고발하고자 2개월 만에
'게르니카'를 그려 그 해 파리 국제 전시회에 공개했다. 게르니카는 그 후 학정에 대한 저항
과 화해의 상징이 됐으며 침묵하던 세계의 지식인들이 직접 스페인으로 달려가 총을 들게
했다. 그림에는 말에 올라탄 사람 아래 여러 사람들이 짓밟혀 있는 것이 보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말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의미하며 말위의 사람들은 프랑코 장군의 군부 쿠데타
세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말을 탄 사람은 한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한 눈은 옆을 보고 있다. 처음에 세계는 공습을 주도한 히틀러 정권만을 비난했다. 피카소는
이중적인 인물화를 통해 게르니카 공습이 실제로는 스페인 군부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웅변
했던 것이다. 이처럼 피카소는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때 숨겨진 진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피카소는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모두 모아 그림으로 표현했다.
피카소의 입체화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부합
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3차원의 공간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음으
로써 4차원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이러한 종합적인 입체화의 방법을 정립한 뒤
"드디어 우리는 완전한 형태를 그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2-2. Massacre In Korea, 황해도 신천 한국동란 학살사건(1951)
3. 라스트로 벼룩시장
3-1. 라스트로 벼룩시장의 모습
4. 레티로 공원
4-1. 레티로 공원 입구
4-2. 레티로 공원 전경
4-3. 레티로 공원 연못 앞에서
덧붙임)
(1)
아토차 역 근처의
잘 다듬어진 신시가지를 가로질러
무성한 가로수 길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 아래 세워진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에 도착하니
어제부터 찌뿌둥한 하늘에서 가랑비가 흩내린다.
이베리아 반도는 연간 강우량이 1,000mm정도로 적은데
봄철에 비가 오는 것을 보니
우리가 아주 반가운 손님인 것 같다고 가이드가 말하다.
창 밖을 보니 로마와 달리, 밀라노나 마드리드는
고대와 현대가 적절히 조화된 도시란 느낌이다.
여기 저기 고대의 흔적이 떡고물 흘리듯 산재해 있는 한편
그 사이사이로 현대식 건축물과 조형물들이
고대의 흔적을 절대 무시하지 않고
그 형체와 색상을 존중하며 어울리는 모습은
동양적 도덕적 고졸함마져 지녔다.
(2)
프라도 미술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며, 회화관으로는 세계 최대의 미술관이란다.
그런데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협소한 입구부터가 별로이다.
입구의 정원에 자그마한 고야의 흉상이 있음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고야의 작품이 특별히 소장되어 있음을 직감하겠다.
'프라도'라는 말은 '목장'이라는 뜻이라 한다.
1819년 비야누에바에 의해 왕립회화관으로 발족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 졌으며,
약 6,000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전시되는 것은 3,000점에 이른단다.
12-18C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으며
특히 16,17C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양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세계 제1급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이 중 스페인 작품이 다수를 자치하고 있으며
플랑드르,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의 작품들도 다수 전시되어 있다.
벨라스케스, 고야, 루벤스, 티티앙, 보티첼리에서
20세기의 피카소에 이르기 까지
명작들을 소장하고 있단다.
1층은 스페인, 플랑드르, 이탈리아 회화, 고야의 작품이 전시되어있으며,
2층은 이탈리아 회화, 조각 작품, 다수의 고야작품, 스페인회화가 전시되어 있고,
전시작품의 위치는 수시로 바뀐단다.
전시 규모가 너무 방대하여 16세기의 엘그레코와 17세기의 벨라스케스,
18세기의 고야 등의 작품들 중 유명한 몇 작품만 보기로 했다.
(3)
고야의
`옷 벗은 마야'와
`옷 입은 마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정설은 옷을 입은 마야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고,
옷을 벗은 마야는 사랑에 빠진 고야 자신을 위해 그렸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보건대
그저 토실토실하게 살찐 뿌우연 피부의 여인네 그림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림을 잘 알아서 그런지
그저 좋은 그림이라고 하니까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넓은 미술관에서 엘그레꼬등 다른 사람의 작품에는 별 관심 없고
마야부인의 그림들 앞에만 몰려 있다.
마야(Maja)부인하니까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과 혼동된다.
한때 나도 미술과에 진학할까 고민할 정도로
심각하게 그림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회화에는 약간의 관심이 있다.
전시 그림은 대부분 사실적 기법의 유화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유화라서 그런지 방금 전에 그림을 완성한 듯
손을 대면 물감이 손에 묻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4)
프라도 미술관 별관(Cason del Buen Retiro)에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Guernica)가
1981년 미국에서 스페인에 반환되어 여기에 전시되어 있다는데 보지는 못했다.
스페인 내란 시 무고하게 죽어간 스페인 국민들을 애도하며 그린 이 그림에서
말은 스페인 국민들을 상징하고
황소는 잔인함과 절망을 나타내고 있단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뉴욕 박물관에 맨 처음 보관하였는데,
조건은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만 보관한다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민주화가 진행된 1981년
게르니카는 결국 마드리드의 이곳으로 옮겨졌단다.
그림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다.
(5)
프라도 미술관을 나와 구라파에서 제일 크다는
라스트로 벼룩시장(El Rastro)을 찾아 갔다.
우리의 남대문시장과 시골장의 중간 분위기를 풍기는
싸구려 서민물품을 파는 시장이었는데
중국제품이 대부분이었고 가죽제품만은 파키스탄이나 모로코 제품이 태반이다.
여기서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조심하라고 하였지만
시장통의 상인들 얼굴을 보니
우리의 시골장에서 만날 수 있는
사심(私心)이라고는 전혀 없는 서민들의 모습과 같다.
그러고 보니 인류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일부러라도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래. 털어갈 테면 털어가라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녔다.
사실은 이동버스에 중요물품은 두고 내렸지만...
동남아인, 동양인, 흑인등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있었는데
딱 하나 눈 하나 만큼은 순진무구한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6)
이어서 16C 펠리페 2세가
그의 아내를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이를 정원으로 개조하여 왕실의 여름 별장(동쪽 별궁)으로 삼았다는
프라도 미술관 뒤편에 있는
레티로 공원(Parque del Retiro)을 찾아갔는데
남쪽에는 울창한 숲,
북쪽에는 우아한 화단으로 이루어진
353에이커(143만ha)의 거대한 공원이었다.
원래 왕이 공무를 떠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스페인 내란 때 불에 타 대파된 것을 복구하여 오늘에 이른다 한다.
여기 와서 아침마다 조깅하면서도
이 곳 사람들의 조깅모습을 볼 수 없어 서운 했는데
공원 주위로 조깅로가 개설되어있어
조깅하는 스페인사람들을 여기에서야 볼 수 있어 반가웠다.
나도 훌렁 벗고 달리기 복장을 갖춘 뒤
그들과 함께 뛰고 싶은 충동이 일어 온다.
왕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넓은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니
왕궁 앞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 주위로
방물장수며, 무명의 악사들이 토속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후줄근한 차림의 집시 여인들이
꽃 한 송이씩을 건네이는 것이었다.
연못 앞에는 젊은이 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노라니 연극의 하이라이트만 보여주고
휴일날 어디어디서 공연을 하니 와보라는 일종의 광고였다.
연못주위에는 알폰소 12세의 기마상이 있었으며
야외음악당, 크리스털전시장, 분수, 장미원, 로드리게스 정원 등이
아름드리 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7)
점심은 마드리드에서 한군데 밖에 없다는
“아리랑”이라는 한국식당을 찾아갔는데
주인은 너무나 반가워 비싸다는 김치며, 상추 등을 마구마구 내놓는 것이었는데
고추장이며 된장이 이렇게 맛나는 식품인 줄을 새삼 느꼈다.
주인이 직접 대패질을 하여
우리의 전통 한식문짝을 만들고
태극선, 맷돌등 한국적인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구사하였는데
모두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잘 생긴 미남의 웨이터가
주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근면 성실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느끼게 해준
아리랑식당 주인장께 감사드린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8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