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2004 유럽 여행 시조[38-40] 리스보아 –38. 리스본 가는 기내에서 내려다 본 운해(雲海)
두꺼운 설원(雪原)위에 황금 물 엎질렀다.
상념(想念)의 돌 떨어져 금파(金波)되어 퍼져간다.
조용한 이베리아 고원이 술 취한 듯 비틀거린다.
39. 포르투갈 첫인상
이태리가 지나(중국)요, 스페인이 삼도(일본)라면
사람답게 사는 나라 포르투갈은 한국이라.
빛나라! 이베리아의 진주, 아름다운 리스본!
40. 리스보아 아침달리기①
돌타일 깔린 거리 섬세한 장인(匠人)솜씨
길거리 그 자체가 박물관 같기만 하여
풀뿌리 들켜버린 마음 촘촘 심고 떠난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20 이름 없는 풀뿌리 나강하
0. 마드리드->리스보아(600km, 1시간)1. 리스보아의 거리
1-1. 서민들이 사는 아파트
1-2. 리스보아 시내의 트램
리스보아 시내에서는 지하철, 버스, 트램을 이용해서 이동하는데
특히 트램 타기가 재미있다.
트램은 엘렉트리코스(electricos)라고 부르는데
덜커덩거리는 구식 스타일과 최신식 트램이 함께 달리고 있어 더 흥미롭다.
조르제 성으로 가는 28번 트램은 좁은 언덕길을 곡예 하듯 올라가는데
리스본의 트램 가운데 가장 운치 있으므로 한번 타볼 것.
2. 리스보아의 돌타일3. 국기와 리스보아 시내 지도
덧붙임)
(1)
마드리드여!
너와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이렇게 잠시 대면하고 나는 가야만 하는가?
또 다른 인연이 있다면
언제 또 다시 너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짧은 에스파냐와의 만남은 아쉬움만 남기고
마드리드 교외의 공항으로 향하여야 했다.
오후의 공항은 부산했다.
그러한 공항은 이태리보다 확실히 관광객은 줄어든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럽을 다 본 다음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맨 마지막에 찾는다던가?
그렇게 찾은 이베리아반도의 매력에 푸욱 빠져
늦게 찾은 걸 후회한다던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스페인은 영어식 발음이고
에스파냐가 현지식 발음이듯이
리스본은 영어식 발음이고 리스보아가 현지식 발음이니
현지식으로 불러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한다.
저녁노을 속에 마드리드를 뒤로 하고
일행을 실은 "Spanair"가
이베리아 상공으로 솟구치니 온통 雲務의 바다이다.
그 양떼 같은 구름에
저녁 햇살이 비치니 황금물이 엎질러진 듯
천지사위(天地四位)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황금 연못에 상념의 마음을 주니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듯
생각의 파편들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베리아의 상공으로 퍼져가는 것 같다.
그러한 구름장 사이로 산, 강, 도로, 촌락들이
모래알 같이 산재되어 뿌려져 있다.
(2)
포르투갈(Portugal)이여!
너는 누구인가?
피구라는 유명한 축구 선수가 있고
또한 우리의 이천수라는 축구 선수가 와 있는 축구를 사랑하는 나라!
수도 리스보아,
그리고 제2의 도시 포르토,
대학도시 코임브라,
성곽도시 에보라를 품고 있으며
남한 면적만한 땅에서 1,000만의 목숨들이 숨쉬는 너는
유적의 바다인 지나(중국)같은 이태리도 아니요,
섬세와 정교를 다한 삼도(일본)같은 스페인도 아니요,
완충의 영역에서 찬란한 과거사를 반추하며 사람답게 사는 나라,
동양의 꼬레아 같은 포르투갈이여!
너는 그리하여
영국인도 독일인도 이태리인도 스페인인도
노년을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땅이라 했던가?
포르투갈로 가는 비행기는 우리의 옛 시골 시내버스를 연상케 한다.
나이 든 여승무원의 온화한 미소는
자애로운 누이와도 같은 친절을 전해온다.
다른 비행기 내부의 점잖은 분위기와는 달리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명절 때 고향에 가듯 승객들이 들떠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른 부존자원이 없는
포르투갈 사람들은 대부분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로 돈벌이를 간단다.
우리의 시골 청년들이 농사를 팽개치고 도회지로 돈벌이 가듯이 말이다.
앞좌석에 앉은 "안나"라는 아가씨도 바로 그런 사람인데
스위스 벤쳐회사에 근무한다고 하며
포르투갈에 계신 부모님을 2년 만에 만나러 간단다.
5개 국어(포르투갈어, 스위스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에 정통한
그녀는 꽤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비행기 내부를 찬찬히 살피노라니
어느덧 포르투갈 상공으로 접어든다.
그럴수록 미지의 나라에 대한 설렘으로 피곤함을 모르겠다.
난생 처음 가는 포르투갈은 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 것인가?
포르투갈이여!
너의 허리를 사람들은 언제 밟았던가?
물론 대서양 연안을 따라 선사시대와 석기시대의 고인돌이
연안을 따라 산재되어 있기도 하고
또한 역사는 BC 7세기경에 너의 허벅지에
철기문화를 갖고 온 켈트족의 진출 및 정착 흔적이
알가르브(Algarve)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미 선주민이 와 있었다고 생각되며
그 선주민과의 결합으로 켈트 이베리아인들이 생겨났고
그 중 한 종족이 루지따니아 (Lusitania)인이라 한다지.
그 루지따니아인이 포르투갈인의 조상으로 간주되는데
이 루주 (Luso)라는 단어는 현대 포르투갈어에도 빈번히 나타난다지.
그 후 그리스나 카르타고 같은 지중해 국가에서 온 집단이
이베리아 반도 해안을 따라 도시를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리스보아며
리스보아의 옛 이름은
고대 그리스의 영웅 율리시즈에서 따온 율리시포 (Ulissipo)라던가?
BC 2세기경에는 로마인이 진출하여
루지따니아인들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전투에서 패했으며 곧 로마 제국에 통합되어
6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로마의 지배를 받아야 하였다지.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어 그 문화적 영향은 엄청났으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포르투갈은 라틴어 계열인 포르투갈어를 쓰며
로마법에 기초한 법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로만 카톨릭교가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이유인거지.
몇 세기 후 로마 제국이 몰락하자 이어서
게르만 인들이 침략하여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왕국을 세웠으나
711년에는 회교도인 무어족의 지배하에 들어가
400여 년간을 코란을 암송하여야 하였다지.
지브랄타 해협을 건너온 그들은
선진의 문화, 건축, 농경법등
발달된 문명과 관대함으로 정착하고자 하였지만
배타적 유일신의 신앙으로 뭉쳐 격렬한 종교적 반감을 가지고 있던
크리스천들이 전쟁을 일으켜
무려 800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다지.
해방전쟁 (Liberation War)라 불리는 이 전쟁은
1492년 아랍인들이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에서 퇴각하면서 막을 내렸다는데...
(3)
포르투갈이여!
그렇게 부침을 거듭했다는데
그 드라마틱한 역사를 잠깐 반추하지 않을 수 없구나.
먼저 너의 포르투갈이란 이름은 어떻게 유래되었던가?
처음에는 도우루(Douro)강 하구에 위치한
칼레(Cale)라는 마을의 항구(라틴어로 포르투스, portus)에서 유래한
포르투스 칼레 (Portus Cale)라고 불려 졌는데
이 마을이 현재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자
유명한 포트와인의 산지인 뽀르뚜 (Porto)가 되었지.
아무튼 뽀르뚜깔르(Portucale)라는
옛 지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미 7세기 이 지역에 대한 역사 기록이 남아있다지.
11세기 초 십자군 전쟁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 왕국들과 이슬람 왕국들이
서로 전쟁을 치르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었다지.
레아웅(Leao)과 까스뗄라(Castela)의 왕인 알퐁소 6세는 그의 딸 떼레자를
1095년 무어족과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프랑스 보르공야(Borgonha)의 귀족과 결혼을 시켰는데
그의 사위의 뽀르뚜깔렌스 백작령의 형성에서 포르투갈의 역사는 시작이 되는 거지.
이 영토는 밍유(Minho) 강과 떼주(Tejo) 강 사이를 포함하였다지.
이 백작령에는 무수한 변화가 일어나 자주 독립에 대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바로 여기서 네가 국가로써 출발하게 되는 것이지.
이제 너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훑어보기로 할까?
[왕국의 탄생 -제1왕조 보르공야(Burgundy1143-1383) 왕조시대]
- 1109 레아웅과 가스뗄라로부터 뽀르뚜깔렌스 백작령 자립 행정권 획득.
- 1111 뽀르뚜깔렌스백작인 보르공야의 동 엔리끄와
도나 떼라자 사이 알퐁수 엔리끄스(Afonso Henriques)탄생.
- 1112 그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알퐁스 엔리끄스는 독립에의 의지를 불태움.
- 1128 그의 어머니, 도나 떼라자의 섭정에 반대 세력을 이끌어 성 마메드전투에서 승리.
-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이슬람 세력을 추방하고자 전쟁을 계속하면서 백작령을 확대해 감.
- 1140 까스뗄라와 전쟁 승리로 레아웅과 가스뗄라 왕국으로부터 독립. Alfonso 1세 초대왕 탄생.
- 이렇게 시작된 포르투갈 왕국은 1910년까지 지속.
1143년부터 1910년까지 포르투갈에는 4 왕조가 있었지만
사실은 초대왕부터 마지막 왕까지 한 핏줄.
대체로 권력은 아버지로부터 장자에게로 이양.
알폰소 1세의 아버지는 프랑스 왕자였고 어머니는 스페인의 공주.
포르투갈 왕들은 대부분 외국의 공주들과 결혼했고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공주들은 외국의 왕이나 왕자와 결혼.
- 1179 레아웅과 가스뗄라의 왕 그리고 교황청에 의해 왕 인정.
- 1249 알퐁스 3세는 알가르브(Algarve : 포르투갈 남부)까지 전 국토를 재정복 무어족 축출.
- 1256 리스본에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 왕국이 탄생.
- 1279~1325 -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동 디니스 왕은 포르투갈의 군사력을 강화.
국경에 50개의 요새를 구축. 농업, 상업, 조선업의 발전 추구. 1288년 최초의 대학을 설립.
- 포르투갈의 제1왕조인 보르공야 왕조의 마지막 왕인 동 훼르난두 사망.
동 훼르난두의 아내 레오노르 뗄르스(Leonor Teles) 왕비는
그 당시 레아웅 왕국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던 까스뗄라의 동 조앙 1세와 외동딸을 결혼시킴.
국민들은 환영 안함. 왜냐하면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기 때문.
- 1357 동 뻬드루 1세의 서자인 메스뜨르 드 아비스를 왕국의 섭정자로 추대.
[신대륙 발견 시대 -제2왕조 오르고 아비스(Aviz, 1385-1580) 왕조 시대]
- 1385 동 조앙이 포르투갈의 동 조앙 1세로서 왕위에 오르고 아비스 왕조 개창.
- 1385 8월에는 알주바호따(Aljubarrotta) 대전투에서 까스뗄라군을 대파, 주권을 확립.
- 1386 포르투갈과 영국 최초로 윈저 조약이 체결.(양국 불가침, 영원불변의 우정 확인)
- 1387 동 조앙 1세는 영국 렝까스뜨르 공작의 딸인 도나 필리빠 드 렝까스뜨르와 결혼함.
- 1394 뽀르뚜에서 포르투갈의 동 조앙 1세와
필리빠 드 렝까스뜨르 사이에 셋째 아들 동 엔리끄(항해자란 뜻)왕자 탄생.
- 1415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한 도시인 쎄우따(Ceuta) 를 정복, 영토 확장의 시초.
- 1419 동 엔리끄 왕자, 포르투갈 남단의 싸그레스(Sagres)에 해양학교를 설립.
- 1418~1427 마데이라섬과 아쏘레스 군도 등 대서양의 무인도를 식민화하기 시작.
- 1437 항해사 질 이아네스(Gil Eanes) 아프리카 연안의 까부 보쟈도르(Cabo Bojador) 항해.
- 1444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까부 베르드에 도착하여 흑인 노예 교역의 시대가 시작.
- 1460 동 엔리끄 왕자가 66세를 나이로 사망.
- 1469 바스코 다 가마가 탄생.
- 1482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자이르강을 통해 아프리카로 진입.
- 1484 동 조앙 2세는 포르투갈의 서쪽으로 항해, 동양까지 갈 수 있으리란 계획을 세웠던
끄리스또바웅 꼴룸부(Ccristovao Columbo)를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
- 1488 바르똘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가 희망봉을 발견 해양국가로써의 위세를 떨침.
- 1494 포르투갈과 까스뗄라가 남미대륙 분할협정인 또르데질냐스(Tordesillas)조약을 체결.
스페인이 아프리카 까부 베르드 섬의 서쪽으로 370레구아스 떨어진
자오선의 서쪽에 위치한 모든 지역에 대한 탐험의 권리를 갖고
포르투갈은 자오선 동쪽의 탐험지역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데 동의.
바로 이렇게 해서 포르투갈인들에게 할당된 동부 지역에 브라질이 속하게 됨.
많은 사학자들은 포르투갈이 이미 남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이 조약의 체결 이전에 미리 알고 있었으리라고 추정.
- 1496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추방에 이어 포르투갈도 자국 영토 내에서 유태인을 추방.
- 1497~1498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리스본에서 인도로 출항.
희망봉을 돌아 모잠비크를 지나 마침내 인도에 도착.
인도양의 무역 통제권을 가졌으며 호르무즈, 말라카, 고아 같은 전략요충지를 점령.
- 1500 뻬드루 알바르스 까브랄(Cabral)이 브라질에 도착(공식적인 브라질 발견).
- 1510 포르투갈은 인도 남서쪽의 고아를 합병.
- 1515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해상권을 장악.
- 1519 훼르나웅 드 마갈양이스(Magalhaes, Magellan) 스페인 국왕의 명령으로
세계를 최초로 횡단 항해. 1522년 필리핀에서 사망.
- 1521~1557 동 조앙 3세 통치시대로 탐험 경비 자제로 쇠퇴기 접어듦..
- 1536~1558 종교재판이 활발히 이루어짐.
- 1557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로 진출하기 시작.
- 1572 루이스 드 까몽이스의 서사시 <우스 루지 아다스 designtimesp=31410>(Os Lusiadas)가
리스본에서 출간. 이 서사시는 포르투갈인들의 항해를 영원불멸의 공적으로 승화.
[공위기간 -제3왕조 Habsburg 왕조시대]
- 1580~1640 60년간 스페인의 지배 = 한국이 삼도에 지배당한 30년간의 역사와 너무나 닮음.
- 1578 쎄바스띠아웅 국왕 아프리카 북부의 알까세르 끼비르 전투에서 사망.
왕위를 계승할 자가 없게 되자 포르투갈은 왕위 계승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게 되고,
스페인의 필립 2세 왕이 포르투갈 왕으로서 추대.
60년 동안 필립 왕조가 포르투갈을 지배, 1640년 국가 복원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
[나폴레옹 침입 -제4왕조 브라간싸(Braganza, 1640-1910) 왕조시대]
- 1640~1656 브라간싸(Braganza) 공작 동 조앙은 동 조앙 4세의 이름으로 통치.
스페인과의 격렬한 전쟁이 계속되었고 포르투갈 독립의 명분으로 영국의 지원이 이루어짐.
해외 영토의 지나친 확장은 포르투갈이 더 이상 모든 영토를 유지하지 못하게 함.
포르투갈은 브라질에만 집중. 아시아의 도시와 성 너무 멀어 방어하기가 거의 불가능.
그 대부분은 네덜란드로 넘어갔고 (콜롬보, 말라카 등) 봄베이는 영국으로 넘어갔으며
포르투갈은 고아, 마카오와 티모르만을 유지.
한편 브라질은 18세기 초 금과 다이아몬드의 발견으로 눈부시게 발전.
- 1706~1750 동 조앙 5세의 통치 기간.
다시 한번 브라질로부터 유입된 금으로 인해 부강. 수많은 대형 건물과 궁전이 건축되고,
산업과 상업분야(섬유, 유리, 포도주 그리고 도자기 부문) 에서 눈부신 발전.
- 1755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발생. 리스보아 2/3 파괴로 폐허로 변하게 되고
3만 명 이상이 사망. 위대한 지도자 Marques de Pombal 백작 통치하에 도시를 재건.
- 1755~1777 뽕발 후작에게 왕국의 통치권을 위임한 동 주제 1세의 재위기간.
뽕발 후작은 포르투갈내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강화하고자 노력.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에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던 예수회 신부들도 추방.
- 1756 포르투갈이 프랑스보다 100년 앞서서 뽀르뚜 와인 생산지를 설정.
세계에서 최초 '포도주 전용 생산지' 개념을 도입.
- 1793~1810 3차례에 걸쳐 프랑스 나폴레옹군의 침공.
1386년 포르투갈과 영국간에 우호조약 때문에 포르투갈은 영국을 적국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하는 프랑스에 맞서 어쩔 수 없는 전쟁.
결과적으로 포르투갈 전국은 초토화되는 전쟁터로 전락.
- 1793 포르투갈은 나폴레옹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에 합류.
- 1801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올리벵싸를 빼앗김.
- 1807 주노(Junot)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포르투갈을 침공. 왕족은 브라질로 피난.
- 1808 웰링턴(Wellington) 장군, 영국군 포르투갈군 지원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도착.
- 1810 포르투갈과 영국 연합군 꼬잉브라의 북부지역 부사꾸(Bucaco) 전투 프랑스군 대파.
- 1811 프랑스 군대를 격퇴시킨 후 브라질로 왕족이 피난 간 상황에서
영국의 윌리엄 가트 브레스포드 지휘관은 실질적으로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장악.
- 1817~1820 포르투갈의 자유주의 운동이 포르투갈 내 영국 세력에 반발하여 반란.
- 1820~1822 자유주의 신헌법이 왕실에 의해 공인.
국왕 동 조앙 6세는 도나 까를로따 왕비와 막내아들과 함께 브라질로부터 귀국.
동 뻬드루 왕세자는 브라질에 잔류.
국왕이 신헌법을 승인하게 되어, 도나 까를로따 왕비와 아들 동 미구엘은 유배 안 됨.
- 1822 동 뻬드루는 브라질에서 브라질의 독립을 선포.
- 1825~1834 동 조앙 6세가 사망.
브라질의 국왕 동 뻬드루 왕자는 동시에 포르투갈의 국왕 선포.
새로운 헌법을 선포한 이후에 동 뻬드루는 포르투갈의 왕위를 거절하고
그의 딸 마리아 다 글로리아(Maria da Gloria)가 왕위를 맡을 충분한 나이가 될 때까지
나라의 섭정을 그의 동생에게 맡김. 동 미구엘은 수락하기는 하나
곧 자유주의 헌법을 무효화하고 절대왕정주의로 복귀.
이에 동 뻬드루는 브라질의 왕위를 포기하고
동생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포르투갈로 돌아옴.
두 군대가 벌인 전쟁은 동 뻬드루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그는 얼마 후 포르투갈 역사상 마리아 2세로 알려진 딸 도나 마리아에게 양위하고 사망.
- 1861~1869 루이스 1세의 통치기간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번갈아 권력을 잡음.
- 1908 동 까를루스 1세 왕은 그의 아들 루이스 필리쁘 왕자와 함께 살해당함.
그의 둘째 아들 동 까를루스가 동 마누엘 2세의 이름으로 왕위에 오름.
[제 1공화국 시대(1910-1926)]
- 1910 내전으로부터 구원하고자 동 마누엘 2세 왕 영국으로 망명. 공화정 선포.
- 1932년 동 마누엘 2세 사망.
- 1910년부터 1926년까지 16년간 45차례나 정권이 교체
- 1916 연합군측에 합류, 제1차대전에 참가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공격했던 독일군대와 전쟁.
- 1917~1922 전쟁은 포르투갈의 경제적, 재정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악화.
[제 2공화국 시대(1926-1974)]
- 1926 군사 반란이 일어나 정부를 전복. 군부 쿠데타으로 Salazar 재무장관 등장
- 1928 꼬잉브라대 경제학교수 쌀라자르(Antonio de Oliveira Salazar) 재무장관으로 임명.
그는 긴축 정책과 엄격한 재정정치를 펴서 성과를 거둠.
- 1932~1968 쌀라자르는 수상으로 임명.
신국가(Estado Novo)를 선도. 이 정부는 군사 독재적 권력체제를 구축.
- 1939~1945 포르투갈은 영국과 미국에게 포르투갈령 아쏘레스섬을
그들의 공군 기지로 사용하도록 허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대전 중에는 중립을 지킴.
- 1949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창설멤버.
- 1961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 다마웅, 디우를 상실.
- 1968 쌀라자르는 뇌에 부상을 입은 후 정권에서 물러남.
마르쎌루 까에따누(Marcelo Caetano)는 쌀라자르의 정치를 승낙하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만족시키지는 못함.
- 1970 쌀라자르가 사망.
[제 3공화국 시대(1974-)]
- 1974 4월 25일 혁명이 발생. 군인들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려
(상징적으로 국민들이 군인들의 무기에 붉은 카네이션을 달아 줌) 다수당 민주정부 수립..
- 1974~1975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네 비싸우, 성 또메 이 쁘린씨쁘
그리고 까부 베르드등의 식민지를 포기. 식민지 거주 인구중 50만명 이상이 귀환.
- 1975 티모르의 탈 식민지화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영토침략으로 인해 중단.
- 1986 포르투갈은 마리우 쏘아레스가 포르투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EU 가입 및 60년 만에 최초의 민선 대통령(Mario Soares)이 탄생(86. 2).
- 1992 포르투갈은 유럽연합의 회장직을 맡음.
- 1994 리스본은 유럽의 문화 수도로 지정.
(4)
이렇게 유구한 세월 속에
너의 역사를 음미하여 보니
우리의 역사와 너무도 많이 닮았구나.
우리의 삼국시대 건국설화가 시작될 무렵 너의 역사가 시작되는 모습과
외래종교인 이슬람이 전래되어 국교적인 종교가 되는 모습은
애니미즘에 젖어있던 때 불교가 들어와 국교가 되는 모습과 너무도 닮았구나.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켈트인, 로마인, 게르만인, 서고트인, 무어인 등
외래 민족이 끊임없는 침입하는 모습과 스페인의 식민지배, 나폴레옹의 침입등도
우리의 수, 당, 돌궐, 여진, 왜등 이민족 침입과
몽고의 유린, 임진왜란, 그리고 일제 36년 등과 너무도 닮았구나.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스페인과 접해있고,
서쪽은 대서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도 그렇고,
대서양의 영향을 받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도 그렇고,
무어인을 몰아내고 해양을 제패하는 모습은 우리의 환국 12연방이나
배달국, 그리고 고구려의 장쾌한 모습과 너무도 닮았구나.
더구나 남한만한 땅 넓이에서 1,000만이란 인구가 민주공화국으로 귀결된
작금의 실정도 너무도 닮아 있구나.
(5)
그러한 포르투갈의 핵(核)인 리스보아여!
너는 누구인가?
“맑은 물, 좋은 물이 고이는 웅덩이”라는 뜻의 너는
1255년 코임브라에서 너에게로 수도를 옮긴 뒤 지금까지 이어지는 너는
바다가 바로 코앞이어서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아 드넓은 강폭을 자랑하며
바다를 향해 너의 큰 가슴을 열어 놓고 있구나.
알폰소 3세가 국토회복을 완료하고 1243년 수도로 정한 뒤
15C 중엽부터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전성기의 중심지로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 들어오는 재물들로 인해
16세기에는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졌다지.
그러나 너는 1755년의 대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 해일 등으로 시가지의 2/3 이상이 파괴되어 버렸는데,
퐁발 후작의 힘으로 부흥을 도모하여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한 신시가지가 조성되었다지.
그러나 지금
굽이쳐 흐르는 언덕들과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좁다란 골목길을 돌아
높다란 돌계단을 따라 지어진 흰 벽돌집들을 지나며
예쁜 발코니로 고개를 쏙 내민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집집마다 걸린 빨래 행렬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리스본은 낭만의 도시로 느껴지지.
단 6초 동안 일어난 1755년 대지진은 알파마 지구를 제외하고
도시의 모든 것들을 잿더미로 바꿔 버렸지.
오늘날까지 리스본에서 가장 예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알파마 지구는
로마 시대부터 리스본의 중심지였고
대항해 시대에도 왕과 귀족들의 별장이 있었을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하지.
덜컹거리는 전차를 타고 알파마 지구에 올라서면 리스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지.
특히 상타 루시아 전망대와 샹 조르제 성 위에 오르면
발 아래로 울긋불긋한 지붕들과 황금 빛으로 반짝이는 테주 강,
하얀 궤적을 그리며 달리는 선박과 유럽에서 길이가 가장 긴 `4월 25일 다리(2.278m)`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질거야.
차분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너는 15세기 해양의 시대였을 때는 유럽의 중심부였지만
그러나 지금의 리스본은 더 이상 유럽의 중심부는 아니라지.
비록 너도 이제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인파와 소음, 교통체증으로 부산하긴 하지만,
낮은 스카이라인과 드넓은 떼주강(Rio Tejo)의 풍광과
지중해성 기후는 소박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지.
하지만 옛 파사데스(Facades)양식이
재개발의 열풍속에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지.
너는 떼주강 하구에 자리한 로시오(Rossio)를 정점으로 하는
바이샤(Baixa)를 중심에 두고
동편에는 고풍스러운 미로가 얽혀있는 알파마(Alfama)와
서고트족의 전성기에 지어진 너를 전망하기에 좋은
조르제성(Castelo de S o Jorge),
서쪽에는 음악과 낭만이 깃든 바이루알토(Bairro Alto),
그리고 벨렘(Belem)은 해양제국의 흔적 남기고 있는데
이 도시에서 가장 멋진
1496년 지어진 제로니모 수도원(Jeronimos Monastery)이 있다지.
(6)
이러한 상념에 잠겨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비행기는 이제 리스보아 상공으로 접어들며
기수를 현저하게 곤두박질친다.
저 아래로 강인지 바다인지 거대한 물바다가 보인다.
지나는 젊은 스튜어디스 청년을 불러 물어보니 강(Rio Tejo)이란다.
그도 동양인인 내가 신기한지
옆 좌석에 앉아서 한동안 그와 대화를 하였다.
그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포르투갈로 오게 되었단다.
그의 국적은 캐나다이며 포르투갈 영주권을 갖고 있단다.
포르투갈의 넉넉한 인심은
이렇게 유럽 사람들의 이상향으로 간주되는 모양이다.
그 강줄기를 따라 비행기가 하강을 하고 있었는데
기다란 다리 하나가 나타나 그에게 물어보니
17km로 유럽에서 제일 길다는 "바스코 다 가마 다리"란다.
그리고 그 청년은 포르투갈은 이태리나 스페인보다 1시간 느린
영국 표준시를 채택한다고 알려준다.
스페인이 중부 유럽적 성향을 지녔다면
포르투갈은 지정학적으로 영국과 가까워 영국의 분위기를 닮아있고
따라서 표준시도 영국을 따른다고 했다.
시계를 한 시간 후퇴하고 공항에 내리니 사방이 깜깜한 한밤중이다.
그런데 마중 나온 현지 안내인이 여성이다.
그 여성의 안내로 리스보아 초입의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거기서 탕수육, 해물 등으로 요기하고 있는데
일단의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온다.
일가족인 듯한데 가족들 중 근엄하고 연로하신 분이 중앙에 앉아 있었다.
눈치를 보니 그 분의 생신인 모양이다.
케이크를 자르고 생일 축가를 부르고 우리네와 너무도 닮았다.
식후에 조금 이동하니 시내 중심부인데 미국 대사관 앞이다.
아랍의 테러로 경비가 삼엄하다.
거리의 야자수, 종려나무등
가로수가 대서양과 인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호텔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Holiday Inn"이란 호텔로
리스보아 중신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저기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도무지 시내 같지 않고 외곽지역 같다.
아침조깅을 위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다.
(7)
아침 눈을 뜨니 2004/4/20 05:30분이다.
어제 호텔로 오면서 보아둔 공원길을 따라 달려 보았다.
여기도 조깅족은 한사람도 없다.
이렇게 훌륭한 공원길의 새벽을 놓아두다니
포르투갈 사람들도 어지간히 느긋한 삶을 살아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엔 몰랐는데 차도 옆의 보도가
온통 손바닥의 절반도 안 되는 사금파리 같은 돌타일로 치장되어 있다.
로마의 바티칸 앞 시가지에도
피렌쩨에도 폼페이의 거리에도 마드리드에도
돌타일이 있지만 분명 자잘한 이곳 것과는 달랐다.
그러한 돌타일은 일부 구간이 아니고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어떤 곳은 검은 돌, 흰 돌, 초콜릿 돌, 녹색 돌로 문양까지 연출하고 있다.
어찌 보면 모자이크로 치장한 아랍풍으로 보이는데 대단한 정성이다.
나중에 안 일지만 포르투갈이 해양대국으로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세계 각지에서 잡아온 노예들로 리스보아가 넘쳐날 때
그 노예들로 하여금 돌타일을 깔게 했는데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오는 공법이란다.
지금도 돌타일을 까는 장인(匠人)들 대부분이 흑인이라니
옛부터 세습되었는가 보다.
또한 리스보아 도시 전역에는 지진 당시 붕괴된
건물 잔재(주로 대리석)를 일정 크기로 조각내어
도로 포장재 등으로 재활용한 것이 인상적이었고,
각종 기하학 무늬로 모자이크해 놓은 人道의 모습과
大航海 시대를 회상하는 각종 기념물에서는
옛 영화를 꿈꾸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한 돌타일 거리는 고풍스런 건물들과 어울려
한껏 거리의 분위기를 색다르게 한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20 이름 없는 풀뿌리 나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