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해외여행산행

2004 유럽 여행 시조[26-30] -톨레도-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28. 14:50
요즈음 – 2004 유럽 여행 시조[26-30] 톨레도– 26. 톨레도(TOLEDO)에서 ①전망대 분명코 동화(童話)에서 보았던 풍경이다. 젊은 날, 꿈속에서 가보았던 곳이다. 지금도 삼만(三萬)의 사람들, 그 속에서 살고 있다. 27. 톨레도(TOLEDO)에서 ②까떼드랄(Catedral) 대성당 정교(精巧)한 웅장함은 두오모를 능가하고 열주(列柱)의 회당 안에 황금보물 현란한데 귓가에 사역(使役)의 신음 쟁쟁하게 울려온다. 28. 톨레도(TOLEDO)에서 ③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신실한 믿음으로 기꺼이 헌신하신 백작의 아름다운 전설 잊혀질까 두렵다. 위대한 엘 그레꼬(EL GRECO)여! 그대 붓으로 전하라! 29. 톨레도(TOLEDO)에서 ④산마르틴(SAN MARTIN)다리1 돌 날라 수 백년간 쌓아올린 대성당 타호강 건너야만 지을 수가 있었으니 아뿔싸! 잘못된 계산, 건축가의 고뇌여! 30. 톨레도(TOLEDO)에서 ⑤산 마르틴(SAN MARTIN)다리2 허물고 다시 짓는다면 세상이 비웃을 터 지아비의 불면의 밤, 옆에서 지켜보다가 남몰래 불 질러 버린 지어미의 기지여!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8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마드리드에서 톨레도 가는 길 1-1.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톨레도로 가던 알깔라문 1-2. 톨레도 가는 길의 주변 풍광 1-2. 톨레도 가는 도중 마드리드 외곽에 AD2세기(로마시대) 건설한 수도교가 보였다. 2. 톨레도에서 2-1. 초입 전망대에서 본 톨레도 전경 2-2. 타호강변에 근접하여 본 톨레도 근경 2-3. 초입의 성문 2-4. 태양의 문 2-5. 산토 또메교회에 있는 엘그레꼬 作 “오르가스백작의 매장” 2-6. 톨레도 중심의 소꼬도베르 광장, 깃발 꽂은 건물이 1000년 된 시청 2-7. 광장에 있는 까떼드랄 대성당 2-8. 금으로 도배한 성당내부 천정 – 식민지 수탈 상징 2-9. 대성당에 진열한 중세의 마차(이외에도 많은 진열품 있슴) 2-10. 산타크루즈미술관 / 비사그라 2-11. 알카사르 요새 2-12. 산마르틴 다리 / 알깐다라 다리 2-13. 톨레도는 금, 은 세공품이 발달 2-14. 톨레도 부분 근경 덧붙임) (1) 아리랑 식당에서 점심 식사 후 다시 마드리드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70여 km의 古都 톨레도로 향했다. 버스로 지나는데 거대한 석조문이 보인다. 알깔라문(Puerta de Alcala)이라 한다는데 건너편이 바로 레티로 공원 입구였다. 그런데 오전에는 왜 안보였는지 모르겠다. 이 문을 통하여 옛사람들이 톨레도로 갔다고 하여 톨레도문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알깔라문은 독립광장에 우뚝 서 있는 교통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알깔라문의 아치는 1778년 까를로스 3세 때 만들어진 것이며 이탈리아의 건축가 Francesco Sabatini가 디자인 하였다. 현재 이것은 스페인 번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저녁이 되면 이곳은 도심한복판의 아름다운 야경을 제공하는 곳으로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사진에는 종종 알깔라문의 야경이 등장한다. (2) 조금 달리니 마드리드 교외의 풍경이 펼쳐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원이다. 해발 600여 미터의 고원에 마드리드가 위치하여 교외지역에 가면 산을 만날 줄 알았는데 이베리아 반도의 거대한 고원지대에 스페인이 위치하고 있는지 평원의 연속이다. 끝없는 평원은 마치 서부활극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광야와 같았다. 이러한 풍광이 스페인 사람들로 하여금 정열적인 플라멩고 춤과 투우에 몰두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나타나는 구릉에 유까리나무와 예의 버섯구름 같은 수형(樹型)을 자랑하는 남유럽송이 어우러진 숲의 나뭇잎이 바람에 젖혀지며 허연 배때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도 농사만으로는 타산이 안 맞는지 폐허가 된 농가며 잡초에 묻힌 들녘도 보인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이름모를 봄꽃이 지천으로 만발해 있다. 톨레도로 가는 길은 그렇게 황량한 산야와 오렌지 밭과 밀밭 초원, 숲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고속도로 옆의 나지막한 언덕의 능선에는 검정소 그림을 그린 선전 간판이 세워져 있다. 투우를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다. 한 시간만에 톨레도 나들목으로 접어드니 고풍스런 산중도시가 나타났다. 건물들은 한결같이 아치를 튼 황토색 벽담과 자잘한 갈색 기와를 얹은 지붕으로 장식한 아랍풍이다. 톨레도는 그렇게 파란하늘과 깊은 계곡 사이의 굽이치는 강줄기에 갇혀 천애의 절벽 위에 오렌지색의 요새로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3) 톨레도(Toledo)여! 너는 누구인가? 마드리드에서 승용차로 1시간여 거리(70km)에 있는 너는 3면이 따호(Taho)강에 둘러싸인 절벽위에 자리한 천혜의 요새로 BC 2세기 로마의 식민도시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지.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지금도 3만 명이란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도시라던가? 711년부터 400여 년간이나 이슬람인 들이 지배하여 아랍풍과 유럽풍이 한바탕 어우러진 굿마당이라던가? 1085년 알폰소6세가 다시 발을 딛고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던 1492년에 이슬람을 완전 추방하기까지 회교도와 유태인들이 지방 경제권을 좌지우지 했기에 지금도 이국적 풍물이 넘쳐나는 곳! 1560년 펠리페 2세의 마드리드 천도 전까지 에스파냐 왕국의 수도로써 지금은 철천지원수로 싸우는 아브라함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예인 아랍인과 유태인들이 골목골목 아래윗집으로 오순도순 살아가던 곳!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라만차 지역 자치구의 주도(州都)이기도 한 너는 스페인 남부의 중심지로서 198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도시로 지정되었다지. 좁고 복잡한 거리들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장구한 역사 속에 형성된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너! 이러한 역사적인 변화를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 성채(Alcazar)라는데 이곳은 너의 가장 아름다운 유적으로 총 네 개의 탑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지. 성채는 14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서고트인, 무슬람,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수차례 재건설 되었다지. 또한 스페인 내란동안 파시스트들에 의해 점령되어 파괴를 많이 받은 곳이기도 하다지. 비록 지금 마드리드에 정치와 경제의 수도를 내주었지만 아직도 스페인 카톨릭의 총본산인 똘레도 대성당은 길이 113m, 폭 57m, 중앙의 높이가 45m를 고딕풍으로 페르난도 3세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설계자들의 참여로 1226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266년 공사기간을 거쳐 1493년에 완공했다지. 세계4대 성당이라 불리우는 성 베드로, 세인트폴, 쾰른, 밀라노 두오모에 견줄 만큼 거대한 성경책으로 펼쳐져 있구나. 수차례 증개축을 했고 지금도 수리를 하고 있지만 기본 골격은 변함이 없다지. (4) 이런 생각을 하며 성채를 한바퀴 돌아 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언덕에 올라 조망을 하고 건물의 외벽에 부딪힐듯 말듯 자동차 한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돌아가니 아랍문양이 알알이 아로새겨진 담벼락들을 정신없이 감상하는 사이 까떼드랄 대성당 광장에 도착하였다. 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은 장엄하면서도 화려했다. 전형적인 고딕식 건축물답게 정면에 대칭되는 두 개의 거대한 탑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하늘을 향해 발사될 것 만같은 높은 첨탑이었는데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한 지붕 장식이 인상적이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또 다른 탑은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애를 보낸 세계적인 화가 엘그레꼬의 아들이 세웠다는 8각형의 돔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 무려 18톤이나 되는 종이 들어있다고 하니 울려 퍼질 종소리의 울림이 어떨지 궁금하여 당장이라도 올라가 한번 쳐보고 싶다. 각기 다른 두 첨탑 사이로 밀라노의 두오모처럼 전면 벽에 다양한 성상들을 조각해놓은 본관이 있다. 특히 본관 중앙에 있는 면죄의 문, 왼쪽의 시계의 문, 오른쪽의 사자의 문 등 3군데로 나누어져 있는 성당입구가 이색적이다. 이 문은 교황이 이곳을 방문할 때에만 열린다 한다. (5) 대사원의 내부는 22곳에 달하는 예배당과 신약 성경과 성도를 주제로 한 스테인드글라스, 보물실(Sala del Tesoro)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물실의 보물들은 16세기 엔리께 알화라는 장인(匠人)이 스페인 황금기에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순금으로 만든 높이 3m, 200kg의 금. 은. 보석으로 정교하게 만든 성병헌치대와 주교들의 관과 의상, 성궤 등이 있었는데 그러한 수탈의 대가로 이루어진 성전이라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생각하니 고개가 갸웃해진다. 지금 남아있는 유물이 이 정도라면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세계의 보물이 그들이 말했던 야만의 땅에서 수탈되고 야만인들의 인권이 얼마나 유린되었는지 가히 짐작할만 하다 하겠다. 대성당 내부는 웅장한 열주(列柱), 스테인 글라스, 주교들의 무덤 등으로 장식한 형식이 밀라노 두오모와 비슷했는데 유물은 밀라노보다 훨씬 많았고 보관상태도 아주 좋았다. 성당내부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적당한 어둠은 자기자신의 죄이식을 덮어주어 편안하게 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들어오는 빛만이 어둔 성당을 밝혀주고 있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기도소리와 함께 더욱 숙연해지는 느낌을 준다. 성당 한켠의 성기실(聖器室, Sacristia)에는 엘그레코의 성화와 주교들의 의상이 줄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습으로 보건데 서구인들의 문화유산 보존 정신은 남다르다 하겠다. 우리의 경우 아무리 전란이 많았다지만 고려나 이조 시대 왕실의 의상, 유물들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는가? 유적들이래야 봉정사 극락전등 절간 건물 몇 채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래! 우리는 풀, 나무등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써서 건축을 했기에 기고만장한 승리자들은 구정권의 유물을 파괴하기에 손쉬웠겠지라고 자위해 본다. 하지만 백제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열배는 됨직한 대성당의 성궤같은 유물이 부지기수로 온전히 잔존함은 그들의 철두철미한 문화유산보존정신을 알아줘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라고 왜 전란이 없었고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전혀 이질적인 회교도들이 지배했었고 그들과 수백년을 엎치락뒤치락 싸웠지만 회교문화라고 배척하기에 앞서 그들과 결합하고 존중하고 보존함으로써 오늘날의 톨레도가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6) 대성당을 나오니 소꼬도베르 광장(plaza de zocodover)에 수학여행을 온 듯한 스페인 학생들이 앉아있었다. 톨레도는 그들에게도 탐방하고 싶은 여행지의 한곳인가보다. 또한 일단의 일본 관광객들이 있었는데 다들 귀에 이어폰을 꼿고 있었다. 자세히 살피니 여행단 전원이 이어폰으로 서로 연락을 취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우리들은 일행 중 한사람이 뒤쳐지거나 가게등지에서 나오지 않아 행방불명이 될 경우 그 사람을 찾을 때까지 일행이 꼼짝할 수 없는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보니 첨단기기로 무장된 삼도인들이 부럽다기보다는 인정미가 없는 로봇군단같이 보이기도 했다. 광장의 커다란 나무 한그루 뒤로 옛 시청 건물에 스페인기가 걸려있어 물어보니 아직도 톨레도 시청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000년 된 건물에서 지금껏 그 용도로 사용한다는 사실 - 감격이다. (7) 광장에서 동네의 골목을 돌고 돌아 자그마한 교회 앞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열 지어 서있다. 산토 토메(Igesia de Santo Tome)라는 교회였는데 여기에는 1586년에 완성된 엘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Entierro del Conde de Orgaz)"라는 그림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이스 크레타 섬 출신의 엘그레꼬(El Greco)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로 너무 길어 스페인 사람들이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그레코로 부른 것이 이름으로 굳어졌단다. 그가 베네치아에서 V.티치아노의 지도로 그림수업을 할 때 바로 이곳 산또또메성당 주교의 아들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를 따라 놀러왔다가 톨레도의 풍광에 반하여 여기에 눌러앉게 되었는데 그때 바로 이 교회에 내려오는 오르가스 백작의 전설을 듣게 되었단다. 오르가스 백작은 불쌍한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거액의 찬조금을 교회에 내놓는 등의 선행을 하였는데 이 그림은 그러한 백작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길이 보전하고자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상하 2단으로 나뉘어 있으며 상단부는 천상계를 하단부는 지상계를 상징하고 있다. 하단부는 성 아우구스틴과 성 에스테반이 지상에 내려와 죽은 백작을 매장하고 있는 장면이며, 그 주변 인물들은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상단부는 구름위의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에게 백작의 혼이 천사의 팔에 감싸져 바쳐지는 모습이며 이는 오르가스 백작의 혼을 표현한 것이다. (8) 톨레도에는 이밖에도 알까사르요새, 알그레고의 집등이 있다는데 일정에 쫏겨 가보지는 못하고 산토토메교회 아래 창문에 빨래가 줄줄이 널려있고 개똥이 즐비한 골목길을 돌아 내려왔다. 골목길의 집들은 온통 토산품가게인데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무기의 제조가 발달해서인지 여기저기 중세시대의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칼이나 갑옷, 투구 등 수공제품 가게들이 많았다. 햇빛에 반사되는 검의 예리한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유난히 눈부신 빛을 내뿜는 검을 집어 카멜롯의 전설에 빠져들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칼과 갑옷들도 여기서 만들어졌단다. 디자인은 뉴질랜드의 갑옷장이 했지만 제작은 모두 여기 톨레도에서 이뤄졌단다. 톨레도의 금속가공 기술은 예나 지금이나 세계 최고라고 한다. 두 건물사이의 오래된 골목길에서 양손을 뻗으면 두 벽에 닿는 손끝에서 과거의 흔적이 느껴진다. 손끝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중세의 향기는 어느새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과거 이 지역에 살았던 무어인의 자손인 회교도들과 경제권을 쥐고 있던 유태인들 그리고 그들을 몰아낸 스페인 기독교도들의 숨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그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손끝에 묻어날 것 같다. 오랜 시간의 흐름과 급속한 경제의 발전은 도시 전체를 한순간에 바꾸어 놓을 수 있다. 하지만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시내에 있는 건물의 개조를 금지시킨 이들의 노력이 오늘날 똘레도와 같은 세계적인 역사의 도시를 만든 추춧돌이 아닌가 싶다. 과거의 문화와 유적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 오랜 역사의 정취를 한껏 맛볼 수 있는 이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도시의 톨레도 시민들답게 저마다 무척이나 친절했다. 이곳에선 마드리드의 떼강도나 소매치기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정지해버린 시계마냥 건물과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았다. 여기저기 무너진 흔적이 남아있는 별 볼일 없는 유적에서조차 과거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 위에 걸터앉거나 밟고 걷는 움직임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시간 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9) 골목길을 내려오니 타호 강이 넘실대는 절벽의 양쪽을 연결한 다리가 보인다. 나중에 안 일인데 타호 강은 이베리아 고원의 중심에서 발원하여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가서는 떼주강으로 불리워지며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한다. 일명 알칸다라다리(Puente de Alcantara)인데 이 다리에는 일화가 있단다. 아랍에서 온 어느 교량 설계 전문가가 설계하여 이 다리를 어느 정도 완성했는데 이 건축가는 다리의 완공을 앞두고야 설계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단다. 즉 톨레도의 대성당을 짓기 위해서는 우마차에 거대한 대리석을 싣고 이 다리를 건너 다녀야만 하는데 이럴 경우 이 다리는 그러한 하중을 오래 견디지 못할 정도로 설계되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적재하중은 계산하지 않고 사람의 하중만 고려한 인도교로만 설계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건축가는 이로 인하여 많은 재정이 들어간 교량을 다시 짓겠다고 선언할 수도 없고 그러자니 교량전문가라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 자명하고 그대로 묻어두고 가자니 붕괴사고가 일어날 것은 뻔하고 어찌되었던 그래서 잠을 못자고 고민하다보니 피골이 상접하여 헛소리까지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러한 사연을 잠결에 중얼거리는 소리를 엿듣게 된 그의 아내가 묘안을 짜내게 되었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는데 이 다리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교량 전문가는 그렇게 불사른 다리를 다시 설계하여 축조했단다. 그리하여서리 대성당을 짓는 돌들을 나르고도 오늘날까지 끄떡없이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10) 알깐다라 다리를 뒤로 톨레도를 떠나 수공예품집에 들러 선물용 목걸이와 팔찌류를 샀다. 톨레도는 예부터 금속류(총기, 목걸이, 반지등)수공예업이 발달했단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톨레도 입구에 기차역이 있었는데 마드리드에서 이곳 톨레도까지 기차가 운행되며 1시간가량 걸린다고 한다. 여기에도 중국음식점이 침투해 있고, 기아와 삼성의 광고 입간판이 보인다. 저녁에는 플라멩고 감상이 있어 숙소에 돌아가 저녁을 먹었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8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