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배달9200/개천5901/단기4336/서기2003≫일까? -나강하-
저는 반드시 ≪배달/개천/단기/서기≫를 쓰는데
궁금한 분들이 많으리라 사료되어 올리는 글이오니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결코 현학연(衒學然)하기 위하여 쓰는 글이 아닙니다.
골수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의 궤변이 아닙니다.
우리의 것을 알고자, 조금이라도 알려드리고자
저도 공부하면서 올리는 글입니다.
㈎ 서언
이 말씀을 올리기 전에
우리나라 사학계의 통탄할 만한 흐름을 언급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왜곡된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알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평소에 역사와 관련된 글들을 즐겨 읽던 중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는 경악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우리 배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음에도 갖은 외침에
철저히 말살되고 변질되어 왔습니다.
㈏ 죽은 역사, 잃어 버린 역사
그러면 그렇게 말살되고 변질된 원인은 무었일까요?
첫 번째로 찬란한 환국, 배달, 단군 조선의 역사를 계승한 고구려 역사가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소멸됨으로 해모수와 주몽이 일으킨 배달민족 북방의 역사가 변질 왜곡되었고, 중국, 왜에까지 영역을 둔 해상왕국 백제(百家濟海)가 역시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함으로 인한 온조와 비류가 일으킨 배달민족 남방의 역사가 그들의 철저한 노략질과 파괴로 거의 남아나지 못하고 멸실된 사실에 있습니다. 유적, 유물은 철저히 초토화 되었고 왕궁은 메워졌으며 정통 국사서인 유기, 신집, 서기등은 불태워졌습니다. 겨우 그들의 역사를 호태왕비나 장군총, 벽화, 금동향로, 무녕왕능등 유물로 더듬어 볼 뿐입니다. 옛적에는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 나라 백성은 거의 노예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기계와 장치(자동차, 전기, 가스등)가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예전에는 노예가 그 모든 일을 해내야 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역사는 노예의 역사라고까지 하지 않습니까? 곧 전승국은 패전국의 백성을 전리품으로 취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의 시대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하면서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문무 고관 88명과 백성 1만 2천 8백 7명을 포로로 잡아갔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12만명 이상이 끌려갔다고도 합니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당은 고구려인의 토착 기반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보장왕과 왕자, 대신 등 20여 만명을 중국의 강남, 회남, 산남 등으로 끌고 가 여러 주로 강제 분산시켰다고 합니다. 백제에서 끌려간 의자왕은 울화병으로 죽어 북망산에 묻히고, 고구려에서 끌려간 보장왕의 뒷소식은 알 수 없고, 다만 고구려 포로의 후손중 고선지와 이정기 장군이 후에 중국에서 출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배달족 포로들은 미개척지인 남방(안남)지방 개발에 동원 됐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변방의 개척도 필요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배달족을 당나라 수도 장안에 모아 놓음으로써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태국 메콩강 상류의 골든 트라이앵글이라는 오지에 씨족단위로 이어져 오는데 풍습, 습관, 언어가 우리와 너무나 유사하여 한국사람이 3일 정도만 머무르면 대화가 통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환국, 배달, 단군 조선의 계승국가인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면서 상고시대의 역사가 사라졌습니다. 다만 극히 일부의 기록이 재가 사가들에 의하여 심산유곡에 메아리로 전해져 왔습니다.
두 번째는 고려의 숭불(崇佛)정책의 영향으로 인하여 우리 고유의 풍습, 문화가 불교화 되면서 왜곡이 이루어 졌습니다. 김부식, 일연등은 우리 고유의 풍월도(風月道)를 유교적으로, 불교적으로 변질시켰고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재가(在家) 사서(史書)를 무시하고 통일 국가인 신라 위주의 삼국사기, 삼국 유사를 저술하여 더욱 우리 역사를 중국의 변방으로 자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일례로 47대, 2096년간 이어온 단군 조선을 삼국사기에서는 언급조차하지 않고 삼국유사에서는 그나마 언급은 하였지만 1500년간 단군왕검 일개인의 역사로 축소한 사실입니다. 삼국유사는 경북 경산사람 일연의 저술로 불교이야기가 90%이상인 점, 경상도 설화가 80%이상 편중되게 구성된 점으로 보아 이는 일연의 지역적 연고에 기인한 한계성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하여 약간 남아있던 우리의 역사는 더욱 신화적, 설화적인 요소로 단지 전설 속의 구전으로만 이어져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전설이 곰과 호랑이에 얽힌 단군신화입니다. 이는 신화가 아닌 현실성을 비유화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소수 민족이 시베리아 지방과 몽골에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세 번째로 중국의 변방으로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하기에 이를 정도의 조선의 사대적 유교정책의 영향입니다. 사실 어느 나라든 중국(中國, 세계의 중심 국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중국이라 부른다는 것은 곧 내 나라는 변방의 나라라고 자처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지금은 중국이 China의 국명으로 굳어져 필자도 어찌 할 수 없이(알면서도) 중국을 中國으로 불러 줄 수 밖에 없는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실록에 보면 세조와 예종, 성종 때 8도 관찰사에게 수서령(收書令)을 내려 옛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 있는데 지금 이 서적들은 전하지 않지만 중국의 역사에 반하는 그러한 민족사서의 존재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역대 왕이 국가적 행사로 천제를 지낸 것을 보면 단군시대의 존재를 역사적 사실로는 받아 들이기는 한 것 같습니다. 강화 마리산, 태백산의 천제단은 지금도 남아 있지요. 하지만 극심한 사대주의는 그 때까지 남아 있던 극소수의 재가 사서는 더욱 심산유곡의 동굴로 숨어들고 도인(道人)들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산 속에서 숨어 살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말 실학사상이 발달하면서 조금 회복되었으며 그 때 산 속에서 단지 명맥으로만 이어져온 재가 사서들이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다시 망라되고 편집되어 오늘날 단지 몇 권만 전하게 되었는데 한단고기, 천부경, 삼성기, 참전계경, 태백일사, 규원사화, 삼일신고등이 그 것입니다.
네 번째는 당나라의 침략, 몽고의 침탈과 임진왜란, 그리고 일제 36년등 전란(戰亂)의 영향입니다. 그러한 전란은 재가 사서들이 남아나지 못하게 한 민족의 크나큰 손실이었습니다. 그 중 역사서를 가장 많이 불태우고 말살한 것이 일제로 조선총독부의 앞잡이 역할을 한 "조선사편수회"인데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주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반도로 축소시켰고, 고려는 무신들의 집권으로 난장판인 국가, 몽고의 노예국가로, 조선은 당쟁으로 나라를 망친 파당정신을 부각시키고 그 때까지 극소수로 남아 있던 우리의 찬란한 중원제패의 역사가 담긴 비서(秘書)들을 전국의 산간에서 들춰내어 불태웠습니다. 1910년 11월부터 14개월 동안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책이 무려 51종 20만권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 때 거두어들인 귀중한 재가 사서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후 일제 사관에 의하여 쓰여진 한국 역사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신화로 축소시켰고 그 결과 조선사 편수회에 깊숙히 관여한 이병도, 신석호의 영향을 받은 한국 역사학자들은 왜곡된 한국 역사관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여 왔으며 이 결과 아직까지도 한국의 상고사가 인정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구한말까지도 인정되던 단군의 존재도 실존 인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최근에 고려는 지금 보다도 훨씬 개방적인 해상 상업 국가였음이 밝혀지고 있고 무신들의 집권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왕권을 견제하는 긍정적인 면도 밝혀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당쟁 또한 그러합니다. 당쟁은 물론 일부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요소가 더 많았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당정치와 비견되는 근대적인 민주 제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무조건 천황에 복종하는 일본은 흉내도 못 낼 왕권 견제와 민주를 지향하는 제도라는 것 또한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 한단고기의 가치
그 "조선사편수회"의 멤버 중 한 사람이 유명한 와세다 대학 출신 이병도씨인데 최근까지도 우리의 사학계는 그 이병도씨의 인맥이 아니고는 사학계에 발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지은 "한국사 대관"은 불후의 명저로 알고 있지만 기실 엄청난 해악을 끼친 역사의 왜곡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젊은 사학자를 중심으로 우리의 역사를 찾자는 운동이 불길처럼 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분이 송호수, 문정창, 임승국, 이도학씨등 입니다. 그러한 소장 학자들에 의하여 우리의 역사의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단고기는 구한말 계연수라는 분이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민족사서들을 말살하기 전에 입수한 비서(秘書)들인 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를 망라하여 편수한 민족 정통사서라 합니다.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잃어버린 민족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정신으로 접근함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한단고기가 일본에서 출판된 것이 다시 우리에게 역수입되었고, 일본학자들과 수메르 언어를 연구하는 불란서 학자들에게 더욱 각광을 받고 연구되어 진다는 부끄러운 사실입니다. 서구 문명의 모태가 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가의 문명을 일으키고 어느날 갑자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수메르인들의 미스테리를 풀 수 있는 단초를 한단고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정작 주인공들인 우리들은 위서라고 배타시하는 데 말입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단고기에 10여 군데 기록된 천문현상이 천체 과학자들이 시뮬레이션 기법으로 역추적해보니 놀랍게도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BC1733년 홀달 단제 시대에 오행성 결집(五星聚婁,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이 일렬로 늘어섬)현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서울대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가 컴퓨터 합성 기법을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시각화해 보니 그 해에 그러한 현상이 실재 일어났슴을 증명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한단고기에 수 없이 언급되는 큰 썰물현상, 일식현상등도 일치하고 있슴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 확증적 접근
역사에는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합니다. 그 하나는 유적, 유물이 확인될 때에만 인정하는 실증사학이요, 서적, 전설, 언어, 풍습까지 포함시켜 실증적인 사실과 혼합하여 추론하는 확증사학입니다. 이전에는 실증사학만 정설로 인정하는 경향이었는데 요즈음에는 확증사학도 인정하는 경향이라 합니다. 민간에서 한단고기가 위서라느니 아니라느니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완벽한 사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사람들은 성서가 진리 그 자체라고 여기지만 과연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을까요? 성서에 의하면 BC3,100년에 하느님의 천지창조가 행하졌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일까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BC(Before Christ), AD(Anno Domini)로 나누지만 일부에서는 예수는 서기 1년에 탄생한 것이 아니고 BC4년이라느니 BC7년이라고도 하고 BC6년이라고도 합니다. 성서에 예수의 행적 중 공생애(公生涯, 30세 이후)이전의 기록이 전무하다 시피하여 추적 결과 인도에서 수행했다느니 티벳에서 수행했다느니 합니다. 예수 탄생일을 12/25일로 오늘날 기념하지만 일부 종파에서는 1/6 혹은 1/17일로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석가의 탄생일도 4/8일로 알고 있지만 남방 불교에서는 2/8일을, 그리고 일부에서는 4/15일을 기념한다고 합니다. 노자는 혹자는 81세까지 살았다고 하지만 생몰(生沒) 연대를 알 수 없다고도 하고 공자가 예(禮)를 물으러 갔다느니 아니라느니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의 역사는 200만년을 넘지 않고 아프리카 동부가 발생지라고 하였으나 최근 투마이원인이라는 유골의 발견으로 인류의 역사가 700만년이나 되고 아프리카 서부가 그 시원(始原)이라고 흥분하더니 인간복제로 지구촌을 용광로처럼 달구는 라헬리언 무브먼트에 의하면 인류는 외계인의 DNA조작으로 탄생된 외계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역사에는 이와 같이 실증적으로는 도저히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것도 확증사학적으로 접근하면 진실은 아니라도 근처에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한단고기가 위서라는니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없다는니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기간 필자의 추적 결과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재야사서를 저본으로 한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의 일정부분을 복원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한단고기에 인용된 사서들에 가필(加筆)은 이루었을 지언정 전혀 새로운 허구의 창작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나라든 정통 사서들이라고 있지만 자의적인 가필이 이루어지지 않은 역사서는 없다고 단언 합니다. 중국의 25사, 사마천의 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아무리 객관성을 확보한다고 해도 저술자와 승리자의 관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집단의 논리로 수 없는 가필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객관적 사실을 도출해내는 혜안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한단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타부시함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실재로 천문 현상이나 신화적 현상, 상고사의 의문점을 명쾌하게 한단고기는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역사의 용광로 한가운데에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9,200년의 역년(歷年) 동안 파미르 고원을 넘어 바이칼호를 거쳐 반도의 구석에 까지 다다른 배달민족의 역정이 그 어떤 이론과 확증보다도 자랑스럽습니다.
㈒ 배달, 개천, 단기의 진실
잃어버린 배달민족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소개하면
① 마고 할미의 마고성에서 시작된 짐세 시대(BC63,182 ~ BC7,197)로 4대의 왕조가 54,000년간 다스렸다 합니다. 인류의 시원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설화는 어느 민족이든 공통된 현상으로 역년의 자료로 보다는 설화의 새로운 해석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② 한인들이 다스린 한국12연방시대(BC7,197 ~ BC3,898)로 7대의 한인이 3,300년간 다스렸다 합니다. 신석기로부터 청동기 초입으로 부족국가에서 연맹체 국가의 형성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즉 배달 = BC7,197 + AD2003 = 9,200년으로 한인 천제들이 배달민족을 다스린 배달을 역년으로 삼았습니다.
③ 한웅들이 다스린 배달국(청구국)시대(BC3,898 ~ BC2,333)로 18대의 한웅들이 1565년간 다스렸다 합니다. 청동기에서 철기 초입으로 국가형성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즉 개천 = BC3,898 + AD2003 = 5,901년으로 배달국의 연호 개천을 역년으로 삼았습니다.
④ 단군들이 다스린 단군 조선시대(BC2,333 ~ BC238)로 47대의 단군들이 2096년 간 다스렸다 합니다. 수 많은 배달민족 중 단지파(밝달파) 일족의 역사라 생각됩니다. 이 시기는 진한, 변한, 기자조선, 마한등의 4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역년은 중심국가인 진한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즉 단기 = BC2,333+AD2003 = 4336년으로 단기의 역년(歷年)을 삼았습니다.
이후의 역사는 5가(五加) 통치시대, 북부여, 가섭원 부여, 사국(四國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시대로 이어져 오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한단고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배달9200/개천5901/단기4336/서기2003/1/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환단고기와 천부경은 위서이다.[1] 입력시간 : 2003. 03.26. 09:24
참조:디지털 창비 독자마당 / 글쓴이: 박수부대 추천수 12 등록일 2002년 04월 24일
제목 환단고기와 천부경은 위서이다. 조회수 155
환단고기는 위서이다.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위서를 위서라고 하면 식민사관을 비호하는 친일분자로 매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90년대였다.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자들과 민족이라면 만병통치약으로 처방하던 일부 운동권들의 떼거지였다. 매카시 현상이었다. 이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뜻있는 학자들은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시비에 말리기 싫어서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우리역사가 10,000년이 넘는단다. 인류 최고의 문명 이집트와 수메르의 역사라 해 보았자 그들의 선사까지 다 합쳐도 7,000년이 되지 않는다. 문명의 역사가 10,000년이 넘는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일제시대를 살았던 몽상적인 재야 역사가 계연수의 말이 있을 뿐이다.
천부경 역시 환단고기에 언급된 계연수의 창작이다. 계연수가 이를 대종교에 제출하여 1975년 대종교에서 정식 경전으로 채택하였다. 천부경은 신라말기 최치원이 바위 비문에서 발췌하였다고 하나 원문은 없고 최치원의 행위에 대한 구전만 전해 졌을 뿐이다. 환단고기에 실린 천부경 역시 진서라고 입증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현재 대종교의 지각있는 간부들은 이 문제로 고민한다고 들었다. 이미 경전으로 채택은 했으나 위서로 판명이 나 버린 가짜문서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떨감씹은 표정이라는 것,
한문에 조예가 깊은 재야 역사가에 의해 창작된 주문 비슷한 숫자 놀음을 두고 이 게시판에서 요상한 해석을 기하는 일이 일어 났다. 그걸 신화라고 우기며 쪼대로 읊어 버린 것이다. 미신 비슷하고 판타지 수필 비슷한 수군작의 글은 그야말로 코미디이다. 개량한복을 입고 기철학이니 뭐니 하며 떨빵한 애들이나 현혹시키고자 똥폼을 잡는 무리들이 하는 행색과 똑 같다. 그 아까운 시간을 몇 년씩이나 허비하여 연구한 것이 고작 그것이라는 말인가? 올바른 학을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피력하라는 김흥년 님의 지적은 뼈 아픈 것이었다.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드나드는 이 게시판, 뭐가 부족하여 이제는 헛소리에다 미신까지 받들어야 하는가? 해프닝도 이런 해프닝은 없을 것이다. 그만 웃고 말자.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글을 옮겨 본다. 독자 여러분들은 아래의 퍼온 글을 읽어 보시고 왜 천부경이라는 것이 주문에 불과한 헛소리인지를 확실하게 느끼시기 바란다.
박수부대.
환(한)단고기에 대한 견해들을 올립니다. 우선, 반대론자의 글로서 하이텔 한국사동호회의 이문영(nymphal)님의 글을올립니다. 이문영님의 글은 환(한)단고기, 규원사화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해 주셨습니다. 이보다 논리적인 글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글을 갈무리해서 오타수정 등을 해서 올리지만, 되도록이면 원문에 충실하도록 했습니다. 문단 등은 새로 편집했습니다. 일단, 이문영님의 글을 올린 후에 그 글에 대한 저의 생각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문영님의 글은 환(한)단고기에 대한 부정론적인 입장인데, 찬성론에 대해서는 당분간 기다려보고, 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제가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토론은 여기 게시판이나, 아래 3번 게시판(역사해석 이래도되는가?)에 올려주셔도 됩니다. 게시판의 활성화를 위해서 제게 편지로 반론을 제기하시는 분의 의견에 대해서는 여기 게시판에서 대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22] 제목 : [갈무리/이문영] 환단고기 반론 1편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사료비판에 대한 논문 두편을 올릴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다음으로 미루고 저일해서 올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규원사화 등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아래 논문들에 나타나 있습니다. 송찬식, 위서변, 월간중앙, 1977년 9월호
이도학, 재야사서 해제 <환단고기>,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조인성, <규원사화> 논첨보, 경대사론3, 1987 이순근, 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성심여대학보,1987년 5월 15일 (이 논문은 고조선은 과연 만주에 있었는가,역사비평,1988겨울호에 수정, 보충됨) 조인성,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검토, 이병도구순기념한 국사학논총, 1987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역사비평, 1990 가을호 이 논문들 중에 이순근님의 논문과 박광용님의 논문에는 이 사서들이 친일파 지식인에 의해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론을 위하여 저술된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저서들이 돌연 80년대에 일대 바람을 탄 것은 일본의 극우파 사학자 카시마(鹿島昇)가 일본에 고대사의 연결성을 중시하여 번역 소개하였는데 일본에서 대히트를 치자 국내에 역수입되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이 저서가 친일파에 의한 위서라는 박광용님의 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환단고기>에서 환웅에게는 일본과 같은 천황이라는 용어를 쓰고 그 이후 임금에게는 <제왕운기> 등에 나오는 대로 천왕이라는 개념을 씁니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우월성을 이야기하며 이후 중국의 황제는 제후로 칭하면서도 우리는 한단계 낮은 왕으로 쓴다는 것은 일본의 천황을 의식한 때문입니다. 즉 일본-조선-중국의 등급을 설정한 것입니다.
2. <규원사화>는 중국이 춘추 이래로 우리를 오랑캐로 취급했다고 분개하며(단군기) 특별히 중국과의 점령, 지배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규원사화 만설에는 “지금 세상사람들은 모두 전쟁에 힘쓰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하면서도 동쪽을 배척하고 서쪽도 배척하여서, 나라를 다시 부강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인가?”라고 씁니다.다시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청나라 황제에게 조상이 같음을 말하고 이해관계를 진언하여, 조선과 함께 요동, 만주, 유주, 영주의 땅에 웅거하도록 유세하고, 북쪽으로 야인을 끌어들여 선봉을 삼고, 동쪽으로 왜와 연합하여 남쪽 울타리를 둘러싸게 한 다음에야, 조선의 강함을 회복하고 중국의 교만함을 꺾을 수 있다.” 이 글이 정말 숙종 당대에 쓰여진 것이라면 청나라 황제와 북쪽의 야인이 구분되지 않던 때이니만큼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구절임에 분명합니다. 당시 중국은 곧 청이었는데 그러면 중국이 중국의 교만함을 꺾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논리에 맞자면 북쪽 배척이라야 맞습니다. 그래서 효종연간에 북벌이라고 말들 했던 것입니다. 이글이 1920년대에 저술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1894년 이래 일본은 조선, 만주, 대만의 운명공동체론을 주장해왔습니다. 즉 同文同種이라는 논리입니다. 이 논리는 친일적 지식인에 의하여 알려지면서 최경환의 <대동역사>에서도 등장하고 있으면서 독립협회 회원들 사이에 널리 읽히기도 했습니다. 즉 스스로는 애국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입니다. 1894년 전후로 일본은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조선, 일본, 만주가 대동 단결하여 함께 번영하자는 이야깁니다. 바로 <규원사화>에 나타난 사항과 일맥상통합니다. 조선, 만주, 일본이 단결하여 중국의 콧대를 꺾자는 것이니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청은 1910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했고 1920년대부터 일본은 만주국 건설 공작을 합니다)
3.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썼다고 하는 범례에서부터 이상한 점을 알게 됩니다. 그는 이를 베낀 이유로 “하나는 세계인류가 대등하게 모여서 함께 존재함을 축하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쓰며 단군세기 서문에도 "세계만방과 더불어 같이 베풀고 함께 즐겼다” 라고 하는 동일한 구절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 무단통치 아래 신음하던 때인데 민족절멸의 위기에서 한가로이 세계만방(일본을 포함한)과 즐기고 축하하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민족주의자가 이책을 과연 썼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적극적인 투쟁을 희석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4. 고려 우왕 말기까지를 기록한 태백일사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왜구와의 싸움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습니다.
5. 태백일사에는 도가사상을 단군 이래의 신교와 맥을 이어놓고는 이 사상적 맥을 이은 서불(서복)이 중국인의 통치에 염증을 느껴 일본으로 도망쳐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전통사상인 신도도 단군신교와 뿌리가 같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한일문화동원론이며 바로 그 끔찍한 동조동근론이 연상됩니다.
6. 단군세기에는 단군시대에 천하가 삼한으로 나뉘어지고 이후 3세 단군으로부터 흉노, 몽고 등 여러 종족으로 갈라져 나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소시모리의 반란을 기록하면서 이후 그 후손이 해상의 3도를 거점으로 하여 천왕을 자칭하였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이 대목은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소잔명존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로 일선동조론에 이용될 소지가 충분한 서슬입니다. 실제로 앞서 말씀드린 카시마가 이 책을 번역해 일본에 소개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니 정말 가공스러운 일입니다. 즉 <규원사화>나 <환단고기>는 단군을 표면에 내세워 민족해방투쟁 시기에 대동아공영론을 바탕으로한 자치론적 민족개량주의의 입장에서 다른 민족주의를 비판했던 책인 것입니다. 정리가 잘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역사비평을 구해서 읽어보십시오.
전말이 본도된 것 같지만 왜 위의 사서들을 위서로 보는가 하는 근거를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규원사화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지금 나와있는 영인본은 1940년 손진태가 양주동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필사시킨 것입니다.규원사화가 처음 인용되는 글은 1928년 김황의 <대동사강>이 처음입니다. 환단고기는 1949년 이유립이 오형기로 하여금 정서시킨 것이라 합니다. 원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하고 이기가 감수하여 1911년 인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인쇄본은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오형기의 정서본을 1979년 이유립이 영인하여 전해집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이 책의 저술연대는 세조3년(1457년)이 됩니다. 그러나 1979년 이전에 환단고기를 인용하는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조인성은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쓴 것으로 생각합니다)
2. 규원사화 단군기에 “고려사 광종 10년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 하였다’고 하였는데, ‘백두산’이란 이름이 여기에서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고 개마산이 백두산과 같은 산임을 언어학적 방법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1823년 <해동역사>의 지리고를 쓴 한진서도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백두산과 개마산이 동일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 다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 책은 어느 것이 어느 것을 베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규원사화는 해동역사가 베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규원사화는 근대에 들어와서야 알려졌으며 해동역사는 전거 문헌을 모두 제시하고 있는데 규원사화는 그 이름에 없습니다.’따라서 규원사화는 1823년 이후에 작성된 것입니다.
3. 단군기에는 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언서를 함께 쓴다면 반드시 이런 폐단이 없을 것이며 초야의 우부도 또한 (단군이 박달임금임을)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니 文化의 계발이 또한 빨라질 것이다.” 여기서 문화는 숙종 연간이라면 文治敎化의 뜻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저자가 이미 앞에서 고유성의 보존을 역설한만큼 현대적인 의미의 culture로 쓰인 것입니다. culture의 번역으로 문화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일본인들이며 20세기초의 일입니다. 또 이 책에는 국가, 전세계, 민중 등의 근대용어가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이런 말들은 아주 많습니다. 철학, 자유, 평등 등이 모두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번역어입니다)
4. 규원사화 만설에서 이런 대목도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나라의 흥망은 뒤바뀜이 무상하니 지금 조선의 불행은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실마리가 아니겠는가. 내가 인심이 분열되고 민기가 가라앉은 것을 보니 붓을 던지고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프다 환인이여, 슬프다 환인이여. 지금 한조각의 진역과 한줄기의 유민은 장창 어찌 될 것인가.” 나라의 흥망과 조선의 불행이란 조선이 멸망했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때(1675년) 특별히 조선에 불행한 일은 없었는데(병자호란이 지난지 50년이나 뒤입니다. 거의 2세대가 지난 것이지요), 지금 조선의 불행이란 무슨 뜻일까요? 또 나라가 망했는데 앞으로 행복해질 실마리가 된다는 것도 저자의 사상을 의심하게 합니다.
5. 만설에 경주의 첨성대는 천수백년이 지났는데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첨성대는 632-646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다른 학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천수백년을 더해봅시다. 일제강점기가 됩니다. 1675년에 쓰여졌다면 천년이 지났는데 라고 쓰는 것이 맞습니다. 다른 연대 추정부분은 모두 맞는데 왜 첨성대 건만 틀릴까요? 또
“우리 선조의 옛땅이 적국에 들어간지 이미 천년이 지나서”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발해가 멸망한 것은 양력으로 927년, 여기에 천년을 더하면 1927년으로 소화 2년입니다.(지금 임금님이 등극하신지 2년이라는 북애자의 말은 그러면?)
6.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자라는 인물은 1901년 황성신문 논설에 나타납니다. (’애’가 崖와 涯의 차이가 있을 분입니다.)
7. 임진왜란을 임진지역으로 쓰는 것도 일본식 방식입니다.
8. 조판기와 태시기에 보여지는 천지창조는 혼돈 - 빛- 하늘과 땅 - 해와 달과 별 -바다와 땅 - 만믈 - 인간이며 기독교 성경과 동일합니다.(혼돈을 물과 어둠으로, 땅을 땅과 식물로만 바꾸면 됩니다.) 인간의 창조이유도 구약 창세기와 동일합니다.
9. 환단고기 단군세기 33세 단군 감물의 기사에는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태백일사 마한세가 하편에도 보입니다.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에 의해 만들어진 지명입니다.
10.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에 눌현은 지금 상춘 주가성자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상춘이라는 지명은 단군세기 9세 단군 아술때에도 나옵니다. 주가성자가 있는 곳은 상춘이 아니라 장춘입니다. 이것은 잘못 베낀 것이라 생각되는데 장춘이라는 지명은 청의 가경연간(1796-1820)에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11. 환단고기에도 역시 근대용어인 문화, 원시국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단군세기 2세 단군 부루, 태백일사 고력국 본기) 남녀평등 - 환국본기부권 - 신시본기
이보다 더 세세한 비평은 처음에 적은 논문을 앍어 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한 대목으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은 적지 않은 것입니다.
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추신:올리고나니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규원사화는 저자가 주장하는 바 를 따르면 1675년(숙종2년)에 저술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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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인물과 사상 쟁토방
[진서예요] 상고사 사이트에 가면 이에 대한 반론이 수도없이 나오고 민족사관 사이트에 가면 완전한 상고사를 모두 보실수 있어요. (05월24일14시38분)
[김기백] 진서?? 같은소리하고 있군... 자네나 철석같이 믿으시게...천부경따위는 그야말로 골수민족주의자인 신채호선생 조차 인정안해..왜그럴까?? (05월24일14시45분)
[김기백] 어떤책이 진서=역사로 인정받으려면 국제적으로 통용될만한 확실성이 있어야 한다는거 모르나?? 꼭 중국.일본 아니라도 그따위 만화를 누가 인정 해줄것 같니?? (05월24일14시46분)
[아찌가 믿] 는 역사는 어떤 서적에 근거한 것입니가? 그리고 국제적인 통용?^^ 아찌 세계사가 언제부터 쓰였죠??^^ 그리고 그거 누가 썻읍니까?역사 길게 보세요..^^ (05월24일15시10분)
[그리고] 단재선생은 북방민족을 우리 민족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뭐 당시의 시대적인 한계였지만요... (05월24일15시16분)
[김기백] 역사를 아주 길게보면 예수쟁이식으로 가면 결국 아담과 이브밖에 더나오니? 현대과학적으론 결국 모든 인간의 발상지가 아프리카라는게 정설이고... (05월24일15시24분)
[김기백] 일본놈들 얘기대로 하면 천조대신... 중국짱궤들에의하면 반고가 모든인간의 조상밖에 더되는거니?? (05월24일15시26분)
[김기백] 그니까 아찌말은 결국 태고적얘기... 상고사는 저마다 각각일수밖에 없고.. 전세계누구도 장담할수 있는 놈은 하나도 없고...그래서도 안되고 그럴필요도 없다는거지... (05월24일15시28분)
[김기백] 따라서 우리는 그나마 고래적부터 전해져온 단군기원... 반만년민족사쯤으로 적정선을 지키는데 가장 합리적이고 옳다는 얘기지.. 뭐 잘못된거 있나??? (05월24일15시30분)
[옳으신 ] 말씀입니다,그렇지만 그렇게 모호하게 하면 민족의 근원을 밝히는데 상당히 곤란한 점이 있지 않을까요..전에 쓴글인데요 그냥 참고만 하세요....답글 하나 올립니다, (05월24일15시31분)
[김기백] 이사람아... 어느나라 어느민족이나 상고사는 애매모호하기 마련이고 그럴수밖에 없어... 그래서 신화시대와 역사시대로 나누는것 아닌가?그건결코 부끄러운일이 아니지.. (05월24일15시34분)
[김기백] 문제는 신화를 역사라고 우기고 별놈의 어거지에 가설을 동원해서지들멋대로 역사시대로 강제편입해놓고는 남들에게까지 믿으라고 강요하는 따위의 국수적발상이지... (05월24일15시37분)
[김기백] 그런부류들은 그따위 작태를 대단한 겨레사랑,나라사랑으로 착각들 하지만 천만에 만만의 말씀이지... 그건 오히려 크나큰 해독이라는거 모르나? (05월24일15시39분)
■ 환단고기와 천부경은 위서이다. [2] 입력시간 : 2003. 03.26. 09:22
이름:박수부대 / 2002/4/26(금)
『규원사화(揆園史話)』와『환단고기(桓檀古記)』 『韓國史 市民講座 제2집』, 일호각, 1988 조인성(趙仁成)
1. 머 리 말
2. 豫備的 檢討
3.『揆園史話』에 대한 史料批判
4.『桓檀古記』에 대한 史料批判
5. 맺음말 -『揆園史話』·『桓檀古記』와 韓園古代史 硏究
1. 머 리 말
요즈음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揆園史話』와『桓檀古記』에 따르면, 우리 나라 상고사는 그야말로 찬란한 영광의 역사인 셈이다. 그것들을 보면 우리 민족은 桓雄이 다스렸다는 神市시대에 이미 국력과 문화면에서 중국울 능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檀君王檢 때부터 중국의 동북지방과 한반도에 걸치는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 축척되어 온 우리 고대사학계의 연구 성과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종래 학계에서는『규원사화』와『환단고기』를 무시하여 왔다. 반면에『규원사화』와『환단고기』에 묘사되어 있는 우리 나라 상고사를 매우 근거있는 것으로 믿는 인사들도 일부 있어 왔다. 그를은 위와 같이 찬란한 민족사를 수록하지 않았다고 하여 국정 국사교과서가 식민지주의사관에 물들었다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기왕의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식민지주의사학자라고 비난하였다. 따라서 이른바 국사교과서 파동의 배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규원사화』와『환단고기』인 것이다. 한편 국사교과서 파동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져 한동안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짝맞추어『규원사화』·『환단고기』가 본격적으로.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소개되자마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환단고기』는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부 서점에서는『규원사화』와『환단고기』그리고 그것들과 유사한 내용의 서적들만을 취급하는 독립된 서가를 만들 정도였다. 한국사에 관심있는 시민들 중 일부는 언 옛날 우리조상들의 뛰어난 문화, 강한 국력, 광대한 영토에 대해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하지만『규원사화』와『환단고기』에 대한 기왕의 사료비판에 따르면, 이 두 책은 僞書이거나 僞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 학계에서『규원사화』와『환단고기』를 무시하였던 것도 사실 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규원사화』와『환단고기』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믿음은 결코 바람직스럽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에 본고에서 필자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규원사화』와『환단고기』의 眞僞 여부와 그것들이 쓰여진 연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그 저자들에 대해서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인용된 이른바 古記들에 대해서도 검토하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 두 책에 서술되어 있는 우리나라 상고사가 과연 믿을 만한 것안가 하는 문제가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의 시작에 앞서 다음과 갇은 점들을 먼저 밝혀 두려고 한다.2) 첫째, 어떤 단어 혹은 술어는 사료의 성립연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일정한 단어는 일정한 시기부터 사용된다. 예컨대 哲學이란 단어는 philosophy의 번역어로 근대에 들어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단어는 어느 시기부터 원래의 의미와는 다르게도 사용된다. 가령 經濟는 본래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經國濟世)이지만, 근대 이후에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재화를 획득하고 사용하는 행위(Economy)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로 쓰이고 있다. 둘째, 人名이나 書名과 마찬가지로 地名도 사료의 성립연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京城府라는 명칭은 1910년 10월부터 사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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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慶南大學校 史學科 교수.
논문으로서「묘본인 杜魯 - 高句麗의 殉葬과 守墓制에 관한 一檢討 -」(『歷史學報』87, 198O),「崔致遠의 歷史敍述」(『歷史學報』94·95합집, 1982),「三國 및 統一新羅의 歷史敍述」(『韓國史學史의 硏究』, 乙西文化社, 1985),「弓裔政權의 中央政治組織」(『白山學報』33, 1986) 등 韓園古代史에 관한 논문이 다수있다.
1) 宋찬植,「僞書辨」(『月刊中央』, 1977년 9월호), 李道學,「在野史書 解題『桓檀古記』」(『民族知性』, 1986년 11월호), 趙仁成,「『揆園史話』論添補」(『慶大史論』3, 1987), 李純根,「古朝群 位置에 대한 諸說의 검토」(『聖心大學報』, 1987년 5월 15일),趙仁成,「現傳『揆圍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李丙燾九旬紀念韓園史學論叢』, l987).
2) 사료비판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은 朴成壽,『歷史學槪擺論』, 1977, pp.259~270 및 杜維運(權重達譯),『歷史學方法論』, 1984, pp.159~184에서 얻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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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豫備的 檢討
(1)『揆園史話』·『桓檀古記』解題
현재 전하고 있는 6종의『규원사화』는 모두 근대에 필사 혹은 등사된 것이다. 예컨대 지금 나와 있는『규원사화』영인본은 1940년 孫普泰가 梁柱東이 갖고 있던 것(역시 근대의 필사본)을 필사시킨 것이다. 이들 6종의『규원사화』를 비교해 보면 약간의 字句 차이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규원사화』의 저자와 저술연대는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저자는「序(文)」에 北崖老人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북애노인이 朔州府使를 지낸 權俔이라는 설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저술연대는「서문」에‘上之二年乙卯’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서문」에서 저자가 孝宗(1650~1659)의 北伐실패를 애석해 하고 있음을 보면, 효종 이후 어느 왕 2년 乙卯가 그 저술연대가 된다. 이에 맞는 것으로는 肅宗 즉위 2년 乙卯(숙종 원년, 1675)만이 있으므로, 『규원사화』는 1675년에 쓰여진 것이 된다.3)
『규원사화』는「서문」·「肇判記」·「太始記」·「檀君記」(서문)·「漫說」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는『규원사화』를 쓰게 된 동기와 그 과정이 밝혀져 있다. 「조판기」에서는 桓困과 桓雄이 천지를 개창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으며, 「태시기」에서는 환웅이 君長이 되어 東夷族을 다스리던 수천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단군기」는 환웅의 아들인 桓儉이 최초의 檀君(檀國의 임금)이 된 때부터 마지막 단군인 古列加에 이르는 47代 1195년의 역사를 적은 것이다. 끝으로「만설」에는 저자의 인생관과 역사의식·문화의식 그리고 조선이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방략(强國之要)이 개진되어 있다.
한편 현재 전하고 있는『환단고기』는 1949년 李裕립(1907~1986)이 吳炯基로 하여금 正書시킨 것이라고 한다(「跋文」). 이로 미루어 그 대본이 되었다는『환단고기』는 필사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위 정서본 범례를 보면, 原『환단고기』는 桂延壽가 편찬하고 李沂가 감수하여 1911년 인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쇄본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유립이 소장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필사본도 역시 찾을 수 없다. 지금은 오형기의 정서본이 1979년 이유립에 의해 영인되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환단고기』가 1979년에 와서야 영인되었던 것은 계연수가 1920년 죽으면서 다음 庚申年(1980)이 되거든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으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한다.4)
『환단고기』는『三聖記』·『檀君世紀』·『北扶餘紀』·『太白逸史』를 묶은 것이다.「범례」에 따르면『삼성기』는 安含老가 撰한 것과 元董仲이 찬한 것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안함로의 것은 계연수가, 원동중의 것은 白寬默이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삼성기』에는 인류의 출현요로부터 高句麗 개국까지의 역사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삼성기』의 이름이『世祖實錄』7, 3년 5월 戊子조에 나오므로, 저술연대는 세조 3년(1457) 이전이 된다.
『단군세기』도 백관묵이 소장했던 것이라고 한다(「범례」). 여기에는 47代 2096년에 걸친 단군조선의 역대 임금명과 그들의 재위기간, 치적 등이 나온다. 고려말의 李암(1296~1364)이 恭民王 12년(1363)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북부여기』는 休崖居土 范樟이 찬한 것으로 원래 『단군세기』와 合編되어 있는 것을 李亨拭으로부터 얻었다고 한다(「범례」). 『북부여기』는 解慕漱에서 高朱蒙에 이르는 북부여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내용상 『단군세기』의 속편인 셈이다. 여기에는 동부여의 역사를 서술한「迦葉原夫餘紀」가 붙어 있다. 『태백일사』「고려국본기」를 보면, 범장은 이암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북부여기』가 쓰여진 것은 고려말 무렵이 된다.
『태백일사』는, 「범례」에 따르면, 李陌(端宗~中宗)5)이 편찬하였으며, 이기가 소장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三神五帝本紀」·「桓國本紀」·「神市本紀」·「三韓管境本紀」·「蘇塗經典本訓」·「高句麗國本紀」·「大震國本紀」·「高麗國本紀」로 구성되어 있다. 「삼신오제본기」는 주로 우주의 생성에 관한 것이다. 「환국본기」는 환인이 다스렸다는 환국의 역사를, 「신시본기」는 환웅이 다스렸다는 신시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삼한관경본기」에는 단군왕검이 나누었다는 辰韓(眞朝鮮)·馬韓(莫朝鮮)·番韓(番朝鮮)중 마한·번한의 역사가 실려 있다.「소도경전본훈」은「天符經」·「三一神諾」등 단군신앙과 관련된 경전·교리에 관한 것이다. 「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국본기」는 각각 고구려·발해·고려의 역사를 다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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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韓永愚,「l7세기의 反尊華的 道家史學의 成長 - 北崖의『揆園史話』에 대하여 -」, 『韓國學報』1, 1975;『韓國의 歷史認識』(上), 1976, p.267.
4) 李道學, 앞의「해제」, pp.205~206.
5) 朝鮮總督府編, 『朝鮮人名辭典』,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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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問題의 提起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1675년에 저술되었다고 하는『규원사화』는 1928년에 나온 金洸의 『大東史鋼』에 최초로 이용되고 있다. 이처럼『규원사화』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性理學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암암리에 전하여져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현전하는 『규원사화』가 모두 근대에 필사 혹은 등사된 것이며, 그 저자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과 더불어,『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한다. 즉 근대에 고양된 단군신앙을 배경으로 짜여진 僞書가 아닌가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수록된 네 책의 저술연대는 모두 조선 전기 이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는 1911년 인쇄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이전에 『환단고기』에 나오는 네 책이나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있는 문헌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에 실린 네 책이 근대 이후(어쩌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와 아울러 이유립이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을 갖고 있었으리라는 점, 현재 『한단고기』의 인쇄본이나 이유립이 갖고 있었을 필사본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하였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3.『換園史話』에 대한 史料批判
(1) 著述年代와 著者
『규원사화』저자는「단군기」에서
-『高麗史』光宗 10년에 “압록강 밖의 女眞을 白頭山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하였다”고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
고 하였다. 그리고 蓋馬山이 백두산과 같은 산임을 언어학적인 방법으로 밝히고 있다.
한편 1823년 『海東繹史』의 「地理考」를 쓴 韓鎭書도 『규원사화』 저자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도 고려사 광종 10년조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 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고 하면서 “백두의 칭호가 여기에서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규원사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방법, 같은 논거로써 개마산이 백두산임을 증명하였다(山水 1, 白頭山).
그런데 『규원사화』 저자와 한진서는 모두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으로 혼동하였다. 두 사람이 『고려사』에서 인용한 구절은 광종 10년조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종 10년 10월조에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치는 우연일까.
『고려사』를 인용한 두 사람이 모두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으로 혼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똑같이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거기에서 처음 보인다고 설명하였고, 또 개마산이 백두산임을 같은 방법, 같은 논거로써 증명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다. 즉 위와 같이 양자가 일치하게 된 것은 둘 중의 하나가 『고려사』를 보고 그것을 나름대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를 참고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한 것이다.
만약 『규원사화』가 1675년에 쓰여진 것이라면 한진서가 『규원사화』를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규원사화』가 알려진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그리고 한진서의 『해동역사』「지리고」에는 전거가 된 모든 문헌이 제시되어 있지만, 거기에 『규원사화』는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한진서가 『규원사화』를 보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결국 『규원사화』저자가 『해동역사』「지리고」를 참고한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1823년 이후에 쓰여졌으면서도 1675년에 저술되었음을 표방하고 있는 『규원사화』가 위서임을 알 수 있게 된다.6) 이 점은 다음을 검토함으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 만약 지금 諺書를 함께 쓴다면 반드시 이런 폐단이 없을 것이며, 草野의 愚夫라도 또한 (檀君이 박달임금임을)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니 文化의 계발이 또한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단군기」). -
이것은『규원사화』저자가 후대의 역사가들이 한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박달임금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 단군임을 모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제시한 의견이다.
그런데 저자가 한자와 諺書(한글)를 함께 사용한다면 계발될 것이라고 한 문화는 古典에 나오는 文治敎化의 뜻이 아니다. 저자가 만설에서 고유어의 사용을 포함한 고유성의 보존(이를 保性이라고하였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보면, 한글을 사용하여 계발될 문화는 고유문화이다. 따라서 위에 나오는 문화는 Kultur·Culture의 의미인 것이다.
이미 알려진 바이지만 Ku1tur·Cu1ture가 문화라고 번역되어 사용된 것은 日本에서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 초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政治·經濟·藝術 등의 번역어와 함께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7) 그러므로 위에 나온 저자의 한자·한글 병용론은 근대인의 주장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규원사화』가 근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8)
그런데 저자는 「만설」에서
- 나라의 흥망은 뒤바뀜이 무상하니 지금 조선의 불행은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실마리가 아니겠는가. 내가 인심이 분열되고 民氣가 가라앉은 것을 보니 붓을 던지고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프다 桓因이여. 슬프다 桓因이여. 지금 한 조각의 震域과 한 줄기의 遺民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
라고 헌실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규원사화』가 1675년에 쓰여진 것이라면 이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의 암담한 실정을 걱정한 것이라고 불 수 있다. 하지만 『규원사화』에 나오는 이같은 저자의 심경은 근대인의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한 조각의 진역’과 ‘한 줄기의 유민’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우리 민족의 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9)
그렇다면 『규원사화』는 1910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 된다. 『규원사화』가 1928년에 나온 金洸의 『大東史鋼』에 최초로 이용되고 있음을 보면, 그 저술연대는 1928년 이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내용의 곳곳에서 환웅과 단군에 대한 신앙이 드러나 있으므로, 그 저자는 단군신앙을 가진 근대 민족주의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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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趙仁成,「현전『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 검토」, pp.658~659.
7) 李崇寧,「韓國語發達史」下,『韓園文化史大系』9, 1967, pp.317~318.
8) 趙仁成, 앞의 논문, pp.659~661. 鄭求福의 교시에 따르면,『규원사화』에 자주 보이는 朝鮮이라는 용어도 大韓帝國 이후에야 흔히 사용되었다고 한다.
9) 李純根은 위 인용문에 대하여 “숙종2년에 특히 불행했던 일도 없고 나라가 망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고 하였다(「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10) 宋찬植은 『규원사화』의 저자를 한말·일제시대의 大倧敎系 인물로 보았다(「위서변」). 趙仁成은 檀君敎와 관련된 인물이 尹德榮의 후원을 받아『규원사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규원사화』론 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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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引用된 古記들에 대한 檢討
韓永愚와 李相時는『규원사화』저자가『震域遺記』·『朝代記』·『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密記』·『四聞錄』·『三韓拾遺記』등 道家 계통의 역사서와 문집을 참고하였다고 하면서 이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11) 특히 이상시는, 그렇기 때문에 「단군기」의 내용이 첫째 『三國遺事』보다 문헌고증적 근거가 연원적으로 더 오래되었고, 둘째 뿌리가 깊고 신뢰성이 두터우며, 세째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네째 『규원사화』저자가 참고하지 않은 문헌에 나오는 사실과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를 들어「단군기」에 나오는 단군조선사가 국사교과서에 반영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 (상략)하지만 다행히 산골짜기에서 淸平이 지은 『진역유기』를 얻었다. 그 중에는 三國 이전의 옛 역사가 있는데, 비록 간략하고 상세하지는 않지만 항간에 전하는 구구한 설에 비하면 오히려 사기를 높일 수 있는 것이었다(「서문」).
옛날에 淸平山人 李茗이란 사람이 있었으니 고려때 사람으로 『진역유기』 3권이 있다.(이는)『조대기』를 인용하여 우리 나라의 옛 역사를 적은 것이다. 一然의 책(『삼국유사』)과 비교하면 심히 서로 다르며, 그중에는 仙家의 말이 많다. (중략) 道家는 이미 檀儉神人이 창조한 원류를 계승하였고 또 문헌의 진맥을 얻었으니, 東史(우리 나라 역사)를 논한 것으로는 승려들이 기록한 것보다 휠씬 낫다. (숭려들의 기록은) 대부분 견강부회와 억설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차라리 청평의 말을 취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단군기」서문). -
위에 따르면 『진역유기』는 고려시대 도가의 한 사람인 이명이『조대기』를 저본으로 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역유기』는 특히「단군기」를 쓰는데 크게 참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체「서문」이 아니라 「단군기」서문에서 『진역유기』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이나 실제 이명의 설이 인용되고 있는 곳이 「단군기」뿐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단군기」의 골자는 저자가 『진역유기』에서 보았다는 ‘三國 이전의 옛 역사’에 의거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 나온 『조대기』는 저자가 「단군기」에서
- 청평이 쓴 것은 대개 渤海人이 秘藏하였던 것에 근거한 것이다. -
라고 한 것을 보면, 발해인들이 고려에 망명하면서 가져온 역사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저자가 『조대기』를 참고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만약 『조대기』를 보았다면 굳이 『진역유기』에 의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가 실제 참고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나오는 경우는 더 있다. 『고조선비기』·『지공기』·『삼성밀기』등이 그러하다. 이들의 명칭은 『규원사화』에 단 한번씩 등장한다.
- 또 『조대기』라는 이름이 『조선비기』·『지공기』·『삼성밀기』등의 책(이름)과함께 世祖가 내린 求書의 유시에 보이거늘 金氏(金富軾)시대에 홀로 이 책(『조대기』)이 없었겠는가(「단군기」). -
이것은 저자가, 이명이『조대기』를 보았으므로 김부식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는 ‘삼국 이전의 옛 역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고 김부식을 비난하면서, 그 비난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참고한 것은 세조가 내린 求書의 유시가 나오는 『세조실록』(7, 3년 5월 戊子 조)이나 기타 다른 문헌이지 『고조선비기』등이 아님은 명백한 것이다.12)
한편 단군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 이외에 (여러) 서적 및 『사문록』·『삼한습유기』와 같은 도가문집 등 諸書에 흩어져 나오는 것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단군기」). -
고 하였음을 보면, 『사문록』·『삼한습유기』등은 그 내용이 일부 『규원사화』에 반영된 듯하다.13) 그렇다면 실제 저자가 참고하였다고 할 수 있는것 중에서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진역유기』·『사문록』·『삼한습유기』뿐이다.
이중 『사문록』과『삼한습유기』는 조선시대 도가의 한 사람인 趙汝籍(宣祖~仁祖)이 지은 『靑鶴集』14)에 그 내용이 일부(?) 인용되어 있다. 『청학집』에 인용된 『삼한습유기』에서는 『규원사화』와 일치하는 것을 찾을수 없다. 반면에『사문록』과「단군기」가 일치하는 곳은 세 군데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단군기」에는 『사문록』이 인용된 셈이 된다. 그렇지만 『사문록』에 단군의 말년이
- 세상을 주재하기 1084년에 阿斯達山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
라고 되어 있는 것은 단군조선의 47代 임금을 설정하고 있는「단군기」와는 전혀 다르다.따라서「단군기」의 주된 참고 자료는 역시『진역유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단군기」에서는 『진역유기』로부터 직접 인용하였다고 되어 있는 부분을 네군데 찾을 수 있다. 그중 둘은 王儉城의 위치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발해사에 대한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고려시대 8聖에 관한 것이다. 이중 마지막 것을 보도록 하자.
- 고려 仁宗 9년에 요망한중 妙淸의 말로 인해 八聖堂을 西京 林原宮 안에 두었다. 淸平이 말하기를 “제1은 護國白頭嶽의 太白仙人이니 大慧·大德이 있어 主神을 도와 大界를 만들었다. 즉 桓雄天王을 일컬음이다. 제2는 龍圍嶽의 六通尊者이니 萬理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人間의 禍福을 관장한다. 제3은 月城嶽의 天仙이니 風雨를 관장하는 神이다. 제4는 句麗平壞의 仙人이니 光明을 관장하는 神이다. 제5는 句麗木멱의 仙人이니 人間의 壽命을 관장하는 神이다. 제6은 松嶽의 震主이니 大勇·大力을 갖고 神兵을 관장하여 항상 國都를 지키고 외적을 물리친다. 즉 옛날 蚩尤氏의 神이다. 제7은 甑城嶽의 神人이니 四時·곡물·초목의 일을 관장한다. 즉 옛날 高矢氏의 神이다. 제8은 頭嶽의 天女이니 地上의 선악을 관장한다. 즉 神市氏의 부인이며 桓檢神人의 어머니이다. 모두 主神의 조절과 헤아림 아래서 천하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다스리는(治) 神이다”라고 하였다. -
위에 나오는 이명의 설은 발해인들이 소장하였다는 『조대기』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이명 자신의 것이다. 왜냐하면 송악(지금의 개성)이나 월성악(청주)등은 단군조선이나 고구려·발해와 전혀 관계없는 지명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우선 다스린다는 것을 ‘治’로 쓰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게 된다. 왜냐하면 ‘治’는 고려 성종의 이름이므로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으로 ‘治’를 피하여 같은 뜻의 ‘理’를 사용하였던 것이다(避위). 뿐만 아니라 각 神들이 맡고 있었다는 업무가 실제 고려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먼 것과 다른 경우를 찾을 수 있다. 『고려사』4, 현종 3년 9월조에
- 이달에 서경 木멱祠의 神像을 만를었다. -
고 하고, 崔滋의「三都賦」(『東文選』2)에
- (東明王의) 혼령이 계시는 곳 平壞神祠가 아닌가. 風伯을 부르고 雨師를 지휘하시니 노하시면 대낮에 번개와 우박·나무·돌이 섞여 날리네. 또 木멱神祠는 농업을 관장하니 애써 갈지 않아도 풍년들어 볏가리가 산더미같으며 公私로 두호하여 큰 이불로 덮어 주네. -
라고 되어 있음을 보면, 우선 목멱신이 고려시대에 농업을 관장하는 신으로 받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15) 그리고 평양신은 동명왕으로 풍우를 관장하는 것으로 믿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 나온 이명의 설에 따르면 농업을 관장하는 신은 증성악 신인이고 풍우를 담당하는 신은 월성악 천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역유기』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셈이다. 여기서『진역유기』가 『청학집』을 비롯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직 근대에 만들어진 『규원사화』·『태백일사』(이에 대하여는 곧 살펴보게 될 것이다)에만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즉 『진역유기』는 『규원사화』를 저술하면서 그 저자가 꾸며낸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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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韓永愚, 「17세기의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 pp.293~297 및 李相時, 『檀君實史에판한 文獻考證』, 1987, pp.163~190.
12) 趙仁成,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 검토」, p.66l의 註 (26).
13) 필자는 위의 논문, p.661의 註 (26)에서『사문록』·『삼한습유기』가 직접 참고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그를 수정한다.
14) 韓永愚, 「解題」, 『揆園史話·靑鶴集』, 1976, p.viii.
15) 李丙燾, 『高麗時代의 硏究』(개정판), 1986,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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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桓檀古記』에 대한 史料批判
(1) 著述(編纂)年代와 著(編)者
『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에는 淸나라 때부터 사용된 지명이 자주 나오고 있다. 그중 두 가지만 예로 들도록 하겠다.
- 戊子 7년 寧古塔 서문 밖 甘勿山 아래에 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단군세기』33세 단군 甘勿).
癸亥 2년 帝가 寧古塔에 순행해 흰 노루를 얻었다(『북부여기』하 6세 단군 古無胥).
戊子년에 馬韓이 명을 받들고 京師에 와 寧古塔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諫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태백일사』「마한세가」하). -
위에 나오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16)
- (高朱蒙) 32년 甲午 10월에 北沃沮를 쳐서 멸하고 이듬해 乙未에 卒本으로부터 訥見으로 도읍을 옮겼다. 訥見은 지금의 常春 朱家城子이다(『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丁巳 2년 淸海의 褥薩 于捉이 군대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니 帝가 常春에 피하고 구월산 남쪽 기슭에 新宮을 지었다(『단군세기』9세 단군 阿述). -
朱家城子가 있는 곳은 常春이 아니라 長春이다. 따라서 상춘은 장춘의 誤寫일 것이다. 그런데 장춘이라는 지명은 청 嘉慶年間(1796~1820)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군세기』와 『북부여기』가 고려 말에, 『태백일사』가 조선 전기(중종대?)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는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 이들의 실제 저술연대는 대체로 1796년 이전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는 후대의 위서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삼성기」도 이들의 예에 비추어 역시 그러할 것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쓰여진 것일까.
- 辛丑 원년 (중략) 제한의 선악을 살펴 상벌을 신중히 하며 도랑을 파서 農桑을 권하고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文化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단군세기』 2세 단군 扶婁).
杏村侍中(이암)은 저서가 3종 있다. 그는 『단군세기』를 지어 原始國家의 體統을 세웠고 또 『太白眞訓』을 지어 桓檀이 서로 전한 道學·心法을 紹術하였으며 『農桑集要』는 經世實務의 학문이다(『태백일사』「고려국본기」). -
위에 나오는 ‘문화’‘원시국가’ 등이 근대적 용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17) 그런데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 나라가 形이라면 역사는 魂이다. 形이 魂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 -
라고 하고, 외세의 간섭에 대한 구국의 방책으로 『단군세기』를 쓴다고 하고 있는 것은 朴殷植이 『한국통사』(1915)「緖言」에서
- 대개 나라는 形이고 역사는 神이다. 지금 한국의 形은 허물어졌으나 神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痛史를 저술하는 까닭이다. 神이 존속하여 멸하지 않으면 形은 부활할 때가 있는 것이다. -
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18) 따라서 단군세기는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던 1910년을 전후하여(아마도 1915년 이후일 듯)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단군세기』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외세란 元나라의 간섭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상은 얼제의 침략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봄으로써 그 저술연대를 보다 좁혀 볼 수 있다.
- 淵蓋蘇文은 蓋金이라고도 하는데 姓은 淵氏이다.그 선조는 鳳城人이다.아버지는 太祖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子遊라고 하며 증조는 廣이라고 한다. 모두가 莫離支였다.(『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
이것은 『조대기』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태백일사』에 인용된 『조대기』는 다음에서 보게 될 바와 같이 근대에 조작된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祖父의 이름이 子遊와 太祖라는 것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泉男生基誌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알려졌다.19) 그러므로 『태백일사』는 1923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로 미루어 『단군세기』를 비롯한 나머지 책들도 1923년 이후에 쓰여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 의심하였던 바와 같이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펀찬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태백일사』 등을 짓고, 그것들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1949년 오형기로 하여금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 『환단고기』를 정서시켰다고 하며, 1979년 그것을 영인하여 공개한 이유립이 아닐까.
이와 같이 이유립을 실제 편저자로 생각할 경우,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에 『규원사화』와 거의 일치하는 부분이 적지 않은 까닭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유립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20년대 말 始興의 鹿洞書院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렵 녹동서원서에는 『규원사화』를 등사하여 판매하였다고 한다. 현전하는 등사본 『규원사화』가 바로 이때 등사된 것으로 여겨지거니와, 그렇다면 이유립은 당시 『규원사화』를 보았음이 분명하다.20) 이 점에서 『환단고기』와 『규원사화』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이유립이『환만고기』를 편저하면서 『규원사화』를 중요한 참고자료의 하나로 삼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단고기』는 1920년대 말 이후에 이유립에 의해 저술·편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환단고기』가 1949년 정서되었다고 하므로 이유립은 1949년 이전 멀지 않은 시기에 『환단고기』의 초고를 작성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후 그것을 수정·보충하여 l979년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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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李道鶴, 앞의「해제」, p.207.
17) 주 (16)과 같음.
18) 李純根, 「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19) 葛城末治,『朝鮮金石攷』, 1935, p.169.
20) 趙仁成,「『규원사화』론 첨보」, p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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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引用된 古記들에 대한 檢討
『환단고기』에 실린 네 책 중 『태백일사』에는 고기로 여겨지는 문헌들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미 세조 때에 求書의 대상이 되었던『表訓天詞』·『大辨經』·『朝代記』·『三聖密記』등(『세조실록』7, 3년 5월 戊子)과 『진역유기』·『三韓秘記』등이 그것들이다. 이중 『표훈천사』·『대변경』·『조대기』·『삼성밀기』등은 그 이름만이 전할 뿐 『환단고기』를 제외한 다른 문헌에도 전혀 인용된 바 없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다음을 보도록 하자.
- 옛날에 桓仁이 있어 天山에 내려와 살았다. (중략) 친하고 친하지 않음의 구별이 없었으며 상하가 차등이 없었다. 남녀가 권리를 공평히 하였으며(男女平權) 노소가 일을 나누니 이 시절에는 비록 법규와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 和樂과 循理를 이루었다(「환국본기」).
(상략) 너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웃사람들을 이끌고 下界에 내려가서 開天施敎하고 主祭天神하여 父權을 세우라(「신시본기」). -
위에 제시한 것은 『조대기』로부터 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男女平權’·‘父權’이니 하는 말이 근대에 들어와 쓰여졌던 것임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조대기』는 근대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위와 같은 말들이 나오는 『조대기』가 세조의 求書 대상이 되었던 『조대기』일 수 없음은 명백한 것이다.
여기서『조대기』의 경우를 미루어 생각하면, 『환단고기』에 인용되고 있는 고기들은 모두 근대에 위조된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즉 書名만 빌어 왔을 뿐 그 내용은 근대인이 쓴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역유기』는 저자가 『규원사화』를 참고하면서 빌어온 것이 틀림없다.
5.맺음말 - 『揆園史話』·『桓檀古記』와 韓國古代史 硏究
이제까지 필자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1920년대 혹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僞書임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거기에 인용된 이른바 古記들도 역시 근대 이후에 조작된 것임을 밝힐 수 있었다. 따라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서 근대 민족주의사학자들의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 성과와 비슷한 점들을 적지않게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규원사화』에 나오는 김부식에 대한 호된 비난이나 『태백일사』에 설정되어 있는 三韓은 申采浩의 김부식에 대한 비난과 그의 前三韓을 연상시킨다. 두 책 (특히 『태백일사』「환국본기」)에 보이는 광명숭배는 崔南善의 이른바 不咸(밝)文化를 떠 올리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1920~193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던 신채호나 최남선 등의 연구21)를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저자들이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혹 『규원사화』·『환단고기』는 史論集으로서의 의의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韓末·日帝시대에 단군신앙이 고양되면서 단군신앙에 입각하여 단군과 단군조선사를 다룬 『檀奇古史』·『神檀實記』등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단기고사』는 발해 武王 원년(719)에 大祚榮의 아우 大野勃이 짓고, 발해의 文人 皇祚福이 중간하였다는 檀君朝鮮과 奇子朝鮮의 역사서이다. 여기에는 단군조선의 47대 임금명, 재위기간, 그들의 치적이 나오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정치군사문화 등 모든 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였으며, 특히 그 문화는 동양문화의 원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宋찬植이 “『단기고사』가 위서임은 천하가 다 아는 일”22)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그것이 위서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07년 學部 편집국장 李庚職이 썼다는 「『檀奇古史』重刊序」나 1912년 신채호가 썼다는「『檀奇古史』重刊序」등을 보면,『단기고사』가 처음 출현한 것이 1900년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 곳곳에서 저자의 단군에 대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단기고사』는 한말 단군신앙을 가진 사람이 만든 宗敎史話이다.23)
『신단실기』의 저자인 金敎獻은 1903년 『文獻備考』纂輯委員, 1909년 奎章閣副提學으로 『國朝寶鑑』刊印委員을 역임한 인물로서 박식한 학문을 바탕으로 대종교의 역사와 교리를 정리하였다.24) 그중 그의 박식함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이 1914년에 지은 『신단실기』이다. 『신단실기』는 신성한 단군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제목대로 단군에 관련된 기록이나 학설·풍습 등을 수집하여, 그것들을「檀君世紀」·「三神上帝」·「敎化源流」등 19개 항목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참고되었음직한 『단기고사』가 전거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단군조선의 歷年은 1212년이고, 傳世는 알수 없다고 하고 있을 뿐, 『단기고사』에 나오는 역대 임금명 등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군과 단군조선에 견강부회된 사실이 많다는 점에서 『신단실기』도 역시 종교사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25)
여기서 우리는『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단군신앙의 입장에서 각종 기록·학설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두 책은 우선 『신단실기』와 유사하다. 하지만 『단기고사』와 마찬가지로 사실을 위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신단실기』보다 더 종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와『환단고기』는 단군신앙과 관련된 종교사화일 뿐 우리의 한국 고대사 연구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규원사화』는 1920년대 일제의 지배에 대항하였던 민족주의적 움직임의 한 예로서 일정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환단고기』가 일제하에서 집필되었다면, 그것에도『규원사화』와 마찬가지의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찌기 신채호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 역사를 연구하려면 史的 材料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 자라. 古物이 山같이 쌓였을지라도 古物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日本의 寬永通寶가 箕子의 유물도 되며, 十萬冊의 藏書樓 속에서 坐臥할지라도 書籍의 眞僞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後人 僞造의 『天符經』등도 壇君王檢의 聖言이 되는 것이다(「三國志 東夷列傳 校正」, 『東亞日報』1925년 l월 26일;『朝鮮史硏究草」, 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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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宋찬植, 「위서변」.
23) 韓永愚, 「1910年代의 民族主義的 歷史敍述 - 李相龍·朴殷植·金敎獻·『檀奇古史』를 중심으로 -」, 『韓國文化』, 1981, pp.132~134.
24) 朴永錫, 「大倧敎의 民族意識과 獨立運動 - 金敎獻敎主時期를中心으로 -」, 『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 - 滿洲地城을 中心으로 -』, 1982, p.157.
25) 韓永愚, 앞의 논문, pp.116~124
해설:박수부대
■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소크라테스는 고대인들이 「토트 」에 관해서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토트는 필기(문자)를 발명한 다음 "당시 이집트 전체를 다스린 왕" 아몬신을 찾아가 필기법(문자)을 모든 백성들에게 보급하자며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오 위대하신 왕이시여, 이것을 배우면 이집트 사람들이 더욱 현명해지고 그들의 기억력이 향상될 것입니다.저는 기억과 지혜의 묘약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아몬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오, 가장 뛰어난 테우트여, 예술의 본질을 탄생시킬 수 있는 사람과, 그것이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해를 끼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제 당신은 기록의 아버지가 되었고 기록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기록의 효과를 실제와 정반대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록은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기억상실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들은 기억력을 이용하는 훈련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의 묘약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묘약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신은 제자들에게 지혜의 실체가 아닌 허울만을 제공합니다. 당신의 발명으로 제자들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않은 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자기네가 많은 지식을 알게 되었다고 상상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총 다섯편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삼성기전 상편(三聖紀全 上篇) - 안함노(安含老) 찬(撰)
2. 삼성기전 하편(三聖紀全 下篇) - 원동중(元董仲) 찬(撰)
三聖紀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안함노의 삼성기이며, 다른 하나는 원동중의 삼성기이다. 삼성기는 왕조실록 세조유시(世祖諭示)의 수상서(收上書) 목록에도 들어 있는데 저자는 安含老와 元董仲이라고 되어있다.
安含老( ? ~ 640)
신라 진평왕 22년 (600)에 왕명으로 중국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던 도승(道僧)이다. 속성은 김씨이며 시부 이찬(詩賦伊湌)의 자손이다. 그는 물위를 걸었으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는 신승이였다고 한다. 이같은 행적으로 보아 그는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선덕왕 9년 62세로 만선도장(량)(萬善道場)에서 세상을 떠났다.
元董仲 : 高麗 때 사람이라고만 알려져 있고 그 행적은 밝혀지지 않는다.
3. 단군세기(檀君世紀) - 행촌(杏村) 이암(李嵒) 편(編)
李嵒(1297~1364)
호는 행촌(杏村) 17세에 과거에 급제 하였으며 왕은 그 재능을 인정하여 부인(符人)을 맡게하고 비성(秘省)의 관직을 제수 하였다. 그후 좌정승을 거쳐 공민왕 8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명(李茗),범장(范樟)과 더불어 천보산(天寶山) 태소암(太素庵)에서 환단(桓檀) 때부터 내려오는 진결(眞訣)을 얻게 되었다.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 홍행촌(紅杏村)에 들어가 스스로 홍행촌 늙은이(紅杏村叟)라 하였다. 저서로는 단군세기(檀君世紀),농상집요(農桑集要),태백진훈(太白眞訓)의 행촌삼서(杏村三書)를 남겼다. 공민왕 13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4. 북부여기(北夫餘紀) -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障) 편(編)
范障
호는 복애(伏崖) 자는 여명보(汝明甫)이다. 일명 범세동(范世東)이라고도 한다. 금성(錦城) 사람이며 고려 공민왕 때 간의대부(諫義大夫)의 벼슬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저서로는 북부여기(北夫餘紀),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이 있다.
5. 태백일사(太白逸史) -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편찬(編撰)
李陌
호는 일십당(一十堂), 환단휘기(桓檀彙記)에 의하면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현손(玄孫)이라고 한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바른 말을 하다가 연산 10년에 괴산으로 귀향갔다. 16년 만에(중종 15년) 찬수관(撰修官)이 되었다. 귀향 때 노인으로부터 들은 비장사전(秘藏史傳)들을 열람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지었다.
역사란 랑케(Leopold von Ranke : 1795~1886)를 鼻祖로 하는 實證史學의 입장인 고증사학의 뒷받침을 통해서 그 眞僞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여야 한다는데 異意를 달지는 않습니다.
허나 역사란 그러한 실증적인 면만이 아닌 다양한 방법론적 고찰을 필요로 합니다.
桓檀古記는 암울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東夷族의 웅대무비(雄大無比)함을 들어내 보인 쾌저(快著)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유립(李裕岦 : 1907~1986)의 僞作 내지는 創作이라는 의견에 동의를 한다해서 우리의 역사성에 흠결을 가져 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찬란한 우리 역사에 대한 흠집내기는 아니더라도,,
여지껏 신화처럼 널리 알려져 왔던 우리네 조상들의 太古的 이야기에 대한 것은
말 그대로 고기(古記)라는 검증 미상의 부분으로 놓아두어도 우리의 역사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연수(桂延壽 : ?~1920)의 原本이 없다는 것,,
고구려의 이문진(李文眞)이 영양왕 11년(600)에 당시의 史書였던 留記 100권을 새로이 편집하여 신집 6권(삼국사기에는 5권으로 기록)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최치원(崔致遠 : 857~?)의 글 대다수도 이름만 남아있습니다.
역사란 한 면만을 부각 시킨다 하여 그 방법론이 모든 것을 다독거려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학자의 양심에서는 나름대로 자신의 독보적인 잣대가 필요한 사안이겠지만
일반인의 範疇에서는 그러한 깊은 속내에 까지 파고들어 그들의 話爭에 편들기로 편승(便乘)
하는 것도 조금은 꺼림칙 합니다.
桓檀古記는 검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桓檀古記에 대한 검증으로 박창범교수가 천문학적 日食관찰을 고증적인 방법론으로 시도하고 있고, 새로이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많은 부분이 史料로써 인정되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가 始初에 글을 올린 것은 책의 眞僞 여부를 떠난 객관적인 발행된 그 책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우리 上古史에 대한 접근은 민족이라는 실체적 개념으로 한울타리를 만드는 민족정서의 同化的 統合을 앞당기는 大憲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중에 이런 말이 나오지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라고,,,
우리가 미생물들을 현미경으로 보거나 천체의 별들을 망원경으로 볼 때, 그 것 역시 광학기술에 의해 맺혀지는 허상을 보는 것이지요,,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봐야되는 직접체험만이 人間事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歷史를 通한 間接體驗은 우리의 知識體系를 확대 시키는 것이며, 그러한 지식에 바탕한 믿음은 한 사람의 人格을 형성시키며 그 한 사람이 民族이라는 구성원으로서 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因子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上古史에 대한 수많은 정수(精髓)들이 지나(支那) 史學者들에 의해 支那 사학의 근간(根幹)으로 둔갑합니다. 그들은 中華思想으로 무장하여 邊方國家로 전락된 東夷族의 역사를 폄훼(貶毁)하고 멋대로 뜯어 고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된 우리 史學者들은 事大主義에 물들어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좌표를 事大에 어긋나는 부분들은 지우기에 바빴고 그 대표적인 인물중에 三國史記를 집필한 金富軾과 이씨조선의 역대왕들및 그에 빌붙었던 이씨조선의 史家들의 잘못됨, 일제하 조선사 편수회를 통한 우리민족의 역사 날조(捏造)및 폄훼의 극치를 주도했던 최남선, 이능화, 신석호, 이병도와 광복후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해 또다시 저질러진 자학(自虐)과 자조(自嘲)의 줄긋기 路線이 강단사학(講壇史學)이라 대표되는 실증주의 역사관이 이 나라의 정의와 진실을 가리우고 亡國의 민족으로 敗殘의 후예(後裔)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과 끊임없이 對話하는 우리 정체성(正體性)의 존재의미이며, 미래로 나아가는 진일보한 인식의 확산이며, 후손들에게 삶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메쎄지입니다.
桓檀古記가 僞書냐, 僞作이냐, 創作이냐라는 물타기 내지는 우선 덮고 보자는 의견들로 부터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당시의 古人들이 집필했던 글이 무수한 핍박과 압박 속에서도 면면히 조상들의 기억속으로 傳受된 不立文字의 위대함을 깨우치기 바랍니다. 古典을 필사(筆寫)하다 보면 字句의 正誤가 있더라도 고스란히 베껴야하는 것이 筆寫者가 지켜야될 不文律입니다. 그러나 筆寫者들은 어쩔 수 없이 단어선택에 있어 당시의 時代相을 반영하게 되고 문화적 편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 한 面만을 보면서 加筆이다,僞作이다,創作이다라고 속단하는 비능률적인 桓檀古記의 僞書 與否를 비난하는 데 쓸 力量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古代史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되는 일입니다.
많은 史料들이 일제하에서 분서(焚書)되었습니다.
지금도 친일세력들로 분류되는 많은 사람들이 自國의 역사보다는 강대국들의 역사에 매료되고 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름잡힌 역사의 골들을 바르게 하고 올곧은 歷史觀을 가짐으로써 찬란한 한민족의 새로운 복본(復本)을 이룩하는데 미력한 힘이나마 결집해야되는 當爲가 이에 존재합니다.
stormmer 올림
■ Subject 환단고기와 천부경은 위서 아니다. 정현숙 [ IP : 61.98.203.80 ]
슬픈마음에서 현생인류가 나타난것이 언제입니까? 적어도 5- 10만년전이라는데 기껏 일만년의 역사가 거짓이라니요? 왜 먼나라의 역사와 우리역사를 연결하여야하지요?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역사시대는 1만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있다고요 지금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미국에서 영어를 사용하지만 영어는 영국 이전에 이탈리아 이전에 이집트 이전에 동방에서 왔겠지요? 님은 순수한 우리말을 얼마나 알고 계신다고 그리고 우리으 진실한 역사를 얼마나 아신다고 여기시나요? 가림토문자라고는 많이 들어보셨겠니요? 가림이란 앞가린다 뒷가린다 라고 아기들이 똥오줌을 가릴수있는 싯점을 이야기하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문자원류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기위하여 만든 부호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언어에서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 그 ㅎ 소리는 목구멍 가장 깊숙한 소리 해(태양)을 가리키는 소리기도 하지요 그리고 우리의 언어는 투박하고 부드럽지못하지요 왜? 그것은 원시적언어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한이라는 언어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언어인지요 한 크다 하나 한가운데 중앙 처음과 시작을 동시에 포함하는 언어가 아닙니까 그것이 천부경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셔요. 시작도 끝도 없다는 그말을 다 포함하는 말이 한이 아닌가요? 그리고 대가리란 말은 크게 가린다는 뜻이 아닐런지요? 우리의 언어가 한자의 영향으로 이두식 표현으로 변한것이 너무많아 순수 우리말을 잃어버렸기에 우리의 역사도 잃어버린것 아니가요? 정말슬퍼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옛날 고구려 시대에 다물흥방가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뜻이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자는 의미였답니다. 그리고 이집트 역사 이전의 수메르라는 잊혀진 역사가 있는데 그 유적지에 발굴된 여왕의 왕관과 얼굴 담배대를 보셨는지요 그여왕의 얼굴은 동양의 얼굴 우리의 얼굴처럼 둥글넙적하였답니다. 환단고기의 구환국중 하나 수밀이국? 어쨌든 저는요 우리의 역사가 단군시대4천년과 그이전을 합하여 1만년이상의 역사를 갖고있음을 확십합니다. 우리언어에서 그뿌리를 찾을수있것이라 생각하고 단국시대의 호랑이족 과 웅족이 싸움에서 웅족이 이긴것은 이민족이고 호랑이는 토착민이라고 생각되고요, 우리의 옛이야기에 호랑이 담배피는 시절... 결국 참지못하고 인간이 못되었다는 의미는 어떤의미든지 싸움에서 패배하였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종교적 전쟁이든 결혼을 의미하든 토작민과 이민족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호랑이족은 흩어젔겠지요 그것이 우리의 역사를 동강이 낸 역사적 사건아니겠어요. 지금의 영어처럼 영국의 글이 미국에서 더욱 활용되듯이 그리고 태초의 인간이 동방에서 해를 바라보고 모여들지 않아겠어요 동쪽으로 동쪽으로 태양을 찾아이동하였을 가능성이 있지요.
■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이름:安 昶 範 작성일:2004.4.25(일) 06:52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濟州大學校 敎授 安 昶 範
차 례
Ⅰ. 問題의 提起
Ⅱ. 桓檀古記 內容은 歷史的 事實과 一致한다
Ⅲ. 僞書論者들의 誤謬
Ⅳ. 맺는말
Ⅰ. 問題의 提起
『桓檀古記』는 桓雄 開天 5808년(서기 1911년) 光武 15年 5월 廣開節에 桂延壽 선생이 妙香山 檀窟庵에서 三聖紀, 檀君世紀, 北夫餘紀, 太白逸史를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환단고기』라 했다고 그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 암흑세계가 지나가고 광명이 비추이듯, 우리 민족의 태고사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실로 환단고기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태고사는 너무나 찬란하고, 우리 민족은 뛰어난 문화와 사상을 지닌 민족이었다. 중국과 인도의 문화만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를 중국과 인도로 수출하였던 문화민족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국가를 창설하고, 종교를 탄생시켰던 문화민족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이웃 민족들로부터 동경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시기질투의 원인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國書庫가 燒失되고 太古史가 神話로 몰리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一然 僧이 편찬한 『三國遺事』에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는 神話같이 서술되고 있는데, 『환단고기』에는 너무나 찬란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환단고기』에는 지금부터 약 9200년 전,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桓國이 있었다는 기록과 이를 理化한 7세 桓仁이 등장하고, 天符經, 三一神誥, 參佺戒經의 경전과 三倫, 五戒, 八條, 九誓 등의 계율과 덕목이 나오며, 환웅천황이 開天하여 三神으로 종교를 창설했다는 이야기, 태고시대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알고 있는 五行思想, 18세 환웅과 배달국에 대한 기록, 단군왕검과 47세 단군에 대한 역사, 그밖에 上下無等, 男女平權, 分權管境制니 하는 민본주의적인 표현, 淸나라 때 생긴 地名이라는 寧古塔 등 도저히 현대적인 常識과 짧은 知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凡例와 跋文을 보면, 桓檀古記 原文인 三聖紀, 檀君世紀, 北夫餘紀, 太白逸史 등 네 책의 撰者와 編者 그리고 所藏者를 소상히 밝히고, 또한 서기 1911년 민족적 치욕인 韓日合邦 직후, 사람 출입이 없는 妙香山 檀君窟 庵子에 숨어서 환단고기를 桂延壽 선생은 줄친 종이에 잘 쓰고, 洪範圖씨와 吳烔振씨가 돈을 내놓음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새기고, 1949년 李裕岦 선생의 위촉을 받아 吳炯基씨가 正書한 사실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곧 환단고기는 원래 印刷本이 아니라 木版本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학자들은 그때의 상황을 정상적인 상황으로 생각하여 환단고기 凡例의 繕寫를 淨書로, 剞劂을 印刷로 誤譯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檀奇古史․桓檀古記․揆園史話․ 등 이른바 在野史書가 僞書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再論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라고1) 주장하면서 환단고기를 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바로 풀릴 경우, 桓檀古記와 檀奇古史 그리고 揆園史話 등 史書가 僞書라는 함정에서 해방되고, 아울러 우리 민족은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세계적 문화민족이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위에 제시한 문제들에 대해 解說과 典據와 考古學的 實證을 제시함으로써 환단고기의 기록이 어느 누구의 造作이거나 僞作이 아니라 歷史的 事實임을 밝히고, 환단고기 僞書論이 實證史學者들의 漢文誤譯에 있음을 밝혀 환단고기가 僞書가 아니라 眞書임을 입증코자 한다. 그러나 본 연구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니며, 앞으로 더욱 보완되어야 할 것임을 밝혀둔다.
Ⅱ. 桓檀古記의 內容은 歷史的 事實과 一致한다.
1. 桓國은 實在했었다.
1) 問題点 : 환단고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9천 2백여년 전, 중앙 아시아의 天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거대한 桓國이 있었고, 이를 3301년 간 無爲而化한 7세 桓仁이 있었다. 그래서 환단고기는 믿을 수 없다는데 대한 解說과 典據와 考古學的 根據이다.
2) 解說 : 桓國은 桓仁에 의해 無爲而化하는 神敎國家로서 神政一致의 國家였다. 神政一致란 新敎(神仙道의 고전적 표현)의 原理가 정치의 원리이며, 신교의 領域이 정치영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桓國의 領土가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라 함은 神敎의 보급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며, 군사적 정치적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시아 일대와 유럽에까지 샤머니즘 현상이 있고, 支石墓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19세기 말엽부터 1930년대에 걸쳐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주변의 유적조사 발굴이 성행하였는데, 그 결과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된 典籍類가 많이 발견되었다.2) 이 典籍類를 불교 측에서는 불교의 전적이라 하지만,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되었으므로 불교의 전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곧, 神敎의 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典籍類의 발견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桓國이 실재했었고, 환국은 태고시대 종교사회였음을 실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환국이 12국으로 되었다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신선도의 12地支에 의한 분류의 표현으로서 지금과 같이 주권, 국민, 영토가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이다.
신선도(신교)와 불교를 연구해 보면, 이들 종교는 근본적으로 같은 중교였고, 신선도를 天山과 불교의 須彌山은 같은 山인데,3) 天山은 중앙 아시아에 현재도 존재한다. 七世桓仁은 불교의 前七佛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신선도를 모르는 사람은 환단고기를 조작할 수도 없는 것이며, 환단고기를 조작할 정도라면, 神仙思想의 대단한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부귀영화와 명예를 초월한다. 따라서 造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 典據 : 그러면 환국 12국에 대한 전거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환국 12연방 가운데 須密爾國(Sumer)과 虞婁國(Ur)이 西洋史에 나오고, 일부의 이름이 中國의 史書인 晉書 裨離國等十國傳에 나온다. “卑離國은 肅愼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하며 領地의 戶數는 二萬이다. 養雲國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하는데 領地의 戶數는 二萬이다. 寇莫汗國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는데 領地의 戶數 五萬餘이다. 一群國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 가야 한다. 이를 헤아리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한다”.4)
肅愼은 삼국시대 이전까지 백두산 북쪽에 웅거하던 나라로서 한편 古朝鮮의 별칭이라 일컫기도 하며,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가를 지칭한다. 晉書는 唐 太宗이 房玄齡, 李延壽를 비롯한 20여명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東晋과 西晉의 史書로서 25史의 목록에도 올라 있는 중국정사이다. 이러한 책에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12제국의 이름이 실려있고, 강역까지 5만여리라는 일치된 말을 하고 있다.5) 이것은 桓國의 실존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2연방의 桓國이 있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누구의 위작이나 조작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제1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4) 考古學的 根據 : 실재적 증거의 문제이다. 최근의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 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산(Novosibirok山) 및 아바칸산맥(abakan山脈)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6) 말라이아뉘아 구석기 유물로 알려진 이 자료는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유물들 가운데는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도 있어서 종래의 서양학자들이 설정하여 놓은 원시의 개념을 뒤엎고 있다. 특이한 것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바칸 산맥은 중앙 아시아의 바이칼 호수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환인왕조가 7세 3301년 간 통치할 때의 중심지로 할려져 있다.7) 따라서 환인의 환국시대가 비록 태고시대라 하더라도 원시시대라 할 수 없고, 환국의 존재를 함부러 부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곧 환국의 실재에 대한 환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이 실려있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부정함은 이론을 무시한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 할 수 있다.
2. 桓雄天皇의 개천設敎 歷史的 事實이다.
1) 問題點 : 桓檀古記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지금부터 약 6000년 전, 倍達國의 初代 桓雄天皇이 開天하여 三神으로 종교를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부터 6000년 전은 흔히 원시시대라 한다. 桂延壽 선생이 목판에 글자를 새겨 환단고기를 보관할 때는 韓日合邦 직후로서 국가가 累卵의 위기에 처한 때였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하였다 함은 민족의 긍지를 높이고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조작이 아니냐 한는 것이다. 이 문제는 본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비교적 자세히 논증한다.
2) 桓雄天皇은 부처님으로서 실존인물이었다 : 桓雄의 桓을 파자하면, 桓은 木․二․日의 會意文字이다. 木은 東方, 二는 하늘과 땅, 日은 태양, 日光, 光明, 빛을 의미한다. 雄우은 “어른, 우두머리, 수컷, 아범(아버지․남편의 비칭)”의 뜻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면, 桓雄은 밝으신 어른, 밝아범, 박가범(薄伽梵)을 의미한다. 불교사전에 薄伽梵은 바가바(婆伽婆)로서 阿彌陀佛의 다른 이름이라 하였다.8) 이는 환웅천황이 부처이며 아미타불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절에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釋迦佛을 부르지 않고, 南無阿彌陀佛을 불렀던 것이며, 지금도 釋迦佛보다 南無阿彌陀佛을 많이 호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阿彌陀佛은 남쪽에 없다”는 뜻의 南無阿彌陀佛이라 호칭하는 것도 이유 있는 것이며, 그 속에 어떤 암시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9) 阿彌陀佛의 衣裳은 全身을 가리고 있는데, 그것은 印度風이 아니라 韓國風이다. 天皇은 天道를 대각한 居發桓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환웅천황이 신화적인 가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란 것이다. 그 증거가 있다. 첫째, 神市歷代記에 의하면, 환웅천황은 배달국의 初代天皇으로서 94년 간 皇立에 있었고, 120세까지 살았다. 이는 역사적 실재 인간으로 생존했던 기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은 역사적 실재 인물인 것이다. 다만 生年月日時와 卒年月日時만이 안 밝혀지고 있을 뿐이다. 둘째, 종교창설은 역사적 실재 인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환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셋째, 종교를 창설함으로써 환웅천황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국가적으로는 국토를 수호하는 護國神 내지 山神이 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오늘날 일본에 건너가서 山岳信仰의 대상이 되고, 그 遺像이 北九州 福岡縣 田川郡 添田町 英彦山 神宮에 안치돼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성수 교수 지음 『단군문화기행』을 참고해주기 바란다.10)
3) 桓雄天皇의 開川設敎에 대한 기념행사가 오늘날 開天節 行事이다 : 우선 開天의 意味이다. 開자는 “열리다. 지혜의 문이 확 열리다. 크게 깨치다. 크게 통하다. 꽃이 피다”의 뜻이며, 天자는 하늘․땅․사람의 會意文字로서 天一․地一․人一 三神一體의 天道를 의미한다. 곧 開天이란 “天一․地一․人一 三神一體의 天道를 크게 깨치다”는 뜻이다.
設敎의 意味이다. 設은 “짓다. 만들다. 세우다. 설치하다. (은혜룰) 베풀다”의 뜻이다. 敎는 “가르치다. 본보이다. 교육의 지침. 종교”의 뜻이다. 곧 설교는 “종교를 창설하다. 종교를 세우다”의 뜻이다.11) 說敎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정리하면, 開天設敎란 환웅천황께서 天一․地一․人一 三神一體를 크게 깨치어 종교를 세웠다는 뜻이다. 檀君世紀에 단군왕검이 개천 1565년 10월 3일에 朝鮮國을 세웠다 하였고,12) 금년이 단기 4334년이므로 환웅천황이 開天設敎한 때는 지금부터 (1565+4334-1=)5898년 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곧 오늘날의 開天節 행사는 桓雄天皇의 開天設敎를 기념하는 행사인 것이다. 이와 같이 환단고기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眞書인 것이다.
4) 三神은 宗敎創設 根本原理이다 : 환웅천황께서 三神으로 종교를 세웠다고 한다. 三神이란 天一․地一․人一을 의미한다.13) 『一』은 天地人을 어떠한 위치에서 파악하느냐 하는 天地人의 쓰임(작용) 이다. 이에 따라 一을 氣의 위치에 두고 天地人을 파악하면, 天一․地一․人一은 天氣․地氣․人氣를 의미한다. 天氣(공기와 햇볕)․地氣(물과 곡식)․人氣(부모조상의 유전)는 人體系에서 氣․心․身 내지 命․性․精과 불가분적인 관계를 지닌다. 氣․心․身 내지 命․性․精을 닦고 수련하는 것이 道․佛․儒의 三敎이다.14) 그래서 丹書口訣에 “天․地․人을 三才라 하고, 道․佛․儒를 三敎라 하니, 三才에서 三敎가 성립된다”고 하였던15) 것이다. 天一은 太陽系, 지일은 地球系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周易 風地觀에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보니 四時의 운행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聖人이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세우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하였고16) 동문선에도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세우니 태평이 가득하다”17)하여 주역과 동문선이 태고시대에 우리 사회에 聖人이 있었고, 그 聖人이 4계가 돌아가는 天道에 의해서 종교를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곧 道․佛․儒 三敎는 자연적인 天道를 배경으로 성립됨으로서 거기에 수용이니 조작이니 재구성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환단고기에 종교를 고의적으로 조작해 기록했다면, 그 종교를 三神思想이나 4계가 돌아가는 원리에 의해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종교를 三神思想과 4계가 돌아가는 원리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고, 환단고기를 僞書라함은 동양철학의 원리인 天道를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5) 桓雄天皇의 宗敎創設에 대한 典據와 實證이 있다.
첫째로 환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했다는 전거가 있다. 천도교창건사를 보면, 천도교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이 “우리 道는 대운은 天皇씨의 근본원리를 회복시킨 無極之運이며, 천황씨는 先天開闢의 始祖를 의미한다”고 하였다.18) 의암 孫秉熙도 “우리 대선생(최제우 선생)께서 비로소 無極大道와 天德의 근본원리와 接靈降話의 이치를 밝혔다고 하나, 開闢初의 天皇氏로부터 처음 비롯된 運이라 하니 의심하지 말라”하였다.19) 즉, 최제우와 최시형 그리고 손병희 선생은 先天時代에 開闢의 始祖인 天皇이 있었고, 그 천황에 의해 성립된 고유종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곧 동학은 환웅천황의 실존과 종교창설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환단고기의 기록이 조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道․佛․儒 三敎一體 思想이 원래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라는 전거가 있다. 崔致遠鸞郞碑序에 의하면,우리 나라에는 태고시대부터 道․佛․儒 三敎一體의 玄妙之道인 神仙道가 있었다. 최치원난랑비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崔致遠鸞郞碑序 曰 國有玄妙之道 曰 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20)
다음은 위의 원문에 대한 필자의 국역이다.
최치원난랑비서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道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는 종교를 일으킨 원천으로써 신선도의 사서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복적으로 (도․불․유)3교의 사상을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벼슬)의 교지와 같고,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함은 주나라 주사(노자의 벼슬)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정반왕의 태자)의 교화와 같다.21)
곧, 우리 나라의 정사인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의 崔致遠鸞郞碑序가 우리 나라에 원래 道․佛․儒 三敎一體의 成立宗敎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인 것이다.
6) 固有宗敎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실증이 있다.
1) 1983-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능원현 우하량 유적지를 발굴조사하였는데, 구릉상에서 제사유적과 神殿, 塑造神像과 靑銅器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방사선 측정한 결과 기원전 3500년으로 나왔다.22) 중국 요령성은 옛날 靑邱라 불리웠던 곳이며, 청구는 배달국이 있던 곳이다. 따라서 요령성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은 배달국의 존재와 고유종교의 실체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1970년 압록강 중상류 길림성 집안시 장천지구 제1호 고분 전실에서 고대의 예불도가 발견되었는데, 불상의 모습과 의복이 인도풍이 아니라 한국풍이다.23) 이것 역시 우리 나라에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실증인 것이다.
3) 그밖에 종교적 실재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들면, 단군릉에서 발견된 금관조각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의 금관, 사찰 내의 탑과 범종, 대웅전과 하옥형의 사찰건물, 칠성각과 산신각, 그밖에도 내에 있는 불교관련 모든 사물이 신선도의 실재를 증명한다.24)
이상 같이 환웅천황이 天道를 깨치어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적이든 실증적이든 거의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天符에 근원하여 地轉에 合되고 人事에서 끝을 맺는 太白眞敎가 있었으며, 환웅천황이 開天하여 三神으로 종교를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하여,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過誤이며 誤謬라 할 수 있다.
3. 天符經과 삼신사상은 불가분적인 관계이다.
1) 問題點 : 종교가 있엇으면, 당연히 경전과 계율과 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환단고기에 천부경․三一神誥․參佺戒經등의 경전과 五訓․五事․五戒․三倫․八條․九誓 등의 계율과 敬天癸인 蘇塗癸天儀式이 나온다. 그러나 서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경전과 계율이 어느 국수주의자의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에 대한 전거와 근거이다.
2) 典據 :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하여 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에 “세상에 전하기로는 세상에 전하기로는 牧隱 李穡과 休崖 范世東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 시속에는 한 자의 글이라도 程頣 朱熹에 맞지 않으면 뭇 사람들의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모여들고 유학자들의 칼날이 바야흐로 사나우니 天經과 神誥의 가르침을 전하려한들 어찌 용이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五隱 중의 한 사람인 農隱 趙元吉 선생의 遺集(農隱集)에서 발견된 天符經 原文을 현재 出版 중인 졸저 『桓雄天皇과 韓國固有思想의 誕生』서두에 실었다.
3) 論理的 根據 : 天符經․三一神誥․參佺戒經은 불교의 三藏과 같이 經․論․律의 관계로서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세 경전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부정되면 세 경전이 모두 부정되고, 어느 하나가 인정되면 세 경전이 모두 인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天符經의 초두를 보면“人始無始 一析三極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이라”하여 天符經의 기본사사은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이다. 우리의 민족에도 三神上帝니 三神帝釋이니 하는 三神信仰이 있다. 사마천의 史記 봉선서에서도 천일․地一․人一(太一)의 三神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 같이 天符經과 三神思想이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고, 三神思想은 天道로서 우리의 民俗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따라서 天符經을 僞書라 함은 있을 수 없는 문제이며, 三一神誥와 參佺戒經은 물론 그 밖의 각종 계율과 종교의식이 실려 있다 하여 桓檀古記를 위서라 부정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과오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한 大倧敎가 天符經․三一神誥․參佺戒經을 기본경전으로 하고, 三倫․五戒․八條․九誓 등을 기본계율로 한다. 이를 알면서도 이들 경전과 계율을 부정함은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학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개인의 명예만을 위한 것인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4. 6000년 전후의 靑銅器기 있다.
1) 問題點 : 실증사학계는 국가의 성립을 청동기 사용 이후로 본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청동기 사용은 B.C. 10세기 이상을 올라가지 않는다고 가르쳐왔고 그렇게 배워왔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의 실증사학계는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한다.25)
2) 靑銅器 出土 : 그러나 최근 평양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고조선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청동기들과 금동제품들이 많이 나왔다. 예컨대, 기원전 2500년경에 해당하는 상원군 룡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는 비파형 창끝이, 4호 고인돌 무덤에서는 청동기단추가 나왔으며,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 무덤에서는 그동귀걸이가 발굴되었다.26) 고조선의 비파형 단검과 좁은 놋단검의 시원 연대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거승로 보이는 평양 덕천시 남양유적의 집자리들을 거기에서 나온 질그릇을 시료로 하여 핵분열 흔적법(FT, Fission Track)으로 측정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5800년 전후라는 절대년대치가 나왔다. 이들 연대 값은 단군조선 이전 시기에도 평양을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당시 주민들이 청동기를 만들어 썼다는 것을 실증한다.27) 따라서 청동기 사용을 근거로 보더라도 우리 민족의 태고사와 신선도는 부정될 수 없고,28) 그러한 기록을 실었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실증사학자들은 북한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다.
3) 解說 : 첫째의 이유는 북한의 주장을 수용할 경우, 우리 민족의 청동기사용이 선진국가인 서구(西歐는 B.C. 3000년경) 보다 500년 내지 1500년이 빠르므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청동기 사용은 우리 민족만이 바른 것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의 청동기 사용은 B.C. 4000-3500년경이고, 이집트 지방에서는 B.C. 4000년경이며29), 만주 요령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B.C. 3500년경이다.30) 더욱이 우리 민족은 지금부터 5898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도한 성립종교를 탄생시켰고,31)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고, 平壤은 古朝鮮의 중심지이며 馬韓의 古都였다는 사실을 안다면,32) 평양에서 출토된 靑銅器 절대 연대가 서구보다 훨씬 앞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발굴보고를 무조건 부정함은 북한에 대한 거부반응에서 비롯된 것이며, 민족적 열등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4) 핵분열 흔적 절대연대 측정원리 : 둘째의 이유는 북한 당국이 적용한 유적유물 절대연대 측정방법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의심이다. 북한당국이 적용한 절대연대 측정방법인 핵분렬흔적(FT, Fission Track) 연대측정원리는 시료 속에 포함된 우라니움의 핵분렬 붕괴량과 현재량을 검출하여 측정함으로써 유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것이다. 우선 이 방법의 측정범위는 넓어 수 백년에서 수 십 억년까지다. 측정한 연대 값의 믿음성이 높으며 오차가 비교적 적다고 한다. 그래서 FT법은 지질 및 고고학 분야에서 널리 적용되어 제4기 지질학적 연대는 물론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유물유적들의 연대측정에 적용되고 있다.33) 그러므로 이 방법을 썼다고 해서 북한의 경우에만 문제 삼는다면,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 三國遺事의 古朝鮮記는 태고사의 隱喩的 表現이다.
환단고기에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가 모두 역사로 기술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神話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에 대한 해설이다.
『三國遺事』 古朝鮮記의 내용을 요약하면, “옛날 桓因의 서자 桓雄이 天下에 뜻을 두고 太白山頂에 내려와 弘益人間 在世理化하여 神市를 베풀고, 후에 熊女와 婚姻하여 檀君王儉을 낳고, 단군왕검이 朝鮮國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에 반해 환단고기에는 우리 민족의 태초 국가로서 7세 桓仁이 3301년 간 無爲而化하던 중앙 아시아 天山 중심의 桓國이 있었고, 桓國의 末 庶子部에 있던 桓雄이 太白山頂에 이르러 弘益人間 在世理化함으로써 神市를 베풀었고, 그 후 188세 居弗檀桓雄이 熊族의 女人과 혼인하여 檀君王儉을 낳고,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세웠으며, 朝鮮國은 47세를 전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이 실려있다.
곧 환단고기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면, 삼국유사의 기록은 神話같기도 하다. 이래서 환단고기의 기록은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이기 위한 僞作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우선 桓檀古記의 기록과 三國遺事의 기록을 비교하면, 환단고기에는 天山, 桓仁, 庶子部, 熊族(雄族), 虎族(虎家)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天, 桓因, 庶子, 熊虎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위와 같은 표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桓仁의 桓을 파자하면, 桓은 木과 二와 日의 會意文字이다. 木은 東方을 의미하고, 二는 하늘과 땅, 日은 태양․일광․광명을 의미한다. 곧, 桓仁은 “동방의 밝은 어진이”라는 뜻으로서 인간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어진 聖人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 桓因을 해석하면 “桓은 萬有의 桓因”이라는 뜻으로 桓因은 하늘님이며 帝釋을 의미한다. 天山은 중앙 아시아에 있는 산명이며, 天은 天上을 의미한다. 庶子部는 桓國의 한 部署名稱인데 庶子는 첩의 자식을 지칭한다. 熊族과 虎族은 인간이며, 熊虎는 동물이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가 神話로 오해받게 되는 동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원상 회복하면, 삼국유사의 하늘(天)은 天山, 桓因은 桓仁, 庶子는 庶子部, 熊虎는 熊族과 虎族의 약칭 내지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용한 書名을 밝히지 않고 막연히 기록한 옛 기록(古記)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사실을 은닉했을까? 삼국유사의 편자 一然 僧(A.D.1206-1289)의 생존시대는 절대적 군사력을 가진 蒙古가 高麗政權을 지배하던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에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이르는 桓國과 倍達國 그리고 檀君朝鮮이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蒙古․滿洲․中國의 영토가 모두 우리 영토였다고 하는 주장과 같다. 그것은 몽고에 대한 정면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정사는 어떠한 형태로든 남겨야 한다. 그래서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 곧 桓仁․桓雄․檀君을 祖․父․孫으로 압축 은닉해서 표현한 것이 삼국유사의 고조선기라 할 수 있다. 곧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기록을 할 수 있다. 곧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기록을 사실대로 해석하면, 그것은 神話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기록이 민족의 긍지를 높이기 위한 위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12. 文字가 있었다는 典據와 實證이 있다.
1) 문제점 : 桓檀古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환웅천황) 神市에 鹿書, 紫府에 雨書, 蚩尤에 花書, 伏義의 龍書, 檀君에 神篆(加臨土, 加臨多)이 있었고, 漢子 역시 神市의 遺法이라 하고, 이러한 字書들은 白山․黑水․靑邱 등 九黎의 지역에 널리 쓰였다고 하였다.34) 특히 가림토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제작 동기와 그 자형까지 밝혀주고 있다.
경자 2년(B.C.2181) 시속(時俗)이 같지 아니하고 방언이 달랐다. 象形表意의 眞書(漢字)가 있었으나 十家의 고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못하는 일이 많고, 白里의 국가에서는 글자를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三郞 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를 加臨土라 하며, 그 글은
“ ㅣ ㅡ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 X ∋
ㅇ ㄱ ∪ ㅁ ㄴ △ ㅈ ㅊ ∧ ∧ ㆆ ∧ M
ㅁ ∪
ㅣ⊃ ㄹ ㅐ ㅒ ㅡ ㅡ ∧ ㄱ ㅜ ㅠ
△ ㄱ ㅈ ∧ ㅡ ㅡ ㅍ“
이다.35)
이상과 같이 태고시대부터 우리 민족사회에는 鹿書, 雨書, 花書, 龍書, 神篆(加臨土), 漢字가 있었다. 특히 加臨土의 제작동기를 보면, 한자가 있었으나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龍書는 이를 범어로 번역하면 Devanagari로서 梵字를 의미하는데, 梵字는 누구나 거의 印度族의 印度文字로 알고 있으며, 漢字는 중국에서 전래된 支那文字로 알고 있다. 그리고 한글은 근세조선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래서 환단고기를 더욱 위서라 부정하게 된다.
2) 典據와 實證 : 종교가 있으면 반드시 경전이 있게 마련이며, 경전이 있으면, 반드시 문자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부터 약 6000년 전, 환웅천황이 설파한 종교가 있었다. 그러면 환웅천황 이전 또는 그 시대부터 문자가 있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전거를 제시한다.
첫째. 고대 한글 곧 가림토에 대한 전거이다.
世宗御製訓民正音序文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新製하였다고 하였다.36) 新製란 舊製의 반대말로서 구제에 근거하여 새로 제작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종 23년 갑자에 반포한 세종실록 103권에 “諺文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前朝鮮 시대에 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하였으며,37) 또 계해 25년 12월 조에도 “10월 초 친히 말글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고 하였다.38) 한글창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申叔舟의 후손인 18세기의 申景濬이 쓴 『訓民正音韻解』에도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쓰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그 모양이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나라의 말을 적어내기에는 모자라나 일부 제한된 범위에서 쉽게 쓸 수 있게 되어있다고 하였다.39)
우리 나라의 문헌이 아닌 일본의 옛 문헌인 행지의 『훈석언문해』에도 훈민정음에 대하여 “옛날체와 지금체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옛날체는 세 나라(삼한 곧 고조선) 시대 초에 만들어 전하는 것이고, 지금체는 이조 세종 때에 옛날 글자를 고쳐 만든 것이다. 지금 그 나라에는 옛날 글자는 없어지고 다만 지금 것만 쓰이는데 옛 글자는 지금 일본에서 전해 온 ‘비인서’<한국인의 글자라는 뜻으로서 일본에서는 神代文字라 이르고 있다>이다”라고 하였다.40)
이상의 전거 외에도 집현전 학자인 鄭麟趾의 훈민정음서문,41) 崔萬理의 上疏42), 신채호의 국문의 기원43) 등에서 단군조선 시대에 옛 한글이 있었고, 현재 우리사회에서 쓰고 있는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제가 아니라 단군조선 시대의 옛 한글을 잘 다듬어 정리한 문자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1994년 12월 “古한글 비석 日서 발견”이라는 題下의 神代文字 기사가 문화일보에 실렸다.44) 神代文字는 일본의 신기 3종인 거울 뒷면에도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고, 수 많은 神社의 位牌 안에 지금도 신성하게 보전되어있다.45) 일본 대마도 아즈하라(嚴原)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伊勢神宮 등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46) 가림토의 모어로 보이는 최고형의 문자가 최근 만주와 경상남도 산청군 단속사터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47) 이상과 같이 기록과 실재적 증거에 의하면, 현재의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 시대의 가림토문자를 다시 잘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흔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근세조선 시대는 절대군주 시대이다. 그러므로 창제란 표현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공을 신하들이 절대군주인 세종대왕에게 돌리기 위한 충성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곧 창제란 표현은 진실이 아닌 아부에서 비롯된 표현인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둘째, 漢字는 원래 우리 민족에 의해서 창제되기 시작했다.48)
한자는 字形․字音․字義의 3요소로 구성돼있다. 자음을 표기하는 발음부호인 反切音이라 한다.49) 반절음은 한자의 字音을 漢字로 표기한 一字一音의 발음부호로써 한자를 창제한 민족의 발음을 기준으로 이뤄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깝게 발음하는 민족이 한자의 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은 北京을 ‘북경’, 商海를 ‘상해’라 발음한다. 그러나 지나족은 北京을 ‘베이징’, 商海를 ‘샹하이;라 발음하여 一字二音인 경우가 있다. 반절음 역시 거의 우리 민족의 발음과 같고, 지나족의 발음과는 틀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임승국은 한자 53,525자의 발음부호인 반절음이 모두 우리 말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이계가 황하문명의 주인공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하였다.50)
한자는 상형문자로서 한자를 만든 민족의 민속을 나타내기 마련인데, 한자의 상형이 우리 민족의 민속을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의 신화인 태양과 금까마귀를 상징한 날일(日)자, 집 속에 돼지를 기르는 민속을 반영한 집가(家)자 등이다. 진태하 교수는 이상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자(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옛한글 혹은 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불러야 옳다고 하였다.51) 한자의 창제설에 倉頡設이 주류를 이루고, 起源說에 甲骨文字 起源說이 있다. 그런데 창힐이 동이족이고, 갑골문도 동방기원설이 주류를 이룬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한자는 우리 민족에서 처음 창제되기 시작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셋째, 복희의 龍書는Devanagari(데워나가리) 곧 梵字를 의미한다.
龍書는 용 무늬 모양의 문자를 이르는데, 대승경의 산스크리트 문자 곧 Devanagari가 용 무늬이고 발음체계가 우리말과 같으며,52) Devanagari라는 뜻이 용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범어의 語義․語法이 우리말과 같다.
1) 어의가 우리말과 동일하다. 예컨대, 붇다(Buddha) 곧 佛陀는 세상을 “밝게 하는 사람, 밝은 사람”의 뜻으로서 우리 말의 “붉다 또는 밝다”와 같다. 니르반나(nirvana) 곧 열반(涅槃)은 안락(安樂), 견성성불(見性成佛), 곧 ‘깨치다. 깨치었느냐‘를 의미하는데, 우리 말의 “닐봤나? 널봤나? 너를 보았느냐”의 뜻과 같다. 석가세존의 열반지인 구시나라(拘尸那羅)는 구시국(拘尸國)을 의미한다. 이를 보면, `나라(那羅)`는 곧 국가를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국가를 `나라`라고 한다. 菩薩은 “보다와 살리다”이다. `차마(叉摩)`는 `참다(忍)`의 뜻인데 우리 말의 `참다`와 같다.
2) 어법이 우리 말과 동일하다. 범서(범어)는 문장구조에 있어서 감탄문을 제외하면, 어떤 경우에도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를 선행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 말의 어순과 일치한다. 범서는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성․수․격이 그 어미 변화로 주어․목적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우리의 언어도 범어와 같이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어미변화 즉 조사의 변화에 의해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예컨대, 명사 또는 대명사에 “는․은․가․이”를 붙이면 주어가 되고 “을․를”을 붙이면 목적어가 된다), 또한 동사의 어미변화로 인칭․수․시상․법․태를 나타낸다(예컨대, 하라․하였다․하겠다․하자).
넷째, 현재에도 녹도문이 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지금 南海縣 郞河理의 岩壁에 神市의 古刻이 있다고 하였다.53) 그런데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양하리 錦山 암벽에 사슴뿔 모양의 옛 문자(廘書)가 새겨져 있다.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영변지를 보면 천부경 81자를 한자로 기록하고 그 뒤에 흔히 神誌文字라는 사슴뿔 모양의 문자가 소개되고 있다.54)
이상과 같이 환단고기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모순인 것이다.
7. 五行思想은 中國思想이 아니라 원래 神仙道의 思想이다.
환단고기에 五行, 五行六正, 五行治水法 등 木火土金水의 五行思想이 자주 거론되는데, 오행사상은 중국사상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天一․地一․人一의 『一』의 순환론의 입장에서 天地人을 파악하면, 天一은 太陽系, 地一은 地球系, 人一은 人體系를 의미하기도 한다. 地球가 태양 주위를 한번 회전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의 四季가 생기고, 四季를 성격과 기능에 따라 간략히 표현하면, 봄은 木, 여름은 火, 가을은 金, 겨울은 水에 해당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四季는 地球가 돌아가서 생김으로 地球인 土가 중앙에 위치하여 木․火․土․金․水의 五行이 된다. 또한 五行의 성격과 기능을 인체의 성격과 기능에 비유하자면, 五行은 五臟과 五指의 성격과 기능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太白眞敎(神仙道)는 天符에 근원하여 地轉에 合하고 人事에서 끝난다고 한 것이며,55) 五行思想은 中國思想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해 보면, 중국의 儒敎와 道敎 역시 太白眞敎(神仙道)의 한 支流임을 알게 될 것이다.
8. 民本主義的인 表現은 三神一體의 政治的 表現이다.
1) 問題點 : 환단고기 환국본기를 보면 상하에 차등이 없으며(上下無等), 남녀의 권한이 평등하고(男女平權), 정사는 越權하는 일이 없다는 등 민본주의적인 표현들이 있다. 그래서 환단고기의 내용이 위작이 아니냐 하는데 대한 解說과 實證이다.
2) 해설 : 신선도의 발생원리는 天一․地一․人一의 一體이다. 여기에서 『一』의 쓰임을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天地人一體를 파악하면, 天地人一體는 上中下一體․人權尊重․人間平等․男女平等․身分平等․萬民一體․生命平等 등 민본주의 사상이 되고, 天一의 작용인 造化, 地一의 작용인 敎化, 人一의 작용인 治化를 정치적 법률적인 用語로 바꾸면, 造化는 立法, 敎化는 司法, 治化는 行政의 의미로 풀이된다. 곧 三神一體는 立法․司法․行政의 三權分立 합의제가 된다. 단기고사를 보면, 前朝鮮 제13세 단제 흘달 16년조와 後朝鮮 제7세 단제 등을 2년조에 국가권력을 입법․사법․행정으로 3분하여 실시하였다 하고56)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13세 흘달 16년(B.C.1767)에 州와 縣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으며,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고57) 한 것은 모두 삼신일체 사상의 정치적 표현인 것이다.
3) 실증 : 김상일 엮음,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을 보면, 桓國 12연방의 하나인 수밀이국(Sumer국)에 B.C.3000년 경 의회제도와 법원이 있었고, 아시아에서 왔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58) 따라서 환단고기에 민본주의적인 표현들이 있다고 하여 환단고기를 僞書라 불신함은 제 민족의 사상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9. 寧古塔은 地名이 아니라 寧安의 옛 塔이다.
1) 문제점 : 환단고기에 寧古塔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영고탑은 중국 淸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이라 주장하면서 淸나라 이전의 단구조선 시대에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59) 이에 따라 환단고기를 청나라 건국 이후의 僞作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60) 그 근거를 보면, 『滿洲原流考』를 들고 있다. 거기에 대한 해설이다.
2) 解說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만주어로 여섯은 寧姑라 하고, 자리는 特으로서 寧姑特에서 寧古台로, 寧古台에서 寧古塔으로 와전된 것이며, 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라 했다.61) 곧, 영고탑이 지명이라는 만주원류고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희승 『국어대사전』에 영고탑을 寧安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古城이라 하였다. 『星湖僿說』에도 寧古塔은 烏剌(오랄), 艾滸(애호)를 합하여 東三城의 하나라 하고,62) 城이 높고 濠(해자. 도랑 못)가 깊다고 하였다.63) 이를 보면, 영고탑은 해자로 둘러싸인 城壁 안에 있고,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 성벽 안에는 옛날 절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절이 없어진 후에는 그곳에 한 때 왕궁이 있었거나, 아니면 막대한 세력을 가진 어느 추장의 저택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환단고기에도 영고탑은 단군조선 시대부터 존재하여 거기에서 회의를 하고, 환인․환웅․치우․단군왕검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때로는 탑을 수축했다는 기록도 있고,64) 그밖에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65) 水雲敎의 元老이시며, 제 18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佛虎子 文泰奎 선생이 저술한, 『弓乙道德』을 보면, 수운교의 신앙대상이며, 우주를 상징한 天壇의 유래를 밝히는 대목에서 “일찍이 환웅천황 시대에는 상제님의 位인 天壇(神壇66))에 모셨고, 단군시대에는 만주 寧古塔에 모셔 敬天하였으며, 근세 고종황제께서는 서울의 圖丘壇에 모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67) 이를 보면, 영고탑은 神壇을 모시는 건물 모양의 塔인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판단하면, 寧古塔은 글자의 뜻 그대로 영안의 옛 탑으로서 단군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었던 것이다. 淸나라 때에 생긴 地名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영고탑이 없어지고 오래되면서 지명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光化門은 조선조 태조 때에 지은 경복궁의 南門이며, 鐘閣은 서울시 종로 1가에 있는 종을 달아매는 누각인데, 오늘날 광화문과 종각은 한편 지명이 되고 있다. 그와 같이 현재는 영고탑이 지명이 되고 있으나, 원래 지명이 아니라 寧安의 옛 塔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고탑을 이유로 환단고기를 僞書라 함은 연구 부족에서 비롯된 오해라 할 수 있다.
10. 國號와 都邑地와 建國年代가 一致한다.
『桓檀古記』 檀君世紀에 戊辰 원년에 檀君王儉이 九桓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고, 舊規를 부활하여 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워 國號를 朝鮮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도 魏書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檀君王儉이 있어 도읍을 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朝鮮이라 하였는데 堯와 같은 때였다”고 하였다.68) 또 『帝王韻紀』는 단군왕검의 조선건국을 戊辰이라 밝히고 있다. 즉 國號 朝鮮과 都邑地인 阿斯達과 建國年代에 대한 기록이 환단고기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동일하다. 이것 또한 환단고기가 僞書가 아님을 입증한다.
11. 太白逸史의 記錄은 抱朴子 記錄과 一致한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이르기를 “三皇內文을 紫府先生이 黃帝 軒轅에게 주어서 마음을 밝히고 義로 돌아가게 하였다. 선생은 항상 三淸宮에 계시니 그 궁은 靑邱國 大風山의 陽地에 있다고 하였다.69) 이는 청구국(배달국의 이칭) 자부선생이 도교의 기본경전인 三皇內文을 중국의 황제 헌원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 4세기 경 지나의 葛洪 『抱朴子』 내편에 ”옛적에 黃帝가 있었는데 동으로 靑邱에 이르러 風山을 지나다가 紫府先生을 뵈옵고, 삼황내문을 받아 갔다“하였다.70) 여기에서 보면 지나인이 기록한 포박자의 기록과 우리 민족의 기록인 태백일사의 기록이 서로 일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기록은 조작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12. 天文現象이 一致한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환단고기』『단기고사』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현상을 천문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한 결과 “2백 50년에 한번 관측되는 五星結集이나 日蝕․潮水干滿의 차이 등 기록이 96% 내지 99.3%로 정확하다며, 단군조선이 한낱 신화가 아니라 실재하였이 증명된다고 결론을 지었다.71) 이에 대해 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교수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이다. 이들 사서를 연구하여 보지도 않고 백안시하여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3. 기타 記錄이 一致한다.
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에 장수왕이 즉위하자, ‘建興 ’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72) 建興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光背銘에 기록된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에 나타나고 있다.73) 그리고 같은 책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太祚, 할아버지는 子遊, 증조부는 廣이라고 밝히고 있다.74)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인 泉男生의 墓誌에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子遊’라 명기하고 있다.75) 따라서 이상 환단고기의 기록은 사실과 일치하고, 오히려 기존 史書보다 더욱 자세하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오해라 할 수 있다.
또한 환단고기에 평양의 명승지인 牧丹峯이 나오고, 고구려의 교육기관인 扃堂(경당)과 관직명인 褥薩(욕살)이 나온다. 이로 인해 환단고기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나,76) 모란봉은 산명으로서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이며, 扃堂은 교육기관이며, 褥薩은 관직명인데, 蘇塗祭天儀式과 함께 있었던 고대의 제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高麗가 高句麗의 이름을 계승하고, 近世朝鮮이 古朝鮮의 이름을 이어받은 격이다. 따라서 모란봉과 경당과 욕살 역시 ktlf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14. 桓檀古記가 지금 出現한 理由와 그 밖의 문제
『桓檀古記』는 지금이야 갑자기 세상에 나왔으니 어느 국수주의자의 위작이 아니냐 하고 의심할 수 있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史書에 의하면 몽고와 만주대륙과 지나대륙 일대가 거의 태고시대 우리 민족의 강토였다. 그러므로 이들 사서를 인정하면 우리 나라와 蒙古 및 支那 사이에 국경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환단고기는 숨어있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에야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환단고기는 자체 내에도 불일치되는 내용이 있고, 다른 古書와도 상치되는 내용이 일부 있다. 그래서 환단고기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하여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연구해 보지도 않고 부정함은 책임회피인 것이다.
Ⅲ. 僞書論者들의 誤謬
1. 桓檀古記 誤譯
1) 桓檀古記의 由來 : 僞書論者들이 『환단고기』를 위서로 誤認하게 된 과오를 지적하기 전에 凡例의 기록을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유래를 요약 소개한다.
三聖紀全 上篇은 신라의 고승 安含老가 撰한 것으로 桂延壽 先生宅에 所藏됐던 것이며, 三聖紀全 下篇은 元董仲이 撰한 것으로 白進士 寬黙에게서 얻었다 하고, 檀君世紀는 고려의 문인 李嵒이 편찬한 것으로 이 책 역시 백진사 관묵에게 얻었다고 했다. 北夫餘紀 上下는 고려 말기의 학자 范樟이 撰한 것으로 朔州 梨洞 李進仕 亨栻의 집에서 얻었다고 했다. 太白逸史는 李嵒의 玄孫 李陌이 엮은 것으로 海鶴 李沂 선생이 소장했다. 개천 5808년(서기 1911), 海鶴 李沂 선생의 감수를 거쳐 桂延壽 선생이 정성을 다하여 繕紙(줄친 종이)에 글을 잘 쓰고, 洪範圖와 吳烔振의 出金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나무판자에 새기게 되었다.77) 그 뒤 1920년 桂延壽 선생이 운명할 때, 제자 李裕岦에게 다음의 庚申年(1980)이 되거든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跋文을 보면, 개천 5846년(서기 1949) 吳炯基氏가 李裕岦氏로부터 위촉을 받고 환단고기를 正書하였다.78) 그 뒤 개천 5876년(서기 1979) 수 십 부가 영인된 후, 廘島昇라는 日本人이 환단고기를 번역하고 영인본과 함께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환단고기의 내력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사학자들과 일부 사계학자들이 是非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직접 소개한다.
2) 桓檀古記 僞書論者들의 主張 : 정신문화연구원의 정영훈은 제기하기를 “적어도 이 책(환단고기)이 계연수의 『범례』와 오형기의 『발문』에서 말하는 1911년 편집과 1949년 필사 사실부터 확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 확인되더라도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는 대단할 것이며, 李裕岦 선생이 창작한 ‘僞書’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였다.79) 다시 말하면, 1911년의 編輯과 1949년의 筆寫說을 확증할만한 物證이 없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냐 하고 의심된다는 것이다. 역설할 경우, 物證이 있으면 僞書가 아니라 眞書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희대의 趙仁成은 "만약 이유립이 印刷本을 갖고 있었다면 굳이 그것을 淨書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환단고기』 공개자로 알려진 이유립도 인쇄본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凡例〉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환단고기』는 인쇄되었던 것일까.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80) 곧 淨書를 했다는 것으로 볼 때, 印刷本이 없는 것이 확실하고, 인쇄본이 없으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3) 問題되는 內容과 僞書論者들의 過誤 : 그러면 僞書論者들이 어디에서 과오를 범하고 있는가? 문제되는 내용은 『桓檀古記』 凡例 末尾에 기록된 다음의 문장이다.
“桓檀古記悉經海鶴李先生之監修而且余精勤繕寫又因洪範圖吳東振兩友之出金付諸剞劂”이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國譯하면, “환단고기는 모두 海鶴 李沂 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한 내(桂延壽)가 줄친 종이에 또박 또박 베끼고(繕寫), 洪範圖와 吳烔振 두 벗의 出金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 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 새겼다(剞劂)”는 뜻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위의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환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오역부분을 지적하면, 환단고기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桂延壽 선생이 ‘繕寫(선사)‘했다는 단어를 “고쳐쓰다. 옮겨쓰다. 淨書하다. 筆寫하다”로 오역하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서 ’剞劂(기궐)‘했다는 단어를 “印刷 또는 編輯”으로 오역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자. 桂延壽 선생이 만약 『환단고기』를 인쇄했다면,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또한 印刷했다면, 후에 正書할 필요가 있겠는가?
字典에 의하면, 繕寫(선사)의 繕자는 “(실로)깁다. 꿰매다”의 뜻이며, 寫자는 “베끼다. 그리다. 본뜨다”의 뜻으로서 「繕寫」는 “줄을 上下左右로 곧게 쳐진 바둑판 같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 하나를 또박또박 베끼다”는 뜻이다. 곧 繕寫를 “잘 그리다. 잘 베끼다. 淨書하다”는 뜻의 善寫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剞劂(기궐)의 剞는 끝이 굽은 ‘조각칼’, 劂은 끝이 굽은 ‘조각끌’을 의미하는 글자로서 「剞劂」은 “조각칼과 조각끌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기다”는 뜻이다. 또한 印刷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剞劂이라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굴속에서 작업했던 것으로 보아서 印刷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桓檀古記』는 처음에는 인쇄되었던 것이 아니라, 板刻되었던 것이며, 종이에 찍은 간단한 印刷本이 아니라, 나무판자에 刻字한 방대한 量의 板刻本 또는 木版冊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桓檀古記』 板刻本은 누구에게나 쉬이 보일 수 없는 것이며, 지금도 어디에 환단고기 원본인 三聖紀․檀君世紀․北夫餘紀․太白逸史와 木版冊이 비장되어 있을 수 있으나, 檀君像도 이를 철거하라고 파괴하는 이 때에 남북이 통일되고 민족적 자주의식이 강해질 때까지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본다.
4) 桓檀古記 木版冊 作成의 理由 : 그러면 어째서 『환단고기』를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나무판자에 刻字했을까? 그때는 1911년 韓日合邦 직후다. 一警과 日軍이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을 마구 逮捕拘禁할 때다. 환단고기를 繕寫한 桂延壽와 出金한 洪範圖와 吳烔振은 애국자이며 독립운동사로서 市中 出入이 불가능한 逮捕拘禁 대상 인물이다. 身邊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환단고기를 필사하려면 종이를 구입해야 하고, 종이를 구입하려면 신변이 노출되기 쉽다. 그래서 필사하지 않고, 사람 출입이 없는 妙香山 檀窟庵 곧 檀君窟 속에 숨어서 나무판자에 환단고기를 새겼던 것이다. 참으로 비통하고 충성 어린 작업이었던 것이다.
2. 實證史學의 矛盾
『桓檀古記』 부정은 한문오역 외에 실증사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에 대해 그 모순을 몇 가지 비판한다.
1) 實證史學을 盲信 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 실증사학은 考古學에 기반을 둔다. 고고학은 20세기초에 이르러 학문으로 성립됨으로써 극히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사이에 지구 전체를 조사하거나 파 볼 수도 없는 것이다. 파본다 하더라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實物이 멸실되어 확인할 수 없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만을 신봉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으며, 現代史 내지 近世史만을 인정하고, 古代史를 무조건 부정할 우려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實證史學은 영국․불란서․독일․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植民地 支配手段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짧은 역사를 가진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이다. 이상과 같이 좋지 못한 역사와 모순을 지니고 있는 학문이 실증사학이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을 우리사회에 무조건 적용함은 크나큰 모순이라 할 수 있다.
2) 실증사학의 배경인 서양문화의 원형(pattern)에 있어서 동양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 서양문화는 헬레니즘(그리스 중심) 문화와 헤브라이즘(유태교와 기독교 중심) 문화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두 문화의 공통점은 유목문화이며, 자연정복문화이다. 동양문화에도 불교․유교․도교에 따라 다소 다르나 공통점은 농경문화이며 자연조화문화이다. 이와 같이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또한, 서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사회적 경험과 배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周易』 風地觀에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보니 봄․여름․가을․겨울의 돌아감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이치(天道)로서 종교를 창설하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고 한 바와 같이 동양문화는 天道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西洋文化의 宇宙觀은 創造論으로서 자연질서를 인간 위에 天神이 있고, 인간 밑에 動植物이 있는 것으로 본다. 즉 西洋文化는 天地人의 관계를 垂直的 位階關係로 본다. 이에 반해, 동양문화의 우주관은 循環論으로서 天地人의 관계를 水平的 一體關係로 본다. 이와 같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는 발생학적 배경과 발생원리 그리고 우주관 등 문화의 원형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문화의 원형이 다른 서구학설을 동양문화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둘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3. 實證史學은 後進社會를 배경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 佛書에 의하면 天地의 中央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81) 이를 풀어 말하면, 지구의 중앙에서 역대 성인이 모두 탄생하였고, 문화가 먼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대각자인 부처님의 말씀으로써 함부로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지리학회의 보고에 의하면, 지구의 중앙 곧 5대양 6대주의 중앙은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 하였다.82) 그렇다면, 세계문화의 최초 발상지는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곧 우리 나라가 서양보다 먼저 개화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서구사회는 우리 나라보다 후진사회였다는 것이다. 서구사회가 유년기였다면, 우리사회는 청년기였다는 것이다. 현대 종교를 예로 들면, 서구종교인 기독교의 출현은 지금부터 2천년 전후인데, 동양종교인 불교와 유교의 출현은 2천 5백년 이전이다. 이를 보아도, 실증사학은 분명히 후진사회를 기준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따라서 그러한 학설을 선진사회였던 동양사회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셋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Ⅳ. 맺는말
이상과 깉이 『桓檀古記』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과 일치되었다. 그리고 『桓檀古記』를 僞書로 곡해하게 된 결정적 원인도 漢文誤譯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僞書가 아니라 眞書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모든 학자들은 환단고기를 마음껏 거리낌없이 자유로이 인용해도 하등의 모순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원래 고집이 세고 자기의 학설을 쉬이 바꾸려 않는다. 마찬가지로 환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자기의 학설을 바꾸어 본 연구를 쉬이 받아들이려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외람 되나마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뜻에서 그들이 과오를 범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과 사회적인 배경에 대해 몇가지 지적한다. 일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첫째, 자아반성과 사실검증의 결여에 문제가 있다 : 실증사학자들은 모든 일에 실증과 검증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환단고기를 비판하기 앞서 자신의 학문적인 소양과 능력 그리고 역사적 안목에 대해서 먼저 스스로 검증하고 반성했어야 한다. 그리고 萬年 이내의 동양사와 민족사를 충분히 연구한 연후에 환단고기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하고 확인한 다음, 환단고기의 내용에 모순이 있으면, 그것을 비판했어야 했다. 그것이 한국사 연구의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桓檀古記』 영구보존을 위한 “繕寫와 剞劂”을 오역하고 있으니 연구의 넓이와 깊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환단고기의 내용은 7000만 민족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그 비판은 신중에 신중을 다했어야 했다. 깊은 반성과 자아비판이 있기를 바란다.
둘째, 학문의 동기와 목적의 모호성에 문제가 있다 : 어렸을 때의 공부는 일반적으로 취미나 적성에 따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투철한 사명감에서 수행되어야 하고, 학문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나 개인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애국자인 독립운동가들의 글에 대해 僞書니 造作이니 거리낌없이 혹평하고, 日帝時代 滿洲에서 獨立運動을 지휘하고 上海臨時政府를 주도한 大倧敎의 經典인 天符經과 三一神誥와 參佺戒經을 僞書 또한 僞作이라 비난하는 것을 보면, 실증사학자들이 학문을 하게 된 動機와 目的이 어디에 있는지 극히 애매 모호하고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서 『桓檀古記』를 僞書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否定을 위한 否定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아무리 태고시대의 국가라 하더라도 桓國과 倍達國 그리고 檀君朝鮮에 대한 遺跡과 遺物이 出土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부정하고 있다. 확인했다면, 부정하는 이유, 곧 그 유적유물에 대한 측정도구, 측정방법, 측정과정 등 어디에 모순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함도 없이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의 환단고기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서구학설을 맹신하는 사학계의 풍토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설은 서구인에 의해 성립된 서구제일주의 학설로서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실증사학계는 서구학설을 진리같이 맹신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서 『桓檀古記』를 僞書로 曲解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捨近取遠하는 敎育風土에 문제가 있다 : 먼 것보다도 가까운 것부터 먼저 공부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교육풍토는 가까운 것인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보다도 먼 것인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시간을 더 할애한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사에 대해 무식하게 되고, 그 무식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왜곡하고, 『桓檀古記』를 僞書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 나라는 태고시대에 이미 東方禮義之國이었고 君子之國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東方禮義之國이니 君子之國이니 하는 말은 태고시대의 우리 사회에 이미 높은 수준의 사상과 문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허무한 조작같이 무시하고 있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대해 소홀하게 되고, 그러한 소홀함이 무식을 낳고, 무식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덟째, 自然法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자연에 春夏秋冬이 있고, 인생에 生老病死가 있어 자연과 인생이 無常하듯, 文化도 거기에 生成消滅이 있어 시간적 공간적으로 돌고 돈다. 오늘날 지구상의 어느 곳에 고도의 문명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는 고도한 문명사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법칙 沒理解가 『桓檀古記』를 僞書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지적을 간단히 요약하면, 실증사학자들에게 민족적 주체의식 내지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정신교육의 기초를 연구하는 國史學者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실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심각한 반성과 자기비판이 있기를 촉구한다. 아울러 자신의 안목과 사고방식이 과연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가를 자연인의 입장에서 되돌아보기를 촉구한다. 파란안경이든 검은안경이든 색안경을 벗고 사물을 볼 것을 촉구한다. 곧 과거의 학설과 종교적 신념과 나는 이렇게 배웠다. 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先入見을 버리고 민족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신장이 1m 75cm면 정상적인 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만났을 때, 1m 50cm밖에 안 되는 사람은 부러워할 것이며, 키가 2m 되는 사람은 무시할 수 잇을 것이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서기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 거의가 『三國遺事』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학자들이 『三國遺事』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본다. 그와 같이 『환단고기』를 보는 시각이나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보는 안목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생각과 태도를 바꿔 환단고기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고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그래도 환단고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영원히 신화 속에 묻혀 두자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惡貨가 良貨를 구축하는 格으로서 다음과 같은 非民族的 非愛國的 主張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되살아나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꺽는 주장이다.
둘째, 그것은 9000년 내지 6000년의 민족사를 단축시키는 주장이다.
셋째, 그것은 진실한 민족사관 정립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넷째, 그것은 민족적 자주의식 확립을 저해하는 주장이다.
다섯째, 그것은 민족총화를 저해하는 주장이다.
여섯째, 그것은 先知者들의 敎示인 原始返本을 거부하는 주장이다.
일곱째, 그것은 신진 사학자들의 태고사 연구열의를 꺽는 주장이다.
『桓檀古記』를 僞書로 간주하여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분명히 이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桓檀古記』 僞書論者들은 그러한 민족적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하고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특히 檀君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檀君學會가 -『桓檀古記』를 僞書로 간주하여 그러한 글을 學會誌 『단군학연구』(제2호)에 싣고, 桓仁․桓雄․檀君에 대한 역사를 神話로 취급하고 있으니 극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군학회의 결성 취지가 어디에 잇는 것인지 깊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본 연구의 주장에 동의하시는 분은 桓檀古記 정당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본 연구를 地上에 게재하거나 소개해도 좋으며, 이를 위해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증명하는 물증 20제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역사성에 관하여 그 실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다음의 몇 가지를 통해 그 진실성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이 풍부히 남아 있는 곳은 환단고기입니다. 여기서는 환단고기의 기록과 고고학적 물증을 기준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환단고기의 기록이 물증으로 증명되고 있는데도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부정하는 제도사학계는 과연 어느 나라 국민인지 스스로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1)북경의 삼조당: BC 2707년에 있었던 배달국과 치우천자와 서토의 황제와의 전쟁은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쟁입니다. 최근 서토는 이 전쟁의 주요 당사자인 치우천자와 황제의 묘를 정비하고 그들을 서토의 정식조상으로 받아들여 북경의 탁록에다 삼조당을 세웠습니다. 환단고기는 동아시아를 뒤흔든 역사적 전쟁인 치우천자와 황제와의 전쟁기록을 가장 많은 분량으로 가장 완벽히 기록하고 있는 사서입니다. (2)강화도 참성단: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과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왕검단군 무오 51년(BC 2284년)에 쌓았다고 나옵니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며 그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습니다. 서울 올림픽과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차제에 마니산 참성단은 국보로 지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3)평안도의 단군릉: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안도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이 단군릉을 거대하게 재축조하여 성역화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BC 2084년 단군조선 제5세 구을 단군이 붕어하시고 대박산에 묻혔다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유물유적인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역사성이 여기서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4)흘달단군 때의 오성취루: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대야발 선생의 단기고사에 는 단군조선 제13세 흘달 단군 50년(BC 1733년)에 5개의 별이 일렬로 서는 장관을 연출했는데, 이것이 서울대학교 박창범 교수에 의해 천문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는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등 추가로 초승달까지 1렬로 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을 연출했음을 확인하였습니다(우연일 확률은 0.007%데 불과) (5)갑골문의 귀방: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세 소태 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은나라의 귀방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6)아유타국과 백제상인: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상인들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백제가 현재의 캄보디아인 부남국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정확히 뒷받침해 줍니다. 이는 백제의 대륙존재설이나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인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는 환단고기를 연구도 해보지 않고 위서 운운하는 것이 한국역사학계의 현실입니다. (7)장수왕의 연호 건흥: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이러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명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그 정확한 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실로 대단한 기록이요 엄청난 고고학적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강단사학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8)연개소문의 내력: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발해의 정사인 '조대기'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을 연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라고 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의 무덤에서 연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진가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고구려 및 발해사와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을 알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서인 것입니다. (9)이정기 장군과 제나라: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781년 고구려의 유장 이정기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고구려의 유장 이정기는 중국대륙 산동반도 일대의 15개 주에 제나라를 건국하고 4대 58년간 다스렸던 사람인데 환단고기는 여기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유장 이정기가 중국의 산동반도에 제나라를 건국하고 다스렸음은 KBS에서도 방영되어 그 역사적 사실이 인정되었습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위대한 사서인 것입니다. (10)발해 문황의 연호 대흥: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발해의 제3세 문황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1949년 만주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발해의 문황 대흠무가 자기 연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란 쓰고 있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가 얼마나 정확한 역사기록을 남긴 사서인지가 확실히 증명된 것입니다. (11)비파형청동검: 단군조선의 비파형청동검은 단군조선이 서토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군조선의 유적유물입니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비파형청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12)고인돌유적: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존적 증거물입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로부터 고인돌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며 세계적인 역사서인 것입니다. (13)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끼가 발견되었는데, 그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서토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습니다. (14)요녕성의 '번한' 명문: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번조선)을 나타내는 '番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으로 만든 도장이 발견된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 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입니다. (15)단, 기, 언, 고죽 명문: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하가점을 중심으로 하북성에서 요서지역싸지 출토되는 청동기 문화 유적지를 '하가점하층문화'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단군조선을 나타내는 단(亶), 단군조선의 제후국 기자조선(번한/번조선)을 나타내는 기(기), 단군조선의 제후국 서국의 서언왕을 나타내는 언(언), 단군조선의 제후국 고죽국을 나타내는 고죽(孤竹) 등이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습니다. 모두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으면 알아 들을 수 없는 명문들이니다. (16)남녀조각상과 곰석상: 서요하지역의 적봉시 홍산과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조각상과 곰석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홍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홍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17)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환단고기에는 BC 3898년 18분의 환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담시킵니다. 그런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18)가림토문과 일본의 신대문자: 환단고기에는 BC 2181년 제3세 가륵 단군이 을보록에게 정음38자를 창제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이 가림토문의 흔적은 지금의 한글에 그래로 남아 있고, 일본의 신대문자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 '구주신사'의 가람토문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청동거울은 한글비석과 한글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 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입니다. 또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19)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20)낙랑군과 낙랑국: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 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홀 단군, BC 195년 북부여 제1세 해모수 단군, BC169년 북부여 제3세 고해사 단군 때입니다. 특히 BC 195년에는 낙랑왕 최숭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납니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은 이렇게 명확히 나타났습니다. 환단고기를 통해본 아시아 정확히 말해 극동삼국 '한국' '지나' '일본'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이미 범죄 수준의 무협소설입니다. 아시아 대륙과 중국대륙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72세 6962년의 역사를 모조리 무덤의 역사로 파묻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불행한 역사를 이제는 제대로 밝혀야 합니다. 부끄러운 동양의 얼굴을 다시금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민족사적 요청이며 동양사적 요청이며 세계사적 요청입니다. -<아!고구려>의 저자 배달 허성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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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2). / 개천(開天)의 성격. -권명수-
이 글은, 말씀 드린 대로,
‘중국’을, 그네들의 역사 왜곡을, 겨냥하고 있다.
특히, 우리네, 상고사의 문제 때문이다.
헌데, 중국 역사상,
극히, 최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국인은 자기네 스스로를 ‘중국(中國)’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우선, 그네들을 알고, 우리 스스로도 알아야 (知彼知己) 하는 즉,
오늘은, 이 ‘중(中)’이라는 한자를 먼저 보겠다.
우리 말의 ‘가운데’이다.
어느 한자 [칼럼]에, (조선일보, 06/1/4)
‘中’은 ‘부락의 한복판에 꽂은 깃발의 모양’이라 했다.
과연, 그럴까?
우리 말의 ‘가운+데’는,‘(무엇의) 겉이나 밖이 아닌, 안쪽에 (들어 있는)+데, 곳’이다.
‘中’은 글자의 형태만으로도, 그 설명이 끝난 듯 보이는,
쉬운? 글자이다. 허나, 그 발음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리네는 이를 ‘중’이라 발음하고,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에서는 ‘듕’이라 했으며, -中國= ‘듕귁’-, 중국어 발음은 [zhong, 쭝](中)이며, 일본어는 [なか, 나까](中)이다. 단, ‘들어 있는’à ‘듕’à ‘중’: 구개음화(口蓋音化).
아마도, 세종 임금 시절의 집현전 학사들은 이를 몰랐겠지만,
실은, 이 ‘발음들’은 모두, 우리네의 것들이다.
중국어의 중(中) [zhong, 쭝]= ‘口[kou, 커우]+丨[xin, gun, 씬, 꾼]’은,
우리 말의, ‘겉이 아닌 데에+솟은, 꽂은’+그래서,
‘속 안에 (들어 있는)’ à [쭝]이다.일본어의 [なか, 나+까](中)는 ‘안에 있는+것’이다.영어의 [미+들](middle)은 ‘무엇의 안에, 사이에+들어 있는’ 이고,[센+터+ㄹ](center)은 ‘속 안에+들어 있는’이다.[러시아]어의 [세+레+디나](середина)는 ‘속에+올라+들어 있는’이다.[핀랜드]어의 [케+스키+피+스테](keskipiste)는, ‘겉 쪽에+없이+솟아 돋은’이다.
나는 이를, 처음에는, 기하학에서의 정의대로, ‘둘레로부터,
같은 길이만큼 떨어져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잘못 잡고, 애를 먹었다.
어쨌든,
중국인은 ‘中’의 발음이 왜 그런지를 모른다.
이것이 ‘中’이 증언하는, ‘중국’의 ‘역사적 실체’이다.
나는, ‘자기네 말 뜻도 모르는’ 이들이 꾸민,
‘그네들만의 상고사’는 신뢰할 수 없었다.
-고조선의, ‘비파형(琵琶形)’ 청동검의 설명.
역시나, ‘피리 모습(Flute-shaped)’ 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찬찬히 읽어야, 이것이 그 ‘피리 모습’의 ‘초기 형태(early style)’임을
비로소! 알 수 있다. -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조선(朝鮮)[zhaoxian, 짜오+씨앤]은 ‘첫+솟아 오른’이다.
이번에는, 단군 왕검의, 출생과 성장은 어느 곳에서, 그리고,
‘조선’의 개국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하는 측면에서 본다.
그 출생 및 성장한 곳을,
‘불함산(不咸山)’과 웅씨왕(熊氏王)의 ‘단국(檀國, 檀木國)’이라 했다.
만주의 산지에는 박달나무가 꽤나 있어서,
‘단(檀)[tan, 탄]= ‘돋은’이라는 글자만으로는 그 단서가 안 된다.
결국, ‘불함산’이 문제를 푸는 열쇠인데,
‘백두산’의 별명도 또한, 공교롭게도 불함산이다.
그곳이 현재의 백두산일까?
단재(丹齋) 신 채호(申采浩) 선생은,
송화강 유역에 있는, 현재의 합이빈(哈爾賓)[harbin, 할빈]=
우리 말의, ‘해+올라+밝은, 높은’을 그 지역으로 비정하시고,
그 산 이름, 완달(完達)[wanda, 완따]가 아사달(阿斯達)과 비슷하므로,
그곳이 가장 유력하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선생은 우리네 역사 학자들 중에서, 중국어에 가장 능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 문제에서만큼은 아쉬운 점이 있다.
불함(不咸)[buxian, 뿌+쌘]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우리 말의, ‘밝게, (혹은, 높이)+솟은’이다.
만일, 옛 한자 기록을 존중한다면,
그 산은 [뿌쌘]과 가장 유사한 발음을 지닌, 옛 산이어야 하므로,
[완따]산의 경우, ‘ㅂ+ㅅ’의 발음이 없어, 이와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평한 ‘농경’ 지역이 곁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웅(熊)[슝]은 우리 말의, ‘씨, 솟은, 싹, 심는’으로,
농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군 왕검의 출생 당시에는,
백두산까지는 아직, 진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뿌쌘](不咸)과 비슷한 발음의,
서쪽 만주 지역, 심양(瀋陽)[shenyang, 썬양] 근처,
현재의, 부신(阜新)[fuxin, 푸씬] 근방의 산지를,
단군 왕검이 출생하고 성장한 곳으로, 일단, 추천하고 싶다.
즉, [푸씬](阜新)=
‘밝게, (혹은, 높이)+솟은’에는,
이미, BC 5000년의 유적지가 있고,
그 인근에 ‘지주산(蜘蛛山)’이란 산이 있는데,
‘지주(蜘蛛)’[zhizhu, 쯔쭈]의 뜻이 우리 말로 ‘거미’이니,
우리네 일부 학자들의 견해대로,
‘왕검’의 ‘검’과도 연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단, [쯔쭈](蜘蛛)라는 말은, 뒤에서, 단군 왕검의 이름을 풀이할 때,
같이 설명할 것이나, 하여튼,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 된다.
해서, 만일에,
그 [푸씬](阜新)이 맞는다면,
그 곳에서, 단군 왕검이 출생, 성장하여,
비교적 가까운, 아사합도(阿斯哈圖)[어쓰허투]의,
그 환웅 시대 말기의, 아사달(阿斯達)[esida, 어쓰따]까지,
부하들을 이끄는 모습이 된다.
나는,
그때의 ‘팔 백명’이니, ‘삼 천명’이니, 하는,
부하들의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팔백(八百)[babai, 빠+빠이]의 발음은 실은,
우리 말의 ‘밝고+높은’일 수 있고,
삼천(三千)[sanqian, 싼+치앤]은,
우리 말의 ‘솟은 (곳의)+솟아 오른’일 수도 있다.
그 숫자보다는, 오히려,
그 ‘대규모’의 부하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들을 ‘쳐들어 가는 군사들’이라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다시 말해, 단군 조선의 개국(開國),
즉, 우리네의 개천(開天)은,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평화롭고, 고요하게’ 묘사되었기에,
오히려, 치열한 싸움이 있었지 않았나, 의심한다.
즉, 단군 왕검은 실은,
매우 강력한, 신권과 왕권을 장악한, ‘정복 군주’가 아니었을까?
그러한 정황이 강력한 ‘법제’와 ‘분할 통치’ 등의 실시에서 엿보인다.
나는, 단군 왕검이 마지막 환웅, 거불단(居弗檀)[jufatan, 쥐파탄]= ‘솟아+밝은 곳의+돋은 이’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그를 정복하여,
그 자리를 잇고, 아예, 새 나라를 선포한 것이라 본다.
---‘첫+솟아 오른 나라’[짜오씨앤](朝鮮)이라고!
‘평화’는 그러한 ‘무서운 전쟁’의 결과였고,
단군 왕검은 실은, 무(武)를 갖춘, 제사장(祭司長) 이상의,
즉, [츠이유](蚩尤) 천왕에 못지 않은, ‘전쟁 지도자’였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다면,
청동검이 어찌 고조선에서 계속 발달했을까?
허면, 중국측 기록에는, 왜, 단군 왕검이 안 나타나느냐고?
분명히, 나타나 있다! 중국 신화에는, 아주 짧게, 이를테면,
‘사람을 꺼리는 산신’, 단위(單圍)[danyu, 딴위] 등으로!
앞서의, ‘중국 신화의 이름들’ (05/10/10)을 참고하시라.
나는, 이제까지의 교육에서,
단군 왕검을 무슨, ‘마음 넓은, 할아버지’쯤으로나 묘사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날씬한 세형(細形) 청동검.
비파형(琵琶形) 청동검을 대체한,
우리네 고유의(Korean-styled) 청동검. -
역사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통렬한 교훈으로써,
무릇, 모든 실패한 이들의 실수는,
혹은, 그런 이들 스스로가 뒤늦게 참회한 바로는,
‘전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주된 원인들로,
무지, 무능, 경망, 독선, 아집, 오만 등등이 거론되고,
여기에, 사기, 부패까지 덧붙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우리네는, 지난 수년간, 참으로 값비싼 경험을 하고 있다는데,
뒷날의 역사는 이를 어찌 기록할까?
어느 정당 내부에서 걱정하기를, 누군가가 입각(入閣)을 하게 되면,
자기네 지지율이 5% 떨어진다고, 예언 겸 반대도 했다지만,
어떤 양반의 각본대로, 기어이, 일이 진행되는 모양이다.
---연작(燕雀)이 대붕(大鵬)의 뜻을 어찌 알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 깊은 마음을?
그 어떤, 끝을 향해, 동반(同伴) 질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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