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몽골제국과 기마민족과 단일민족에 대한 소고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2:49

 


▲ 전성기의 몽골제국

 

 

몽골제국과 기마민족과 단일민족에 대한 소고


 

1. 몽골제국은 어떻게 유사이래 초유의 통일 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는가?

대초원에 산재한 수많은 유목부족들 중에 오논강 상류의 부르칸산 기슭을 근거지로 하는 에스게이 바루트란 족장이 있었다. 그 때 그는 마침 타타르 족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몽고족의 전통에 따라 적장의 이름을 따서 테무진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 아버지 에스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되고, 어린 나이로 어머니와 이복동생등 가족들의 무사안위를 위하여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던 테무친이 모랫바람 뿐인 사막의 한 모퉁이에서 친구인 완칸과 자무카(나중에는 원수가 됨)의 도움으로 서로 은원(恩怨)관계로 점철된 수많은 부족들(메르키트, 타이추트, 타타르, 몽구트, 케레이트, 키르키스, 옹기라트, 나이만등 21개 부족)을 아우르고 무엇하나 부쳐먹을 것 없는 고비사막을 통일하게 된다. 그는 오논강변 쿠릴타이 회의에서 대칸으로 추대되어 몽고제국을 세우게 된다.(1206년) 그는 이어 타클라마칸(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사막을 넘어 1207년부터 3년간 서하(시샤왕국)를 정복하고, 1211년부터 1215년까지 만리장성을 넘어 금을 정복하고, 1219년에는 20만의 정규병력과 지원병력 30만, 도합 50만을 동원하여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가 근거지인 호라즘을 원정하고 잔당을 쫓아 흑해 크림반도 칼가강, 남쪽 인더스강 중류에까지 이르렀다가 원정 7년만인 1225년에 본토로 돌아오게 된다. 1226년에는 다시 반발하는 서하의 사마르칸트를 포위하였는데 여가시간에 사냥 중 징기스칸은 낙마하여 1227년에 죽게된다.

그의 사후 장남인 주치는 흑해의 킵챠크 고원에 킵챠크 한국을, 차남인 차카타이는 서요의 땅 중앙아시아에 차카타이 한국을, 셋째인 오고타이는 1229년 대칸의 지위를 잇게 하고, 막내 툴루이는 몽고족 관례에 따라 몽고본토를 물려받고 분할 통치하게된다. 1230년 대칸 오고타이는 막내 툴루이와 금 원정에 올라 1234년 금을 정복하지만 원정도중 툴루이가 병사하게된다. 1231년에는 고려에 침략을 시작하고 금 정복 후 오고타이는 1235년, 오르콘강 상류에 동서 무역의 물산의 집산지인 수도 카라코룸을 세운다. 1236년 오고타이는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정규군 10만으로 하여금 유럽 원정에 나선다. 그들은 볼가강을 건너 모스크바, 랴잔, 키예프등을 차례로 함락한다. 1241년에는 동유럽에 진출하여 폴란드, 헝가리, 독일, 오스트리아등 주요도시를 역시 함락시킨다. 이 때 치마만 입던 유럽인들에게 바지가 전해져 그 바지가 오늘날 세계적인 의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연전연승 서유럽으로 향하는 그들에게 변고가 생긴다. 대칸인 오고타이의 죽음이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군하게되고 서유럽은 화를 면한 것이다. 만일 이때 오고타이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이 몽골의 말발굽아래 놓였을지도 모른다.

이어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가 집권하였으나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1251년 사촌 툴루이의 장남 몽케가 4대 칸에 오른다. 그의 둘째 동생 훌라구는 1258년 압바스 왕조를 멸하고 바그다드에 일 한국을 세운다. 첫째 동생 쿠빌라이는 중국, 윈난, 티벳을 정복한다. 몽케도 쿠빌라이를 도우러 남송 원정 중 병사하게 된다. 1260년 남송과 화친하고 돌아온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열어 5대 칸에 오르고 1264년 수도를 카라코롬에서 대도(연경, 북경)로 옮기고 1271년 국호를 원이라 한다. 1259년에는 고려와 강화한다. 사실상 정복이었다. 1273년 삼별초 군이 4년 간의 항쟁 끝에 전멸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는 1271년 이탈리아를 출발, 4년만인 1275년 원에 도착 쿠빌라이를 만난다. 그는 17년 간의 원의 생활을 정리하여 동방견문록을 남긴다. 1279년 남송이 150년의 역년 끝에 멸망하고, 1281년에는 2차 일본정벌에 나서지만 실패한다.1294년 쿠빌라이가 세상을 떠나다. 그가 죽자 중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1351년 시작된 홍건적의 난이 그것이다. 홍건적에 쫓겨 몽고족은 1368년 만리장성 밖으로 쫓겨난다. 이것이 몽골 제국의 약사이다.

초원의 한 부족이 초원을 통일하고 순식간에 중앙아시아(압바스왕조, 위구르, 西夏:시샤왕국), 그리고 동유럽(헝가리), 러시아남부(키예프공국), 인도북부(무굴제국), 지나(금, 요, 남송), 동남아, 고려등 유라시아대륙의 2/3를 아우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잔학무도한 무력의 힘만이 그 동인(動因)이었을까? 그 제국이 160여 년(1206-1368)유지 되었다니 7대(1대:30년, 실제로는 권력다툼으로 10대)를 이어져 내렸다는 이야기인데 짧은 기간만은 아니었다. 지나를 통일한 秦은 불과 14년(BC221-207) 유지되었다니 그에 비하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더구나 그 제국은 징기스칸의 후손 티무르가 건국한 티무르 제국(1369-1500 : 131년), 티무르의 자손 바베르가 건국한 무굴제국(1526-1857 : 331년), 투르크인 오스만 베이가 건국한 오스만제국(1299-1922 : 623년)에 의하여 면면히 유지되고 러시아 제국의 황실은 몽골인의 피가 섞임을 자랑으로 여겼고 오늘날 러시아인의 피에는 몽골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니 위대한 제국은 쓰러졌어도 그들의 잔재는 오늘날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인의 피 속에 대몽골이란 DNA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300만인 몽골인구가 당시에는 200만이 채 안되었고, 군대라야 병참인력까지 포함하여 50만이었다 한다. 50만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인 것도 아니었고 최대 20여만이 움직인 적이 있는데 그 때에 그 숫자의 5배인 100만 정도의 마소와 양떼가 같이 초원(Step)지대를 통과하였다 한다. 당시 그들이 석권한 세계인구는 5억이 넘었다니 그들이 소수병력으로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학자들에 의하면,

첫째, 신속한 기마군단 - 당시 몽골 군만큼 신속한 군단은 없었다. 중요한 수단은 2대 칸 오고타이 때부터 발달한 驛站제도(잠치)였다. 동유럽 크림반도에서 출발한 파발꾼이 사막과 초원지대등에 100리마다 설치한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고 수도 대도(연경)에 도착하는데 채 일주일이 안 걸렸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신속할 뿐만 아니라 기마술 또한 능수 능란하였다. 즉 당시의 개념으론 오늘날의 인터넷 초고속망에 버금가는 신속한 연락 수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천호장제, 백호장제란 강력한 군대조직과 기마술에서 능가할 군대가 없었다. 기마는 한 병사가 여섯 필의 말을 끌고 진군하였는데 말은 식량으로, 가죽은 갑옷이나 부대로, 뼈는 화살촉으로 쓰는 움직이는 군수창이었던 셈이다. 기마단의 이동 속도는 70km/1일 이었다.

둘째, 대몽골이란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수용정책 - 실재 몽골은 불교국가였지만 칭기즈칸의 측근 중에는 회교도(이슬람), 기독교도도 다수 있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대몽골이란 기치아래 웬만한 것은 모두 수용하였다.

셋째, 철저한 상인보호정책 - 사막의 비단길을 통과하여 동서간의 무역을 하는 대상들을 비적들로부터 철저히 보호하여주고 그들로부터 조세를 부과하여 제국을 유지했다. 종교와, 정치보다도 상인보호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한다. 마르코 폴로, 이븐밧투타등도 대몽골의 이러한 보호정책으로 동방을 견문하고 돌아 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넷째, 바로 여의나루지기님이 지적하신 협조하지 않는 자에 대한 철저한 보복정책 - 예를 들어 그들이 항복을 요구하여 항복하면 그들이 갖고있는 정치, 종교 등은 일절 간여하지 않고 세금만을 거두어 갔다한다. 대항 시에는 철저한 보복, 말살정책을 취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공포의 대왕 - 이는 로마 교황청에 기록된 문서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러시아 침공시 대항한 백러시아 키예프공국은 철저히 보복하였지만 항복한 모스크바공국은 그 당시에는 목조성책을 가진 조그마한 소읍이었는데 거기에 오늘날 크렘닌궁이라 부르는 城을 이때부터 쌓기 시작하여 러시아제국의 수도가 되게 하였고, 러시아인들은 몽고인의 피가 70%이상 이때부터 섞였다는 것이다. 순수 슬라브족은 오늘날 백러시아인으로 15%미만이라 한다. 또한 몽골의 피가 섞인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한다. 황실은 당시의 사령관 바투의 후손들이었다 한다. 스탈린, 옐친등 소련인의 얼굴을 보라. 서양인이라기 보다는 동양적인 분위기가 풍겨옴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밤 12시, 뉴욕의 깜깜한 골목에서 백인이 흑인과 황인종을 동시에 마주쳤다. 누구를 무서워할까? 우리는 대부분 흑인이라 대답할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시커먼 피부 속에 두 눈만 반짝이고 혀는 빨갛고 손바닥은 노랗고... 그러나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쪽 째진 눈을 가진 동양인을 소름끼치도록 무서워한다 한다. 몽골인 들에게서 예전에 당한 핍박이 유전적으로 전달되어서는 아닐까?


2. 기마민족이란 무엇인가?

기마민족(騎馬民族)이란 일본인 에가미 나오미(江上派夫)가 제창한 학설이다. 즉 북방초원지대에 살던 스키타이, 흉노, 몽골, 오환, 선비등 말 잘 타는 민족을 총칭하는 말로 부여족, 고구려족, 말갈족, 여진족등을 통칭한 몽골로이드를 이르는 말이다. 학설인즉, 그들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남하하여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언뜻 우리에게 유리한 학설인 것 같은 데 파고들면 그게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이 학설은 천황가의 일본열도 기원설과도 배치되어 일본에서조차 초기에 배척되다가 최근에는 일본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여 가고 있는데, 일본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그들은 그들 조상의 나라인 한반도에 다시 건너와 임나일본부를 두어 경영하였다는 논리로 둔갑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하여야 한다. 즉 그들이 일제시대부터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의 합리적인 근거로서, 일선 동조론의 근거로서, 대동아 공영의 근거로서 기마민족설을 도용하고 있음을 알고 우리는 "기마민족"이란 말을 사용하여야 한다. 봄이면 항상 치르는 황사(黃砂)-이제는 그 황사가 일본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최근 일본인들은 먹고 살만하니까 그들 기마민족의 조상의 나라, 고비사막을 가진 조상의 나라를 사막의 黃砂源으로 방치할 수 없다하여 그 사막에 대대적으로 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환경보호란 가면을 쓴 뒤에는 그러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니 우리는, 천손족인 우리는, 우리민족의 원류인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고작 울란바토르 공항 앞에 벤쳐기업 하나 차릴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3. 과연 우리는 단일민족인가?

우리는 스스로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라 한다. 요즈음은 5,000년이 아니고 9,200년의 역사(환국3301년+배달국1565+단군2333+현재2002)라고까지 주장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숱한 외침을 받았음을 기록을 통하여 알고 있다. 침략은 곧 문물과 풍습의 교류를 뜻한다. 그런데 얼마 전 태국 메콩강 상류 황금의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는 곳을 탐방한 기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3일을 같이 생활하고 나니 말이 통하더라는 것이다. 말뿐이 아니고 생활습관, 풍습(자치기, 색동옷, 디딜방아 등등)이 똑같더란 것이다. 치앙마이 근처의 오지에 사는 리수, 리후, 아카족이 그들이다. 기록이 없어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자의 추적에 의하면 백제, 고구려가 망하면서 唐이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갔는데 남방(안남지방)개척시 당은 그들 포로를 동원하였다 한다. 당시 당의 혹독한 사역을 견디다 못하여 월남, 태국의 국경지대까지 피신하여 소수민족으로 남게 되었는데 바로 그들이 리수, 리후, 아카족이라는 것이다. 실재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망하면서 의자왕을 비롯하여 12만, 고구려가 망하면서 20만 명이 장안성으로 끌려갔다 한다. 이와 같이 전쟁이 나면 그 나라 백성은 전리품이요, 여자들은 노리개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가야의 김수로왕 전설에 그의 부인 허황옥는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했다. 아유타국은 바로 인도에 실재한 부족국가이다. 허황후 뿐이 아니고 우리는 삼국이전 국가의 기원에서 난생설화와 천생설화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알에서 나왔다는 난생설화는 말레이민족등 남방의 공통된 설화이고 천생설화는 기마민족의 천손사상에서 기인한 북방민족의 공통된 설화라는 것이다. 즉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의 융합이 한반도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김, 이, 박등 몇 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백성이 성을 갖게 된 것은 이조 중엽이후라 한다. 예전에 드물게 구전되던 족보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된 싯점도 이때라 한다. 이조 중엽 중상주의가 대두되어 돈이 있으면 벼슬도, 性도 살 수 있었고, 돈이 있으면 상대방의 족보에 조상을 편입시킬 수도 있었다니 우리의 자랑스런 족보문화가 그런 것이었던가 개탄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일부에서 그랬다는 것이고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그러한 일은 소수에서 비일비재하게 있어왔기에 조금의 흠이 있다하여 조상의 족보문화를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을 것이다.

간혹 우리는 주위에 유독 코가 크고 눈동자가 노릿끼리한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조상은 고려시대 예성강 벽란도에 무역하러 왔다가 조선 처녀와 혼인하여 눌러앉은 회화아비(아라비아인)가 아닐까,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은 조선시대 네덜란드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인도를 거쳐 일본에 가려다 제주도에서 난파당한 하멜 일행이 저편(Japan)으로 가라는 말을 안 듣고 조선에 상륙하여 터를 잡아 살다 어느 가문의 족보에 편입하였는지 추적해 보아야 한다. 또한 하얀 피부에 새까만 눈동자, 칠흑 같은 머리, 쌍꺼풀진 눈을 가졌다면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을 모시고 왔던 하인이 살던 인도 드라비다족이 뿌리의 원류가 아닐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또한 지난 여름 삼척 마라톤 대회에 나가지도 않았고 혹서기 마라톤에도 나가지 않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유독 새까만 피부를 가졌다면 그의 조상이 말레이반도에서 동지나해의 점점이 떠 있는 산호섬을 거쳐 유구국(오끼나와)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에 조공하려 사신일행으로 뽑혀 한양에 왔다가 조선에 망명한 말레이족이 아닐까 추론해 봄직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뿌리를 찾겠다고 여름 휴가철 마라톤도 마다하고 아라비아로, 인도로, 말레이시아로 탐색하다가 알렉스 헤일리처럼 베스트셀러 한 권 저술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세상에 순수한 단일민족이 하나라도 있을까? 민족전체가 이방인에 유린되어 씨알머리도 찾아 볼 수 없는 게 오늘날 대부분의 민족들의 사정인데 한민족이란 거대한 용광로에 약간의 이민족의 피가 섞였다하여 잡민족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약간의 티끌은 거대한 용광로에서 흔적도 없이 타버리거나 녹아들게 마련이므로... 우리는 스스로 단일민족이라 하여 부끄러울 것은 없되 반만년의 역사에 저간의 사정도 있음을 알아야겠기에 감히 여의나루지기님의 글에 사족을 달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한양근처 분당에서...
2002/1/10 대전사람 이름 없는 풀뿌리 배상


 

 

 

 

 

칭기스칸의 리더쉽

칭기즈칸은 지난 97년 4월 뉴욕타임즈에서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 중 첫 번째 자리로 뽑힌 바 있다. 우선 칭기즈칸의 리더십의 비밀 10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칭기즈칸의 리더십 중에 주목받을 점은 그의 "웅대한 비전"이다.
일찍이 과거에도 없었고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대단한 비전이다. 그의 비전이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다. 17살의 어린 소년 테무진이 타타르족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그의 부족은 모조리 흩어 졌으며 자신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신세에 처해졌다. 이때 그가 가진 목표는 "흩어진 부족을 되찾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 이었다. "할 일이 있는 한 나는 죽을 수 없다" 라는 말과 같이 소설과도 같은 모험과 역정을 거쳐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는데 어린 테무진이 결론지은 것은 그의 부족들이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잘 뭉치더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공동의 목표는 소박하거나, 곧 이룩될 만한 작은 것에서는 별반 효과가 없었으며 원대야망한 것이라야 사람들이 큰 힘을 내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비전>과 다를 바 없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면면에는 한가지 공동목표가 달성되기가 무섭게 곧 다음의 새로운 공동목표를 만들어 쉬지 않고 달리는 자전거만이 서 있을 수 있다는 듯이 그의 부족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그 비전은 나라를 만드는 것, 주변국가로부터의 위협을 없애는 것, 아예 중원을 경영하는 것,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 그리고 그 천하는 중국 땅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으로 계속 커져만 갔고 그 꿈들은 하나씩 하나씩 실현시켰다.

두번째 칭기즈칸의 리더십 두 번째는 명분과 정당성의 확보이다.
부족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이름 석자에 대한 오명을 몹시도 싫어 한다. 항상 그들은 옳은쪽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청군 아니면 백군인 상태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은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으로 싸우도록 같은 전쟁을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금나라 100만 대군을 칠 때도 그 명분은 나라를 물려 받지 못할 불효한 놈이 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일종의 해방전쟁이라고나 할까 땅을 빼앗거나 명분없는 약탈을 자제하였다.

세번째 칭기즈칸 리더십의 탁월한 점은 슈퍼 리더십이다.
중앙아시아며, 그리스 발칸반도, 모스크바, 베를린 등 엄청난 거리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 자신은 자신의 본토를 벗어 나 본 적이 없다. 십 수년전 까지만 해도 벌판에서 말을 부리던 부하들이 대군사를 지휘하고 신출귀몰한 전략을 구사하는 대장군으로 변신된 것이다. 부하를 육성함은 물론, 전권을 주어 현지의 왕을 임명하고, 인접국가에의 전쟁 여부까지 모든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그리고 서양세계 정신적인 지주인 교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숙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권한은 현지에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끔 현지의 지휘관이 철저히 알아서 하도록 믿었던 것이다.

네번째 그는 그의 부족들이 끊임없는 상무정신(尙武精神)에 젖어 있기를 바랬다.
그의 마지막 유언중의 하나가 "흙벽돌집에 살지 마라"라는 것이다. 흙벽돌 생활은 정착생활을 의미하며 곧 말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허벅지에 살이 찌고 배부른 기름 맛을 알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원정길을 포기하고 음주가무에 빠져 들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살림이 풍족해 지면 더 많은 재물에 욕심을 내고 단신의 군장이 온갖 재물보화로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며 서로 많은 재물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울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오늘 날 우리의 위정자들이 험난했던 민주투사의 역정에서는 서로 잘 뭉치다가 정권을 잡으니 서로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배고픈 시절 굶주림을 면하려고 이 역만리 먼 땅의 건설현장에 나가던 우리의 근로자들이 이제는 3D기피 현상에 빠진 것에 비추면 새삼 뒤돌아 볼 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다섯번째 그의 리더십 비밀은 스피드이다.
마차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년이 걸리던 것을 생각하면 중원을 점령하는 2년여의 세월은 거의 말을 달리는 속도로 영토를 점령해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먼저 의사결정의 스피드주의를 보자. 원정군들은 온갖 작전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수많은 정보와 판단을 요구하는 결정임에도 그들은 철저한 임장주의(臨場主義)를 선택하였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현장주의인데,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내 봤자 소용이 없고 "저 산을 넘어 가 보아야 그곳이 산일지 바다일지를 안다"는 모토로 일단 대원칙을 먼저 세우고 행동에 옮기며 상황을 보아가며 세부적인 사항을 그때 가서 결정한다는 방식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을테지만 이는 모르고 내린 결정보다 안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무모한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조직이 기동력에서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몽고말과 손에 익은 작은 칼, 그리고 사냥터에서 갈고 닦은 그들의 활솜씨는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중세 서양의 병정들은 양철 허수아비와 같이 다루기 편한 연습상대에 불과했다. 중후장대가 아니라 경박단소가 세계를 점령한 것이다. 직관적 감각과 선이 굵은 대원칙 주의, 빨리 빨리를 노래하는 우리의 스피드광 기질은 언뜻 보아도 칭기즈칸의 리더십에 걸맞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리더십의 여섯번째 비밀은 그의 통합적 패러다임에 있다.
일단 전쟁을 벌인 적국이라 할지라도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일원으로 충성을 맹약하기만 하면 이러 저러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의 재산은 물론, 왕권, 심지어 종교까지 자율권을 부여했다. 각 국가가 가진 고유의 특수성(개체성)을 보존하는 것은 보편성(전체성)을 의미하는 제국에 대한 충성하나로 허용되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얘기되는 Global Standard가 어떠해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이 자국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정치적으로 자국에 도움을 주는 약소국에게까지 압박을 가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칭기즈칸을 생각해 내고 그 회포를 풀었으리라. "야야 칭기즈칸의 반만 닮아 봐라" 하고 말이다. 과거 아시아 지배의 야심을 불태웠던 일본의 작태에서도 한참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주장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천황, 종교를 섬기도록 강요하고 언어사용을 강요한 것을 보면 일본은 역시 아시아 조차도 지배할 만한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지 못한 섬나라로서의 한계를 지녔다 할 것이다.

리더십의 일곱번째는 현대인의 생각을 앞지를 정도의 성개방 의식에 있었다.
아울러 자손을 번영시키는 근본으로서의 여성 지위를 무척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부락이 공격을 받을 때 적국에게 납치되어 2년여를 적의 장수에게 잡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되찾았을 때는 이미 그의 아내는 적국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에 그 사실을 알리고 나의 아내가 낳은 아이는 나의 자식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대몽골족의 장손으로 남아 그의 아버지 위업을 이어 받게 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국사에서 배운 바와 같은 고려시대의 공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빠르다. 궁녀로 끌려간 조선의 아녀자들은 그들의 원래 가문의 등급에 따라 대접을 받게 되는데 공녀 위씨는 나중에 원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기도 한다.

리더십 비밀 여덟번째는 조직력에 있었다.
그의 대장군 밑에는 사단과 연대, 대대, 중대 등을 편성하였는데 그와 같은 군대의 조직 편성은 먼 훗날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에는 없던 형태의 조직이라고 한다. 칭기즈칸은 뛰어난 조직가로도 유명한데, "어떤 조직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칭기즈칸은 <나라를 함께 세우고 고생한 자들> 즉 건국공신 88명을 천호장(千戶長)에 임명했다. 그 중에는 두세개의 천호를 가진 자들도 있었으므로 전체 95개의 천호가 편성되고 이것이 몽골이라는 국가의 사회조직이 되었다. 천호라고 하면 천명의 戰士를 제공할 수 있는 단위이고, 그 밑에 백호, 또 십호가 있어서 사회조직 자체가 군대조직과 동일하였다. 따라서 국가 사회조직이든, 군사조직이든 동일하였고, 칭기즈칸을 정점으로 완전히 재편한 것이다. 칭기즈칸은 종종 적군을 숫자로 압도하며 일렬 횡대로 진격하여 눈깜짝할 새에 포위하는 전법을 썼는데 이는 조직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전법이었다. 이러한 그의 조직력은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 아무리 뛰어 난 장수라더 라도 군율을 어기면 엄격하게 벌을 주었다. 그의 몽골군이 승리를 거두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기동력이었는데 그 키작기로 유명한 몽고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백성들이 자기 몸에 딱맞는 칼을 쥐고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몽골군의 전령은 10마리의 말을 끌고 달리며 교대로 말을 갈아 타며 2000리를 내리 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부산과 평양까지의 거리쯤 될까?) 식량은 어떻게 하느냐? 그들의 말안장 밑에는 말린 고기가 깔려 있는데 사방 60센티 가량의 방석같은 고기가 소두마리 분량이라고 한다. 물만 부으면 완전한 우주식량이다. 적어도 병사 한명이 몇 달치 식량을 깔고 달리는 것이다. 몽골의 영광 속에 더욱 놀라운 것은 역참제도이다. 소도 카라코쿰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공용도로를 개설하였고 일정 거리마다 역을 세웠는데 그의 손자 오고타이칸이 즉위할 무렵에는 역전을 위한 말이 20만필, 역사만도 1만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로운영으로 상인이 다니게 되었고 로마교황의 사자가 다녔으며 마르코폴로 부자도 이 길로 몽골에 이르게 된다. 강력한 지휘명령 체계로 군율이 잡힌 조직력과 기동력! 이것이 칭기즈칸 리더십의 핵심적 성공비결이다.

리더십 비밀 아홉번째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교역의 장려였다.
그가 대칸에 오르자 엄청난 재보가 들어 왔다. 서방의 이란이나, 아라비아의 산물이 받쳐 졌는데 이런 먼 나라의 진기한 물건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위그르인들에 의해서였다. 대부분의 위그르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의 사라센 제국은 8, 9세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쇠퇴해 진 상태이지만 그들의 왕성한 교역활동은 여전하였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국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그르인들의 교역활동을 돌봐 주었다. 한편 그들도 칭기즈칸의 무력에 의해 교역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중세국가에서 서로 다른 종교의 이교도들을 적으로 보는 반면, 실사구시적인 정신으로 이교도를 통하여 국익을 증가하였고, 그 같은 개방정책으로 선진화된 문명과 각종 과학기술이 교류되었다. 또한 칭기즈칸의 사후에 호레이즘의 수도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을 때 종전의 섬태멸진 전법에 의해 대부분의 주민을 몰살시켰는데 기술을 가진 자들 즉 공예가나 직인들 3만명은 죽이지 않고 몽고 본토로 후송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유럽에서 동방에 이르는 길목에는 각종 소국이 자리 잡아 통행하기가 곤란하였고, 중간 중간의 험한 길에는 온갖 길에 도적들이 들끓어 동서교류가 곤란하였으나 원대에 이르러 동서왕래가 활발해 졌으니 세계 인류사의 과학문명의 발전을 3세기 가량 앞당겼다는 평가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마지막 비밀은 훌륭한 그의 참모에 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인재를 두어 각종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야율초재(耶律楚材)이다. 그는 칭기즈칸이 두 번째로 금정벌할 때 중도의 성을 지키고 있던 26세의 늠름한 청년이었다. 그는 금에 의해 멸망한 거란족 요나라의 귀족이었는데 유불선 3교에 통달하고 모든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이 자를 불러 칸은 말했다. "요와 금은 원수지간이다. 내가 금을 무찔러 그대의 원수를 갚았노라" 그러자 초재는 하나의 두려움도 없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조도, 나의 부친도 모두 금의 조정에 봉사하였다. 한번 신하가 된 이상에는 어찌 두 마음을 품고 주군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겠나 이까?" 이 대답이 마음에 들어 그를 항상 곁에 두고 정치 상담역으로 삼았다. 

 


※ 기마민족 세계지배 약사

① 몽골 제국 약사(1206-1368 : 162년)
- 1204년 고비사막을 통일하고
- 1206년 몽고제국 건국 오논강변 쿠릴타이 회의에서 대칸으로 추대
- 1207년부터 3년간 서하(西夏:시샤왕국, 1038건국)를 정복하고,
- 1211년부터 1215년까지 만리장성을 넘어 금을 정복하고,
- 1219년에는 20만의 정규병력과 지원병력 30만, 도합 50만을 동원하여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가 근거지인 호라즘을 원정하고 잔당을 쫓아 흑해 크림반도 칼가강, 남쪽 인더스강 중류에까지 이르렀다가 원정 7년만인 1225년에 본토로 돌아 오게 된다.
- 1226년에는 다시 반발하는 서하의 사마르칸트를 포위하였는데 여가시간에 사냥중 징기스칸은 낙마하여
- 1227년 징기스칸 죽음. 그의 사후 장남인 주치는 흑해의 킵챠크고원에 킵챠크한국을, 차남인 차카타이는 서요의 땅 중앙아시아에 차카타이 한국을, 셋째인 오고타이는
- 1229년 셋째인 오고타이는 대칸의 지위를 계승, 막내 툴루이는 몽고족 관례에 따라 몽고본토를 물려받고 분할 통치하게된다.
- 1230년 2대칸 오고타이는 막내 툴루이와 금 원정에 올라
- 1234년 금을 정복하지만 원정도중 툴루이가 병사하게된다.
- 1231년에는 고려에 침략을 시작하고 금 정복후 오고타이는
- 1235년, 오르콘강 상류에 동서 무역의 물산의 집산지인 수도 카라코룸을 세운다.
- 1236년 오고타이는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정규군 10만으로 하여금 유럽 원정에 나선다. 그들은 볼가강을 건너 모스크바, 랴잔, 키예프등을 차례로 함락한다.
- 1241년에는 동유럽에 진출하여 폴란드, 헝가리, 독일, 오스트리아등 주요도시를 역시 함락시킨다. 이 때 치마만 입던 유럽인들에게 바지가 전해져 그 바지가 오늘날 세계적인 의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연전연승 서유럽으로 향하는 그들에게 변고가 생긴다. 대칸인 오고타이의 죽음이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군하게되고 서유럽은 화를 면한 것이다. 만일 이때 오고타이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이 몽골의 말발굽아래 놓였을지도 모른다.
- 이어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가 집권하였으나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 1251년 사촌 툴루이의 장남 몽케가 4대 칸에 오른다. 그의 둘째 동생 훌라구는
- 1258년 압바스 왕조를 멸하고 바그다드에 일한국을 세운다. 첫째 동생 쿠빌라이는 중국, 윈난, 티벳을 정복한다. 몽케도 쿠빌라이를 도우러 남송 원정 중 병사하게 된다.
- 1260년 남송과 화친하고 돌아온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열어 5대 칸에 오르고
- 1264년 수도를 카라코롬에서 대도(연경, 북경)로 옮기고
- 1271년 국호를 원이라 한다.
- 1259년에는 고려와 강화한다. 사실상 정복이었다.
- 1273년 삼별초군이 4년 간의 항쟁 끝에 전멸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는 1271년 이탈리아를 출발, 4년만인
- 1275년 원에 도착 쿠빌라이를 만난다. 그는 17년 간의 원의 생활을 정리하여 동방견문록을 남긴다.
- 1279년 남송이 150년의 역년 끝에 멸망하고,
- 1281년에는 2차 일본정벌에 나서지만 실패한다.
- 1294년 쿠빌라이가 세상을 떠나다. 그가 죽자 중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 1351년 시작된 홍건적의 난이 그것이다. 홍건적에 쫓겨 몽고족은
- 1368년 만리장성 밖으로 쫓겨. 1306년 차가타이 한국 분열, 1335년 일한국 분열이 시작되다.
- 1368년 주원장이 금릉에서 명을 세우다.

- 북원(北元, 1368년 ~ 1635년)은 명나라주원장에게 밀려 몽골 고원의 초원지대로 돌아간 이후의 원나라를 부르는 말.

- 1368년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上都)로 패주.

- 1370년 토곤 테무르는 응창(應昌)에서 훙거했다. 이로써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 토곤 테무르의 아들인 원 소종(元昭宗)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1372년에 명의 원정군을 격파했다.

- 그러나 코케 테무르가 죽고,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퇴하고,

- 1388년 브이르 노르의 동북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 소종의 뒤를 이은 동생 토구스 테무르도 투울 강 기슭에서 살해되었다. 이로서 쿠빌라이 가문은 단절되었다.

 

 

몽골의 역사
Монголын түүх
DschingisMongoliaStatue.JPG
고대
중세
근현대
② 티무르 제국 약사(1369-1500 : 131년)
- 1369년 티무르 제국 건국, 1369-1389 사마르칸트 게슈라인 징기스칸 후손 티무르 차가타이 점령,
- 1393년 일한국, 1395 킵챠크한국, 1398인도 델리 정복,
- 1402년 오스만 격파,
- 1405년 티무르 명 원정 중 70세로 사망, 15C말까지 흥성,
- 1500년 투르크 일파 우즈베크족에 멸망, 1502년 킵챠크 멸망

③ 무굴제국 약사(1526-1857 : 331년)
- 1526년 티무르 자손 바베르 서북인도 정복 델리를 수도로 이슬람 무굴제국 건국,
- 1530년 바베르 사망, 손자 악바르대제 무굴 흥성, 힌두교인을 왕비로 함.
- 5대 샤자한 대제 뭄타즈 마할을 위한 묘 20년 걸려
- 1653년 아그라 자무나강 기슭에 타지마할묘 세움.
- 17C중 아우랑제브시 번영, 1707년 아우랑제브 사후 쇠퇴,
- 1857년 멸망,

④ 오스만제국 약사(1299-1922 : 623년)
- 1299년 오스만제국 건설, 11C 투르크계 셀주크(1037건국, 1194멸망) 쇠약 12C분열, 오스만 베이 투르크 통일 운동
- 1326년 오스만 베이 27년만에 사망, 아들 오르한에 동로마(비쟌틴제국 : BC7C건국 로마 4C분열, 이집트, 소아시아, 시리아, 그리스 차지 콘스탄티노플 수도로 함) 멸망 부탁,
- 1326년 오르한 동로마 진격 예니 체리(새로운 병사란 뜻)부르사 점령, 오르한 사후 무라트1세 발칸 진출,
- 1396년 4대 바야지트1세 때 십자군 원정 옴,
- 1402년 티무르 침공, 앙카라에서 바야지트 포로, 발칸 이외 티무르에 점령, 7대 메메트2세 때 수복
- 1453년 10만 오스만군 콘스탄티노플 공격, 5/29 콘스 함락 동로마 멸망, 콘스를 이스탄불로 개명, 이슬람 국가로 됨,
- 1514년 셀림 1세 이란,
- 1517년 이집트 마물루크 왕조(13C중 이집트.시리아지배 투르크계 왕조) 멸망, 메카, 메디마 정복,
- 1520년 술래이만 1세 최강 번영,
- 1529년 오스트리아 빈 공격 실패등 13회 유럽 진출,
- 1538년 프레베자 해전 승리 베네치아.에스파냐 장악,
- 1571년 그리스 레판토 해전 기독교 연합함대(신성동맹)에 패배후 쇠퇴,
- 1922년 1차대전 패전 623년만에 멸망

 

 

 

배달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상선약수님-

 

濊貊族이 세운 淸 때는 明族이라 부를 수 없고, 淸族이라 해야 한다. 물론 그 뜻은 ”오로지 淸나라의 정치적 세력 밑에 든 여러 갈래의 종족들을 합친 말이다. 淸族은 어떤 하나의 특수한 독립적 종족이 아니라 여러 종족들 혹은 민족들의 혼합체인 까닭에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民族의 개념으로서의 淸族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淸나라에 속한 사람, 백성, 혹은 국민으로서의 淸族“이다.

中奴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단어가 中族이다. 그 뜻은 세계의 중심 종족이 아니고, 단순히 “수많은 종족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華夏族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華夏族은 미개 종족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인가. 우리는 그 동안 우리나라가 내내 한반도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단정해 왔으므로 서슴없이 단일민족이라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高麗 末까지 靑邱大陸을 중심지로 삼아 아시아를 지배한 나라다. 단일민족이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타임 라이프북스(Time, Life Books)의 2 차 대전에서는 일본조차 단일민족이라 단언했다.

日本 국민이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왔는가는 신화나 전설 속에 묻혀 잘 알 수 없다. 기원전 어느 시기에 기본적으로 몽고계에 속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이동의 흐름이 韓半島를 거치고 바다를 건너서 동아시아의 가장자리에 솟은 화산섬 열도에 속속 상륙했다. 이들은 선주민과 섞이면서 남쪽에 있는 3 개의 섬에 정착했다. ...... 1941 년 서양과의 전쟁에 돌입한 日本人은 바로 이 원시적 이주자들의 직계순혈 자손이다. 전쟁 당시 총인구 중 불과 1 % 미만이 타혈종이었다. 공동의 문화와 미래를 함께 영유하면서 지리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세계와 격리된 채 살아온 일본인은 아마 세계의 주요민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동일혈통족일 것이다. ( http://library.lhs.usd497.org/japan.htm )

1 %만이 他血種? 日本民族은 기원전에 온 것도 아니고, 純血民族은 더더욱 아니다. 청구대륙에서 이주한 中國倭만 해도 25.8 %요, 말살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先住民도 4.8 %나 된다(일본국립유전자협회에서 인정하는 호라이의 단독연구). 韓國人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은 24.2 %라고 했으니, 나머지 45.2 %는 세계 각지의 온갖 잡다한 유전자라는 결론이다. 서양인이 일본을 맨 처음 방문한 1543 년부터 시작된 일본 민족과의 생물학적 교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더 확대되어 갔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는 19 세기 말 여러 번 일본에 다녀 갔었다는데, 그는 두 권의 '일본일기'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은 거의 일본 여자들과의 성행위의 기록이라고 한다. 대낮에 떼거지로 배로 찾아온 일본 처녀들과 프랑스 선원들의 선상 난교, 저녁이면 아무 마을이나 찾아가도 반겨주는 마을처녀들의 ...... 한 마디로 일본은 서양인들도 이해 못하는 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http://tango.kist.re.kr/..0602.htm )

그러므로 日本人은 절대 민족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메국민족(米國民族)이라는 것과 똑같다. 일본인이 대부분 北方系 아시아인의 混血이다 보니까, 생김새에 큰 차이가 없을 뿐이다.

政治的인 목적으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航海術과 造船術이 없어서 격리 되었다. 中國倭가 이주하자 三漢은 同族이라는 책을 焚書하고, 國風이라며 한문화(漢文化)를 이상하게 비틀었다. “공동의 문화와 미래를 함께 영유”하기 위하여 漢文化를 미개의 바닥까지 끌어내려 倭文化를 만들어냈다. 그런 미개 日本人이 “세계의 주요민족”으로 부상한 것은 고작 20 세기에 들어와서였다. 漢委奴國의 기나긴 日本史를 모르는 서양인들에 의해 극찬받는 민족으로 거듭난 것이다.

한민족은 單一民族이 아니다
. 한민족이란 배달과 朝鮮의 지배하에 모여든 種族 가운데 獨自種族으로서의 존재를 포기하고 장구한 세월 동안, 같은 傳統을 계승하고 같은 文化를 향유하여 오는 동안 同化되어 同族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종족들의 集合體이다. 따라서 과거에 한민족으로 살았다고 해도 어느 시기에 떨어져 나가 더 이상 한민족이라는 인식을 소유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한민족이 아니다. 또한 韓半島에 살면서도 스스로를 濊貊族이라 인식하는 자들도 한민족이 아니다. 현재 한민족이 單一血統을 가진 민족으로 인식되는 것은 淸이 李氏朝鮮의 땅을 계속해서 빼앗은 결과, 해부학상 같은 계통에 속하는 종족만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三韓은 모두 五家 64 族을 포함 하였다(三韓皆有五家六十四族 檀君世紀)."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깔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藍部之人一云風族又棕色種其皮膚暗褐色貌猶黃部之人也 三神五帝本紀)." 64 族 대부분은 한민족이 아니다. 64 族은 아시아에 거주하는, 檀君의 지배를 받은 모든 種族을 가리킨다. 수로왕비(首露王妃)가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이름이 허황옥(許黃玉)이라는 것, 伽倻人과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 등은 阿踰陀國이 우리와 같은 말, 같은 문자를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인도 역시 朝鮮의 거수국(渠帥國)이었던 것이다. 인도 역시 한문명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남아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나라가 부탄(Bhutan)이다.

종카(Dzongkha)語 노래를 듣다보면 우리나라 전통 민요와 비슷한 약간 단조풍의 음색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의 놀이문화에도 제기차기, 고무줄 놀이, 공기놀이 등 동일한 놀이문화가 많고 부탄의 전통의상인 고(Gho·남자의상)와 기라(Kira·여자의상)도 얼른 보기에는 개량한복과 아주 유사한 모양이다(또 다른 한국 부탄, 노은오. 부탄 주재 한국어 강사)
(http://blog.naver.com/ilong4u.do?Redirect=Log&logNo=140002070066)

◀ 부탄 왕정의 표식

특히 종카語는 발음만 빼고 韓國語와 유사하다. 두 言語는 어순이 같고,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만든다. 경어법도 비슷하고, 발음에 있어 친숙한 단어들이 많다. 아빠, 엄마를 종카語로 아빠(Apa), 아마(Ama)라고 발음한다. 종카語 알파벳 상당수가 한글 알파벳과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카(Ka) 차(Cha) 자(Ja) 타(Ta) 다(Da) 나(Na) 파(Pa) 바(Ba) 마(Ma) 와(Wa) 아(A) 야(Ya) 라(la) 사(Sa) 하(Ha)

종카語는 잡드룽 나왕 남게이(Zhabdrung Nawang Namgay)가 티벳어를 변형시켜 1616 년 쯤에 만들어졌다. 그 전에도 종카語가 쓰이고 있었다는데, 그리 오래 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成桂가 韓半島로 내뺀 1388 년 이전에는 티벳이 티벳고원의 땅 한 줌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티벳고원에 들어오기 전에 티벳은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티벳고원 남부 이남에 있는 부탄에 언어를 수출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부탄에는 方言이 많은데, 종카語와는 완전히 다른 方言들도 존재한다. 부탄의 지형적 영향으로 오랜 기간 다른 지역과 교류 없이 고립된 지역들이 많아 方言的 차이가 심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日本의 예로 보건데, 아무리 고립되었다 해도 원래 사용하던 언어가 완전히 다른 언어로 변하지는 않는다. 부탄에 방언이 많은 것은 옛날부터 지역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탄의 지리적 위치에 기인한다. 부탄은 방글라데시와 함께 우리나라(靑邱大陸)와 인도, 동남아 나라들의 문화 수렴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부탄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부터 사람들이 흘러 들어가서 살던 지역인 것이다. 부탄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된 것은 16 세기 부터 였지만, 지방은 토후들이 지배했다. 중앙집권제가 성립한 것은 1907 년에 와서다.

종카語가 韓國語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배달, 朝鮮時代에 부탄 역시 구한(九桓)의 일원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明 때 티벳고원에 티벳이 이주하고, 티벳불교를 받아 들이면서 티벳어를 배우는 대신, 티벳어 발음만 기존 말에 접붙인 것이다. 종카語를 부탄의 일반인들이 배우기 시작한지는 수십 년 밖에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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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기즈칸 무덤의 800년 미스터리 곧 풀리나

  •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E-mail : flatron2@chosun.com
    1982년 경남 진해의 어촌마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
 
중국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있는 칭기즈칸릉. 시신 대신 유물을 모아 조성한 '의관총'이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있는 칭기즈칸릉. 시신 대신 유물을 모아 조성한 '의관총'이다.
 
칭기즈칸이 무덤에서 깨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9일 중국의 과학기술매체인 텅쉰과기는 “2010년부터 칭기즈칸의 무덤을 추적해온 린위민(林宇民·앨버트 린) 박사가 최근 칭기즈칸의 매장지를 55곳으로 압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티아고 분교 소속의 중국계 미국인 연구원인 린위민 박사는 “칭기즈칸의 후손”을 자처하며 칭기즈칸의 매장지로 추정되는 6000㎢가 넘는 지역을 인공위성과 무인기 등을 동원해 추적해 왔다.

이를 통해 촬영한 8만4000여장에 달하는 위성사진 등을 바탕으로 도로와 하류를 비롯한 대규모 매장 흔적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해 왔다. 이 과정에는 린위민 박사를 비롯해 1만명이 넘는 연구지원자가 함께 참여했다. 그 결과 칭기즈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지를 55곳으로 압축해 낸 것.

린위민 박사는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는 ‘대칸(칭기즈칸)의 계곡’이란 국제 프로젝트의 주축 인물이기도 하다. 그간 린위민 박사가 소속된 미국 캘리포니아대를 비롯 몽골과학원, 국제몽골연구협회, 전미지리학회 등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아왔다. 린위민 박사 측에 따르면, 곧 압축된 55개 지점에 대한 몽골 현지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계획대로라면 지난 800년간 인류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혀온 칭기즈칸의 무덤이 중국계 미국인의 손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동서양을 통틀어 세계 최대 정복자인 칭기즈칸 테무진이 사망한 것은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자신이 사망한 뒤 밀장(密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1만여필의 말을 동원해 시신을 묻었던 곳을 철저하게 말발굽으로 다지는 식으로 평장(平葬)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일설에 의하면 매장에 참여했던 과정에 마주쳤던 모든 사람을 죽이고, 호송 인원과 말들을 함께 순장(殉葬)시킨 것으로도 전한다. 도굴 등에 의한 무덤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 인해 칭기즈칸의 사망 이후부터 8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칭기즈칸이 매장된 곳의 정확한 위치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역사상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무덤은 전 세계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도굴꾼들에게도 늘 관심거리였다.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운 만큼 칭기즈칸의 시신과 함께 막대한 부장품이 묻혀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몽골을 점령했던 권력자들 역시 칭기즈칸의 무덤에 줄곧 지대한 관심을 표해왔다. 특히 만몽(滿蒙) 연합정권인 청(淸)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일대를 정벌하고 칭기즈칸의 ‘대원전국(大元傳國)’ 옥새를 수중에 넣은 직후 황제를 자처했다. 또 청나라 옹정제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칭기즈칸의 유물을 모은 ‘의관총(衣冠冢)’을 조성해 칭기즈칸을 신성시해 왔다.

내몽골 일대를 다스렸던 장제스(蔣介石) 역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칭기즈칸의 의관총을 칭하이(靑海)의 타얼스(塔爾寺)로 피신시켰다. 반대로 일제는 중일전쟁 때 내몽골 일대를 점령한 뒤 ‘몽강국(蒙疆國)’이란 괴뢰정권을 세워 칭기즈칸 무덤 발굴에 나섰다. “칭기즈칸이 미나모토 요시쓰네(源義經)”라는 전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미나모토 요시쓰네는 일본에서 추앙받는 헤이안 말기의 무장으로, 칭기즈칸과 활동 시기가 비슷하다. 이에 상당수 일본인들은 “미나모토 요시쓰네가 곧 칭기즈칸”이라고 믿고 있다. 일본은 1990년대에도 몽골과 함께 칭기즈칸 무덤 공동탐사를 진행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에 있는 칭기즈칸의 초대형 기마상.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에 있는 칭기즈칸의 초대형 기마상.
 
반면 지금까지 칭기즈칸의 무덤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몽골족 원(元)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원사(元史)’에 나와 있는 ‘장기련곡(葬起輦谷)’이란 네 글자가 전부였다. ‘기련곡에 묻었다’는 뜻으로, 후대의 학자들은 기련곡의 위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게다가 칭기즈칸이 동서양에 걸친 워낙 넓은 대제국을 세운 까닭에 ‘기련곡’의 위치 역시 중국, 몽골, 러시아 등지로 의견이 팽팽히 엇갈렸다.

현재로서 칭기즈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련곡’으로 가장 유력한 곳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동북쪽에 있는 컨티산맥 일대다. ‘몽골비사’에 등장하는 부르한산(不兒罕山·부르칸 칼둔산)이 바로 이곳이다. 칭기즈칸이 태어나 청년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성산(聖山)이다. 이에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칭기즈칸이 있다면 컨티산맥의 부르한산 어딘가쯤에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반면 중국의 상당수 학자들은 닝샤(寧夏)회족자치구의 류판산(六盤山) 일대를 매장지로 추정하고 있다. 칭기즈칸은 서하(西夏) 원정을 벌이던 1227년 8월, 류판산 인근에서 66세의 일기로 병사했다. 회족자치구인 닝샤는 옛 서하국의 영역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부패하기 마련인데, 죽은 시신을 들고 몽골 초원까지 가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란 것이 류판산설을 주장하는 근거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 때 원나라를 방문했던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는 “칭기즈칸이 알타이산에 묻혀 있다”고 주장했다. 알타이산은 현재 몽골과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사이에 있는 산맥이다. 반면 일부 러시아 학자들은 “칭기즈칸이 바이칼호수에 수장(水葬)돼 있을 것”이란 주장을 펴기도 했다.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바이칼호수는 몽골의 북쪽 국경 너머에 있어 수장 가능성도 없지 않다.

칭기즈칸의 무덤이 중국계 미국인의 손에 의해 발견되면 몽골 출신 칭기즈칸의 중국인화(化)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현재 “칭기즈칸이 각 민족 통합에 지대한 공을 기록했다”며 우상화하고 있다. 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이 세운 원나라를 자신들의 정사(24사)에 편입시켜 가르치고 있다. 1954년에는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칭기즈칸 의관총을 대대적으로 중수한 뒤 ‘5A급’(최고급) 국가문물로 지정해 짭짤한 관광수입마저 올리고 있다. 2004년에는 몽골족 배우 바썬(巴森)을 주연으로 한 30부작 대하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중국화에 맞서 몽골에서도 2008년 울란바토르 동쪽 외곽에 40m 높이의 칭기즈칸 초대형 기마상을 조성해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곳은 칭기즈칸의 황금 채찍이 발견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무덤 발굴 등 고고학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중국은 1974년 중국 시안에서 진(秦)시황의 병마용을 발굴해낸 이후부터 이미 세계 정상 수준이다. 그 결과 2009년에는 ‘삼국지’ 위(魏)나라 무왕 조조(曹操)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 또 2013년에는 ‘대운하’로 잘 알려진 수(隨)나라 양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하는 등 매년 굵직굵직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이덕일 사랑] 칭기즈칸의 무덤
1206년 몽골의 대집회 쿠릴타이에서 대칸[大汗]으로 추대된 칭기즈칸은 당대에 제국의 영토를 중앙아시아에서 남러시아 지역까지 확장시켰다. 1227년 여름 서하(西夏)를 공격하던 칭기즈칸은 육반산(六盤山) 아래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청수행궁(淸水行宮)에서 66세로 병사했다. ‘원사(元史)’ 태조(太祖) 22년(1227)조는 칭기즈칸을 “기련곡(起輦谷)에 안장했다”고 전하는데, 그의 장지는 역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칭기즈칸의 시신이 40일 거리 정도에 옮겨졌는데, “도중에 부딪치는 모든 사람은 그 시신을 옮기는 사람들의 칼에 베였다”고 전한다. “가서 저승에서 너의 주군(主君)을 섬겨라!”라고 말하면서 죽였다는 것이다. 이란 출신으로 원(元) 제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1319)이 쓴 ‘집사(集史)’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몽골사 전문가 룩 콴텐은 ‘유목민족제국사’에서 “사망한 군주의 장지(葬地)를 숨기는 것은 몽골족의 전통이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기련곡이 칭기즈칸 혼자의 무덤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동구릉(東九陵)이나 서오릉(西五陵)처럼 원 황실의 장지였다는 점이다. ‘원사(元史)’본기(本紀)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과 정종(定宗)·세조(世祖)·성종(成宗)·무종(武宗)·인종(仁宗)·태정제(泰定帝)·명종(明宗)·문종(文宗)을 비롯해 7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한 영종(寧宗)까지 대부분의 황제가 기련곡에 묻혔다. 이 중 세조는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장인이므로 우리 역사와도 직접 관련이 있다.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통치했던 대제국의 11명 황제들이 묻힌 기련곡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몽골 고원이 아무리 광활하다 해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 일본은 기련곡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몽골과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벌였고, 최근 한국이 몽골과 공동으로 유적 발굴에 나선다는 소식이다. 베일에 싸인 동이족(東夷族) 최고 영웅의 무덤이 같은 동이족 후손의 손에 발견되는 것이, 현재 활발해지고 있는 한·몽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도 낫겠다 싶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08.16 18:37 48' 2006/08/18 09:12:46

 

 

[이규태 코너] 許皇后의 故鄕碑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씨의 고향은 인도 남동부 아요디아시(市)다. 그곳에 세워진 허황후비에 후손들인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일행이 해마다 참배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8년 김수로왕은 김해 앞바다에 표착한 아유타국의 여인 허황옥을 맞아 비(妃)로 삼았다는 것이 전부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아유타국이 어디이며 그 먼 타국에서 어떤 사연과 경로로 김해 앞바다까지 흘러왔는지를 살핀다는 것은 역사에로의 대탐험이 아닐 수 없다. 고고학자인 김병모(金秉模) 교수가 30년을 추적, 허황후의 뿌리를 찾아내어 그곳에 허황후 고향비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인도의 옛 지도를 살펴 아유타국이 인도 남동쪽 아요디아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아요디아국이 1세기에 북방 월지족(月氏族)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층은 쫓겨나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인 촉(蜀)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았다. 허황후의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쓰인 데서 허황후가 보주(普州)란 곳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추적한 끝에 보주가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임을 알아낸 것이다. 그곳에서 서기 48년 전해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는데 그 반란을 주모한 가성(家姓)이 허씨라는것도 후대 기록에서 확인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인도 소녀인 허황옥은 오빠와 더불어 장강(長江)을 타고 삼협(三峽)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 앞바다에 이른 보트 피플이었던 것이다. 이 허황후의 이동 지역을 꿰는 문화의 공통분모로 김 교수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쌍어(雙魚)신앙을 들었다. 인도 아요디아의 사원이나 풍물에 쌍어가 흔한 것을 보았고 중국 보주에서도 확인했으며 김해 수로왕릉의 정문에도 이 천축문화인 쌍어가 새겨져 있다. 허황후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세웠다는 은하사(銀河寺)에서도 두 쌍의 쌍어를 찾아볼 수 있다. 언어학자로부터 가락이라는 말이 인도 고대어에서 물고기를 뜻한다는 것도 알아내어 이 허황후의 궤적을 문화적으로도 입증한 셈이다. 이 같은 역사궤적을 확인하는 연구결과가 한국유전체학회에 보고됐다. 곧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족 유골에서 북방계가 아닌 인도의 남방계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역사 속으로의 궤적이나 유전질 탐험이 필요한 사항이 비일비재한데도 방치돼 있다는 것을 새삼 통감케 하는 장거가 아닐 수 없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입력 : 2006.01.20 19:01 58' / 수정 : 2006.01.20 19:07 08' 2006/04/02 18:2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