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포르투갈 -나강하-
1. 포르투갈인은 임진왜란에 있어서 우리에게 善과 惡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2. 그 하나는 일본에 최초로 조총을 전래함으로써 일본이 스스로 조총을 대량 생산하여 보유케된 그 신무기를 동원, 조선을 전쟁의 구렁으로 빠지게 한 惡을 안겨 주었다는 점이다. 이 때 일본은 전세계 조총 숫자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3. 일본의 조선침략의 원인으로는 오랜 전란을 유발한 군벌들이 히데요시의 통일로 할 일이 없어지자 내분을 우려한 집권군벌의 고의적인 대외전쟁 유발, 궁핍한 섬나라를 탈출하려는 정명가도, 백제를 조국으로 아는 황실의 멸망한 조국인 조상의 나라 수복에 대한 열망설등 여러 설이 있으나 조총이란 신무기의 대량 보유로 인한 조선정벌의 자신감도 큰 원인이라 할 수 있으니 고의적인 아닐지라도 포르투갈인의 조총전래는 결과적으로 조선에 커다란 재앙을 안겨 준 셈이다.
4. 또 하나는 그들의 식민지 남미 브라질에서 가져 온 고추를 조선에 전래케하여 된장과 백김치를 먹던 조선에 고추장과 붉은 김치를 개발케 하여 김치문화에 혁명을 일으킨 善을 안겨 준 점이다.
5. 고추의 전래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그 중에는 일본에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과 결탁하여 조선 사람들을 고추의 매운 맛을 퍼트려 조선인종말살을 획책하려 임진왜란 때 가져 왔으나
6. 현명한 조선은 오히려 백김치를 붉은 김치로 된장을 고추장으로 업그레이드(Upgrade)하여 스스로 면역력을 갖추었으니 포르투갈이 준 惡을 우리 스스로 善으로 탈바꿈한 사례라 하겠다.
7. 명군의 참전시에는 바다에 능숙한 일부 포르투갈인이 해귀(海鬼)라하여 잠수부로 참전하여 정박한 일본전함의 바닥으로 잠수하여 구멍을 뚫어 수장시키는 공을 세웠으니 善을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8. 16세기부터 예수회 신부들의 선교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소서행장과 함께 일본측 요원으로 동행하여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포르투갈인들이 조선에 체류했던 결과로
9. 사분(Sabao 비누), 타바코(Tabaco 담배), 빵(Pao), 빌로드, 고무, 레자등과 같은 단어들이 한국말의 어휘에 남게 된 점등은 포르투갈인의 영향을 반증하는 자료라고 볼 수 있는데
10. 그들은 일본이나 조선에 정략적으로 가담했던 것이 아니고 오로지 개인들의 이해득실로 양 진영에 가담하여 善과 惡을 동시에 안겨 준 것이니
11. 임진왜란에 있어서 포르투갈은 우리와 무관했던 것이 아니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天朝壯士餞別圖천조장사전별도]
1599년 4월 임진왜란에 원병(援兵)으로 왔던 명군(明軍)이 철수할 때,
명장 형개(邢介)가 자신들이 철군하는 모습을 그려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그 결과 화원(畵員) 김수운(金水雲)이 그린 전별도를 받았는데,
형개(邢介)는 이 그림을 다시 자신의 연락관인 김대현(金大賢)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전한다.
명군의 대규모 행렬이 다채롭게 묘사된 그림이다.
당시 해귀(海鬼)라고 불렸던 소수의 포르투갈 용병들이 명군(明軍)과 함께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좌측 하단에 수레를 탄 포르투갈 병사들의 모습이 재미나게 그려져 있다.
수연당공 「천조장사전별도」는 명군의 진용과 무기류 군복 등을 세밀히 묘사하고 있어
임란사 연구에 획기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별도는 형개장군이 조선땅을 떠나면서 당시 조선인 부관이었던
14세 김대현(金大賢-풍산김씨, 8형제 진사, 5형제 등과)에게 정표로 준
네 폭의 그림으로 포르투갈인의 참전사실은 제 2폭「邢軍門」중
수레를 탄 4명의 군인을「해귀(海鬼)」라 표시한데서 확인 됐다.
해귀는 오늘의 해군특공대와 같은 것으로
세전서화첩에는 해귀가 어느나라 사람인가를 밝히는 기록이 함께 전하고 있다.
(불란국해귀사명육색여칠발종화적여 란모능침수 천적선자)라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불란국은 오늘날의 포르투갈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구절을 풀이하면 「불란국 해귀 4명은 살색이 옻칠을 한 듯하고
머리 색깔은 황적색으로 윤단처럼 곱게 흩어졌으며 잠수에 능하고 적의 배를 뚫는 사람」으로
해전에 매우 능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이 조선 명나라 일본간의 3국 전쟁에서
보다 국제성을 띤 전쟁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화첩은 김대현의 15손 김윤씨(오미동 248)가 소장하고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179호로 지정돼 있다.
또 이 화첩은 맹활약을 한 원병(猿兵)의 정체 규명과 함께
형개장군 철군시 명군(明軍)지휘관 350명의 명단을 최초로 공개해
임란사 연구에 새로운 국면을 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금까지 원숭이복장을 한 병사로만 알려진 원병은 적진을 미리 염탐하는 위장병이었다.
중국 형초(荊楚)에서 양호(楊鎬)장군이 원병 300명을 거느리고 와
직산(稷山)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전별도에도 원병 300이란 대기(大旗)와 춤추는 원숭이 모습이 보인다.
세전서화첩 기록중 임란 당시 최후까지 우리땅에 남아
왜군을 무찌른 명군 장수명단이 계급과 함께 밝혀진 것도
사학계에 새로운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직산전투(1597년 12월 12일~98년 1월 4일)에서 대승을 거둔 마귀(麻貴)와 양호제독
四川城전투(1598년 9월 17일~10월 1일)의 동일원( 一元)제독
순천왜교성(順天倭橋城)전투(1598년 9월19일~10월 24일)의 유연(劉 ) 진린(陳璘) 계금(季金)장군,
노량진 해전(1598년11월 19일)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전사한 등자룡(鄧子龍)장군(등소평의 선조) 명단이 나온다.
이 밖에도 역사를 통해 낯익은 李如海(이여송의 동생)와
祖永訓 장군(평양전투) 등 3백 53명의 직급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접찰(接察), 제독(提督), 총병(摠兵) 등 고위직에서
예과급사(禮科給事), 파총(把摠), 관발군(管撥軍), 랑중(郞中)등 하위직급까지 나와
당시 중국의 군사직제 연구에도 결정적 자료가 되고 있다.
형군문도에는 해귀 4명의 머리색을 갈색으로 그렸고
승전뒤 철군하는 형개장군의 흐뭇한 표정과 조선인 3인(부관이나 통역으로 보임)의 모습도 있다.
무리 중에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군졸들이 따르고 있어
조선 중기의 군사문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화첩은 임란 7년을 통해 명군이 쓴 전비(戰費)와 군량미까지 정확히 밝혀
조선에 대한 지원상황 알 수 있게 해 준다.
전쟁이 끝난 후 사절단으로 간 백사 이항복이
중국 경지하기(慶支下記-지금의 재무부)를 통해 확인한 것으로
'잡비가 은으로 340만냥, 군량미 13만석, 출병인원수 22만1천 5백여명'이라 밝히고
군량미를 은으로 환산하면 5백83만 2천여냥이며
조선에 와서 구입한 쌀과 콩이 7만석이므로 도합 20만석이었다고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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