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일본)는 배달족이 세운 나라다? -나강하-
요즈음 "불멸의 이순신"에 아이누가 가끔 등장한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으로부터 지켜주신 나라이고
또한 장군은 배달족의 후손이므로 "불멸의 이순신"에
아이누 토론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 제민족이 아이누 후손이라는 설은
극우 일본인들이 퍼트린 유언비어이다.
이는 에가미 나미오가 발표한 "기마민족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몽골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인을 형성했으므로 한민족과 몽골족이 일본인의 원류라는 것인데
얼핏 우리에게 유리한 설인 것 같은데 기실 그렇치가 않다.
이 기마민족설은 일본 천황가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원형이 되었다 하여
일본에서조차 배척을 받다가 최근에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는데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기마민족의 고향인 한반도,
나아가 중원이 바로 그들의 고국이며 수복해야 할 땅이라는 논리로 둔갑하여
극우주의자들의 아시아 침략의 근거자료가 됨을 알아야한다.
"기마민족"이란 설은
이런 위험성이 있으므로 극히 경계해야하며
필자는 "천손족"이라거나 "배달족"이란 말을 권유하고 싶다.
일본인의 근간이 아이누족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세운 나라라는 근거는 수도 없이 많다.
1. 아이누족은 홋가이도에 존재하는 혼혈 토착민으로
그 특징은 큰 발(왕발), 검은 털, 시커멓고 무성한 눈썹, 둥그런 눈,
작은 키, 짧은 상반신, 긴 팔의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BC7500년 경 등장하는 죠오몽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들 죠오몽인을 몰아내고 오늘날 일본인의 형질을 구성한
BC4세기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인 야요이인과도 분명 다른 형질을 갖고 있다.
야요이인은 배달족과 아주 유사한 형질을 갖고 있는데
바로 그들이 대다수 일본인의 원형을 이루었음은 일본인들도 인정하고 있으며,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은 극소수로 현재도 실재한다.
2. 우리의 배달족의 특징은
황인종으로서는 유난히 큰 키, 옆으로 쪽 째진 눈매,
갸름한 손발, 황인종이지만 유난히 흰 피부,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등으로 토착 일본인과는 형질적으로 다르다.
3. 그러나 우리 주위에 간혹 배달족의 특징 만이 아닌,
유난히 피부가 검거나, 남방계의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전쟁등 혼란기에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듯이
약간의 인민족의 피가 섞인 결과로
전체적으로 우리 백의민족을 "천손족, 배달족"의 후예라하여 이상할 것은 없다.
즉, 커다란 배달민족의 용광로에 섞인 약간의 티끌은 흔적도 없이 녹아 들게 마련이므로
일만년 역사의 단일민족이라 자랑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으며
이러한 단일민족으로 동질의 유전자를 보전하여
집단을 이루고 유구한 세월에 걸쳐 살아가는 민족은
한민족이 유일무이 하다고 한다.
4. 일본에는 현재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유래한 지명, 신사, 서적, 황실계보등
수많은 자체자료가 있으므로 현재의 일본인이 한반도인의 후예임은 전혀 부인할 수 없다.
5. 한 일본 형질인류학자가 혈청을 조사하니 놀랍게도
일본토착인 특성은 10%, 한국인 특징은 90%를 나타냄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과학적인 규명사례이고
6. 그들은 아직도 황실 족보나,
황실 수장고등을 전면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칠지도등 논란의 소지가 있는 유물 몇점만 공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전면적으로 공개할시에는
그간 그들이 끊임없이 주장한 황실 일본열도기원설이 뒤엎어지기 때문이다.
일본 황실에서는 공식적인 제사 이후 황실만 모여
한반도에서 건너간 그들의 조상 위패를 따로 모시고
비밀리에 2차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왜 그럴까?
누구에게 따로 제사를 지낼까?
7. 유적이 발굴되면 학자 몇 몇만 비밀리에 들여다보고
다시 보존의 핑계로 발표도 없이 봉인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왜 그럴까?
구석기 유물까지 조작하는 그들은 조상 한반도 기원설의 근거가 되는
유물유적의 공개를 꺼리기 때문이다.
8. 대륙에서 전쟁이 나면 도피처를 찾게 마련이고
그러다가 구석으로 피하게 마련인데
고구려나 백제 신라가 멸망한 싯점에
일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 하고 있음이 규명되고 있다.
이는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 했슴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9. 고대 일본의 말은 한반도와 큰 차이가 없었고
한단고기에서 언급된 가림토문의 계통인 아히루문자는
얼핏 한글과 너무 닮아 글에서도 우리와 일치함을 보는데
이러한 거증자료는 앞으로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관련 자료]
■ 에가미 나미오 [江上波夫, Egami Namio, 1906.11.6~2002.11.11]
일본의 고고학자.
국적 일본
활동분야 고고학
출생지 야마구치현
주요저서 《기마민족국가》 《학문의 탐험》 《동양학의 계보》
1906년 11월 6일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출생하였다. 도쿄대학[東京大學]을 졸업하고 1948년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 《민족학연구 民族學硏究》라는 학술지에서 개최한 '일본 문화의 원류와 일본 국가의 형성'이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일본 황실의 기원이라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騎馬民族征服王朝說)'을 발표해 천황 체제 중심의 역사관으로 무장되어 있던 당시의 사회와 학계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동서문화의 교섭사(交涉史)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도쿄대학 이라크-이란 유적조사단장으로서 발굴을 지휘하는 등 고고학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도쿄대학 명예교수와 고대오리엔트박물관 관장, 일본수중고고학회의 초대회장과 일본오리엔트 학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02년 11월 11일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에가미 나미오 문화사 논집 江上波夫文化史論集》 《기마민족국가 騎馬民族國家》 《학문의 탐험 學問の探險》 《동양학의 계보 東洋學の系譜》 등이 있다.
■ [과학기술] "…일본인은 한국인 후예"미 다이아몬드교수 (조선/1998.05.31)
현재 일본인의 핏속에는 한국인의 혈통이 얼마만큼 흐르고 있을까. 한때 일본이 한반도의 동남부를 지배했다는 일본측의 주장과, 일본 고대 왕실은 한인의 후예였다는 학설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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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빙하기 무렵의 동아시아. 빙하(빗금 부분)때문에 일본 열도가 서로 붙어 있고, 일본 남쪽은 한반도와, 북쪽은 러시아쪽 아시아 대륙과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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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서양 과학자가 일본인의 기원을 한국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해 눈길을 끌고 있다. 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미 과학전문지 '디스커버'지 6월호에서 '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을 통해, "현재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일본의 역사와 고대 문화를 자세히 훑은 후,일 본인 혈통에 영향을 준 '아이누족'(홋카이도쪽에 살고 있는 일본의 고대 원주민), '조오몽'인, '야요이'인, 그리고 '한국인'을 분석했다. 조오몽인은 기원전 7천5백년 무렵, 규슈에서 시작해 일본전역에 흩어 졌던 신석기시대 사람. 야요이인은 기원전 4세기 무렵 한국에서 넘어 간 문물을 받아들인 신 일본족으로, 우월한 무기와 문명으로 조오몽 인들을 축출하고 일본의 주인이된다. 현재 일본학자들은 "일본인의 조상은, 기원전 2만년전 빙하기때 아시아 대륙과 연결된 홋카이도쪽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유럽-아시아 부족들의 후예(현 아이누족의 선조)거나, 한국을 통해 넘어간(그러나 한국인은 아닌) 아시아 기마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들 고대 종족들의 인골 화석에서 뽑아낸 유 전자 정보와 골상 구조 등을 분석한 최근의 연구결과를 검토했다. 그 의 주장에 따르면 조오몽인의 유골은 현대 일본인 보다는 아이누족에 가깝고, 반면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을 닮았다는 것. 조오몽인들은 키가 작고, 이마가 길고,날카로운 코에 넓적한 얼굴을 지닌 반면, 야 오이인들은 키가 3∼5㎝ 크고, 미간이 좁으며, 편평한 코에 날카롭고 긴 얼굴을 가졌다. 또 유전자 분석결과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조몽 보다는 야요이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 이로부터 그는 기원전 4세기 무렵, 한반도서 넘어간 농경인(주로 쌀농사)들이 야요이인들에게 고급 문명을 전달하며 어울려 피를 섞었 고, 이들의 후예가 현대 일본인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 떤 학자들은 도일한 한국인들의 수가 수백만이었다고 주장한다고 전 했다. 마지막 수수께끼. 그렇다면 왜 현재 일본말과 한국말이 서로 많이 다를까. 현재 한국말은 그 뿌리가 7세기 말 이뤄진 삼국통일의 승자, 신라말이라는 것. 따라서 기원전 4세기에는 한반도에는 한가지가 아 닌 아주 다른 언어들이 서로 섞여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도래한 족속들의 언어가현재 한국어와 매우 달랐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글 연구에도 조예가 깊은 다이아몬드 교수는 지난 94년 같은 책 '디스커버'에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다룬 논문을 기고, 주목을 받 기도 했다. 그가 인간을 침팬지에 비유해 쓴 '제3의 침팬지'는 LA타 임스 출판상과 영국과학출판상을 받았다.
(기자 : taimo@chosun.com)
■ "日선조 한반도에서 왔다" 재확인 (중앙/2003.06.24)
일본의 선조 집단이 한반도를 경유한 도래인(渡來人)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기존 학설을 방증하는 연구가 일본에서 잇따라 나왔다. 이같은 연구들은 기원전 5~4세기 중국 전국시대의 혼란을 피해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다수의 도래인이 벼농사 기술을 갖고 일본 열도로 옮겨오면서 일본의 야요이(彌生)시대(기원전 3세기~서기 3세기)가 열리게 됐다는 학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돗토리(鳥取)대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井上貴央) 교수팀은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DNA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23일 교도(共同)통신에 따르면, 돗토리대 연구팀은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토리현 아오야가미(靑谷上) 절터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의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배열을 분석한 결과 이같은 결론을 얻었다. 연구팀은 야요이인 유골 29점 가운데 7점으로부터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중 4점에서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배열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이들이 한국의 현대인 및 혼슈(本州)의 일본인과 동일한 그룹에 속하는 것을 밝혀냈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로 이어지는데 이번에 분석된 4점은 모두 모계를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아오야가미 절터 유적에는 당시 적어도 서로 다른 4개의 모계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도쿄(東京)대 의학부 인류유전학교실 도쿠나가 가쓰시(德永勝士) 교수는 인간의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는 ‘HLA 유전자군’을 이용한 인간유전자(게놈) 정보를 비교연구한 결과, 일본 본토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 한국인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도쿠나가 교수는 일본인, 한국인, 중국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동아시아 12개 민족(집단)을 비교분석한 결과, 일본 본토인은 오키나와(沖繩)인이나 홋카이도(北海道)의 아이누족보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장 가까웠다고 밝혔다. 일본 본토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HLA유전자 형태는 HLA-B52-HLA-DR2로 북큐슈(北九州) 지방에서 야마가타(山形)현에 이르기까지 12% 이상 존재했고, 몽골인에게서는 5~8%가 나타났다. 반면 HLA유전자는 오키나와인에서는 2%, 아이누족에서는 1%에 그쳤다. 도쿠나가 교수는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몽골과 중국 동북부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 중앙부에 진출한 집단이 현재 일본 본토인의 뿌리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런 연구결과는 7월 도쿄대 출판부가 발간할 예정인 ‘공개강좌’ 총서에 수록될 예정이다.
(도쿄=연합)
■ "日황실, 한국혈통 밝혀질까봐 왕릉발굴 계속회피" (동아/02/03/11)
일본인들은 최근 일본의 문화적 뿌리가 한국이라는 사실에 대해 매우 불편해하고 있다고 뉴스위크 아시아판이 최근호(18일자) 커버스토리에서 지적했다. 뉴스위크는 ‘오래된 비밀’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에서 간무(桓武) 천황(781∼806년 재위)의 생모(일본이름 다카노노 니이가사)는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언급한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이례적 발언(지난해 12월 23일)으로 양국간 구원(舊怨)을 풀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지만 대다수 일본인은 이 같은 사실을 여전히 부인하고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뉴스위크는 또 간무 천황이 반(半)한국인이며 일본은 한국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역사적, 문화적, 계보학적 증거를 일본인이 수세기 동안 외면함으로써 양국 관계를 악화시켜 왔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일본 궁내청은 천황이 한국 혈통이라는 증거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고고학계의 천황일가 왕릉 발굴 요구를 사유재산이라는 핑계로 거부하고 있다고 뉴스위크는 전했다. 일본의 주요 언론이 아키히토 천황의 발언을 보도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이 잡지는 덧붙였다. 뉴스위크는 △기원후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기마민족이 일본 민족의 조상이며 △왕실의 제례용어는 신라왕조에서 유래했고 △니이가사 모후 당시 일본인의 3분의 1이 백제 유민이었으며 △일본인의 선조로 알려진 ‘쌀의 신’ 니니기는 일본에 쌀 경작문화를 전수한 한국 출신 선원이었다는 등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일본 역사에 미친 한국의 영향을 소개했다. 뉴스위크는 현재 니이가사 모후의 무덤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서 “이제 일본인들은 한국인 공주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곽민영기자 havefun@donga.com
■ "26대 게이타이 천황, 백제 무령왕 친동생" (동아/01/12/24)
《일본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옛 칸무(桓武·재위 781∼806)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한 것이 화제다. 과연 어떤 의도에서 이같이 발언했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본 황실이 백제와의 혈연적 관계에 대해 처음 언급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적지 않다. 고대 한반도인이 일본 열도에 이주하고 그곳에 선진 문물을 전파해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어서 한일 고대 사학계에서 천황과 백제 사이의 관련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관련된 역사 기록의 내용과, 지금까지 발표된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해 본다. 》
◆ '일본 천황=한국인론'(한일동족론)의 내용
최초로 일본을 지배한 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인 15대 오우진(應神·4세기)천황과 16대 닌토쿠(仁德·5세기)천황 부자다. 일본 역사학자 미즈노 유우(水野祐)는 그의 저서 ‘일본 고대 국가 형성’(고단샤·1978)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아울러 오우진 천황이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들 천황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河內)왕조가 세워졌다. 6세기 백제 무령왕의 동생이 26대 게이타이(繼體)천황이 된 이후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 7세기 말까지 천황 자리에 올랐다. 백제 성왕 역시 일본 천황이다. 백제 성왕이 540년 고구려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29대 킨메이(欽明)천황이 되었다.
33대 스이코(推古·6세기말∼7세기초)천황은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일본 최초의 정식 여왕이다. 그의 남편 30대 비다쓰(敏達·6세기)천황도 백제인 왕족이다. 815년에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엔 1182씨족의 가계(家系)가 기록되어 있는데 수록된 대부분의 씨족들은 한반도인이 주축이다. 여기엔 스이코여왕의 남편이었던 비다쓰천황이 백제인 왕족이었다는 사실도 담겨 있다. 일본 고대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엔 ‘비다쓰 천황이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엔 ‘비다쓰천황의 친손자인 34대 죠메이(舒明· 7세기)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천황 발언으로 화제가 된 50대 칸무천황의 생모는 8세기 화씨(和氏)부인이다. 왜 왕실에서 백제조신(百濟朝臣)이라는 벼슬을 지낸 화을계(和乙繼)의 딸이었다. 화을계는 백제 무령왕의 직계 후손이다.
히라노 신사
◆ 관련 유적가 유물
일본 교토에 있는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는 백제인 칸무천황 때부터 백제 조상신들의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이마기노카미(今木神·백제의 성왕), 구도노카미(久度神·백제 성왕의 조상), 후루아키노카미(古開神·백제 비류왕과 근초고왕), 히메노카미(比賣神·칸무천황의 어머니인 백제인 화씨부인) 등의 신위가 봉안돼 있다. 백제 무령왕은 일본에 있는 동생이 케이타이 천황이 되자 동생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503년에 만들어 보낸 청동거울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현재 일본의 국보)도 존재한다.
청동거울 인물화상경
◆ '일본 천황=한국인론'을 바라보는 시각
일본에서 처음 한일동족설을 제기한 사람은 14세기 정치사상가였던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白田白親房)였다. 그 이후 한일동족설은 에도(江戶·1603∼1867)시대를 지나 메이지(明治·1868∼1912)시대, 한반도 침략기(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도 역사학자인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 등이 킨메이 천황은 백제 성왕이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한일 동족설은 극우 역사학계에 밀려 주류로 편입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과 일본이 동족이었기에 일본의 한국 지배는 정당했다는 논리로 활용되고 있는 편이다. 한국에서는 18세기 역사학자 한치윤과 20세기의 신채호가 한일동족론을 간단히 언급했고 1980년대 들어 재야사학자 김성호씨가 성씨 비교를 통해, 홍윤기 한국외국어대교수가 각종 사료와 일본 현지조사를 통해 일본 천황가는 백제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홍교수는 지난해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효형출판)를 펴내 관심을 끌었다. 국내에서는 일본 천황가에 백제의 피가 섞였을 가능성에 대해선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천황가가 한국인이라고 보는 것은 비약이라는 신중론 혹은 비판론도 만만치 않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관련홈페이지 : http://aspire7.hihome.com/belief-1-19.html
청동기 등 신기술 무장한 한반도인, 日초기국가 건설 기여
유덕영기자
입력 2015-06-16 03:00:00 수정 2015-06-16 03:48:20
미국의 문명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총, 균, 쇠’의 개정 증보판(2003년)을 내면서 야요이 시대에 선진 농업기술을 갖고 이주한 한국인들이 오늘날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론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DNA 분석이라는 과학적 실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일본 고대인인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두개골 유전자를 채취해 현대 일본인과 일본에 살던 원주민족 아이누족과 비교 분석해보니 조몬인이 현대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족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야요이인 것을 닮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유전자가 한국인과도 닮았다는 것.
다이아몬드 교수는 유전자 분석 외에 고고학 분자생물학 인류학 언어학 등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논문 말미에 “과거 현재의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한국과 일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국가’와도 같았다”며 “이런 사실은 이후 역사를 거듭하며 불편한 관계를 맺었던 양국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가혹한 식민 지배와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의 후안무치를 생각한다면 ‘쌍둥이 국가’라는 말에 불편해하는 한국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일본인도 자신들이 조몬인으로부터 진화해 최소 1만2000년간 독자성을 지켜왔다는 학설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조상이라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한일은 쌍둥이 국가”
3월 후쿠오카역에서 한 시간가량 기차를 타고 요시노가리공원역에 도착했다. 역 밖으로 나서니 ‘요시노가리’가 한국어로 ‘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란 것이 새삼 실감났다. 멀리 보이는 산들을 배경으로 풍요롭고 넓은 들판에 청명한 날씨는 일본이 아니라 호남평야 같은 포근함과 친근감을 주었다. 배를 타고 건너온 낯선 땅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이곳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이 정착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었을 것 같았다.
실제로 해양교류학자인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어제 동아일보가 소개한 가라쓰를 굳이 인천으로 비교한다면 요시노가리는 서울이라 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한 이들이 정주하기 좋은 땅을 찾아 육지로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요시노가리이기 때문”이라며 “이곳에서 일본 고대 문화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야요이 시대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성 밖을 둘러 판 도랑인 해자(垓子)가 있었고 해자 바깥쪽으로는 끝이 뾰족한 굵은 나무 말뚝으로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 한국인에게도 친근한 옹관묘
공원을 통과하면 ‘내곽(안쪽 테두리)’이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처진 특별한 구역과 만난다.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있어 북내곽, 남내곽이라 불린다. 북내곽 안에는 건물 여러 채가 복원되어 있었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 ‘주제전(主祭殿)’이고 나머지는 제당 망루 등이었다. 2층에는 지배층이 회의하는 모습을, 3층에는 제사장이 제의(祭儀)를 진행하는 모습을 모형으로 꾸며 놓고 있었다.
시치다 관장은 “북내곽은 당시 지배층이 모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고 남내곽은 거주 공간이었다”고 소개했다.
북내곽을 나와 북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대형 항아리가 두 줄로 묻혀 있는 특이한 곳이 나왔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안내원 황성민 씨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옹관묘열(甕棺墓列)”이라고 했다. 일부 항아리 안에는 뼛조각이 그대로 있는 것도 있었다.
옹관묘는 초벌구이한 대형 토기에 시신을 구부려 넣고 흙 속에 묻는 매장 방식으로 우리나라 마한 지역에서 유행하던 장례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마을 공동체 안에 이와 같은 매장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준다고 했다.
1990년대 초 옹관묘 발굴 당시 현장을 볼 기회가 있었다는 윤명철 교수는 “옹관묘는 지금으로 따지면 하이테크놀로지 기술이 응집된 초호화판 무덤이었다. 그만큼 지배층의 힘이 강했다는 것”이라며 “먹고 사는 공간에 묘지가 함께 있다는 것은 공동체가 부족 수준이 아니라 초기 국가 형태로 본격적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 한국은 문명 전수자, 일본은 매개자
공원 안 유물 전시실로 발길을 옮겼다. 논농사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가져온 농경사회 변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다.
보통 벼를 재배하면 생활시스템이나 경제활동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종자 선택, 모 키우기, 물 대기, 피 뽑기, 벌레 제거하기, 비료 주기, 수확하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가래나 괭이 같은 목제 농기구가 필요해지고 이를 만들기 위한 돌도끼 돌자귀 대팻날 같은 도구와 돌칼이나 돌낫 등 수확용 도구도 필요해진다. 요시노가리 유물전시실에도 이런 다양한 유물이 있었다.
시치다 관장은 이런 유물들이 한반도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고 했다. “야요이 시대 유물들에서는 수렵 채집 시대와는 다르게 저장용 단지, 취사용 항아리, 음식용 굽다리 접시 등이 많이 나왔는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해 한반도에서 전파된 농경문화 요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유물에서도 한반도계 토기가 출토됐는데 당시 청동기 주조 기술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고급 기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청동기 주조 기술을 가진 한반도인이 요시노가리에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같은 문명 교류에 대해 서울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했다는 것만 강조하며 우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각자의 문명 전환기에 상대방에게 매개자 또는 촉매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일본의 선사 고대 시대에는 한국이 중국 문명을 전한 전수자(傳授者)였고, 한국 근현대 문명 형성기에는 일본이 서구 문명의 매개자(媒介者) 역할을 했다. 고대 문명 교류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요시노가리=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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