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古事 몇 가지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4:12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古事 몇 가지


1. 요즘의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이 2400여 년 만에 예상치 못한 호사(豪奢)를 누릴지도 모르게 됐다. 그의 출생지에 인접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케르딜리온산의 절벽을 깎아 알렉산더 대왕의 얼굴을 새겨 넣는 공사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 높이만 무려 73m가 넘는 대형 조각이다. 그리스계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알렉산더 대왕 재단’이 추진 중인 이 사업은 그리스 정부와 역사학자, 환경보호론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고대 그리스 최대 건축물인 전쟁의 여신 아테네상(像)도 12m밖에 안 되는데, 70m를 넘는 얼굴 조각은 “그리스 적이지 않다”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2. 대왕의 임종
알렉산더 대왕(BC 356~BC 323)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죽거든 손을 무덤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의 유언치고는 너무 소박한 것이었다. 그는 “천하를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3. 스승 디오게네스
알렉산더 대왕 때에 철학자 디오게네스(BC 400 -323)는 집도 없이 큰 술통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 안에서 살았다. 그야말로 거지로 살았다. 어느 날 왕이 디오에게 "무엇인가 바라는 일이 있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아테네인도 그리스인도 아닌 세계시민입니다. 그 곳에서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나서 나에게 햇빛이 비치게 해주면 고맙겠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언젠가 적군들에게 포위되어 온 시민이 도시 방위에 바빴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자기가 잠자리로 쓰고 있던 술통을 열심히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고 물었다."남들이 모두 열심히 일하는데 나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나라도 뭔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니오. " 이렇게 디오게네스가 대답했다. "남들 일하는데 거치적거리기만 하니 그냥 낮잠이나 자고 있으세요. " 이렇게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를 나무랐다.

4.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포스의 관점
한편 아리스토포스(BC 435 -355)는 왕에게 아첨하여 안락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디오가 저녁밥으로 콩깍지를 삶아 먹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아리가 말했다. "왕에게 고분고분할 줄 알면, 그따위 형편없는 콩깍지나 먹고살지 않아도 되련만." 이 말을 들은 디오는 "콩깍지를 먹고 살 줄 알면, 왕에게 아첨 떨지 않아도 되련만." 라고 말했다. 당대에 유명했던 두 사람의 철학자였지만 이렇게 차원이 달랐다. 어느 날 아리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통속의 디오게네스여, 그대는 독신이니까 사타구니에 달린 물건은 쓸모가 없을 겁니다. 그것을 떼어버리면 어떻겠소?" 그러자 "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시오. 추울 때는 이것으로 통의 구멍을 막는다오." 이 디오게네스는 바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 흑해 해변가 출신의 디오게네스가 청년시절 스승으로 삼기 위해 찾아갔던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안티스테네스였다. 스승은 채찍으로 맞으면서까지 버티는 그를 어쩔 수 없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원래 안티스테네스는 귀족적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이후 그는 모든 철학을 무가치하게 여겼다. 그는 노동자들 과 교제하며 똑같은 옷차림에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은 노예제도까지 비난했다. 이런 스승의 영향을 받아 모든 전통을 부인하고 인도의 수행자처럼 생활한 디오게네스는 물질적 소유 없이도 잘 살수 있다는 자신의 설교처럼 개같이 살았다. 따라서 「견유(Cynic)학파」라 불려졌다. 또한 그는 애국심, 자녀와 친구가 죽었을 때의 슬픔 따위도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고 가르쳤다. 게으른 사람들에게 자기위안을 준 셈이 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엔 욕망에서 해방된 도덕적 자유를 주장하는 그의 통찰이 숨어있었다.

5. 칭기즈칸과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 348만, 히틀러 219만, 나폴레옹 115만…. 세계사에 등장하는 정복자들이 차지한 땅 면적을 평방 킬로미터로 계산 한 수치다. 그들을 단숨에 능가하는 인물이라면 징기스칸이 있다. 그는 총 777만 평방 킬로미터를 지배했다.

6. 광개토대제와 알렉산더 대왕
불과 22년의 재위 중에 64성. 1,400촌을 공파하여 만주 벌판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38세의 나이에 요절한 광개토대제는 33세의 짧은 생애에 지중해 연안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의 삶을 연상케도 해준다. 대제(大帝)의 요절에 한이 맺혔던지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재위 79년에 97세(!)의 수를 누렸다던가. 참으로 시공(時空) 양면에서 「제국적 스케일」을 과시한 제왕적 삶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배달9199/개천5900/단기4335/서기2002/8/17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박원 알렉산더 대왕이 오래살지는 못했군요.. 진시황도 그렇다지요... 2005/09/30 21:12:13  
풀뿌리 일생을 정복 사업에 투신하여 바쁘게 살다 30대에 요절한 광개토대제와 알렉산더대왕에 비해 지나(중국) 통일 후 갖은 호사와 방탕한 삶을 살다가 50대에 죽은(BC259-BC210) 시황제의 경우는 좀 다른 경우가 아닐까요? 2005/10/02 20:42:18  
이영혜
풀뿌리 님! 추천 꾸욱 누르고 제 블로그로 스크랩합니다.
관련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005/10/12 16:32:06  
풀뿌리 예전엔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못했먹겠다."는 어리광을 부리는 리더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영웅이여 오라. 영웅이여 오라. 2005/10/12 21:11:08  
엄마 ~! ^ 2005/10/13 18:16:42  
金錡泰

갑장 산사나이님. 산행을 열심히 하면 다방면으로 해박해 지는 겁니까?
그렇다면 나도 매일 산행해야겄네요...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하나가 생각나 올리겠습니다.
이름에는 그것을 지어준 사람의 뜻과 바람이 담겨있다.
알렉산더 대왕 수하에 같은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었다.
이 병사가 잘못할 때마다 다른 병사들이 "알렉산더, 자네는 졸장부 같네"라며 나무랐다.

그의 행동이 알렉산더라는 이름에 먹칠을 했던 것이다.
어느덧 알렉산더 대왕의 귀에도, 이 병사에 대한 나쁜 소문이 들어갔다.
한 병사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우스운 꼴이 되고 있다는 보고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 사실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 병사가 있는 막사로 찾아갔다.
술에 취해 바닥에 뻗어 있던 병사는 대왕이 오셨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다.
그런 병사에게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 이름이 알렉산더인가? 나와 이름이 똑같군. 이제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네 인생을 바꿔라."  2005/11/24 11:40:57  

풀뿌리 33세란 짧은 생애를 산 알렉산더란 영웅은 그래서 영웅인가 봅니다. "네 인생을 바꿔라!" 참 멋있네요. 그래서 친구란 나이가 문제가 아니고 사상적 수준이 문제라고 봅니다. 아~~~ 나에게도 10대에서 90대까지 친구가 두루두루 있었으면 좋겠네요.  2005/11/28 12:22:51  
여기에 50대 한명이 있습니다. 이름은 무영수라고 한답니다. 2005/12/01 18:04:17  
풀뿌리 님의 블로그에서 까치를 보니 생각이 나네요. 몇 년 전 삼도(일본)에 갔을 때 의아한 일이 있었는데 도시의 공원에 까마귀가 무리지어 날아 다니며 까르륵 까르륵 울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으스스하기도 하고 鬼氣가 느껴져 웬 까마귀냐고 안내하는 삼도인에게 물어보니 삼도에서는 까마귀가 길조고 까치가 흉조라네요. 그들 설명인즉 까마귀는 죽은 시체나 쓰레기를 먹는 반면 까치는 농작물이나 생물을 해쳐 당연히 흉조안냐고 반문하더군요. 그런데 북한에서도 까마귀가 길조고 까치가 흉조라니 과연 까치가 길조라는 우리네 관년이 맞는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잡설로 붓방아가 길어 졌네요. 반가워서요. 50대 친구를 얻게 되어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배달9202/개천5903/단기4338/서기2005/12/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5/12/02 13:23:25  
풀뿌리 [분수대] 주사(酒邪) 중앙일보 2006.03.05 20:30 입력 이훈범 week&팀장
인류 최초의 술꾼은 노아였다. 구약에 따르면 그는 대홍수가 끝난 뒤 포도나무를 심고 술을 빚어 취하도록 마셨다. 자신이 발가벗은지도 모를 정도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사도 간단치 않다. 술을 마시다 친구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가 하면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파르사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무리한 술 시합 때문이라는 전설도 있다. 포도주 2쿠스(약 6.8ℓ)가 담긴 술잔을 상대인 프로테아스가 단숨에 들이켠 뒤 다시 잔을 채울 것을 요구한 반면 알렉산드로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는 것이다. 냉전의 주역 스탈린 또한 요란한 술꾼이었다. 그는 동지 레온 트로츠키를 시베리아로 추방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그는 이상한 위스키를 마시잖소."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증오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산된 고급 포도주나 싱글몰트 위스키만 마셨다. 스탈린은 술에 취해 침대로 업혀 가면서도 부하들을 지팡이로 때리며 자기 술을 훔쳐 갔다고 욕을 해댔다. 윈스턴 처칠의 술 사랑도 유명하다. 그는 신문기자 시절 보어전쟁 취재를 가면서 포도주 36병, 스카치 위스키 18병, 브랜디 6병을 전선에 가져갔다. 한 파티에서는 노동당의 베시 브래독 하원의원이 "당신 끔찍하게 취했군요"라고 말하자 "당신은 끔찍하게 못생겼소. 나는 내일 아침이면 깨기나 하지"라고 맞받아쳤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이런 술버릇의 원인을 최초의 술꾼답게 노아가 설명해 준다.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있을 때 사탄이 나타났다. 사탄은 술 만드는 걸 돕겠다며 양.사자.돼지.원숭이를 죽여 그 피를 땅에 뿌렸다. 이후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양처럼 순해졌다 좀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나워지고 돼지처럼 추악해졌다가 마침내 원숭이처럼 소란을 피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폐해를 일찌감치 깨쳤다. 음주 가무를 즐기면서도 스스로 경계해 주도(酒道)를 지켰다. '한잔 먹세근여 또 한잔 먹세근여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근여'라는 송강 정철의 '권주가'는 무진장 마시자는 게 아니라 잔을 세면서 주량껏 마시자는 얘기다. 고산 윤선도는 또 이렇게 말했다. "술을 먹으려니와 덕 없으면 문란하고 춤을 추려니와 예 없으면 난잡하니 덕예를 지키면 만수무강하리라." 진작 가슴에 새겨뒀더라면 하고 땅을 칠 사람이 성추행을 폭탄주 탓으로 돌리고 있는 의원 나리만은 아닐 터다.  2006/03/06  
풀뿌리 < 한국의 酒仙 10걸 > - 출처-미라클님 블로그
고금을 통틀어 각계 인사들이 추천한 주선은 모두 140여명이나 된다. 두주불사의 주량과 풍류가 특출한 당대의 호걸들을 총망라한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 나라 최고의 주선으로 '황진이(黃眞伊)'가 선정됐다. 약주종생(藥酒終生)의 기라성 같은 대장부들을 젖히고 가장 많은 17명의 인사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서화담(徐花潭),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불리는 그녀는 '여성으로서 일종의 당연직'처럼 추천을 받은 셈이다(張德順씨).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란 시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뛰어난 시서음율(詩書音律)과 술로 당대의 문인, 석유(碩儒) 들을 매혹시켰다는 점을 높이샀다(金正鈺, 金宗吉, 李御寧, 朱宗恒, 邢基柱, 제씨). 말하자면 '酒仙 중의 酒仙이자 '한국적 낭만파의 거장'(崔禎鎬씨)으로 떠올려진 셈이다. 2위는 술과 詩와 자기 理想에 취해 평생을 살다간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차지했다. (金容誠, 宋志英, 申宇植, 李昑, 全鳳健 씨등). 두주 불사의 奇行을 담은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을 보면 그는 이미 대여섯살 때 술독에 기어올라가 술을 훔쳐 마신 천부적인 모주꾼이었다고 한다. 또 이 수필집에서 그는 成大 뒷산에서 친구들 공초 오상순 (空超 吳相淳), 성제 이관구(誠齊 李寬求), 횡보 염상섭(橫步 廉尙燮)과 함께 술에 취해 벌거벗고 소를 탄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런 그를 가리켜 '타이틀 매치다운 타이틀 매치를 위해 살다간 酒聖'으로 묘사되기도(劉榮鍾씨)하였다. 시인 조지훈(趙芝薰)을 두고 '신출귀몰의 酒仙' 또는 '행동형 酒傑'이라고 한다(金容權, 金桭贊씨등). 통금은 안중에도 없고 '야밤의 주붕(酒朋)의 집을 습격, 對酌하다가 새벽에 귀가하기가 예사였다' (鄭漢模씨)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생생히 기억한다(白仁鎬, 李光勳씨 등). 그는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通飮을 해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며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한 방랑시인 김삿갓은 풍류가 넘치는 酒仙이다(金敬丸, 許完九, 鄭泰熏, 韓萬年 씨 등). 장원급제까지 했으나 자신이 '홍경래(洪景來)난' 때 항복한 선천(宣川) 방어사 김익순(金益淳)의 손자임을 뒤늦게 알고 일생을 방랑하며 술과 시로 보냈다. 동가식 서가숙하며 詩를 지어 주고 술을 얻어 마셨다는 작시 걸주(作詩乞酒) 등 많은 詩를 남겼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의 작가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도 한 시대를 풍미한 주선이다(李圭泰 씨). 그는 당대의 비리를 닥치는대로 조롱하며 중이되어 산천을 주유할때도 툭하면 시내로 들어와 大醉한 채 거리를 누볐다. 당시의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쁜 놈, 영상이고 뭐고 집어 치워라'하고 일갈했을 만큼 세상과 담을 쌓으며 한 평생을 방랑으로 보냈다.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우리 나라의 '酒仙 文章家 중의 한사람'이다(宋志英씨). 황진이의 묘 앞을 지나다가 지었다는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의 시조는 그의 호방한 기질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일생을 술로 벗삼으며 봉건적인 권위에 저항하는 가운데 시문(時文)으로써 인간미가 돋보이는 저서 백호집(白湖集)을 후세에 남겼다.  2006/03/08 23:51:39  
풀뿌리 소설가 김동리씨 또한 10傑에 랭크됐다. 네살 때부터 술을 입에 댄 타고난 애주가로 알려졌고 술이라면 청탁불문의 酒量 제일주의이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酒席을 이끄는 大酒家로 명성을 얻었다(李海浪, 趙敬姬 씨 등). 음치이면서 주석이 익으면 노래를 즐겨 부르고, 매일 저녁상 앞에서 취할때까지 반주를 든 다음 식사를 하는 애주가이기도 했다. 신출귀몰의 義賊으로 관가를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재물을 털면서도 유유히 한양에 나타나 술을 마셨던 임꺽정(林巨正) 을 두고 '심장에 털 난 酒仙'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정 출신의 서민이던 그는 조선조 명종 10년(1555년)에 도둑의 우두머리가 되어, 12 년간 황해도 일원에서 탐관오리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의적으로 종횡무진 누볐다. 그런 와중에서도 한양에 네 명의 애첩을 거느리고 술을 마셔댄 것이다. 대원군(大院君)은 왕권을 손아귀에 쥐기 전, 막강한 세도가들을 의식, 철저히 파락호(破落戶)로 위장해 술로 야망을 불태운 술의 영웅이다 (崔一男 씨 등). 세도가들의 잔칫집이나 시회(詩會)에 나타나 술을 얻어먹고 대감의 품계를 가지고 여염집 상가를 버젓이 드나들었다.
때론 市井의 잡배들과 어울려 對酌을 하는가 하면, 투전판에까지 끼여들기도 했다.
술값이 떨어지면 난초 그림을 팔아 충당하면서 그는 술독에 파묻혀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세도가들의 정보를 입수했다. 後日 야망을 달성한 뒤에는 파락호 시절의 酒朋인 심복들을 重用해 술과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주선이다. 원효대사, 연산군, 마해송, 심연섭, 박종화는 각기 5명 씩의 추천을 받아 나란히 10위에 오른 주선이다. 원효는 고대의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주선의 반열에 올랐다. 화엄종의 고승으로서 신라 무열왕 때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눠 대유학자 '설총'을 낳은 승려이기도 하다. 화엄경을 노래로 지은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시정의 술집에까지 출입, 기녀들에게 불법을 전파했다. 범사에 구애받지 않고 비파를 타며 '깊은 삶의 멋과 슬픔'을 노래한 행동형의 주선이다. 주지 육림속에 묻혀 산 주선으로는 연산군이 단연 으뜸에 속한다. 채청사, 채홍사를 두고 8도의 미녀들을 뽑아 춤과 술과 노래를 즐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주선이라고 불린다.  2006/03/08 23:56:56  
풀뿌리 마해송은 '따뜻한 청주 한 잔을 컵에 따라 1시간 동안 핥아 마시는 술의 신사요 선비'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南載熙 씨 등). 방안에는 늘 술과 안주를 준비해두고 주야불문 조금씩 마시는 선비풍의 기질을 지니며 술을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컬럼니스트 심연섭은 술을 즐기는 것으로 소문난 언론인 중 첫손에 꼽히는 애주가였다(白承吉, 林升準 씨 등). 서울 명동, 무교동 일대의 단골 술집이 컬럼의 산실이었고,스스로 '한국에서 술맛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며 술과 함께 살다 갔다. 월탄(月灘) 박종화는 한창 마실 때 동대문과 종로를 오가며 50사발의 막걸리를 마신 일화를 남기고 있다. 현진건(玄鎭健), 김기진(金基鎭), 이상범(李象範) 등 當代의 모주꾼들이 모두 酒朋들이다. 일생을 술과 원고지에 묻혀 지낸 주선으로 '댁에서 내놓은 술도 좋았지만 알찌개 등 술안주가 별미였다'고 회고하는 인사도 있다. (宋志英, 鄭韓模 씨 등). 비록 10걸에 들지는 않았지만 술을 마시면 '기생의 치마폭에 시를 써주던 大 酒仙' 고려 때의 문장가 이규보(李圭報)(李御寧씨 등)와 집을 팔아 술을 마시며 '내가 네 안에 들어가 살았으니 이젠 내 안에 들어와 보라'며 웃은 국어학자 권덕규(權德奎)(李興雨 씨)도 특출한 주선으로 손꼽힌다. 여성으로는 모윤숙, 최정희씨 등이 추천되기도 했고(趙敬姬 씨), '꿈과 정치, 환상과 현실을 술로 달랜' 여운형(呂運亨)이 주선의 후보에 오른 것도 이채롭다(李洪九 씨). 酒仙을 선정하게 된 계기는 두산(斗山)그룹 사사편찬실에서 술 백과사전의 편찬용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추천 기준은 풍류와 품위, 주량이 뛰어나고 약주종생(藥酒終生-역사적 인물의 경우)의 일생을 마친 인물들로 국한했다. (자료 : 박석기)  2006/03/09 00:0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