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진포해전(鎭浦海戰) - 그 진실은?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4:08

 

 KBS-TV '역사 스페셜' 시리즈 입니다. 

https://youtu.be/A480GJgLY04

진포해전(鎭浦海戰) - 그 진실은?
다들 고려말 일어난 진포해전은 화약을 제조한 "최무선"이 치룬 것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진포해전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 [고려사]참조-


1. 진포해전은 우리나라의 931회 외침 역사 기록중 전란에 버금가는 큰 전쟁이었다.

2. 진포(鎭浦)의 위치에 대하여는 오늘날 논란이 많다. 충남 서천에서는 서천으로 주장하고, 전북 군산에서는 군산으로 주장하며 기념비까지 건립하기도 하였다. 공통적인 점은 금강하구라는 점일 것이다. 진포의 위치문제는 지역이기주의적으로 해석하기에 앞서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국가적으로 한시바삐 정립하여야 할 문제라고 본다.
 3. 필자의 소견으로는 조선후기 사학자인 안정복도 그의 저서 「동사강목」에서 진포를 서천으로 비정했듯이 지금의 금강하구인 서천군 장항 일대가 맞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 일원에서 장항읍 원수리 일대로 비정된다.  4. 일각에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금강 대안부인 전북 웅포리 일원에서 군산시일대로 보기도 하나 서천 일대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넓은 평야가 군산 지역에 위치함으로 선박은 장항에 정박하고 왜구가 서천, 군산등 주변에 산개하여 상륙했을 수는 있다. 진포가 서천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5. 지정학적인 면으로 보더라도 일제시대 이전까지 군산 지역은 수심이 얕고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토사가 쌓이는 지형이고, 반면에 서천 지역은 강물의 유속이 빠르고 깍이는 지형인 관계로 수심이 깊다. 일제시대 군산항이 준설되어 항구로서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서천지역이 항구로써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고 그 이후 본격적인 준설이 되기 전인 1970대 까지만 해도 배수용량이 큰 선박들은 장항항에 접안했었음을 미루어보아도 서천지역이 진포임에 틀림없다.
6. 역사적으로 살피자면 서천은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이 위치하였으며,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배치되었던 군사적 요지였다. 조운제도(漕運制度)가 발달하였던 시기에는 조세운반의 주요수로 및 창고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나 조선 말기에는 교역의 중심지로 바뀌기도 하였다.  그 뒤 호남선의 개통과 더불어 발달한 육상교통으로 인하여 이 지역의 내륙수로로서의 운송기능은 상실되었으니 꽤 오랜기간 물류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7. 설화적으로 살피자면 장항읍에는 현재 "나세 상원수"에서 유래한 "원수리"란 지명이 실재하며 또한 나세 장군에 관한 구전설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서천-장항 일대하여 대(代)를 이어 세거하고 있고 서천군 마서면 옥산리에 "나세"장군의 가묘(假墓)가 전한다. 그러한 사실들도 서천이 진포라는 하나의 방증이라고 생각된다.

8. 금강하구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상고시대부터 내륙 깊숙히 선박이 드나드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공주와 부여를 근거지로 하면서부터는 일국의 관문이었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 소정방이 첫 발을 들여 놓은 곳이고, 백제와 깊은 관련이 있던 왜가 수 백 척의 전단을 이끌고 당과 신라의 연합군과 백강구 전투를 치룬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망국의 한을 안고 의자왕이하 수 만의 백제 포로가 지나의 장안성으로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고국산천을 바라보기도 한 곳이다.
 9. 사실 왜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시대까지 줄기차게 우리와 지나의 연안에 출몰하였는데 가장 창궐한 시기는 고려 충정왕 2년(1350년)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약 40여년으로 그 기간 매년 왜구는 고려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며 내륙까지 왜구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은 지방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진포해전 전후로 진포 한 지역에만도 10여차례 이상 입구(入寇)하게 되는데 거의 안방 드나들듯이 왜구들이 드나들었던 것이다. 10. 그렇게 끊임없이 침략해오던 왜구가 1380년(우왕 6)에 유난히 극성을 부렸는데 충청·전라·경상도의 7도 연해의 주군을 돌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다가 그 해 8월 추수가 끝날 무렵에 500여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금강하구로 침입하였다. 11. 그들은 진포에 닻을 내려 배가 흩어지지 않게 밧줄로 상호결박하여 놓고는 일부는 배를 지키는 한편 대부분의 병력이 인근 군현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시작하였다.  12. 이 때 왜구의 노략질로 서천-장항 근처의 들판에 짊어지고 나르다가 흘린 쌀이 한 자(30cm)나 쌓였다고 "고려사절요" 나세열전에 전하였으니 약간의 과장이 있는 표현이라 생각되나 왜구의 분탕질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13.그 당시 왜선의 승선인원은 소함이 25명, 중함이 50명, 대함이 100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볼 때 상륙한 왜구가 중함을 몰고 왔다고 보더라도 그 수효는 3만여명(500척*50명)이라는 대군이었다.

14.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上元帥)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都元帥)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100여 척의 병선에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 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출전시켰다. 
 15. 나세장군이 두 명의 부원수와 함께 금강에 이르러 왜적의 선단에 근접하여 일시에 화포를 쏘아대자 500척의 적선 대부분은 서로 엮어져 있어 일시에 불타 가라앉고 연기는 하늘을 덮었으며 3만의 왜구들은 거의가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으며 돌아갈 길이 막히자 내륙으로 들어가 먼저 상륙한 대규모 집단의 왜구들과 합류하여 아녀자와 아이들을 닥치는대로 살상하여 들판이 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처럼 진포의 해전은 우리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해안에 정박하여 있다가 우리 전함의 화포로 거의 모든 배를 잃은 왜적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 당한 형편이 되었기 때문에 육지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잔악한 행위를 벌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왜구들은 포로로 잡은 우리측의 양민과 어린아이들을 대거 살륙하여 시체가 산처럼 쌓였으며, 여기에서 살아서 도망쳐 나온 사람은 겨우 33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왜구들은 심지어 2-3세 된 어린아이의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쌀과 술과 함께 제물로 삼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도주하면서도 노략질을 계속했으며 고려조정에서는 잔당들의 소탕을 위하여 모든 군사를 총동원 하였던 것이다.

16. 진포대첩이 최무선이 제조한 화약과 대포를 써서 대승한 것이 사실이나 진포대첩의 총사령관(상원수)은 "나세"란 잘 알려지지 않은 무인으로 그의 지휘하에 수행된 전쟁이다. 
 17. 이 때 고려에 화약을 이용한 화포라는 신무기가 있음이 왜국에 알려지게 되어 두려움에 떨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진포에서의 대규모 병선과 병력의 손실로 왜구의 세(勢)가 크게 약화되었음에 진포대첩의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18. 아무튼 진포에서 대패한 왜구의 잔당들은 옥주(沃州: 지금의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하였는데 일부는 옥주(옥천), 영동, 상주, 선산등지로 일부는 부여, 홍산, 논산 방면으로, 일부는 웅포, 정읍, 운봉, 남원, 지리산 방향으로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19. 지리산 방향으로 도주한 왜적은 심산유곡에 숨어 살면서 토착화 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20.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중간에 여러지역에서 쫏겨온 잔당들과 합세하여 다시 무리를 이루어 5,000명 정도가 내륙으로 도주하여 이르는 곳마다 폐허로 만들었다고 한다.
21.큰 세력을 이룬 그들은 다시 경산(京山:지금의 성주)을 침략하고 사근내역(沙斤乃驛: 지금의 함양)에 집결하여 그들을 추적하는 우리 부대에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 당시 왜구를 추격하던 9원수(배극렴, 김용휘, 지용기, 오언, 정지, 박수경, 배언, 도흥, 하을지)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하여 5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기도 하였다니 왜구 잔당들의 세(勢)를 짐작할 만하며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전쟁이었다고 생각된다.

22. 그들은 다시 1380년(우왕 6년) 9월 여러 지역에서 쫏기는 왜구들과 연통하여 남원 운봉에 재집결하였으나 변안렬과 이성계의 황산대첩에서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황산대첩은 이성계가 이룬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으나, 이는 승리자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며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변안렬이 총지휘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고 한다. 23. 이에 앞서 1379년(우왕 5년) 5월 아지발도를 괴수로 하는 왜구는 기마병 7백명과 보병 2천명의 대병을 이끌고 진주 함양을 차례로 짓밟으면서 이해 8월에 인월에 쳐들어와 장기전에 대비하면서 장차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 지금의 남원 인월리)에 주둔하면서 아지발도라는 아기장수를 중심으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던 일이 있었다.  24. 크게 놀란 조정에서는 이성계 장군과 부장 변안열, 종사관 정몽주 등으로 하여금 남원의 왜구토벌에 출정토록 하였다. 변안렬이 이끄는 고려 토벌군이 남원에 도착하니 왜구는 인월역에 있었다. 운봉을 넘어온 별동대 이성계가 적장 가운데 나이가 어리고 용맹한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선두에 나서서 적의 예봉을 꺽고 변안렬이 이끄는 주력 토벌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적군을 섬멸케했다.   25. 이 싸움에서 아군은 1,000여 필의 군마와 여러 병기를 노획하였다고 하며 살아 도망간 왜구는 70여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중 극소수가 지리산등지에서 귀화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토착화하게 된다.
26. 금강에서 대첩을 거두고 돌아오자 나세, 심덕부, 최무선에게 우왕은 연회를 베풀어 개선을 축하해 주었다고 하며 참가한 장수들에게 일정한 벼슬을 내리고 선물을 하사했다고 한다.
27. 고려말 빈번한 왜구의 침입의 이유는 여러 설이 있으나

28. 일본은 산악국가여서 농토가 없어서 식량을 구하러 조선, 지나를 빈번히 침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설이 그 하나이고,

29.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은 백제계가 주축이 되어 국가와 황실이 성립되었으므로 본토수복이란 잠재의식이 작용했다는 설이 그것인데 일본서기의 기록을 살피더라도 백제가 망하자 일본 천황은 조상의 묘에 어떻게 성묘하란 말인가? 탄식하였다 하며 그리하여 백제가 망하자 수 백척의 대선단을 보내 나당단연합군과 백강구전투를 치루게 된 것이다.

30. 세번째로는 일본은 고래로 지진이 많아 불안한 나라로 안정된 지반을 갖고있는 내륙으로 진축하려는 야망이 항상 존재한다는 설이 그것인데

31. 그들 세가지 중 어떤 이유이든 세가지 전부가 그 이유이든 정명가도란 명분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대동아공영을 명분으로 일본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고도 아무런 사과 한마디 없는 그들이고보면 앞으로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32. 이상으로 진포대첩을 통하여 왜구의 실상과 그 원인,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한 무인을 알아 보았거니와 역사란 승리자 위주의 기록으로 그 기록들의 상호 비교를 통한 객관적인 분석 뿐만이 아니라 설화와 지리의 고찰을 통하야 사실을 분석해 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7/30 이름없는 풀뿌리 라강하(書)

 

 

 

 

 

진포 해전

최근 수정 시각 : 2015-09-20 22:49:57

진포해전
날짜
우왕 8년 1380년 8월
충청남도 진포 (고려)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대한민국 왜구
지휘관 최무선
나세
심덕부
불명
병력 군함 약100척 군함 약 500척
피해 규모 불명 군함 500척 궤멸
결과
고려 대승
기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

1. 어떻게 해적들이 500여척의 함대를 꾸렸나?2. 최무선과 고려 수군의 정비3. 최무선의 화포가 불을 뿜다

 

鎭浦 海戰
"진포대첩은 왜적을 화포를 사용해서 바다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하는, 왜구 금압(禁壓)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고려 정부가 수 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왜구에 대하여 총사령관 나세 장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이,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사용해 큰 타격을 가함으로써 왜구의 금압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中[1]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벌어지고 아직도 정체가 불분명한 왜구들이 고려의 전역을 유린하고 있을 무렵, 우왕 6년에 벌어진 대규모 해전. 당시 고려 남쪽을 어지럽히던 왜구를 격파한 전투로 황산 대첩과 더불어서 고려 말의 전투로 유명하다. 동아시아 혼란기의 막바지를 보여준 싸움 중의 하나로 분류하기도 한다.

1380년 8월, 500척이 넘는 왜구의 대규모 선단이 진포에 침입해 큰 밧줄로 배를 묶어 두고 이를 기지로 삼아 진포 연안에 상륙해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다. 상황이 이러하자 고려는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 그리고 최무선에게 전함 100척을 주고 진포로 내려보내 왜구를 막게 했다. 이때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화약고기(火藥庫記)》[2]에 따르면 화통(火通)과 화포(火砲)가 왜군의 배를 불태우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 어떻게 해적들이 500여척의 함대를 꾸렸나?[편집]


당시의 왜선 500여척은 왜구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압도적인 규모에 속한다. 어떤 식으로 대함대가 등장했는지 확실히 알긴 어렵지만, 큐슈남조 세력이 다카기·아마쿠사 일대의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그리고 남조의 본거지 기쿠치 일대가 포위당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병량미를 얻기 위해서 생겨났다는 의견이 있다. 이런 견해를 따르자면 이 1380년의 왜구는 다카기·아마쿠사 지역의 수군 세력은 물론, 규슈 최남단의 오오스미 지역의 호족 네지메씨 주변의 남조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의 일본 남조는 북조의 큐슈 공격이 시작되어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었으므로 활로를 뚫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라고 볼 수 있다.[3]

물론 왜구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워낙 견해가 상이해서 확실한 결론은 없다. 일본에서는 고려말의 왜구가 내륙의 행정 시스템까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고려인의 지방 세력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정 반대의 주장도 있다. 또한, 남조의 운명이 멸망 직전에 몰린 상황에서 대함대를 보낸다는 것은 정신이 나간 행동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참고로, 고려 사람들이 아기발도라고 불렀던 왜구 장수는 몽골과 고려인의 혼혈이라는 가십 이야기도 있다.[4]

이렇듯 당시의 왜구들은 이질적인 형태를 띄었다. 이들은 전략전술을 비롯한 행동양식이 교육을 받은 군대에 가까웠으며, 일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기병을 운용할 때는 유목민족이랑 비슷한 기록도 많이 발견된다. 이런 설을 따른다면, 원청교체기에 갈 곳을 잃은 해양 세력+남조편에 섰다가 궁지에 몰린 왜구들이 최후의 명운을 걸고 고려로 진출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5]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낙오자들



분명한 것은, 진포에 나타난 500여척의 함대가 상당한 규모였다는 점이다. 이 엄청난 군단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있다가 여러 주(州)ㆍ군(郡)으로 갑자기 흩어져 마음대로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니 고려 백성들의 시체들이 산과 들에 뒤덮이는(屍蔽山野)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그렇게 노략질한 곡식을 질질 끄며 운반을 하느라 땅에 널부러진 쌀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2. 최무선과 고려 수군의 정비[편집]


최무선(崔茂宣)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왜구 토벌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은 바로 이성계의 등장, 그리고 기술적으로는 화약 병기의 실전 배치였다. 고려 말의 최무선(崔茂宣)은 평소에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즐겨 말하는 편이었는데, 스스로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보니 "왜구를 제어하는 일은 화약 만한 게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화약 병기를 만들기 위해 분골쇄신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최무선의 성과가 결실을 맺은것이 바로 진포대첩이지만, 고려 조정에서 화약 무기를 어떻게 써보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1373년 10월 공민왕은 화전(火箭)과 화통(火筒)을 시험해보기도 했으며, 그 해 11월 명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병기·화약·유황·염소(焰焇) 등을 좀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화약 만드는 노하우를 알게 되고 직접적으로 투입된 것은 우왕 시기, 진포대첩을 기점이라고 보아야한다.

왜구의 끝없는 침입이 계속되던 1380년 8월, 마침내 장장 500여척의 왜선은 진포(鎭浦) 어귀로 진입해 오기 시작했다. 진포 대첩이 벌어진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충청남도 서천 남쪽 즈음으로, 일반적으로는 이곳이 진포 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이해되며 국사 교과서 등에서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반면에 전라북도 군산이 진포대첩의 위치였다는 소수설이 있는데, 군산시는 재빨리 이 설을 이용해서 진포대첩 기념비 등을 만들어 놓았다. 어찌되었건 금강 하류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무렵에 해도원수였던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 최무선 등은 전함 1백여척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 해 이전에는 최영이 2천척을 더 만들자라고 했다지만, 4월 경에 최영이 함선이 백여척 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면, 3~4개월만에 극적인 증강이 이루어졌다고 보긴 힘드니 이 백여척의 함선은 당시 고려가 가진 전 해상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고려군은 정치의 혼란과 연속으로 침략하는 군벌들을 상대하느라 일부 정예군을 제외하면 병력자원이 바닥난 상태였다. 이작도 해전에서는 훨씬 압도적인 고려수군이 어이없이 패배하여 수군 전력 자체가 쇠퇴한 적도 있었다. 즉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3. 최무선의 화포가 불을 뿜다[편집]

 

이리하여 한반도의 명운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압도적인 규모였던 왜군은 고려군이 화약이 있는 줄을 몰랐고, 또 함선의 숫자에서도 비교가 안 되는 고려군의 작은 규모를 보고 배를 한 곳에 집결시켜 달려들었다. 이때 고려군의 화포가 불을 뿜어댔는데,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 흘렀고 왜군은 거진 타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 자들도 많았다. 이어 도주하기 시작한 왜군을 공격한 고려군은 큰 배를 아홉 척을 빼앗았고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2년 4월 14일 5번째기사,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334명의 포로를 구출해 내었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최무선 졸기

현대에는 당시의 화포를 분석하여, 화약무기들이 별로 도움이 안 되었거나 전과가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왜구들이 배를 묶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미처 화약을 생각치 못했기에 화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또한, 당시의 배들은 대다수가 작은 크기였기에 화포가 위력적으로 통용되었다는 점도 감안해볼 수 있다. 나는 불화살이랑 창으로 덤비는데 고려는 화포랑 화전을 쾅쾅

분명한 것은 500여척의 대함대가 100여척 밖에 안 되는 고려수군에게 격파되었다는 기록 뿐이다. 아무튼 전세가 절망적이 되자 왜구는 잡아놓았던 어린 아이들을 처참하게 도륙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시체가 산처럼 쌓여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 되었다. 이런 참극을 피해 겨우 3백 30여명 정도만이 도주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이는데, 양 기록을 합쳐보면 왜구의 학살을 피해 간신히 도주한 사람들이 300여명 가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포로를 잡고 있으려면 군대의 규모도 많이 필요한데, 겨우 피한 일부의 포로조차도 300여명이나 되었으니 살아남은 왜구들도 규모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려군은 신무기 화포의 힘을 빌려 위기에 놓였던 전황을 돌파해내었으며, 압도적인 숫자의 왜선을 격파한 이 사례는 이후로도 해상에서 왜구를 격파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군사적인 의미에서 진포대첩의 승리는 정말 거대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수군이 사용한 화약 때문에 왜구들의 함대가 어이없이 전멸하자, 가까스로 육지에 상륙한 왜구들은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갔는데, 이때 왜구들도 규모가 상당해서 지나가는 길마다 살육과 약탈을 저질러서 피해가 극심했다. 전기 왜구의 세력이 총 집결한 대규모 원정이었던 만큼, 패잔병의 규모나 정예도도 엄청났던 것이다. 내륙으로 도망간 왜구들은 고려 중앙군이 보낸 병력에 의해 토벌되었는데, 이때 이성계가 활약한 황산 대첩이 벌어지며 내륙으로 퇴각한 왜구들은 모두 격멸 된다. 이후 상황은 황산 대첩 항목 참조.

[1] 일반론적인 시각은 보통 그렇고, 다만 당시의 사건 해결에 화포가 그리 큰 역할을 끼치지 않았다는 식의 의견도 제시되고는 있다. 다만 당시의 작고 조잡한 함선들의 크기를 본다면, 거의 백병전이나 불화살을 주고 받았던 규모의 싸움에서는 화전이나 화통이 제법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2]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鄭以吾)가 쓴 책.[3] 고려 말 왜구와 남조 : 경신년(1380)의 왜구를 중심으로 中, 이영[4] 아기발도는 다른 왜구들에게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고려 포로와 주민들의 기록.) 그런데 아기발도의 아기는 명백하게 한국어의 아기라는 설이 대세. 발도는 몽골의 바아토르(지휘관)을 뜻한다. 즉 아기장수라는 뜻이며, 해적의 별칭이라고 하기에는 좀 괴상하다. 당시 제주도는 원제국이 목초지로 삼으면서 몽골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원청 교체기에는 제주도의 고려인과 몽골인들의 혼혈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최영이 직접 제주도로 가서 이들의 기마부대를 진압해야했다. 이후 몰락 직전까지 쇠퇴했던 고려를 괴롭힌 것은 왜구의 대규모 기병 부대였으며, 왜구들의 지휘관은 놀라운 기동전략을 보여주었으니 제법 유사한 점이 있다. (...)[5] 비슷한 시기의 홍건적, 원의 잔존 세력, 이전에는 금나라와 여진족과 거란족도 고려를 정벌하여 재부흥을 노리겠다는 목적으로 수만 단위의 침략군을 파견한 전례가 있었다. 참고로 전자는 동시대였다. 그러니까 고려는 남북으로 목숨을 걸고 침략을 감행하는 수만 단위의 군대를 연달아 상대해야했다. 막장
 

 

[관련 싸이트 - 진포대첩과 왜구]http://home.opentown.net/~hy10004/

 

[관련 싸이트 - 황산대첩비]http://www.sogang.ac.kr/~history/dapsa/02html/7.html

  

  • “왜구는 일본판 알카에다”
  • 이영 교수 “가난한 어민 아닌 전문 무사… 테러조직”
  • 글=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사진=김보배 객원기자 iperry@chosun.com
    입력 : 2007.06.05 00:43 / 수정 : 2007.06.05 05:57
    이 교수는 왜구를 ①1223~1265년의 ‘13세기 왜구’ ②1350~1391년의 ‘경인년 이후 왜구’1392~1555년의 ‘조선시대 왜구’라는 세 시기별로 분류한다. 이중 ①과 ③은 창궐한 빈도가 낮은 반면 ②는 40년 동안 무려 591회의 침략 기록이 나온다. 왜 이 시기에 이렇게 왜구가 많았을까? 그것은 같은 시기 일본이 남북조시대의 전란기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큐슈 지방은 토호 세력인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와 이주한 무사 세력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발생했고, 쇼니 휘하의 군사력이 군량미와 물자를 얻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 이들 ‘숙련 무사집단’이 바로 왜구의 실체였다는 것이다. 당시 왜구는 대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구성된 복수의 집단이 연해 지방에 상륙한 뒤 내륙으로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약탈을 끝내고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에 철수했다. 왜구가 ‘삼면이 절벽으로 막힌 곳에서 칼과 긴 창을 고슴도치의 털처럼 겨누고 버텼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 남북조시대 사무라이들의 전술과 똑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고려 조정이 고작 어민과 상인으로 이뤄진 해적 집단도 막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이 교수는 “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중장갑 기병들로 이뤄진 왜구를 상대로 결정적 타격을 입힌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며 “기록과 현장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손자병법’의 내용이 그대로 응용된 탁월한 전투였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 ▲일본 남북조 시대 중무장한 무사의 모습을 그린 삽화.

    진포대첩의 진포, 서천 ‘확실’
    이영 교수, 진포 역사지리학적 고찰 완료
    서천신문 [2007-06-04 오전 11:58:00]
     
     
     



    ▲ 조선총독부가 1911년에 제작한 지도를 보면 당시 지형이 잘 나타나 있다. 원내 A는 기벌포, B는 현재의 장항읍 시가지가 형성된 곳으로 고려시대 진포대첩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산설 전면부정 진포대첩비 철거 여론도



    진포대첩의 진포가 서천군 장항읍 일대로 확실해지면서 군산시가 충분한 고증 과정 없이 세운 진포대첩비 철거 여론도 함께 대두되고 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이영 교수는 ‘잊혀진 전쟁 왜구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라는 책을 통해 진포구 전투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결과 진포는 서천군임이 확실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영 교수는 경신년 1380년 8월 금강하구 진포구에서 해도원수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 고려수군이 왜구 500척 제압한 사건을 진포구 전투로 규정하고 그동안 서천설, 군산설 등 의견이 분분했던 진포위치와 관련 서천설이 타당하다고 고증했다. 이 교수는 관련 사료를 엄밀하게 분석해 본 결과 진포구 전투의 진포는 서천군 장항읍 일대가 그 현장으로 입증됐고 지리·지형적 고찰에서도 장항읍 일대가 가장 적합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교수는 현재 역사교과서에서도 진포구 전투의 현장을 서천의 남쪽으로 규정하고 있는 데다 군산설을 뒷받침할만한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군산의 옛 지명은 ‘고군산열도’로 옥구현에 속해 있었고 고려시대까지는 군산도라는 섬은 있어도 육지에 군산이라고 하는 지명은 없다 즉 기벌포 전투 당시 군산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군산설을 일축했다. 이 교수는 조선왕조 지리서인 ‘신증도국여지승람’에는 진포 지역 중에서도 서천군을 가장 중시하고 있고 장항읍 일대는 항해용 대선단이 정박할 수 있는 충분한 수심과 넓은 공간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항해시 이정표가 되고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전망산의 위치, 일본 중세무사들이 전망산과 같은 바위산을 신성시한 점, 진포구 전투당시 고려군 총사령관이 나세장군의 자손이 서천군 마서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점, 장항읍 장암일대가 백제시대 군항인 기벌포라는 점, 경신년 왜구가 최초로 침구한 지점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서주로 기록돼 있고 서주는 곧 서천군이라는 점 등 총 7가지 이유를 들어 진포의 서천설을 고증했다.   김명옥기자   

    ‘진포(鎭浦)’ 원조는 ‘서천’
     
    [2007-06-04 오전 11:51:00]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화포로 왜구병선 500여척을 폐퇴시킨 ‘진포대첩(鎭浦大捷)’ 전적지를 놓고 인근 군산시와 ‘원조논쟁’이 벌어진 적 있다. 하지만 ‘진포’는 오늘날의 금강하구, ‘서천’임을 밝히며 그 증거자료를 알려둔다. 역사상품에 관심이 커지면서 최근 몇 년여 간 그 전적지가 양 지역의 행정구역에 포함됐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그러나 서천군은 이미 지난 2004년 6월 ‘서천역사문화 심포지엄’을 열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옛 기록을 들어 진포대첩 해전지가 현 서천 장암리 일대임을 주장한바 있다. 또 조선 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기술내용을 비롯해 당시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 만호 김성길이 전사했던 도둔곶 전장지 등을 근거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서천군은 이를 근거로 최근까지 기벌포문화권 역사프로젝트를 추진하며 한·일양국의 사학자들과 사적지 답사를 진행하는 등 역사고증에 힘을 쏟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 영교수가 자신의 저서 ‘잊혀진 전쟁 왜구’란 책 발간을 통해 ‘진포’는 ‘서천’이라고 못 박아 지역 학계와 문화계의 잊혀진 ‘진포’ 지명 찾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이 영 교수가 ‘진포’란 지명의 원조가 ‘서천’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이렇다. 경신년 1380년 8월 금강하구 진포구에서 해도원수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 고려수군이 왜구 500척을 제압한 사건을 ‘진포구’라고 규정, 서천이 ‘진포’ 지명의 원조라는 것. 진포구 전투의 ‘진포’는 현 서천군 장항읍 일대가 그 현장으로 입증됐고 지리·지형적 고찰에서도 장항읍 일대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입증 자료는 ‘목은 이색 선생’이 일생동안 집필한 ‘목은집’에서 전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진포구 전투는 역사적인 사실이면서 당시 고려로서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어서 진포구의 정확한 기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에 대한 증거로 주장하고 있다. 특히 현재 역사교과서에도 진포구 전투의 현장을 서천군의 남쪽에 비정(比定)하는 지도를 싣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1985년 김상기씨가 집필한 ‘신편 고려시대사’, 1984년 이현종 씨가 집필한 ‘왜구’, ‘한국사’, 1987년 박용운 씨가 집필한 ‘권문세족과 신진사류의 사회 왜구’와 ‘고려 시대사’를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더욱 ‘진포’의 지명이 서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진포구의 군산설이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당시 항해 시 이정표가 되는 전망산의 위치, 일본 중세무사들이 전망산과 같은 바위산을 신성시 한 점, 나세 장군의 자손이 서천군 마서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점, 장항읍 장암일대가 백제시대 군항인 기벌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진포’란 지명을 찾는 일은 서천군의 역사를 찾는 것이고 우리의 뿌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 역사라는 자산은 주민정신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기에 ‘진포’란 지명의 원조를 가리기 위한 규명작업이 필요하다. 서천군이 우리의 것을 되찾아 지역발전의 또 다른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할 것이다. 이 영교수의 ‘진포’ 지명 규정은 다시 한번 서천이 원조임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고 있어 서천의 역사가 빛을 발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근 군산에서 축제까지 열지만 규모가 초라하고 역사적 규명작업이 미흡하다. 그러나 서천군은 이미 그 규명이 이뤄진지 오래다.  윤승갑기자 

    1500년 기벌포의 발자국
    박수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서천신문 2008-12-03 오후 2:19:00]
     
     
     
     
     

    기벌포 장항은 금강과 함께 1500년 백제의 숨결이 머물었던 곳으로 신라왕실이 당나라 군사를 끌어다 백제를 명말 시키고 조선500년 역사와 일제36년간의 강압과 수탈 속에서도 榮枯(영고-번영과 쇠퇴)의 희비를 함께한 곳이다 1500년전 서해바다에서 금강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두고 장항을 역사적 옛 지명을 말함이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서천군하면 어느 지역이지?  혹 서산, 하고 반문하지만, 장항제련소가 있는 곳, 하면 바로 알겠다고 한다.
    예전에 장항선 열차를 타고 종창역인 장항역에 내리면 갯바람을 타고 비릿한 생선 냄새가 코끝을 자극 항구임을 느끼게 하곤 하였다.
    한때 장항의 명물이었던 장항제련소 굴뚝의 연기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전망산과 굴뚝은 묵묵히 그 위용을 자랑하고 서있다.

    백제때 기벌포, 고려때 진포, 조선세종때 수군만호영
    장항은 역사적으로 당나라와 신라가 한판 전쟁을 치른 전장지 백강구이며 왜구의 침범이 잦아 수군진영으로 군사적 요충지역으로 적의 방어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때는 伎伐浦(기벌포)로 , 고려때는 수군진영인 長岩鎭(장암진)또는 鎭浦(진포)로, 조선세종때는 충청수군 萬戶營(만호영)으로 舒川浦(서천포)로 불리였다 .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 충신 성충은 의장왕에게 다른 나라의 군사가 쳐들어 오면 수군은 기벌포(금강하구) 즉 금강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극간한 곳이며, 또한 장항은 고려말 진포해전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고려 우왕6년8월(1380년) 왜적의 배500여척이 이곳 진포에 들어와 군사를 나누어 각 지역으로 흩어져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니 해도원수 羅世(나세)는 심덕부, 최무선 등이 이곳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만든 호포를 써서 왜적의 배를 수장시키고 승리를 거둔

    진포대첩으로 역사적인 전장지다.
    옛 장항제련소 옆 성안마을 후망산에는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97호 長岩鎭城(장암진성)이 있다 이성은 조선중종9년(1514년)에 축성하였고 수군만호가 장항 앞바다와 금강입구를 지키도록 하였던 鎭營城(진영성) 이였다.
    또한 장항은 고려시대 포영이면서 정치적인 유배지역 이기도 하다
    고려의 문신 杜英哲(두영철)도 이곳에 유배되었고 이곳 주민들과 유배기간동안 가깝게 지내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유배가 풀려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 노인이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면서 옷자락을 붙들고 구차히 영달을 위하여 또다시 벼슬을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권욕에 눈이 어두었던 두영철은 이를 노인의 말을 듣지 않고 평장사란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다시 죄를 짓고 좌천되어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이곳 장암진으로 지날 때 두영철은 옛날의 그 노인을 찾아 갔으나 방문도 열어주지 않고 방안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읊었다고 한다.
    고려말 문신이며 시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詩 소악부의 것을 보면  “ 잡혀든 참새새끼야 두둥이만 짹짹 네가 무엇을 하랴  그물에 걸린 누런 주둥이의 어린새끼야 눈구멍은 애당초 어느 곳에 팔았던고 가련하다 그물에 걸린 어리석은 참새새끼여”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원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기에 알 수 없으나 <고려사> 악지에 유래와 그 노래의 제목인 長巖歌만 실려 있다
    (拘有雀爾 僞觸着網羅黃口兒 眼孔元來在何許 可燐觸網雀兒癡)

    “노인은 두여철의 영달을 주의시켰고, 어진 정승은 죄에 걸린 걸 비난하였네, 옛사람만 그랬으랴 지금도 마찬가지, 노인은 어느 곳에 깊이 숨어 버렸나..
    (人誡進杜平章 賢相書譏鳥網張 何必古人今亦爾 老人何處己深藏)




    진포대첩 현장은 장항!
    총사령관 나세장군 후손들 서천정착
    [2006-03-06]
     
     
     
     
     
     장항항, 장암진성 등에 고증유물 풍부



    마서면 도삼리 금강하구둑 관광단지 소재에 위치한 나세장군 공적비
     
    ▶ 들어가는 말
    그동안 군산시와 서천군은 진포대첩의 위치 비정을 놓고 팽팽한 의견대립을 보여 왔다.
    이에 본지는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나세 장군은 물론 그의 아들 나궤와 후손들, 진포대첩이 벌어졌던 전투장소가 장항읍 장암리 일수밖에 없는 여러 근거와 기록들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 나세 장군과 나궤, 그의 후손들
    금강하구둑 놀이동산 뒷산.
    이곳에는 관광객의 발길과 무관한 듯 세워져 있는 나세 장군의 공적비가 있다.
    나세 장군은 고려 정부가 왜적의 잦은 침입과 약탈로 신음하는 서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왕 6년(1380) 장암성에 파견한 총사령관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해군제독으로 심덕부, 최무선 등과 함께 진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나부(羅富)의 5세손으로 진포대첩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연안군(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개성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황해도 연안지방)에 봉해졌다. 당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출신 지역의 지명을 딴 '~군'으로 임명하는 전례를 감안, 전라도 나주라는 본관과 달리 황해도 연안이 나세 장군의 거주지 또는 출신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세 장군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차남인 나궤의 후손들은 마서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나궤는 종일품 판한림원사라는 고관지위에 오른 문신으로 1411년에 사망했으며 이후 1454년경 후손들에 의해 마서면으로 이장됐다. 이는 그의 후손들이 마서 지역으로 이주한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마서를 선택했을까?
    나주 나씨 연안군 파에게 진포대첩은 집안의 큰 자랑거리였다. 
    특히 원나라에서 귀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가문임을 감안, 진포대첩의 현장인 서천군에 모여 사는 것은 가문발전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고려 충숙왕(1332-1339) 무렵에는 이씨가 세력 있는 가문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서천군의 대표성씨로 나씨가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다. 즉 세종 때 나씨는 이씨를 능가하는 가장 힘 있는 성씨였다는 얘기다.


    ▶진포대첩의 진포구는 장항!
    '진포'의 정의는 임천에서 서천에 이르는 포구를 일컫는다. 때문에 진포대첩의 현장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돌출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군산진이라는 지명이 처음 확인된 것은 1490년으로 진포대첩이 벌어졌던 고려 말 1380년에는 존재치도 않았다.
    또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며…<중략>'라는 고려사 기록에 의거, 진포구는 어선 6백 척의 선박이 정박 가능한 큰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관련 1937년 출판된 한 책자에 따르면 장항항은 수심 6-10미터로 3-4천톤급 선박이 정박하기 충분하고 매년 깊어지지만 군산항은 토사퇴적으로 얕아지는 경향이라고 기록돼 진포대첩의 현장이 장항일대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장항항은 수심이나 면적에 있어 바다를 항해하는 대규모 선단을 정박시키는 항구로써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 백제의 주요 군항인 기벌포와 고려 조정이 대 왜구의 방어기지로써 최초로 세운 요새인 장암진이 서천에 위치하는 등 군산 쪽보다는 장항읍 일대가 진포대첩의 현장으로서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의견. 서천군청 박수환 담당은 "진포는 부여에서 서천에 이르는 부대가 있는 포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진포대첩 현장이 어디냐에 주목해야 한다"며 "군사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장암진성, 깊은 수심, 각종 역사기록 등을 살펴볼 때 진포대첩이 일어난 곳은 장항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다수의 향토사학자들도 사료검토와 지리학적 고찰을 통해 진포대첩의 현장이 서천이라는데 동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명옥 기자>






    ‘진포대첩’ 원조논쟁 가속화
    군산시, 서천 주장에 역사고증 반박 나서
    [2005-10-07]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화포로 왜구병선 500여척을 폐퇴시킨 ‘진포대첩(鎭浦大捷)’ 전적지를 놓고 서천과 군산지역 향토사학 간에 ‘원조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역사상품에 관심이 커지면서 최근 몇 년여 간 그 전적지가 서로 자신들의 행정구역에 포함됐다고 주장해오면서 역사논쟁이 가속화 되고 있는 것. 서천군은 이미 지난해 6월 ‘서천역사문화 심포지엄’을 열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옛 기록을 들어 진포대첩 해전지가 현 서천 장암리 일대임을 주장한 바 있다. 또 조선 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기술내용을 비롯해 당시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 만호 김성길이 전사했던 도둔곶 전장지 등을 근거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서천군은 이를 근거로 최근 기벌포문화권 역사프로젝트를 추진, 한·일양국의 사학자들과 사적지 답사를 진행하는 등 역사고증에 힘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에 발끈한 군산측도 지난 27일 전북도내 대표적인 향토사학자들과 함께 진포대첩에 대한 역사고증을 벌이겠다며 군산문화원 주최로 심포지엄을 가져 ‘원조논쟁’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 군산 향토사학계도 이날 서천군과 동일한 문헌은 물론 ‘태조실록’과 ‘동여비고’, ‘해동지도’ 등 각종 사서를 근거로 제시하며 그 전적지는 군산임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군산의 옛 지명이 진포인데다 지난 1999년 내흥동 금강시민공원 등 시내일원에 세워진 진포대첩비가 문광부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군산측은 이날 진포를 사적지로 정식 지정받아 기념일로 정하고 대대적인 행사는 물론 전승기념관 건립 등도 신중히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 수많은 역사서는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최무선 장군이 화포를 만들어 ‘진포’에서 왜구를 크게 폐퇴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천군과 군산시가 수년째 그 전적지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가운데 방폐장 문제를 비롯, 해상도계와 어장분쟁, 제2금강대교 건설위치 등 숫한 현안들도 마찰을 빚고 있어 서천군의 적극적인 대응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윤승갑기자   

    기벌포, 진포 위치는 서천”
    한일 역사학자 26일 장항읍 일대 학술 답사
    [2005-05-25]
     
     
     
     
     
    진포의 위치 비정과 관련한 서천지역 역사 사적지 학술답사가 26일 장항읍 일원에서 진행된다. 이날 학술답사는 고려말 최무선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통쾌한 대승을 거둔 진포대첩 해전지인 장암리 일대, 왜선 50여척과 전투를 벌이다 만호 김성길이 전사한 도둔곶전장지, 신라와의 대당전쟁의 격전지인 기벌포(장암리~금강하구둑 일대) 등을 답사할 예정이다. 이번 학술답사팀에는 지난해 심포지엄에서 서천의 진포 고증 주장을 펼친 한국방송통신대 이영 교수와 강원대 손승철 교수 등 한국 역사학자 7명과 무라이쇼오스케 동경대학원 교수, 하네다 마사시 동경대 교수, 다카하시 키미야키 나고야대학 교수 등 총 17명이 참가한다. 서천군 관계자는 “서천의 고대 지명인 기벌포와 왜구와의 격전지인 진포에 대한 고찰을 통해 관련 자원의 활용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이번 학술답사가 이뤄지게 됐다”며 “역사적 고증이 완료되면 전국에서 주목할 만한 기벌포 문화권에 대한 획기적인 역사프로젝트가 추진될 것이다”고 말했다. 김정기기자





    대마도를 가다
    김성규 에세이 <전 센다이 총영사/ 본지 논설위원>
    [2004-12-16]
     
     
     
     
    대마도는 대한해협 한 중간쯤에 떠 있는 일본의 섬이다. 일본 사람들도 별로 찾지 않는 외딴섬을 찾는 것은 역사탐방을 겸한 관광목적이었다. 대마도에 가기위해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야 한다. 부산에서 고속 국제여객선으로 1시간 반이 걸린다. 비행기도 아닌 선박으로 이렇게 빠른 시간에 닿을 수 있는 곳이 대마도다. 알고 보니 대마도는 부산에서 불과 50km 거리였다. 이에 반해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쪽 대륙인 후쿠오카까지는 150km나 떨어져 있다. 이런 대마도가 어째서 한국 땅이 아니고 일본 땅이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섬 전체가 거의 산악지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경지가 절대 부족하다. 농경지가 절대 부족하니 양식은 옛날부터 가까운 대륙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대륙이란 다름 아닌 한반도인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한반도가 왜구의 약탈에 시달려 온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왜구의 노략질을 힘으로 막아야 했고 때로는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기도 했지만 이 땅을 복속시킨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것 같다. 신라시대에 엄연히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도 있는 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애석하다. 대마도를 우리영토로 보전하지 못함으로서 우리 민족이 후세에 받게 되는 수난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복속시키지 못한 역사적 실패의 대가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는 조선침략의 전초기지였고 병참기지로서도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대마도라는 일본 영토가 존재함으로서 조선침략이 가능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일 전쟁에서도 대마도는 일본을 위하여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대마도 섬 사이에 숨어있던 일본 함대의 급습을 받고 무적의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던 것이다.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승리는 곧바로 조선합병이라는 민족적 수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대마도가 없었다면 아니 대마도가 조선 땅이었다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감히 조선을 침략할 꿈을 꿀 수 있었을까. 대마도가 없었다면 아니 대마도가 조선 땅이었다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과연 승리할 수 있었을까. 대마도에 머무는 동안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대마도 서북단을 돌면서 한국이 가장 잘 보인다는 한 전망대에 올랐다. 북쪽 수평선을 바라보니 부산의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바라보니 아파트 같은 고층건물도 눈에 띈다. 망원경 없이 육안으로 보인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시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바로 이 자리에서 핏발 서린 눈으로 조선 땅을 건너다보며 전의를 불태웠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조선합병을 앞두고 이 곳을 경유하던 일본의 대신들도 바로 이 자리에서 풍요로운 조선 땅을 건너다보며 군침을 흘렸을 것이다. 대마도는 일본인에게 대륙에의 야망을 끊임없이 자극해 온 괘씸하기 짝이 없는 땅이다.대마도는 일본인이 대륙에 진출하는데 있어 발판의 역할을 해 온 위험한 땅이다. 항구에 배가 닿으면 발판이 내려지고 승객들은 이 발판을 이용하여 하선한다. 대마도는 한반도에 걸쳐진 일본호의 발판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마도의 모양이 꼭 발판처럼 생겼다는 느낌이다.이 섬에 와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대마도가 일본의 땅으로 존재하는 한 한국은 잠시도 일본을 좌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서천신문

       


    진포대첩의 현장은 어디?
    서천 -군산 역사 지명 논란 군 역사 고증 통해 재 규정
    [2004-09-15]
     
     
     
     
     
    금강하구 일대에서 왜구 선단 5백여척을 격파, 고려시대 최대 해전으로 일컬어 지는 진포(鎭浦)대첩 현장을 놓고 최근 군산시와 서천군이 역사지명 논란에 휩싸였다. 그간 서천설과 군산설로 나누어졌던 진포대첩 현장에 대해 서천군이 역사적 고증을 통해 당시의 진포(鎭浦)가 서천 장항일대인 점을 밝히자 인근 군산시가 이를 역사왜곡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군산문화원(원장 이복웅)은 군산시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ꡒ군산의 옛 지명인 진포를 서천지역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역사왜곡이다ꡓ며 이를 즉각 중단할 것 요구했다. 군산문화원은 또 진포는 분명한 군산의 옛 지명이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勝覽, 중종25, 1530년)`` ``동여비고(東與備고, 숙종, 1682년)`` ``해동지도(海東地圖, 영조)`` 등 각종 문헌을 근거로 내세웠다. 특히 군산문화원은 군산시가 진포대첩을 기념해 지난 92년부터 진포대첩제를 시민축제로 갖은바 있으며 진포대첩비와 진포대첩 기념탑을 세우는 등 진포가 군산 역사임에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천군은 단순한 역사서에 기초한 지명논쟁을 벗어나 이미 사료의 재검토는 물론 현장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을 통해 당시의 진포가 분명 서천군 장항읍 일대임을 확인했으나 문화가 지역적 전유물이 아님만큼 지명논란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진포가 서천 장항일대임을 주장한 이영 교수(한국방송대)는 먼저 진포대첩이 일어난 1380년에는 군산 쪽 진포에는 포구 존재가 문헌 사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고 진표대첩의 현장이 진포구(鎭浦口) 즉 하구에 위치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진포에 관한 설명을 서천군 조(條)에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 교수는 또 ¨서천이 군산보다 수심이나 면적에 있어서 선박을 정박시키는 항구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진포대첩 최고사령관인 나세 장군의 후손의 집성촌이 마서면에 위치했던 아들 나궤의 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인수기자



    비인읍성과 600년 청석교역사
    박수환의 문화이야기
    [2004-05-25]
     
     
     
     
    비인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고 생활하였음을 입증하는 유적등이 남아 있다. 서면, 비인, 종천지역은 특히 고인돌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비인지역은 마한시대 54개국중 비미국(卑彌國)이 자리하고 개별적으로 성장해 오다가 3세기에 이르러 백제에 부속되었다. 백제시대에는 비중현(比衆縣 또는 비비현), 신라 경덕왕15년(756년)에 비인현(庇仁縣)으로 개칭되었고, 조선 고종32년(1895년)5월28일 현(縣)이 군(郡)으로 승격되었으며, 일제가 1914년 비인군을 폐하여 서천군에 편입하고 비인면(庇仁面)으로 전락시켰다. 비인군 지역은 해안변을 끼고 있어 오래전부터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세종12년(1430년)9월24일 도순찰사(道巡察使=재상으로 왕명을 받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파견한 정부관리) 최윤덕(崔閏德)의 장계를 올려 아뢰길, 충청도 비인의 읍성은 바닷가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해구(海寇=해적)들이 가장먼저 발길을 들여놓는 지역이라 성터로써 적합지 않으니 비인현의 죽사동(竹寺洞)으로 옮길 것을 주창, 그 해 10월부터 비인읍성 축조공사가 이루졌다. 비인읍성은 성내리 시가지를 중심으로 비인초등학교 북쪽과 동쪽에 성벽이 잘 남아 있다. 동쪽의 성벽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지금도 자라고 있다. 이와 같이 대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옛날에는 죽사동(竹寺洞)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세종29년(1447년)실록을 보면, 비인현감(庇仁縣監) 박희굉(朴喜宏)이 부임지로 떠나기 전 세종임금께서 친히 불러 하교하길, 비인 고을은 해변 방어의 땅이니 군사에 관한 일을 소홀하게 하지 말고 정성껏 하라고 특별히 당부하였다. 이와 같이 비인 지역은 해변에 위치하고 있어 조정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인군수의 임명은 주로 무관출신을 임명하였으며 비인지역은 중요한 군사지역으로 월명산 관적 곡산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를 입증하고 있다. 비인읍성 안 비인초등학교 앞으로 흐르는 냇가를 따라 비인면사무소 앞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청석교(靑石橋)는 길이=460㎝ 너비=160㎝의 일부 상판만 냇가 위에 지금도 남아 있다. 청석교(靑石橋)는 언제 설치된 것일까? 설치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문헌자료를 토대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청석교는 18세기에 발간된 각종 관찬읍지(官撰邑誌=관청에서만든 역사책)에 비인읍성 내로 흐르는 하천에 설치된 것으로 읍지도(邑地圖=행정지도)에 표기되고 있다. 청석교의 이름은 아마도 돌의 색깔이 푸른색을 띠고 있어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종지리지를 보면 태종12년(1414년)관청과 공문서의 전달 관리들의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청화역(靑化驛)을 설치하고 있다. 청화역의 역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청석교도 이 청화역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1430년 읍성을 축성하면서 기존 왕래를 위한 다리로 설치한 청석교를 읍성을 쌓으면서 읍성(邑城)안으로 편입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판석위는 당시 많은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드나들었던 흔적으로 반질반질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일반인들은 어떤 돌인지 알 수 없고 관리하는데 무관심으로 언제든지 훼손될 우려가 있는 실정이다. 향후 문화재로 지정하여 역사적인 자료가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군민 모두가 관심을 갖고 관리하여야 할 것이다. 서천신문
     
     
     
     
     
    한산읍성 500백년 역사
    <박수환의 문화이야기>
    [2004-05-22]
     
     
     
     
     
    우리고장 한산은 1914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여 행정구역을 통합하기 전까지는 한산군이었다 지금은 서천군에 합병되고 일개 면으로 전락하였지만 서천군 , 비인군, 한산군 이였던 3개군 시절에 한산은 뿌리 깊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며,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다. 한산지방은 특히 문화유적이 지금도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시내를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한산읍성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기 전에 이미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일부는 파괴가 되어 멸실 되었지만 대부분은 원형이 존재하고 있어 더 이상의 문화재를 훼손하지 않도록 도 문화재로 지정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멸실 된 읍성의 성곽복원은 많은 예산이 수반되는 만큼 국고지원이 이루어 져야만 복원이 가능하다. 많은 유적 중 한산읍성 축성에 대한 역사자료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곽은 山城과 邑城으로 구분한다. 산성은 오로지 장기전의 전투목적으로 쌓지만 읍성은 전투목적 외에 행정을 하기 위한 목적에 더 비중을 두고 쌓았다. 읍성의 축조는 세종때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방어의 목적으로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성의 축조는 많은 백성을 동원하여야 하는 국가 대규모 사업으로 백성의 생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곽축조는 농한기를 택하여 축성하도록 하였다 특히 농사가 잘 되지 않은 해에는 성 쌓는 것을 금지 할 것을 명한 것을 보면 얼마나 성 축성으로 폐단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한산읍성의 축성시기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고 있다. 연산2년(1496년) 築城體察使(축성체찰사) 李鐵堅(이철견)이 아뢰기를, 韓山郡의 성은 계축년(성종24년-1493년)에 역사를 시작했다가 흉년이 들었으므로 축조를 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산은 돌을 이미 모아 놓았으니 역사가 불과 한 달이면 끝날 것이오니 다시 역사를 시작하고 청하였다. 이에 왕이 승정원에게 묻자 승지들이 아뢰길 ¨한산의 성은 농사철 이전에 끝마칠 수 있다면 쌓게 하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그렇게 하라고 명하였다. 한산읍성은 성종24년(1493년) 역사를 시작하였지만 성종25년(1494년)에 충청도 지방에 농사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충청도 관찰사 趙偉(조위)가 백성을 동원하여 한산성의 축성 역사를 중지 할 것을 청하여 중지하였지만, 연산1년(1495년)10월19일 판의금부사 이철견 등이¨한산군의 성터도 이미 정해졌고, 그때 역시 엄동이어서 쌓지 않았지만 올해는 자못 풍년이 들었고 또한 성곽은 나라의 울타리이오니 이미 축조하다 중지한 한산읍성을 축조하지 않을 수 없다¨하며 내년 봄에 다시 수축을 완성함이 좋을듯 하다고 청하니 왕은 ¨그렇게 하라¨하고 명하였다. 그러나 연산2년(1496년)1월10일 사헌부 지평 이세인이 아뢰길 한산군의 읍성을 금년 봄에 쌓도록 명하였지만 국상을 당하여 山陵(산릉=왕과왕비등의 묘)의 喪葬(상장=장례)의 역사(역사= 일을시킴)에 피곤한 데다가 중국 사신이 왔음으로 民力(민력=일 할 수 있는 백성의힘)이 심히 지쳐 있으며 만약 역사를 시작한다해도 3,4월까지도 성의 축조는 끝내지 못할 것이니 장차 백성이 농사를 짓지 못할까 걱정되며 성을 쌓는 일도 국가의 대사인 만큼 가을을 기다려서 쌓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니 왕이 명하길 아뢴 대로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한산읍성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축성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난 1496년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한산읍성은 몇 차례의 수난을 맞았다. 선조30년(1597년)9월2일에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1597년)때 왜구들이 임천과 한산등지에 침입하고 읍성을 불지르고 약탈하였다. 이때 李時發(이시발)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과반수가 도망을 치고 말았기에 읍성과 한산향교를 비롯한 민가들이 불에 타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1894년 갑오동란 때 전북 동학군들이 한산 신성포를 거쳐 부여양화면 수원리, 한산면원산, 마산면 요곡 등의 동학도들과 합세하여 한산읍성을 공격하여 성안의 민가와 관청을 불사르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로써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다. 또한 일제가 36년간 통치하면서 나머지 건물들은 파괴하여 급속히 사라져 오늘날에는 당시 건물들은 사라진지 오래다. 당시 읍성은 4개 성문이 설치었으나 조선후기에 오면<여지도서>.<충청읍지> 등에는 3개의 성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자료를 보면 東門(한산 유산리쪽도로)을 耀德樓(요덕루), 西門(향교가는길목 마을창고쪽)을 受降樓(수강루) ,北門(한산우체국 정면도로)을 百勝樓(백승루)였다 지금은 성의 누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서천군 공업담당/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박 수환 서천신문



    진포대첩


    우왕 6년 8월 왜구들은 5백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오늘날의 금강 어구에 해당하는 진포구鎭浦口에 침입했다. 그들은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하여 묶어 놓고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한 다음에, 대 부대를 거느리고 연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왜구의 야만적인 약탈로 인하여 우리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으며, 약탈한 쌀을 배로 실어 나르면서 한 자 두께가 넘게 땅에 수북히 흘렸을 만큼 그 피해가 매우 컸다.  

    정부는 해도원사 나세와 심덕부, 그리고 최무선을 진포로 파견하여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진압하게 하였다. 이 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硝石과 유황(硫黃), 그리고 목탄(木炭)을 혼합한 근대적인 폭발화약의 제조법은 이미 북송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원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정벌 때에도 사용할 만큼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고려에 대해서는 이를 군사기밀이라 하여 철저하게 비밀로 하였다. 왜구를 격멸하기 위해서 화약의 제조가 절실하다고 생각한 최무선은 중국의 강남에서 온 상객 가운데 화약의 제조법을 터득한 사람을 자신의 집에 데려다 두고 의식을 제공하며 수십일 간에 걸쳐 화약 제조의 요령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우왕 3년에 직접 조정에 건의하여 화통도감(火通都監)을 설치하게 하고, 여기에서 화약을 제조하면서 각종 화기를 제작하였다.

    이 당시 그가 만든 화기로는,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 )·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 ·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이렇게 제작된 화기들은 진포 해전에서 사용되어 왜구를 격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鄭以吾)가 그의 저서 {화약고기(火藥庫記)}에서 우왕대의 진포해전과 남해의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왜구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통(火通)과 화포(火砲)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싸움에서 화포를 맞은 왜선(倭船)은 거의 모두 불에 타서 연기가 온통 하늘을 뒤덮었으며,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왜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진포의 해전은 우리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해안에 정박하여 있다가 우리 전함의 화포로 거의 모든 배를 잃은 왜적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 당한 형편이 되었기 때문에 육지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잔악한 행위를 벌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왜구들은 포로로 잡은 우리측의 양민과 어린아이들을 대거 살륙하여 시체가 산처럼 쌓였으며, 여기에서 살아서 도망쳐 나온 사람은 겨우 33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왜구들은 심지어 2-3세 된 어린아이의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쌀과 술과 함께 제물로 삼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왜구들이 저지른 살인과 약탈은 바다에 인접하여 있는 삼도의 마을들을 폐허로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었다. 왜적의 일부는 옥천과 영동 쪽으로 달아나 약탈 행위를 벌였는가 하면, 일부는 상주와 선산, 금산 쪽으로 달아났다. 특히 상주 쪽으로 달아난 왜군의 주력 부대는 다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산(星州)을 거쳐 함양의 동쪽에 있는 사구내역에 주둔하였다. 정부는 원수 박수경, 배언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싸움에서 져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하여 아군 5백여명이 전사하였다. 승전에 고무된 왜구들은 함양을 노략질하고 다음 달인 9월에는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운봉현으로 물러나 인월역에서 두둔하면서 "장차 말을 금성(潭陽)에서 먹여 가지고 북상하겠다"고 기세를 부렸다.

    이에 정부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로, 변안열을 체찰사로 각각 임명하고, 왜구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이들 지휘부는 병력을 거느리고 남원으로 달려 가 그곳에 있던 배극렴 등과 합류하여 운봉을 지나 황산의 서북쪽에서 왜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그들을 섬멸하였다. 황산전투는 숫적으로 10배에 가까운 적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거의 전멸하고, 불과 70여명의 적들만이 살아남아 지리산 속으로 도망갈 정도로 완전한 승리였다.이 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가는 당시 그곳 냇가에서 흐르는 물이 모두 붉게 물들어 일주일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싸움을 계기로 하여 왜구의 세력은 차츰 시들어갔으며, 한편 이성계 등 신흥 군부세력은 확고한 세력 기반을 구축하게 되어 뒷날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진포해전은 이제까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화기를 제조하여 이를 왜구의 토벌에 이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전사상戰史上 큰 의의가 있었으며, 또한 이 싸움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하여 왜구의 침입이 수그러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이곳 진포 지역에 대한 크고 작은 왜구의 침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진포해전이 있고 난 뒤 2년째가 되는 우왕 8년 10월 왜선 50척이 진포에 침입하자, 해도원사 정지가 이를 공격하여 군산도(지금의 고군산)까지 추격한 끝에 4척을 포획하였으며, 우왕 14년 5월에는 다시 왜선 80척이 대거 진포에 들어와 근처의 마을들을 노략질하였다. 정부는 상호군 진여선를 전라양광도에 파견하였으나, 그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자, 그의 자제와 노예들 중에서 대신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보내 왜구를 막게 하였으며, 이를 피한 자들은 군법으로 엄단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왜구들은 전주에 침입하여 관청을 불살랐는가 하면, 김제와 만경, 인의현 등에도 침입하였다. 이같은 왜구의 잦은 노략질은 공양왕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마침내 소멸되게 되었다.











    金錡泰   倭를 항상 경계해야 했음이 설명되는 명 칼럼입니다. 해박한 역사 지식과 사관에 그저 고개만 끄덕입니다.
    근자에 TV를 거의 보지 않다가 mbc의 신돈을 즐겨 보고있는 데 신돈과 노국공주,공민왕 그리고 기철등에 대한 정사자료가 있으면 한번 올려 주이소. 좌우간 유익하고 흥미만점 포스트가 즐비합니다. 2005/12/18  
         
         
     
      solhanna   유익한 글, 잘 읽고 갑니다.. 다른 동네라서 스크랩 기능을 사용하지 못하니 허락하지 않으면 삭제 하겠습니다.. 종종 놀러 오겠습니다. 2006/01/15 09:28:46  
         
         
     
      풀뿌리   [홍익인간]연재건으로 이제야 답신드립니다. 왜구에 대하여는 많은 설이 있으나 그들에 대한 연구가 곧 상고사의 내용이 불비한 우리의 ㅇㄴ구라고 생각합니다. 왜구문제 하나만 잘 규명하더라도 밝혀지지 않은 우리 상고사의 베일이 많이 벗겨지리라고 감히 생각해봅니다. 방문 감사드리고 [홍익인간]은 일단 끝냈는데 많은 토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1/15 21:56:23  
         
         
     
      풀뿌리   [이덕일] 해적은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 발생하기 마련이다. 해적은 중국 출신도 있었지만 왜구(倭寇)·왜적(倭賊)이 동아시아의 대표적 해적으로 인식된 것은 14~15세기의 일본 상황 때문이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국왕은 명목뿐이었고, 막부(幕府)를 장악한 장군(將軍)이 실제 국왕이었다. 1185년경 성립된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직을 세습하는 미나모토(源)씨가 지배했는데 일왕 고다이고(後醍�:1288~1339)가 명목상의 지위를 거부하고 직접 통치를 꾀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한반도와 가까운 서국(西國)지역의 영주들이 일왕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미나모토씨가 서국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라고 파견한 아시카가(足利尊氏)가 1333년 태도를 바꾸어 일왕을 지지함으로써 일본은 둘로 분열됐다. 이런 혼란을 이용해 서국지역의 무사와 상인들이 해적으로 돌변해 한반도와 중국 연해를 약탈하면서 왜구가 동아시아 해적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우왕 6년(1380)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적을 무찌른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왜구를 강력하게 토벌하거나, 무로마치(室町)막부(幕府)에 금압을 요구하고, 투항한 왜장(倭將) 구육( 六)에게 선략(宣略) 장군직을 하사하는 등 강온책을 적절히 구사했다. 그 결과 "옛날과 비교해 10분의 8, 9가 감소되었다"('태조실록' 4년 7월 10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큰 효과를 거뒀다. 태종 18년(1418)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이 뒤를 이은 후 왜적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왜구는 다시 창궐해 세종 1년(1419) 비인현(庇仁縣)을 공격해 만호 김성길(金成吉) 부자를 전사시켰다. 이에 분개한 상왕 태종이 이종무(李從茂)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 기해동정(己亥東征)이다. 해적 출현이 빈번한 소말리아에 이순신함을 파견한다는데 가까운 서해상에서 해경을 살해한 중국 어선들도 해적과 다름없다. 먼저 중국 정부에 금압을 요구하고 가시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을 경우 해적에 준해 대처하겠다고 통보하고 강력 제재해야 할 것이다. 입력 : 2008.09.29 22:18 2008/10/02 07: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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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구(倭寇)가 가난한 어민이나 상인 출신이라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전문적인 무사 집단이었고, 마치 현대의 알 카에다와도 비슷한 테러 조직이었습니다.”이영(李領) 한국방송대 교수(일본중세사 전공)가 최근 낸 단행본 ‘잊혀진 전쟁 왜구’(에피스테메 刊)는 왜구를 전문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의 연구서다. 우리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숱하게 출몰한 일본의 해적 집단’으로 알고 있는 왜구이지만 국내 학계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교수는 “왜구는 근본적으로 일본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에서는 잊혀진 반면, 가해자인 일본이 왜구 연구를 주도해 오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의 연구 결과는 우리 입장에선 상당히 뜻밖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 다카하시 기미아키(高橋公明) 등의 연구자들은 14~15세기 ‘전기(前期) 왜구’에 대해 “일본인·고려인·중국인 같은 다국적민으로 구성된 해적”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 교수는 “자기 조상들이 해적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은폐하려는 심리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한국 사료에 대한 불신이 ‘국적과 민족의 틀을 넘어서 역사를 보자’는 당시 서양사학계의 풍조와 만난 결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왜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화척·재인 같은 고려의 천민들이 ‘가짜 왜구’ 행세를 했다는 기록이 일본측 주장의 근거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사건에 불과했을 뿐이며 당시의 모든 정사(正史)와 문집이 왜구를 ‘왜인’이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