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3국의 성씨(姓氏)의 기원
2000년에 조사한 우리 나라의 성씨별 인구가 통계청 홈페이지에 떴는데, 1985년 발표 당시보다 성씨의 숫자가 12 개 늘었다. 그 때는 274개였는데, 이번은 286개가 되었다. 우리 나라 10대 성씨의 순위는 변화가 없었다.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
“김(金)” 씨는 우리 나라 인구의 21.6%인 992만 여 명으로 여전히 제일 많았다.
“이(李)” 씨는 그보다 훨씬 적은 14.8%로 679만 여 명으로 조사되었다.
“박(朴)” 씨는 또 그보다 훨씬 적은 8.5%로 389만 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잇는 “최(崔), 정(鄭)”씨는 4% 대이고,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씨는 2% 대, 그리고 “임(林)” 씨부터 21위 “전(全)” 씨까지 1%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씨별 인구 수가 거의 일정한 차이를 유지하며 계속 나열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성씨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가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 특정 성씨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다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만 1, 2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아진 것은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법이 시행될 때 “양반이 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기형적인 분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에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를 만들어서 가졌다고 한다. “田中, 中村, 松下...” 등 다양하게 창씨된 성씨의 숫자가 순식간에 8만 개나 되었는데....
일본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특정 성씨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는 없다고 하며... 또한 성씨만 가지고는 가문의 역사 같은 것은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를 논할 때 성씨가 무언가 하는 것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착 같은 것이 거의 없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여기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일본이 우리 나라, 즉 대한제국에 와서도 계급을 타파한다면서 “신분 표시가 없는 호적법”을 시행하였고, 여기에서도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운동을 전개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결과는 일본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 들은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이들 대부분이 그 동네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하여 그 “양반님”들의 성씨를 얻어 와서는 관청에 신고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 때에 김(金) 씨나 이(李) 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 성씨가 총 인구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양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던”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난,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여튼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러이 이루어졌고, 옛날 이야기에 그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구월이...”의 자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슨무슨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버렸고, 오로지 양반의 후손만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덕분에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양반이 많은 나라가 되었고, 또한 제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불과 100 여 년 전만 해도 “성씨도 없는 쌍놈들”은 제사고 차례고 지낼 수가 없었는데, 요즈음은 집집마다 장손이면 모두 명절날 차례를 지낸다.
참고로 5000년 전부터 성씨를 사용해 온 중국의 경우를 보면 성씨별 인구 1, 2, 3위의 비율은 각각 7.4%, 7.2%, 6.8%로 되어 있어서, 특정 성씨로 몰리는 현상은 없다. 중국은 인구 0.1% 이상을 차지하는 성씨가 모두 129개로 나타났는데, 이 129개 성씨의 인구 합계는 중국 인구의 87%라고 한다. 이는 2006년 1월 10일 중국과학원에서 중국역사상 가장 정밀한 자료조사를 거쳐 발표했다는 “100대 성씨”에 근거한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인구기준 성씨순위”가 1987년의 발표자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표본조사한 기초자료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1987년 조사는 겨우 57만 명 정도를 표본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고, 이번 조사는 그 때에 비하여 500배도 넘는 약 3억 명을 표본 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기 때문에 그 정밀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번 조사에서 중국 10대 성씨는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陳), 양(楊), 황(黃), 조(趙), 주(周), 오(吳)”
로 판명되었다. 이 순위는 자동적으로 전세계의 10대 성씨가 되기도 한다. 이 중 “李”는 중국 인구의 7.4%인 9천 60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679만여 명을 합치면 “李”씨는 1억 명을 넘어 가는 세계 유일의 성씨가 된다.
약 900년 전인 서기 1100년대에 북송(北宋)에서 발표한 『백가성(百家姓)』이란 책자가 최초의 성씨 조사 기록이었고, 명(明)나라의 『천가성(千家姓)』, 청(淸)나라의 『백가성(百家姓)』 등이 뒤를 이었으나 이 책들은 모두 성씨별 인구수를 기준으로 서열을 매긴 것은 아니었다.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趙錢孫李 周吳鄭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인구수 순위가 아니었다. “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인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던 것인데... (중국의 1100년대는 송나라가 약간 힘이 강한 정도였고, 고만고만한 나라들로 나누어져서 도토리 키재기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인구 순이 아니라 예우(?)를 받아야 할 성씨의 순위였고, 최근 중국 일부 신문에서 보도한 “900년만에 조(趙)가 1위에서 8위로 밀렸다”는 내용은 옛날 기록의 특징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나라 성씨의 순위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 성씨 순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金 : 21.59%, 한국 1위 (중국 64위)
한국 발음이 현재는 “김”이지만 옛날에는 “금”으로 읽었다는 주장도 있음.
현재 중국 배우 중에도 이 성씨를 가진 배우가 있는데 “금성무”라고 보도되고 있음
이 글자의 현대식 중국 표준발음은 “찐”임
李 : 14.78%, 한국 2위(중국 1위 7.4%)
한국, 중국 합하면 1억이 넘어 가는 전 세계 단 하나의 성씨임
중국, 북한에서는 “리”라고 하는데, 남한에서만 “이”라고 읽고 있음.
그런데, 남한 사람들도 영어로 쓸 때에는 대부분 “Lee(리)”라고 하는 버릇이 있음
박 : 8.47%, 한국 3위(중국 100위 내에서는 안 보임)
한자로 “朴”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바가지”란 뜻의 순우리말 토종 성씨임.
“박혁거세”의 “박”은 “박만큼이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은 말임
영어로 "Park" "Pak" 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으나 "Paak" 이라고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함.
최(崔) : 4.72%, 한국 4위(중국 58위)
정(鄭) : 4.37%, 한국 5위(중국 21위)
강(姜) : 2.27%, 한국 6위(중국 50위)
조(趙) : 2.14%, 한국 7위(중국 8위)
윤(尹) : 2.06%, 한국 8위(중국 95위)
장(張) : 2.00%, 한국 9위(중국 3위)
임(林) : 1.66%, 한국 10위(중국 17위/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오(吳) : 1.54%, 한국 11위(중국 10위)
한(韓) : 1.53%, 한국 12위(중국 26위)
신(申) : 1.52%, 한국 13위(고려태조가 하사한 성씨,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일족이 있음)
서(徐) : 1.51%, 한국 14위(중국 11위)
권(權) : 1.42%, 한국 15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황(黃) : 1.40%, 한국 16위(중국 7위)
안(安) : 1.39%, 한국 17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송(宋) : 1.38%, 한국 18위(중국 23위)
유(柳) : 1.31%, 한국 19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홍(洪) : 1.13%, 한국 20위(중국 99위)
전(全) : 1.07%, 한국 21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고려 왕씨 유래설이 있음)
고(高) : 0.95%, 한국 22위(중국 19위)
문(文) : 0.93%, 한국 23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손(孫) : 0.90%, 한국 24위(중국 12위)
양(梁) : 0.85%, 한국 25위(중국 20위)
배(裵) : 0.81%, 한국 26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조(曺) : 0.79%, 한국 27위(중국 27위)
백(白) : 0.76%, 한국 28위(중국 79위)
허(許) : 0.65%, 한국 29위(중국 28위)
남(南) : 0.56%, 한국 30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우리 나라 31위 이후의 성씨는 다음과 같음.
31-40 심(沈) 유(劉) 노(盧) 하(河) 전(田) 정(丁) 성(成) 곽(郭) 차(車) 유(兪)
41-50 구(具) 우(禹) 주(朱) 임(任) 나(羅) 신(辛) 민(閔) 진(陳) 지(池) 엄(嚴)
51-60 원(元) 채(蔡) 강(康) 천(千) 양(楊) 공(孔) 현(玄) 방(方) 변(卞) 함(咸)
61-70 노(魯) 염(廉) 여(呂) 추(秋) 변(邊) 도(都) 석(石) 신(愼) 소(蘇) 선(宣)
71-80 주(周) 설(薛) 방(房) 마(馬) 정(程) 길(吉) 위(魏) 연(延) 표(表) 명(明)
81-90 기(奇) 금(琴) 왕(王) 반(潘) 옥(玉) 육(陸) 진(秦) 인(印) 맹(孟) 제(諸)
91-100 탁(卓) 모(牟) 남궁(南宮) 여(余) 장(蔣) 어(魚) 유(庾) 국(鞠) 은(殷) 편(片)
101-110 용(龍) 강(疆) 구(丘) 예(芮) 봉(奉) 한(漢) 경(慶) 소(邵) 사(史) 석(昔)
111-120 부(夫) 황보(皇甫) 가(賈) 복(卜) 천(天) 목(睦) 태(太) 지(智) 형(邢) 피(皮)
121-130 계(桂) 전(錢) 감(甘) 음(陰) 두(杜) 진(晋) 동(董) 장(章) 온(溫) 송(松)
131-140 경(景) 제갈(諸葛) 사공(司空) 호(扈) 하(夏) 빈(賓) 선우(鮮于) 연(燕) 채(菜) 우(于)
141-150 범(范) 설(偰) 양(樑) 갈(葛) 좌(左) 노(路) 반(班) 팽(彭) 승(承) 공(公)
151-160 간(簡) 상(尙) 기(箕) 국(國) 시(施) 서문(西門) 위(韋) 도(陶) 시(柴) 이(異)
161-170 호(胡) 채(采) 강(强) 진(眞) 빈(彬) 방(邦) 단(段) 서(西) 견(甄) 원(袁)
171-180 방(龐) 창(昌) 당(唐) 순(荀) 마(麻) 화(化) 구(邱) 모(毛) 이(伊) 양(襄)
181-190 종(鍾) 승(昇) 성(星) 독고(獨孤) 옹(邕) 빙(冰) 장(莊) 추(鄒) 편(扁) 아(阿)
191-200 도(道) 평(平) 대(大) 풍(馮) 궁(弓) 강(剛) 연(連) 견(堅) 점(占) 흥(興)
201-210 섭(葉) 국(菊) 내(乃) 제(齊) 여(汝) 낭(浪) 봉(鳳) 해(海) 판(判) 초(楚)
211-220 필(弼) 궉(鴌) 근(斤) 사(舍) 매(梅) 동방(東方) 호(鎬) 두(頭) 미(米) 요(姚)
221-230 옹(雍) 야(夜) 묵(墨) 자(慈) 만(萬) 운(雲) 범(凡) 환(桓) 곡(曲) 탄(彈)
231-240 종(宗) 창(倉) 사(謝) 영(永) 포(包) 엽(葉) 수(水) 애(艾) 단(單) 부(傅)
241-250 순(淳) 순(舜) 돈(頓) 학(郝) 비(丕) 영(榮) 개(介) 후(侯) 십(辻) 뇌(雷)
251-260 난(欒) 춘(椿) 수(洙) 준(俊) 초(肖) 운(芸) 내(奈) 묘(苗) 담(譚) 장곡(長谷)
261-270 어금(魚金) 강전(岡田) 삼(森) 저(邸) 군(君) 초(初) 영(影) 교(橋) 순(順) 단(端)
271-280 후(后) 누(樓) 돈(敦) 소봉(小峰) 뇌(賴) 망절(網切) 원(苑) 즙(辻) 증(增) 증(曾)
281 삼(杉) : <남자 2명>
282 우(宇): <남자 1명> 소(肖)예(乂) 빙(氷) 경(京) : <여자 각 1명>
(이상 총 286개 성씨)
이 중 최근에 새로 생긴 성씨 중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잘못 기재하여 그리 된 것도 있고, 국제 결혼으로 우리 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남아 또는 중국 사람들의 성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중국의 주요 성씨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 : 중국 7.4%, 중국 1위(한국 2위)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개국공신들에게 “李”를 하사했고, 나중에 후위(後魏)의 선비족(鮮卑族)에서도 “李”씨로 바꾸어 사용한 사람들이 많음.
중국인들은 영어로 표기할 때 "Li"를 주로 사용하며, 미국 "Lee"와의 관계는 불명확함
王 : 중국 7.2%, 중국 2위(한국 83위)
중국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사이의 신(新)나라 때 황제 왕망(王莽)의 성씨임.
중국 사람이라 하면 “비단장사 왕서방”이라 할 정도로 중국에 왕 씨가 많았음
한국에서도 고려시대 왕족이 “왕건(王建)”의 왕씨였으나 고려 멸망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춤.
張 : 중국 6.8%, 중국 3위(한국 9위)
장삼이사(張三李四 : 중국인들은 대개 張씨네 셋째 아들 아니면 李씨네 넷째 아들이라는 뜻)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張씨가 많았음. 지금도 “장가계(張家界)”는 관광지로 유명함. “왕삼이사(王三李四)”란 말이 생기지 않은 것은 “왕이 셋이면..”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됨.
劉(유) : 중국 4위(한국 32위)
陳(진) : 중국 5위(한국 48위)
楊(양) : 중국 6위(한국 55위)
黃(황) : 중국 7위(한국 16위)
趙(조) : 중국 8위(한국 7위)
周(주) : 중국 9위(한국 71위)
吳(오) : 중국 10위(한국 11위)
徐(서) : 중국 11위(한국 14위)
孫(손) : 중국 12위(한국 24위)
朱(주) : 중국 13위(한국 43위)
馬(마) : 중국 14위(한국 74위)
胡(호) : 중국 15위(한국 161위)
郭(곽) : 중국 16위(한국 38위)
林(임) : 중국 17위(한국 10위)
何(하) : 중국 18위(한국에는 없음)
高(고) : 중국 19위(한국 22위)
梁(양) : 중국 20위(한국 25위)
鄭(정) : 중국 21위(한국 5위)
羅(나) : 중국 22위(한국 45위)
宋(송) : 중국 23위(한국 18위)
謝(사) : 중국 24위(한국 233위)
唐(당) : 중국 25위(한국 173위)
韓(한) : 중국 26위(한국 12위)
曹(조) : 중국 27위(한국 27위) / 한국에서는 “曺(조)”란 글자를 주로 사용함
許(허) : 중국 28위(한국 29위)
鄧(등) : 중국 29위(한국에는 없음)
蕭(소) : 중국 30위(한국에는 없음)
중국 31위부터 100위까지는 다음과 같음
31-40 馮(풍),曾(증),程(정),蔡(채),彭(팽),潘(반),袁(원),于(우),董(동),余(여),
41-50 蘇(소),叶(협),吕(여),魏(위),蒋(장),田(전),杜(두),丁(정),沈(심),姜(강)
51-60 范(범),江(강),傅(부),钟(종),卢(노),汪(왕),戴(대),崔(최),任(임),陆(육)
61-70 廖(료),姚(요),方(방),金(금),邱(구),夏(하),谭(담),韦(위),贾(가),邹(추)
71-80 石(석),熊(웅),孟(맹),秦(진),阎(염),薛(설),侯(후),雷(뢰),白(백),龙(용)
81-90 段(단),郝(학),孔(공),邵(소),史(사),毛(모),常(상),万(만),顾(고),赖(뢰)
91-100 武(무),康(강),贺(하),严(엄),尹(윤),钱(전),施(시),牛(우),洪(홍),龚(공)
중국 측 발표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성씨는 56개 종족에 약 12000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13억 인구 전부를 조사 못해서 이런 추정치라는 것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신판 『중국성씨대사전(中國姓氏大辭典)』에는 무려 23000개의 성씨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나 인식들에 대하여 약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의 성씨관...
중국은 예로부터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원래 성(姓)이라 함은 모계제 사회의 흔적으로 “어머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씨(氏)는 “출생한 뒤에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모두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황제(黃帝)”의 경우 성(姓)은 “희(姬)”이고 씨(氏)는 “헌원(軒轅)”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황제(皇帝), 즉 천자(天子)가 내려 주는 것은 성(姓)이라 했고, 제후(諸侯) 또는 국왕(國王) 정도가 내려 주는 것은 씨(氏)라 했다. 언제나 성(姓)이 한 단계 위의 개념이었는데, 보통 성(姓)은 한 글자였고 씨(氏)는 두 글자가 많았다.
그리고 한(漢) 나라 때에 족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천자가 각 제후나 공신들의 자제들에 대한 특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천자가 만든 족보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가 권력의 유무를 판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성씨는 남자들만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Y염색체의 유전 상황을 표시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중국의 성씨는 역사가 5000년이 되었고, 성씨는 문화의 전승과 남성 혈통의 흐름을 연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성씨이면 무조건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관습이 자연스러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혈연 관계는 인간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성씨관...
원래 우리 나라의 토착민들은 성씨가 없었다고 한다. 계속적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일부 고위 관리들에게서 성씨를 가진 자들이 간간이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서는 국력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왕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스스로 만들어서 가졌다. 그래서 왕족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고 없는 먼 조상님들(혁거세, 알지 등등)에게도 소급해서 성씨를 만들어 붙이고 했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보다 쌍놈들이 더 많았고,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절 일본의 압력 덕분에 호적에 성씨란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많았지만, “만들어 올렸다”는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가문의 비밀”로 숨겨 두어야 했다.
성씨의 유무와 관련한 성씨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우리 백성들은 양반제도가 비록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40년대에 일본이 “이제 조선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한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고, 앞으로 성씨로 인한 조선인, 일본인 간의 차별대우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성씨 자체를 “가문의 역사”로 생각하는 많은 우리 백성들은 당연히 반대하였고, 성씨의 역사가 불과 50년밖에 안 되어 성씨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던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들의 반대를 보고 “거참, 이상하다. 그깟 성씨 가지고 왜들 저러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성씨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씨를 만들어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신청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신고하였는데, 이광수가 만든 성씨는 “일본 천황 고향의 뒷산인 향구산(香久山)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향산(香山)이었다. 이광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성씨란 건 별 것 아니야”라는 자기네들의 전통적 인식을 한국식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전 세계의 남자들이 한국인들에게 깜짝 놀라는 것이 두 가지라 하는데, 한 가지는 부인의 성씨 문제이고 또 한 가지는 “부인이 남편 통장을 관리”하는 것이라 한다. “자다가 벌떡 깨어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는 한국은 거의 구제불능성 선천적 여성천국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성씨관...
일본은 우리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백제와 교류할 때부터 성씨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고, 오랜 기간 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가물에 콩 나듯 하는 중국과의 교류도 크게 활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성씨의 위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19세기말 미국이 군함을 밀고 들어오고, 일본 청년들이 세계일주도 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패밀리 네임”이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을 보니 자기네들의 직업을 가지고 만든 성씨도 있고, 자기네 마을의 특징을 살려서 만든 성씨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도 성씨란 걸 만들어서 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에게 물어 보니 동양 문화권에서는 성(姓)이라는 것도 있고 씨(氏)라는 것도 있는데.. 성(姓)이란 것은 황제가 직접 만들어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백성이 한두 명도 아닌데 어느 세월에 만들어서 준단 말인가... 그냥 일본은 씨(氏)를 만들어서 쓰기로 하고 창씨(創氏)하는 업무는 각 사무라이들에게 그냥 맡기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순식간에 수만 개의 씨(氏)가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일본은 어떤 장부이든지 “성명(姓名)”이란 칸은 없고 어디든지 모두 “씨명(氏名)”이란 칸만 있다. 19세기 말 갑자기 시행된 창씨(創氏)였기 때문에 각자의 씨(氏)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청일 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게도 성씨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호적법을 만들어 창씨(創氏)의 기회를 주었으나, 조선인들은 이상하게도 창씨(創氏)는 않고 기존 양반들의 성(姓)을 빌려 와서 관청에 신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글자 짜리인 성(姓)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국 또는 조선인이고 두 글자 짜리 씨(氏)를 쓰는 사람은 일본인.... 어찌 되었든 간에 국적 구별이 쉬워서 좋기는 했다.
조선을 삼키고 난 뒤에 조선인들로부터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 놓고는 차별대우가 너무 심하다”는 등 불만사항이 많이 접수가 되었지만, 우선 이름에서부터 출신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니 일본 정부로서도 별로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그냥 대충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가고... 조선인들이라도 군인으로 뽑아서 내보내야겠는데 차별대우 해소를 위한 근본대책을 세우라고 매일 투덜대는 저 조선인들을 그냥 일본군으로 들여 보냈다가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 보고 질 것 같고... 일본정부는 착잡해졌다.
누군가 묘안을 냈다. 일본식으로 창씨(創氏)할 기회를 한 번 더 줄 터이니 이 참에 일본식으로 제대로 창씨를 해라... 어차피 얼굴 생긴 것도 똑같고.. 조선 출신을 차별대우하고 싶어도 조선 출신이란 표시가 없으니 못할 것 아니냐... 그러나 그대신 조선 청년들 군대에 좀 가 줘야 되겠다.... 이렇게 하여 1940년대에 창씨(創氏)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어떻게 그 동안 써 오던 성(姓)을 버리고 그보다 격이 낮은 씨(氏)를 쓸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법적으로 양반이란 것도 없어졌고 문벌이란 것도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는데 허울만 남은 성(姓)을 가지고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차별대우 철폐란 것이 어차피 민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문제이고 정책 차원에서 조선출신이라는 표시가 안 나게 해 주겠다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불만에 대해 잘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강제 창씨를 계속 밀고 나갔다. (이 때 林, 柳, 南씨 일부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 하여 새로 창씨를 하지 않았다고 함).... 그리고 조선인들을 일본군으로 받아 들여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사람들만 일본군복을 입은 채로 애매하게 죽은 셈이 되어 버렸고 몇 년 후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1945년에 전쟁도 끝이 나고 살림살이도 일본 내부로 축소되었으니 일거리도 줄어들고 오히려 편해졌다. 일본인들도 이제 성씨를 사용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간다. 100년 동안 의 짧은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성씨에 대한 관념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씨에 대한 뚜렷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일본인은 성씨의 종류는 8만여 가지로 무지하게 많지만 성씨별 인구 수에 대해서는 아직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양반의 자손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일본인은 "근본도 모르는 쌍놈들"일 뿐이다.
내용출처 : [기타] 한국과 중국의 100대 성씨는-문학박사 황재순著
|
'05역사의 뒤안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슬람에 대한 오해 몇가지 (0) | 2015.07.31 |
---|---|
정화, 세계사를 다시 쓴다 (0) | 2015.07.31 |
봉한학설을 아시나요? (0) | 2015.07.31 |
황사(黃砂)에 대한 소고(小考) Beautiful Day / Andante (0) | 2015.07.31 |
누가 원균(元均)장군에게 돌을 던지는가? (0) | 2015.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