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정화, 세계사를 다시 쓴다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5:16

정화(1371-1433)

 

명대(明代)의 항해가이며 환관(宦官). 원래의 성(姓)은 마(马)이며 이름은 화(和). 윈난 곤양(昆阳) 출신의

후이족

(回族, 회족)인으로 조상은 원초(元初) 중앙아시아의 색목인(色目人) 귀족(贵族)이었다. 증조부는 백안(伯顏, Bayan)으로 원의

대덕

(大德) 11년(1307) 중서평장(中书平章)에 임명되었고 부친은 마합지(马哈只, 원명 米里金)이 전양후(滇阳候)에 봉해졌다. 마(马)씨 성은 Mahmud의 한자식 표현이다.

부친 미리금(米里金)은 명

홍무

(洪武) 4년(1371) 마삼보(马三宝)를 낳았고 홍무 13년(1381) 겨울 명군이 윈난으로 진격 시 마삼보(马三宝)가 10세의 나이로 포로가 되어 거세가 된 후에 태감(太監)이 되어 연왕(燕王) 주체(朱棣)의 왕부(王府)로 들어갔다가 정난지변(靖難之变) 중 마삼보는 지금의 허베이 임구(任丘)인 허베이 정저우(郑州, 정주)에서 연왕(燕王) 주체를 위해 전공을 세웠다.

영락

2년(1404) 명성조(明成祖)

영락제

가 된 주체는 난징에서 마삼보(马三宝)에게 정씨(郑氏) 성을 하사하여 이름을 화(和)로 개명하며 관직이 사례감(司礼監) 다음의 4품(四品)에 해당하는 내관감태감(內官監太監)이 되었다.

선덕

(宣德) 6년(1431) 정화(郑和)는 삼보태감(三宝太监)이 되었고 선덕 8년(1433) 4월 사망하여 난징 우수산(牛首山)에 장사를 지냈다. 정화(郑和)는 장형(长兄) 마문명(马文铭)의 장자 정문명(郑文铭) 양자로 삼아 대를 이어 지금의 마부가(马府街)인 난징 삼산가(三山街) 마부(马府)에서 거주하게 하였고 정화의 후예가 지금까지 21대가 이어지고 있다. 1402년 영락제(永乐帝) 성조는 주변 국가들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도록 사신을 사방으로 파견하였으며 영락 2년(1404) 정화를 수군 10만과 함께 일본 사신으로 파견하여 명과 외교관계를 맺게 하였으며 1405년 7월 11일 영락(永乐) 3년 영락제는 정화(郑和)에게 240여 척의 배에 2만 7천 8백 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여 행할 것을 명하여 이후 30여 개 국의 서태평양과 인도양 국가와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정화는 매번 쑤저우(苏州) 유가항(刘家港)에서 출발하여 1433년 명선덕(明宣德) 8년까지 7차에 걸쳐 원정을 떠났으며 선덕8년(宣德八年) 4월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명사(明史) 정화전(郑和传)의 기록에 따르면 정화의 항해보선(航海宝船)은 모두 63척으로 최대 길이 44장(丈) 4척(尺), 넓이 18장(丈)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선박으로 현재의 척도로 길이 151.18m, 폭 61.6m의 4층 규모에 승무원이 24,800명으로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가 120톤급 3척, 승무원 170명이었고, 콜럼버스의 함대는 250톤급 3척, 승무원 88명에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의 대 함대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화의 사후명은 쇄국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성화제

(成化帝) 때 다시 대항해 실시에 대한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항해에 쓰이는 막대한 비용과 유교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물거품이 되었다. 정화의 항해에 대한 기록은 제4차 원정과 제7차 원정 때 동행했던 마환(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과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嵯勝覽),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国志)등에 의한 견문지에 의해 전해져 그 시대 동남아시아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으나 정화의 공식기록은 다시 대항해가 착수되는 것을 염려한 한 관료에 의해 감춰지고, 그 이후 기록은 행방불명되었다.

정화의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 보다 70년이나 앞선 대 원정이자 대항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후세에 삼보태감으로 불리며,

사마천

(司马迁),

채륜

(蔡伦) 등과 함께 환관(宦官)의 영웅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또한 정화가 머물렀던 각지의 항구에서도 정화에 대한 평판이 높아 자바, 수마트라, 타이에서는 삼보묘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하며, 말라카 해협에 건국된 말라카 왕국을 인도양 항해를 위한 근거지로써 중시하고 우대하여 말라카 왕국은 정화함대의 보호 아래 성장하여 중국 함대의 항해가 단절된 뒤에도 동서교역의 중계항으로써 번영을 누렸다.

 

 

정화(郑和)의 항해 경로

 

   구분     기간 항해경로

1차

1405~1407

참파(베트남), 자바, 팔렘방, 말라카, 수마트라, 실론, 캘커타 등

2차

1407~1408

참파, 자바, 시암(Siam), 수마트라, Lambri, 캘커타, Cochin, 실론

3차

1409~1411

참파, 자바, 말라카, 수마트라, 실론, Quilon, Cochin, 캘커타, 시암, ambri, Kaya, Coimbatore, Puttanpur

4차

1413~1415

참파, 자바, 팔렘방, 말라카, 수마트라, 실론, Cochin, 캘커타, Kayal, Pahang, Kelantan, Aru, Lambri, 호르무스, 몰디브, 모가디슈, Brawa, Malindi, Aden, Muscat, Dhufar

5차

1416~1419

참파, 파항(Pahang), 자바, 말라카, 수마트라, Lambri, 실론, Sharwayn, Cochin, 캘커타, 호르무스, 몰디브, 모가디슈, Brawa, Malindi, Aden

6차

1421~1422

호르무스, 동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제국

7차

1430~1433

참파, 자바, 팔렘방, 말라카, 수마트라, 실론, 캘커타, 호르무스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과학이 발전하려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9시간전 | 중앙일보 | 다음뉴스

이끌었던 영락제가 죽으면서 해외 원정사업도 덩달아 폐기됐죠. 개방정책 폐기로 과학 발전 더뎌 당시 명은 인력·자원이 풍부해 교역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특히 북방...

 

 

 

 

[정화1] 정화, 세계사를 다시 쓴다 (한겨레21)
   
아전인수 | 2004/09/18 (토) 10:01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 명나라 제독… 3천개 나라 10만리를 누빈 대항해
 
역사적 인물들을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하는 새 칼럼.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이 이번호부터 매주 연재된다. 그 첫 주인공은 콜럼버스보다 71년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명나라 환관 출신 제독 정화!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사진/ 강재훈 기자)
 
1431년 제7차 항해에 나서 동지나해를 내려가던 명나라 제독 정화(鄭和)는 이번이 마지막 항해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다. 막 60살이 된 그는 중간 기착지에서 해상의 안전을 주관하는 도교의 여신 천비에게 그동안의 가호에 감사하는 글을 올렸다. 정화의 글을 담은 비석은 비바람과 정치적 음모로 얼룩진 600년의 세월을 이긴 채 마침내 세상을 향해 정화 함대의 숨겨진 진실을 전하기 시작했다.
 
명군의 포로가 되어 환관으로…
“우리들, 정화와 그 동료들은 야만 지역의 번국에 칙사로 가라는 황상의 천명을 받들어 지금까지 7차례에 걸쳐 항해를 수행했다. …수평선 너머 세상의 끝에 있는 나라들이, 서쪽 나라들의 서쪽 끝이, 북쪽 나라의 북쪽 끝이, 그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건 우리 항해의 목표였다. 그렇게 우리는 크고 작은 나라 3천개를 찾아갔다.”(복건성 장락현 삼봉탑사 천비궁에 있는 <천비령응지기>에서)
 
△ 정화 상상도.(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우리는 모두 10만리(약 18만5천km)가 넘는 거대한 해역을 항해했으며, 그 대양에서 하늘까지 치솟는 산더미 같은 파도를 보았다. 우리는 저 멀리 빛살 속에서 투명한 하늘색에 잠긴 야만 지역을 발견했다. …우리의 항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무자비한 파도를 쾌속으로 통과하는 별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태창현 유가항 천비궁에 있는 <통번사적기>에서) 20세기까지 명나라 제독 정화의 활동은 대체로 이렇게 기록돼 있었다.
 
정화는 운남성 출신으로 색목인이었다. 몽골을 지원해 원 초기 함양왕에 책봉된 바 있는 집안의 원래 성은 마(馬)씨다. 명나라의 운남정벌 때 12살 소년이었던 그는 명군의 포로가 돼 거세되었다고 알려진다. 1년 뒤 그는 북경의 국경 수비를 지휘하던 주원장의 넷째아들 연왕(燕王) 주체에게 환관으로 보내져 연왕부의 핵심인물로 성장했다. “신장 9척(180cm), 허리둘레 10위(150cm), 미목 수려,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며 음성은 낭랑하다.” 환관은 여성형일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선입견과 달리 그는 대장부상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해 여러 나라 말에 능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알려진다. 한편 탁월한 지도력을 갖춘 주체는 결국 건문제의 숙청 작전에 맞서 정변을 일으켜 4년 동안의 격전 끝에 승리한다. 그가 승리한 원인의 하나로 황제 진영에서 박대받은 환관들의 비밀스런 지원을 꼽기도 한다. 환관들은 황제 진영의 허술한 경비 상황을 그대로 연왕쪽에 전달해 남경 함락의 결정적 요인을 제공한 것이다. 정화는 한편으로는 황제쪽 궁정에 있는 환관들을 이용한 정보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능한 야전 지휘관으로서 주체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주체가 영락제로 등극한 직후 환관의 최고위 직위인 태감으로 승진하고, 정씨 성을 하사받는다.
 
△ 정화는 대항해를 통해 도자기 등 명나라의 특산품 시장을 아시아 · 아프리카로 확장시키는 한편 기린 등 각종 동물과 특산품을 중국으로 들여왔다.
그 뒤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저 유명한 ‘남해대원정’을 떠나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1차 항해 당시 함대는 보선 62척을 비롯해 100여척으로 이뤄졌다. 보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50m, 폭이 60m가 넘는다. 그가 지휘한 함대는 당시 유럽 모든 나라의 군함 수를 합친 것보다 큰 규모다. 영락제가 대항해를 명령한 배경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바다 건너 세상의 끝까지 가서 모든 번국들이 조공을 바치도록 하라.”
 
영국 퇴역장교 멘지스의 놀랄 만한 발표
공식적인 칙명은 그렇게 돼 있다. 세상 천하를 유교적 중화질서에 편입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외국 망명설이 민간에 퍼져 있는 건문제의 행방을 쫓으라는 명령이 비밀리에 내려졌을 수도 있다. 7차에 걸친 항해 때마다 최고지휘관인 정사는 태감 정화가 맡았다. 수백척의 함선에 3만명에 이르는 대군의 총사령관으로 환관 출신을 기용한 것에는 정화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영락제의 유학자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당시 대유학자 방효유를 비롯해 유학자 진영의 상당수는 주원장의 적손으로 학문을 사랑한 건문제를 지지하며 영락제에 대한 출사를 거부하다가 무더기로 처형됐다. 환관은 자식을 낳을 수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황제에게 더욱 충성하리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대항해는 비단·도자기·옻칠기·사향·장뇌 등 중국 특산품의 시장을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장시키는 한편, 그 지역의 특산품인 후추·용연향·진주·보석·산호·사자·기린·얼룩말·타조 등을 중국으로 들여왔다. 사람과 정보의 대규모 교류도 촉진하면서 동남아 지역에 화교들이 진출하는 주요한 계기로 작용했다고 평가받는다. 그 뒤 정화는 7차 항해에서 돌아오는 길에 1433년 인도양에서 62살의 나이로 죽는다.
 
명나라 역사는 공식적으로 정화 함대가 찾아간 지역을 수마트라, 베트남, 시암, 캄보디아, 필리핀, 실론, 방글라데시, 인도, 소말리아 모가디슈로 기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희망봉까지 돌았다는 주장도 제시된 바 있다. 세계 역사는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바다를 사실상 서양의 지배권 아래 가둬놓았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카브랄… 마젤란… 제임스 쿡… 모든 대항해시대의 영광은 이런 서양식 이름이 휩쓸어갔다. 세계 학계는 그렇게 수세기 동안 철옹성처럼 정화를, 정화로 표상되는 동양의 바다사를 사실상 배제하거나 축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철옹성이 갈라지는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002년 3월15일 영국 런던의 왕립 지리학회에서 개빈 멘지스라는 한 퇴역 해군장교가 놀랄 만한 내용을 발표하고 나선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 그는 이미 72년이나 늦어 있었다. 실제로는 명나라 제독 정화의 함대가 이미 1421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콜럼버스나 마젤란은 오히려 이 정화 함대가 만든 지도를 가지고 대항해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정화 함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조선술과 항해술로 세계일주까지 마쳤을 개연성이 대단히 높다.”
△ ‘21세기 정화논쟁’은 2002년 개빈 멘지스가 <1421: 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를 출판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했다.
멘지스의 발표는 그가 영국 해군 잠수함 장교로 17년 동안 근무하면서 항해지도와 천체관측에 정통한데다, 대항해시대의 대표적 탐험가들의 항로를 모두 실제로 항해했다는 경력 때문에 독특한 관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21세기 정화 논쟁’은 그해 11월 멘지스가 <1421: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를 출판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한다. 14년 동안 140개 국가의 현장과 문서보관소, 도서관, 과학연구소, 희귀자료 소장기관 등을 뒤지고,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는 등 숱한 노력 끝에 태어난 이 책은 곧바로 영국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했다.
멘지스가 논점의 시발로 삼은 주제는 대략 다음과 같은 5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1492년 콜럼버스가 이른바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실제로 대서양 건너편 육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항해지도가 여럿 있었다. 콜럼버스나 마젤란은 모두 이런 지도를 가지고 항해에 나섰다. 그들은 어둠 속에 잠긴 미지의 바다를 항해한 것이 결코 아니다.
 
(2)1421년 시작된 정화 함대의 제6차 항해 때 본대와 별도로 3개 분견대가 2년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1423년 여름과 가을 각각 명나라로 귀환했다. 이 가운데는 28개월 만에 단 5척만 살아서 돌아온 분견대도 있다.
 
“정화의 지도를 손에 든 콜럼버스”
(3)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남중국 등 아시아계로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미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도착 당시 곳곳에 상당수 살고 있었다. 이런 지역은 남북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태평양의 여러 섬 등 광범한 지역에 점점이 흩어져 있다. 1400년대 것으로 확인되는 선박의 잔해도 계속 보고되고 있다.
 
(4)약 1만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말이 실제로는 유럽 정복자들의 남아메리카 도착 시기에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등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에 인간에 의한 동물과 식물의 대규모 교류를 증명하는 사례들이 매우 많다. (5)콜럼버스 이전 시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조선술과 지도 제작기술, 천문관측 능력, 항해술을 갖춘 나라는 중국 명나라밖에 없다.
 
△ 중국 기념주화에 새겨진 정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수십년 전에 이미 아메리카의 존재를 확인하는 비교적 정확한 지도가 존재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사실이라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1421년 정화 함대의 3개 분견대는 외교사절들을 아프리카로 귀국시킨 뒤 과연 어디로 갔던 것일까 분견대의 ‘알려지지 않은 항해’가 과연 ‘아메리카 지도’의 존재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시아계 인종으로 보이는 인물들에 대한 DNA 측정검사는 실시했는가 정화 함대의 아메리카 발견이 사실이라면 왜 중국 역사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인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의 주장대로 중국이 유럽에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사는 다시 씌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한 아마추어 역사가(an amateur historian)의 특이한 전문성과 정열 그리고 치열한 노력이 없었다면 도저히 빛을 보기 어렵거나 영원히 묻혀버렸을지 모르는 ‘정화 함대=아메리카 발견+최초의 세계일주’ 주장은 이제 정식으로 세상의 빛 속으로 나왔다. 정화가 남긴 비문 2개에 나타난 ‘3천개의 나라’와 ‘10만리’(18만5천km)는 중국적 과장이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우리도 멘지스의 안내로 모든 지적 능력을 총동원해 1421년 정화 함대가 과연 무슨 일을 해냈는지 그 대항해를 되살려내는 ‘21세기의 오디세이’를 떠나보자.
 
…정화 함대의 항해는 점점 더 모험의 강도를 높여갔다. 제2차 항해 때는 전진기지 말라카에서 본대와 분견대가 분리되더니 제3차 항해 때는 훨씬 더 서쪽인 인도 서안의 캘리컷이 전진기지가 됐다. 제4차 항해 때는 캘리컷에서 함대가 분리돼 각각 페르시아만, 아프리카로 향했다. 제5차 항해 때는 세계 각국의 대표와 사절을 북경으로 데려왔다.
 
…1421년 제6차 항해… 항해의 목적은 제5차 항해 때 북경으로 경호해온 각국 대표와 사절을 반대로 자기네 나라로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함대는 모두 107척으로 이뤄졌다. 함대는 충분히 보급품을 채운 뒤 캘리컷으로 항해했다. 캘리컷에서 총사령관 정화는 본대를 이끌고 남지나해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 주문, 주만, 홍보, 양진 등 모두 환관이기도 한 분견대 지휘관들은 전부 정화와 함께 오랫동안 대항해에 참여해오며 함대 지휘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 각 분견대에는 화약을 이용한 무력을 갖춘 군대가 편재돼 있었다.
 
‘21세기 오디세이’로 떠나는 길
함대는 주문, 주만, 홍보의 3개 분견대로 나뉜 채 함께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로 갔다. 외교사절들을 모두 목적지까지 데려간 뒤 함대는 아프리카 남단까지 내려가 희망봉을 돌았다. 주문, 주만, 홍보의 분견대는 벵구엘라 해류를 타고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올라가 케이프 베르데 군도까지 갔다. 아직 사람이 살지 않고 있는 케이프 베르데 군도에서 식수와 식량을 조달한 그들은 이번에는 모든 바다에 떠 있는 것들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어내는 거대한 적도 해류를 타고 계속 항해해 마침내 카리브해에 도달했다.
 
그러나 카리브해에 진입하면서 세 분견대는 이 해역에서 적도 해류가 각각 남북으로 갈라지는 거대한 자연 현상에 따라 주문 분견대와 주만-홍보 분견대로 갈라지게 된다. (상상해보라. 거의 항공모함 크기에 육박하는 30여척의 보선과 그를 따르는 50여척의 크고 작은 중간급 보선과 수송선들이 해류의 분리 현상에 따라 저마다 돛들을 펄럭이며 각각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향해 두 패로 갈라지는 장관을! 이 장면은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 틀림없다.) <다음호에 계속>
 
 
 

[연재에 들어가며] 우리는 정녕 바다를 잊었는가
 
바다가 좋았다. 산에 올라 자유로워 한강을 내려다본다. 눈에 들어오는 남녘과 북녘을 둘러보다가 저 멀리 구름 아래 펼쳐져 있을 바다를 생각한다. ‘위대한 정복자’라는 엉터리 부제가 붙은 <마스터 앤드 커맨더>라는 괜찮은 바다영화를 보았다. 1800년대 초반 영국인들은 열예닐곱 우리 아들 또래 청소년들을 사관생도라는 이름으로 군함에 태운 채 대서양을, 태평양을 휘젓고 있었다. 마취조차 없이 팔다리를 잘라내야 하고, 전사한 어린 사관생도를 바다에 수장하는 상황에서도 ‘의무’(Duty)라는 것을 가르쳤다. ‘디지털 사기열전’ 첫 번째 인물로 ‘정화’를 쓰며 나는 조선의 위정자들이 첫 세계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조선을 키우라는 엉터리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기열전>이 좋았다. 난세 속에서도 이상과 대의를 처절하게 추구하는 2000년 전의 인간들이 진실로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기록이라는 무기를 통해 진시황 분서갱유의 참극을 수습하고, 한무제의 독단을 극복한 사마천이 참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처럼 조국이 안타까운 적은 별로 없다. 지난날 우리는 어려웠어도 진실을, 정의를, 선함을 함께 호흡하고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이 땅엔 수두룩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저 기자생활을 조금 오래 한 그렇고 그런 정도의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이 땅, 이 조국은 우리 아이들이 끝내 살아나가야 공동체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책을 펼치고 사이트를 뒤지고 자판을 두드리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사기열전’은 지금까지 존재한 세계의 역사인물을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하는 시도이다. 대상은 21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조명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예측하는 방식으로 골라볼 참이다. 디지털 시대, 온라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제대로 살려 오프라인 지면을 한번 그럴듯하게 꾸며보고 싶다는 작은 욕심인 셈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 땅의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이 시리즈를 보고 뭔가 얻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것이다.
 
 

 

세계지도, 정화 지도 베껴 짜깁기?
 
멘지스의 주장대로라면 아메리카의 존재를 담은 정화 함대의 오리지널 지도가 막상 중국에서는 버림받고 유럽에서는 채용된 결과 세계사의 서양화가 결정됐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중국이 영국보다 수세기 앞서 미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다. 따라서 정화 함대의 지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실제로 멘지스가 정화 함대의 지도를 베껴 짜깁기한 것으로 분석하는 주요 초기 세계지도는 현재 1천만달러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미 대항해시대가 400~500년씩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대한 지도는 당시 흔히 베끼거나 짜깁기 되곤 했다. 우리나라의 이회가 부분적으로 참여했다는 세계지도 <역대제왕혼일강리도>의 제작과정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1402년 조선 태종 때 이회는 조선전도인 <팔도도>를 만들었다. 그해 조정에서 3년 전 명나라로부터 도입한 원나라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합쳐 하나로 만들도록 했다. 두 지도를 합치되 서로 틀리는 곳은 조화시키고 자세하게 더 조사해 교정하라는 것이다. 이 합쳐진 지도에다 다시 우리나라 지도를 특별하게 크게 넓히도록 했다. 여기에 1401년 일본에서 가져온 일본 전도인 <늑성신도>를 덧붙여 만든 것이 바로 <역대제왕혼일강리도>이다. 이회가 <강리도>를 종합하는 기간이 불과 3개월 안팎인 점을 미뤄볼 때 <강리도>의 조선 부분에는 <팔도도>를 그대로 옮겨 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방동인 지음 <한국의 지도>에서) 초기 세계지도도 이런 식의 베끼기나 짜깁기가 일반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엄청난 함대의 규모!

△ 정화 함대와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동원된 산타마리아호와의 비교도. 정화 함대가 2500t 정도로 추정되는 반면 산타마리아호는 200~250t에 지나지 않았다.
 
정화 함대는 가장 큰 함선인 보선(서양취보선·西洋取寶船) 60여척을 중심으로 100~200척 정도로 이뤄져 있다. “1차 항해에 참가한 보선 63척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44장 4척에, 폭이 18장이다.” 이 기록에 따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길이 약 151.8m, 폭 61.6m에 이른다. 대형 돛이 9개다. 영국의 밀스는 적재 중량을 ‘약 2500t, 배수량은 약 3100t’으로 추정했다. 약 8천t까지 보는 설도 있다. 이에 비해 1492년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동원된 선박은 기함 산타마리아호가 200~250t에 지나지 않고 함선 수도 3척, 승무원은 총 120명 수준이다. 15세기 초 중국에 이렇게 큰 선박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은 1957년 남경 부근의 명나라 때 조선소 유적지로 보이는 곳에서 길이 11m의 거대한 목재 타봉이 발견돼 단번에 풀리게 된다.
 
함대의 총원은 보통 약 2만7천명 수준이다. 큰 보선에는 1천명 가까이까지 탑승한 것으로 추측된다. 의관과 의사들도 약 180명씩 됐다. 놀랍게도 수백명에 이르는 무희와 가수 등 여성도 동승하고 있었다. 외국의 군주나 외교사절 등을 함선에 초청하거나 명나라까지 태우고 이동하는 것 등에 대비했다고 한다. 식수선·양곡선·마선을 별도로 운용했고, 도자기·동전·옻칠기·비단 등 조공 무역품도 싣고 이동했다. 2만7천명 규모의 인원이 먹는 식량은 하루치가 70t, 음료수 역시 70t 규모가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때문에 파라핀 왁스를 이용해 바닷물을 증류하는 기술도 채용했다고 한다.
 
함대는 북반구에서는 북극성(Polaris) 등을, 남반구에서는 남십자성(Southeern Cross)과 용골자리의 으뜸별인 카노푸스(Canopus)를 기준별로 삼아 정확한 항로를 찾아냈다고 멘지스는 분석한다. 이런 보급 능력과 항해술로 함대는 어떤 기상조건에서도 하루 24시간씩, 한번에 몇달씩 어떤 대양이라도 운항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화2] “정화 함대의 기록을 불태워라”

 

   
아전인수 | 2004/09/18 (토) 10:09  
 

1천년 동안의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대사건…
왜 그들의 아메리카 경영은 실패했나
 
1421년 여름 카리브해에서 갈라진 주문의 분견대는 북아메리카로 향했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배 9척을 잃는다. 비미니 제도에서 발견된 ‘비미니 로드’라는 석조물은 이때 위기 상황에서 배를 해안에 상륙시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주문 함대는 쿠바를 거쳐 오늘날 미국령인 로드아일랜드에 닿는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온 콜럼버스와 베라차노 같은 초기 항해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이 명나라 선원들의 후손을 만나게 된다. 함대는 캐나다 해안을 따라 북으로 계속 올라갔다. 정화 함대에는 황제의 이런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세상 동서남북의 끝을 찾아서 확인하라. 모든 항해의 기준별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내라.”
 
놀라운 항해술과 지도제작 능력
그린란드를 돌아간 함대는 적어도 북극점 250마일(약 400km)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북극점까지 갔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탐험가 난센이 부근에서 발견한 이상한 철제 리벳들의 성분을 정확히 분석하면 이 주장이 맞는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주문 함대는 다시 시베리아 북부 해안을 타고 동쪽으로 항해한다. 1507년 제滂?‘발트세뮐러 세계지도’에 놀랍게도 시베리아 북부 해안이 백해로부터 베링해협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런 항해술과 지도제작 능력을 갖춘 것은 정화 함대밖에 없다. 그들은 달의 기울기로 정확한 경도를 결정할 수 있었고, 당시 이미 600년 이상 되는 대양 항해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 1507년 제작된 ‘발트세뮐러 세계지도’. 정화 함대의 궤적을 추정케 해준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북부 해안을 답사한 뒤 그 지도를 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0여년 뒤의 일이다. (멘지스는 오늘날에도 무동력선은 아프리카 서안의 케이프 베르데에서 적도 해류를 타면 그대로 카리브해로 들어가고, 멕시코 만류를 따라 미국 동부 해안을 올라간 다음 다시 해류를 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북대서양 중앙부에 있는 아조레스 제도를 거쳐 다시 케이프 베르데로 되돌아온다고 밝히고 있다. 콜럼버스도 대서양의 해류 등의 영향으로 바로 이 항로로 여행했다.) 주문 함대는 그렇게 베링해협을 통과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남쪽 항로로 들어간 주만 함대와 홍보 함대는 브라질쪽으로 내려간다. 그들은 오리노코강 삼각주 지역에 정박했다가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군도로 갔다. 그 뒤 함대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파타고니아에 상륙해 동식물을 채집하고 연구하며 6개월을 보낸다. 이런 추정은 1430년 명나라에서 출판된 <서양번국 풍물화집>(The Illustrated Record of Strange Countries)에 파타고니아 특산 동물로 지금은 멸종한 ‘밀로돈’이 그림과 함께 묘사돼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 화집에는 “중국에서 서쪽으로 2년을 항해한 곳에서 발견했다”고 적혀 있다.
 
밀로돈은 키 3m에 무게 200kg이나 나가는 동물로 1513년 제작된 <피리 레이스 세계지도>에도 묘사돼 있다. (<피리 레이스 지도>는 멘지스가 정화 함대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초기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는 1428년 제작된 세계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남아메리카 부분’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1428년 지도는 포르투갈에서 사라졌는데, 콜럼버스의 항해에 참가했던 한 선원이 이 지도의 ‘남아메리카 부분’을 가지고 있다가 오스만 터키에 포로로 잡히면서 다시 등장한다. 오스만 터키의 제독 피리 레이스가 그 중요성을 알고 새 세계지도에 집어넣도록 지시한 것이다. 따라서 1492년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를 그린 문제의 1428년 세계지도를 가지고 항해에 나섰다는 추론은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멘지스는 1428년 지도의 최초 원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제작 능력과 항해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정화 함대의 지도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 1513년 제작된 ‘피리 레이스 세계지도’.
남중국 원산인 아시아계 닭이 남아메리카 곳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다는 사실도 정화 함대와 남아메리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거꾸로 남아메리카 원산인 옥수수도 이때 중국과 필리핀 등에 전래됐다.
 
아메리카에 첫 식민지를 건설하다
주만과 홍보의 함대는 마젤란해협 부근에서 서로 헤어진다. 주만의 함대는 태평양으로 들어가 차가운 훔볼트 해류를 타고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홍보의 함대는 남반구 항해에서 기준별이 된 카노푸스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남극해의 남셰틀랜드 제도로 내려갔다.
 
주만 함대는 페루 해역에서 남적도 해류를 타고 다시 서쪽으로 밀려갔다. 그들은 투오모토 군도와 피지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상륙했다. 뉴캐슬 바로 북쪽 해안에 닻을 내린 그들은 돌로 수비대 시설을 세우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어느 곳보다 풍부한 선박 잔해와 중국 특산품이 발견된다. 금을 채굴한 흔적도 남아 있다. 주만 함대는 그 뒤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스파이스 제도까지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중국으로 가지 않고 다시 해류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되돌아갔다.
 
미국의 서부 해안에 도달한 함대는 해안을 따라 남아메리카까지 내려가며 곳곳에 정박했다. 새클라멘토에서는 정화 함대의 선박 잔해의 흔적, 벼 등이 확인됐고,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다는 신빙성 있는 기록도 남아 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도 정화 함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닻이 발견됐다. 무엇보다 멕시코 서해안 마초아칸에서 지금도 제작되는 옻칠기·직물염색 제품 등은 정화 함대와 이곳 원주민들이 교역을 했으며, 중국인들이 장기간 거주하며 이 기술들을 전수해주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베네수엘라 인디언 가운데서는 중국인 혈통을 증명하는 DNA가 확인되고 있으며, 페루 인디언 가운데서는 중국어를 말하는 인디언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만 함대가 아메리카에 상륙해 결국 첫 식민지까지 건설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주만 함대는 다시 적도 해류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1423년 10월 중국으로 귀환한다. 주만의 함대 가운데 중국에 도착한 것은 총 25척 가운데 단 한척이다.
 
△ 별호가 ‘삼보’였던 정화는 영문으로 ‘Sambo’ 또는 ‘Sin Bao’로 서양에 전해졌다. 그런데 ‘Sin Bao’가 아랍권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Sin Bad’로 오기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신밧드의 모험’은 원래 ‘정화의 모험’인 셈이다.
정화 함대의 강력한 후원자인 영락제는 1424?타타르족을 정벌하러 갔다가 병으로 죽었다. 손자인 선덕제가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의도로 실시한 1430년의 제7차 대항해를 끝으로 명나라는 바다를 닫아버리기 시작했다. 환관과 라이벌 관계였던 한림학사들은 무능한 황제들을 부추겨 환관들이 주도하던 대항해 정책을 무너뜨렸다. 남경의 조선창을 폐쇄하라는 칙령이 포고됐다. 대양 항해 선박을 더 이상 만들지 말라는 칙령에 저항하던 사람들은 처형됐다. 중국의 찬란한 대항해 시대는 유학자 세력의 눈먼 이기심에 짓밟혀갔다. 그 마지막 장면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대양 강대국에서 내륙국가로의 추락
“1477년 한 야심적인 환관이 정화의 대항해에 대한 기록을 내줄 것을 병부에 요구했다. 병부의 부책임자였던 한림학사 유대하는 문서보관소에서 정화 함대가 만든 지도와 기록 등 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압수한 뒤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병부의 각신(장관)에게는 ‘분실됐다’고 보고한다.
‘어떻게 문서보관소의 공식 문서들이 분실됐다는 말이오’
‘삼보(정화의 별호)의 서양 원정은 수만금과 수만의 양곡을 낭비했을 뿐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멋지고 비싼 물품을 가져온들 조정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설사 그 옛날 문서들이 아직 보관돼 있더라도 이런 일이 재발되는 것을 뿌리째 뽑기 위해선 모조리 없애버려야 합니다.’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아챈 각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역시 공은 대단하오. 다음 이 자리는 확실히 당신 것이야!’”(루이즈 레바티즈 <중국이 바다를 지배하던 시대>(When China Ruled the Sea·국내 미번역)에서)
 
과연 정화 함대가 아메리카까지 갔는지 중국 역사나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아가 이 분서 사건를 계기로 중국은 해양강국의 자리를 급속히 잃기 시작한다. 15세기가 되기도 전에 중국에서는 대형 보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보선들은 조선소에서 썩고, 화약과 총포의 연구도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아메리카에 남은 중국인과 모국의 연결선은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중국은 이제 대형 보선으로 대양을 누비던 강대국에서 중소형 평저선 따위로 대운하나 오가는 내륙국가로 전락했다. 분서 사건 뒤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해안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범하는 왜구들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국은 그 뒤 거의 600년 동안 강대국의 자리를 되찾을 수 없었다. 정화 함대의 기록을 불태운 것은 바로 지난 1000년 동안의 중국 역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
 
 
‘1421년 항해’가 재현된다

현재 중국에서는 정화 함대의 대형 보선을 복원해 ‘1421년 항해’를 그대로 재현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과연 정화 함대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세계일주까지 할 수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해보자는 시도인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예비역 해군 장성과 해양학자 등이 추진하고 있으며 스폰서를 모으고 있는 상태이다. 멘지스도 지원 의사를 밝힌다. 보선을 복원한 뒤 1421년의 추정 항로를 따라 항해하며, 선원들은 당시 선원들이 먹던 방식으로 먹는 등 당시와 똑같은 조건을 재현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이전까지는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최종 목표다.
 
중국 지도부는 ‘아메리카 발견설’에 대해 현재 외형적으로는 반응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화 함대에 대해 그들은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명나라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있다고 분석하는 의견도 나온다. 영국의 우주과학자 마이클 마틴 스미스는 장쩌민 주석이 1996년 당대회 회기 중인데도 매우 이례적으로 국제우주비행사연맹(IAF) 총회에 참석해 발표한 개회사에서 그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우주정거장은 15년 이내에 가능해질 것입니다. …달과 화성에도 기지를 건설할 것입니다. …중국 과학원 회원인 왕시지 동지는 우주야말로 육지, 바다, 하늘에 이어 인간이 자신을 적응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4번째 영역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는 아폴로호의 달 착륙 50주년이자 정화 함대 항해 600주년인 2019년 무렵 우리가 달에 갔다가 귀환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의 복리와 장기적 진보를 위해 피도 흘리지 않고, 침략도 하지 않고 새 영역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세계 속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없습니다. 우주로 나아감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지구상에서 가장 선진되고 진취적인 문명으로 부상할 수 있습니다. 중국 만세!” ‘선저우계획’(神舟計劃), 제2의 정화 대원정은 이미 시작됐다.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
 
정화의 대항해가 계속됐다면…

만일 정화 함대의 대항해가 계속됐다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1. 아메리카=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스페인의 코르테즈 정복대는 1521년 당시 병력 1600명으로 15문 정도의 대포와 초기 머스킷총, 석궁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정도 화력으로 아스텍군 7만~수십만명을 격파해 멕시코 일대의 식민지화를 결정지었다. 정화 함대는 그 100년 전인데도 대포와 발사무기 등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이 먼저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했거나 이런 화력을 연합군으로서 아스텍이나 잉카제국에 지원했다면 스페인 정복대의 아메리카 점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 정화 함대의 중심선박인 보선 상상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에 실린 것이다.
중국-스페인 해전에서도 중국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 정화 함대는 아메리카로 가는 태평양 항로와 대서양 항로를 확보한 채 100년 이상 아메리카를 경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와의 조공무역을 가동했다면 아메리카 문명권의 엄청난 금은이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경제의 세계 영향력 극대화와 중국 군사력 및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달로 이어졌을 것이다.
 
2. 유럽=정화 함대가 유럽을 먼저 공격하거나 유럽을 조공 체제로 편입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정화 함대의 무장력은 유럽 전체의 해군력보다 우월했다. 그러나 조공 체제 편입 이상의 강도 높은 지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카와 달리 유럽은 오랜 전쟁 경험이 광범하게 축적돼 있고 당시 군사력의 발달도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국 입장에서는 보급선이 지나치게 긴 점, 중간지대에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존재한다는 점도 치명적 약점이 된다.
 
3. 제국주의=세계는 유럽식의 약탈 제국주의와 전혀 다른 길을 경험했을 것이다. 중국이 아메리카 등을 지배하는 형태는 조공무역에 편입시키는 중화질서에의 복속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영락제는 “번국의 백성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라”고 명령했다. 주만 함대는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과 교역하고 옻칠기 기술 등을 전수하는 과정에서도 대단히 평화적이고 호혜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고 멘지스는 분석한다. 어쨌든 오늘날 세계의 패권은 미국 아닌 중국이, 세계어의 지위도 영어 아닌 중국어가 누렸을 것이다.
 
 
 

[바다의 실크로드] “세계의 모든 깃발을 휘날려라”

기사입력 2004-12-03 18:12

[한겨레]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역사를 바꾼 길4]

기원전 3천년 전부터 개척된 바다의 실크로드… 종교전쟁 위기 직면한 세계 최대의 원유 수송로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운송은 문명이다(Transportation is civilization).”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1980년 중동의 오만 정부는 고대 바다의 실크로드를 재현하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 옛날 아랍인들이 사용하던 범선과 똑같은 배를 제작해 걸프해의 주요 출항지였던 소하르(Suhar)를 출발해 중국의 광저우(광주)까지 항해하는 것이다. 165일 만에 완성된 27m 길이의 옛 범선은 ‘소하르’라고 명명됐다. 10세기 무렵 아랍권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이 출항지를 기리기 위해서다. 소하르는 1981년 1월 페르시아만의 항구를 떠나 7월11일 광저우에 도착했다. 6개월 만에 9656km를 항해한 것이다. 놀랍게도 소하르는 옛 기록과 거의 일치한 항해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대 아랍인들의 항해술과 바다에 대한 정보가 그대로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연안을 따라 곳곳에 무역기지를 건설하다

동양과 서양을 이으려는 인류의 시도는 처음 육지를 통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실크로드다. 그러나 바다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위험성이 있음에도 (1) 물동량을 극대화할 수 있고 (2) 화물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측면 등으로 인해 훨씬 더 매력적인 길로 부상한다. 문명의 길, 바다의 실크로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고도 광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께에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바빌로니아와 인도가 바다를 통해 직접 교류한 흔적이 있다고 밝힌다. 무려 5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따라 내려가 오늘날의 소말리아 지역인 푼트에 이르는 항로가 개척된 것도 기원전 2500~30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인들은 육로보다 이 항로가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곳곳에 무역기지와 보급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이집트의 배들은 나일강의 동쪽 지류를 따라 비터호를 경유, 홍해로 빠져나온 뒤 푼트까지 가서 금, 상아, 흑단, 가구용 목재, 향, 계피, 가죽 따위를 싣고 다시 나일강의 항구로 돌아왔다. 그 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이집트에 건설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이집트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상인들이 홍해의 항구로부터 아라비아 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한다.

로마제국의 등장은 이런 고대 인도 항로의 비약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특히 기원전 1세기 중엽 로마 항해사 히팔루스가 아라비아해의 계절풍을 이용해 안정적이고 주기적으로 인도를 항해하는 방식을 개발해 동서 항로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상인들은 7월 이집트를 출발해 계절풍을 타고 9월 말 인도의 항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시 11월 말 인도에서 귀로에 올라 2월이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기 160년 무렵까지는 이 동방 항로가 중국까지 이어진다. 당시 비단은 아직 주로 육로의 실크로드를 통해 로마로 들어갔지만 향수, 향료, 후추, 보석, 약, 진주, 상아, 면화, 무명, 가죽, 티크목재 등 인도산 물품들은 바닷길을 통해 이집트나 이라크 지역으로 간 뒤 다시 로마로 운송됐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는 시도도 이어졌다. 이미 서기 1세기 무렵 중국의 내륙으로부터 바다의 실크로드를 거쳐 이집트와 중동 지역으로 나아가는 항로가 활성화됐다. 첫 번째 길은 중국의 낙양으로부터 사천성 성도로 나아간 뒤 양자강을 타고 운남으로 가서 다시 버마의 이라와디강을 거쳐 인도까지 진출하는 길이다. 인도나 실론에서 다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홍해로 진입해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두 번째 길은 중국의 광동 지역에서 베트남의 하노이를 거쳐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경유해 말라카해협을 돌파한 뒤 인도로 가는 길이다. 인도에서는 다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페르시아만으로 진입해 페르시아 지역으로 가거나 유프라테스강을 타고 올라가 바그다드까지 간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나오는 “대진국왕(大秦國王·로마황제) 안돈(安敦·안토니우스)이 바친 상아”라는 것이 바로 이런 항로를 거쳐 중국까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 중국의 대로마 수출품이던 비단을 비롯해 가죽, 계피, 대황 등이 이 길을 통해 이동했다. 로마로부터는 유리, 모직물, 아마포, 진주, 홍해산 산호, 발트해의 호박, 상아, 꼬뿔소 뿔, 대모, 석면, 향유, 약품 등이 중국에 밀려들어왔다.

도자기·향신료, 전적으로 바닷길에 의존

바다의 실크로드는 일찍부터 도자기와 향신료의 교역로이기도 하다. 운송 과정에서 파손될 위험이 높고 중량도 무거운 도자기를 나르는 데 배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인도와 동남아 일대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를 아랍과 유럽 지역으로 대대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배와 항구가 발달하게 된다. 육상교통의 위험과 복잡성 때문에 열대와 아열대산 향신료는 거의 전적으로 바닷길에 의존해야 했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도자기의 길’이자 ‘향신료의 길’이었던 것이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또한 ‘종교의 길’ ‘문명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해 불교의 많은 고승과 순례자들이 오가면서 인류 정신문명의 지평을 넓혔다. 5세기 초 중국 동진의 승려 법현은 육상의 실크로드로 인도에 들어갔다가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돌아와 <불국기>를 남겼다. 서기 671년에는 당나라의 승려 의정이 뱃길로 인도에 들어간 뒤 25년 만에 역시 뱃길로 돌아와 <남해기귀내전>(南海寄歸內傳)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등 여행기 2권을 남겼다. 이슬람교도 이 바닷길을 이용해 전파됐다. 처음 중국까지 진출한 아랍 상인들은 경유지인 동남아시아 일대에 포교를 하기 시작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시대인 13세기 말 오늘날 인도네시아 지역인 수마트라 북부가 이미 이슬람화됐다. 1세기 뒤 말레이반도 서안의 말라카왕국도 이슬람화됐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말에 이르는 100여년 동안 말레이반도의 파타니왕국과 케다왕국, 보르네오 북부의 브루나이왕국, 필리핀 남부의 수르왕국과 민다나오왕국, 자바 서부의 반텐왕국,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왕국 등이 잇따라 이슬람화한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무대로 한 동양의 활약이 15세기 중엽 명나라 제독 정화의 7차례에 걸친 대항해로 절정을 이룬 뒤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 등 유럽국가의 동양 진출이 이어진다. 동서양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고, 다시 1519년부터 1522년까지 마젤란의 스페인함대가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이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해 곳곳에 두 나라의 중계기지와 식민지가 생겨났다. 포르투갈은 희망봉과 페르시아만의 아시아 서부지역, 인도, 티모르, 중국, 일본 등지로 급속도로 세력을 팽창해나갔다. 스페인은 스페인대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중국 진출을 시도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아시아를 먹다

그러나 서양 세력의 아시아 진출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세력은 영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신항로가 열린 지 80여년이 지난 1586년에도 100t 이상의 배는 스페인 104척, 포르투갈 9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1582년 잉글랜드의 각 항구에는 177척이 등록돼 있었다. 또 스페인은 왕가나 국민이나 모두 라틴아메리카의 금광이나 은광에서 쏟아져나오는, 거저 얻는 성격의 부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잉글랜드쪽은 강력한 상인의식으로 무장한 채 장기적인 이익의 창출을 노렸다. 결국 잉글랜드는 강력한 해군력과 재정력을 바탕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네덜란드 역시 (1) 해양국가로 발전하는 데 유리한 지리적 이점 (2) 현명한 상술 (3) 교묘한 금융기법 (4) 과도할 정도의 욕심에 바탕한 도전의식 등에 힘입어 아시아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아시아 진출에 박차를 가해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제국주의 시대 바다의 실크로드는 유럽국가에는 부와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아시아 국가에는 고통과 분노의 원천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 바다의 실크로드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계적인 교역로로서 과거에 누렸던 영광을 회복하는 한편 세계적인 원유 수송로라는 새로운 전략적 중요성이 더해진 것이다.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동아시아의 막대한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중동산 원유가 이동하는 에너지의 대동맥이 됐기 때문이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현재 세계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원유와 물동량이 통과하는 항로다. 특히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침략에 따라 전세계적으로 종교전쟁이 심화·확대되는 양상을 보여 바다의 실크로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폭발의 위기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총 6천여km에 이르는 구간 가운데 가장 좁은 호르무즈해협과 말라카해협이 쉽사리 테러리즘의 위협 아래 놓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이슬람 정권의 등장 등 새로운 변수에 따라 해협 봉쇄라는 극단적인 상황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과연 바다의 실크로드는 이런 종교전쟁의 위기를 벗어나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라는 과거의 찬사를 누릴 수 있을까?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1816~1892)은 자신이 바라는 바다의 꿈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 바다여, 세계 모든 나라의 깃발을 나부껴라!”



흑산열도에서 양자강까지!


바다의 실크로드를 여행한 우리 민족 인물들의 첫 기록은 7세기 말~8세기 초 배를 이용해 천축(인도)을 방문한 당나라의 승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이다. 이 책에는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현진’(玄進), ‘현태’(玄太), ‘현각’(玄恪), ‘혜륜’(慧輪), ‘현유’(玄遊), ‘혜업’(慧業) 등 신라와 고구려의 구법승 8명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당시 불법의 진리를 찾아 목숨을 걸고 천축으로 가 수도하던 승려들이다. 이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들은 중국의 광동에서 배편으로 교주(베트남의 하노이)를 거쳐 수마트라에 갔고, 다시 수마트라 동남방인 팔렘방에서 배편으로 그 서방인 파로사국에 이르러 불행히도 병사했다.” 이와 달리 고구려의 현유는 스승인 승철 선사를 따라 동남아시아 항로를 이용해 천축의 불교 성지를 두루 순례하고 실론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그 직후 신라의 승려 혜초가 바다의 실크로드로 천축에 들어가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육로로 파미르를 넘어 당나라로 돌아온다. 그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이다.

그 뒤 생활고 등으로 신라를 떠나온 사람들이 중국 양자강 유역의 국제항 양주 등지에 밀집해서 살면서 ‘신라방’이 형성된다. 양주의 경우 당나라 당시 바다의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역으로서 외국 상인이 빈번하게 오가는 대항구인데다, 계절풍을 타면 우리나라의 흑산열도까지 사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신라인의 진출이 활발한 곳이었다. 한편 장보고의 청해무역선단의 활동 등으로 신라의 청해진, 울산 등도 바다의 실크로드에 본격적으로 편입돼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국제도시로 변모한다.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주장은 이런 배경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무렵 아랍과 페르시아 학자 17명이 쓴 20여권의 책에 신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국제적인 항구도시의 전통은 왕족까지 나서 해양활동을 장려한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나, 쇄국주의 기조를 유지한 조선조부터 그 맥이 끊긴다.

 

 

 

 

 함규진의 정화(1371-1433)

 

 

1405.7 사상 초유의 해외 대원정을 시작하다

 
“일찍이 크고 작은 30여 나라를 찾아, 십만 리의 바닷길을 다녔네. 망망대해에서 산처럼 큰 파도가 하늘을 엎을 듯이 몰아쳤다네. 보이느니 안개 자욱하게 덮인 바다 틈틈이 낯선 이국의 풍경이라네. 돛을 높이 올려 밤낮으로 바다를 달리니, 파도가 뱃전을 때리고, 그 파도를 우리 배가 뛰어넘었네.” (정화, <천비지신령응기(天妃之神靈應記)>에서)
 

수려한 외모와 온화한 품성, 병법과 지략에 밝고 학술에 통달한 '완벽한 인간'

정화. 본래 이름은 마화(馬和)다. 아니, 그나마 다른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리던 중동 계통의 피를 받은 이슬람교도로, 그의 아버지는 메카 순례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마합지였다고 하는데, ‘합지’(哈只)란 메카 순례를 다녀온 이슬람교도에게 붙이는 존칭, ‘하지’인 듯하니, ‘마(馬)’란 본래 ‘마흐무드’ 또는 ‘알 마그레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정화의 조상이 원나라 때 함양왕에 봉해진 최고위급 색목인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정화는 어린 시절에 고향을 떠났고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겨우 기억할 정도라고 했으므로 그다지 믿기 힘든 기록이다.

 

정화가 고향인 운남성 곤명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바로 나중에 영락제가 되어 그에게 대원정을 지시하는 연왕 주체(朱棣)가 원나라의 세력이 남아 있던 곤명을 정벌했기 때문이다. 곤명성이 함락되자 주체는 성인 남성을 모두 학살해 버리고, 어린 소년들은 거세시켰다. 병졸이나 환관으로 쓰기 위해서였는데, 열두 살이던 정화도 이 때 거세된다. 자신의 가족과 남성을 빼앗아간 주체에게 원한을 품을 만도 하련만, 정화는 오히려 그에게 충성했다. 그래서 주체가 조카인 건문제와의 권력 투쟁을 거쳐 황제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로를 세우고, 덕분에 환관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내관태감이 되어 정(鄭)이라는 성도 하사 받았다.  

나중에 미화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화의 용모와 풍채는 흔히 환관에게서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키가 9척에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위엄 있게 걷는 모습은 호랑이 같고, 목소리는 크고 우렁찼다고 한다. 또 병법과 지략에 밝고, 고금의 학술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사람됨이 온화하고 겸손하여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이었다는 것인데, 이미 ‘완벽한 남자’일 수는 없었던 그에 대한 그런 묘사가 얼마나 진실일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영락제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야심적인 사업을 그에게 맡긴 것을 보면, 그리고 그것을 기대 이상으로 훌륭히 수행한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으리라.

  

상 초유의 대원정

 
그 국력과 인구에 비추어 보면, 전근대 중국은 다른 왕국들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영토에 욕심을 낸 경우가 많지 않다. 원정을 하더라도 북방 초원 지대, 서역, 베트남, 그리고 한반도 정도였다. 그러나 영락제는 다섯 차례나 직접 몽골 원정을 했을 뿐 아니라 1405년에는 정화에게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동, 아프리카까지 대원정을 하도록 지시한다. 실로 중국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물결을 가르고 나아가는 정화의 함대(왼쪽), 말레이시아의 사당에 있는 정화의 석상

 

 

그래서 그것이 정말 ‘원정’의 성격이었는지 묻는 일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분분하다. 황궁 함락 당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시체를 찾지 못했고, 지금은 ‘바다 멀리’ 달아나서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소문이 나돈 건문제를 찾기 위한 수색이라는 말이 있었다. 뭐든 화려하고 진기한 것을 좋아했던 영락제가 일반적인 진상품에 싫증이 나서, 머나먼 곳에서 진귀한 물건을 가져오도록 한 극히 개인적인 동기가 위주였다는 해석도 있다(그래서인지 원정대의 함선들은 ‘보물배(寶船)’라고 불렸다). 하지만 동원된 선박이 최대 3500척, 인원은 3만 명에 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동기에서 벌인 사업으로는 규모가 너무 크다. 그래서 정치적 동기, 또는 군사적 동기가 거론된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여러 나라와 적극적으로 무역을 해서 몽골과의 전쟁 등으로 피폐된 재정을 보충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영락제는 외국과의 교역을 억제했던 아버지, 태조 홍무제와 달리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한 교역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대원정의 동기를 그것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머나먼 나라에 넘치도록 있다는 황금이나 당시 유럽에서 황금이나 다름없는 가치가 있었던 향료, 또는 노예를 노리고 모험을 떠난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과는 달리 ‘보물배’는 세계 각지의 진귀한 물건을 실어왔을 뿐 당장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은 물자를 갖고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보물배가 싣고 온 향료 등을 서양에 판매하면 높은 수익을 얻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이중 무역이 행해졌다는 기록은 없다. 그에 비해 대규모의 원정단에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났다.

 

그래서 명나라의 영향력에 도전하고 있던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고, 중화와 변방이라는 전통적인 국제관계를 과거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이룩하려던 것이라는 해석, 즉 정치적 동기를 주로 보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인지 정화의 선단은 수십 년 후 ‘지리상의 대발견’에 나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단과는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가 정반대였다. 서양인들은 원주민을 분열시켜 자기들끼리 싸우게 했고, 자신들을 환대하는 사람들을 배반하고 학살했다. 정화의 함대는 반대로 서로 갈라져 싸우는 세력들을 중재하고 화해시켰으며, 적대 세력은 가만 두지 않고 격파했지만 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선물을 주었다. 원주민의 땅을 빼앗거나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고, 원주민을 노예로 잡아가지도 않았다. 중국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정복과 착취가 아니라 명나라의 위력을 과시하고 그 형식적인 지배권을 인정받는 게 목표였던 것이다.

  

대원정, 그 영광과 쇠락

만약 시대의 흐름이 조금 달라져서 중국과 서양의 함대가 충돌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부분 약 4백년 뒤 아편 전쟁 때와는 정반대의 양상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중국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했으리라는 것이다. 중국 함대는 서양 함대보다 인원이나 배의 수에서 훨씬 앞섰고, 배의 크기만 보더라도 콜럼버스의 캐러벨선보다 정화의 보물배는 30배나 더 큰 거인이었다. 마젤란의 배는 3 개의 돛으로 움직였고, 보물배는 10개의 돛으로 움직였다. 한 척의 보물배 옆에 바스코 다 가마의 배들을 놓으면 다섯 척이 나란히 늘어서도 모자랐다. 공격력을 봐도, 서양 배들은 기본적으로 활로 무장을 했으나 중국 배들은 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약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명나라 함대는 보급선과 지원 부대도 충분했다. 전쟁이란 물자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규모의 차이였다.
 

 

그러나 중국 ‘무적 함대’의 영광은 오래지 않았다. 누군가와 싸워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 스스로 보물배의 목재를 뜯어내고 항해 기록을 불살랐다. 1424년에 영락제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홍희제는 “보물배의 원정은 아무 소용없는 일에 국력을 낭비할 따름이니 마땅히 중단해야 한다”는 유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인 태조 주원장의 정책을 본받아 외국과의 접촉을 통제하고, 특히 배가 중국의 항구를 드나드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다. 원정의 기록은 폐기되고, 정화도 궁궐의 개축작업을 돕는 등 비교적 한가한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홍희제의 뒤를 이은 선덕제는 기본적으로 홍희제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애써 이룩한 해군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깝게 여겼다. 그래서 6년 만에 원정을 지시했고, 육순을 넘긴 정화도 다시 바다로 나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1433년, 정화는 호르무즈 근방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시신을 싣고 돌아온 함대는 두 번 다시 출항하지 못했다.

 

그만한 노력을 들여 그만한 업적을 세워 놓고, 왜 중국은 스스로 공든 탑을 허물어 버렸을까? 원정의 동기가 건문제를 찾거나 영락제의 이국 취미를 만족시키는 차원의 것이었다면 이는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정에는 그 이상의 뜻이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도 영락제의 죽음 후 상황이 급변한 이유는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설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기득권과의 정치적, 이념적 다툼’이다. 정화의 대원정은 경제적 목적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었기에 서양의 경우처럼 ‘상업혁명’을 가져올 정도의 효과는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신흥 상인층의 등장은 가져왔을 것이다. 또 이민족 출신에 환관인 정화처럼 전통 중국의 지배계급에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의 권력 획득도 두드러졌을 것이다. 상업이 발달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가 유행할 조짐도 보였을 것이다. 이에 조바심이 난 기득권층, 다시 말해 농업 생산을 바탕으로 유교 이념과 전통 문화를 내세우며 살던 계층이 일제히 ‘반격’을 한 것은 아닐까? 명나라는 17세기 초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광업, 공업, 상업의 발달로 새로운 상인층의 세력이 강해지자 상공업에 무지막지한 세금을 매기며 노골적으로 탄압하여 권력구도의 변화를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중국은 자체적으로, 그것도 서양에 앞서서 ‘근대화’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셈이다.

  

콜럼버스에 앞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보다 먼저 세계를 일주했다?

2002년에는 한 권의 책이 세계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다. 개빈 멘지스의 <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였다. 정화 원정대의 항해일지와 보고서 등은 해금 때 불태워지고, 지금은 선덕제 때 세운 비석 몇 기와 원정대에 따라갔던 역사가들이 쓴 개괄서 두어 권만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보물배들은 동남아에서 동부 아프리카까지 오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그렇게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도 있었다. 동남아-인도, 인도-중동, 중동-동아프리카 등의 항로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정화 원정대는 그 여러 항로를 하나로 꿰어서 오갔을 뿐이며, 콜럼버스나 마젤란처럼 미지의 바다를 누비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멘지스는 항해가로서의 자기 경험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여러 흔적들에 의거하여 놀라운 주장을 내놓았다. 정화의 함대, 특히 제6차 원정에서 정화와는 별도로 움직이다가 여러 해가 지나서야 귀국했던 부대장들의 소함대는 동아프리카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나아가 희망봉을 돌았으며, 서아프리카를 지나 남북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극과 북극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인들이 콜럼버스보다 수 십 년 전에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마젤란보다 수 십 년 전에 세계를 일주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당시 중국의 기술로 미루어 그런 항해는 충분히 가능했고, 서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메리카 등에 군데군데 남아 있는 중국인의 흔적들, 가령 정화가 원정지에 남긴 비석과 비슷해 보이는 돌판, 동양인의 용모를 한 사람들의 전설, 중국 닭과 비슷한 품종인 남미의 닭 등을 ‘증거’로 들고 있다. 또한 그는 마젤란 해협의 발견 연도보다 앞선 해도에 이미 그 해협이 나와 있다면서 “정화 원정대가 남긴 해도를 바탕으로 서양 사람들이 세계 해도를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콜럼버스나 마젤란이 항해에 성공했을 것이다”고도 주장했다. 멘지스의 주장이 맞다면 ‘지리상의 대발견’이란 중국인들이 차린 밥상에 수저만 들이민 격이었다.

 

18세기에 그려진 세계지도. 정화의 원정 때 그린 지도를 본떠서 그렸다는 말이 전해진다.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가슴이 뛰는 주장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것이 ‘가능’했다고 해서 실제로 ‘존재’했다고는 볼 수 없다. 중국 배들이 세계를 일주할 능력이 있었다고 실제로 세계를 일주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또한 ‘신대륙’,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분명 서양인들이 오기 전에 동양인들이 오고 간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꼭 중국인이라고, 구체적으로 정화 함대였다고 봐야만 할까? 앞선 송나라나 원나라, 아니 신라나 고려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멘지스는 뛰어난 상상력과 보기 드문 끈기를 가지고 주목할 만한 책을 썼지만, 정작 한자를 해독할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번역된 자료나 2차 자료만 갖고 중국의 시대 배경을 설명하다 보니 곳곳에 어색한 부분도 눈에 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책 한 권만으로 정화 대원정의 역사가, 그리고 세계사가 다시 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정화와 그의 위풍당당한 함대를 떠올리며, 생각해 봐야 할 점이 둘 있다. 하나는 중국, 아니 크게 보아 동양이 서양에 뒤지지 않았으며 많은 부분 앞서 나갔음에도 결국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양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오늘날까지 서양 중심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1등을 해 놓고도 2, 3등에게 뒤처지는 경우는 더 비참하고, 한심한 게 아닐까. 또 하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점이다. 정화의 업적은 서양에서는 동양에서만큼 평가 받지 못한다. 그러나 동양의 힘이 점점 강해진다면, 나중에는 멘지스의 주장처럼 다소 어설픈 이론도 정설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그리고 오늘날 세계사가 대체로 서양 위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것과 반대로, 동양이 항상 서양을 이끌었고 서양이 앞선 시기는 ‘잠깐의 예외’에 불과했다고 통용되지 않을까. 역사는 냉정한 시각을 요구한다. 그러나 역사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역사를 외치는 목소리 크기에 달려 있다. 그런 현실이 단지 ‘동양 중심 대 서양 중심’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아전인수적 역사관마저 경계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남달리 착잡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조행복 역, 사계절)는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 조금 부담스럽지만, 하나의 장편 역사소설을 읽는 듯 다채로운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간 점을 음미할 수 있다.

미야자키 마사카쓰의 <정화의 남해대원정>(이규조 역, 일빛)은 정화의 원정을 세계사적인 큰 흐름에서 서술하며, 그의 원정이 이슬람 상인들의 ‘제1차 대항해 시대’와 서양인들의 ‘제3차 대항해 시대’ 사이를 잇는 중국 위주의 ‘제2차 대항해 시대’를 나타낸다고 본다.

 

 

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정화의 남해대원정 1421 세계최초의 항해가 정화

 

 

 
 

우에스기 센넨의 <1421 세계최초의 항해가 정화>(임진호 역, 이치)는 다른 책에 비해 정화라는 인물에 많은 중점을 두었다. 멘지스의 주장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은근히 동조하는 투다.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대륙조선 정화의 남해함대 세계 여행

2011.01.29. 12:52

http://cafe.daum.net/greatchosunsa  

정화 함대의 기록을 불태워라

 1천년 동안의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대사건… 왜 그들의 아메리카 경영은 실패했나
1421년 여름 카리브해에서 갈라진 주문의 분견대는 북아메리카로 향했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배 9척을 잃는다. 비미니 제도에서 발견된 ‘비미니 로드’라는 석조물은 이때 위기 상황에서 배를 해안에 상륙시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주문 함대는 쿠바를 거쳐 오늘날 미국령인 로드아일랜드에 닿는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온 콜럼버스와 베라차노 같은 초기 항해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이 명나라 선원들의 후손을 만나게 된다. 함대는 캐나다 해안을 따라 북으로 계속 올라갔다. 정화 함대에는 대륙조선황제의 이런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세상 동서남북의 끝을 찾아서 확인하라. 모든 항해의 기준별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내라.”
정화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륙조선함대는 28년 동안 7차례 대항해에 나섰다. ※매번 2만 7000여명의 인력과 대형 함선인 보선(寶船) 60여척 및 100척 정도의 ※소형 함선으로 이뤄진 대함대였다. 승무원 150명에 한 명꼴로 ※배치된 의사만 해도 180명에 이르렀고 승무원들이 ※소비하는 하루 식량만 70톤 가량이었습니다.


놀라운 항해술과 지도제작 능력

 

그린란드를 돌아간 함대는 적어도 북극점 250마일(약 400km)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북극점까지 갔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탐험가 난센이 부근에서 발견한 이상한 철제 리벳들의 성분을 정확히 분석하면 이 주장이 맞는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주문 함대는 다시 시베리아 북부 해안을 타고 동쪽으로 항해한다. 1507년 제滂?‘발트세뮐러 세계지도’에 놀랍게도 시베리아 북부 해안이 백해로부터 베링해협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런 항해술과 지도제작 능력을 갖춘 것은 정화 함대밖에 없다. 그들은 달의 기울기로 정확한 경도를 결정할 수 있었고, 당시 이미 600년 이상 되는 대양 항해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 Ptolemy world map 서기 150년 제작)(서기 90년 탄생 – 서기 168년 사망 )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북부 해안을 답사한 뒤 그 지도를 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0여년 뒤(1807년)의 일이다. (멘지스는 오늘날에도 무동력선은 아프리카 서안의 케이프 베르데에서 적도 해류를 타면그대로 카리브해로 들어가고, 멕시코 만류를 따라 미국 동부 해안을 올라간 다음 다시해류를 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북대서양 중앙부에 있는 아조레스 제도를 거쳐 다시케이프 베르데로 되돌아온다고 밝히고 있다. 콜럼버스도 대서양의 해류 등의영향으로 바로 이 항로로 여행했다.) 
주문 함대는 그렇게 베링해협을 통과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남쪽 항로로 들어간 주만 함대와 홍보 함대는 브라질쪽으로 내려간다.
그들은 오리노코강 삼각주 지역에 정박했다가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군도로 갔다. 그 뒤 함대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파타고니아에 상륙해 동식물을 채집하고연구하며 6개월을 보낸다.
이런 추정은 1430년 대륙조선에서 출판된 <서양번국 풍물화집>(The Illustrated Record of Strange Countries)에 파타고니아 특산 동물로 지금은 멸종한 ‘밀로돈’이 그림과 함께 묘사돼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 화집에는 “중국에서 서쪽으로 2년을 항해한 곳에서 발견했다”고 적혀 있다. 

Surviving fragment of the first World Map of Piri Reis (1513)피리레이스 제독의 첫번째 세계지도

Surviving fragment of the second World Map of Piri Reis (1528)피리레이스제독의 두번째 지도
피리 레이스(Piri Reis 1465년 탄생 ~ 1554년 사망)오스만 제국의 제독이다.얼음 밑의 남극 대륙을 지도로 정확하게 표현을 한 사람이다. 이 지도는 오파츠로 분류된다. 밀로돈( mylodon )은 키 3m에 무게 200kg이나 나가는 동물로1513년 제작된 <피리 레이스 세계지도>에도 묘사돼 있다.(<피리 레이스 지도>는 멘지스가 정화 함대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데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초기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는 1428년 제작된 세계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남아메리카 부분’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1428년 지도는 포르투갈에서 사라졌는데, 콜럼버스의 항해에 참가했던한 선원이 이 지도의 ‘남아메리카 부분’을 가지고 있다가 오스만 터키에포로로 잡히면서 다시 등장한다. 오스만 터키의 제독 피리 레이스가 그 중요성을 알고 새 세계지도에 집어넣도록 지시한 것이다. 따라서1492년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를 그린 문제의 1428년 세계지도를가지고 항해에 나섰다는 추론은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멘지스는1428년 지도의 최초 원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제작 능력과 항해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정화 함대의 지도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남중국 원산인 아시아계 닭이 남아메리카 곳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다는
사실도 정화 함대와 남아메리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거꾸로 남아메리카 원산인 옥수수도 이때 중국과 필리핀 등에 전래됐다
   밀리돈(mylodon) 1만년전 살았던 동물   대략 1만년전까지 남아메리카의 파타고니아 지역에 살았던 동물입니다.
   약 200kg을무게와 키가 높이 3m까지 가능합니다.
     파타고니아 지역


아메리카에 첫 식민지를 건설하다

 

주만과 홍보의 함대는 마젤란해협 부근에서 서로 헤어진다. 주만의 함대는 태평양으로 들어가 차가운 훔볼트 해류를 타고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홍보의 함대는 남반구 항해에서 기준별이 된 카노푸스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남극해의 남셰틀랜드 제도로 내려갔다. 
주만 함대는 페루 해역에서 남적도 해류를 타고 다시 서쪽으로 밀려갔다.
그들은 투오모토 군도와 피지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상륙했다.뉴캐슬 바로 북쪽 해안에 닻을 내린 그들은 돌로 수비대 시설을 세우기도 했다.이곳에서는 어느 곳보다 풍부한 선박 잔해와 중국 특산품이 발견된다.금을 채굴한 흔적도 남아 있다. 주만 함대는 그 뒤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스파이스 제도까지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중국으로 가지 않고 다시 해류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되돌아갔다. 미국의 서부 해안에 도달한 함대는해안을 따라 남아메리카까지 내려가며 곳곳에 정박했다. 새클라멘토에서는 정화 함대의 선박 잔해의 흔적, 벼 등이 확인됐고,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다는 신빙성 있는 기록도 남아 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도 정화 함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닻이 발견됐다
. 무엇보다 멕시코 서해안 마초아칸에서 지금도 제작되는옻칠기•직물염색 제품 등은 정화 함대와 이곳 원주민들이 교역을 했으며, 중국인들이 장기간 거주하며 이 기술들을 전수해주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베네수엘라 인디언 가운데서는 중국인 혈통을 증명하는 DNA가 확인되고 있으며, 페루 인디언 가운데서는 중국어를 말하는 인디언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만 함대가 아메리카에 상륙해 결국 첫 식민지까지 건설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주만 함대는 다시 적도 해류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1423년 10월 중국으로 귀환한다. 주만의 함대 가운데 중국(=대륙조선)에 도착한 것은 총 25척 가운데 단 한척이다.

정화 함대의 강력한 후원자인 영락제는 1424년 타타르족을 정벌하러 갔다가 병으로 죽었다.
손자인 선덕제가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의도로 실시한 1430년의 제7차 대항해를 끝으로 명나라는 바다를 닫아버리기 시작했다. 환관과 라이벌 관계였던 한림학사들은 무능한 황제들을 부추겨 환관들이 주도하던 대항해 정책을 무너뜨렸다. 남경의 조선창을 폐쇄하라는 칙령이 포고됐다. 대양 항해 선박을 더 이상 만들지 말라는 칙령에 저항하던 사람들은 처형됐다. 중국의 찬란한 대항해 시대는 유학자 세력의 눈먼 이기심에 짓밟혀갔다. 그 마지막 장면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명나라 영락제는 조작사입니다.※이시기가 바로 대륙조선의 태종황제 시기였기때문에 ※내용은 날조로 뒤덮어있습니다.

1398년 조선-제1차 왕자의 난

1400년 조선-제2차 왕자의 난

1401년 대륙조선 3대 황제 태종( 1401년~1418년 재위)

 

 

1402년 태종(2년)-혜성(彗星)의 꼬리가 매우 길다. 젊고 유능한 사람에게 천문과 지리를 가르치게 하다

1403년 대륙조선 태종황제-정화에게 대함대 건설지시하여 착수합니다.

1404년 태종(4년)-진산 부원군 하륜이 도읍을 무악(毋岳)으로 옮기도록 다시 청하다(10/31)1404년 태종(4년)-한양(漢陽 =트루판)과 무악(毋岳 =모름) 중에 어느 곳을 도읍으로 정할 만한 것인지를 논의하다(11/15) 1405-02-26  대륙조선 태종(5년) 황제- 한양(=트루판)에서 원단제(圓壇祭)를 지내다1405-00-00  대륙조선-정화 대함대 탐험시작( 1405년~1433년 )   

 

1405-10-00  태종(5년)-양자강 유가항에서-정화의 남해함대 출항( 63척 27.000명) (  길이 150m 폭은 60m  )

1405-10-00  태종(5년)-제1회 인도까지 항해 참파 자바섬 팔렘방 수마트라섬각지 말라카 실론 캘커타(~ 1407-09-02)

1405-00-00  티무르(1336-1405), 이성계(1335-1408), 주원장(1327-1398)은 서로 생몰년대가 비슷합니다

1405-00-00  또 건국자로서도 공통성이 있지요.

1405-00-00  조선이 아시아와 동일한 것일진대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건국하였다면 원전은

1405-00-00  하나인데, 각색한 극본이 두개 더 있다는 말이 됩니다 

1407-12-00  태종(7년)-대륙조선 정화함대-제2회 각국과통상관계(~ 1409-夏-00)1409-00-00  태종(9년)-정화함대-제3회 위험한전투항해(~ 1411-06-16)

1412-05-30  프랑스-잔다르크 출생(~A.D1431년. 05월. 30일)

1413-冬-00  태종(13년)-대륙조선 정화함대-제4회 바다를건너 기린을 가져온항해(~ 1415-07-08)1413-冬-00  조선인 정화가 머물렀던 아라비아반도는 조선의 땅이었다

1417-冬-00  태종(17년)-정화함대-제5회 경험을쌓아 효과적으로 이루어진항해(~ 1419-07-17)

1418-12-15  대륙조선/4대황제 세종( 1418년 ~ 1450년 재위 )  

1421-春-00  대륙조선 정화함대-제6회 경험을쌓아 효과적으로 이루어진항해(~ 1422-08-18)

1421-春-00  대륙 조선인 정화가 세계최초로 발견한 아메리카대륙에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살다. 

1424-05-00  대륙조선 세종 06년(시계의역사)-5월에는 경복궁에 청동제의 누각을 주조합니다. 

 

정화남해함대 -양자강 유가항에서 출항(1405년)

 


 

양자강 유가항(  太倉 Taicang  북위 31.44 동경 121.09)

 

1424-08-05  명나라-영락제 사망/ 몽골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영락제가 병으로 쓰러지다[조작사]

1424-08-05  명나라/제3대 영락제 (재위 : 1402 ~ 1424 . 8. 5)[조작사]1424-08-05  명나라/제4대 홍희제 (재위 : 1424 ~ 1425)[조작사]

1430-05-24  프랑스-잔다르크 부르고뉴군에 체포됨(05월 24일)

1431-05-30  프랑스-잔다르크 화형-올드마켓에서(05월 30일)

 

 

정화의 남해함대 세계일주( 1421년 )


대양 강대국에서 내륙국가로의 추락

 

“1477년 한 야심적인 환관이 정화의 대항해에 대한 기록을 내줄 것을 병부에 요구했다. 병부의 부책임자였던 한림학사 유대하는 문서보관소에서 정화 함대가 만든 지도와 기록 등 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압수한 뒤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병부의 각신(장관)에게는 ‘분실됐다’고 보고한다. 
‘어떻게 문서보관소의 공식 문서들이 분실됐다는 말이오’
‘삼보(정화의 별호)의 서양 원정은 수만금과 수만의 양곡을 낭비했을 뿐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멋지고 비싼 물품을 가져온들 조정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설사 그 옛날 문서들이 아직 보관돼 있더라도 이런 일이 재발되는 것을 뿌리째 뽑기 위해선 모조리 없애버려야 합니다.’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아챈 각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역시 공은 대단하오. 다음 이 자리는 확실히 당신 것이야!’

※위의 내용도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환관이 자료를 없애다라고  남아있는것은...자기들  유럽인들이 없애놓고(19세기~20세기)※그것을 환관을 등장시켜 없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1477년 이시기는 대륙조선 성종(成宗)황제 8년째 되는해 입니다.
※조작되어 있는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성종황제 시기(재위  1469년 ~ 1494년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등용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러 후궁들 간의 갈등을 다스리지 못하고
폐비 윤씨를 사사, 이는 뒷날 아들 연산군으로 하여금 대량 숙청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루이즈 레바티즈 <중국이 바다를 지배하던 시대>(When China Ruled the Sea•국내 미번역)에서) 
과연 정화 함대가 아메리카까지 갔는지 중국 역사나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사실상 불가능하다. 나아가 이 분서 사건를 계기로중국은 해양강국의 자리를 급속히 잃기 시작한다. 15세기가 되기도 전에 중국에서는 대형 보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보선들은 조선소에서 썩고, 화약과 총포의 연구도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아메리카에 남은 중국인과 모국의 연결선은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중국은 이제 대형 보선으로 대양을 누비던 강대국에서 중소형 평저선 따위로 대운하나 오가는 내륙국가로 전락했다. 분서 사건 뒤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해안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범하는 왜구들조차 제대로막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국은 그 뒤 거의 600년 동안 강대국의 자리를 되찾을 수 없었다. 정화 함대의 기록을 불태운 것은 바로 지난 1000년 동안의 중국 역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서구유럽인들이 확인할 증거자료와 문서들은 모조리 ※갈갈이 찢어놓고(1842년~1900년 사이 대대적으로 지워버림) ※없애버렸으며 유물조작( 위치와 지명 옮기기 )까지 해되는 바람에※정화 남해 함대에 관한 확실한증거는 눈씻고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대륙조선을 멸망시킨 장본인들이 바로 유럽인들이기에.... 

 

이름없는풀뿌리   '동양'과 '서양'은 원래 말라카해협을 기준으로 나눈 개념이다. 중국에서 보았을 때 말라카해협 너머 서쪽으로 가는 해로(海路) 혹은 그 해로를 통해 도달하는 지역을 서양이라 불렀고, 반대로 말라카해협 동쪽을 동양이라 불렀다. 아시아 해상 세계의 중요한 길목이었던 말라카해협이 이제는 오늘날 의미의 동양과 서양이 교류하고 충돌하는 핵심 지역이 되었다. 말라카 해협은 세계 해상 무역의 50% 이상이 집중되는 곳이다.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을 나누는 깔때기 모양의 이 해협은 길이가 950km에 이르며 그 끝에 싱가포르가 위치해 있다. 이곳은 매년 5만 척의 수송선과 이 지역의 어선 및 연안 항해 선박들이 오가는 핵심 전략 지점이다. 만일 이 해협이 봉쇄되면 전 세계 원유 수송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당연히 세계 강대국들과 초대형 기업들의 이해가 걸려 있지만,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같은 주변 국가들은 외세의 지나친 개입을 원치 않고 있다. 싱가포르만이 미국 해군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고, 이를 이용해 미국이 말라카해협을 장악하고 있다. 중국이 우려하는 것이 이 점이다. 현재 중국 원유 수입의 80% 이상이 이 해협을 통과하고 있다. 유사시에 미국이 봉쇄한다면 중국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중국 해군은 이 지역 각지에 거점을 얻고자 노력해 왔지만 현재까지 큰 성과는 없다. 여전히 '대륙 세력'의 성격이 강한 중국의 해외 팽창을 '해양 세력'인 미국이 틀어막고 있는 형세다. 게다가 중국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는 인도도 중국의 해상 팽창을 앉아서 보고 있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중국이 인도양 거점 도시인 과다르항(港)의 운영·관리권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중국은 파키스탄 남서부에 있는 이 항구 도시를 확보한 후 이곳으로 수입해 들여온 원유를 육지를 통해 중국까지 수송하는 계획을 검토 중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 과다르항과 신장위구르자치주를 잇는 철도와 송유관 건설을 추진 중이다. 중국이 과다르항 정비 사업을 추진하면서 단순히 상업 항구를 개발할지 군항을 동시에 건설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인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쟁 관계가 놓여 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계 정세를 정확히 읽는 눈이 필요하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201] 말라카해협 입력 : 2013.02.06 조선일보 2013/02/07 08: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