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동아 3국의 성씨(姓氏)의 기원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5:13

동아 3국의 성씨(姓氏)의 기원

 

2000년에 조사한 우리 나라의 성씨별 인구가 통계청 홈페이지에 떴는데, 1985년 발표 당시보다 성씨의 숫자가 12 개 늘었다. 그 때는 274개였는데, 이번은 286개가 되었다. 우리 나라 10대 성씨의 순위는 변화가 없었다.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

“김(金)” 씨는 우리 나라 인구의 21.6%인 992만 여 명으로 여전히 제일 많았다.
“이(李)” 씨는 그보다 훨씬 적은 14.8%로 679만 여 명으로 조사되었다.
“박(朴)” 씨는 또 그보다 훨씬 적은 8.5%로 389만 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잇는 “최(崔), 정(鄭)”씨는 4% 대이고,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씨는 2% 대, 그리고 “임(林)” 씨부터 21위 “전(全)” 씨까지 1%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씨별 인구 수가 거의 일정한 차이를 유지하며 계속 나열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성씨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가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 특정 성씨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다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만 1, 2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아진 것은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법이 시행될 때 “양반이 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기형적인 분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에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를 만들어서 가졌다고 한다. “田中, 中村, 松下...” 등 다양하게 창씨된 성씨의 숫자가 순식간에 8만 개나 되었는데....

일본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특정 성씨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는 없다고 하며... 또한 성씨만 가지고는 가문의 역사 같은 것은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를 논할 때 성씨가 무언가 하는 것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착 같은 것이 거의 없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여기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일본이 우리 나라, 즉 대한제국에 와서도 계급을 타파한다면서 “신분 표시가 없는 호적법”을 시행하였고, 여기에서도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운동을 전개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결과는 일본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 들은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이들 대부분이 그 동네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하여 그 “양반님”들의 성씨를 얻어 와서는 관청에 신고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 때에 김(金) 씨나 이(李) 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 성씨가 총 인구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양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던”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난,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여튼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러이 이루어졌고, 옛날 이야기에 그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구월이...”의 자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슨무슨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버렸고, 오로지 양반의 후손만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덕분에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양반이 많은 나라가 되었고, 또한 제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불과 100 여 년 전만 해도 “성씨도 없는 쌍놈들”은 제사고 차례고 지낼 수가 없었는데, 요즈음은 집집마다 장손이면 모두 명절날 차례를 지낸다.

참고로 5000년 전부터 성씨를 사용해 온 중국의 경우를 보면 성씨별 인구 1, 2, 3위의 비율은 각각 7.4%, 7.2%, 6.8%로 되어 있어서, 특정 성씨로 몰리는 현상은 없다. 중국은 인구 0.1% 이상을 차지하는 성씨가 모두 129개로 나타났는데, 이 129개 성씨의 인구 합계는 중국 인구의 87%라고 한다. 이는 2006년 1월 10일 중국과학원에서 중국역사상 가장 정밀한 자료조사를 거쳐 발표했다는 “100대 성씨”에 근거한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인구기준 성씨순위”가 1987년의 발표자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표본조사한 기초자료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1987년 조사는 겨우 57만 명 정도를 표본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고, 이번 조사는 그 때에 비하여 500배도 넘는 약 3억 명을 표본 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기 때문에 그 정밀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번 조사에서 중국 10대 성씨는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陳), 양(楊), 황(黃), 조(趙), 주(周), 오(吳)”

로 판명되었다. 이 순위는 자동적으로 전세계의 10대 성씨가 되기도 한다. 이 중 “李”는 중국 인구의 7.4%인 9천 60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679만여 명을 합치면 “李”씨는 1억 명을 넘어 가는 세계 유일의 성씨가 된다.

약 900년 전인 서기 1100년대에 북송(北宋)에서 발표한 『백가성(百家姓)』이란 책자가 최초의 성씨 조사 기록이었고, 명(明)나라의 『천가성(千家姓)』, 청(淸)나라의 『백가성(百家姓)』 등이 뒤를 이었으나 이 책들은 모두 성씨별 인구수를 기준으로 서열을 매긴 것은 아니었다.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趙錢孫李 周吳鄭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인구수 순위가 아니었다. “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인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던 것인데... (중국의 1100년대는 송나라가 약간 힘이 강한 정도였고, 고만고만한 나라들로 나누어져서 도토리 키재기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인구 순이 아니라 예우(?)를 받아야 할 성씨의 순위였고, 최근 중국 일부 신문에서 보도한 “900년만에 조(趙)가 1위에서 8위로 밀렸다”는 내용은 옛날 기록의 특징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나라 성씨의 순위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 성씨 순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金 : 21.59%, 한국 1위 (중국 64위)
한국 발음이 현재는 “김”이지만 옛날에는 “금”으로 읽었다는 주장도 있음.
현재 중국 배우 중에도 이 성씨를 가진 배우가 있는데 “금성무”라고 보도되고 있음
이 글자의 현대식 중국 표준발음은 “찐”임

李 : 14.78%, 한국 2위(중국 1위 7.4%)
한국, 중국 합하면 1억이 넘어 가는 전 세계 단 하나의 성씨임
중국, 북한에서는 “리”라고 하는데, 남한에서만 “이”라고 읽고 있음.
그런데, 남한 사람들도 영어로 쓸 때에는 대부분 “Lee(리)”라고 하는 버릇이 있음

박 : 8.47%, 한국 3위(중국 100위 내에서는 안 보임)
한자로 “朴”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바가지”란 뜻의 순우리말 토종 성씨임.
“박혁거세”의 “박”은 “박만큼이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은 말임
영어로 "Park" "Pak" 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으나 "Paak" 이라고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함.

최(崔) : 4.72%, 한국 4위(중국 58위)
정(鄭) : 4.37%, 한국 5위(중국 21위)
강(姜) : 2.27%, 한국 6위(중국 50위)
조(趙) : 2.14%, 한국 7위(중국 8위)
윤(尹) : 2.06%, 한국 8위(중국 95위)
장(張) : 2.00%, 한국 9위(중국 3위)
임(林) : 1.66%, 한국 10위(중국 17위/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오(吳) : 1.54%, 한국 11위(중국 10위)
한(韓) : 1.53%, 한국 12위(중국 26위)
신(申) : 1.52%, 한국 13위(고려태조가 하사한 성씨,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일족이 있음)
서(徐) : 1.51%, 한국 14위(중국 11위)
권(權) : 1.42%, 한국 15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황(黃) : 1.40%, 한국 16위(중국 7위)
안(安) : 1.39%, 한국 17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송(宋) : 1.38%, 한국 18위(중국 23위)
유(柳) : 1.31%, 한국 19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홍(洪) : 1.13%, 한국 20위(중국 99위)
전(全) : 1.07%, 한국 21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고려 왕씨 유래설이 있음)
고(高) : 0.95%, 한국 22위(중국 19위)
문(文) : 0.93%, 한국 23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손(孫) : 0.90%, 한국 24위(중국 12위)
양(梁) : 0.85%, 한국 25위(중국 20위)
배(裵) : 0.81%, 한국 26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조(曺) : 0.79%, 한국 27위(중국 27위)
백(白) : 0.76%, 한국 28위(중국 79위)
허(許) : 0.65%, 한국 29위(중국 28위)
남(南) : 0.56%, 한국 30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우리 나라 31위 이후의 성씨는 다음과 같음.

31-40 심(沈) 유(劉) 노(盧) 하(河) 전(田) 정(丁) 성(成) 곽(郭) 차(車) 유(兪)
41-50 구(具) 우(禹) 주(朱) 임(任) 나(羅) 신(辛) 민(閔) 진(陳) 지(池) 엄(嚴)
51-60 원(元) 채(蔡) 강(康) 천(千) 양(楊) 공(孔) 현(玄) 방(方) 변(卞) 함(咸)
61-70 노(魯) 염(廉) 여(呂) 추(秋) 변(邊) 도(都) 석(石) 신(愼) 소(蘇) 선(宣)
71-80 주(周) 설(薛) 방(房) 마(馬) 정(程) 길(吉) 위(魏) 연(延) 표(表) 명(明)
81-90 기(奇) 금(琴) 왕(王) 반(潘) 옥(玉) 육(陸) 진(秦) 인(印) 맹(孟) 제(諸)
91-100 탁(卓) 모(牟) 남궁(南宮) 여(余) 장(蔣) 어(魚) 유(庾) 국(鞠) 은(殷) 편(片)
101-110 용(龍) 강(疆) 구(丘) 예(芮) 봉(奉) 한(漢) 경(慶) 소(邵) 사(史) 석(昔)
111-120 부(夫) 황보(皇甫) 가(賈) 복(卜) 천(天) 목(睦) 태(太) 지(智) 형(邢) 피(皮)
121-130 계(桂) 전(錢) 감(甘) 음(陰) 두(杜) 진(晋) 동(董) 장(章) 온(溫) 송(松)
131-140 경(景) 제갈(諸葛) 사공(司空) 호(扈) 하(夏) 빈(賓) 선우(鮮于) 연(燕) 채(菜) 우(于)
141-150 범(范) 설(偰) 양(樑) 갈(葛) 좌(左) 노(路) 반(班) 팽(彭) 승(承) 공(公)
151-160 간(簡) 상(尙) 기(箕) 국(國) 시(施) 서문(西門) 위(韋) 도(陶) 시(柴) 이(異)
161-170 호(胡) 채(采) 강(强) 진(眞) 빈(彬) 방(邦) 단(段) 서(西) 견(甄) 원(袁)
171-180 방(龐) 창(昌) 당(唐) 순(荀) 마(麻) 화(化) 구(邱) 모(毛) 이(伊) 양(襄)
181-190 종(鍾) 승(昇) 성(星) 독고(獨孤) 옹(邕) 빙(冰) 장(莊) 추(鄒) 편(扁) 아(阿)
191-200 도(道) 평(平) 대(大) 풍(馮) 궁(弓) 강(剛) 연(連) 견(堅) 점(占) 흥(興)
201-210 섭(葉) 국(菊) 내(乃) 제(齊) 여(汝) 낭(浪) 봉(鳳) 해(海) 판(判) 초(楚)
211-220 필(弼) 궉(鴌) 근(斤) 사(舍) 매(梅) 동방(東方) 호(鎬) 두(頭) 미(米) 요(姚)
221-230 옹(雍) 야(夜) 묵(墨) 자(慈) 만(萬) 운(雲) 범(凡) 환(桓) 곡(曲) 탄(彈)
231-240 종(宗) 창(倉) 사(謝) 영(永) 포(包) 엽(葉) 수(水) 애(艾) 단(單) 부(傅)
241-250 순(淳) 순(舜) 돈(頓) 학(郝) 비(丕) 영(榮) 개(介) 후(侯) 십(辻) 뇌(雷)
251-260 난(欒) 춘(椿) 수(洙) 준(俊) 초(肖) 운(芸) 내(奈) 묘(苗) 담(譚) 장곡(長谷)
261-270 어금(魚金) 강전(岡田) 삼(森) 저(邸) 군(君) 초(初) 영(影) 교(橋) 순(順) 단(端)
271-280 후(后) 누(樓) 돈(敦) 소봉(小峰) 뇌(賴) 망절(網切) 원(苑) 즙(辻) 증(增) 증(曾)
281 삼(杉) : <남자 2명>
282 우(宇): <남자 1명> 소(肖)예(乂) 빙(氷) 경(京) : <여자 각 1명>
(이상 총 286개 성씨)

이 중 최근에 새로 생긴 성씨 중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잘못 기재하여 그리 된 것도 있고, 국제 결혼으로 우리 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남아 또는 중국 사람들의 성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중국의 주요 성씨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 : 중국 7.4%, 중국 1위(한국 2위)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개국공신들에게 “李”를 하사했고, 나중에 후위(後魏)의 선비족(鮮卑族)에서도 “李”씨로 바꾸어 사용한 사람들이 많음.
중국인들은 영어로 표기할 때 "Li"를 주로 사용하며, 미국 "Lee"와의 관계는 불명확함

王 : 중국 7.2%, 중국 2위(한국 83위)
중국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사이의 신(新)나라 때 황제 왕망(王莽)의 성씨임.
중국 사람이라 하면 “비단장사 왕서방”이라 할 정도로 중국에 왕 씨가 많았음
한국에서도 고려시대 왕족이 “왕건(王建)”의 왕씨였으나 고려 멸망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춤.

張 : 중국 6.8%, 중국 3위(한국 9위)
장삼이사(張三李四 : 중국인들은 대개 張씨네 셋째 아들 아니면 李씨네 넷째 아들이라는 뜻)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張씨가 많았음. 지금도 “장가계(張家界)”는 관광지로 유명함. “왕삼이사(王三李四)”란 말이 생기지 않은 것은 “왕이 셋이면..”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됨.

劉(유) : 중국 4위(한국 32위)
陳(진) : 중국 5위(한국 48위)
楊(양) : 중국 6위(한국 55위)
黃(황) : 중국 7위(한국 16위)
趙(조) : 중국 8위(한국 7위)
周(주) : 중국 9위(한국 71위)
吳(오) : 중국 10위(한국 11위)
徐(서) : 중국 11위(한국 14위)
孫(손) : 중국 12위(한국 24위)
朱(주) : 중국 13위(한국 43위)
馬(마) : 중국 14위(한국 74위)
胡(호) : 중국 15위(한국 161위)
郭(곽) : 중국 16위(한국 38위)
林(임) : 중국 17위(한국 10위)
何(하) : 중국 18위(한국에는 없음)
高(고) : 중국 19위(한국 22위)
梁(양) : 중국 20위(한국 25위)
鄭(정) : 중국 21위(한국 5위)
羅(나) : 중국 22위(한국 45위)
宋(송) : 중국 23위(한국 18위)
謝(사) : 중국 24위(한국 233위)
唐(당) : 중국 25위(한국 173위)
韓(한) : 중국 26위(한국 12위)
曹(조) : 중국 27위(한국 27위) / 한국에서는 “曺(조)”란 글자를 주로 사용함
許(허) : 중국 28위(한국 29위)
鄧(등) : 중국 29위(한국에는 없음)
蕭(소) : 중국 30위(한국에는 없음)

중국 31위부터 100위까지는 다음과 같음

31-40 馮(풍),曾(증),程(정),蔡(채),彭(팽),潘(반),袁(원),于(우),董(동),余(여),
41-50 蘇(소),叶(협),吕(여),魏(위),蒋(장),田(전),杜(두),丁(정),沈(심),姜(강)
51-60 范(범),江(강),傅(부),钟(종),卢(노),汪(왕),戴(대),崔(최),任(임),陆(육)
61-70 廖(료),姚(요),方(방),金(금),邱(구),夏(하),谭(담),韦(위),贾(가),邹(추)
71-80 石(석),熊(웅),孟(맹),秦(진),阎(염),薛(설),侯(후),雷(뢰),白(백),龙(용)
81-90 段(단),郝(학),孔(공),邵(소),史(사),毛(모),常(상),万(만),顾(고),赖(뢰)
91-100 武(무),康(강),贺(하),严(엄),尹(윤),钱(전),施(시),牛(우),洪(홍),龚(공)

중국 측 발표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성씨는 56개 종족에 약 12000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13억 인구 전부를 조사 못해서 이런 추정치라는 것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신판 『중국성씨대사전(中國姓氏大辭典)』에는 무려 23000개의 성씨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나 인식들에 대하여 약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의 성씨관...

중국은 예로부터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원래 성(姓)이라 함은 모계제 사회의 흔적으로 “어머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씨(氏)는 “출생한 뒤에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모두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황제(黃帝)”의 경우 성(姓)은 “희(姬)”이고 씨(氏)는 “헌원(軒轅)”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황제(皇帝), 즉 천자(天子)가 내려 주는 것은 성(姓)이라 했고, 제후(諸侯) 또는 국왕(國王) 정도가 내려 주는 것은 씨(氏)라 했다. 언제나 성(姓)이 한 단계 위의 개념이었는데, 보통 성(姓)은 한 글자였고 씨(氏)는 두 글자가 많았다.

그리고 한(漢) 나라 때에 족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천자가 각 제후나 공신들의 자제들에 대한 특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천자가 만든 족보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가 권력의 유무를 판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성씨는 남자들만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Y염색체의 유전 상황을 표시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중국의 성씨는 역사가 5000년이 되었고, 성씨는 문화의 전승과 남성 혈통의 흐름을 연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성씨이면 무조건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관습이 자연스러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혈연 관계는 인간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성씨관...

원래 우리 나라의 토착민들은 성씨가 없었다고 한다. 계속적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일부 고위 관리들에게서 성씨를 가진 자들이 간간이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서는 국력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왕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스스로 만들어서 가졌다. 그래서 왕족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고 없는 먼 조상님들(혁거세, 알지 등등)에게도 소급해서 성씨를 만들어 붙이고 했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보다 쌍놈들이 더 많았고,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절 일본의 압력 덕분에 호적에 성씨란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많았지만, “만들어 올렸다”는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가문의 비밀”로 숨겨 두어야 했다.

성씨의 유무와 관련한 성씨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우리 백성들은 양반제도가 비록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40년대에 일본이 “이제 조선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한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고, 앞으로 성씨로 인한 조선인, 일본인 간의 차별대우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성씨 자체를 “가문의 역사”로 생각하는 많은 우리 백성들은 당연히 반대하였고, 성씨의 역사가 불과 50년밖에 안 되어 성씨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던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들의 반대를 보고 “거참, 이상하다. 그깟 성씨 가지고 왜들 저러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성씨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씨를 만들어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신청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신고하였는데, 이광수가 만든 성씨는 “일본 천황 고향의 뒷산인 향구산(香久山)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향산(香山)이었다. 이광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성씨란 건 별 것 아니야”라는 자기네들의 전통적 인식을 한국식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전 세계의 남자들이 한국인들에게 깜짝 놀라는 것이 두 가지라 하는데, 한 가지는 부인의 성씨 문제이고 또 한 가지는 “부인이 남편 통장을 관리”하는 것이라 한다. “자다가 벌떡 깨어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는 한국은 거의 구제불능성 선천적 여성천국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성씨관...

일본은 우리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백제와 교류할 때부터 성씨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고, 오랜 기간 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가물에 콩 나듯 하는 중국과의 교류도 크게 활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성씨의 위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19세기말 미국이 군함을 밀고 들어오고, 일본 청년들이 세계일주도 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패밀리 네임”이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을 보니 자기네들의 직업을 가지고 만든 성씨도 있고, 자기네 마을의 특징을 살려서 만든 성씨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도 성씨란 걸 만들어서 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에게 물어 보니 동양 문화권에서는 성(姓)이라는 것도 있고 씨(氏)라는 것도 있는데.. 성(姓)이란 것은 황제가 직접 만들어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백성이 한두 명도 아닌데 어느 세월에 만들어서 준단 말인가... 그냥 일본은 씨(氏)를 만들어서 쓰기로 하고 창씨(創氏)하는 업무는 각 사무라이들에게 그냥 맡기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순식간에 수만 개의 씨(氏)가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일본은 어떤 장부이든지 “성명(姓名)”이란 칸은 없고 어디든지 모두 “씨명(氏名)”이란 칸만 있다. 19세기 말 갑자기 시행된 창씨(創氏)였기 때문에 각자의 씨(氏)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청일 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게도 성씨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호적법을 만들어 창씨(創氏)의 기회를 주었으나, 조선인들은 이상하게도 창씨(創氏)는 않고 기존 양반들의 성(姓)을 빌려 와서 관청에 신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글자 짜리인 성(姓)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국 또는 조선인이고 두 글자 짜리 씨(氏)를 쓰는 사람은 일본인.... 어찌 되었든 간에 국적 구별이 쉬워서 좋기는 했다.

조선을 삼키고 난 뒤에 조선인들로부터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 놓고는 차별대우가 너무 심하다”는 등 불만사항이 많이 접수가 되었지만, 우선 이름에서부터 출신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니 일본 정부로서도 별로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그냥 대충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가고... 조선인들이라도 군인으로 뽑아서 내보내야겠는데 차별대우 해소를 위한 근본대책을 세우라고 매일 투덜대는 저 조선인들을 그냥 일본군으로 들여 보냈다가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 보고 질 것 같고... 일본정부는 착잡해졌다.

누군가 묘안을 냈다. 일본식으로 창씨(創氏)할 기회를 한 번 더 줄 터이니 이 참에 일본식으로 제대로 창씨를 해라... 어차피 얼굴 생긴 것도 똑같고.. 조선 출신을 차별대우하고 싶어도 조선 출신이란 표시가 없으니 못할 것 아니냐... 그러나 그대신 조선 청년들 군대에 좀 가 줘야 되겠다.... 이렇게 하여 1940년대에 창씨(創氏)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어떻게 그 동안 써 오던 성(姓)을 버리고 그보다 격이 낮은 씨(氏)를 쓸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법적으로 양반이란 것도 없어졌고 문벌이란 것도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는데 허울만 남은 성(姓)을 가지고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차별대우 철폐란 것이 어차피 민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문제이고 정책 차원에서 조선출신이라는 표시가 안 나게 해 주겠다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불만에 대해 잘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강제 창씨를 계속 밀고 나갔다. (이 때 林, 柳, 南씨 일부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 하여 새로 창씨를 하지 않았다고 함).... 그리고 조선인들을 일본군으로 받아 들여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사람들만 일본군복을 입은 채로 애매하게 죽은 셈이 되어 버렸고 몇 년 후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1945년에 전쟁도 끝이 나고 살림살이도 일본 내부로 축소되었으니 일거리도 줄어들고 오히려 편해졌다. 일본인들도 이제 성씨를 사용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간다. 100년 동안 의 짧은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성씨에 대한 관념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씨에 대한 뚜렷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일본인은 성씨의 종류는 8만여 가지로 무지하게 많지만 성씨별 인구 수에 대해서는 아직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양반의 자손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일본인은 "근본도 모르는 쌍놈들"일 뿐이다.

내용출처 : [기타] 한국과 중국의 100대 성씨는-문학박사 황재순著

 

 

 

풀뿌리 족보 [族譜]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 종족의 계보(系譜). 일명 보첩(譜牒) ·세보(世譜) ·세계(世系) ·가승(家乘) ·가첩(家牒) ·가보(家譜) ·성보(姓譜)라고도 한다. 국가의 사승(史乘)과 같은 것으로, 조상을 존경하고 종족의 단결을 뜻하며, 후손으로 하여금 촌수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치 않고 화목의 풍을 이루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족보는 존비(尊卑) ·항렬(行列) ·적서(嫡庶)의 구별을 명백히 하고 있다. 본래 족보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한(後漢)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우족(右族) ·관족(冠族)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존중하는 사상이 높아져 육조(六朝) 시대에 이르러 족보의 작성 및 보학(譜學)이 발달하였다. 한국 족보 간행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에 보면,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가 최초라 하였으나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문헌적으로 믿을 수 있는 최초의 것은 1476년(성종 7) 간행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 《성화보(成化譜)》로서 《문화유보》보다 80년 앞서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氏族系譜)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관제(官制)로서도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보첩(族屬譜牒)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거가(巨家) 귀족(貴族) 사이에는 보계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를 가첩이라 함은 동족 전부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초록(拔萃抄錄)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키며, 가승이라 함은 계도(系圖) 외에 선조의 전설 ·사적에 관한 기록을 수록한 것을 가리킨다. 일반적인 족보는 이른바 종보(宗譜)에 해당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분파된 일단(一團)의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이를 지보(支譜) ·파보(派譜)라 부른다. 이들 파보에는 그 권수가 많아 종보를 능가하는 것도 적지 않다. 파보는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증가되어가고, 그 표제에 연안김씨파보(延安金氏派譜) ·경주이씨 좌랑공파보(慶州李氏佐郞公派譜) ·순창설씨 함경파세보(淳昌薛氏咸鏡派世譜) 등과 같이 본관과 성씨 외에 지파의 중시조명(中始祖名) 또는 동족부락의 거주지로 보이는 지명을 붙이고 있으나, 내용과 형식에서는 족보와 다름없다. 따라서 한 성씨족의 족보이면서 여러 종류의 족보 성격을 띤 것이 많다. 이에 대해 국내의 족보 전반에 걸쳐 망라한 계보서가 있다. 즉, 《청구씨보(靑丘氏譜)》 《잠영보(簪纓譜)》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다. 2006/05/16 20:41:41  
풀뿌리 국가 ·사회에서 현달(顯達) ·귀현(貴顯)의 세계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로 《문보(文譜)》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 《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 등도 있으며,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등과 같이 자기 조상 중 특히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사적(事蹟)과 공훈을 수록한 것도 있다. 이상은 모두 혈통 표시의 필요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러한 습속의 연장으로 환관(宦官) 사이에도 계보를 끊이지 않고 이성(異姓)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혈족적 가계의 유형을 보존하고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도 있다. 족보의 기록 내용은 족보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한다. 우선 권두에 족보 일반의 의의와 그 일족의 근원과 내력 등을 기록한 서문(序文)이 있다. 이 글은 대개 일족 가운데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기록하는 것이 상례이다. 다음에는 시조나 중시조의 사전(史傳)을 기록한 문장이 들어가고, 다음에는 시조의 분묘도(墳墓圖)와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지도 등을 나타낸 도표가 들어가며, 그 밑에 범례가 있다. 끝으로 족보의 중심이 되는 계보표가 기재된다. 이것은 우선 시조에서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縱系)를 이루며, 같은 항렬은 횡으로 배열하여 동일 세대임을 표시한다. 기재된 사람은 한 사람마다 그 이름 ·호(號) ·시호(諡號) ·생몰 연월일 ·관직 ·봉호(封號) ·훈업(勳業) ·덕행(德行) ·충효(忠孝) ·문장 ·저술(著述) 등을 기록한다. 또, 자녀에 대해서는 입양관계, 적서의 구별 및 남녀의 구별 등을 명백하게 한다. 2006/05/16 20:41:56  
풀뿌리 성씨의 기원
姓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 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 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모(母)만 확실히 알 수 있고 부(父)는 알수 없는것 이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母系)사회건 부계(父系)사회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시사회를 씨족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씨족사회는 씨족전원이 힘을 합하여 수렵, 어로, 농경에 종사하고 외구의 침입도 공동으로 방어하였다. 그리고 씨족사회는 그 집단을 통솔하기 위하여 씨족원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덕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씨족장으로 삼고, 큰일이 있을 때에는 씨족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였는데, 이 씨족회의는 자못 민주적이어서 씨족원은 누구나 다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하고 씨족 전원의 찬성으로 결정하였다. 씨족사회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히 같은 씨족중 에도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개의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외적을 방어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를우리는 부족사회라 한다. 부족사회에서는 씨족장들이 모여서 부족장을 선출하고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부족국가는 다시 부족 연맹체를 조직하고 부족연맹의 왕을 선출하여 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오늘날 사회학, 역사학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 산명, 강명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희씨(姬氏)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姚氏)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姓氏란 이름자의 첫글자를 말하며 홍길동 이라고 할 때 洪자를 말하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surname라고 하여 존 F 케네디 라고 할 때 케네디를 말한다. 2006/05/16 20:42:21  
풀뿌리 고구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유리왕이 사성 하였다는 위씨,우씨 또는 대무신왕이 사성 하였다는 낙, 부정, 대실씨 등은 전설이라고 하더라도 대무신 왕때의 을두지, 송옥구를 비롯하여 이후 재상급만도 목도루, 고복장, 명림답부, 을파소, 고우루, 명림어수, 음우, 창조리,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등의 이름이 있으며, 또한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 예, 송, 우, 연, 주씨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 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에 연원을 두는 성씨는 극히 드물다. 고씨는 고주몽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지방에 약간 산재한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고씨는 모두 탐라 고씨계이다. 오직 강씨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있다.

백제
또한 백제에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또한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 공신이 되었다는 전섭과 마여를 원조로 하는 전씨와 마씨가 있다. 개루왕때 인물인 도미를 선계로 하는 성주도씨가 있으며,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새로 사성받고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부여융을 시조로 하는 부여서씨가 있다. 이 외에 백제 8대 성과 같은 성으로 진씨,연씨,국씨가 현재도 있기는 하나 그 연원이 분명치 않다.  2006/05/16 20:42:42  
풀뿌리 신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의 기원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연원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박,석,김 3성과 이,최,손,정,배,설의 6촌성에서 연원을 찾는 것이더 합리적 일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우리는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성씨가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으며, 성씨가 쓰이기 전에는 신분을 표시하는 역활을 했던 것은 그 사람의 출신지이다. 다만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때부터 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령 [양서],[신라전]에는 신라왕 모태가 처음 사신을 보내왔다'고 나와 있는데, 모태란 23대 법흥왕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북제서]에는 법흥왕 다음 임금인 진흥왕을 김진흥, 진평왕을 김진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왕실의 김씨를 제외한 그 밖의 6촌성들은 그보다 훨씬 뒤인 중기에야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다만 가락국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의 12대손인 김유신은 제외이다. 김유신은 누이가 태종무열왕의 비가 되면서부터 김유신이 처음으로 김씨를 사용하게 된것 같다는 설도 있다. 신라 시대의 성씨로는 3성과 6촌성 외에 9세기 초 당나라에 갔다온 후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가 처음 장씨로 등장하였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로운 姓의 등장을 보게 된다.이와 같이 삼국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추정해 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이 사용되었으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등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삼국시대에도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2006/05/16 20:43:03  
풀뿌리 고려
신라 말기 후삼국의 대동란을 당하여 평민으로서 각지에서 일어난 상주의 원종(元宗) 애노(哀奴), 죽주(竹州),죽산의 기명(箕蓂), 북원(原州)의 량길(梁吉)-良吉, 태봉왕 궁예의 부장인 홍언(弘彦) 명귀(明貴), 후백제왕 견명(甄蓂)의 부장인 관흔(官昕) 상귀(相貴) 상달(尙達) 웅환(熊奐), 고려 태조 의 부장인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웅산(三熊山), 복사귀(卜沙貴)등은 모두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이 중에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 백옥, 삼웅산, 복사귀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서 그들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장군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王)씨의 성을 주고, 발해 태자(渤海太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또한 왕(王)씨의 성을 주고, 신라인 김신(金辛)이 태조를 보필하여 공이 많음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 ≪동국흥지승람(東國興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午), 마(馬), 상(象), 돈(豚), 장(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성(姓)을 주었는데, 뒤에 우(午)는 우(于), 상(象)은 상(尙), 돈(豚)은 돈(頓), 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고려 초기부터 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 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시대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9년의 이 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성의 한 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성이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2006/05/16 20:43:18  
풀뿌리 조선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 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성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한 1939년의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2006/05/16 20:43:39  
풀뿌리 일본속의 韓國姓氏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에 이미 성씨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흑지상지(黑齒常之), 부여충성(扶餘忠勝),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성씨는 단일(單一) 성씨보다 복수(復數) 성씨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왕실과 귀족들은 한국의 영향으로 오래 전부터 성명을 가졌으나 대부분 서민들은 19세기 후반에야 성명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의 고대사에는 수많은 한국 고관 명사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 의하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먼저 복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도 백제사람 수수허리(須須許里)이다. 일본의 고대 씨족을 기록한 사서(史書)로 주목되는 것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다. 이 성씨록에 등장하고 있는 고대 선조들은 신라, 백제, 고구려 왕족과 고관들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기록된 성씨는 약 300여 개인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그중 백제 왕족의 성씨로는 일본어로 쿠다라(百濟), 이와노(石野), 오오카(大丘), 마쓰다(沙田), 스가노(菅野), 오카야(岡屋), 하루노(春野), 오하라(大原), 나카노(中野), 쿠니모토(國本), 나가다(長田)등의 복성과, 하야시(林), 후미(文)씨 등 단성이 있다. 신라 후에 성씨들은 야마무라(山村), 미야께(三宅), 우나바라(海原), 오이치(大市), 다께하라(竹原), 야마다(山田), 토요하라(豊原) 등의 복성과 이토(系)시 등 단성이 있다. 고구려 성씨는 고마(高麗), 나가세(長背), 나니와(難波), 고부(後部), 다카이(高井), 다카다(高田), 쿠와하라(桑原), 아사케(朝明), 요시이(吉井) 등의 복성과 고(高), 오(王), 시마(島)씨 등의 단성이 있다. 그리고 괄목할 것은 고대 일본의 벼슬한 사람의 관명과 성명을 “중부덕솔 목협금돈(中部德率 木傀今敦)” 등과 같이 백제와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관직 명칭과 성씨와 이름의 3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 나라(奈良)시대 직제 등이 일본 조정의 실권을 가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2006/05/16 20:43:54  
풀뿌리 일본의 역사책 의하면 1603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명자대도 금(命字帶刀 禁)”이란 법령을 만들어 평민이 성을 갖고 허리에 칼을 차고 무사 귀족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엄벌을 내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870년 9월 19일 일본정부에서 모든 사람이 성씨를 지어서 사용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평민도 묘오지(苗字: 名字)를 지어 쓰도록 허락하노라”하였으니 그전까지 일본 평민들은 성명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일본정부는 호적을 확실히 하여 징병목적에 두고 있었으나 오랜 봉건사회에서 지내온 평민들은 성명을 짓지 않고 신고를 기피하였다. 일본정부는 1871년 일본내각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천민들도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주는 “태정과포고”라는 “신분해방령(身分解放令)”을 내려 사회 계급을 화족(華族), 사족(士族), 졸(卒), 평민(平民)의 4민(四民)으로 분류하였다. 그후 1873년 태정관은 다시 징병령을 내려 만 20세 이상 남자는 3년간 군 복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간혹 좋은 성씨를 선호하여 막부관가에 돈을 바쳐 성씨를 사는 자도 있었으나 많은 평민들은 세금과 군대 가기를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정관은 1875년 2월에 “명자필칭 의무령(命字必稱義務令)”을 내려 성씨를 짓지 않으면 엄벌하도록 하였다. 일본 교민들에 의하면 그 당시 한꺼번에 그 많은 창씨를 하려니 갖가지 애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갑자기 성씨를 짓기 위해 유식자들의 행패로 별개별 성씨가 생겨난 것이다. 예컨데 큰뱀(大蛇), 여우코(狐鼻), 메도키(百目鬼), 히토카베(人首), 우키(浮氣:바람끼), 시나씨(尻無:엉덩이가 없다), 쇼오유(醬酒: 간장), 와쇼쿠(華食), 후로(風呂: 목욕탕), 호즈미(8월1일), 토우지(冬至), 누쿠이(明日), 시토(刺刀: 날카로운 칼), 도께(時計), 이에데(家出), 나나시(名無), 반치(番地) 등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성씨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인구의 95퍼센트가 동시에 새로운 성씨를 만들려니 수 만개의 성씨중 이상한 성씨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와타나베 미치오(渡邊三男)교수는 그의 저서 ‘일본의 성자(姓字)’에서 일본성의 28퍼센트가 백제, 신라, 고구려인의 기본성이며, 하라지마 레이지(原島 禮二)교수도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성씨 가운데 32퍼센트가 한국에서 온 성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성씨의 30퍼센트 이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성이며, 1875년 이후 지어진 대부분 성씨도 한국 고대 성씨를 모방하였다고 보여진다. 특히 현재 일본의 성씨 가운데 신라에서 건너간 야마다(山田), 시미즈씨(淸水), 백제에서 건너간 하야시(林), 야마쿠지(山口) 등은 일본에서 20대 안에 들어가는 대성(大姓)이다. 또한 쿠다라(百濟), 쿠다라키(久多良木), 시리기(新羅), 시라키(白木), 고마(高麗), 코마(駒)씨 등의 삼한시대 국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의 후예들도 아직도 여러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2006/05/16 20:44:13  
산하 성씨에 대한 기원, 통계,중국과의 비교 유익하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성씨가 많네요. 2006/05/19 15:04:37  
풀뿌리 제가 할아버지(1894년生)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구한말까지도 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집에 노비가 30여명 있었는데 할아버님 기억에 의하면 성은 없고 [이뱅이, 차내기, 개똥이, 바우, 분이, 갑술이]등의 이름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름을 천하게 지어줘야 ㅇ래 살 수 있다고 하여 일부러 아주 천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네요. 감사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5/23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5/20 15:57:39  
풀뿌리 [이덕일 사랑] 귀화 성씨(歸化 姓氏) 입력:2007.02.07 22:39(조선)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안남국(安南國·베트남) 혜종의 숙부였다. 고려 고종 13년(1226년) 안남 궁중의 정변으로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했는데 고종은 화산이란 본관과 식읍을 하사했다. 고려 세자 왕심(王諶·충렬왕)은 1274년 5월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서 세조 쿠빌라이의 딸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제국대장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고려로 시집오는 제국 공주를 호종했던 무슬림 삼가(三哥)라는 인물이 충렬왕으로부터 장순룡(張舜龍·일명 장백창)이란 이름을 하사받아 덕수 장(張)씨의 시조가 된다. 조선의 귀화 성씨로 유명한 이는 조선 개국 1등 공신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으로 청해 이씨의 시조이다. ‘태종실록’ 2년 4월조의 이지란 졸기는 귀화 전 이름을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라고 썼다. ‘연려실기술’은 ‘몽골 이름은 구룬두란테물(古論豆蘭帖木兒)’이라며 몽골인인 것처럼 적고 있다. ‘세종실록’ 6년(1424년) 10월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李和英)의 졸기에는 ‘여진인’이라고 못박고 있다. 중국 남송의 장수 악비(岳飛)의 후손이란 주장도 있는데 여진이 아니라 한족(漢族)과 연결시키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김충선(金忠善)은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이었던 사야가(沙也可)라는 일본인이 귀화 후 받은 이름이다. 조선에는 일반인의 상상보다 귀화인이 많아서 ‘광해군일기’ 1년(1609년) 4월 10일자 사간원의 밀계(密啓)는 ‘귀화한 호인(胡人)들이 해서(海西·황해도)로부터 경기·호남·호서의 해변 열읍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다’고 전하고 있다. 세종 때는 귀화인들에게 ‘공사 노비 중에서 양인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여자에게’ 장가를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을 정도로 귀화인에 대한 대책이 마련돼 있었다. 최근 귀화 외국인들이 김·이·박·최씨 등의 성씨를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 민족과 여진·몽골·거란 등은 중국에서 동이(東夷) 또는 동호(東胡)로 함께 불렸던 사이였다. 세계화시대를 맞아 민족 개념을 다시 개방적으로 바꿀 때가 됐다.  2007/02/08 13:4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