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7 : 蚩尤天王(치우천왕)]
1) 자오지 한웅은 중국 대륙의 서토를 정복했다 -상선약수님-
천문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百濟와 新羅가 건국 초부터 日蝕을 발해만과 揚子江 유역에서 관측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百濟와 新羅가 어디서 옮겨온 나라가 아니라, 渤海灣과 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百濟가 갈라져 나온 高句麗 역시, 中國 대륙에서 건국할 수밖에 없었다. 高句麗의 초기 일식이 중가리아분지 및 大興安嶺山脈 이북 에서만 관측되는 것은 高句麗의 일식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三國史記에 기록된 高句麗 일식은 高句麗가 관측한 전체 일식의 1~2 %에 지나지 않는다.
遼水는 우리나라의 국경이 아니었다. 遼西까지도 우리나라 땅이었기 때문이다. 朝鮮時代 遼水가 현 遼水라면, 三國이 어떻게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가 있는가. 朝鮮時代에는 遼水가 동북아 끝에 있었다가, 三國時代에는 遼水가 중국 대륙 끝으로 끌려갔다는 것인가. 그 후 또 다시 遼水가 동북아 끝으로 밀려나고? 그러나 朝鮮의 일식기록도 중국 대륙에서 관측했다.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것은 三國 이전의 국가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白山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 神市가 중국 대륙에 있었을 경우, 동북아의 문명이 중국 대륙보다 앞섰다는 『列國時代의 갑옷-朝鮮 갑옷의 발전에 관한 시론』이 성립할 수 없다. 배달의 중심지는 동북아에 있다가 중국 대륙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 청이 만든 날조 여지전도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겨간 시기는 배달 14 世 慈烏支 桓雄 때다. 우리나라는 배달 말기부터 중국 대륙을 중심지로 삼았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한단고기, 임승국)
왕동령(王桐齡)의 中國民族史에 나오는 말이다. 임승국 선생은 바로 아래에서 “慈烏支 桓雄인 치우(蚩尤)를 군주로 하는 구려국(九黎國)의 백성들을 苗族 혹은 유묘(有苗), 三苗라고 하며 현대의 苗族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九黎가 苗族의 나라라면, 漢族에 정복됨으로써 九黎 아닌 다른 나라가 되어야 한다.
정복자는 慈烏支 桓雄이었다. 임승국 선생의 해석 대로라면, 우리민족은 원래부터 중국 대륙에 살고 있었고, 中奴가 들어와 우리민족을 정복한 것이 된다. 그러나 王桐齡의 글은 문맥상 으로도 중국에 漢族이 들어와 苗族을 정복한 것이 九黎다(九黎는 배달의 별칭이고, 蚩尤는 慈烏支 桓雄의 별칭이다)
우리민족은 韓(漢)民族이지, 苗族 혹은 有苗, 三苗가 아니다. 중국도 東夷族이라 불렀을 뿐이다. 훗날 明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꾸면서 秦始王 呂政(秦始王은 呂不韋의 자식임)이 우리민족을 濊貊族 이라고 했다고 날조한 것이 전부다. 하나의 종족을 두고 온갖 명칭을 다 갖다 붙인 것은 濊貊族 밖에 없다. 민족명은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과 관련 있는 것으로 짓기 마련이다. 한국(桓國)에서 시작하고, 그 구성원을 구한(九桓)이라 한 우리나라가 한족(桓族, 韓族, 漢族)이 아니라면, 누가 한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당시 중국의 한족(漢族)은 없었다. 날조 역사에서도 중국의 漢族은 漢나라 때 와서야 문헌상에서 창작된 종족이다. 그나마도 문헌상 漢나라는 고작 기원전 202 년에 등장한 나라다.
사람들은 漢이 중국의 漢나라를 가리킨다고 생각 하지만, 본래 漢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문자가 녹도문(鹿圖文)에서 漢字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을 桓族, 韓族, 漢族이라 번역한 것이다. 漢水, 漢江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시대는 달라도 한인(桓人, 韓人, 漢人)이라 불렀다. 北夫餘人도, 高句麗人도, 百濟人도, 新羅人도, 大震國人도, 高麗人도 언제나 한인이었다. 서로를 구분할 때나 高句麗人이고, 百濟人, 新羅人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증 한단고기에는 王桐齡의 글을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가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로 바뀌어 있다. 이 글자 한 자 때문에 문장 전체의 뜻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주 아주 이상한 문장이다. 원래 苗族이 살고 있었고,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 왔는데, 이렇게 해서 생긴 나라는 中國이 아니고, 우리나라라고 한다. 이 나라의 지배자 역시 우리나라 통치자라는 것이다.
정말 王桐齡이 ‘중국의 한족(漢族)’이라는 의미로 썼다면, 苗族이 우리민족 이라는 뜻이라면, 明이 붙인 漢國에 착안하여 중국인이 진출했다고 우긴 것이라면, 문장 서술까지 바꾸어야 한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들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이며, 군주는 치우다. 그 뒤 중국의 한족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대체 중국인이 언제, 어디에서 민족 대이동을 했다는 것인가. 우리민족은 기원전 3898 년에 한웅 거발한(居發桓)이 무리를 이끌고 사백력(斯白力 : 시베리아)에서 黑水와 白山 사이로 이주 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중국인은 민족 대이동을 한 사실이 없다. 원래부터 중국 대륙 한 구석에 살고 있던 종족이다. 그래서 神市本紀에서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有公孫軒轅者土着之魁)”고 했던 것이다. 中土人(支那人)은 토착민이 대대로 정복되어 외부 유전자와 섞임 으로써 만들어진 종족이다. 公孫軒轅은 중국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이라 부르는 인물로 헌구(軒丘)로 유배 보낸 우리나라 사람 公孫의 후손이다.
우리나라는 배달 개천 당시부터 중국 대륙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桓因 : 한인) 뒤에 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白山과 黑水 사이에 내려왔다(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 三聖紀全 上篇)."
백산(白山) : 중앙아시아 일대의 天山山脈과 알타이산맥이라는 설과 白頭山이라는 설이 있다. 임승국씨는 白頭山으로 비정 하는데 임승국씨는 『한단고기』에서 “白頭山은 유사 이래로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또 최근 일부에서는 이 白山을 중국 甘肅省의 太白山 이라고 하는 학설을 퍼뜨리는 이도 있으나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白頭山을 빼고 중국의 太白山이 白山 이라고 함에는 보다 확실하고 확고한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중국 『二十五史』에 보이는 ‘白山’이나 ‘太白’이 의심없이 지금의 白頭山임을 밝혀둔다.”고 말했다 (임승국 선생의 의견을 따른다. 다만 중국대륙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제천의식은 白頭山을 떠나게 된다. 대신 제천을 담당하는 후국을 둔다. 후술한다)
여기서 나오는 黑水도 黑龍江이라는 설과 바이칼호수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있다(편저자는 바이칼호수로 比定한다).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
漢族은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王桐齡(중국역사학자)의 글을 읽어보면, 중국 즉 中原에서 한족이 들어왔다고 썼음을 알 수 있다. 慈烏支 한웅 때 中土를 정복 하면서 토착종족인 苗族과 접촉했던 것이다.
◀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치우의 모습 : 이 그림에서도 동두(銅頭)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므로 苗族은 현재의 湖北, 湖南, 江西 등지에 살고 있지 않았다. 李成桂가 揚子江 이남을 朱元璋에게 주었을 때, 朱元璋은 華夏族을 揚子江 이남 전체로 밀어냈다. 苗族들이 현재의 湖北省, 湖南省, 江西省 등지에서 살게 된 것은 겨우 6 백년 밖에 안된다.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苗族과 접촉하게 된 곳은 티벳고원 북부로 우리민족이 진출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해서 중국 대륙을 포함, 동아시아를 강역(疆域)으로 한 우리나라 이름이 九黎, 군주는 蚩尤였던 것이다.
“東夷는 대륙의 동쪽에, 華夏族은 대륙의 서쪽에 있다”고 한 史記는 中土(西土)를 대륙이라 바꾼 것이다. 華夏는 中土 토착민의 총칭으로 우리나라의 피지배종족 이었다. 慈烏支 한웅이 정복할 당시 토착민 일부가 中土 서부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토착민이 中土 서부에 있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는 배달 5 世 天皇 태우의(太虞儀) 한웅의 아들 태호(太昊) 때부터 中土를 지배하고 있었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할 당시에도 고신씨(高辛氏)가 中土 서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東夷는 中土로 들어간 太昊와 高辛 등이 中土밖에 살고 있는 同族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東夷가 中土를 정벌해 회대(淮垈)와 海垈에 눌러 살게 된 것이다. “東夷는 中土의 동쪽에, 華夏族은 中土의 서쪽에 있다” 함은 피지배종족 華夏의 관점에서 본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苗族은 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http://bluecabin.com.ne.kr/kyuwon/tasiki.htm 참조). 苗族이 정복된 시기가 4 천년 전인 것으로 보아, 苗族의 시조는 慈烏支 한웅이 아니다. 慈烏支 한웅은 81 명의 친척을 장수로 삼아 中土를 정복했는데, 이들 蚩尤氏들은 中土(淮垈)에 정착했다. 漢族이 진출하자 苗族을 포함한 中土 토착민 일부는 서쪽으로 밀려 났는데, 시간이 흘러 蚩尤氏의 후예가 번성하자 앞서 정착한 淮垈에서 벗어나 더욱 깊숙이 서쪽으로 들어가 苗族들을 지배하고 산 것이다.
“司馬遷의 史記에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다는데 蚩尤가 가장 사납게 굴어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었다. 헌원(軒轅)이 섭정 했는데 蚩尤의 형제가 81 인이 있었다. 이들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였다.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蚩尤는 옛 天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司馬遷史記曰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天下莫能伐軒轅攝政蚩尤有兄弟八十一人並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丘杖刀戟太弩威振天下蚩尤古天子之號也 三聖紀全 下篇)."
어떻게 형제가 81 인씩이나 될 수 있는가. 람세스 2 세(Ramses II)도 그렇게 많은 아들을 갖지는 못했다. 太白逸史 神市本紀의 ”집안과 종당(宗黨)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 81 명을 골라(選兄弟宗黨中可將者八十一人)"가 정확한 기술이다.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獸身人語銅頭鐵額)” 라함은 갑옷 입고 투구 썼다는 말이다. 中土는 아직도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로부터 4 백년 후인 요(堯) 때 후직(后稷)이 농사법을 가르쳤다. 곡식이 뭔지 몰랐던 華夏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 등의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쌀알이 꼭 모래처럼 작으니까 “모래를 먹었다.(食沙)”고 한 것이다.
◀ 중국 벽화 속의 치우천황 : 중국의 입장에서 그린 벽화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던 치우의 모습이다
헌원(軒轅)이 최후의 승자라면, 慈烏支의 위세가 천하에 떨쳐질 수 있는가. 왕동령(王桐齡)도 慈烏支 한웅에 의해 정복된 中土가 우리나라의 일부가 되었다고 했다. 苗族이 살던 땅을 蚩尤가 정복해 九黎에 병합 시켰다고.
軒轅은 慈烏支 한웅에 패해 도망친 유망(楡罔)을 대신해 섭정했던 것이다. “이때 軒轅이란 자가 있었는데, 楡罔이 패하여 달아나고 蚩尤氏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蚩尤氏에게 대항하여 싸웠다(時有軒轅者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欲代以爲君乃大興兵與蚩尤氏拒戰 揆園史話 太始紀)." 楡罔을 패퇴시킨 후에야 蚩尤氏가 제위에 올랐다는 것은 거짓이다. 慈烏支 한웅은 배달의 통치자가 된 후에 中土를 정복했다. 軒轅은 楡罔이 도망치자, 왕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軒轅 역시 慈烏支 한웅에게 패해서 慈烏支 한웅의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威振天下)” 天子는 軒轅이 아니라 蚩尤였던 것이다.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 되었기에 黃帝氏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撼 黃帝氏亦不得自安 揆園史話)." “軒轅의 무리들은 모두다 신하 되기를 원하며 공물을 바쳤다(軒轅之屬皆稱臣入貢 太白逸史 神市本紀)." “軒轅은 이로부터 편안하지 못하여 그 대가 끊길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史記에 이르되 (軒轅이) 산을 뚫어 통로를 내며 일찌기 편안히 살지 못하였으며 탁록(涿鹿)의 강에 고을을 옮겼으나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營衛)에서 살았다(軒轅以來世不自安終其世而未嘗安枕而臥史記所謂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 太白逸史 神市本紀)." 三聖紀全 下篇 에서는 "涿鹿의 벌판에서 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고 했다.
◀ 태호복희의 초상
태호(太昊 伏羲)조차 中土를 封土로 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慈烏支 한웅은 제후들이 다스리는 中土를 정복 했는가. 시간이 흐르자 제후들이 점차 말을 안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벌’했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 하여지니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다(楡罔衰政乃興兵出征 太白逸史 神市本紀)." 李氏朝鮮 중기의 책이라서 그렇다. "楡罔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두 백성(이 글 바로 앞에 神農과 少昊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神農과 少昊의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神農과 少昊는 楡罔의 부하다)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道가 매우 어지러워졌다.(楡罔爲政束急諸邑携二民多離散世道多艱 太白逸史 神市本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기사는 이렇다. “楡罔의 정권이 덕을 잃으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연전연승하고, 적병들을 혼미케 하여 혼란에 빠지게 하고, 헌원(軒轅)의 무리들이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였다면서 湖南, 湖北, 江西 등지만 慈烏支 桓雄이 지배한 九黎(구려, 구리) 땅일 수 있는가. 배달의 통치자 慈烏支 한웅이 湖北, 湖南, 江西 등지만으로 만족했단 말인가.
慈烏支 한웅이 고작 湖北, 湖南, 江西 일대만 지배했다면, 어떻게 “천하의 태평을 맹세”할 수 있는가. 중국 문헌에도 慈烏支를 가리켜 천하의 임금이라 했다(蚩尤古天子之號也). 전쟁에서 패한 軒轅은 慈烏支 한웅의 신하가 되었다.
이 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일곱번 신에게 제사 지내는(七回諸神) 역법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왕이 있는곳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살게 하였는데,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헌원의 모습
헌원(軒轅)이 일어나자 바로 탁록(涿鹿)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고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軒轅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神市本紀)
이와 똑같은 글이 원동중(元董仲)의 三聖紀 에도 있다.
헌원(軒轅)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涿鹿)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고신(高辛)을 쳐 공을 세우게 하였다(軒轅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제곡고신(帝梏高辛)이 黃帝(軒轅)의 증손이라면, 黃帝를 신하로 삼은 기사 바로 뒤에 나올 리가 없다. 서쪽이라 함은 아직 정복하지 않은 中土를 말한다. 高辛만이 아니라, 神農도 끊임없이 나온다. 高辛과 神農은 姓이기 때문이다. 中奴가 五帝라 부르는 인물들은 軒轅의 자손이 아니다.
吳나라는 우리나라의 제후국이다. 吳나라는 慈烏支 한웅이 정복한 中土의 최전방에 위치했다. 高辛의 나라와 접해 있어 吳나라에 침공군을 집결시킨 것이다.
高辛에 대요(大撓), 창힐(倉頡), 神農 등도 가세하여 中土를 나눴다. 軒轅은 티벳고원조차 저 혼자서 지배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吳장군”은 “吳나라의 장군으로”의 오기다. 神市本紀의 “軒轅黃帝가 즉위함에 이르자”는 “黃帝軒轅이 일어나자”의 오기다.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 적은 것이다.
軒轅은 皇帝가 아니었다. 秦始王 이전에는 皇帝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中奴 스스로 날조하지 않았던가. 皇帝라는 호칭이 三皇五帝에서 한 자씩 따왔다고? 軒轅은 帝位에 오를 수 없었던 인물이다. 中奴의 날조사 에서는 5帝가 모조리 軒轅의 자손으로 나온다.
春秋戰國時代를 통일한 呂不韋의 자식이 도토리 같은 春秋五覇[날조사에 의하면 제(齊)의 환공(桓公), 진(晋)의 문공(文公), 송(宋)의 양공(襄公), 진(秦)의 목공(穆公), 초(楚)의 장왕(莊王)을 말한다]나 戰國七雄(秦,魏,趙,燕,齊,韓,楚)과는 다르다고 뭔가 특별한 것으로 불리고 싶다고 해서 3皇 5帝에서 한자씩 따 皇帝라고 했다나. 그러나 皇帝가 三皇五帝에서 한 자씩 땄다는 말부터가 거짓말이다.
기원 전후로 한자는 이미 2 만자를 넘었다고 했다. 이름에 공통적으로 ‘皇’과 ‘帝’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 많은 글자 가운데 어째서 3‘皇’이라고 하고, 5‘帝’라고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皇帝’를 염두에 두고 明 때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5帝는 軒轅의 자손 이라면서, 皇帝라는 호칭은 3皇 5帝에서 한 글자씩 땄다면서, 炎‘帝’, 黃‘帝’라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3皇 5帝가 누구인가는 문헌마다 제각각이다. 三皇만 해도 史記에서는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이라 하고, 河圖에서는 天皇·地皇·人皇이라 하고, 尙書大典에서는 수인(燧人)·복희(伏羲)·神農이라 하고,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伏羲·神農·축융(祝融)이라 하고, 춘추운과추(春秋運科樞)에서는 伏羲·여와(女媧)·神農이라 하고, 尙書에서는 伏羲·神農·黃帝라 했다. 五帝도 史記와 世本 등에서는 黃帝·전욱(顓頊)·제곡(帝梏)·堯·舜이라 하고, 帝王世紀에서는 少昊, 전욱(顓頊), 帝梏, 堯, 舜이라 하고, 禮記에서는 伏羲, 神農, 黃帝, 少昊·顓頊이라 하고, 周易에서는 伏羲, 神農, 黃帝, 堯, 舜이라 했다.
모두가 3皇 5帝를 언급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원래 中奴史에는 3皇 5帝가 없다는 의미다. 3皇 5帝 역시 우리나라 역사에서 착안해서 明 때 졸속으로 만들어낸 것이다(한단고기의 三神五帝本紀 참조).
3皇은 여러 황제 가운데 가장 뛰어난 3 인으로 桓因(한님), 배달을 개천한 神市氏 桓雄(거발한한웅), 慈烏支 桓雄(蚩尤天皇)을 일컫고(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5帝는 관념적인 존재로 천지창조의 주관자 黑帝, 赤帝, 靑帝, 白帝, 黃帝(黃帝軒轅이 아니다)를 말한다.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이 당시 인간세상의 황제였다고? 땅위의 皇帝가 누구였나. 배달과 朝鮮의 天皇이다. 天皇은 배달, 朝鮮의 통치자에 대한 호칭이다. 하늘의 皇帝라는 뜻으로 천손민족을 자부한 우리민족이 아니면 쓸 수 없다. “天子라는 호칭은 東夷(배달)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기 때문에 天子라고 한 것이다(天子之號稱始於東夷父天母地故曰天子 獨斷)”라는 蔡邕(채옹 : 後漢의 학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天皇·地皇·人皇은 우리민족에게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희한하게도 3皇 5帝는 모두 넉자 이름이다(千字文에도 나타난다).
기원전 수천 년 전에 하나같이 넉자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론 성은 있었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넉자 이름을 가지지 않았기에 제요도당(帝堯陶唐=堯)은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이라고도 하고 제순유우(帝舜有虞=舜)는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라고도 한다. “우순(虞舜)은 맥족(貊族)이며, 貊族은 東夷의 부족을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자손이다(中國史前史話-臺灣大學의 徐亮之 교수 저)."라더니, 무슨 帝舜重華? 날조사를 창작하던 인간들이 제각각이 썼던 것이다. 帝舜有虞라 하고 帝舜重華라 날조당한 인물의 실명은 우순(虞舜)이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아들은 모두 2 자 姓인데, 炎帝神農, 黃帝軒轅, 帝舜有虞의 母는 모두 강씨[姜(羌)氏], 희씨(姬氏), 요씨(姚氏)로 1 자 姓이다. 모두 2 자 姓 가진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 하겠지만, 중국 문헌에 이 당시 中土는 母系社會였다. 모계사회란 다수의 남편이 있어서 부(父)를 확정하지 못해(유전자 검사법이 없으니까) 부득이 母의 姓氏를 따르는 사회다. 더구나 中土의 모계사회는 더욱 현란하여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가 ‘결혼’하는 형태였다. 결국 태어난 아이들에게 남자의 姓을 하나씩 골고루 붙여줄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神農의 母가 姜氏이고, 黃帝의 母가 姬氏 라면서 그 아들을 炎帝神農, 黃帝軒轅이라 부르는 것은 父의 성을 따랐다는 것인데, 神農과 軒轅 이후로는 母의 성으로 돌아가 姬氏, 姜氏라 불러, 姬氏의 시조가 軒轅, 姜氏의 시조가 神農 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軒轅의 아들이 소호금천(少昊金天)이고, 軒轅의 외손자가 전욱고양(顓頊高陽)이라고 횡설수설한다. 제곡고신(帝梏高辛)은 軒轅의 증손자, 帝堯陶唐은 軒轅의 고손자로 변신했다. 날조사에 의하면 결국 軒轅은 姬氏의 시조 이면서 姬氏를 姓으로 물려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母系社會였다는 것은, 軒轅의 아내는 하나가 아니었고, 軒轅의 아내들은 남편이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다. 뭘 근거로 軒轅의 아들, 손자라고 하는지 밝혀야 할 것이 아닌가. 후대에 일관성 없이 날조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얘기다.
中土에서 母系社會를 구성한 것은 華夏族이지, 우리민족이 아니다. 미개 華夏族의 치부를 감추고자 우리민족을 끌어들인 것이다. 華夏라는 명칭은 周나라 武 임금 때에 "華夏와 蠻貊이 따라 오지 않음이 없다(華夏蠻貊 罔不率俾 周書)"라 한 글에서 비로소 처음 나타났다. 周나라를 건국할 때만 해도 中土人들은 華夏와 陌(貊), 漢族으로 뚜렷이 구분됐다. 하지만 漢族(?)도 점차 모계사회 풍습에 빠져들어 周나라 말기 이후 혹은 漢나라 이후는 華夏族과 구분이 안 갔을 것이다. 그래서 高句麗와 百濟가 저들을 통틀어 한위노(漢委奴)라 했다.
“혹 말하기를 창힐(倉頡)은 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蚩尤氏의 후예다(或曰倉頡與高辛亦皆蚩尤氏之苗裔 太白逸史 神市本紀)." 帝梏高辛은 軒轅의 후손이 아니라 蚩尤氏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帝梏高辛 뿐만 아니라, 少昊金天, 顓頊高陽 도 軒轅과는 혈통의 연결이 없는 사람들이다. 모두 軒轅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軒轅을 신하로 잡은 다음에 오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高辛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太白逸史 神市本紀)." 神農, 高辛 등은 모두 성이다. 그래서 무수한 神農과 高辛, 少昊 등이 있었다. 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로, 神農을 성으로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 중심지가 中國 대륙으로 옮겨가자, 더 이상 太白山(현 白頭山)은 祭天儀式 장소로써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현 白頭山이 화산폭발하기 전에는 보통 크기의 산이라서 우리나라의 靈山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太白山은 神市氏가 처음으로 정착한 땅이라서 우리나라 靈山이 된 것이지, 높고 큰 산이라서 우리나라 靈山이 된 것이 아니다).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교통이 발달한 요즘도 먼 거린데, 탈 것이라고는 말과 가마밖에 없었던 그 옛날, 제사 한 번 지내러 가기 위해 6 개월씩, 1 년 씩 투자할 수는 없다. 1 년에도 몇 번씩 祭天儀式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戊戌 28 년(B.C. 1583),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三神과 上帝에게 제사지냈으니, 한인(桓因), 한웅(桓雄), 치우(蚩尤) 및 檀君王儉을 함께 배향 하였다(戊戌二十八年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而享之 檀君世記)."에서 보듯이 16 世 檀君 위나(尉那)가 제후국의 한(汗)을 모조리 대동하고 太白山까지 가서 매번 제사 지내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중국 대륙에 새로운 靈山을 마련해야 했다. 西安 서쪽의 太白山은 長安, 鷄林(桂林), 星宿海와 함께 아마도 중국 대륙의 지명 중에서 유일하게 옮겨지지 않은 지명일 것이다. 朝鮮時代 제사를 올린 곳은 여러 장소로 그 외에도 寧古塔, 九月山 등이 있는데, 모두 중국 대륙에 있다.
섬서성(陝西省)에 太白山이 있다는 사실은 朝鮮의 도읍도 그 근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朝鮮時代에는 여러 번 遷都했으나, 太白山에서 먼 곳에 도읍할 수는 없다.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太白 이라고 한다. 범과 표범·곰·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 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 하였고, 北史·勿吉傳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太白''이라 하며, 풍속에 그곳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魏書勿吉傳曰國有徒太山魏言太白有虎豹熊狼不害人人不得上山鏽溺…云云 北史勿吉傳曰亦國有徒太山華言太白俗甚畏敬之 揆園史話)."? 太白山은 우리나라 말이다. “한웅(居發桓桓雄)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太白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 오시니 이곳을 神市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 三聖紀全 下篇)." 역사를 남의 나라 말로 기록하나? 역사를 뒤바꾸면서 우리나라 말까지 제 것이라 우긴 것이다. 이제껏 太白山이 남의 나라 말인 줄 알고 太白山, 太白山 했단 말인가.
"이 때에 한 곰족(熊族)과 한 범족(虎族)이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신단수(神檀樹)에 와서 빌기를 '원하옵기는 변하여 신계의 백성(神戒之氓)이 되게 하옵소서' 하였다. 환웅(桓雄)이 이 말을 듣고 '가르칠만하다'하고, 이에 주술(呪術)로써 뼈를 바꾸고 정신을 고쳐 신(神)이 보낸 깨우침을 가지고 영(靈)을 삼았다. 그리고 쑥(艾 : 애) 한 줌과 마늘(蒜) 스무 개를 주면서 경계 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체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雄聞之曰可敎也乃以 呪術換骨移神先以神遺靜解靈其艾一炷蒜二十枚戒之曰爾輩食之不見日光 百日便得人形 三聖紀全 下篇)."
이 기록에서 桓雄(거발한한웅)은 熊族과 虎族에게 산(蒜 : 마늘) 스무 개를 준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늘의 자생적인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및 천산산맥 일대 중가리아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기록은 우리민족의 천산산맥 기원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마늘(蒜)은 파(蔥), 쑥(艾)과 함께 아득한 태고적부터 우리 겨레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소중한 식품이며 약재이다. 우리의 옛 문헌을 살펴보면 마늘의 기원을 추측할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파미르 고원에는 ''마고성(麻姑城)''이라고 하는, 바둑판처럼 네모지게 생긴 城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천부단(天符壇)''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지상천국 이었다. 여기에 4 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형제 중의 하나가 禁忌를 범하여 4 형제 모두가 쫓겨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연대책임을 지운 것이다.
쫓겨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맏아들은 천산산맥을 지나 북쪽으로 가고 둘째는 동쪽 중국으로, 셋째는 서쪽 중동지방(수메르지역)으로, 넷째는 남쪽 인도로 가서 각각 인간을 다스렸다. ''환국(桓國)''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麻姑城''을 가리킨다. 또한 ''桓雄''은 이들 형제 중에서 직계 宗孫이었다. 桓雄은 天山山脈을 지나서 요동, 만주 등의 기름진 땅에 도착하여 농경사회를 일구었는데 이때 파미르 고원에서 가져온 파와 마늘이 나중에 여러가지로 큰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신계지맹(神戒之氓) : 맹(氓)이라 함은 外來의 이주민, 외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마늘(蒜)은 天孫(神國)의 의미를 쑥(艾)은 토착민(氓)의 의미를 갖는다.
코리(Khori)族이 고리국(槀離國)사람? 비리(卑離)가 부이르 호수? 蒙古族은 1270 년 이전까지는 蒙古高原에 살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았다.
수백 개씩 城을 쌓은 高句麗나 百濟를 서슴없이 유목국가라 부르는 것이 이 땅의 사학자들이다. 유목국가에 대한 개념 정립부터 안돼 있어서 그렇다. 하기야 東洋史를 날조한 인간들도 高句麗나 百濟가 수백 개씩 성을 쌓은 기록을 남기고도 遊牧民族이라 우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蒙古高原과 티벳고원에 가보면, 유목민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천막 치고 살다가,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천막을 걷고 가축을 몰아서 간단하게 이동한다. 가축만 빼면 천막 안에 있는 것이 遊牧民이 가진 전부다. 유목민에게 그 이상의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蒙古高原에 蒙古族이 살게 된 것은 12 세기 후반이고, 티벳고원에 티벳이 살게 된 것은 明 때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유적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었다. 수시로 이동하는 유목민에게는 高度文明을 개발할 시간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이삿짐이 간단해야 하니까, 고도문명을 개발해야 할 이유도 없다. 정착생활은 문화의 기원이다.
匈奴도 유목민이라 오르도스(鄂爾多斯)로 이주 했다고 간단히 날조 당했다. 그러나 오르도스는 천문기록으로 나타나는 高句麗 疆域이다. 蒙古年表 대로 기원전 4 백 년경에 匈奴族이 오르도스로 이주 했다면, 우리나라 강역을 빼앗긴 것이고, 보통 큰일이 아닌데, 桓檀古記 어디에도 匈奴族을 포함해서 蒙古族의 침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기원전 425 년 부터 삼신영고(三神迎鼓)의 제사를 지냈고, 감찰관을 파견하여 효도 잘 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고, 燕나라 사신이 새해 문안인사를 올리는 한가한 얘기나 있고, 다만 구물(丘勿) 檀帝가 붕어하고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한 것이 큰 사건이다. 성을 쌓거나, 燕나라가 변두리나 遼西에 침범하다가 내쫓긴 것이 가장 큰 사건이다.
匈奴나 蒙古에 대한 기사라고는 온통 한가로운 얘기뿐이다. “甲申 원년(B.C. 2137) 天皇(4 世 檀君 烏斯丘)의 동생 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다(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 檀君世紀)." “戊寅(B.C. 703)년에 흉노(凶奴)가 番韓에 사신을 파견해 天王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칭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戊寅凶奴遣使番韓求見天王稱臣貢物而去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下)."
“甲辰 6 년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 하시고 곧 그 땅에 封하니 그가 흉노(凶奴)의 조상이 되었다(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遷于弱水終身棘置後赦之仍封其地是爲凶奴之祖 檀君世記)."
弱水 :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 내리는 강, 부력(浮力)이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 앉는다고 한다. 옛날에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강이다. 천문기록으로 찾은 한국사에서는 약수의 위치를 티벳고원 동쪽으로 비정한다. 옮겨진 지명이다.
凶奴 : 곧 흉노(匈奴)이며 지금의 몽고지방에서 살았다. 후에 고구려에게 쫒겨 티벳으로 들어간다.
蒙古가 蒙古高原에 없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日本이 베낀 大震國의 일식기록이다. 日本이 베낀 710 년에서 792 년까지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이북이다. 蒙古高原이 蒙古 땅이라면, 黑龍江 상류의 黑水女眞을 숙여진(熟女眞)처럼 전력화하지 않고서는 蒙古高原 이북을 지킬 수 없다. 수초나 찾아 떠돌도록 방치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蒙古高原이나 오르도스에서 티벳고원 북부의 漢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가. 중국이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했다고 날조한 결과, 종이 위에서 匈奴가 오르도스로 이동했던 것이다.
천문기록으로 살핀 高句麗의 강역이 동아시아 북부로 나타난 이상, 新羅가 揚子江에서 건국하고 百濟가 동북아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高句麗가 滿州에서 소국으로 출발했다던가, 百濟와 新羅가 韓半島에서 건국했다는 주장은 성립할 여지가 없다. 고리국[槀離國 : 北夫餘의 시조 해모수(解慕漱)의 조상이 槀離國 사람이다] 역시 蒙古에 없었다.
3) 축소된 회대, 해대. 그러나 중토는 급팽창했다
우리민족은 하늘의 자손(天孫民族)으로 하늘의 들판(天坪)에서 살았다. 우리나라는 하늘나라(桓國)로 하늘의 통치자(天王, 天皇)가 다스렸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군대(天兵)를 일으켰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신농씨(神農氏)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뜻을 크게 품고 서쪽에서 여러 번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淮垈) 사이를 차지 하였다(蚩尤天王見神農之衰遂抱雄圖屢起天兵於西進據淮岱之間)
◀ 산해경에 나타나는 치우의 형상
三聖紀全 下篇 및 三韓秘記를 인용한 太白逸史 神市本紀의 기사다. 그런데 三韓秘記는 中國을 대국으로 상정한 책으로 李氏朝鮮에 들어와 쓴 책이다. 그러므로 慈烏支 한웅이 겨우 中土를 정복 하면서도 뜻을 크게 품어야 했던 것이다.
神農氏는 배달의 제후다. 그러니까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한 인물이 절대 아니다. 배달나라 10 世 갈고(葛古) 한웅 때도 神農과 공상(空桑)을 기준으로 영토 경계를 정했다. 葛古 한웅은 기원전 3071 년에 즉위했고, 慈烏支 한웅은 기원전 2707 년에 즉위했다. 慈烏支 한웅 때는 少典의 아들인 神農의 후손 神農氏가 中土를 다스리고 있었다.
(神農 이전에) 伏羲는 서쪽 변방(西鄙)에 봉토를 받더니 직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 하였다(伏羲旣受封於西鄙位職盡誠 太白逸史 神市本紀)
神農과 軒轅, 유망(楡罔), 高辛 등이 난립한 中土는 중국 대륙 서쪽의 변방(西鄙)에 있었던 것이다.
치우(蚩尤)는 청구(靑邱)에 우뚝 서 만고에 무성(武聲)을 떨치므로, 회대(淮垈)의 모든 왕이 거기에 쏠리니 천하에 능히 칠자가 없도다(蚩尤起靑邱萬古振武聲淮岱皆歸王天下莫能侵 檀君世紀)
靑邱는 본래 배달 開天 당시부터 중국 대륙에 있던 우리나라 땅이고, 淮垈 지방은 慈烏支 한웅이 획득한 땅이다. 慈烏支 한웅은 동북아의 神市에서 중국 대륙의 靑邱로 중심지를 옮겨, 제후국 정복에 착수했다. 封土를 재정복한 이유는 제후들이 독립적인 지배자 행세를 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회대(淮垈)에 집을 짓자, 헌원(軒轅)의 족속이 모두 다 신하 되기를 원하며 공물(貢物)을 바쳤다(宅於淮岱軒轅之屬皆稱臣入貢 太白逸史 神市本紀)
淮垈는 西土를 장악하는 전략지역인 동시에 西土 안에 위치했던 것이다. 또한 淮垈는 東土(배달나라)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慈烏支 한웅은) 정예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垈)의 땅을 빼앗아 성읍을 삼고, 헌원(軒轅)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分遣精銳西守芮涿之地東取淮岱爲城邑而當軒轅東侵之路 太白逸史 神市本紀)
회대는 원래 淮岱가 아니라 淮垈였다. 淮垈는 淮水에서 泰山 사이 땅이 아니다. 岱山도 泰山의 별칭이 아니다. 어떻게 강 하나, 산 하나로 지명을 붙일 수 있는가. 강과 산 사이의 땅은 삼각형 지형인가. 아니면 강과 산 사이의 최단거리 혹은 최장거리를 폭으로 해서 강 전체로 확대시킨 것인가. 그러면 강줄기가 굽이칠 때마다 淮水의 반대편 끝도 산과 들을 가로지르며 굴곡이 생기나? 역사를 날조 하려고 꾸며낸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는 山海經의 구절은 淮岱가 아니라, 淮垈라는 강력한 증거다. 燕이 怒江 상류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明의 날조사 속에서 揚子江 이남으로 왔고, 중국 남부의 倭와 접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淮垈라 쓰고 揚子江 하류와 黃河 하류 사이라고 설명한 사이트가 있었다. 淮垈가 淮水에서 泰山 사이거나 揚子江 하류와 黃河 하류 사이라면, 慈烏支 한웅이 애써 정복할 가치가 없다. 慈烏支 한웅은 淮垈가 西土로 부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서 정복했던 것이다.
淮垈는 淮水의 터, 다시 말해 淮水가 들어앉은 자리라는 뜻이다. 淮垈는 회수(淮水) 유역에서 발전한 개념으로 揚子江과 黃河 사이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산
① 신산(神山) : 6714 m Mt.Kailash 수미산(須彌山)
② 안나푸르나(Annapurna) : 8091 m
③ 마나슬루(Manaslu) : 8163 m
④ 시샤팡마(Shisha Pangma) : 8012 m
⑤ 초 오유(Cho Oyu) : 8201 m
⑥ 에베레스트 (초모랑마 : Qomolangma) : 8848 m
⑦ 로체(Lhotse) : 8516 m
⑧ 마칼루(Makalu) : 8463 m
⑨ 칸첸중가(Kanchengzungar) : 8586 m
호수① 청해호(靑海湖) : 염호, 중국에서 제일 큰 호수다.
② 남쵸(納木錯)호수
③ 얌드록 쵸(羊卓雍錯)호수
④ 귀호(鬼湖) : 락샤스 탈(Rakshas Tal)호수
⑤ 성호(聖湖) : 마나사로바(Manasarova)호수
도시명
1. 게르체(改則)
2. 초첸(措勤)
3. 동파(仲巴)
4. 사가(薩?)
5. 갼체(江孜)
6. 라오그(然烏)
7. 자율(察隅)
강
금사강(金沙江 : 진사강) - 양자강(長江)의 상류
란창강(瀾滄江 :란창강) - 메콩강의 상류
노강(怒江 : 누장강) - 살윈(Salween)강의 상류
브라마푸트라강(雅魯藏布江 : 야루장뿌강) - 하류(방글라데시)에서 갠지즈 (Ganges) 강과 만나 벵골(Bengal)만으로 빠진다
과거 티벳고원에 있던 지명은 중국 대륙 전체로 확대 되었다. 역사날조를 위한 지명 밀어내기는 거리와 방위 등을 참고해서 한다. 티벳고원에는 큰 강이 5 개, 중국 대륙도 큰 강이 5 개 이상이다.
티벳고원에 있는 아노장포강(雅魯藏布江 : 야루짱뿌강), 怒江(누장강 : 살윈강이라고도 하며 중국과 미얀마를 흐른다), 난창강(瀾滄江 : 란창강), 금사강(金沙江 : 진사강), 민강(岷江 : 민장강)을 중국 대륙으로 확대시켜 현 黃河와 揚子江의 위치와 비교해보라. 주강(珠江 : 주장강), 長江, 淮水, 黃河, 그리고 동북아의 遼水. 明初까지 중국의 黃河는 金沙江이고, 長江은 怒江 이었던 것이다. 자연히 淮水는 瀾滄江이 된다.
현 黃河는 黃土高原에서 유입된 진흙으로 강물이 누렇다. 金沙江도 그 옛날 강물이 누랬다. 금사강(金沙江)이라는 말 자체가 中土가 원시, 미개 땅이라는 증거다. 金沙江 상류에서 沙金을 채취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朱元璋이 티벳고원 북부에서 빠져 나오면서 黃河 대신 붙인 이름이다. 그 당시에도 사금이나 채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사금을 채취할 때, 강물에 흙을 다 씻는다. 떼거지로 몰려와 사금채취 한다고 상상해보라. 온통 흙탕물이 될 것은 뻔한 일. 요컨대 黃河나, 金沙江이나 다 沙金을 채취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다만 黃河는 黃土高原으로 부터 끊임없이 黃土가 유입되고 黃沙바람의 원인을 제공해 준다.
黑水女眞(生女眞; 東女眞)도 黑水에서 沙金을 채취해 高麗에 조공품으로 진상한 미개 종족이다(高麗史). 무수히 많은 족속들이 고려에 사금을 진상하는 기사들이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들은 주로 사금을 채취해 우리나라에 진상했던가 보다. 그런 미개종족을 가련히 여겨 우리나라에서는 후히 하사품을 내려주었다(高麗史).
江南. 옛 長江(怒江)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다. 상류에서 휘어져 東西로 흐른다. 결국 옛 長江은 상류 끄트머리만 江南이었던 것이다.
江湖. 중국 영화, 중국 소설에 나오는 江湖는 원래는 怒江, 金沙江 유역이다. 怒江, 金沙江 상류 끄트머리에 보면 호수도 꽤 있다. 어떤 사람들이 江湖에 살았나. 요즘 중국 영화에서 보여주는 허풍떠는 무술인이 아니고, 사금 채취하던 미개인이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금사강(金沙江)이다. 明代에야 洞庭湖와 長江사이를 이르는 關中지대를 江湖라 이름하게 되었지만 굳이 江湖의 원류를 찾자면 西土에서 찾아야 한다.
굳이 瀾滄江과 산 하나 사이나 金沙江 하류와 怒江 하류를 통과하지 않더라도 軒轅은 얼마든지 동쪽으로 침입 가능했다. 淮垈는 강 전체였던 것이다. 長江(怒江)과 黃河(金沙江) 사이의 전체 땅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淮垈지, 淮岱가 아니다.
淮垈는 군사전략적 지역이었다. 淮垈 이동[空桑이 淮水(瀾滄江) 이서에 있었다]은 葛古 한웅 이후 우리나라 땅이었다. 淮垈(怒江과 金沙江 사이) 以西는 예탁(芮涿)이다. 淮垈 남부는 怒江이 동남아에 바짝 붙어 있으므로 국경까지 다 淮垈라고 불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芮涿은 淮垈 북부의 이서다. 바꾸어 말하면 怒江 상류 以西(혹은 이남. 怒江 상류는 동서라기 보다는 북서에서 남동 방향이다)다. 그래서 “蚩尤天王은 서쪽으로 芮涿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淮垈를 평정하셨다(蚩尤天王西征涿芮南平淮岱 番韓世家)"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재정복한 이후로 海垈, 淮垈는 사실상 海垈, 淮垈의 북부만을 가리켰다. 즉 淮垈는 長江 상류와 黃河 상류 사이였던 것이다. “甲戌 67 년(B.C. 2267) ...... 淮垈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케 했다(甲戌六十七年......定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使虞舜監其事 檀君世紀)." 虞舜에게 맡긴 땅은 長江 상류와 黃河 상류 사이다. 淮垈 이남은 이미 扶蘇, 扶虞, 扶餘의 후손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22 世 檀君 索弗婁[21 世 檀君 소태(蘇台 : 52 년간 在位)는 오가(五加)를 불러 帝位를 물려줄 것을 의논했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 하시며 정치를 서우여(徐于餘)에게 맞기고 싶어 했다. 檀君 蘇台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帝位를 물려줄만한 인물로 서우여(徐于餘)를 선택하고 후계자 수업을 시키려고 薩水의 땅 백리(?)를 封하자, 지위로 보아 당연히 다음 帝位가 자신의 것이라 여긴 우현왕(右賢王) 색불루(索弗婁)가 반대했던 것이다(仍召五加與之議傳位自謂老倦于勸欲委政於徐于餘環薩水百里而封之命....右賢王聞之遣人勸帝止之 檀君世紀)]는 “친히 구한(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殷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 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파멸 시켰다. 이듬해 2 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 주변에서 승전의 하례를 받았다(
親率九桓之師屢戰破殷都尋和又復大戰破之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 檀君世紀).” 索弗婁 檀帝가 殷나라와 싸워 승전의 축하를 받은 黃河 주변은 金沙江 상류다. 전쟁에 진 殷나라는 淮垈 이북으로 밀려났다.
番朝鮮이 이미 岷江 이서에 있어, 淮垈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였다. 중구(中寇)의 침입을 막을 임무를 부여해 索弗婁 이전에 番朝鮮의 위치를 丹江 이남에서 岷江 이서로 옮겼던 것이다.
▲ 중토의 회대(淮垈)와 날조된 회대(淮岱)
“남후(藍侯 : 藍國은 蚩尤의 후손의 세운 나라이다)가 殷나라 淮水의 남쪽 땅에 선모국(鮮牟國)을 세웠다(藍侯立鮮牟國於殷淮南之地 揆園史話)." 淮水 남쪽 땅은 慈烏支 天皇의 中土 정벌 이래로 내내 우리나라 영토였다. 殷나라는 金沙江 상류에서 건국한 나라로 기원전 11, 12 세기에 망했다. 기원전 1284 년, 索弗婁 天皇이 殷나라의 淮垈를 정벌했을 때 부터 中土는 淮垈를 상실했다. 鮮牟國을 세운 땅은 殷나라 남부로 淮水의 북쪽에 있었다. 淮水의 남쪽이라는 저 揆園史話의 기사는 날조다.
乙酉 2 년(B.C. 1236)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오지(奧地)에 까지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垈)의 땅을 평정하였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 檀君世紀)
23 世 檀君 아홀(阿忽) 때의 기록이다. 淮垈의 땅을 평정했는데, 오지(奧地)라는 것이다. 金沙江 북부는 奧地다. 이 역시 현 淮水에서 泰山(太山) 까지가 淮垈라는 날조가 통할 수 없는 말이다. 현 淮水 이북에는 東夫餘가 있었다. 얼마나 곡식이 잘 자라는지, 백성들이 왕(解夫婁)에게 노래까지 지어 받쳤다(正春之謠).
“周나라 穆王 때, 周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여 이 淮垈지방을 할양받아 중원 대륙에 空前無後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저 서언왕(徐偃王)의 이른바 大徐帝國의 터가 바로 이곳 淮垈지방”이라고? 淮水와 岱山(泰山) 사이에 공전무후(空前無後)의 대제국을 건설할 수는 없다. 周나라는 淮垈를 차지하지 못했다. 殷나라 때 우리나라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떻게 제 것도 아닌 땅을 할양해줄 수 있단 말인가. 徐偃王의 정체는 22 世 檀君 索弗婁다.
丙申 원년(B.C. 1285) 11 월 몸소 구한(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殷)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 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파멸 시켰다. 이듬해 2 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 주변에서 승전의 하례를 받고 번한(番韓)의 백성(弁民)들을 회대(淮垈)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丙申元年......十一月親率九桓之師屢戰破殷都尋和又復大戰破之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岱之地使之畜農國威大振 檀君世紀)
시차가 3 백년 가까이 벌어지나, 원래 中奴史家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베끼면서 연대를 정확히 일치 시키지는 않았다. 周, 楚의 침략을 받자 백성을 생각한 徐偃王이 싸움을 포기했다고? 殷나라가 다시 淮垈로 밀려왔다는 뜻이다. 그래서 23 世 檀君 아홀(阿忽)이 또 다시 淮垈를 평정해야 했다.
淮垈가 중국 땅 가운데 제일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고? 하기야 淮垈는 티벳고원에서는 제일의 요충지였다. 淮垈 너머에는 그나마 큰 강의 상류조차 없으니까. 우리가 알고있고 사용하고 있는 현재의 지명들은 明의 대륙점령을 기화로 中土(西土)에서 대륙으로 옮겨진 것이다.
“番韓은 太子(扶婁)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扃堂)을 일으키고 아울러 三神을 태산(泰山)에서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三神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사(淮泗 : 淮水와 泗水) 지방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番韓以太子命令境內大興扃堂幷祭三神于泰山自是三神古俗大行于淮泗之間也 番韓世家 上)." 그런데 番韓은 저 당시 淮垈가 아니라, 丹江 이남에 있었다. 扶餘 또한 淮垈 이남에 있었다.
番韓世家는 1520 년에 이맥(李陌)이 쓴 太白逸史의 일부다. 1520 년에도 淸은 揚子江 이북에 버젓이 존속 했지만, 역사날조는 揚子江 이남까지 차지한 이후에 했다. 아직은 明의 역사날조 뿐이었다. 明이 揚子江 하류에서 黃河 하류까지를 淮垈라 날조한 결과, 淮垈 안에 泰山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三神을 태산(泰山)에서 제사지내자, 三神을 받드는 옛 풍속이 淮泗 지방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泰山은 오악(五嶽)의 하나로 우리나라 聖山이다. 원 泰山은 우리나라 땅에 있었지, 이 당시 中土였던 淮垈 즉 怒江 상류와 金沙江 상류 사이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泰山이 티벳고원 남부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丹江 이남에는 항산(恒山)이 있었다. 五嶽 가운데 둘이나 丹江 이남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산(泰山)은 오늘날의 그 자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 태산정상(泰山頂上)에서,,건물이 산정을 흉물스럽게 차지하고 있다.
泰山에는 도교(道敎)의 여신(女神)으로 추앙받는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사당이 있다.
후진(後晋 : 936-946)때 기록에서는 태산(太山)으로, 宋(1060)때 기록에서는 태산(泰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태산(泰山)은 山東省에 있는데 대(岱) 또는 대산(岱山)이라 쓰였고 『史記』권6에는 태산(泰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史記』에서 처음에 대(岱)로 불리웠다고 했으며 單字로 표현 되었으나 두 문자로 만들어 현재까지 태산(泰山)으로 2 천년 동안 불리웠다면 그동안 아무것도 다른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산(太山)의 명칭이 후진(後晉)때 사용되었다는 것은 한(漢)나라 때부터 宋(960-1126)때까지 대산(岱山), 태산(太山), 태산(泰山)이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中奴가 티벳고원 북부를 빠져 나오면서 큰 강 둘을 黃河와 長江으로 이름을 붙이자, 淮水는 그 가운데 작은 강으로 귀착 되었다. 淮垈는 黃河 상류와 揚子江 상류 사이에서 黃河 하류와 揚子江 하류 사이가 되었다. 明 때의 淮岱다. 그래도 淮垈는 그 폭이 자그만치 500 km가 넘는다. 淮垈, 淮水 유역이라 부르기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넓은 지역이다. 이 淮垈마저 날조 역사 속에서나마 우리나라에 주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淸은 “淮水와 泰山 사이”로 축소했다. 그러면서 태산을 대산(岱山)이라고 우기는데, 그래야 淮岱가 되기 때문이다.
▲ 중토의 해대(海垈)와 날조된 해대(海岱)
해대(海垈) 일대는 일찍부터 그(蚩尤氏)의 부족들이 자리잡고 앉은 땅이 되었다.
淮垈에서 보았듯이 해대 역시 海岱가 아니다. 원래는 海垈다. 黃海와 泰山 사이가 海岱가 된 것도 淸 때 이르러서다. 黃海와 泰山. 海泰밖에 안되니까, 泰山을 岱山이라고 우기면서 해대(海岱)로 고쳤다. 그러나 한 점 산에서 바다까지를 지명으로 붙일 수 있는가.
泰山에서 黃海에 이르는 경계는 무수히 많이 존재할 수 있다. 山東半島 반대편에 泰山이 있으니까. 적당히 우길 수 있다고 생각 했겠지만, 실제로 각자 선을 그어보면 천차만별이다. 중국 대륙이 커서 그 땅 차이가 별것이 아니다 생각할지 몰라도 소위 春秋戰國 시대에는 백 개가 넘는 나라가 난립하고 있었다. 淸은 그 당시 海岱에 濟와 魯가 있었고, 인근에는 宋, 鄭, 燕 등이 있었다고 날조했다. 세계 어디에도 그렇게 애매하게 지명을 정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과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海岱인지 海岱 밖인지 알 수 있는가. 지명이란 강과 산을 경계로 해서 정하는 법인데, 海垈, 淮垈는 물론 중국의 현 행정구역 까지도 지형을 무시하고 있다. 明 때도 해대는 海垈였다. 바다가 있는 지역이란 뜻이었다.
“薩水가 곧 辰韓의 남해안(薩水乃辰韓南海岸也)”이라는 馬韓世家 및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江·淮의 수군 선단을 이끌고 수백 리에 이르도록 바다(揚子江)에 떠서 먼저 浿水(漢水)로 들어갔다(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數百里浮海先進入自浿水 高句麗本紀).”는 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보듯이 중국이 우리나라 영토를 갈취하고 역사를 바꾸기 전까지는 웬만큼 큰 江은 다 바다(海)라고 불렀다.
창수사자(蒼水使者), 창해역사(滄海力士)는 薩水를 바다로 가진 나라의 使者, 力士라는 뜻이다. 즉 蒼水, 滄海는 ‘바다처럼 큰 강’이라는 의미로 곧 大國 이라는 뜻이다.
中土의 바다 역시 강이다. 아노장포강(雅魯藏布江), 怒江, 난창강(瀾滄江), 金沙江, 岷江(金沙江 끄트머리와 雅魯藏布江만 中土다)은 모조리 큰 강 상류에 불과 함에도 바다라 불렸던 것이다. 海垈는 그 가운데 하나의 유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滄海, 東海 너머에 우리나라가 있으므로 서쪽에 치우친 雅魯藏布江, 怒江, 瀾滄江은 바다는 될 수 있어도 滄海, 東海는 될 수 없다. 옛날에는 黃山江(揚子江)도 바다라 불렀으므로 黃山江 상류인 金沙江이나 岷江 가운데 하나가 滄海였다. 岷江 유역은 전부 우리나라 땅이니까, 金沙江(옛 黃河)이 滄海였던 것이다. 21 世 檀君 소태(蘇台)가 索弗婁에게 제위를 물려주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나라를 버리고 밭을 갈며 살았다는 東海의 해변가는 바로 金沙江 유역이다. 海東은 金沙江 동쪽이다. 海東盛國은 예전 黃河 金沙江의 동쪽에 있는 大帝國이라는 뜻이다.
위의 지도에서 보라색으로 표시된 것이 해대이다. 주황색은 朱元璋이 날조한 海岱, 분홍색은 淸이 날조한 海岱다. 淸의 海岱는 明의 海岱 내부에 위치한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재정복한 이후 海垈, 淮垈는 사실상 海垈, 淮垈의 북부만을 가리켰다. 즉 海垈는 淮水 상류와 黃河 상류 사이였던 것이다.
海垈는 黃河(金沙江) 유역에서 발전한 개념이다. 하지만 淮水(瀾滄江)와 遼水(岷江)가 金沙江 보다 길이가 짧다. 中奴의 江北이 番朝鮮 땅이므로 이후 전쟁터가 된 海垈는 金沙江 발원지 까지다. 海垈도, 淮垈와 마찬가지로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海垈의 북부만을 가리켰다.
淮垈가 金沙江 상류와 怒江 상류 사이의 땅이기 때문에 海垈는 淮垈와 일부 겹친다. 그래서 海上[강(상류)이 모이는 지역]을 “海垈와 강회(江淮)”라 표현한 것이다. 海上 − 海垈 =江淮. 江淮는 長江(怒江) 상류와 淮水(瀾滄江) 상류 사이를 말한다. 淮垈의 서쪽 절반이다.
“무릇 海垈와 강회(江淮)의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온 지 오래되었는데, 殷나라의 도가 쇠퇴해지자 남후(藍侯)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하여 들어간 것이다(盖海岱江淮之地 爲東人占居者已久 及至殷道之衰 而藍侯與諸侯進攻 揆園史話)." 江淮 역시 북부만을 가리켰다.
遼水가 桑乾河인 明 때의 날조 海垈는 黃河 하류였다. “海垈와 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漢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었다.(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는 揆園史話의 淮垈는 현 淮水에서 桑乾河 까지이다.
“개국(蓋國)은 거연(鉅燕) 남쪽에 있고, 倭의 북쪽이며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蓋國在鉅燕南倭北 倭屬燕 山海經).”에서 倭와 접했다던 연(燕)은 어떻게 발해만까지 진출했나. 淮垈를 淮水와 岱山 사이로 날조한다고 해도 海垈가 黃河 하류라면, 연(燕)은 淮水 이남이나 長安 쯤에 있어야지, 발해만(渤海灣)으로 진출할 수가 없다. 그러나 淸이 海垈를 岱山과 黃海 사이로 고치자, 燕은 거뜬히 渤海灣에다 長城까지 쌓은 것이다. 실제로 渤海灣에 長城을 쌓은 나라는 百濟다. 燕이 倭와도 접하고 渤海灣에다 長城까지 쌓을 정도면, 秦이 아니라, 燕이 中土를 통일했다. 萬里長城도 秦이 아니라 燕이 쌓아야 했다. 그래서 淸은 중국 대륙에서 倭를 없애버렸다.
왜(倭)는 燕에 속한다(倭屬燕). 이 말은 조그만 中土에서 빠져나와 揚子江 이남만을 차지했던 明 때 고친 날조기사다. 이 당시에는 戰國 七雄의 하나인 燕이 발해만이 아니라, 중국 남부에 있다고 날조했던 것이다. 淮垈 너머에 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春秋戰國 시대에는 倭가 없었다. 연대를 일치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燕이 倭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이다.
倭를 거느린 燕은 5 胡 16 國에 속하는 北燕, 後燕, 西燕(西燕은 존속기간이 짧다고 16 國에 넣어 주지도 않는다. 947 년에서 950 년 까지 있다 망한 後漢도 있거늘, 그래도 西燕은 10 년이나 버틴 나라가 아닌가), 前燕, 南燕이 아니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은 모두 揚子江 이북에 있었다고 날조했기 때문이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은 中土 서쪽에 산재한 호수 너머에 있었다.
▲ 중토의 회대(淮垈)와 날조된 회대(淮岱)
보라색이 진짜 회대다. 주황색은 朱元璋이 날조한 淮垈, 분홍색은 淸이 날조한 淮岱다. 淸의 淮岱는 明의 淮垈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 淮垈는 군사전략적 지역이었다. 그래서 “蚩尤天王은 서쪽으로 예탁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淮垈를 평정하셨다”(번한세가)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날조 淮岱는 군사전략상 아무 쓸모도 없는 지역이다.
中土를 확대시키자, 淮垈와 海垈 즉 揚子江에서 遼水(桑乾河)까지는 우리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燕은 揚子江 이남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明의 날조 역사 속에서도 揚子江에서 桑乾河, 그리고 桑乾河에서 동북아 전체가 우리나라 강역이었다.
淸이 우리나라 영토를 가로채면서 遼水를 현 遼水까지 밀어내자, 淮垈, 海垈는 일시에 揚子江에서 현 遼水까지로 확장된 셈이다. 海垈가 淮水에서 현 遼水까지라는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하다. 더구나 탐욕스러운 濊貊族(淸)에게는 淮垈조차 너무 커 보였다. 그래서 淮垈를 淮岱로 날조해 淮水에서 泰(岱)山까지, 海垈를 海岱로 날조해 泰山(岱山)에서 黃海까지로 축소하고 나자, 燕은 발해만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티벳고원 내의 淮垈, 海垈는 中土로 부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군사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지만, 축소한 淮岱, 海岱는 무가치한 지역이다. 明이나 淸이 날조한 淮岱, 海岱를 아무리 점령하고 있어 봐야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淮岱, 海岱를 우회해서 침공하면 되니까. 요컨대 淮岱, 海岱를 만든 이유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날조 中奴史 속에서 우리나라는 遼水와 泰山(岱山) 사이는 정복하지 못한 셈이었다. 그래서 배 타고 黃海를 건너가 淮岱와 海岱를 정복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李成桂와 朱元璋은 우리나라의 한단사(桓檀史)를 말살하고 中奴가 갖기로 합의했다. 날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축소된 淮岱와 海岱조차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春秋戰國시대의 날조 강역도에는 海岱에 齊, 魯를 그려 두었다.
소위 春秋戰國時代의 疆域圖에는 齊·楚·秦·燕·魏·韓·趙를 戰國七雄이라며 모조리 중국 대륙 동부, 그것도 揚子江 이북에다 그려 놓았다. 齊는 山東半島에, 楚는 漢水 유역에, 秦은 長安 일대에, 燕은 桑乾河 이서에, 魏·韓·趙는 현 黃河 중류 東岸에 있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楚는 남방에, 秦은 서방에, 魏·韓·趙는 중앙에 있었다고 한다. 결국 春秋戰國 시대의 中土는 揚子江 이북 동쪽이라는 소리다. 그러면서도 秦始王은 萬里長城을 오르도스 이남에 쌓았다. 티벳고원이나 揚子江 이남의 적을 막는 게 더 시급할 텐데도. 戰國七雄을 揚子江 이북 동쪽에 다 몰아 넣었으니, 정복활동을 하려고 해도 戰國七雄끼리 싸워야 한다.
淮垈와 海垈에 상응하는 말로 패대가 있다. 그런데 패대의 한자는 浿帶다. 역사를 날조하면서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 한 가지는 浿水는 淮水(瀾滄江)나 黃河(金沙江)와 지형이 같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浿水(漢水)와 나란히 흐르는 강이 양쪽에 없기 때문에 垈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癸丑年은 索弗婁 임금의 원년이다. 商나라(殷나라)와 싸워 이긴 후 얼마 있지 않아 화해하였다. 뒤에 다시 크게 싸워 商나라를 깨트리고 그 국경 안까지 들어가서 마침내 해상(海上)에 주둔하니 많은 백성들이 다시 점차 옮겨갔다[癸丑歲壬儉索弗婁元年 與商戰破之 尋和 後 復大戰破之進入其境 遂屯海上 庶民復漸遷徙 揆園史話]."
江을 끼고 있는 땅에 주둔하고 이주했다는 뜻이지, 수상가옥을 지었다는 뜻이 아니다. 海上이란 여러 강이 모이는 땅을 일컬었다. 바다 위가 아니다.
海上은 원래 5 대강이 모여 있는 티벳고원 남부다. [雅魯藏布江은 탕구라 산맥 중간에서 부탄으로 빠져나가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 아시아 남부를 흐르는 대하천. 길이 2,900 km. 유역면적 93 만 ㎦. 브라마푸트라는 산스크리트로 ‘聖者의 자식 이라는 뜻)강이 된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재정복한 이래로 中土의 4 대강 상류(雅魯藏布江은 하류)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揆園史話의 저 기사에서는 海上이 金沙江 상류만을 가리킨다. 揆園史話라는 책을 보면 볼 수록 北崖라는 인간은 어떻게 저리도 거짓말을 잘할 수 있을까 허탈해 진다.
“黃河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番韓의 백성들(弁民)을 淮垈의 땅으로 옮겼다(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岱之地 檀君世紀)." 東中國海, 南中國海도 바다라 불렀기 때문에, 그때그때 문맥에 따라 진짜 바다인지, 강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진짜 바다를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燕나라와 齊나라의 바다(燕.齊海上) 위에 괴이한 방사(方士)가 있다(而燕齊海上之方士傳其術不能通 史記 秦始皇本紀)”에서 燕나라와 齊나라가 江을 끼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江이라고 해봤자, 怒江 상류 이남에 있는 것으로 燕나라와 齊나라의 바다는 雅魯藏布江의 지류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 이르니(還至海上)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神女가 함(柙)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緋衣)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檀君을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還至海上赤龍呈祥 神女奉柙 有一童子 衣緋衣 從柙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揆園史話 檀君紀)” 돌아오는 길에 이른 바다는 薩水(丹江)다. 南海上長은 薩水上長이다.
"隋나라 왕 양견(楊堅 : 文王)은 은밀하게 해칠 마음을 품고 감히 원수 갚기 위해 군사를 출병시켜 몰래 위충(韋沖)을 보내어 총관(摠管)이라는 이름으로 관가를 부수고 邑落에 불지르고 약탈 하였다, 이에 皇帝(嬰陽武元好太烈帝)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 山東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隋主楊堅陰藏禍心敢出讎兵密遣韋沖摠管爲名潰破管家焚掠邑落乃遣將兵擒殺賊魁山東平服海域 太白逸史)." 물론 海域도 金沙江 상류 양안이다. 山東, 山西는 中土의 金沙江 상류 이서에 있었다.
탁록(涿鹿)은 어딘가. 慈烏支 한웅은 “서쪽에서 여러번 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淮垈의 사이에 거처했다. 軒轅이 일어나자 즉시 涿鹿의 벌판에 나아가 軒轅을 사로잡았다(屢起天兵於西進據淮岱之間及軒轅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 神市本紀)."
우선 涿鹿은 벌판이다. 淮垈에 집결한 후 涿鹿의 벌판에 나아간 것으로 보아, 지형상 淮垈 서쪽이나 북쪽에 있다. 또 涿鹿에는 江도 있다. 軒轅이 “涿鹿의 江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영위(營衛)하게 하여 살았다(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 神市本紀, 史記).” 이제 남은 단서는 涿鹿이라는 한자. 涿鹿. 탁은 치다, 물방울 떨어지다, 고을이름.문지르다의 뜻이 있다. 鹿은 사슴, 산기슭, 방형 모양의 쌀창고, 權座라는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땅은 라사(Rasa)가 있는 평야지대다. 라사는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강의 상류인 雅魯藏布江의 지류 라사강(카츄)이 이루는 곡저평야(谷底平野)에 자리한다. 谷底平野는 골짜기 안에 발달한 평야다. 즉 골짜기가 사슴 뿔 형상(V)을 이룬다. 라사강이 있으니, 물방울도 떨어진다 하겠다. 예탁(芮涿)은 涿鹿의 또 다른 이름으로 추정된다.
▲ 라사 시내의 포탈라 궁
“한때 天下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涿)의 북쪽에 대요(大撓)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倉頡)이 있었으며 서쪽엔 軒轅이 있었다?(時天下鼎峙涿之北有大撓東有倉頡西有軒轅 三聖紀全 下篇)." 여기서의 天下란 티벳고원 북부도 아니고, 涿鹿 일대만을 가리킨다. 李氏朝鮮 이전에는 中土 일부를 천하라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三聖紀의 저 기사는 잘못된 기사이다).
“이 때 반고(盤固)라는 자가 있어 기이한 술책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神將들을 거느리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遂)와 함께 삼위산(三危山)의 납림동굴(拉林洞窟)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諸畎)이라 하고 또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時有盤固者好奇術欲分道而往請乃許之遂積財寶率十干十二支之神將與共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君謂之諸畎是謂盤固可汗也 三聖紀全 下篇)." 저 부분만 빼면 앞뒤 문장 연결이 자연스러워진다.
盤固를 빼고 써보면, 안파견(安巴堅) 한인(桓因)이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을 이치로 교화하여(在世理化) 자손만세의 큰 법(洪範)을 세워라 하셨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太白山 꼭대기의 神檀樹 밑에 내려 오시니 이곳을 神市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君勿惜厥勞率衆三千而往開天立敎在世理化爲萬世子孫之洪範也......於是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
三聖紀全 下篇의 나머지 기사는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天子國이라는 관점에서 쓴 글이다. 원동중(元董仲)은 高麗 시대 사람이고, 三聖紀全 下篇은 李氏朝鮮 때 첨삭됐다.
안함로(安含老)의 三聖紀全은 “丙辰年, 周나라 考王 때(丙辰周考時)”를 기준으로 이전은 實史를, 이후는 날조사에 따라 식민지의 왕을 연대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다. 三聖紀全 上篇의 백미가 바로 “丁未(B.C. 194)년 漢나라 惠王 때 燕나라 추장(酋長)이었던 衛滿(丁未漢惠時燕酋衛滿)”이다. 燕나라 장수는 추장(酋)인데, 酋長의 나라들을 통일한 秦, 漢은 皇帝의 나라? 이것이 中奴史의 진실이다. 酋長들을 하나같이 皇帝로 격상 시켰다.
八條法을 만든 것은 大夫餘 때가 아니라 索弗婁 天皇 때였다. “衛滿이 이(解慕漱)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 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 하였다. 이로부터 三韓의 무리는 거의 漢水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群雄)들이 요해(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三韓所率之衆殆遷民於漢水之南一時群雄競兵於遼海之東 三聖紀全 上篇).”는 대목도 거짓이다.
우리나라 강역을 韓半島와 그 이북으로 상정하고 우리나라 영웅들이 발해만 동쪽에서 전쟁을 했다는 소리다. 遼海(渤海灣)가 中土로 변한 것은 淸碑를 세우고 부터다(그 이전 까지는 李氏朝鮮의 땅이였다). 날조사에서 三韓을 부족국가로 만들어 漢水 이남에 집어 넣었다. 衛滿은 解慕漱와 싸운 적도 없다. 衛滿이 箕準을 속이고, 番朝鮮을 빼앗자, 箕準이 瀾滄江(淮水)으로 들어갔다.
“夫餘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東明(進據夫餘故都稱國東明)”이라고(?) 國號가 아니라 帝號를 지으니 新羅의 옛 땅(是乃新羅故壤也)이 아니라, 槀離國의 옛 땅이다. 高鄒牟가 “解慕漱를 제사하여 太祖로 삼다(祀解慕漱爲太祖)”는 것도 李氏朝鮮人이 썼다는 증거다. 太祖, 世祖 등의 묘호(廟號)는 大震國 시대부터 등장한다. 安含老의 三聖紀全이 전반부와 후반부의 시각이 다르다는 점, 후반부가 거짓 역사라는 점 등은 安含老의 三聖紀全 역시 첨삭되었음을 말해준다.
李氏朝鮮은 온갖 역사책을 다 뜯어고쳤다. 安含老와 元董仲의 三聖紀全 뿐만이 아니고, 檀奇古史도 형체를 알 수 없을 만치 완전히 뜯어고친 檀君世紀다. 李氏朝鮮이 존재한 기간 내내 역사날조가 이루어졌다. 檀奇古史는 李氏朝鮮이 멸망하기 직전에 최후로 날조한 책이다. 역사날조는 李氏朝鮮을 멸망에 이르게 한 병이었던 것이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포탈라궁은 17 세기 중반에 지었다고 합니다. 이미 몽고가 中土를 정복한 13 세기에 서양인들이 티벳고원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PECHELI. sive PEKING. IMPERII SINARVM PROVINCIA PRIMA 도 그때 서양인이 그린 것입니다.
포탈라궁이 동양식 건물로 보입니까? 포탈라궁은 서양인이 만든 건축물입니다. 高句麗人이 만든 唐의 長安城 위에 만든 것입니다.
한민족의 이동경로
우리민족은 神市氏가 남하하기 전에 살던 한국(桓國) 땅(시베리아)으로 도로 진출했다. 녹색은 세부 진출경로
楡罔의 도읍 空桑은 西土, 즉 티벳고원 안에 있었던 것이다. “少昊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空桑으로 들어가더니 楡罔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涿鹿으로 들어갔다. 蚩尤氏는 이에 空桑에서 제위에 올랐다(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涿鹿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는 揆園史話 太始紀는 사실이 아니다. 慈烏支 한웅은 배달 14 世 天皇으로 즉위한 후 정복활동에 나섰다. 涿鹿으로 되돌아 들어갔다는 것도 거짓이다. 楡罔이 涿鹿으로 도망친 것은 涿鹿이 慈烏支 한웅의 군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회대(淮垈)와 기연(冀兗)의 땅을 모두 점거 하였으며, 탁록(涿鹿)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 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淮岱冀兗之地 盡爲所據乃城於涿鹿宅於淮岱遷徙往來號令天下 揆園史話 太始紀)
中土가 중국 대륙일 때나 가능한 얘기다. 동아시아의 통치자가 도읍할 곳이 없어서 고작 미개 땅 티벳고원 안에 皇城을 짓고 살았단 말인가.
우선 눈이 괴롭다.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은(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華夏가 사방의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꼴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시아를 다스리는 대제국의 지배자가 번창한 도시를 다 팽개치고, 고작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는 땅에 들어가, 皇城만 번듯하게 지어놓고 살겠는가. 어느 나라 지배자가 화려한 도시를 팽개치고, 빈민굴에 皇城을 지어두고 산단 말인가.
慈烏支 한웅이 거처한 宮은 三淸宮이다.
자부선생(紫府先生)께서 칠회제신(七回諸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 : 궁전의 층계)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慈烏支 한웅이) 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中土를 정복한 후 동아시아의 통치자답게 웅장한 궁을 세우고, 거기서 살았다. 紫府先生에게 거처하라고 지어 주었다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해도 宮이 될 수 없다. 宮은 황제나 왕이 거처하는 건축물이다. 紫府先生은 제후조차 아니지 않는가. 慈烏支 한웅이 거처한 三淸宮에 紫府先生도 같이 살았던 것이다. 三淸宮에 慈烏支 한웅이 계시니까, 共工, 軒轅, 倉頡 , 大撓 등이 와서 알현하는 김에 紫府先生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서쪽에서 天兵을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 부터 군사를 진군시켜 淮垈 사이를 차지했다(起天兵於西又自索度進兵據有淮岱之間 三聖紀全 下篇, 太白逸史 神市本紀)." 淮垈의 안으로 군대를 진입시킨 것은 空桑이 淮垈에 있었기 때문이다. 空桑 동쪽은 葛古 한웅 이후 우리 땅이다. 결국 군대를 집결시킨 곳은 空桑 동쪽이다. 慈烏支 한웅은 楡罔의 도읍 코앞에다 군대를 포진시킨 것이다.
空桑의 후보지는 昌都와 제꾸(腊久) 정도. 강가에 있는 昌都가 空桑일 가능성이 더 높다. 옛날에는 육상교통보다 수상교통에 의지했기 때문에 도읍을 강가에 정했다. 그러므로 慈烏支 한웅이 空桑에 이르기 위해 건넌 洋水는 瀾滄江이다. 4700 년 전의 도시가 오늘날까지 도시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결국 瀾滄江 서안 어디엔가 空桑이 있었던 것이다.
空桑이 瀾滄江 서안에 있었으니까, 空桑 以東으로 영토경계를 정한 葛古 한웅 때부터 淮垈 일부는 우리나라 땅이었다. 空桑과 그 주변을 지배한 楡罔을 패퇴시킨 후로는 淮垈 전체가 우리나라 땅이 되었다. 지리상으로도 涿鹿은 空桑을 획득한 후에 정복했다. 그러므로 “淮垈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涿鹿에 城을 쌓고 淮垈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軒轅의 무리는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는 잘못 쓴 글이다. 정확한 글은 아래와 같다.
涿鹿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점령한 淮垈에 성을 쌓았다. 이에 軒轅의 무리는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慈烏支 한웅은 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다음, 또 다시 吳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高辛氏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中土에는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高辛氏는 中土의 서쪽, 즉 캐시미르(Kashmir)를 포함한 땅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 배달나라 청구 강역도
慈烏支 한웅 때 동북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白山은 우리나라 영산이 아니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僳黰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한다(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河嶽鹿鈵崷莊 風氣勁雄 曰嫘黰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揆園史話 檀君紀).” 동북아의 풍경이다. 다음 설명에서 神誌氏가 받은 봉토에 대한 더욱 자세한 위치를 알 수 있다.
“神誌氏는 속진국(僳黰國)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메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神誌氏受封於嫘黰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揆園史話 檀君紀)." 만주는 농사에 적합한 지형이다. 그래서 이 땅의 사학자들은 만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곡식이 잘 자라는 기름진 땅으로 女眞族이 살고 있었다. 혈거생활하며 水草를 찾아다닌 女眞族이 유목민이라서 李氏朝鮮人들이 鴨綠江 너머로 건너가 그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李氏朝鮮이 개간한 땅이라 女眞族이 淸을 세운 다음 淸碑를 세워 李氏朝鮮과 사이좋게 그 땅을 나눠가졌다. 다시 말해 떠돌이 미개 유목민족은 沃土인 거대 滿州를 차지한 반면, 고도 농경민족인 우리나라는 비좁은 韓半島의 산악지대만 차지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新石器人처럼 떠도는 유목민족조차 내쫓지 못해서 滿州를 침이나 흘리며 바라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유목민족이 대대로 침입해서 나라를 세운 中奴史가 끝없이 부풀려지는 바람에 유목민족이 뭐 대단한 문명을 가진 민족처럼 날조되어 왔지만, 유목민족이 가진 문명이란 천막과 짐승 몇 마리가 전부다. 고도문명의 유목민족은 오직 東洋史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역사다.
神誌氏의 땅은 북동쪽인데, 滿州가 아니었던 것이다. 神人王儉이 神誌氏에게 주었던 땅은 大興安嶺山脈 이북이다. 우리나라 강역이 시베리아까지 라면서 어째서 大興安嶺 이북을 북동쪽이라 하는가. 朝鮮은 우리나라 강역 일부에서 개국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는 아직 朝鮮의 땅이 아니었다.
高矢氏에게는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는 중국 대륙 동부를 주고서 어째서 神誌氏에게는 동북아 전체도 아니고, 大興安嶺山脈 이북만 줬을까. 이 땅의 사학자들이 버려진 땅이라 단언하는 滿州에는 神市와 太白山이 있었기 때문이다.
慈烏支 한웅 이후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겨와 중국 대륙의 산을 太白山이라 부르고는 있지만, 가짜 太白山에 지나지 않는다. 神市氏가 무리 3,000을 이끌고 처음 정착한 곳은 동북아의 太白山이 있는 神市였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聖山이기 때문에 비록 몸은 중국 대륙에 있으나, 歷代 檀君이 대대로 직접 다스렸던 것이다.
辰韓의 강역은 薩水 이북에서 黃河 하류를 거쳐 大興安嶺山脈 이남이다. 渤海灣도 檀君의 직접 통치지역이니까, 泗沘城(北京)에서 천문관측한 것은 기원전 1916년 부터다. 溫祚는 그 천문대를 접수해서 계속 천문관측한 것이다.
“高矢氏는 靑丘國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昜 五穀豊肥 民皆衣輕暖煖而食肥俍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揆園史話 檀君紀)." 중국 대륙 동부다. 이 당시는 揚子江 이북이었다.
설유(稧兪)의 난을 진압한 후 高矢氏의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했는데, 바로 揚子江 이남이다. 靑邱의 백성이 揚子江 이남으로 건너가 살고, 揚子江 이남 사람들도 檀君에게 복속하자, 高矢氏의 봉토를 변경한 것이다. “夫餘가 남이(南夷)를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天王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靑丘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이의 사람(南夷之人)들도 함께 神人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 하였으니, 후의 眞·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弁諸族 皆是也 揆園史話 檀君紀).” 眞·弁은 3차 辰韓, 弁韓이니까, 南夷가 모두 眞·弁 사람은 아니다. 眞·弁의 뭇 부족들? 中土도 아니고, 고작 揚子江 하류 유역에 여러 부족이 살았을 리가 없다.
列水는 揚子江이다. 열수가 洌水라는 건 날조고, 원래는 列水다. “神農은 列山에서 일어났는데 列山은 列水가 흘러나오는 곳(神農起於列山列山列水所出也 太白逸史 神市本紀)”이라 했다. 揚子江이 발원하는 곳에 列山이 있었던 것이다. 후대에 揚子江 상류만 따로 떼어내 黃河(金沙江)니, 遼水(岷江)니 했지만, 이 당시에는 揚子江 상류까지 포함해서 列水라 한 것이다. 金沙江이 岷江보다 더 크니까, 列山은 金沙江이 발원하는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南‘夷’라 하고, ‘夷’人이라 한 것으로 보아 揚子江 이남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분명하다. 다만 나머지 夷는 1 世 檀君王儉을 ”마음 깊이 복종하여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제왕으로 모셨(完服王化)“는데 반해 南夷는 아직 檀君王儉의 다스림에 복종치 않았던 것이다.
列水 남쪽의 南夷는 朝鮮 개국 10 년 만에 亂을 일으킨 南夷가 아니다. 이 당시는 檀君의 교화가 남쪽으로 淮垈까지만 미쳤기 때문에 南夷는 “갑비고차(甲比古次) 남쪽의 이인(夷人)들(南夷之患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揆園史話 檀君紀)”이었다. 즉 揚子江 이북, 丹江 이남의 사람들을 南夷라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민족의식을 가졌던가. 高麗 시대니, 近代에 들어와서니 분분하지만, 최소한 1 世 檀君王儉 때 부터였다. 배달시대에도 땅을 나누어 수많은 제후국을 만들어내고 그 종족들을 九桓이라 불렀지만, 慈烏支 한웅이 수행한 무수한 전쟁에서 보듯 하나의 민족 이라는 개념은 형성되지 않았다. 1 世 檀君王儉은 朝鮮의 영토를 분할해 제후국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天孫民族이라 자부하며 辰韓을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三國이 서로를 정복하려 한 것도 다 同族이라는 인식에서였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은 산업혁명 이후 이거나 열강이 식민정책에 물불을 가리지 않을 싯점에 서양사학자들의 주장에 의한 민족의 개념이 성립 되었다고 하지만 앞으로의 글에서 구체적으로 풀이 하겠지만 西洋은 高麗의 멸망 이전 까지는 미개의 극을 달렸다. 高麗의 멸망으로 西洋은 東洋을 문화적, 과학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北海에 나라가 있는데 朝鮮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 山海經)." 北海는 현 黃河를 가리킨다. 물가는 물론 강도 포함되지만, 辰韓이 黃海, 渤海灣, 東海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太白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頭嶽에서 제사를 지냈다. 甲比古次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必致祭於壇所也 揆園史話 檀君紀).”
薩水는 辰韓의 남해안이다. 바닷가는 朝鮮의 남해안 丹江을 말한다. 甲比古次는 薩水(丹江) 北岸에 있었다.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사지내던 甲比古次에 관한 기사가 檀君世紀에도 나온다. “檀帝께서 나라 안을 돌아 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海城에 이르러 父老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 檀君世紀).” 21 世 檀君 蘇台 때의 기록이다. 甲比古次(山)는 海城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歷代 檀君은 왜 남쪽을 순행 했을까. 중국 남부에 제후국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薩水가 辰韓의 남해안 이었던 것이다.
티벳고원은 중국 대륙의 축소판이다. 우리나라 땅인 남부를 제외하면, 완전히 똑같아진다. 티벳고원은 큰 강의 상류가 모여 있는 지역이다. 5 대강 雅魯藏布江, 怒江, 瀾滄江, 金沙江, 岷江은 모두 큰 강의 상류다. 雅魯藏布江은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江, 怒江은 살윈(Salween)江, 瀾滄江은 메콩강(Mekong), 金沙江과 岷江은 揚子江의 상류다.
雅魯藏布江은 예전 中土의 珠江(주장강), 라사江은 紅水河(홍수이강)였다. 怒江은 長江, 瀾滄江은 淮水, 金沙江은 黃河, 岷江은 遼水였다. 怒江(長江)과 金沙江(黃河) 발원지에는 호수도 산재해 있다.
원 中土는 강 상류에 호수가 몰려 있는데 반해, 확대된 中土에는 강 하류에 호수가 모여 있다. 티벳고원 남부는 우리나라 영토니까, 호수 위치까지 절묘한 셈이다. 중국 동부에는 호수가 揚子江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모여 있는데, 中土에는 4 대강 너머에 있다.
티벳고원에 있던 珠江(雅魯藏布江), 長江(怒江), 淮水(瀾滄江), 黃河(金沙江)는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다. 遼水(岷江)는 明 때 桑乾河로 옮겨졌다가, 淸 때 난하(灤河)로, 大凌河로, 다시 현 遼水로 옮기자, 中土는 티벳고원 북부에서 중국 대륙에다 동북아 대륙을 합친 넓이로 팽창했다.
中土는 초기 우주가 빅뱅(big bang)을 일으키듯, 급팽창했던 것이다.
갈고(葛古) 한웅이 신농(神農)의 나라와 국경을 획정하여 공상(空桑)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葛古桓雄與神農之國劃定疆界空桑以東屬我 太白逸史 神市本紀).
‘새롭게’ 空桑 동쪽을 얻었다는 의미다. 空桑이 神市氏가 개천할 당시의 배달의 영토 가장자리 즉 白山 근처에 있다면, 기록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토 분쟁이 생겼고, 우리나라 영토가 더 늘어났다는 의미다. 배달나라 10 世 葛古 한웅은 배달의 통치자고, 神農은 배달의 제후이므로 실은 하사했던 封土의 일부를 환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神農의 나라란 神農의 여러 후손들이 다스리던 나라다.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洋水)를 건너 출진하여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空桑)은 지금의 진류(陳留)이며 유망(楡罔)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 제후(諸侯)의 나라를 아울러 합병하니 죽인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 이에 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하여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整師躬率而出陳洋水殺至空桑空桑者今之陳留楡罔所都也時歲之中兼倂十二諸侯之國殺得伏尸滿野西土之民莫不喪膽奔竄 太白逸史 神市本紀)
공상(空桑)은 한자를 봐도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도움이 안된다. 空은 하늘; 비(우)다; 쓸쓸하다; 헛됨의 뜻이고, 桑은 뽕나무다. 그렇다면 空桑은 뽕나무가 없다는 뜻? 잠상(蠶桑)과 길삼(길쌈 績)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됐다. “처음 神市氏의 말기에 蚩尤氏의 형제가 비록 涿鹿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 왔으나 東方의 사람으로 淮垈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漢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初神市之末蚩尤氏兄弟 雖自涿鹿退歸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檀君紀)."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中土는 누에치기는 커녕 길삼(織)조차 하지 못했다. 누에치고(蚕), 삼을 재배하는 것은 농사인데, 中土는 기원전 4300 년에야 后稷이 농사를 가르쳤다. 그 당시까지도 中土의 토착민은 짐승가죽이나 뒤집어쓰고 살았던 것이다.
軒轅의 아내 나조(螺祖)가 누에를 치고 실을 잣는 것을 가르쳐 의상의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고? 3 백년 뒤인 堯 때서야, 后稷이 온갖 곡식과 과일의 종자를 中土로 들여와 농사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后稷을 농사의 시조라고 부른다. 곡식재배 조차 못해서 일일이 가르침을 받은 처지에 양잠(養蠶)은 어떻게 하고, 길삼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양잠을 못하던 西洋도 농사만은 지었다.
軒轅이 內經을 지어 처음으로 의약 처방의 길을 열었다고? 그런데 中奴들은 軒轅이 아니라, 神農을 의약의 시조라고 떠받든다.
“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神農..嘗百草之滋味制藥).”는 太白逸史는 날조사(淮南子)를 그대로 읊조린 것에 불과하다. 혀로 맛본다고 약을 만들 수 있나. 임상실험 해야 약을 만들 수 있다. 아픈 사람에게 처방을 해봐야 약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맛보아서 만들 수 있는 건 음식뿐이다. 이미 배달 개천 당시 병을 주관하는 저가(猪加)가 있었다. 한국(桓國) 시대에도 猪加가 있었다(三聖紀全 下篇). 神農은 배달의 의학지식을 中土로 가져갔을 뿐이다.
軒轅은 中奴의 상상 속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대요(大撓)에게 명하여 甲子를 짓게 하였으며, 창힐(倉頡)에게 명하여 六書를 짓게 하였으며,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율려(律呂)를 정하게 하였으며, 예수(隸首)에게 명하여 산수(算數)까지 정하게 하고, 기백(岐伯)에게 자문하여 내경(內經)을 지어 의학처방의 길을 열었다고 했다.
甲子는 伏羲가 만들었다. 그래서 韓易(周易이 아니다)을 선천팔괘(先天八卦), 복희팔괘(伏羲八卦)라고 날조하지 않았나. 軒轅은 共工, 倉頡, 大撓와 함께 紫府 先生에게 가르침을 받던 무리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軒轅은 大撓, 倉頡과 함께 中土 한 쪽을 삼분하던 자로 慈烏支 한웅과의 전투에서 매번 패하자, 大撓에게 기대려다가 거절당하고, 倉頡에 기대려고 했으나 역시 거절당한 비참한 인물이다(三聖紀全 下篇). 大撓는 甲子를 지은 게 아니라 배웠고, 倉頡도 六書를 지은 게 아니라 부도(符圖 : 天符經이 쓰여진 글)의 글(鹿圖文, 鹿書)을 배웠다. 이전에는 中土의 무리 중에 글을 아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軒轅이 백년을 왕위에 있었다고? 왕위에 있었다한들,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涿鹿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영위(營衛 : 막사를 지키게)하게 하였다(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렇게 전전긍긍해 하며 살다가 慈烏支 한웅에게 정복 되었다. 慈烏支 한웅의 신하가 되고, 장수가 되어 살아야 했다. 그후에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다.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軒轅은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撼, 黃帝氏亦不得自安 揆園史話). 蚩尤氏 형제들 사이에 끼어 中土 한 줌을 封土로 받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洋水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空桑에 이르렀다. 空桑은 지금의 陳留이며 楡罔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 諸侯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하여 숨지않는 자가 없었다(整師躬率而出陳洋水殺至空桑空桑者今之陳留楡罔所都也時歲之中兼倂十二諸侯之國殺得伏尸滿野西土之民莫不喪膽奔竄 太白逸史 神市本紀)." 西土의 백성들이 간담이 서늘해져 도망하여 숨지않는 자가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사는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귀면와(鬼面瓦) 사진(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도깨비상 내지 蚩尤像으로 통함
기와 치미에 남아있는 치우천황
치우(治尤 혹은 蚩尤)는 상고시대(BC2,700년경)의 인물로서 이른 바 '천하융사지주(天下戎事之主)'라고 평가되던 전설적 영웅이다. 이에 관해서 지나 측과 우리 측 모두 관련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지나 측 기록에는 매우 곱지 않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러하다. “치우는 노산의 쇠로써 오병을 만들었다. 그런데 치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중략)---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와 그 형제 81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였다. 구리 머리에 소의 이마를 가졌고 모래와 돌을 먹었다. 병장기로 칼·창·큰활 등을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사기(史記)> 사기의 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이 모래와 돌을 먹었다니. 그러면 괴물이었단 말인가? 사마천은 왜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그 까닭은 치우가 다름 아닌 동이(東夷)겨레의 수장이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록을 통하여 치우에 관한 몇 가지 단서를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치우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상고시대 금속제 병장기를 만들었음은 고도의 기술 수준이 바탕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 당시 우리 겨레의 기술수준이 높았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매우 높은 금속관련 기술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관한 우리 측의 기록물을 보면 치우와 동이겨레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확인 된다. 우리 측 기록에 치우는 일명 “치우천황”으로 통칭되던 존재였다.
그리고 치우천황의 치적을 몇 가지로 추려보면 벽토지(闢土地), 흥산(興産), 작병(作兵) 및 연병(鍊兵), 그리고 뛰어난 숭생중물(崇生衆物)의 치세이념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벽토지란 산과 계곡을 뚫어 길을 냈음을 말한다. 교통의 발달을 꾀한 것이다, 흥산이란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기>의 일부 내용처럼 노산 등지의 광물을 뽑아 제련사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나 이때 치우천왕은 구야(九冶)라고 하는 일종의 기술부대를 운용하였다고 한다. 제련산업 일으키고 기술부대 운용도 또한 작병이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음을 말하는 것이요, 연병이란 강력한 군대를 길렀음을 뜻한다. 그리고 숭생 중물이란 치우천황의 치도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이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온갖 물상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황은 그야말로 문무겸전의 이념으로 겨레의 앞날을 열고자 땀 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이겨레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동이겨레가 늘 외경하던 “밝은 하늘의 뜻”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이단성을 주도하던 인물이 한족(漢族)인 공손 헌원이었다. 그리하여 치우천황은 공손헌원과 일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공손헌원족의 한 갈래인 “소호”의 부대와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치우천황은 각종 기술과 기상을 조화하여 커다란 안개를 펼쳤다고 한다. “소호”의 부대는 앞을 가리지 못한 채 괴멸하여 갔다. 이 전투가 끝난 뒤에도 공손헌원부대는 치우천왕측에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물과 불을 마음껏 다스릴 줄 알았던 치우천황측을 도저히 담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치우천황의 놀라운 웅략(雄略)이 그들을 압박하였다. 이른바 “분출사도(分出四道)”라고 하는 전법이 공손헌원 부대를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치우측은 “돌날림치게”라는 신전투장비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치우천황부대는 대승하였다. 뛰어난 전법과 신장비의 효과가 컸던 것이다. 그리하여 치우천황은 겨레의 오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치우천황은 각종의 기와에 '도깨비'무늬라고 하여 남아있다. 어느덧 치우천황의 영웅적 자취는 엉뚱한 도깨비 환상으로 옮겨진 것이다. 어쨌거나 치우천황의 웅략은 소중한 우리의 정신자산이 분명하다. 몹시 어려운 오늘에 있어 더욱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전쟁의 신, 치우천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한임(桓因. 환인)은 하늘과 땅을 열면서 빛으로 온누리를 밝히고 아사달(새땅. 시작하는 땅)을 중심으로 '한국'을 열어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고는 기원전 7199년부터 3899년에 이르기까지 7대 3300여 년에 걸쳐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이후 이를 이어받아 한웅(桓雄. 환웅)이 신시(神市)를 세우고 '배달'(밝달. 기원전 3898년부터 2333년까지 18대1565년에 이름)을 다스렸다. 배달국은 그 강역이 북으로는 바이칼호 일대, 남으로는 한반도와 서해서안일대(지금의 중국 해안지역), 서쪽으로는 몽골사막, 동쪽으로는 태평양까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이르렀다.
서기전 2707년에 이르러서는 치우천황(蚩尤天皇)이 배달의 제14세 한웅으로 오른다. 그는 자오지천황(慈烏支天皇)으로도 불리었으며 숱한 전쟁에서 단 한차례의 패배도 없이 전승을 거두어 우리 민족 최고의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치우가 재위에 오를 무렵, 당시 한민족은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사방의 영토에 대한 중앙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주위 여러 거수국(제후국)들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특히 신농씨의 후손이었던 유망(楡罔)이 왕위에 오르면서 유사 이래 내륙에 살아오던 화산족(華山族. 중국민족의 조상)을 이끌고 공상으로 선공해 왔다. 일찍이 제10세 갈고(葛古) 한웅이 여와의 왕위를 빼앗은 신농(神農)을 화산족의 최고 통치자로 임명할 당시 신농이 그 자리를 보전하는 대가로 약속한 공상(空桑)의 동쪽 영토를 영원히 넘지 않겠다고 한 국경협약을 어긴 것이다. 이에 치우는 전쟁을 선언하고 활과 창, 갑옷과 투구 등을 만드는 한편쇠로 만든 칼 등 여러 새로운 신무기로 무장했다. 아울러 전 배달민족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갈로산(葛盧山. 葛石山)으로 집결시켰다. 특히 그는 신농과 유망이 원래 한겨레였으나 화산족 세력을 등에 업고 이제 영토까지 넘보는 것을 응징하고자 했고 이 참에 한민족의 지배력과 영토도 확고히 해두고자 했다. 우선 그는 9명의 장군 아래로 군사를 배치하고 이를 다시 9진영으로 나누어 81명의 장군과 함께 탁록( 이수평원·기주평원. 평양)으로 진격했다. 이에 유망편에 서 있던 탁록왕의 군대는 한겨레에게서 배운 축성법을 이용하여 성을 쌓은 뒤 치우의 기마부대를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이 아닌 평지에 허술하게 쌓은 성이라 신무기로 무장한 치우의 군대는 성문을 격파하고 반나절 만에 점령해 버렸다. 첫 전투였지만 치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에 따라 각 곳의 거수국들 중 일부는 바로 항복하고 일부는 싸우다 항복하였다. 그 결과 '탁록전'의 승리 이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아홉 제후국이 치우에 복속하고 충성과 조공을 맹세했다. 이에 유망은 공상으로 수도를 옮기고 성을 쌓아 대비했다. 아울러 소호(少昊)를 보내 치우를 상대케 했다. 그러나 소호가 치우의 군대보다 2배나 많은 화산족을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전략에 뛰어났던 치우인지라 과보와 형요(形夭. 후일 그는 중국 남부지역 정복에 성공하고 티베트까지 정벌하여 800년간 다스렸다)로 하여금 염초와 폭약을 설치한 다음 태산(泰山)으로 유인하여 격파해 버렸다. 치우군은 일단 소호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다 마치 패하여 도망치듯 하다가 화산족이 태산으로 모두 쫓아 들어옴과 동시에, 다시 뒤돌아선 치우가 손을 올려 우뢰와 같은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큰 소리가 나고 연기가 자욱해지면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에 치우가 안개와 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안 소호와 화산족이 후퇴하려 했으나 서로 짓밟히고 넘어지는가 하면 치우군의 돌을 굴리고 활을 쏘는 공격에 거의 전멸당해 버렸다. 사실 치우는 일부러 도망치듯 하면서 적을 유인하여 모두 태산의 계곡으로 몰아넣은 뒤바람을 등에 업고, 마른 염초를 태워 그 연기를 바람과 함께 계곡으로 불어 넣고 폭약을 써서 그 놀라운 소리를 만들어 내어 이를 처음 겪었던 화산군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아무튼 이후부터 적은 치우가 천둥과 안개를 일으키고 산과 물도 바꾼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에 유망은 공상으로 도피해온 소호와 함께 도망해 버렸고 천하는 평정되었다. 이후에도 치우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였고 화산족과 하족계열의 12거수가 항복해오자 이들도 모두 자신의 영지로 편입했다. 그러던 중 중국민족계인 공손씨 헌원(公孫氏 軒轅)이 화산족과 하족을 화하족(오늘날의 중국민족)으로 하나로 단결시키고 군병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이후 동양 역사의 쟁탈전이 10여년에 걸쳐 70여회의 대회전을 치르며 계속되었다. 물론 치우는 모두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길고 긴 10년 전쟁을 마무리했다. 또한 헌원이 항복하자 치우는 헌원을 조선의 5제(五帝)벼슬 중 으뜸가는 벼슬인 황제(黃帝)로 명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한겨레에 의해 지배받던 화하족과 그들의 영토가 중국인의 자치권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 후 치우는 수도를 청구(지금의 산둥반도 일대)로 옮기고 그의 치세를 열어 갔다. 치우는 전쟁을 하기에 앞서 항상 끊임없이 신병기를 개발하는 한편 전쟁에 임해서는 지형과 자연조건까지도 이용했다. 아울러 당시 군사력의 상징이 되는 철기무기를 만들어 세상을 압도했다. 원래 철(鐵)의 옛글자가 금(金)과 이(夷)를 합친 글자였음에 비추어 철의 생산기술이 우리 한겨레로부터 나왔고 치우시절에는 야금술(冶金術)도 선진적이어서 쇠로 만든 칼 등의 무기로 무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전략과 기마부대를 중심으로 한 용병술은 탁월해서 가히 그를 전쟁의 신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그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전한다. 특히 치우의 활동무대가 지금은 중국의 영토인지라 그는 중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그들은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모시고 사방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 지금도 우리는 최고위층 사람을 우두(牛頭)머리라 하는데 이는 당시 치우가 전쟁에서 항상 동(銅)으로 만든 투구에 양쪽으로 쇠뿔 모양의 장식을 달고 다닌데서 유래되었다. 즉 무리의 대장을 “치우처럼 머리에 뿔이 난 자”라고 여긴데서 나온 말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위와 같은 말들이 결국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중국의 정사인 "25사" 제일 첫 부분 "사기"의 기록을 보자.
『중국의 시조는 "황제헌원"인데 이웃나라 "치우(蚩尤)"라는 사람과 기원전 2700년경 "탁록"에서 전쟁을 하였다』고 하며 치우천황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그 요점은,
1. 제후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는데 치우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벌할 자가 없었다.
2. "치우는 고천자이며, 황제는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다"
3. 치우의 형제는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동이고 이마는 철(동두철액, 銅頭 鐵額)이며 모래로 밥을 지어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만민을 살해하였다.
4. 구리의 통치자는 치우다
5.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 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같이 솟아올라 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또한 그 부인 견비의 묘는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6.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일본의 사학자는 물론 한국의 사학자들마저 단군조선조차 신화라고 우기는 판에 위와 같은 중국의 사가에 의해 거꾸로 기술된 기록을 보더라도 그 진실은 낭중지추모양으로 다음과 같이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즉,
1. 단군조선(고조선 : 기원전 2333년) 이전에 중국 정사에 나오는 "구리국(九黎國)"이 있었으며 그때 14대 천자인 치우천자께서 중국의 시조인 황제헌원과 전쟁을 하였다.
2. 황제헌원이 중국역사의 시조라고 표현해놓고서는 뒤편에서는 황제가 (구리국의) 제후국의 아들이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치우천왕’과 “구역질나는 삼국사기” 2005년 10월 5일 (수) 10:22 한겨레 | |||
[한겨레]
어린 시절, 국사 책에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고조선이다. 국사 책에는 단군이 조선(朝鮮)을 개국한 것이 BC 2333년인데, 갑자기 BC 108년 중국 한나라에 왕검성이 함락된다는 망국 이야기로 끝맺는다. 반만년 역사 중 고조선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2113년)보다 그 이전 고조선(2225년)의 역사가 더 길다. 그런데 고조선과 관련해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단군신화, 홍익인간·재세이화(在世理化), 3개 밖에 전하지 않는다는 8조법금, 그리고 멸망. 그게 끝이다. 그나마 고등학교 국어 고문 시간에 배운 백수광부(白首狂夫·흰머리 미치광이)의 처가 지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2천년 뒤, 가수 이상은의 노래로 되살아나기도 했다)가 고조선 시대에 지어졌다는 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고조선에 대한 전부다. 의심했다.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론 2천년 남짓이 고작 아닌가 하고. 그러다 1985년 소설 <단>(丹)을 접했다. <단>은 그해 베스트셀러 1위였다. <단>은 삼국시대 이전에 환인-환웅-단군 시대가 각각 존재해 우리나라의 역사가 5천년이 아닌 9천년이며, 단군은 고유명사가 아닌, 임금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고조선 시대 47대에 걸친 단군(임금)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대 우리 역사의 강역이 이 좁아터진 한반도가 아니라, 저 북방 바이칼 호수에서 저 남방 파미르 고원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을 거의 장악했다는 것 아닌가? 긴가민가 했지만, 일단 뻐근한 감격이 올라왔다. 말 그대로 웅혼한 기상이 마음 속에 일었다. 처음 <단>을 읽을 때, 다분히 창작인 줄 알았던 그 내용이 실은 <환단고기>(桓檀古記·‘한단고기’라는 주장도 있다)를 중심으로 한 내용이었다는 것을 안 건 나중이었다. 1. 우리 역사는 9천년인가, 7천년인가, 5천년인가, 2천년인가? <환단고기>는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동이족의 비사(秘史)인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 4권의 책을 묶은 것이다. <삼성기>(三聖記)는 신라 승려 안함로가 쓴 책으로, 고조선 이전 환인-환웅 시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문정공이 쓴 책으로, 1세 단군 왕검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고조선 2096년 왕조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북부여기>는 고려말 학자 범장이 전한 책으로, 동명성왕의 아버지이자,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부여 멸망까지의 부여 300년사다. <태백일사>는 조선 연산군때 학자 이맥이 전한 책으로, 환국-신시(神市·환웅시대)-고조선에서 마한, 변한, 고구려, 고려때까지의 역사를 드문드문 전하고 있다. 이 <환단고기>를 보면, 우리 역사는 BC 7199년에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근처에 세워진 환국(桓國)이 7세, 3301년 동안 지속되고, 이어 환웅이 BC 3898년 산동반도 근처에 배달(倍達)국을 세우고,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했다. 배달국은 18세, 1565년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BC 2333년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워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전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BC 131년이 끝이다. 그다음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전개된다. 굳이 언급하자면, BC 108년까지의 빈 공간인 위만조선(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연나라가 망하자 연나라 망명객인 위만이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 서쪽 지방에 살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중국 역사서인 <전한서>(前漢書)에 쓰여져 있음. 그리고 위만조선은 4대까지 왕위가 이어졌으나, 한반도에 위치한 진(辰·삼한의 전신)나라의 중국 소통을 막다가 한나라와 전쟁이 일어나 BC 108년 망하고, 한나라는 이곳에 한4군을 설치했다고 전함. 우리 역사는 중국 역사서인 <전한서>를 따르고 있는 것임)이 빠져 있다. 태초에 가까운 환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역사는 오늘날까지 무려 9204년이 되는 것이고, 배달국부터 따지면 5903년이며, 단군부터 따지면 올해가 단기 4338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삼국사기>에는 신라(BC 58년), 고구려(BC 37년), 백제(BC 18년) 이전의 이야기가 없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 역사는 2천년을 겨우 넘으며, <삼국사기>가 스치듯 언급한 기자조선(BC 1122년)을 더해도 우리 역사는 3127년에 그친다. 2. 환국(桓國)(BC 7199~BC 3898) “오래전 한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백력(斯白力: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흑룡강) 백산(白山:백두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중생을 돌보는 직책)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환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파나류산(중국 하얼빈 남쪽 완달산/소설 <단>은 이를 파미르 고원으로 봤다) 밑에 환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바이칼호) 동쪽 땅이다. 그 땅이 넓어 남북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통틀어 환국이요. 7세, 3301년 동안 지속됐다” 환산하면 강역이 대략 북으로는 바이칼 호수, 남으로는 양쯔강 북쪽, 동으로는 만주와 백두산 지역, 서로는 몽고가 다 속한다. 황제의 나라인 환국은 그 아래로 비리, 양운, 구막한, 구다천(캄차카), 일군, 우루, 객현한, 구모액, 매구여, 사납아, 선비(퉁구스), 수밀이 등 12개의 나라를 둔 일종의 연방체(?)였다. 일본 학자인 가지마 노모루는 수밀이국과 중동 지방에서 최초의 도시문명을 이룩한 수메르 문화와의 연관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3. 배달국(BC 3898~BC 2333) 환국 말기에 환인이 서자 환웅을 삼위와 태백에 보내, 홍익인간의 뜻을 펴도록 한다. 이에 환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중국 감숙성이라고도 하고, 백두산이라고도 한다) 꼭대기에 신시를 세우니, 그가 곧 배달국 제 1대 환웅천왕이다. 이때 배달국 인근에는 곰을 숭상하는 족속과 호랑이를 숭상하는 족속이 살며 서로 다투었는데, 웅씨족의 여추장이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환웅과 혼인했는데, 이것이 후세에 단군신화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단고기에는 이 장면을 “환웅이 웅(熊)씨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했다”고만 전하고 있다. 배달국은 18세 거불단 환웅까지 이어진다. 4. 조선(BC 2333~BC 108?) <삼국유사>는 중국 역사서인 <위서>(魏書)를 참조했다며, “단군 왕검이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묘(BC 1122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였다 한다”고 전해 단 1명의 신화 속 단군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단고기>를 보면, 47명의 단군(고조선 임금)이 나온다. 또 이때 문명이 크게 발달해 쌀 되와 저울을 통일하는 도량형 통일이 진시황보다 1900년 전인 2대 단군 부루(BC 2238년) 때 이뤄졌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거의 똑같은 글자인 정음 38자 ‘가림다’도 3대 단군 가륵 때 만들어진다.(BC 2181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도 완전창작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글을 재구성해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글자가 만들어진 뒤, 이전까지 구술로 전해오던 옛일을 글로 적어 첫 역사서인 <배달유기>(BC 2180년)가 지어진다.(고구려 영양왕 때(AD 600년) 때 이문진이 <유기>를 요약해 <신집> 5권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유기>가 바로 이 책은 혹시 아닐까? 지금은 <유기>도 <신집>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밖에 인삼, 돈, 배 등이 4대 단군 오사구 때 발견되거나 만들어진다. 그리고 또하나 주목할 것은 BC 1987년 8대 단군 우서한 때 대궐로 날아왔다는 ‘세 발 달린 까마귀’다. 그 까마귀는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이 삼족오(三足烏)는 나중에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나는데, 우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이 ‘삼족오’는 일본의 신화 속 동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일본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즈인 울트라니폰의 상징물이 바로 이 ‘삼족오’이다. 우리가 우리 옛 역사(또는 신화)에 무관심한 사이, 우리 것들을 다른 나라에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5. 치우천왕(蚩尤天王, BC 2748~BC 2598) 환단고기에서 특히 주목한 임금(황제)이 바로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치우천왕)이다. 치우천왕은 <환단고기> 외에도 <제왕연대>, <규원사화> 등 우리 역사서에 언급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와 <한서지리지>, <상서>, <운급헌원기> 등에도 실려 있다. <환단고기>를 보면, 치우천왕은 BC 2706년(42살) 환웅의 자리에 올라 BC 2598년(151살)까지 재위 109년 동안 동아시아 일대를 호령했다. 그는 10년 동안 중국의 황제 헌원(BC 2692~BC 2592)과 73번 싸워 모두 이겼다. 헌원은 중국 하나라 이전 삼황오제의 삼황(三皇) 중 태호복희에 이은 2번째 황제다.(삼황 다음은 오제(五帝, 요순 임금 등)가 이어지고, 이어 우(禹) 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그리고 은(殷)나라,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로 이어진다. 현재 은나라부터 역사시대로 인정하고, 그 이전은 아직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은나라도 은허 유적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얼마전 중국에서 하나라 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치우천왕은 수레와 투석기(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전쟁에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서는 치우천왕이 탁록(오늘날 하북성) 벌판에서 헌원을 끝내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는 이와 다르다. “제후가 모두 다 와서 (치우에게)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때 헌원이 섭정했다.” <사기>에 따르자면, 치우는 중국 산동성(산둥반도 지역)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동이족의 나라)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중국 조상인 신농이 다스리던 영역 안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었다. 치우는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신농의 후계자인 유망(楡罔)을 무찌른다. 그러자 유망이 황제 헌원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중원을 놓고 헌원과 치우가 대결전을 벌인다. 고대의 세계대전인 셈이다. 그리고 치우는 전군을 동원해 헌원과 10번을 싸워 9번을 모두 이긴다. 여기까지는 우리 역사서와 같다. 헌원은 폭풍우 속에서 치우에게 쫓기다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세력을 회복해 용맹하던 치우의 형제(아마도 신하 장군으로 추정) 81명이 하나씩 하나씩 스러지고, 마지막 탁록 대전에서 치우는 종국에는 혼자 남아 싸우다 헌원의 병사에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려 처형된다. 이후 동이족은 중원에서 밀려나 중국 동쪽 변방(만주)으로 옮겨갔다. 중국 역사서를 따르더라도, 우리 민족의 무대가 만주벌판에서 한반도로 축소된 단절점이 신라의 3국통일이었다면, 우리 민족의 무대가 중국대륙에서 만주와 한반도 등 대륙 변방으로 밀려난 것이 치우천왕의 패전이니, 우리 상고사의 중요한 한 순간이다. 중국 역사에서 치우는 악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머리가 구리와 쇠로 돼있고(아마도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치우가 휘두르는 강력한 청동 신병기에 놀란 고대 중국인들의 눈에 치우가 그렇게 비춰졌을 지도 모른다), 폭풍우를 뿌리기도 한다. 치우천왕의 능은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었던 것으로 <한서지리지>에 전해지는데, 춘추전국시대에는 이곳 제(濟)나라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됐고, 이어 진나라, 한나라 때는 주민들이 제를 지냈다. 또 <사기> 봉선서에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전쟁에 나가기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했다고 한다.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치우천왕은 신화시대인 그때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세나라 역대 왕릉 모두에 도깨비상의 모습으로 조각된다. 그런데 탁록의 마지막 전투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비극적 인물인 치우(정사로 인정받는 <사기>를 따를 때)는 수천년이 흐른 뒤인 1999년 또다시 깨어난다. 붉은 악마의 캐릭터로. 붉은 악마는 당시 회원이던 한 축구디자이너의 권고로 1999년 치우천왕을 공식캐릭터로 정한다. 그리고 그해 3월29일 한국-브라질 전이 열린 잠실경기장에 가로 4m, 세로 3m의 대형 치우천왕 깃발이 첫 선을 보인다. 이날 한국은 한국 축구역사상 처음으로 히바우두가 뛴 세계 최강 브라질을 1 대 0으로 물리친다. 4500년 만에 깨어난 치우천왕이 ‘불패의 신화’를 또 한번 보여준 걸까? 그리고 붉은 악마는 이후, 경기에 앞서 애국가가 울릴 때는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치우천왕기를 펼치는 것이 공식화 돼 있다. 그리고 치우천왕이 등장한 이후, 처음 맞은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4강 신화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또다른 치우가 있다. 만화가 이현세는 이보다 앞선 97년 고대 동아시아 전설을 집대성해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로 다시 표현해낸 <천국의 신화>에서 치우와 헌원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치우는 천족(天族·동이족)의 영웅으로, 그리고 헌원은 화족(華族·한족)의 영웅이다. <천국의 신화>에서 치우는 ‘까치 오혜성’, 황제 헌원은 ‘마동탁’의 이미지다. 이 만화에서 치우는 천족의 임금인 천군의 두번째 부인 발기달의 아들로 태어난다. 왕비가 아들이 없어 자연스럽게 천족의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나, 이를 시기한 왕비가 벌인 왕실 다툼에서 어머니 발기달이 살해당하는 와중에 부하들이 그를 안고 도망치다 밀림에 홀로 버려져 산속에서 호랑이에게 키워진다. 나중에 나라의 칼을 만드는 충신 손돌이 치우를 발견해 몰래 데려다 손자로 키운다. 치우는 아무 것도 모른채 평화롭게 자라나고, 그 사이에서 동네 여자친구 미리내(은하수의 순 우리말)와 연정을 키워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천족(天族)이 그동안 제후국이었던 화족(중국 민족)의 황제 헌원의 세력이 커지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하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다 스러져가는 천족의 나라, 배달국을 지키는 적통 왕세자, 메시아로 부상하고, 황제 헌원과 탁록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며 부족을 지켜낸다. 그러나 이 와중에 미리내가 교활한 헌원에게 사로잡히고, 헌원이 미리내를 이용해 치우를 괴롭히자, 치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돼 부하들을 찔러 죽이는 등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킨다. 자신의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느끼는 가운데, 치우는 결국 잠들어 있는 사이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린다. 이현세는 치우천왕을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 등에서 나온 ‘까치 오혜성’과 너무나 흡사한 인물로 그려냈다.(개인적으로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승리자 치우천왕(<환단고기>)보다 <사기>에 나오는, 단 한 번의 패배로 죽음에 이른 ‘비극적인 치우’가 애잔해 마음이 더 끌립니다. 또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실제 치우는 후자 쪽이 더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6. 그리스 신화는 알면서 자기네 신화는 모르는 한민족 이런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는 이런 내용들이 관련 유적들이 발굴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료적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는 <한단고기>가 엮은 책들이 신라~조선초기에 걸쳐 쓰여졌는데, 이전까지는 전혀 언급도 되지 않다가 구한말에 들어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미뤄 혹 이것이 어떤 의도를 가진 위서(爲書)라는 주장까지 있다. 그러나 <한단고기> 외에도 1675년에 쓰여진 <규원사화>(揆園史話)도 고조선 47대 1195년의 역사가 소개돼 있고, 신라의 박제상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부도지>도 환국-배달국-조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또 우리 역사서가 아닌 <사기>, <상서>, <위지> 등에서도 비록 조각조각난 것이긴 합니다만, 배달국과 조선, 그리고 치우천왕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 백번을 양보해 이 모든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화로는 왜 전할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제우스,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아폴론, 큐피트, 헤라클레스, 아킬레스 등 그 복잡한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은 줄줄 외우면서 우리 동이족의 영웅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 아닌가? 게다가 역사로 인정받는 은나라 이전에 대해서도 요순 시대, 삼황오제 등 그 이전시대의 일화나 용어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불쑥불쑥 등장하는데 그 옛날 중원을 호령했을 치우천왕은 어디에다 내평겨쳤단 말인가?
7. 화근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구역질이 날뻔한 적이 있었다. 어떨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가 이토록 수치스러운 것인가 하고. “거룩할사 당나라 큰 업을 개발하여/황가의 정치 경륜 높고도 창성하구료/싸움을 끝맺어 천하를 안정하고/전임금 잇받아 문교를 닦았도다/(…)/산악의 기운받아 재상들 태어나고/임금님은 충량한 신하만을 믿으시네/삼황으로 뭉치어 한 덕이 되니/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65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승리하자(아직 백제 멸망은 아니었다), 진덕여왕이 비단에 써 당 태종에게 올린(?) 글이다.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중국과 다른 별도의 연호를 써왔다. 그러나 진덕여왕 때에 이르러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이름지어 쓸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일심으로 중국을 섬기어 사행과 조공이 길에 끊이지 아니하면서도 법흥왕이 연호를 자칭하였으나 의심스러운 일이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제와서야(진덕여왕) 비로소 당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니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하면 허물을 지었지만 능히 고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대해 <삼국사기>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삼국통일의 주역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면,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러 신라의 사신으로 당에 갔을 때, 당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중국 옷을 입게 해달라”고 요청한 뒤, 중국 옷을 입고 아뢰었고, “신의 자식이 7형제가 있으니, 원컨대 성상(당 태종)의 곁을 시위케 하여 주소서”라며, 자기가 스스로 청해 아들을 중국에 사실상 볼모로 남겨두고 온다. 또다른 역사서에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연개소문을 만났을 때, 연개소문이 “신라와 우리 고구려가 함께 하면 당나라가 무서울 게 무어냐?”며 “우리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할 때, 아무 말도 않고 이를 거절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당나라에 빌붙어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노예의 평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또 삼국통일을 이룩했고,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다에 자기를 묻게 한 문무왕. 그러나 <삼국사기> 문무왕편을 보면, 문무왕은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중국 의상을 입게 했다”고 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갑자기 뜬금없이 “문무왕 8년, 당으로부터 이후로는 여자를 헌납하지 말라는 칙지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 이전까지는 당에 바치는 조공에 여자까지 포함됐던 것이다. 참으로 수치스런 역사요, 너무나 낯뜨거운 신라 왕들의 행태다. 또 <삼국사기>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땅에서 당나라 장수들과 함께 잔치를 열면서 항복한 의자왕을 데려와 옛 백제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상에서 술을 따르게 했다고 전한다. 당시 신라는 정말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나라였단 말인가? 삼국시대 이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해동에 나라가 있은 지는 오래다. 기자가 주실(주나라)에서 수봉(受峰)함으로부터(BC 1122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나라의 신하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중국 역사서를 이야기한다) 위만이 한초에 참호할 때(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뒤, 한나라와 맞섰을 때)까지는 연대가 막연하고 문자가 소략하여 상전할 수가 없다”는 한 마디로 끝맺었다. 김부식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땅 곳곳에 흩어져 있었을 고대 역사서, 고조선의 옛 이야기들을 단칼에 다 생략해 버린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는 신채호가 ‘일천년래 최대 사건’이라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직후다. 김부식은 유교사상을 나라의 이념으로 삼고, 중국을 숭상하는 것으로 정권의 안정을 도모코자 했다. 이때 이미 고려 초기의 자주적이고 웅혼한 기상은 사라진 때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기 전에 다섯번이나 중국을 다니면서 중국의 역사서를 섭렵했다.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제 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중국의 시각에서 그저 귀퉁이에 조금 흘려쓴 것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주워담아 얼기설기 엮어 역사로 만들다니. 그러나 어쨌든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책이 됐고, 또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다. <환단고기>가 엮었다고 전해지는 각종 역사서들이 구한말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서 논란을 빚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김부식 이후 조선시대까지 중국 중심의 모화사상이 이어지는 와중에 중국과 일합을 겨룰 뿐 아니라, 중국을 제후국으로 삼아 다스렸다는 치우천왕이나 환국-배달국의 이야기를 누가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론한다. 숨죽여 고이고이 전해질 뿐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의 진실은 아마도 중국 역사와 우리 중심 역사인 <환단고기>, 그 중간 어디쯤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운 것은 <삼국사기>가 중국 역사서와 내용은 물론 중국 중심의 관점조차(우리를 준오랑캐 나라로 스스로 자칭하는) 똑같다는 것이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고조선을 사실상 계승한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로 우기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날로 더해지는 이때, 치우천왕의 신화만이라도 최소한 “우리네 역사 속에 이런 신화도 있다”라고 하는 정도로 자라나는 아이들(초등학생들이 혼동스러워한다면 최소한 중고생에게라도)에게 알려주는 것, 그것도 안되는가? 치욕의 역사서 <삼국사기>를 읽기 전에 치우천왕을 먼저 알게 하는 것이 정신건강면에서도 좋을 것 같다. 참조:<한단고기>(임승국 번역·주해), <삼국사기>(김부식), <삼국유사>(일연), <천국의 신화>(이현세), <부도와 한단의 이야기>(지승),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등. <한겨레> 경제부 권태호 기자 ho@hani.co.kr
[덧붙이는 글] 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권태호 기자입니다. 자신이 쓴 글이나 말 뒤에 ‘내 의도는 그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비겁함을 무릅쓰고 다시 글을 띄웁니다. 경제부 기자가 뜬금없이 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이유는 개천절을 맞아 개천절의 진짜 주인공들을 한 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 쓴 것입니다. 제가 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목적은 (물론 아시겠지만) 치우천왕 고사를 국사교과서에 올리자거나, 정사로 인정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네 신화 속 인물 중에 이런 이도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치우천왕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교 때였습니다. 그때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왜 초등학교 때, 중고등학교 때, 우리 역사와 신화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이 이야기를 알지 못했던가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우리네 역사를 보며 늘 패배의식에 젖어있기 보다 (비록 마취제 성격이 있었을 진 몰라도) 더 큰 상상력과 창의력, 자긍심을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제가 글을 쓴 첫번째 이유는 제 후배들이 그때 제가 느꼈던 그 안타까움을 똑같이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신화시대의 이야기인 치우천왕이 실존인물이냐 하는 문제는 논란거리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최소한 동이족의 신화 속 영웅인 치우천왕(중국은 치우천왕을 악마로 묘사합니다)을 우리들이 좀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문화는 또 얼마나 더 풍부해 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치우천왕을 역사로 받아들이자는 게 아니라, 묻혀진 우리의 신화를 끄집어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치우천왕이 속한 민족인 구려족이 우리 민족이 아닌, 지금은 사라진 중국의 소수민족이었다고 이야기하면 원인무효가 되기도 합니다. 구려족이 동이족의 한 분파이며,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이미 치우천왕은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도깨비 등으로 이미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고, 이미 붉은 악마의 캐릭터로도 등장합니다. 그것마저 정사가 아니라며, 내쫓아야 합니까? 고구려 벽화에 있는 삼족오를 일본이 자기네 신화 속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둘째, 또다른 문제의식은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네 역사란 대개 자기네 나라가 가장 강성할 때, 실제보다 조금 부풀려서 쓰여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있는 역사도 잘라버리고, 굴욕적인 부분(물론 현대적 관점과 시각에서 판단한 것입니다)을 당연했다는 시각으로 쓰여지는 것을 보고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한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도 한편으론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완벽한 창작물이라는 주장에도 선뜻 동의하기 힘듭니다. 아마도 숨겨진 역사서를 유교 사상이 위축된 시점에서야 다시 엮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종의 첨삭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한단고기의 내용들이 중국의 역사서에도 일치하는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가치, 아니면 최소한의 연구가치라도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는 점입니다. 덧붙일 점은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위 2가지이나, 우선 그 전제로 되는 한단고기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언급해야 했기에 한단고기 이야기를 처음에 장황하게 썼습니다. 물론 한단고기를 이미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혹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먼저 관련 정보와 전제를 제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글의 비중이 한단고기 소개에 치우친 점은 인정합니다. 그 다음, 글에서 몇 가지 틀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5. 치우천왕 편에서 99년 3월29일 호나우두가 뛴 브라질을 1 대 0 으로 꺾었다고 했는데, 호나우두는 그때 뛰지 않았고, 히바우두가 뛰었습니다. 6. 그리스 신화는 아는데 제나라 신화는 모르는 한민족 편에서 주지육림(하나라)라고 썼는데, 주지육림은 은나라 마지막왕 주왕과 달기의 고사인데, 제가 그 직전 나라인 하나라로 잘못 썼습니다. 7. 화근은 <삼국사기> 편에서 김춘추가 고구려 사신으로 간 것은 백제 멸망 전인데, `백제 멸망 뒤'라고 잘못 썼습니다. 이 내용들은 수정했습니다. 넓은 이해 바랍니다. 권 태 호 올림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환단고기>는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동이족의 비사(秘史)인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 4권의 책을 묶은 것이다. <삼성기>(三聖記)는 신라 승려 안함로가 쓴 책으로, 고조선 이전 환인-환웅 시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문정공이 쓴 책으로, 1세 단군 왕검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고조선 2096년 왕조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북부여기>는 고려말 학자 범장이 전한 책으로, 동명성왕의 아버지이자,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부여 멸망까지의 부여 300년사다. <태백일사>는 조선 연산군때 학자 이맥이 전한 책으로, 환국-신시(神市·환웅시대)-고조선에서 마한, 변한, 고구려, 고려때까지의 역사를 드문드문 전하고 있다. 이 <환단고기>를 보면, 우리 역사는 BC 7199년에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근처에 세워진 환국(桓國)이 7세, 3301년 동안 지속되고, 이어 환웅이 BC 3898년 산동반도 근처에 배달(倍達)국을 세우고,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했다. 배달국은 18세, 1565년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BC 2333년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워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전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BC 131년이 끝이다. 그다음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전개된다. 굳이 언급하자면, BC 108년까지의 빈 공간인 위만조선(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연나라가 망하자 연나라 망명객인 위만이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 서쪽 지방에 살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중국 역사서인 <전한서>(前漢書)에 쓰여져 있음. 그리고 위만조선은 4대까지 왕위가 이어졌으나, 한반도에 위치한 진(辰·삼한의 전신)나라의 중국 소통을 막다가 한나라와 전쟁이 일어나 BC 108년 망하고, 한나라는 이곳에 한4군을 설치했다고 전함. 우리 역사는 중국 역사서인 <전한서>를 따르고 있는 것임)이 빠져 있다. 태초에 가까운 환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역사는 오늘날까지 무려 9204년이 되는 것이고, 배달국부터 따지면 5903년이며, 단군부터 따지면 올해가 단기 4338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삼국사기>에는 신라(BC 58년), 고구려(BC 37년), 백제(BC 18년) 이전의 이야기가 없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 역사는 2천년을 겨우 넘으며, <삼국사기>가 스치듯 언급한 기자조선(BC 1122년)을 더해도 우리 역사는 3127년에 그친다.
2. 환국(桓國)(BC 7199~BC 3898) “오래전 한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백력(斯白力: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흑룡강) 백산(白山:백두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중생을 돌보는 직책)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환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파나류산(중국 하얼빈 남쪽 완달산/소설 <단>은 이를 파미르 고원으로 봤다) 밑에 환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바이칼호) 동쪽 땅이다. 그 땅이 넓어 남북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통틀어 환국이요. 7세, 3301년 동안 지속됐다” 환산하면 강역이 대략 북으로는 바이칼 호수, 남으로는 양쯔강 북쪽, 동으로는 만주와 백두산 지역, 서로는 몽고가 다 속한다. 황제의 나라인 환국은 그 아래로 비리, 양운, 구막한, 구다천(캄차카), 일군, 우루, 객현한, 구모액, 매구여, 사납아, 선비(퉁구스), 수밀이 등 12개의 나라를 둔 일종의 연방체(?)였다. 일본 학자인 가지마 노모루는 수밀이국과 중동 지방에서 최초의 도시문명을 이룩한 수메르 문화와의 연관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3. 배달국(BC 3898~BC 2333) 환국 말기에 환인이 서자 환웅을 삼위와 태백에 보내, 홍익인간의 뜻을 펴도록 한다. 이에 환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중국 감숙성이라고도 하고, 백두산이라고도 한다) 꼭대기에 신시를 세우니, 그가 곧 배달국 제 1대 환웅천왕이다. 이때 배달국 인근에는 곰을 숭상하는 족속과 호랑이를 숭상하는 족속이 살며 서로 다투었는데, 웅씨족의 여추장이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환웅과 혼인했는데, 이것이 후세에 단군신화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단고기에는 이 장면을 “환웅이 웅(熊)씨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했다”고만 전하고 있다. 배달국은 18세 거불단 환웅까지 이어진다.
4. 조선(BC 2333~BC 108?) <삼국유사>는 중국 역사서인 <위서>(魏書)를 참조했다며, “단군 왕검이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묘(BC 1122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였다 한다”고 전해 단 1명의 신화 속 단군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단고기>를 보면, 47명의 단군(고조선 임금)이 나온다. 또 이때 문명이 크게 발달해 쌀 되와 저울을 통일하는 도량형 통일이 진시황보다 1900년 전인 2대 단군 부루(BC 2238년) 때 이뤄졌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거의 똑같은 글자인 정음 38자 ‘가림다’도 3대 단군 가륵 때 만들어진다.(BC 2181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도 완전창작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글을 재구성해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글자가 만들어진 뒤, 이전까지 구술로 전해오던 옛일을 글로 적어 첫 역사서인 <배달유기>(BC 2180년)가 지어진다.(고구려 영양왕 때(AD 600년) 때 이문진이 <유기>를 요약해 <신집> 5권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유기>가 바로 이 책은 혹시 아닐까? 지금은 <유기>도 <신집>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밖에 인삼, 돈, 배 등이 4대 단군 오사구 때 발견되거나 만들어진다. 그리고 또하나 주목할 것은 BC 1987년 8대 단군 우서한 때 대궐로 날아왔다는 ‘세 발 달린 까마귀’다. 그 까마귀는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이 삼족오(三足烏)는 나중에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나는데, 우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이 ‘삼족오’는 일본의 신화 속 동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일본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즈인 울트라니폰의 상징물이 바로 이 ‘삼족오’이다. 우리가 우리 옛 역사(또는 신화)에 무관심한 사이, 우리 것들을 다른 나라에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5. 치우천왕(蚩尤天王, BC 2748~BC 2598) 환단고기에서 특히 주목한 임금(황제)이 바로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치우천왕)이다. 치우천왕은 <환단고기> 외에도 <제왕연대>, <규원사화> 등 우리 역사서에 언급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와 <한서지리지>, <상서>, <운급헌원기> 등에도 실려 있다. <환단고기>를 보면, 치우천왕은 BC 2706년(42살) 환웅의 자리에 올라 BC 2598년(151살)까지 재위 109년 동안 동아시아 일대를 호령했다. 그는 10년 동안 중국의 황제 헌원(BC 2692~BC 2592)과 73번 싸워 모두 이겼다. 헌원은 중국 하나라 이전 삼황오제의 삼황(三皇) 중 태호복희에 이은 2번째 황제다.(삼황 다음은 오제(五帝, 요순 임금 등)가 이어지고, 이어 우(禹) 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그리고 은(殷)나라,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로 이어진다. 현재 은나라부터 역사시대로 인정하고, 그 이전은 아직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은나라도 은허 유적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얼마전 중국에서 하나라 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치우천왕은 수레와 투석기(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전쟁에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서는 치우천왕이 탁록(오늘날 하북성) 벌판에서 헌원을 끝내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는 이와 다르다. “제후가 모두 다 와서 (치우에게)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때 헌원이 섭정했다.”<사기>에 따르자면, 치우는 중국 산동성(산둥반도 지역)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동이족의 나라)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중국 조상인 신농이 다스리던 영역 안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었다. 치우는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신농의 후계자인 유망(楡罔)을 무찌른다. 그러자 유망이 황제 헌원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중원을 놓고 헌원과 치우가 대결전을 벌인다. 고대의 세계대전인 셈이다. 그리고 치우는 전군을 동원해 헌원과 10번을 싸워 9번을 모두 이긴다. 여기까지는 우리 역사서와 같다. 헌원은 폭풍우 속에서 치우에게 쫓기다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세력을 회복해 용맹하던 치우의 형제(아마도 신하 장군으로 추정) 81명이 하나씩 하나씩 스러지고, 마지막 탁록 대전에서 치우는 종국에는 혼자 남아 싸우다 헌원의 병사에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려 처형된다. 이후 동이족은 중원에서 밀려나 중국 동쪽 변방(만주)으로 옮겨갔다. 중국 역사서를 따르더라도, 우리 민족의 무대가 만주벌판에서 한반도로 축소된 단절점이 신라의 3국통일이었다면, 우리 민족의 무대가 중국대륙에서 만주와 한반도 등 대륙 변방으로 밀려난 것이 치우천왕의 패전이니, 우리 상고사의 중요한 한 순간이다. 중국 역사에서 치우는 악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머리가 구리와 쇠로 돼있고(아마도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치우가 휘두르는 강력한 청동 신병기에 놀란 고대 중국인들의 눈에 치우가 그렇게 비춰졌을 지도 모른다), 폭풍우를 뿌리기도 한다. 치우천왕의 능은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었던 것으로 <한서지리지>에 전해지는데, 춘추전국시대에는 이곳 제(濟)나라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됐고, 이어 진나라, 한나라 때는 주민들이 제를 지냈다. 또 <사기> 봉선서에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전쟁에 나가기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했다고 한다.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치우천왕은 신화시대인 그때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세나라 역대 왕릉 모두에 도깨비상의 모습으로 조각된다. 그런데 탁록의 마지막 전투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비극적 인물인 치우(정사로 인정받는 <사기>를 따를 때)는 수천년이 흐른 뒤인 1999년 또다시 깨어난다. 붉은 악마의 캐릭터로. 붉은 악마는 당시 회원이던 한 축구디자이너의 권고로 1999년 치우천왕을 공식캐릭터로 정한다. 그리고 그해 3월29일 한국-브라질 전이 열린 잠실경기장에 가로 4m, 세로 3m의 대형 치우천왕 깃발이 첫 선을 보인다. 이날 한국은 한국 축구역사상 처음으로 히바우두가 뛴 세계 최강 브라질을 1 대 0으로 물리친다. 4500년 만에 깨어난 치우천왕이 ‘불패의 신화’를 또 한번 보여준 걸까? 그리고 붉은 악마는 이후, 경기에 앞서 애국가가 울릴 때는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치우천왕기를 펼치는 것이 공식화 돼 있다. 그리고 치우천왕이 등장한 이후, 처음 맞은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4강 신화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또다른 치우가 있다. 만화가 이현세는 이보다 앞선 97년 고대 동아시아 전설을 집대성해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로 다시 표현해낸 <천국의 신화>에서 치우와 헌원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치우는 천족(天族·동이족)의 영웅으로, 그리고 헌원은 화족(華族·한족)의 영웅이다. <천국의 신화>에서 치우는 ‘까치 오혜성’, 황제 헌원은 ‘마동탁’의 이미지다. 이 만화에서 치우는 천족의 임금인 천군의 두번째 부인 발기달의 아들로 태어난다. 왕비가 아들이 없어 자연스럽게 천족의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나, 이를 시기한 왕비가 벌인 왕실 다툼에서 어머니 발기달이 살해당하는 와중에 부하들이 그를 안고 도망치다 밀림에 홀로 버려져 산속에서 호랑이에게 키워진다. 나중에 나라의 칼을 만드는 충신 손돌이 치우를 발견해 몰래 데려다 손자로 키운다. 치우는 아무 것도 모른채 평화롭게 자라나고, 그 사이에서 동네 여자친구 미리내(은하수의 순 우리말)와 연정을 키워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천족(天族)이 그동안 제후국이었던 화족(중국 민족)의 황제 헌원의 세력이 커지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하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다 스러져가는 천족의 나라, 배달국을 지키는 적통 왕세자, 메시아로 부상하고, 황제 헌원과 탁록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며 부족을 지켜낸다. 그러나 이 와중에 미리내가 교활한 헌원에게 사로잡히고, 헌원이 미리내를 이용해 치우를 괴롭히자, 치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돼 부하들을 찔러 죽이는 등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킨다. 자신의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느끼는 가운데, 치우는 결국 잠들어 있는 사이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린다. 이현세는 치우천왕을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 등에서 나온 ‘까치 오혜성’과 너무나 흡사한 인물로 그려냈다.(개인적으로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승리자 치우천왕(<환단고기>)보다 <사기>에 나오는, 단 한 번의 패배로 죽음에 이른 ‘비극적인 치우’가 애잔해 마음이 더 끌립니다. 또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실제 치우는 후자 쪽이 더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는 이런 내용들이 관련 유적들이 발굴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료적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는 <한단고기>가 엮은 책들이 신라~조선초기에 걸쳐 쓰여졌는데, 이전까지는 전혀 언급도 되지 않다가 구한말에 들어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미뤄 혹 이것이 어떤 의도를 가진 위서(爲書)라는 주장까지 있다. 그러나 <한단고기> 외에도 1675년에 쓰여진 <규원사화>(揆園史話)도 고조선 47대 1195년의 역사가 소개돼 있고, 신라의 박제상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부도지>도 환국-배달국-조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또 우리 역사서가 아닌 <사기>, <상서>, <위지> 등에서도 비록 조각조각난 것이긴 합니다만, 배달국과 조선, 그리고 치우천왕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 백번을 양보해 이 모든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화로는 왜 전할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제우스,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아폴론, 큐피트, 헤라클레스, 아킬레스 등 그 복잡한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은 줄줄 외우면서 우리 동이족의 영웅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 아닌가? 게다가 역사로 인정받는 은나라 이전에 대해서도 요순 시대, 삼황오제 등 그 이전시대의 일화나 용어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불쑥불쑥 등장하는데 그 옛날 중원을 호령했을 치우천왕은 어디에다 내평겨쳤단 말인가?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구역질이 날뻔한 적이 있었다. 어떨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가 이토록 수치스러운 것인가 하고. “거룩할사 당나라 큰 업을 개발하여/황가의 정치 경륜 높고도 창성하구료/싸움을 끝맺어 천하를 안정하고/전임금 잇받아 문교를 닦았도다/(…)/산악의 기운받아 재상들 태어나고/임금님은 충량한 신하만을 믿으시네/삼황으로 뭉치어 한 덕이 되니/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65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승리하자(아직 백제 멸망은 아니었다), 진덕여왕이 비단에 써 당 태종에게 올린(?) 글이다.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중국과 다른 별도의 연호를 써왔다. 그러나 진덕여왕 때에 이르러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이름지어 쓸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일심으로 중국을 섬기어 사행과 조공이 길에 끊이지 아니하면서도 법흥왕이 연호를 자칭하였으나 의심스러운 일이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제와서야(진덕여왕) 비로소 당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니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하면 허물을 지었지만 능히 고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대해 <삼국사기>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삼국통일의 주역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면,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러 신라의 사신으로 당에 갔을 때, 당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중국 옷을 입게 해달라”고 요청한 뒤, 중국 옷을 입고 아뢰었고, “신의 자식이 7형제가 있으니, 원컨대 성상(당 태종)의 곁을 시위케 하여 주소서”라며, 자기가 스스로 청해 아들을 중국에 사실상 볼모로 남겨두고 온다. 또다른 역사서에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연개소문을 만났을 때, 연개소문이 “신라와 우리 고구려가 함께 하면 당나라가 무서울 게 무어냐?”며 “우리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할 때, 아무 말도 않고 이를 거절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당나라에 빌붙어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노예의 평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또 삼국통일을 이룩했고,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다에 자기를 묻게 한 문무왕. 그러나 <삼국사기> 문무왕편을 보면, 문무왕은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중국 의상을 입게 했다”고 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갑자기 뜬금없이 “문무왕 8년, 당으로부터 이후로는 여자를 헌납하지 말라는 칙지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 이전까지는 당에 바치는 조공에 여자까지 포함됐던 것이다. 참으로 수치스런 역사요, 너무나 낯뜨거운 신라 왕들의 행태다. 또 <삼국사기>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땅에서 당나라 장수들과 함께 잔치를 열면서 항복한 의자왕을 데려와 옛 백제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상에서 술을 따르게 했다고 전한다. 당시 신라는 정말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나라였단 말인가? 삼국시대 이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해동에 나라가 있은 지는 오래다. 기자가 주실(주나라)에서 수봉(受峰)함으로부터(BC 1122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나라의 신하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중국 역사서를 이야기한다) 위만이 한초에 참호할 때(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뒤, 한나라와 맞섰을 때)까지는 연대가 막연하고 문자가 소략하여 상전할 수가 없다”는 한 마디로 끝맺었다. 김부식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땅 곳곳에 흩어져 있었을 고대 역사서, 고조선의 옛 이야기들을 단칼에 다 생략해 버린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는 신채호가 ‘일천년래 최대 사건’이라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직후다. 김부식은 유교사상을 나라의 이념으로 삼고, 중국을 숭상하는 것으로 정권의 안정을 도모코자 했다. 이때 이미 고려 초기의 자주적이고 웅혼한 기상은 사라진 때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기 전에 다섯번이나 중국을 다니면서 중국의 역사서를 섭렵했다.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제 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중국의 시각에서 그저 귀퉁이에 조금 흘려쓴 것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주워담아 얼기설기 엮어 역사로 만들다니. 그러나 어쨌든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책이 됐고, 또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다. <환단고기>가 엮었다고 전해지는 각종 역사서들이 구한말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서 논란을 빚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김부식 이후 조선시대까지 중국 중심의 모화사상이 이어지는 와중에 중국과 일합을 겨룰 뿐 아니라, 중국을 제후국으로 삼아 다스렸다는 치우천왕이나 환국-배달국의 이야기를 누가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론한다. 숨죽여 고이고이 전해질 뿐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의 진실은 아마도 중국 역사와 우리 중심 역사인 <환단고기>, 그 중간 어디쯤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운 것은 <삼국사기>가 중국 역사서와 내용은 물론 중국 중심의 관점조차(우리를 준오랑캐 나라로 스스로 자칭하는) 똑같다는 것이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고조선을 사실상 계승한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로 우기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날로 더해지는 이때, 치우천왕의 신화만이라도 최소한 “우리네 역사 속에 이런 신화도 있다”라고 하는 정도로 자라나는 아이들(초등학생들이 혼동스러워한다면 최소한 중고생에게라도)에게 알려주는 것, 그것도 안되는가? 치욕의 역사서 <삼국사기>를 읽기 전에 치우천왕을 먼저 알게 하는 것이 정신건강면에서도 좋을 것 같다.
치우(蚩尤) 천왕의 청구(靑丘). -권명수-
(1) 이제, 신시(神市)[shenshi, 썬쓰] 시대의 말기에 접어든다. 그 가운데, 14대 환웅(桓雄)[huanxiong, 환슝]의 이름은 자오지(慈烏支)[ciwuzhi, 츠우쯔]= ‘첫, 솟은+위, 오른+솟은 이’ 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는 이 분이 곧,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蚩尤)[ciyou, 츠이유]라고 한다. 헌데, 이 이름은, 중국인의 한족(漢族)에게는, 악귀 같은, 두려운 존재로 묘사된 즉, 또한, 그 한자 표기가 비칭(卑稱), ‘추함이(蚩)+더한, 허물(尤)’이므로, 이 양반은 그네들 한족일 리가 없고, 바로, 우리네의 환인(桓仁)족이며, 배달(倍達)[beida, 뻬이따]족 = ‘높이+돋은 (터의 사람)’이다.
우선, 그 두 개의 이름이 동일인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이 이름들을 표기한, 한자의 ‘개수’가, 각각, 3개와 2개이니, [츠우쯔](慈烏支)는 [츠이유](蚩尤)와 다르다, 라고 할 수 있으나, 그 ‘발음’으로 보면, ‘올라 솟은’=[우쯔](烏支)à ‘(위) 오른’= [이유](尤)로, 그 발음의 뜻이 같다. 한자의 훈(訓)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앞의 글에서 보인, 우리네 환웅의 이름들과 비교하면, 두 이름이 동일한 인물이라고 본다. 한편, 이 글에서는, [츠이유](蚩尤)라는 ‘발음’을 쓰겠다. 왜냐고? 중국인의 한족은 지금, 이 [ciyou, 츠이유]를, 그 ‘발음의 뜻’도 모르면서, 자기네 선조로 ‘다시’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므로! 희한하지 않은가? 이는 한족의 ‘습관적 역사 왜곡’이라는 진부한 지적은 놔두고라도, 과연, ‘다민족 통일 국가’라는 ‘창의적’인 개념에, 아주 잘 어울리는, 지극히 ‘관대한’ 행태라 할 것이다.
-[츠이유](Ciyou)의, 중국측, 흉상 [이미지]. 강소(江蘇)[쟝쑤]성의 무석(无錫)[우씨]에 있다고 한다.-
[츠이유](蚩尤)는, 한족에게서, 악귀 같은 대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는, ---그 말뜻이나 알고 썼는지 모르지만---, [츠이유]가 ‘천자(天子)의 칭호’라 ‘카더라.’ 했다! 즉, 중국 땅의 ‘천자 1호’였다는 것이다. ‘묘한 수수께끼’가 아닌가? 그 해답은 이렇다. ‘치우 천왕(蚩尤 天王)’이라는 호칭에서, 천왕(天王)[tianwang, 티앤+왕]은 ‘돋아 오른 곳의+오른 이’이다. 바로, [츠+이유]= ‘솟아+오른 이’와 똑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천자(天子)[tianzi, 티앤+즈]는, 다름 아닌, 우리 말의, ‘돋아 오른+솟은 이’인 즉, 이제,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아신 셈이다.
그는, 현재의 만주 땅, 요서(遼西)[liaoxi, 랴오씨]의 서쪽을 치고, 다시, 중국 땅 북부의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여, 현재의 중국 하남성(河南省)과 산동성(山東省)에, 청구(靑丘)[qingchu, 칭+츄] ‘첫째의+솟은’ 나라를 세웠다. 중국측 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천하를 바꿨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참고로, 말씀 드리거니와, 우리네 땅을 의미한다고도 하는, 청구(靑丘)[칭츄]는 그 무슨, ‘푸른 언덕’ 따위가 절대로 아니다! 역사에 무지한, 그리고, 우리네 [알타이] 말을 모르던, ‘순진한 선비’들의 왜곡이다. 혹, 시간이 되시면, 앞서의 글, ‘중국 신화의 이름들’ (9/28~10/22)중, 그 시기가 겹치는 부분들을 같이 참조하시기 바란다.
[츠이유]의 확장 과정에서, 같은 동족과도 분쟁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현재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있던, 탁록(涿鹿)[zhuolu, 쥬어루]에서, 황제(黃帝)[huangdi, 황띠]라고 후세에 부른, 헌원(軒轅)[xuanyuan, 쇈왠]과 싸웠다. 앞서 설명 드린 대로, 한족의 표기 방법에 따르면, 우리 말 발음, [쇈왠]의 뜻은 황(黃)[황]이 ‘뒤따라서 부연 설명’한다. 해서, [쇈+왠]의 ‘솟아 오른 (곳에서)+오른, 내려온 이’와, [황](黃)의 뜻인, ‘누른, 늙은, 오래된, 어린, 오르는’의, 발음의 공통점을 비교하면, [쇈왠]은 ‘솟아+오른 이’ 쯤이 맞을 듯하다. 그리고, [황](黃)의 ‘오래된’의 의미인, [lao, 라오](老)는 자기네에게 ‘친근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족(漢族)이 자기네의 후원자로 [황띠](黃帝)를 내세워, 후세의 역사에서, [츠이유]를 극렬하게 비하했다는 점이다. [황띠](黃帝) [꿍쑨 쇈왠](公孫 軒轅)은 73번이나 [츠이유]에게 덤볐다니, 실로, 백종백금(百縱百擒)이었다. 이에 비하면, 삼국지(三國志)[싼궈쯔]의, [쭈꺼량](諸葛亮)과, [멍훠](孟獲)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애들 장난이다. 중국측 기록으로는, 지남차(指南車)[즈난처]---혹시, [쭤란](作亂)? ---로, [츠이유]의 ‘안개’를 피하고, 최후에는, ‘북’(鼓)[gu, 꾸]---혹은, 고씨 환족(高氏 桓族)? ---을 쳐서, 이겼다고 한다. [쇈왠](軒轅)의 한자 훈은 ‘전차(戰車)의 멍에’이나, 이는 무의미하다. 그런 한자 기록 속에 숨겨진 비밀은 그 ‘발음’으로 드러난다. [황띠](黃帝)라는 이름은, (黃+地)[황+띠], 즉 ‘(중앙의) 밝은+땅’을 차지하려는 염원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어떤 이는, 공손(公孫)[gongsun, 꿍쑨]씨가, 곰, 즉 웅(熊)[xiong, 슝]씨의 후손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이들의, 원래의 근거지는 훗날, 연(燕)[yan, 얜]의 지방이며, 그 도읍이 연경(燕京)[yanjing, 얜징], 즉, 오늘날의 [beijing, 베이징](北京)이다. 또한, [황띠](黃帝)는 소전(少典)[shaodian, 샤오띠앤]의 아들이라 했다. 내 생각에, [dian, 띠앤]은 단(檀)[tan, 탄]= ‘돋아 오른’과 통하니, 결국, 환족의 지배층 출신이라는 말씀이다. 그걸, 굳이, ‘적을 소(少)’자를 붙여, 별거 아닌 것으로 했다. 허나, [샤오+띠앤]의 발음은 우리 말의, ‘새로운+돋아 오른’일 터이다. 중국측 성씨로는, 희(姬)[ji, 지]씨라고 했다. 그 역시나, [지]= ‘솟아’ 라는 집안 내력을 말한다. 허면, [꿍+쑨](公孫)은 우리 말의, ‘큰+솟은’의 뜻으로, 꽤 실력이 있는 ‘환인족의 일파’였을 것이다.
황제(黃帝)[황띠]가, 탁록(啄麓)[쥬어루]에서 도읍 했다 함은, 이를테면, 내몽고(內蒙古)지역에서, 중국 내륙으로 왔다는 것을 말한다. 즉, 황제(黃帝)[황띠]는, 만주와 [화베이](華北)지역의 환인족에서, 독립하여, 과거와는 결별하고, ‘남쪽’으로 쳐들어 왔으며, 그로부터, 한족(漢族)을 이끌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결과, 소위, ‘화족(華族)의 시조(始祖)’로 모셔진다는데, [춘츄쓰꽌](春秋史觀)의 소위, [웨이궈훼츠](爲國諱恥), ---나라, 즉, 한족을 위해, 부끄러운 것은 숨긴다---가 여기서 시작된다. 역사의 앞머리가 잘려 나간 것이다. 한족(漢族)은 [츠이유]천왕의 확장을 ‘위협’으로 봤다. [츠이유] 천왕은 이런 [황띠 쇈왠]을, 오늘날의 내몽고에 있었다는, 탁록(啄麓)[zhuolu, 쥬어+루], 곧 ‘솟아+오름’의 벌에서 쳐내고 남하했다.
우리네 작가 몇 분이, [츠이유](蚩尤) 천왕의 장대한 얘기를 ‘소설’로 쓰신 듯 하다. 이들을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걱정하는 바는, 그 양반들이, 겉으로 한자의 모습들을 하고 있는, 그 속의, ‘우리 말 발음’을 제대로 짚어냈을까,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저, ‘국내용’의 것으로만 한정되고 만다. 부디, 왕성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족의 중국인들도 수긍할 수 있는, 대작들을 만드시기 바란다. ---우리네와 한족(漢族)의 역사에서, 공히, 비중이 있는 영웅이므로. ---그리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자면, 여러 가지로, 더욱, 아쉬워지는 분이므로.
(2) 과보(夸父), 도철(饕餮)과 붉은 악마. 어제, 여러 분이, 이 [블로그]를 방문해 주셨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앞의 글에서, 중국인 한족의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역사 왜곡’의 사례를 말씀 드렸다. 치우(蚩尤)[ciyou, 츠이유] 천왕을 비하하면서도, 이제는, ‘자기네의 조선(祖先)’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현재’의 중국 땅에서, 과거에 등장한 옛 인물은 ‘모두’ 중국인인가? 물론, 아니다. 그네들은, [츠이유](蚩尤)를, 그네들이 모시는 [황띠](黃帝)에 덤빈, 자기네와 같은 동족의 하나쯤으로 꾸미고 있다. 이런 것들이 도대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 말씀이 괴이하다면, 그네들에게 [츠이유]의, 그 한자 비칭의, ‘발음의 뜻’을 물으시라. 나는 중국측의 역사를 구태여 폄하하고 싶지도 않고, 오히려, 그네들의 최근, 1~2000년의 성취를 ‘대단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를테면, 중국 음식은 그 얼마나 [스마트]한가? 다만, 그네들이 ‘공연히’ 고대사를 꾸미고 있다는 것뿐이다.
한편, 우리네는, 스스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증거가 속출하고 있다. 만일, 과거의 우리네가 ‘진실로’ 형편없었고, 그저, 동 [아시아]의 변방쯤이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주 가까운 예로, 일본의 [나라](奈良)나 [교또](京都)의, 그 고색창연한 유물들을 만들어 준, 우리네에게는, 정작, 왜, 그런 것들이 우리 땅 곳곳에 없는지를 잠시 생각하시라. 기록으로만 봐도, 우리 땅은 970여 회의 외침(外侵)이 있었다고 하는 즉, 그만큼 우리 땅은 970여 회의 ‘초토(焦土)’가 되기를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물질적, 정신적’ 과거를 잃게 된 것이다. ---마치, 기억상실증(amnesia)에 걸린 것처럼. 날 달걀을 ‘냉장고에 넣었다 꺼냈다’ 를 여러 번 반복하면, 어찌 될까? 강인해진다고? 아니다. 나중에는, 곯아 버린다.
중국 신화에서는, 치우(蚩尤)[츠이유]가 거인족(巨人族)이라 했으니, 곧, 우리네 환인족이고, ---고대, 만주 지역의 평균 신장(身長)이 세계 최고였다. --- [츠이유]의 모습을, ‘사람의 몸에, 소의 발굽’(人身牛蹄), 그리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라 했은 즉, 이를테면, 발에는 장화도 신고, 얼굴에는 투구도 쓴, 막강한, 그리고 한족에게는 이질적인, ‘금속’ 문명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는 또한, 묘족(苗族)을 ‘선동’했다고도 한다. ---선동이 아니라, 당연한 지휘를 한 것이 아닐까? 현재는, 묘족(苗族)[miaozhu, 먀오쭈]가, 중국 [광시싱](廣西省)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이라 하나, 과거에는, [miao, 먀오](苗)= ‘높이, 빨리+오르는’, 날쌘 족속으로써, 북부 중국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에,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다지만, 아마도, 우리와는 더 오랜 역사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중국 인민 은행이 2003년 발행한, 신화(神話) [시리즈]의 금화에 그려진, [kuafu, 콰푸](夸父)의 ‘태양’과의 경주 모습. 중국인의 한족은 [콰푸]를 자기네 얘기로 만들고 있다. -
한편, 중국 신화에서는, [황띠]가 [츠이유]천왕을 이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의하면, 전쟁의 승리자는 늘 [츠이유]천왕이었다. ---그 [황띠 쇈왠](黃帝 軒轅)이 승리한 것은, 한참 나중에, [츠이유]천왕의 부하, 또는 그 후손에게, 였다고 한다. 허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양쪽 기록에 같이 나와있는, 탁록(啄麓)[쥬어루]의 위치로써, [츠이유]가 그 지점을 돌파하고 남하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중국 신화에서는, [츠이유]천왕에게 동원된, 거인족(巨人族)이 하늘의 태양과도 뜀박질 시합을 했다고 한다. 그 이름, 과보(夸父)[kuafu, 콰+푸]는, 다름아닌, 우리 말의 ‘크고+무서운, 또는 빠른’이다. [콰푸]가 쓰러진 곳에, 복숭아(桃)[tao, 타오]가 났다던가? 결국은, 도망갔다? 는, ---[tao, 타오](逃)---, 중국측 얘기다. 과연, 그랬을까? 아니다. [황띠](黃帝)는 [콰푸]들을 위해, 박보국(博父國)이란 것을 세워 줬다? 하므로, 그들은 실제로는, [황띠]와는 상관 없이, 어딘가에서 계속 살았다.
헌데, 그 [콰푸]족(夸父族)의 ‘우공(愚公)’이, 집 앞의 ‘산을 옮기려 했다’는, 이른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古事)가 있다. ‘어리석을 우(愚)’, 또는, 중국인? 의, 대대손손의 ‘집념’이라는 교훈 사례로 인용된다. 너도 나도, 학교에서 그렇게만 배웠다. 허나, 그 실체는 뭘까? 이는 바로, ‘산하(山河)를 옮기던’ [츠이유]와 [콰푸]의, 저 한족에게는 몸서리쳐지는, ‘기억’을 반증하는 것이다. 중국측의 ‘말장난’ 풀이는 다시 봐야 한다.
-[츠이유]를 뜻하는, [taotie, 타오티에](饕餮) 무늬의 하나. -
아무튼, [츠이유] 천왕은, 한족 중국인의 입장에선, 악귀(惡鬼)였다. 그 상징물인, 도철(饕餮)[taotie, 타오티에]의 경우, 그 한자의 훈은 ‘탐(貪)하다’의 뜻이라 한다. 헌데, 왜, 이렇게 복잡한 한자를 굳이 썼을까? 원래, 한자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타오+티에]를, 우리 말 발음의, ‘따로+떨어지는’, 또는, ‘덧 씌우는+(구멍) 뚫린 것’= ‘탈’로 본다. 이것은 실은, [츠이유] 천왕의, 그 몸(身體)은 없이, 두상(頭像)만을 본뜬 ‘탈’로써, 그릇, 도끼 등에도 장식을 했고, [츠이유] 천왕의 ‘탐욕(貪慾)?’ 을 두고두고 경계하는 상징물이다. 중국인으로서는, 두려움의 대상 제1호가 그 분이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도철’을 ‘도찬(饕䬸)’이라 잘못 쓴 책 때문에 고생을 했다. 중국에는, 치우희(蚩尤戱)[ciyouxi, 츠이유씨]라는 ‘곡예’도 있었다 한다. 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이것 또한, [츠이유]의 영향력을 보이는 것이다. 한편, [츠이유]의 무덤에서 솟았다는, 치우기(蚩尤旗)[ciyouqi, 츠이유치]는 ‘붉은 색(赤)[chi, 츠]’이었다. 실은, 치(蚩)[ci, 츠]와 비슷한 발음! 의 [츠](赤)를 쓴 것뿐이다.
-2002년, 졸지에 유명해진, ‘붉은 악마’의 표시물. 이것이 ‘한국의 힘 (Forza Corea)’ 이라? -
2002년,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이, 그 ‘붉은 악마’의 기원과 [츠이유]를 연결한 것도 엉뚱하지만, 또한, 무슨 ‘악의(惡意)’는 없었다고 보지만, [츠이유]의 [타오티에](饕餮)를 ‘붉은 빛깔’로 만든 것은, 중국인 한족의, [츠](蚩)à [츠](赤), 단순한 ‘유추(類推)’ 방식을, 검증 없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다들, 그 ‘색깔’ 좋다고만 했고. 그리고, 그 얼마 전부터, 이 땅에서는, ‘색깔론’이 ‘금기 사항’이 됐다. 갑자기, 모두가 ‘색맹(色盲)’이 됐다는 얘기인가? 혹은, 누가 그리 만들려는가? 왜 그럴까?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내게는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붉은 것’을 ‘붉다’고 말을 못하게 하다니!
(3) 관련 지명들과 청동기의 기원?
어디선가, [프로페셔널]한 ‘작가(writer)’는, 끊임없이, ‘현실에는 없는 것을 채워주는’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이 [블로그]의 글들은, 다만, ‘현실에서 잊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니, 그런 엄격한 정의에는 감히, 어울리지도 못한다. 어제 올린, ‘색깔’에 대한 글은, 예전의 [메모]에서 군살을 뺀 것이나, 다시 읽어본 즉, 너무 [다이어트]를 해서 그런지, ‘느낌’이 빠졌다. 역시, 글에 관한 한, 나는 ‘2%, 아니, 20%가 부족한’ [아마츄어]이다.
중국은, 대외적, 대내적 ‘정치’를 위한, ‘역사’의 효용을 잘 아는 듯 하다. 이제껏, 신문에 공개된, 그네들의 움직임을 정리하면, 우선, 자기네의 정체성이, 56개 민족의 ‘통일적(統一的) 다민족(多民族) 국가’라고 한다. 과거에는, ‘다민족 대가정(大家庭)’이라는 통일 전선 이론도 있었다. 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1981년에 제기된 것으로, ‘중국의 판도 안에 있었던, 모든 국가나 민족은, 중국에 귀속된다’는, ‘비(非) 역사적’ 궤변이다. 이는 ‘현재의 설명’은 될지언정, 그들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증명’은 결코 아니다. 참고로, 중국은 인구의 절대 다수, 95%! 가 한족(漢族)으로, 중국 영토의 30% 만을 점유하면서도, 다른 70%의 땅도 통치하고 있다. 헌데, 우리네 일각에서는, 100만 명의 동학군 중, 그 중심 인물들은 빼고, 450명만의 명예를 살린다고 한다. (조선일보, 05-12-29) 왜, 그럴까? 비싼 비용을 쓰면서도, ‘역사 왜곡’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다.
중국은 이미, 1986년에, 소위, ‘장학 연구중심(藏學硏究中心)’을 만들어, 서남쪽 [티베트] 역사를 왜곡했고, ‘변강사지(邊疆史地) 연구중심’을 통해, 서북쪽의 [신짱 위구르]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했다. 그리고는, 2002년에는, 동북쪽의 만주 지역을 대상으로, [뚱뻬이꿍청](東北工程)을 착수해서, 이를 이미 마쳤다. 이렇듯, 공간적으로,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한편, 시간적 역사로는, 1996년에, ‘하상주(夏商周) 단대공정(斷代工程)’으로 고대 역사를, 2003년부터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으로 상고사를, 각각, ‘한족 위주로 꾸미고’ 있다 이 [블로그]의 글은, 비록, 미력하지만, ‘말’의, 그 ‘발음의 뜻’을, 통해서, 그 ‘~공정’들의 허구(虛構)를 반박해 보려는 것이기도 하다.
-용산(龍山)[longshan, 룽싼] 문화 지역. -
[츠이유](蚩尤) 천왕은, 한족(漢族)에 치우친 감이 있다고 판단되는, 소호(少昊)[shaohao, 싸오하오], 신농(神農)[shennong, 썬눙]과 제곡(帝嚳)[digu, 띠꾸] 등도 공격했다. 그리고, 나라는 발전했다. ---300년 후, BC 23세기의 어느 날, [칭츄](靑丘)는, 다른 북방계의 동족들에게 밀려나서, 원래의 환웅 시대의 근거지인, [랴오허](遼河) 쪽으로 옮긴다. --- [츠이유]는 중국 대륙의 북부를 장악했다. 공상(空桑), 현재의 개봉(開封)시 진류(陳留)에서 즉위했고, 뒷날, 수장(壽張)에 묻혔다. 그와 관련된 지명들은, 제하(濟河), 치하(淄河), 임제(臨濟), 임치(臨淄), 염구(鹽丘), 청구(靑丘) 및 안구(安丘) 등이다. [츠이유] 시대에는, 구리와 쇠를 잘 다뤘다고 했고, 또한, 구 자일 박사에 의하면, ‘갈로’산(葛盧山)에서 쇠를 캐어, ‘옹호’산(雍狐)에서 야금을 했다는데, 현재의 ‘옹우’특기(翁牛特旗)로, 몽고어로는 [옹곹](ongot)이며, ‘영고’탑(寧古塔)이었다고 했다. 헌데, 구 박사는, [츠이유]의 청동기 문화가, [수메르]? 에서 왔고, [츠이유]의 시대는 이른 바, ‘용산(龍山) 문화’와, 그 시기와 일치한다고 한다.
-용산(龍山)문화: BC 2,800~2,000년. 현재의 산동성(山東省)의 제남(濟南)[jinan, 지난]을 중심으로, 중국의 하남성, 섬서성, 산동성, 하북성에 이른다. BC 2,700년의 대문구(大汶口)문화를 대체했다고 한다. -하가점(夏家店)문화: BC 2,000년의 것으로, 첫 청동기 문화의 유적이라 한다. -소하연(小河沿)문화: BC 2,200년의 것으로, 특히 ‘만(卍)의 형상’을 비롯한, 최초의 부호 문자가 출현했다.
PEM으로 지명을 해석한다. [츠이유]가 즉위한, 공상(空桑)[kongsang, 쿵+쌍]은, ‘비어있는 뽕나무’가 아니라, 우리 말의 ‘큰+솟은’ 이며, 그 현재 지명인, 개봉(開封)[kaifeng, 카이펑]은, ‘닫힌 것을 연다’가 아니고, ‘(해) 크게 올라+밝은, 높은 곳’이다. 진류(陳留)[chenliu, 천+류]는 ‘첫+오름’이고, 그가 묻힌 곳, 수장(壽張)[shoujiang, 써우+쟝]은, ‘첫 (어른)+지다, 저물다’이다. 언젠가, 중국인이 [츠이유]의 뼈를 발굴?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게 가능할까? 나는, ‘장(葬)’이란 회의문자(會意文字)를, 그저, 글자 모습만을 따라서, ‘묻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을 의심한다. 그 옛날에는 혹시, 귀인(貴人)은 화장(火葬)하지 않았을까? 즉, 장(葬)[zang, 장]= ‘草[cao, 차오]+死[si, 쓰]+卄[yi, 이]’는, ‘(위로) 솟게+숨을 멈춘 이를+(태워) 올려’+‘잘 가시라는 것’은 아닐까? 고대 [그리스] 영웅의 화장(火葬), 인도의 다비식(茶毘式) 등등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한편, 다른 지명들, 제하(濟河), 치하(淄河), 임제(臨濟) 및 임치(臨淄)를 보면, [츠이유](蚩尤)의 ‘첫’을 따른 ‘치’(淄)[ci, 츠]와, ‘(해) 솟아’의 의미를 지닌, ‘제’(濟)[ji, 지]가 구별되어 있다. 염구(鹽丘), 안구(安丘)는 각각, [yanqiu, 얜+츄], [anqiu, 안+츄]로, ‘오르는+솟은 곳’, 청구(靑丘)[qingqiu, 칭+츄]는 ‘첫+솟은 곳’이다. 한편, 유적지 이름들의 뜻은 다음과 같다 용산(龍山)[longshan, 룽+싼]: ‘오르는, 이룬+솟은’이고, 제남(濟南)[jinan, 지+난]은 ‘(해) 솟아+내린’이다. 하가점(夏家店)[xiajiadian, 쌰+쟈땐]은 ‘솟은 (곳의)+솟은’. 소하연(小河沿)[xiaoheyan, 쌰오+허+얜]은 ‘솟은+높이+오른’이다. 이 명칭의 이름, 그 발음들이 어디서 비롯했을까?
청동기와 철기 문명의, 그 전래와 발전에 대해, 이론들이 많다. 갈로산(葛盧山)[kelushan, 꺼+루싼]은, 철광석, 동광석을 ‘밖으로+캐어+올린’ 산인 듯도 하다. 옹호(雍狐)[wenghu, 웡+후]산은 ‘윗+높은, 밝은’ 산이니, 그곳에서 야금(冶金)을 했을 성도 싶다. 영고탑(寧古塔)[ningguta, 닝+꾸+타]는 ‘높은+큰+돋은 곳’이다. [황띠](黃帝)가 ‘지남철(指南鐵)’을 썼다는데, 만일, [츠이유]의 ‘쇠’가 없었다면, 그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한편,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Sumer)가, 세계 최초로? 청동기를 사용했고, 가까운 지역과는 무역을 했다지만, 거기서 어떻게, 동쪽으로? 청동기 문화가 전래됐는지는 모르겠다.
‘환단고기’의 일부 해설자들이 말 하듯, [수메르](Sumer)와 [우르](Ur)가 우리 고대 민족의 한 갈래? 라면, 먼저, [수메르]의 도시 국가와 왕의 이름부터라도, 그 ‘교착어’라는, 음운의 형식과 의미를 규명해야 한다. 다만, [수메르]는 BC 3500년~ BC 2000년까지의 나라로, 그 시기의 뒷 부분은, [환슝](桓雄)의 신시(神市) 시대 후기의, [츠이유](蚩尤)의 청구(靑丘) 시절에 해당한다. [우르]는 그 [수메르]의 12개 도시 국가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고, [수메르]인들은 도시에 신전을 짓고, ‘별’과 신들을 연결 지었다 하므로, 우리 [알타이]의, ‘해’를 중시하는 문화와는, ‘좀 다르다’고 본다. 헌데, [야훼](Yahweh)를 숭배한, [히브루]족의 [아브라함](Abraham)이 [우르] 출신이라니, 검토가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야+훼]는, 그 해석이 분분하나, 우리 말의, ‘올라+높은, 밝은’으로 풀이 되므로. 참고로, [수메르]의 도시와 왕의 이름들은, -도시: Adab, Arshak, Badtibira, Erech, Kish, Lagesh, Larak, Larsa, Nippur, Sippar, Umma 및 Ur. -왕: Meskiagasher, Enmebaragesi, Mesanepuda, Lugalanemundu, Sargon 및 Uthuhegal. 이 이름들을 ‘접두어, 접중어 및 접미어’로 분해하면, 우리 말로, 그 풀이가 가능해 보인다. 허나, 이는 [수메르]학-(Sumerology)이 찾은 내용과 비교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라, 일단, 숙제로 남긴다.
그 보다는, 그 옛 발음을 승계한 것으로 보이는, 후대의 [바빌론](Babylon)과 관련하여, 기존의 개념과는 다른, 내 나름의 해석을 말씀 드리려 한다. 그들의 신(神), [마+르+두+크](Marduk)의 뜻은, 우리 말의 ‘밝게 높이+올라+돋은+큰’이다. 이게 ‘태양’일까? 그들의 나라, [바빌+론](Babylon)과 저 유명한 전설적인 탑, [바벨](Babel)의 뜻은 ‘밝고 높이+오른 곳’이다. 그들의 위대한 왕, [느브갓네살](Nebuchadnezzar)의 경우, ‘Nabu-Cho-Dono-Sor’, 또는 ‘Nabu-Ku-Durri-Usur’로 추적하여, 그 뜻이, ‘오, 네보여, 내 나라를 지키소서’ (O Nebo, defend my land)? 라고 하나, 이 해석은 ‘네보?’ 라는 말뜻을 확실히 풀이하지 못했다. 헌데, 이를 우리 말로 보면, ‘높이+크게+솟아 돋아 오른 터에+위에 솟은 이’이다. 현재의 [바+그+다+드](Bagdad)는 ‘밝게, 큰+돋은+터’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 말로 풀이가 된다면, 그 고대 시절에도, 원거리 ‘교류’는 있었다는 것이고, 이를테면, ‘세계화(世界化)’가 당시에도 존재했으며, 우리네 선조는 분명히! 그 ‘무대’의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화’에 반대하는 분들의 심정은 이해하나, ‘쌀(米)’도 원래, 교류해서, ‘도입된 것’이지, ‘우리 만의 것’이 아니다. 한편, ‘청동기 문명’의 기원이 어느 쪽인가를 검증하는 방법은, 일단, [수메르]와 [츠이유] 시대의 청동기의, 그 ‘금속 성분’들을 각각,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결과의 해석일 터이다. 왜냐하면, 더 원시적인 것이 그 성분이 단순할 수도 있고, 혹은, 모방하는 쪽이 기술이 부족해, 성분이 단순할 수도 있다. 즉, ‘말의 변화’는 그 이동에 따라, ‘단순화’ 하는 것과 달리, ‘금속 성분’의 해석은,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동위 원소를 이용한, 연대(年代) 측정도 그 정밀도에 한계가 있은 즉, 무형의 ‘말’도 그 열쇠를 쥐고 있다 해도 되지 않을까?
(4) 만(卍)은 뭘까?
2005년의 섣달 그믐 날이다. 이 [블로그]를 찾아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와 아울러, 새해 인사의 말씀을 올린다. ‘새해에는 모두, 높고 밝게 솟으시기를 바랍니다!’
위의 인사는 실은, 우리네 옛 선조의 ‘고어(古語) 형태’이다. 정말이냐고? 그 남아 있는, 증거가 바로, 일본어의 새해 인사로, [お めでと(御目出度, 御芽出度)う ございます, 오 메데또오 고자이마쓰]인데, ‘경사스럽습니다’ 의 뜻으로, 모든 종류의 축하 인사에 쓰인다. 헌데, [오메데또오]는 ‘눈(目, 芽)이 돋아 나오듯이’의 한자 표시가 두 개이다. 참, 엉뚱하지 않은가? 즉, 한자 말이 아니다. ---[메데+또오]는 우리 말의, ‘모든 것이, 또는 밝게 되어+돋아’가 변화된 것이다. 전체로는, ‘어른께는+모든 것이 (밝게 되어) 돋아 계셨으면 합니다’ 이다. 특히, 새해 인사의 경우, [あ(明)け まして~, 아께+마씨떼~]= ‘(새로운 해가 밝게) 밖으로 오르고+있다고 하는 터에, ~’ 라고, 먼저, 운을 띠운 후, 이어서, [오 메데또오 고자이마쓰] 라고 한다. 일본인은 자기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서 이 말을 쓰고 있다! 중국인의 새해 인사, 공희(恭禧)[gongxi, 꿍+씨]는, 우리 말의, ‘(몸을) 구부려 (말씀 드리건대)+(밝은 해처럼) 솟으시옵소서.’ 이다. ‘근하신년(謹賀新年)’에서의, 하(賀)[he, 허]= ‘加[jia, 쟈]+貝[bei, 베이]’는, 우리 말의 ‘솟아+밝게’+그래서, ‘높이 (오르소서.)’이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의, 복(福)[fu, 푸]는 우리 말의 ‘높고, 밝은’이다. ‘I wish you a Happy New Year!’ 의, [해피](happy)는 ‘높고 밝게’이다.
어제 말씀 드린, ‘청동기(靑銅器)의 기원’과 관련, 보충 말씀을 드린다. ‘청동(靑銅)’이란, 구리(copper)와 주석(tin)의 합금(alloy)인데, 그 기원은, 구리와 주석이 같이 묻힌 산에서, 어떤 ‘산 불(山火)’로 인해, 두 금속이 같이 녹은 것을 우연히! 발견해서 썼을 것이다, 가 정설이다. ---산(山) 사람들의 작품이다. 참고로, 놋쇠(brass)는 구리와 아연(zinc)의 합금이다. 영어의 ‘청동’, [브론즈](bronze)는 [페르시아]어의 [비린지] (birinji)= ‘구리’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그 ‘br-‘는 우리 말의 ‘불(fire), 붉은’이다. 우리 말의 ‘구+리’는 ‘붉게+(녹아 솟아)+오른 것’, 또는, ‘겉이+파랗게 (녹이 쓰는 것)’이 압축된 것이다. ‘청(靑)동’은 주석의 비율이 ~20%에 이르면, 합금의 색깔이 회청색이 되어, 그리 불렸다고도 한다. [비+ㄹ+인+지](birinji)는 우리 말의 ‘붉게+녹아+솟은 것’이다. 중국어, 동(銅)[tong, 퉁]의 발음은 우리 말의 ‘(붉게) 돋은 것’이다. 영어의 ‘구리’, [카+퍼+ㄹ](copper)은 ‘cuprum, kyprios = 현재의, [사이프러스]섬의 광산’에서 비롯했다고들 하나, 엉성한 풀이이다. 내가 보기에는, 영락없는, 우리 말의, ‘겉이+파랗게 되는 것’이다. 청동의 성분, 즉, ‘합금 비율’은 차후의 문제이다. 우선은, 그 발음이 ‘청동’의 기원을 말한다. 허면, 어디가 기원일까?
오늘은, 년말 특집이라 할까, ‘이단적’이라 해도 좋을, ‘파격적’인 말씀을 드린다. 나는, 앞의 글에서 언급된 [츠이유](蚩尤) 시대의 유적지, 소하연(小河沿)[xiaoheyan, 쌰오허얜]에서 나온, ‘만(卍)’이란 ‘부호 글자’에 특별한 흥미를 느꼈다. 중국측의 학설은, 이것이, 소위, 백적(白翟)[baidu, 빠이듸], 즉, 나중에 ‘북쪽 오랑캐’로 불리우는, 적(狄)[du, 듸]의 ‘상징’으로, ‘새의 깃털? ’을 묘사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거기서 그쳤다. 우리 학계도, 아마, 그 학설에 그냥 따라가는 모양이다.
허나, [빠+이+듸](白翟)의 발음의 뜻은, 우리 말의, ‘밝은, 높은+오른 (곳의)+돋은’ 이다. ---[알타이]이다. 헌데, 이 ‘만(卍)’이 만약, [알타이]의 상징이라면, ‘새의 깃털’이 아니라, ‘새의 비상(飛翔)’ 자체를 그린 것이고, 이는 또한, 동사(動詞)의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써, 바로, ‘(해) 높이 솟다!’ 라는 ‘우리 말’이 된다는 말씀이다! 즉, ‘솟대’, 소도(蘇塗) [shutu, 쑤투]의 구체화 된 원형이, 또 하나 나온 것이고, 글자라는 형태로는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새의 깃털’이 아니라는 것은, 이것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 원 모양의 옛 그림에서, 그것의 각 사분원(四分圓) 마다, ‘서로 다른 방향의 빗금’이 그려 있는데, 이것을 봐서도 분명하다. 그 형상은, ‘해’ 자체를 상징한 것이고, 아직, 그 역동적인 움직임을 묘사함에는 이르지 못한, 원시 단계의 것이다. 다시 말해, 만(卍)이 발견된 그곳, [쌰오허얜](小河沿) 역시, 단군 왕검을 전후한 시대의, 또 하나의 아사달(阿斯達)[esida, 어쓰따]= ‘올라+솟은+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어의 (卍)[man, 만]의 발음 뜻은, PEM으로는 ‘ㅁß ㅂ’ 이므로, 당연히, ‘밝은’이 될 터이다.
나는, 이렇게, 적어도 4,200년 전에 등장한, 우리 [알타이]의 ‘卍’ 무늬가, 그 뜻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세계 각처의 ‘후발 문명들’에게서, 무제한적으로 복제 및 변형되고 있음을 본다. 우리네 역시도, 그 뜻을 잊고서, 그저, ‘뢰문(雷紋)’으로 담장의 장식에나 쓰고 있다. 심지어, 60여 년 전에는 독일 [나치](Nazi)에 의해서 악용까지 됐다.
-만(卍, swastika)의 여러 변형들. 그 장소의 차이와 회전 방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대들은, 그 [스와스티카](卍, swastika)의 ‘발음의 뜻’을 아는가? 단지, 외형상으로, [그리스]문자인 [감마](Γ)가 네 개 모였다고 해서, [감마디온](gammadion)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설명이 안 된다. 그 숨은, ‘뜻’을 아는가? 10,000년에 걸친, [알타이]와 한민족의 상징인, 저 장엄한 ‘해 솟다’의 의미를? 그걸 주장할 수 있는, 역사의 흔적을 제시하라고? 우리네 복희(伏羲)[fuxi, 푸씨]가 만든, ‘태극(太極) 문양’---☯---을 보시라. 뒷날의 중국인이 ‘변화’를 강조하려고, 그 뜻도 모르고 덧붙인, 양중음(陽中陰)과 음중양(陰中陽)의 군더더기를 빼고서, 그 원래의 순수한, 원의 테두리 ‘ㅇ’과 역동적인 모습의 ‘~’을 합치면, 그게 바로, ‘밝은 해+솟다’라는 우리 말이요, ‘卍’의 형상이다.” 해서, 얘기가 통할 만한, 만해(卍海) 한 용운(韓龍雲) 선생에게, 한 말씀을 드린다.
“선생께서는, 불가(佛家)에 몸을 기탁하셨습니다. 헌데, ‘만(卍)’의 뜻을 아시고, 그 아호(雅號)를 쓰셨습니까? 이로써, 선생이 호기심 많은 분임을 미루어 짐작하겠습니다만, 쓰시고 계신, ‘만(卍)’은 만(萬)[wan, 완]이 아닙니다. [완](萬)은 우리 말의 ‘위 아래의 (모든) 솟은’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신에, ‘만(卍)’은 우리 말의 ‘밝은~’입니다. ‘만(卍)’이 불교의 ‘길상해운(吉祥海雲)’, 또는 ‘길상희선(吉祥喜旋)’으로, 부처님의 손, 발, 가슴에 나타나는 회전 무늬, 만덕(萬德)의 상징이라고요? 원래는, 불교가 나오기 이전의, 그 옛날 [힌두]교의 신(神), [비슈누] (Vishnu)= ‘빛나는, 비치는 이’의 가슴 털, [난디아바타라](nandyavatara)에서 비롯했다고 합니다만, 그 [힌두]교 자체의 발생보다도, 적어도 500년~1,500년쯤은 앞서서, 환웅(桓雄) 시절에, 우리네 [알타이] 민족이 ‘창안’한 것입니다. 이제, 그 음운학적 증거를 말씀 드립니다.
우선, [난+디+아바+타라]를 설명 드립니다. 우리 말의 ‘(해, 기쁨이) 나오는 데의+앞, 높이+돌다~털’에서, (해 나오는) 오른 쪽으로 돌아가는, 우선(右旋), 또는, 기쁘게 돌아가는, 희선(喜旋)이란 중국식 번역이 나왔다고 봅니다. 아시겠지만, [난디](nandi)는 황소, [아바타](avatar)는 화신(化身)이나,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시바](siva, shiva, ishiwara)의 중국어 번역, 길상(吉祥)[jixiang, 지+썅]은, 우리 말의 ‘(해) 솟은 (곳의)+솟아 오른’ 입니다. [시바] 신이 ‘파괴와 생식(生殖)’을 관장한다고는 하지만, 그 별칭인, [이쉬+와라](ishiwara)를 보면, 그 뜻 역시, 우리 말의, ‘(해) 올라 솟은 (곳의)+오른’ 이라고 봅니다.
-[스와스티카]의 2차적 해석들. 행운, 빛, 삶, 사랑 등등. –--그 원래의 뜻은 모른 채, 추정한 것인, ---
[스와스티카](swastika)는, [산스크리트]어의, [스+바스+티+카](svastika)에서 나왔다는데, 흔히, ‘good+being’, 또는 ‘행운’쯤으로만 알려져 있고, TV에서 본 즉, 인도의 어느 [산스크리트]어 대가라는 분, 역시, ‘그 뜻은 그저, 지극히 높은 것으로만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허나, 이것은 우리 말의, ‘솟아+밝은+터의, 돋은+큰 것’ 이고, 같은 뜻의 [쉬리+바+차](shrivacha)는, 우리 말의 ‘솟아 오른 (곳의)+밝게 솟은’ 입니다. 한자의 신(神)[shen, 썬] 또한, ‘솟은’에서 온 것 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 말로 해석이 된다는 것은, 인도-[유럽]어의 원조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실은, 우리 [알타이]어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산스크리트]어 자체가 겨우! BC 1,500년에야 시작됐지 않았습니까? [산스+크리트](Sanskrit)가 ‘순수한 말’이라는 뜻이라 하나, 저는, 우리 말의 ‘솟은+그리다’ 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이나, 그로부터 1,000년도 지난, 한참 후대의,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어찌 이런 내용의, 옛 얘기를 알았겠습니까?
한편, 중국 불교는 뒤늦게, 뭣도 모르고, [쉬리+바차]의 뒷부분 [바+차], 즉 ‘밝게 솟는’ 의 일부를 따서, [man, 만](卍)이라고 발음한 것뿐입니다. 그런 즉, 훗날의 한국 불교가 또한 이를 어찌 알았겠습니까? 어쨌든, ‘卍’의 형상이, 이 땅에서는, 불교의 전유물처럼 쓰이고 있으나, 그 ‘해 솟음’과 ‘밝은’ 이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글자 하나로, 민족의 선구자이신 선생을 어찌 감히 핍박하겠습니까? 만은, 선생께서, 지하에서라도 제 말씀에 귀를 기울이신다면, 아호 하나는 기차게 잘 썼구나, 하실 겁니다. 부디, 망각과 시련에 빠진, 이 민족을 보살펴 주옵소서.”
-[시바](Siva) 신의 [이미지]. -
나는 PEM이 문화 이동의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만(卍)’이 바로, 그 문화 이동의 증거이다. [시바](siva)신의 상징물들에서 여러 손들이 둥근 원을 그리는 것을 보라. 나는 그것이 만(卍)과 태극의 ‘ㅇ’, ‘~’의 모습을 빼어 닮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바]신의 형상은 둥근 광륜(光輪)을 그 배경으로 한다. ---‘해’와 관련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카프라] (Fritjof Capra)는, 그의 책 ‘The Tao of Physics’ 에서, [시바]신과 우주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동양의 도(道)를 연결시켰다. 허나, 그가 [시+바]의 뜻이, 우리 말의, ‘(해) 솟은 (곳의)+밝게 솟아 오른’ 임을 알았을까? 그는 동양 철학의 근본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몰랐을 터이다. 서양의 [그리스]나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시대의 조각 작품들은, 옛 설화의 주인공들이나, 어떤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만든, 노력의 결과이다. 인도의 옛 조각들도 이처럼, ‘그들에게 오래 전에 전수된, 그 실체를 잊은, [알타이]의 개념’을, 어떻게든, ‘신의 형상’으로 구체화한, 안타까운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오늘도, 수많은 [힌두] 신도들이, [시바] 신에게 참배한다. 결국, 무엇에게, 누구에게 절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진정한 영적(靈的)인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오늘 밤에는, [올 랭 자인](Auld Lang Syne)이 울려 퍼질 것이다. [스콧티쉬](Scottish) 말로, ‘old long since’ 라던가? ‘auld, old’는 ‘althas’, 즉 우리 말의 ‘오래 돋은’ 에서, ‘long’은 [산스크리트]어의 ‘dirghah’, 즉 우리 말의 ‘두 곳의 갈라진 사이의 (길이)’에서, ‘syne, since’는 ‘sith+tham’= ‘sayam(=[산스크리트]어의 evening)+that’, 즉, 우리 말의 ‘(해) 지듯이 다음의(after)+떨어진 것’ 에서, 풀이가 된다. 우리는 몰랐어도, 우리 말은 이미, 세계의 ‘영혼’ 속에 들어가 있다! 어떤 분들은, 우리네의 역사적 ‘유전자(遺傳子)’에 이끌려, ‘해돋이’(日出)를 보면서, 소망을 비는, ‘새해 맞이’(迎新)를 준비하실 터이다. ---마음이 바쁘실 터인데도, 긴 글을 읽어 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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