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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8 : 三足烏(삼족오)]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1:30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8 : 三足烏(삼족오)]

 


 

[각저총 삼족오]

 

 

 ◆ 삼족오를 엠블렘으로 사용하고 있는 삼도 축구협회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상적 고찰 (동아일보)
하늘의 빛에서 생명을 얻은 자 빛의 세계로 돌아가니…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한국 고유의 사상과 도교 및 불교사상이 곁들여져 있다. 동아시아의 종교사상에 한국적 특색을 가미한 셈이다. 특히 도교가 한국으로부터 중국에 전래되었음을 시사하는 부분도 눈에 띈다.

 

 

‘삼족오(三足烏)’가 일본 축구국가대표팀의 엠블렘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일본의 상징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내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눈으로 직접 본 것은 1988년 지안(集安)에서였다. 짧게는 1500년, 길게는 1700년 가량 된 작품들이었지만 나는 한눈에 그 화려한 빛깔과 훌륭한 솜씨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벽화들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얼과 뿌리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한 21세기 회화에 영감을 주고 동아시아 미술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동양미술과 종교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도 소중한 재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도 훌륭한 역사적 재료이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그려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벽화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한국 역사의 뿌리를 찾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발전된 채색 기술과 우수한 회화 기법을 통해 미술사를 고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고구려의 고분 벽화 연구는 고구려의 역사, 풍속, 해외정책, 음악, 미술, 그리고 종교사상적인 측면을 아우르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삼족오(三足烏)’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세 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는 일본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엠블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은 1930년부터 삼족오를 상징물로 사용했는데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일본축구협회가 삼족오를 상징물로 사용하면서 외국인들은 삼족오가 일본의 고유 상징으로 오해하는 일도 생겨났다.

하느님의 자손, 고주몽

그러나 실상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는 태양 숭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이라는 숫자는 동양철학에서 신성한 숫자로 여겨지며 ‘천지인(天地人)’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해 안의 세 발 까마귀와 달 안의 두꺼비는 어떤 사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까. 고구려 건국신화에 따르면 시조 고주몽은 하느님의 자손, 해와 달의 자손이다. 해 안의 까마귀는 신비한 출생과 관계가 있다. 고주몽은 천제(하느님)로 칭하는 해모수(天神)와 지모신(地母神)이라는 유화가 만나서 태어난 신인(神人)이라는 것이다. 고주몽이 알에서 햇빛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은 하늘, 즉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무교의 천신(天神)과 천조(天鳥)신앙, 즉 알에서 새가 나온다는 사상과도 일치한다. 다시 말해 이는 일신(日神)신앙과 천조신앙의 결합을 의미한다. 해와 달은 도교의 음양사상과도 무관하지 않아 중국의 복희씨와 여와씨의 신상(神像)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건너간 무당이라는 설이 있는 일본의 첫 여황(女皇) 천조대신(天照大神)은 일신(日神)이면서 황조신(皇祖神)으로 이 역시 삼족오(三足烏) 설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고대 동이(東夷)족의 태양숭배 신앙이 조류숭배 신앙과 합쳐진 결과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새들은 무속의 천조(天鳥)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새는 이 세상과 하늘세계를 연결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분 벽화는 동이계의 조류숭배와 태양숭배의 샤머니즘, 즉 원시신앙에 근거를 둔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은 사라지지만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무덤 주인은 생전에 자신의 일족이 받들던 조상신의 일원이 되어 계급 신분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고구려인에게 사후에 영혼이 도달하는 곳은 광명의 신(神)이 지배하는 ‘빛의 하늘’이었다. 그들은 하늘의 빛에서 생명을 얻고, 죽은 후에는 자신의 근원인 빛의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고구려인들의 이러한 세계관, 즉 하늘은 광명의 세계이자 아래 세상에 복을 베푸는 선한 신의 세계라는 사상은 단군신화와도 관계가 깊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고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이 세상을 잘살게 했다는 단군신화와, 해모수와 유화가 결혼해서 고구려 태조 고주몽을 낳아서 고구려를 건국하게 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이룩하여 복을 내리게 한다는 고구려 건국설화는 모두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우주관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성스럽고 큰 나무가 그려져 있는 것은 천신(天神)신앙이 산신(山神)신앙으로 연결되는 대목이다. 나무에는 곰과 호랑이가 기대고 있는데 이는 단군신화에서 인간이 되기를 꿈꾸었던 웅녀(熊女)와 이곳을 드나드는 신(神) 환웅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또 나무, 곰, 호랑이 그림은 죽은 사람이 다음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오회분 4호묘 일중삼족오]

 

[길림 오회분 4호묘의 삼족오와 일월신도]

 

 

◆ 고구려 대표상징물 三足烏 일본축구협회 엠블럼 둔갑
일본축구협회 (JFA)의 엠블럼인 세 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가 고구려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학계에 따르면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고구려의 독특한 상징물이 라는 것. 중국 지린 지방의 오회분 4호묘, 각저총, 북한 평남의 덕화리 1,2호분 등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삼족오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에서는 고대부터 까마귀를 태양신으로 숭배해오긴 했어도 삼족오만은 고구려 고유의 상징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고구려 사람들이 세 발 달린 까마귀를 숭배했던 것은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이 '셋'이라는 숫자를 신성한 숫자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삼족오의 존재와 중요성을 알려서 이 문제를 공식 거론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 일본 축구협회(JFA) 사이트에 있는 그림과 설명 シンボルマ-クの ボ-ルを 押さえている 三本足の 烏は,中國の 古典にある 三足烏と 呼ばれるもので, 日の 神= 太陽を シンボル 化したものです. 旗の 黃色は 公正を, 靑色は 靑春を 表わし, はつらつとした 靑春の 意氣に 包まれた 日本 サッカ- 協會の 公正の 氣宇を 表現しています.

 

 

[이규태 코너] 삼족오(三足烏)

고대 임금이나 귀족들은 죽어서 가는 저승에서도 이승과 똑같이 재현해놓고 영생하려 들었다. 그래서 같이 살 처첩이나 타고 다닐 말을 순장(殉葬)시키고 식량이나 세간살이도 무덤에 갖춘다. 그로써도 부족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과 동서남북 방위를 무덤 속에 재현시켰다. 이 같은 무덤 속 이승의 재생은 고구려 고분들 벽화에서 완연하다. 동서남북 방위는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 사신도(四神圖) 벽화로 표시하고, 성신은 별자리인 이십팔수(二十八宿) 벽화로 표시했다. 해는 그 속에서 산다는 세 다리 까마귀(三足烏)로 나타냈고ㅡ. 삼국시대의 한국문화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 옛 도읍 나라(奈良) 아스카의 기토라 고분에서 사신도를 비롯, 평양 인근에서 관찰한 것 같은 별자리 그림이 탐지돼 왔는데, 이번에는 집안의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세 다리 까마귀 그림이 발견되어 고대 한국문화의 일본 유입의 증거로 굳혀지고 있다.

해 속에 삼족오가 있다는 것은 한나라 때 문헌에 자주 나오고,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류학자 프레이저는 해와 하늘을 나는 새를 동일시하는 것은 동서가 다르지 않다 하고, 이집트의 태양신이 독수리 머리를 하고 있음이며 인도에서 해를 뜻하는 파탕가는 바로 새를 뜻하기도 한다 했다. 중국에서 하필이면 까마귀를 해 속에서 보았는가에 대해 까마귀는 해가 뜨는 새벽에 사라지고 해가 지는 저녁에 나타난다는 습성이 연상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태양 속의 흑점이 검기에 새 가운데 검은 새로서 가장 가까이 사는 까마귀로 보았음직하다. 한데 왜 세 다리로 보았을까.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라는 문헌에 보면 음양설에서 양수(陽數)는 하나에서 일어나 셋에서 완성되기에 양의 대표격인 해 속의 까마귀는 다리가 세 개여야 한다는 것이다. 곧 음양사상의 합리화로 삼족오가 됐다는 것이다. 중국 신화시대에 해가 열 개나 떠 초목과 사람이 타죽어갔다. 이에 천제는 명궁 예로 하여금 해를 쏴 떨어지게 했다. 해를 쏘자 그 화살에 맞아 낙하하는 것이 다름아닌 황금색 세 다리 까마귀였다. 그렇게 아홉 마리 삼족오를 사살하여 살기 알맞게 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날아간 삼족오가 천년 무덤 속에서 부활한 셈이 됐다.

 

 

[횡설수설/김충식]三足烏 (동아일보 06/1/16)



세 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져 있다. 용이나 봉황 같은 상상의 동물로 ‘태양’을 상징한다. 고대 동북아의 태양 숭배 사상과 샤머니즘이 낳은 것이라고 한다.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태양, 그 동력(動力)을 나는 새와 결부하는 발상이 동북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 속에 새가 산다거나, 해를 운반하는 것은 신성한 새라고 믿었다. 기원전 4000년의 중국 양사오(仰韶) 토기에도 삼족오가 나타나고, 멀리 이집트에도 유사한 신화(神話)가 있다.

▷일본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유니폼에 삼족오가 그려져 있다. 삼족오는 1930년대부터 일본축구협회의 상징으로 대표팀의 엠블럼이 되었다. 일본에 근대 축구를 보급한 나카무라 가쿠노스케(中村覺之助)라는 인물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의 고향인 와카야마의 구마노(熊野)신사에 그려져 있는 까마귀를 본뜬 심벌이다. 그 까마귀가 날개만 150cm에 이르는 신화 속의 ‘야타가라스’다.

▷야타가라스는 일본 신화에 천황 군대의 안내역으로 나온다. 건국의 신이라는 진무(神武)천황이 동정(東征)에 나설 때 까마귀가 길잡이를 해 주었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단체의 상징 깃발에도 삼족오가 섬뜩하게 그려져 있다. 천황 호위군을 자처하는 우익다운 발상이다. 우익은 아마테라스 오가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을 상징하는 개국(開國)의 신을 섬기므로 삼족오야말로 그들에게 이래저래 딱 들어맞는 심벌인지도 모른다.

▷행정자치부는 금이 간 국새(國璽·나라 도장)를 새로 만들 경우 삼족오를 새기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봉황이나 용, 백호보다 삼족오를 권유하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삼족오는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두 발 달린 주작(朱雀)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따라서 일본의 삼족오처럼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까마귀는 현대인에게 신성하거나 친근한 이미지의 새가 아니다. 흉측하고 공격적인 데다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천덕꾸러기의 이미지다. 이미지를 떠나서라도 세 발 달린 돌연변이의 ‘퓨전 새’를 굳이 국새에 새길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

 

 

 [휴지통]새 국새 손잡이는 까마귀?



 

‘새 국새(國璽)의 손잡이는 까마귀로?’

2008년 2월부터 사용될 예정인 새 국새의 손잡이를 태양에 산다는 신화 속의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사진) 모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 의견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자치부는 15일 지난해 말까지 두 달간 55건의 국민 제안을 접수했으며 이 중 삼족오가 9건으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현 국새의 손잡이 모양인 봉황 의견은 용과 함께 3건, 그리고 백호는 2건이 접수됐다. 삼족오는 세 발 달린 까마귀로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신화 속의 동물. 삼족오 관련 신화는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서 많이 나온다고 한다.

삼족오 제안자들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삼족오가 중국의 상징인 용과 우리나라의 상징인 봉황을 거느리고 있어 용과 봉황보다 상위의 문화상징이 될 수 있으며 고구려 전통을 되살리는 의미도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일본 축구국가대표팀의 공식 엠블럼이 삼족오인 점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행자부는 기본계획이 확정되기 전까지 새로운 의견을 계속 접수한다는 방침이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일본 문화 원류는 한반도` 증거 자료
연합뉴스  2004-06-10 14:18:14


일본왕의 즉위복은 왜 대각국사 가사의 문양을 베꼈을까? 일본왕이 즉위식 때 입은 곤룡의에 그려진 해와 달 속의 문양이 고려조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아 소지하고 있던 가사의 문양과 닮은것으로 밝혀졌다. 본지가 최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전남 순천시 선암사에 소장된 대각국사 의천의 삼보명자수가사(三寶名刺繡袈裟)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있는데 해 속에 삼족오(三足烏,세발까마귀)가 달 속에는 떡방아를 찧는 두 마리의 토끼가 각각 수놓아져 있다. 한편 일본왕이 즉위식때 입는 곤룡의의 어깨 부위에도 각각 삼족오가 들어 있는 해와 교토가 있는 달이 수놓아져 있으며 일본 명치왕 즉위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명치천황어즉위식도병풍(明治天皇御卽位式圖屛風)'에도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다. 역사학자 김영래(53)씨는 이와 관련 "일월성신(日月聖神)은 한국에서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대각국사의 가사를 통해 한결같이 이어져 내려오는 평화의 상징 체계"라고 설명하면서 "이 문양은 가야 및 백제가 일본을 개척할 당시 일본왕의 곤룡의로 전해졌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문화의 원류가 한반도임을 나타내는 증거 중 일본 메이지(明治) 천황 즉위시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명치천황어즉위식도병풍(明治天皇御卽位式圖屛風)에 삼족오(三足烏)가 보인다.

 

 

[천자칼럼] 三足烏 [사설/칼럼] 2001년 02월 22일 (목) 16:47

 

고구려 고분벽화의의 성신도에는 붉은 해속에 발이 셋 달린 까마귀와 달속에 개구리를 그려 놓았다. 삼족오는 각저총 덕흥리벽화고분 개마총 등의 해그림속에 또렷하게 그려져 있다. 삼족오는 아니지만 붉은 까마귀가 고구려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도 "삼국사기"에 전한다. 태양을 양, 달을 음으로 생각했던 음양론의 한 표현이다. 이런 사상의 표현은 이미 BC2세기께 중국 서한초기 유적인 호남성 장사의 마왕퇴 1호고분에도 나타난다. 중국 한대의 "회남자"에는 태양의 화신인 붉은 까마귀와 삼족오 이야기가 실려있다. 신라 소지왕이 488년 까마귀의 인도에 따라 연못에서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고 쓰인 글을 얻어 역적모의를 했던 궁녀와 중을 죽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고구려벽화에 삼족오가 그려지기 시작했던 AD300년대를 지나 이때와서야 이 사상이 신라에 전해졌음을 뜻한다. 당시 거문고 갑에는 왕을 상징하는 태양속에 삼족오가 그려졌을지도 모른다는 한 고대사학자의 흥미로운 해석도 있다. 역시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우리의 태양신화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는 주인공의 이름에 모두 까마귀를 뜻하는 글자가 들어있고 연오랑은 일본에 건너가 왕이됐다는 내용이다. 고대사학자들이 태양신화의 전파루트를 중국-한반도-일본으로 보는 근거도 여기 있다. 현대 한국인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처럼 까치는 길조이고 까마귀는 흉조라는 관념은 고대에는 없었다. 고대 한국인에게는 까마귀도 영조이고 신조였다. 일본에서도 예부터 까마귀를 신령한 새로 알고 있다. 진무천황의 정벌때 구마노에서 야마도에 이르는 험로를 안내한 것은 까마귀였다. 그들은 오늘날도 까마귀를 산신으로 여기기도 하고 까마귀를 신의 사자로 모시는 사당도 있다. 특히 신토에서는 성조로 대접받는다. 그중에서도 구마노신사계통에서는 전통적으로 삼족오가 숭배대상이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고구려의 대표 상징물인 삼족오를 도형화한 일본축구협회의 엠블럼이 홍보물마다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삼족오는 고대 한.중.일이 공유했던 문화현상일 뿐이다.

 

진파리 7호 무덤에서 나온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 사진.

중앙에 《고구려 문화 유물에는 태양(해) 안에 세발까마

귀를 넣은그림이나 조각이 여러 점 있다. 대표적인 것으

로 진파리 7호 무덤에서  나온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

(日光透彫金銅裝飾品)’을 들 수 있다.

 

 

 

노중평 선생의 <세계신화문명> “죽지 않는 뱀과 거인의 나라”


 

우리의 고구려 고분벽화(오회분 4호묘와 각저총,덕화리 1호분)에 그려진 삼족오는 우리역사에 있었던 황궁시대를 의미하는데, 이 시대는 아직도 직녀성의 영향이 남아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밤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까마귀를 택하게 된 것이고, 그의 발이 셋인 것은 아직도 오리 세 마리의 시대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인데, 그러면 과연 우리의 상고시대의 신화와 그 당시 사라진 풍이(풍이)족의 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보도록 한다.

중원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문명을 시작한 풍이가 각처로 퍼져나가면서 지금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으로 남은 남미의 페루신화와 멕시코신화, 인도의 인도신화,중동의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풍이는 인류문명을 창시한 위대한 종족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현지인화 함으로서 그들이 첫 문명을 시작한 풍이였음을 전하지 못하였다.


1) 풍이 이산의 역사

가. 사라진 풍이: 신화학자들은 신화시대에 동쪽에서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어떤 문화를 가진 종족이 세계 각처로 문명이민을 떠났을 것으로 추리한다. 그들이 쓰던 언어를 인공언어라고 하였다. 이 언어는 어떠한 언어에도 맞는 언어이다. 이 언어에 자국의 언어를 대입하면 자국의 언어가 풍이의 언어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신화학자는 인공언어를 쓰며 문명을 전파한 이들의 실체를 찾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마고-황궁-구황-구한-풍이-구려-동이-조선 으로 이어지는 풍이의 역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이들이 뱀과 거인이라는 두 가지 아이콘을 전세계 인류에게 유적으로 남겨준 풍이라고 생각하여 통칭하여 풍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본인은 풍이라고 할 때는 마고 황궁 구황 구한 풍이 구려 동이 조선으로 이어지는 이들 모두를 통틀어서 말한다고 보면 된다. 풍이는 현지인과 종족이 동화하여 현지인화 하였고, 그들이 남긴 유물로서 수수께끼투성이의 거대한 피라미드만 남겼다.

나. ‘치란 바람’과 ‘아스트’에서 온 사람들: 마야문명() 원조문명은 마고문명이자 풍이문명이다. 언젠가 마고족이나 풍이가 멕시코로 들어가서 마야문명을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유추가 마야문화를 기록한 책 이름 ‘치란 바람(Chilarn Balam)'에서 유추된다. 치린 바람(Chilarm Balarm)이란 음을 인공문자로 분석해 보면 마야문명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들이 밝혀진다. 이 비밀의 키워드가 치우와 바람이다. ‘치란’의 ‘치’는 인공문자 ‘蚩尤치우’의 ‘치’로 볼 수 있고, ‘란’은 ‘사람’이나 ‘바람’으로 볼수 있다. ‘치우사람’이나 ‘치우바람’이라는 뜻이다. 중앙아메리카에 치우바람이 불었다면,아마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멸망한 다음일 것이다. 치우일족이 그들이 살던 청구-탁록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중앙아메리카(중앙America,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좁은 지대. 지리적으로는 멕시코 남부의 태우안태펙 지협에서 파나마 지협까지의 지역을 이르지만, 일반적으로는 멕시코 남부를 제외한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니카라과,코스타리카.파나마, 벨리즈를 이른다)에 정착하였다고 생각된다.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멸망한 때라면 , 약 5,000년쯤 된다. 그의 본 명칭은 배달나라의 청구국 14세 자오지한웅천왕(서기전 2706-2598)이다. 황제 즉위 해는 서기전 2689년이다. 청구국이 멸망함으로써 문명이민이 발생한다. 이들의 문명이민의 역사가 ‘치림 발람’이리는 문자에 들어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그쪽으로 종족이동을 하면서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문명을 보존할 수 있는 최고의 학자와 기술자와 행정가와 무사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누리던 신에 의존하는 군사문화를 보존하는 일이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였을 것이다. ‘발람’은 ‘바람’이다. 바람은 風풍이다. 풍이와 관련이 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풍이라는 종족뿐만 아니라,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 風神풍신이기도 하다. 풍신을 관장하는 이가 風師풍사이다. 풍사의 지휘 아래 종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치란 바람’은 ‘치우사람 풍이’로 볼 수 있는 말이다. 왜 마야문화를 기록한 책에 치우와 풍이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일까?
치우는 동양권에서는 도깨비나 귀신의 형상을 남겼고 , 이 형상은 차우시대에 풍이가 쓰던 군대아이콘이었다. 치우의 군대를 도깨비라고 하였던 것이다. 도깨비란 오늘날의 군대나 군인이라는 뜻이다. ‘도깨비부대’란 ‘치우군대’라는 뜻이다. 우리 군대에 ‘도깨비부대’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도깨비의 원형은 쇠머리이다. 쇠머리를 벽사부적화(辟邪符籍化)함으로써 도깨비로 정착하였다. 쇠머리+뱀머리 하면 용머리가 되는데, 소와 뱀이 하나가 되어 용이 된다. 치우가 황제와의 결전에서 패하여 종족이동이 이루어지면서 풍이의 도깨비문화가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용의 문화는 도깨비문화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용의 문화를 공유한 종족이 치우를 멸망시킨 하화족(오늘날중국인의 조상)이다. 황제는 탁록대전에서 승리하여 용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치우가 용의 절반에 해당하는 뱀족 출신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호칭인 치우의 치(蚩)자에 보인다. 蚩자를 파자하면 山 - 虫 이 되는데, “산 밑 땅속에 숨어있는 뱀”이라는 뜻이다. 그가 황제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뱀족이 땅 밑으로 숨었음을 나타낸다고 볼수 있다. 풍이 일족의 흥망성쇠가 이 蚩자에 나타나 있다. 우尤는 어리석다는 뜻으로 쓰는 문자인데 , 황제가 전쟁에 승리하여 그를 비하하기 위하여 尤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고 생각된다. 멕시코의 전승담에 “옛날에 사람이 아즈트 대륙에서 멕시코로 왔다”고 기록 하였다. 아즈트의 ‘아즈’는 아침으로 볼 수 있는 말이다.‘트’는 ‘토’ 즉 ‘땅’으로 본다. ‘땅’은 ‘달’達로 달리 쓸 수 있다. 따라서 ‘아침의 땅’이 된다. ‘아침의 땅’은 곧 단군조선시대의 ‘조선’의 다른 이름인 ‘아사달’이다. ‘아사달’의 원형은 마고가 세운 ‘마고지나’이다. 멕시코의 원주민 마야인은 ‘麻野마야’ 즉 ‘마고의 들’-마고지나‘에서 온 ’아사달‘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일 것이다. 아스트에서사람이 왔다는 아스트 무명의 전승은 단군조선의 문명이민의 역사로 볼 수 있다. 1차로 도깨비문명이민선단이 떠나고 2차로 조선문명이민선단이 떠났다고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은 올빼미 아이콘을 족표로 쓰던 분이었으므로, 올빼미문명이민선단이 떠났다고 볼 수 있다. 단군왕검 즉위 해에 전세계적으로 대홍수가 휩쓸었으므로 이때 이민선단이 조선을 떠났다고 생각된다. 이민선단은 새로운 아사달을 찾기 위한 이민선단이었을 것이다. 그 이민선단의 일부가 강화동에 상륙한 부루태자 3형제였다. 영어의 동쪽을 의미하는 ‘이스트’라는 말도 그 근원은 멕시코의 ‘아즈트’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두 문자가 다 같이 아사달에서 나온 문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 풍이 이전시대의 모계족성과 부계씨칭: 영해박씨의 문중비서인 [부도지]에, 궁희와 소희의 뒤를 이어서 네 천인과 네 천녀가 태어나는 기록이 있다.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 천부를 받들어 지키며 선천을 계승하였다. 성안의 사방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피리)을 쌓아 놓고 소리를 만드니, 첫째는 황궁씨요, 둘째는 백소씨요, 셋째는 청궁씨요, 넷째는 흑소씨였다.” 지구의 세차운동에 의하여, 직녀성이 지구중력회전축의 회전을 관장하던 선천시대 즉 직녀성의 시대가 끝나고, 천추성-북극성이 지구중력회전축의 회전을 관장하게 되는 후천시대가 왔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이전인데, 12궁도의 12지 중에서 자(쥐)에 배속된 사자궁시대에 해당한다. 하늘에 대 이변이 일어난 이 시대에 땅에서는 남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여자를 대표하는 직녀성의 시대가 가고, 남자가 주도세력이 될 태양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태양의 시대가 열리면서 네 사림의 사내 부족장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황궁 백소 청궁 흑소 였다. 황궁과 청궁은 궁희에게서 태어났고, 백소와 흑소는 소희에게서 태어났다. 궁희와 소희는 모계시대의 여성부족장들이었다. 그들의 조상은 마고였다. 모계시대에 여자들이 족성(族姓)을 만들었다. 족성이란 모계성(母系性)이라는 말이다. 족성을 짐승 형상의 아이콘을 써서 표현하였다. 이 시대에 어머니의 성만이 중요시되고, 아버지의 성은 조재조차 없었다. 그러나 태양을 숭상하기 시작한 천추성시대가 오고,남자부족장이 생겨나면서,모계족성과 함께 氏稱씨칭을 쓰기 시작하였다. 족성은 앞에 붙고,씨칭은 뒤에 붙였다. 가령 한인을 예로 들면, 한은 족성이 되고, 인은 씨칭이 되었다, 한인의 이름이 안파견(安巴堅)인데,안은 족성이 되고 견은 씨칭이 되었다. 가운데에 있는 파는 용 즉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과 안은 같은 족성이 되고, 인과 견은 씨칭이 되었다.


하화족이 신화시대의 조상으로 맨 앞에 놓는 분이 유소씨(有巢氏)인데, 유소씨란 백소와 흑소라는 말이다. 이때에 有유는 모계족성인 소희(巢姬)를 숨기기 위하여 쓴 말이다. 氏씨는 소희족의 씨칭을 말한다. 그러나 족성인 소희를 모두 씨칭으로 바꾸면서 씨를 붙였다. 말하자면 족성 巢姬 가 씨칭 소희로 바뀐 것이다. 소희에서 백소와 흑소가 갈라져 나온다. 원래대로 족성과 씨칭을 구분하여 쓰면 巢姬白氏,巢姬黑氏가 되어야 하나, 이상하게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풍이는 백소(白巢),흑소(黑巢)라 하여 족성과 씨칭의 구별을 없에버렸다. 이렇게 한 것이 궁희와 소희의 삼신시대이고, 후대에 와서 부계사회가 힘을 쓰기 시작하면서 일어나게 될 문화혁명과 같은 사회적 변동에 의하여 변절된 것으로 보인다. 하화는 한술 더 떠서 백소와 흑소 자체의 구별을 없에 버리고, 유소(有巢)라고 하여 희(熙)를 없에 버렸다. 그러므로 하화의 족성말살과 왜곡이 더 심했다고 볼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모계사회가 퇴조하면서 일어난 부계사회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볼수 있다. 이렇게 원래의 의미를 추적하여 밝혀내는 것이 인공언어의 사명이다. 마고성에 살던 사람들은 선천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땅에서 하는 일은 직녀성을 보좌하는 점대(漸臺) 네 별을 하나씩 맡아서 율려(律呂)의 변화를 살피는 일이었다. 율려란 우주중력에서 나오는 팡장을 의미한다. 이 파장은 12辰진(24시간을 생산하는 파장)으로 순방향(시계방향)으로 회전하여 시간을 생산한다. 시간의 흐름에 역행(시계방향의 반대방향으로 역회전)하여 역시간을 생산하는 북두칠성의 파장과 해와 달이 만나면서 생산하는 역시간의 파장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부조화의 파장이 생겨난다. 부조화의 팡장의 간극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세차운도의 폭이 커진다고 보아서 이 파장을 감지하여 피리를 불어 조정하는 역할을 맡아 할 사람을 필요로 하였고, 이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황궁 청궁 백소 흑소를 두었던 것이다. 이 네 천인의 부족장시대를 후천시대라고 하였다. 점대의 최고 책임자가 황궁이었다. 아마 그가 불었던 피리가 생황(笙篁)이었을 것이다. 생황은 동쪽의 대에 설치하고 부는 피리이므로, 그가 동쪽의 파장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라. 마고의 상징 검은 까마귀: 당시의 사람들은 아이콘을 써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밤을 대표하는 직녀성시대에는 마고의 새로 학(鶴)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학은 유일하게 북두칠성에 접근할수 있는 새이고(고구려 고분벽화 참조), 장수하여 1,000년을 살면 ‘청학’이 된다고 전해 오는 새이므로, 마고의 새로서는 가장 합당한 새로 볼 수 있다. 마고를 신선으로 보게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마고삼신의 시대는 오리를 아이콘으로 사용하였다. 삼신을 선발하여 각처에 시집을 보낼때 오리를 가지고 가게 하였다. 심신이 도착하여 정착하는 섬을 영주라고 하였고 그들이 가지고 간 오리는 마을에 솟대를 세우고 거기에 앉혔다. 그 유습은 지금도 전통혼례 때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신부가 신랑 집에 기러기를 가지고 가는 전안례(奠雁醴)가 그것이다.


황궁시대는 삼족오시대였다. 밤을 대표하는 직녀성시대, 즉 마고삼신의 시대를 상징하는 오리의 시대가 끝나고, 낮을 관장하는 까마귀의 시대가 온 것이다. 까마귀는 해 안에 들어 있으므로 모든 새의 중심에 서 있는 새이다. 해가 까마귀에게는 황궁이 된다. 황궁시대에 천추성시대를 시작하였다. 까마귀에서 ‘검’이 나온다. 또한 ‘마귀’에서 마고가 나온다. 검은 마고가 까마귀이다. 밤에는 흰 학으로 변신하고 낮에는 검은 까마귀로 변신하는 것이 마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해 안에 들어 있는 까마귀는 낮에 활동하는 마고의 변신이기도 하다. 단군왕검의 검이 여기에서 나온다고 불 수 있다. 검은 씨칭이다. 까마귀의 발이 셋인 것은 이 까마귀가 삼신인 오리에게서 태어난 새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오리 다음으로 세상에 나온 새가 발이 셋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라는 뜻이다. 까마귀의 몸이 까만 것은 낮을 밤이 지배하고 있음을 말한다. 삼족오시대(삼족오시대)는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석삼극(일석삼근)의 시대이고, 삼태극(三太極克)의 시대이고, 음양조화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우주에서 황궁(黃穹),즉 黃宮이라는 공간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황궁은 천지만물의 중심이다. 앞과 뒤의 가운데가 황궁이고, 상중하의 중간이 황궁이다. 우주에서 상원 중원 하원의 중심인 중원이 황궁이다. 소리에도 양의 소리와 음의 소리가 있고, 이들 소리 사이에 중간 소리가 있다. 우주 만물에 중궁(中宮), 黃宮 이 있다는 인식은 상고시대 인간들의 사고에 <페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직녀성이 음이라면 천추성은 양이다. 이 음과 양의 중간지대가 있다. 여기가 황이다.이는 삼태극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黑흑이 직녀성이라면 赤은 천추성이다. 직녀성과 천추성의 중간 지대가 황이다. 황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을 때는 중심이 되지만, 순방향으로 회전을 시작하면 조화를 낳는다. 황이 회전함으로서 음양에 조화가 일어난다. 삼태극의 황이 음양이 조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 황궁시대에 최초로 문명이민 시작: 마고삼신시대 말기에 마고성을 폐쇄하지 않으면 아니 될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다. 성의 규모는 한정되어 있는데,인구는 불어나고, 먹을 것은 부족하고, 성안은 오염되어 살기 힘들게 된다. 인종이 서로 싸우고 패악한 짓을 일삼게 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 마고성 안에 널려 있는포도나무열매를 먹을 줄 알게 되면서 인종분쟁이 일어난다. 포도에 술기운이 있어서 포도 맛을 본 사람들은 술기운에 취하여 전혀 다른 인종으로 변해갔다. 형이상학적인 인종에서 형이하학적인 인종으로 변해간 것이다. 마고성에서 형이하학적인 인간은 살 수 없었다. 이리하여 마고는 성을 폐쇄하고 이들을 성에서 모두 내쫓아버린다. 타의에 의하여 타락한 문명이 다른 곳으로 전이하게 된다. 황궁시대에 황궁의 주도로 직녀성의 마고성에 살던 모든 종족이 마고성의 동서남북 네 문을 통하여 뿔뿔이 흩어진다. 마고상이 사람이 살 수 업을 만큼 오염이 심각해지자 청정을 회복하면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아디론가 떠난다. 그는 오로지 마고가 지시한 해혹복본(解惑複本)을 일념으로 살았다. 해혹복본은 마고성이 청정해지면 직녀성시대로 돌아가라는 마고의 지시였다. 황궁이 택하여 간 천산주는 천산이 있는 곳이다. 황궁시대에 九皇구황이 태어나고, 구황이 추대하여 한인천제가 등극한다. 이리하여 구황이 구한(九桓)이 된다. 구한은 풍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신화를 우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

최근에 그리스·로마신화 가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신화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신화이야기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 왜 갑자기 신화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게 된 것일까? 우리가 관심을 갖는 신화이야기는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겠지만, 우리의 역사와 관계가 있는 신화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 자문해 본다.

1. 신화는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이다.

신화를 읽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신화는 신화로만 읽는 방법과 역사로 읽는 방법 2가지가 있을 것이다. 신화를 신화로만 읽으면 신하가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임을 망각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학이나 인류학적인 접근이 차단되고, 그냥 종족신화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 보다는 신화가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이라는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려면 신화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 읽어야 할 것이다.


이 공동의 상징을 인류의 종족 아이콘이라고 생각하며, 인류신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아이콘은 ‘뱀과 거인’이라고 본다. 그러면 뱀은 무엇을 상징하고, 거인은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찾아가면서 읽도록 한다. ‘뱀’은 인류역사에서 사라진 종족 ‘풍이’의 상징임을 알리고자 한다. 풍이는 마고족-구황족-풍이-동이-고조선족-삼한족-삼국족-고려족-조선족-한민족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조상이다. 그 역사 연대중 14,000년 전에서 4,000년 전에 이 세상을 살다 간 죽은 사람들-‘풍이’ 조상을 찾아냄으로 신화시대 인류신화 형성에 그들이 상당한 기여를 하였음을 강조 하고자 한다. 즉 마고시대에 마고지나가 있었고, 구황시대에 구황이 분거하였고, 풍이족시대에 한제국에 있었고, 동이시대와 고조선시대에 고조선이 있었고, 삼한시대에 삼한시대에 삼한이 있었고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있었고, 후의 남북조 시대에 발해와 고려가 있었고, 조선시대에 조선이 있었고, 지금 한민족시대에 대한민국과 북한이 있다.


우리는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뱀과 거인 아이콘에서 풍이(風夷)를 찾아냄으로 신화시대 인류신화 형성에 풍이가 상당한 기여를 하였음을 알게 된다. 풍이(豊夷)를 휩쓴 대홍수 때에 배를 타고 이민을 떠났다. 당시에 풍이는 최고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풍이의 이민은 풍이의 문명을 전파하는 문명이민이 되었고 그 문명의 흔적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홍수신화에 남아 있다. 페루와 멕시코의 피라미드 유산과 이집트의 피라미드 유산은 풍이의 유산이다. 창세기 신화와 홍수신화와 바벨캅신화는 풍이의 신화이다. 각국에 퍼져있는 잡다한 신들은 풍이의 신들이거나 풍이의 신이 현지화(現地化)한 신이다. 그러나 인류문명을 시작한 위대한 종족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들의 행적은 수수께끼로 남고 만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간 한자언어(桓字言語) 즉 인공언어가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화를 읽는 또 다른 이유는 사라진 한자언어의 실체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렇게 함으로서 사라진 풍이를 찾는 것은 물론이고, 한자언어를 찾아 현지신화화한 풍이의 신화를 복원할수 있다. 풍이신화의 복원은 곧 풍이시대에 실재했던 한제국(桓帝國)의 실체를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신화를 역사로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신화에서 역사가 복원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풍이와 한제국이 사라지자 풍이가 남긴 인류의 원초문명도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현지인에 의하여 왜곡되고 폄하되었다. 반면에 위댕한 문명으로 숭상되는 경우도 있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하여 국내에 소개된 신화 이야기들을 텍스트로 사용하였다.
1) 뮤 대륙의 비밀(문화사랑): 제임스 치치워드 씀-박혜수 번역
2) 신의 지문(까치): 그레이엄 헨콕이 씀-이경덕 번역
3) 세계신화101(아세아 미디어):요시다 아스히코 外 다수 씀-김수진 번역
4) 금지된 신의문명 1(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앤드류 콜린스 씀-오성학 번역
5) 벽화로 보는 이집트 신화: 멜리사 리틀필드 씀-최용훈 번역
6)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전호태 교수 씀 ···
등(等)을 참고로 하였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인류신화는 본래의 모습을 많이 상실한 신화이다. 우리는 이 점을 유념하고 신화에 접근해야 한다. 많지 않은 신화학자들이나 몇 사람의 탁월한 이야기꾼이 신화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신화가 지금 우리에게 와서 꽃이 피듯 꽃피기 시작한 이 현실에 우리가 간파하지 못한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본다.

2. 혼(魂)은 국적을 불문하고 제사지내 주는 곳을 찾아 간다

얼마 전 미국이 신화의 나라 ‘이라크’를 영국과 함께 공격하여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라크는 알다시피 신화(수메르신화·바빌로니아신화·메소포타미아신화 等)와 관련된 많은 유적을 보유하고 있고, 또 그 신화들을 전승해 온 최고의 신화국가인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공격에 의해 이들 유적의 상당수가 파괴되어 타격을 받았다. 이 신화의 나라에 한 어리석은 독재정권이 출현하여 백성을 볼모로 잡고 있다가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그들은 위대한 신화유산을 남겨준 위대한 조상들과 단 한번의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고,일신의 부귀와 영달이라는 수준에 머물러 위대한 조상이 물려준 국가를 사조직화 함으로써 세계화된 신화를 보존할 능력을 상실하여 조상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것이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멸망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게 하는 악역을 맡은 사람이 미국의부시 대통령이다. 그는 동맹국들을 협박하여 음으로 양으로 사담 후세인을 멸망시키는 일에 동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신화국가 멸망이라는 심상치 않은 일에 악역의 대표가 된 것이다. 미국은 생긴지 일천하여 신화가 없는 나라이다. 오래된 인디언 신화가 있었지만 노랑머리 백인들에 의해 인디언과 함께 거의 다 사라자고 말았다. 그들의 신화를 유추할 수 있게해 주는 독수리,까마귀,늑대,사슴,곰,뱀,소의 아이콘들만 남아 있을 뿐들이다. 이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백인들이다. 이들에 의하여 신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왜 작가들은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일까? 신화를 우리에게 남겨준 조상들의메시지를 전달아는 일에 동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화 전달자로서,신화 해석자로서의 임무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혼은 국적을 불문하고 제사지내 주는 곳을 찾아 간다’ 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믿음의 밑바닥에는 신화가 우리에게 남겨준 집단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돌아가신 분들의 혼백에게는 조국이니 성씨니 가족이니 하는 것들의 의미보다는 오로지 자기의 혼백을 찾아주는 대상에게만 관심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지나칠지 모르겠으나, 신화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을 실천하였다. 그리스의 올림포스 산정에 세운 판테온(Pantheon,萬神殿-만신전의 뜻으로, 로마에 있는 로마시대 神殿을 일컫는 말. 기원 전 27년에 아그리파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가 불타 없어진 것을 115~125년 무렵에 하드리아누스제(Hadrianus帝)가 재건한 것으로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은 대표적인 例이다. 만신전은 그리스 최고신 제우스를 비롯하여 많은 신들의 집합장소였다. 여기에 모이는 신들은 제우스를 비롯하여 순수한 그리스의 신들이 아니었다. 그리스 토착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외래신이었다. 신이란 다 이런 것이다. 대한민국 종교인들이 외래신인 예수나 불타를 모셔다가 열심히 제사지내는 것도 이와 다를 게 없다. 2003년 6월 14일 20시에 KBS 1TV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에서는 명치유신 이후로 일본 해군의 스승이 된‘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다루고 있었다. 이제 막 창설하여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일본해군이 스승으로 선택한 분이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을 괴멸시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었다. 러일전쟁 때 일본해군의 도고장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일본해군을 괴멸시킬 때 썼던 학익진(鶴翼陣)을 연구하여 정자진(丁字陣)을 개발하여 대한해협에서 세계 최강의 러시아함대를 전멸시킬수 있었다. 도고장군은 출전하기 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여기서 추가로 例를 한가지 더 들자면, 한고조 유방도 항우와의 전쟁에 出戰전에 앞서 치우천황의 영정에 제사를 지내면서 전승을 기원하였던 역사도 생생히 살아 있는 것 인데···, 어떻게 자기 조상들 즉 하화족을 격퇴하고 혼줄내 주던 동이족의 조상에게 제사를 드렸겠는가 하는 점을 신중히 살펴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본인의 민족감정과 하화족의 후손으로서 도저히 용납될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일본해군의 스승’으로 , 또 한편 치우천황을 ‘전쟁의 신’으로 모심으로서 저승의 벽을 깨고 이승에서 그 분들의 도움을 받을수 있을 것 이라는 그들의 생각이 ‘무서운 교훈’이 될 것이다. 만약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에 해방이 없고 강점이 계속되었다면 대한제국은 사라졌어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계속 살아서 일본의 군신으로 모셔졌을 것이고,치우천황은 중국인들의 조상과 군신으로서 계속 모셔지며 우리의 혼과 은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언젠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어 대한해협에서 일전을 벌여야 하거나 중국의 패권주의(중화사상)에 맞서 북방에서 부득이 전쟁을 치루어야되는 상황이 되어, 우리 군대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예배드리고,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부처님에게 불공드리고 나서 출전하고, 일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전승기원제사를 지내고 출전하고 중국은 치우천황을 그들의 조상으로 모시면서 출전 했다면,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치우천황의 혼백이 살아 계시다면, 어느 쪽을 돕게 될 것인가? 아마 일본과 중국을 도우리 라고 생각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이 될 것인가? 후손들이 본인들을 제쳐두고 예수님과 부처님에게 도움을 청했으므로 이쪽에 오실 리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충사에서 매년 충무공탄신일에 관리를 동원하여 형식적으로 올리는 제사나, 중국인들의 역사왜곡에 미온적인 태도나 나약한 역사회복 의지 보다는, 적국과 일전불사를 피할수 없는 시각에, 일본의 도고장군이나 한고조처럼 충무공 이순신장군이나 치우천황에게 제사 올려 도움을 청하는 일. 즉 전쟁과는 무관하고 아무 관심도 없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 기대는 것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전문가 중의 대표적 인물이신 충무공 이순신장군이나 치우천황에게 기대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고 실효성도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역사적인 인물로 태어나서 신화적인 인물로 승화된 분이며, 치우천황은 아직 우리가 제대로 밝히지 못한 엄연한 우리들의 조상이시다. 이 분들의 행적은 그들이 살다 가신 조선과 청구제국을 뛰어 넘어 전세계 군사학의 신화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이러한 점이 신화가 갖는 보편성이다. 충무공신화가 보편성을 갖게 됨으로써 ,이 분들이 이룩한 신화의 세계에서 대한민국·중국 그리고 일본의 국경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가 국경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화의 세계에서 국경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이점을 깨닫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 인물이 신화적 인물로 신화화 하면 여기에 초월성과 신비성이 생겨난다. 또한 역사성이 생겨난다. 이를 종교적인 이론으로 체계화 하면 종교가 되고 ,철학적인 이론으로 체계화 하면 철학이 되고. 또한 역사화 하면 역사가 된다.


이제 우리는 남의 신화에서 우리의 신화를 찾아내어 우리의 신화로 자리매김을 하는 일을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앞으로의 시대는 문화의 시대이다. 문화가 우수하지 못하면 타문화에 종속되고 만다. 지금 우리는 미국의 섹스와 폭력문화에 길들여진 전세계 사람들의 문화행태를 본다. 우리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나락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사라진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되찾는 일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신화와 상고사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일은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다.

참고논문: 노중평 선생의 <세계신화문명> “죽지 않는 뱀과 거인의 나라”

 

 

● 세 발 까마귀[三足烏]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삼족오에 대해 그것이 태양 속에 그려져 있으니 태양신을 상징한다는 것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왜 까마귀가 태양신의 상징이 되었는지는 명쾌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런데 그것은 고대에 석기문명에서 금속기문명으로 전환되는 문명의 커다란 전환점과 관련되어 발생된 관념으로 보인다. 이것은 청동기문화 및 그 뒤를 이은 철기문화의 융성과 관련되고 이런 제련, 제철기술을 가진 강력한 집단이 강력한 무력을 가졌다는 것과 고대인의 태양신숭배사상이 복합되어 생겨난 개념으로 판단된다.

까마귀[烏]는 고대 제철집단의 상징

연오랑·세오녀는 제철집단의 지도자

삼국유사 기이1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 나오는 주인공 둘은 "제철집단의 지도자"였다. 고대에는 제철기술을 가진 집단이 우수한 무기와 농기제조 및 무역으로 세력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신라를 떠나 열도로 가버리자 "해와 달의 빛[日月之精]"을 잃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신라로서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름도 제철을 상징

이들이 제철집단이라는 것은 이들의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영어로 대장장이를 'blacksmith'라고 한다. 왜 '검다[black]'는 말이 붙었을까? 그것은 고대에는 숯으로 야철(冶鐵)을 했기 때문에 이들은 대체로 옷이며 외모가 평소 일을 할 때는 검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런 현상이나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동일한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烏'자는 흑(黑)이나 현(玄)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까마귀 烏'자다. 烏는 곧 'black'이다.

이름에 단조기법도

또 연오랑의 '펼/늘일 연(延)'자는 단조 즉 두드려 펴는 것을 뜻하고 세오녀의 '가늘 세(細)'자는 가늘게 단조하는 정밀단조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본다.

일월지정

일월이란 말은 음양의 개념으로 남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야철(冶鐵)과도 관련이 있다. 태양광은 밝고 뜨겁고 도가니에서 벌겋게 녹은 쇳물을 은유하고 열간단조(熱間鍛造)를 상징하기도 한다. 월광은 차가운 빛이므로 냉간단조(冷間鍛造)를 상징한다고 본다.

선주지명도 제철과 관련

이들의 선주지는 역시 한쪽은 감물현이고 한쪽은 마산현이었을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영일현의 고지명이 근오지현(斤烏支縣)이라고 나온다. 역시 '烏'자가 들어있다. 뜻으로 풀어보면 '斤'은 '큰'의 이두고 지(支)는 고어로 '시[支]'로도 읽어 요즘의 사이시옷에 해당하는 말이다. '之'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즉 "큰 까마귀의 현"이란 뜻이다. '烏'란 제철집단을 상징하므로 상당한 규모의 제철집단이 있었던 곳의 이름답다고 하겠다.

감물현의 감물(甘勿)도 이두표기로서 '오(烏)'나 '현(玄)'의 뜻이다. 천자문을 읽을 때 '하늘 천(天)', '따 지(地)', '가물 현(玄)', '누루 황(黃)'이라고 할 때의 그 '가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검을'이라고 읽지만 옛날엔 '가물', '감물'이라고도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ㄱ+아래아+ㅁ)을' 정도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아래아가 '아'로 분화되고 '으'가 원순모음화현상에 의해 '우'로 변하면 연음법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가물'로 발음된다. 여기에 원래의 '(ㄱ+아래아+ㅁ)'이란 음을 살리려고 하면 미음이 추가되어 '감물'이 된다.

세오녀가 보내온 비단으로 제사지낸 영일이 세오녀의 선주지로 보이고 월성은 연오랑의 선주지로 판단된다. 그 근거는 석탈해집단이 신라에 와서 정착한 곳이 월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연오랑은 석탈해보다 약 1세기 뒤의 인물이며, 석탈해설화를 분석해보면 역시 제철집단으로서의 특징이 있으므로 연오랑은 석탈해가 데리고 온 제철집단의 후예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집단은 지도자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기 때문이다. 일월의 개념을 음양으로 보면 이 선주지명의 경우는 음양이 바뀐 셈이다. 또 석탈해 설화를 분석해보니 원래는 진한인으로서 연나라의 용성국 출신으로 판단되고 연오랑의 '延'은 음이 같은 '燕'을 달리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까마귀의 어원

까마귀도 옛날엔 발음이 '가마기'였을 가능성이 많다. 새[鳥]에 붙이는 명사형어미는 대체로 '이'이고 기러기, 갈매기, 뻐꾸기 등과 같이 '가막'에 어미 '이'가 붙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오늘날의 표준말에서 '위'로 발음하는 것도 경상도사투리로는 '이'로 발음하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면 '귀(貴)하다'를 '기하다'로 발음하는 경우다. 물론 요즘은 공교육에 의해 이렇게 발음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사전에 보면 까마귀의 고어가 '가마귀'로 나오고 흔히 까마귀와 까치를 합쳐서 부를 때 다시 축약현상이 발생하여 '까막까치'라고 부르는데 이 말이 어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음의 변화과정을 추정해보면 가막>가마기>가마귀>까마귀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귀비고

비미호가 사신을 통해 보내준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이라고 했는데 귀비고가 영일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더라도 역시 이곳이 비미호집단의 선주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귀비고는 야철공장이고 비단은 신라로서는 지극히 소중한 제철기술을 은유한 것이다. 사신이란 사신및 제철기술자였던 것이다.

도기야는 야철지

귀비고가 설치된 곳으로 추정되는 도기야(都祈野)라는 지명도 야철(冶鐵)과 관련 있다. 이 역시 이두표기로 보이고 "도가니가 설치된 땅"이라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도가니야>도기야 또는 야(野)를 열도어로 읽으면 노[野]가 되므로 도가니노>도기노로 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기술자가 구주에 오래 있다가 왔고 당시 구주에서 쓰던 말은 가라어 즉 진한어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들이 도왜한 곳은 구주였고 이들보다 먼저 가락국의 선견왕자와 묘견공주가 건너가 야마다를 세웠고 그것을 이들이 계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까마귀와 제철집단의 상관관계

위에서 제철집단의 평소의 일과 외모를 '까마귀 오(烏)' 자로 은유 내지는 상징했다고 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진 금오(金烏/三足烏)와 월신(月神)의 상징으로 알려진 금와(金蛙)는 고구려나 부여의 건국신화 및 철기문화의 융성과 관련하여 제철기술을 가진 커다란 두 집단의 융합을 상징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금오(金烏)는 풍수에서도 태양을 상징하고 제왕(帝王)을 은유하기도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서 음양개념의 일월지정으로 놓고 본 시각과 고구려의 금오(金烏)와 금와(金蛙)는 같아 보이기도 한다. 日神은 고온으로 제조하는 제철을 상징하고 月神은 그보다 저온으로 제조 가능한 제련의 특성 그대로이기도 하다.

가야의 철기문화와 태양신 숭배사상은 고구려의 철기문화와 태양신 숭배사상과 이런 상징성 면에서 흡사하게 보인다. 또 "(ㄱ+아래아+ㅁ)을 오[烏]"에서 (ㄱ+아래아+ㅁ)[烏]으로 보고 (ㄱ+아래아+ㅁ)[神]>감[神], 곰[熊]으로 분화되므로 감[烏]=감[神]으로 놓고 볼 때 고대 철기문화가 융성하던 시대에 고도제철기술을 가진 강력한 집단의 지도자[王]를 감[神]으로 추앙하고 감[烏]으로 상징하고 그들의 최고신인 日神의 아들로 보았음직한 것이다.

감[烏]은 태양신의 아들

고대에는 왕이 곧 신(神)이었고 왕은 곧 청동제련기술이나 제철기술을 가진 집단의 지도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감[烏]=감[神]=왕(王)인 것이다. 또 석기문명에서 금속문명으로 넘어오면서 그때까지 석기를 쓰던 고대인들의 눈에는 그보다 훨씬 단단하고 오래가는 금속기술을 가진 집단의 지도자를 바라볼 때는 가히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부를 만도 한 것이다. 그러니 그 전 석기문명시대에 그들이 가졌던 우주만물 중 가장 위대한 대상으로 바라보던 태양을 숭배하는 신앙이나 사상과 결합하여 제철집단의 지도자를 "태양신의 아들" 즉 감[烏]=감[神]으로 본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고구려는 고분벽화에서 보다시피 중무장 철갑기병을 볼 수 있는데 가야도 중무장 철갑기병이 있었던 것이다.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제투구, 갑주, 마구 등의 유물을 보면 고구려의 수준을 넘는다.

가야는 제철왕국

김수로왕 탄강신화의 구지가에 나오는 알은 고온의 용융상태의 누런 황금빛 쇳물이 담긴 제철로[製鐵爐/冶爐]의 상징이기도 하다. '도가니 爐'자와 '드러날 露'자는 한어 음도 같다. 알[卵]에서 수로왕이 나왔다는 것은 도가니에서 쇠[金]가 나왔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알은 곧 도가니와 그 속의 용융상태의 쇳물과도 같다. 용융상태의 쇳물은 누런 황금빛으로 알[卵]의 노른자 같기도 하다.

또 바꾸어 말하면 제철기술에서 권력이 나왔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가야가 제철왕국이었음은 삼국지 위지 변진조에서 잘 나와있다. 질 좋은 철을 만들어 발해만부터 열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 수출했다고 나온다. 3세기의 기록이지만 이러한 당시로서는 고도 제철기술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4세기중반의 사실을 신화로 재구한 일본서기 신대기에도 아라사히[추正], 가라사히[韓鋤]라고 나온다. 아라사히[阿羅金], 가라사히[加羅金]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각 아라가야에서 만든 칼, 가라에서 만든 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들의 성씨가 '쇠 金'자 김씨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가야의 구지가는 중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본다. 최초에 배로 상륙한 것을 토착민들이 환영하는 듯한 의미도 물론 담고 있지만 바로 제철로에서 질 좋은 철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심리도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여지승람 고령현조에 나오는 가야의 시조인 뇌질주일(惱窒朱日), 뇌질청예(惱窒靑裔)의 이름에 들어있는 '惱'란 한자의 상형으로도 확인된다. 惱의 오른쪽 아래는 도가니를 상형했고 윗부분은 아지랑이나 연기를 상형한 것이다. 좌측 '심(心) 방변' 마음[ ]이 바로 도가니 옆에서 질 좋은 철이 나오기를 노심초사 기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감[烏]이란 개념에는 제철뿐만 아니고 동, 청동 등의 금속제련도 포함된 개념으로 보는 것은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던 집단이 철기문화도 아무래도 일찍 발달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삼족오

일본이란 나라는 일본고대사서를 해석해본 결과 우리 고대국가 백제와 가야로부터 생겨난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의 태양신숭배사상과 가야의 제철기술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것이다. 열도 최초의 대규모 제철단지가 있던 시마네[島根] 이즈모[出雲]는 4세기 중반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소잔명존)이 개척했고 지금도 열도에서 제일 좋은 철광석과 철이 난다고 한다(日立의 제강공장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신사문화도 가야문화라고 보는데 백제도 고구려로부터 나왔다고 하지만 일본의 삼족오가 고구려문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으로 본다. 백제의 영향도 받았겠지만 기원전부터 동북아 제일의 제철왕국이었던 가야의 태양신숭배사상과 제철집단의 수장은 곧 "태양신의 아들[烏]"이라는 상징성 면에서 삼족오가 일본왕실과 관련돼온 것으로 보인다.

서기 신무전기 무오년 6월조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천황은 혼자 황자 수연이명과 군을 거느리고 웅야의 황판진으로 갔다. 거기서 단부호반이란 자를 주살하였다. 그때 신이 독기를 뿜어 인마가 힘을 잃었다. 이 때문에 황군이 다시 떨칠 수 없었다. 그때 거기에 웅야의 고창하라는 사람이 있어 밤에 문득 꿈을 꾸니 천조대신이 무옹뢰신에게 이르기를 "위원중국은 아직도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그대가 다시 가서 정토하여라"라고 하니 무옹뢰신이 답하기를 "제가 가지 않아도 제가 나라를 평정하였던 칼을 내려주면 나라가 저절로 평온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천조대신이 "좋다[諾]"라고 하였다. 이때 무옹뢰신이 고창하에게 "내 칼의 이름은 '후쯔.노.미다마'라고 한다. 지금 그대의 곳간 안에 놓아둘 테니 그것을 가져다 천손에게 주어라"라고 하였다. 고창하는 '네, 네" 하고는 잠이 깨었다. 아침에, 꿈에 가르쳐준 대로 곳간을 열어보니 과연 칼이 떨어져 있는데 곳간의 널판바닥에 거꾸로 서있었다. 가져다 바쳤다. 그때 천황은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깨어나더니 "내가 어찌하여 이토록 오래 잤는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중독되었던 사졸도 모두 깨어 일어났다. 황군이 중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산이 험하여 나아갈 길이 없었다. 진퇴의 길을 잃었다. 이때 밤에 꿈을 꾸었는데 천조대신이 천황에 가르쳐 "짐이 지금 두팔지오(頭八咫烏)를 보내니 향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과연 두팔지오가 하늘에서 날아 내려왔다. 천황은 "이 까마귀가 오는 것은 상서롭게 꿈이 들어맞는 것이다. 위대하고 빛나는 일이다. 우리 황조이신 천조대신이 창업의 기틀을 이룸에 도우시려는가"라고 하였다.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 우러러보며 쫓아갔다』

천조대신이 보낸 까마귀가 길을 인도했다는 이야기인데 후에 신무의 동정이 끝나고 왕조를 열 때 행상을 하는데 이 까마귀에게도 상을 내리는 것이 나온다.

신무는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고 신라왕자 천일창이며 신라는 가야를 가리킨다.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에 阿那加耶의 고명 아시라[阿尸良]는 그 뜻이 '아침땅/새땅'이고 한역하면 新羅다. 阿那=阿羅도 그 뜻은 新羅다. 천조대신이 "좋다[諾]"라고 하는 것도 이장낙존과의 연결고리다. 천조대신과 이장낙존은 백제 초고대왕이다. 무옹뢰신은 침류왕이다.

후쯔.노.미다마는 七支刀를 가리키고 천조대신과 무옹뢰신이 신무에게 준 것이 아니고 무내가 가지고 있던 칠지도를 무내를 제거하고 차지한 것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황극기에 실려 있다). 고사기서문에서는 天劒이라고 표현하고, 고사기 응신기에서는 백제국주 照古王이 아직기를 통해 보내준 橫刀라고도 나온다. 8세기초에 선대의 결과를 놓고 사서를 개작하면서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으므로 대화왕조가 선 것도 천지천황(=응신)의 시호에 있다시피 '하늘의 뜻[天智]', '하늘의 명[天命]'으로 돌리고 위와 같이 순순히 준 것처럼 설화풍으로 꾸민 것일 뿐이다.

후쯔.노.미다마'라는 것은 "후쯔[經津]의 영이 깃든 神體"이라는 뜻이고 서기 신대기 하9단의 후쯔누시.노.가미[經津主神]가 귀수태자이므로 초대왜왕이었던 "귀수태자의 영이 깃든 물건"은 곧 열도통치권을 상징하는 칠지도인 것이다.

구주로 천강한 천손은 니니끼[瓊瓊杵]>귀수태자였지만 신무가 초대천황으로 나오므로 여기서는 천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둘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천조대신은 일신으로서 일본왕실의 황조신이고 곧 태양신인 것이다. 다름 아닌 백제의 초고대왕이고 2인자인 월신은 귀수대왕인 것이다. 천照대신의 '照'자가 고사기 응신기의 照고왕과 연결되는 고리다.

또 까마귀를 고사기서문에서는 大烏吉野라고도 하고 본문에서는 야다가라스[八咫烏]라고도 하는데 실제는 새가 아니고 사람을 새로 꾸민 것이다. 신찬성씨록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鴨縣主; 賀茂縣主同祖 神日本磐余彦天皇(諡神武) 慾向中洲之時 山中험絶 跋涉失路 於是 神魂命孫 鴨建津之身命 化如大烏翔飛奉導 遂達中洲 天皇嘉其有功 特厚褒賞 天八咫烏之號 從此始也(산성국천신)

내용은 위에 인용한 서기 본문과 같은 것인데 신혼명의 손자 가모.노.다께쯔노미[鴨建津之身]가 큰 까마귀로 화하여 날아올라 길을 인도했다고 나오고 중주에 도달하여 천황이 그 공을 칭찬하고 특별히 포상을 후하게 하였고 이때부터 "하늘의 큰까마귀'[天八咫烏]"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賀茂縣主; 神魂命孫 武津之身命之後也(산성국천신)
矢田部; 鴨縣主同祖 鴨建津身命之後也(산성국천신)
矢田部; 饒速日命七世孫 大新河命之後也(산성국천신)
矢田部首; 神饒速日命六世孫; 伊香我色雄命之後也(하내국천신)

신요속일명은 초고대왕이고 그 6세손으로 되어 있는 이가가시고오[伊香我色雄]가 야다베[矢田部]의 조로서 무내숙니이고 대신하명은 그 아들처럼 되어 있다. 야다가라스[八咫烏]에서 '야다[八咫]'를 떼어서 따로 성씨를 '야다[矢田]'라고 하나 더 창씨한 것이다. 다께[武]=다께[建]로 같고 다께우찌[武內]는 다께찌[武內]로도 발음하고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므로 다께찌[武內]=다께쯔[武津/建津]인 것이다. 6세손이니 7세손이니 하는 것은 적당히 대수를 조정한 것이다. 야다[八咫/矢田]는 열도를 달리 은유한 야다[八田]와도 같은 말이다.

'가모.노.아가다누시[賀茂縣主]'조에서 그의 조인 신혼명은 아라사등인데 그 손자로 되어 있는 무내숙니의 후손으로서 무내도 새로 은유되었고 그 아들도 새로 은유된 것이다. 가야에 협력해서 백제본국에 반기를 들었다고 가야계 취급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는 요속일의 후손인데도 아라사등의 후로도 연결해둔 것이다. 무내(=오뢰명)는 신대기 하11단과 신무기에서는 아라사등(=언파불합존)의 장남이자 신무의 형으로 나온다.

따라서 위의 야다가라스는 무내숙니의 아들인 것이다. 대화왕조 창업에 공을 많이 세웠다는 뜻이다. 무내는 제거되었지만 그 아들들은 응신측이나 아신측에도 흩어져 협력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서기 응신기 3년 시세조의 구원전투에서 진사왕을 제거한 왜장 4인이 바로 무내숙니의 아들들로서 아신왕의 사촌들이었다.

「이때 大伴氏의 원조 日臣命이 大來目을 거느리고 대군의 선봉에 서서 산을 넘고 길을 열어」라고 하는데 일신명은 신무의 형이고 길을 잘 인도했다고 후에 이름을 道臣命으로 바꾼다. 대래목은 원래 무내를 가리키는데 이때는 전사한 후이므로 그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반씨는 가야왕족 김씨다.

大伴造; 出自任那國主龍主王孫 佐利王也(대화국제번)
佐伯首; 天押日命十一世孫 大伴室屋大連公之後也(하내국천신)
久米朝臣; 武內宿니五世孫 稻目宿니之後也(우경황별)

대반씨는 가야왕족 사이[佐利]왕>金王의 후손이다. 구메[來目]는 구메[久米]와 같다. 왜인들이 아닌 것이다.

속일본기나 연희신명식에는 대화국 우다군에 야다가라스신사도 있다고 하는데 이 설화를 일본의 토템신앙의 일종으로 설명하는 설도 있다고 한다. 짐작이지만 지통천황 다음의 문무천황이 무내의 후손으로 비정되는데 아마도 바로 이 야다가라스가문에서 나온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金烏란 帝王을 상징하므로 바로 이런 상징성을 가지고 후대의 문무천황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고사기에는 금조(金鳥)라고도 나온다.

열도는 해양성기후로 반도보다 습도가 높아서 반도의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많아 숲에 어둡고 그늘진 곳이 많고 이런 기후 때문에 까마귀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까마귀를 불길하다고 하지만 일본인들은 까마귀를 한국인들이 까치 보듯 여긴다고 한다. 안 그래도 까마귀가 그들의 고대사서에서 천황이 창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나오니 친근감을 느낄 만도 한 것이다. 그리고 삼족오를 그들의 주요한 심벌로 쓰고 있는데 기·기상에서 삼족오라는 명칭으로 등장하지는 않으나 고구려의 삼족오와 같은 것이다.

왜 까마귀일까?

수많은 새 중에서 까마귀가 태양을 상징하게 된 데는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 시각적으로 볼 때 태양의 흑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과학에서 태양의 흑점활동이 왕성할 때는 지구자기장에 불안정해지고 여러 가지 극심한 기후변동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런 현상들이 태양신사상과 결합될 때는 신의 노여움, 신의 뜻으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극심한 한발이나 호우, 태풍, 홍수 등의 자연현상을 신의 뜻으로 간주하고 치자의 부덕과 결부시켜 해석하는 것은 고대에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태양 속의 흑점운동이 활발하면 크기가 커져 그것이 마치 자연계의 까마귀의 형상으로 인식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까마귀를 태양신이 지상의 인간세계에 보내는 신의 사자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고대에 태양의 흑점을 관측할 수 있었을까가 문제가 된다. 어느 정도는 가능하리라 본다. 예를 들어 아침 일출을 관측하면 수평선, 지평선에서 올라오는 태양은 한동안은 육안으로 얼마든지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흑점을 어슴프레하게라도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날이 흐릴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은 발생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천문관측기록은 80% 이상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기록한 것임이 최신과학으로 입증되었다. 거기에는 금성을 낮에 육안으로 관측한 결과인 소위 太白晝現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정도로 천문관측을 할 정도면 태양흑점활동도 충분히 관측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삼국사기는 주로 기원 이후를 기록한 것이고 삼족오가 태양신의 상징 또는 태양신이 지상에 내려보내는 사자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그 훨씬 이전임을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일출시의 태양이나 흐린 날의 태양을 관측하는 것은 이런 시대의 선후와 무관하게 가능하다고 본다. 현대인이 보는 일출과 고대 삼국시대 사람들이 보는 일출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보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만 달라졌을 뿐이다.

또 태양의 흑점은 제철·제련집단들과도 관련된다. 도가니에 쇳물이 벌겋게, 누렇게 녹아 있을 때 위에서 내려다보면 동그란 도가니 속의 녹은 쇳물[熔湯]은 시각적으로 태양과 흡사하다. 거기에 표면온도 변화에 의해 용탕의 표면에 시커먼 얼룩들이 생겼다, 없어졌다는 반복하는 것은 태양의 흑점의 변화와도 흡사한 것이다.

※ 태양흑점을 까마귀로 인식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금년 8월 27일을 전후한 화성근접사진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고대왕관에도 삼족오가
이 까마귀는 신라금관 등의 왕관에도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하여 들어 있다. 고대왕관에 보이는 곡옥은 바로 이 천신의 사자인 삼족오의 몸통을 상형한 것이다. '니은'자 모양의 가운데가 통통한 曲玉·勾玉이다. 이런 관념은 풍수에도 반영되어 '金烏'를 태양의 상징으로 보고 의미는 '帝王'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삼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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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벽화에 그려진 삼족오 (오른쪽)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삼족오 (가운데)


삼족오(三足烏) 또는 세발까마귀는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 속에 산다고 여겨졌던 전설의 이다. 해를 상징하는 원 안에 그려지며, 종종 달에서 산다고 여겨졌던 원 안의 두꺼비에 대응된다. 삼족오는 신석기 시대 중국의 양사오 문화, 한국의 고구려 고분 벽화, 일본의 건국 신화 등 동아시아 고대 문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삼족오'는 3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까마귀를 의미한다.[1] 그 이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자연스레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도 3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또 고조선 시대의 제기로 사용된 삼족정(三足鼎)과 연관시켜 ‘세 발’이 천계의 사자(使者), 군주, 천제(天帝)를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삼족오의 발은 조류의 발톱이 아니라 낙타 같은 포유류의 발굽 형태를 보이고 있다.



동아시아 문화 속의 삼족오[편집]

중국[편집]

삼족오 문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5,000년에서 3,000년 사이에 중국 황하 중류에 존재했던 양사오 문화이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 양사오 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천 점의 토기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 문양이 발굴되었다. 상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 후가장(侯家莊) 1004호 묘에서 발굴된 청동제 사각형 솥에도 삼족오 문양이 발견되었다. 또한 랴오닝 성 차우양 지구 원태자 벽화묘에도 삼족오 문양이 있다.

중국에서 삼족오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한 시대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라는 책의 기록이다. 또한, 《산해경(山海經)》에도 "태양 가운데 까마귀가 있으니 세 발 달린 까마귀이다(日中有烏謂三足烏也)"라고 삼족오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국[편집]

고구려의 삼족오


일부 학자들 및 재야사학에서는 삼족오의 기원이 한민족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2][3]

한국에서는 씨름무덤(각저총),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삼족오가 많이 그려져 있다. 《삼국유사》의 기이편(紀異扁)에는 소지왕 10년 때에 까마귀가 나타나 사람에게 해야할 일이나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영험한 존재로 등장한다. 일본의 기원과 관련이 깊은 신라연오랑과 세오녀 전설에서도 삼족오가 등장하는데, 연오랑(燕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둘 다 이름에 까마귀 오(烏)자가 붙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까마귀를 빛의 상징으로 보았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의천의 가사에서 보이며, 조선 시대에는 일부 묘석에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한국의 삼족오는 중국과 일본의 삼족오와는 달리 머리에 공작처럼 둥글게 말린 벼슬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그 외형에서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벼슬은 국가통치조직에서 나랏일을 담당하는 직위나 직무를 상징한다.

약식의 유래는 고려시대 후기 때 승려 일연이 1281년에 쓴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조에 기록되어 있다. 488년 신라소지왕이 음력 1월 15일에 왕이 경주 남산에 있는 정자인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 이때에 까마귀가 날아와 왕이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왕은 역모를 꾀하려던 신하와 궁주(宮主)를 활로 쏘아 죽여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때부터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여, 까마귀를 기념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으며, 약식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진무 천황의 활 위에 앉은 삼족오.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개국 신화에서 일본왕의 군대의 길 안내를 한 태양신의 사자인 일본의 삼족오 ‘야타가라스(八咫烏)’가 고대 고분과 각종 유물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아직도 쿠마노본궁대사(熊野本宮大社) 등에서 모시는 대상이기도 하다. 일왕이 즉위식 때에 입는 곤룡포의 왼쪽 어깨에는 삼족오가 자수로 놓여 있다. 또한 일본축구협회에서는 삼족오를 엠블렘으로 사용하고 있다.

같이 읽기[편집]

각주[편집]

  1. 이동 일부에서는 삼족오의 '오'(烏)가 까마귀가 아닌 단순히 '검은 새'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2. 이동 김주미 (2010). 《한민족과 해속의 삼족오 한국의 일상문 연구》. 학연문화사. ISBN 9788955082302. 
  3. 이동 “삼족오, 조선 사대부의 넋이 되다”. 경향신문. 2013년 1월 30일. 2013년 7월 27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