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2 : 유태와 아랍은 같은 민족]
<유태.아랍갈등 중동에 '한 핏줄' 조상 스토리>
난마처럼 얽혀있는 중동문제를 지켜보다 보면 이스라엘의 정치학자인 야론 에즈라히의 '슈퍼스토리이론'이 생각난다. 대충 이런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인간의 인식은 문화적ㆍ역사적 렌즈로 세상을 여과해서 본다. 야론 에즈라히는 이 렌즈를 '슈퍼스토리'라고 명명한다. 어떤 신화나 이야기, 즉 슈퍼스토리가 특정 지역이나 특정 민족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같은 스토리는 일반 대중들에게 막연한 사랑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 수천 년 전 조상의 갈등이후손들의 눈을 가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상대방 민족을 공격하고 학살하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는 한 명의 교사였고 은행원이었던 사람들이다.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슈퍼스토리에 의해 학살자가 되어간다. 어제까지 어깨동무를 하고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슈퍼스토리 앞에서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조상들의 슈퍼스토리 때문에 비극적인 사랑을 해야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말이다. 이 같은 학설은 난마처럼 얽혀있는 지금의 중동문제를 푸는 중요한 열쇠다. UPI통신사 기자로 세 번이나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토머스 프리드먼도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창해 펴냄)에서 슈퍼스토리 이론을 거론한다. 재미있는 건 긍정적인 관계는 슈퍼스토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갈등 스토리 훨씬 이전에는 같은 조상을 가진 형제민족이라는 스토리를 공유한다.
성서를 통해 추정하면 아담의 10대 손이 노아이며, 노아의 3형제 중 셈(Shem)의 후손이 아브라함(Abraham)이다. 그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아브라함과 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Issac)이 유태민족의 조상이고 아브라함과 후처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Ishmael)이 아랍족의 조상이다. 즉 그들은 이복형제의 후손으로 같은 핏줄인 셈이다. 이슬람을 창시한 마호메트도 이스마일의 직계 후손이니 결국 그들은 한 핏줄인 셈이다. 기원 전 11∼10세기 경 이삭의 후손 다윗(David)은 현 팔레스타인 지역의 예루살렘에 있는 지온(Zion) 언덕에 왕궁을 세워 당대의 번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 전 406년에 바빌로니아왕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분산되었으며 뚜렷한 국가건설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도무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5000년 전의 슈퍼스토리를 다시한번 들려주고 싶다.
성경에 보면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야벳과 셈과 함이었다. 홍수 이후에 셈족은 메사(Mesha : 페르시아만의 북서 끝에 위치한 바스라 지역)에서 세발(Sephar : 남서 아라비아에 있는 산)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다. 이 두 지역은 모두 욕단부족이 사는 지역의 동쪽 변경에 위치하고, 세발은 욕단부족의 국경에 있는 산이었다. 셈은 아랍인과 히브리인의 조상이 되었고, 욕단은 셈의 5대손(셈의 넷째 번 자손)이었다. 욕단의 아버지는 에벨(Eber)인데, 에벨은 Heber로서 히브리인들의 조상이다. 욕단은 카흐탄(Kahtan) 또는 예크탄(Yektan)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랍인들은 그를 아랍인의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여긴다. 그래서 아랍민족은 노아의 둘째 아들 셈을 조상으로 하여 그 후손을 다음과 같이 두 혈통으로 나눈다.
첫째, 아브라함과 하갈의 아들이었던 이스마엘의 후손 아드난에 뿌리를 둔 북부 아랍인.
둘째, 에벨의 아들 욕단과 동일시되는 카흐탄에 뿌리를 둔 남부 아랍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드난계보다는 카흐탄계 자손이 아랍인으로서 순수성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셈족의 자손들이 쓰는 언어를 통칭하여 셈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셈어가 사용되는 지역이 아라비아 반도와 북부 아프리카인 점에 착안하여 어떤 학자들은 셈 함어 또는 함 셈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용어는 함어가 셈어와 대립된 어족으로 잘못 인식되는 인상을 남기므로, 언어적 친족관계를 지리적 부분이나 인종적 구분보다 우선하여 아프리카·아시아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지어 이라크인 학자는 셈어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주로 쓰이므로 '반도의 언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셈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언어학자들은 아라비아 반도 또는 저지(低地) 유프라테스 또는 아르메니아나 아프리카라고 하지만, 이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견해는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이다. 그리고 오늘날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쓰이고 있는 셈어는 다음과 같다.
1. 아랍어 : 아라비아 반도, 북부 아프리카 등
2. 에티오피아어 : 에티오피아
3. 히브리어 : 이스라엘
4. 아람어 :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마을룰라 지역 등
Ⅱ. 셈어의 종류
보통 셈어는 동부 셈어와 서부 셈어로 나뉜다. 서부 셈어는 북서 셈어와 남서 셈어로 구분되며, 원 셈어(proto-semitic)의 가장 중요한 어파는 남서 셈어의 북부 아라비아어, 남부 아라비아어, 그리고 에티오피아어이다.
1. 동부 셈어
동부 셈어에는 아카드어(기원전 2500-3000)가 대표인데, 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언어로서 원 셈어의 고향을 떠나 가장 먼 거리를 여행하여 셈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 수메르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류문명의 가장 오래된 언어가 수메르어이다. 이라크 땅에 들어온 셈족은 이라크 남부에 살던 수메르인과의 구별을 위해 바벨의 북쪽 셈족이 살았던 도시 아카드의 이름을 따서 그들의 언어를 아카드어라고 했다. 수메르인들은 바닥이 삼각형인 얇은 나뭇가락으로 진흙판을 눌러서 글자를 썼는데, 이 글자가 쐐기같다고 해서 쐐기문자라 한다. 수메르인들은 그들의 말을 쐐기문자(설형문자)로 나타냈으며, 당시의 아카드인들은 쐐기문자 쓰는 법을 수메르인에게서 배웠다. 수메르인이 창안한 쐐기문자는 기록을 위한 수단이 됨으로써, 그 후 여러 민족이 이를 모방하여 글자를 만들어 썼다. 수메르인의 쐐기문자는 소리에 바탕을 두고, 낱말은 음절단위로 나누어 각 음절마다 표기하는 글자가 따로 있었다. 아카드어는 앗수르어(기원전 1950-600)와 바빌론 방언(기원전 1950-600)으로 나뉘는데, 이들은 각각 고·중·신의 세 단계로 나뉜다.
2. 북서 셈어
북서 셈어는 가나안어와 아람어가 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가나안어파에 가나안어, 우가리트어, 히브리어, 페니키아어, 분어, 모압어로 구분하고, 지리적으로는 북부 가나안어(우가리트어), 중부 가나안어(페니키아어), 남부 가나안어(히브리어와 모압어)로 나누기도 한다. 우가리트어는 우가리트 도시국가의 언어인데, 기원전 1400년경에 쓰인 쐐기문자로서 분절음 단위로 모음없이 자음만으로 쓰였다. 역사상 최초로 알파벳 글자로 쓰인 우가리트어는 아랍어처럼 원 셈어에 가깝다.
2-1. 가나안어
기원전 1500년경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빌려 쓸 때 이집트어의 의미는 버리고 그 발음만을 따다 쓴 페니키아어는 기원전 12세기에서 서기 196년까지 쓰였다. 비문에 따르면 페니키아어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에 분포되었고, 페니키아 민족은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지중해 여러나라에 걸쳐 있었다. 페니키아어는 22개의 글자로 이들 모두가 자음이며, 모음은 표기되지 않았다. 음절문자인 페니키아어는 기원전 9세기경 마그립 지방까지 이르렀는데, 그 곳에 쓰인 페니키아어는 분어라고 한다. 분어는 대부분 튀니지 평원에서 쓰였고, 146년 분국의 정치적 실권이 약화되자 분어도 자취를 감추었다.
기원전 9세기 그리스인들은 우가리트어와 관련된 페니키아어 알파벳을 페니키아인과의 잦은 접촉 속에 배우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이과 다르게 낱말 속에 모음을 나타내는 글자를 넣고, 글자의 방향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페니키아어의 인후음도 필요없게 되었다. 그러나 페니키아 음절문자에서 빌린 문자가 남았는데, '?lef가 성문 파열음을 떼고 ?lef로, he가 성문 마찰음 /h/를 떼고 e로, '?yn은 인두 마찰음 없이 oyin으로 부르게 되었다. 음소문자였던 그리스어는 모음을 추가하여 로마인의 라틴문자가 되었다.
2-2. 아람어
셈어중 아람어는 언어 분류상 서로 대단히 유사한 방언들을 포함하고 있다. 샴 지방과 이라크 지역에 다양한 방언들이 퍼져 있었으며, 아람어가 고대중동에서 국제 교통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아람어에는 여러 유사한 방언들이 있었다. 이미 기원전 3000년의 앗수르 비문에 아람인들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아람어는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글자로 기록되어끨. 그래서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아람어의 비문으로는 기원전 10세기의 것이다. 그 후 아람어는 복잡한 역사의 단계를 거쳤다. 아람어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고대중동의 제국과 연관되었는데, 예를 들면 기독교 복음전파의 도구로서, 그리고 그리스의 학문을 아랍문명에 옮기는 수단으로서 아람어의 한 방언이 존재했다. 그것이 시리얀어인데 시리얀어는 중동 문명사에서 큰 역할을 한 아람어의 한 방언이었다. 그러나 아람어의 사용은 이슬람의 도입과 동시에 후퇴하였다. 그 후 아람어는 여전히 이라크 북부와 이란, 시리아의 여러 마을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다. 역사를 거치면서 다양한 아람어의 방언들에 대한 여러 이름들이 붙여졌다. 가장 중요한 아람어 방언 중에는 고대 아람어, 국제 아람어, 시리얀어, 유대 아람어와 나바트어, 그리고 만다이 아람어 방언 및 현대 아람어 방언 등이 있다.
아람어는 앗수르 국가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여졌다. 기원전 625년 앗수르 국가가 망했을 때 페르시아 제국의 관할하에 이라크가 놓이자 이곳에 아람어를 도입하였다. 페르시아인들은 아람어를 국가전역에서 공식어로 인정하였다. 이로써 아람어가 이란에도 도입되었으며, 또 아람어는 페르시아의 영향과 함께 고대 중동전역에까지 도입되었다. 기원전 7세기부터 아람어는 국제어로 쓰여 페르시아 지역 사람들과 비페르시아 지역 사람들 간에 상업적·정치적 교류와 고대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많은 비문들이 이란과 이라크, 샴지역과 북부 알제리, 그리고 이집트의 아스완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소아시아에서도 이중언어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일부는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었다.
아람어는 크게는 동부 아람어와 서부 아람어로 나뉜다. 서부 아람어에는 나바트어(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팔미라어(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 시나이어(기원전 1세기-서기 4세기)와 성서 아람어(갈대아어로 잘못 불림), 팔레스타인 탈무드의 유대 아람어, 그리고 기독교인 팔레스타인 아람어(기원전 5세기-서기 6세기)와 사마리아어(기원전 3세기-서기 4세기) 등이 있다. 그러나 서부 아람어는 9세기에 아랍어에 그 자리를 넘겨 주었다.
무슬림이 정복하기 전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에서 쓰였던 서부 아람어 방언은 오늘날 거의 사라졌지만, 동부 아람어 방언은 제한적으로 이라크, 이란, 터키의 남동부, 그리고 구소련의 극히 일부지역에 쓰이고 있다. 서부 아람어 방언의 구어체 변이형은 다마스쿠스의 북쪽 50km에 위치한 마을룰라 산간지역에서 약 6천여 명이 쓰고 있다. 아람어는 알파벳이 전해 내려오지 못하고, 다만 구두로 쓰일 뿐이며, 이라크의 투르 아비딘과 모술, 그리고 북서 이란내에 우르미아, 구소련의 게오르기아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쓰인다.
구약의 다니엘서 등에 쓰였던 아람어는 국가 아람어였고, 가장 중요한 아람어는 시리얀어이다. 아람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자신들을 시리얀인이라 불렀다. 옛 민족이름이 불신자를 나타냈으므로 그들에게 좋지 않다고 여겼다. 시리얀어는 13세기까지 하란 근처 에데사(Eddssa)지역에서 페르시아 지역까지 퍼져 갔다. 시리얀어는 3세기까지 번역에 쓰여졌는데, 특히 그리스 문명을 아랍문명에 접목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스 철학, 수학, 의학 등의 서적이 메소포타미아 에데사의 네스토리우스파 학원, 시리아의 기독교 단성론자 학원, 나중에는 페르시아 준디사푸르 학원에서 아람어 또는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5세기에는 기독교 교파에 따라 동부 네스토리우스파(경교)와 서부 야곱파로 나뉘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추방되었는데, 페르시아 보호 아래 당나라에 전파되었고, 신라에도 들오온 것으로 전한다. 결국 동부 아람어는 기원전 9세기부터 아카드 지역에서, 기원전 5세기에는 바빌로니아에서 쓰였고, 심지어는 인더스강 상류까지 퍼져 나가 중국서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중앙 아시아의 몽골 문자체계와 인도의 데바나가리(Devanagari)문자는 시리얀어의 후손이라고도 하며, 아람어는 아랍어, 터키어, 쿠르드어 등에 섞이게 되었다.
나바트어는 나바트인들이 썼던 아람어 방언인데, 나바트인들은 시리아 남쪽과 아라비아 북쪽 끝에 살았던 아랍민족이다. 그들의 교통어는 아람어였는데, 아람인에게서 아랍어 글자를 배워 나바트 글자를 만들었다. 오늘날 아랍어 글자는 나바트 글자를 본떠 만든 것이며, 나바트 글자는 우가리트 글자와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그래도 가나안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는 히브리어이다. 시리얀어(Syriac)가 이전에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연결시켜 주었던 것처럼, 히브리어는 아랍어와 라틴어를 연결지어 주는 가교역할을 했다. 구약의 대부분은 고대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나 창세기 31:47, 예레미아 10:11의 두 낱말과 다니엘 2:4-7:28, 에스라 4:8-6:18, 7:12-26 문장들은 아람어로 쓰였다. 고대 히브리어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드보라의 노래, 사사기 5장 등) 쓰였고, 구약의 대부분은 기원전 9세기-기원전 6세기 사이에 쓰였다.
기원전 536년 바빌론 포로에서(왕하 25:11) 돌아오는 길에 유대인들은 아람어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두루 쓰였음을 발견한다. 그런데도 히브리어는 사라지지 않고 탈무드 히브리어의 바탕을 이루었으며, 2세기부터 이슬람이 발흥하는 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탈무드는 구약성서의 주석으로 기원전 300년-서기 500년 사이에 쓰여진 것인데, 이는 히브리어 원문인 미쉬나(Mishna)라는 부분과 히브리 원문의 아람어 주석인 게마라(Gemara)라는 부분으로 되어있다. 미쉬나는 구약성서의 원문이고 게마라는 미쉬나의 주석이다. 중세 히브리어는 교육과 종교어로 쓰였고, 유대 민족주의와 더불어,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현대 히브리어로 부활되었다.
3. 남서셈어
남서 셈어에는 북부 아라비아어와 남부 아라비아어, 그리고 에티오피아어가 있다. 북부 아라비아어는 지역적으로 근접한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로 침입하고 무역을 하거나 곡물을 서로 나누면서 많은 아람인과 히브리인들이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과 섞이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북부 아라비아어와 남부 아라비아어의 지리적 구분이 어디까지인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런 구분이 아랍어 방언의 생성과 어떻게 결부될 수 있느냐고 의아해한다.
하여튼 북부 아라비아어에는 리흐얀어(Lihyanian, 기원전 2세기-서기 4세기)와 타무드어(Thamudian), 사파이어(Safaitic, 서기 1세기), 그리고 아랍어가 있는데, 아랍어는 쿠란의 언어로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랍어 최초의 비문은 서기 328년으로 되어 있고, 리흐얀어와 히자즈 북부의 타무드어, 시리아 사막지대의 사파이어는 사어가 되었다. 남부 아라비아어에는 해안가의 미나어(Minaeans), 마으립의 사바어(Sabaean), 아랍만에 이르는 카타반어(Qatabanians), 그리고 하드라마우트어(Hadramautian)가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쓰였다.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방언으로는 마흐리(Mahri), 하루수시(Harsusi), 사흐리(Shahri), 카라위, 소코트리 등이 있다.
흑인 유대인’ 차별 고통
이스라엘로 이주 20년 전체 60%가 빈곤 허덕,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 이디오피아 출신 유대인들이
빈곤과 백인 유대인들의 차별대우로 고통받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16일 보도했다.
통신은 “전쟁과 기근에 허덕이는 이디오피아 현지보다는 생활이 나아졌지만,
집단 이주해 온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흑인 유대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백인 유대인들의 차별대우가 2세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현지 메이어스-브룩데일 사회조사연구소의 보고를 보면,
백인 유대인의 20%만이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반면
흑인 유대인 가운데 빈곤층은 60%에 이른다고 통신은 지적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솔로몬의 후예로 불리는
이디오피아 출신 유대인(이른바 ‘베타 이스라엘’)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것은
1975년 메나헴 베긴 총리 시절이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정부는 1980~90년대 군 수송기를 동원해
‘모세 작전’ ‘솔로몬 작전’ 등의 이름으로 이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현재 이스라엘 600만 인구 가운데 이디오피아 출신 유대인은 모두 10만5천여명에 이른다.
통신은 “아랍계 및 팔레스타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만,
다른 지역의 유대인 이민이 급격히 줄면서 이스라엘 이민 당국은
2007년가지 베타 이스라엘 2만여명을 추가로 이주시킬 계획”이라며
“하지만 이디오피아 출신 이민자들은 최근 급증하고 있는
이디오피아계 유대인에 대한 반감으로
학교교육에서 구직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만연해있다고 호소한다”고 전했다.
정인환 기자 (한겨레, 2005.03.17(목) 18:49)
잃어버린 부족 구하기, 아세르 나임 지음 / 이종인 옮김, 시대의 창 펴냄
1860년대에 에티오피아 전역을 순회하며 선교하던
영국의 선교사들이 깜짝 놀랄만한 한 종족을 만났다.
오지에서 낯설은 부족 하나 만나는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니겠으나,
여기 영국 선교사들이 만난 이 종족은 ‘유대교’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에티오피아 산지에 사는 유대인(?), 저들은 두말이 필요없는 유대인들이었다.
피부색만 까맣지 오히려 본토 유대인들보다 더 전통과 격식에 충실했다.
선교사들은 생각했다.
솔로몬 왕을 만나러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시바 여왕이 생각났고,
사도행전의 에티오피아 내시 간다게가 떠올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그들은 북부 에티오피아의 바위가 많은 지대 깊숙한 곳,
시미안 산맥의 준봉들이 눈 안에 들어오는 곳에서
농사를 짓거나 토기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거래를 하는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팔라샤”라고 불리우는 이 종족은 수천 년 동안 외부와 단절된 환경에서 살았다.
선교사들이 저들을 개종시키려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실들은
저들 팔라샤들이 고대 유대교 신앙을 실천하면서
안식일, 또는 정결의식 등 히브리인들과 똑같은 관습을 지켜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저들은 솔로몬과 시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 이스라엘이라고 전해진다.
저들은 정통 `이스라엘 가문' 이라 하여 `베타 이스라엘'이라고 호칭한다.
베타 이스라엘(팔라샤)이 선교사들과의 대화를 기피하자,
선교사들은 조셉 할러비(Joseph Halevy)라는 유대인 학자를 내세웠다.
할러비가 저들 지도자를 만나서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왔으며
오직 아도나이(주님)만 믿는 유대교 신자라고 하자
저들은 의심을 풀고 말하기를 백인 중에 유대인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할러비에게 `당신이 예루살렘, 축복받은 도시에서 왔단 말이오?
그래, 당신 눈으로 시온산, 이스라엘 주님의 집, 거룩한 성전을 보았단 말이오.
라헬 할머니 묘소를 안다는 말이오?'
팔리샤들은 언젠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꿈을 가지고
수천 년 동안 에티오피아 산지에서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난 1991년 에티오피아는 내전 상황이었는데
그때 팔라샤가 표적이었으며 대학살이 예고되었다.
`아디스의 백정'이라는 별명을 가진 독재자 멩기스투는 베타 이스라엘을 담보로
이스라엘과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얻어내기 위해 줄타기 외교를 하였다.
저들 요구에 응해 주지 않으면 베타 이스라엘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겁을 주었다.
이 책의 저자 아셰르 나임은
베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하여 주 에티오피아 대사로 부임,
독재자 멩기스투와 협상을 하여 이른바 `솔로몬 작전'을 통해
정확히 25시간 안에 1만 4천여 명의 베타 이스라엘을 탈출시켜
`아버지의 땅'이라 하는 예루살렘까지 데려온 내용이
〈잃어버린 부족 구하기〉에 담겨 있다.
이 책은 흥미진진한 스릴이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구속' 또는 `대속' 이라는 용어에 익숙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 아, 이것이로구나 하는 힌트를 얻게 된다.
앞서 말한대로 미국과 이스라엘은 독재자와 힘든 외교전을 했다.
결국 돈이 필요했다.
베타 이스라엘의 몸값이 자그마치 3천 5백만 달러나 되었다.
이 돈이 없으면 3천년 동안 조국, 아버지의 나라,
믿음의 조상들이 살아온 거룩한 땅을 소원했던 팔라샤들이 집단 학살로 죽어가야 한다.
이 많은 돈 3천 5백만 달러,
이 돈을 미국인 100명이 사흘 안에 기부하여 탈출 작전은 성공을 한다.
3천 5백만 달러가 베타 이스라엘 1만 4천명의 목숨 값이다.
이것이 대속이다. 대신 갚는다, 대신 속죄한다,
“대신 죽는다”의 뜻을 담은 예수의 십자가를 기독교인은 여기서 배우게 되며,
유대인들의 동족애가 얼마나 뜨겁고 간절한가를 볼 수 있다.
동족애가 얼마나 강했으면 수천 년 유랑을 거듭해온 저들이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가를 눈여겨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고도 하는 1992년의 대작전,
비행기 10대로 정원의 열 배를 태우고 대탈출(대구출)을 시도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에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지혜와 용기가 들어 있다.
에티오피아와 예멘의 싸움
솔로몬의 아이를 잉태했다고 전해지는 시바의 여왕,
그녀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에티오피아와 예멘 두 나라가
서로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가?
그러나 두 나라의 어디에서도 그녀에 대한 유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진정 누구인가?
미인의 대명사로 혹은 현명한 통치자의 대명사로 쓰이는 말이다.
그 시바여왕의 탄생지를 놓고 에티오피아와 예맨이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악숨이란 지역을 통치한 마케다 여왕을
시바의 여왕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그녀가 이곳의 장본인이라고 주장한다.
1974년 군인들에 의해서 왕위에서 축출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자신이 바로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솔로몬과 시바 여왕 사이에 “메네리크라”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기원전 1270년에 세워진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의 선조라는 것이다.
1931년에 제정된 에티오피아 헌법에는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 태어난 아들
“메네리크”의 직계 자손이 에티오피아의 황제이다."라고 명기되어있다.
그러나 예맨은 “무슨 헛소리냐”고 반복한다.
마리브지역을 통치한 빌키스 여왕이 진짜 시바의 여왕이라는 것이다,
코란에는 빌키스 여왕이 이곳의 왕국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민들은 그녀의 무덤이 곧 마리브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맨의 한 관광 여행 가이드에는 시바 여왕이
마리브의 고대 댐을 세웠고
그녀의 이름을 딴 두 개의 사원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유대인의 정의에 대하여
가령 '나는 뭐만 봐도 뭐인지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기기만적인 착각일 뿐입니다. 독일의 나찌스 장교들은 자신들이 100미터 밖에서 봐도 유태인을 알아본다고 말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유럽 유태인들은 혼혈이 심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정말 유태인 피가 섞여 있는지도 불확실한 경우가 있는데? 흔히 유태인코라는 말을 합니다. 원래 아랍계인종들, 셈족이 코가 큽니다. 백인이 코가 크다고 하지만, 그건 대체로 코가 높다는 말인데, 셈족의 경우에는 사막에 적응해서인지 코가 옆으로도 좀 크면서 긴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조금 더 심해지면 매부리코가 되죠.
유태인은 원래 셈족에 들어갑니다. 즉 지금의 팔레스타인인들이나 이라크인들과는 동족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셈족은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 조금은 갈색기가 도는 하얀 피부가 원래의 표준적인 모습이죠. 결국 유태인을 알아본다고 하는 말은 실제로는 그게 셈족인지 알아본다 하는 말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중동지방 사람들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죠. 다만, 유태인은 그 중에서도 코가 특히 매부리의 경향이 있다고 하는 건데, 실제로는 유태인들 중 그런 매부리코를 가진 사람은 1/3도 안 된다고 합니다.
유태인을 구별한다는 말은 사실은 지독한 편견과 차별의식에서 나온 근거없는 미신과 같은 것입니다. 유태인은 인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중국에서 온 유태인은 동양인처럼 생겼고, 이디오피아에서 공수해 온 유태인들은 흑인처럼 생겼습니다. 현대의 유태인은 인종적으로는 대부분이 혼혈이기 때문에, 어떤 공통된 특징을 찾기 어렵습니다.
'07洪益參考資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 : 훈민정음 이전의 글자들] (0) | 2015.08.07 |
---|---|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3 : 이슬람에 대한 이해] (0) | 2015.08.07 |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1 : 三一神誥(삼일신고)] (0) | 2015.08.07 |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0 : 三國史記 / 三國遺事] (0) | 2015.08.07 |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9 : 訓民正音(훈민정음)] (1) | 2015.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