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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 : 훈민정음 이전의 글자들]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2:37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 : 훈민정음 이전의 글자들]

 


이 글은 [ '송호수 박사 민족 사상 글모음' "위대한 민족" - 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 라는 제목으로 보림사에서 개천5886(1989)년에 출판한 책 중에서 실린 글의 일부이며, 글 쓴 분은 송호수 박사이십니다. 저자에게 양해도 없이 이런 글을 마구 쓰게 됨에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널리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옮깁니다.  참고로, 책 원문에는 한자가 필요한 경우에 한글로는 쓰여있지 않고 한자로만 쓰여 있는것을 제가 옮기면서 한글로 바꾼 후에 ( )안에 다시 한자를 썼으며 이야기의 한자 화일에 없는 글자는 쓰지 못하고 *,**등으로 한자가 없는 글자에 표시를 하여 아래에다가 따로 설명만 해 놓았음을 밝힙니다.


 1. 한글과 닮은 일본 옛글


 무릇 인간생활에서 문화와 표기법은 아마 같은 시대에서 비롯되어진것 같다. 그 표기법이 단순한 기호였건 문자였건간에 인간생활과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옛 글자 즉 신대문자(神代文字)를 연구하는 학자가 많아서, 저서들도 상당히 나와 있고 (대략 97종) 또 옛 글들도 여러가지 유형이 꽤 발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소위 그들이 말하는 신대문자 중에서 아히루문자(阿比留文字)는 우리측의 한글과 너무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히루 문자가 역사적으로 오래된 문자라 하여 '친(親)'격이라 하고, 우리의 한글 곧 언문이 '자(子)'격이라 하여 일본의 아히루 문자와 한글은 '친자(親子)관계' 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대마도와 구주 지방에서 주로 발견이 되었고 고대의 신궁(神宮), 신사(神社)의 위패(神體)가 그렇고, 또 그들의 최고 조상신을 모신 이세(伊勢) 신궁에서만도 한글과 같은 아히루 문자로 기술된 문헌들이 도합 99점이 있다고 다다이(田多井四郞治)씨는 그의 [일본신대 문자론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차외(此外), 이세(伊勢)의 신궁문고(神宮文庫)에는 패전지아체(稗田之阿體), 태안마(太安마*), 등원겸자(藤原鎌子)를 비롯, 후제호천황시대(後醍호**天皇時代)의 문헌을 끝으로하여 기수합계구십구점(其數合計九十九點)있습니다. 이것을 시대별로 해보면,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記)'가 되어진 때를 기점으로 후제호천황시대(後醍호天皇時代)를 마지막으로하여 그 이전도 없거니와 그 이후에도 없다.


* 여기서 '마'는 이야기에 들어 있는 한자에는 없습니다. '麻' 아래에 '呂'이 있는 글자로 일본어로 '그대'를 뜻하는 호칭이라고 합니다. 

** '호'자도 없어서요, 酉와胡자를 나란히 쓴 글자입니다. 라고 되어있는 것이다.

<자료 1> 또 신경(神鏡)의 이면에 부각되어 있는 글자 역시 아히루문자(한글)로 되어있다.

<자료 2> 뿐만아니라 신사(須賀神社등)의 위독(位독***)에도 아히루 글씨로 되어있다.

<자료 3>

 *** '木'자와 '賣'자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까노(中野裕道)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아히루신자(阿比留神字)는 조선으로 건너가서 언문(諺文)의 원형이 된 것이다. 지역적으로도 당연히 생각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경우에 일본의 학자는, 화자(和字)편에서 언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전다정씨(田多井氏)도 말한 바와 같이 시대 고증에서 말하더라도 和字편이 훨씬 고대 것이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아고(吾鄕淸彦)씨는 '아히루문자와 언문(한글)과는 친자(親子)의 관계'라는 제하에서, "아히루 문자와 언문과의 사이는 親子의 관계가 있어도 아무런 불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다.,,,아히루 문자인 즉 대마(對馬)의 복부아비류가(卜部阿比留家)가 천아옥근명(天兒屋根命)의 직전(直傳)으로 비장보존(秘藏保存)하여 온 고대화자(古代和字)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연전(1968)에 한국을 다녀간 바 있는 가리 레디야드 박사(미 컬럼비아大 한국사 교수)는 그의 한글 창제를 다룬 박사 학위 논문에서, "훈민정음이 중국 언어학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외에도 몽고의 팔사색(八思色) 문자의 흔적도 보이고 있다."고 하는 이견이 있었다. 또한 일본의 북리(北里)박사도 레디야드와 같이 한글이 몽고의 팔사파문자의 영향에 의한 창제설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오향(吾鄕)은, "아히루문자와 한글이 팔사파문자에 자극되어 그 영향에서 제작되었다고 판정하는 北里의 설은 착각이다."라고 일격을 가하였다. 이렇듯 吾鄕은 한글과 아히루 문자가 팔사파 문자의 영향에서 창제설을 배격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한글 창제가 일본의 아히루 문자의 영향하에서 이루어 졌음을 주장하고 있다.(후에 수정하였지만) 물론 인접한 한국과 일본은 상호간 그 문화의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시한상에 먼저의 것이 후자의 것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 것도 당연한 소치이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 영향의 先이 과연 일본이나 몽고에서일까 아니면 직접적인 외래 영향성을 배제할만한 충분한 고증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할 것이다.


 2. 고전(古篆)과 한글


 훈민정음 창제 근거를 보면 전(篆)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먼저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형상은 옛 전(篆)자를 모방하고 소리는 7조(調)를 화협하였는데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묘(妙)가 모두 포괄되어 있다."


** 원문이 한자로 나와 있는데 생략했습니다(이하 모두 생략). 라고 하였으며 또 <조선 왕조 실록> 세종 실록 25년 12월조에서는, "이달에 상왕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篆)자를 모방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최만리의 소(疏)에서도, "글자 틀이 비록 옛 전문을 모방하고 글자를 합쳐서 소리를 내나 모두 다 옛 것과 반대이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또 일본의 北里박사 역시 옛 전자를 저본으로 하여 이 새 글자를 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본 神大大 문자, 쪽 357) 정인보 역시 우리나라의 옛적에 문자가 있었다는 추증을 하면서 다음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다만 고초(古初)의 문자 - 단군 古祖 이래 북방의 문화를 실어가지고 내려오는 - 面, 내려 오면서 수익 없는 전쟁에 시달려 문자의 발전이 자연히 지후(遲後)함을 면치 못하게 되자 漢족의 문자 점점 융성하여 방취(傍取)하는 손이 어찌할 수 없이 그리 향하게 되매 뒤에 미쳐서는 한자로 고문대책(高文大冊)에 사용하기까지도 마침내 주저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까지 전하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가 그 하나이다."(정인보 조선사연구 하권 典故甲, 三, 藝文典, 안호상, 민족정론 쪽 31)또 신경준(1712 - 1781)은 옛적에 문자가 있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동방에 옛적에 통속으로 쓰던 문자가 있었으나 그 수가 불비(不備)하고 그 형틀이 무법(無法)하여 제대로 말이 못되어 일반으로 쓰이지 못하였드니,,, 우리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신경준 諺書韻解 : 안호상, 민족정론 쪽 31)라고 하였으니 어쨌든 훈민정음이 나오기 이전에 한자 아닌 우리의 고유 문자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전술한 바와 같이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解例本)에 나오는 정인지의 글, 최만리의 글 등은 한결같이 옛 전(篆)자를 본떠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 전(篆)서에 대하여는 천부경(天符經)에 관한 기록에 많이 드러나고 있다. "천부경은 천제환국(天帝桓國)의 구전지서(口傳之書)였던 바 환웅천황(桓雄天皇)께서 천강(天降) 이후에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였더니 최고운은 신지(神誌)의 옛 전비(篆碑)를 발견하여 작첩(作帖)하여 세상에 전하였다."(졸저, 한민족의 뿌리사상 쪽 71 - 78)라고 하였으며 천부경을 주해한 노주(蘆洲) 김영의(金永毅)도 "신지의 전문을 고비(古碑)에서 보고 최고운이 해석하여 태백산에 각(刻)하였다." 하였고, 단전요의(檀典要義)에도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篆碑)가 있으니 해독하기 어려워 고운(孤雲)이 번역하였다." 하였고, 또 정조 실록에도 "천부경은 보배로운 전문(天符寶篆)이라."하였다. ( 졸저, 한민족의 뿌리사상 쪽 41 - 90 ) 그런데 또 신사기(神事記)에 보면 "신지가 문자를 만들어 윤리를 가르쳤다."라고 하였다.


 3. 天符經과 한글


 전술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은 전(篆)자를 본떠 지었다.(字倣古篆)"고 세종 실록이나 정인지, 최만리 등이 똑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篆字로된 천부경을 최치원이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은 훈민정음 창제시에 본이 되었던 그 전(篆)과 최고운이 천부경을 지금의 한자로 번역할 적이 본(原本)이 되었던 전(篆)이 물론 그 형틀에 있어 서로 다른 글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천부경 연구에 일생을 바친 일암(一菴) 김형탁(金炯鐸) 선생의 유고를 보면 그는 '한글'을 '환문(桓文)'이라 적고 있는데 '독환문범례(讀桓文凡例)'에서 한글의 오리(奧理)를 풀면서 천부경(그는 '天經'이라 하였음)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천경의 '일시무시(一始無始)'의 句를 고요히 千回萬 番을 암송하면 이 경계를 점차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설명한 바의 ●과 ○의 일환일권(一丸一圈)은 곧 그 중에 스스로 종횡이획(縱橫二劃) ㅣ(ㅡ)의 이치가 있음을 자연히 알 것이다.  이미 이ㅣ(ㅡ)의 (十)字에는 ○이 둘려 있으니, 이는  천부경의 이른바 '일석삼극무진(一析三極無盡)'의 이치이다. 天地가 이미 조판(肇判)하고 천지가 감응 상교상적(相交相積)하여 ㅕㅑ, ㅠㅛ로 천지가 대성(大成)하니 곧 천부경 '일적십거(一積十鉅)'의 이치이다.  천지가 이루어지면 천지가 회중(會中)하고 合하여 성인(成人)하고 ㅘㅝ가 되니 이것은 곧 천부경의 이른바 '대삼 합육(大三合六)'의 이치이다. 이미 이 사관(四關) '일시무시(一始無始)', '일석삼극무진(一析三極無盡)', '일적십거(一積十鉅)', '대삼합육(大三合六)'(즉 천부경 본문의 일부)을 투득(透得)하면 天地가 天地된 바를 가히 알 것이다. <자료 4>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훈민정음이 창제된 원리가 천부경(造化經)에 이미 담겨져 있음을 추리해냈다. 그런데 또 '훈민정음 해례'의 '제자해(制字解)'에서는


 ● : 바탕이 둥글어 天을 상징하고


 ㅡ : 바탕이 명명하여 地를 상징하고


 ㅣ : 바탕이 서있어 人을 상징한다.


 이렇게 천부경의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삼극(三極), 곧 天, 地, 人원리가 원천적으로 훈민정음 창출 원리였다는 것이 설명되고 있음을 보아, 저 一庵의 관점과 상관된다 할 것이다. 말하자면 천부경의 '삼극(三極)'(천,지,인) 원리에서 한글이 창출되었다는 일암의 설과 역시 삼극원리에서 훈민정음이 창출된 '제자해(制字解)'의 설이 서로 일치하고 있으며, 또 더우기 천부경이나 훈민정음의 양자 공히 '篆字'가 그 창출된 바의 원형이었다는 데에 유의할 문제가 있다고 보아진다. 일암(一菴) 김형탁(金炯鐸)은 그가 지은 <단군철학 석의>(檀君哲學釋義圖說)에서도, "桓文(한글)의 의지(義旨)를 세구(細究)하면 먼저 ●○의 實하고 虛한 2개의 환(環)을 만들었으니, 곧 聖經(천부경)의 '일시무시(一始無始)'에 實이 먼저요, 虛가 뒤임의 뜻이오, ●中의 종횡이리(縱橫二理)를 배출하여 (ㅣ)(ㅡ)의 分이 되니 곧 성경의 '일석삼극(一析三極)'의 뜻이오, ㅡ가ㅣ에 入하여 ㅕㅑ가되고, ㅣ가 ㅡ에 入하여 ㅛ ㅠ가 되어서 종과 횡이 교적(交積)하니 곧 성경의 '일적십거(一積十鉅)'에 '무궤화삼(無궤*和三)' 뜻이요, ㅕㅑ 가 ㅛㅠ로 더불어 합하여 ㅛ ㅑ ㅠ ㅕ 를 이루어 天地會合의 像이 되니 곧 성경의 大三이 六에 合하여 三을 生하여 運함의 妙한 理이라. 그 구조가 정밀하고 심원하여 의리(義理)가 극진함이 성경으로 더불어 딱들어 맞으니 그 한 손(단군)에서 같이 나왔음이 의심이 없나니라. 그러므로 함부로 성문(聖文)-한글-으로써 성경의 圖를 지으니 오는 者는 상세히 할지어다.( 이 실허(實虛)의 이환(二環)이 주역의 흑백 두 점으로 더불어 모양은 같으나 가르침이 다르니라.) * 궤(櫃)字 에서 왼쪽의 나무 木을 뗀 글자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일암은 천부경과 한글이 동일한 솜씨(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한글과 천부경은 그 창출원이 동일한 곳이지 서로 따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유학 출신으로 30대에 천부경을 얻어보고 일생을 천부경(篆碑文)연구에 전력을 다하고는 그 전비문을 도해해 보니까 그것이 한글이었다는 것으로 확언하고 있다.


 4. 檀君조선의 '가림다(加臨多) 文'


 태백일사에 보면 "단군 시대에 신지의 篆문이 있었다"고 하고 부여의 王文이 처음으로 전문이 번거로와 생략하여 예(隸)서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신시(神市: 桓雄)시대에는 一二三*****(표기 불능,,쩝,,)와 같은 산목(算木)이 있었다고 하였다. 치우(蚩尤)시대에는 투전(鬪佃)이 있었고 부여시대에는 서산(書算)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단군 3세 가륵(嘉勒) 2년에는 三郞 을보륵에(乙普勒)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지었는데 '가림다'(加臨多: 選地文, 즉 가려진 땅, 곧 하늘에 선택받은 글)인 그 글은, "단군가륵이년(檀君嘉勒二年)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 정음삼십팔자(正音三十八字) 시위가림다(是爲加臨多) 기문왈(其文曰),,,, <자료 5>"와 같이 되어있다.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가림다 문과 일본 대마도 구주 지방을 그 주 출처로하는 아히루 문자와 세종때 나온 훈민정음의 三者는 삼각적으로 너무나도 일치하고 있다.(졸저 한민족의 뿌리사상 쪽 58, 59 도표 太白逸史 참조) 고려 광종때에 장유(張儒)는 접반사(接伴使)로서 난을 피하여 오월(吳越)에 이르러 동국 한송정곡(寒松亭曲)이 거문고 밑에 새겨져 있어 월(越)씨가 이를 알지 못하여 장유를 만나 절하고 물었다. 장유는 즉석에서 한시(漢詩)로 풀어 이르되, "月白寒松夜 波晏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鳴(달밝은 한송정 밤, 물맑은 경포대 가을, 슬피 울며 오가는, 갈매기 소식뿐)"라고 하였으니 "저 거문고 밑바닥에 새겼던 글은 가림다였다"고 하였다.(태택일사 - 94) 그렇다면 고려 초의 광종때까지도 가림다문이 산재하였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가림다문의 창제설은 <동국역대>, <단기고사>, <단군세기> 등에도 명기되어 있고, 또 <한단고기>의 <단군세기>나 <태백일사>에는 그 가림다문의 字形이 그대로 실려있다. 동국역대(東國歷代)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삼세단제(三世檀帝) 가륵원년(嘉勒元年) 기해춘이월(己亥 春二月) 납언박사(納言博士) 강보륵(姜普勒 - 일명 乙普勒)이 찬(撰) 국문정음(國文正音)하여 명지음(名之音)하여 언문(言文)이라 하다.라고 하였고, 또 발해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檀奇古史:729년 再編)>에는, 제삼세단제가륵(第三世檀帝嘉勒) 이년춘(二年春) 博士 乙普勒을 命하여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精선*) -백악마한촌(白岳馬韓村)에 고비문(古碑文)이 있다.- * '지을 선'字입니다. 選에서 부수로 책받침 대신에 言이 들어갑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 檀君世紀:1297-1364 고려 공민왕 때 >에는, 제삼세단군 가륵(第三世檀君嘉勒),,,,, 庚子二年 시속상불 일(時俗尙不一) 방언상수(方言相殊) 수유상형(雖有象形) 표의지진서(表意之眞書) 십가지읍어(十家之邑語) 다불통(多不通) 百里之國 자난상해(字難相解) 於是 명삼랑지보륵(命三郞之普勒) 찬정음삼십팔자(撰正音三十八字) 是爲  가림토(加臨土) 其文曰 辛丑三年 명신지고계(命神誌高契) 편수배달류기(編修倍達 留記) <자료 6> * 쩝,, 여기서 <자료 6>을 보셔야하는데,, 라고 되어있다. 보다시피 이상의 가림다문 38자 속에는 훈민정음 28자가 거의 다 원형 그대로 들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다면 가림다문 38자에서 10자를 제거한 것이 곧 28자인 훈민정음이다.또 단군시대에는 신전문(神篆文)이 있었다 하였다.


 5. 인도(印度)의 '구라자트'文


 인도의 남방 '구라자트'주에서 쓰고 있는 문자가 우리의 한글과 일치하는 점이다.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같다는 것이다. ",,, 구라자트 주의 간판에서 신기하게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과 너무나 비슷하여 한글식대로 읽어나갈 수가 있었다. 독일의 어느 학자가 옛날에 한글이 남인도의 드라비디안語와 닮은데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다는데, 드라비디안語가 아니라 구자라트어를 잘못 알고 쓴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구자라트어에서 한글의 모양과 많이 닮은 것은 자음 가운데서 ㄱㄴㄷㄹㅁㅂㅅㅇ 등이고, 모음은 ㅏㅑㅓㅕㅗㅛㅜㅠㅢ 의 열 자가 똑같았다. 종자음(終子音), 즉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다. 우리들은 구자라트에 있는 동안 소리를 내어 간판을 한글식으로 읽으며 다녔다.(新 왕오천축국전 쪽 200-201)라고 되어 있는데, 구자라트 주는 인도 대륙에서도 서쪽 해변에 가까운 지역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와 인접한 곳에서 원시 한글과 같은 소위 아히루 문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상과 같이 인도라면 우리와는 지역상으로 상당히 격리되어 있어 구자라트어의 형성이란 그 향방을 종잡기 매우 어렵다고 보여진다. 다만 이 구자라트 지방은 일찌기(지금부터 1200년 전) 신라승 혜초가 오천축(五千竺)을 고행하면서 남천축에서 서천축으로 가는 도중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서 우리와의 문화사상에 연고라면 연고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 참조)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고전(古篆)인 천부경을 최치원이 알고 번역을 한 것이라면 고운보다 약 100년 전의 인물이 혜초였다. 같은 신라인으로서 후대인인 고운이 고전을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인 혜초가 고전을 응용하지 아니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 소장문 중에서 고대 한글(아히루문자)이 적힌 한점에 '和銅 元年'(일본 신대문자 쪽 218-219)이라 하였다.(安萬侶가 古事記를 지은 것은 和銅 5년임). 이 '화동원년'은 서기 708년에 해당하며, 혜초는 704년생이다. 말하자면 '이세신궁'에 있는 한글 문헌이 쓰여진 연대와 한글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 혜초가 머문 연대가 거의 동시대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구자라트 어와 가림다 문과의 상관성을 암시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또 고구려 성왕(동명 성왕?)이 요동성에서 파낸 명(銘) 위에 범서(梵書:인도 문자)가 있었는데, 시신(侍臣)들이 그 글을 알아 보았다고 하였다. "석고려성왕안행국계차("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 우굴득명 (又掘得銘) 상유범서(上有梵書). 시신식지(侍臣識之),,,, 우시한역(于時漢亦) 미견패엽(未見貝葉). 하득해외배신기능식 범서호(何得海外陪臣己能識梵書乎).,,,," (주 :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이때는 불교가, 고구려는 고사하고 漢나라에도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그런데 왕을 모신 신하들이 이 범서라는 문자를 알아 해득했다고 한다. 또 일본의 북리박사는 '일본 고대 언어 조직考의 彦文과 실?(悉?)'의 節에서 '고전즉범자(古篆則梵字)'(일본 신대문자 쪽 367)라는 말을 쓰고 있다. 어쨌든 한글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보아 '가림다문,고전(古篆), 범서, 구자라트 문자, 아히루 문자, 훈민정음' 등은 서로 동일계라는 상관성을 짙게 풍겨주고 있다고 보아야한다는 데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맺 음 말


 한자 문화의 강한 정치 세력의 팽창은 원시한글(가림다 문)을 얻어보기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대륙 방향에서의 밀어 닥친 공격적 戰禍가 적은 소위 문화 유산의 안전지대였던 일본 지역에서는 그 보존이 가능하였다. 30년의 연구 끝에 고대화자총감(古代和字總監)을 저술한 吾鄕은, "九鬼家는 천아옥근명이래(天兒屋根命以來), 대중신신기백(大中臣神祇伯)의 직계(直系)로서 3천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다. 중단함이 없이 門外不出의 고사비록(古史秘錄)을 전래하여 왔다. ,,,漢字渡來以降, 대륙 문화의 격렬한 공략 중에서 古代和字는 九鬼家의 神道系家門의 비호로 地下에 잠겨 주옥같이 비장(秘藏)되어 온 것이다." (일본 신대문자 중에서)라고 말하고 있다. 아히루 문자를 보존하였던 '阿比留家'는 대마도에 있고, 아히루 문자는 유독 대마도와 구주지방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그런데, '三韓秘記'를 인용한 '태백일사'의 <고구려본기>에 보면, 自古 仇州 對島 乃三韓分治也 非倭人世居地.라고 하였다. 즉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三韓 땅이니 왜인들이 살던 곳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대마도와 구주가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조선의 통치 강역이었던 대마도와 구주에서 고조선의 '가림다'문이 발굴되는 것은 하등에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아히루 문자는 고대 한글인 가림다 문과 같음.) 가령 가림다 38자 중에서의 '*(ㅎ)'이란 글자는 아히루 문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고 (신대문자 쪽 237), 그 외에는 가림다문과 아히루 문자, 훈민정음 등 3자의 글자 모습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위의 *는 ㄷ자를 왼쪽으로 90도 돌리고 그 위에 ㅅ자와 비슷한 글자를올려 놓은 모습임.)


 따라서 아히루 문자는 훈민정음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림다문의 흔적이 아히루 문자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일본학자도 수긍함. 吾鄕) 그렇다고 하여 훈민정음이 아히루 문자의 영향에 창제된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직계로서의 고대 한글인 가림다문을 본떠 이루어 졌다고 보아진다.(졸저, 한민조의 뿌리사상 쪽 57 참조.) 지금까지 훈민정음 창제에 관하여 많은 추측설, 모방설, 추증설 등이 있었으나 고대한글인 가림다 문의 38자에서 10자를 줄여 훈민정음 28자가 되었고 다시 4자를 줄여 지금 쓰여지고 있는 한글 24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 단군 3세 가륵임금때에 만들어진 가림다문을 한글의 기원으로 보지 않으면, 일본에서의 아히루 문자를 모방하여 (소위 親子 관계설) 훈민정음이 되었다는 설을 배격할 통로가 없는 것이다.  최고운(857 - ?)이 古篆碑(원시글)를 한자로 번역하였고, 그보다 앞서 혜초(704 - 787)가 머물렀다는 인도의 구자라트 주에서 지금도 전하여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모습과 같은 시대, 즉 일본의 和銅(708-714) 원년에 써진 '패전아체(稗田阿體)'가 서명한 '이세신궁'에 소장된 한글이 가림다 문 38자가 그대로 제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면, 역시 동 시대인 일본의 후제호천황시대(後醍호天皇時代:1318-1339)를 그 하한선으로 하는 이세신궁의 신대문자(99점, 신궁문고 것만) 즉 한글(아히루문자, 즉 가림다문)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의 명확한 물증들이 언제까지나 훈민정음에 관한 '세종 창제설'에 집착하여 머뭇거리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더욱이나 세종실록 등에도 흔민정음은 옛글(古)을 본때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말이다!<광장 1984, 1월호>

 

 

 


잃어버린 민족의 뿌리와 역사를 찾아,, 빛고을에서 '한얼'


한글의 뿌리는 "가림토" 문자이다


미국의 시카코大 언어학과 매콜리 교수는 20년 동안 해마다 10월 9일이면, 학생들과 교수들을 불러모아 파티를 열어왔다고 합니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가 만들어진 날인 한글날은 마땅히 "인류가 축하해야 할 우리들의 공휴일"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지요. 유엔 산하기구인 유네스코에서는 문맹퇴치에 공헌한 국가나 단체에 주는 상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King Se-Jong Prize" 즉 세종대왕상입니다. 그 상의 이름도 이색적이지만 그 상의 첫 번째 수상국이 바로 한국이었는데, 그 이유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세종대왕께서 처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문맹율이 낮은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 언어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또한 언제 누가 어떤 의도로 그 문자를 만들었는지가 분명하고 또 유일한, 그리고 아주 과학적인 글이라고 언어학자들은 감탄을 합니다. "대지"의 저자인 펄벅 여사 같은 이는 "한글을 발명한 세종대왕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라고 찬탄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한글창제 당시의 기록들을 잘 살펴보면 조금 이상한 구절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세종 임금의 재위시 기록에 나타나는 이 구절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前)조선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23년에 발표한 글)

 (2)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실 록25년;훈민정음창제당시의첫발표문)

 (3)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여덟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 시면서 이름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를 본따고....... (정인 지 (해례서문) : 훈민정음 제작원리 등을 설명한 책으로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

 (4)....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이번에는 다음의 자료사진을 살펴볼까요? (자료사진은 "자료실"안의 "사진방"에 들어가면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월27일부터)

 사진1. 쓰시마섬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 기록 사진

 2. 일본 신대문자 비석 사진

 3. 신대문자가 일본에서 발견되었을 때의 한국신문의 사진과 기사 사진

 4. 일본의 청동거울에 새겨진 신대문자

 사진1은 지금의 일본 쓰시마섬 이세신궁이란 곳에 보관중인 유물인데 일본글자가 아닌 한글임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문자가 만들어지기 전인 신(神)들의 시대에 쓰여지던 문자라 해서 신대(神代)문자, 또는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 전해지는 글이라 해서 아히루 문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유물의 제작연도가 서기 708년입니다. 세종께서 한글을 창제하기 735년 전에 이미 일본땅에 한글이 쓰이고 있었고, 일본사람들이 신들이 쓰던 문자라고 하는 글이 바로 우리 한글이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진2는 일본땅 큐슈의 신사(神社)에서 발견된 비석이며, 사진3은 그러한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우리 나라의 신문기록입니다. 또 사진4는 일본천황 계승식 때 사용되는 신기삼종(神機三種: 일본의 개국신으로부터 천황의 증표로 받았다는 보물) 중 하나인 거울에 새겨진 신대문자인데, 역시 한글입니다. 그렇다면 일본문자에서 한글이 나왔다는 말일까요?


 실제로 바로 위에서 본 일본땅에 있는 유물들을 증거로 일본의 국학자들(오찌아이 나오노리, 五鄕淸彦 등)은 "한글이 일본의 신대문자를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한단고기라는 책이 세상에 나오자, 바로 그런 주장을 펴던 五鄕淸彦 같은 학자도 드디어는 "일본신대 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한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양심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는 계속해서 "이 고대문자는 불과 38자 뿐이지만 귀중한 신대문자 자료이다. 나의 연구에 의하면, 이 원시한글이 만들어진 연대는, 신시개천 1715년으로 기원전 2181년에 해당한다. 이것은 실로 아득한 초고대인 것이다. 진실로 본서는(한단고기를 말함) 거듭된 분서에 의해 잃어버린 한민족과 일본인의 뿌리를 가리키는 아시아의 지극한 보물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한단고기 -단군세기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사진5 가림토 문자 38자 사진

 사진6 훈민정음 28자

 사진5는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에 만들어진 가림토 문자이며,

 사진6은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훈민정음입니다. 가림토 문자는 민족의 성군이라 추앙 받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재창제하기 벌써 3627년 전에 만들어진 한글의 원형이지요. 그러한 주장의 첫 번째 근거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앞서 살펴본 세종 당시의 기록 여기저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역사왜곡 경향은 지금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는 하나의 상식인 "한반도로부터의 고대 문화전수"를 부인해보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일본사람 그것도 언어학자가 신대문자의 뿌리가 바로 단군조선 시대의 원시한글인 가림토 문자라고 "눈물을 머금으며"(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러나 학자적 양심이 있었기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겝니다) 그 연구결과를 발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 96년 10월 9일 한글날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한다면 "요즘 학계에서는 한글을 세종 혼자서 친제했는 지, 신하들과 공동 창작했는 지 논쟁이 한창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사학계에서는 한단고기를 위서(爲書 : 믿을 수 없는 조작된 책이라는 뜻)라며 옆으로 밀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한단고기가 위서인지 아닌지를 굳이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기고문의 포인트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 세종께서(혹은 신하들과)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창제했다."라고 굳게 믿으시는 분들은 세종께서 한글을 창제하기 735년전에 쓰여진 고대일본의 한글-신대문자는 그렇다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밝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종실록을 비롯한 많은 기록상의 "전조선시대에 있었던 옛문자를 모방해서 만들었다" 는 대목들을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신대문자의 뿌리가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가 아니라면, 한글의 원조는 일본문자인 셈이 됩니다. 한국사람이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문자를 만들 정도로 실재했던 시대였고, 훈민정음의 원형이 가림토 문자라는 것, 그리고 한단고기의 정확성(가림토 문자에 관한 한)을 인정하기 싫어서, 우리한글의 뿌리를 엉뚱하게 일본문자로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또한 가림토문자의 흔적은 일본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중국문명이라고 알려져 있는 은나라의 은허 유적지에서 발견된 소의 어깨뼈에는 한글이 선명하게 쓰여 있습니다. (자료사진 7) 은나라는 물론 세종 창제 3천년전인 기원전 1500년-1100년 사이에 있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한글의 뿌리가 중국어일까요?


 은나라는 바로 단군조선의 중기 무렵에 고대 한국인인 동이족(東夷族)이 세우고 다스렸던 나라입니다. "중국의 상상고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 라는 것이 現 북경대 고고학과 엄문명 주임교수의 결론이지요.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가 아니라면 이번에도 "한글창제 3천년 전 은나라에 이미 있었던 한글"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자료사진 7)를 살펴 볼까요?


 지금도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이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아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도 10자나 같다는(ㄴㄷㅌㅇㅁㅈㅂ, ㅗㅔㅣ등) 연구결과가 이미 나와있습니다. (송호수 박사-"한글은 세종대왕 이전에도 있었다")


 또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알파벳은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꺼커거...,쪄쳐져...,떠터더...,뻐퍼버...,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ㅎ"으로 끝납니다. 구자라트주의 시내에 있는 간판들은 한국인이면 지금도 60-70%는 읽을 수 있다니 신기하지 않은가요?

 (96년 3월 8일 중앙일보 기획 시리즈-"아시아 10만리"-19편)


 영어와의 관계-한편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영어의 알파벳 자모도 여러 개 보입니다. 가림토 문자는 4177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반해, 알파벳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3000년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혹 알파벳도 가림토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요? 젊은(마음이) 세대들의 연구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이렇듯 일본. 중국뿐 아니라 인도, 몽고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나라들에는 지금도 풍부하게 가림토 문자의 흔적은 남아있답니다. (자료사진7.참조- 고대 문자 비교표-가림토 문자와 훈민정음, 일본, 인도, 몽고, 중국 )


 물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서기 1443년) 이전인 고대로부터 사용되어오던 문자이지요. 단군조선 시대와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이 모든 미스테리가 풀리며, 우리 역사 속 깊이 숨겨져 있던 신비의 퍼즐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우리의 세종께서는 단군시대 때부터 이미 사용해 오던 언문을 새로이 틀을 짜고, 실용성 있게 문자체계를 확립해 놓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종대왕은 한글을 처음으로 창제한 것이 아니라, 가림토 문자를 참고로 한글을 쓰기 편하게 재창조하였고, 지금까지 널리 쓰이게 하셨지요. (사실 그것만 해도 너무나 큰 치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종대왕은 지금으로부터 5000여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의 원형인 가림토 문자가 있었으며, 훈민정음은 가림토 문자를 활용하여 재창제 되었다는 진실을 왜 당당하게 밝히지 못 했을까요?


 첫째는 역성혁명과 골육상쟁을 거치며 건국된 이씨왕조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의 의식 수준의 발달은 몇 가지의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수준에서 효(孝)-충(忠)-도(道)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해간다고 하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가 속해있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지극한 효자였으며, 또 어질고 현명한 임금이었으므로 (孝)에서 (忠)의 의식수준까지는 도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忠은 된 "이씨왕조에 제한된 충"이었습니다. 만약 한민족 전체를 생각하는 진충(眞忠)이었다면,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단군조선과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밝혔겠지요


 둘째는 세종에 대한 신하들의 과잉충성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던 그런 신하들은 있게 마련이지요. 덕분에 세종임금은 그렇게 과학적이고 우수한 한글까지 창제한 유사 이래의 성군(聖君)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셋째, 중국 눈치보기를 들 수 있습니다.

 조선조 초기는 이미 중국(명나라)의 눈치를 보던 정신적 속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이름도 명나라 황제의 낙점으로 결정되었고, 새 임금이 등극하거나 세자의 임명 등도 명나라에 보고를 했어야 했지요. ("고조선秘史", "대변설", "도징기", "삼성밀기", "옥추경", "조대기", "지공기", "천부경" "통천록", "표훈천사"등 한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기록하고있는 책들은 이씨조선의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마음대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공자를 사모하던 유학자들이 우글거리던 이조시대에, 중국에게 문화.문명을 전수해주었던 단군조선의 역사를 전달하기는 아마 몹시 힘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글 재창제 이후 세종대왕 재위시 전국에 집서령이 내려져 수거된 책들이 불태워졌고, 그 과정에서 가림토문자와 관련된 책들이 소멸되어 훈민정음의 뿌리는 알 수 없게 되었지요.)


 가림토 문자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재창제하기 3600여년 전, 지금부터 4178년 전인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에 삼랑 을보륵에 의해 만들어진 한글의 원형문자입니다.

 *** (참고서적-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정연종 )***

 

 

 


吏讀·鄕札 表記法의 原理와 實除


南 豊 鉉 / 檀國大 敎授, 國語學

Ⅰ. 吏讀와 鄕札의 개념
    漢字를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던 表記法을 借字 表記法이라 한다. 이 表記 資料는 三國 時代부터 朝鮮朝 末期까지의 것이 현재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면서 표기법상 여러 변천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사용 범위를 중심으로 분류하면 吏讀·鄕札·口訣·固有 名詞 表記(語彙 表記)로 나뉜다.
    吏讀란 말은 廣意의 吏讀와 狹意의 吏讀의 두 개념으로 쓰인다. 廣意의 吏讀는 狹意의 吏讀는 물론, 鄕札, 口訣, 固有 名詞 表記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니 借字 表記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이다. 吏讀가 이러한 개념으로 쓰인 것은 이 명칭이 생겨난 초기부터였다. 李承休의 帝王韻記에서 '薛聰이 吏書를 지었다.'고 한 것이나, 訓民正音 序文에서 '薛聰이 吏讀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 것은 吏讀를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三國史記에서는 '薛聰이 우리말로 九經을 읽었다'고 하였고 三國遺事에서도 '薛聰이 우리말로 中國과 우리의 民間에서 사용하는 物名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六經文學을 訓解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薛聰이 그의 學問을 借字 表記로 기록함으로써 그 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던 것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이두와 차자 표기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시대 이후는 漢文이 교양인들이 쓰는 文語임에 대하여 吏讀는 吏胥을 중심으로 하여 민간에서 쓰이는 文語였으므로 이와 같이 쓰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吏讀을 이와 같이 借字 表記의 대명사와 같이 사용하는 것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협의의 吏讀란 '吏讀文에 쓰인 우리말'을 가리킨다. 吏讀文이란 實用的인 文章으로서 散文이 중심이 된다. 시대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漢文과 우리말이 혼용되는 文體이다. 行政 文書에 주로 쓰였지만 민간에서도 書簡이나 造成記, 發願文 등에 널리 쓰인 實用文이다. 이는 三國 時代부터 近代까지 사용되었고 保守性이 강하여 近代의 이두이면서도 中世나 古代의 國語을 다분히 유지하고 있다. 이 글에서 吏讀란 이 협의의 개념으로 쓴 것이다.
    鄕札이란 명칭은 옛 기록으로서는 均如傳에 오직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崔行歸가 均如의 普賢十願歌를 漢譯하기 위하여 편하면서 漢文(唐文)에 대하여 普賢十願歌와 같은 우리말의 문장을 鄕札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용어도 본래는 吏讀과 같이 借字 表記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는 鄕歌와 같이 우리말을 全面的으로 表記한 借字 表記를 가리키는 데 쓰이고 있다. 우리말을 全面的으로 表記한 借字 表記 資料는 향가밖에 알려진 것이 없으므로 현재 鄕歌의 표기법이 곧 향찰 표기법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吏讀와 鄕札의 이러한 구별은 표기된 자료를 세부적으로 검토하면 그 한계를 명쾌하게 구별지을 만한 특징들을 지적하기 힘들다. 특히 차자 표기가 우리말의 유일한 표기 수단이었고 이 표기가 후대보다는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고려 시대나 신라 시대로 올라가면 그 한계를 긋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다만 散文 表記 吏讀는 우리말의 반영보다는 전달 내용이 중요하므로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등의 표기가 소홀해질 수 있지만, 詩歌의 표기는 詩로서의 形式이나 韻律도 중요하므로 그 표기가 보다 충실해지지 않을 수 가 없었을 것이다. 또 吏讀文은 文書로서의 자리가 굳혀지고 그 사용 범위가 한정되므로 일정한 套式이 있고 비교적 한정된 套語가 사용되지만, 鄕歌는 詩情의 發露에서 지어지는 것이므로 이러한 제약이 없이 詩作 당시의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 先人들의 文字 生活을 한문과 국어 문장으로 兩分하면 순수 국어 문장 표기를 지향하는 것이 鄕札이고 이보다는 漢文的인 성격을 지향하거나 그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띠는 것이 吏讀文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다. 그 밖에도 吏讀는 三國 時代부터 近代까지 사용되었지만, 鄕札은 統一 新羅 時代에 완성되어 고려 시대까지만 이어졌던 것으로 믿어지므로 이것도 한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의 鄕札 表記는 普賢十願歌와 悼二將歌뿐이지만 13세기 중엽의 鄕藥救急方의 鄕名 表記에도 이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으므로 자료상으로만 보더라도 이 시대까지는 鄕札 表記法이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口訣은 漢文의 原典에 吐를 단다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자료와 쉽게 구별이 된다. 이는 漢文을 정확하고 쉽게 해득하기 위하여 발달한 것인데 크게 釋讀 口訣과 音讀 口訣로 나뉜다. 釋讀 口訣은 漢文을 우리말로 해석하여 읽는 방법을 토로써 표시한 것이다. 현존 자료는 12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지는 舊譯仁王經 釋讀 口訣이 最古의 것이다. 이러한 구결은 늦어도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薛聰이 訓解六經하였다는 것도 바로 이런 釋讀口訣이었을 것이다. 이 口訣이 吏讀 表記法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鄕札 表記法의 母胎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니 借字 表記法을 論함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音讀 口訣은 漢文을 音讀하면서 그 句讀處에 우리말의 助詞나 語尾를 넣어서 읽는 것이다. 漢文이 널리 보급되고 그 學習 方法이 발달되면서 발달한 것이니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자료상으로는 15세기 이후의 것이 남아 있으나 鄭夢周의 詩(經) 口訣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口訣은 吏讀의 漢文化 傾向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固有 名詞 表記는 人名, 地名, 國名 등의 固有 名詞 表記가 중심이 되어 왔으나, 官名이나 物名 등의 普通 名詞도 포함되므로 語彙 表記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한 것이다. 이는 우리말의 文章에는 물론 漢文 文脈에도 사용되었으므로 文章의 借字 表記와 구별한 필요가 있다. 漢文이 이 땅에 들어와 우리 先人들이 우리의 것을 漢文으로 표현할 때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을 것이니 借字 表記法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 표기는 表音字만으로 표기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 表音字들은 後代까지 이어져서 文章 表記의 발전에도 공헌을 한다.
    이와 같이 借字 表記 資料는 네 가지로 나뉘지만, 表記法上의 근본 원리는 같으므로 하나로 묶어 借字 表記法이라 한다. 먼저 借字 表記法의 原理를 밝힌 다음 吏讀와 鄕札 表記法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Ⅱ. 借字 表記法의 文字 體系
    表記法은 文字 體系와 그 運用 法則으로 크게 나뉜다. 訓民正音에서 자음과 모음의 문자 체계를 보인 다음 그 운용법을 규정한 것은 이러한 표기법의 원리를 가장 간명하게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文字 體系는 한 언어를 모두 기록할 수 있으면서도 간결한 것일수록 우수한 것이다. 한글과 같은 音素 文字가 높이 평가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借字 表記法의 文字 體系는 漢字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이므로 한자의 문자 체계에 의지하게 된다. 한자의 문자 체계가 복잡한 것에 비례하여 차자 표기법의 문자 체계도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한자를 빌어오는 과정에서 차자 표기법 나름의 문자 체계가 형성되어 왔다.
    이 文字 體系의 原理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하나는 한문의 學習 方法에서 얻어진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한자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원리이다.
    漢文의 學習은 原文을 音讀한 다음 우리말로 새기는 두 과정을 밟고 있다. 이러한 방법이 언제부터 발생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밝힐 수가 없지만 漢文이 이 땅에 들어온 초기부터였을 것이다. 외국어의 학습, 특히 文語의 학습은 이 두 과정을 취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三國 時代 借字 表記 資料들을 보면 당시 이 방법으로 한문을 학습하였던 것으로 믿어지는 증거가 있다. 한문을 새기는 방법이 체계화되면 漢字에 제한된 범위에서의 訓을 부여하게 된다. '天'에 대하여 '하', '地'에 대하여 ''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한자를 音으로 읽는 방법과 訓으로 읽는 방법이 성립되어 이 音과 訓이 차자 표기법의 문자 체계를 이루는 첫 원리가 된다.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방법은 表意 文字인 漢字의 뜻을 살려서 이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뜻을 버리고 표음자로만 이용하느냐의 둘로 나뉜다. 前者를 '讀'의 原理라 하고 後者를 '假'의 原理라고 한다. '讀'이란 漢字가 본래 表意 文字이므로 이를 읽으면 자연 그 뜻도 살려서 읽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고 '假'란 한자가 표의 문자이지만,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 빌어서 쓴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이 音과 訓, 讀과 假의 原理가 적용되어 漢字로부터 借字 表記法의 文字 體系가 나오는 과정을 도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  音讀字
   
 
 
     
漢字    →  音假字
   →  訓讀字
     
   
   
   →  訓假字

이 문자 체계를 좀더 부연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音讀字:漢字를 音으로 읽으면서 그 表意性을 살려서 이용하는 차자.
音假字:漢字를 音으로 읽되 그 表意性은 버리고 表音性만을 이용하는 차자.
訓讀字:漢字를 訓으로 읽으면서 그 表意性을 살려서 이용하는 차자.
訓假字:漢字를 訓으로 읽되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을 이용하는 차자.

이 가운데 音讀字와 訓讀字를 묶어서 讀字(表意字)라고 할 수 있고, 音假字와 訓假字를 묶어서 假字(表音字)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音과 訓의 구별이 필요 없거나 그 구별을 하기 어려울 때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音讀字는 漢文에서의 漢字의 용법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말의 표기에 사용된 것이라고 보면 이는 우리말에 들어온 中國語 借用語의 表記이다.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는 글에서 한자로 표기된 漢字語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 漢字語는 중국어에서 借用한 것도 있지만, 국어 내에서 조어된 것도 있음은 古今이 같다. 오히려 借字 表記 文體에서는 이 경향에 의한 조어가 현대어보다는 더 생산적이었다. 때로는 借字 表記 文字에 漢文句가 대량으로 사용되어 漢文의 語順만을 바꾸었거나 한문에 吐를 단 듯한 文章이 사용되어 한문과 차자 표기 문장과의 경계가 애매해지는 수가 있다. 이 경우 이를 國語 文章으로 보느냐 漢文 文章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어느 쪽의 입장에 서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국어 문장으로 보면 이 경우의 漢字는 모두 音讀字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音讀字는 漢文에서 무제한으로 빌어올 수 있는 것이 되므로 漢字와 獨立하여 音讀字의 文字 體系는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말에 사용되는 漢字語는 漢文의 용어 그대로가 아닌 제한된 범위에서의 사용이므로 音讀字의 범위가 한문에서 사용되는 한자의 범위보다는 적다고 하겠다.
    訓讀字는 漢文의 單語에 해당하는 漢字에 국어의 새김이 대응하는 범위에서 사용되는 借字이다. 두 言語 間의 對應은 日常用語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만 中國語의 특수한 개념을 나타내는 漢字는 국어에는 대응하는 訓(새김)이 없으므로 이러한 漢字는 訓讀字로 쓰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訓讀字의 수는 音讀字의 수보다는 제한된다고 하겠다. 訓讀字 가운데는 한 글자가 여러 訓으로 읽힐 수도 있고, 여러 글자가 같은 訓으로 읽히는 것도 있다.
    音假字란 漢字의 形成 原理인 六書 가운데 假借의 原理를 빌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中國語로는 번역할 수 없는 외래어를 중국인들이 한자의 音을 이용하여 표기한 것이 假借의 한 방법인데 固有 名詞는 이 방법에 의하여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의 音假字도 초기에는 漢譯할 수 없는 우리의 固有 名詞를 표기하다가 보편화되어 일반 단어는 물론 조사와 어미를 표기하는 데에도 이용된 것이다.
    音假字의 수는 시대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느 정도 한정된 수의 글자가 사용된다. 차자 표기법의 발생 초기인 固有 名詞의 표기 단계에선 한문의 假借字에 준해서 사용되었을 것이므로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자 표기법이 발달하여 문장의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는 단계에 이르면 제한된 수로 한정되는 音假字의 문자 체계가 이루어진다. 後期 中世 國語 時代에 口訣의 吐를 표기에 사용된 借字는 110字 내외인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이 가운데는 訓假字도 이지만 音假字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口訣의 吐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는 音假字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고 이것이 각 시대의 吏讀이나 鄕札의 표기에 응용되었고 영향을 준 것으로 보면 吏讀와 鄕札에 사용된 音假字의 수도 이러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後期 中世 國語의 口訣에 쓰인 音假字는 音讀 口訣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된 것이지만, 統一 新羅 時代나 高麗 時代의 吏讀나 鄕札은 釋讀 口訣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믿어지므로 音假字의 수가 이보다는 증가할 것이다. 鄕藥救急方의 鄕名 表記에 사용된 音假字의 수는 단어의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111字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한된 수의 音假字가 국어의 음절 체계에 준하여 어느 정도의 체계를 이루고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音假字는 單音節語를 표기하는 한자에서 빌어온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音節 文字이다. 다만 우리말의 音節 末 子音을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에 '只(ㄱ) 隱(ㄴ), 乙(ㄹ), 音(ㅁ), 邑(ㅂ), 叱(ㅅ)'이 있어, 이것이 音節 文字性을 벗어나는 것이다. 音假字에는 같은 音을 표기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글자가 사용되는 예가 흔히 있다. 鄕藥救急方을 보면 '古, 高, 苦'가 '고'音의 표기에, '包, 苞, 甫, 鮑'가 '보'音의 표기에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 같은 글자가 前代의 音과 當代의 音을 나타내기도 한다.

'彌'는 吏讀와 鄕札에서는 '며'로 읽힌다. 이는 古代의 漢字音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鄕藥救急方에선 '미'音의 表記로 사용되어 당대의 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訓假字는 訓讀字에서 발달한 것이다. '以'字는 漢文의 介詞로서 국어의 造格 助詞 '-로'를 표기하는 데 주로 쓰인다. 이는 漢文의 원뜻에 따라 쓰인 것이므로 訓讀字이다. 이것이 '幷以/아오로'에도 쓰였는데 이는 '아올+오'로 분석되는 것이므로 '以'의 원뜻과는 무관한 것이다. 訓讀字가 訓假字로 바뀐 것이다. 訓假字의 用例는 語彙 表記(固有 名詞 表記)에서는 매우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늦어도 6세기 중엽 이전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藯州川前里書石의 追銘에 新羅의 官名인 '波珍干支'가 나타난다. '波珍'은 '바돌(海)'로 읽히는 것으로 '珍'이 '돌'로 읽히는 것은 訓에 의한 것이다. 그 表意性이 반영되지 않았으니 訓假字이다. 이와 같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訓假字가 쓰이긴 했지만 그 수는 音假字에 비하면 매우 적다. 鄕藥救急方에서는 音假字가 111字로 쓰였는데 訓假字는 21字가 쓰여 그 5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있다.
    訓假字도 音假字와 같이 單音節을 나타내는 것이 원칙이다. 그 訓이 2音節인 경우에도 訓假字로 쓰이면 單音節을 나타낸다. '靑'의 訓은 '프르-'인데 訓假字로서는 單音節 '플'을 표기하는데 쓰인다. '加'의 訓도 '더으-'이지만 訓假字로서는 '더'音의 표기에 쓰인다. 訓假字는 그 수가 적으므로 국어의 音節數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따라서 訓假字만으로 표기되는 독자적인 표기법은 성립될 수가 없다. 音假字와 함께 假字로서 이루어지는 문자 체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표기자의 입장에서 보면 音假字와 訓假字의 구별은 엄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별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글자가 音假字와 訓假字로 쓰이는 것도 있다. 鄕藥救急方에선 '加'가 音假字로선 '가', 訓假字로선 '더'로 읽힌다. '耳'도 音假字로선 '', 訓假字로선 '귀'로 읽히고 있다. 이 假字들은 起源的으로는 固有 名詞 表記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初期의 固有 名詞 表記는 音假字만으로 표기되었을 것이지만, 後代로 오면서 訓假字도 쓰이게 된 것이다. 三國 時代 新羅의 初期의 資料에서 訓假字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固有 名詞 表記가 상당히 발달된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借字 表記法의 네 가지 文字 體系를 설명하였지만 表意 文字性과 表音 文字性이 혼합된 문자 체계에선 이 둘의 한계가 항상 분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둘의 중간 단계에 속하는 借字가 있을 수 있으니 讀字이면서 그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擬似 讀字가 있을 수 있고 假字이면서 그 表音字的 性格에 어느 정도의 表意性을 부여하여 사용하는 擬似 假字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2차적으로 擬音讀字, 擬訓讀字, 擬音假字, 擬訓假字가 있게 된다.
    '靑黛'는 여인의 눈썹을 그리는 染料인데, 藥草인 藍(쪽풀)을 재료로 만든다. 그런데 鄕藥救急方에 보면 이 제품의 이름이 提喩에 의하여 그 재료인 藍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言衆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俗語가 되었다. 이 俗語를 鄕藥救急方에선 '靑台'로 표기하였다.'靑'은 '靑黛'의 '靑'에서 온 것이니 이는 분명히 音讀字이다. 그러나 이 '靑'은 '黛'와 결합하면 그 뜻이 분명하지만 '台'와 결합하면 그 본래의 뜻은 약화되어 假字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靑'은 擬音 讀字라 할 수 있는 것이다.
    普賢十願歌의 禮敬諸佛歌에 쓰인 '心未筆留 慕呂白乎'의 '慕/그리-'는 訓讀字이다. 그러나 그 漢譯歌를 보면 '書/그리-'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語原으로 보면 '그리-(慕)'가 '書(그리-)'의 뜻에서 온 것으로도 생각되지만, 이 文脈에서 '그리-'는 '書'의 뜻이므로 '慕'字의 讀字性은 그만큼 약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慕'는 擬訓讀字이다.
    鄕藥救急方에서 早莢의 鄕名은 '注也邑(주엽)'으로 표기되었다. 이는 早莢의 차용어이므로 '注也邑'은 이를 순수한 音假字만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것이 같은 책에서 '鼠厭木(쥐염나모)'로도 표기된다. '鼠'는 訓假字로서 '쥐'를 '厭'은 音假字로서 '염'을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鼠'와 '厭'자를 사용한 것은 이 나무의 특성을 은연중 암시하기 위하여 선택된 借字이다.

'鼠(쥐)'는 이 나무의 특성이 작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厭'은 이 나무에 벌레 구멍같은 것이 있어 사람들이 싫어하는 나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다. 즉 '鼠/쥐'와 '厭/염'은 순수한 訓假字나 音假字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 表意性을 감안하여 선택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鼠'는 擬訓假字이고 '厭'은 擬音假字인 것이다.
    이와 같이 '擬'라는 원리는 借字 表記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讀과 假의 기본 원리가 적용된 다음 2차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므로 讀, 假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고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다. 讀, 假는 차자 체계에서 필수적으로 적용돼야 하는 것이지만 '擬'는 수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므로 讀, 假의 原理를 문란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Ⅲ. 吏讀와 鄕札 表記의 實際
    吏讀와 鄕札의 表記는 어느 한 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변천되어 온 것이다. 吏讀는 三國 時代부터 近代까지의 자료가 남아 있어 각 시대의 변천상을 어느 정도 추적할 수 있지만 鄕札은 遺事의 鄕歌 14首와 均如傳의 11首, 悼二將歌 1首밖에 없어 그 表記法의 변천상을 추적하기가 어렵다. 이에 따라 吏讀 表記의 변천상을 먼저 설명하고 다음에 鄕札 表記의 實際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三國 時代의 吏讀文은 讀字만으로 표기되는 것이 특징이다. 助詞나 語尾를 표기하지 않고 讀字들을 우리말의 語順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같은 吏讀文에서도 우리말의 語順과 漢文의 語順이 함께 쓰였다. 敬州川前里書石의 原銘을 보면 '善石得造(좋은 돌을 얻어 만들었다)' '作書人(짓고 쓴 사람)'과 같이 우리말의 語順으로 讀字들을 배열한 句節이 있는가 하면 '始得見谷(처음으로 골짜기를 볼 수 있었다)'와 같이 漢文의 語順으로 배열한 구절이 섞여 쓰이고 있다. 丹陽新羅赤城碑(眞興王代)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壬申誓記石(552 ?, 612 ? ), 戊戌塢作碑(578 ?), 南山新城碑(519 ?)들은 讀字들을 완전히 우리말의 語順으로 배열하고 있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 失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이는 壬申誓記石銘의 일부분이다. 현대어로 해석하면

壬申年 六月 十六日에 두 사람이 함께 다짐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다짐한다. 지금부터 三年以後, 忠道를 執持하고 過失이 없기를 다짐한다. 만약 이 일을 잃으면 하느님께 큰 죄를 얻음을 다짐한다. 만약 나라가 不安하고 크게 어지러운 세상이면 가히 모름지기 행할 것을 다짐한다.

와 같다.
    당시 이러한 문장들을 이렇게 읽었는가, 音讀을 하였는가, 아니면 우리말로 풀어 읽는 釋讀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단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현재까지의 연구들을 보면 壬申誓記石銘은 音讀한 것으로 본 주장이 있고 戊戌塢作碑銘이나 南山新城碑銘은 釋讀을 한 것으로 본 연구가 있다. 音讀을 하거나 釋讀을 하거나 뜻이 전달되는 데 있어서는 같은 것이므로 개인에 따라서 읽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이 音讀되었다면 變體 漢文的인 성격이 강한 것인데 이러한 文體는 統一 新羅 時代의 資料나 高麗 時代의 자료에도 나타난다. 統一 新羅 時代의 것으로는 810年의 記錄인 昌寧仁陽寺碑文이 대표적이고 高麗 時代의 것으로는 若木淨兜寺造塔記(1031)나 鄕藥救急方에서도 볼 수 있다. 若木淨兜寺造塔記는 대표적인 이두문인데도 그 題目에 해당되는 部分이

太平十一年......若木郡內 巽方在 淨兜寺 五層石塔 造成形止記

라 되어 있다. 여기서 '巽方在'는 '巽方'에 있는'으로 풀이되는 것으로서 이 '在'는 國語의 語順에 따라 쓰였지만, 音讀되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鄕藥救急方에서도 藥材 牽牛子에 대한 이름을 '朝生暮落花子(아침에 피어 저녁에 지는 꽃의 씨)'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音讀字만의 表記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音讀字들을 우리말의 語順으로 배열하는 表記法은 오랫동안 사회적인 공인을 받으면서 사용되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三國 時代의 吏讀文을 釋讀도 하였으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통일 신라 시대의 이두문과의 관계에서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이두문은 讀字들을 우리말의 語順으로 배열하면서 助詞나 語尾 등을 나타내는 吐를 넣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서 吐가 쓰인 最古의 吏讀文은 甘山寺阿彌陀如來造成記(720)이지만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新羅華嚴寫經造成記(755)이다. 이 造成記의 한 部分을 예로 하여 이 시대 吏讀文의 表記法과 아울러 三國 時代 吏讀文이 釋讀도 되었으리라고 보는 논거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經 成 楮根 香水 散 生長 令內弥 然後 若 楮皮脫 脫皮練......
    佛普薩像筆師走使人 菩薩戒 授 令 薺 食 右 諸人 若 大小便爲哉 若 師宿 若 食喫 爲者 香水 用 沐浴 令只但 作作處在之

이를 현대어로 직역하면

經을 이룬 法은 닥나무 뿌리에 香水를 뿌리어서 生長시키며 然後에 혹 楮皮脫이나 脫皮練이나 佛菩薩像筆師의 走使人이나 菩薩戒를 받도록 시키며 薺를 먹으며 위의 모든 사람들이 혹 大小便을 한다거나 혹 師宿을 한다거나 혹 밥을 먹는다거나 하면 香水를 써서 沐浴시켜어야 만드는 곳에 나아갔느니라.

가 된다. 이 글에는 漢文 文法的인 表現도 없지는 않으나 완전히 우리말의 語順으로 되어 있다. 밑줄을 그은 부분이 吐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實質 槪念을 나타내는 讀字들이다. 이 讀字들은 다음과 같이 音讀字와 訓讀字로 나뉜다. (訓讀字는 15세기 국어와 근대 이두를 참고하여 그 독법을 표시한다. )

音讀字:經, 法, 香水, 生長, 然後, 楮皮脫, 脫皮練, 佛菩薩像筆師走師人, 菩薩戒, 薺, 大小便, 師宿, 沐浴
訓讀字:成/일-, 楮/닥, 根/불휘, 散/빟-, 令/시기-, 若/다가, 授/받-, 食/먹-, 右/오, 諸/모, 人/사, 用/-, 作作/질질, 處/곳, 進/나-.

音讀字로서 표기된 단어 가운데, '楮皮脫(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사람)', '脫皮練(벗긴 껍질을 다듬는 사람)'은 우리말의 語順으로 音讀字를 배열하여 造語한 것이고 '師宿'은 그 뜻이 분명치 않은 것이나, 音讀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밖의 것은 中國語 借用語이다.
    訓讀字들은 吐에 의하여 訓讀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과 우리말과의 대응 관계에서 파악되는 것이 있다. 일례로 '成'字에는 '內'字가 吐로 쓰였는데 新羅 時代에는 '內'를 吐로 가진 讀者는 모두 訓讀字인 것이 여러 자료를 검토하면 확인된다. '楮根' '食喫'과 같은 연결체는 漢文의 成語로 보기보다는 고유어에 쉽게 대응하는 말이어서 訓讀字로 본 것이다.
    吐에 쓰인 借字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訓讀字;者/-(으)ㄴ, 中/-긔, 等/-, 爲/-, 但/-(어), 在/견, 之/-(이)다.
音假字;內/-, 弥/-며, 那/-(이)나, 哉/-재, 只/기
訓假字:厼/-(이)금, 中/-긔

吐에 쓰인 訓讀字는 漢文에서 虛辭字로 쓰이는 것들이 주가 된다. '在'만이 實辭에서 온 것이지만 이것은 國語의 특성에서 虛辭的인 기능으로 발달한 것이다. 이 訓讀字들은 '但'字만을 제외하면 모두 三國 時代의 吏讀文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삼국 시대의 이두문이 비록 讀字만으로 표기되었다고 하더라도 釋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虛辭字들이 新羅 時代의 吐로 이어져서 訓讀되고 있기 때문이다.
    吐에 쓰인 音讀字는 '哉'를 제외하면 모두 三國 時代부터 固有 名詞 表記字로 쓰이던 借字이다. '哉'는 後代에 '制', '薺'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音假字인 것이 분명하지만 漢文에서도 語氣詞로서 文의 終結에 쓰인 점을 고려하면 讀字性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는 擬音假字이다.
    訓假字 가운데 '厼'은 '彌'字에서 변한 略體字로 생각되는 것이다. 즉 '彌→弥→厼'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彌'字에는 '그치다'는 뜻이 있어 그 古代 訓이 '금다'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中'은 訓讀字로도 쓰였지만 '然後中(연후에)'라고 한 것은 한문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어서 이 '中'을 국어의 처격 조사를 표기한 訓假字로 본 것이다. 이는 訓讀字가 訓歌字로 바뀌어 간 擬訓假字이다.

吐의 기능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또 하나의 기능은 末音 添記이다. 이는 借字 表記法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인데 이것이 이 造成記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즉 '令只'는 '令'의 訓이 '시기'인데 여기에 그 末音을 나타내는 '只/기'가 添記된 것이다. 이는 '시기+기'의 표기로서 '시기'를 나타낸다. 이러한 末音 添記는 비록 수의적이긴 하지만 借字의 讀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와 같이 吐 표기가 발달되었어도 국어의 조사나 어미들을 모두 표기하지는 않고 있다. 主格, 屬格, 對格을 나타내는 표기가 없고 語尾의 表記도 불완전하여 보충하여 읽지 않으면 안된다.
    이 이후의 新羅 時代 吏讀文은 대체로 이 造成記의 표기법에서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吐의 表記에서 讀字들이 假字化되어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記憶해 둘 일이다. 吐는 후대로 올수록 假字가 많이 쓰이는데 이렇게 되면 文의 語節의 表記 構造가 '讀字+假字'의 構造로 나타난다. 여기서 한 걸음만 나아가면 鄕札의 表記法이 되는 것이다.
    高麗 時代로 넘어오면 이 吐 표기가 보다 정밀해진다. 鳴鳳寺慈寂禪師俊雲塔碑陰記(941, 太祖 24年)는 高麗 時代 最古의 吏讀文이다. 여기서 新羅 時代의 吏讀文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屬格 助詞와 對格 助詞를 발견할 수 있다. 吐의 길이도 훨씬 더 길어진다. '成造爲內臥平亦在之'에서 밑줄 그은 부분이 吐인데 무려 7자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吐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말의 표기가 정확해졌음을 뜻한다.
    1031年(太平 11年, 顯宗 22年)에 쓰여진 淨兜寺造塔記에서 高麗 時代 吏讀文의 한 標本을 볼 수 있다. 우선 이 기록은 長文으로 되어 있어 高麗 時代 吏讀文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語順이 일부 套語를 제외하면 거의 국어의 語順으로 되어 있고 吐表記에 있어서도 필요한 조사나 語尾가 거의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伯士 身寶 衆 三亦 日日以 合夫 三百四十八 幷乙良 第二年春節己只兮齊遣 不得爲 犯由 白去平等(伯士 身寶의 衆 셋이 나날로 合夫 三百四十八을 아울러서 돌은 第二年 春節까지 미치었다 하고 이루지 못한 사유를 사뢰었으므로)

이는 造塔記의 한 句節인데 거의 우리말로 된 표현이다. 밑줄 그은 것이 吐인데 '爲/'를 제외하면 모두 假字로만 쓰이고 있다. 이 表記 構造를 보면 音讀字로 표기된 '伯土, 身寶, 衆, 合夫, 三百四十八, 第二年, 春節'을 제외하면 모두' 訓讀字+吐'의 구조이다. 吐가 거의 모두 假字로 되었으니 기본 구조는 '讀字+假字'의 구조인 것이다.
    이 吏讀文은 高麗 後代로 오면 漢文化되어 가는 경향을 띤다. 佛家의 造成記나 發源文이 高麗 前期까지는 吏讀文으로 쓰인 것이 많으나 後期로 오면 漢文化되어 吏讀文 造成記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밖의 吏讀文에도 音讀字로 표기한 漢文 句節이 대량으로 쓰인다. 朝鮮初의 大明律直解의 吏讀文도 우리말 어순의 표기가 많은 것이 사실이나 고려 전기의 吏讀文과 비교하면 漢文句가 대량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壬亂 때의 記錄인 農圃集이나 李 忠式公의 狀啓로 내려오면 漢文句에 口訣의 吐를 단 듯한 느낌을 주는 文體로 바뀐다.
    朝鮮 後期의 吏讀文을 보면 자연스러운 國語에 바탕을 둔 生産性이 있는 말이 아니라 套式化된 用語를 漢文句에 섞어 쓰는 特殊한 文語로서 그 生命을 유지한 것에 불과하다.
    鄕札 表記는 遺事의 鄕歌 14首, 均如傳의 11首, 悼二將歌 그리고 鄕藥救急方의 鄕名 表記도 여기에 포함시키면 統一 新羅 時代서부터 13세기 중엽까지의 자료가 전하는 셈이다. 鄕札 表記가 발생되어서 쓰여온 기간도 이 기간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 表記는 吏讀와 固有 名詞 表記가 보여 주는 여러 특징이 모두 응용되어 있다. 먼저 특징적인 표기 구조로 들어야 할 것은 '讀字+假字'의 구조이다.

東京 明期 月良 夜人伊 遊行如可/東京 긔 아 밤들이 놀니다가

이는 處容歌의 첫 句節이다. 이를 借字 體系에 따라 그 연결 구조를 분석하면

東京/동경, 音讀字+音讀字
明期/긔, 訓讀字+音假字
月良/아, 訓讀字+音假字
夜/밤, 訓讀字
入伊/들이, 訓讀字+音假字
遊行如可/놀니다가, 訓讀字+訓讀字+訓假字+音假字

와 같다. 이로 보면 語頭는 모두 讀字들이고 後尾는 假字들이다. 이 假字는 곧 釋讀 口訣이나 吏讀의 吐에 해당한다. 이 吐는 文法 關係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明期(+긔→긔)'와 같이 未音 添記를 겸한 것도 있다. 鄕札에서 이 吐는 우리말에 필요한 조사나 어미 및 그 밖의 文法的인 형태소들을 거의 다 표기하고 있어 이두문에서와 같이 보충해서 읽어야 할 곳이 거의 없다.
    鄕札 表記가 모두 이러한 構造로만 된 것은 아니다. 禮敬諸佛歌의 '身語意業无疲厭'은 音讀字만으로 表記된 漢文句가 그대로 쓰인 것이다. 이러한 表記는 初期 吏讀文에서 보아온 것이다. 또 같은 노래의 '此良 夫作沙毛叱等耶/이아 부질 사못야(이에 떳떳함을 삼을 것이로다)'의 '夫作'이나 '沙毛叱等耶'는 모두 假字만으로 表記된 것이다. 이렇게 假字만으로 單語를 表記하는 것은 固有 名詞 表記에서부터 있어 온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鄕札은 固有 名詞 表記, 初期 吏讀文, 그리고 統一 新羅 時代부터 나타난 吐가 들어간 吏讀文의 表記法이 융합되어 자연스런 우리말을 거의 완벽하게 표기한 表記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表記法은 舊譯仁王經의 釋讀 口訣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鄕札 表記法은 이러한 釋讀 口訣이 발전되어 보편화된 것으로 믿어진다.

Ⅳ. 參考 文獻
金完鎭(1980), 「鄕歌 解讀法 硏究」, 서울大 出版部.
南農鉉·沈在箕(1976), 舊讀仁王經의 口訣 硏究(基一), 「東洋學」6. 檀大 東洋學 硏究所.
朴炳采(1967), 韓國 文字 發達史, 「韓國 文化史 大系」Ⅴ, 高大 民族 文化 硏究所.
申采浩(1924), 古史上 吏讀 名詞 解釋法, 「丹薺 申采浩 全集」.
安秉禧(1977), 「中世 國語 口訣의 硏究」, 一志社.
梁柱東(1942), 「古歌 硏究」, 博文書館.
李基文(1981), 吏讀의 祈願에 대한 一考察, 「震檀學校」52.
李丙燾(1957), 壬申誓記石에 대하여, 서울大 論文集(人文·社會)5.
李崇寧(1955), 新羅 時代의 表記法 體系에 관한 試論, 서울大 論文集(人文·社會 科學)2.
李熙昇(1955), 「國語學 槪說」, 民衆書館.
小倉進平(1929), 「鄕歌 및 吏讀 硏究」
拙著(1981), 「借字 表記法 硏究」, 檀大 出版部.
拙著(1980), 漢字·漢文의 受容과 借字 表記法의 發達, 「'80 學術 大會 發表 論文」, 韓國 精神文化 硏究院

 

 

 

풀뿌리 [오피니언] 한글날, 이극로를 생각한다
집념 끝 ‘최초의 한글사전’ 편찬 … 辭典에 일생거는 狂人 그리워
한글날(9일)만 되면 으레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예찬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런 한글을 지키고 가꾸는 데 일생을 바친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종종 잊어버린다. 대표적인 예로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글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선각(先覺)들의 고초와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한글은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멸시당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글이라고 탄압받았다. 한글 창제 465년 만인 1911년 조선광문회 주시경, 최남선, 김두봉이 최초로 한글사전 편찬을 시작했으나 일제 탄압 속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나타난 이극로에게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이고 문화운동이며 계몽운동이었다. 물불 이극로(李克魯·1897~1982)는 17세에 만주로 건너가 박은식, 신채호 등을 만나 민족주의자로 다시 태어난다. 1916년 상해 동제대학 수학을 거쳐 1922년 베를린대학에 입학, 궁핍과 싸우며 5년간 학업에 몰두해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대학에 조선어강좌를 개설, 3년간 강의했다. 학생들로부터 “어째서 조선에는 사전 하나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수치와 비애를 절감, 조국에 돌아와 조선어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2006/10/09 09:27:19  
풀뿌리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를 다시 일으키고 한글사전 편찬운동을 주도해 나간다. 동지들과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등의 작업을 거쳐 16만 어휘가 정리된 사전 원고를 완성하고 조판에 들어간 것이 1940년 3월. 그러나 1942년 9월 5일 편찬원 정태진이 함경도 홍원경찰서에 잡혀가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가 비밀 독립운동을 한다는 허위 자백서를 쓰고 만다. 잡혀간 회원은 27명. 참혹한 고문 속에 이윤재, 한징은 옥사한다. 이극로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2년 6월, 정인승 2년 등의 형을 선고받는다. 한글 타자기 발명가 공병우는 자전(自傳)에서 이극로를 말한다. “그의 한글 애정은 종교적 신앙처럼 뜨거웠다. 눈 치료 받으러 와서 처음 보는 의사에게까지 한글을 전도할 수 있었던 그 신념. 그것도 서슬이 시퍼런 일제 치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이 한글을 알아야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다’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해방을 맞아 감옥에서 풀려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조선어학회 재건에 착수, 애타게 찾던 사전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한다.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을 두 번 거절당하고 세 번째 찾아가서 책상을 치며 호통쳤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나라문화 기둥인 한글사전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으니 왜놈에게 가서 사정하라는 말입니까!” 정진숙 등 을유문화사 간부들은 크게 감명받아 출판 결단을 내린다. 드디어 1947년 10월 9일 한글큰사전 제1권이 발행되었다(1957년 전6권 완간). 이극로와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잉크도 마르지 않은 큰사전을 앞에 놓고 감개무량해 눈물을 흘린다. 조선광문회가 편찬을 시작한 지 37년 만이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최초의 한글사전을 갖게 된다. “이극로의 물불 가리지 않는 무서운 추진력은 누구도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불이라는 별명이 그의 호가 되어 버렸다.” 이희승의 회고다. 흔히 우리말과 한글의 수난을 얘기한다. 그러나 말과 글의 집인 사전이 제 역할을 하는 한 걱정은 기우가 될 수 있다. 물불과 같이 일생을 사전 편찬에 거는 광인(狂人)들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 걱정일 뿐이다.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 입력 : 2006.10.08  
풀뿌리 [사설] 한글날에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과 글 출처 ; 조선일보
오늘 9일은 560돌 한글날이다. 한글날이 다시 국경일로 되살아나 처음 맞는 날이다. 한글날은 1991년 바다의 날, 소비자의 날 같은 여러 기념일 중 하나로 격이 낮춰졌다. 나라 말의 중요성, 나라 말의 고마움, 나라 말의 역사, 나라 말의 수난을 알지 못한 無知무지의 결과였다. 세계 많은 민족이 자기 언어를 표현할 문자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한글처럼 분명한 시기(1446년)에 특정한 사람들(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완전히 독창적인 새 문자를 만들어 국가 공용문자로 사용한 것은 유례가 없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자기 말이 있음에도 그것을 표현할 문자를 갖지 못해 영어 알파벳을 빌려다 쓰는 궁색한 처지를 면하지 못한 걸 보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 수 있다. 한글은 불과 24개의 낱자를 써서 한국인이 내는 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과학적이고 편리한 글자다. 한글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고 우리 국력이 커가면서 세계 48개국 590여 개 대학에서 가르치는 국제적 문자가 됐다. 한글의 과학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관심과 찬사도 높다. 그런데 정작 본고장인 우리나라에서 한글의 처지는 고단하기 짝이 없다. 청소년 사이에서 유행하는 걍(그냥) 짱나(짜증나) 열라(매우) 지대(제대로) 따위 통신언어와 羅ⓡⓖ孝(나알지요?)처럼 해독할 수 없는 언어파괴 현상이 아름다운 우리 말에 무수한 생채기를 내고 있다. 일반 국민의 언어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방송의 연예오락프로그램은 비속어·은어·비표준어 경연장이 된 지 오래다. 국내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국어실력이 빈약해 기획안이나 보고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는 신입사원들의 문장력에 혀를 차고 있다. 한국어는 남북한 7000만 명만 계산해도 사용인구 세계 15위권에 드는 언어다. 우리 문화의 사명은 그 한글에 깊이와 아름다움과 정확성을 더하도록 가꿔가는 것이다. 국경일이 된 한글날을 그저 생일잔칫상 하루 잘 차려먹는 날쯤으로 넘길 것이 아니라, 이 겨레문화의 꽃을 어떻게 하면 풍요롭고 품위 있게 키워나갈 것인지 다같이 생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입력 : 2006.10.08 22:19 20' 출처 ; 조선일보
풀뿌리 [사설] 한글날 경축사에까지 끼어든 '지배·被지배' 논리
대통령은 9일 한글날 慶祝辭사에서 “세계 어느 역사를 봐도 支配層이 쓰는 문자가 있는데도 (被피지배층)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던 일은 없다”며 “(지배층만이 문자를 쓸 수 있는 것이) 지배층 특권을 유지하는 方便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세종대왕이 한자만을 고집하던 지배층에 굴복했다면 한글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한글 창제에 담긴 民本主義와 自主的 실용주의를 계승·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혁신과 통합을 이루는 길”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은 정치행사도 아니고 한글날이 국경일로 格上격상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한글 창제의 의의를 ‘계급투쟁에서 지배층의 반대를 이겨낸 승리의 産物’로 설명한 것이다. 대통령이 초등학교 5학년 어린아이들에게 “사람들 사이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있는데 (둘 사이에) 소통이 안 되니까 따로 살게 된다”고 말한 게 불과 열흘 전 일이다. 세상 萬事를 지배와 被피지배의 단순 二分法으로 나누고 이 선동적 이분법을 혁명의 선동수단으로 활용해 온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다. 공산주의 지배계층은 세상을 지배와 被지배로 나눠 혁명을 부채질하고선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한 다음에는 주변에 가시철망을 쳐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해 왔다. 그 僞善的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20년이 지난 후 그들의 지배·피지배 논리가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백주 대낮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더구나 지역간·계층간 화합과 통합을 이뤄내는 것이 포부라는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는 “세계 여러 분야에 남아 있는 제국주의적 잔재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2000년대의 세계 질서를 지배층인 제국주의 강대국과 피지배층인 弱小國으로 구분짓고 대한민국을 그 사이에 놓은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무역으로 富를 일군 대표적 국가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세계를 제국주의적 지배국가와 약소국인 피지배국가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지금 세계를 이끌어가는 나라의 지도자치고 自國과 세계를 흑백의 이분법으로 읽는 지도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대통령이 시대착오적 黑白흑백의 海圖만을 보고 대한민국號를 이끌어 가고 있으니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의 바다에서 漂流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입력 : 2006.10.09 19:03 16' / 수정 : 2006.10.09 22:00 28' 출처 ; 조선일보 2006/10/16
풀뿌리 가갸날
10월 9일.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당시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인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주동이 되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가지고, 이날을 제1회 '가갸날'로 정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1446년(세종 28)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을 한글이 반포된 날로 추정하여 '가갸날'로 정하고, 신민사(新民社)와 공동 주최로 한글반포 8회갑(八回甲:480년)을 기념하였다. 이듬해인 1927년 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이 창간되고부터 이날을 '한글날'로 고치고 계속 음력으로 기념하다가, 1932년 양력 날짜로 환산, 10월 29일에 기념 행사를 가졌다. 다시 1934년 정확한 양력 환산법을 적용하여 10월 28일로 정정하였고, 1940년 7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 발견되어 정인지(鄭麟趾) 서문에 반포일이 9월 '상한(上澣)'으로 나타났으므로, 상순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였다.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포하여 공휴일로 정했다. 그러나 1990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 기념일로 바뀌었고, 2006년부터 법정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한글날을 전후한 주간에 정부·학교·민간단체 등에서 세종대왕의 높은 뜻과 업적을 기리고 한글의 제정을 경축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2006/10/16 21:02:20  
풀뿌리 조선어연구회 [朝鮮語硏究會]
선구적 한글학자인 주시경(周時經)의 영향을 받은 임경재(任璟宰), 최두선(崔斗善), 이규방(李奎昉), 권덕규(權悳奎), 장지영(張志映), 신명균(申明均), 이상춘(李常春), 김윤경(金允經), 이승규(李昇圭) 등 15, 16명이 1921년 12월 3일 휘문의숙에서 국어의 정확한 법리(法理)를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간사장은 임경재, 간사는 장지영·최두선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국어연구학회로 학문연구뿐 아니라 주시경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 말과 글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단체는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김정진 등을 중심으로 우리 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표로 조직된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하여 탄생하였다. 국어연구학회는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모음'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개칭하였다가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변경·조직되었다. 1931년 1월 10일에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9년 9월 25일 이후 한글학회로 정해져 오늘에 이른다.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였는데 지금의 한글날에 해당한다. 1927년 2월부터는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여 한글의 보급과 선전에 힘썼으나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1928년 10월 제9호를 내고 휴간하였다가 1932년 속간되어 오늘에 이른다. 1931년부터 한글강습을 시작해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였다. 1936년 표준말의 정리와 체계를 세워 사정(査定)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고,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을 발표하여 혼란된 표기 현상을 통일하였다. 1942년 10월 일제는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회원 33명을 반일(反日)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하여 8·15광복 때까지 학회활동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8·15광복 후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6/10/16 21: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