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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0 : 三國史記 / 三國遺事]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1:49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0 : 三國史記 / 三國遺事]



단절된 역사 -상선약수님-

 

1)  한국사 말살은 이성계-이씨조선이 시초였다

◀ 김부식 영정과 삼국사기

우리나라 역사축소를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三國史記 편자 金富軾(1075~1151)이다.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얘기할 때 반드시 거론하는 것이 日本이다. 그러나 金富軾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지 않았다.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의 최후의 抹殺者일 뿐, 유일한 말살자는 아니다.

歷史抹殺은 무엇을 말하는가. 역사말살의 개념부터 정의하자. 歷史는 그대로 놔두고 이름만 抹殺이라 붙인 것은 말살이 아니다. 말살에 해당하는 역사축소 작업이 존재했기 때문에 역사말살이라 한다. 우리나라가 고작 滿州와 韓半島에 터 잡고 살았다면, 滿州에 웅거한 역사를 지우는 것은 歷史縮少는 될지언정 歷史抹殺은 되지 않는다. 동북아 전체가 우리나라 영토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최소한 중국 대륙까지 우리나라 영토 이어야만이 역사말살이 되는 것이다. 主人史를 奴隸史로 날조해야 말살 했다고 할 수 있다. 말살이란 滄海를 無로 만들거나 一粟으로 축소할 때만 붙일 수 있는 단어다.

잘난 조상은 광대한 영토와 빛나는 역사를 물려준다. 조상만 말살해서는 계승국까지 줄줄이 못난 나라로 만들 수가 없다. 倭奴가 아무리 미련해도 그렇지, 朝鮮의 존재를 지운다 해도, 朝鮮의 광대한 영토와 빛나는 역사를 계승한 三國과 高麗를 남겨놓고 韓國史를 말살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三國史記, 三國遺史만 대조해 봐도 엉터리 역사책을 썼다는 걸 알 수 있다면, 누가 그런 ‘歷史抹殺’을 애써 하려고 하겠는가. 倭奴가 韓國史를 말살하려면, 배달사부터 해서 朝鮮史, 三國史, 高麗史까지 다 말살해야 한다. 倭奴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한 것이 아니다.

倭奴國. 순종해야 하는 노예 나라라는 뜻이다. 원래 中國倭에 붙여준 이름이나, 中國倭가 日本으로 집단 이주한 이래로 列島의 倭 또한 中國倭의 문화에 침몰되어 갔다.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李成桂의 나라는 日本을 倭奴國이라 불렀다.

倭奴에게는 韓國史를 말살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百濟, 新羅의 식민지이고, 大震國의 朝貢國, 高麗의 屬國이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에 까지 朝貢한 나라가 日本이다. 저 日本列島는 百濟, 新羅가 식민지를 건설한 땅이고, 高句麗는 百濟, 新羅의 上國 이었다. 日本은 高麗도 아니고, 高麗 諸侯國의 屬國이었다. 그리고 濊貊族의 나라에도 조공한 나라고, 濊貊族의 나라로 부터 가르침을 받은 나라다. 그러나 倭奴에 의한 말살은 韓國史 抹殺의 마지막이었다.

동기와 기회. 倭奴는 韓國史를 말살할 동기도 충분했고, 기회도 있었으나, 이미 그 전에 韓國史는 말살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말살할 수 있는 범위가 적었다. 三國遺史, 花郞世紀...... 倭奴는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책들을 뜯어고쳐 재보급 해왔다. 三國史記, 三國遺史는 壬辰倭亂 때 약탈해갔다. 日本은 李氏朝鮮을 강점했을 당시, 우리나라 역사책들 역시 日本書紀와 古事記 만큼이나 왜곡, 날조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럴 태세도 되어 있었지만, 이미 韓國史는 말살되어 있었다.

이미 李成桂가 朱元璋에게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준 지 5 백 년이나 지났는데,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책이 많다고 했다. 朝鮮半島史 편찬 요지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 있어서의 야만적이고 반개화된 민족과 달라서 독서속문에 있어서 문명인에 떨어지는 바가 없다. 고래로 사서의 존재하는 바 많고,

倭奴가 그림책 에토키(繪解)를 들여다보고 퇴폐소설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를 읽는 것은 독서문화라 그러겠지? 우키요조우시는 朝鮮通信使가 건너가 학문을 가르쳐주자, 최후의 문맹자 집단인 사무라이의 눈까지 번쩍 뜨게 만든, 倭奴 땅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퇴폐소설이다. 우키요조우시와 기생들의 음탕한 연회에서 출발한 가부키(歌舞伎) 등 잡다한 것을 한데 묶어 겐로쿠 문화(元祿文化)라고 한다. 한 마디로 퇴폐문화다. 壬辰倭亂으로 李氏朝鮮의 國富를 모조리 강탈해 가서 그것으로 퇴폐문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倭奴는 한국 역사책을 焚書(1910 년 11 월 부터 전국의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 년 12 월 말 까지 1 년 2 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檀君朝鮮' 관계 고사서 등 51 종 20 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웠다『제헌국회사,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 년사』)하고 일본으로 빼돌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倭奴王이 소유하고 있다는 족보책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은 중국의 문물을 전수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졌다. 중국계 가문 109 개는 모두 중국에 있던 百濟, 新羅系의 가문이다. 高句麗系 역시 百濟系, 新羅系 가문이다[날조 日本史에서 新羅의 문물 전수는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中國倭에게도 新羅는 원수같은 나라였다. 추잡의 절정 기모노(きもの)섹스, 혼욕(混浴), 요바이(よばい) 풍습 때문에 新羅 땅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하기야 家門이라는 말이 日本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中國倭가 저 땅에, 기모노섹스, 混浴, 요바이의 性文化를 전파한 이래로 천 년 동안 가문 해체를 경험한 나라다. 그저 다른 나라 보기에 창피해서 家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히로히토(裕仁)는 다이쇼(大正)의 섭정으로 있으면서 南淵書라는 희대의 僞書도 창작해내고, 倭奴王이 된 후에는 花郞世紀 날조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新撰姓氏錄 역시 히로히토가 날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南淵書는 벌거벗고 흙구덩이에서 뒹굴던, 百濟의 군사식민지로 출발한 日本이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했으며 당연히 예속시켜야 한다.”가 핵심 내용이다. 5 세기에도 日本은 원시 그대로의 아담과 이브였다.

日本의 순수창작이 아니다.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한 것은 배달, 朝鮮, 高句麗였다. 배달과 朝鮮, 高句麗를 日本으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결단코 배달도, 朝鮮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데, 日本은 배달과 朝鮮이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王朝의 모든 正史書와 온갖 역사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濊貊族 왕들이 숨겨놓았던 한단 역사서 51 종 마저 日本으로 빼돌렸다.

倭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서를 분서하고 개서해서 韓國史 말살에 광분 했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韓國史 抹殺은 倭奴의 最大 國策事業이었다.

 

왜(倭)의 역사왜곡은 18 세기 부터다. 1607 년 부터 1811 년 까지 204 년간 파견된 朝鮮通信使에게 배우면서 역사왜곡에 열을 올린 것이다. 이 당시까지 倭奴는 그림책 에토키(繪解)나 들여다보는 문맹자들 이었지만, 학문을 깨우치자, 자신들의 초라한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광적으로 역사왜곡을 해댔다. 참고서는 중국의 날조 역사책이었다. 우리나라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가공의 중국 문명을 받아 들였다고 날조 하기로 한 것이다.

왜(倭) 이전에 明, 淸과 李氏朝鮮 등이 韓國史를 말살했다 해서 왜(倭)의 韓國史 抹殺行爲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倭奴의 韓國史 말살은 李氏朝鮮의 역대 왕들이 숨겨온 한단 역사서와 1 차 사료에 집중되어 있다.

▲ 조선전도



李氏朝鮮의 천문관측 기록은 일식 214 회를 비롯하여 수만 개에 이른다고 추정된다(인간과 우주, 1997). 李氏朝鮮 末 까지 보존되어 있던 관상감(觀象監)의 방대한 천문관측 일기까지 훔쳐간 倭奴다. 우리나라 천문기록까지 말살한 倭奴가, 奴隸史를 지우고자 혈안이 된 倭奴가 주인나라의 역사는 말살하지 않았단 말인가.

日本 쇼소인(正倉院)에서 新羅의 民政文書가 발견 되었다면, 기뻐할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 부터 의심 해봐야 하지 않는가.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역사말살의 전력이 없는 나라라고 해도 일단 그것부터 규명해야 한다. 역사말살 행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역사 말살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新羅가 자신의 民政文書까지 식민지 日本에 하사 했던가. 도저히 발견될 수 없는 장소에서 발견 되었으면, 어째서, 어떤 목적으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다. 물론 韓國史를 왜곡하고 날조하기 위해서다. 倭奴는 倭史와 韓國史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날조한 식민종족이다.

“州, 縣, 管, 驛들이 없고 곳곳에 촌리(마을)들이 있는데 다 靺鞨人들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靺鞨人이 많고 土人(高句麗人)은 적다. 다 土人들로써 村長을 삼는데 큰 촌의 촌장은 都督이라고 하고 다음 가는 촌의 촌장은 刺使라고 하며, 그 이하는 다 백성들이 首領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지극히 추워 논농사에는 마땅하지 않다(無州縣管驛處處有村里皆靺鞨部落其百姓者靺鞨多土人少皆以土人爲村長大村日都督次日刺使其下百姓皆日首領土地極寒不宜 類聚國史)”고 柴達木盆地에 거주하는 大震國의 속민 靺鞨族을 설명한 것을 두고 大震國이라 날조한 日本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新羅의 民政文書에 나오는 인구와 재산 역시 최소한 두 자리는 축소했다. 논농사도 할 수 없는 靺鞨人의 나라에 조공을 하고, 新羅 선박을 타고 중국 대륙을 왕래하며 遣震史(遣眞使)를 보내던, 高麗의 제후국에게 조공하며 황제라 아첨하던 日本은 대체 어떤 나라란 말인가.

김정호(金正浩 ?~1864)는 1864 년 까지 살았다. 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 당시 朝鮮의 영토는 東鴨綠江에서 黑龍江 까지였다. 그렇다면 金正浩가 부분도를 만들었던가? 倭奴가 韓半島 이북을 떼어 버리고 다시 만든 날조지도다.

大東輿地圖는 倭奴에게 있어서 植民母國의 역사를 말살할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金正浩의 사망에서 30 여년만 더하면 倭奴가 우리나라에서 날뛰기 시작한 시절이다. 大東輿地圖를 倭奴가 20 세기에 다시 제작한다 해도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다.

大東輿地圖 木刻版이 舊總督府 건물에서 나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倭奴가 우리나라 영토를 보호 하려고 韓半島만 표시된 지도 원판을 숨기지는 않았다. 淸과 협정도 맺어 우리나라 영토를 넘겨준 종놈이 아닌가. 나중에 발견될 것을 감안해서 後代에 까지 길이길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半島史로 왜곡, 날조할 목적하에 넣어둔 것이다. 金正浩의 또 다른 지도 靑邱圖에는 義州가 현 大凌河 유역에 있었다. 현 大凌河가 西鴨綠江 이였다는 의미다. 大凌河 유역에 세운 淸碑를 白頭山定界碑라 유포시킨 倭奴다. 漢委奴가 漢委奴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인가.

倭奴가 우리나라 역사를 半島史로 축소 하려면, 우리나라 영토 축소가 선행 되어야만 한다. 땅마저 中奴에게 넘긴 상황에서 이를 마무리 하는 것이 지도축소이다. 그것은 中奴가 날조지도를 통해 우리나라 영토를 가로채고, 李氏朝鮮이 존속 내내 해온 짓거리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半島史로 축소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지도의 축소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倭奴가 우리나라에 1900 년 부터 들어와 우리나라 지리를 연구 한다면서 설치고 다녔다는 사실이 朝鮮總督府 산하 조선교육회에서 발간한 문교의 조선 1931 년 3 월호에 이토 후미마루(伊藤文治)의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박사의 조선산맥론을 소개한다』에 나와 있다.

1900 년에 벌써 『조선산악론(An Orogrphic Sketch of Korea)』이라고 써서 전세계에다 소개한 것이다. 고토 분지로는 우리나라 지리와 관련해서 모두 3 편의 논문과 지명사전(공동), 그리고 지도 1 편을 남겼다. 3 편의 논문은 모두 영문으로 발표 되었다. 고토 분지로의 조선전도는 1903 년 동경에서 발행 되었다. 컬러판이고 지명은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개념의 지리부도가 들어온 것은 倭奴가 李氏朝鮮을 강점하고 나서였다. “값싸고 질좋은 지도책이 대량 유통 되면서 재래식 전통지도가 자취를 감추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 알면서 날조 이전의 지도를 연구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고, 오늘날 까지도 倭奴가 만든 韓半島 지도에만 죽어라 매달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倭奴가 만든 半島史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현 사학계의 ‘독창적인’ 半島史라는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중국 고지도도 연구하지 않는다. 현 遼水가 시종일관 遼水였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태반 이니까.

大陸史를 논할라치면, 현 사학계는 民族史學으로 매도하기 일쑤지만, 그것 조차도 자신의 견해가 아니다. 倭奴가 먼저 써먹은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철저히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연구는 민족사학(民族史學)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 祖上의 장, 단점을 배워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고쳐서 국가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조사를 實史라 믿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日本은 植民地史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한 것을 잘 알고 있다. 日本史가 하도 미개 하니까, 자기네끼리도 시침 뚝 떼고 이런다. “韓半島에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건 ‘한여름 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다.” “왜 없다고 단정하느냐. 한국학계를 고무시켜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런다. “우리도 다 안다. 우리가 朝鮮의 역사를 왜곡 조작 하였다는 것을. 日本이 이렇게 빨리 文明化된 것은 다 역사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알렸다가는 자부심이 없어지고 기가 죽어 안되니까 거꾸로 해서 용기를 내게 했다. 기를 살려서 淸日, 러일전쟁도 이겼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꾸기로 거래했을 때도 日本史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만큼 미개국이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通信使의 가르침을 받은 18 세기에 들어와서야 미개 日本史를 날조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한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식민지로 자진해서 바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 말살된 韓國史를 말살한다고 광분했던 것이다.

倭奴의 韓國史 말살 이전에 벌써 안정복(安鼎福 ; 1712~1791)이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三國史記를 무가치한 사서라 했다. 東史綱目은 箕子朝鮮을 정통으로 삼은 책인데, 그런 安鼎福의 눈에도 三國史記는 너무도 事大主義에 치우친 책이라 판단 되었다는 것이다. 三國史記는 安鼎福이 東史綱目을 쓴 李氏朝鮮 이순(李焞 : 李氏朝鮮의 肅宗이라 불리는 濊貊族) 이전에 말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역사축소’ 문제 가운데 가장 문제된다고 너나없이 지적하는 것이 三國史記 ‘왜곡’이다. 그리고 왜곡의 당사자로 倭奴도, 中奴도 아니고, 三國史記의 편자를 지목한다. 그러나 金富軾은 三國史記를 왜곡하지 않았다. 흔히 말하듯 金富軾이 事大主義者라서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 기술했다면, ‘중국이 있는데, 무슨 천문관측이냐?’하면서 천문관측 기록까지 다 빼버렸을 것이다.

현재의 半島史가 金富軾이 대륙의 지명을 전부 韓半島 주변에 우겨넣은 후에 생겨난 거라고 하기에는, 金富軾 사후의 高麗史와 李氏朝鮮史도 너무나 잘못 알려져 있다. 강조 하지만, 東寧府가 柴達木盆地이고, 雙城摠管府가 黃河 하류 이북이라는 사실은 高麗 末까지 내내 우리나라 영토가 동아시아라는 증거이다. 中國은 高麗의 속국이었다. 高麗의 도읍 開京은 高句麗의 마지막 도읍 平壤이다. 高麗 때까지 우리나라는 줄곧 중국 대륙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국이 지명을 밀어 내거나 바꿀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국 역사책이 ‘唐은 대제국이다’라고 써놓았다고 해서 과연 金富軾이 믿었겠는가.

金富軾이 생존할 당시, 宋人의 삶이란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遊女도 많고,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형편이었다. 金富軾이 ‘그래, 지금은 쪼그라져도 그 옛날에 중국은 대국이 틀림없었어’하고 이해 했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학자들 보다 훨씬 이해력이 높았던 셈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李氏朝鮮은 小國이라 高麗도, 大震國도, 三國도 小國 이라고 단정 하니까. 朝鮮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확신하니까. 이씨조선 이라고 말하면 왜노의 후예쯤으로 보는 낯뜨거운 비난은 어찌할꺼나,,,

高麗는 新羅가 물려준 광대한 영토를 감사히 받으면 됐다. 오히려 高麗는 高句麗를 계승했다고 천명했다. 단순히 三國 중 高句麗가 가장 큰 나라라서 高句麗를 계승했다고 한 것이 아니라, 高句麗(朱蒙聖帝 당시)가 동아시아의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지배자를 계승했다고 천명까지 했으니까, 高麗도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고구려가 이상으로 가졌던 다물정신(多勿精神 : 復舊土)은 그대로 고려의 통치이념 이기도 했다.

근본적인 의문. 과연 皇帝國 高麗가 자국의 역사를 그것도 正史(高麗實錄)를 편찬 하면서 皇帝 칭호와 年號를 다 삭제 했겠는가. 국가의 위신을 드높이려고 建元稱帝했는데, 역사책을 편찬 하면서 축소, 누락 시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高麗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축소 되었던 것이다.

金富軾은 三國의 이해관계에서 초월한 후대 사람이다. 金富軾이 事大主義者라고 하는데, 高麗 末까지 우리나라가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金富軾이 事大했다면, 高麗에 한 것이다. 조국에 事大한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나. 愛國者다. 金富軾은 역사축소를 하지 않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는 史家의 자세도 잃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나라 역사축소는 金富軾이 三國史記를 편찬한 이후에 일어났던 것이다.

다음으로 의심되는 것이 몽고간섭기(蒙古干涉期)다. 蒙古는 朝鮮의 계승국을 자처했고, 당연히 우리나라 역사를 탐낼 수 있다. 三國을 제후국으로 밀어내고, 朝鮮의 계승국으로서 동아시아의 天子國 행세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 지나지 않았다. 高麗는 蒙古干涉期에도 長安에 도읍했던 대제국이다. 그런 高麗가 蒙古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 하도록 놔두겠는가. 蒙古에게는 동기는 있어도 기회가 없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三國史記가 왜곡 되었다고 주장 하지만, 三國史記보다 더 심하게 날조된 것이 바로 高麗史다. 무엇보다 韓國史 전체를 말살할 수 있는 것은 李氏朝鮮 뿐이다. 高麗가 高麗史를 말살하겠는가, 李氏朝鮮史를 말살할 수 있는가. 李氏朝鮮은 李氏朝鮮史도 날조 했지만, 李氏朝鮮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李氏朝鮮이 韓國史를 말살했다는 증거는 많다. 그 중 하나가 한단사(桓檀史) 말살 기록이다.

世祖 3 년 丁丑 5 월에 팔도관찰사들에게 유시 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 백여 권과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璱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등 문서(地華錄等文書),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찰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世祖三年丁丑五月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安含老.元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一百餘券.動天錄.磨璱錄.通天錄.壺中錄.地華錄等文書.道詵漢都讖記等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其廣諭公私及寺社)

예종 1 년 9 월 18 일(戊戌),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王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 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제서(地華錄諸書), 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 월 그믐날 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 월 그믐날 까지, 먼 도(道)는 12 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 품계를 높여 주되, 상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 50 필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睿宗己丑九月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王居仁薛業等三人記一百餘券.壺中錄.地華錄諸書.明鏡數及天文地理陰陽諸書 家藏者 京中 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 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 超二階 不納者 許人陳告 告者 依上項論賞 匿者 處斬 其速諭中外)

성종 원년 12 월 9 일(戊午),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 하소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왕거인·설업 삼인기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제서(地華錄諸書), 명경수와 무릇 천문·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 이상의 9 책과 태일금경식, 도선참기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成宗卽位己丑十二月戊午 下書諭諸道觀察使曰 前者 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一百餘卷.壺中錄.地華錄諸書, 無遺搜覓 上送事 曾已下諭矣 其已收冊者 依前諭 上送 餘書 勿更收納 李氏朝鮮實錄)

책을 바치면 벼슬을 2 品階나 올려주고, 숨기면 그냥 사형도 아니고, 참형(斬刑)에 처한다. 대한민국은 나라를 위해 순직해야 2 계급 특진 시켜준다. 고작 책 하나 바친다고 벼슬을 2 품계나 올려준다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다. 책을 숨기면 죽인다고 하니, 이건 倭奴들이 韓國史를 말살한 것보다 더 심한 것 아닌가. 李氏朝鮮은 천문관측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以前 王朝의 天文觀測記錄은 없애고자 혈안 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地理다. 우리나라가 高麗 時代까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地理冊에는 모두 중국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이 사실을 은폐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自國史는 국민들로 하여금 널리 읽히게 해야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朝鮮도, 高句麗도 大震國도 모두 自國史 배우기가 국민들의 가장 중요한 학과과정이었다.

自國(?) 역사책을 수거해서 비밀장소에 감춰두고 自國民이 읽지 못하도록 하는 나라는 李氏朝鮮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李氏朝鮮은 濊貊族의 나라니까 우리나라도 아니다. 自國史가 아니니까 韓國史를 말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太白逸史를 보면, 震域遺記, 檀君世紀, 神誌秘詞 등 世祖, 睿宗, 成宗 때 수거한 한단사(桓檀史) 등에 포함되지 않는 책들이 인용문헌으로 나오고 있다. 震域遺記, 檀君世紀가 수거목록에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목록만 봐도 朝鮮時代에 관해서 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李陌은 수거한 비밀서적과 “집에 간직한 여러 상자들을 취하여 조사해 본즉 사전(史傳)으로 가치가 있는 것과 또 평소에 여러 고로(古老)들에게 들은 것들을 합쳐서 채록(取閱家藏陳匧其有可據於史傳者與夫平日聞諸古老者幷擧採錄 太白逸史 跋)”했다고 했지만, 李陌의 집에서 간직한 문헌 역시 수거목록에 포함된 문헌인데, 제출하기 전에 채록했던 것이다. 한단 역사책을 수거한 李氏朝鮮의 왕들은 世祖, 睿宗, 成宗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李氏朝鮮實錄도 내내 뜯어 고쳤으니까 요행히 눈에 띠지 않아서 삭제를 면한 것이 저 求書의 諭示로 둔갑한 것들이다. 실상 李成桂 부터 한단사를 수거 해야만 했다. 한단사 마저도 朱元璋에게 주었으니까.

古朝鮮秘詞. 李氏朝鮮이 세워진 후에 쓴 책이라 朝鮮을 古朝鮮이라 한 것이다. 한단 역사책을 수거하자, 한단사를 보충하기 위해 쓴 책이다. 世祖 이전에 이미 한단사를 수거 했음을 암시한다. “책을 바치면 벼슬을 2 품계나 올려주고, 숨기면 斬刑에 처한다.”고 한 것은 이미 수거를 했지만, 수거가 제대로 안돼 극단의 처방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준다. 李成桂와 濊貊族들이 한단사 말살에 얼마나 혈안 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李氏朝鮮이 한단 역사서를 다 수거하고 감춘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李氏朝鮮은 분명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긴 나라다. 한단사만 수거하고 없앤 것이 아니라, 三國史記, 高麗史에서 온갖 문헌을 다 조작했다. 高麗가 高麗史를 축소할 수는 없다. 高麗는 李氏朝鮮史를 왜곡할 수 없다. 李氏朝鮮史는 李氏朝鮮 스스로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李氏朝鮮實錄도 광범위하게 날조된 책이다. 단계적으로 우리나라 영토를 축소한 것 외에도 李氏朝鮮 이후의 동아시아사를 다 바꿨다. 일례로 明, 淸은 동시대에 존속하고 淸에게도 李氏朝鮮 초 부터 조공을 했으면서 淸이 明을 멸망시키고 동북아를 가로채자, 李氏朝鮮實錄을 뜯어고쳤다.

明, 淸과 李氏朝鮮은 중국 대륙을 揚子江, 黃河로 삼등분했다. 정복에 의해 차지한 것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어색한 분할이다. 三國도 7 백 년을 넘나들며 싸워온 揚子江과 黃河는 전투의 장애물이 아니다. 임의로 나눠 가지지 않고서는 그런 분할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淸은 스스로 明의 땅에 빌붙어 살던 미개종족임을 자인했다. 원래 미개종족이니까, 손해보는 것도 없었다. 역사날조를 할 당시에는 淸이 천년만년 중국 대륙과 동북아를 차지 하리라고, 머지않아 韓半島까지 집어삼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의 사실 인정은 감수했던 것이다. 더구나 黑水女眞을 끌어들여 滿州族으로 만들고, 자신들은 漢族으로 멋지게 변신할 생각 이었으니까.

李氏朝鮮은 이미 기록에 나타난 것만 따져도 世祖 때 부터 한단 역사책을 수거해서 韓國史 말살에 적극 나선 나라다. 한단사도 말살한 李氏朝鮮이 三國史記와 高麗史를 그냥 둘 리 없다. 高麗史는 1392 년 부터 1451 년 까지만도 여섯 번이나 날조했다.

우리나라의 역대왕조 가운데 광대한 영토를 상실한 것은 李氏朝鮮 뿐이다. 그것은 雙城摠管府와 東寧府의 위치에서도 알 수 있다. 李氏朝鮮이 건국 하면서 우리나라 영토가 축소 되었으므로 李成桂는 高麗史를 왜곡해 자신의 책임을 우리나라에 전가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해 버렸다. 영토 상실은 全王朝史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역사를 줄줄이 축소를 너머 말살한 이유는 될 수 없다. 李氏朝鮮의 비정상적인 행적은 단순히 우리나라 영토를 상실 했다는 사실 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영토 상실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5300 년의 식민종족 중국에게 李氏朝鮮이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明, 淸의 무력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역사를 줄줄이 축소 했다면, 李氏朝鮮實錄에 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李氏朝鮮은 高麗에게도 모든 책임을 전가한 나라다. 그런 나라이니 만큼 역사축소 책임을 中國에게 혹은 高麗에게 전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려 했다는 사실마저 감춘 나라다. 李氏朝鮮 에게는 떳떳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軍事大國은 李氏朝鮮이지, 明이 아니었다. 高麗가 발명한 모든 첨단무기는 明이 아니라 李氏朝鮮이 가졌다. 火藥, 火箭, 火口, 질려포(疾藜砲), 飛火槍...... 宋의 발명품으로 종이 위에서나마 인심 쓴 것들은 高麗 初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 (飛火槍이 走火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니까, 火箭, 火口, 疾藜砲도 中奴가 모방해서 만든 것일 가능성도 있다). 神機箭, 火車...... 高麗의 최첨단 무기들은 李氏朝鮮이 다 가로챘다. 高麗는 한민족 5 천 년의 과학문화가 응집된 진정한 軍事大國이었다. 李成桂는 明, 淸의 무력 위협이 아니라, 협박에 굴복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이 존속하는 내내 明, 淸에 적극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李成桂한테 우리나라의 統治者로서 결격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약점을 잡은 明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바꾸고, 영토까지 빼앗았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 한 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없는가. 統治者 로서의 요건은 의외로 제한이 없다. 거지에 일자무식한 朱元璋도 중국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오직 하나 우리민족이 아닐 경우에만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없다. 淸이 中奴의 통치자가 되었듯이, 匈奴, 鮮卑, 거란(契丹), 濊貊, 蒙古 등이 줄줄이 中土로 가서 中土를 지배했듯이, 李成桂가 우리나라를 정복 했다면 충분히 우리나라의 統治者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李成桂는 濊貊族이고, 우리나라를 정복하지도 못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차지한 植民種族이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있는 길은 華夏族과 제 동족에게 우리나라 영토를 넘기고, 우리나라 역사를 팔아먹는 것 뿐이었다. 그래놓고 온갖 인간들에게 역사말살의 책임을 덮어 씌웠다.

秦始王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지 않았다. 中土 절반(티벳고원 북부 동쪽)을 통일한 秦始王 呂政은 解慕漱의 신임을 받고자 하면서도 檀帝를 직접 찾아 뵙지도 못하고 고작 中土에 있는 太山에 가서 祭를 올리려다 滄海力士 黎洪星의 공격을 받고 도망친 자다. 그런 자가 中寇의 역사가 한민족의 지배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했을까. 죽는 순간 까지도 解慕漱의 신임이나 바랐을 자다.

唐 太王 李世民도 우리나라 역사를 훔칠 수 없었다. 唐 高王 李治도 高句麗, 百濟 역사서를 분서할 수 없었다. 너무도 미개국이니까, 우리나라 역사를 훔쳐 自國史를 거창하게 꾸미겠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흔히 거란(契丹)이 大震國史를 말살 했다고 말한다. 거란이 불태웠다는 大震國의 忽汗城 부터 거란은 王城으로 사용했다. 유목민족 거란이 동아시아 天子國의 皇城을 불태우면, 천막에서 사는 길밖에 없다. 거란이 분서 했다는 大震國史는 세세한 부분까지 모조리 中國史로 둔갑해 있다. 大震國 유민이 세운 나라들이 거란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忽汗城에 보관 중인 大震國 역사서는 분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全國에 보관 중이던 大震國史는 고스란히 남아 高麗가 물려 받았다. 원래 역사책은 전국민이 읽고 배우는 책이다. 史庫가 불탄다고 국민들이 가진 역사책이 사라지는가.

수천 년사를 순수창작 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中國史는 未開史에서 文明史로 둔갑만 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와 완전히 뒤바꿔 썼다. 李氏朝鮮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고려 때 송의 관리가 대동강 평양에 와서 기자묘(箕子墓) 찾아 보기를 원하였으나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 년(1102) 예부상서(禮部尙書) 정문(鄭文 ?~1106)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기자묘라 하고 사당을 세워 중사(中祀)로 제향을 올렸다. 그 뒤 평양의 사당에서 주벽(主壁) 단군왕검의 위패를 서향지좌로 하고 기자의 위패를 주벽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기자는 삭망향축(朔望香祝)까지 올리는 제전(祭田)이 있었지만 봄·가을 두 번 지내는 단군 제사에는 제전조차 없었다.
http://greatautumn.com.ne.kr/history/root_of_history.htm, 9 천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高麗는 동아시아를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三國史記의 편자 金富軾 조차 箕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箕子朝鮮이 高麗 때 전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舞主古塚을 하나 찾아 箕子墓라 해? 李氏朝鮮은 사기그릇 몇 개 묻어두고 箕子墓라 한 나라다. 무엇보다 箕子를 한민족의 정통으로 떠받든 것은 李氏朝鮮이다. 李氏朝鮮의 얘기를 각색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高句麗의 平壤은 高麗의 開京이다. 浿水가 남으로 흐르는 平壤은 長安이지, 韓半島의 平壤이 아니다. 平壤에 箕子墓를 세웠다면, 중국 대륙에 있어야지, 현 平壤에 있을 수 없다.

한단사 부터 三國史記, 高麗史 등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한 것은 李氏朝鮮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우리나라 영토를 포기한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자신의 책임을 모두 우리나라에 떠넘겼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하고, 우리나라의 피지배종족 漢委奴 明과 淸을 떠받든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잘난 나라로 추앙받고, 동아시아의 대제국 高麗는 단지 蒙古의 침입에 굴복했다는 이유 하나로 없느니만 못한 못난 나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蒙古는 高麗를 침입한 적이 없다. 아니, 침입할 수 없었다. 고려가 너무나도 거대한 대제국이었기 때문에 유럽까지 정복한 蒙古도 高麗만은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高麗는 위대한 조상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 나라이고, 李氏朝鮮은 위대한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려한 나라다. 하기야 제 조상이 아니니까. 배달에서 高麗 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언제나 강대했다.

倭寇가 高麗 末에 침입 했다고 하지만, 李氏朝鮮 초에도 백여 차례나 침입했다. 李氏朝鮮은 크고 작은 倭亂까지 수시로 발생한 나라다. 그뿐인가. 결국 5 천 년의 식민종족 華夏에게 중국 대륙과 동북아를 준 것도 모자라 上國으로 떠받들고 華夏의 일파인 倭奴 한테는 국권까지 빼앗긴 나라다. 그 결과, 우리민족이 어떠한 고통을 받았는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한단 역사서를 모조리 거둬들여 왕궁에 감춰 두었으니까, 사실상 倭奴가 王宮에 있는 한단 역사서만 일본으로 빼돌려도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할 수 있었다. 李氏朝鮮이 그처럼 혈안이 되어 시시때때로 韓國史를 수거해왔기 때문에, 그게 전통으로 굳어져 倭奴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수색, 압수할 때도 순순히 내놓았던 것이다.

 

2) 이성계는 예맥족이다

李成桂(1335~1408)의 고조부는 高麗에서 蒙汗으로 歸化한 인물이고, 李成桂의 父는 蒙汗에서 高麗로 귀화한 인물이라 했다. 李成桂의 부 子春(소위 桓祖라는 시호를 받았다)은 恭愍帝 4 년에 처음으로 雙城摠管府 千戶 자격으로 高麗朝廷에 來朝하러 왔다고 했다. 李成桂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 소위 穆祖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高宗 때 사람으로 蒙汗에 歸化,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濊貊族을 다스렸고, 李子春까지 蒙汗에서 벼슬을 살았다.

李安社가 蒙汗으로 귀화한 때는 高麗가 蒙汗의 침입을 받기 시작했다고 날조된 시기다. 高宗 때는 물론이고 蒙汗은 高麗를 한 번도 침입하지 못했지만, 高麗 高宗 때, 濊貊族에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濊貊族이 세운 金汗이 망한 것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귀화한 때는 蒙汗이 쇠약해져 망하기 일보 직전인 恭愍帝 때다.

李成桂 家系의 특징은, 한 마디로 기회주의자들의 집안이라는 것이다. 出世를 위해서라면, 國籍을 바꾸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李安社가 高宗 때 지의주사(知宜州事)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출세를 위해 과연 국적까지 바꾸었단 말인가. 그래서 지방 관리의 탄압을 받아 蒙汗으로 도망쳤다고 날조했다. 고작 地方 官吏의 보복이 무서워 高麗 영토를 벗어나 蒙汗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고조부모의 능인 덕릉(德陵)과 안릉(安陸)은 타타르인이 주 활동 거점지 달단동(鍵輯洞)에 있었다고 조선실록은 쓰고 있고 이성계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영흥(永興)에는 성(萬里長城)이 통과하고 있었으며 (쌍성총관)부(府)의 북쪽에는 만리장성의 관문이 있었다고 정사서가 쓰고 있다.
(http://www.chosunsa.co.kr/lec1/history1%2813-1%29.htm, 이성계는 타타르인)

萬里長城은 “李成桂는 타타르인”의 저자가 추측한 것이고, 실제로 實錄에는 萬里長城 이라는 말이 없다. 高麗長城이다.

高麗 元宗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정책은 확고하게 異民族과 섞여 살지 않는 것이었다. 蒙古가 雙城摠管府를 설치한 것을 기화로 蒙古의 일파인 숙여진 일부가 雙城摠管府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지명이 밀렸다.

중국 대륙의 지명 중 밀리지 않은 것은 長安(高句麗의 長安에 티벳고원 북부의 長安을 포겠으니까, 실제로는 밀린 셈이다)과 太白山, 桂林 정도일 것이다. 濊貊族은 高句麗 때 부터 柴達木盆地에 살았다. 高句麗와 大震國이 멸망할 때, 柴達木盆地에서 기어나오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우리나라에 의해 도로 柴達木盆地로 집어 넣어졌다. 12 세기 초 거란이 쇠한 것을 보고, 나라를 세울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깨달은 濊貊族은 中土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해서 柴達木盆地에서 나올 수 있었으나, 백 여년 뒤, 蒙汗에 정복되고 말았다.

濊貊族이 살던 달단동(鍵輯洞)은 柴達木盆地에 있었다. 高麗가 권력투쟁으로 어이없게 柴達木盆地 등을 상실하자, 또 다시 濊貊族은 中土에서 기어나와 蒙汗 땅이 된 柴達木盆地로 들어갔던 것이다. 蒙汗이 濊貊族을 우대했다고 하지만, 겨우 예전에 살던 柴達木盆地로 밀어 넣은 데 불과하다. 그 정도 우대라면 우리나라가 대대로 濊貊族에게 해주었다.

우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숙여진은 柴達木盆地에 사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蒙汗人은 소수종족이라 長城 이북을 차지 하고도 방어할 병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같은 蒙古族인 숙여진과 거란을 활용했다.

雙城摠管府가 있던 黃河 하류 이북에도 百濟長城이 있었지만, 柴達木盆地의 북동쪽에도 長城의 끝자락이 길게 뻗어 있다. 高麗長城이다.

李安社는 다루가치(達魯花赤) 였다고 했다. 實史 에서는 東寧府는 1258 년, 雙城摠管府는 1270 년에 설치됐다. 實史에서는 쿠빌라이(世祖 1260~1294 재위)가 長城 이북을 가져가면서 蒙汗이 접수한 高麗 땅에 다루가치를 몇 년 간 설치 했지만, 날조사 에서는 西京과 西北面에 한해서 高宗 때 부터 景孝帝 때 까지 다루가치를 설치했다. 그러므로 李安社가 다루가치라도 되려면 西北面인 東寧府에 살아야지, 東北面인 雙城摠管府에 살아서는 안된다. 李成桂는 東寧府의 高麗長城 지역에서 살면서 삐뚤어진 야망을 키웠던 것이다.

 

李安社는 언제 출생했는지 알 수 없고 1274 년 까지 살았으므로 이미 李成桂가 高麗 皇位를 찬탈할 당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李成桂가 자신의 고조부 李安社가 蒙汗에 귀화하기 전 까지 高麗人이며 “高宗 때 知宜州事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고 얘기 한다면 모두가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知宜州事를 지낸 李安社라는 인물이 실제로 있었다면, 더욱 신빙성을 더해 주겠지만, 李安社의 출생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全州李氏 족보에도 안 올랐던 사람이다. 高麗人 李安社는 존재하지 않았다.

李成桂의 父 子春이 高麗로 귀화하기 전, 雙城摠管府 격파에 절대적 협력을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 雙城摠管府 격파를 무려 12 년이나 앞당겼다. 李安社가 高麗人 이었다면 그런 구질구질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李安社가 蒙汗에 歸化한 후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살았던 東寧府는 濊貊族(숙여진)이 집단으로 이주해 우리나라의 감시를 받으며 천 년 동안 살던 柴達木盆地이다. 濊貊族이 中土로 들어간 후 柴達木盆地에는 高麗人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濊貊族이 柴達木盆地로 재차 이주했을 때는 高麗人과 같이 살았다. 그러나 高麗史와 世宗實錄에서 揆園史話에 이르기까지 濊貊族과 李成桂의 家系를 기록한 모든 기사는 李安社와 李成桂가 高麗人이 아님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를 中奴에게 주고, 中奴史를 우리나라 역사로 둔갑 시켰던 것이다.

李安社는 濊貊族이었던 것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歸化한 것은 李成桂가 21 살 때였다. 李成桂도 濊貊族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李成桂의 外家도 濊貊族 이라니까, 李成桂는 순수 濊貊族 혈통이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서 권력탈취를 위해 威化島 회군했을 당시, 東北面이 아니라 西北面의 濊貊族 천 여명이 밤낮을 달려와 지원했던 것이다(이성계는 타타르인).

李安社는 高麗人이 아니나 高宗 때 蒙汗에 귀화한 것은 맞다. 高宗 때 濊貊族이 세운 金汗이 蒙汗에 망했다. 李安社는 티벳고원 북부에 살다가, 金汗이 정복된 것을 계기로 蒙汗人이 되었다. 귀화가 아니라, 나라 자체가 멸망하고 蒙汗 땅으로 변했으니, 그냥 蒙汗人이 된 것이다. 李安社가 蒙汗이 될 당시는 雙城摠管府는 커녕 東寧府도, 8 站(jamuchi)도 설치되기 전이다. 그래도 다루가치 까지 된 걸로 보아 蒙汗에 적극적으로 충성한 모양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귀화한 때는 蒙汗이 쇠약해져 망하기 일보 직전인 恭愍帝 때다. 李成桂의 집안은 전형적인 機會主義者의 家系였던 것이다.

‘李’는 李子春에 이르러 恭愍帝로 부터 받은 賜姓이기 때문에 李安社는 李安社가 아니고, 이행리는 이행리(李行里 翼祖)가 아니며, 이춘(李椿 度祖)은 李椿이 아니다. 李安社는 金汗式 이름과 蒙汗式 이름이 있었고, 李行里와 李椿은 蒙汗式 이름밖에 없었다.

 

恭愍帝의 蒙古式 이름이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蒙汗은 자신의 딸을 대대로 高麗 皇帝에게 시집 보내는 수법으로 高麗에 빌붙어 살던 나라다. 高麗 皇帝의 은혜에 기대 산 나라였다. 高麗 皇帝가 그런 蒙汗의 이름을 가졌겠는가.

高麗 皇帝가 우리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蒙汗 皇帝의 손자가 되다 보니까, 몽고식 이름도 하나 붙여줄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자를 사용한지 2 천 년이 가까운 나라에서 맏이, 얼굴, 문서, 나무, 아이라고 열거해 통치자의 이름을 짓는가. 恭愍帝는 숙제(날조사의 忠肅王 1294~1339)의 둘째 아들이므로 설령 蒙古式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顔帖木兒는 될 수 있어도 伯顔帖木兒는 될 수 없다.

伯顔帖木兒는 원래 문자를 모르던 미개 종족에게 蒙汗國이 공문서(인구통계 등) 작성을 위해 붙여 주었던 이름의 하나로 시간이 흐르자, 미개 유목민족 스스로 애용하게 된 것이다. 伯顔帖木兒는 상식적으로 顔帖木兒의 형 보다는 자손일 확률이 높다. 아들을 더 낳을 계획인 蒙古人이 첫아들을 伯顔帖木兒라고 했다면, 둘째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첫 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는 소리다.

안첩목아(顔帖木兒 ; 앤티무르)는 成桂의 曾祖 춘(椿)의 본명 이었다. 그런데 顔帖木兒의 아들 즉 子春의 몽고식 이름은 오서사불화(吾暑思不花)다. 伯顔帖木兒는 자연히 한 대 건너뛴 成桂의 본명 이었던 것이다. 한족으로 둔갑하면서 제 이름을 恭愍帝에게 떠넘긴 것이다.

成桂는 이두란(李豆蘭)과 결의형제를 맺었다지만, 원래 친형제간이다. 豆蘭의 본명은 帖木兒(티무르)다. 成桂는 伯顔帖木兒(빠이앤티무르)니까, 이 둘이 형제이었음을 알 수 있다. 成桂는 帖木兒가 태어날 때 까지 伯顔帖木兒라는 비천한 이름조차 없이, 이 새끼, 저 새끼로 불리던 종자였음이 분명하다. 7 살 까지 이름조차 없었던 伯顔帖木兒는 그 사실을 高鄒牟에게 슬쩍 떠넘겼다. 그런 천하디 천한 노예 종자가 유언비어를 유포해 高麗皇帝를 제거한 뒤 9999 개의 방을 가진 紫禁城을 짓고, 전세계에 군림하며 皇帝 노릇했던 것이다.

친형제간 이라서 한족으로 변신한 成桂는 濊貊族 帖木兒와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날조했다. 帖木兒는 成桂의 둘째 처 姜氏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형제가 나란히 이모와 조카딸에게 장가든 것이다. 같은 姓氏끼리 혼인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사촌, 고종, 이종 누이들은 물론 이모, 조카를 가리지 않고 妻로 삼은 것은 新羅가 아니라, 濊貊族을 포함한 蒙古族이었던 것이다.

帖木兒(豆蘭)는 伯顔帖木兒(成桂)와 吾暑思不花(子春)이 귀화한지 16 년 뒤인 1371 년(恭愍帝 20)에 高麗에 귀화하지 않았다. 帖木兒는 伯顔帖木兒의 동생이고, 吾暑思不花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아비 吾暑思不花가 동족을 팔아 高麗에 東寧府를 넘긴 대가로 高麗에 귀화할 당시, 제 아비를 따라왔다.

東寧府 정벌이 1357 년 11 월에야 완료 되었으므로 吾暑思不花가 高麗로 귀화한 것은 1357 년 말 내지 1358 년이었다. 伯顔帖木兒(成桂)의 나이가 23 살 이었으니, 帖木兒는 10 살 전후였다. 그러므로 帖木兒는 千戶는 커녕, 百戶 조차 아니었다. 한족으로 둔갑한 伯顔帖木兒와 濊貊族 帖木兒가 형제간임을 부인하기 위해서 帖木兒가 吾暑思不花(子春)이 귀화한지 16 년 뒤에 高麗로 귀화했다고 날조했다. 帖木兒가 李氏朝鮮 개국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伯顔帖木兒와 朱元璋 사이의 연락책 이었기 때문이다.

顔帖木兒의 아들은 吾暑思不花, 吾暑思不花의 아들은 伯顔帖木兒와 帖木兒였다는 사실에서 成桂 집안은 姓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안사(安社)의 원래 이름은 뭘까. 한단고기에 나온다. 야사불화(埜思不花)다. 埜思不花와 吾暑思不花는 祖父, 孫子간이고, 伯顔帖木兒와 帖木兒는 형제간 이니까, 埜思不花의 아들 행리(行里)의 진짜 이름은 暑思不花나 思不花쯤 될 것이다.

날조사에서 成桂의 할아비는 椿, 아비는 子春이다. 그러나 누가 부모 이름에 子자 하나 붙여서 이름을 짓는가. 高麗에서는 없었다. 항렬에 따라 돌림자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成桂는 제 조상의 이름을 날조 하면서 무심코 濊貊族의 버릇을 모방한 것이다.

埜思不花는 본국(本國)이 아니라 번국(蕃國) 사람이었다. 元에 있으면서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1274 년에 죽은 인간이다. 埜思不花는 향사(嚮使)도, 삭방도병마사(朔方道兵馬使)도 아닌, 東寧府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횡포를 부렸다. 天使 즉 天子의 사신 정지상(鄭之祥)을 맞아 “다시는 高麗를 섬기지 않는다.”며 거만하게 굴다가 철퇴에 맞아죽은 종자다.

埜思不花가 죽은 후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능력껏 출세에 도움 될 蒙汗 여자와 결혼 했음에도 萬戶인지 千戶(상상 속에서 천호가 된 帖木兒의 예에서 보듯이 百戶, 十戶 혹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인지 외에는 東寧府에서 직위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高麗가 東寧府를 공격하는 기회에 吾暑思不花는 제 동족을 팔아 高麗로 전향했던 것이다.

 

“滿州의 동류(同類)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된 까닭인가?(滿州之讎爲不俱戴天則獨何故耶 揆園史話 序文)" “淸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자(說淸帝 談同祖 揆園史話 漫說)." 淸나라 皇帝와 조상이 같은 건 우리민족이 아니라, 李成桂다.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이후 高麗 때 까지 단 한 번도 異民族을 皇帝로 삼은 적이 없다. 한단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濊貊族 李成桂가 우리나라 왕이 되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기원전 7197 년에 개천해 6 천년간 동아시아에 군림해온 나라 에서는 濊貊族은 절대로 皇帝가 될 수 없다. 濊貊族은 우리나라의 속민 이었다. 같이 섞여 산 것도 아닌, 그들만의 거주지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蒙古干涉期 이전 까지는 濊貊族과 한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 아무리 恭愍帝 이후 濊貊族의 귀화를 허락했다 하나, 그런 濊貊族이 우리나라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熊氏族 女王이 배달 1 세 한웅 거발한(居發桓桓雄)과 혼인 했음에도 熊氏族의 첫 王儉(배달의 제후)이 나오기 까지는 무려 천 년이 넘게 걸렸다.

만선사관(滿鮮史觀)에 찌들은 자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麻衣太子 후손이 지도한 生女眞이 淸을 세웠다면서 淸이 우리나라라고 우긴다. 生女眞은 나라를 세우지도 않았고, 그러한 식의 논리는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는 작태다. 초라하게 쪼그라든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짓이다. 新羅人이 生女眞을 지도해서 濊貊族이 세운 淸이 우리나라라면, 濊貊族을 王으로 받든 우리나라는 濊貊族의 나라란 말인가.

李成桂는 자신이 濊貊族 이라는 사실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꿨다는 사실이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말 한 마디가 모든 진실을 알려준다.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洪武)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三國史記의 일식기록은 李成桂의 말이 얼마나 허구에 찬 거짓인지 적시하고 있다.

세상에 自國史를 말살하는 인간이 어디 있던가.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조차 말살된 韓國史를 축소했을 뿐이다. 李成桂는 濊貊族이다. 李成桂에게 韓國史는 他國史였다.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살할 수 있었다. 李成桂에게 있어서 韓國史는 교환의 대가로 자신이 왕노릇할 수 있는 비싼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朝鮮人 보다 더 朝鮮人으로 살다간 沙也可도 있다. 沙也可의 영정을 보라. 거기서 倭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가. 朝鮮人 보다 더 朝鮮人 같이 생겼다. 沙也可 金忠善은 생김새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정신 까지도 朝鮮人 이었다. 沙也可의 號는 中國을 그리워 한다는 慕夏堂 이었다. 우리나라 家門의 족보책을 뒤져 본다면, 李氏朝鮮이 얼마나 事大主義에 썩어빠진 나라인지 알 수 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王位를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5300 년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한 긍지 높은 민족이다. 李成桂가 濊貊族인 사실이 드러나면 아무도 李成桂를 우리나라 통치자로 추대할 사람은 없다. 濊貊族은 우리나라 땅에 등장한 기원전 19 세기 부터 朝鮮時代 까지도 줄곧 우리나라에 의해 멸시받던 종족이다.

李成桂는 江陵帝를 폐위 시키면서 신돈(辛旽 ?~1371)의 자식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江陵帝의 아들을 옹립했다. 결국 李成桂는 辛旽의 자식임을 알면서도 옹립 했다는 모순에 빠진다. 高麗皇帝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해서 皇位를 계승할 수 없다고 李成桂 스스로 말했으니까, 高麗人도 아닌 濊貊族은 당연히 우리나라 皇帝가 될 수 없다.

그래서 李成桂는 高祖父가 高麗人 이었다고 왜곡한 것이다. 그런데 濊貊族은 李成桂만이 아니다. 李成桂의 동족도 있고, 明으로 넘어간 濊貊族도 있었다. 李成桂가 濊貊族이란 사실은 明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李成桂가 濊貊族이란 사실은 李成桂가 皇帝가 되는 것을 막는 오직 하나의 결격사유였다. 高麗로 귀화한 濊貊族은 李成桂가 高麗人인척하고, 또 李成桂가 권력을 잡으면 그들에게도 유리 하니까, 입 다물고 있었지만, 明으로 간 濊貊族은 다르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을 朱元璋에게 알려야 그들의 출세길이 열리는 것이다.

당연히 明은 협박했다. 단 한 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네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 피지배 종족들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부러워 해왔다. 그래서 朱元璋과 李成桂의 자리만 바꾸자고 했다. 朱元璋은 한民族의 皇帝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中奴가 너무 미개해서 李成桂가 거부했다. 그런 나라의 왕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 결과, 朱元璋과 濊貊族에게 현 黃河 이남을 주고 대대적인 역사날조 작업이 진행 되었던 것이다. 三國, 大震國, 高麗의 正史만이 아니다. 배달에서 朝鮮, 大夫餘, 北夫餘에 이르는 正史에서 史草, 潛夫論, 通志·氏族略 등 온갖 문헌에 기초 자료에 해당하는 공적 장부까지 다 朱元璋의 손에 넘어갔다. 여기에 文學, 科學 분야의 서적까지 더해졌다. 三國의 正史書만 해도 수천 권이다. 李成桂가 넘긴 문헌이 수만 권인지, 수십만 권인지 짐작이 안 간다.

明이 高麗에 遷都를 요구했다는 말(高麗史節要 禑王 9 년)은 날조다. 明은 揚子江 이남을 차지했다. 高麗의 수도는 長安이다. 濊貊族이 요구했으면 모를까, 李成桂가 韓半島로 내빼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다.

高麗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자신이 실권을 잡고 있던 高麗末에 遷都를 단행했다. 그래야 高麗가 明에 영토를 빼앗겼다고 유언비어를 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遷都한 시기는 昌王 때다. 江陵帝를 폐위하고 고작 9 살인 昌을 옹립한 것은 韓半島로 천도하기 위해서였다. 천도 후 李成桂는 10 살인 昌王을 시해(弑害)했다. 어린아이를 죽이고 황위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恭讓王을 옹립해 3 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역시 폐위시키고 시해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과거에 동아시아의 天子國이고 大帝國이었다 해도 高麗가 쪼그라든 초라한 나라였다면, 朱元璋은 우리나라 역사를 원하지 않았다. 똑같이 蒙古에 정복됐지만, 중국 대륙 중앙에 떡 버티고 있는 高麗와 국체조차 보존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중국. 몽고는 티벳고원 북부는 여지없이 정복했지만, 권력투쟁에 몰입한 高麗와는 전쟁조차 벌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너무도 차이 나니까,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5 천년 天子國 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高麗史에 長安城을 차지한 전쟁 및 다수의 전쟁 기록을 누락시킨 것은 李氏朝鮮 이었다. 高麗가 연전연승한 기록을 내버려두면, 李成桂가 중국 대륙을 朱元璋에게 준 사실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李成桂는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는데, 아무 거부감이 없었다. 濊貊族 이었으니까. 단지 왕노릇만 할 수 있으면, 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고 서슴없이 날조한 것이다.

정도전(鄭道傳 1337~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이 李成桂가 濊貊族 이었음을 몰랐을까? 李成桂가 濊貊族임을 알았든, 아니든 광대한 우리 영토를 포기하고 역사를 말살 하는데, 동참 했다는 점에서 鄭道傳, 權近 등 소위 李氏朝鮮의 開國功臣들은 모두가 매국노다. 연남생(淵男生 634∼679)은 같은 민족인 新羅에게로 갔고, 발기(發岐)는 百濟로 갔다. 하지만 鄭道傳과 權近 등은 일신의 영화를 위해 우리나라 피지배 종족에게 영토와 역사를 모두 다 주었다. 李成桂는 1 만년 韓國史에서 제1의 賣國奴다.


 

 

▲ 백상루(百祥樓)
백상루는 평안남도 안주읍성 서북쪽에 서있는 루대이다. 안주는 백제 때의 석성이다. 고려 때 처음 세워진 백상루는 조선시기 1753 년 읍성의 면모가 완성되면서 고쳐 지어지고, 관서8경의 하나로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내려왔다. 백상루란 여기서 백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볼 수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살수의 푸른 물결 굽이쳐 출렁이는데,
수(隋)나라 백만 대군이 물고기가 되었음이여.
이제는 어부나 나무꾼의 이야기로만 남아,
나그네의 작은 웃음거리도 못되는구나.

(
薩水湯湯漾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語 不滿征夫一哂餘
)

隋나라 백만 대군? 百濟와 高句麗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 이었을 때, 백만 대군을 보유했다. 티벳고원에서 백만을 거느릴 수 있는가. 10 만도 벅차다.

조준(趙浚 1346~1405)이 明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읊었다는 시(百祥樓賦詩)는 乙支文德을 칭송한 것이 아니라, 역사날조 작업이 성공하고, 李成桂와 朱元璋이 땅을 나눠가진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지었다. 李成桂와 趙浚에게는 乙支文德 조차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蒙汗도 차지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를 蒙汗의 동족 李成桂는 역사날조 하나로 차지한 것이다.


 

三國史記는 明이 축소했다. 李成桂가 날조 중국사에 일치시켜 三國史記를 축소하기란 불가능하다. 李成桂에게 맡기면 어디를 어떻게 축소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역사를 맞바꾼다 해도 축소 날조의 지침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날조 연호를 알아야 하고, 무얼 바꿀지 등등. 그 과정에서 三國史記의 천문기록은 빼버렸기 때문에 李成桂는 다시 三國의 天文記錄을 집어 넣어야 했다.

三國史記에는 온갖 인용 문헌이 등장한다. 소위 25 史는 시대구분만 해놓으면 책을 쓰기 전이라도 간단하게 이름 붙일 수 있다. 周書, 漢書, 三國志, 隋書...... 그 외 문헌은 우리나라 문헌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배구전(裵矩傳), 통전(通典), 회남자(淮南子), 논어정의(論語正義, 論語도 물론이고)는 원래 우리나라 책이다.

李成桂가 三國史記를 축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행한 사실만 알려져 있지, 三國史記를 수정했다는 기록이 없다. 高麗史 처럼 李氏朝鮮이 축소 했다면 6 번이나 수정 했다고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恭愍王以下事多不實宜更竄定 太宗實錄 恭愍帝 이후 왜곡과 날조를 더하고 李成桂에 관해서는 확실히 부풀렸다는 소리다)", “본래의 史草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 잡히게 되었다(이씨조선이 史草대로 쓰지 않았다는 실토다)",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儒敎的이고 事大的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었다(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를 뒤바꾸었다는 소리다)", “이 부분을 實錄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實錄을 무시하고 썼다는 소리다)",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이때 우리나라에 귀화한 濊貊族 대부분을 우리나라 사람으로 둔갑시켰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내용을 더욱 날조했다는 뜻이다)",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체재를 바꾸면서 완전히 뜯어고쳤다는 소리다)"처럼. 高麗史를 날조하기 위해 늘어놓은 변명을 보면, 李氏朝鮮이 사실대로 역사를 쓰는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너무도 많은 李氏朝鮮實錄의 역사왜곡 사례들을 이 좁은 공간에 늘어 놓을 수가 없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 http://www.jeongdoryeong.net/josun_sillok11.html )를 참조하기 바란다.

李成桂 즉위와 동시에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해야 하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李氏朝鮮 중간에 느닷없이 三國史를 축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李成桂는 高麗의 황위를 빼앗느라 바빴기 때문에 朱元璋이 三國史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三國의 正史書는 놔두고 三國史記만 축소했다. 이렇게 축소된 三國史記는 李成桂 즉위 3 년에 간행됐다.

高麗史는 高麗에서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고, 李氏朝鮮이 창작했다. 高麗 역사책은 實錄과 史草 밖에 없었다. 三國史記 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李氏朝鮮은 高麗史를 편찬한다는 구실로 高麗史를 축소할 수 있었다. 李成桂의 즉위(1392)와 동시에 작업에 들어가 1451 년에 일단 완성 되었다. 60 년이나 걸렸다. 高麗實錄과 高麗 末의 史草를 기본 자료로 했다면서, 무려 6 번이나 고쳐 썼다.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유교에 입각하여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를 中奴에 대한 事大主義 국가로 만든 것이다.


▲ 大明混一圖



역사를 날조 하려면, 그에 선행해서 지명을 밀어낸 날조지도 부터 만들어야 한다. 中土의 지명을 밀어낸 시기는 李成桂가 실권을 잡은 高麗末 1389 년으로 추정된다. 1389 년, 朱元璋은 高麗 지도를 보고 大明混一圖를 만들었다.

동계의 화북 15 주가 몽고에 소속되어 쌍성총관부가 수립되었다.(살아 있는 한국사)

高麗 말 까지도 黃河가 金沙江이었다. 黃河를 밀어내 華北이라 쓴 날조지도를 보고 李氏朝鮮이 華北 15 州라 쓴 걸까. 일반적으로 高麗의 和州지역이 雙城摠管府가 되었다고 말한다. 恭愍帝는 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和州牧을 설치했다.

周나라에서 지도를 제작한 관원이 직방씨(職方氏)? 周나라의 시조 后稷도 우리나라 사람이긴 하지만, 周나라는 지도 제작을 하지 못했던 미개소국이다. 티벳고원 북부를 백 여개의 제후국에게 나눠주고 周王室은 고작 땅 한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지도를 제작한단 말인가. 周書? 먹고 살기에도 급급했을 周王이 무슨 史官을 두고, 史草를 쓴단 말인가. 明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끼고, 우리나라 지도를 베껴서 周나라가 쓰고 그렸다고 한 것이다.

宋이 만들었다는 화이도(華夷圖 1137 년에 만들었다)를 보면, 宋이 있던 티벳고원 북부는 대충 그리고, 우리나라 땅만 자세하다. 金沙江, 난창강(瀾滄江) 너머에는 지명이 몇 개 없다. 宋이 만든 지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明이 만들었다는 大明混一圖 역시 마찬가지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대한 애착심이 없었던가. 高麗의 지도를 베끼면서 韓半島를 생략했을 뿐이다. 티벳고원 북부의 소국 明은 역사 맞바꾸기에 앞서 지명부터 밀어내야 했다. 그때 만든 것이 바로 華夷圖와 大明混一圖이다.

 

朱元璋과 李成桂 사이에 밀약이 이루어지자마자, 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 전 부터 朱元璋은 서둘러 지명을 밀어낸 중국 대륙 지도부터 만들고, 李成桂는 韓半島에 중국 대륙의 지명을 우겨넣었던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權近 外 1402)의 발문에는 權近이 蒙汗의 세계지도를 참고했으나 韓半島와 日本이 소략하므로 그것을 첨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蒙汗이 세계대제국을 건국했다면, 高麗 역시 아라비아(이 땅의 사학자들은 아라비아에서 한반도까지 航海를 해서 무역을 했다고 주장한다. 아라비아인들이 그처럼 항해에 능숙 했다면, 무역이 아니라, 세계정복에 나섰다. 西洋도 大西洋을 간신히 건너자마자 식민지 정복에 나섰다) 등과 세계 무역을 했다.

高麗는 세계 탐험까지 했던 나라다. 蒙汗은 천막 하나가 유일한 재산인 유목민족이다. 色目人이 아니라 雙城摠管府 땅의 高麗人이 蒙汗을 위해 일했다. 高麗人이 일한 과실이나 향유하던 蒙汗이 세계지도를 만들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원 지도는 高麗 지도니까, 韓半島가 소략일 턱이 없다.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원 지도를 지명만 바꿔치기해서 그대로 베낀 지도다. 결국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나 華夷圖, 大明混一圖는 우리나라의 세계관을 반영한 지도였던 것이다.

▲ 순우천문도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1247)는 高麗의 천문도다. 지도도 못 만든 中奴가 天文圖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淳祐天文圖에는 종대부(宗大夫 : 韓半島에 나타나는 고유의 별자리)가 없고 韓半島는 독자 천문체계를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1916 년 부터 대대로 전왕조로 부터 천문대를 물려받아서 천문관측해온 나라다. 淳祐天文圖는 중국 대륙에서 제작한 천문도였던 것이다. 長安城(開京)에서 제작한 천문도일 것이다.

1389 년 高麗 지도를 베껴 大明混一圖를 만들고 나서 역사책 고치기에 들어갔다. 맨 먼저 날조한 것은 中國史가 아니고, 三國史記였다. 威化島 회군한 李成桂가 江陵帝를 내쫓고 내세운 昌王, 恭讓王은 합해 4 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축소한 三國史記는 李成桂 즉위 3 년에 간행됐다. 그러고서는 金富軾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三國史記 편찬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6, 7 년은 三國史記를 축소 하기에도 촉박한 시간이다. 그래서 이후에는 中國史는 明이 날조하고, 高麗史는 李氏朝鮮이 맡아 축소했다. 高麗史는 1451 년에 일단 완성했다. 60 년 만이었다.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그렇다면 배달, 朝鮮 시대에는 中奴가 우리나라를 성실 근면하게 섬겼다는 소린가. 아니다. 李成桂는 三國史, 高麗史는 축소하고, 한단사는 말살했다. 그래서 이유(李瑈 1417~1468 李氏朝鮮의 世祖라는 濊貊族), 이광(李晄 1450~1469 李氏朝鮮의 睿宗이라는 濊貊族), 이혈(李絜 1457~1494 李氏朝鮮의 成宗이라는 濊貊族)이 그처럼 한단사 말살에 혈안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 역시 한단사, 三國史, 大震國史 등을 대대적으로 수거, 분서했음은 물론이다.

한단사(桓檀史)까지 축소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또한 일개 제후국의 역사가 유구할 수는 없으니 배달과 朝鮮은 존재 자체를 부정키로 했다. 한단시대 中土에는 독자문화란 눈 닦고 찾아봐도 없었다. 중국이 문화라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필히 한단사를 지워야 했다. 그래서 한단사는 李氏朝鮮 왕조 대대로 수거, 분서했던 것이다. 자신의 國號는 朝鮮 이라고 하면서,,,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李氏朝鮮은 날조 역사책에 부합하지 않은 모든 우리나라 역사책을 焚書하고, 明 으로부터 받은 날조 역사책을 보급했다. 그 외에도 李成桂는 배달 이후 축적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수많은 우리나라 문헌을 明에 건네 주었다. 온갖 책을 다 줬다. 文明大國 中國에 문학서적이 없어서는 안되지. 그래서 新羅人이 桂林을 두고 읊은 詩도 唐나라인의 작품으로 둔갑했다. 저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唐宋八大家들의 주옥같은 싯귀들을 기억하는가? 기막힌 현실이 아닌가?

濊貊族의 나라라 李氏朝鮮은 5300 년의 한민족 국가의 유산을 거식증(拒食症) 환자처럼 소모해댄 나라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高句麗의 천문도를 중앙부만 고쳤다. 그 천문관측 기술조차 우리나라가 물려준 것이다. 거북선(龜船)은 高麗 때의 전함이다. 火砲, 走火, 지화통(地火桶), 神機箭, 火車 모두 高麗 때 만들었다. 백자(白瓷)는 高麗 시대에 이미 시도됐다. 한글조차 高麗가 만든 문자다. ......

심지어 李氏朝鮮이 존속하는 동안, 한문명이 퇴보했다.

 

당시 삼포(三浦)의 교역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산 비단이었다. 조선 상인들은 명나라의 비단이나 그 원료인 백사를 들여와 삼포 왜인에게 팔아서 짭짤한 이익을 남겼다.(역사스페셜 3 권)

慈烏支 한웅의 中土 정복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淮垈에 자리잡고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역대 檀君이 양잠(養蠶)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비단 만들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생업 중의 하나였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는 비단길 무역을 통해 西方과 무역했다. 비단이 주수출품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조차 비단길이었다. 李氏朝鮮은 黃河 이남을 明, 淸에 주고 韓半島로 내빼면서 비단제조 기술자까지 내팽개치고 온 탓에 비단 제작 기술까지 퇴보하고 말았다. 유구한 세월 선조들이 개발하고 개량해온 비단제조 기술까지 망각해 미개 明에 구차하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明의 비단 제조는 중국 대륙에 남은 우리민족이 맡았다.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동이전에서 “마한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 한 것 또한 양잠법이 고대 동이족에서 시작됐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해가 뜨는 동방에 거대한 뽕나무인 부상수(扶桑樹)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거대한 뽕나무가 신목(神木)으로 있는 동방을 부상국(扶桑國)이라 이른 것도 고대 양잠기술의 전래와 무관하지 않다.(실증 한단고기)

해뜨는 동방은 東夷族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朝鮮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뽕나무를 神木으로 삼을 만큼 비단 제작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高麗史를 올린 모 사이트에 보니까, “神木으로 東海 중에 多生하여 兩水가 同根으로 相依相存하므로 扶桑이라 하며 日出處라고 하였는데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서는 扶桑國 즉 日出國이라 하는 뜻으로 日本을 말한 것임”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산해경 해외동경(山海經海外東經)은 보면서 “倭는 연(燕)에 속한다”고 한 구절은 못 봤던가? 이 당시, 중국의 해외는 바로 중국 대륙이었다. 중국 대륙 대부분을 차지한 우리나라가 金沙江 너머에 있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 중국의 東海는 金沙江 이었다. 중국 대륙의 해뜨는 바다는 黃海는 될 수 있어도 韓半島 東海는 될 수 없다. 따라서 日本은 절대 扶桑國이 될 수 없다. 웃끼는 것은 일본역사날조의 대표격인 새역모에서 발간하는 日本史의 출판사 이름이 후쇼사(扶桑社)라는 이름이다. 왜들 친일에 목말라 하는가?

부상수(扶桑樹)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나무다. 그 扶桑樹가 있는 나라가 동쪽에 있어 日出處라 했다. 우리나라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민족을 東夷族이라 했다. 그 원뜻은 오랑캐가 아니고 동쪽에 사는 어진 종족, 근본인 종족이다. 오늘날 옥편을 찾아보면 夷는 ‘오랑캐, 동방동족,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평평하다, 평탄하다, 깎다, 온화하다, 안온하다, 기뻐하다, 크다’라는 뜻이 있다. 정반대 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랑캐,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등은 中土의 미개 오랑캐 華夏族이 揚子江 이남으로 기어 나온 후에 玉篇에 추가한 것이다.

倭에는 5 세기 말에야 양잠 기술이 도입됐다. 新羅人 진하승(秦何勝)의 선조가 건너가 양잠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양잠기술이 서툴렀는지 李氏朝鮮에 조공무역 하면서 15 세기 후반 이전 까지는 비단을 주수입품으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절대 扶桑國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그 어느 나라도 日本을 日出國이라 불러준 예가 없다.

중국은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면서 심지어 면직물 제조법도 중국이 개발 했다고 날조했다. 그러면서도 “東夷族은 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는 後漢書의 기록을 三國志 에서는 “馬韓 사람들은 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曉蠶桑作縑布 三國志)”로 고친 것으로 만족했다. 머리가 안돌아가서 그렇다. 심지어 日本에도 솜이 있었다.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가 주동이 되어 신라를 침공하려 했을 때, 日本 만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어 大震國을 끌어 들이려고 했다면서 후지와라는 大震國의 사신 양승경(楊承慶)에게 솜 1 만 둔(屯)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사신에게는 관례적으로 솜 300 둔을 주었다고 했다. 大震國과 연합해 新羅를 침공 하겠다는 계획은 사실이 아니지만, 솜은 있었다. 그 솜이 어디서 건너 갔겠는가. 우리나라다.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은 붓뚜껑에 목화씨를 넣어오지 않았다. 티벳고원 북부에 사는 中奴가 우리나라에 왔다가 붓뚜껑에 木花씨를 넣어간 것이다. 중국이 처음부터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날조하다 보니까, 종이 위에서나마 우리나라 사람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넣어가야 했던 것이다.

우리민족이 白衣民族이라고? 신이경(神異經)에는 “동방에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들은 모두 붉은 옷에 흰 띠를 두르고 검은 관을 쓰고 있으며 여자들은 모두 채색한 옷을 입고 있다(東方有人男皆縞帶玄冠女皆采衣)” 했다. 白衣民族은 中國과 日本이었다. 원래 물들이지 않은 천은 흰색이다. 채색할 여유조차 없어서 흰색 그대로 입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中奴는 “신자의 두 배의 ‘흰’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던” 것이다.

◀ 각저총(角抵塚)에서 발굴된 삼족오(三足烏) 벽화

까마귀가 흉조(凶鳥)라고? 三神五帝本紀에는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말하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하며 또 천왕랑(天王朗) 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烏羽冠)를 하사받는다(源花稱女郞男曰花郞又云天王朗自上命賜烏羽冠)”고 했다. 우리나라 고분 벽화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까지 나온다. 檀君世紀에는 8 世 檀君 우서한(于西翰=烏斯含) 때 “甲寅 7 년(B.C. 1987)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 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甲寅七年三足烏飛入苑中其翼廣三尺)”고 했다. 세발 달린 까마귀(三足烏)는 우리나라의 聖鳥 이므로 비범한 인물이 檀君을 찾아왔다는 뜻이다.

 


◀ 이성계(伯顔帖木兒 1335∼1408) 초상

우리나라는 高麗 시대까지 坐式生活을 하지 않았다. 立式生活을 하자면 좌식생활시 보다 더 많은 생활공간이 필요하다. 탁자에 의자, 침상 그리고 가구에 부딪히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東北亞로, 韓半島로 축소되다 보니까, 집 크기도 축소 되어야 했으므로 부득이하게 선택한 생활방식일 것이다. 무엇보다 濊貊族은 坐式生活을 했다. 濊貊族은 유목민이라 천막이 곧 집이었다. 아무리 크다 한들, 건축물 보다 천막이 클 수 없고 또 이동이 필요하면, 천막을 걷고 간단히 짐을 꾸려야 했다. 그러므로 濊貊族은 입식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종족이다. 우리나라는 濊貊族의 풍습을 받아들인 결과, 좌식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묘청(妙淸 ?∼1135)이 建元稱帝 하자고 했다는데, 高麗, 아니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建元稱帝한 大帝國이다. 妙淸은 또 金汗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高麗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며 西京으로 천도 하자고 했다는데, 이미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高麗에 조공하고 있었다. 妙淸의 亂은 中奴의 亂을 우리나라 역사로 바꾼 것이다. 三國史記의 저자 金富軾을 事大慕華者로 몰아가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한 것은 李氏朝鮮이 아니라 金富軾 이라고 덮어씌우기 위해서 中奴史를 高麗史로 날조한 것이다. 妙淸은 상당히 미신적인 인물로 나오는데, 中奴의 未開王은 혹할 수 있어도 科學의 나라 高麗의 皇帝가 넘어갈 수는 없다. 妙淸은 中土에서 권력다툼 했던 인물이다.

李成桂가 역사를 축소시킨 덕에 中國은 萬里長城 이라는 거창한 건축물을 벽돌 하나 안 쌓고 만들어냈다. 明의 날조사에서 雙城摠管府의 위치는 實史와 동일하다. 雙城摠管附는 長城 이남에 설치했다고 했다.

李氏朝鮮이 淸에 영토를 빼앗길 때마다 高句麗長城도 종이 위에서 滿州로, 韓半島 이남으로 밀려났다. 상상 속에서 쌓았기 때문에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丙子胡亂(1636 )으로 桑乾河 이서까지 빼앗기자, 雙城摠管府는 滿州에 그린 날조 高句麗長城 이남으로 옮겨왔다. 李氏朝鮮이 韓半島 이북을 다 빼앗기자, 高句麗長城은 東鴨綠江 이남으로 밀려났다. 雙城摠管府도 長城을 따라 움직였다. 雙城摠管府에 있다고 날조한 李成桂의 고향도 함경남도가 되었다.

역사를 축소하면 끝내 영토까지 다 상실해야 한다는 진리를 李成桂나 鄭道傳 등은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皇位를 찬탈 하려는 李成桂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종이 위에서 遼東을 상실한 李成桂가 高麗의 지배층을 이끌고 韓半島로 대이동하자, 朱元璋과 中奴가 티벳고원에서 빠져나와 長安城으로 들어간 후 우리나라의 복식으로 정비했다. 그걸 두고 “明의 복식은 唐, 宋代에 이미 수립 되었던 복식제도가 元代에 문란해 졌었기 때문에 건국 후 漢族의 의례를 회복해 관복제도를 재정비했다. 제도개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 복식도 구체적으로 제한 되었는데 이 때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식이나 복식도안, 색 등에서 엄격한 제한과 구별이 있었다(明史 輿服條 참조)”고 기술한다.

이렇게 만들어낸 服飾은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복식과 차이가 없다. 티벳고원의 지배층도 唐 때 부터 우리나라 복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李成桂가 高麗 皇位를 찬탈 했으니까 李氏朝鮮도 高麗의 복식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래서 李成桂는 百濟의 服飾을 기본으로 삼았다.

티벳고원의 中奴가 우리나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民生安定을 위해 인구 과밀한 江南에서 황폐한 江北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부흥에 주력 하였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南에서 北으로의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났다”로 기술했다. 그러나 明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으니까, 江北으로 농민을 이주시킬 수도,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의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날 수도 없었다. 淸 이후에 날조한 대목이다.

朱元璋의 정치적 반대세력이라! 中奴를 억압하고 멸시하는 蒙汗의 지배에서 中奴를 해방 시켜준 것이 朱元璋이라 하지 않았는가. 朱元璋이 蒙汗을 내쫓고, 中土를 통일 했다면 政敵이 있을 리 만무하다. 朱元璋에게 반대하고 싶어도 밀어주는 세력이 등장하지 않을 테니까. 비록 협박으로 달성한 것이라 해도 朱元璋은 中奴를 티벳고원 북부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이다.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던 中奴가 어엿한 집에서 번듯한 옷을 입게 되었는데(이를 두고 庶民生活이 향상 되었다고 기술했다),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다가 번듯한 집안에서 그 짓을 하게 되었는데, 반대자가 나올 수 있는가. 미개 中奴가 우리나라 영토로 기어들자, 우리민족이 반발한 것이다.

李成桂와 高麗 지배층이 떠난 중국 대륙에는 여전히 우리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족이었다. 朱元璋 이하 中奴들은 高麗가 전쟁에 패했다고 속이고 들어 왔지만, 우리민족이 中奴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어째서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가 하잘 것 없는 中奴 따위에게 패했는지 납득이 될 리 없다. 朱元璋의 政敵은 우리민족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는 表裏不同한 인간 이었다. 한단사를 말살 하면서도 朝鮮을 國號로 쓰고, 大帝國 高句麗를 미개 中奴의 제후국으로 만들고서도 高句麗 天文圖를 구하기에 혈안이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한단 역사책 등을 수거해서 王宮 깊숙이 감추었다. 日本도 한단사와 우리나라 正史書를 모조리 숨겨 두었다. 중국도 우리나라 역사책을 기밀장소에 감추어 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개 中奴가 韓國史와 中國史를 뒤바꿀 수 있는가. 朱元璋 조차 까막눈 이었다. 한편 에서는 봉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朱元璋에 협력하여 韓國史를 中國史로 바꾸었던 것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 高麗史)”는 四不可論은 나중에 날조했다.

우선 중국은 단 한번도 大國이 아니었으며, 明도 마찬가지였다. 李成桂가 우리나라 땅을 넘기기 전 까지는 明은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였다. 大國은 우리나라였고 小國은 中國 이었다. 그러므로 中國이 高麗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三國時代부터 여름철에 수많은 전투를 해왔다. 이상하게도 우리 역사를 장식하는 중요한 전쟁은 여름철(음력 4, 5, 6 월. 중국 대륙에서는 여름이 한반도보다 빠르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반론은 威化島 回軍 이전에는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火藥 발명국 高麗는 활을 못 쓰면 大砲, 走火, 鐵砲 등을 사용하면 된다.

遼東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倭寇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倭寇는 중국 대륙을 침범하지 않았다. 韓半島에서만 노략질했다. 李成桂는 遼東을 넘어 遼西까지 갔다. 西鴨綠江을 건너 泰川(富江)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遼東征伐이라는 말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었다.(상선약수)


 

어느 나라가 일련의 일식 기록들을 남겼을 때 이 기록으로부터 어떻게 최적 관측지를 찾을 수 있는가? 일식이 일어나면 지구에는 달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어떤 곳에는 달의 온 그림자가 드리워져 해가 달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일식을 볼 수 있다. 그 주변 지역에는 달의 반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해의 일부만이 달에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일어난다. 달이 해에서 좀더 비껴 지나가는 경우에는 부분일식만 일어난다. 어떤 경우이든 어느 한 일식은 지구상의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어떤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서에서는 볼 수 있지만 동쪽에서는 볼수 없다. 또 한반도와 그 이북에서는 볼 수 있지만 남쪽에서는 볼 수 없는 일식도 있다.

만약 어느 나라가 한반도에서 꾸준히 일식을 관측했다고 하자. 그 나라가 기록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은 어디겠는가? 바로 한반도이다. 그 나라가 기록한 일식 중에는 주변국에서 볼 수 없거나 보기 힘든 일식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적 일식 관측지는 바로 이러한 일식의 성질을 이용하여 찾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삼국이 각기 일식을 관측한 지점은 어디였을까? 이것을 알 수 있다면 삼국이 정말 독자적으로 천문 관측을 했는지, 또 관측을 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나의 일식 관측지 추정 방법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 고려와 한·당·양나라가 남긴 일식 기록들에 대해 최적 관측지들을 추적하고 이를 각 나라의 강역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가 실제 역사적으로 이미 확인된 강역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삼국의 최적 일식 관측지를 찾아보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구상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다. 그리고 서기 2~3세기에 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는 만주와 몽고에 이르는, 백제보다 북위도의 지역이었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 이전과 787년 이후로 양분되어 있다. 그중 서기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 유역으로 나타났다.

서기 787년 이후에 나오는 하대(下代) 신라에선 한반도 남부가 최적 관측지로 밝혀졌다. 즉,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에는 남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에는 북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백제에는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일식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매우 심상치 않은 결과이다.

중국의 기록을 베꼈다면 당시 중국 나라들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와 삼국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가 평균적으로 모두 같은 위치로 나와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식 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의 관측지가 나라마다 매우 다른 위도상으로 각각 떨어져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가 중국의 기록을 무분별하게 베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 등이 고도의 천체 역학적 계산을 통해 중국 일식 기록을 선별한 다음, 북위도로 지나가는 일식은 <고구려본기>에, 저위도로 지나가는 것은 <신라본기>에, 그 사이의 것은 <백제본기>에 나누어서 삽입하는 등 주도면밀한 편집을 했을리 만무하다. 이 정도의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천체 역학적 지식과 첨단의 컴퓨터를 이용한 방대한 수치계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은 각각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나온 자료라고 결론지을 수있다.

이를 확률적 계산으로 증명할 수 있다. 컴퓨터를 이용해 중국 사서의 일식 기록을 임의로 뽑아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에 나누어 싣는 모의실험을 수천번 해 보면 삼국의 최적 관측지에 이 정도의 위도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은 사실상 0임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 의 일식 기록은 중국 기록의 모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실측했던 기록인 것이다. 한편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에서 일식 관측을 했음에도 '우연히' 최적 관측지의 경도가 모두 중국 대륙으로 나올 확률도 사실상 0이다. (기존 발표 논문 참조).

이들의 일식 기록은 우연히 최적 관측지가 중국 대륙 동부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실측한 기록인 것이다. 요컨대 삼국의 일식 관측지를 살펴보면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기존의 결론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800년 논쟁, 삼국사기의 진실은?(2000/11/18 KBS역사스페셜)


 

김부식의 역사왜곡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 장서 원본에 의하면 김부식이 편찬한 사서는 사진에서 보듯이 본래"삼국사"이다 삼국사를 "삼국사기"로 바꾼 자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의 괴수 금서룡(이마니시류)인데 금서룡은 후한서의 편자 범위종이 말한 다음의 편사체제에 의해 니혼쇼기(日本書紀)를 본기(本紀)로 하고 '삼국사'를 제후적 신속(臣屬)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삼국사기(三國史記)라 했다.「제왕의 일을 서술한 것이 소의 서기(書紀)이며, 신하의 일을 서술한 것이 소위 서기(書記)이다.」<통곡하는 민족혼>

민족사가 문 정창 선생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들추어내며 김부식을 다음과 같이 치죄한다. 결론부터 내리면 김부식은 삼국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고려조정의 벼슬을 그만두어 인종으로부터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금나라의 서슬퍼런 분위기에 이미 천자나 황제를 일컫지 못하는 고려조정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 서문에 천자의 선칙을 받아 쓴 것을 진상한다고 했다. 또 「고려사」 <세가전>에는 인종이 국사편찬을 명한바 없고 오히려 벼슬을 그만둔 일개 야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김부식은 자신의 「삼국사」 편찬팀 10명을 거느리고 작업을 완료해 금의 황제를 뜻함에 분명한 천자에게 본서를 진상한다 했다. 고려 인종은 이미 천자용어를 쓸 수 없는 살얼음판 정국이었다. 게다가 이미 야인에 불과한 김부식이 인종에게 보고해야 할 공식적인 라인이 없어진 후였다. 그의 보고라인은 인종이 아니라 인종이 묵인한 상태에서 금의 입맛에 맞는 사관으로 역사서를 변조해 바치기로 명령받은 금의 황제였다.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한 때는 고려 16대 인종 23년(1145년)이다. 이때는 북방의 금나라가 인종 3년에 칭신을 요구한 이래 허다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남송을 그 복속국으로 만든 여세로서 고려조에 강한 압력을 가하여 인종으로 하여금 칭신하게 하고,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황(皇) 자, 제(帝)자적인 것을 모조리 삭제하고, 심지어는 사당에 모신 선제(先帝)의 시호와 그 능묘의 명칭까지를 모조리 왕, 왕릉으로 격하시킨 때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오히려 「삼국사」에 선칙을 받들어 편찬했다는 '김부식 봉선찬(金富軾 奉宣撰)'이라는 말을 썼다. 선(宣)은 「강희자전」에 '天子宣室 通哲智' 등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김부식이 '이 선을 받들어 편찬하다' 한 선(宣)은 바로 금제(金帝)를 받들어 쓴 것이지 고려 인종을 위해 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도 '당태종 문황제어찬(唐太宗文皇帝 御撰)'이라 하였다. 선(宣)은 금제(金帝)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송을 토멸한 직후부터 고려왕조에 대해 일관적으로 사용한 글자다. 또 인종 20년 3월 상표를 올려 사표를 제출해 허락 받았다 한 「고려사」<열전 김부식전>의 '仁宗 20年 三上表 乞表致仕 許之' 는 부식이 고려조정을 떠나 금제의 지휘라인에서 금의 입맛에 맞게 사대사서를 지어 바친 것임을 확인해 준다. 이것이 바로 신채호가 조선의 역사는 외적이나 내란에 의해 무너지고 상한 것 보다 조선사를 편찬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 더 많이 손상되었다 한 모범적인 케이스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 부식은 인종으로부터 하등의 역사서 편찬 명을 받은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세가전>에 보이는 '인종 23년(1145년) 12월 임술 김부식 進所撰 삼국사'라 하여 김부식이 편찬한 바 「삼국사」를 진상한다 한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 50권의 권두마다 '치사신'이라 하였으나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서는 돌연 신(臣)이라 칭하고 치사(致仕:벼슬을 버림) 두 글자를 생략했다. 금제의 신하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일 선유(先儒)들이 이 사실을 알기에 이 글을 권두에 안 두고 뒤로 살며시 돌려놓았다. 김부식은 이 진표에서 다음과 같은 깎듯한 경칭을 사용했다.

'복유성상폐하(伏惟聖上陛下) 성당요지문사(性唐堯之文思) 체하우지근검(體夏禹之勤儉)-성상폐하께 엎드려 생각건대, 성품은 당요의 문사에 바탕하시고 , 하우의 근검을 근본으로 하시니' 이는 금제에게 한 말이지 결코 인종에게 한 말이 아니다.

김부식은 고려 인종에게 치사(致仕:벼슬사직)하고 물러나 금제의 선칙을 받아 조선족 고유의 사기를 일체 무시 말살하고 모든 역사 사실을 지나의 역대왕조에게 유리하게 해석, 취사하여 그들에 대한 부용적인 사관을 수립하는데 일조했다. 그리하여 부식은 옛 문헌들은 거칠고 무디며 사적이 없어져 옛 일이 아득하고 어지럽다(其古記 文字蕪  史迹闕亡)는 말로 단군조선을 비롯한 우리의 역사 일체를 묵살해 버리고 「위략」의 저자 어환(魚 ), 「후한서」 저자 범엽 등 지나 사가들이 요동에다 꾸며놓은 이른바 후일 양(梁)나라가 된 황하 섬서지방의 기자조선을 받아들였다. 거짓말로 만든 기자조선이 대륙에 있거늘 하물며 김부식이 기자조선을 반도 내로 끌어들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과 같이 표절에 표절을 거듭하면서 민족사를 분탕질 한 것이다. 또 「사기」 <조선열전> 이래 국경선에 가로놓여있는 강하의 이름을 패수(浿水)라 불렀음이 사서상의 일반적 칭호였음에도 불구하고 얼어죽을 금제(金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대동강이 패수라 한 당서를 근거로 하여 평양이 한(漢)대의 낙랑군이라 했다. 그러나 한적상의 패수에는 난하( 河)의 패수, 대능하(大凌河)의 패수, 요하(遼河)의 패수가 있고, 삼국사기 상의 패수에는 대동강의 패수, 예성강의 패하 등이 있다. 당 고종은 고구려를 토멸한 직후 대동강이 당과 신라의 국경이라는 뜻에서 패수로 처음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낙랑군에 관한 기본사료인 「사기」와 「한서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낙랑군이 위만조선이 망한 해인 한무제 원봉 3년, 본시 낙랑조선의 땅인 북경 유주(幽州)에 속해, 응소 말하기를 그러므로 조선국이라 하고,  낙랑군 수성현이 갈석산에 있으니, 만리장성을 지은 첫 출발점이라 했다.(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浪郡 屬幽州? 應 曰 故朝鮮國也? 樂浪郡遂城縣 在碣石山 長城所起?) 아니, 대륙 북경이 우리 땅인데 거꾸로 고구려가 망한 뒤 당 고종이 신라와 경계를 삼은 뜻으로 대동강을 패수라 한 것을 낙랑이 대동강 패수에 있었다 하는 이런 영토를 팔아먹은 천하의 매국노를 2001년 1월 문화의 인물로 정한 문화부 장관은 도대체 어느 나라 장관이냐.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매국노 을사 5 적신(賊臣)이 구 한말 조선왕조의 힘이 쇠약한 틈을 타 일제에 붙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임금을 빈 껍데기로 만들고 조국과 동족의 피를 빨더니 이미 8백여 년 전에 금이 강성해진 틈을 타 자신의 주군인 인종을 둘러리로 내세워 금에 붙어 사대의 사서를 지어바치고 매국의 길을 걸은 예를 보인 것이 바로 이완용보다 더 한 천하의 매국노 김부식이다. 김부식이 지어바쳐 간살을 떤 '진 삼국사 표'를 보면 일제 하 친일매국노의 대표적 거두 인촌 김 성수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간살을 떤 것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김부식의 죄를 이완용의 추로 저울에 재면 이완용의 추를 두 개를 얹어도 오히려 부족하다 할 것이니 이는 나라를 팔아먹은 것 보다 역사 혼을 판 후유증이 천세 만세에 그 해악이 미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새로운 해석
 
神話(신화)를 어찌 국사로 후손들에게 가르칠수 있겠는가 ?

대개 세계의 각 나라 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민족은 나라를 개국한 시조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믿을수 없는 <신화시대의 신화>나 전설이 전래하고 있으나
역사와 전통이 짧은 민족은 神話時代(신화시대)에 전래한 전설이나 神話(신화)가 없다

태양의 나라 고조선은 일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을수 없는 한 聖人(성인)이
무려 2,000년이란 오랜 세월로 통치하고 수명이 1,908세 혹은 1,506세 혹은 1,300세로 통치한
帝王歷代記(제왕역대기)와 종교 경전들만 전국 곳곳에 전래되어 있었다

고로 <고려의 인종 임금>은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을수 없는 신화시대의
신화적(神話的) 역사를 어찌 후손들에게 민족의 正史(정사)로 교육 할수 있겠는가 ?

중국은 이미 우리 나라의 聖人(성인)을 자국의 선조로 둔갑시키고 우리 민족을 東夷族(동이족)으로
날조하여 전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도 국사를 새로 편집해야 되지 않겠는가 ?

<고려 인종 임금>은 후손들이 믿을수 있는 민족의 正史(정사)를 삼국사기를 편집한 경험이 있는
老臣(노신) 김부식에게 명함으로 인하여 김부식 공은 신화로 전래된 성인의 행적을 모두 말살하고
간략히 의미만 암시적으로 기록하여 두 번째로 재편집된 사서가 오늘날의 <삼국사기>인 것입니다

또한 삼국사기의 원문은 한자과 이두문자를 병행하여 편집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과 <최만리의 훈민정음창제 반대상소문>등을
살펴 보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삼국을 개국한 시조는 모두 성인이며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 본토에서 개국한 사실과 중국의 漢族(한족)은 모두 東夷(동이)겨례의 후손이라는
진실을 명확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왜곡 날조된 국사 교육에 역사관이 오염되어 마치 한반도에
고구려와 백제가 건국한 나라로 인식하고 역시 한국은 중국에서 문물을 받아드려 한민족이
개화된 것으로 오인하고 모든 한국인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후세에 이르러 당나라와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이 전투한 지역은 모두 중국 대륙의
각 城(성)에서 전쟁이 벌어진 사실을 <삼국사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나 어느 사학자가
그 城名(성명)을 마치 한반도에 존재한 城(성)으로
明記(명기)하여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민족 분열 정책과 민족의 말살 정책으로
소위 신식 교육이란 명목으로 식민지 시대에 한국의 국사를 왜곡 조작하고 약소국으로 날조하여
만든 국사로 학교에서 교육시킨 것이 한민족의 최초의 국사 교육이라 사료된다

즉 오늘날은 國史(국사)는 필수 과목으로 교육시키고 있지만 1백전을 돌이켜 보면 관청의 관료나
몇몇 선비들만 漢文(한문)을 깨우쳐 국사에 대한 관념이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千字文(천자문)이나
한글을 깨우친 사람도 극히 더물었던 시대에 일반 백성들에게 정식 국사 교육은 없었음을 짐작 할수 있다

고로 한민족은 왜곡된 국사 교육에 한번 인식된 지식에 고착되어 민족의 正史(정사)에서
삼국 시대의 성인은 중국의 대륙은 물론 일본도 삼한의 강역으로 제도한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고
또한 날마다 전쟁을 일삼는 우매한 오랑케 부족들을 교화하여 차후로 다시는 노략질을 일삼지
않겠다는 서약을 시킨 맹서문이 <광개토대왕비명>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역사적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한번 깊게 오염된 역사관은 분별력을 잃어 그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史書(사서)를 불신 부정하는 습성마져 고착화되어 역사에 대한 지식인일수록 더욱 고질적인
고정관념의 역사관을 갖고 있는 것이 한국인의 가장 슬픈 병폐라 하겠다

한국의 고대사는 오직 <삼국사기,삼국유사,환단고기>외는 없다


三國史記(삼국사기)
<삼국사기>는 고려 仁宗(인종) 23년 을축(서기 1145년)에
신하 <김부식>은 왕명을 받아 고구려,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중심으로 편찬한 책이다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본기가 28권이며 연표가 3권,지 9권,열전 10권,으로 총 50권이며
무려 1000년의 역사를 기록한 史書(사서)이나 현대의 활자로는 한권의 분량밖에 않된다.

김부식 공이 삼국사기를 편집할 당시만 하여도 신라 진흥왕 6년에 편찬한 金居柒夫(김거칠부)의
書記(서기)와 고구려의 倍達遺記(배달유기) 100권과  陽王(영양왕) 11년에 편찬한
李文眞(이문진)의 신집 5권이 있었다

백제는 근초고왕 29년에 편찬한 高興(고흥)의 書記(서기)가 있었고 遺籍(유적)으로 해동고기)
삼한고기 新羅古記(신라고기)와 김대문의 화랑세기 鷄林雜傳(계림잡전) 樂本(악본) 韓山記(한산기)등이 있었다

또한 중국은 神話(신화)는 <역대신성통감>으로 분류하고 고대사는 모두 날조하여 편진한
소위 漢書(한서),後漢書(후한서),晉書(진서),宋書(송서),梁書(양서),魏書(위서),三國志(삼국지),
隋書(수서),新舊唐書(신구당서), 資治通鑑(자치통감),南北史(남북사),冊府元龜(책부원구),
陳壽(진수),東夷傳(동이전)등 중국의 사서가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李奎報(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癸丑(계축) 4월에 이규보는 使臣(사신)으로 중국에 갔는데
越國(월국)에서 김부식이가 편찬한 舊三國史記(구삼국사기)를 읽어 보았다는 구절이 있다.

그로 인하여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두 번째로 편찬 하였음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舊本(구본)은 전하지 않고 있다

고려 시대에 대 장군이며 대 사학자이며 <삼국사기>를 편찬한 경험이 있는 <김부식 공>이
어찌하여 <중국의 모든 사서가 날조>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겠는가?

또한 어찌하여 삼국의 시조는 성인이라 하고 성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모두 말살하고
그 의미만 간략히 기록하고 唐(당)나라에 조공 받힌 사실은 특별히 강조하였겠는가?

그 사유를 살펴보면 <이두문자>는 수천년을 사용한 우리 나라의 고유한 문자로서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까지 한문과 이두문자를 병행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본문은
<한문과 이두문자를 혼용하여 편찬> 되었던 것이다

또한 한문자로 편집된 삼국사기를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 학자에 의하여
<일본어로 번역된 일본어판 삼국사기>를 우리 나라 학자 이병도등은 참조하여 한글로 번역하였으라 사료된다

왜냐하면
중요 문장에서 왜곡 오류 해석되어 있음을 발견할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시대에 설정한 각 지명과 각 城名(성명)을 삼국과 당나라와의 전투에 기록된
각 지명과 각 城名(성명)으로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은 착각하여 마치 한반도에 존재한 성으로
明記(명기)함으로 인하여 오늘날 까지 혼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왜곡 오류된 역사관에 고질화되었으며 역시 오염된 역사관으로
사서를 탐구하면 올바로 번역할수 없는 것이 한자의 속성이다

그리고 고려시대는 소국을 침략하여 속국으로 일삼는 시대이며 또한 抑佛崇儒政策(억불숭유정책)으로
불교는 멸종되고 유교가 흥성한 시대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즉 孔子(공자)의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윤리 도덕>인 것이다
<유교사상>은 세력이 강한 큰 나라에게 소국은 대국에 순종하고 상국을 받들어 섬기는 주종 관계로
예속을 강요하는 <사대주의의 봉건사상>이고 <불교사상>은 主從(주종) 관계가 아니라 <평등사상>이기
때문에 大國(대국)은 유교를 약소국을 지배하는 통치의 수단으로 유교를 정책에 악용한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중국은 고대사를 모두 날조하여 소위 正史(정사)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仁宗(인종) 임금은 그 대비책으로 김부식공에게 명하고 또한 아무리 聖人(성인)의 행적이
역사적 진실이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을수 없는 신화를 어찌 후손들에게 正史(정사)로
교육할수 있겠는가?

이미 동명성왕의 神聖(신성)한 행적을 담아 <삼국사기>를 편집한 경험이 있는
老臣(노신) 김부식에게 우리 나라 역사를 다시 편집하도록 왕명을 내리게 된다

김부식은 삼국의 시조는 聖人(성인)이라 기록하고도 聖人의 행적은 말살하고 한 시대의 唐(당)에
조공바친 사실은 특별히 강조하고 삼국은 마치 개 잇발처럼 개국초부터 동족끼리 서로 영토 점령을
위한 무력투쟁을 일삼는 오랑케 같은 민족으로 묘사하여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 자존에서
김부식을 事大者(사대자)로 매도하고 삼국사기는 <평가절하>하여 부정하는 사유라 사료 된다

그러나 김부식공은
輸忠定難靖國贊化功臣開府儀同三司監修國史上柱國致任臣下:
수충정란정국찬화공신개부의동삼사감수국사상주국취임신하>이다.

즉 어려운 혼란 정국을 평정한 공신이며 상주국을 찬양 미화하여 국사를 다시 편찬하는 일에 취임한 신하의 뜻이 된다

시대적으로 국내는 妙淸(묘청)의 반란과 <이자겸의 변란>과 抑佛崇孺(억불숭유) 정책으로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이 대립하였고 西京(서경) 遷都(천도)운동을 평정한 功臣(공신)이 김부식 장군이다

그때 국외의 상황은 遼(요)와 北宋(북송)이 멸망하고 金國(금국)의 시대이며 불교를 숭상하는 고려의 정치적 상황을 짐작할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進表(진표)를 살펴보면
왕명을 받고 편집한다 하였고
고대 우리 나라의 古代史書(고대사서)가 있으나 缺字(결자)가 많아 알아 볼수 없다 하였고
또한 비록 만족하지 못하여 藏書(장서)로서 사용할 가치가 없으면 간장병에 넣어 명산에 흙으로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구구절절이 망녕되이 기록한 <삼국사기>는 하늘의 해만이 나의 뜻을 觀照(관조) 할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비록 짧은 진표문이나 시대적 상황과 김부식공의 어려운 심정을 명확히 읽을수 있다

즉 高麗(고려)의 국력은 쇠약하여 소국으로 전락되었고 이미 날조된 소위 漢書(한서),唐書(당서),
東夷傳(동이전)등을 살펴본 김부식 공은 울분을 삼키며 東夷傳(동이전)의 내용에 맞추고
事大禮(사대예)에 거스리지 않으면서 삼한의 후손들이 진실을 감지할수 있도록 교묘한
隱喩法(은유법)으로 <삼국사기>를 편집할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본서를 탐독하면 곧 삼국사기는 교묘한 隱喩法(은유법)으로 편찬 되었음을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

즉 삼국사기의 문장 사이 사이에 역사적 진실을 은밀이 감추어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 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의 문장내용은 <광개토대왕비명>을 해설한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학자와 오늘날의 학자는 은밀이 감추어진 진실은 발견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꾸며 놓은
사실은 믿고 김부식을 사대자로 매도하여 비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신라는 황제헌원과
소호금천씨의 후손이고 고구려는 고신씨의 후손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진실은 전연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일가가 된 동기는 전연 탐구하지 않고 삼국사기를 평가절하고
김부식을 사대자로 매도하여 비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김부식 공은 교묘한 은유법으로 마치 戰史書(전사서)와 같이 唐(당)과 삼국이 전투한 지역의
城名(성명)은 모두 중국 본토에 있었음을 뚜렷이 기록 함으로서 선조님께서 통치하였던 광활한
강역을 후손들이 感知(감지)할수 있도록 밝혀 주는 동시에 오늘날 한민족의 원류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임을 뚜렷이 밝혀 놓은 등불이 되었다

이미 중국에서 고대사는 모두 날조하여 편집한 東夷傳(동이전)과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을수 없는
환웅천왕과 단군왕검 등의 神政(신정)으로 이루어진 <제왕역대기>를 살펴본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두 번째로 집필하면서 후손들이 믿을수 있도록 성인의 무량한 수명과 神政(신정)은 모두 말살하고
역시 한분의 성인을 나누어 고구려의 시조는 <고주몽>으로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로
마치 두나라의 시조로 만들어 삼국시대의 <제왕역대기>를 고의적으로 조작하여 편집 할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 또한 현실적으로 도저히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서를 탐독하면
이와 같은 진실을 확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삼국사기>를 새롭게 번역한다면 오늘날 번역된 사기와 전연 다른 <삼국사기>가
될뿐 아니라 그 문장 구성과 김부식의 필치에 감탄할 것이다

고려시대 이후 오늘날 까지 문무를 겸하고 문학적 소질이 뛰어난 석학자는 <김 부식>외는 찾아 볼수 없다

오늘날 김부식과 같은 대학자가
한국에 있다면 우리 나라의 역사는 반듯이 개편하여 올바른 역사로 정립할 것이다. 끝.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요약과 소감


목     차



1.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著者)인 일연(一然) ………………………2

2.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작(著作)의 배경(背景) ………………………2

3.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구성(構成)과 내용(內容) 요약(要約)…………3

4.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특징과 의의(意義) 및 소감(所感) ……………6

5.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평가(評價)와 소감(所感) ………………10

참고문헌 ………………………………………………………………………11

 

 

1.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一然:1206~1289)은 고려때의 승려이며 학자였다.1) 그가 살았던 때는 고려 후기 최씨 집권과 대몽 항쟁을 거져 고려가 원에 굴복하고 그 간섭을 받게되었던 격변기였다. 일연은 희종 2년 경주읜 속현인 장산(경산)의 향리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자호는 목암(睦庵)이었다. 일찍이 9세에 절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4세에 선종 가지산문케 속하는 설악산 진전사에서 정식으로 머리를 깍고 계를 받았다. 22세에 승과에 최우등으로 합격했고 몽골의 침략이 남녘까지 미치던 와중에 난을 피하여 여러 암자에서 수행하던 중 31세에 "삼계가 없는 꿈임을 알고 대지가 티끌만큼의 막힘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주에서 가까은 현풍 비슬산에서 20년간 수행한 뒤 남해 정림사(定林社)로 가서 10여 년을 머물렀다. 이때 남해분사대장도감의 대장경 조관 사업에도 참여하고 수선사(修禪社)와 접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259년에 대선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원종의 명에 의해 강화도 선월사에 주석하면서 왕실파 관련을 맺게 되었으며 1283년에는 충렬왕으로부터 국존(國尊, 국사를 원 간섭기에 국존이라 칭함)에 봉해져 전 불교 교단을 대표했다. 이듬해 군위의 인각사를 하산소로 정하여 내려와 머물면서 구산문의 선승들을 모아 성대한 법화를 열고 선종 교단을 이끌었다 1289년 84세때에 세상을 떠났다. 충렬왕에게 보각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보각국존비와 부도가 인각사에 세워졌다 저술은 10여종이 있는데 『삼국유사』외에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가 전해지고 있다.2)


2. 삼국유사의 저작의 배경

   일연(一然)이 남긴『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충렬왕(1236-1308)때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승려 일연(一然)이 개인적으로 저술한 이 책은 고조선, 기자조선을 비롯하여 가락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겠다.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전설, 민속, 사회, 사상, 불교 등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정형 시가인 향가 14수를 기록하여 역사책으로서만이 아닌 국문학의 자료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3)

   저작과정과 시기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일연(一然)의 나이 70세(1276) 이후에 저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75세(1281) 이후 2, 3년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마지막으로 정리되어 완성된 시기를 말하는 것일 뿐,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이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저작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 이전부터 부분적으로 기록해두었던 내용을 이때 집중적으로 정리하여 한 권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유사'(遺事)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빠뜨린 것을 끼워 보완한다는 성격을 가진다. 국가의 대사업으로 편찬된『삼국사기(三國史記)』는 방대하고도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역사를 기술하는 태도와 자료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편찬자의 시각이 지나치게 합리성을 강조하고, 중국 중심적이어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소홀히 다루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기존의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다룬 점은 승려인 일연(一然)의 입장에서 수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일연이 이를 저작할 당시는 중국을 지배하게 된 몽골의 침략이 계속되어,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비판되고 민족자주의식이 강하게 대두되던 시기였다. 일연(一然)의 저술의도에는 이같은 민족감정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삼국사기』에서는 가치가 없다고 제외시키거나 소홀히 다룬 자료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결과『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있고, 다르게 기술하거나 해석한 부분도 적지 않게 있다. 이런 면에서『삼국유사(三國遺事)』는『삼국사기』와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가진다.『삼국사기(三國史記)』가 합리적이고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정사(正史)라면,『삼국유사(三國遺事)』는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야사(野史)에 해당한다.

        

3.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구성과 내용 요약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편성내용을 고간본 정덕본에 의하여 살펴보면, 왕력王曆,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등의 9편목으로 나누고 있다. 이를 내용상으로 대별하면 상․하 양권으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역사 사실을 주로 다룬 1, 2권은 상권에 해당하고, 불교 사실을 주로 다룬 3, 4, 5권은 하권에 해당한다. 실제 내용에서는 주제에 따라 다시 9개의 편목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제1권에서는 삼국 역대 왕들의 계통을 도표로 보인 왕력(王曆), 건국의 시조와 왕들의 사적을 다룬 기이(紀異) 2편이 들어 있다. 왕력편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상단에 놓고 그 아래 신라․고구려․백제의 왕들을 시대적으로 배치하여 대비시켰다.  제2권 기이편은 제2권에까지 이어지는데, 전반부에서는 건국의 시조와 왕들을 중심으로 삼국과 그 주변 여러 나라의 유래와 역사를 이야기했다. 전반부에서 언급된 나라는 고조선을 비롯하여 위만조선․마한․진한․변한․대방․낙랑․가야․부여․말갈 등 수십 개국에 이른다. 후반부에서는 주로 신라의 역대 왕들이 중심이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후백제와 가락국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첨부했다. 제3권에는 불교를 전해준 여러 승려들의 사적을 다룬 흥법(興法), 사찰의 탑이나 불상, 건물 등에 얽힌 일화를 다룬 탑상(塔像) 2편이 실려 있으며, 제4권에는 원광․자장․원효 같은 고승들의 학업과 공적을 실은 의해(義解) 1편이 실려 있다. 제5권에는 불교적 이적(異蹟)을 다룬 신주(神呪), 수도승들과 신도들의 정진하는 모습과 덕행을 다룬 감통(感通),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덕행을 닦는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 및 사상을 이야기한 피은(避隱), 효행의 미담을 전하는 효선(孝善) 등 4편이 실려 있다. 5권 9편으로 구성되어있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왕력(王歷) 기이(奇異)이고 제2귄은 기이의 계속이다 제3권은 흥법(興法)과 탑상(塔像)이며, 제4권은 의해(義解), 제5권은 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체제는 흔히 중국에서 편찬된 고승전류와 유사한 깃으로 비교된다. 그러나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왕력과 기이의 구성은 고승전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즉, 불교사 사적에 한정되지 않고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자료를 모아 엮은것이 이 두 편이다.

   왕력편은 신라 시조 혁거세로부터 고려 태조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신라,고구려, 백제의 삼국과 가락 그리고 후삼국의 왕력을 중극과 함께 도표로 나타 낸 연표이다. 다섯 단으로 나누어 첫째 단에는 중국의 역대 왕조와 왕의 연호(年號), 재위 연수를 싣고 아래 네 단에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 순으로 각 왕과 관련 사실들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유사한 연표가『삼국사기」에도 실러 있으나 여기에는 왕의 재위 연수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삼국유사』의 왕력은 가락국을 포함하고 있긴 각 왕의 세계(世界), 기년(紀年)및 치적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그 기사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다른 사효도 많아서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 왕력편의 기사가 기이편의 기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즉, 왕의 재리 연수를 세는 방법이 유년(逾年) 기원과 즉위년 기윈으로 다르고 신라에서 시호를 처음 사용한 시기와 마립간 왕호를 사용한 시기 등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체제상 왕력편이 부록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왈력편 찬술에 앞시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인홍사에서 발간(1278)한 것을 보면 집필 떼의 구상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편인 기이펀은 고조선으로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역사를 신이한 사실들 을 바탕으로 기록하였다. 59개 항목이나 되어 기이편 이하 전체 129패 항목 가운데 거의 반을 차지한다. 기이편은 일연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국가의 흥망에 신이한 힘이 크게 작용한다는 인식에서 ‘신이를 기록한다’는 뜻으로 이름붙인 것이다. 신인한 설화를 역사의 흔적으로 받아들여 채록함으고써 후세에도 신화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돌아보게 하였다.

   기이편에서 일연은 고조선(古朝鮮), 곧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천신의 자손인 단군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며 위만조선(衛滿朝鮮)과 마한(馬韓)이 나란히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한의 뒤에는 사이(四夷), 구이(九夷), 구한(九韓), 예맥(濊貊)에서부티 오가야(五伽倻), 북부여(北夫餘)  동부여(東夫餘) 등에 이르기까지 삼국뿐만 아니라 고대 국가를 이루지 못한 정치 세력들까지 모두 모아 놓았다

   그 뒤에 다시 마한에서 고구려로, 변한(弁韓)에서 백제로, 진한(辰韓)에서 신라로 계승되는 체계를 제시하다. 이러한 삼한과 삼국의 연결은 마한이 백제로, 진한이 신라로, 변한이 가야로 계승되었다고 보는 지금의 견해와 다른 것이지만, 일연이 고조선에서 삼한을 거쳐 삼국에 계승되는 체계를 기본으로 그 사이에 중국 기록들에 나타나는 여러 나라와 군현의 이름을 열거하여 기미편을 괸찬하였음을 보여 준다.

   삼국의 건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피어 있는데 일연은 신라 앞에 백제를 싣고 신라 기사가 끝난 다음 남부여 항목에 백제 관계 기사를 추가로 실었다. 박혁거세 이래 김부 대왕(경순왕, 敬順王)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에 대해 기록한 신라 기사는 기이편 전체의 절반를 차지하는 30개 항목이며 그 내용은 거의 국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기이편에 기사가 실리지 않은 왕도 신라 왕계의 3분의 1에 달하고 있으며 법흥왕처럼 다른 편에 기사가 실린 경우도 있다. 신라에 이어 남부여 항목에 백제 건국 설화 등 백제 기사를 싣고 무왕과 후백제 견훤 항목이 있으며 마지막에 고려 중기에 찬술된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실려 있다.

   흥법편 이하 7펀은 모두 불교에 관한 기사이다 일연은 선종 승려라는 입장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 전래 사실부터 교종의 고승들의 전기, 절과 불상 불탑의 조성, 민간의 신앙 영험담 등 불교사 관계의 사실을 폭넓게 수집하여 채록하였다.

   먼저 흥법푄은 7개 항목으로 삼국에 불교가 전래된 사적과 신라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수용, 백제 법왕의 살생 금지, 고구려 승러 보덕 망명, 흥륜사의 열분 성인(十聖) 기사를 수록하였다. 불교의 전래 순서 역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탑상편은 30개 항목으로 그 내용은 불상(佛像), 불탑과 불전(佛典), 불경(佛經)), 범종과 사리 등에 대하여 조성 연기(緣起)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황룡사 장륙존 상과 구층탑, 사불산․굴불산․만불산, 흥륜사, 백률사 오대산 등의 이름난 불교 문화 유산과 그에 관련된 기적적 영험담이나 신앙을 전해 주고 있다.

  의해편 14개 항복은 고승들의 전기이다 원광, 혜숙과 혜공, 자장, 원효, 의상, 진표 등 당대 고승들의 행적과 활동을 기록하고 있어 불교학 연구와 불교 사상의 정립, 교단의 확산 등 불교 시상사 연구에 기본 자료가 된다.

  신주편 이하의 내용들은 불교 신앙 영험담을 다양하제 제시하여 일반 민중들의 정토 신앙이나 관음 신앙 등 불․보살의 원력(願力)에 의지하는 신앙의 모늠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먼저 신주편 3개 항목은 밀본, 혜통, 명랑 등 밀교 승려들의 영험한 이적을 서술하였다. 감통편 항목은 선도 성모의 불사 후윈 사실로두터, 노비의 욱면의 극락왕생, 월명사의 도솔파 호랑이를 감동시킨 김현 등 다양한 계층의 신앙 영험을 수록하였다.

  피은편 10항목은 자신을 세상에 드리내지 않고 숨어서 이적을 보였던 승려와 고사(高士)의 일화를 모은 것이다.

  효선편 5항목은 부모에 대한 효(孝)와 불교적 선(善)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 참된 효라고 하는 입장에서 효와 관련된 신앙 사례를 서술하였다. 의상(義相)의 제자인 진정과 그 노모에 대한 이야기, 금생과 전생의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창건했던 김대성의 효행 등이 실려 있다. 일연 또한 효성으로 사람들의 찬탄을 밭았는데 78세의 나이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 인각사 하산을 청하였다고 전한다. 효선편에 실린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윈하는 내용의 불교적 효는 유교 이념이 강조된 통일 신라 이후에 불교 신앙이 사회적으로 유교 윤리와 상층되지 앉게 일상 생활에 정착된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흥법편 이하는 삼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확산 정착되는 과정을 신앙 영험을 중심으고 엮은 것이다. 일연은 선승이었지만 신앙에도 폭넓은 관신을 보여 문수보살의 감웅을 얻었고 관음 진언의 공덕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오랜 기간의 몽골 침략과 원의 압제에 시달리고있던 고려인들에게 신앙 의 힘으로 자긍심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三國遺事』에 실러 있는 향가(鄕歌) 또한 신비로운 사실이나 불교신앙을 소재로 한 것이다. 향가 14수는 이두와 고대 문학 연구에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또 신라 불교에 관한 많은 설화들을 통해 불교가 그 이전의 전통 종교나 원시 신앙과 어떤 형태로 복합되었으며 어떻게 신앙으로 정착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엿 볼수 있다.4)

 

4.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특징(特徵)과 의의(意義)와 소감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후기 곧 몽골의 30여 년에 걸친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굴복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던 시기에 민족의 위기에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민족의 자주성과 문화 전통의 우위를 인식하고 확신함에서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역사 인식은 기이편 서문에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라고 한 데서 보이는데, 천신의 자손이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세웠고 그것은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서술하여 우리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내세웠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신화 설화 형태로 여러 갈래로 전승되어 온 많은 자료를 종합하여 민족사의 시초를 확립하고 고대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고대사 체계는 후세에도 계승되어 우리 역사 서술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먼저『삼국유사(三國遺事)』라는 이름에서 '유사'는 이전의 역사책과 기록에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일연(一然)은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또 직접 답사하여 보고 들은 설화나 사적들도 채록하여 기존의 역사책과는 다른『삼국유사(三國遺事)』라는 책을 구성 집필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일연의 출신지와 주된 활동 지역이 신라 지역이었던 관계로 삼국 가운데 신라 중심의 불교사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지 않은 설화와 전승, 향가 등 고유한 자료들이 많이 채록되어 있어 고대사와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일연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혀 서술하려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에서 일연(一然)은 불교 선종의 승려였지만 불교뿐만 아니라 유가와 도가 사상, 역사와 시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읽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고 고대인들의 생활과 문화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른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민중들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지게 실려 있다. 일연이 생존했던 고려 사회는 최씨 집정기에서 대몽항쟁기를 거쳐 몽고지배 초기로서,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했던 시기로 온 국민과 함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던 시련기였으며, 일연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써서 펴냈던 때는 그의 나이가 여든살이나 되었었다. 그 일연(一然)을 우리는 그 당시 고려 불교의 최고 높은 승려로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이들어서 온 정신을 다 기울여 쓴 책 삼국유사(원래는 다섯권에 책 셋으로 묶여 있었다.)의 저자로서 기억하고 있다.

   한편『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일연 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이기 때문에 체제와 양식이 자유롭다고 평가 받아 왔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일연(一然)이 혼자서 집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가 김부식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었듯이 삼국유사 역시 일연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자료수집, 필사, 판각등을 함께한 공동작업의 결과였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원본 즉 정본은 그 모습이 극히 초라하고 내용 역시 잘 단장되어 있지 않다.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와 위대한 업적들은 실상 떠들석하지 않고 조용한 것처럼, 어느날 문득 발견되는 놀라움처럼 뒷날에야 나타난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역시 오늘날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일연(一然)의 살아있을 당시 발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유고 속에 아무도 모르게 감춰져 있던 것을 사우들의 손에 의해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데서 시작된다. 그렇다 다시 한번 짚지만, 일연은 그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은 사람이라고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학사적(文學사史的) 의의(意義)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三國史記)』는 대체로 중국쪽 문헌만을 의존하는 사대주의적인 관점에서 씌어졌다고 평가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삼국사기(三國史記)』는 편찬 목적과 절차, 양식, 자료의 선별 표준, 문장 표현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전통적 규범에 따르는 것을 편집 제강에 삼았던 책이었다. 그에 반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집필자의 주관적 의도와는 별개 문제로, 이와같은 까다로운 제약들로부터 벗어난 입장에서 일정한 교양을 갖춘 불교 승려가 삼국시대의 유사들을 들추어 냈다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정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책임하게 집필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점이 오히려 오늘날에는 사료적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만든 원천이 되고 문학적 사료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수 있다

   삼국유사의 서두에 실린 도깨비 이야기 같은 허망한 이적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써서 괴이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유사편찬의 방향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삼국유사의 사료적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만든 원천이 된 것이다.

   삼국사기 이래로 우리나라의 고전을 지은 사람들이 한문지상주의 입장에서 어느것이나 한문으로 전해진 자료가 아닌 이상 "사료 부재"라고 평가 절하한 채 취급대상으로 삼지않은 반면, 일연(一然)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유사들을 되도록 빠뜨리지 않고 수록하겠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편찬한 것이다. 특히 일연의 사상과 관련된 불교관계의 설화가 많다는 인연도 작용하여「사설이 비속」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록했던 것이 오늘날에 와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작품으로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歷史的) 의의(意義)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옛 지명들과 함께 그 지명의 유래들을 밝히는 부분이 많이 있어 우리나라의 언어사와 고대 지리학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문헌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일연(一然)은 이 책에서 종래의 불교 관계, 서적에서 잘못 전달된 부분을 시정하겠다는 목적으로 전편의 절반이나 되는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통사를 의식한 역사 서적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일연(一然)이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시작, 삼국시대(三國時代) 이전까지의 문헌적 공적을 책의 머리부분에서 주의깊게 보충함으로서, 삼국의 역사적 전통을 뚜렷이 밝혔고, 특히 그 시대의 역사적 첫 기록을 한민족의 구성원으로서 남겼다는 그 자체의 의미만도 대단히 지대하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삼국유사가 조금 앞선 시대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엄격히 구별되는 점이다.

   고조선을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민족국가로 인식하면서 고조선과 공존했던 나라들의 건국설화를 통하여 단일 민족국가로 우리 민족을 규정한 일연의 역사의식이 결코 일연(一然)의 독창적 견해이거나 구상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화유산(文化遺産)적 의의(意義)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일연의 기억이나 지식으로 소화된 자료들을 주관적으로 엮어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고전문헌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인용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중국의 고전만 해도 27종에 달하였고, 우리나라의 고전은 역사서적, 불교서적, 문집류를 포함하여 책명이 분명한 것만하여도 50여종이 포함되었으며, 고기, 향기등, 약칭, 범칭으로 표시한 문헌도 무수히 많았다. 이밖에 비문과 고문서등으로부터 인용한 것이 20여종에, 개인의 말이나 시에서 인용한 것도 적지 않으니, 이것을 유추해 보면 『삼국유사(三國遺事)』속에는 자칫하면 사라져버릴 뻔 했던 수많은 문헌들이 보고로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역사, 지리, 문학, 미술, 언어, 고고, 민속, 사상, 종교등 각 분야를 통하여 이 책이 없었더라면 영구히 찾을수 없는 귀중한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임이 틀림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전체가 神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一然이 유교의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일반적인 역사적 神異에 대한 기록으로 한국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즉, 한국의 역사는 중국이 아닌 天과 직결되는 것이고 한국사의 기원은 고조선 위만조선 마한으로 이어져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것이었다. 즉, 민족적 자주의식을 표현인 것이다. 또, 불교적 神異에 대한 서술로 信仰을 옹호했다. 신화, 전설, 신앙의 세계인 三國遺事는 당시 사학계의 합리주의에의 접근이라는 전진적인 자세와는 다른 복고적인 것이었다.

   첫째, 전자를 제시한 인용문으로 인해 많은 원전들이 남아있지 않은 오늘날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지니는 사료적 가치가 높다. 둘째,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해 비판하고 폭넓은 문화사적 측면을 제시해 줌으로써 근대사학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셋째, 민주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사학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역사적(歷史的) 의의(意義)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5. 삼국유사에 대한 평가와 소감

 『삼국유사』에 인용된 책과 문장들을 통해 일연이 불교만이 아니라 유학과 역사, 시에도 대단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비문에도 “선의 기쁨을 누리는 여가에 대장경을 거듭 열람하였으며, 제가(諸家)의 장소를 깊이 연구하였고 한편으로는 유가(儒家)의 책을 섭렵하였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도 두루 통했다”고 전한다. 일연이 선승으로서 수선(修禪)을 중시하면서도 불교를 넘어서 다양한 사상에 능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삼국유사』에는 다양한 경전과 전적들이 인용되어 있고 그 문장은 풍부한 내용과 의미를 담고있지만,『삼국유사』를 제대로 읽어 내기는 쉽지 않다.

   일연은 많은 자료를 모아 수록하고 인용된 사료와 자신의 견해를 구분하 서술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때로는 고증을 도입하기도 하여 객관적으로 밝히려고 노력하였다고 평가가 되기도 하지만, 그가 인용한 인용 내용 가운데 절반 가량이 그 전거(典據)를 밝히고 있지 않아 객관적 서술 태도가 일관되게 지켜 지지는 않았음을 발견하여 볼 수가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속해있는 종교를 전파하기위한 의도가 짙게 갈려있음을 엿볼수 있다. 또 확실하지 않거나 의심스러운 경우는 판단을 유보하고 서로 다른 사료를 그대로 인용해 놓았으며 때로 번잡한 사료나 다른 책에 실린 기록은 생략해 버리기도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김남윤. “일연의 삼국유사” 『동서양고전』서울: 방송대학교 출판부, 2002.

송창범. “일연의 역사인식과 삼국유사” 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1993.


 1) 송창범, “일연의 역사인식과 삼국유사” (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1993.


 2) 김남윤, “일연의 삼국유사” 『동서양고전』(서울: 방송대학교 출판부, 2002), p. 12.


 3) 송창범, "일연의 역사인식과 삼국유사“ p. 2.


 4) 김남윤, "일연의 삼국유사" pp.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