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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7 : 揆園史話(규원사화)]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3:06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7 : 揆園史話(규원사화)]

 


5) 미개 예맥족사를 한단사의 위치로 끌어올린 규원사화 -상선약수님-

“蚩尤氏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宅奄慮忽 檀君紀).” 및 “후세에 蚩尤氏·高矢氏·神誌氏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蚩尤氏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다(而後世蚩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揆園史話 太始紀)."만 보면, 마치 대륙의 남서부를 연상 시킨다. 그러나 개국 당시 朝鮮의 영토는 揚子江 이북 까지였다.

“蚩尤氏는 藍國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 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海垈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漢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揆園史話 檀君紀)."만 보면, 藍國은 티벳고원 남부로 보인다. 그러나 티벳고원 남부는 扶虞, 扶蘇, 扶餘의 봉토였고, 곧 扶餘의 땅으로 다시 馬韓, 番韓의 땅이 되었다.

22 世 索弗婁 檀君에 이르러 藍侯의 행동에서 藍國이 위치가 파악된다. “이즈음 藍侯가 자못 강성하여 차츰 제후들을 부리고 거느리게 되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을 몰아내고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 : 忽은 골 로도 발음한다. 고을이라는 뜻)에 거처하였다. 그 곳은 殷나라와 매우 가까왔다(至是藍侯頗强 稍役率諸侯逐孤竹君 南遷其都 居奄瀆忽 與殷逼近 揆園史話, 檀君世紀)." 남부로 천도 했는데, 殷나라와 가까왔다고 한다. 藍國이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다면, 남으로 천도하면 殷나라와 멀어진다.

30 世 檀君 내휴(奈休)는 서쪽으로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汗들과 모여서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周)나라 사람들과도 수호 하였다(三十世檀君奈休......西至奄瀆忽會分朝諸汗閱兵祭天與周人修好 檀君世紀).

엄독골(奄瀆忽)은 辰韓의 도읍에서 서쪽에 있었다. 22 世 檀君 索弗婁 이후 辰韓의 도읍은 白岳山 阿斯達로 현 은허(殷墟)이다. 辰韓의 도읍에서 서쪽인 藍國은 柴達木盆地에 위치했다. 奄瀆忽은 柴達木盆地 남단에 있었다. 그래서 殷나라 땅과 가까웠던 것이다.

柴達木盆地에서 藍侯가 “백성들을 수차례 海垈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언제나 漢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且其民 數遷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던 것이다. 그러므로 蚩尤氏가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恒爲西南藩蔽).”는 것은 거짓이다. 番韓의 시조 蚩頭男도 慈烏支 한웅의 후손 이었지만, 朝鮮 전기에는 丹江 이남에 있었다.

蚩尤氏가 항상 울타리가 된 땅은 柴達木盆地이고, 백성들을 옮겨가게 한 海垈는 金沙江 상류이다. 金沙江 상류에서 항시 中土의 나라들과 서로 각축했던 것이다.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다(巨野浩豁 海天靚碧).” 들녘에 바다가 있다고 했다. 진짜 바다가 아닌 것이다. 柴達木盆地는 강수량이 적어 강물이 크게 불어나는 일이 없지만, 여기서의 바다는 대기를 뜻하는 말이다. “바다가 고요하다(海靚).”는 말은 바람이 잠잠하다는 뜻이다. 柴達木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니까, 바람이 별로 불지 않는다.

柴達木盆地의 하늘이 푸른 것은 푄 현상('푄'이란 말은 원래 라틴어의 favonivs에서 유래하는데 '西風'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때문이다. 분지 밖에서는 상승기류가, 분지 안에서는 하강기류가 생긴다. 바람받이 사면(분지 밖)을 올라가면서 100m당 0.5℃씩(습한 공기가 상승할 때에는 수증기 응결로 숨은열이 방출되어 공기를 가열시킨다) 내려 가므로 포화 수증기량에 도달하고 더욱 기온이 내려가면, 비를 뿌리게 된다. 비를 뿌린 공기는 건조해진 상태에서 이번에는 바람의 지사면(분지 안)을 내려가면서 100 m당 1.0℃씩 올라간다. 하강 기류에서는 포화 수증기량이 증가해 구름이나 습기가 모두 증발,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날씨가 쾌청해지는 것이다.

북반구에서는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 柴達木盆地는 저지대의 평균 해발고도가 2600~3000m인 반면, 서쪽의 타림분지는 평균 해발고도가 800∼1,200m 이다. 게다가 타림분지의 연간 강우량은 10mm 이하다. 옛날에는 좀 더 습윤했다. 타림분지에서 유입되는 건조한 공기는 바람받이 사면을 상승 하면서 더욱 건조해진 다음(매우 건조한 공기이므로 100m당 1.0℃ 가까이 내려간다), 바람의 지사면을 하강하면서 포화 수증기량이 증가하여 남아 있는 습기마저 모두 증발,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 그 외에 영향은 미약 하지만, 가시광선의 산란 탓도 원인이다.


가시광선은 파장이 짧을수록 산란이 잘되고, 산란을 거듭 할수록 에너지를 잃게 된다. 柴達木盆地는 고지대이니까, 파장이 짧은 보라색의 산란이 가장 많이 일어나고, 저지대 에서는 파장이 긴 노란색과 빨간색도 일부 산란된다. 사람의 눈은 파란색에 더 민감하니까, 저지대 까지 도달하는 일부 보라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藍國(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이라 한 것이다.

 

揆園史話는, 檀奇古史 따위는 비교가 안되는, 대단히 교묘하게 쓴 날조사다. 揆園史話를 읽다보면, 北崖라는 인간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인간심리를 완전 파악하고 있는 대단히 지능적인 모사꾼이다. 揆園史話의 특징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한 문장 내에 실사와 날조사를 교묘히 섞었다. 자신의 거짓말을 사실로 둔갑 시키기 위해 남의 말이라며 인용형식을 취했다. 감정에 호소하는 말을 사용 함으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상적으로 만들어 판단력을 둔화시킨다.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자.

己丑年은 연나(延那) 임금의 원년이다. 이듬해 상(商)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여 그 군사가 남쪽 경계에 까지 이르렀는데, 남후(藍侯)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 이겼으며, 뒤에는 서로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였다.(己丑歲壬儉延那元年 叔父固弗加攝政 翌年商人攻我 師至南界藍侯率諸軍 戰克 後 互相戰和 揆園史話 檀君紀)

24 世 檀君 延那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 1161 년이다. 己丑年이 아니고, 庚子年이다. 商나라는 殷나라의 별칭이다. 殷나라는 기원전 11, 12 세기에 망한 나라다. 기원전 12 세기에는 殷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져 우리나라를 공격할 수가 없었다. 藍侯가 강성했던 시기는 22 世 檀君 索弗婁 때로 기원전 13 세기였다.

壬子年은 해모(奚牟)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藍侯)로 하여금 비류후(沸流侯) 및 청구후(靑丘侯)와 더불어 소니수(溸泥水)에 모이게 하였다.(壬子歲壬儉奚牟元年 使藍侯與沸流侯靑丘侯 共聚 溸泥水 揆園史話 檀君紀)

28 世 檀君 奚牟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 971 년이다. 壬子年이 아니고, 庚戌年이다. 이것은 檀君世紀에 없는 내용이다.

乙卯年은 두홀(豆忽) 임금의 원년이다. 비류후(沸流侯)가 큰 자라(大鼈)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었다. 속진후(鞻溍侯)가 용가(龍加)가 되었다. 처음 흘달(屹達) 임금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邠),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일어나니 마침내 점차 물러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빈천한 백성으로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자들은 여전히 그 땅에 흩어져 살면서 오랫동안 풍속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藍侯가 자못 강성하여 차츰 제후들을 부리고 거느리게 되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을 몰아내고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거처하였다. 그 곳은 殷나라와 매우 가까우므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빈(邠),기(岐) 사이로 나아가게 하여 그 유민들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우고 '여(黎)'라고 이름 짓고 여홀(黎忽)을 도읍으로 하니, 이에 마침내 殷나라의 제후 및 서융(西戎)의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거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藍侯의 위세가 점차 번성하여 졌으며, 임금의 명령 또한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乙卯歲壬儉豆忽元年 沸流侯獻大鼈 長丈餘鞻溍侯爲龍加 初屹達之世 東人之進據邠岐者甚衆 及商湯之興而遂漸撤退 然細民以耕桑爲業者 猶散處其地 久不失其俗 至是藍侯頗强 稍役率諸侯孤竹君 南遷其都 居奄瀆忽 與殷逼近 使黎巴達將兵 進至邠岐之間 與其遺民相結 立國曰黎 治黎忽 遂與殷家諸侯及西戎之人相雜處 於是藍氏侯之威漸盛而壬儉之命亦及乎恒山以南之地矣 揆園史話 檀君紀).

39 世 檀君 豆忽은 기원전 545 년에 즉위했다. 乙卯年이 아니고, 丙辰年이다. 545 년은 殷나라가 망한지도 5, 6 백 년이 넘었다. 저 기사는 檀君世紀에도 나온다. 22 世 檀君 索弗婁 20 년 때로 乙卯年(B.C. 1266) 기사이다.

乙卯 20년(B.C. 1266) 이때에 남국(藍國)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殷)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邠), 기(岐)를 점거하고 그곳의 유민과 서로 결합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殷)나라 제후들 사이에 섞여사니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남쪽 지방까지 미쳤다 (乙卯二十年至是藍國頗强與孤竹君遂諸賊南遷至奄瀆忽居之近於殷境使黎巴達頒兵進據邠岐與其遺民相結立國稱黎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藍氏威勢甚盛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檀君世紀).

孤竹君은 朝鮮의 제후국 이었으나, 역사날조 하면서 殷나라의 諸侯國으로 둔갑시킨 나라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孤竹君을 내몬 것이 아니라, 함께 군사행동을 했다는 檀君世紀의 기사가 맞다. 그래서 21 世 檀君 蘇台가 물러나자, 孤竹君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東海(金沙江)가에 살면서 힘써 농사를 지어 스스로 살아갔다(伯夷叔齊亦以孤竹君之子遜國而逃居東海濱力田自給 檀君世紀).

殷나라 땅을 정벌해서 黎國을 세운 결과, 殷나라와 인접해 殷나라 제후들이 지척에 있게 된 것이지, 殷나라 제후와 “더불어 섞여 거처(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하게 된 것은 아니다. 西戎은 靺鞨(濊貊族)로 中土 서쪽에 있었다.

“檀君의 명령이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된(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것은 39 世 豆忽이 아니라, 22 世 索弗婁 때이다(檀君世紀). 索弗婁는 皇位 찬탈자이다. “새 임금이 白岳山에 도읍하자 여러 욕살(褥薩)이 안된다고 고집하였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檀帝의 조서(詔書)를 받들어 이들을 타이르니 여러 褥薩들이 복종하게 되었다(新帝相都於白岳山諸褥薩執不可黎元興蓋天齡等奉詔諭之於是諸褥薩畢服 馬韓世家 下)." 하지만 恒山 이남은 아직도 索弗婁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索弗婁를 따르는 藍候의 위세가 점차 번성하자, 索弗婁의 교화가 또한 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邠, 岐의 유민이라 한 것은 13 世 檀君 흘달(屹達) 때 이미 정벌해 우리나라 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처음 흘달(屹達) 임금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邠)·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일어나니 마침내 점차 물러 나오게 되었다(初屹達之世 東人之進據邠岐者甚衆 及商湯之興而遂漸撤退 揆園史話 檀君紀).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邠)·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던 것은 邠·岐를 정벌했기 때문이다. 屹達 天皇이 邠, 岐를 정벌한 시기가 바로 商나라(殷나라의 별칭) 湯王 때이다.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夏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檀帝)께서 읍차(邑借)인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殷나라의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 하였다. 곧 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夏나라 桀王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殷나라 사람들과 함께 夏나라 桀王을 쫓기로 하여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畎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邠), 기(岐)의 땅에 거하며 관제(官制)를 설치 하였다(是歲冬殷人伐夏其主桀請援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以助戰事湯遣使謝罪乃命引還桀違之遣病遮路欲敗禁盟逐與殷人伐桀密遣臣智于亮率畎軍合與樂浪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設官制 檀君世紀).

13 世 檀君 흘달(屹達 또는 代音達 이라고도 한다)의 기사이다. 殷나라 湯王 때 邠·,岐가 우리나라 땅이 되었던 것이다. 殷나라 湯王은 中土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일부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도 北崖의 날조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戊寅年은 흘달(屹達)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무예에 용맹이 있음에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 하면서도 좋아 하였다. 해문(奚門)을 얻어 용가(龍加)로 삼았다. 하(夏)나라 사람이 건너오자 임금이 그를 예절로서 대우 하였다. 이 때 夏나라의 덕이 이미 쇠퇴하니 사람을 시켜 가서 그 정치를 살펴보게 하고는, 또 춤과 노래를 보내어 그를 시험하게 한 후에, 奚門과 남후(藍侯)로 하여금 모든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엄(奄)에서 빈(邠)·기(岐) 사이의 지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 후 夏나라 왕과 서로 화해 하였다(戊寅歲壬儉屹達元年 有武勇 國人畏愛之 得奚門爲龍加夏人來至壬儉優禮之 時夏德旣衰 使人往觀其政 又送舞樂而試之 及後 使奚門與藍侯率諸兵 進征奄至邠岐之間 後與夏王和 揆園史話 檀君紀)." .

춤과 노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정벌 했던가. 13 世 檀君 屹達의 즉위 원년은 己卯年(B.C. 1782)이다.

 


◀ 영인본 규원사화

癸未年은 달음(達音) 임금의 원년이다. 청구후(靑丘侯)의 여식 아시씨(阿施氏)를 취하여 황후로 삼으니, 어질며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흠모 하였다. 개마후(蓋馬侯)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다. 옛적에 부여(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稧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씨(藍氏)의 백성이 되었다
(癸未歲壬儉達音元年 娶靑丘侯之女阿施氏爲后 賢而有德 國人慕之 蓋馬侯獻靈艸 昔 夫餘民有遁居于稧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揆園史話 檀君紀).

40 世 檀君 達音이 즉위한 해는 기원전 509 년이다. 癸未年이 아니라, 壬辰年이다. 이 당시 藍國은 없었다. 檀君世紀에는 22 世 檀君 索弗婁를 끝으로 藍國이 등장하지 않는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高句麗 때 癸未年에 濊貊族이 藍國의 영토였던 柴達木盆地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었던 것은 이 당시 濊貊族의 실상이다.

淸이 寧古塔이라는 사라진 지명을 되살렸다는 점(그리고 지명을 밀어냈다)에서 熟女眞(濊貊)은 朝鮮의 속민이다. 濊貊이 캐시미르(Kashmir)에 있었을 때도 역시 朝鮮의 영향 아래 있었다. 더 이상 藍國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蚩尤氏 후손에게 주었던 柴達木盆地를 선뜻 濊貊族 따위에게 내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濊貊族이 柴達木盆地에 있다는 사실은 高句麗가 濊貊族을 그곳에 집어 넣었음을 추측케 한다. 당시 遼西를 지배하고 있던 百濟와의 전쟁에 濊貊族을 이용하기 위해 柴達木盆地에 거주케 한 것이다.

濊貊族의 시조로 둔갑시킨 藍侯는 揆園史話에서는 7 世 檀君 한율(翰栗) 때부터 그 위세를 발휘한다.

壬戌年은 한율(翰栗) 임금의 원년이다. 아질(阿叱)이라는 자가 있어 난을 일으켜 백성을 해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죄(罪)는 오로지 그것을 범한 자에게로 돌아가며, 도(道)는 오로지 그것을 삼가 닦은 자에게서 이루어진다」라 하고 더욱 덕스러운 정치를 닦으며 여로(黎老)에게 그를 정벌하게 하니, 삼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사로 잡았다. 또한 당시 하(夏)나라의 정치가 바야흐로 융성해 지므로 남후(藍侯)로 하여금 군사 일을 힘써 다스리게 하니, 오랫동안 이로써 평화로왔다
(壬戌歲壬儉翰栗元年 有阿叱者 作亂害民 壬儉曰 惟罪歸于作犯 惟道成于謹修 乃益修德政 使黎老征之 三年而後始禽 且當時夏政方殷 使藍侯勤修戎事 而終世以和 揆園史話 檀君紀)

7 世 檀君 翰栗의 즉위 원년은 壬戌年(B.C. 2047)이다. 7 世 檀君 翰栗 때의 기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乙丑年은 물리(勿理)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어질면서도 무도(武道)의 용맹을 좋아 하였다. 이 때의 제후들은 이미 강성 하였으나 여전히 임금을 존중하여 때를 맞추어 항상 알현 하였다. 남후(藍侯)인 검달(儉達)이 청구후(靑丘侯), 구려후(句麗侯), 속진후(嫘黰侯) 등과 더불어 병사를 거느리고 은(殷)나라를 정벌하여 마침내 그 땅의 회대(淮垈) 사이로 깊이 들어가게 되니 반가이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제후들이 이에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고 박고씨(薄姑氏)를 청주(靑州)의 땅에 세워 '엄국(奄國)'이라 이름하고, 영고씨(盈古氏)를 회수(淮水)의 북쪽 서주(徐州)의 땅에 세워 '서국(徐國)'이라 이름 하고는, 서로 연맹하여 원조하고 단결하니 은(殷)나라 사람들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무릇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 온 지 오래되었는데, 은(殷)나라의 도가 쇠퇴해지자 남후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하여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바다를 인접한 곳의 백성들은 모두 그들의 마을을 바치며 흔쾌히 군사를 환영 하였던 것이다. 치우씨(蚩尤氏)가 물러난 이후 다시 이 때에 번성함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제후들 역시 조금씩 왕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으니, 비록 겉으로는 맡은 일을 처리 하였지만 마음으론 받들지 않게 되었다 (乙丑歲壬儉勿理元年 仁而好勇 時 諸侯已强而猶尊壬儉時常朝覲藍侯儉達 與靑丘侯句麗侯嫘黰侯 率兵伐殷 遂深入其地淮岱之間 莫不響應 諸侯乃定淮岱之地 乃立薄姑氏於靑州之地曰奄國盈古氏於淮北徐州之地曰徐國 互相聯盟而援結殷人莫敢當者 盖 海岱江淮之地 爲東人占居者已久 及至殷道之衰 而藍侯與諸侯進攻 於是濱海之民 皆以其州欣迎其師也 自蚩尤氏撤退以後 復見斯時之盛矣 雖然諸侯亦稍輕王室 雖外修其職 不甚崇戴焉 揆園史話 檀君紀)

43 世 檀君 勿理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 461 년으로 周나라 말기에 해당한다. 乙丑年이 아니라, 庚辰年이다. 이 기사도 檀君世紀에 있다. 23 世 檀君 아홀(阿忽) 2 년 乙酉年(B.C. 1236) 기사이다.

乙酉 2 년(B.C. 1236) 남국군(藍國君) 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垈)의 땅을 평정했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 檀君世紀)

殷末 이후 海上이 완전히 우리나라 땅으로 굳어졌다. 저 기사는 기원전 1236년에 일어난 사건을 北崖가 역사날조 차원에서 8 백년 이나 뒤로 뺐다. 藍侯를 강성한 인물로 만들기 위한 北崖의 의도적인 날조이다. 단지 藍國이 高句麗 때 穢貊族을 몰아넣은 땅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藍侯는 濊貊族(穢貊族)의 시조로 날조당한 인물이다.

반가이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檀君世紀에는 “殷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殷人風惶怯莫敢近之 檀君世紀).”고 했다.

丁亥年은 여루(余婁)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藍侯)가 은(殷)나라 회수(淮水)의 남쪽 땅에 선모국(鮮牟國)을 세웠다 (丁亥歲壬儉余婁元年......藍侯立鮮牟國於殷淮南之地 揆園史話 檀君紀)

45 世 檀君 余婁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 396 년이다. 丁亥年이 아니라, 乙酉年이다. 이 당시는 殷나라가 망한지도 7 백년이 넘었다. 殷나라는 金沙江 상류에 세운 나라로 淮水(瀾滄江) 이북에 있었다.

壬辰年은 보을(普乙)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藍侯)가 마침내 제후들을 총괄하여 거느리게 되니 임금을 알현하는 자가 드물었다 (壬辰歲壬儉普乙藍侯遂總帥諸侯朝覲者遂稀 揆園史話 檀君紀)

46 世 檀君 普乙이 즉위한 해는 기원전 341 년이다. 壬辰年이 아니라, 庚辰年이다. 나라의 힘이 약해진 것은 乙丑 46 년(B.C. 296), 한개(韓介)의 난 이후다(乙丑四十六年韓介率須臾兵犯闕 檀君世紀).

 

解慕漱가 箕丕와 짜고 군대를 일으켜 白岳山(현 殷墟)에서 즉위한 다음 北夫餘를 건국한 것을 끌어당겨 쓴 것으로 추정된다. 解慕漱가 北夫餘를 세운 해는 고열가(古列加) 檀君 57 년으로 기원전 239 년이다. 이때 解慕漱의 나이 23 세였다(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古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 北夫餘紀).

이로서 나라는 마침내 없어지니, 임금으로 있은 지 30 년이요, 단검신인(檀儉神人)이 큰 위업을 처음으로 펼친 때부터 역년이 47 세요 1,195 년이다. ...... 그후로 제후들은 자못 무력으로 서로 경쟁하였는데, 유독 남후(藍侯)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항상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게 되었기에 이로서 열국이 되었다(是國遂除在位三十歲自檀儉神人開創鴻業歷四十七世一千一百九十五年......自後諸侯頗以武力相競獨藍侯者出諸家之右時常役率羣后以行國政是爲列國焉 揆園史話 檀君紀)

古列加 檀帝는 30 년이 아니라, 58 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퇴위한 해는 癸亥年(B.C. 238)이다. 그러므로 神人王儉이 큰 위업을 처음으로 펼친 때 부터 2096 년이다. 2096 년을 1195 년으로 줄이다 보니까, 47 世에 이르는 檀君의 즉위원년이 2 世 扶婁만 제외하고 하나도 맞는 게 없다. 60 甲子 중에 마지막인 癸亥年에 朝鮮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새로이 시작되는 北夫餘의 역사가 甲子로 부터 시작된다. 물론 건국은 그 이전 이지만,,,

揆園史話에는 古列加 檀帝가 제위를 내놓은 뒤에도 藍侯가 등장하는 반면, 한단고기(桓檀古記)에는 30 世 檀君 내휴(奈休) 이후[“서쪽으로는 엄독골(淹瀆忽)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汗들과 만났다(西至淹瀆忽會分朝諸汗 檀君世紀).” 淹瀆忽은 지명이므로 奈休 檀帝 이전에 藍國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강성하던 藍國이 사라진 원인은 나와 있지 않지만, 藍侯의 혈통이 끊긴 것이 아닌가 한다. 제후가 아들이 없다 하여 조카, 혈족으로 왕위를 잇게 할 수는 없다. 제후로 봉하는 것은 檀君만이 할 수 있으니까]로 등장하지 않는다. 揆園史話에 의하면, 藍侯가 北夫餘 시대에도 강자로 떠올라야 하나, 北夫餘紀에는 그런 기술이 전혀 없다.

강성한 藍候가 있다면, 고작 사냥꾼(于和沖) 따위가 도성을 에워싸고 공격할 수 있는가. 普乙 檀帝는 몽진(蒙塵)까지 떠났다. 燕나라 배도(倍道)가 遼西를 함락 시키고, 雲障까지 육박했을 당시도 三朝鮮이 격퇴 시켰지, 藍侯는 등장하지 않는다. 藍侯가 융성 했다면, 노관(盧綰), 裵川의 漢寇 등이 우리나라 땅을 일시나마 점령 할 수 있었겠는가.

“옛적에 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稧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씨(藍氏)의 백성이 되었다(昔夫餘民有遁居于稧兪之地遂與其民雜處頗習其俗殆無恒業以狩獵爲生獸皮爲服 人謂之貊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揆園史話 檀君紀).”와 관련하여 韓民族 으로서의 濊貊의 기원을 만들어내기 위한 날조다. 揆園史話를 쓸 당시에는 한단(桓檀) 역사서가 모조리 분서되고 숨겨진 때라 마음놓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濊貊族의 시조로 둔갑시킨 藍侯를 강성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北崖는 시기적으로 앞선 역사를 뒤로 뺐다. 北崖의 거짓말은 이 뿐만이 아니고, 揆園史話 전반에 걸쳐 있다.

乙亥年은 가륵(嘉勒) 임금의 원년이다. 하(夏)나라 왕이 덕을 잃어 그 신하 가운데 왕위를 넘보고 반역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내 식달(息達)로 하여금 남국(藍國)과 진번(眞蕃)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케 하니 나라의 위세가 더욱 빛났다 (乙亥歲壬儉嘉勒元年......夏王失德其臣有簒逆者乃使息達率藍眞蕃之民以征之於是國威益彰 揆園史話 檀君紀) 3 世 檀君 嘉勒의 즉위 원년은 己亥年(B.C. 2182)이다. 저 기사는 檀君世紀에도 나오는데, 4 世 檀君 烏斯丘 때의 기사로 내용도 틀리다.

壬寅 19년(B.C. 2118) 夏나라 왕 상(相)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檀帝께서는 식달(息達)에게 명하여 남(藍), 진(眞)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치니 천하가 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 하였다(壬寅十九年夏主相失德帝命息達率藍眞弁三部之兵往征之天下聞之乃服
檀君世紀)

揆園史話에는 烏斯丘 天皇 때 夏나라 정벌 기사도 나오지만 이기지 못했다(壬儉烏斯征夏王后相 不克 後和)고 했다.

하(夏)나라 왕 후상(后相)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후에 화해하여 사신을 보내고는 서로 교통하였다 (征夏王后相不克後和遣使相通 揆園史話 檀君紀)

揆園史話에는 丙寅年이 4 世 檀君 烏斯丘의 즉위 원년이라 했다. 또 烏斯丘를 烏斯라고 기술하고 있다. 烏斯丘 檀君의 즉위원년은 甲申年(B.C. 2137)이다.

庚寅年은 달문(達門) 임금의 원년이다. 서쪽으로 설유(稧兪)를 달래고 북쪽으로 앙숙(軮肅)을 진정시켰으며, 남으로 하(夏)나라를 물리치고 동쪽은 창해(蒼海)에 이르렀다 (庚寅歲壬儉達門元年......乃西撫稧兪北安軮肅南攘夏東至于蒼海 揆園史話 檀君紀)

6 世 檀君 達門의 즉위원년은 戊寅年(B.C. 2083)이다. 夏나라는 朝鮮의 남쪽에 있지 않았다. 동쪽은 神市氏 이후 언제나 蒼海(滄海)에 이르렀다.

10 世 檀君 노을(魯乙)의 즉위 원년 辛卯年(B.C. 1950)을 壬子年으로 날조했다. “처음으로 우리를 만들어 바깥의 짐승들을 길렀다(始作大囿養畜外之獸 檀君世紀).”고 했는데, 이미 太始紀에서 “神市氏가 ...... 高矢氏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다(神市氏乃使......高矢氏生致牛馬狗豚雕虎之獸而牧畜 揆園史話 太始紀)”고 했다. 우리를 만들어 기른 것은 가축 이외의 짐승이었다.

庚寅年은 벌음(伐音) 임금의 원년이다. 이 때 하(夏)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구원을 청하므로 말량(末良)에게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구원하게 하였다. 뒤에 夏나라 왕이 또다시 병사를 요청 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무도함을 들어 청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탕왕(湯王)이 상(商)나라를 일으키고 크게 어진 정치를 닦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덕이 있는 군주로다. 서로 침범할 수 없도다”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들인 뒤 화해 하였다 (庚寅歲壬儉伐音元年......時夏王遣使請援乃使末良興兵進救後夏王復請兵壬儉以其無道却而不許及湯王商大修仁政壬儉曰有德之君也不可相侵乃戢其兵後和 揆園史話 檀君紀)

伐音은 15 世 檀君 代音(혹은 後屹達)의 誤記다. 檀君世紀에는 “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했다(庚辰元年殷主小甲遣使求和)”고 했다. 다음 기사가 같다. “이 해에 80 분의 1의 세법을 개정하였다(是歲改八十稅一之制).” 小甲이 화친을 구하자 군대를 거둔 것이지, 殷(商)나라 왕이 덕이 있어, 먼저 군대를 거두고 화해한 것은 아니다. 代音의 즉위 원년은 庚寅年이 아니라 庚辰年(B.C. 1661)이다.

庚午年은 아물(阿勿) 임금의 원년이다. 아우 고불가(固弗加)에게 영을 내려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였다. 웅가(熊加) 을손(乙孫)을 보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간 군사들을 살펴보게 하고는 상(商)나라 땅에 고을을 세웠다. 뒤에 商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화해하지 않으니 병사를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고는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왔다 (庚午歲壬儉阿勿元年令弟固弗加治樂浪忽遣熊加乙孫觀南征之兵立邑商地後商人互爭不和乃進兵攻之尋罷 揆園史話 檀君紀)

檀君世紀에는 23 世 檀君은 아홀(阿忽)이며, 즉위 년도는 甲申年(B.C. 1096)이다. 또한 固弗加는 檀帝의 아우가 아니라, 叔父이다. "첫 해(甲申)에 황숙(皇叔)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을 내려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藍國의 임금과 함께 남쪽을 치는(南征) 병사들을 돌보게 하였다(甲申元年命皇叔固弗加治樂浪忽遣熊乫孫與藍國君觀南征之兵).

壬寅年은 솔나(率那) 임금의 원년이다. 북쪽 궁벽한 곳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어린 백성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달팽이도 집이 있고(蝸牛有室) 벌과 전갈에게도 먹이가 있는데(蜂蠆有餌) 어찌 나의 백성을 유랑 하게만 하겠는가”라고 하며, 백성들에게 권하여 물자를 서로 교환하고 옮기게 하여 그 쓰임새를 더욱 넓히게 하였다. 따라서 남북의 백성들이 배와 수레를 사용하여 서로 교통하게 되었다 (壬寅歲壬儉率那元年出巡北鄙見小民艱苦爲生歎曰蝸牛有室蜂蠆有餌安使我民有或流離耶乃勸民貿遷以廣其用於是南北之民舟車相通 揆園史話 檀君紀)

25 世 率那 檀君의 원년은 辛亥年(B.C. 1183)이다. 檀君世紀에는 이미 2 世 檀君 부루(扶婁) 때 시장의 저울과 가격을 통일했다.

癸卯 3 년(B.C. 2238) 말(斗)과 저울을 모두 관청의 표준에 따르도록 하였고 베(布)와 모시(苧)의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게하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멀고 가까운 곳이 두루 편했다
(癸卯三年......斗衡諸器悉準於官布苧市價無處有二民不自欺遠近便之 檀君世紀)

또한 檀君世紀 에서는 4 世 檀君 烏斯丘 “庚寅 7 년(B.C. 2131) 배 만드는 곳을 薩水의 상류에 설치(庚寅七年設造船于薩水之上)”했고, 11 世 檀君 道奚 “乙亥 46 년(B.C. 1846)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舟)와 노(楫)등 기물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乙亥四十六年設作廳于松花江岸舟楫器物大行).”고 했다.

戊午年은 추로(鄒盧) 임금의 원년이다...... 丁卯년은 두밀(豆密) 임금의 원년이다. 사람을 시켜 환검(桓儉) 이래 열성조(列聖祖)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 궁문의 안쪽에 걸어 두고는 입조(入朝)하여 알현하는 사람에게 이를 읽도록 하였다 (戊午歲壬儉鄒盧元年......丁卯歲壬儉豆密元年使人記桓儉以來列聖之詞掛於宮門內側使出入朝覲者閱之 揆園史話 檀君紀)

26 世 檀君 鄒盧의 즉위 원년은 己卯年(B.C. 1062) 이다. 또한 27 世 檀君 豆密의 즉위 원년은 甲申年(B.C. 997)이다.

乙亥年은 오루문(奧婁門) 임금의 원년이다. 도읍을 낙랑홀(樂浪忽)로 옮기고 진번후(眞番侯)를 시켜 옛 도읍을 감독하게 하였다(乙亥歲壬儉奧婁門元年遷都樂浪忽使眞番侯監舊都 揆園史話 檀君紀)

34 世 檀君 奧婁門의 즉위 원년은 丙午年(B.C. 795)이다. 朝鮮의 도읍은 寧古塔에서 藏唐京으로, 白岳山으로 다시 藏唐京으로 옮겨졌다. 樂浪忽에 도읍한 적이 없다. 23 世 檀君 阿忽 때 皇叔인 固弗加가 다스린 곳이다.

寧古塔에서는 10 년간 있었고, 藏唐京은 천년 제업의 땅[“辛丑 6년(B.C. 1280) 신지(臣智)인 육우(陸右)는 ‘천년제업(千年帝業)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寧古塔은 王氣가 짙어 白岳山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檀帝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新都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辛丑六年臣智陸右奏曰阿斯達千年帝業之地大運已盡寧古塔王氣濃厚似勝於白岳山請築城移之帝不許曰新都已宅更何他往 檀君世紀)]이고, 白岳山은 22 世 檀君 索弗婁가 檀君으로 즉위한 후 丘勿(揆園史話에서는 丘忽이라 했다)이 즉위 이전[丙辰年(B.C. 425년은 丘勿이 44 世 檀君으로 즉위한 해)에 上將 丘勿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于和沖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으로 옮겼다]까지 朝鮮의 도읍이었다.

그러므로 癸卯年은 “고열가(古列加) 임금의 원년이다 ...... 임금은 이에 제기(祭器)를 받들고 당장경(唐莊京)으로 피하여 거처 하다가 마침내는 아사달(阿斯達)에 자리를 잡았다. 기내(圻內)의 백성들 가운데 임금을 좇아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唐莊京에 집을 정하였다(癸卯歲壬儉古列加元年......壬儉乃奉祭器遜居于唐莊京遂宅于阿斯達圻內民從來者甚衆皆宅于唐莊京 揆園史話 檀君紀).”도 사실이 아니다. 藏唐京은 44 世 丘勿 이후 멸망 당시까지 朝鮮의 도읍이었다. 阿斯達도 寧古塔, 藏唐京, 白岳山 세 곳이나 되니까, 불분명한 말이다. 阿斯達은 지명이 아니라 도읍지를 일컸는 보통명사이다.

 

北崖의 거짓말은 이미 慈烏支 한웅에 대한 기술에서 본격화 되었다.

치우씨(蚩尤氏)는 이에 공상(空桑)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涿鹿)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回兵圍攻於涿鹿之野又大破之 揆園史話 太始紀)

慈烏支 한웅은 배달의 天皇으로 즉위한 후 中土를 정복했다. 누구도 두 번씩 즉위식을 거행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慈烏支 한웅은 병사를 되돌리지 않았다. 진격시켰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즉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 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涿鹿)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蚩尤天王乃卽祭天而誓告天下泰平更復進兵圍迫涿鹿一擧而滅之 太白逸史 神市本紀)

윗글 기사 뒤에 오는 말이 檀君世紀와 揆園史話의 기사가 똑같다. “관자(管子)가 말하는 바 ‘천하의 임금(天下之君)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管子所謂天下之君頓戰一怒伏尸滿野者是也).’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北崖 스스로 진역유기(震域遺記)만을 보고 揆園史話를 썼다고 밝혔는데, 太白逸史는 대변경(大辨經)이 출처라고 했다.

揆園史話의 날조기사와 최종적으로 날조한 淮垈, 海垈를 보고 풀이한 모 사이트 (http://bluecabin.com.ne.kr/kyuwon/main.htm) 에 보면, 黃河와 淮水 사이(오늘날의 商水쯤)에 空桑이 있다 하고, 우리나라는 난하(灤河) 이서에 그려 두었다. 空桑 이동까지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三聖紀全 下篇, 太白逸史 神市本紀는 무시하고 空桑과 우리나라를 뚝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空桑은 楡罔이 거처를 정한 곳일 뿐, 楡罔의 땅은 空桑만이 아니고, 주변(空桑 이동을 뺀 空桑 이북, 이서, 이남)을 포함한다. 우리나라가 空桑과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空桑만을 향해 한 방향[군사를 정돈하여 친히 이들을 이끌고 洋水를 건너 출진해 재빨리 空桑에 이르렀다(整師躬率而出陳洋水殺至空桑)]에서 진격하면, 空桑에 도달하기도 전에 측면 공격 및 배후공격에 놓이게 된다.

승리는 고사하고, 궤멸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용케 궤멸의 위기를 피했다고 해도, 난하(灤河) 이서까지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요행히 날조한 淮岱와 海岱로 흩어져 농성전을 펼친다 해도 고립되어 있으므로 굶어죽기 쉽상이다.

근공원교(近攻遠交). 멀리 있는 나라와는 교류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 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전쟁의 상식이다. 가까운 나라를 놔두고 먼 나라를 공략해서 설령 성공했다 해도 적진 속에 자국 영토를 확보했다는 소리이다. 그 땅을 지킬 수 있는가.

더구나 (http://bluecabin.com.ne.kr/kyuwon/main.htm) 에서는 탁록(涿鹿)이 北京이라고 주장한다. 慈烏支 한웅이 병사를 ‘되돌려’ 涿鹿을 공략, 패퇴 시켰다는 揆園史話에 따른 해석이다. 軒轅은 길을 내주고, 다시 慈烏支 한웅과 맞붙는다는 것이다. 慈烏支 한웅이 먼 곳부터 치고, 가까운 곳을 나중에 공략했다면, “군사를 주재하는 자가 절대 제사지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소호(少昊 : 揆園史話에는 少顥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패했고, 죽기로 작정 했던지 그 너른 중국 대륙을 다 놔두고, 楡罔과 함께 우리나라 국경 쪽으로 달아났다[少昊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空桑으로 들어가더니 楡罔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涿鹿으로 들어갔다(少顥大敗落荒而走入空桑與楡罔出奔反入涿鹿)]는 것이다.

涿鹿이 北京이고, 空桑이 상수(商水)라면(空桑 이동이 우리나라 땅이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涿鹿부터 공략해야 한다.

揆園史話는 慈烏支 한웅이 中土에서 물러 나왔다고 한 반면 太白逸史에는 中土에서 물러 나왔다는 기사가 없다.

치우씨(蚩尤氏)가 비록 물러나 돌아 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楡罔) 또한 다시 그 제위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炎帝)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軒轅)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蚩尤氏雖然退歸中土以是蕭然楡罔亦不得復位炎帝之業以是永墜矣自是軒轅代爲中土之主是爲黃帝而蚩尤氏兄弟諸人乃永據幽靑聲威自是不减黃帝氏亦不得自安終其世 揆園史話 太始紀)

헌원(軒轅)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楡罔)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업적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과 위엄을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헌원(軒轅) 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軒轅以是索然楡罔亦從以永墜矣蚩尤天王之餘烈世襲能振盡有幽靑聲威不墜軒轅以來世不自安終其世而未嘗安枕而臥 太白逸史 神市本紀)

바로 뒤에 둘 다 “史記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통로를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涿鹿의 물가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史記所謂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者蓋其戰兢之意歷歷可觀)”가 나온다. 中土의 주인은 軒轅이 아니라 慈烏支 한웅이었다.

軒轅이 중토의 주인 이라면 神農(炎帝)의 혈통도 끊이지 않은 것이 된다. 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軒轅은 少典의 별고(別故)인 公孫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楡罔 집안과 軒轅 집안은 대대로 누비혼인(두 姓 사이에 대대로 겹쳐서 하는 婚姻)까지 했다고 날조하지 않았던가.

이때 치우씨(蚩尤氏)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中土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炎帝)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하물며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당(兄弟宗黨)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軒轅)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 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 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 라는 자(蚩尤者)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蚩尤氏)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淮垈)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써 헌원(軒轅)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時蚩尤氏仰觀乾象俯察人心深知中土旺氣漸盛且炎帝之民所在固結不可勝誅况各事其主不可漫殺無辜乃決意退還使兄弟宗黨務要大戰而立威使敵不敢生意追襲復與軒轅大戰混殺一陣然後方此時部將不幸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盖謂是也蚩尤氏乃東據淮岱之地以當軒轅東進之路及至其沒漸至退鐛矣 揆園史話 太始紀)

(헌원이) 더욱더 크게 군사와 말을 일으켜 우리의 신시(神市)를 본따 널리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100 번이고 싸우려고 나섰다. 이에 天王은 불같이 진노하사 형제와 종당(兄弟宗黨)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軒轅)의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한바탕 싸움이 크게 일어나자 한 개의 진(陳)을 여지없이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다. 우리쪽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蚩尤飛)라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치우(蚩尤)라는 자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사를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飛石迫擊之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끝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軒轅)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尤益大興士馬效我神市而廣造兵甲又制指南之車敢出百戰天王赫然震怒使兄弟宗黨務要大戰而立滅使軒轅之軍不敢生意於追襲與之大戰混殺一陳然後方熄是役也 我將蚩尤飛者不幸有急功陳沒 史記所謂擒殺蚩尤者蓋謂此也 天王赫怒動師新造飛石迫擊之機成陳聯進賊陳終不能抗也 於是分遣精銳西守芮涿之地東 取淮岱爲城邑而當軒轅東侵之路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 다음에는 揆園史話, 太白逸史 둘 다 “지금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괄향성(闕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 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한다(今據漢書地理志其陵在山東東平郡壽張縣闕鄕城中高七丈秦漢之際住民猶常十月祭之必有赤氣出如疋絳謂之蚩尤旗).”가 이어진다.

 

“中土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炎帝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中土旺氣漸盛且炎帝之民所在固結不可勝誅)”는 민심 따위는 애초부터 中土에 없었다. 그 땅은 누가 들어가도 지배할 수 있는 땅이었다. 그 땅은 누가 들어가 지배해도 환영하는 땅이었다.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고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는 華夏가 지배자가 누군들 환영하지 않았을 것인가.

北崖는 한단(桓檀) 역사책은 震域遺記만을 참고했다고 했으나, 太白逸史에는 大辨經이 출처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震域遺記의 저자라는 청평(淸平) 이명(李茗)의 말을 줄곧 인용하고 있다. “청평산인(靑平山人) 李茗이 있었는데, 그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서 震域遺記 세 권을 저술하였다. ....... 나는 차라리 淸平의 말을 취함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古有淸平山人李茗者高麗時人有震域遺紀三卷......余寧取淸平之說而欲無疑云).” “淸平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渤海)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檀君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壬儉城)으로 곧 平壤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졌으며(淸平云粟末水之陽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 라고 하였다. 檀君의 첫 王儉城은 金富軾이 말한 西京으로 粟末水보다 한참 저위도에 있었다. 上京 忽汗城이 곧 平壤城으로 첫 王儉城과는 700 km나 떨어진 거리이다.

“이 때 부장(部將)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 사기에서 이른바 ‘마침내 蚩尤氏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此時部將不幸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盖謂是也).”? 中土가 慈烏支 한웅 이래로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蚩尤를 잡아 죽이다’고 말할 수 있는가. 大辨經 역시 明 때 날조한 역사를 보고 李氏朝鮮人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

太白逸史 神市本紀는 ‘震域遺記의 神市紀에서 말한다(震域留記神市紀云).’로 시작하는데, 그 끝에 이렇게 써놓았다. “공구(孔丘)의 春秋에 이르러 이(夷 : 원전 표기는 大밑에 弓을 표시했다)의 이름을 마침내 융적(戎狄)과 나란히 냄새나는 더러운 호칭이 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至孔丘氏春秋之作而夸之名遂與戎狄並爲腥臊之稱惜哉).” 春秋는 孔子가 쓰지도 않았고, 미개 中寇가 세계를 밝힌 문명을 창출한 대제국을 오랑캐라 부를 수도 없었다. 게다가 揆園史話의 많은 내용이 檀君世紀에 나온다. 달랑 大辨經만 보고 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孔丘가 우리나라를 오랑캐라 불렀다는 소리는 揆園史話에도 나온다. 震域遺記를 보고 쓴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거짓말을 하다 보니까, 일관성이 없어서 “神市의 말기에 蚩尤氏의 형제가 비록 涿鹿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다(神市之末蚩尤氏兄弟雖自涿鹿退歸 檀君紀)”고 하면서도 “通志·氏族略에 ‘치(蚩)씨는 蚩尤의 후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들은 蚩尤氏의 후손으로서 영원히 漢나라 땅에 머무른 자들이다(通志氏族略蚩氏蚩尤之後也云 則是蚩尤氏之後而永居漢土者也 檀君紀).”는 둥,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마칠 때까지 편안함을 얻을 수 없었다(蚩尤氏兄弟諸人乃永據幽靑聲威自是不撼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太始紀).”는 둥 횡설수설 했던 것이다. 檀君世紀의 기사가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포기한 적이 없음을 알려준다. “甲戌 67 년(B.C. 2267) ...... 淮垈 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케 했다(甲戌六十七年......定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使虞舜監其事 檀君世紀)." 이미 淮水 중, 하류는 扶蘇, 扶虞, 扶餘가 다스리고 있었다. 虞舜에게 맡긴 淮垈는 淮水 상류 즉 長江(怒江) 상류와 黃河(金沙江) 상류 사이다. 淮水 상류도 우리나라 땅이니까, 제후라 한 것이다. 말 안 듣는 제후들 이라서 평정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 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음에, 나와 같이 청빈(淸貧)한 필부(匹夫)가 이 또한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巷間)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漢)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食肉忘味之).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그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듣게 되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朝聞道 夕死可矣 )’ 하였으니, 역시나 오직 이를 두고 한 말 같구나. 만약 하늘이 나에게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단지 그 선구(先驅)에 불과할 뿐이로다. 오호라!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곡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유혼이 무한히 기뻐할 바로다(余嘗有志於述史 而固無其材 且名山石室 渺無珍藏 以余淸貧匹夫 亦竟奈何哉 然何幸峽中得淸平所著震域遺記中有三國以前故史 雖約而不詳 比於巷間所傳區區之說 尙可吐氣萬丈 於是復采漢史諸傳之文 以爲史話 頗有食肉忘味之槪矣 雖然 凡今之人 孰能有志於斯而同其感者哉 經曰 朝聞道 夕死可矣 亦惟此而已矣 若天假我以長壽 則卽可完成一史 此不過爲其先驅而已也 噫 後世若有執此書而歌哭者 是乃余幽魂無限之喜也 揆園史話 序)

이제 北厓가 얼마나 교활한 모사인지, 어째서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알았을 것이다. 北崖가 揆園史話를 쓴 목적은 먼 훗날, 濊貊族을 韓民族으로 만드는 것 그 이상은 아니다. 北崖가 살았을 당시는 濊貊族을 아무도 韓民族이라 여기지 않았다.

“이름 있는 山의 石室에조차 貴하게 秘藏된 것 하나 없(名山石室渺無珍藏)“을 정도로 李氏朝鮮은 혈안이 되어 우리나라 역사책을 수거했던 것이다. 그래놓고 求書의 諭示?

우리나라 역사를 抹殺한 후 李成桂가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大國을 섬겼고, 홍무(洪武)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辛禑列傳).”로 시작하는 상소문을 강능제[江陵帝(1364~1389) : 위화도(威化島) 회군 후 李成桂가 폐위한 우왕(禑王)이다. 太白逸史에 “江陵王이 先帝의 命을 받아 즉위하였다(江陵王以先帝命卽位)”고 했다. 창왕(昌王), 공양왕(恭讓王)은 李成桂가 내세웠다]에게 올렸다고 날조한 李氏朝鮮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高麗)가 어서어서 멸망해 줘야 했다.

그래서 北崖는 “유독 藍侯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항상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게 되었기에 이로서 열국이 되었다(獨藍侯者出諸家之右時常役率羣后以行國政是爲列國焉).”고 날조했던 것이다.

北崖가 스스로 밝혔듯이 揆園史話는 한단사(桓檀史)를 쓴 책이다. 그래서 太始紀와 檀君紀로 나누어져 있다. 그런 한단사에 엉뚱하게도 미개 濊貊族에 대한 기술을 대폭 할애하고 있다. 날조한 미개 濊貊族史가 여러 종족명으로 등장하면서 한단사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揆園史話는 망각된 한단사를 후세에 전하려는 애국심에서 쓴 글이 아니다. 濊貊族을 한민족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썼던 것이다.

 

 

 

『규원사화』 이항녕, 홍익대 명예교수  


지금 남북이 분단되어 이념적 갈등이 심해 남북이 다같이 인정할 수 있는 공동분모를 찾을 필요가 있는데, 나는 우리나라의 국조로 여겨지고 있는 단군에서 민족의 구심점을 찾는 것이 가장 가까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에 일연一然이 사사로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 나오고 그보다 약 150년 앞서 김부식金富植이 국가사업으로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군의 실존을 부정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런데 조선조 숙종肅宗 2년(서기 1675)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 규원초당揆園草堂에서 지었다는 『규원사화揆園史話』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서문에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국사자료를 구하던 중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 중에 삼국 이전 옛날 역사가 있는 것을 얻어서 그것을 참고로 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다. 진역유기의 저자 청평은 고려 때 사람 이명李茗으로 발해渤海의 저술인 『조대기朝代記』 등을 근거로 「단군기檀君記」를 썼는데 저자의 말과 같이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와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한사람으로 1500년을 다스렸다고 하였으나 규원사화에는 초대 단군은 재위 34세로 146세에 돌아가시고 47대, 1195년 동안 단군조선이 계속되었으며 역대 단군의 임금(壬儉) 이름과 재위년수와 치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규원사화』의 기록은 상당히 신빙할 만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광무光武 15년(1911년)에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에서 발굴하였다는 『환단고기桓檀古記』 속의 「단군세기檀君世紀」도 그 내용이 『규원사화』와 똑같지는 않지만 단군조선이 47대까지 계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 때 사람 이암李 이 편찬하였고, 『환단고기』는 이유립李裕 이 가지고 있다가 1979년 일본인 가시마 노보루(鹿島昇)에게 공개되어 1982년 그 일본어역이 출판되고 이어서 우리나라에도 출판되었다. 그런데 『규원사화』나 『환단고기』는 우리의 단군역사의 해명에 큰 도움이 된다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학자도 있고 서지학書誌學적 고증이 부족하다고 하여 그것을 위서爲書로 보는 학자도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기록도 비과학적인 면이 많아서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규원사화』나 『환단고기』를 역사 그대로 인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덮어 놓고 부인할 필요는 없다. 내용에 있어서 좀 믿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책전체를 부인할 이유는 못된다. 책 가운데에서 진실로 인정될만한 부분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규원사화』의 저자는 "슬프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하면서 「조판기肇判記」「태시기太始記」「단군기檀君記」「만설漫設」의 4편을 썼다.


조판기에는 환인桓因에 관한 것, 태시기에는 환웅桓雄에 관한 것, 단군기에는 단군 47대에 관한 것, 만설에는 유학자들의 사대주의를 통틀어 비판하고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하고 있는데 "슬프다 환인이여! 슬프다 환인이여! 이제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 장차 어찌 될 것인가"하고 붓을 놓았는데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명저를 펴낸 북애 선생에게 나는 그저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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