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5 : 桓檀古記(한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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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상선약수님)
소크라테스는 고대인들이 「토트 」에 관해서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토트는 필기(문자)를 발명한 다음 "당시 이집트 전체를 다스린 왕" 아몬신을 찾아가 필기법(문자)을 모든 백성들에게 보급하자며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오 위대하신 왕이시여, 이것을 배우면 이집트 사람들이 더욱 현명해지고 그들의 기억력이 향상될 것입니다.저는 기억과 지혜의 묘약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아몬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오, 가장 뛰어난 테우트여, 예술의 본질을 탄생시킬 수 있는 사람과, 그것이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해를 끼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제 당신은 기록의 아버지가 되었고 기록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기록의 효과를 실제와 정반대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록은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기억상실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들은 기억력을 이용하는 훈련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의 묘약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묘약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신은 제자들에게 지혜의 실체가 아닌 허울만을 제공합니다. 당신의 발명으로 제자들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않은 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자기네가 많은 지식을 알게 되었다고 상상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총 다섯편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삼성기전 상편(三聖紀全 上篇) - 안함노(安含老) 찬(撰)
2. 삼성기전 하편(三聖紀全 下篇) - 원동중(元董仲) 찬(撰)
三聖紀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안함노의 삼성기이며, 다른 하나는 원동중의 삼성기이다. 삼성기는 왕조실록 세조유시(世祖諭示)의 수상서(收上書) 목록에도 들어 있는데 저자는 安含老와 元董仲이라고 되어있다.
安含老( ? ~ 640)
신라 진평왕 22년 (600)에 왕명으로 중국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던 도승(道僧)이다. 속성은 김씨이며 시부 이찬(詩賦伊湌)의 자손이다. 그는 물위를 걸었으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는 신승이였다고 한다. 이같은 행적으로 보아 그는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선덕왕 9년 62세로 만선도장(량)(萬善道場)에서 세상을 떠났다.
元董仲 : 高麗 때 사람이라고만 알려져 있고 그 행적은 밝혀지지 않는다.
3. 단군세기(檀君世紀) - 행촌(杏村) 이암(李嵒) 편(編)
李嵒(1297~1364)
호는 행촌(杏村) 17세에 과거에 급제 하였으며 왕은 그 재능을 인정하여 부인(符人)을 맡게하고 비성(秘省)의 관직을 제수 하였다. 그후 좌정승을 거쳐 공민왕 8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명(李茗),범장(范樟)과 더불어 천보산(天寶山) 태소암(太素庵)에서 환단(桓檀) 때부터 내려오는 진결(眞訣)을 얻게 되었다.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 홍행촌(紅杏村)에 들어가 스스로 홍행촌 늙은이(紅杏村叟)라 하였다. 저서로는 단군세기(檀君世紀),농상집요(農桑集要),태백진훈(太白眞訓)의 행촌삼서(杏村三書)를 남겼다. 공민왕 13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4. 북부여기(北夫餘紀) -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障) 편(編)
范障
호는 복애(伏崖) 자는 여명보(汝明甫)이다. 일명 범세동(范世東)이라고도 한다. 금성(錦城) 사람이며 고려 공민왕 때 간의대부(諫義大夫)의 벼슬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저서로는 북부여기(北夫餘紀),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이 있다.
5. 태백일사(太白逸史) -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편찬(編撰)
李陌
호는 일십당(一十堂), 환단휘기(桓檀彙記)에 의하면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현손(玄孫)이라고 한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바른 말을 하다가 연산 10년에 괴산으로 귀향갔다. 16년 만에(중종 15년) 찬수관(撰修官)이 되었다. 귀향 때 노인으로부터 들은 비장사전(秘藏史傳)들을 열람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지었다.
역사란 랑케(Leopold von Ranke : 1795~1886)를 鼻祖로 하는 實證史學의 입장인 고증사학의 뒷받침을 통해서 그 眞僞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여야 한다는데 異意를 달지는 않습니다.
허나 역사란 그러한 실증적인 면만이 아닌 다양한 방법론적 고찰을 필요로 합니다.
桓檀古記는 암울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東夷族의 웅대무비(雄大無比)함을 들어내 보인 쾌저(快著)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유립(李裕岦 : 1907~1986)의 僞作 내지는 創作이라는 의견에 동의를 한다해서 우리의 역사성에 흠결을 가져 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찬란한 우리 역사에 대한 흠집내기는 아니더라도,,
여지껏 신화처럼 널리 알려져 왔던 우리네 조상들의 太古的 이야기에 대한 것은
말 그대로 고기(古記)라는 검증 미상의 부분으로 놓아두어도 우리의 역사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연수(桂延壽 : ?~1920)의 原本이 없다는 것,,
고구려의 이문진(李文眞)이 영양왕 11년(600)에 당시의 史書였던 留記 100권을 새로이 편집하여 신집 6권(삼국사기에는 5권으로 기록)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최치원(崔致遠 : 857~?)의 글 대다수도 이름만 남아있습니다.
역사란 한 면만을 부각 시킨다 하여 그 방법론이 모든 것을 다독거려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학자의 양심에서는 나름대로 자신의 독보적인 잣대가 필요한 사안이겠지만
일반인의 範疇에서는 그러한 깊은 속내에 까지 파고들어 그들의 話爭에 편들기로 편승(便乘)
하는 것도 조금은 꺼림칙 합니다.
桓檀古記는 검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桓檀古記에 대한 검증으로 박창범교수가 천문학적 日食관찰을 고증적인 방법론으로 시도하고 있고, 새로이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많은 부분이 史料로써 인정되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가 始初에 글을 올린 것은 책의 眞僞 여부를 떠난 객관적인 발행된 그 책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우리 上古史에 대한 접근은 민족이라는 실체적 개념으로 한울타리를 만드는 민족정서의 同化的 統合을 앞당기는 大憲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중에 이런 말이 나오지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라고,,,
우리가 미생물들을 현미경으로 보거나 천체의 별들을 망원경으로 볼 때, 그 것 역시 광학기술에 의해 맺혀지는 허상을 보는 것이지요,,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봐야되는 직접체험만이 人間事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歷史를 通한 間接體驗은 우리의 知識體系를 확대 시키는 것이며, 그러한 지식에 바탕한 믿음은 한 사람의 人格을 형성시키며 그 한 사람이 民族이라는 구성원으로서 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因子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上古史에 대한 수많은 정수(精髓)들이 지나(支那) 史學者들에 의해 支那 사학의 근간(根幹)으로 둔갑합니다. 그들은 中華思想으로 무장하여 邊方國家로 전락된 東夷族의 역사를 폄훼(貶毁)하고 멋대로 뜯어 고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된 우리 史學者들은 事大主義에 물들어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좌표를 事大에 어긋나는 부분들은 지우기에 바빴고 그 대표적인 인물중에 三國史記를 집필한 金富軾과 이씨조선의 역대왕들및 그에 빌붙었던 이씨조선의 史家들의 잘못됨, 일제하 조선사 편수회를 통한 우리민족의 역사 날조(捏造)및 폄훼의 극치를 주도했던 최남선, 이능화, 신석호, 이병도와 광복후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해 또다시 저질러진 자학(自虐)과 자조(自嘲)의 줄긋기 路線이 강단사학(講壇史學)이라 대표되는 실증주의 역사관이 이 나라의 정의와 진실을 가리우고 亡國의 민족으로 敗殘의 후예(後裔)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과 끊임없이 對話하는 우리 정체성(正體性)의 존재의미이며, 미래로 나아가는 진일보한 인식의 확산이며, 후손들에게 삶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메쎄지입니다.
桓檀古記가 僞書냐, 僞作이냐, 創作이냐라는 물타기 내지는 우선 덮고 보자는 의견들로 부터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당시의 古人들이 집필했던 글이 무수한 핍박과 압박 속에서도 면면히 조상들의 기억속으로 傳受된 不立文字의 위대함을 깨우치기 바랍니다. 古典을 필사(筆寫)하다 보면 字句의 正誤가 있더라도 고스란히 베껴야하는 것이 筆寫者가 지켜야될 不文律입니다. 그러나 筆寫者들은 어쩔 수 없이 단어선택에 있어 당시의 時代相을 반영하게 되고 문화적 편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 한 面만을 보면서 加筆이다,僞作이다,創作이다라고 속단하는 비능률적인 桓檀古記의 僞書 與否를 비난하는 데 쓸 力量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古代史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되는 일입니다.
많은 史料들이 일제하에서 분서(焚書)되었습니다.
지금도 친일세력들로 분류되는 많은 사람들이 自國의 역사보다는 강대국들의 역사에 매료되고 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름잡힌 역사의 골들을 바르게 하고 올곧은 歷史觀을 가짐으로써 찬란한 한민족의 새로운 복본(復本)을 이룩하는데 미력한 힘이나마 결집해야되는 當爲가 이에 존재합니다.
stormmer 올림
추적! 환단고기 열풍(1999/10/2 KBS역사스페셜)
환단고기 원본 발견
위서논쟁 종지부 찍을 듯
이유립이 필사한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진위여부가 사학계의 위서논쟁으로 대립되는 가운데, 그러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환단고기 원본이 발견되었다. 환단고기는 그동안 그 내용의 가치가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부분에서 시대적인 오류가 발견되어 한참동안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위서'라는 논쟁에 휩싸여 빛을 바랬다. 이에 대해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방영되어 논란을 뜨겁게 달구었었지만, 연구의 가치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원본을 옮기는데 있어서 몇몇 오류때문에 가치를 무시하는 입장과 그럼에도 필요한 부분은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환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선생이 공개한 필사본으로 1911년에 계연수 선생에 의해 간행된 원본이 아니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 선생에 의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을 엮어 한정판 30부로 출간한 되었지만 당시 일제 총독부의 사료말살 계획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던 중 단학회 인사들이 만주 등지에서 간직해오다 해방 후 이유립 선생이 귀국하여 원본을 오형기씨에게 필사하게 하고 그것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유립 선생은 원본을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기성 역사학계로부터 원본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이유립 옹은 공개하지 못하고 결국 마음고생을 하다 1986년에 작고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원본이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 숙명여대에 소장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어, 확인 결과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 도서관에는 원본이 없었고, 숙명여대에서 확인되어, 복사본을 구해 이전의 오형기 필사본과 원문을 대조한 결과 이것이 필사되기 이전의 원본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애국지사로서 건국 훈장을 받은 바 있는 송지영 전 KBS 이사장이 1989년에 숙대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다. 문제는 민족사서들은 하나같이 ‘대출불가’로 되어 있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환웅천황이 신시를 열었을 때의 이상과 정치,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했을 때의 백성 사랑과 통치이념,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과정의 고난과 다물을 연호로 정한 이유, 왕건이 무엇을 통일하려 했던가를 심각히 연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때, 선조들의 정신세계와 역사흐름의 일관성을 꿰뚫어볼 때, 우리 역사가 나아갈 방향이 제대로 정해지고 한국인의 정체성이 확립될 수 있으며 또한 민족의 번영과 세계사에 대한 기여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우리 역사의 면면을 제대로 연구하고 이에 관련된 많은 논문이 발표되길 기대한다. 출처 : http://blog.empas.com/kim5862/12235040
Comment : 이제 잃어버린 9쳔년 역사를 찾아야할 좋은 기회가 왔다. 우리의 혼을 잃어버린 사람을 얼간이라고 한다. 그대는 얼간이로 살 것인가, 대한국인으로 살것인가?
한단고기와 고대문헌에 나타나는 종족연맹체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만난 곳을 아이사타阿耳斯[]라 한다. 꿈에 천신天神의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九桓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人類之祖曰那般 初興阿曼相遇之處曰阿耳斯[] 夢得天神之敎 而自成婚禮 則九桓之族皆其後也
─ 《삼성기三聖記》 하편
나반 → 나바이 →아바이 →아버지 / 아만 → 아마이 →어머니
■ 아이사타 ≒ 아사달
* 아사 - ‘아침’, ‘처음’, ‘첫’, ‘새로운’, ‘광명’, ‘동녘’, ‘동방’, ‘태양’을 뜻하는 고대의 우리말. 일본에서는 지금도 아침을 ‘아사’라고 한다.
* 달 - ‘땅’, ‘벌판’, ‘대지’, ‘산’ 등을 의미함. 음지(양지)=응달(양달), 비탈=빗+달.
중앙아시아지역 국가인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파키스탄(Pakistan),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등에 공통적으로 있는 ‘-이스탄-istan’은 ‘아이사타isata’의 잔영인 듯 하며 터키의 ‘이스탄불Istanbul’ 역시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이스탄불Istanbul’은 ‘해뜨는 동방’을 의미하는데 터키(Turkey)는 투르크(Turk)족族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이고 투르크족은 바로 돌궐족이었다. 뒤에 밝히겠지만 돌궐, 거란(글안), 여진, 몽고, 흉(흉노), 선비족族 등은 모두 우리 배달종족연맹체였다. 몽고어로 산山을 ‘타우tau’라 하고 역시 ‘달’과 같은 뜻이다.
아이사타 → 아사달 → 알단, 아덴, 아르덴, 아나톨리아(아시아와 유럽 곳곳의 지명들)
『이로부터 환인의 형제 아홉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를 9황 64민이라 한다.』
─ 《태백일사》
『인황씨人皇氏는 아홉사람이 제위에 올랐다. 구름수레를 타고 태양에 사는 여섯마리 새에 멍에를 씌우고 곡구谷口에서 나왔다. 형제 아홉 사람이 9주州로 나누어 각기 우두머리가 되었다.』
─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
※ 고대에 ‘씨氏’는 임금의 이름 뒤에 붙이는 극존칭이었으며 그 나라를 뜻하기도 한다.
구황 이외에 고대 중국의 사서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는 동이東夷를 일컬어 구이九夷 혹은 구려九黎라고 하였으며 9황皇, 9환桓, 9한韓은 동일한 뜻이다. 훗날 고구려를 구려句驪라고도 불렀다.
『우리 민족은 단일종족이 아니었다!
단일종족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다종족 연합국가였다! 고구려(高句麗)라 말은 고씨의 구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말 자체는 이두로 “가우리”의 음을 빌린 글자다. 가우리? 가운데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뜻을 한자로 옮기면 “중국(中國)”이다! 중국은 근대에 와서 그들의 이름을 중국이라고 썼으니 이 나라이름의 특허권은 원래 고구려에 있었던 셈이다.』
─ 박창규(고대사 X파일 中)
환국과 12연방
『《고기古期》에 이르기를, 파내류산 아래 환인씨桓仁氏의 나라가 있는데 천해天海의 동쪽 땅이며 파내류의 나라라고도 안다.』
─ 《삼성기》 하편
* 총 강역 -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
* 12환국 -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시위국 혹은 통고사국), 수밀이국
* 역년 - 7대 환인이 3,301년간 통치.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 하는데 불함산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을 가야 한다.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구막한국에 접해있고 북으로는 약수弱水(흑룡강)에 닿았다. 그 땅의 경계는 넓고 길어 수천리에 이른다. (중략)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한다,』
─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
※ 《진서晉書》는 당 태종이 20여명의 학자로 하여금 편찬케 한 동진東晉과 서진西晉의 정사로, 25사의 목록에도 올라가 있는 역사서이다.
■ 수밀이국 = 수메르Sumer
이집트,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황하 등의 4대문명설은 이미 폐기된 학설이나 다름없다. 이들보다 더 오래된 문명유적들이 세계각지에서 발견되고 있고, 특히 우리민족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요녕성에서는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선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인공은 바로 수메르이며 지금의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등지의 인접지역이다.
* 수메르인 - 그들 스스로 동방의 고원 산악지대에서 이주해 왔다고 하며. 교착어를 쓰는 검은 머리의 황색인종이었다. 이들의 창세신화는 후일 바빌론과 시리아에 전해졌으며 그들의 점토판에 기록된 홍수설화는 이스라엘의 구약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의 유물 중에는 두 장정이 서로 씨름(?)을 하는 모양으로 구리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들의 자세는 고구려 벽화의 씨름도와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다. 이들은 서로의 샅바를 잡은 손 중에서 왼손이 바깥으로 나가있는 왼씨름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전라도 지방에서 행해지는 씨름이 바로 왼씨름이다. 삼국 중 백제와 고구려의 동일기원설을 떠올리게 하는 의미있는 대목이다.
환웅과 배달국 시대
환국 말기에 이르러 환국이 위치하고 있었던 중앙아시아 고원(해발 2천미터 이상)은 점차 기후와 토양이 척박해져 갔을 뿐만 아니라 3천년을 내려 오면서 날로 증가하는 인구에 비해 생산되는 물자 또한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므로 새로운 땅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아래는 《태백일사》에 실려있는 이에 관한 기록이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당시 사람은 많고 생산은 궁핍하니 살아갈 방법이 없어 근심거리였다. 서자부의 대인 환웅이 있어 여러 사정을 깊이있게 듣고 살핀 뒤 하늘에서 내려가 지상에 광명세계를 열고자 하였다. 그때 안파견이 지상세계의 금악, 삼위, 태백을 두루 살핀 뒤 태백은 가히 홍익인간할 만하므로 환웅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제 사람, 물건, 업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군은 무리를 거느리고 하계에 내려가 하늘을 열고 가르침을 베풀어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것을 주관하며, 천부의 권위를 세우고 (중략) 사도를 세워 세상을 이치대로 교화하며, 자손만대로 큰 모범이 되게 하라.’ 하시며 마침내 천부와 인 세개를 주면서 하계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신시라 한다. 풍백·운사·우사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 《태백일사》 신시본기神市本紀
※ 여기서는 안파견이 1대 환인이 아니라 마지막 7대 지위리 환인을 말한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대인大人과 대인국大人國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환웅이 세운 배달국을 일컫는 말이었다. 대인국 외에 군자국君子國, 청구국靑邱國 등이 있으며 후대의 단군조선을 의미하기도 했다. 청구국은 제 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치우천황) 때 배달국을 부르던 이름이다.
청靑은 오행에서 동방을 뜻하며 후일 여진이 세운 금金나라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미 말했지만 여진도 우리 배달종족의 일부였고 처음에 나라이름을 금으로 한 것은 배달민족의 광명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며 청淸은 청靑에 삼수변을 붙인 것인데 이또한 금생수金生水라는 오행이치에 따른 것이다.
『청나라(靑) 임금이 왜 신라(新羅)를 사모하는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을 우리는 누루하치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들의 성(性)은 무엇인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府儀)의 성도 당연히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라는 성에는 무슨 뜻이 숨어있는가? 애각(愛覺) 신라(新羅)라,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신라(新羅)? 삼국시대의 그 신라? 그렇다. 그 신라다. 다름 아닌 그 신라다. 청나라와 신라가 무슨 관계냐고? 다름 아니라 청나라의 왕족과 신라의 왕족은 멀리멀리 가면 그 뿌리가 같다. 사실이냐고? 지금부터 이 이야기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따라가 보련다. 물증은 없으나 너무나 확연한 심증을 드러내는 고대사 X 파일의 첫 장면이다.
우리가 오랑캐 청나라라고 알고있는 만주족이 세운 첫 나라는 청나라가 아니다. 대진국(발해)이 망한 후 북방 종족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그중 거란(글안)족이 세운 나라가 요(僚)이고 만주족이 세운 나라가 금(金)이다. 나중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가 되는 시점에서 이때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할 정도로 “金”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데, 바로 이 金이 “심증”의 근거다.』
─ 박창규(고대사 X파일 中)
배달국은 18대 환웅이 1,565년간 다스렸다.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환웅의 배달국이 그 시초이다. 배달국은 일찍이 하늘에 천제를 올리는 하늘사상이 있었고 이를 신교라 하는데 그 가르침에서 유불선 삼교가 나왔다.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가르침의 근본은 《신사神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실로 3교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說敎之源備詳神史 實乃包含三敎
─ 《삼국사기》
중국이 여러 문헌에서도 배달국의 이러한 고차원의 철학을 가지고 도道로써 세상을 다스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동방을 동이東夷라 하는데, 이夷는 근본을 말한다. 말하기를 인자하여 만물이 생生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근본은 땅에서 나온다. 때문에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제어하며,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에 이르렀다.』
─ 《후한서後漢書》
* 어릴 때부터 호생(好生)의 덕이 많아 여섯 살 때 마당 구석에 화초를 심어 아담하게 가꾸시고 밭둑에 나가시어 나무를 즐겨 심으시니라. (道典 1:15:4)
* 어머니 권씨는 용모가 단아(端雅)하시고 붕어를 잡아 오면 고기의 배를 가르기 어려워할 정도로 성품이 선하시며, 천성이 조용하시고 한평생 남의 말을 하지 않는 분이라. (道典 1:13:9)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 한 것은 환인, 환웅, 단군의 신선도와 관련이 있으며 또 도로써 세상을 교화하기 때문에 누가 나라를 다스려도 마치 한 사람의 군자가 수천년을 혼자서 다스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이 있어 이름을 대인大人이라 하며, 대인국大人國에 있다.』
有人名曰大人 有大人之國
─ 《산해경》 대황북경大荒北經
『대인국大人國이 북쪽에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크며, 앉아서 배를 만든다. (중략) 청구국靑邱國은 그 북쪽에 있다. 그 나라의 여우는 네 개의 발에 꼬리가 아홉 개다.』
─ 《산해경》 해외동경海外東經
『군자국은 북쪽에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잡아먹고 큰 호랑이 두 마리를 옆에 놓고 부린다.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 《산해경山海經》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가서 살고자 하니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누추할 텐데 어떡하시겟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거처하는 곳인데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
─ 《논어論語》
『동방에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들은 모두 붉은 옷에 흰 띠를 두르고 검은 관을 쓰고 있으며 여자들은 모두 채색한 옷을 입고 있다. 남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가히 사랑스럽고 항상 떨어져 앉아 서로 범하지 않는다. 서로 칭찬하고 서로 헐뜯지 않으며, 남의 어려움을 보면 몸을 던져 구하여 주니 이름하여 선善이라 하며 세상에서는 사인士人이라 한다.』
─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神異經》
『이른바 중국에서 예禮를 잃었을 때에는 사방의 동이東夷에게서 구하였다.』
─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동이전
이처럼 배달국과 단군조선은 일찍부터 주변 국가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고대 아시아의 선진문명국이었다. 그리하여 대인, 대인국이라는 칭호를 중국인들로부터 들었던 것인데 김부식은 이도 모른 채 단지 ‘거인들이 사는 나라’라고 해석하여 이러한 기록을 모두 허황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환웅은 대웅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사찰에 있는 대웅전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환웅桓雄을 대웅大雄의 하늘이라 칭한다.』
桓雄稱大雄天
─ 《태백일사》
『불상이 처음 들어오자 절을 세우고 이를 대웅大雄이라 칭했다. 이는 승도僧徒들이 옛 풍속을 세습하여 부르는 칭호이며 본래 승가僧家의 말이 아니다.』
─ 《태백일사》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땅에 환인·환웅·단군을 모시던 신전 혹은 신당 등이 있었는데, 이를 대인당·대웅전·삼성전 등으로 불렀다. 그 뒤 이 땅에 들어온 불교는 우리민족 고유의 신앙적 요소를 모두 사찰에 흡수하고 수용했는데, 이는 외래종교로서 기존 문화와의 충돌을 최소화하고 포교를 쉽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고유의 가르침이 유·불·선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불교의 가르침과 근본에서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태호복희씨太昊伏姬氏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太虞儀환웅의 막내아들이었으며 여와女臥와는 남매지간 혹은 부부지간이었다. 여와는 후일 수메르 문명을 거쳐 이스라엘의 야웨신의 원형이 되었다. 여와가 황토로 인간을 빚어 7일만에 완성을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구약의 창세기와 아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태호복희는 역법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바로 역법 또한 동이족에서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역법易法은 사실 동이東夷가 창시자이며, 소호少[]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 중국의 서량지 교수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 중국의 학자 필장복
복희는 풍씨風氏였는데 당시 동이족의 아홉 갈래였던 견이·방이·적이·백이·우이·황이·현이·양이·풍이 중에서 풍이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풍씨는 이로부터 15대만에 손이 끊어졌다.
앞서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배달국의 광명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이 금金사상 또한 태호복희씨의 후예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부터 비롯한다. 소호금천씨의 풍속을 보면 오늘날의 불교와 아주 흡사한 면이 많다. 이는 역시 불교사상이 한민족 고유의 사상에서 근원하는 것임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사상과 한민족 고유 사상의 공통적인 속성들을 여러가지로 열거한 바가 있는데 아래와 같다.
1. 한국사상은 본시 인본주의 사상인데 불교사상이 그러하다.
2. 한국사상의 신선사상은 무량수(장생불사)를 뜻하는 불교의 아미타불과 통하며 불佛을 선인 중 최고라는 뜻으로 대선大仙이라 하였다.
3. 한국에 벌레, 짐승을 죽이지 않는 사상이 있는데 불교에 불살생의 가르침이 있다.
4. 한국에 사람의 피가 신의 피요, 신의 피가 사람의 피라 하여 인간에 신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불교 또한 인간에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5. 한국에 사형수를 죽이지 않는 사상이 있는데 불교사상이 그러하다.
6. 한국의 주신을 환인이라 칭하는데 불교가 33천의 주신을 환인이라 칭한다.
7. 한국은 천신 환웅이 단목 아래에 하강했다 하고 씨족사회의 장을 단군이라 칭하고 또한 단궁을 사용하고 전단이라는 문이 있었는데 불교가 신도를 단도라 칭하고 신도의 집을 단가라 하고 단도의 보시를 주관하는 시주를 단특이라 하고 인도에서 가장 뫃은 목향을 전단이라 칭한다.
8. 한국에 금강산이 있고 불교에 금강신, 금강경이 있다.
9. 한국의 화랑도가 삭발하고, 인삼을 채취하는 신선파가 삭발하였다는 제문으로 산신에 제사하였는데 불교도가 삭발한다.
10. 한민족의 특징은 백의이다. 그런데 고대의 인도인이 백의를 입고 관세음보살을 백의대사라 한다.
11. 한국인은 예맥, 부여, 삼국시대, 고려시대까지 의복, 음식, 등 일상생활에 깨끗한 것을 즐겼는데 불교가 또한 그러하다.
12. 한국에 환인, 환웅, 단군 3성을 말하는데 불교가 아미타, 관음, 세지3존을 말한다.
13. 한국은 본래 고구려, 신라가 일월을 숭배하였는데 불교서에 일월천자와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있다.
14. 한국을 본래 진단이라 칭하고 한국의 인삼을 진단이라 한다. 불교에서 중국과 천자天子를 진단이라 했다.
15. 산해경에 동해안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 천독이라 칭한다고 하였다. 인도를 천독이라 한다.
소호금천씨들은 삭발하고 금으로 만든 인상人像을 모셨기 때문에 후일 한무제에게서 김金씨성을 하사받는데 그 형상이 지금의 불상佛像과 같았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뒤에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서 한반도 남단에 이주해와 가야국을 세우게 되니 바로 김수로왕이다. 가락국 설화에서는 김수로왕이 금으로 된 알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이 또한 금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가야불교를 고구려보다도 일찍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불교라고도 얘기하고 심지어는 불교이전의 전불前佛터가 한반도에 있다고까지 하는데 이는 결국 불교가 동이족에게서 나갔다고 다시 역수입되어 들어왔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말들이다.
그런데 소호금천씨들의 또 다른 갈래는 서방으로 뻗어나가서 수메르 문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수메르인들의 유물 중에는 삭발한 남자가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반신상이 있는데 이것은 소호금천씨들이 만들었던 금상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수메르는 전술했듯이 훗날 기독교의 먼 뿌리가 되므로 결국 소호금천씨들은 불교와 기독교 양측의 뿌리가 되는 것이고 이들은 태호복희씨로부터 나왔으니 태호복희씨야말로 현 문명의 진정한 조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인데 하사도인다불가何事道人多佛歌오
모름지기 선천문명의 조종祖宗은 태호복희씨인데 웬일로 도 닦는 자들이 아직도 부처 타령만 하느냐! (道典 5:303:4∼5)
단군조선의 개국
초대 환웅과 동시대에 따로 환국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갈라져 나간 반고로부터 비롯된 지나족들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며 동이족들과 대립을 하곤 했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투쟁이 제 14대 자오지환웅(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탁록전쟁이었다. 결국 황제는 굴복하였지만 그 뒤로도 지나족들은 동이족의 지배영향권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지속적인 저항을 하였다. 그리고 배달국도 말기에 이르러 점차 세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종족연맹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 다시 9환을 재규합하며 등장한 배달민족의 고대강국이 바로 단군조선이었다.
환웅이 환국으로부터 3천무리를 이끌고 신세계를 개척해 나왔듯이 단군도 마지막 18대 거불단환웅으로부터 동남동녀8백무리를 이끌고 신세계를 개척해 나왔던 것이다.
단군 왕검은 배달국 마지막 18대 거불단환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웅족의 여왕이었다. 《단군세기》에 보면 단군 왕검이 14세 때 왕을 보필하는 비왕裨王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였고 그 후 단군조선에서도 우현왕右賢王, 좌현왕左賢王이라는 비왕제도를 두었는데 이 제도는 동이족의 한 갈래인 흉노족도 답습하였으며. 선비족鮮裨族은 이름부터가 ‘조선의 비왕’이라는 뜻이었다.
단군 왕검은 배달국에 속해있던 소국 중의 하나인 단국檀國에서 비왕이 되었다가 조선을 개국하게 되는데 단국은 초대 환웅 시절에 배달국에 귀의했던 웅족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던 나라였다.
『웅씨의 왕이 전쟁중에 붕어하니 왕검은 마침내 그 자리를 이어받아 구환을 통일하고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
─ 《태백일사》
단군 왕검이 조선을 개국한 해는 기원전 2333년 무진년이었으며 요임금 25년이었으며 수도는 아사달이었는데 이후 두번을 더 천도하여 모두 세 곳의 아사달이 있었다.
1. 송화강 아사달(1048년) - 초대단군 ~ 21대 소태단군, BC2333~BC1286(현 하얼삔 지역)
2. 백악산 아사달(860년) - 22대 색불루단군 ~ 43대 물리단군, BC1285~BC425
3. 장당경 아사달(188년) - 44대 구물단군 ~ 47대 고열가단군, BC425~BC238(현 개원 지역)
세 곳 모두 한반도의 평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현 학계에는 오로지 반도사관에만 집착하며 평양이니 구월산이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지나족은 요임금이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조정에는 여전히 동이계열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사실상 단군조선은 당시 동아시아의 절대맹주였으며 오늘날의 미국과 똑같은 위상이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주변국가와 단군조선 간에는 내정간섭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침이 없는 사건들이 다반사로 발생하였고 이러한 관계는 단군조선의 국운이 다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요임금 → [조선의 내정간섭] → 순임금 정권이양 → [조선의 내정간섭] → 우왕(하夏나라) → [조선의 내정간섭] → 탕왕(은殷나라) → [조선의 내정간섭] → 무왕(주周나라) → 춘추전국시대 → 진시황(진秦나라) ….
아무튼 단군조선은 이렇듯 근 2천여년간의 세월동안 막강한 국세를 떨치는데 이것은 현 인류역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물론 그 이전의 배달국, 환국시대는 제하고도 말이다.
공자도 염원했던 이상국가를 이토록 장구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필시 고도의 통치철학과 교화시스템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신교神敎라고 하는 심오한 정신세계에 기반을 둔 것이다. 옛 조선이 이룩했던 그 이상세계를 우리 또한 공자 못지 않게 염원하고 있다. 아니 염원해야만 한다.
단일민족의 허울을 넘어서
기마민족驥馬民族의 영토를 초월하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기질은 오늘날 세계제일의 인터넷 문화를 꽃피워내었다.
말馬 → 午 → 태양(日) → 문명
『문명은 언제나 서쪽으로 이동한다.』
─ 아놀드 토인비
태양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인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싣고 서쪽으로 내달렸던 아폴론이 문명의 신神인 까닭인 것이다.
서두에 말했지만 한민족의 원형은 광활한 대륙을 거침없이 말달리던 기마민족이다. 그랬기에 영토의 개념을 초월한 범아시아적 종족연맹체를 이루어낼 수 있었고 아울러 드높은 도덕정치로써 그 체제를 영구히 결속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바로 우리들 유전인자 속에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다시금 우주가 완성되는 이 시점에서 그 잠재력을 활짝 발현해주기를 천지가 우리에게 염원하는 것이다. 그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단고기란 무엇인가?
이 한단고기는 이 땅이 식민지 시대로 접어든 후인 1911년에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그 내용은 삼성기와 단군세기,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 사서(史書)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삼성기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것을 각각 상하권으로 나누어 합친것이니,
한인 .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시발인 한국시대의 한인으로 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 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엔 신시역기가 덧붙여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에 살았던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전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까지 2096년 동안
각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했다.
북부여기는 고려말의 학자인 범장이 전한책이다.
국사책에서의 고구려건국 연대는 B.C. 37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이 보다 두 갑자(120年) 내지는 세갑자(180年)가 앞선 것으로 생각되는데,
몇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로 보아
이 북부여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상권.하권.가섭원 부여기로 구성되는데,
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이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 떼의 학자인 이맥이 전한 책으로,
이 한단고기의 압권을 이루는 부분이니,
한국(桓國).신시시대(神市時代)로 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여기엔 신오제본기.한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
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본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삼한 관경본기엔 마한세가 상.하와 번한세가 상.하가 담겨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이 책에 의하면 발해라는 나라의 칭호는 우리나라가 부르는 것이아니라
외국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우리는 대진국(大震國)이라 불렀다한다.
위의 이 작은 예제를 볼떼 우리가 우리민족을 생각할떼
이조그만 땅 안의 반도적 사관을 벗어나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묶는 아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우리 선조의 모습을 상상해야 할것이다.
여기서 하나더 집고넘어가야 할것을
우리들은 흔히 우리민족이 시작된 국가를 삼국시대 부터 잡고있으나, 그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엄연히 기원전에도 대륙을 호령하던 우리 민족의 국가가 존재했는데
일제시대의 일본학자의 얕은 수에 속아
삼국시대의 나라만이 우리민족의 나라인양 알고있으니 큰일 이라고 하지않을수 없다.
이제는 우리도 반도적 역사관을 탈피할 때가되었습니다.
저 광활한 대륙을 누비며 믓 민족들의 찬양의 대상이 되었던 우리조상님들의 기개를 되살려야합니다.
지금 중국은 큰나라이나 오래전엔 우리의 눈치를 보던 소국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국가가 커지자 현대에 와서는 우리 민족은 원래부터 이 한반도에서 살았던 민족인양 치부하고 있습니다.
또 황당무개한 한사군을 들먹거려 우리의 민족의 기개를 흐트리려 하고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그 한사군 에대하여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기자 조선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방대한 영토를 나누어 제후국으로 봉하고 단제께서 선정을 베푸셨습니다.
그당시 기자란 인물이 우리에게 망명을하여 살았는데
그의 후손이 번조선의 왕이 된자가 있었다합니다.
그 왕이 아마 "기준"이라는 왕 일것입니다.
후에 한의 유방이 죽자 "노관"은 그의 허물을 감싸주던 이가없어지고
생명의 위협을 받자 흉노로 망명을 했습니다.
"노관"의 부장이었던 "위만"도 우리에게 망명을 하여
번조선의 왕 "기준"이 위만에게 상하운장의 영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고마움을 모르고 번조선을 공격하여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위만조선입니다.
이때 번조선의 왕은 바다로 갔다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마한.진한.변한"이라는 국가를 만들었다합니다.
후에 단제 "고해사"께서 보병과 기병을 내어 "위만"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망한 위만의 무리중의 "우거"라는 자가 있어 다시 작은 나라를 세워 노략질을 일삼으니
한의 유철이 공격하여 "우거"를 불안케 하자 번조선의 백성 최라는 이가 우거를 죽였습니다.
이러하자 한은 공백인 우거의 땅을 자신들이 갖고자 "4군"을 설치하려 하였고 그러자 "고두막한"과 번조선 백성 그리고 "동명왕"이 이 한을 물리 쳤다 합니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패전한 한의 군의 수장들,
지금의 육군사령관.해군사령관 그리고 사신들은
육시를 당해 몸이 육등분되는 사형선도를 받고 죽었다 합니다.
후에 중국의 역사학 자가 이를 부끄러이 여겨
한4군이 있었다는 몇자를 그들의 기록에 적어 두었다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조선에 이르러 중국을 하늘인냥 모시는 양반들이
우리민족을 어떻게든 소중국으로 우리나라가 불리워지기를 원하던나머지
있지도 않은 "4군" 우리 한반도에 그려 넣기위하여 서로 경쟁하며 지도에 표시하려 하였다합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중국에서 조차 "4군이있었다."란 말외엔 기록이 없는 이허구의 땅을
우리자신이 스스로 기록하고싸웠다는것이...
또 한가지 우리는 단군신화의 雄을 곰 부족으로 번역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기원전의 말로는 곰은 즉 ᄀ.ᄆ이란 말로 신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웅녀는 신을 모시는 종족의 여자로 봄이 옳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말로 불교에서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을 대웅(大雄)전이라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써왔기에 우리는 이것의 뜻을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자보십시요. "대"는 크다는 뜻이고, "웅"은 곰 즉 ᄀ.ᄆ이란 말로 신을 뜻합니다.
그러니 "대웅전"리라함은 큰신을 모시는 전각이란 뜻이 됩니다.
또, 일본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들어서 아실겁니다.
그들의 말가운데 "도소"라는 말이 있는데 이말은
우리의 소도와 같은 말로 신의영역을 뜻함이죠.
국사책에 보면 잘나와있을 겁니다.
그리고 일본은 신을 "가미"라 합니다, 비교해 보십시요.
우리말의 .자는 후에 ㅗ와ㅏ의 중간 발음입니다. ᄀ.ᄆ => ᄀㅏᄆ,
이것으로 볼때 우리말에서 파생된 말이란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가미가제"들어 보셨지요? 그것은 일본말로 신풍(神風), 신의 바람이란 뜻입니다.
또 한웅의 웅의 뜻도 역시 신이란 뜻이겟죠?
끝으로 하나만더 말하려 합니다. 우리민족의 시작은 나반님과 아반님으로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학자 가지마(일제시대에 한단고기의 번역을 허구라고한사람) 는
크리스트교의 아담과 이브를 베낀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 교보다 더 오래된 우리의 역사,
기원전에 크리스트교의 역사를 베꼈다닌 말이않되는 주장입니다.
더 우스운일은 일본의 역사가 우리의 민족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라는 사실을 이시죠?
그러니 창조 설화도 같습니다
정작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인물인 선남과 선녀가 자신의 민족의 시조라하며
그것을 만화로 까지 만들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것의 뜻도 모르는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그만화를 수입해와서
만화가게에서 대여하고 있더군요.
몇년전 한만화 가게의 일본만화 진열대에 꽂혀 있던 책을 보게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일본만화 불법 발행을 단속한 후인 지금에도
그 만화가 아직도 있는지는 알수없으나 아직제 기억에는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아주 분개할 일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만화를 본이들은 일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깨달아야합니다.
우리는 거대한 민족이고 그민족의 혼과 기상은
아직 우리의 가습속 어딘가에 뿌리깁게 잠제되어 있습니다.
방송인 하용철님의 한단고기 기행문1
흠 제 직업은 방송쟁이 임다.. 환단고기에 관심이 많아서 작년 1년동안 환단고기의 신빙성과 원시 한글의 존재 유무에 관해 추적 취재 했지요. (작년 10월9일 한글날 특집으로 Q채널에서 2부작으로 방송/Q채널 검색란에 "한글"을 입력하고 엔터해보세요) 그래서 한국,일본,중국,인도를 뒤지고 다녔는데... 머..제가 내린 결론은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거였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박창범 교수의 오성취루 현상 검증은 알고 계시죠? 요걸 가지고 혹자(경희대의 조인성 교수)는 중국 기록 것을 베끼지 않았나 하는데.. 참고로 중국 최초의 천문기록은 기원전 700년대가 최초죠.. 그런데 환단고기의 오성취루 현상등은 그 보다 1000년이나 앞서니까 이건 말이 안되죠..
2)치우가 사용했다는 청동기에 관한 건데..이건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따라 계속 연대가 상향조정 되고 있다는 거 아시죠..
3)환단고기에 쓰인 용어에 관한 문제 인데..요건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수한 것도 있지만 일부가 위조된 것은 틀림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단고기의 삼성기라는 부분인데...삼성기하면 당연히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의 세분의 성인 환인과 환웅과 단군이 다루어 져야 하는 것이 상식이죠..그러므로 삼성기는 환인기,환웅기,단군기..요렇게 구성이 되어야 맞죠..그런데 앞에 두분꺼는 있는데. 이상하게 단군기는 온데 간데 없고 단군세기가 붙어 있다 말이죠...그래서 후세의 누군가가 단군기에다 가필을 해서 단군세기로 둔갑시키지 않았나..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태백일사를 보건데 ..이맥이나 이암의 후손 즉 고성이씨의 후손 중에 누군가가 자기 조상의 집필처럼 위조.가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혹시 이유립씨가 고성이씨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만약 고성 이씨라면 제 추리가 정확할껍니다..즉 문제가 가장 많이 되는 것이 단군세기 서문이거든요.. 단군세기 전체적 내용은 문제가 없지만 서문이 좀 문제가 되는 거 아닌가여? (이건 경상대 여증동 교수의 의견을 빌린 것입니다.)
4)치우의 무덤이 있다는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에 가봤습니다만 치우의 무덤이 있었다는 곳은 산동성이 아니라(산동성에는 수장현이라는 데도 없음) 섬서성에 있는 수장집이라는 시골이죠..이 곳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본 결과 그 동네에 문화혁명전 까지만 해도 무지하게 큰 무덤과 사당이 있었는데 그게.치우의 무덤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 자리는 지금 밀어내고 집터가 되어 있더라구요.. 나..참
5)은나라가 동이족이라는 거 아시죠? 은나라에서 갑골문자를 만들어 이게 한자의 기원이 되었는데..은 나라가 있었던 산동지역 무씨사당의 석실에 가보았는데 그 사당안에 단군신화를 그림으로 묘사한 한나라 때의 석비가 있는데 요게 재밌는 것은 사람이 된 것이 곰이 아니라 호랑이로 묘사되어 있죠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호랑이 입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그림이죠..추측컨대 아마도 은나라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교화가 안되어서 추방된 호랑이 숭배 부족인데 이들이 산동촉으로 내려와서 은나라를 건국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구요..
6)한글의 원시형인 가림토 문자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주 경박호에 가면 혹시 단서가 있을 까봐 갔는데 이 경박호라는 데가 경포호 만한게 아니라 소양호보다 수십배는 큰 것 같더라구요.근데..지금은 작고하신 서울대 사회학과 이상백 교수님이 학생시절에 만주를 여행하다. 거대한 비석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정체를 알수 없지만 가림토 문자와90%이상 닮은 글자가 새겨진 걸 보고 탁본을 해왔죠(지금 경상대 미술교육과 정도화 교수가 소장) 이걸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중국에 있는 학자들에게 물어보니까 정확한 정체는 모르고 옛날 만주족이 쓰는 문자라고 추측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운남성쪽의 어떤 부족이 사용하던 문자가 아닌가 추측하는 이도 있더라구요.. 근데..만주족과 우리와의 친연성은 다 아는 사실일 꺼구 운남성의 여러부족 중 특히 장족은 우리민족과 풍습이 너무너무 닮았죠.. 문제의 탁본에 새겨진 글자는 해독은 불가하지만 표음문자의 전단계인 음소문자일 확률리 큽니다(뜻글자는 절대 아니라고 그랬음) [이 대목에서 문득 세종실록에 기록된 글자의 형태는 옛글자를 모방 했지만 음을 사용하는 법이나 합자의 원리는 옛것과 반대 된다..라는 대목이 떠올랐죠..]
7)인도 구자라트에 한글과 닮은 문자들을 찾으러 갔죠.. 가보니까 닮기는 닮았더라구요..이 한글과 닮은 문자의 기원은 산스크리트 경전을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던 브라흐미 문자인데 문제는 이 글자를 만든 종족이 서쪽에서 온 아리안족들이 아니라 기원을 알 수없는 드라비다족이라는 거죠 이 드라비다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수메르 인종이라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의 고산지대에서 왔다는 설이 있죠..수메르 인종은 참고로 중앙아시아 쪽에서 왔고 현재 이라크 지방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문자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죠.. 유물중에서 흑도가 많이 발견되고(동이족의 토기) 씨름하는 향로도 발견되었죠.. 흥미있는 것은 그들의 말이 우리말과 똑같은 교착어 이고 심지어는 낱말의 의미나 조사의 쓰임새,결혼전에 함을 지는 풍습까지도 비슷하다는 거죠.. [수메르어의 '나락'은 곡식의 신인데 나락은 지금 우리 말로 '벼'를 의미하죠 딩기르는 하늘의 아들 머 이런 뜻인데 단군이란 말과 통하죠.우르 혹은 우리 는 같은 민족을 의미하는 수메르 말입니다..조사의 경우 어디에..어디로.. 우리는...머 요런 것들이 똑같고 어순도 똑같죠-이스라엘 대학의 수메르어 강의를 하고 있는 조철수 박사님의 말..] 결코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는 사실들이죠..
그리고 현재 중국의 학계에서는 갑골문자를 그들의 문자기원으로 보는게 아니라 부호문자등..그 기원을 훨씬 올려잡고 있다는 거죠.. 헥헥 아고 힘들어.. 그리고 참고로 일본의 신대문자 얘긴데.. 이세신궁 각 신사들을 돌아다녔느데 없는 건지 안보여주는건지 모르겠지만 아뭏든 세종이전에 한글과 닮은 신대문자를 찾아내는데 실패했습니다. 이세신궁의 서고에서 몰래카메라 돌리다가 들켜가지구 쫓겨나기도 했죠..히히 근데 신사같은데에서 한글 비스무리하게 신대문자라고 새겨놓은데는 무지 많더라구요,,,,나 참..
세종실록을 보더라도 한글은 세종 혼자서 비밀리에 만든걸로 되어 있고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음) 성삼문등이 만주에 오락가락 한거는 훈민정음 창제후 운해를 만들기 위한 것임 혼자만들었다면 몇년사이에 어떤 전거 없이 이렇게 위대한 문자를 만들수 있을 까라는 의문이 생기고..또 세종실록에 분명히 차사언문전조유지... 라고 해서 이 언문은 전조(고려조)부터 있었던 것이다라고 명기되어 있으니까.. 암튼 세종이전에 어떤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강력한 근거가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내 생각에는..환단고기를 초.중.고.대학교 필수과목으로 했으믄 좋겠슴다. 두서없는 글 끝가지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여 머 혹시 질문사항 있으믄 아는 범위내에서 성심성의껏 답해드리지여..
-하백의 아들-
하용철님의 한단고기 기행문2
방송쟁이란 직업이 돈은 안되고 게다가 저는 머리도 나빠서 대신 몸은 더욱 바쁘게 돌아가야하는 운명을 타고 났지요.. 윤걸님이 부탁하신거에 대해서는 노력해보겠습니다만 잘될지 모르겠군요.. 대부분의 자료들은 회사 자료실에 들어가있고 다시 꺼내기엔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라..기억나는대로...또 틈나는 대로 글을 올립죠.. 기행문 형식이 좋겠네요... 먼저 전 대학시절에 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학창시절에 항상 의문을 가졌던 것이 바로 한글창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디스카버지에서 분석한대로라면 한글은전세계에서 현존하는 문자중에 가장 뛰어난 알파벳이자 가장 과학적인 필기 시스템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위대한 문자를 세종 할아버지 한분이 수년만에 발명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줄곧 가졌더랬습니다. 그 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일을 하던 어느날 문화일보에 보도된 어떤 기사를 보게 되었죠.. 아마도 그 기사제목은 [일본신사에서 발견된 한글의 원형]... 이쯤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에는 참 희안한 기사도 다있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죠.. 근데 그 후 2년쯤 지났을까? 세종실록을 우연히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학창시절에 그냥 흘려버렸던 문제의 [形而 字倣古篆]이란 대목을 발견한 거죠..
이거를 우리나라의 강단학자들은 몽고글자나 인도의 범자로 해석을 하죠.. 그렇다면 문제는 왜 자방몽자나 자방범자로 하지 않고 자방 고전이라고 기록되었을까 라는 문제가 생기고 두번째로는 옛 것이라함은 자기나라의 옛것을 지칭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죠. 아울러 [此斯諺文 前朝有之....非新字也]라는 최만리의 상소에 분명히 고려조에도 있었던 글자라고 되어있고 새글자가 아니란 말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죠. 뿐만아니라 모양은 옛것을 모방했지만 用音과 合字는 옛것과 다르다란 말도 분명히 기록되어있죠.
결론적으로 세종할아버지는 형태는 옛 글자에서 빌어왔고 음을 운용하는 방법과 합자의 원리만 새로 창안한 것이되죠...
이러한 추측의 과정을 거치다가 마침도 한글에 얽힌 이러한 미스테리를 본격적으로 추적하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먼저 일본쪽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동경에서 부터 규슈지방에 이르기 까지 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수많은 소위 말하는 한글과 닮은[신대문자]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듯이 그 신대문자가 한글의 원형이라면 왜 세종이전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신대문자의 최고 권위자라는 아고오기요히코씨를 찾았죠. 그분은 지금 시마네현에 살고 계시죠. 그 분 말씀에 세종이전의 신대문자는 일본 열도내에 분명히 존재하며. 특히 일본 10만신사의 총본산이자 오오가미아마테라스 를 섬기는 이세신궁에 수천점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비오는 날 우리들은 이세신궁을 찾았죠. 이곳은 일본 천황이 매년 참배하는 곳이기도한 일본 정신의 총본산이기도 하죠..홍보과 직원의 말은 그런 것은 없다는 거였고 신대문자가 기록되었다는 야탸노 거울(청동거울)-천황의 3종신기중 하나 은 아무도 볼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 자체가 허위일 가능성이 많다는 거였죠.결국 우리는 이세신궁옆의 신궁문고에서 혹시 세종이전의 신대문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에 그리로 발길을 옮겼죠. 몇가지 책을 찾아보았는데 모두 에도시대 혹은 명치시대에 나온 책들이고 한글과 닮은 신대문자는 꽤 있었지만 세종이전의 것은 찾을 수가 없었죠. 우린 그거라도 촬영해갈려구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거를 몰래카메라를 돌리다가 들켜서 쫓겨나는 망신을 당해야만 했죠.
신대문자에 관해서는 에도시대 일본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한글을 보고 조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고 (히라타 아쯔다네등에 의해) 다음으로는 세종 할아버지가 한글을 창제할 때 바로 요 신대문자를 참고하여 만들었다는 일부 일본학자들의 황당한 주장이 있고 마지막으로는 고조선 때부터 한글의 원형이 있었는데 그것이 대마도 아히루 가문에 전해져서 일본신대 문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1)한글을 보고 조작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일단 일본 열도에서 세종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한글을 닮은 신대문자가 없다는 점에서 타당한 점이 있고
2)만약 세종이전에 존재했던 신대문자라면 지금 우리의 한글을 발음하는 방식과 완전히 달라야 하는데 90%이상이 우리 한글과 똑 같이 읽는 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때 일본인들에 의한 위조의 냄새가 짙습니다.
[용음과 합자의 원리는 엣것과 다르다고 세종실록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런데 이상한 것은
1)위조라고 보기엔 발견되는 장소가 너무 많고
2)위조를 했다면 금방 탄로날 이웃나라의 글자를 고렇게 모방했을까하는 점
3)신대문자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곳이 한반도와 가까운 큐슈지방 일대가 대부분이라는 점과 그 신사들이 거의 한반도계 신들을 모시고 있다는 점이죠
4)신대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기록이라는 문서 (실물 확인 불가)의 저자는 일본 고사기를 집필한 백제계인물 태안마려라는 점 (이기록을 믿는다면 이 문서가 기록된 시기는 서기708년이 됩니다.)
5)그리고 한국 정신문화원의 박성수 교수님 같은 경우는 일본인들에 의해 한글의 원형이 조직적으로 말살 은폐되었다고 말씀하시고 있죠..
어쨋든 이런 논쟁이 아직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죠... 재밌는 사실은 일본에 처음 환단고기를 소개한 가지마노보루란 인물을 만났는데.. 그 사람과 아고오기요히코는 환단고기를 보고 한글이 신대문자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가림토 문자를 신대문자의 조상 글자였단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본에도 단군을 모신 사당이나 신사가 상당수 된다는 사실도 흥미롭죠. 바로 히코산 신궁과 옥산궁등이 그런 곳들 중의 하나죠.. 신대문자 가 발견되는 대표적 신사들은 큐슈 미여자키현의 마토노 신사, 오우치현은 오오우치 신사등 무지하게 많습니다.아..졸립디.. 요담에는 환단고기로 화제를 옮겨보기로 하겠습니다.
하용철님의 한단고기 기행문3
환단고기를 일본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저번에 말씀드린대로 가지마노보루죠..이사람은 변호사이자 재야 사학자라고 할수가 있는데.. 이 양반은 환단고기의 진위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고.. 아고오 기요히코 같은 경우는 동아시아의 위대한 보물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문제는 가지마노보루는 한단고기의 해석을 아주 이상하게 하고 있다는 거죠..
단군 할아버지를 저기 멀리 바빌로니아에서 온 사람이래나..나 참. 그런제 아고오 기요히코 같은 경우는 일본인들의 조상이 우리 한반도인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더라구요..
참 참고로 일본에서는 한글과 닮은 신대문자를 학문의 신으로 숭배하기도 하고 부적으로 쓰기도 하고..神習敎라는 데에서는 그 종교의 경전이 아예 한글과 닮은 신대문자로 되어 있으니 아예 놀랄 따름 입니다.
환단고기로 돌아가보면..환단고기에 3대 가륵 단군이 을보륵에게 만들어서 정음38자를 만드니 이름 가림토라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의 전후에 [眞書가 있었으나 서로 통하지 않아서..]라고 창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이 진서 즉 가림토 이전에 있었다는 문자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했죠..각설하고 가림토 문자 이전에 있었다는 진서는 아마도 상형을 기초로 한 녹도문자 같아여..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북한의 평양 법수교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비석조각에 새겨진 글자를 혹시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이것을 해독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평북 영변지에 수록되어 있음)
놀라운 사실은 중국 섬서성 서안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백수현 사관촌이란 동네가 있는데 거기 창힐의 무덤이 있습니다. 꽤 큰 무덤이고 또 사당을 지어 놓고 중국사람들이 모시고 있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전설속의 중국문자의 시조로 전해내려오고 있는 황제헌원의 신하이죠..
이 중국문자를 최초로 만든사람의 사당 정면에 한나라때 세운 비석이 세워져 있죠 그런데 그 비석에는 창힐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자들이 평양 법수교밑에서 발견된 비석 글자랑 순서만 다를 뿐 기가 막히게 일치한다는 걸 발견한겁니다..여기서 생기는 미스테리가 있죠..당연히...
그것은 수천리 떨어진 중국 서북 지역의 내륙의 창힐 비석에 있는 글자가 한반도 평양의 법수교 밑에서 발견된 글자랑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대목에서 번쩍 나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환단고기의 어느대목에선가 본적이 있는 바로 이 대목!
[창힐이 고조선에 와서 글자를 배워갔다.]
물론 지금의 평양이 당시 고조선의 수도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진 않지만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환단고기의 기록대로라면 창힐의 묘앞에 세워진 비석글자와 평양에서 발견된 글자가 일치함은 창힐이 고조선 글자를 배워 갔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는 연결이 가능하죠..
뿐만아니죠..범자와 같은 이유도 환단고기에 기록되어있는 것 같아여. 아마도 단군의 신하중 한사람이 아유타에 가서 사람을 개화시켰다란 대목 이 나오죠..이 아유타는 지금 인도의 동북부의 아요디아를 말하죠
여긴 라마신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의 고향이었다고 우리에게 알려진 쌍어문이 많은 곳이기도 하죠..
가림토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된 만주 경박호와 선춘령 오소리를 찾았습니다.먼저 연변으로 들어가 지프를 타고 북쪽으로 거의 15시간을 타고 가니까 흑룡강성 지역에 경박호에 도착했습니다. 여기는 중국인들의 국민 관광지이기도 하죠 근데 호수의 넓이가 아마 제주도 만하나? 무지하게 크더라구요
근데 재미있는 것은 요기서 20분만 가면 발해의 고도라고 알려진 상경용천부가 있던 곳이 있죠..그래서 만약 경박호에 가림토문자의 흔적이 있다면 발해의 수도가 여기에 있었던 연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는 만주 지역에서 발견된 비석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솔깃하지만 믿기엔… 너무 찬란한 한민족 상고사
환단고기·규원사화 등 수십년 동안 진위 논쟁
발행일 : 2009.07.04 / Why B6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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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면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이라는 인물은 실존의 근거가 사라진다.
본지 6월 26일자 보도
위서(僞書) 논란이 계속되는 고서(古書)는 많다. 최근 출간된 김진명씨의 소설 '천년의 금서'는 기원전 18세기의 한국 고대사에 문명을 갖춘 나라가 존재했다는 근거로 '단군세기(檀君世紀)'라는 책을 들고 있다. 무슨 책일까?
세상에 알려진 지 수십년 동안 진위 논쟁이 계속되는 책이 '환단고기(桓檀古記=한단고기)'다. '환단고기'는 4가지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삼성기(三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와 문제의 '단군세기'가 그것이다.
'화랑세기'는 역사학자 중에서 진서(眞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반면 '환단고기'는 그 책 자체가 제도권과 재야를 나누는 기준인 것처럼 인식된다. 제도권 사학자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이 책을 '위서(僞書)'로 보고 있고 책 자체를 거론하는 게 금기처럼 돼 있다. 도대체 왜?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의 내용은?
이 책이 소개하는 우리 고대사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 역사의 시발점이 1만 년 전 가까이 올라간다. 그 강역도 대단히 넓다. 세계 문명의 시원(始源)이 한민족에게 있다고 여겨질 정도다.
'삼성기'에 따르면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할아버지로 등장하는 환인(桓仁)이 천해(天海) 동쪽에 환국(桓國)을 세웠다. 영토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였고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방국가였다. '천해'를 바이칼호로, 12환국 중 하나인 수밀이국(須密爾國)을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낳은 수메르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삼성기'는 7명의 환인이 재위하는 동안 환국이 3301년 또는 6만3182년 동안 지속됐다고 썼다.
환국 말년에 아들인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로 가 웅씨(熊氏)의 딸과 결혼하고 백성을 교화하며 배달국(倍達國)을 세웠다. 배달국은 18명의 환인이 1565년 동안 다스렸다. 그 중 14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바로 치우천왕(蚩尤天王)이다. 치우천왕은 중국 신화에서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황제(黃帝)로 등장하는 헌원(軒轅)과 73차례 전쟁을 벌여 모두 이겼다.('삼성기'와 '태백일사')
'단군세기'는 이후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배달국을 계승한 새 나라를 아사달에 열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고조선)이라 했다고 기록한다. 조선은 2대 부루, 3대 가륵, 4대 오사구 단군을 거쳐 마지막 고열가 단군까지 모두 47명의 단군에 의해 2096년 동안 존속했다.
당시 한반도와 중국 동북 대부분의 지역이 조선의 영역이었다. 조선을 계승해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가 단군의 지위에 올랐고 7대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북부여기')
'환단고기'와 유사한 내용을 지닌 역사서가 '규원사화(揆園史話)'와 '단기고사(檀奇古史)'다. 두 책 모두 다른 사서엔 없는 고조선 역대 단군의 재위 기간과 치적을 기록했다. 이 세 권의 책은 한마디로 '재야사학계 상고사 복원의 3종 세트'라 할 만하다.
◆어디 있다가 20세기에 출현했을까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이 책들의 존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이며 ▲단군조선의 역사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고 배워 온 많은 사람의 상식체계에 혼란을 일으킨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환단고기'의 일부인 '삼성기'란 책은 조선 초기까지 실제로 존재했던 책과 이름이 같다. '세조실록'에는 1457년(세조 3) 임금이 팔도관찰사에게 압수령을 내린 책들 중에 이 책의 이름이 등장한다.
'환단고기' 첫머리의 범례(凡例)를 보면 '삼성기'는 신라의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단군세기'는 고려말의 이암(李?V)이, '북부여기'는 같은 시기 범장(范樟)이,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 이맥(李陌)이 지은 것이라고 돼 있다. 이 책들을 '환단고기' 한 권으로 엮은 사람이 평북 선천 출신의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였다고 한다.
계연수는 1911년 묘향산 단굴암에서 이 책을 필사했는데 독립운동가인 홍범도와 오동진이 여기에 자금 지원을 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책이 곧바로 공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연수는 1920년 사망하면서 '한 간지(干支·60년) 뒤에 발표하라'고 제자인 이유립(李裕??)에게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사이 이유립이 한 차례 계연수의 원본을 분실했다가 다시 필사했다는 얘기도 있다.
마침내 '환단고기'는 1979년 영인본 형태로 세상에 등장한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공개되기 10년 전의 일이었다. 일본인 가시마 노보루(鹿島昇)가 1982년 일본에서 번역본을 출간했고 이것이 국내에 역수입되면서 비로소 큰 반향이 일어났다.
'규원사화'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훨씬 이전이다. 1675년(숙종 1)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썼다는 이 책은 광복 직후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서울의 한 책방에서 구입해 귀중본으로 등록했으며 이미 양주동 등의 학자가 일제시대에 필사본을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책의 서문에서 북애노인은 과거에 떨어지고 전국을 방랑하다 한 산골에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발견한 뒤 참고했다고 썼다. 이 책은 고려 초 발해 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조대기'라는 책의 이름은 앞서 세조 3년의 기록에 나온다.
'단기고사'는 서기 8세기 초 발해 시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이 발해 글자로 편찬했다는 역사서로, 100년 뒤 황조복(皇祚福)이라는 사람이 한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원문' 자체가 없다. 대야발의 발해본과 황조복의 한문본 모두 전해지지 않으며 남아있는 자료는 1949년과 1959년에 나온 국한문본이다.
세 책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20세기 이후에 출간되거나 알려졌고 ▲편자들은 '오래 전부터 전승돼 왔거나 전승된 책을 참고한 책'이라 말하며 ▲선교(仙敎) 또는 특정 종교의 색채가 깔려 있고 ▲1980년대 이후 재야사학계의 상고사 관련 주장에 중요한 논거가 되고 있는 동시에 강단사학계로부터는 위서로 치부되고 있다는 점들이다.
◆주류 역사학계 "말이 되는 얘기냐"
세 권의 책이 진짜라면 한국 고대사는 물론 세계 문명사를 송두리째 다시 써야 한다. 하지만 국내 주류 역사학계는 줄곧 '위서'라는 입장이다.
'환단고기'는 책의 출처가 불명확하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계연수가 썼다는 원본이 전해지지 않을뿐더러 편찬되고 나서 공개되기까지 70년이 걸렸다는 사실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숱한 어휘가 근대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백력(시베리아)' '파나류산(파미르 고원)' '국가' '인류' '전세계' '세계만방(世界萬邦)' '남녀평권(男女平權)' 같은 용어가 고대 사서에 등장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위서론자들은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라는 구절은 1915년 출간된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인용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고고학적 근거다. '환국'이나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시기의 동아시아는 신석기시대인데 어떻게 국가와 문명이 존재할 수 있는가? 14대 단군인 고불(古弗) 때의 인구가 1억8000만 구(口)였다는 기록도 위서의 근거로 곧잘 지적되는 부분이다.
'규원사화'에 대해서도 주류 학계는 위서로 보고 있거나 '설사 숙종 때의 진본이라 해도 사료적인 가치보다 조선 후기 민족주의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부 내용이 성경 '창세기'와 비슷하다는 것 등이 그 논거가 되고 있다.
'단기고사'는 일부 재야사학자들마저 당혹해 하는 책이다. 이런 문장들 때문이다. '매년 부(府)와 군(郡)의 대표가 의사원(議事院)에 모이게 해… 백성에게 참정권을 허락하시옵소서.'(전단군조선 9세 아술) '만국박람회를 평양에서 크게 개최했다. 각종 기계를 제조했는데 자행륜차(自行輪車),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鍾), 어풍승천기(御風昇天機), 흡기잠수선(吸氣潛水船) 등이 상을 받은 발명품이었다.'(11세 도해)
'지구도 태양계의 하나의 행성이나 본래는 태양에서 분리된 천체다'(13세 흘달) '입법 사법 행정기관을 세워 다스렸다'(후단군조선 7세 등올) '도덕률이라는 것은 그 의지가 항상 자기의 자율법칙과 함께 생기는 것입니다'(기자조선 29세 마간) 등의 문장도 사람들을 아연하게 했다.
'환단고기' 등이 과연 민족주의적인 책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고려 말 왜구와의 전투기록은 생략된 반면 곳곳에서 일본 건국신화나 신도(神道)와 비슷한 점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는 고대 단군민족이 일본까지 포괄하는 거대 문명권을 이뤘다는 기술이 대동아공영권이나 내선일체론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진서론자들 "식민사관은 이제 그만"
'환단고기' 등을 '진짜'로 보는 쪽은 "지엽적인 자구에 연연해 전부를 위작으로 단정할 수는 없고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됐다는 증거는 없다"는 입장이다. 진서라는 근거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서 13대 흘달(屹達) 단군 50년조에 나오는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기록이다. '다섯 개의 별이 누성(婁星·이십팔수의 16번째 자리에 있는 별들)에 모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3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등이 수퍼 컴퓨터를 통해 추적한 결과 기록보다 불과 1년 뒤인 기원전 1733년에 금성·목성 등 다섯 개의 행성이 한 곳으로 모인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대해선 '고조선 건국 연대를 2333년으로 잡은 연구의 설정이 잘못됐다'는 등의 반론도 있었다.
'환단고기'에서 연개소문의 조부 이름을 자유(子遊)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도 진서라는 근거로 제시된다. 1923년 중국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의 묘비에 처음 나타난 이름이므로 책의 진가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서론자들은 '책이 1923년 이후에 쓰여졌다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규원사화'에 대해서는 1972년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등의 학자들이 '조선 중기에 쓰여진 진본'이라고 판정했던 것이 진서라는 논거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환단고기' 등이 지난 30년 동안 우리 사회와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었던 '치우'는 '환단고기'의 존재를 거쳐 국가대표 축구 응원단의 상징이 됐다. 바이칼호에서 민족의 기원을 찾는 시각도 이 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고조선 시대에 한글과 유사한 문자인 '가림토(加臨土)'가 존재했다는 주장의 논거도 '환단고기'였다. 안시성 전투 직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장안성까지 추격해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 책의 기록도 곧잘 인용됐다.
반면 '환단고기' 등을 위서로 보는 주류 학계의 의견은 대중들의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식민사학'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시인 김지하씨 등의 일부 문인들은 "고조선의 역사를 열지 않으면 미래를 위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없다"며 '환단고기'를 옹호하고 있다.
◆천부경·삼일신고·부도지·격암유록
이 밖에도 진서 여부가 의심받고 있는 옛 서적들은 많다. 환인이 환웅에게 전승했다는 81자의 '천부경(天符經)' 역시 20세기에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진 책이다. '환단고기'의 편집자라는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벽에서 그 내용을 발견해 1917년 단군교로 보냈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가 1929년 위작이라 말한 이후 역사학계의 자료로 쓰인 예는 거의 없다.
또 다른 고조선 관련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는 대종교 교주 나철(羅喆)이 1906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한 노인으로부터 단군 초상화와 함께 전해 받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부도지(符都誌)'는 신라의 박제상(朴堤上)이 저술했다는 사서 '징심록(澄心錄)'의 일부라고 전해지는 책이다. 1953년 박제상의 55세손이 공개했고 1986년 번역본이 출간됐다. 전설상의 '마고(麻姑)'를 민족의 시조라고 기록한 이 책은 위서 논쟁조차 일어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조선 명종 때의 남사고(南師古)가 신인(神人)에게서 받았다는 '격암유록(格庵遺錄)'도 위서로 의심받는다. 이 책에는 국토 분단과 6·25사변을 예측했다고 해석되는 내용과 통일 한국이 동양 최고의 강대국이 된다는 예언이 적혀 있지만 '1960년대에 특정 종교의 지도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KBS 역사스페셜 ‘추적! 한단고기 열풍’을 보고....
나 영남 박사님
1) 국방과학연구소 공학박사
2) 현 미국 워싱턴 해군연구소 연구원
5년 전 KBS 역사 스페셜에서 개천절 기념으로 방영한 ‘추적! 한단고기 열풍‘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프로는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역사의 이면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거나 인식을 새롭게 열어주는데 대단히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천절 기념으로 방영한 위 제목의 프로를 보면서 참으로 착잡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이게 나 혼자만의 경우였을까?
한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라는 분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4종 5권의 역사서를 묶어서 ‘한단고기’라는 하나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5권의 역사서란 삼성기(상,하권),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말한다. 이 책이 문제되는 것은 우리의 고대 역사가 5천년도 아닌 1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고대 역사라는 것이 지금 우리의 처지에 비해서 너무도 찬란했다는 점이 될 것이다. 이 ‘한단고기‘에 대한 열풍은 주로 젊은 층 중심의 네티즌 사이에서 들길처럼 번지고 있는데, 방송사로서는 이러한 반향에 한껏 고무되어 야심 찬 취재를 하려고 계획했던 듯 하다.
그러나 책 내용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해줘야 할 ’제도권‘(대학이나 연구소) 사학계에서는 이 서적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넘어서서 아주 노골적으로 내용 전체를 무시해버리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취재진이 무척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른바 학교나 연구소에서 일하는 ‘제도권’ 사학자들의 견해는 이렇다. 그 ‘한단고기’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원본이 남아 있지 않으며 책 내용 중에 현대적인 용어들이 있어서 편찬자(계 연수의 제자인 이 유립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가 가필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료로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실증사학’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어떤 유물이 출토되었을 때 그것을 뒷받침 할만한 검증된 증거가 없으면 그 유물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다소 자체모순을 지닌 논리이다. 즉, 어떤 기준이 되는 증거에 맞지 않거나 없는 새 유물은 모두 인정이 불가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들에겐 한국 사학계에서 1백여 년을 쌓아온 절대적이고 전형적인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 여기에 비추어 맞지 않는 것은 모두 인정치 않는다는 주의이다. ‘제도권’ 사학계의 기득권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특권이라 해야 할까?
그에 비해서 ‘재야’ 사학계에선 이 ‘한단고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들은 ‘제도권’ 사학계가 이 책에 대해서 애써 침묵하거나 맹목적으로 비판만 한다고 하면서 사대주의에 찌든 결과라고 질타한다.
‘제도권’ 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이 ‘한단고기’ 일부 내용이 가필한 흔적이 있고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해서 이 책 내용 전체를 부정할 수가 있을까? 이 책의 내용이 다른 어떤 ‘검증된’ 역사서에 언급되지 않는다고 하여 내용 전체를 역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가 있는 것일까? (편집자주 : 세조실록에 한단고기 목차와 저자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단군세기에 나오는 47대 각 단군의 이름과 그 치적을 상세히 기록한 것을 어떻게 조작할 수 있다는 걸까?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그저 감정적으로 무시해버리는 것이 한민족의 구성원이기에 앞서 과연 학자로서 옳은 태도일까?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지적하듯이 그 책에 기록된 고대 천문현상(행성의 위치, 일식, 혜성 등)을 컴퓨터로 재현해보면 연대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 역사서가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지 않을까?
또 ‘한단고기’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영토도 비파형 동검의 출토 위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집권자들만이 지녔던 독특한 청동검으로서 이것이 출토되는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책(기독교의 성경도 마찬가지다.)은 여러 편찬자나 해석자에 따라서 가필되고 수정되는 게 불가피하다. 이를 비유하자면 큰 바위덩이가 산 위에서 아래로 굴러오는 동안 숱하게 상처를 입으나 그 바위 본래의 핵심적인 성질이나 형태는 유지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록 20세기 초 편찬자가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필을 했다고 해서 그 ‘한단고기’의 본질이나 가치 전체가 훼손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그 ‘제도권’ 사학자들이 이 책에 대해 사소한 것을 문제 삼아 몸서리를 칠 만큼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이 책을 인정하게 되면 자신들이 쌓아온 ‘공든 탑’ 또는 ‘금자탑’이 일시에 무너진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제도권’ 사학자들은 ‘재야’ 사학자들이 자신들을 사대주의자로 매도한다고 감정적인 하소연을 한다. 아마 그들 사이엔 이미 감정적 골이 무척 깊이 패여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이 사대주의는 우리 역사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의 책이 세상에 유행을 한 것도 사대주의의 영향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면 사대주의 의식이 이 경우엔 긍정적 작용도 했다 하겠다.
원래 이 책은 1970년대 계연수의 제자 이유립이란 학자가 세상에 공표를 했지만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의 변호사 ‘가지마 노보로’란 사람이 ‘한단고기’ 영인본을 우연히 서울에서 입수하여 일본어로 책을 내었고 이것이 한국으로 역 수입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그 일본인은 이 책이 ‘진짜’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없었다면 ‘한단고기’는 영영 빛을 못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우리 국민들은 우리들 자신의 것보다는 외국의 것에 더 관심과 신뢰를 던지는 아주 이상한 경향을 보이는데, 이게 무의식적인 사대주의의 발로가 아닐까?
몇 달 전 직장에서 승진에 필요한 항목이다 하기에 TOEIC 시험을 치러 모 고등학교에 가서 깜짝 놀란 일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달 전국적으로 시험을 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두 번째는 수험생의 대부분이 20세 초반에서 중반 가량의 젊은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내가 속한 고사장에선 내가 가장 나이(43세임.)가 많았던 것 같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정력과 시간과 돈(모두 외화로 나간다!)을 투자하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일까? 물론 표면적으로야 각 회사나 관공서에서 모두 영어시험을 원하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 왜 그렇게 영底봉岵?원할까? 영어를 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사소통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대한 척도일 뿐 그것으로 일을 잘한다는 건 아닌 데도 말이다. 모두 세계화 시대이니까 그걸 요구할까? 나는 이것도 사대주의의 발로라고 하고 싶다.
또 하나 웃지 못 할 일이 지금 대학가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소위 대학 교수를 충원하는데 있어서 국내 박사학위 출신은 좀처럼 명함 내밀기조차 어렵다는 것은 벌써 수년 전부터의 일이 되었다. 3류 대학이라도 외국박사 학위소유자를 우선적으로 선발하다보니 이제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크게 줄어드는 건 당연지사가 아닐까? 그 교수들이 이젠 대학원생들이 없어서 연구를 못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취직이 안 되는데도 대학원에 가는 것이 자본주의 논리로 가능하기나 할까? 참으로 사대주의의 망령은 우리 사회에 넓고도 깊숙이 퍼져 있다.
우리가 오늘에 있어서 ‘한단고기’ 같은 역사서를 두고 논란을 벌이는 이유는 이것을 비교, 검증할만한 다른 역사서가 거의 없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는 두 가지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내부적인 이유로는 우리 스스로 귀중한 상고사서들을 수거하여 없애버린데 있다. 조선시대에 ‘수서령’이란 관청까지 설치하여 고대사적을 전국으로부터 수거하여 스스로 없앴는데, 이는 화려한 우리 고대사가 자칫 ‘대국’ 명나라에 누가 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외부적인 이유로는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란 사업을 통해 그나마 남아 있던 역사서 20여만 권을 수거하여 불태웠다는 점이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철저한 민족성을 갖고 있는가? 그 이후 우리 역사에서 단군조선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둔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제도권’ 사학자들이 계속 실증사학을 주장하고 우리 상고사를 검증할만한 다른 결정적인 책이 발견되지 않는 한 단군조선은 계속 신화속의 얘기로만 존재할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국의 ‘제도권’ 사학자들이 비이성적으로 ‘한단고기’에 임하는 태도를 설명하는데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자고로 교육은 백년대계란 말이 있는데, 한국이란 조그만 학문 사회에선 사제간에 일종의 도제 조직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역사를 주도적으로 왜곡했고, 해방 후 경성대(서울대)에서 왜곡된 역사를 가르쳐온 ‘제도권’ 사학자의 거두 고 이병도(李丙燾)와 그가 길러낸 쟁쟁한 사학자들은 이미 대한민국에 철옹성 같은 도제조직을 형성해 왔다.
그는 죽기 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지 그의 역사 왜곡의 사실을 인정하고 ‘단군조선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발표하게 된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런데 그가 길러 놓은 제자들은 이런 그를 ‘노망’ 들었다고 했다. 이미 그가 뿌린 씨앗은 전국에 퍼져서 우리 민족의 혼을 제거해 버렸는데....
일부 과격한 기독교 교파에서 초등학교에 세워놓은 단군상의 목을 잘라버리는 끔찍한 사건을 접하고서는 우리 역사를 잃어버린 결과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한심하기만 하다. 그들은 주장한다, 단군은 신화이고 단군을 숭배하는 건 우상숭배의 대 죄악이라고. 대학 축제 때 동아리에서 흔히들 장승을 세우기도 하는데, 가끔씩 그 장승들이 톱으로 잘려 두 동강이 난 것도 보았다. 어쩌면 이런 척박한 정신세계는 우리 역사를 잃어버린 결과가 아닐까?
만약 우리 민족이 ‘한단고기’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찬란한 상고사를 갖고 있다면 우리 민족은 상고사 이래로 영토가 줄곧 쪼그라져 왔으며 정신도 그에 비례하여 쪼그라져 왔음을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국통이 환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북부여-대진국-삼한(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남북한 시대로 오면서 우리 민족의 영토는 이제 한반도로 고착화되어버린 실정이다. 요사이엔 중국이 고구려사마저도 자기네 역사라고 항변하는 시대이니 한반도에서 또 얼마나 쪼그라들지도 모르고. 하여튼 왜 이렇게 우리의 민족이 물리적, 정신적으로 계속해서 쪼그라들고 있을까? 그에 대한 시원한 해답을 주는 것이 없을까?
나는 그것을 증산도 도전에서 찾는다.
증산도 도전에는 우리 민족의 특수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한 증산상제님의 말씀이 등장한다. 이는 ‘한단고기’에 등장하는 상고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가 천지를 개벽하고 조화정부를 열어 인간과 하늘의 혼란을 바로잡으려고 삼계를 둘러 살피다가 너의 동토에 그친 것은 잔피(孱疲)에 빠진 민중을 먼저 건져 만고의 원한을 풀어 주려 함이라. (도전 3:184:10)
증산상제님의 위 말씀 중에서 우리민족의 상태를 나타내는 키워드라면 바로 ‘잔피’와 ‘만고의 원한’이다. 우리 민족의 영토가 오늘날처럼 한반도로 쪼그라들고 민족정신도 최악으로 침체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잔피’이며 화려하게 인류문화를 개창하고 주도했던 문화의 종주국이 세계열강에 쌓여 운신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원한이 크고 깊을 것인가?
상제님의 위 말씀은 우리 상고사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모두 인정하시고 그 해소 방안으로서 지구상의 숱한 민족 중에서 우리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즉, 선천의 인류문명을 조선족이 개창한 것처럼 후천의 인류문명도 조선족이 주도적으로 개창하게 함으로써 만고의 한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신 것이다. 우리의 영토가 점차 줄어드는 현상을 인류문명사적으로 해석하자면 우리민족의 핵심 세력이 장차 상제임이 탄강하실 땅(한반도 중에서도 남한)을 찾아 쉼 없이 이동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바로 선천 인류역사의 열매를 맺으면서 동시에 후천 인류역사를 개창하는 곳으로.
우리 상고사와 정신세계와 관련하여 상제님이 언급하신 것 중 대표적인 것만을 든다면 다음 두 가지가 아닐까 한다.
應須祖宗太昊伏인댄 何事道人多佛歌오. (도전 5:282:3)
朝鮮國 上計神 中計神 下計神이 無依無托하니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 무의무탁
不可不 文字戒於人이니라
불가불문자계어인
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 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 말고 잘 받들 것을
글로써 너희들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노라. (도전 5:347:16)
태호 복희씨는 신시(배달국)의 5대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의 막내아들로 성은 풍(風), 이름은 방아(方牙)이다. 복희씨는 성씨의 시조요, 역(易)철학의 시조이며 문자를 만들고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를 세우는 등 인륜도덕의 푯대를 세운 명실상부한 인도문명사(人道文明史)의 첫 개벽자로서 선천문명의 조종(祖宗)이시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사실(事實)도 모른 채 뿌리를 잃어버리고 남의 조상을 꿔다가 믿으며 구원을 달라고 열렬히 노래 부르고 있는 선천 종교인들의 한심한 작태를 나무라신 것이다. (도전 5:282:3 측주)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군조선이 세계 최초의 국가였음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평양, 구월산, 마니산 등에서 해년마다 국가적인 제천 행사를 지내왔다. 지금은 그 국조 단군상의 목을 잘라버리는 지경에 왔으니 시,공을 초월하여 만사를 기획하시는 상제님으로선 이런 사태를 도저히 그냥 묵과하실 수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우리 조선 민족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은 셈이다. 그 경고도 ‘구두경고‘가 아니라 ’공문경고‘(文字戒於人)이다. 세상사에서도 구두경고보다는 공문에 의한 경고가 훨씬 강도가 강하지 않은가?
19세기~20세기 초 동양으로 몰려드는 서구 열강들로부터 동양을 보호하시기 위해 상제님은 조선의 신명(神明)들을 모두 서양으로 보내시어 제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하는 공사를 행하신다. 그 결과 조선을 비롯한 동양 각국이 서양으로부터 식민지화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으나 우리 조선은 역사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남북이 분단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서양으로 갔던 조선의 신명들이 다시 조선으로 오면 제집 일은 제가 주장한다.’는 도전 속의 말씀처럼 이제 조선의 운명이 남의 손이 아닌 우리의 손으로 결정되고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도 우리 민족이 주도해 갈 날을 기대한다. 지금 당장 이런 것을 꿈꾸는 것이 한갓 몽상가의 그것으로 치부되고 문약한 국수주의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속담에 ‘떡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라고 했으니, 먼 옛날에 찬란한 인류문명을 열어본 경험이 있는 우리 민족이 다시 그 일을 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상서로운 기운을 여러 면에서 목격하고 있다. 첫째,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터져 나온 ‘대~한민국‘이란 우렁찬 목소리이다. 이 목소리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구호이자 후천문명 개창지를 알리는 구호였다고 여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대열에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젊은이였다는 데에 있다. 묵은 정신에서 한껏 해방된 발랄한 그들은 분명 ’제집 일을 주장하는‘ 조선의 신명들이 음호하고 있었으리라.
둘째, 요즘 아시아권과 미 대륙에서 들길처럼 번지고 있는 한류열풍이다. 가요, 드라마, 영화, 휴대폰, 김치 등 우리의 문화와 상품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혹자는 반짝 현상이라고 하지만 나는 세계 사람들이 우리민족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정도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교환연구원으로 있는 미해군연구소(NRL)의 한 연구원이 하루는 내게 쪽지를 들고 왔다. 거기에는 글씨를 썼다기보다는 그렸다고 볼 수 있는 ’보고 또 보고‘ 한국 드라마 제목이 있었다. 자기는 그 드라마가 너무도 재미있어서 일주일을 그것 기다리며 보는 낙으로 산다고 한다. 이제껏 자기가 미국 문화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탄탄한 줄거리, 신선한 동양의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차원의 도덕과 철학이 녹아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법으로 모든 것을 규제하려 들고 법적인 소송이 만연해 있는 미국에서 그에겐 한국의 문화가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우리역사를 찾고자 하는 욕구가 폭발하는 것에서 우리민족의 큰 희망을 발견한다. 거기엔 인터넷이라는 문명이기가 절대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인터넷은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역사가 소수의 ’제도권‘ 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번 역사 스페셜 제작 과정에서 대다수 ’제도권‘ 학자들이 보여준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태도는 이제 인터넷이라는 매체 앞에서 초라한 변명 내지는 고루한 자기방어 논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것이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증산도 도전에도 ’붓대 가진 놈이 앉아서 이리저리 다 만드니, 그들이 가장 큰 도둑이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참으로 인터넷이란 후천 생활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거기에선 이제 거짓이나 속임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세계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 정확하게는 당당하게 알리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것을 무시하고 남의 것을 동경하는데 그 ‘마음’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그것은 20세기에 조선의 일을 주장하는 조선 신명이 한반도에 없었기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민족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세계를 향해 용틀임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 신명들이 본격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지금의 한류 열풍이 지속되어 그 끝자락에는 어떤 열풍이 남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지구촌 형제들에게 우리민족이 줄 수 있는 최고급의 문화이자 선물, 그것은 진정 휴대폰은 아니리라. 냉장고나 세탁기, 자동차도 아니리라. 우리 민족이 첫 선천 인류문명을 열었을 때와 같이 그것은 정신적인 면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모든 정신문화의 원천이자 뿌리, 바로 자연법에 바탕을 둔 세계 보편적 사상이 정답이라고 확신한다.
중동에서 이슬람교의 ‘라마단’ 기간인 오늘에도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종교간 갈등은 그것들이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태극(太極)의 역동적인 역할만 이해하더라도 ‘악(惡)이란 때로 우리를 가르치는 귀중한 스승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악(惡)은 선(善)이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 둘은 태극의 음양처럼 양면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의 크고 작은 전쟁과 갈등들은 어리석게도 태극의 양면을 이루는 한 면을 없애려 하는 데서 기인한다. 한 면을 세게 누르면 누를수록 튀어 오르는 힘도 강한 용수철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지구촌 형제들에게 우리민족이 줄 수 있는 최고급의 문화이자 선물을 갖고 있고 그것을 전 세계 형제들을 향해 선포할 준비를 하는 곳,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의 증산도이다!
이병도(李丙燾) 양심고백
이 글은 우리의 역사가 일본에 의해 얼마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는가를 말해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역사를 주도적으로 왜곡했고, 해방 후 경성대(서울대)에서 왜곡된 역사를 가르쳐온 강단 사학자의 거두 故 李丙燾씨가 임종하기 전 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한 문서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진지 17년이 지난 이 시간에도 소위 강단사학자 들은 역사적인 사실 앞에 반성 하기는 고사하고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몰두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자〉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 때 끊겼다"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은 즉 「君長을 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 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은 즉 最古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紀異 제1권의 「古朝鮮(王儉朝鮮)」條에 의하면 『檀君王儉이 阿斯達에 도읍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桓雄이 「弘益人間」의 理念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頂 神檀樹下에 내려와 이곳을 神市라 하고 그를 桓雄天王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風伯(風神) 雨師(雨神) 雲師(雲神)의 三神을 거느리고 主穀 主命 主刑 主善惡등 무릇 人間三百六十餘事를 主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 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觀念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桓雄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 국가를 개창한 君長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百事를 주관하는 守護神的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守護神의 住處는 곧 神壇樹로 이것은 지금 民俗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仙王堂(서낭당)은 즉 天王堂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神壇樹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神壇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神壇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神市였던 것이다.
神壇樹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樹木자체가 神 그것이었는데, 그 후 변천하여 神壇樹는 天神 天王의 降下階段, 혹은 天王의 住處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國號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阿斯達)이 정작 국호였고 朝鮮은 후에 이르러 「阿斯達」을 雅譯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大 논문집(社會科學)제2집에 「阿斯達과 朝鮮」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古記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古記에는 熊이 女神으로 化한 것이라 하나 이는 熊(곰) 토템族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年來 주장해 오고 있다.
즉 熊을 神聖視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地上族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天上族, 天神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開天節이라 하여 단군의 開國日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十月節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十月節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季節祭(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落種(下種)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神에게 年事의 豊登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薦新祭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落種期의 祭典을 五月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天神에게 제사하고 歌舞와 飮朱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君民이 同樂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端午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十月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神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時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五月祭 十月祭의 遺風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上,高,山,神 등을 의미하는 古語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譯으로 볼 수밖에 없다. 夫餘의 迎鼓祭, 高句麗의 東盟祭, 東濊의 舞天祭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燃燈大會, 八關大會도 春冬二期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仲冬八關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古俗을 갱생시켜 이로써 檀君立國의 開天節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 초생 특히 3일에「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鼎足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不安定監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斗溪雜筆」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顯正會理事 李喜秀씨가 1977년 10월 「顯正誌」에 「史書上에서 본 國祖檀君」이라는 제목하에서 三國遺事의 저자 一然이 지금은 없어진 「古記」와 「舊三國史記」와 현존 魏書와는 다른 또 하나의 魏書의 檀君記事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事大의 입장에서 기술한 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史記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記載를 제외하였지만 同書卷十七 高句麗本紀五 東川王二十一年春二月條에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이라고 하였다(惑云이하의 王之는 王노릇을 하였다는 動詞로 읽어야 하고 「都王儉城의 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王之都王儉」이라고 連書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平壤은 지금의 평량(平土良)이 아니라 고구려의 黃城(皇城, 즉 丸都城)의 對岸인 東黃城(今江界)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樂浪郡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량(지금의 평량)의 지칭이므로 前後者를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당시 平壤은 다른 곳
金富軾과 같은 史家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 않고 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 것은 金富軾의 머리 속에 지금의 평량이 仙人王儉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史實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內外史書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량을 王儉城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古記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史記地理誌高句麗條에서 古記云朱蒙自夫餘逃難至來本則紇升骨城 ②史記 志一 祭祀條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③史記 列傳 金庾信上에서 金春秋가 講和하려고 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言眞平王 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傳故兩存之」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古記에는 檀君記史가 기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기록이 高句麗에 金春秋가 갔던 西紀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金富軾이 史記 高句麗本紀 東川王二一年書二月條에서 「평량은 본래 仙人王儉의 宅」이라고 한 것은 역시 古記이거나 檀君記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金富軾은 三國史記에서 新羅의 六村도 朝鮮의 遺民이 山間에 와서 자리 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三國史記 卷第一新羅本記第一에 보면 「始祖姓 朴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時 朝鮮遺民分居 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一然이 인용한 古記의 檀君記載를 근거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金富軾이 평량이 仙人(檀君)王儉의 宅이라고 명기한 데서 古記가 檀君記事를 實載하였다고 볼 수 있다. 一然이 마치 근거도 없는 古記를 들먹여서 檀君記事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 차례의 國難을 겪으면서도 檀君廟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 때에는 노래(世年歌)에 의하여 檀君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 권40 세종10년 戊申6월條에 柳寬의 上書를 보면 文化縣 九月山 東嶺허리에 神堂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北壁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文化縣 사람들은 이를 三聖이라고 일컬으며 산 아래 부락을 聖堂里라고 한다고 하였다. 柳寬은 그 上書중에서 「九月山은 縣의 主山이던 檀君朝鮮 때에는 阿斯達山이라고 하였으며, 新羅에 와서 闕山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文化縣을 闕口縣이라고 처음에 이름 하였다. 高麗때에 儒州監務로 하고 후에 또 文化縣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闕자를 느리게 소리 내어 九月山이라고 부른다.
두 首의 시에 나타나
文化의 동쪽에 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父老들이 전하기를 檀君의 都邑地라고 한다‥」하였으며 「九月山下에는 桓雄을 南面으로 모시고 東西向으로 桓因과 檀君을 모신 三聖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檀君이 立都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世宗18년 丙辰 12月丁亥條 柳思訥(柳寬의 조카)의 上書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土良)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基歌曰亨國一千四十八至今廟在阿斯達則등無所처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與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古記 檀君記 외에 歌詞형식으로 된 檀君記事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世年歌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檀君記載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柳思訥은 漢城府使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臣이 檀君世年歌를 보니 檀君은 朝鮮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沒함에 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쨌든 朝鮮世宗代까지 檀君世年歌가 남아있었고 識者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柳寬의 上書에 따르면 三聖堂은 黃海道 九月山 東嶺에 있다. 柳寬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父老들로부터 檀君事迹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三聖堂에 桓雄天王을 上座에 모셔서 南面하게하고 東壁에는 桓因天王을 모셔서 西向하게하고 西壁에는 檀君天王을 모셔서 東向하게 하였다고 한다. 三聖堂의 경 내외에는 새 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文獻備考 卷64 札考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는 황해도 文化縣 九月山에 있으며 桓因 桓雄 檀君을 모셨으며 春秋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조 成宗13년에 황해도 관찰사 李芮之의 말에 좇아서 九月山에 三聖廟를 세우고 평낭(土良)의 檀君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卷42 文化縣祠廟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는 桓因 桓雄 檀君의 祠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東國輿地勝覽 卷51 平낭條」에 보면 두 首의 詩를 통하여 「開國한 지가 멀고 먼 檀君은 朝鮮始祖이다. 檀君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堯와 함께 開國하였다고 들었으니 去今 四千年이며 檀君廟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主體思想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廟를 세우고 祭祀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國祖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 때 새 祠堂 지어
文獻備考 卷13 輿地考1 歷代國界1에서는 檀君朝鮮國을 첫머리에 싣고 遺事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白嶽은 지금의 文化縣이며 九月山의 본명은 闕山인데 檀君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闕山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闕山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九月山의 藏唐京은 또 藏藏坪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 때의 司은注簿 鄭陟(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箕子祠堂에 가보니 箕子의 位牌는 북쪽에 있어서 南向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西向하였다. 臣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唐堯와 같이 입국하였고 箕子는 武王의 명으로 朝鮮에 봉하여졌으니 帝王曆年數로 보더라도 帝堯에서 武王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箕子가 북향하여 南面하고 箕子보다 앞서서 立國한 檀君을 東쪽에 配享하는 것은 立國傳世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臣이 本朝의 諸祀儀式을 고찰해보니 檀君祭의 陳設圖에 이르기를 「神位는 堂의 중앙에 모셔서 南面토록 되어있으며 臣이 箕子祠에서 본 西向의 坐는 陳設圖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箕子와 나란히 南向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上座에 箕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立國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箕子祠堂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臣의 생각으로는 따로 檀君祠堂을 지어서 단군을 南向하게하고 제사를 받들면 祀儀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札曹에 명하여 鄭陟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國祖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箕子보다는 上位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檀君의 祭享이 끊어진 것은 日帝 때부터였다고 본다.
檀君朝鮮 연구 숙제
三國遺事의 檀君記載는 他書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一然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一然이 인용한 古記도 金富軾의 인용古記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古記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金富軾도 仙人王儉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古記에는 檀君史記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檀君의 世年歌가 전하여져서 많은 識者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檀君의 祠廟祭天壇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享檀君陳設圖가 世傳되어 왔고 그것은 檀君祭儀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朝議에 의하여 建廟 奉祭祀했던 것이다. 만일 檀君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檀君과 檀君朝鮮에 관한 記載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三國史記에서 檀君記載를 제외한 것은 金富軾의 事大的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夫餘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