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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30 : 가림토문의 존재 증거]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4:02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30 : 가림토문의 존재 증거]

 


*** 원시한글 가림토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들  

 

지금 한글학회 사랑방에는 원시한글 가림토의 존재를 전혀 인정할수 없다는 논장이 벌어 지고 있다. 필자는 전에 최만리 상소문이나 정인지 서문등 대략적인 증거를 들어 원시한글의 존재를 입증했으나 반론자 들은 전연 이해를 못하는지 원시한글 소리만 나와도 치를 떨 정도로 반론이 심하다. 또 이런 원시한글이 없다는 이론이 앞으로도 계속될것이기에 먼저 말을 한것을 보강하여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원시한글을 인정하면 세종실록이나 최만리 상소문, 그리고 정인지 해례본 서문까지 하나도 걸림이 없다. 단 해례본의 제자해 만큼은 좀 다른것 같은데 이도 정독해 보면 이해가 간다. 이번에는 말미에서 해례본과 제자해 까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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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이 한자를 모방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론

 

(1) 세종실록에 나타난 말들의 논쟁중     

훈민정음 서문에 세종은 나라의 말과 소리가 中國과 달라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 자가 많으므로 내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라는 말이 있다.

(가) 이것은 중국의 한자가 우리 말과 맞지 안아 새로 28 자를 만들었다는 말인데 만약 혹자의 주장대로 다시 그 한자를 다시 들여다가 아무리 용음합자를 새로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말과 맞을 수도 없고 또 한글과 한자의 비슷한 점이 없다.

(나) 누구의 말처럼 國中을 中國으로 사관들이 잘못 기재 한 것인가? 즉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가 아니고 " 나라안에 말들이 달라서... " 라는 것이다. 우선 세종이 쓰신 훈민정음 서문을 보며 中國이 말이 되는지 國中 이 말이 되는지 좀 해석해 보자.

우선 원문 "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 이를 中國으로 본 해석

國之語音異乎 中國  나라의 말과 소리가 中國과 달라

與文字不相流通故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내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이렇게 中國으로 해석하면 문장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國中( 나라 가운데) 이라 해석한다면

國之語音異乎 國中 나라의 말과 소리가 나라 가운데에서도 달라

 

이 해석대로 라면 지금도 그렇지만 세종당시에는 더욱더 방언이 심해서 지방마다 말소리가 다르다는 말이고 당연히 그랬을것이다. 즉 예를 들면 처녀(處女)를 서울에서는 처녀 라 하고 경상도 에서는 가시네  라고 나라안에서도 그 부르는것이 달라 한글을 만들었다면 한글을 만든 결과는 역시 서울에서는 처녀 라 쓰고 그렇게 읽으며 경상도 에서는 가시네 라고 쓰고 읽을수 밖에 없다. 이게 한글을 만든 효과인가?

 

(2) 세종의 字倣古篆과 정인지 서문의 象形而字倣古篆의 古篆을 한자로 보는 이들에게 반론

(가) 세종이 한자를 모방하여 한글을 만들었다면 한글과 한자가 단 한군데라도 닮은데가 있어야 한다. 

(나)  또 이두나 혹 다른나라 글자를 모방했다 하더라도 그 글자들이 한글과 비슷한데를 하나라고 제시해야 한다.

 

(3) 자방고전이나 정인지 서문에 나오는 古人 이 중국인으로 보면?

(가) 고인이란 자기네 조상에게나 쓴는 단어이다.

(나)해례본  서문에 나오는 외국에 우리나라도 포함 되는가?

(다)우리나라 까지 외국으로 보고 고인을 중국인으로 보면 세종이나 정인지는 중국인이 된다.

 

(4) 최만리 상소문중 1.

최만리 상소문에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으로 한 글자라 하셨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 전자를 모방 했다 하나 발음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 것과 달라서 실로 옛것을 근거했다고 볼 수 없음으로 만약 이것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 혹시 비방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중국을 섬기고 사모하는 우리 정서에 부끄러움이 아니옵니까?"( 諺文皆本古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若流中國或有非議者豈不有愧於事大慕華)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세종의 훈민정음은 옛 전문 (古之篆文)을 모방해서 새 글자를 만들었다고 하시지만 소리 내는것이나 글자 조합(用音合字)가 다르니 옛 글자도 아니어서 중국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는 말이다.  

(가) 이 말은 세종의 한글은 완전 세종 창작이라는 말과다르다.

(나) 고전 이 만약 한자라면 무엇이 중국에 들어가면 두렵고 또 설총의 이두는 그냥 두면서 왜 이 훈민정음만 가지고 그 야단인가?

 

(5) 최만리 상소문중 2.

전해오는 글에 이르기를 중국의 문화로써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어도 오랑캐에게 변화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나이다. 역대중국에서는 다 우리에게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있기 때문에 문물이나 예의 나 음악이 중화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지금 특별히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면 이는 소위 향료(蘇合)를 버리고 쇠똥구리(螂)를 취하는 것이니 이 어찌 문명을 크게 더럽히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傳曰用夏變夷未聞變於夷者也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文物禮樂比擬中華今別作諺文捨中國而自同於夷狄是所謂棄蘇合之香而取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栽)

(가) 이 역시 훈민정음은 중국의 한자를 전혀 모방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만약 古篆은 한자라거나 훈민정음이 완전 창작이라면 말이 되지 안는다.

 

(6) 최만리 상소문중 3.

또 한가지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저속한 글이나 다 중국에 통용되는 한자를 빌려 말을 돕는데 쓰게 했기 때문에 문자와 더불어 크게 다른 점이 없기때문에..(.新羅薛聰吏讀雖爲鄙俚然皆借中國通行之字施於語助與文字元不相離故)

(가) 이 글도 훈민저음은 한자와는 전혀 다를 글자라는 뜻이다.

 

(7) 최만리 상소문중 4.

그런고로 비록 서리(胥吏)나 노복의 무리라도 반드시 그것(이두)을 익히고자 할진대 먼저 몇 권의 책을 읽어 문자(한자)를 안 연후에야 이두를 쓰게 되니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한자)에 의지한 연후에야 능히 뜻을 전달 할 수 있는 고로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아는 자가 많으니 학문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옵니다. (故雖至胥吏僕隸之徒必欲習之先讀數書組知文字然後乃用吏讀用吏讀者須憑文字乃能達意故因吏讀而知文字者顔多亦與學之一助也)

(가)여기서 이두가 한자가 아닌 다른 나라 글자인가? 

 

(8) 최만리 상소문중 5.

만약 우리 나라가 처음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끈을 맺어서 일을 기억하는 세상이라면 일시적으로 언문을 빌려 쓰는 것은 오히려 괜찮을 것이므로 (若我國元不知文字如結之世則姑借諺文以資一時之用猶可)

(가)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글자가 없었다면 그 언문이라는 것을 일시적으로...이라고 해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부터 언문이라는 게 있었다는 말이다.

(나) 훈민정음 발표후 한달여 만에 최만리 상소문이 올라오고 여기에 처음으로 언문(諺文)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언문의 뜻은 상것들이나 쓰는 글자란 뜻이다. 만약 훈민정음 전에 언문이란 단어가 없었다면 감히 최만리는 자기 임금이 만든 새 글자를 언문이라 할수 있는가? 이는 참수형 감이다.

 

(9) 최만리 상소문중 6.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 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이옵니다. 가령 언문이 전의 조정(고려나 그 이전)때부터 있던 것을 빌려 쓴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문명시기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거늘 오히려 구습에 따르려 하시나이까? (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借使諺文自前朝有 之以今日文明之治燮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가)여기서 문자란 한자가 아닌 다른 나라 글자인가? 다른 나라 글자라면 어느 나라 글자인가?

(나) 언문은 시골것들이 전용하는 글자라는데 언문이 한자라면 그 시골 것들이 그렇게 유식한가? 이두나 다른 나라 글자라도 마찬가지 이다.

(다)언문은 전 조정서부터 써 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언문은 세종 전 에서 부터 있었다는 말이다.

(라) 이 문명시기에 언문을 쓰는 것은 구습을 따르는 것이라 했다. 그럼 언문은 옛 부터 있었던 구습이다.

 

(10)세종의 답변)

임금님께서 최만리등이 올린 상소문을 읽어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히들이 말하기를 발음하는 것이나 글자 조합한 것이 진실로 옛 것 같지가 않다고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다른 소리가 아니더뇨?"(上覽謂萬理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가) 최만리는 훈민정음이 옛 것과 그 모양은 본떴지만 용음합자가 다르다고 하는데 대한 대답으로 설총의 이두 역시 한자와 소리가 다르다는 말 입니다.

 

(11)  다시 최만리의 답변

최만리등은 대답하여 가로되 설총의 이두는 비록 소리는 다르다고 말씀 하셨으나 소리를 의거하고 풀이를 의거하여 문자(한문)를 말로 돕는지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옵니다. 그런데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萬理等對曰薛聰吏讀雖曰異音然依音依釋語助文字元不相離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가) 여기서 편이상 문자(한문), 모든 (옛) 글자 등 (  )을 붙여놓은 게 잘못된 것인가?

(나) 설총은 한자와 소리가 다르지만 그 글자 모양은 같으니 상관 없는데 훈민정음은 그 옛 글자를 용음합자만 하였을 뿐 아니라 그 글자모양이 한자와 판이 하므로 안 된다는 말로 해석된다.

 

(12) 다음은 정인지 해례본 1.

그러므로 옛 사람은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서 만물의 뜻과 통하게 했고 삼재의 도에 실리게 했으므로 후세에서 능히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가)所以古人因聲制字 = 옛 사람은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因聲制字는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이외 다르게 해석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정인지 서문에 지금 훈민정음은 " 형상은 옛 전자를 모방한 것이며 소리를 따라 글자를 칠조에 맞추었다" 는 말을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犀七調"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소리를 따라서" 를 "因聲" 이라 했고 그 소리를 따라 만든 글자가 바로 우리 소리 글인 한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옛 글자의 해석을 한자 같은 뜻글 이었다면 뜻을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는 인의제자(因意製字) 라고 했을 것이다. 

 

(13) 정인지 해례본 2.

그러나, 세계는 기후와 토질이 나누어져 있으며, 말소리의 기운도 또한 서로 다르다. 대개 외국의 나라말은 그 소리는 있으나, 그 글자는 없다.(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盖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가)여기서 외국에는 우리나라까지 포함되는가? 그렇다면 위에서 "옛 어른들은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정과 통하게 하였고 삼재의 道를 실었으니 후세 에서 능히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은 왜 했을까?

(나) 만약 古人이 중국인이고 古篆이 한자라면 원시한글이 없었다는 자들의 말이 맞는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까지 외국에 포함되고 세종이나 정인지는 중국인이 된다.

 

(14) 또 원시한글이 없었단는 자들의 주장

"또 훈민정음해례본에는 분명히 의심할 바 없는 창제원리가 적혀있다. 거기에는 분명히 자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한 기본자음과 가획의 원리에 따라 기본자음과 같은 계열의 자음을 창제했으며 모음은 천지인을 상형한 기본모음과 이를 조합하여 새로운 모음을 계속 만들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건 의심할 바 없는 명확한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한글의 기원은 해례본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가) 정인지는 서문에서 분명 옛 어른들은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었다(所以古人因聲制字) 했고 그 모양은 옛 글자를모방하여 (象形而字倣古篆)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했다.

(나) 그러나 그 바로 아래 제자해 에서는 ㄱ ㄴ 등은 사람의 발성기관을 본떠 만들었다고 했다. 이것을 보고 원시한글이 없었다는 자들은 세종은 전연 무에서 새 글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한다. 

(다) 그런데 그 제자해 에는 우리나라 계절을 4계절이라 했다가 금방 5 계절이 된다는것, 입을 본떠 만들었다는 ㅁ 이 입 모양과 다르다는 점, ㅅ 이 이빨을 본따 만들었다는데 앞니 몇개는 그럴지 모르나 그 옆 니 부터 어금니 등은 전연 그렇지 않다는점.

(라) 목구멍이 뒤에 있고 어금니가 다음이니 북쪽과 동쪽의 위치이고, 혀와 이가 또 그 다음이니 남쪽과 서쪽의 위치이고, 입술은 끝에 있으니 흙이 정한 위치 없이 네 철에 붙어 왕성하다 는 뜻인즉 곧 초성 가운데 자연히 음양오행 방위의 수가 있는 것이다. 喉居後而牙次之. 北東之位也. 舌齒又次之. 南西之位也. 脣居末. 土無定位而寄旺四季之義也. 是則初聲之中自有陰陽五行方位之數也. 이것도 말이 되지 안는 이유는  喉居後而牙次之.北東之位也.... 목구멍은 뒤에 붙었으니 북쪽인 것은 좋으나  어금니는 다음에 붙었으니 동과 서 이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동쪽뿐이며 그대신 혀와 이빨이 남과 서 라고 하고 가장 앞에 있어서 남쪽 이어야할 입술은 방위가 없이 네 방향 네철에 붙어 결국 다섯이 된다는 것 역시 음양오행을 맞추기 위한 억지가 된다.  

 

(15) 그렇다면 왜 제자해 에는 갑자기 이조초에나 중국에서 우리에게 들어온 음양오행설이 붙어가며 억지 제자 원리가 되는가?

(가) 최만리 상소문중

또 근래 성상께서 청주온천에 행차하실 때 특별히 흉년을 염려하시어 따라가는 사람이나 제반사를 간략하게 하라 하셨기에 전날에 비해 경비가 십중팔구나 절감되었고 조정에 올라오는 공무 역시 의정부에 위임하시었는데 그 언문이란 국가의 위급한 사항이나 부득이 기한을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어찌 홀로 휴양소 에서까지 몰두하시어 성상께서 옥체를 조섭하실 때 번거롭게 하셨으니 (今淸州椒水之幸特慮年兼+欠(흉년들겸)扈從諸事務從簡約比之前日十八九至於啓達公務亦委政府若夫諺文非國家緩急不得已及其之事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以煩聖躬調燮之時乎)

(가) 이건 세종이 훈민저음을 창제 하실 때 최만리 등이 거들어 주지 안았다는 말이다.   

(나) 정인지 해례본중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하게 예의(例義)을 계시하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는데 형상은 옛 글자를 모방한 것이고 소리를 따라 글자를 칠조에 맞추었다"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犀七調.) 여기서 "간략하게 예의(例義)을 계시하시고 ..." 를 보면 훈민정음은 혼자 창제 하시고 그 창제원리나 간단하게 말씀 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다) 이상을 보면 세종께서 일생 동안 혼자서 그렇게 힘들여 만든 훈민정음이니 그 제자 원리도 무척 힘이 들어 세종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모를 것인데 그 중요한 제자원리를 왜 자신이 쓰지 않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정인지 등에게 내 던지듯 시켰을까?  

(라) 혹자는 세종의 옛 글자를 모방 하였다는 자방고전 말씀은 최만리 등을 달래기 위한 고육지책 이라고 하는데 자방고전설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며 하신 말씀이고 최만리가 중국을 팔아가며 공갈치는 상소문은 훈민정음 반포후 한달여 후에나올려 진다.  

(마)다시 최만리 상소문에서 세종의 말씀

세종대왕께서 노하여 말씀하신다. 이따위 말들이 어찌 사리가 있다는 선비의 말이라 할수 있겠는고? 참으로 쓸모 없는 속된 선비로다.(此等之言豈儒者識理之言乎甚無用之俗儒也) 내가 너히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를 묻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너희들 상소문 가운데 한두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부른 것이니라. 그런데 너희들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말만 바꾸어 이랫다 저랫다 대답하니 너희들 죄는 벗어나기가 어렵게 되었도다. (予召汝等初非罪之也但問內一二語耳汝等不顧事理變辭以對汝等之罪難以脫矣) 그래서 그들을 하옥시키고 다음날 아침 풀어 주었다. 

 

(16) 이사을 가지고 원시한글이 없다고 하는자 들에게 묻고 싶다.

(가) 여기서 세종같이 어지신 임금이 자기 신하들을 하옥시키고 밤새 편히 주무셨겠는가 하는 점이다. 별별 고민을 다 하시며 그들을 달랠 방법을 생각했다고 생각된다.  

(나)자기 임금님 앞에서 말을 이랬다 쟀다 한는것은 매우 큰 죄인데 다음날 아침 풀어주실 때 그들의 죄가 없어 풀어 주었다고 생각 하는가? 그들을 달랠 방법이라도 생각이 나서 풀어 주었는가?  

(다)정인지 해례본은 세종이 최만리 등에게 곤욕을 치른 다음 써진 글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최만리 상소문은 세종 26년 2월 20일에 올려졌고 정인지등 해례본은 그 해례본에 정통 11녀 9월 상한 이라 되 있는데 이는 세종 28년 병인년 9월 상순에 해당한다. 즉 정인지 등은 최마리 상소문이 올려 진지 2년 반 정도나 걸려 해례본을 썼다는 말이 됩니다.  

(라) 그러니까 세종은 최민리등이 중국을 팔아가며 하도 공갈치며 이랬다 저랫다 말을 번복하니 하옥까지시켰으나 세종은 신하를 사랑하는 어진 임금으로써 그들을 석방시키고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정인지 등에세 해례본을 쓰게 한것으로 본다. 즉  훈문정음의 제자원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직접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 자신인데 이것을 중국과 최만리 등을 달래려니 고육지책인 중국의 음양오행설로 밖에 쓸수 없고 이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은 차마 세종 자시이 쓸 수 없으니까 그래도 훈민정음 반대는 하지 않는 아무것도 모르는 정인지 등에게 몇 마디 설명해 주고 음양오행설로 적당히 쓰거라 한것이라 본다.  

(마) 원시한글이 없다는 자 들은 한자나 다른 글자는 다 좋은데 원시 한글 만큼은 세종을 모독 한다고 했다. 왜 한자등 다른 글자는 다 좋은데 원시한글만큼은 세종을 모독하는지 그 이유가 사리에 맞지 않다. 즉 훈민정음이 완전 세종의 창제라면 자방고전을 말한 세종이나 정인지가 그리고 그 많은 토론을 한 최만리 말등 세종실록이 모두 거짖이 되고 한자나 다른 나라 글자를 모방했다면 차라리 우리 조상의 글자를 모방 했다는것 보다도 더 모독이 된다. 

(사) 이상 치만리 상소문이나 정인지 서문을 종합해 보면 원시한글이 있었다고 인정하면 한마디로 모든 의문이 풀리고 앞뒤 말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데 번론자 들처럼 원시한글이 없다고 하면 모든 말이 전부 꼬이고 뒤틀린다.

 

(17) 가장 강력한 증거  

** 원시한글 가림토의 제자 원리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의 원 모양은 세종이 전연 무에서 창작한 것이 아니라 세종의 말씀처럼 옛 조상의 글자를 모방 했다(字倣古篆)는 말처럼 대락 6 천년전 신석기 문명이 끝나고 청동기 문화가 시작 될 무렵 지금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사시던 북방계 몽골리안 일족의 지도자 하느님(하느님( 여호아가 아닌 우리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께서 개국을 하시려는 그 아드님 환웅께...아니 우리 민족에게 주시는 선물 천부인세 개, 즉 天地人 에서 나왔고 이 기호는  圓方角, 즉 ㅇ, ㅁ, △ .이었으며 이 것으로 가림토는 물론 우리 한글까지 만들었다는 증거를 제시 한다. 

 

우선 천부인 세 개중 하늘을 의미하는 글자는 ㅇ 이고 ㅎ은 이 ㅇ 에서 나왔으며 땅을 의미하는 ㅁ 에서는 ㄱ,ㄴ,ㄷ,ㄹ, ㅂ ㅌ이 나왔고 사람을 의미하는 △에서 ㅅ, ㅈ, ㅊ 이 나왔다. 따라서 지금 우리 한글의 자음 속에는 모두 각자마다 독특한 뜻이 들어있는데 그 뿌리를 찾아보면 모두 이 하늘과 땅과 사람 의 뜻이 된다. 그래서 ㅇ 이나 ㅎ ( 꼭지이응과 여린히읏은 ㅇ 과 ㅎ 사이의 중간 발음 이므로 생략) 으로 발음되는 글자는 모두 하늘을 닮아 원융무애(圓融無碍) 하거나 형이상학적(形而上學) 적인 말에만 쓰이고 땅 성질이나 사람 성질에 쓰이는 말은 없다. 다음 땅 성질이 있는 ㅁ 에서 나온 말이나 여기서 분해되어나 온 ㄱ ㄴ ㄷ ㄹ ㅁ ㅂㅌ 도 땅 성질만 있고 하늘 의 뜻이나 사람의 뜻은 없다. 마지막 사람 천부인에서 나온 ㅅ이나 여기서 덧붙여진 ㅈ ㅊ 등은 그 △ 모양대로 서거나 솟거나 뽀죽한 뜻의 말 만 있고 이것을 잠시 유보시키는 ㅈ 과 같은 뜻만 있지 하늘이나 땅의 뜻 이 있는 말은 없다.러니까 이것들은 절대 남이 영역을 침범 하거나 혼동되지 안는다.

 

** 우리 자음이 가지고 있는 뜻

우리 자음은 지금 한글이나 알파벳처럼 아무 뜻도 없는 그저 발음기호가 아니다. 그리고 대략 천년이 흐른 단군 초기에도 우리 말은 불과 160 여개 단어밖에 없었다는 증거가 나온다. 이렇게 적은 말을 가지고 사시던 선조들은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말도 늘어나게 되어 지금 우리의 국어사전에는 무려 20만 어휘가 실려 있다. 또 우리 원시한글 가림토 등의 모음, 즉 ㅏ ㅓ ㅗ ㅜ 은 무시되거나 혼동되기 때문에 우리 말에 감둥이 검둥이가 같은 말이고 봄에 풀이 나면 파릇 파릇 퍼릇 퍼릇 포릇 포릇 푸릇 푸릇 등이 말들이 지금 20 만 어휘의 말을 쓰는 우리에게는 그 의미가 미묘하게 다를지 모르나 사실 같은 말이다. 그 이유는 모음은 천부인으로 만들어진 글자가 아니기 때문에 ㄱ ㄴ 등 자음처럼 중요하지 안았기 때문이다. 

 

** 다음은 이 원시한글 자음들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알아 보자.

 

** 하늘 천부인 ㅇ 으로 만들어진 글자의 뜻

* 하늘과 같은 태초, 처음.- 아사달, 단군의 처음땅, 새땅 (단군의 도읍지), 아침.(하루의 처음) 아시빨래, 아시 김매기등. 아사히(朝日) 아다라시 (앗달아시)

* 새것 - 새것은 어리므로 아우, 아재비등 이하 생략  다 올리려면 책 한권

 

** ㅎ 이 가지고 있는 뜻

하느님, 하늘, 해, 한(한  민족의 한) 이하 생략, 다 올리려면 책 한권

 

** 땅의 성질을 가진 'ㅁ'에서 분해된 ㄱ  

ㄱ 은 애초 세상, 즉 지표면의 만물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이 ㄱ 의 첫 발음인 '가' 는 가장자리 라는 뜻으로 쓰여진다. 이 가장자리는 강가니 바다 가니 하는 '가' 가 되고 여기서 서고 세우는, 즉 성립을 뜻하는 ㅅ 이 붙으면 가장자리의 뜻이 완전 성립되어 갓'이 된다. 이 '갓'이 지표상의 물건들, 즉 세상 만물이라는 증거는 세종후 백년후에 만들어진 한자사전 訓蒙字會 에도 物은 갓物 자로 나온다. 그래서 ㄱ 으로 시작되는 우리말은 거의 이 가장자리의 뜻밖에 없는데  그외 ㄱ 으로 시작됐지만 가장자리의 뜻이 없는 것 같은 말도 결국 그 뿌리를 추적하면 결국 가장자리가 된다. 즉 말은 위 가림토 에서 보듯이 진화한다.

* ㄱ - 가 (강가 바다가 등)

* 가시 - 여자 ( 북한의 장인 장모는 가시어머니 가시 아버지, 경상도 방언 가시내) 여자가 가시인 이유는 남자는 주체이고 여자는 객체이기 때문이 아니고 말이란 강력한 자극에 의하여 만들어 지고 그 강력한 자극이란 바로 생식 행위 인데 우리 말은 거의 생식행위에서 만들어 졌으므로 성기 결합 시 男根은 알맹이 女陰은 그 가장자리. 여기서 가장자리 다음에 ㅅ 이 붙어 가시가 되는 것은 ㅅ 은 서는 뜻의 사람이란 뜻이 붙어 '가장자리'인 사람이 '가시' 이다.

* 가시(나무 가시) - 먼저 여자인 가시와 같은 음 이지만 그 뜻은 전연 다르다. 즉 나무의 가시는 나무 줄기에 뾰죽한것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 즉 ㅅ 은 그 끝이 뾰죽하므로 서고 솟는 뜻 이외에 뾰죽한뜻도 있다.

* 가지 - 나뭇가지도 원 줄기의 가장자리 ( ㅈ 은 ㅅ 에 '-' 의 이불을 덮어 ㅅ 을  유보 시키는 글자 )

* 가죽 - 가죽 皮 등 ( 몸둥아리의 가장자리) 

* 거죽 (물건의 가장자리, 거죽과 가죽은 사실 같은 말)

* 겉 - 거죽이 단축된말 (겉은 맞춤법이 잘못된 말, '겆' 이라 해 야함, 겉 이라고 한다면 거죽이 아니라 거툭이 되며 가죽이 아니라 가툭이 됨) 

* 겨 - 보리겨 왕겨, 왕겨등 알곡의 껍질

* 겨집 -세종때 까지 쓰던 계집 (女)

* 깁 - 누에 꼬치,  번데기의 가장자리, 비단 ( ㅂ 은 받는 그릇, 싸는 보자기의 뜻이 있음)이하 생략 (좀더 알려면 필자 졸저 참고)

 

이상 세종은 우리글자는 만들었으나 우리말은 만들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장자리 라는 뜻의 말을 할 때는 반드시 ㄱ 을 쓰게 만들었을까? 이는 바로 ㄱ 으로 표시되는 어군(語群)은 가장자리라는 뜻이 이미 세종 이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 말이 진화한 예 하나만 더 든다.

기름 (油)은 가장자리와 전연 관계가 없는 듯 하다.그러나 한번 그 뿌리를 추적해 보자. 가장자리인 ㄱ 으로 시작되는 깃 (巢) 은 새 털이다. 이것도 새 몸통의 가장자리 이다. 그런데 이 깃은 새들의 집으로 진화하여 깃 이라 하여 새가 깃든다 한다. 그러니까 깃은 새 집도 된다. 그런데 이 집은 새 집뿐 아니라 원시에 우리 조상의 여름집도 역시 깃 이었다. (근거문헌 冬卽窟夏卽巢 - 東夷列傳) 즉 원시 사람은 겨울에는 굴속에서 살았고 여름에는 새들처럼 나뭇가지 사이에 새 깃 처럼 나무를 얽어 살았다는 것인데 이 깃은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반드시 길(道) 이 있어야 한다. 즉 사냥을 하러 다니건 물을 기르러 다니건...그런데 이 길은 고속도로가 아닌 구불 부불,  꼭 개울물 흐르는 것 같았으므로  흐르는 뜻이 있는 'ㄹ' 이 붙어 '길'이 된다. 그런데 이 길은 짧은 것이 아니다. 매우 길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서 길음, 길다(長) 이라는 말이 생긴다. 다음 사람이건 식물이건 길게 하려면 이 기름 이 필요 하므로 '기름' 이란 말은 기름지다는 기름(油) 가 된 것이니 돌 기름인 석유(石油)가 왜 가장자리 이냐고 따진다면 우선 그 말들의 진화과정을 살펴 봐야 한다.

 

** ㄴ - 누어 있다는 뜻이다.

눈(目) - 가로 누어있다.

눈 (雪) - 비는 흘러 가나 눈은 그대로 누어 있다.

누에 - 누어 있는 벌래

누리 - 누어있는 세상

누님 - 성기가 누어있음 이하 생략

 

** ㄷ 은 땅이다

다 - 다地(문몽자회)

달 - 음달 양달

땅 -

둔덕 - 땅이 어덕진곳

내(川) - 누어있는 개울 이하 생략

 

** ㄹ - ㄹ 로 시작되는 말은 오직 리을 뿐이나 이 ㄹ 은 유동성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딱딱한 우리 다른 말에 붙어 우리 말을 유연성 있게 해 준다.

 

** ㅁ - 땅 천부인 이지만 물위의 땅이 되어 뭍, 만뎅이(고개) 마마, 마루 등에 써 지며 땅의 뜻은  ㄷ 보다 오히려 약하다.

 

** ㅂ - 비, 빛 밭, 씨를 받는 여음 등에 쓰여지고 바람, 바람壁, 뿔등  받거나 받치는데 쓰여짐

 

지면상 생략하고 가림토가 왜 상형문자이며 뜻들인지를 설명한다.

 

* * 사람 천부인은 △ 이기 때문에 그 모양이 서 있고 또 솟는 모양이며 그 끝이 뾰죽하다. 여기서 ㅅ ㅈ ㅊ 이 나왔다고 했다.

* 서거나 솟는 모양으로 된 말

* 서다,세우다 (立)
* 사람 -

* 사내(丁) - 사내의 원 의미는 장정의 남근을 말하므로 서 있는 것이다.
* 솟다 -

* 숫 - 남근(男根)

* 솟대(山象雄常) - 생명의 핵심인 남근상을 상징하는 서낭나무의 원조로 신단수(神壇樹)

* 소도(蘇塗) - 솟대가 모셔진 성소 솟터

* 서울 - 섯벌 (徐羅伐) >서벌 >서블 >서울
* 새벌(新羅) - 새로 선 벌 (섯벌 >서라벌)
* 스승, 스님 - 학문 등이 서 있는 사람
(이하 생락)

 

** 한편 우리 원시한글의 자음은 상형문자의 일종이었으므로 그 형상을 닮아서 만들어 진것이 많다.
* 서까래 - ㅅ 처럼 대들보에 걸친 것

* 쑥 - 그 잎 모양

* 삼 ( 麻, 蔘)- 그 잎 모양

* 손 - 손가락 사이

* 삿 (사타구니) - 다리 사이 (이하 생략 )

 

** 한편 △ 은 그 끝이 뾰죽 하고 뾰죽 한것은 가늘고 좁다.

* 솔 - 소나무

* 솔 - 부추

* 솔기 - 옷솔기등 가늘다.

* (오)솔길 - 좁고 가는길 (이하 생략)

 

  으로 된 말들 역시 세종이 만든 말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쓸려면 반드시 ㅅ 을 써야 한다. 이역시 위와 같이 세종 전에 이미 ㅅ 을 써야만 말할 수 있는 ㅅ 의 어군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상이 가림토의 성질이니 가림토는 물건의 모양을 본따 만들어진 상형문자이며 뜻 글이며 그 어군이 있어 ㅅ같은 물건이나 말을 쓸려면 ㅅ을 써야 하니 소리 글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림토는 완전한 소리글이 아니라 ㅇ ㅁ △ 분야에서 서로를 침범할 수 없는 제한된소리 글 이다.

 

** ㅈ 은 서는 뜻이 있는 ㅅ 위에 이분 '-' 을 덮어놓아 서는 것을 유보 시킨다.

* 자다 , 죽다(永眠), 자리, 저녁(해가 자다), 잡다  이하 생략

 

** ㅊ 은 잠에서 깨어 나는 글자

차다 - 가득 차다.

참 - 가득찬것

차다 - 날씨가 차니 동굴에 사람이 가득 차다.

* 치다 - 막대로 공을 치다

* 치다 - 짐승을 쳐서 우리에 넣다. 이하 생략

 

** ㅌ 은 붙 딴 땅의 뜻

타다 - 불타다

터 - 원시 불을 놓고 집을 지었던 터

튀다 - 불 탈 때 튀는 것

토끼 - 튀듯이 뛰는 동물 이하 생략

 

** 현재 맞춤법이 잘못된 예

우리는 흔히 말을 하다가 막히면 거시기 라고도 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곤란한 생식기 용어 등을 말할 때도 흔히 거시기 라고 한다.

그렇다면 거시기란 어디에서 나온 말이며 무슨 뜻인가? 거시기 란 것(겉)이기 >거시기 가 된 말이다. 지금 이라고 하는 것은 그 유식한 한글학자들이 잘못 만든 맞춤법이다. 만약 것(表)을 겉 이라면 거죽도 거툭 이라 해야 하고 가죽(皮)도 가툭 이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은 잘못된 맞춤법이고 이라 해야 한다.(ㅅ과 ㅈ 은 한 몸에서 나온 같은 글자, 이라 해도 됨, ㅌ 은 집 터 등에서 보듯이 불탄 땅(집을 지을 때 불태우고 집을 짓던 원시 조상))의 의미가 있는 글자이다. 이상으로 볼때 만약 이라 한다면 겉이기 >거티기 가 된다. 그런데 우리 말에 거티기 란 말은 없다.

 

** 가림토가 중요한 이유

그러나 한편 이 가림토의 ㄱ ㄴ ㄷ ..ㅎ 등에 들어있는 뜻이 왜 중요한가 하면 어느 유물 보다도 더 중요한 우리 말의 뿌리를 찾아 우리 미약한 상고사를 밝히고 그 출처 없이 변질 되가는 현재 우리말과 잘못된 맞춤법 등을 교정 하는 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 가림토가 없어진 이유

즉 세종의 한글처럼 아무 소리나 다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아니라 그 어군이 다르면 적을 수 없고 따라서 모화사상에 젖어 중국글자만을 즐겨 쓰던 한자의 발음도 적을 수 없는데 이는 예를 등면 ㅅ 으로 발음 되더라도 事件 史記司法 등에는 쓸 수 없는 문자이니 한자로 만들어진 용어만을 좋아하는 선비들에게는 완전 무용지물 이었다. 이것도 가람토가 없어진 증거의 하나 이다. 그러니 이것을 지금 세종의 완전한 소리 글과 같이 봐서는 안 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원시 한글은 일종의 상형문자인 뜻글 이었으며 소리 글이기도 한데 그 모음도 혼동되어 지금 한글처럼 체계화 하지 못했다. 즉 뜻글도 아니고 소리 글도 아니기 때문에 말이 몇마디 되지안던 원시에는 이것이 복잡했을 수도 있고 반면에 그림글자인 원시한자는 오히려 간단하고 알아보기 쉽기 때문에 이 한자에 눌리었다고도 보여지지만 한편 또한 가지 이유는 우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대 사상이 너무 심하여 지금 소위 학자 교수 작가 언론인들은 영어가 아니면 말을 못하듯이 옛날선비들도 일부러  그간 복잡하게 변한 한자가 아니면 쓰질 안았다고 보여진다. 또한 가지 이유는 지금 학자나 옛날 선비들은 정보의 독점욕 때문에 일반 평민이 모르는 글자를 쓰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자의 발달과 보존은 일반 평민이 아니라 선비나 학자에 의하여 전해 진다. 그러니 원시한글이 있다 해도 이는 최만리 상소문이 말하는 촌것들(鄕里)이나 주먹구구 식으로 쓰는 문자로 전락했다. 이렇게 우리 것을 천시하여 잡초처럼 버려졌던 원시한글을 세종이 용음 합잘를 하여 아무나 쓸 수 있는 완전한 소리 글 체계로 재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나 쓰게 한 이유 때문에 최만리 상소문에 촌것들(鄕里)이나 쓰는 언문 이라는 말과 여자들만 쓰는 암클 등으로 불리워 오다가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500 년 후인 6.25 후에나 제대로 쓰는가 했더니 불과 50 년도 되지 안아 다시 영어에 눌리게 됐다. 글자란,  특히 우리 글자란 편리하다고 유행되는 것은 아니다. 옛날 선비들은 중국의 요순우탕의 서적은 중요시 했어도 하느님, 단군 서적은 잡서 취급을 했다. 이와 같이 앞으로는 미국 조지워싱턴의 할아비 족보는 시험문제에 나와도 하느님이나 단군 소리는 시험문제는 그만두고 누가 그 이야기만 해도 사이비 신도라고 몰매를 맞는다. 우리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단기를 썼다. 그러나 지금 단기라 하면 아이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 단기를 버리고 서기를 쓰는 이유는 세계화 때문이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온 세계가 그렇다.

따라서 이대로 간다면 영어가 세계 공용문자가 된다는 건 시간 문제다. 이렇게 영어가 세계 공용어에 공용 문자가 된다면 지식층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기뻐할 것이니 우리 말과 글자는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우리말과 글을 쓸려면 한자를 빼면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100년..아니 10년 후에도 영어를 빼면 말과 글이 되지 안는다. 그대로 한 500 년만 흘러가 보자. 우리말과 한글은 완전 무식한 촌 것들이나 암암리에 쓰게 될 것이고 천년, 3 천년, 5천년이 흐르면 그 촌것들이 썼던 기록은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거기다가 우리 풍토는 습기가 많아 타임캡슐에 보관하지 안는 한 웬만한 글자는 모두 사라지게 될 텐데 촌 것들이 쓰던 한글이 보관될 것 같은가? 그때 세종 같은 분이 나타나면 그 때는 영어화된 우리말을 적자니 지금 한글로는 되지 안는다. 그래서 한글의 모양은 모방하되 풀어 쓰기 등 그 용음 합자는 달리 해야 한다. 그런때에 그때 한글의 기록은 이미 없어 졌다. 이것이 바로 가림토가 한글이 되는 과정이고 가림토가 남아 있지 안은 이유 이다.

 

** 가림토의 흔적은 미약하나마 지금도 남아 있다.  

 

부산일보 2003/03/13일자 038면-

훈민정음 창제(1443년) 이전의 고(古) 한글로 추정되는 가림토(加臨土) 문자가 국내 최초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사진) 가림토 문자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이암(李巖)이 저술한 단군세기에 제3세 단군 가륵이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3일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鳴馬山) 중턱에 자리한 바위(가로 1.8m,세로 3.4m)에서 가림토로 추정되는 문자 다수가 새겨진 것이 발견됐다. 이 바위에는 상형문자에 가까운 글꼴이나,ㅅ ㅈ ㄴ ㅠ 등 한글 자모가 뚜렷이 각인돼 있다. 재야 사학자인 예대원(62·경북 경산시 사동)씨는 '훈민정음 창제의 모태이자 기반이 된 것으로 알려진 가림토 문자가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72·역사학) 명예교수는 '바위에 암각된 문자가 가림토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가림토 여부를 판명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54·국문학) 박사는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돼 언어 역사 민속학 인문지리학 등 여러 분야 학자들이 공동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경산=정철수기자 csjung@

 

위 부산일보가 없는 보도를 했다고 할텐가? (신문에는 비석 사진도 있었다. 보기를 희망하면 위 부산일보를 보실것)

 

*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옛 한글))
- 길림시 송호상 교수의 증언 - "동이민족 논설중 일부"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옛 한글)}는 조선의 한글이 세종대왕의 발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하 6m 깊이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문자는 C14 측정결과 거금 3850년 전의 것으로 확인하였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000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림토 사진)

 

소위 학자라는 분이 발표한 이것들을 모두 위작이라 할것인가?

 

 

* 일본 신사에 있는 신대문자 사진 (KBS 방영)

* 훈민정음 창제 700년전에 새겨진  일본 신사  비석의 신대문자.(神代文字) (KBS 한글날 특집 방영 에서 방영 했던것을 ch25 Q 에서 재 방송 한것을 인용) 본 사진은 책에도 있는데 인터넷 독자를 위하영 공개 한다. 한글은 세종이 완전 무에서 창제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 (환인)은 그 아드님 환웅에게....아니 우리 민족에게 '천부인' 이라는 천하의 보물 세개를 하사 하시었고 우리 민족은 그것으로 우리의 말과 글자(원시한글)를 만들어 썼으며 이 글자(가림토)가 일본으로 건너가 신대문자가 되었고 세종이 복원하여 지금 우리 한글을 만들었다는 근거를 제시 한다. 

 

 

 

 

 

 

 

이 글자들은 분명 KBS 에서 훈민정음 보다 700 년이나 앞서 써진 글자들 이라고 보도 했고 이는 가림토로 추정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KBS 보도도 가짜이고 그렇다면 세종은 일본 문자를 모방하여 한글을 만들었다고 할 텐가?

 

 

 

인도 부라미 문자로 된 간판 사진들

 

 

 

 

* 현재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 통용되는 부라미 문자 사진 ( 상가 간판. KBS 방영) 이는 현재 인도에 가보면 그대로 이다. 의심이 가면 가 보라. 왜 이런 글자들이 여기에 써 있는지?

 

* 결국 공룡 하나의 발자국 하나만 이라도 발견되면 이는 공룡이 살았다는 증거이다. 많은 것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만 발견되면 앞으로 얼마던지 더 발견될 수 있다는 말이고 따라서 가림토의 흔적이 아직 적긴 하나 이는 한민족이 살던 땅은 사막등과 달라서 유물이 오래가지 안는 지역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우리 글자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은 하느님 이래 세종때 까지 대략 5 천년 동안 글자 하나 만들 실력이 없어 중국의 한자나 빌려 쓰는 바보 민족 이었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안는데 과연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우리 민족이 그렇게 바보였을까?  이하 글 생략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저자

카페. 천부인과 천부경이 비림 운영자. -우리 -

http://cafe.daum.net/chunbuinnet   

 

 

KBS 역사 스페셜 환단고기에나온 가림토 문자
 


① 가림토 문자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가 있었다. 그러나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또 음문자이며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가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이다.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다. 그리고 근세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림토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 (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의 분국이 있었으며 그 후예들이 살고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스토 알파벳과 구라자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 가림토 문자 창제동기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에 갸륵 단제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환단고기 - 단군세기>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①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非新字也>.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②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③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 해외에 남아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
그러나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환단고기 뿐 아니라 일본, 인도, 몽고 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한민족의 가림토 문자를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면, 1446년의 훈민정음에서 708년의 일본의 신대문자가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일본의 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는가? 실제로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것을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신대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환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일본의 천황가 자체를 비롯, 일본이 단군조선이래 한국인이 건너가 세운 나라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일본인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기본적으로 꺼릴 뿐 아니라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거꾸로 왜곡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그런 풍조 속에서 일본의 학자가 그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뒤엎고 가림토 문자에서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나왔고 그 뿌리임을 학자적 양심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통 사학계와 국어학계에서는 아직도 "훈민정음이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는지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는지" 논쟁 중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제를 입증해준다. 단군조선이 있었다면 단군할아버지도 실제하셨던 민족의 조상임을 믿을 수 있고, 가림토 문자가 발견되는 곳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일본에 보급되어 아히루 문자가 된 것이다.

▶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ㄴㄷㅌㅇㅁㅈㅂ 그리고 ㅏㅑㅓㅕㅗㅛㅡㅣ등) 이 지역은 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가서 세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자라트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에 문자뿐 아니라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들(나-난/너-니/엄마-엄마/아빠-아빠/보다-봐/날-날/오다-와/나라-나르/너 이리와-니 잉게와 등)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국민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g"으로 끝난다.

▶ 영어와의 관계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알파벳의 자모도 여러 개 보인다. 가림토 문자가 4177년 전에 만들어진 반면, 알파벳의 역사는 겨우 3000년을 넘지 못한다.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광명을 뜻하는 글자인 환(桓)에서 나온 이름이다. 즉 환(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이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고문자는 한단시대의 영역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펌)
 
 
 
훈민정음 이전 한글 '가림토' 발견

 
가림토 문자 비석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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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이 <고대 한글>인 <가림토>
2번은 <훈민정음>
3번은 <고대한글>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금 변형된 <신대문자>
 
 
 
단군이 만든 우리말과 원시한글
 
1.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은 물론 세종이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연 無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옛 글자를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했다.(世宗實錄,字倣古篆) 그리고 訓民正音 반포후 이를 적극 반대하던 집현전 학사 최만리등의 상소문을 참고해보면


2. 원시한글이 있었다는 부분

* “언문은 다 옛자를 근본으로 했음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히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불과 50일만에 최만리 등의 상소문이 올라오는데 이 상소문에 벌써 19개의 언문(諺文)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만약 훈민정음이 사상 초유의 문자였다면 언문이라는 단어대신 ‘훈민정음’ 이라는 단어가 대신 올라 있엇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문은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유치한 형태로나마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증거는 최만리등 상소문중 다음 글귀가 증명한다.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借使諺文自前朝有)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 이옵니다. (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3.옛 글자는 단군 3세때 만든 加臨土

* 원시한글인 가림토(또는 加臨多)가 만들어 졌다는 기록은 ‘환단고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환단고기를 위서로 보는 학자가 많아 이것만 가지고 원시한글이 있었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인술이 없어 필사본에 의해 전하던 이 기록이 더러 가필의 흔적은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위서라고할 수는 없다. 즉 동립선언서의 원문은 “吾等은 玆에....”인데 국립극장 아래 비석에 “우리는 이에”라고 써 놓았다 하여 그것이 한글세대가 이해하기 좋으라고 써진것이지 위서는 아닌거와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림토가 실재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므로 다음글을 보자.


4. 가림토가 있었다는 논리적 증거

* 가림토(加臨土)가 있었다는 기록은 고려말 충정왕을 받들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와서 천성사를 거쳐 좌정승이 되고 홍건적 난으로 서북면 도원수가 되어 활약한 杏村 이암(李嵒)선생이 그간 수집한 고서들을 인용해 찬술한 ‘단군세기’에 있고

* 한편 기림다(加臨多) 라는 말은 위 이암의 현손으로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 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유배를 당하여 유배지에서 우리의 상고사 만을 탐독 하다가 중종때 복위되어 찬수관이 됬으므로 내각에 비장되어있던 수많은 책을 얽어볼 기회를 가졌던 十一堂 主人 이맥(李陌)이 지은 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있다.

* 그런데 그 내용은 모두 3세단군 가륵이 삼시랭이 을보륵에게 시켜 만들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점은 가림토와 가림다의 표현이 다르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가림토가 실재 했다는 증거거 된다.

* 즉 이 글들이 모두 위서가 가 쓴 위서라면 가림토건 가림다건 한목소리를 내야 했을것이고 이암의 현손인 이맥이 자기 조상인 이암의 글을 베껴 썻더라도 기림토건 가림다건 한목소리를 내야 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맥은 전술한 바와같이 성격이 강직하여 조상의 글이라고 무조건 베껴쓰지 않고 자기가 본 다른 기록에 의하여 ‘가림다’ 라고 썼을 것이다.

* 그렇다면 이암과 이맥이 본 기록들은 서로 다른것인데 바로 이것이 가림토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이유는 다음을 보자.


5.가림토와 가림다는 같은 말이다.

* 필자는 어떤 학위는 없지만 20여년간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 우리말과 한글은 결국 하느님의 선물인 천부인으로 만들었다는 제자 원리의 이론을 확립한 사람이다. 1940년 안동 이한걸의 집에서 나타난 유네스코 보존물이며 우리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이 해례본은 사실상 우리 한글이 중국의 성리학이나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정인지등이 해례본을 썻지만 이는 사실상 한글을 모독하는 글이므로 그 해례본은 국보에서 폐기되야 한다.

* 세종대왕은 옛 글자를 모방하여 한글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 글자들이 가지고 있는 音까지는 분명히 취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의미는 취하지를 못했다. 즉, ㄱ ㄴ ㄷ ...ㅎ 속에는 그져 발음기호 노릇밖에 못하는 알파벳과는 달리 분명한 의미가 들어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현재 엉터리인 우리 한글의 맞춤법 교정은 물론 고대에서 쓰던 말 까지도 복원해야 우리 말이 제대로 살아난다는 엄청난 사건이다.(엉터리라는 현재 맞춤법의 이론은 홈페지 에서)

* 우선 ‘ㄱ’속에는 갓(邊)의 뜻이 있다. 우리말에 ㄱ 으로 발음되는 말들은 모두 ‘갓’ 가장자리의 뜻밖에 들어있지 않아 가죽, 가지(나무 줄기의 갓), 가시, 기시네(男을 알맹이 女를 껍데기로본... 女는 원래 겨집여, 훈몽자회) 겨(왕겨,알맹이의 갓) 겉(外) .....등 또 겨울은 여름을 알맹이로 보는 원시에서 껍데기 계절. 게으르다는 “겨울이다”에서 나온말... 하여간 기름(油)까지도 ‘갓’에서 진화한 말이다 (더이상 설명 생략)

* 위를 근거로 가림토나 가림다를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보자. 우선 ‘가림’부터 본다. 위에서 ‘가’는 가지(枝),또는 가람(川)은 가지를 치고 그 가지가 커지면 가랑이(가지랭이)처럼 갈라지게 되어 원 줄기와 비교하게 되는데 이것을 ‘比較,分別’ 한다고 하여 ‘앞가림’ 이나 아기가 대소면을 ‘가린다’, 낯가림을 한다, 말이있다.

* 한편 이 분별과 비교는 ‘대신’한다는 말로도 쓰여져 “이것으로 인사말을 가름 하겠습니다” 한다면 인사말을 대신 한다는 말이 된다.

* 이상으로 위 가림토와 가림다의 ‘가림’은 분별, 비교, 대신의 뜻이 들어잇다. 그러면 土와 多 가 다르고 그렇다면 어느것이 맞는말인가? 이는 둘다 같은 말인데 우리 말로는 ‘다’가 맞는다. 즉 土는 土臺 그러니까 땅이다. ‘다’는... 현재 地는 따지 이지만 소주가 쏘주가 되고 번데기가 뻔데기가 되듯 말이 강해진 연유이므로 훈민정음 배포 100년만에 쓰여진 최세진의 한자사전 訓蒙字會 만 하더라도 ‘따지’가 아니라 ‘다지’이다. 그러니까 결국 다(多)는 “많다”가 아니라 땅이다.

* 결론은 위 加臨土나 加臨多는 둘다 무엇 무엇을 가림 한다는 토대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림 했을까? 이는 말이나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분별 비교 대신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가림다’ 라는 말은 한자가 생기기전 즉 文字라는 말이 있기도전 그 말이나 사건을 대신, 분별 한다는 우리의 순수한 말이다. 이것이 후에 우리 가림다는 없어지고 한자로 적자니 가림은 그래로 加臨이라 음을따고 加臨土의 土는 땅의 의미를 딴것이며 ‘다’는 음까지 그대로 한자로 기록하여 加臨多라 한것이다.

* 이 좋은 가림다가 왜 없어졌는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으로 인한 한자 사용이다. 즉,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도 우리 민족이 한글을 제대로 쓴 것은 6.25 이후로 불과 50년 남짖인데 지금 한글은 어느새 영어로 대치되어 길거리의 간판이나 상장주식 회사 모두 영어이고 언론계나 학자 정치가 교수 작가 모두가 영어를 쓰지 않으면 행세를 못하니 써붙인 글씨도 “개업”이 아니라 “open" 이라 써 붙였고 천철간 비디오 카메라 선전문구에는 한글은 한마디도 없다. 필자가 단언 하건데 한글을 만들어 50년 썻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50년 후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그래도 가림토는 단군때 만들어지고 4천년이 지난 세종때까지는 가림토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위대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우리 한글은 우리들의 잘못으로 100년 500년 후에는 타임캡술 속에서나 찾아야 하다.

* 다음 가림토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는 가림토 가림다의 기록이 있다고 쓴 이암이나 이맥도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보지 않은한 가림토의 의미를 몰랐을 것인데 어느 위서가들이 이 모르는 소리를 위서로 쓴다는 말인가?

* 이외 실증적 증거로 중국 山東省 桓台市에서 출토된 BC1580년후로 추정되는 뼈에 새겨진 가림토 문자의 사진이 있고 부산일보에서 2003.3/31자로 발표된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성에 암각화된 가림토와 경남 산청군 단속사 터에서 발견된 가림토 비석 사진이 있다.

* 그러므로 가림토는 3세단군 加勒 46년(BC2181) 당시 별직의 제사장 으로 두었던 화랭이 乙普勒을 시켜 만든 것이 확실한데 요는 이 글자를 3세 단군과 삼시랭이 을보륵이 창제 했느냐는 것이다.

* 이는 세종의 한글이 완전 창작이 아니고 모방 이드시 이 3세 단군도 1대 단군(단군은 개인 이름이 아니라 ‘밝은 잇큼’ > 밝은 임금을 후세에 한자로 檀君으로 표시한 왕의 명칭. 단군은 고조선때 48분이 통치했음)이나 그 아버님 황웅때부터 원시적으로 전해지던 말고 글자를 보강 정리 했음이 어원뿌리로 보면 밝혀지는데

* 여기서 필자가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었다는 근거 한가지만 예를 든다. 즉, 석가래, 사타구니, 손가락, 쑥, 삼(인삼) ....등등의 말들은 전혀 그 뜻이 상관없고 세종이 만든 말도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쓸려면 반드시 ‘ㅅ’을 써야 한다. 이는 세종이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또하나의 증거도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 한글이 표음문자 이면서도 상형문자 이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위에서 말한 서가래 사타구니.등은 그모양이 ㅅ 같고 손가락이나 쑥 등도 그 사이가 ㅅ 같다.

* 이 ㅅ은 위로 솟는 것 같아 ‘솟다’ 라고도 쓰고 한편 서(立) 잇을수도 있어 ‘사람’ 등에도 ‘ㅅ’을 쓴다. (생략) 이는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 졌다는 증거이다.

* 결론- 이렇게 우리 말과 우리 한글은 우리 단군과 그 조상님인 환웅, 환인 하느님께 까지 올라가고 우리는 지금 그 말과 글자를 쓰고 있다.

*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현재 옷을 여호아에게 빼앗겻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하느님이 누구냐고? 아마 십중팔구 여호아 라고 대답할거이다. 이러다가는 먼저 말했드시 “동해물과 백두산이....여호아가 보우하사....”가 될것이다.

* 이렇게 자기 민족의 뿌리를 짤라버린 일부 종교에서는 단군을 거론하면 특정종교 선전이라고 비판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 한글학회에서는 대통령 갈릴때마다 달라지는 맞춤법 몇 개만 가지고 따질것이 아니라 우리 한글의 원류를 찾아 우리 말과 우리 뿌리부터 확립해야 할 것이다. 즉, 고정관녕에 사로잡힌 기존 이론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이론도 받아드려 함께 연구해 활기찬 한글학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