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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9 : 가림토문과 한자의 기원]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3:56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9 : 가림토문과 한자의 기원]

 


상선약수님의 "天文記錄으로 찾은 韓國史"에서

 

中國은 문자가 없던 시대의 日蝕까지 기록해 놓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일식기록은 기원전 2128 년의 일식으로 書經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원전 2128 년에 中國에는 文字가 없었다. 漢字의 원형이라는 갑골문자마저 殷末 200 년 동안(B.C. 1250~B.C. 1046?)에 사용 했다고 날조했다. 周나라 선왕(宣王, B.C. 827~ B.C. 782) 때 周文을 만들었고, 진(秦)나라 때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 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甲骨文字가 발견된 黃河 下流는 우리나라 영토이다. 일식기록으로 본 三國이 黃河 河流를 축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三國은 수세기에 걸쳐 치열하게 싸운 나라들이다. 殷이 黃河 하류에 있었다면, 殷을 멸망시킨 周도, 秦도, 漢도 黃河 하류에 있어야 한다. 黃河 하류가 中土라면, 三國이 전쟁을 하기 전에 中國부터 멸망 시켜야 했다. 하지만 三國史記나 三國遺史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黃河 下流에는 中國이 없었던 것이다. 中國은 우리나라 文字를 빌려 쓴 것에 불과하다.

기원 직후 玉篇에는 漢字가 22,726 字였다. 1716 년에 만들었다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47,035 字로 나와 있다. 그러면 기원전 11세기의 甲骨文字는 몇 字 였을까. 고작 3 千字이다. 甲骨文字는 점치는 데 사용된 문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상생활 에서는 3 천 단어쯤 있으면 의사소통이 가능 하다고 하지만, 그 옛날에는 3 千字로 절대 역사책을 쓸 수 없었다. 역사책 이라는 특성상, 온갖 분야의 전문용어가 등장한다. 관직만 해도 대체 몇 개인가.

◀영변지에 실린 鹿圖文 : 한웅대성존(桓雄大聖尊)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에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鹿圖文으로 기록 하였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일찌기 神誌의 전서(篆書)로 쓴 옛 비석을 보고 다시 문서(帖)를 만들어 세상에 전한 것이다(桓雄大聖尊天降後命神誌赫德以鹿圖文記之崔孤雲致遠亦嘗見神誌篆古碑更復作帖而傳於世者也 蘇塗經典本訓).

孔丘(孔子)가 썼다는 書經(尙書)이 中國의 첫 역사책 이라고 했다. 孔丘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면, 書經 이전에 역사책이 나왔어야 한다. 孔丘는 기원전 5~6세기 사람이다. 書經이 중국의 첫 역사책 이라면 한자는 周 宣王이 아니라, 기원전 6세기부터 중국에서 사용된 문자[중국 전설에서 한자를 개발했다는 창힐(倉頡)이 배운 부도(符都 : 符都誌는 朴堤上이 쓴 글로 창세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의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자인 녹도문(鹿圖文)이다]라는 소리다. 그런데 書經은 요순시대(堯舜時代 : 기원전 24세기)부터 기록한 책이다. 2천년 가까이 역사를 기억 했다가 기록할 수 있는가. 일본은 300년의 역사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고 고사기(古事記), 日本書紀를 썼다.

우리나라의 첫 文字는 기원전 39 세기에 만든 鹿圖文이고, 가림토(加臨土) 문자도 기원전 2181년에 만들었다. 그렇다면 기원전 2128 년에 일어났다고 書經에 기록된 일식은 어느 나라가 관측하고 기록한 일식인가. 문자가 없는 중국이 2천년이나 일식기록을 전해올 수 있는가.


 

▲ 가림토 문자 : 3 세檀君 가륵(嘉勒) 2년(庚子 B.C.2181)..이에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正音) 38 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또한 3년(辛丑)에 神誌 고설(高契)에게 명을 내려 「倍達留記」를 편수하게 하였다 (庚子二年..是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辛丑三年命神誌高契編修倍達留記 檀君世紀) 加臨土文字는 후대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원전이 된다.

 

 

 

 

 

한자의 기원과 가림토문 이야기


일반적으로 표의문자인 한문의 기원을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찾고 있다. 그런데 갑골문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 이전시대의 중국에는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진 창힐문자가 있었다. 창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과 동시대(BC28세기∼BC27세기)의 인물이었다. 창힐의 고향 산동반도 지역에서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위 그림의 중간에 있는 비석(倉聖鳥跡書碑)문이 창힐문자이며 그 왼쪽이 그보다 더 오래된 문자인 신지문자(녹도문)이다.『환단고기』「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이다. 『환단고기』에 인용된『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하게 된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형태가 된 것이다.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이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문자이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 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한다. 왜냐면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머릿수 많은 중국인들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당연히 갑골문자를 들고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지문자보다 더 진보된 형태였을 것이다. 그가 정착한 지역은 현재 유물,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지금의 발해 북안, 요하 서쪽이 그 곳이다. 은나라 계통 유물인 네모진 솥이 출토되었는데 거기에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의 국경선이 그 지역(요서)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가림토문, 하나는 신지문자이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신지문자가 새겨져 있다.(위의 그림 오른쪽 위) 거기에다 중국에서 사용된 갑골문자(한자)까지 들어왔다. 그리하여 무려 3가지의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다.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글 자모 24자가 세종 때 창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훈민정음의 "正音"에서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은 문자를 반포한 것이라기 보다 음을 바로 잡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글 자모의 기원이 되는 가림토 문자는 이미 단군 3세 부루 때에 처음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桓檀古記"나 "대쥬신제국사"등 에서 언급한 된 있다. 실제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7번이나 만주에 왕래하게 한 역사적 사실은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은 바로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던 우리 민족이란 것이다. 중국이란 나라는 이들 우리민족이 지배했을 때 강성한 제국을 유지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곤 하였다. 이를 근거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잃은 중국이 분열될 것이라는 예견 또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가림토문자가 특이한 것은 전세계 어느 나라 문자와도 다른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문자가 대단히 반듯하다는 것이다. 갑골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원시 한자의 모양도 구불구불 하였던 것이 단군 3세때 처음 만들어진 우리민족(쥬신족)의 가림토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쥬신족(숙신족)의 일부가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 중에서 가림토 문자 'ㄷ' 'ㅁ' 'ㅐ'등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 뿐 아니라 사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대륙의 한 고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보아도 뜻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가림토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여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더욱 실제적인 고증을 거치기를 기대한다.

 

 

 

[과학으로 푸는 우리유산] 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이종호/과학저술가)

'통치자의 글' 해석…한자·몽골글자와 구별
근래에 발견되는 수많은 유물 등을 통해 요하지역이 황하지역보다 오래되었으며 보다 발달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중국의 발달된 선진 문명이 일방적으로 동쪽으로 전파되었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고 요하 쪽의 동이족 문명이 황화 쪽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황하유역에 살던 이른바 본래의 한족(漢族)은 농경민족으로서 북쪽에서 남하하는 기마민족인 동이족에게 밀리어 남쪽으로 쫓겨가 오늘날 중국의 남방과 동남아 일대에 살고 있다는 설명도 있다. 현재 중국은 55개의 소수 민족 중에 객가족(客家族)이 있는데 이들은 지금도 자기들이 순수 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황하문명의 주역은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설명도 가능한 것이다. 고조선 때 한반도를 포함한 우리나라 강역에서 중국의 황하 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선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파장이 국내에서조차 아직 크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선진 문명의 척도라 볼 수 있는 고유문자를 사용한 증거를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설형문자가 사용되었으며 이들을 사용한 민족이 선진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데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중국도 갑골문자에 이어 한자를 만들었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아세아 문명이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추론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반면에 한민족의 경우 문자다운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다가 한자를 차용하기는 했으나 그것도 삼국시대에 겨우 도입되었으므로 우리의 첫 번째 국가라고 설명되는 고조선을 문명화된 국가로 볼 수 없다고 단언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와 같은 주장에는 설사 일부 청동기 문화가 중국보다 다소 앞섰더라고 하더라도 문자가 없는 한 진정한 문명세계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근래 이런 주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두 가지의 놀라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고조선 문자 즉 신지문자가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이 자랑하는 한자가 원래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 째 주장에는 중국의 국가로 알려진 하(夏) 은(殷)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는 주장도 포함된다. 

첫 번째 고조선에 신지글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 창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주요 성원의 한 사람인 신숙주의 18대 후손 신경준은 『훈민정음운해』에서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사용하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그 모양에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국가의 말을 적어내기에는 모자란다고 적었다. 또한 고려와 탐라(제주도)에서도 한자가 아닌 어떤 고유글자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덕무의 『청비록』에는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에 장유가 중국의 강남에 갔을 때 고려에서 떠내려간 ‘슬’이란 악기의 밑바닥에 쓰인 글을 중국 사람들이 읽지 못하자 그가 한문으로 옮겨 주어주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고려에 일정한 고유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를 강력히 반대했던 최만리는 세종대왕에게 낸 상소문에서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본래 옛 글자이지 새 글자가 아니라 하는데”라는 말과 “설사 언문이 전 왕조 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중략) 그대로 따라 쓸 것인가”라는 말을 볼 때 그 당시 언문 곧 훈민정음이 원래부터 있었던 옛 글자를 기초한 것으로 완전히 새로 만든 글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은 종래 알려진 대로 사람의 발음기관 모양을 본뜬 것도 아니고 중국 학설을 모방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지금까지 한글의 ‘ㄱ, ㄴ, ㄷ’등 자음과 ‘ㅏ, ㅗ, ㅣ’ 등 모음은 사람의 입이나 목구멍 모양을 상형(象形)했거나 12세기 중국 문자연구서 『육서략』을 본뜬 것이란 학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카톨릭대학교의 이승재 교수는 고려시대 불경 등에 사용됐던 각필과 훈민정음의 자형이 일치되는 예가 무려 17개나 되며 고바야시는 각필 흔적은 ‘일본문헌에 나타나는 오코도점(點)의 원조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의 가나 문자가 한반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까지 연결된다.

15세기 후반기까지 전해 온 『삼성기』에 ‘단군 때에 신전(신지전자, 신지글자)이 있었다.’고 하였고 16세기 초의 이맥의 『태백일사(태백유사라고도 함)』에서는 ‘단군 때에 신지전서(신지전자, 신지글자)가 있었는데 그것을 태백산과 흑룡강, 청구(조선), 구려 등의 지역에서 널리 사용했다.’라는 글도 있다.

‘신지’란 ‘신시’라고도 표기했는데 원래 ‘큰 사람’이란 뜻을 가진 말로서 처음에는 ‘왕’을 가리켰으므로 ‘신지글자’란 ‘왕이나 지배자 즉 통치자의 글’로 해석하기도 한다. 『영변지』에서 전하고 있는 신지글자 16자는 글자의 짜임의 특성으로 보아 뜻글자가 아니라 소리글자이며 글자수가 모두 16자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신지글자 전부가 아님을 암시한다.

더구나 이들 글자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평안북도 룡천군 신암리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신지글자와 비슷한 모양의 두 글자가 있었고 중국의 료녕성 려대시 백람자에서 발굴된 고조선 토기에 새겨진 글자도 신지글자와 유사하다. 이들 글자는 뜻글자인 중국의 한자와도 구별되며 몽골글자와 인도의 범자와도 구별되며 마디글자인 일본 가나자와도 구별된다.

신지글자는 현재의 한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종실록』에 ‘이달에 임금이 어문 28자를 만들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본땄다’라고 기록했고 정인지도 『훈민정음』〈해제〉에서 ‘글자는 옛 전자를 본땄다’고 했는데 ‘옛 전자’를 ‘신지글자’로 추정하기도 한다.

가림도글자.
 

한편 『단기고사(檀紀古事)』와 『단군세기』에는 고조선 3대 단군 가륵(嘉勒) 경자 2년(기원전 2181)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했고, 그 이름을 ‘가림도(加林多, 加林土)’라고 했다는 글이 있다. 이 38자는 훈민정음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고대로부터 대마도에 보존되어 왔다는 ‘아비루글자’는 가람도글자에서 갈라져간 것이 분명할 정도로 유사하다.

일본의 『훈석언문해』에는 훈민정음(언문)에 대해 ‘옛날체와 지금체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옛날체는 고조선 말기에 만들어 전하는 것이고 지금체는 이조 세종 때에 옛날 글자를 고쳐 만든 것인데 지금 그 나라에는 옛날 글자는 없어지고 다만 지금 것만 쓰이는데 옛 글자는 곧 지금 일본에서 전해 온 신대글자(肥人書, 조선 사람의 글자라는 뜻)이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옛날체의 글자라는 것은 곧 가림도글자를 가리키며 그것이 비인서이자 또 아비루글자 즉 신대글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아비루글자.
 

낙랑무덤에서 나오는 벽돌에 새겨져 있는 무늬를 글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낙랑무덤의 벽돌에 새겨져 있는 무늬는 무늬의 기본 특징인 규칙성, 반복성, 대칭성이 보이지 않고 개개의 벽돌 전체에 새겨진 것들도 있고 벽돌에 하나의 요소로 삽입된 것도 있다. 이를 ‘불규칙적인 기하학적 무늬’라고 부르는데 규칙성이 무늬의 근본이므로 불규칙적인 기하학적 무늬는 결국 무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무늬를 장식무늬라기보다는 오히려 뜻을 표현하는 글자무늬로 볼 수 있으며 그 글자무늬가 고대 고조선의 고유문자 즉 신지글자 계통의 문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지글자에 관한 충분한 자료들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책보다 주로 돌, 뼈, 청동제품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또 신지글자는 조선시대의 정책과도 배리되어 세조, 예종, 성종 시대에 전국적으로 금지도서로 정하고 국가적으로 회수 조치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단군 말살 정책에 의해 많은 유물과 문서들이 훼손되거나 약탈되었다는 데서도 기인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므로 앞으로 이들에 대한 자료가 발견될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의 유산〉

한자의 발명자가 기존의 정설인 중국인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폭탄선언이 나오게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1993년 1월 4일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중국의 약 4천3백년전 신석기시대 후기문화를 보여주는 룡산문화유적지에서 문자가 새겨진 도자기 조각이 출토돼 중국의 문자사용연대가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아온 연대(기원전 1400년경)보다 최소한 9백년 가까이 더 올라가는 기원전 2300년경으로 판명됐다고 홍콩의 중국계 신문들이 구랍 30일 보도했다.

(중략)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공인된 중국의 문자사용연대는 금세기초에 발견되 갑골문자를 근거로 기원전 1400년경의 상대 말기로 추정해왔다.

(중략) 용산 문화란 1928년 산동성 용산진에서 처음 발견된 황하강 중하류에 분포된 문화로 대략 기원전 2800∼2300년경에 황하유역에 있었던 신석기 후기문화인데, 이들 문화유적지에 많은 흑색도자기가 출토되어 흑도문화라고도 부른다.

산동대학 고고학팀이 출토해낸 도자기에 오행으로 새겨진 11개의 부호를 전문가들이 감정해 본 결과 이것들이 용산 문화 후기에 속하는 기원전 2300년경의 하왕조 이전에 사용됐던 문자인 것으로 판명됐으며 전문가들은 도구를 이용하여 숙련된 기술로 새긴 이들 문자는 그 배열에 순서가 있고 어떤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자연구가인 김응현씨는 '기원전 2300년이라면 고조선 시대로 특히 지금의 산동성 지역은 고조선에 포함된 지역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면서 '한자를 막연히 중국의 문자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동방문자로 재조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김응현의 주장이 억지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교육인적자원부의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고등학교 『국사』에 동이족의 분포와 고조선 강역을 나타내는 지도가 있는데 이곳에는 산동반도가 동이족의 영향권으로 들어가 있다.

고등학교 『국사』에 나오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 지금의 산동 지역이 동이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지대학교의 진태하 교수도 한자의 조상인 갑골문(胛骨文)이 동이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언어학적인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은나라 때 이미 발달한 갑골문은 1899년에 출토된 이후 4000여자에 이른다. 은나라 때는 글의 뜻으로 계(契)를 사용했다. 문자의 시작은 상호약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현재 이 ‘契’자의 소리값을 ‘계, 설’로 쓰지만 고음(古音)으로는 반절음으로서 ‘글’이었다.

문자의 명칭을 ‘글’이라고 하는 민족은 세계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오직 한국뿐이다. 특히 ‘契’자의 소리 값에서 우리말의 ‘글’이 나왔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지만 이 경우 말이 먼저이지 글이 먼저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글’이란 말이 세종대왕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한글이란 문자를 창제한 분이지 우리말을 만든 분이 아니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진 교수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을 이룩했던 동이족이 은(殷 또는 商)의 멸망으로 크게 약화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황하유역에 그대로 남아 살았기 때문에 혈통적으로 오늘날 중국 민족의 상당수가 동이계라고 주장했다.

진 태하 교수는 중국이 최초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하(夏)’나라도 한국사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 교수는 그 이유로 한자는 본래 일자일의(一字一意)의 문자였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의미가 확대되어 대부분 일자다의(一字多義)로 변했다는데서부터 찾는다.

우선 ‘하(夏)’ 자의 근원을 보면 더욱 뚜렷하다고 설명한다.

식물이 여름철에 성장하기 때문에 ‘하(클 하)’자가 뒤에 ‘夏(여름 하)’자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夏)’의 자형은 갑골문에서 해서체에 이르기까지 많이 변했으나, 글자의 소리값은 ‘하(ha)’로서 상고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우리말에서 ‘하(ha)’가 크다 또는 많다의 뜻으로 예로부터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夏’의 자형을 만든 것은 ‘하(ha), 크다’라는 말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세웠다는 것이 자연스런 추론이라는 것이다.

중국학자들도 하(夏)와 은(殷)이 모두 황하 이북의 북방족 곧 동이족에 의해 수립된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황하문명의 주역은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설명도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동이는 누구인가〉

기원전 3000년경에 단군의 고조선이 국가로서의 위상을 갖고 현재의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등 중국의 동북부를 통치했다고 객관적인 자료로 인정하더라도 당시의 기록이 없으므로 추론만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들을 중국은 동이(東夷)로 불렀다. ‘동이(東夷)’란 ‘동쪽 오랑캐’란 의미로 고대 중국인들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동방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사용한 별칭이다. 중국 동북부에 살던 민족들이 스스로 동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중국인들에 의해 동이라 불려졌기 때문에 동이는 우리의 고대사를 거론하려면 반드시 등장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동이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이 의미하는 중국사에서의 영토가 동쪽으로 어디까지이냐가 관건이다. 중국의 사료에 의하면 연경(燕京) 즉 오늘의 북경에서 조금 동쪽인 만리장성이 끝난 곳 즉 산해관 부근으로 추정한다. 산해관 동쪽이 동국사 즉 한국사의 영토이다.

북경 근처 만리장성인 모전욕의 설경. 진시황은 기마민족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이를 만리장성 안에 있는 민족만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중국인들이 동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된다. 중국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에는 은의 무정(武丁 기원전 1324∼1266)이 동이를 정벌하느냐 마느냐로 그 가부를 점친 갑문(甲文)이 있으므로 동이족이 무정(武丁)시대 이전에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사에서 동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협의의 동이는 고대 중원의 동쪽인 산동반도와 회하(准河)유역 일대의 종족을 가리키며 광의의 동이는 한족(漢族)의 세력이 보다 확대된 진(秦)이후 중국의 동쪽인 만주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민족을 총칭한다. 그러므로 동이를 종족의 칭호가 아니라 정치적인 용어의 개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좌전(左傳)』에 의할 경우 상(商)의 멸망은 결국 동이족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갑골문, 청동기 명문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상(商, 은)이 기원전 11세기경 주족(周族)이 중심된 여러 종족의 연맹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서주(西周)시대가 열렸다. 동이는 끊임없이 중국 역사 속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공(周公) 단(旦)은 어린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단(旦)은 동이에 대한 대대적인 전쟁을 벌여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주(周)왕실의 친척과 공신을 대규모로 분봉하였다. 이때 봉해진 나라가 산동(山東)과 강소(江蘇) 지역의 노(魯), 제(齊), 초(楚) 등의 나라이다. 노나라에 살았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등을 동이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후 서주(西周)시대의 동이는 그들 지역에 분봉된 제후국들과 치열한 병탈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서주(西周)시대에 주(周)의 제후국과 토착민 동이 사이에 있었던 대표적인 대결이 제(齊)와 래이(萊夷), 주(周)와 회이(准夷)와의 전쟁이다. 래이(萊夷)는 중국 동부 연해 지역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한 지파로서 산동에 거주했던 토착민(주로 목축업과 농사를 지었음)이며 회이(准夷)란 준수(準水) 유역에 위치했던 종족이다.

제와 혈전을 벌였던 래이(萊夷)는 제나라 영공(靈公) 15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회이(准夷)도 노(魯)와 대립적인 관계에서 점점 밀접한 관계로 변화되며 동화되었다. 춘추(春秋)시기에는 서이(徐夷)가 등장하는데 서이(徐夷)는 산동에 존재하던 동이 중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서이(徐夷)가 한민족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서언왕(徐堰王)의 설화가 고구려 주몽의 난생설화(서군(徐君)의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았으므로 상스럽지 못하다 하여 강가에 버렸더니 독고모(獨孤母)의 개가 물고 들어왔다. 그가 알을 따뜻하게 하였더니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서언왕이라는 내용)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서주(西周) 강왕(康王) 때 서이(徐夷)가 스스로 왕임을 천명했다. 그는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황하의 상류까지 이르렀으며 국토가 사방 500리에 달했고 조회하는 나라가 36국이나 되었다.’라는 기록을 볼 때 당시에 매우 강성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임승국은 서언왕이 주나라 목왕(穆王, 기원전 1001∼947)과 일대 결전을 벌렸는데 이 당시 서언왕이 할거한 곳은 회수(淮水)와 대산(垈山)사이의 회대(淮垈) 지역으로 중원 대륙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라고 설명했다.

중국 문헌에서 동이는 ‘이(夷)’, ‘동북이(東北夷)’, ‘구이(九夷)’, ‘구려(九黎)’, ‘사이(四夷)’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동이보다 이(夷)가 먼저 일반화된 것은 이(夷)가 어떤 특정한 민족을 가리킨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이질집단을 통틀어 부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인들은 문화가 높은 지역을 ‘하(夏)’, 문화가 높은 사람 혹은 종족을 ‘화(華)’라 칭하고 화하(華夏)가 합해져서 중국이라 칭했다.

여하튼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산동의 동이들은 점점 중국인들에게 밀려 점점 제후국에 예속되면서 그들의 고유의 문화는 중국 문화에 흡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을 완성시킨 사람이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이다. 그는 중국 천하를 통일시켜 전국(戰國)시대를 마감시키면서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이전까지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통일 제국을 세웠다.

진시황제가 통일한 중국 영역은 동으로는 조선(朝鮮), 서로는 임 조 강중, 남으로는 북향호(北嚮戶), 북으로는 황하의 북단, 동북은 요동과 국경을 접하는 거대한 영토로 오늘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서주(西周)시대부터 중국인들에게 동화하기 시작한 중국 대륙 안의 동이들은 진나라의 출현으로 중국민족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수연 박사는 한대(漢代)이후 동북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동 일대에서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하와 은나라는 후대에 중국에 동화되어 중국인으로 자리잡았으므로 이들 국가를 동이족이 원류인 한민족이 세웠고 한자도 동이가 살던 산동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자 역시 ‘한민족이 만든 것과 다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 중에서도 비약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런 주장은 중국의 북방에서 생성된 이(夷)집단이 한 파는 산동으로 내려가고 또 다른 한 파는 동쪽으로 나와 만주 일대에 분포되었다는 견해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동이(東夷)가 동쪽의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夷)자는 원래 활은 평상시에 활줄을 빼놓았다가 유사시에 걸어서 쏘는 생활을 한 사람들의 상형자라는 것이다.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우리의 고대사는 이제 시작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이 분야는 앞으로 보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계속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된다. 04/5/29 이종호(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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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토(加臨土) 글자가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곳


1. 강도(江都:江草)의 해운당에서, 또는 선천(宣川)의 묘향산 단굴암(檀窟庵)에서 계연수(桂延秀)가 저술했다고 알려진 한단고기(桓檀古記:소도경전본훈)에 가림토(加臨土:加臨多)의 38자(字) 정음(正音) 부호가 나온다. 이태백전서(李太白全書)의 기록(옥진총담)을 빌어 대진국(大震國:渤海)에서 가림토 정음표기로 당(唐)나라에 글을 보낸바 있었는데, 조정에서 해독하는 사람이 없어 이태백이 해독해주었다는 내용도 함께 실려있다. 대진국에서 당(唐)에 보낸 글에대한 이태백의 해독은, 일본서기 민달왕(敏達王) 원년(AD572)에 고구려가 국서를 일본에 보냈을 때 조정대신과 사관이 해독치 못하여 백제의 왕진(王眞)이 해독해 주었다는 내용과 유사하다. 가림토(加臨土)의 정음 부호는 15C 근세조선의 세종(世宗) 시대에 재정되었다는 훈민정음의 표음부호와 거의 같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가림토 정음(正音)의 기본부호 38자가 세종시대에 와서 28자로 축소 되었다는 성격 이외는 없다. 따라서 가림토(加臨土) 정음 글자가 훈민정음의 신(新:親)제정 28자보다 앞서 사용된 것도 틀림이 없다. 물론 한자(漢字)의 뜻을 전하고자 만들어진 표음(表音)글자의 체계로도 인정이된다. 그러면서도 가림토 문자가 만들어지고 사용된 지역인 가림토(加臨土)가 어디였는가에 대한 해설은 있지도 않으며 고의적으로 설명을 회피한다. 가림토 지역에 대한 의문을 한단고기의 번역과 관계없는 필자에게도 많은 독자들의 질문이 쇄도 한적도 있고 지금도 질문을 한다. 이 기회에 지면을 통해 가림토(加臨土)에 대한 위치를 밝혀 궁금증을 풀어주고 싶다.

 

 우선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썼다는 강도(江都)와 선천(宣川)에 맞추어 가림토 위치를 찾아야 할 것 같다. 강도는 강화(江華)로도 쓰여지는데 강동(江東)의 화주(華週:中州)란 뜻이며, 강도는 강동(江東)의 도회지(도읍지)란 뜻이다. 강(江)은 황하의 별칭인 호강(胡江)에서 따온 것이다. 강동은 강서(江西)의 동쪽에 해당되며 하서(河西)의 동쪽에 하동(河東)이 설정된 의미와 같다. 또한 산동(山東:화산기준)도 된다. 선천의 선(宣)은 안(安)과 단( )의 합성글자로 동방( )의 북지(安)란 의미를 담고있는 글자다. 따라서 강화 및 강도·선천은 한반도의 강화도나 선천(평안도)과는 인연이 없다. 강도와 선천의 중심은 지금의 하남성(河南城) 지역의 개봉(開封)과 낙양(洛陽) 지역이며 영주(寧州)의 월국(越國)이 있었던 곳이다. 월국(越國)의 뜻은 중주(中州)·중국(中國)의 다른 표기다. 특히 선천은 녹읍(鹿邑)으로 개봉과 봉구의 다른 표현이며 일본사의 가고시마(鹿兒島)로 병칭되고 있다.


 2. 가림토 문자는 대진국(大震國)에서 쓰여졌으며 신라의 북진(北鎭:북국)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 즉 동국의 북방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대진국은 곧 발해(渤海)며 발해는 부상국(浮上國)으로, 부상국(扶桑國)으로도 호환된다. 발해국의 장유가 오월(吳越)로 가림토 글자를 거문고에 새겨보냈는데 월(越)나라 사람들이 해독하지 못했다는 한단고기의 기록도 있다. 여기에 등장한 오월의 오(吳)와 월(越)은 하동에서 하북과 하남으로 나뉘어 있었다. 월은 중주의 뜻이며 백제(百濟)와 함께 있었다. 당연히 영월(寧越)로도 쓰여졌다. 고려 광종(光宗:AD949∼975)때 장유가 말한 오월(吳越)은 개봉의 황하 주변을 말하며, 특히 월(越)은 영월로서 개봉의 남쪽지역이 된다. 묘향산(妙香山)이란 동방의 북해지역에 있던 향산(香山)을 말하며, 지금의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 맞은편(동쪽)에 있다.

 

 발해의 대평원 남쪽에 백제가 있었고 발해는 대진국의 의미와 어울리게 동방(동국, 동해)의 부상국(浮上國) 또는 부양군(浮陽郡) 지역에 있었다. 부양군이자 발해국의 중심지도 낙양과 정주·개봉의 황하주변이 된다. 역사에서 대진국이자 발해(진단국)가 현재의 동북3성과 극동에 있었다는 해설은 반도 한국사(韓國史)가 만들어 지면서 가능해졌고, 또 근래의 일이다. 따라서 계연수가 한단고기를 저술한 곳도 현재의 하남성이고, 장유가 거문고에 가림토 글자를 써넣어 보낸 월(越)나라도 하남에 있었다. 또 가림토 글자를 사용하였던 주체로서, 부양군과 발해로 병칭되던 해동의 성국인 대진국(진단)도 하동(河東:河南)에 있었기에 가림토를 반도나 동북3성 지역으로 해설할 이유는 없다. 일단 황하지대로 옮겨놓고 보면 한자(漢字:韓字)의 생성지역과 연관된 가림토 문자와 한글의 입맞춤은 해결이된다. 또 계연수의 별호인 홍행촌수의 홍행(紅杏)역시 홍주(紅州)와 행주(杏州)의 합성으로 지금의 하남성 노산(魯山)과 우현(禹縣:杏州)을 말한다는 것을 알아두면, 가림토 지역이 어느 곳인가를 알아 차릴수 있다.

 

 3. 가림토(加臨土)의 가림(加臨)은 가주(加州)와 임주(臨州)의 합성이고, 오방(五方)의 중앙(중원)을 상징인 토(土)가 합쳐진 지역명이다. 토(土)를 다(多)로 한다고 해도 달(達)로서 같은 의미다. 달(月:達)은 월성(月城) 및 만월성(滿月城)이되어 중토와 중원의 의미인 월(越)로 돌아오고 내토(奈城) 와 내성(奈城)·나라(奈良)가 되어 기나이(畿內:경기) 및 중주의 야마토(大和)로 다시 돌아간다. 즉 가림토와 인연을 맺은 모든 역사지명은 하남(하동남로)이자 소중화(小中華) 지역을 원형질로 삼아 조선의 한성부로 돌아온다. 가주(加州)는 가평(加平)과 가림(加林)으로 환원되며 두지명은 같은곳의 이칭이다. 임주(臨州)는 임천(臨川) 및 림주(林州)로 병칭되고, 임하(臨河)·임진(臨津)과도 다르지 않다. 주(州)·천(川)·평(平)·양(壤)은 지명의 나(那)·라(羅)·야(耶:野)와 같은 뜻이다. 또한 가림의 림(林)은 시림(始林)의 뜻으로 '동방의 중심' 이란 곳이며, 시평(始平)과 임주(林州)의 약칭이다. 임주 역시 하남성 안양(安陽)에서 만날 수 있다. 따라서 가림토의 토(土)가 오행으로 중앙(中央:中原)을 상징하듯이 가림(加臨)은 백제의 가림성(加林城:嘉林城)과 임존성(任存城)이 있었던 곳이다. 또 고구려의 임천성(臨川城)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의 안동(安東)과 임하(臨河)가 있던 곳이기도 하고, 일본사의 축자(筑紫)·웅본(熊本)·기내(畿內) 및 나라(奈良)가 있던 곳이었다. 가라(加羅:加耶, 駕洛)가 있던 곳이며, 임나(任那) 일본부가 있었던 사주(司州)였기도 하다.

 

 가라(加羅:加耶)가 '갈라지다, 나뉘어지다, 변지(邊地)'의 뜻이있고, 강(江)의 옛표기인 '가람' 과 맞물려 갈라지다의 한자표기인 기성(岐城)이 경남거제·경북 고령에 만들어지게 된것도 낙동강(洛東江)의 반도 이식과 깊은 인연이 있다. 낙동강이 상징하는 의미는 '낙양(洛陽)의 동쪽을 흐르는 강 '이란 뜻과 '낙수(洛水)와 대동강(大東江:黃河의 본줄기)이 합쳐지는 강' 이란 뜻이다. 낙동강은 김해(金海:東海)지역을 흐르고, 가락(駕洛) 지역을 있게한 보충설명도 해준다. 가락(駕洛)의 본래뜻은 '낙수(洛水)·낙주(洛州)·낙양(洛陽)지역의 군주(君主)' 가 있는 곳이란 뜻이다. 가락은 일본사의 기내(畿內)이자 본정(本町)으로서 한국사의 가야와 맞물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지역도 되었다. 임나(任那)는 임주(任州) 또는 임현(任縣)지역이란 뜻으로 '동방의 북주(北州:任州, 10간기준) 에 있었던 나라' 의 뜻이다. 임나는 산해경에서 조선의 중심이 '동방의 북해(北海)'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한 내용과 통한다. 우리가 흔히 가라말(加羅馬)을 흑색(黑色)의 말로 표기하듯, 한단고기에서 신라·발해(대진국)·흑수국(黑水國)·보로국(寶路國:하남성의 보주와 로주사람) 사람이 사이좋게 지냈다는 곳도 하남성의 낙주지역이며 낙수와 황하연변에 있었던 나라가 가라(加羅:駕洛) 가 된다. 그러면 낙동강·가락(駕洛)·임나(任那)·흑수국(黑水國)이 있었던 하동(河東:晋州)의 허창(許昌)에서 아유타국(서역)에서온 허황옥(許黃玉) 왕비를 만날 수 있다.

 

 4. 열도의 기나이(畿內) 나라현 신궁(神宮)에는 가림토 문자 및 훈민정음 글자가 새겨진 둥근 동판(銅版)이 있다. 일본사의 기나이 나라(奈良)는 백제의 공주(公州:웅주)·남부여(河南扶餘)·한성(漢城)과 같다. 또한 대가야국의 가락(駕洛)과도 같고, 백제의 가림성(加林城:加臨城)과 같으며 임존성(任存城)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나 임주(任州)와 존성(存城)의 중심은 영주(寧州)의 건평(建平)이 되며, 지금의 하남성 낙양(洛陽)에 대한 이칭으로 쓰였다.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아들인 준(俊)의 묘지명이 낙양의 망산(邙山)에서 아버지의 것과 같이 발견 되었는데, 준의 묘지명에 그의 증조부(상지의 조부)는 임본향(任本鄕)의 자사를 역임했고, 조부(상지의 부)는 임본향(任本鄕)의 호부상서를 역임했다고 쓰여져 있다. 임본(任本)이란 임주(任州:북국, 북주)의 중심인 본정(本町:中央)이란 뜻이며, 이곳은 지금의 하남성 낙양→정주→개봉이 연결되는 황하남북 지역을 말한다. 또한 준의 조부가 근무지로 했던 형산(荊山)·울포(蔚浦)·일역(日域:東州, 百濟)이란 지명도 하동이자 현재의 하남(河南)에 있었으며 현재도 있다. 특히 형산(荊山)은 하남성 정주(鄭州)로서 지금도 자형산(紫荊山)이 있다. 임본(任本)이란 곳이 바로 백제의 가림성과 임존성이고, 가락국(駕洛國)이 있었던 곳이며 일본사의 임나일본부 지역이다. 임나일본부 약칭이 임본(任本)이며 신라의 시림(始林)과 계림 지역으로서 동경(東京)이자 왕성(王城) 지역도된다. 또한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 지역이자 내토(奈吐)와 내성(奈城) 지역이며 나라(奈良)였다. 또한 경기 및 기내 였으며, 중화사의 광평(廣平)과 시평(始平)이었고, 동황성(東黃城:고구려)이 있었던 기주(冀州)였다. 임본(임나일본부)을 백제식으로 표기하면 풍달(風達:朴達)이 된다. 즉 백제의 흑치상지가 흑치부(흑수부) 출신으로서 풍달장군을 역임했던 연국(燕國)의 흑수부(북국)지역이다. 가림토의 토(土)를 중앙이 아닌 지(地)와 국(國)으로 해석해도 가림(加臨) 지역은 지금의 하남성의 황하지역에서 떠날 수 없고, 중심을 낙양→정주→개봉을 잇는 황하유역에서 찾으면 있다. 임나일본부 였기도한 일본사의 축자(筑紫)는 정주(鄭州)의 자형산(紫荊山) 지역에서 임점(任店)과 공현을 범주에 두고 있었다. 이곳이 곧 가림토 지역으로서 백제의 웅주(공주)였으며, 또한 한성부(漢城府)였다. 이곳에서 한글과 한자(漢字)가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5. 가림토 문자의 한글이 한자(漢字)의 뜻을 표현하기 위한 표음(表音)의 부호 및 글자로 생각할 때, 한자가 생겨난 곳에서 가림토 문자와 한글이 생겨났다고 보는 견해가 상식적이다. 한글을 한자로 쓰면 한글(韓契:汗契)이 되어 '대칸(大汗:황제)이 있는 한국에서 사용된 한자의 표음글자'로 정리가 되며, 이곳 역시 한국사 강역의 한성부(漢城府)가 있었던 현재의 하남성(하동, 산동) 지역에서 찾아야 있다. 한자의 원류이자 초기 문자였던,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쓰여진 귀갑(龜甲)과 골편(骨片)이 처음 발견되고, 대량발견된 곳도 은허(殷墟:은나라, 조선왕국)였다. 은허는 상허(商墟)로도 병칭되며 지금의 하남성 황하 남북지역을 말한다. 즉 가림토(加臨土) 지역이며 조선왕국사(한국사)의 모두가 이루워졌던 지역이다. 한자를 발음할 때 이러한 모양의 부호를 사용하자고 약속(제정)하면서 생겨난 것이 가림토 정음 38자이고, 한글의 28자다. 문자와 언어 사이에는 신속하고 정확한 의미 전달이라는 경제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럴 때 단음절의 표기가 실효성을 발휘한다. 모범적인 한자의 단음절 표기는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반절음 결합) '한글'을 상대할 표음자는 없다. 이럴 때 일본의 가나 또는 현중국의 한어병음자모 및 주음부호 표기는 2음절 이상으로 발음되어 한글의 방언(사투리) 성격을 헤어나지 못한다. 즉 조선의 왕국 지역인 한국(중국)에서 만들어진 라틴문자로서는 한자(漢字:韓字)가 있고, 라틴어 표음글자로는 한글(가림토문자)이 있었다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한국사의 중심이자 왕국이 있었던 한성부(漢城府) 지역이 중국이듯이 한자(漢字)가 말하고자하는 상징도 중주(中州)·황주(黃州)에 있었던 조선의 한국(韓國)이자 중국(中國)에서 만들어지고 쓰여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일역(日域:東國)의 본정(本町:중앙, 중심)인 임나(任那:북해왕국) 일본부지역에서 만들어진 표의(表意) 문자가 한자였다로 생각해도 된다. 또 역사를 통해 중국·한국·일본이 공동으로 한자를 만들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갑골문자가 많이 발굴되고 처음 발견된 현재의 하남성 지역의 황하 연변이 한자가 만들어진 곳이자 가림토 문자가 만들어진 가림토(加臨土)지역이며, 한국이자 칸국(汗國)에서만 쓰여졌던 한글(韓契)이 만들어 졌던 곳이다. 물론 조선의 왕국 지역이었던 한성부 지역이다. 중심은 낙양이 된다.

 

 한글(韓契)은 한국 및 칸국(汗國:조선의 왕국)에서만 쓰여졌던 한자의 표음문자(表音文字)이고, 가림토 문자는 백제의 가림성과 임존성이 있었고, 가주(加州)·임주(臨州)가 있었으며, 가락국(駕洛:낙양, 정주)이 있었던 공주(公州)이자 웅주(熊州)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글자다. 신라의 안동이기도 하고 고구려의 내토와 내성이기도 했던 이곳은 한자(漢字)가 만들어진 한주(漢州) 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글·가림토글자·한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즉 한자가 만들어진 하남성 지역에서 가림토 글자와 한글이 만났던 것이다.

 

 한단고기를 저술한 계연수의 강화(江華)이자 강도(江都)가 있었던 곳도 하동남로(하남성)인 강동(江東)에 있었고, 홍주(紅州)와 행주(杏州)가 합쳐진 계연수의 고향인 홍행촌(紅杏村)도 하남성에서 노산(魯山)과 우현(禹縣)으로 남아있다. 계연수는 안성마춤으로 지금의 하남성이자 한글→가림토글자→한자가 만들어진 묘향산(하남성 낙양의 향산)지역에서 한단고기를 저술했다. 바로 이곳에서 38자의 가림토 정음(正音) 글자가 만들어지고 쓰여졌다고 하였고, 대진국(진단)지역이자 발해가 있었던 부양군(浮陽郡) 지역으로서 계연수의 출생지이자 고향(故鄕)이라고 하였다. 한글의 초기 형태였던 가림토 글자의 탄생지를 한반도로 한정하여 한자·한글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1.한문과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정보화시대 의 필수품, 한글의 우수성
21세기의 벽 두, 우리나라는 정보화시대의 선진국 지위를 자리매김 했습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정보화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다름 아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글의 우수성 때문이지요. 컴퓨터 자판을 보시면 왼손은 자음 오른손은 모음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타이핑이 가능합니다. 세상에 이런 문자는 없습니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우리 한글을 가르치면 불과 40분만에 한글로 표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학창시절 영어 알파벳 다 배우는데 며칠 걸렸죠? 또 휴대폰을 보면 천지인 삼재를 형상한 ·ㅡ ㅣ 세 개면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지요? 세상에 이런 문자가 있나요? 없습니다. 한민족 고유종교인 증산도의 경전인 『도전』에는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말과 글을 세계인들이 배워간다고 예고되어 있습니다. 일본을 봐요. 히라까나 가타카나를 쓰는데 이걸 외워서 타이핑하려면 골치 좀 썩을 겁니다. 중국을 봐요. 한자를 컴퓨터로 입력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여러분 다 아실 겁니다.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의 우주원리가 담긴 한글, 정말 대단한 문자입니다. 알파벳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단연 세계 최고의 문자입니다.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신하들의 창작품일까?
2년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한글과 관련된 특집방송을 한 적이 있지요. 한글은 집현전 학사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도리어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들이 알면 모화사대(慕華事大)에 어긋난다고 반대할까봐 아예 비밀리에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창제하시는데 뭘 갖고 작업을 하셨을까요? 조선시대 어떤 학자는 몽골 글자(蒙字)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원나라 때 라마승 파스파가 만든 파스파문자란 뜻이죠. 그런데 그것을 한글과 비교해보면 한두 글자 빼고는 닮은데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또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한 거 아닐까? 라고 했는데 역시 한두 글자 빼고는 전혀 안 닮았습니다.
정인지가 쓴 서문에는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 같군요. ^^;


@한글은 고조선문자

 

 

옛 전자(篆字)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다른 나라 문자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문자를 개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는 고조선 3세 단군이신 가륵 임금 때입니다. 단군께서 신하인 삼랑(관직명) 을보륵에게 명하셔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드셨다고 합니다.(『환단고기』)

이게 한글의 첫 작품입니다. 이것은 고조선 후기까지 사용되다가 사용빈도가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글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건너갔습니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를 『일본서기』에서는 신대(神代)라고 부르는데요. 이 무렵에 일본으로 유입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부르지요.
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진 명문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는 『고사기(古事記)』는 백제인 태안만려(太安麻呂)가 완성했는데요. 원래는 위의 사진처럼 신대문자로 표기되었습니다.

 
@인도로 간 한글

가림 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에 인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송호수 교수님이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했지요.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습니다. 구자라트에는 주로 드라비다인(후술)들이 거주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하다고 하지요.

가림토 문자가 건너간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환단고기』「단군 세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금 때 신독(身毒: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에는 게르만계 백인인 아리안족이 아닌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아닌 희안한 인종이라고 하지요. 최근의 연구결과 한국인과 드라비다인은 공통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하는군요. 언어 비슷해서 무려 6백 개가 넘는 단어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등....


여기서 쌀과 메디, 벼 등을 통해 농업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 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따라서 쌀과 메디, 벼는 우리말이 인도로 건너간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
조랑말 같은 조그만한 말들이 보인다는 군요. 고조선의 과하마가 건너간 모양입니다.
이처럼 고조선시대에 인도와 우리나라는 엄청난 교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조선시대는 팍스 코리아시대였어요.

 

우리나라는 4천 년 전부터 국제화, 세계화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
가림토문 은 공용문자로 사용되었겠지요.
인도 구자라트문자는 훗날 산스크리트 문자로 변형되었고 이것은 다시 티벳문자가 된 뒤 원나라 승려 파스파에 의해 몽골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몇몇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범자(梵字)나 몽자(蒙字)라 오해한 것이지요. 충청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가야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왕옥도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하지요.

@한문의 기원은 배달국의 녹도문
다음은 한문에 대 해 알아보지요.
일반적으로 표의문자인 한문의 기원을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골문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이전시대의 중국에는 창힐문자가 있었습니다.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창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과 동시대(B.C.28세기∼B.C.27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창일의 고향 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 그림을 보세요. 중간에 있는 비석(倉聖鳥跡書碑)문이 창힐문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있습니다. 그 왼쪽에 보이는 신지문자 이른 바 녹도문입니다.

『환단고기』「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지요.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습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입니다. 『환단고기』에 인용된『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형태가 되었지요.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입니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습니다. 그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죠.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것
입니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습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 왜냐면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머릿수 많은 중국인들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지요.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합니다. 당연히 갑골문자를 들고 왔다고 봐야겠죠. 신지문자보다 더 진보된 형태라고 할 수 있겠구요. 그가 정착한 지역은 현재 유물, 유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의 발해 북안, 요하 서쪽입니다. 은나라 계통 유물인 네모진 솥이 출토되었는데요. 거기에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의 국경선이 그 지역(요서)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지요. 하나는 가림토문 하나는 신지문자입니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신지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위의 그림 오른쪽 위)

거기에다 중국에서 사용된 갑골문자(한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무려 3가지의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습니다.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된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한글 자모 24자가 세종 때 창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훈민정음의 '正音'에서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은 문자를 반포한 것이라기 보다는 음을 바로 잡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글 자모의 기원이 되는 가림토 문자는 이미 단군 3세 부루 때에 처음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桓檀古記'나 '대쥬신제국사'등 에서 언급한 된 있다. 실제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7번이나 만주에 왕래하게 한 역사적 사실은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은 바로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던 우리 민족이란 것이다. 중국이란 나라는 이들 우리민족이 지배했을 때 강성한 제국을 유지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곤 하였다 한다.이를 근거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잃은 중국이 분열될 것이라는 예견 또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가림토문자가 특이한 것은 전세계 어느 나라 문자와도 다른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문자가 대단히 반듯하다는 것이다. 갑골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원시 한자의 모양도 구불구불 하였던 것이 단군 3세때 처음 만들어진 우리민족(쥬신족)의 가림토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쥬신족의 일부가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 중에서 가림토 문자 'ㄷ' 'ㅁ' 'ㅐ'등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 뿐 아니라 사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대륙의 한 고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보아도 뜻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가림토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여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더욱 실제적인 고증을 거치기를 기대한다.

 

 

[이덕일 사랑] 漢字와 東夷族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한자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는 에피소드에 관해 적었다. 현종이 조총의 길이를 묻자 유혁연이 두 손을 들어 “이만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기주관(記注官)이 선뜻 적지 못하자 유혁연이 돌아보며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上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어 ‘자(尺) 남짓하고 이만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라고 쓰지 못하느냐?”고 꾸짖었다. 무장(武將) 유혁연이 문관(文官)보다 재치가 있었던 것이다. 또 숙종이 인현왕후 폐출 반대 상소를 올린 박태보(朴太輔)를 국문하면서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고 하자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여 돌로 때려라[必字形縛之無隅石擊之]’라고 써서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는 고사도 들었다. 신채호는 “남의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國文)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漢文)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다”고 덧붙였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甲骨文)은 은(殷)나라 문자라는 뜻에서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부른다. ‘맹자(孟子)’는 ‘이루(離婁) 하’편에서 ‘은나라 순(舜)임금은 동이 사람[東夷之人]’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이를 읽고서야 성인(聖人)이라는 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초토화했던 이유가 이해된다. 은(殷)과 주(周)의 교체는 치열한 민족 전쟁이었던 것이다. 한자가 중국 문자로 인식된 이후에도 우리는 ‘돌(乭)’자처럼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했던 국자(國字)를 여럿 만들었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나 최남선의 ‘신자전(新字典)’에 여러 국자(國字)가 나온다. 벽초 홍명희는 ‘효종실록’의 표기대로 임꺽정을 ‘林巨正’이라고 썼지만 임꺽정이 생존했던 ‘명종실록’에는 ‘林巨叱正’이었다. ‘巨叱’의 발음이 ‘꺽’이었으리라. 국자(國字)에는 이밖에도 걱( )·엿( ㄱ)·쌀( )자, 심지어 똥( )자도 있다. 한자 학습 열풍이라는데 한자는 그 원형을 동이족이 만들었을 뿐 아니라 우리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2006.08.21

 

 

 

풀뿌리 [이덕일 사랑] 漢字와 東夷族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한자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는 에피소드에 관해 적었다. 현종이 조총의 길이를 묻자 유혁연이 두 손을 들어 “이만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기주관(記注官)이 선뜻 적지 못하자 유혁연이 돌아보며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上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어 ‘자(尺) 남짓하고 이만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라고 쓰지 못하느냐?”고 꾸짖었다. 무장(武將) 유혁연이 문관(文官)보다 재치가 있었던 것이다. 또 숙종이 인현왕후 폐출 반대 상소를 올린 박태보(朴太輔)를 국문하면서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고 하자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여 돌로 때려라[必字形縛之無隅石擊之]’라고 써서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는 고사도 들었다. 신채호는 “남의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國文)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漢文)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다”고 덧붙였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甲骨文)은 은(殷)나라 문자라는 뜻에서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부른다. ‘맹자(孟子)’는 ‘이루(離婁) 하’편에서 ‘은나라 순(舜)임금은 동이 사람[東夷之人]’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이를 읽고서야 성인(聖人)이라는 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초토화했던 이유가 이해된다. 은(殷)과 주(周)의 교체는 치열한 민족 전쟁이었던 것이다. 한자가 중국 문자로 인식된 이후에도 우리는 ‘돌(乭)’자처럼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했던 국자(國字)를 여럿 만들었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나 최남선의 ‘신자전(新字典)’에 여러 국자(國字)가 나온다. 벽초 홍명희는 ‘효종실록’의 표기대로 임꺽정을 ‘林巨正’이라고 썼지만 임꺽정이 생존했던 ‘명종실록’에는 ‘林巨叱正’이었다. ‘巨叱’의 발음이 ‘꺽’이었으리라. 국자(國字)에는 이밖에도 걱( )·엿( ㄱ)·쌀( )자, 심지어 똥( )자도 있다. 한자 학습 열풍이라는데 한자는 그 원형을 동이족이 만들었을 뿐 아니라 우리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2006.08.21 18:48 09' 2006/08/24 10:2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