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39 : 거란족 미스테리]
거란족 미스터리 풀린다(중앙/04/8/6)
1000년전 멸망 뒤 갑자기 역사서 '실종' / 중국 학계, DNA로 후손 찾아 / 몽골과 손잡고 전세계 파병…뿔뿔이 흩어져 / 윈난성 등서 '다얼족'으로 혈통 이어진 듯
매처럼 강인했던 민족'.
1000여년 전 중국 동북 지방에서 일어나 중원을 강하게 압박했던 요(遼)나라 거란(契丹)족에 대한 평가다. 거란은 993년부터 세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던 강국이었다. 1018년 강감찬 장군이 적장 소배압을 상대로 귀주대첩을 거둔 것으로, 거란은 고려에 대한 야심을 접어야 했다. 한데 이렇게 강성했던 거란은 몽골이 세운 원(元)대 이후 돌연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한 민족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을까.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거란족 실종에 관한 의문이 최근 들어 조금씩 풀리고 있다. 거란족에 대한 문헌 연구, 유전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NA) 분석기법을 동원한 성과다. 중국 학계는 최근 "거란의 핏줄은 중국 동북 지방의 소수 민족인 다얼(達爾)족에 의해 상당부분 계승되고 있다"고 밝혔다. 동북지방의 싱안링(興安領)산맥과 푸르고 맑은 넌(嫩)강, 후룬베이얼(呼倫貝爾)의 드넓은 초원이 한데 모인 곳에 살고 있는 12만명의 다얼족은 예전부터 '거란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가장 큰 민족'으로 지목돼 왔다. 거란이 웅거했던 네이멍구(內蒙古) 초원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중국 학계는 이번에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냈다. 요나라 당시의 무덤에서 나온 거란족 피장자들의 뼈에서 유전자를 채취해 다얼족 구성원들의 유전자와 비교한 결과다. 다얼족에 구전으로 전해져 왔던 시조 설화도 그들이 거란의 후예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설화는 "거란의 한 군대가 이 땅에 와서 지역 방어를 위한 성을 쌓은 뒤 선조가 됐다"고 읊고 있다. 과거 청(淸)대 학자들도 이들의 시조 설화와 다얼족의 습속.언어.역사를 종합 연구한 끝에 "다얼족은 거란족의 후예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중국 학계는 서남쪽 윈난(雲南)성 내 일부 지역에도 다얼족이 10만명가량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윈난성의 한 산골 마을 사람들은 거란의 시조 '아쑤루'의 한자식 이름인 '야율(耶律)'이란 글자를 액자에 넣어 사당에 걸어 놓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중국 학자들은 네이멍구에서 나온 요나라 시대 무덤 피장자와 이들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윈난 다얼족 사람들 역시 거란족 부계(父系) 혈통을 그대로 전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거란족의 후예들은 왜 이처럼 멀리 떨어져 살아남은 걸까. 이에 대해 중국 학계는 학술 성과와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토대로 "거란족이 몽골 군대의 전위부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정은 이렇다. 요나라 멸망 뒤 자신을 공격했던 금(金:여진에 의해 세워진 왕조)을 증오하게 된 거란족은 몽골과 손을 잡았다. 곧이어 칭기즈칸에 의해 몽골이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용맹한 거란족은 원 왕조가 편성한 정복부대의 선봉으로 배치돼 세계 곳곳에 파견됐다. 그 결과 거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결국 중국 내 중요한 민족세력으로 부상할 기회를 잃었다. 중국 학계는 거란족의 일부가 요나라 멸망 뒤 현재 이란의 코르만 지역으로 이동해 이슬람 세력으로 귀화했다는 설도 소개했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kjyoo@joongang.co.kr> 만주족 역사 (원문출처 : 푸른바다에부는 바람한올의 사연)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지역에 살았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1990년 현재 만주족 인구는 982만여명이다. 주요 분포지역은 동북 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요녕성이 4,952,859명으로 가장 많다. 그 나머지는 하북 · 내몽고 · 영하 · 감숙 · 복건 · 산동 · 신강 등의 성구(省區) 및 북경 · 천진 · 상해 · 성도 · 광주 · 항주 · 서안 등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만주족은 원래부터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어는 알타이어계 만주퉁구스어족 만주어지(滿語支)에 속한다. 현재 대다수의 만주족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그들의 공식 언어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사료에 의하면 만주족의 조상은 2천여년 전의 숙신(肅愼) 및 이후의 읍루(相婁) 물길(勿吉) · 말갈(靺鞨)과 여진 등의 고대 민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북조 · 수당 시기에(4~7세기) 숙신 · 읍루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민족 명칭을 물길 · 말갈이라 했다. 물길은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도 신속히 증가하여 수십개의 부락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속말(粟末) · 흑수(黑水) · 백산(白山) 등 7개의 큰 부락연맹이 있었다. 그 후 사서에서는 물길을 다시 말갈이라 불렀다. 7세기 말에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속말 · 말갈을 중심으로 송화강(松花江) 상류,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 '진국(震國)'을 건국한 후 713년에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즉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당왕조는 흑수(黑水: 흑룡강) 말갈 지역에 흑수군(黑水軍)을 조직하고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여, 흑수 말갈 각 부의 수령들에게 도독(都督) ·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 집권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728년에 다시 그 도독들에게 황족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 겸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에 제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된 흑수부는 흑룡강 유역에 세워진 당왕조의 직속 지방기구가 되었다.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 흥성을 거듭하던 흑수 말갈부도 그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발해를 뒤이어 번성을 누린 흑수 말갈을 거란인들이 '여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 이 명칭은 점점 말갈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세기 초엽에 유명한 아골타(阿骨打)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요나라를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들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요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과 대치하였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원(元)을 세우자 여진인들은 원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왕조는 흑룡강성 의란(依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하류 및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풍속으로 다스리는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5만호부(五萬戶府)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뒤에는 흑룡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를 설치하고 계속하여 두 개의 천호부(千戶府)와 한 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하였다. 15세기 초에는 명왕조가 동북지구를 관할하면서 여진의 각 부도 모두 명왕조에 귀속되었다. 명왕조는 여진인의 분포 지역 내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여진 각 부의 수령들을 각각 도독 · 도지휘사(都指揮使) · 지휘첨사(指揮僉使) · 천호(千戶) · 백호(百戶) · 진무(鎭撫) 등의 관직에 임명하고 칙서(勅書) · 인신(印信) · 의관 · 금전을 하사하였으며 조공과 마시장의 시간과 대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노아간위(奴兒干衛)의 여진 수령 홀자동노(忽刺冬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흑룡강과 항곤하(恒滾河)가 합류하는 특림(特林) 지방에 중앙 왕조 직속의 지방행정과 군사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 한족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명대에 여진인들은 점점 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이동의 과정 중에 그들은 건주(建州) · 해서(海西) · 동해의 3부로 나누었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해서여진은 이주한 후에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살면서 북으로 송화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동해여진(명나라에서는 그들을 야인여진 野人女眞이라고도 불렀음)은 건주 · 해서 이동과 이북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정착한 후에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동해여진은 그러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완만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제 문화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그들 부락 사이의 빈번한 전쟁으로 서로를 침탈하고 살육하는 참혹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였다. 건주여진 좌위(左衛)의 수령 누르부응하여 군대를 일하치(努爾哈赤)는 역사적 조류에 으켜 여진의 각 부를 점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통일 과정 중에 누르하치는 군사적 · 정치적 · 생산적 기능을 갖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은 청대의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되었다. 1616년에 누르하치는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고 금나라(즉 후금 後金)를 세웠다. 여진 각 부의 완전한 통일을 따라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바탕으로 일부의 동해여진과 다른 민족을 흡수한 사람들은 오랜 공동생활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635년에 황태극(皇太極)은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버리고 만주(滿洲)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만족'(滿族: 만주족)이라 칭하게 되었다. 1635년 황태극은 여진이라는 이름을 '만주'로 고쳤는데, 이것은 만주족의 민족공동체가 정식으로 형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듬해에 황태극은 황제라 칭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만주족 정권인 대청(大淸)을 세웠다. 1644년 청나라는 군대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와 단시간내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청왕조 통치자들은 명나라의 패인을 교훈으로 받아들여 일련의 행정개혁 조치를 취하고 계층간 · 민족간의 갈등을 완화함으로써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1667년 강희제(康熙帝)는 권지(圈地: 공신들이 하사받은 토지)를 폐지하였으며, 부역을 정돈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켜 농업을 장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는 다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의 인구 · 경지면적 · 농업과 수공업은 모두 현저하게 증가되거나 향상되어 자본주의의 기틀이 더욱 많이 다져졌다. 강희제의 집권 중반기에는 대내외적으로 반정부 세력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다. 이에 만주족도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국토수호 전쟁에 참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강희제는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삼번(三藩)'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만주족 중심의 팔기군(八旗軍)을 친히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정러시아와 연합하여 내외몽고를 침공한 갈단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옹정제(雍正帝) · 건륭제(乾隆帝)에 이르기까지 70여년간의 분쟁을 거쳐 즁갈지역을 안정시켰다. 일찍이 17세기 중엽에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흑룡강 유역을 끊임없이 침입하였다. 1685년 강희제는 만주족 도통(都統) 팽춘(彭春)을 파견하여 팔기군과 수군을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였으며, 그 후 1689년 중 · 러 쌍방은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네르친스크(Nerchinsk)조약을 체결하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8세기에 대영제국은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한 후 네팔을 앞세워 티벳 중부지방을 침공하였다. 건륭제는 만주족 대학사 복강안(福康安)을 파견하여 그들을 진압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에 복강안은 티벳지역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네팔군을 격파하고 그곳을 안정시켰다. 19세기 초에 영국은 다시 장격이(張格爾)를 앞세워 여러 차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을 침공하였다. 이에 도광제(道光帝)는 만주족 대학사 장령(張齡)에게 신강 경내의 만주족 · 한족 군대와 동북 팔기군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진압토록 하였다. 이에 장령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장격이를 생포하여 영국의 야욕을 분쇄하였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서구열강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청왕조를 마음대로 유린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이에 중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만주족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2차아편전쟁 중에 제정러시아는 청왕조의 통치력이 북방에까지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100㎢에 달하는 동북변경 지역을 강제점령하였다. 이에 분개한 만주족 주민들은 한족 주민들과 합세하여 제정러시아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용감하게 맞섰다.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일제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였다. 일제가 요동지역을 점령하여 그 세력을 신속히 확장시켜 나가자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주족 · 한족 · 조선족 백성들은 함께 들고 일어나 민간자위단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요양(遼陽) 방어전쟁에서는 만주족과 한족 백성들의 합동작전으로 한달 동안에 일본군의 침공을 네 번이나 물리치고 일제의 봉천성(奉天城) 진입 계획을 무산시켰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 정부였던 청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종말을 고하였다. 1931년 '9 · 18사변'으로 동북지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는데, 이때 청왕조의 마지막황제 부의(溥儀)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에 올라 청왕조와 만주족의 영화를 계승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청나라 역사 제대로 평가받자” ‘한족중심 중국史’ 바로잡기 운동도 입력 : 2007.05.18 23:30 / 수정 : 2007.05.18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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