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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39 : 거란족 미스테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4:12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39 : 거란족 미스테리]




란족 미스터리 풀린다(중앙/04/8/6)

1000년전 멸망 뒤 갑자기 역사서 '실종' / 중국 학계, DNA로 후손 찾아 / 몽골과 손잡고 전세계 파병…뿔뿔이 흩어져 / 윈난성 등서 '다얼족'으로 혈통 이어진 듯

 매처럼 강인했던 민족'.

1000여년 전 중국 동북 지방에서 일어나 중원을 강하게 압박했던 요(遼)나라 거란(契丹)족에 대한 평가다. 거란은 993년부터 세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던 강국이었다. 1018년 강감찬 장군이 적장 소배압을 상대로 귀주대첩을 거둔 것으로, 거란은 고려에 대한 야심을 접어야 했다.

한데 이렇게 강성했던 거란은 몽골이 세운 원(元)대 이후 돌연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한 민족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을까.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거란족 실종에 관한 의문이 최근 들어 조금씩 풀리고 있다. 거란족에 대한 문헌 연구, 유전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NA) 분석기법을 동원한 성과다.

중국 학계는 최근 "거란의 핏줄은 중국 동북 지방의 소수 민족인 다얼(達爾)족에 의해 상당부분 계승되고 있다"고 밝혔다. 동북지방의 싱안링(興安領)산맥과 푸르고 맑은 넌(嫩)강, 후룬베이얼(呼倫貝爾)의 드넓은 초원이 한데 모인 곳에 살고 있는 12만명의 다얼족은 예전부터 '거란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가장 큰 민족'으로 지목돼 왔다. 거란이 웅거했던 네이멍구(內蒙古) 초원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중국 학계는 이번에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냈다. 요나라 당시의 무덤에서 나온 거란족 피장자들의 뼈에서 유전자를 채취해 다얼족 구성원들의 유전자와 비교한 결과다.

다얼족에 구전으로 전해져 왔던 시조 설화도 그들이 거란의 후예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설화는 "거란의 한 군대가 이 땅에 와서 지역 방어를 위한 성을 쌓은 뒤 선조가 됐다"고 읊고 있다. 과거 청(淸)대 학자들도 이들의 시조 설화와 다얼족의 습속.언어.역사를 종합 연구한 끝에 "다얼족은 거란족의 후예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중국 학계는 서남쪽 윈난(雲南)성 내 일부 지역에도 다얼족이 10만명가량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윈난성의 한 산골 마을 사람들은 거란의 시조 '아쑤루'의 한자식 이름인 '야율(耶律)'이란 글자를 액자에 넣어 사당에 걸어 놓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중국 학자들은 네이멍구에서 나온 요나라 시대 무덤 피장자와 이들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윈난 다얼족 사람들 역시 거란족 부계(父系) 혈통을 그대로 전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거란족의 후예들은 왜 이처럼 멀리 떨어져 살아남은 걸까. 이에 대해 중국 학계는 학술 성과와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토대로 "거란족이 몽골 군대의 전위부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정은 이렇다. 요나라 멸망 뒤 자신을 공격했던 금(金:여진에 의해 세워진 왕조)을 증오하게 된 거란족은 몽골과 손을 잡았다. 곧이어 칭기즈칸에 의해 몽골이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용맹한 거란족은 원 왕조가 편성한 정복부대의 선봉으로 배치돼 세계 곳곳에 파견됐다. 그 결과 거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결국 중국 내 중요한 민족세력으로 부상할 기회를 잃었다. 중국 학계는 거란족의 일부가 요나라 멸망 뒤 현재 이란의 코르만 지역으로 이동해 이슬람 세력으로 귀화했다는 설도 소개했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kjyoo@joongang.co.kr>
 
 
 

"뭐? 우리 박물관에 한국인이 구경왔다고?"

[몽골기행 20] 몽골의 거란 성(城), 하르 보흐 발가스(Khar Bukhiin Balgas) 기행


 

만주족 역사 (원문출처 : 푸른바다에부는 바람한올의 사연)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지역에 살았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1990년 현재 만주족 인구는 982만여명이다. 주요 분포지역은 동북 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요녕성이 4,952,859명으로 가장 많다. 그 나머지는 하북 · 내몽고 · 영하 · 감숙 · 복건 · 산동 · 신강 등의 성구(省區) 및 북경 · 천진 · 상해 · 성도 · 광주 · 항주 · 서안 등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만주족은 원래부터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어는 알타이어계 만주퉁구스어족 만주어지(滿語支)에 속한다. 현재 대다수의 만주족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그들의 공식 언어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사료에 의하면 만주족의 조상은 2천여년 전의 숙신(肅愼) 및 이후의 읍루(相婁)  물길(勿吉) · 말갈(靺鞨)과 여진 등의 고대 민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북조 · 수당 시기에(4~7세기) 숙신 · 읍루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민족 명칭을  물길 · 말갈이라 했다. 물길은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도 신속히 증가하여 수십개의 부락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속말(粟末) · 흑수(黑水) · 백산(白山) 등 7개의 큰 부락연맹이 있었다. 그 후 사서에서는 물길을 다시 말갈이라 불렀다. 7세기 말에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속말 · 말갈을 중심으로 송화강(松花江) 상류,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 '진국(震國)'을 건국한 후 713년에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즉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당왕조는 흑수(黑水: 흑룡강) 말갈 지역에 흑수군(黑水軍)을 조직하고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여, 흑수 말갈 각 부의 수령들에게 도독(都督) ·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 집권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728년에 다시 그 도독들에게 황족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 겸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에 제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된 흑수부는 흑룡강 유역에 세워진 당왕조의 직속 지방기구가 되었다.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 흥성을 거듭하던 흑수 말갈부도 그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발해를 뒤이어 번성을 누린 흑수 말갈을 거란인들이 '여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 이 명칭은 점점 말갈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세기 초엽에 유명한 아골타(阿骨打)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요나라를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들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요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과 대치하였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원(元)을 세우자 여진인들은 원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왕조는 흑룡강성 의란(依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하류 및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풍속으로 다스리는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5만호부(五萬戶府)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뒤에는 흑룡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를 설치하고 계속하여 두 개의 천호부(千戶府)와 한 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하였다.


15세기 초에는 명왕조가 동북지구를 관할하면서 여진의 각 부도 모두 명왕조에 귀속되었다. 명왕조는 여진인의 분포 지역 내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여진 각 부의 수령들을 각각 도독 · 도지휘사(都指揮使) · 지휘첨사(指揮僉使) · 천호(千戶) · 백호(百戶) · 진무(鎭撫) 등의 관직에 임명하고 칙서(勅書) · 인신(印信) · 의관 · 금전을 하사하였으며 조공과 마시장의 시간과 대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노아간위(奴兒干衛)의 여진 수령 홀자동노(忽刺冬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흑룡강과 항곤하(恒滾河)가 합류하는 특림(特林) 지방에 중앙 왕조 직속의 지방행정과 군사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 한족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명대에 여진인들은 점점 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이동의 과정 중에 그들은 건주(建州) · 해서(海西) · 동해의 3부로 나누었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해서여진은 이주한 후에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살면서 북으로 송화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동해여진(명나라에서는 그들을 야인여진 野人女眞이라고도 불렀음)은 건주 · 해서 이동과 이북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정착한 후에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동해여진은 그러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완만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제 문화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그들 부락 사이의 빈번한 전쟁으로 서로를 침탈하고 살육하는 참혹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였다. 건주여진 좌위(左衛)의 수령 누르부응하여 군대를 일하치(努爾哈赤)는 역사적 조류에 으켜 여진의 각 부를 점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통일 과정 중에 누르하치는 군사적 · 정치적  · 생산적 기능을 갖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은 청대의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되었다.


1616년에 누르하치는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고 금나라(즉 후금 後金)를 세웠다. 여진 각 부의 완전한 통일을 따라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바탕으로 일부의 동해여진과 다른 민족을 흡수한 사람들은 오랜 공동생활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635년에 황태극(皇太極)은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버리고 만주(滿洲)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만족'(滿族: 만주족)이라 칭하게 되었다.


1635년 황태극은 여진이라는 이름을 '만주'로 고쳤는데, 이것은 만주족의 민족공동체가 정식으로 형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듬해에 황태극은 황제라 칭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만주족 정권인 대청(大淸)을 세웠다.


1644년 청나라는 군대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와 단시간내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청왕조 통치자들은 명나라의 패인을 교훈으로 받아들여 일련의 행정개혁 조치를 취하고 계층간 · 민족간의 갈등을 완화함으로써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1667년 강희제(康熙帝)는 권지(圈地: 공신들이 하사받은 토지)를 폐지하였으며, 부역을 정돈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켜 농업을 장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는 다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의 인구 · 경지면적 · 농업과 수공업은 모두 현저하게 증가되거나 향상되어 자본주의의 기틀이 더욱 많이 다져졌다. 강희제의 집권 중반기에는 대내외적으로 반정부 세력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다. 이에 만주족도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국토수호 전쟁에 참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강희제는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삼번(三藩)'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만주족 중심의 팔기군(八旗軍)을 친히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정러시아와 연합하여 내외몽고를 침공한 갈단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옹정제(雍正帝) · 건륭제(乾隆帝)에 이르기까지 70여년간의 분쟁을 거쳐 즁갈지역을 안정시켰다. 일찍이 17세기 중엽에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흑룡강 유역을 끊임없이 침입하였다. 1685년 강희제는 만주족 도통(都統) 팽춘(彭春)을 파견하여 팔기군과 수군을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였으며, 그 후 1689년 중 · 러 쌍방은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네르친스크(Nerchinsk)조약을 체결하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8세기에 대영제국은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한 후 네팔을 앞세워 티벳 중부지방을 침공하였다. 건륭제는 만주족 대학사 복강안(福康安)을 파견하여 그들을 진압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에 복강안은 티벳지역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네팔군을 격파하고 그곳을 안정시켰다. 19세기 초에 영국은 다시 장격이(張格爾)를 앞세워 여러 차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을 침공하였다. 이에 도광제(道光帝)는 만주족 대학사 장령(張齡)에게 신강 경내의 만주족 · 한족 군대와 동북 팔기군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진압토록 하였다. 이에 장령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장격이를 생포하여 영국의 야욕을 분쇄하였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서구열강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청왕조를 마음대로 유린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이에 중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만주족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2차아편전쟁 중에 제정러시아는 청왕조의 통치력이 북방에까지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100㎢에 달하는 동북변경 지역을 강제점령하였다. 이에 분개한 만주족 주민들은 한족 주민들과 합세하여 제정러시아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용감하게 맞섰다.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일제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였다. 일제가 요동지역을 점령하여 그 세력을 신속히 확장시켜 나가자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주족 · 한족 · 조선족 백성들은 함께 들고 일어나 민간자위단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요양(遼陽) 방어전쟁에서는 만주족과 한족 백성들의 합동작전으로 한달 동안에 일본군의 침공을 네 번이나 물리치고 일제의 봉천성(奉天城) 진입 계획을 무산시켰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 정부였던 청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종말을 고하였다. 1931년 '9 · 18사변'으로 동북지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는데, 이때 청왕조의 마지막황제 부의(溥儀)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에 올라 청왕조와 만주족의 영화를 계승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Why?] 300년간 중국을 지배한 만주족 깨어난다
  • 젊은층, 사멸위기 만주語 학습열풍 인터넷 ‘만주족 네트워크’도 확산

    “청나라 역사 제대로 평가받자” ‘한족중심 중국史’ 바로잡기 운동도
  •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입력 : 2007.05.18 23:30 / 수정 : 2007.05.18 23:31
    • 지난 3월18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한족(漢族)에 동화된 만주족들이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만주족 언어가 사멸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黑龍江)성 산자쯔(三家子)의 고립된 마을에 살고 있는 80대 노인 18명만이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뿐, 만주어의 사멸은 시간문제”라며, “그렇게 되면 청나라 문헌 200만 건도 해독이 불가능해 영원히 수수께끼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강력한 전제군주국가인 청(1616~1912)을 건설하고 3백년 가까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만주족.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인구는 1000만 명으로 장족(壯族·약1600만) 다음으로 많지만, 만주어 전용 신문이나 방송을 갖지 못했고, 후세들을 위한 정규 학교도 없다.

      인구 200만의 조선족이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초·중·고와 대학을 세우고, 여러 개의 언론기관을 운영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불과 50여 년 사이에 만주족은 뉴욕타임스의 보도처럼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일까.

      그러나 물밑으로 만주족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만주족 젊은이들이 인터넷에 자신들만의 사이버 커뮤니티를 열고, 만주어 강습과 역사 문화교육에 나서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지난 3월말 베이징 한복판에 만주어 무료교실도 열었다. 단순히 언어 교육에 머물지 않고, 한족 위주로 서술된 중국의 역사를 만주족의 시각에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편다.
      • ▲만주어 무료강좌… 중국 베이징(北京) 구로우(鼓樓) 부근의 한 전문학교에서 3월말부터 주말마다 열리고 있는 만주어(滿洲語) 무료 강좌. 사라져가는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는 만주족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뚱쩐나란(東珍納蘭)문화전파중심 제공
    • 지난 3월31일 오전 9시, 베이징 시청취(西城區)의 한 전문학교 교실에 20~40대 남녀 20여명이 모였다. 교실 칠판에는 꽈배기 모양의 꼬불꼬불한 글씨가 쓰여있고, 학생들은 “나, 나, 나”하며 선생님의 발음을 큰 소리로 따라 했다.

      이 강좌는 NGO단체인 ‘뚱쩐나란(東珍納蘭) 문화전파중심’과 인터넷 사이트 ‘만주의 하늘(滿洲的天空)이 공동으로 개설한 무료 ‘만문(滿文·만주어)기초교학반’이다. 작년 3월에 이어 두번째다.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언어문학학원 내 강좌를 제외하고, 민간이 만주어 강좌를 연 것은 드문 일이다.

      강좌에 참석한 왕모(25)씨는 “어릴 때부터 나 자신이 만주족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변에 만주어를 말하는 사람이 없어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손으로 만주어를 써보면서 나 자신의 뿌리를 발견한 느낌이다”고 말했다.

      강좌를 듣는 사람은 대학생 중에는 만주어를 배워 만주어 사료 번역작업에 참여하려는 의욕도 보이고 있다. 강좌를 개설한 ‘뚱쩐~중심’의 리단(李丹·29) 대표도 만주족 청년으로, 매혈(賣血)로 에이즈에 감염된 농민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NGO활동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만주어를 몰라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만주족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인 ‘만주의 하늘’을 알게 된 뒤 운영자인 왕숴(王碩·24)씨와 힘을 합쳐 이 강좌를 열었다”고 말했다.

      다니던 설계회사에 사표를 내고 만주어 강의를 맡고 있는 왕숴씨는 헤이룽장 하얼빈 출신으로 대학 시절 만주어 연구자에게서 말을 배웠다. 그는 만주어를 더 배우기 위해 조만간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시보(錫伯)족 자치현으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다. 시보족은 만주족의 일파로,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신장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팔기군(八旗軍) 병사들의 후손이다. 약 17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한족 생활권과 떨어져 있는 덕분에 지금까지 만주어와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올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에 전통복장을 입고 참가한 만주족의 일파인 시보(錫伯)족 대표 관구이쩐(關桂珍?45)씨. 인터넷 사이트 東北滿洲在線
    • ‘만주의 하늘’처럼 인터넷에서 만주어를 가르치는 통칭 ‘만주족 네트’는 중국 전역에 20여 개에 달한다고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만족고향네트’란 사이트는 광고회사에 다니는 우스보(吳思博·28)씨가 2003년 친구 3명과 만든 것. 매년 회원이 1000명씩 늘어나, 현재 4000여명에 달한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사이트는 회원들이 수집한 민족문화 자료와 만주어 학습교재 등을 공개하고 있다. 우씨는 “도서관에나 가야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인터넷에서 간단히 볼 수 있게 됐다”면서 “자기 민족의 위대함을 깨닫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중앙정부가 만주족에 대해 차별정책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베이징대학 역사학부 쉬카이(徐凱) 교수는 “전국에 만주족 자치현과 자치향이 7개 있으며, 이곳의 만주족들이 교육이나 취업에서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앙민족대학의 황유복(黃有福) 교수(조선족)는 “만주족은 교육에서 오히려 우대를 받았고 이들은 과거에는 민족분류에서 ‘한족’을 선택했으나, 요즘은 ‘만주족’을 택한다”고 말했다. 교육의 우대란, 베이징대학·칭화(淸華)대학 등 일류대학들이 일정한 숫자의 소수민족 출신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말한다. 소수민족 출신은 ‘쿼터’ 덕분에 일류대학 가기가 그만큼 쉽다.

      또 상하이(上海)에 거주하는 강희제(康熙帝)의 8대손인 진헝웬(金恒源·63)씨는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만주족 자치현인 모란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국가 최고 지도자가 소수민족 자치현을 찾은 것 자체가 만주족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민족고향네트’에서 알게 된 만주족 청년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만주족의 시각에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제기하는 ‘역사왜곡’의 대표적 사례는 ?남송의 악비(岳飛)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다.

      악비는 남송의 장수로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金)에 철저히 저항하여 중국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인물. 이에 대해 만주족들은 “만주족을 중화민족의 하나라고 한다면 결국 금과 남송의 전쟁은 내전인데, ‘내전’에서 싸운 악비를 어떻게 민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비판한다. 이 주장은 동북공정의 역사관과도 맞닿아 있다. 청말의 농민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 혁명의 선구’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구호를 내걸고 수많은 만주족을 살해한 잔학행위는 은폐되어 있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강희·옹정제(雍正帝)에 관한 책을 썼다는 진헝웬씨는 “지난 4월 CCTV의 백가강단(百家講壇)에서 강희제에 대해 강의한 내용 중 틀린 것이 많다”면서 “이는 베이징의 중앙당안관(黨案館)과 대만의 당안관에 있는 수많은 만주어 사료가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만주족 청년들의 민족의식 회복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까. 중국만학회(中國滿學會) 얜충녠(閻崇年) 회장은 “민족의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생활에 여유가 있는 젊은이들”이라며 “민족의식이 강해진다고 해서 티벳족이나 위구르족처럼 한족과 충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족은 오랫동안 한족 문화와 잘 융합해 왔다”고 그는 강조했다.

      만주족 사회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미풍(微風)이다. 하지만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었다. 

    • 만주족은…

      한반도와 ‘병자호란’ 악연 … 19세기 중반이후 쇠락

      훈의 근작 소설 ‘남한산성’은 만주족이 세운 청(淸)과 관계가 있다. 1616년 누르하치(努爾哈赤)는 만주족을 통일한 뒤 후금(後金)을 세웠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었다. 홍타이지는 명(明)을 정복하기 앞서 배후의 위협세력인 조선을 두 차례 정복했다. 당시 인조(仁祖·1595 ~1649)는 반금친명(反金親明·금에 반대하고 명과 친교함) 노선을 천명하다 전쟁을 초래했다.

      두번째 전쟁인 병자호란(1636~1637년) 때 인조는 20만 대군을 몰고 온 홍타이지에 굴복, 남한산성을 내려와 삼전도(三田渡·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부근)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했다.

      홍타이지를 계승한 순치제(順治帝)는 1644년 북경을 점령해 한족 왕조인 명(明)을 무너뜨렸다. 17~18세기 청조는 평화와 번영을 구가해, 이 시기 중국 인구는 1억5000만 명에서 4억30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만주족 정권은 서구 열강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공산중국 출범 후 만주족들은 ‘죄인’인양 숨 죽이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