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洪益參考資料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42 : 마고(麻姑)의 역사적 고찰]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4:16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42 : 마고(麻姑)의 역사적 고찰]

 

 

눈을 감고 마고여신을 연구하느라고 모아 온 2300여 편의

마고설화과 민요, 문학, 시, 회화 등의 내용을 상상하면,

너무 방대한 양이라서 한번에 다 상상할 수도 없지만,

마고할미 이름을 가진 한국의 산과 바다, 섬과 강, 바위와 마을,

그리고 선조들의 영혼이 일제히 일어나서 “마고할미!” 하고 함성을 치는 것 같다.
이 함성은 한반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 대륙 전체에서 마고 위대한 여신이여! 라고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다. 누가 한국에 위대한 여신이 없다고 했는가? 누가 우리나라에 창조신화가 없다고 했는가? 누가 한국에 민족문화/종교가 없다고 했는가? 동서양 외래종교와 문화에 밀려서, 있기는 있지만 하잘 것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글을 쓴다. 물론 이 글은 여성 독자들을 위해서만 쓰여지지 않았다. 근세조선적 유교사상에서 깨어나 한국역사와 문화를 되찾으려는 남성들에게도 말한다. 마고할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필자가 거의 전적으로 잊혀진 마고신앙과 함께 무너진 여성들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 여성주의적 관점을 고수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한국역사는 남녀모두에 의해서 되찾아져야한다. 우리는 왜 한국의 창조여신 마고와 마고문화에 대해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가? 한국인이 누구이며 한국역사는 무엇이고 한국의 신은 어떤 신이었는가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은 어디가서 우리 자신의 것들에 대해서 배워야 한단 말인가?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의 역사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현대 한국인들은 여전히 기억상실증에 걸려있고 밤마다 유령에게 쫓기고 있다. 마고로 시작되는 일 만년 이상의 장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의 기억을 되찾는 그 날은 한국인들이 역사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날이다. 앞으로 다시 말하게 될 마고전승들은 한국인들에게 부서지고 지워진 기억들을 되살려 낼 것이다. 그러면 한국인들은 예전처럼 다시 10월 상달에 축제를 열어 마고삼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우주와 인간과 자연을 꽤뚫는 엄청난 지성을 다시 소유하게 될 것이다. 우리 핏속에 흐르는 마고삼신의 영이 다시 살아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조상들처럼 우리가 신-인神-人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이 바로 신-인이 되는 춤을 출 시간이다.

한국인은 누구인가? 일본과 중국, 서양에서 말하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들 스스로 말하는 한국역사와 문화는 무엇인가? 최근 이런 질문들이 한국의 깨어난 대중들과 지성인들을 통하여 문화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인들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찾기 위한 노력이 다방면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1986년 현대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부도지>와 <한단고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부도지>는 한국인들이 다 상상하지도 못할 엄청난 역사와 신화를 전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마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던 우리 선조들. 그들은 그 화려한 마고역사와 문명의 주인공들임을 기뻐했던 것이다. 아, 마고... 한국인들은 마고할미라는 이름으로 마고를 친근하게 불렀다. 오랫동안 잊혀지고 묻혀진 마고할미에 관한 전설이 여기저기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비롯한 서구의 종교가 맹렬하게 세계인들의 정신을 잠식해가고 있는 이때, 그리고 아시아 남성들의 지성과 신성을 대변하는 유교, 힌두교, 불교, 도교가 지속적으로 아시아 여성들의 손발을 묶고 눈을 가리고 있는 이 때에, 한국인들이 마고여신의 전통을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부도지>와 거의 동시에 번역, 출판된 <한단고기>의 연구로 시작된 한국의 상고사와 한국사상은 추락하는 인류의 정신을 바로 잡아주는 지적, 도덕적, 영적인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마고여신은 물론 한국상고사를 되찾는 일은 한국남성들만의 힘으로 부족하다. 한국의 상고사와 문명은 마고여신을 시조로 하는 여성중심적 문명이자 역사였기 때문이다. 근세조선 후기 이래로 뿌리내린 여성억압적 유교이념과 윤리의 유산을 씻어내지 못한 현대 한국남성들의 사고는 여전히 여성들의 역사와 신화를 왜곡, 소외하면서도 그 오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남성 지성인들에 의한 한국상고사와 마고신화 연구는 마고여신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중심적 한국전통과 유산을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 현저한 예가 2002년에 제작 상영된 영화 <마고>이다. <부도지>가 제시하는 여성독립적 신인 마고를 한웅이라는 시조의 배우자로 설정하는 등 마고신화를 남성적인 시각에서 왜곡했을 뿐 아니라, 수 백명의 나체배우들을 등장시켜서 포르노 영화광들을 자극했다. 필자는 영화 <마고>의 제작 과정 중에서도 여성들의 몸과 성애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한국남성들이 마고여신으로 대변되는 여성정신을 종속시키려는 하나의 방편으로 영화마고가 제작되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한국 일반대중들이 <부도지>와 마고전승 등에 나타난 마고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 <마고>는 마고신화를 남성들의 관음증적 향락을 위한 상업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도서관에 실린 여성신문과 우먼타임즈의 보도 참고.) 남북한 전체에 즐비하게 전래되는 마고전승을 고찰하는 일은 남성중심적 시각을 넘어서는 마고문화 연구를 필요로 한다.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과 대중소설, 시, 회화 등을 통해서 알아가는 마고문화는 문헌에 기록된 역사서와 신화서 만을 검증적인 자료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에 도전을 줄 것이다. 마고전승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면서도 항상 지배층 남성지성인들의 역사기술에서 제외되어온 남녀민중들의 해학적 지성과 일상적인 신성神性을 만나게 될 것이다. 

출처: http://www.magoism.com/

 

 

6) 마고할미인가 마귀할멈인가



△ 제주도의 선문대할망이 다리를 놓다 그만 두었다는 전설이 서린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앞바다. 선문대할망이 치마폭에 담아 나르다 조금씩 흘린 흙이 쌓여 만들어졌다는 남제주군 도선면 선읍리의 좌보미 오름(오른쪽 아래).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경기도 양주에 설화 조사를 갔다가 가납리 노인회관에서 들은 이야기. “노고산에 있는 노고할미는 얼마나 몸집이 큰지 노고산과 불국산에 다리를 걸치고 오줌을 누었는데 문학재 고개에 있는 큰 바위가 오줌발에 깨져나갔어.” 옆에 있던 노인들이 웃으며 한 마디씩 거든다. “노고할미는 순한 할머니여서 사람들한테 해를 끼치지 않는대.” “노고산성도 노고할미가 쌓았다지.”

 

거대한 몸집 지닌 대모신
노고할미·선문대할망…
단군에게 굴복한 ‘마고’처럼 산신되거나 빠져죽거나

강원도 <삼척군지>를 보니 이런 이야기도 있다. 취병산 서쪽 백월산 중턱 바위굴에 서구할미가 살았는데 어린애들을 홍역 같은 병에 걸려 죽게 했다. 요염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해 남자들을 홀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해도 입혔다. 생김새도 산발에 낚시코에, 손톱은 길다랗고 앙상했다.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했는데 효자인 최아무개가 머리에 쑥뜸을 뜨자 “효자가 벌을 주니 달게 받겠다”고 하면서 며칠만에 죽었다고 한다. 서구할미가 죽어서 바위로 변한 것이 서구암이다. 양주의 노고할미와 삼척의 서구할미. 둘 다 할미인데 형상은 판이하다. 노고할미가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인자한 할머니라면 서구할미는 구미호처럼 둔갑술을 부려 사람들을 해친다. 노고할미가 엄청난 거인이라면 서구할미는 거인은 아니지만 생김새가 괴이하고 마음씨가 고약하다. 마치 손톱 길이가 네 치나 되는 <술이기(述異記)>의 마고(麻姑)나 <백설공주>의 마귀할멈에 가깝다. 두 할머니의 정체는 무엇인가? 노고할미의 모습에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거대한 몸집’과 ‘세찬 오줌발’이다. 노고할미를 상징하는 두 형상이 우리 앞에 신화를 불러내기 때문이다. 먼저 남자들의 공중화장실 음담에서 정력과 동일시되는 오줌발 이야기를 해보자. 바위를 깰 정도의 오줌발이 뜻하는 것은 뻔하지 않은가? 할미의 강한 생식력, 그것이다. 할미의 생식력이란 표현이 낯설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할미란 말은 지금 쓰이는 할머니의 뜻이 아니라 본래 ‘한+어미’, 다시 말해 ‘큰 어머니’(大母)였다. 이 대목에서 구석기에서 신석기에 걸쳐 숭배되던 가슴과 엉덩이가 유난히 강조된 여신상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노고할미의 오줌발에는 원시의 비너스, 곧 대모신(Great Mother)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사라진 웅녀에서 보듯
숭배 대상에서 밀려난 여신
요괴같은 서구할미로 남아

 


△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 <한겨레 자료사진>

오줌발이 이렇게 풀리면 거대한 몸집은 더 쉽게 풀린다. 거대한 몸집이란 바로 대모신의 몸집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을 지닌 대모신은 여러 민족들의 신화에서 창조여신으로 나타난다. 윈난(雲南)에 사는 이족의 창조여신 아헤이시니마는 금빛 바닷물을 마시고 하늘과 땅, 해와 달을 낳고, 신과 동식물을 낳고, 인간을 낳는다. 그런데 이 여신은 키가 구만 발, 꼬리가 구십 발, 눈과 귀가 열네 개, 젖이 스물네 개나 되는 기이한 형상을 지닌 거인이다. 자연 자체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이런 거인 여신에 의한 구체적인 창조의 모습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 편린은 우리 신화에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제주도의 선(또는 설)문대할망이 그렇다. 이 여신이 얼마나 컸는가 하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다리는 제주도 앞 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질 정도였다. 그래서 빨래를 하려면 관탈섬에 빨래를 놓고, 팔로는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문질러 빨았다고 한다. 또 제주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오름들은 이 할머니가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의 터진 구멍으로 흙이 조금씩 흘러서 만들어진 것이고,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것이 한라산이 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선문대할망의 몸집, 흙을 담아 나르는 선문대할망의 노동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거인 여신의 창조 행위를 엿볼 수 있다. 흙을 물 위에 던져 대지를 만드는 방식은 창조신화에 아주 흔한 형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엄청 크고 오줌발이 센 양주의 노고할미는 본래 천지를 마련하고 인간을 낳은 창조여신이었음에 틀림없다. 지금은 양주 사람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 노고산의 산신으로 남아 있지만. 그런데 제주도의 선문대할망은 뭔가 이상하다. 이 여신은 속곳 한 벌만 만들어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제주도 사람들에게 약속하지만 실패한다. 속곳 한 벌을 만드는 데에는 명주 1백 필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모아도 한 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망은 다리를 놓다가 그만 두었는데 지금도 그 자취가 조천면 앞 바다에 남아있다는 것. 게다가 물마다 들어가 키 자랑을 하다가 밑이 빠진 한라산 물장오리에 빠져 죽는다. 세상을 만들고 제주도를 마련한 창조여신이 한라산의 산정호수 정도에 익사하다니! 말이 되는가? 여기에는 뭔가 숨은 곡절이 있다. 이 남도의 곡절을 가장 극적으로 해명해주는 북쪽의 이야기가 있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인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싸움에서 진 마고할미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마고는 단군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단군은 투항한 마고할미와 그 아래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다.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이 구빈(九賓) 마을이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림(枉臨)고개라고 한다.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전설이다. 이 전설에서 마고할미는 마고족의 족장으로 등장하지만 기실 이 마고할미는 노고할미·선문대할망과 같은 계열의 할머니다. 왜냐하면 18세기 장한철(張漢喆)이 지은 <표해록(漂海錄)>에 사람들이 한라산을 보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선마고(詵麻姑)이기 때문이다. 선문대할망이 한자 선마고로 표기된 것. 더구나 우리나라 곳곳에 마고할미가 치마로 돌을 날라 쌓았다는 성이 있는 것을 보면 같은 계열의 여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고성의 마고할미는 단군에게 항복한다. 단순한 항복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이었다고 전설은 말한다. 이 복종의 의미가 뭘까? 겉으로 드러난 대로 한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 패배한 이야기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외피와는 달리 실은 여신을 모시는 집단이 남신을 모시는 집단에게 복속된 이야기다. 세계를 창조한 여신이 창조신의 지위를 남신에게 넘겨주고 산신으로 밀려나거나 한 집단의 시조신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고할미나 마고할미가 그런 경우이다. 그러니 마고족의 족장 마고할미의 투항 이야기는 창조여신의 역사적 패배와 소외를 기억하고 있는 ‘말의 비석’(口碑)이 아니겠는가.

 



이제야 선문대할망이 한라산 물장오리에 빠져죽은 곡절이 얼굴을 내민다. 선문대할망은 창조여신이었지만 더 이상 그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제주도의 창조신은 남신 천지왕(옥황상제)이 차지했다. 남성 중심의 신성가족의 계보에서 창조여신은 선마고와 같은 산신으로 숭배되거나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익사하는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 선문대할망 위로 곰나루의 웅녀가 겹쳐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삼척의 서구할미가 마귀할멈의 형상을 쓰게 된 것도 여기에 까닭이 있다. 서구할미에게는 창조여신의 모습이 거의 없다. 오히려 요괴나 구미호의 이미지가 씌어져 있다. 산신 서구할미가 이런 꼴이 된 것은 십중팔구 민간신앙을 억압한 조선시대 유교 이념 탓이리라. 사악한 서구할미가 ‘효자’에게 굴복했다는 결말의 논리가 그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오래된 내력이 있다. 덕이 높은 단군에게 복종했다는 마고할미 전설에서 알 수 있는 대모신의 역사적 소외라는 내력. 창조의 힘을 잃고 숭배의 대상에서마저 배제된 여신에게 부과된 누명이 서구할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으로 드리워져 있다. 조현설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연구교수 mytos21@hanmail.net

 

 

북한에 전해오는단군할아버지와 마고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여기서 단군에 얽힌 설화 한가지를 소개한다. 우리나라 명산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마고할미 설화란 게 있다. 마고할미는 일종의 여성 산신으로 보면 될 텐데 그 마고할미가 단군과 화해한 전설이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현대 단군능이 있는 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으로 있는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전투에 진 마고할미는 달아나서 박달족과 단군족장의 동태를 살피는데 알고 보니 자기부족에게 너무도 잘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마고할미는 단군에게 심복하게 됐고 단군은 마고할미의 신하인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이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을 구빈 (九賓) 마을이라 하고 마고할미가 단군에 복속하기 위해 고성으로 되돌아오며 넘은 고개를 왕림 (枉臨) 고개라 한다는 것이다. 단군과 마고는 둘 다 자생적인 우리 민족 고유의 신이다. 하나는 남성이고 또 하나는 여성이란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런 두 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화해하고 하나가 됐는가.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그걸 말해주는 설화를 남녘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이번에 북녘에 와서 그 설화를 접하니 결국 우리 고유의 신은 어디선가는 합치는구나하는 묘한 감회에 젖어들게 된다

 

 

 

마고가 세운 최초의 나라 ? 마고지나?


우리는 마고의 자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하는 물음에 대하여 ‘국조 단군의 자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이다. ‘국조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중시조 단군의 자손’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우리가 국조로 모시는 단군왕검 위로도 조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계에서 인정하는 단군왕검에 관한 역사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실린 ?단군신화?이다. 개천절이 오면 누군가 기념식장의 단상에 서서 인용하는 글들이다. 매년 되풀이하여 이 글을 인용하면서도 이 역사 기록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다. 이를 정사로 인정한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록을 믿으면 우리의 역사가 ‘중시조 역사’로 전락하고 마는 믿어서는 아니 되는 역사기록이다. 이러한 역사기록이 바로 축소되고 조작된 역사기록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축소되고 조작된 ‘중시조 단군의 자손’이라는 역사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에게 마고를 시조로 하는 진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중원 땅에서 태초의 문화를 시작한 사람들이 동이東夷이다. 이 동이의 최고 시조가 마고이다. 마고는 인류문명사에 지구의 동쪽에서 최초로 출현한 문명인이다. 인류의 문화는 마고에서 시작한다.

 

장자莊子는 그가 쓴 소요유逍遙遊에서 마고에 대하여 기막힌 기록을 남겼다.

“묘고산(막고야산)에 신인이 살고 있는데, 살결은 눈처럼 희고 부드럽기 처녀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사해의 바깥을 노닐고 있다.”


마치 UFO를 타고 다니는 젊은 여인을 묘사한 것과 같다. 이 글은 장자가 아마 구전으로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일 것이다.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사해의 바깥을 노닐고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서, 마고가 무신巫神이나 무조巫祖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금도 신을 받는 여자들에게 꿈이나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환상으로 이와 유사한 장면이 간혹 되풀이하여 재현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묘고산은 봉래 앞 바다에 있는 묘도군도에 있는 산으로 추정한다. 산동반도의 돌출부분과 발해만 사이에 있다. 묘고는 마고와 발음이 닮았다. 그래서 묘고산을 막고산으로 고쳐서 부를 수도 있다고 본다. 역易에는 마고를 상징하는 천풍구天風?쾌가 있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따르면, 천풍구의 ‘구’는 ‘고’로도 발음이 된다. 천풍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늘에서 온 풍이족의 마고라는 뜻이 된다. 하늘은 그가 떠나온 직녀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풍이는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쓰는 종족이므로, 천풍은 하늘에서 온 뱀이 된다. 신라 때 박제상이 쓴 ?부도지符都誌?에는 마고가 무슨 일을 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마고는 마고본성과 실달성과 허달성의 주인이었다. 이들 세 성은 직녀성에 비정할 수 있는 성이다. 마고는 직녀성의 화신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에서 12,000년 전에 왔다가 사라진 쌍여궁시대에 인류의 문명을 창설하고 국가를 창설하였다. 이 시대에 마고문화가 있었음을 전하는 징표가 마을 입구에 세운 ‘오리 세 마리가 앉아 있는 솟대’이다. ‘솟대에 앉은 오리 세 마리’는 마고삼신을 의미한다. 그가 이 시대에 창설한 국가의 이름이 ?마고지나麻古之那?였다.


마고가 세운 최초의 나라 마고지나

후대에 와서 마고지나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 세가 제 36 충혜왕조>에 보인다. 고려사는 조선조 초기에 고려를 멸망시킨 고려의 유신들이 조선을 세우면서 기록한 고려의 역사이다. 나라의 공식명칭은 태조 왕건이 정한 고려高麗였지만 백성들은 고려를 마고지나로 불렀다. 이 말은 고려가 생겨나기 이전인 삼국시대에도 각 나라의 백성들이 자기가 살고 있던 나라를 고구려 ? 신라 ? 백제로 부르지 않고 마고지나로 불렸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원元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 말기에 28대 충혜왕은 원나라 사신에게 잡혀간다. 이윤 ? 조익청 ? 기철이라는 자들이 원나라와 내통하여 반원反元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왕을 원의 사신으로 온 타적과 내주에게 내주었다. 사신을 맞는 자리에서 현장을 경비해야할 신예라는 자가 병사들을 매복시켜 왕을 납치하러 온 원나라 사신들이 왕을 잡아가도록 도왔다. 충혜왕은 원의 황제에게 끌려가 시종 한 사람 없이 계양현을 거쳐 악양현으로 귀양가다가 독살당했다. 이 소문이 온 나라에 퍼져 백성들 사이에 <아야요阿也謠>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阿也 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아야 마고지나 종금거하시래     

아아 마고의 옛 나라 이제 떠나가면 언제 돌아오려나


고려의 백성들이 부른 한에 사무친 노래 ?아야요?에는 우리시조 마고가 세운 최초의 나라  마고지나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이렇게 마고지나가 이미 마고시대에 있었다.


마고지나는 제주도의 옛 이름 영주의 모체

마고지나의 정치체제는 신시체제였다. 육로나 해로로 물건을 가지고 와서 교환하는 시장을 열고, 화백회의를 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신시 개척단을 해외로 내보내어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 하늘과 조상을 제사를 지냈다. 이 신시체제는 마고족의 후예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쓰는 풍이에 의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세계 각처에 퍼져 있는 뱀신화와 거인신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서양의 별자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험독險瀆은 신시의 도읍이었다. 이들이 신시 밖으로 나갈 때 가지고 다니는 징표가 <천부삼인>과 <오리>였다. 신시의 여자들이 다른 곳으로 나가서 그곳의 사내와 혼인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가 마고  황궁黃穹과 청궁靑穹의 삼신시대를 거쳐서 황궁黃穹시대, 한인桓因시대, 한웅桓雄시대를 거쳐서 단군시대에 이르렀다. 그 역사가 무려 1만 년이나 되었다. 제주도에 지금도 전해 오는 영주신화瀛洲神話는 이때의 역사가 지금도 신화로 남아 전해 오는 것이다. 영주신화는 삼성혈신화三姓穴神話로도 불린다. 한라산 기슭에 세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에서 고高씨 양梁씨 부夫씨의 삼성三姓이 태어나 각각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 이름을 고을나高乙那 ? 양을나梁乙那 ?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고, 이들 삼성이 고씨와 양씨와 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시대에 영주의 동해빈東海濱에 세 여자가 배를 타고 와서 정박하여 이들 삼성과 혼인하였다. 이 기록도 단종 2년에 간행한 ?고려사 지리지?에 있다. 세 처녀는 마고삼신의 나라에서 온 여자들이다. 을나乙那는 조선시대초기의 기록이므로 고려를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지나之那의 곡필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之가 乙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다. 高乙那 ? 梁乙那?夫乙那를 高之那 ? 梁之那, 夫之那로 바꾸면 이들 나라가 마고삼신을 시집보낸 麻古之那와 연결이 된다. 乙那 즉 之那가 마고지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마고지나가 우리 역사와 무관한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之那와 支那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한다. 도대체 지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사전에는 “지나支那는 진秦의 와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진나라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결코 진의 와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支자는 ‘흩어지다’ ‘여러’ ‘갈려나다’ ‘지탱하다’ ‘사지四肢’ ‘가지枝’ 등 여러 의미를 가진 문자이다. ‘나라이름’이라는 의미도 있다. 본문에서는 지족支族 즉 갈라져나간 혈족血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갈라져 나갔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 해답은 나那자에서 나온다. 나那에서 갈라져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나那는 ?說文?에 ‘西夷國安定有朝那縣(서이국안정유조나현)’으로 설명이 나와 있다. ‘서이국西夷國이 안정이 되어 조나현에 편입되었다’는 말이다. 조나현朝那縣의 조나朝那1)는 朝鮮那羅를 축소한 말이다. 조선나라는 모두 하화족의 말이 아니라 우리말이다. 이를 해명할 수 있는 기록이 李固善의 ?朝鮮紀?에 있다. 단군왕검은 그의 장인 지일홍제가 붕어하자 무진원년(BC2333년)에 단국檀國을 승계하고 나라 이름을 한웅천왕이 나라를 세울 때 썼던 배달나라倍達那羅라 이름을 그대로 썼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경인 23년(BC2311년)에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쳤다. 조나현朝那縣이라는 지명에는 우리 상고시대 국호를 제정하고 변경한 역사가 이렇게 그대로 들어가 있다.  지나支那를 중국의 사전에서 ‘진의 와전’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인정을 한다고 해도, 조선이 진시황에게 멸망당한 때가 진시황 8년이므로, 당시에 선진국이었던 조선의 영향을 모두 없애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류 문명사에 최초로 출현한 ?마고지나?의 반영이 “중국의 조상 나라 마고지나에서 갈라져 나온 지손支孫의 나라”를 의미하는 ‘지나’로 나타난 것이다.

   

마고지나의 대표적 스타 견우와 직녀

필자는 앞의 장 ‘견우와 직녀’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타난 견우와 직녀가 천문도에 나타난 구국狗國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구국은 한웅천왕이 배달나라를 세울 때 나라를 구성하는 데에 주축이 된 오가五加 중에서 구가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진의 역사를 하늘에 기록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한인과 한웅과 단군의 대까지 하였다. 그러나 하화족이 진시황 8년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석권하면서, 천문에 기록된 마고시대, 한인시대, 한웅시대, 단군시대의 역사를 진한대의 천문으로 둔갑시켰다. 하화족은 천문을 역사로 해석하지 않았다. 역사로 해석하면 마고와 풍이와 동이의 역사가 천문으로 풀리게 되므로 천문을 점성학의 수준에 머물러 있게 하도록 점성학 쪽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마고지나시대의 국가나 사회체제를 유추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록은 ?천상열차분야지도? 뿐이다. 직녀가 마고지나를 창설했으므로, 직녀에 대응하는 견우와 관련이 되는 별자리를 찾아서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견우가 매년 칠월칠석날 하나님을 만나러 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장마를 그치게 하겠다고? 그 일이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무엇인가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견우는 하나님과의 담판이 끝나면 반드시 소를 한 마리 하사받아가지고 돌아온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경운기를 한 대 받아가지고 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직녀의 배후에 천주天廚와 부광扶筐 별자리가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먹는 일과 관련이 있는 별자리로 볼 수 있는 별자리이다. 천주는 6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늘의 주방이다. 부광은 7별자리로 되어 있는 하늘의 광주리이다. 잠자리로 볼 수 있는 별자리이다. 북두칠성은 그 음이 곰이다. 한자로 고마固麻로 쓴다. 고마는 백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남사백제전南史百濟傳?(?康熙字典? 부수-麻 1622쪽 國際文化出版公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魯如中國言郡縣也

백제국호왕소도성왈고마읍왕첨로여중국언군현야

백제의 국호는 왕이 머무르는 도성으로 하는데, 고마읍이라고 하고, 첨로라고도 하고, 중국말로 군현과 같다.


백제의 서울 이름이 고마라는 것이다. 고마固麻는 마고를 좌정시켰다는 말이다. 마고를 국조로 숭상하여 신전을 짓고 신전에 모심으로 해서 고마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해석된다. 또 달리 도성을 첨로라고도 했는데, 첨?은 처음을 뜻하는 첨僉과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처음 첨로의 책임자로 임면된 사람이 노魯이므로 물고기를 종족의 아이콘으로 썼던 희熙씨2) 계열의 사람으로 보인다. 노魯를 파자하면, 魚 +日이 됨으로 일관日官으로 있는 어씨족魚氏族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백제가 처음 건국했을 때, 위례성으로 불린 그 도성이 고마로 불렸음을 알 수 있고, 고마에 마고를 모셨음을 아 수 있다. 후대에 와서 고려가 백제 땅에서 일어났는데, 충혜왕이 원나라로 잡혀가 독살당하여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백성들이 아야요를 지어 부를 때 무슨 이유로 고려라고 하지 않고 마고지麻姑之那라고 했는지, 그 이유가 고마固麻라는 문자에서 밝혀진다. 또 하나 여기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고마와 검의 관계이다. 고마는 마고를 좌정한 백제의 서울이고, 검은 단군왕검이다. 우리말 처음이라는 문자가 첨?이라는 문자에서 나오고, 첨僉이라는 문자에서도 나오는데, 첨?은 마고와 관련되는 문자이고, 첨僉은 단군왕검과 관련되는 문자이다. 첨?은 파자하면 木+詹이다. 첨詹자는 별을 본다는 뜻의 첨瞻자와 같은 뜻으로 쓴다. 하늘에서 별을 살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고의 자손인 네 천인天人이다. 이들이 별을 살피는 자리가 점대漸臺별자리이다. 우리는 첨로?魯라는 문자에서 직녀별자리에 속한 점대별자리를 지키는 종족이 노魯로 표현되는 희熙씨계열의 일관日官임을 알 수 있다. 희씨는 유망의 둘째 아들이다. 유망시대에 그는 일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검儉을 파자하면 ?+僉이 된다. 검은 처음으로 임금이 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儉은 단군왕검을 뜻한다. 백제 부여에는 부소산扶蘇山이 있다. ‘부여’나 ‘부소’ 두 곳은 모두 다 단군왕검의 두 분 아드님의 이름을 산의 이름으로 쓴 경우이다. 이들 이름에는 단군조선의 문화와 풍물을 승계했다는 의미가 있다. 백제가 조선의 문화와 풍물을 승계했다면, 단군왕검과 관련이 되는 지명이나 유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 땅에 남아 있는 검단산儉丹山은 단군왕검과 관련이 있는 산들이다. 백제 땅에 단군왕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단군왕검의 검이 고마 즉 마고의 검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라 이름은 마고지나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 중에서, 마고의 적통을 계승한 한인과, 한인을 승계한 한웅과, 한웅을 승계한 단군왕검과, 이분들의 나라를 계승한 나라를 든다면, 백제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한 사람이 백제도성의 이름을 마고를 뜻하는 고마로 남긴 초기백제 사람들이었다. 후대에 와서 마고를 국조로 모시는 백제를 계승한 사람들은 고려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왕이 원에 잡혀가 독살 당했을 때 분명히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지 않고 마고지나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누구의 적통을 승계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라는 말에는 정체성이 없고, 역사성도 없다. 지금도 우리는 백제나 고려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마고의 후손이고, 마고지나의 후예이다. 

 

女神 마고’ 21세기에 환생
연극·무용극 이어 영화 개봉 등 ‘마고 붐’ … 학술계 논쟁도 열기 뜨거워
3년 전 40여명의 여성들이 지리산 노고단에 모여 ‘마고할머니’에게 예를 올리며 ‘여신축제’를 벌일 때만 해도 ‘마고’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여신일 뿐이었다. 그 후 여신 마고는 2001년 6월 수원 화성국제연극제의 주인공(한·미 합동공연 개막작 ‘마고’)으로 무대에 오르는가 하면, 서울시무용단의 무용극 ‘산-그 영원한 생명의 터’에서는 아득한 신화의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다. 올해는 퍼포먼스 팬터지라는 새로운 장르를 표방한 영화 ‘마고’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5월20일 예정). 또 여성 록밴드 마고밴드, 연극집단 마고극장 등 마고의 이름을 앞세운 단체도 등장했다. 이제 마고 신화는 21세기 문화·예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떠올랐다.

‘부도지’ 속 창세신화에 등장
그러나 우리는 오래 전부터 어떤 형태로든 마고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천신의 딸 마고가 지리산에 내려와 8명의 딸을 낳았다는 천왕봉과 반야봉에 얽힌 전설, 마고할머니가 아흔아홉 마지기의 논을 만들어 하늘양식을 지었다는 석문(단양 8경 중 하나), 마고할머니가 돌을 갈다가 남겼다는 양양 죽도의 절구바위, 역시 마고할머니가 치마에 돌을 가져와 성을 쌓고 나머지 돌을 버렸다는 거제도의 마고덜겅 등 이 땅 곳곳에서 마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95년에는 동화작가 정근씨가 ‘마고할미’라는 그림동화를 발표했다. 제주 지역에서 설문대 할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마고할미의 전설을 동화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모든 신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세상을 창조하는 ‘우주거인’의 개념을 찾을 수 있다. 여신으로서 마고의 제 모습은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이 썼다는 ‘징심록’ 중 ‘부도지’편에 나타난다. 현재 ‘부도지’ 원문은 전해지지 않는다(상자기사 참조). ‘부도지’는 우리 민족 고유의 창세신화 혹은 개벽신화의 존재를 알려준 놀라운 기록이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건국신화) 외에 문헌상 남아 있는 창조신화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부도지’에 따르면 선천과 후천의 중간인 짐세 시대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8려음(呂音)에서 마고성(麻姑城)과 마고가 태어났다. 마고는 혼자서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낳았다. 다시 궁희와 소희가 4명의 천인(황궁씨, 백소씨, 청궁씨, 흑소씨)을 낳고, 4명의 천녀를 낳아 이들 4쌍에서 각각 3남3녀가 태어난다. 이들이 인간의 시조이며 몇 대를 거쳐 12파가 각각 3000명에 이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인구 증가로 마고성의 식량인 지유(地乳)가 부족해지자 백소씨 일족인 지소씨가 지유 대신 포도를 먹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도 권한다(‘오미의 변’이라고 함). 마고성 안에서 지유만 마실 때는 무한한 수명을 가졌던 사람들이 풀과 과일을 먹게 된 후 천성을 잃고 수명이 줄어들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느낀 황궁씨가 마고 앞에 복본(復本·근본으로 돌아감)을 서약하고 사람들을 4파로 나눠 성을 떠난다. 그중 황궁씨는 일행을 이끌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천산주(天山州)로 가서 한민족의 직계 조상이 된다. 황궁씨의 자손은 유인, 유호, 한인, 한웅, 단군으로 이어진다. 알엠제이씨가 제작한 영화는 마고신화를 태초의 어머니인 마고와 그의 분신인 12정령(물 불 비 바람 달 길 대지 구름 나무 파문 그림자 천무), 그리고 마고와 함께 사랑을 나눠 만물을 빚어낸 태초의 남자 한웅의 이야기로 변형했다. 영화는 환경오염과 전쟁, 핵, 강간과 폭력, 마약 등으로 찌든 현실세계에 머물고 있는 한웅이 12정령의 인도로 마고성에 대한 기억을 회복하고 이 세상 위에 낙원 마고성을 다시 세우려 한다는 줄거리다. 그러나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시나리오를 쓴 장경기씨가 영화에서 마고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으로 설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논쟁이 진행중이다. 장씨는 “마고는 음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무극의 상태로 남녀와 음양을 같은 비중으로 품고 있는 중성”이라면서 “‘부도지’에 근거한 창세신화에서 마고를 생물학적인 의미의 여인으로 보는 것은 단편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에서 활동중인 종교여성학자 황혜숙씨가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다음 사이트에 개설한 종교여성 카페cafe.daum.net/religionwomen)에서 ‘마고 영화 감시대’를 발족하고 영화 ‘마고’는 ‘부도지’의 마고 기록을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우선 ‘한단고기’에 의하면 기원전 3898년 한국의 신시시대를 시작한 한웅을 기원전 3만년 전의 마고와 동시대인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오류이며, 세계의 창조주인 여신 마고를 한 남자의 배우자 혹은 성적 상대자로 전락시킨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영화 ‘마고’는 마고신화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폄훼했다.

영화 속 ‘중성’의 마고 … 논쟁 빌미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를 놓고 이처럼 설전이 오가는 것을 신화 연구자들은 흥미롭게 바라본다. 이 과정에서 황혜숙씨가 “마고는 중국의 서왕모와 같은 여신”이라는 새로운 가설도 내놓았다. 즉 서왕모가 우주의 어머니, 세계의 주재자, 창조자의 이미지로 중국인들로부터 숭배를 받은 점에서 마고와 일치하며 서왕모가 머물렀다는 서방 곤륜산은 마고성이 위치했다고 알려진 파미르 고원 부근이다. 이 주장에 대해 ‘금문의 비밀’을 쓴 상고사 연구자 김대성씨는 “사실 중국 신화는 중국 고유의 것이라기보다 변방 민족의 신화를 차용한 경우가 많다”면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동양학자 박현씨는 영화 마고를 둘러싼 논쟁을 떠나, 모처럼 일고 있는 마고 붐을 우리 신화 체계를 완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신화는 창세신화에서 자연신화, 문화신화, 역사신화, 영웅신화의 단계로 분화한다. 단군신화는 국조신화이며 역사신화일 뿐 그동안 우리에게 그 전 단계의 신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히 ‘부도지’에 담긴 마고 이야기는 우리 신화의 공백을 메꿔준다. 황궁씨의 마고성 출방으로 창세신화가 끝나고 자연신화가 시작된다. 다시 황궁씨의 자손 유호씨 대부터 역사신화, 영웅신화의 시대가 열린다. 신화의 주인공이 신에서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다.”박현씨는 ‘징심록’의 유실로 완전한 신의 계보를 작성할 수는 없으나 ‘부도지’에 등장하는 신들만이라도 정리된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 못지않은 위대한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했다. ‘꿈’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신화는 하나의 대안으로 다가온다. ‘부도’(符都)라는 말 자체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나라, 또는 그 나라의 수도를 가리킨다. 새로운 세기에 부활한 마고신화는 곧 인류가 희망하는 ‘부도의 꿈’을 말해 주는 것이다.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역사적 사실




마고는 우리의 시조이고 문명의 창시자
① 우리 기록에 麻姑가 처음 등장하는 때는 신라 내물왕(奈勿王) 때이다. 당시의 재상 朴堤上(363-419?)이 징심록澄心錄 15誌를 지었는데, 5誌 부도지符都誌에 인류문명인의 시조로 나온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고가 등장하는 때가 지구의 운동으로歲差運動으로 지구가 뒤집어져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고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던 때라고 한다. 혹은 헤성과의 충돌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14,000년 전으로, 대빙하기의 말기의 혹독한 추위가 걷히어 가던 때이다. 남태평양 상에서 뮤 대륙이 침몰하고, 대서양에서 아틀란티스가 침몰했는데, 뮤 대륙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마고라고 하고, 아틀란티스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멜기세댁이라고 한다. 마고에 대한 기록은 인도 등 동남아시아의 사원에 보관되어 있는 토판에 쇄기문자로 기록되어 있고, 멜키세댁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 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 ② <부도지>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 마고는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낳았고, 궁희에게서 청궁과 황궁이 태어나고, 소희에게서 백소와 흑소가 태어난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원시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불리는 인류는 이분들의 후손이 된다. 우리는 황궁의 후손으로, 황궁에게서 유인이 태어나고, 유인에게서 한인이 태어나고, 한인에게서 한웅이 태어나고, 한웅에게서 단군이 태어난다. 마고에서부터 단군까지의 역사가 1만년이다.
③ 이후로 마고에 대한 기록은 우리 역사 곳곳에 나온다. 마고는 태초의 하늘에서는 직녀성이고, 북두칠성에 좌정하여 곰으로 불린다. 큰곰별자리와 작은곰별자리가 이리하여 생긴다. 마고의 자손은 칠성의 자손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곰은 단군왕검 때에 와서 검으로 변한다. 검은 곰이고 곰은 한자로 쓰면 고마固麻이다.
④ 삼각산 기슭에 소서노와 온조 모자가 백제를 세울 때, 이곳을 한자로 위레성慰禮城이라고 하였다. 인수봉에 우레가 치므로 우레성이라고 한 것을 한자로 바꾸어 쓰다 보니 위례성이라고 한 것이다.
⑤ 南齊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북두칠성은 그 음이 곰이다. 한자로 고마固麻로 쓴다. 고마는 백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남사백제전南史百濟傳?(?康熙字典? 부수-麻 1622쪽 國際文化出版公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남사는 南齊史이다.

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魯如中國言郡縣也
백제국호왕소도성왈고마읍왕첨로여중국언군현야
백제의 국호는 왕이 머무르는 도성으로 하는데, 고마읍이라고 하고, 첨로라고도 하고, 중국말로 군현과 같다.

위 글에서 고마固麻는 우리글 곰을 한자로 바꾸기 위하여 고마로 풀어 쓴 것이다. 이글은 백제의 도성이 ‘곰’으로 불렸다는 증거이다. 첨로?魯의 ‘첨’은 단군왕검의 검儉과 같은 뜻으로 쓴 말이다. 두 말 다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들 문자는 모두 다 마고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 말의 중요한 점은 마고를 계승한 조선과 백제가 국조國祖를 마고로 하였다는 점이다. 삼각산에 마고가 관련이 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곰이 다시 한자화 하여 웅진熊津이라는 지명이 생긴다. 웅진은 곰나루(지금의 公州)의 한자화 이다. 마고는 지방마다 사당을 지어 모시는데, 이 사당을 할미당 또는 삼신당이라고 하였다. 할미는 한어머니라는 뜻이다.

⑥ 고려시대의 기록은 좀더 확실하다.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戊辰宰相會百官及國老欲署名呈省書國老多不至事
竟未就王傳車疾驅艱楚萬狀未
至揭陽丙子薨于岳陽縣. 或云遇 或云食橘而
國人聞之莫有悲之者小民至有欣躍以爲復見更生之日.
初宮中及道路歌曰:'阿也麻古之那從今去何時來?' 至是人解之曰: '岳陽亡故
之難今日去何時還?'
王在位前後六年壽三十.

무진일, 재상들이 백관들과 나라의 원로들을 소집하여 원나라 중서성에 제출할 서한에 서명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나라의 원로들 대부분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성사하지 못하였다. 왕(원에 납치되어 후에 살해당하게 되는 충혜왕)은 전거傳車(역마)에 실려서 급히 달려가는 도중에 천신만고를 겪으며 계양까지 가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에서 죽었다. 혹은 “독살되었다”하고, 혹은 “귤에 중독되어 죽었다”고도 하는데, 본국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가난한 백성들은 기뻐 날뛰면서 이제 다시 갱생할 날을 보게 되었다고까지 말하였다.(주, 이 글은 친원파親元波의 기록을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편찬하는 사람들이 다시 폄하한 글이므로 왜곡되고 훼손된 글이라고 보아야 한다) 처음에 궁중과 항간에서 노래가 유행되기를, “아아 마고지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고 하였다. 왕은 전후하여 재위 6년이며 수명 30세이었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고려가 계승한 나라가 ‘마고지나’임을 밝히고 있다.

⑦ 古韓語 연구자들은 우리 말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에 쓰이는 고마가 마고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 ‘神 같다’는 표현으로 썼는데, 오늘날 ‘고맙’다는 표현으로 의미가 바뀌었다고 한다. ‘곰 같다’→‘검 같다’→‘신 같다’로 보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神을 かみ라고 한다. かみ는 우리 말 검(神)의 일본어화이다.

⑧ 우리 음악의 고유한 이름을 매昧라고 한다. 매는 북두칠성에 소속한 별이다. 매를 친다, 두드린다는 의미가 있다. 두드린다는 斗(북두칠성)에 드린다는 의미이다. 곰에게 드린다는 뜻이기도 한다. 곰은 검이다. 검에게 드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에게 드린다는 뜻이 된다. 매는 신의 의미로 쓰는 마고에서 나온 것이다. music은 마고에서 온 것으로 본다.

⑨ 엄마의 마나 어머니의 머는 마고에서 온 것으로 본다. 



이 시대에 마고를 되살려야 하는 이유

중국의 한국역사 중국사편입연구와 관련하여


① 현재 중국은 5년에 걸쳐 200위엔(우리돈 3조원)을 투입하여 한국의 강단사학의 연구성과물을 수거하여 조선족 역사 학자를 주축으로 한 <한국 고구려사 중국사 편입을 위한 연구>를 서두르고 있고,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는바, 이를 <東北工程>(동북아프로젝트)라고 한다.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면, 우리의 역사는 중국의 변방역사로 전락하게 되는데, 한국을 중국의 속국, 변방국가로 자리매김을 하자는 데에 목적이 있다.

② 중국은 앞으로 북한이 붕괴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동북공정>은 이때 북한지역을 중국화 하려는 음모를 노출하는 것으로, 북한이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고구려를 계승한 북한이 멸망하였으므로, 북한 땅은 당연히 고구려의 역사를 귀속한 중국에 속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펴게 될 것인 바, 이때를 대비하여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③ 마고는 우리의 시조로 조선, 백제, 고려를 통하여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으므로, 마고의 역사를 복원해야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논리의 구축이 가능해진다.

④ 마고를 삼각산 자락에 현신하게 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우리 정체성의 상징인 삼각산에 세움으로써 확고히 하자는 것이다.

⑤ 문화민족은 각 민족이 국민적 사표가 될만한 구원의 여인상을 가지고 있는바, 중국의 서왕모, 일본의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 유태인의 마리아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조 마고를 우리 구원의 여인상으로 내세움으로써 이 취약한 부분을 보강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새로운 화두 마고

우리 조상이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  이다. 신라 때 박재상 선생이 쓴 ?부도지?에 따르면, 그때, 마고가 마고성을 폐쇄하고, 마고의 후손인 네 종족이 마고성을 떠나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게 되면서 비롯된다. 네 종족의 우두머리인 황궁黃穹이 다른 종족은 비교적 살기가 괜찮은 곳으로 떠나보내고, 마지막으로 황궁부족을 이끌고 가장 자연환경이 열악한 북쪽지방 천산주天山洲에 정착함으로써 잃어버린 마고문명 찾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이 정학한 곳이 사신도四神圖에서 현무玄武로 표현되는 곳이다. 황궁은 천산주에 다다르자, 그의 부족에게 해혹복본解惑復本할 것을 명한다. 해혹복본은 “그들이 마고성을 폐쇄하여 떠나게 된 원인을 규명하고, 다시 원래대로 마고성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민족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과학적, 종교적 메시지였다. 황궁이 해혹복본을 명령할 때, 이 명령에는 이미 역사인식이 내재해 있었다. 이 시대엔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역사인식이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그들이 떠나온 마고성을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시간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해혹’이라는 말은 인류문명의 여명을 의미하는 말이다. 천문학의 시작, 원인규명으로서의 학문의 시작을 의미한다. ‘복본’이라는 말에는 원형에 대한 기억과 회귀라는 의미가 있고, 종족이동과 낯선 환경에의 적응, 새로운 주거, 생활 등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혹복본’이라는 말에는 인간이 문명을 열고 발전시켜야 하나, 그 문명은 원래부터 있었던 문명에의 복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인류가 아무리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킨다고 해도 그 문명은 마고문명에의 복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문명을 주도한 사람들이 모계시대를 열고, 그 시대의 문명을 시작하고 완성한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이 문명은 어느 날 갑자기 마고에 의하여 사라지는 문명이 되었다. 그 원인은 인간성이 패악하게 되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마고의 결정에는 인성이 문명의 존립을 결정한다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관은 마고문명으로의 회귀라는 관점에 초점이 모아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적 사명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마고역사규명은 황궁이 명령한 14,000년 전으로의 회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고작 서기전 3500년경의 신화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신화라는 것도 마고의 후예인 풍이족이 9,900년 전에 퍼뜨린 풍이문명의 한 분파에 불과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풍이족은 우리의 선조이다. 마고의 후손인 우리는 황궁이 명한대로 마고역사를 규명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 그래야만 우리 조상이 떠나 온 마고성으로의 회귀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우리가 집단무의식으로 받은 기억의 소자에는 이미 이러한 종교적 메시지가 내장되어 있다. 우리 민족이 타민족에 비하여 유별나게 신비주의적인 종교성이 강한 이유는 이러한 기억의 소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교의 <서방정토설西方淨土說>이나, 기독교의 <천년성설千年城說>은 모두 마고후손의 마고성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해혹복본에서 파생한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마고를 찾아가는 해혹복본이 타종족에게 넘어가 종교화 하여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마고문명으로의 회귀라는 관점에서, 사라진 마고 역사와 문명의 복원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시간대로는 마고문명이 시작된 14,000년 전에서 단군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4,300년 전까지의 10,000년대이다. 편년체의 역사를 규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고고학적 유물을 찾아서 이 시대의 역사를 마고문명에 귀속시킨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류 최고의 역사물인 ?부도지? ?한단고기? ?천상열차분야지도? ?부소보서? 기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화와 신화적 유물들이 마고문명과 마고문명을 이어받은 풍이문명, 풍이문명을 이어 받은 배달문명, 배달문명을 이어받은 동이문명을 다소나마 밝혀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나 필자가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단무의식이나, 하늘의 별자리, 문자, 신화와 설화 등에서 역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영적인 세계에서도 역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필자는 철저하게 그런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영적인 해석능력이 탁월한 사람일수록 미래의 역사학계를 주도해 나갈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점쟁이를 방불케 하는 역사가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지식이 분단위로 페기처분 되는 시대에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시간단위로 지식이 폐기처분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이 시간단위로 폐기처분되는 이 시대에 학문의 기득권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유물일 뿐이다. 모든 학문은 순간순간 역사에 편입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유물은 마고문명의 회귀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미 완성된 마고문명으로 다가서는 진일보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미 완성되어 수명이 다한 마고문명의 실체를 확인하는 수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사가들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완성된 마고문명의 실체를 찾아내는 일이다.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라는 오만불손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문명의 끊임없는 발전은 결국 마고시대처럼 마고성의 폐쇄와 추방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의 배후에는 아직도 마고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다. 그가 언제 또다시 마고성을 폐쇄하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필자는 역사를 해석하고 추리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문자학에 의지하여 해석하였다. 지구상에는 표음문자와 표의문자 두 종류의 문자만 있다.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문자이다. 우리의 역사는 대부분 표의문자이자 이미지문자인 한자로 써져 있다. 그래서 숙명적으로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역사가 상대방의 역사에서  떨어져나갈 수 없듯이 문자에서도 떨어져나가지 못한다. 떨어져 나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눈을 감고 아웅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한자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자를 한자漢字로만 인식을 해서는 아니 되고, 한자桓字로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자漢字는 중국인의 문자이다. 그러나 한자桓字는 우리 선조의 문자이다. 역사적으로 한자漢字에 우선하는 문자가 한자桓字이다. 한자桓字가 먼저 생기고, 한자漢字가 나중에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자桓字는 사라지고 한자漢字만 살아남아 있다. 한자桓字가 한자漢字에 통합되거나 잠식되어 버린 것이다. 필자는 桓字 잠식의 시작을 고조선이 멸망한 진시황 8년을 기점으로 본다. 진시황 8년 이전의 문자를 한자桓字로 보고, 그 이후의 문자를 한자漢字로 보는 것이다. 지금 중국 사람들이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漢字를 그들이 쓰지 않는 ‘고어古語’라고 말하기도 하고, ‘사라진 진秦나라의 문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조선이 진시황 8년에 멸망했다는 점에서 이 말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자전字典에 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문자들이 나온다. 하나의 문자에 두 가지 의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다. 이들 문자 중에서, 그 의미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의미로 쓰였다면 한자漢字로 보고, 그 의미가 우리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의미로 쓰였다면 한자桓字로 본다. 지금 우리는 한자漢字를 중국의 문자라고 하여 버리고 쓰지 않는다.

그러나 한자의 역사를 추적해 올라가 보면, 우리의 선조가 중원에 살고 있을 때 쓰던 문자가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桓字와 漢字가 등을 돌리고 갈라지게 되는 분기점은 후한시대에 허신許愼이 한자 9,358자를 모아 해석한 ?설문해자說文解字?가 세상에 나왔을 때이다. 그 이상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도저히 중국인의 문자라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설문해자?가 후한(後漢, 후한은 전한前漢 다음에 있었던 나라이다. 전한은 서기전 202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 중국을 지배하던 왕조이다. 고조 유방이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여 세웠는데, 왕망의 찬탈 기간을 계기로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뉜다. 25년에, 왕망王莽에게 빼앗긴 한漢 왕조를 유수劉秀가 다시 찾아 부흥시켰으나, 220년에 위魏나라의 조비에게 멸망하였다.-한컴사전) 때 나온 자전字典이므로, 한대(서기전 202-서기 220)를 한자가 중국의 문자로 정착하는 시기로 본다면, 그 이전은 한자가 오늘날의 중국인만의 문자가 아닌 시대이다. 오늘날의 중국인의 조상인 하화족夏華族이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한자가 중국인의 문자가 될 수 없었던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 이전에 중원을 통일한 진(秦,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춘추 전국 시대, 지금의 간쑤(甘肅) 지방에서 일어나 서기전 221년 시황제가 주나라 및 육국六國을 멸망시키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였는데 기원전 207년 한나라 고조에게 멸망하였다. -한컴사전)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고 있었고, 고조선은 진시황 8년(서기전 213년)에 진에게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한자는 이 시대에 진과 고조선이 함께 쓰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후한 때 ?설문해자?가 나온 것은 후한이 당시에 쓰던 문자에서 고조선의 잔재를 없애기 위하여 자전을 편찬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라면 구태여 9,353자를 모아서 해석을 시도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설문해자?가 나오기 전의 문자가 하(夏, 우禹가 세운 나라. 439년간 존속하다가 걸왕 때 탕왕에게 망하였다, -한컴사전), 은(殷, 서기전 1100년까지 중국 황허黃河 강 중류 지역을 지배한 고대 왕조. -한컴사전), 주(周, 서기전 1050년에서 기원전 256년까지 중국을 지배하던 왕조.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여, 호경에 도읍을 정하고 봉건 제도를 시행하였다. -한컴사전) 삼국시대에 이들 나라에서 고조선과 함께 문자를 공유하였다고 본다. 이 시대에 고조선은 최고 선진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중원에서 유일무이하게 패권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문자가 고조선의 문자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고조선은 마고족-구황-풍이-구려-동이로 이어지는 종족명칭변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시대는 동이의 시대였다. 나라는 마고족의 마고지나, 풍이의 한제국, 구려의 배달나라, 동이의 고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고조선이 진에게 멸망함으로써 당시에 공유하던 문자가 모두 진으로 넘어갔고, 진을 멸망시킨 한이 이 문자를 승계하였다. 고조선이 쓰던 문자를 한漢의 문자와 구분하면 한자桓字가 된다. 따라서 후한 이전의 문자를 桓字라고 하고, 후한이후의 문자를 漢字라고 말할 수 있다. 한자桓字는 동이의 문자이고, 漢字는 오늘날 중국인의 조상인 하화문자夏華文字이다. 漢字에서 사라진 동이의 흔적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사라진 桓字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桓字로 표현된 말이 한자언어桓字言語이고, 이 한자언어를 완성한 종족이 한제국을 건설한 풍이다. 풍이는 제국을 건설하고 나서 세계 각지로 흩어져 나갔다. 이들은 신화학자들이 인공언어라고 말하는 사라진 한자언어를 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화시대 각국의 언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고 본다. 그들은 골격이 커서 현지인들에게는 거인으로 불리었고, 스스로를 대인大人이나 발인發人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현지인에게서 신으로 대접을 받았다. 제주도에 남아 있는 비바리(처녀)라는 방언은 발인에서 나온 것이다. 비발인非發人, 즉 발인(골격이 큰 남자)이 아니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천문의 해석은 문자해석으로 밝혀지는 역사나 신화를 토대로 하여 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료를 천문도와 맞추어 해석하였다. 인류의 시조나 견우직녀의 해석, 마고 한인 한웅 단군왕검의 별자리 비정 해석이 그런 해석이다. 이 시대에 이미 인터넷 카페 역사가들이 역사기득권층의 권위의 아성에 도전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하였다. 나는 인터넷 카페에서 우리 학계의 기득권층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막강한 실력자들을 본다. 그들이 올린 글을 검색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문화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젊은 세대들이다. 그들은 학문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엔 외국에 살고 있는 동족들도 동참하고 있다. 앞으로의 시대는 평범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대가 온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마고성에 관한 이야기

 

신라시대 충신인 박제상이 쓴 『부도지』라는 책을 보면 우리민족이 세운 첫 국가가 고조선도 환국桓國도 아닌 마고가 세운 마고성 또는 마고의 나라(마고지나:麻姑之那)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고의 나라가 세워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2천년전(6만년전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여러가지로 보아 제가 보기엔 1만 2천년전이 맞는 것 같습니다)인 짐세시대(우리가 살고있는 선천시대 이전의 시대) 때 지금의 파미르 고원에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마고성은 8려의 음에서 나왔으며 8려의 음에서 마고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파미르 고원에 있는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라고 합니다. 이 성의 주인은 마고라는 여성(혹은 여신)인데 마고에게는 궁희와 소희 두 딸이 있었고 이 둘이 겨드랑이로 출산을 하여 궁희는 황궁과 청궁 소희는 흑소와 백소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네 천녀와 결혼하여 12명의 자식을 낳는데 이 들이 인간의 시조라고 합니다. 이 때 사람들은 성품이 순수하여 능히 조화를 알고 땅 속에서 솟아나는 지유를 마셨으므로 혈기가 맑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또한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을하고 형상을 나타내지 않고도 능히 행동을 취할 수 있었으므로 수명은 한이 없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몇 만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는 동안 마고성에는 인간의 수가 많이 늘어나서 사람들이 먹을 지유가 부족했습니다.

 

하루는 백소씨족의 지소씨가 다른사람들에게 5번이나 자신이 먹을 지유를 양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가고파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난간에 포도넝쿨이 있는 것을 보고는 배가 고픈 나머지 포도를 먹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펄쩍 뛰어 일어나 "넓고도 큰 천지가 열렸다 참으로 좋구나"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포도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을 오미-시고,쓰고,맵고,달고,짠맛-의 변이라고 합니다.)이 때부터 포도를 먹은 사람들은 이빨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빨에서 생기는 침이 독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억지로 다른 생명을 먹었기 때문인데 열매를 따먹은 것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어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사람들의 눈이 밝아져서 올빼미 모양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살과 피가 탁해지고 심기가 모질게 되어 마침내 착하던 본래의 천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가 하면 가볍던 발은 무거워져 그 전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짐승같이 생긴 사람을 많이 낳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수명도 줄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지소씨를 원망하였고 지소씨는 부끄러운 나머지 자기 권속을 이끌고 성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포도를 먹은 사람도 떠나야 했습니다. 이 때 인간들의 우두머리이자 우리 한민족의 직계 조상인 황궁씨는 떠나는 사람에게 열심히 수도하여 성정이 맑아지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복본에 이를 것이라며 격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성을 떠난 사람들 중 일부는 복본을 하려고 했는데 방법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그 방법은 성에서 지유를 얻는 것인데 지유를 얻고자 성을 팠는데 성토가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들어 단단한 흙으로 변해 지유를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성 안 사람들은 배고픔은 못 이긴 나머지 포도등 열매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습니다. 그리하여 성 안 사람들도 마고성을 떠나야 했습니다. 황궁씨는 마고 여신 앞으로 가 사죄를 한 후 반드시 복본을 하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을 불러모아 칡을 캐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천부의 신표를 나누어 준뒤 각 권속별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 나누어 살도록 하였습니다.

 

먼저 청궁씨는 자기네 부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가 운해주(중원, 즉 중국)로 백소씨는 서쪽으로 나가 월식주(오늘날 중동과 유럽일대)로 흑소씨는 남쪽으로 나가 생성주(오늘날 인도와 동남아 일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황궁씨는 북동쪽으로 나가 천산주(천산산맥)로 나갔는데 천산주는 매우 춥고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황궁씨가 천산주로 가기로 한 이유는 복본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요 맹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황궁씨는 아들인 유인씨에게  대권을 넘겨주고 둘째,셋째 아들에게는 각 주를 순행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복본에 성공한 황궁씨는 천산에 올라 돌이 되어, 길게 조음을 울려 인간세상의 미혹을 남김없이 없앨 것을 도모하고 복본의 서약을 하며 장자 유인에게 대권의 증거인 천부삼인(天符三印)을 물러 주었습니다. 이것은 천지본음(天地本音)의 상(象)이며, 진실로 근본이 하나임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유인씨(有人氏)는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히 여겨, 나무를 뚫어서 마찰을 일으켜 불을 밝게 비춰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물을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치니, 모든 사람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유인씨가 천년을 지내고 나서 아들 환인씨(桓人氏)에게 천부(天符)를 전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수도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천부삼인을 이어받은 환인씨는 지금의 바이칼 호에 환국이란 나라를 세운 안파견 환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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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성의 위치-오늘날 파미르 고원 일대가 바로 마고성이 있던 자리와 동시에 마고의 나라가 있었던 곳입니다.

마고성의 경제- 마고성 안 사람들이 성 안에서 솟아나는 지유를 마셨다는 점에서 마고성의 경제는 자급자족의 경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고 성 안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진 이유는 마고성 안의 식량이 부족해지자 식량을 얻기 위해 각지로 흩어진 것 같습니다.

복본사상: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고구려, 대진국, 고려의 국가적 이상으로, 잃었던 낙원 즉 마고성 시대의 원형을 되찾고자 하는 다물사상이라 합니다. 즉, 다물사상은 단순히 잃었던 영토와 국가와 문화의 영광만을 되찾자는게 아니라 오미(五味)의 변(變)으로 잃어버린 정신적 고향, 인간의 본성 즉 神性까지 되찾자는 차원높은 심오한 구도정신(求道精神)이기도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박제상, 『부도지』김태영, 『한단고기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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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신화에서 마고와 마고성을 탄생시킨 율려는?

(출처: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02&docid=500362)

 

'율려'라는 말은 음악(音樂)이나 음성(音聲)의 가락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음향'이라는 말은 소리의 울림. 공기(空氣)의 진동(振動)으로 나는 소리의 총칭(總稱)을 뜻합니다. 한자의 뜻을 높고 보면 율려와 음향으로 만물이 자랄 수 있도록 조율한다는 소리입니다. 지구 자체를 하나의 악기처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律 법 율(률)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걷는다)部와 음을 나타내는 聿(율☞붓을 손에 잡은 모양)로 이루어짐, 붓으로 구획을 긋다→잘 기록을 하는 일, 나중에 법률이라든가 音律(음률)의 뜻으로 씀.

㉠법, 법령

㉡규칙

㉢가락

㉣음률(한시의 한 체)

㉤학문상의 법칙

㉥정도

㉦한도

㉧자리

㉨지위

㉩피리

㉪빗다

㉫본뜨다

 

呂 등뼈 려(여)

사람의 등뼈가 이어져 있는 모양을 본뜸

㉠등뼈

㉡풍류

㉢음률

㉣성(姓)

 

音 소리 음  

言(언)의 口(구)속에 또는 一(일)을 더한 모양, 노래 부르거나 외거나 할 때에 곡조를 붙인 말, 또는 목구멍 속에서 나는 소리, 뚜렷한 말이 되지 않는 音聲(음성), 音(음)을 글자의 成分(성분)으로 하는 글자에는 어둡다는 뜻이 있음, 부수로서는 일반적으로 음이나 音聲(음성)·音樂(음악)의 뜻을 나타냄.

 

響 울림 향

뜻을 나타내는 소리음(音☞소리)部와 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向(향)하다의 뜻을 가지는 鄕(향)으로 이루어짐, 사방으로 전해지는 소리의 뜻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마고, 마고의 후손 풍이와 뱀의 문화

노중평

 

옛날 사람들은 종족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동물의 이름을 썼습니다. 동물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썼던 것입니다. 종족의 아이콘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 상징성이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합니다. 우리 조상이 써온 종족의 아이콘은 뱀과 곰이었습니다. 뱀은 한인천제를 배출한 풍이족의 종족 아이콘이었고, 곰은 한웅천왕을 배출한 구려족-배달족의 종족 아이콘이었습니다. 곰 아이콘은 단군왕검을 배출한 조선으로 이어졌습니다. 특이하게도 뱀아이콘이 전세계의 신화를 모두 관장하고 있습니다. 천문에도 뱀과 곰 아이콘을 그대로 반영하였습니다. 작은 뱀은 북극오성으로, 큰 뱀은 북두칠성으로 사용하였다고 봅니다. 북극오성과 북두칠성의 형상을 뱀으로 보았기 때문에 작은 뱀과 큰 뱀의 형상으로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풍이가 세상을 관장했던 시대에 이일을 하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곰을 아이콘으로 썼던 한웅천왕의 시대엔 북극오성을 작은 곰으로, 북두칠성을 큰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한인천제 때 썼던 큰 뱀과 작은 뱀 아이콘은 곰에게 본래의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다른 별자리로 옮겨 졌다고 생각됩니다. 신화시대의 사람들은 우주를 뱀을 통하여 바라보았습니다. 뱀 2 마리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우주를 표현하였습니다. 이 형상을 우로보로스라고 하였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뜻이지요.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쓰는 풍이를 알지 못한다면 이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우로보로스가 풍이의 우주관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뱀은 표음문자이고, 사巳는 표의문자입니다. 먼저 뱀이라는 표음문자를 먼저 쓰고, 사라는 표의문자를 나중에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역사는 대략 1만 년 전부터 입니다. 이때가 한국桓國이 세상에 태어나고, 한인천제桓因天帝가 종족을 이끌어 가던 시대입니다. 이때의 종족을 풍이風夷라고 했는데, 풍이라는 문자를 분석해 봄으로써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로보스를 풍이의 문자에서 온 문자로 보고 풍이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우레와 밝음을 보는 신”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우레도 신이고 밝음도 신입니다. 우레는 우레의 신 우라노스를 탄생시킨 서양의 신으로 볼 수 있고, 밝음은 밝달을 탄생시킨 동양의 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로보스의 세계에는 우레와 밝음의 두 세계가 공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풍이시대에 뱀 한 마리는 우레의 공간을 만들고, 다른 뱀 한 마리는 밝음의 공간을 만듭니다. 이 2 마리의 뱀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우레와 밝음을 만들어내는 양태극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밝음을 만들어내는 우레가 먼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현무玄武라고 하였습니다. 이 뱀 2마리의 이미지에서 마고성이 폐쇄될 때 황궁이 천산주 즉 현무玄武로 인솔해 간 풍이족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우레와 밝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조물주라는 최고의 신을 우레로 표현하기도 하고 빛으로 표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주 안에는 창조주가 있습니다. 뮤 대륙에서 전승되어 오는 문양에는 우주 공간 안에 머리가 7개가 달린 뱀이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머리 7개가 달린 뱀이 창조주이자 북두칠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뱀에서 나라야나라고 하는 문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나라那羅(國)라는 의미가 뱀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라는 신성함, 야나는 만물의 창조주를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말 “아나→아이를 낳다”라는 문자의 근원이 되는 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문자는 이렇게 뮤 대륙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무당이 신당에 걸어두는 삼신도에는 고깔을 쓴 삼신(용궁부인이라고도 함)이 있는데, 삼신도에서 보여주는 연꽃, 동심원, 고깔 등에서 우리는 6만5천년의 역사를 가진 뮤(巫라고 봄)제국의 역사와 문화가 읽어집니다. 우리의 근원이 6만5천년의 역사를 가진 뮤에 있다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마고의 후예인 우리의 선조 풍이족이 뱀의 형상으로 사巳라는 문자를 만들어 썼는데, 이 사자가 발전하여 자子라는 문자가 되었습니다. 사는 뱀을 뜻합니다. 자는 아이를 뜻합니다. 뱀에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뱀은 그 형상을 변화시키면서 다양한 의미를 가진 말로 분화하였습니다. ‘아기를 배다’라는 말의 ‘배다’가 뱀에서 왔고, 내장을 의미하는 밸이 뱀이라는 문자에서 왔다고 봅니다. 물을 건널 때 타는 배도, 사람의 배나 짐승의 배도 모두 뱀이라는 표음문자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또한 뱀을 의미하는 사巳라는 문자도 함께 쓰게 되었는데, 사는 풍이족을, 또한 풍이족 조상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상인 사를 아는 자’가 사람으로 불리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을 조상을 아는 자로 보는 것입니다. 삶이란 문자도 조상을 아는 자의 생활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문자로 봅니다. 풍이족의 임금을 표현할 때, 巳를 파巴로 만들어 썼습니다. 巴라는 문자에서 세월이 가면서 용龍이라는 문자가 나왔습니다. 파가 변하여 하가 되었습니다. 하는 한桓이 됩니다. 한은 할로 발전합니다. 이리하여 하나, 할아버지 등의 문자가 나왔다고 봅니다. 따라서 풍이족의 문화는 표음문자 뱀과 표의문자 사의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웅천왕시대엔 표음문자 곰과 표의문자 웅熊이 함께 쓰였습니다. 곰은 검이 되고, 검은 신이 됩니다. 그 어원은 마고에서 비롯합니다. 마고가 곰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화족은 곰이라는 말을 표현하지 못하여 고마固麻로 표현하였습니다. 고마란 곰이라는 뜻입니다. 마고를 도성의 신으로 좌정하였기 때문에 마고에서 다양한 의미가 분화하였습니다. 백제시대에 와서 고마 즉 곰이 초기 백제의 국도인 하북 위례성과 하남 위례성을 의미하는 문자로 쓰였습니다. 곤다는 말들도 마고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부도지(符都誌) - 잃어버린 천부인(天符印)을 찾아서

"김태형의 마고복본을 꿈꾸며"                                                   

머리말
처음 시작에 앞서…

처음에 부도지(符都誌)를 봤을 때 난 무척이나 당황을 했다. 강단 사학자들이 주장하던 역사, 내가 공부를 했었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던 역사와도 차이가 있는 또 하나의 역사…. 난 이 역사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를 놓고 많이 고민을 했었다.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편에 나오는 창조신화와도 내가 별도로 연구를 했던 창조신화와도 틀린 또 다른 하나의 세계창조관을 가지고 접근을 하여 나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 그런 책 이였다. 그리고 지금은 확신을 한다. 적어도 선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반듯이 읽어야만 선도의 목적을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고… 한단고기의 삼성기 편에 보면 한국(桓國)의 역년이 63,182년 또는 3,301년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다른 두 가지의 년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오미의 난은 무엇이고 왜 박재상이 이 책을 만들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같이 공부를 해 보기로 하자. 또한 강단사학가들에 의해 얼마나 왜곡된 역사를 배웠는지를 보면서 세계사 속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는 그러한 시간이 되도록 하겠다… ( 원래 마고성 이후 한국, 배달국으로 이어지던 부도의 법이 조선의 3국 중 진한이 신라가 되고 그 전통을 박혁거세가 받았다. 고구려는 조선의 말기 고열가단군의 폐관이후에 해모수의 반란으로 만들어진 부여의 후손으로 한단고기는 한국, 배달국, 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내용으로 실제의 주된 전통은 신라를 통해 이어 졌다 보기에 이 책은 부도지(符都誌)를 중심으로 한단고기(桓檀古記)의 내용을 추가하여 설명을 하겠다.)
개천 5897년, 단기 4332년 10월 1일 사무실에서…


[ 목차 ]

I 조화(造化)의 시대

1장 마고(麻故)의 시대
부도지 1장, 2장, 3장, 4장
제 1 부 도입에 앞서…
제 2 부 신화에의 접근

2장 부도(符都)의 시대
부도지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제 3 부 부도(符都)의 시대
제 4 부 오미(五味)의 화(禍)가 말하는 의미는…
제 5 부 한국(桓國)시대

 

II 교화(敎化)의 시대

3장 배달국 시대
부도지 11장
제 6 부 : 환웅(桓雄)씨 시대

4장 임검(壬儉)씨 시대(조선 시대)
부도지 12장, 13장, 14장, 15장, 16장
제 7 부 임검(壬儉)씨 시대

5장 오행(五行)의 화(禍)
부도지 17장, 18장, 19장, 20장, 21장, 22장, 23장, 24장
제 8 부 : ‘오행(五行)의 화(禍)’가 주는 의미
제 9부 한사군의 허구

III 치화(治化)의 시대

6장 잃어버린 부도의 법
부도지 25장, 26장
제 10부 잃어버린 부도의 법

7장 삼한에서 삼국으로
부도지 27장
제 11부 열국시대로

8장 잃어버린 역사
부도지 27장
제 12부 한사군의 허구

9장 어둠속으로
부도지 28장, 29장, 30장, 31장, 32장, 33장
제 12부 어둠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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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조화(造化)의 시대


우리나라 전통사상에서 보면 인간에게 본래 신성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동학에서는 이를 보고 인내천(人乃天)이라 하였다. 부도지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본성을 잃게 되었는지 이유가 나온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본성을 찾아 다시 마고성(이상향)으로 복본을 할 수 있는지도…부도지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면 조화(造化)의 시대와 교화(敎化)의 시대, 치화(治化)의 시대로 구분을 할 수 있다. 처음 부도의 시작에서는 땅에서 나는 지유(地乳)를 먹으므로 먹기 위해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음식이 한가지뿐이므로 맛을 추구할 수도 없어 추구해야할 욕망의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이때의 사람들은 본성만을 가지고 생활을 했으므로 신성을 가지고 있어 천지 창조에 동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할 일이 없었으므로 유일하게 할수 있는 일이란 율려(律呂)만이 존재했고 이를 율려로써 천지를 창조한 것으로 표현을 했다. 부도지는 이를 표현하기를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라 하였다.


제 1장 : 마고(麻故)의 시대
第一章

마고성(麻姑城)은 지상(地上)에서 가장 높은 성(城)이다. 천부(天符)를 봉수(奉守)하여, 선천(先天)을 계승(繼承)하였다. 성중(成中)의 사방(四方)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을 쌓아 놓고, 음(音)을 만드니, 첫째는 황궁(黃穹)씨요, 둘째는 백소(白巢)씨요, 셋째는 청궁(靑穹)씨요, 넷째는 흑소(黑巢)씨였다. 두 궁씨의 어머니는 궁희(穹姬)씨요, 두 소씨의 어머니는 소희(巢姬)씨였다. 궁희와 소희는 모두 마고(麻姑)의 딸이었다. 마고는 짐세(朕世)에서 태여나 희노(喜怒)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가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았다. 궁희와 소희도 역시 선천의 정을 받아, 결혼을 하지 아니하고, 두 천인(天人)과 두 천녀(天女)를 낳았다. 합하여 네 천녀 였다.

麻姑城은 地上最高大城이니 奉守天符하야 繼承先天이라, 成中四方에 有四位天人이 堤管調音하니 長曰 黃穹오 次曰 白巢氏오 三曰 靑穹氏오 四曰 黑巢氏也라. 兩穹氏之母曰穹姬오 兩巢氏之母曰巢姬니 二姬는 皆麻姑之女也라. 麻姑ㅣ生於朕世하야 無喜怒之情하니 先天爲男하고 後天爲女하야 無配而生二姬하고 二姬ㅣ赤受其精하야 無配而生二天人二天女하니 合四天人四天女야라.

第二章

선천(先天)의 시대에 마고대성(麻姑大城)은, 실달성(實達城)의 위에, 허달성(虛達城)과 나란히 있었다. 처음에는 햇볕만이 따뜻하게 내려 쪼일 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오직 8 여(呂)의 음(音)만이 하늘에서 들려 오니, 실달성과 허달성이, 모두 이 음에서 나왔으며, 마고대성과 마고도, 또한 이 음(音)에서 나왔다. 이것이 짐세(朕世)다. 짐세 이전에, 율려(律呂)가 몇 번 부활하여, 별들(星辰)이 출현하였다. 짐세가 몇 번 종말을 맞이 할 때, 마고가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아, 두 딸로 하여금, 오음칠조(五音七調)와 음절(音節)을 맡아보게 하였다. 성중(城中)에 지유(地乳)가 처음으로 나오니, 궁희와 소희가, 또 네 천인(天人)과 네 천녀(天女)를 낳아, 지유를 먹여, 그들을 기르고, 네 천녀에게는 여(呂)를, 네 천인에게는 율(律)을 맡아보게 하였다.

先天之時에 大成이 在於實達之上하야 與虛達之城으로 並列하니 火日暖照하고 無有具象하야 唯有八呂之音이 自天聞來하니 實達與虛達이 皆出於此音之中하고 大城與麻姑ㅣ赤生於斯하니 是爲朕世라. 朕世以前則律呂幾復하야 星辰巳現이러라. 朕世幾終에 麻姑ㅣ生二姬하야 使執五音七調之節하다. 城中에 地乳始出하니 二姬又生四天人四天女하야 以資其養하고 四天女로 執呂하고 四天人으로 執律이러라.

第三章

후천(後天)의 운(運)이 열렸다. 율려(律呂)가 다시 부활하여, 곧 음상(音象)을 이루니, 성(聲)과 음(音)이 섞인 것이었다. 마고가 실달대성(實達大城)을 끌어당겨, 천수(天水)의 지역에 떨어드리니, 실달대성의 기운이 상승하여, 수운(水雲)의 위로 덮고, 실달의 몸체가 평평하게 열려, 물 가운데에 땅이 생겼다. 육해(陸海)가 병렬(並列)하고, 산천(山川)이 넓게 뻗었다. 이에 천수의 지역이 변하여, 육지가 되고, 또 여러 차례 변하여, 수역(水域)과 지계(地界)가 다 함께 상하가 바뀌며 돌므로, 비로서 역수(曆數)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기(氣)·화(火)·수(水)·토(土)가 서로 섞여 빛이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을 구분하고, 초목(草木)과 금수(禽獸)을 살찌게 길러내니, 모든 땅에 일이 많아 졌다. 이에 네 천인이 만물(萬物)의 본음(本音)을 나눠서 관장(管掌)하니, 토(土)를 맡은 자는 황(黃)이 되고, 수(水)를 맡은 자는 청(靑)이 되어, 각각 궁(穹)을 만들어, 직책을 수호 하였으며, 기(氣)를 맡은 자는 백(白)이 되고, 화(火)를 맡은 자는 흑(黑)이 되어, 각각 소(巢)를 만들어, 직책을 지키니, 이것으로 인하여 성(姓氏)이 되었다. 이로부터 기(氣)와 화(火)가 서로 밀어, 하늘에는 찬 기운이 없고, 수(水)와 토(土)가 감응(感應)하여, 땅에는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음상(音象)이 위에 있어, 언제나 비춰주고, 향상(響象)이 아래에 있어, 듣기를 고르게 해 주는 까닭이었다.

後天運開에 律呂再復하야 乃成響象하니 聲與音錯이라. 麻姑ㅣ引實達大城하야 大城之氣ㅣ上昇하야 布幕於 水雲之上하고 實達之体ㅣ平開하야 闢地於凝水之中하니 陸海並列하고 山川이 廣圻이라. 於是에 水域이 變成地界而雙重하야 替動上下而斡旋하니 曆數始焉이라.
以故로 氣火水土ㅣ相得混和하야 光分書夜四時하고 潤生草木禽하니 全地多事라.
於是에 四天人이 分管萬物之本音하니 管土者爲黃하고 管水者爲靑하야 各作穹而守職하고 管氣者爲白하고 管火者爲黑하야 各作巢而守職하니 因稱其氏라. 自此로 氣火共推하야 天無音冷하고 水土感應하야 지무흉戾하니 此는 音象이 在上하야 常時反照하고 響象이 在下하야 均布聽聞姑也라.


第四章

이 때에, 본음(本音)을 관섭(管攝)하는 자가 비록 여덟 사람이었으나, 향상을 수증(修證)하는 자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물이 잠깐 사이에 태여 났다가, 잠깐 사이에 없어지며, 조절이 되지 못하였다. 마고(麻姑)가 곧, 네 천인과 네 천녀에게 명하여, 겨드랑이를 열어 출산(出産)을 하게 하니, 이에 네 천인이 네 천녀와 결혼하여, 각각 삼남(三男) 삼녀(三女)를 낳았다. 이가 지계(地界)에 처음 나타난 인간의 조상(人祖) 였다. 그 남녀가 서로 결혼을 하여, 몇 대(代)를 지내는 사이에, 족속(族屬)이 불어나, 각각 3000명의 사람이 되었다. 이로부터 12사람의 시조는 각각 성문(城門)을 지키고, 그 나머지 자손은 향상(響象)을 나눠서 관리하고, 수증(修證)하니, 비로서 역수(曆數)가 조절되었다. 성중(城中)의 모든 사람은, 품성(稟性)이 순정(純精)하여, 능히 조화(造化)를 알고, 지유(地乳)를 마시므로, 혈기(血氣)가 맑았다. 귀에는 오금(烏金)이 있어, 천음(天音)을 모두 듣고, 길을 갈 때는, 능히 뛰고, 걷고 할 수 있으므로, 내왕(來往)이 자재(自在)하였다. 임무를 마치자, 금(金)은 변하여 먼지가 되었으나, 그 성체(性體)를 보전하여, 혼식(魂識)이 일어남을 따라,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을 하고, 백체(魄體)가 때에 따라 움직여, 형상을 감추고도 능히 행동하여, 땅 기운(地氣) 중에 퍼져 살면서, 그 수명(壽命)이 한이 없었다.

是時에 管攝本音者ㅣ雖有八人이나 未有修證響象者故로 萬物이 閃生閃滅하야 不得調節이라. 麻姑ㅣ乃命四天人四天女하야 辟脇生産하니 於是에 四天人이 交娶四天女하야 各生三男三女하니 是爲地界初生之人祖也라. 其男女ㅣ又復交娶하야 數代之間에 族屬이 各增三天人이라. 自此로 十二人祖는 各守城門하고 其餘子孫은 分管響象而修證하니 曆數始得調節이라. 城中諸人이 稟性純精하야 能知造化하고 飮啜地乳하야 血氣淸明이라. 耳有烏金하야 具聞天音하고 行能跳步하야 來往自在라. 任務己終則遷化金塵而保己性體하야 隨發魂識而潛能言하고 時動魂體而潛能行하야 在住於地氣之中하야 其壽無量이러라

* 響(울릴 향) 


제 1 부 도입에 앞서…
부도지에서의 1,2,3,4장을 창조의 시대로 분류를 해 보았다.
혹시 본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나 ‘한단고기’에서 ‘태백일사’ 안에 보면 ‘삼신오제 본기’에서 또한 창조신화가 나온다. 나반과 아만의 이야기가 나오고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이야기도 나온다. 같은 창조신화를 이야기를 하는 것임에도 불구 하고 이 두 가지의 내용은 완전히 틀리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뭘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책이 만들어진 배경을 봐야 한다.

부도지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성인 마고성에서 있는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씨(支巢氏)에 의하여 오미(五味)의 화(禍)가 일어나 결국 황궁씨는 무리를 이끌고 마고성을 나오게 되었다.

이때 황궁씨는 다시 마고성으로 복본하기 위하여 부도의 법을 세우니 이것이 부도지의 근원이 되는 사상이다. 이후 한국과 배달국과 조선으로 이어지던 부도의 법은 진한을 통하여 박혁거세에게 이어지니 부도의 법을 신라가 이어 받았다. 그렇기에 신라의 법이 고려로 이어지나 묘청의 난 이후 세력을 잃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잊혀지게 된 것이다.

한단고기란 진한의 제후국이었던 변한을 통하여 부여 고구려 발해를 거쳐 만들어진 역사를 조선시대에 정리를 한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에서 보는 객관화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부도의 법을 찾을 수가 없어 이 책에서는 부도지를 중심으로 다른 것을 합쳐가며 이야기를 풀어 가겠다.

제 2 부 신화에의 접근

[오랜 세월 동안 신화의 형식으로 전해진 이야기의 껍데기속에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대의 경전에서 몇 년 몇 월에 입에서 불을 품는 용이 하늘에 나타났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선택 앞에 서게 된다.
1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 (어린아이나 이런 방식으로 이해 한다.)
2 철저하게 허구라고 생각 한다. (아주 손쉬운 방법이지만 과학적인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3 신화나 종교로 덮인 베일 속에서 기록의 재료가 된 사실을 찾는다. 예를 들면 혜성이나 유성, 또는 그 이 사물의 출현을 찾아내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학자와 연구자가 선택해야 하는 길이다.)]
--<잃어버린 고대문명> 중에서-
고르보프스키의 이러한 설명은 신화에 접근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잘 말한 것 같아 여기 첫머리에서 이야기를 하였다.

신화를 접근 하는 방법은 다른 역사자료와는 달리 단순히 활자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비밀을 탐구를 해 나가야 한다. 자칫 그 껍데기에 연연할 경우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바뀐 내용을 그대로 받아 들여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전혀 다른 엉뚱한 형상을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부도지의 시대흐름을 보면 마고성에서 나와 황궁씨 유인씨 한인씨 한웅씨 임검씨 부루씨 읍루씨가 각기 천년씩 7천년을 다스리는 것으로 나온다.
황궁씨가 처음 부도의 법을 밝혀 읍루씨까지 7천년의 기간동안 전해지고 그 법을 잃게 된다.
그런데 한사람이 어떻게 천년을 살 수가 있을까?
위에 제시한 방법으로 생각한다면

첫번째, 진짜 천년을 살았다(이러면 정말 신화가 되어 버린다.)
두번째, 사람이 천년을 살 수 없으므로 허구다.(가장 마음 편한 소리지만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이책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으니 조용히 덮어 주시기를 바란다.)
세번째, 이것은 인간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왕조나 혈통 그밖의 다른 것을 이야기 한다. (이것이 이 책에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사회를 보면 아주 이상한점이 보인다.
그것은 세금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국가가 유지 될수 있는 최소한의 양보다도 적다.
조금 자세히 설명을 해 보자.
마을이 있으면 치안을 위한 조직이 필요하고 그것이 많아지면 관리를 위한 행정조직이 필요하다. 그들이 행정과 치안에 전념을 하려면 그들의 생계는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기에 세금이 필요하다.
생각해 보자 백명이 사는 마을에 치안을 유지하려면 몇 명이 필요할까? 최소 두세명의 경찰조직이 필요할 것이고 마을에 일어나는 각종 분쟁을 해결할 인원도 몇 명 필요할 것이다.
또 여러 마을이 모여 고을이 되면 고을을 관리할 조직이 또 필요 할 것이고. 고을이 모여 국가가 되면 국가를 관리 할 조직이 또 필요 할 것이다. 또한 국방을 담당하는 군사조직도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이것 저것 다 따져 보면 세금이 최소 1/4에서 1/2사이 이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당시는 국가를 유지 할 최소한의 세금도 없는 것이다. 또한 한국 배달국 조선은 너무나 큰 영토를 가지고 있으나 한국이 3301년, 배달국이 1565년, 조선이 2096년…
너무나도 오랜 기간동안 국가를 유지 할수 있었다.
중국의 여러 국가들, 사라센, 몽고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거대한 국가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국가를 유지한 전래가 있는가?
이 규모로 이정도 기간을 유지 할려고 한다면 상식적으로는 강력한 중앙 통제 체제가 정비 되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선 과도한 세금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적은 세금을 거뒀다. 이는 당시의 모습이 우리의 상식상에 있는 국가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후조선시대때 보면 마을마다 연세가 드시고 인망이 높아 마을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한명씩 있다. 사람들은 관가의 말보다 고을 원님의 말보다 이분의 말을 더 따르고 마을의 대소사를 이분께 논의를 하였다. 나는 이것을 마고의 흔적이라 보고 싶다. 그렇게 적은 세금으로 관리가 불가능하다면 중앙에서 관리를 하지는 않고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은 없는가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치안과 관리를 맡으면 어떨까 그러면 치안을 위한 관리를 위한 조직이 불필요 할 것이고 약간의 군사조직이나 중앙 조직만 있으면 되니까 세금이 적어도 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마을 마다 존경 받는 사람이 있고 이사람은 또 자신보다 학식이나 덕망이 더 높은 사람을 따르고…
인류의 큰 스승은 천년에 한명씩 나온다니까 이렇게 보면 황궁씨 유인씨 환인씨등이 천년을 사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을까?
당시는 힘으로 통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깨닮음으로 자율적으로 따르는 세상이였고 큰 스승의 법이 천년을 내려 간다 하면….
앞의 모든 것이 시원하게 설명이 된다.

자 그러면 이제 다시 부도지로 들어 와서 계속하겠다.

앞의 부도지 1장에서 보면 마고(麻姑)가 선천(先天)을 남자(男子,陽)로 후천(後天)을 여자(女子,陰)로 하여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았다. 이 둘이 다시 선천의 정기(陽)의 기운을 받아 황궁씨(黃穹氏)와 청궁씨(靑穹氏),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를 낳았다. 이들로 하여금 오음칠조(五音七調)와 음절(音節)을 맡게 하고, 다시 네 천인(四天人)과 네 천녀(四天女)를 낳아 율과 여를 맡아 보게 하였다.
마고가 네 천인(四天人)과 네 천녀(四天女)에게 명하여 이들이 합하여 각기 3남 3녀를 낳으니 모두 12쌍 24명이 되었다. 한국의 본체가 되는 9황64민이 다 이들의 후손이 된다.

자 이상이 부도지(符都誌)의 1,2,3,4장을 총괄한 족보이다.
여기서 어떠한 수(數)가 보이고 무엇을 느끼는가?

단순하게 그냥 조상님의 족보로만 생각하지 말고 잘 살펴보자.
글쎄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생각이 되는가?

좋다 그럼 이번에는 동양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역학(易學)에서 살펴보자.

태초에 무극(無極)이 있으니 무극에서 태극(太極)이 나오고 태극에서 사상(四象) 팔괘(八卦) 육십사괘(六十四卦)로 나눠지면서 황극(黃極)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극(極)에 이르면 다시 무극으로 환원을 하고….
이렇게 놓으니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시간에 비유를 하니 우주는 밤과 낮으로 나누고 다시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로 나누고 각 계절이 3으로 나눠져서 12달이 되고 각 달에서 음과 양으로 나누면 24절기가 되고….
이러니 이것 봐라 이번에는 이것과도 비슷하네…

그럼 이건 그렇다 치고 왜 음을 통해 해석을 했나 알아보자.
부도지에서는 음(音)이 우주 삼라만상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을 했는데 그 의도는 무엇인가?…

음이란 파장이다. 율과 여에서 율이란 상승파장 즉 오행에서는 상생의 힘을 말하는 것이고 여라는 것은 하강파장 즉 오행에서는 상극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양적인 부분에서는 이들이 팽창과 수축을 통하여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겪으면서 변화를 하나 이들의 내면 즉 음적인 부분에서는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영향을 받아 사물의 변화를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땅에서 나는 지유를 먹으면서, 실달성과 허달성의 가운데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중간에 서서 육체를 가진 인간의 형상과 신성을 동시에 가지고 창조에 동참을 하니 이는 기독교의 에덴동산이요, 그리스신화의 황금의 시대 였다.

이렇게 만상을 갖춰 놓으니 비로서 역수가 시작되고 인류가 시작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제 2장 : 부도(不渡)의 시대
第五章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유천(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나 되었다. 곧 돌아와 소(巢)에 오르니, 배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 귀에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의 넝쿨에 달린 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곧 소(巢)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

넓고도 크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한다.
이 어찌 도(道)인가!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소씨의 말을 의심하였다. 지소씨가 참으로 좋다고 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포도를 많이 먹었다,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에 제족이 포도를 많이 먹었다.

白巢氏之族 支巢氏ㅣ與者人으로 往飮乳泉할새 人多泉少어늘 讓於諸人하고 自不得飮而如是者五次라. 乃歸而登巢하야 遂發飢惑而眩倒하니 耳嗚迷聲하야 呑嘗五味하니 卽巢欄之蔓籬萄實이라. 起而偸躍하니 此被其毒力故也라. 乃降巢闊步而歌曰浩蕩兮天地여 我氣兮凌駕로다. 是何道兮요 萄實之力이로다. 衆皆疑之하니 支巢氏曰眞佳라하거늘 諸人이 奇而食之하니果若其言이라.於是에 諸族之食萄實者多러라.

第六章

백소씨(白巢氏)의 사람들이 듣고 크게 놀라, 곧 수찰(守察)을 금지하니 이는 또 금지하지 아니하되, 스스로 금지하는, 자재율(自在律)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열매를 먹는 습관과 수찰을 금지하는 법이 시작되니, 마고가 성문을 닫고 수운(水雲)의 위에 덮혀 있는 실달대성의 기운을 거두어버렸다.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齒)가 생겼으며, 그 침(唾)은 뱀의 독(毒)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이는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수찰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눈이 밝아져서, 보기를 올빼미 같이 하니, 이는 사사로이 공률(公律)을 훔쳐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의 혈육이 탁(濁)하게 되고, 심기(心氣)가 혹독하여져서, 마침내 천성을 잃게 되었다. 귀에 있던 오금(烏金)이 변하여 토사(兎沙)가 되므로, 끝내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발은 무겁고, 땅은 단단하여, 걷되 뛸 수가 없었으며, 태정(胎精)이 불순하여, 짐승처럼 생긴 사람을 많이 낳게 하였다. 명기(命期)가 조숙(早熟)하여, 그 죽음이 천화(遷化)하지 못하고 썩게 되었으니, 이는 생명의 수(數)가 얽혀 미혹(迷惑)하게 되고,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白巢氏之諸人이 聞而大驚하야 乃禁止守祭하니 此又破不禁自禁之自在律者也라. 此時에 食實之習과 禁祭之法이 始하니 麻姑閉門撤冪이러라. 已矣오 食實成慣者ㅣ皆生齒하야 唾如蛇毒하니 此는 强呑他生故也오 設禁守祭者ㅣ皆眼明하야 視似치目하니 此는 私 公律故也라. 以故로 諸人之血肉이 化하고 心氣ㅣ酷變하야 遂失凡天之性이라. 耳之烏金이 化作兎沙하야 終爲天聲하고 足重地固하야 步不能跳하며 胎精不純하야 多生獸相이라. 命期早熟하야 其終이 不能遷化而 하니 此는 生命之數ㅣ 惑 縮故也라.


第七章

이에 사람(人世)들이 원망하고 타박하니, 지소씨가 크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져서, 권속(眷屬)을 이끌고 성을 나가, 멀리 가서 숨어 버렸다. 또 포도의 열매를 먹은 자와, 수찰을 하지 아니한 자도, 역시 모두 성을 나가,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가니, 황궁(黃穹)씨가 그들의 정상을 불쌍하게 여겨 고별(告別)하여 말하기를, [여러분의 미혹(迷惑)함이 심대(甚大)하여 성상(性相)이 변이(變異)한 고로 어찌할 수 없이 성중(城中)에서 같이 살 수가 없게 되었오. 그러나, 스스로 수증(修證)하기를 열심히 하여, 미혹함을 깨끗이 씻어, 남김이 없으면, 자연히 복본(復本) 할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시오.]하였다. 이 때에 기(氣)와 토(土)가 서로 마주치어, 시절(時節)을 만드는 광선(光線)이, 한 쪽에만 생기므로, 차고 어두웠으며, 수(水)와 화(火)가 조화를 잃으므로, 핏기 있는 모든 것들이 시기하는 마음을 품으니, 이는, 빛을 거둬들여서 비추어 주지 아니하고, 성문이 닫혀 있어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於時에 人世ㅣ怨咎하니 支巢氏ㅣ大恥顔赤하야 率眷出城하야 遠出而隱이라. 且氣慣食萄實者와 設禁守祭者ㅣ亦皆出城하야 去各地하니 黃弓氏ㅣ哀憫彼等之情狀하야 乃告別曰 諸人之惑量이 甚大하야 性相變異故로 不得同居於城中이라. 然이나 自勉修證하야 淸濟惑量而無餘則自然復本하리니 勉之勉之하라. 是時에 氣土相値하야 時節之光이 偏生冷暗하고 水火失調하야 血氣之類ㅣ皆懷猜忌하니 此는 冪光이 卷撤하야 不爲反照하고 城門이 閉隔하야 不得聽聞故也라.


第八章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혼탁(混濁)이 지극하여, 청정(淸淨)을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황궁(黃穹)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물러나와 제족(諸族)에게 고하기를 [오미의 재앙이 꺼꾸로 밀려오니, 이는 성을 나간 사람들이 이도(理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혹량(惑量)이 불어 났기 때문이다. 청정(淸淨)은 이미 없어지고, 대성(大城)이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이 때에 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본전하고자 하므로, 황궁씨가 곧 천부(天符)를 신표(信標)로 나누어 주고, 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復本)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已矣오. 出城諸人中悔悟前非者ㅣ還到城外하야 直求復本하니 此未知有復本之時所故也라. 乃欲得乳泉하야 掘鑿城廓하니 城址破損하야 泉源이 流出四方이라. 然이나 卽化固土하야 不能飮철이라. 以故로 城內에 遂乳渴하니 諸人이 動搖하야 爭取草果하니 混濁至極하야 難保淸淨이라. 黃穹氏ㅣ爲諸人之長故로 乃束身白茅하고 謝於麻故之前하야 自負五味之責하여 立誓復本之約이러라. 退而告諸族曰五味之禍ㅣ反潮逆來하니 此出城諸人이 不知理道하고 徒增惑量故也라. 淸淨已破하고 大城將危하니 此將奈何오.

 

是時에 諸天人이 意決分居하야 欲保大城於完全하니 黃穹氏ㅣ乃分給天符爲信하고 敎授採葛爲量하야 命分居四方이라. 於時에 靑穹氏ㅣ率眷出東間之門하야 去雲海洲하고 白巢氏ㅣ率眷出西間之門하야 去月息洲하고 黑巢氏ㅣ率眷出南間之門하야 去星生洲하고 黃穹氏ㅣ率眷出北間之門하야 去天山洲하니 天山洲는 大寒大險之地라. 此는 黃穹氏ㅣ自進 難하야 忍苦復本之 盟誓러라.


第九章

분거제족(分居諸族)이 각 주(洲)에 이르니, 어느덧 천년이 지났다. 옛날에 먼저 성을 나간 사람들의 자손이 각지(各地)에 잡거(雜居)하여,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거의가 그 근본을 잃고, 성질이 사나와져서, 새로 온 분거족을 보면, 무리를 지어 추격하여 그들을 해하였다. 분거족이 이미 정주(定注)하니, 바다와 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왕이 거의 없었다. 이에 마고가 궁희와 소희와 더불어 대성을 보수하여, 천수(天水)를 부어 성내(城內)를 청소하고, 대성(大城)을 허달성(虛達城)의 위로 옮겨버렸다. 이 때에 청소를 한 물이 동과 서에 크게 넘쳐 운해주의 땅을 크게 부수고, 월식주의 사람을 많이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지계(地界)의 중심(重心)이 변하여, 역수(曆數)가 차이가 생기니, 처음으로 삭(朔)과 판(昄)의 현상이 있었다.

分居諸族이 繞倒各洲하니 於焉千年이라. 昔世出城諸人之裔ㅣ難居各地하야 其勢甚盛이라. 然이나 殆忘根本하고 性化猛獰하야 見新來分居之族則作群追跡而害之러라. 諸族이 已定住하니 海阻山隔하야 來往이 殆絶이라. 於時에 麻故與二姬로 修補大城하고 注入天水하야 淸掃城內하고 移大城於虛達之上이러라. 是時에 淸掃之水ㅣ大漲於東西하야 大破雲海之地하고 多滅月息之人이라. 自此로 世界之重이 變化하야 曆數生差하니 始有朔昄之象이라.


第十章

황궁씨가 천산주에 도착하여, 해혹(解惑)하여 복본(復本)할 것을 서약하고, 무리에게 수증(修證)하는 일에 근면하도록 고하였다. 곧 장자(長子) 유인(有因)씨에게 명하여, 인세(人世)의 일을 밝히게 하고, 차자(此子) 와 삼자로 하여금 모든 주(洲)를 순행(巡行)하게 하였다. 황궁씨가 곧 천산(天山)에 들어가 돌이 되어, 길게 조음(調音)을 울려, 인세의 혹량을 남김 없이 없앨 것을 도모하고, 기어이 대성 회복의 서약을 성취하였다. 이에 유인씨가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이어 받으니, 이것은 곧 천지본음(天地本音)의 상(象)으로, 그것은 진실로 근본이 하나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유인씨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나무를 뚫어서 마찰을 시켜 불을 일으켜서 밝게 비춰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물을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치니, 모든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유인씨가 천년을 지내고 나서, 아들 한인(桓因)씨에게 천부를 전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계불을 전수(專修)하며 나오지 아니하였다.
환인씨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크게 밝히니, 이에 햇빛이 고르게 비추고, 기후가 순조로와 생물들이 거의 안도함을 얻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괴상한 모습이 점점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는 3세(황궁, 유인, 환인)가 수증하기 삼천년에 그 공력이 거의 없어질만큼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黃穹氏ㅣ到天山洲하야 誓解惑復本之約하고 告衆勸勉修證之業이라. 乃命長子有因氏하야 使明人世之事하고 使次子三子로 巡行諸洲러라. 黃穹氏乃入天山而化石하야 長嗚調音하야 以圖人世惑量之除盡無餘하고 期必大城恢復之誓約成就러라. 於是에 有因氏ㅣ繼受天符三印하니 此卽天地本音之象而使知其眞一根本者也라. 有因氏ㅣ哀憫諸人之寒冷夜暗하야 鑽燧發火하야 照明溫軀하고 又敎火食하니 諸人이 大悅이라. 有因氏千年에 傳天符於子桓因氏하고 乃入山하야 專修契불不出이라. 桓因氏ㅣ繼受天符三印하야 大明人世證理之事하니 於是에 日光均照하고 氣侯順常하야 血氣之類ㅣ庶得安堵하고 人相之怪ㅣ稍得本能하니 此는 三世修證三千年에 其功力이 庶幾資於不 者也라.


제 3 부 : 부도(符都)의 시대


내가 부도지를 보면서 가장 많이 고민을 한 것은 과연 이것이 어느 시대냐는 것이다.
부도지를 읽어 보면 거의가 인물 중심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우선 몇 가지 알고 있는 사실을 중심으로 시대를 분류 하였다.
일단 전체의 족보를 보면
이 뒤에서도 보면 마고가 궁희와 소희를 낳고 이들이 세상의 창조주로 조화를 담당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4명의 천인을 낳고, 다시 8명의 천인을 낳는 것으로 하여 이들이 총 12명의 천인을 낳는다.

앞에서 보면 [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보전하고자 하므로…]라는 대목이 나온다 환국이 총 12개의 연방국가 이고 이들은 12명이다.
또한 환국의 역사를 보면 삼성기에서 63,182년 또는 3,301년이라 했는데 부도지 10장에 보면 황궁씨, 유인씨, 환인씨가 각기 1,000년을 다스렸다 했으니 합이 3,000년이니 환국의 역사 3,301년과 유사하다.

뒤에 보면 임검씨때는 시대적 배경이 중국의 요순 때이니 이는 단군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 환웅씨는 자연히 배달국의 환웅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황궁씨다, 유인씨다 하는 것은 특정한 인물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환인이란 특정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환이란 밝다는 뜻이고 인이란 님이란 존칭에 해당하는 이두식 표현이라 한다.

이렇게 놓고 봤을 때 마고성시대는 환국의 역사 63,182년 중 3,301년을 뺀 나머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이 된다.

몇몇 상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50,000년에서 60,000년 전에 이미 초 고대문명이 있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내 놓기도 하니 그것이 이 마고성의 시대가 아닌가 한다.
또 신의 지문이라는 책에서 보면 약 1만년 전에 지구에 큰 변혁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9장에서 보면 마고가 마고성을 청소하면서 큰 변혁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때가 환국으로 보면 시기적으로 일치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 4 부 : 오미(五味)의 화(禍)가 말하는 의미는..

부도지에서 오미의 화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왜 많고 많은 것 중에서 하필이면 포도를 먹었을까?
성경에서는 사과(선악과)를 먹었다는데 이 차이점은 뭘까?
왜 이것 때문에 마고성에서 나와야 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했을까?
땅에서 솟아나는 지유를 먹었다 함은 힘들여 먹을 것을 탐할 필요도 없었고 먹기 위해서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의식주 문제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노동이 없었고 욕망이 없었다.
이를 그리스신화에서는 황금의 시대로 말하였고 성경에서는 에덴동산, 우리 신화에서는 마고성 시대로 말하였다.
포도(사과_성경)를 먹었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맛을 알게 되었고 식욕에 대한 욕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식욕과 성욕을 같은 개념으로 본다.

결국 식욕과 성욕을 중심으로 성취욕, 명예욕, 인정에 대한 욕구 등 각종 욕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포도에 달린 이 수많은 알갱이가 하나에서 엮어가는 수많은 욕망을 상징화 시킨 것이다.
결국 이 욕망에 의해 관념(선악과)이 생겨나고 이 관념으로 인해 여러 가지 피해의식이 생겨나고 결국 본성이 가려져 신성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마고성시대는 욕망이 없는 본성만이 있는 시대 였기에 법이라는 것이 필요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백소씨족에 의해 오미의 난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그들은 마고성을 나왔으나 결국 법이 없었던 관계로 욕망의 세계에서 살다가 일부 인원이 속은 놔두고 껍질만을 가지고 섣불리 마고성(깨닮음)시대로 환원을 하려 했다가 결국 전체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에 황궁씨는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시대로 나왔으나 언젠가는 다시 본성을 찾아 마고성을 복본(復本)하려는 사명을 띄게 된다.

그래서 백소씨의 예를 상기하여 법을 세우고 이 법으로써 백성을 이끌게 되는 것이다.
이 법과 하나가 되어 생활한 시대가 고열가단군시대 까지다.
삼일신고를 통해 지감 조식 금촉하여 본성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제 5 부 : 한국(桓國)시대
한국(桓國)은 시베리아(사백력, 斯白力) 하늘 밑 바이칼 호수의 동쪽으로 흐르는 흑룡강(黑龍江, 龍江, 天河, 天海)을 중심으로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의 거대한 제국이다. 한국(桓國)의 한이란 밝다는 말이다.
한국은 7대 한인(桓因)이 3,301년 동안 나라를 이뤘다.



II 교화(敎化)의 시대


교화(敎化)의 시대….
교화의 시대란 마고성에서 나온이후의 시대를 말한다.
오미의 화 이후 많은 혼란기가 있다.
이때 황궁씨는 준비가 되지 않았던 백소씨의 일족 일부와 지소씨의 일족이 세상에 나왔다가 적응치 못하고그 법을 잃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 법을 보존키 위해서는 다시말해 마고로의 복본을 위해서는 사람들을 흩어지지 않게 묶어 줄 수 있는 법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천부삼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바로 본성을 가리는 욕망을 제어 해야 다시 마고성(본성)으로의 복본이 가능함을 알기에 천부삼인의 가르침을 내려 바른 길로 인도하고 스스로의 모범을 보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쫗아 다시 마고로의 복본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교화의 시대라 한다.

교화의 시대에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한국(桓國) 천손족의 시대, 배달국, 조선…
처음 마고성에서 나온 이들을 지손족(당시의 원시 부락)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신령스럽고 밝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천인이라 불렀고 이들을 가르켜 한님(桓因), 즉 하느님이라 불렀으며 한님이 사는 나라라 해서 한국이라 했다.
배달국은 천손족과 지손족이 결합한 최초의 국가이다.
한(桓)이란 하늘을 말하는 것이고 웅(雄)이란 땅을 말하는 것이니 한웅(桓雄)이란 천손족과 지손족을 아우르는 말 일것이다.
이때를 최초로 하늘(천손족)을 열어 땅(지손족)을 받아 들였다 하여 개천(開天)이라 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최초로 지손족중에 왕이 출현을 하니 이가 무리들 중에 왕이라는 뜻에서 임검(壬儉)이라 하였고 이가 바로 단군왕검이시다.
지손족이 하늘로부터 나라를 물려 받아 세웠다 하여 하늘이 주신 땅이라 하여 ‘쥬신’이라 불렀고 ‘쥬신’ 의 이두식 표기가 조선(朝鮮)이다.
중국 요와 순의 오행의 화로 인해 조선이 문화 침투를 당하여 42대 단군이후로는 지방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결국 47대 단군 고열가단군께서 부도의 법을 닫고 폐관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후가 치화(治化)의 시대 이니, 치화의 시대 앞 약 7천년에 이르는 기간을 교화의 시대라 한다.



제 3 장 : 배달국 시대
第十一章

환인씨의 아들 환웅씨는 태여날 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 삼인을 계승하여, 수계제불 (修계除불) 하였다. 천웅(天熊)의 도를 수립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래한 바를 알게 하였다. 어느덧 인세(人世)가 의식(衣食)의 일(業)에만 편중하므로, 환웅씨는 무여율법(無餘律法) 조(條)를 제정하여, 환부(鰥夫)로 하여금 조절하게 하였다.

 

1조는, 사람의 행적(行蹟)은, 때때로 깨끗하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생귀(生鬼)가 되지 않게 하고 번거롭게 막혀, 마귀(魔鬼)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통명무여일장(通明無餘一障)하게 하라.

 

2조는, 사람의 취적(聚積)은, 죽은 뒤에 공을 제시하여, 생귀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게 하고, 함부로 허비하여, 마귀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보흡무여일감(普洽無餘一憾)하게 하라.

 

3조는, 고집이 세고 사혹(邪惑)한 자는 광야(曠野)에 귀향을 보내, 때때로 그 사옥함을 씻게 하여, 사기(邪氣)로 하여금, 무여어세상(無餘於世上)하게 하라.

 

4조는, 죄를 크게 범한 자는 섬도(暹島)에 유배시켜 죽은 뒤에 그 시체를 태워서, 죄집(罪集)으로 하여금, 무여어지상(無餘於地上)하게 하라 였다.

 

또 궁실(宮室)을 짓고, 배와 차(車)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거주(居住)하고, 여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환웅씨가 바다에 배를 띄워 시승(始承)하여 사해(四海)를 순방하니,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제족의 소식을 소통하여 근본을 잊지 않을 것을 호소하고, 궁실을 짓고, 배와 차를 만들고, 화식(火食)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었다. 환웅씨가 돌아와 8음2문(八音二文)을 수학하고, 역법(曆法)을 정하고 의약술(醫藥術)을 수업하며,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를 저술하니, 홍익인세(弘益人世)였다. 이는, 세대는 멀어지고, 법은 해이하여져서, 모든 사람들이 몰래 사단(詐端)을 모색하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에, 일용(日用)하는 사물 사이에서, 근본의 도를 보전하여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비로소 학문을 하는 풍조가 일어나니, 인성(人性)이 혼매(昏昧)하여, 배우지 않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桓因氏之子桓雄氏ㅣ生而有大志하야 繼承天符三印하고 修계除불하고 立天雄之道하야 使人知其所由러라. 於焉人世ㅣ偏重於衣食之業하니 桓雄氏ㅣ制無餘律法四條하야 使鰥夫로 調節하니

一曰人之行蹟은 時時淸濟하야 勿使暗結生鬼하며 煩濟化魔하야 使人世로 通明無餘一障하라.

二曰人之聚積은 死後堤功하야 勿使陳垢生鬼하며 濫費化魔하야 使人世로 普洽無餘一憾하라.

三曰頑 邪惑者는 謫居於曠野하야 時時被其行하야 使邪氣로 無餘於世上하라.

四曰大犯罪過者는 流居於暹島하야 死後焚其尸하야 使罪集으로 無餘於地上하라.

 

又作宮室舟車하야 敎人居旅러라. 於是에 桓雄氏ㅣ始乘舟浮海할새 照證天符修信하고 疏通諸族之消息하며 訴言根本之不忘하고 敎宮室舟車火食之法이너라. 桓雄氏ㅣ歸而修八音二文하고 定曆修醫藥하며 述天文地理하니 弘益人世라. 此는 世遠法弛하야 諸人之暗취摸 이 增詐端故로 欲保根本之道於日 用事物之間而使昭然也라. 自是로 始興修學之風하니 人性昏昧하야 不學則不知故也라.


제 6 부 : 환웅씨 시대.

부도지에서는 환웅씨에 관해서는 거의 나온 것이 없다.
그래서 한단고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기에 적어 보겠다.

한인의 서자 환웅이 있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 한다.

배달국은 9개의 나라로 이루워져 있고 18대 환웅이 1565년간 재위하였다.
한단고기에서 ‘삼성기’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뒤에 한웅씨(桓雄氏)가 계승하여 일어났다.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 왔다. 자정(子井)과 여정(女井)을 천평(天坪)에 마련하고 청구(靑邱)에 정지(井地)를 정했다. 천부인(天符印)을 지니고 다섯가지 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에 머무르며 인간을 교화하고 크게 이롭게 하였다.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배달(倍達)이라 하였다. (…)]


제 4 장 : 임검(壬儉)씨 시대(조선시대)
第十二章

환웅씨가 임검(壬儉)씨를 낳았다. 때에 사해의 제족(諸族)이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혹(迷惑)속에 빠져, 세상이 고통스러웠다. 임검씨가 천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천웅의 도(天雄之道)를 닦아, 계불의 의식을 행하여,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갈고, 심고, 누에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交易)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임검씨가 뿌리를 먹고, 이슬을 마시므로, 몸에는 털이 길게 나가지고, 사해를 널리 돌아다니며, 제족을 차례로 방문 하였다. 백년사이에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해혹복본(解惑復本) 할 것을 맹서하며, 부도(符都)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은 멀고 소식은 끊어져, 제족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로 변하여 서로 다르게 되었기 때문에, 함께 모여 협화(協和)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여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후일에 회강(會講)의 실마리가 되니, 인사가 번거롭고 바빠, 강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桓雄氏生壬儉氏하니 時에 四海諸族이 不講天符之理하고 自沒於迷惑之中하야 人世因苦라. 壬儉氏懷憂於天下하고 修天雄之道하며 行계불之儀하야 繼受天符三印이라. 敎耕稼蠶葛陶 之法하고 布交易稼 錄之制러라. 壬儉氏ㅣ啖根吸露하고 身生毛 하야 遍踏四海하야 歷訪諸族하니 百年之間에 無所不往이라. 照證天符修信하고 盟解惑復本之誓하며 定符都建設之約하니 此는 地遠信絶하야 諸族之言語風俗이 漸變相異故로 俗講天符地理於會同協和之
而使明之也라. 是爲後日會講之緖하니 人事煩忙하야 不講則忘失故也라.


第十三章

임검(壬儉)씨가 돌아와 부도(符都)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다. 즉 동북의 자방(磁方)이었다. 이는 2와 6이 교감(交感)하는 핵심지역이요, 4와 8이 상생(相生)하는 결과의 땅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십방으로 갈리어 나가니, 즉 9와 1의 끝과 시작이 다하지 않는 터전이었다. 삼근영초(三根靈草)와 오엽서실(五葉瑞實)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이 금강(金剛)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려, 전 지역에 두루 가득하니, 이는 1과 3과 5와 7의 자삭(磁朔)의 정(精)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곧 태백산 밝은 땅의 정상에 천부단(天符壇)을 짓고 사방에 보단(堡壇)을 설치 하였다. 보단의 사이에는 각각 세 겹의 도량길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길의 사이는 천 리였으며, 도랑길의 좌우에 각각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는 마고본성(麻故本城)에서 그 법을 취한 것이었다. 부도의 하부를 나눠 마을을 만들었다. 삼해(三海)의 주위에 둥그렇게 못에 잠기었다. 사진(四津)과 사포(四浦)가 천 리 간격으로 연결되어, 동서로 줄을 지어 둘러쌌다. 진(津)과 포(浦)사이에 다시 6부를 설치 하였다. 6부에는 제족(諸族)이 살았다. 부도가 이미 이루어지니, 웅려(雄麗)하고 광명하여 사해를 총화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제족의 생맥(生脈)이었다.

壬儉氏ㅣ歸而擇符都建設之하니 卽東北之磁方也라. 此는 二六交感懷核之域이오 四八相生潔果之地라. 明山麗水ㅣ連선萬里하고 海陸通涉이 派達十方하니 卽九一終始不 之其也라. 三根靈草와 五葉瑞實과 七色寶玉이 托根於金剛之臟하야 遍滿於全域하니 此一三五七磁朔之精이 會方成物而順吉者也라. 乃築天符壇於太白明地之頭하고 設保壇於四方이라. 保壇之間에 各通三 道溝하니 其間이 千里也오 道溝左右에 各設守關하니 此取法於麻故之本城이라. 劃都坊於下部之休하고 圖涵澤於三海之周하니 四律四浦ㅣ連隔千里하야 環列於東西라. 律浦之間에 又設六部하니 此爲諸族之率居也라. 符都 成하니 雄麗光明하여 足爲四海之總和요 諸族之生脈

第十四章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곧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흘려 보내, 사해의 제족을 초청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 숲에 신시를 크게 열고, 수계정심(修禊淨心)하여, 천상(天象)을 살핀 후, 마고의 계보(系譜)를 닦아 그 족속(族屬)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문(語文)을 정리 하였다. 또 북진(北辰)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전(奠)을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악(樂)을 연주하였다. 제족이 방장산(方丈山) 방호의 굴(方壺之堀)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여 칠난(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반듯이 신시를 여니, 이에 어문(語文)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로 되어, 인세가 태화(太和)하였다. 인하여 바닷가에 성황(城隍)을 지어 천부에게 전을 올리고, 제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

第十五章

또 예와 양(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팔택(八澤)에 해시(海市)를 열어, 매년 10월에 조제(朝祭)를 행하니, 사해의 제족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의 제족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제족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공진하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하였다.


 

이를 가르켜 조선제(朝鮮祭)라 하였다. 이 때에 산악과 해양의 제족이 물고기와 육(肉)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이 거개가 저린 어물과 조개와 가죽류이기 때문에 곧 희생제(犧牲祭)를 행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 하고, 공에 보답하게 하였다. 피에 손가락을 꽂아 생명을 성찰하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을 보답하니, 이는 물체가 대신 오미의 잘못을 보상하여, 재앙을 먿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즉 육친고충의 고백이었다. 언제나 세제(歲祭) 때에는 물화(物貨)가 폭주 하므로 사 진과 사 포에 해시를 크게 열고, 몸을 깨끝하게 하여, 지리(地理)를 거울 삼아,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며, 물성(物性)의 근본을 분별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 또 부도 팔택의 모양을 본떠서 뭇을 파고, 곡수(曲水)의 사이에서 보새(報塞)를 지내고, 회연(會燕)하여 제물(濟物)하는 의식(儀式)을 행하였다. 제족이 봉래산 원교봉(圓嶠峯)에서 오서(五瑞)의 열매를 얻으니, 즉 잣나무 열매였다. 봉래 해송(海松)이라 하여, 은혜롭게 오행(五幸)을 얻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사해가 산업이 일어나서 교역이 왕성하게 되므로, 천하가 유족하였다.

第十六章

시(市)에 온 사람들은 영주(瀛州) 대여산(岱與山) 계곡에서 삼영근(三靈根)을 얻으니, 곧 인삼이었다. 그것을 영주 해삼  이라 하였으며, 능히 삼덕(三德)을 보전하고 돌아갔다. 대개 인삼이 그 수격(數格)을 갖추어, 자삭방(磁朔方)에서 난 것은 반드시 장생하니 40세(歲)를 1기로 휴먼하고, 13기를 1삭(朔)으로 축정(蓄精)하고, 4삭을 경과하여 씨(子)를 맺어 화(化)하니, 이러한 것은 부도의 지역이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방삭초(方朔草)라 하니,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 혹 작은 뿌리라도 부도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 영효(靈効)가 있으므로, 시(市)에 온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구하였다. 대저 삼근영초(三根靈草)의 인삼과, 오엽서실(五葉瑞實)의 잣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의 부인은 진실로 불암삼역(不咸三域)의 특산이요, 사해제족(四海諸族)의 천혜(天惠)였다.

제 7 부 : 임검(壬儉)씨 시대

여기서 임검씨란 그 시대적 배경이 요순임금의 시대 이므로 한배검 단군을 말하는 것 같다.

앞서 환국과 배달국에서의 임금은 천손족인 마고성의 후예였으나 한배검 단군께서는 웅족(熊族, 지손족)중 가장 세력이 강한 단국(檀國)의 후손으로 천손족에서 지손족으로 이어지는 첫임금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라의 이름도 하늘(天, 천손족)이 주신국가라 하여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또한 한배검께서는 조선의 전체의 행정구역을 3한(三韓, 三王)이 나눠, 한배검 자신은 진한(辰韓) 인 진임금(辰王)으로써 마한(馬韓)과 변한(卞韓)을 거느리고 있었다.

임검씨는 먼저 흩어져 있는 마고성의 여러 민족을 찾아 다니며 부도를 다시 건설 할 것을 약속하고 6만의 백성을 먼저삼신산으로 이주시켜 자리를 지키게 하고, 텟목 8만을 만들어 이주를 하여 박달나무숲에 신시를 여셨다. 이는 흩어진 마고성의 여러 민족을 모아 천부의 이치를 가르쳐 분명히 알게 하여 부도의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다.

임검씨는 마고성을 모방하여 신시를 꾸미고 사방에 흩어진 민족들을 초청하였다.


III 치화(治化)의 시대

치화의 시대의 계기가 된 것은 [오행의 화]이나 이때 치화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만들어 진 것이지 이때부터 치화의 시대는 아니다. 본격적인 치화의 시대는 47대 고열가단제의 폐관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부터 오행의 화에 대해 나오는데 부도지의 내용중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다.
오행의 화란 하늘에 대한 인간의 반란으로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흐름을 바꿔 놓았고 결국 그것이 조선의 막을 내리며 부도의 법이 끊어 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제 5 장 : 오행(五行)의 화(禍)

第十七章

이 때에 도요(陶堯)가 천산(天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다. 일차로 출성(出城)한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堡)의 간(干)에게서 도(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수(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수5중(九數五中)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중5(中五) 이외의 8은,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내(內)로써 외(外)를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오행(五行)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有因)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壬儉)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갔기 때문에, 비어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흩어졌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중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명협(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하여 부도(符都)의 역을 버리니, 이는 인세 두번째의 큰 변이었다.

第十八章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을 하고, 공순하게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유호씨가 부도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오미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보다 나이를 100여살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업(業)을 이어, 임검씨를 도와, 도를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사자(使者)가 되어, 완미(頑迷)한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有舜)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딴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 주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마침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第十九章

이 때 유호씨가 수시로 경계를 하였으나, 순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요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하였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하였다. 유호씨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으므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을 가리어, 수사(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세(人世)가 곤고(困苦)하여 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 곧 차자(次子)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권사(勸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하였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서 죽고,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가 순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한다고 말하고, 상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第二十章

우가 마침내 부도를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壇)을 설치하였다. 서남 제족을 정벌하여, 제후(諸候)라 하고, 도산에 모이게 하여, 조공을 받았다. 이는 부도 제시(符都際市)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나, 폭돌(暴突)한 것이었다. 이에 천하가 시끄러워, 부도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우가 곧 수륙(水陸)의 길을 차단하여, 부도와 연락을 끊고, 내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감히 부도를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에 유호씨가 서벙에 살면서, 묘예(苗裔)를 수습하여, 소부와 허유가 사는 곳과 통하고, 서남 제족과 연락하니, 그 세력이 심히 왕성하여, 스스로 읍(邑)을 이루웠다.

 

유호가 곧 권사(權士)를 보내, 우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요는 천수(天數)를 몰랐다. 땅을 쪼개서 천지를 제 멋대로 하였다. 기회를 틈타 독단(獨壇)을 만들고,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기 위하여, 사람을 몰아낸 후, 자칭 제왕이 되어, 혼자서 처리 하였다. 세상은 토석(土石)이나 초목처럼 말이 없고, 천리(天理)는 거꾸러 흘러, 허망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거짓으로 천권(天權)을 훔쳐, 사욕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이 만약 천권을 대행하는 것이라면, 능히 일월(日月)을 개폐(開閉)하여, 만물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제왕이란 수의 요체(數諦)요,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다만 사기와 허망의 나쁜 장난이 될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증리(證理)요, 세상의 일이란 그 증리한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이외에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도의 법은 천수의 이치를 명확하게 증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무(本務)를 수행하게 하고, 그 본복(本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비록 선후는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하고 생소한 것은 있으나, 끌어들이고 몰아내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해가 평등하며, 제족(諸族)이 자행(自行)하는 것이다. 오직 그 오미(五味)의 죄책을 보속(報贖)하는 것과, 대성의 일(大成之業)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일인 희생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요, 여러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이 일은 예로부터 세상 일(人世之事)에 섞이지 아니하였다.

 황궁(黃窮)씨와 유인(有因)씨의 예가 바로 이것이다.


第二十一章

또 그 소위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수(天數)의 이치에 이러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방위(方位)의 중앙 5는 교차(交叉)의 뜻이요, 변행(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1로부터 9까지 이므로, 5는 언제나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윤회하여, 율(律)과 여(呂)가 서로 조화를 이룬 후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기수(基數)를 이르는 것이요, 그 57이 크게 번지는 고리(大衍之環)에 이르면, 그 자리가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4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순역(順逆) 생멸(生滅)의 윤멱(輪冪)은 4요, 5가 아니니, 즉 원수(原數)의 9는 불변수이기 때문이다. 또 윤멱이 한 번 끝나는 구간은 2X4=8 사이의 7이요, 5가아니다. 또 그 배성지물(配性之物)은 금

(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다섯 중에서 금(金)과 토(土)를 왜 따로 구별하는가. 그 약간의 차이 때문에 구별을 하고자 한다면, 기(氣)풍(風)초(草)석(石)따위는 어찌 같이 들지 않는가. 그러므로, 다 들자면, 수가 없는 것이요, 엄별해서 들자면, 금목수화 혹은 토목수화의 넷이요, 다섯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 물성(物性)을 어떤 이유로 수성(數性)에 짝지우는가, 수성지물(數性之物)은 그 원수가 9요, 5가 아니다. 그러므로 5행의 설은, 참으로 황당무괘한 말인 것이다. 이로써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무혹(誣惑)하여, 곧 천화(天禍)를 만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第二十二章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못하고, 거북이나 명협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는 또 무슨 속셈인가. 천지의 만물이 다 수에서 나와, 각각 수를 상징하고 있는데, 하필 거북과 명협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물사(物事)에, 각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이라는 것은 역사(歷史)다. 그러므로, 요의 역제는, 즉 거북과 명협의 역이요, 인간의 역이 아니니, 그것이, 인세(人世)와 불합(不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삼정(三正)을 번복하여, 구차스럽게 맞추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하늘의 죄를 끌여들였다. 역(曆)이라는 것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이므로, 그 수는 몸소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증합(證合)하여 복이 되고, 역이 바르지 못하면, 천수에 어긋나 화가 되니, 이는 복은 이(理)가 존립(存立)하는데 있고, 이는 정증(正證)에 존립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인세 화복(禍福)의 발단이니, 감히 삼가 하지 않을 것인가. 옛날, 오미(五味)의 화(禍)가, 한사람의 미혹에서 나와서, 만대의 산사람(生靈)에게 미치고 있는데, 지금 또 다시 역의 화가, 장차 천세(天世)의 진리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기만 하구나.

第二十三章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종시(終始)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 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니, 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曜)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47성수(性數)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昄)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58법수(法數)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半)에 대회(大晦)에 구가 있으니, 구는 시(時)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眇)가 되니, 묘는 구가 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刻), 분(分), 시(時)가 1일이 되니, 이는 369의 체수(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쳐서, 이수(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저 요의 이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僞)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 실위(實爲)의 도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허위는, 안에서 이(理)가 불실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실위는, 이(理)가, 나를 언제나 만족하게 하여, 스스로 함께 존립한다.

第二十四章

유호(有戶)씨가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일러서,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위협이고, 모욕이라 하여,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차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모산(茅山) 진지(陣地)에서 죽었다. 이에 하중(夏衆)들이 비분하여, 죽기를 원하는 자가 수 만이였다. 이는 거의가 우와 함께 치수(治水)를 한 무리들이었다. 우의 아들 계(啓)가 이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으로 진격하여 오니, 유호씨의 군은 불과 수 천이었다. 그러나, 하군(夏軍)이 싸우면 반드시 패하여, 한번도 전적을 거양하지 못하였다. 계가 마침내 두려워서 퇴진하고, 다시 공격하지 못하자, 그 무리가 격양되었다. 이에 유호씨가 하중(夏衆)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차 서남제족(西南諸族)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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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운영자 조회수 897

이메일 webmaster@margosung.com 작성일 2001-03-07 17:39:33

제 목 김태형의 마고복본을 꿈꾸며 2


제 8 부 : ‘오행(五行)의 화(禍)’가 주는 의미

부도의 법에서는 기(氣)화(火)수(水)토(土)라는 4대 원소로 만물이 구성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 4가지의 구성 요소가 오행 목(木)화(火)토(土) 금(金)수(水)의 5가지 구성 요소와 차이는 무엇일까?
부도지(符都誌)에서는 이 구절에서 상당히 많은 자리를 할당을 하여 설명을 하였다.
물론 상당부분은 내용에 대한 설명이긴 하지만 그만큼 중요하게 다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도지에 나오는 4대 원소는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면을 보충하며 완성으로 나가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 아이와 어른, 밤과 낮과 같이 서로 상반되는 개념끼리 서로 조화를 이루며 만물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는 높고 낮음, 잘나고 못남, 귀함과 천함이 없이 모든 것에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고 그것이 서로 어울러져 조화를 이룰 때 완성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개념이다.

실제 고대 우리나라의 국가는 완전평등을 실현한 공산주의 국가로 높고 낮음이나 귀천의 개념이 없는 완전한 평등 사회라 한다.
이는 우리의 음식문화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외국의 경우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거나 주된 맛 뒤에 첨가하여 맛이나 향을 첨가하거나 보조해 주는 형식인데 반하여. 우리의 음식은 여러 가지 재료가 어울어져 새로운 맛을 만드는 이른바 비빔밥으로 대표가 되는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행의 원리에서는 토가 중앙에서 다른 네가지 원소의 균형을 제어하는 형상으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통재하며, 희생을 받거나 희생을 하는 관계등으로 이루워져 있다.
이는 지도층의 절대 권력을 형상화 시킨 것으로 계급사회, 투쟁을 정당화 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水)는 화(火)를 이기며, 토(土)에게는 지며, 목(木)을 생(목을 위해 희생)하고, 금(金)의 희생을 바탕으로 생성이 된다.
목은 토(土)를 이기며, 금(金)에게는 지며, 화(火)를 생(화을 위해 희생)하고, 수(水)의 희생을 바탕으로 생성이 된다.
또한 토(土)는 중앙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니 중국의 황제(皇帝)나 지배층을 형상화 하여 만들어진 개념이라 하겠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늘에서 나온 산물이며 만물이 서로의 부족한 면을 서로 메워주며 이들의 조화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 진다는 이론이 서로 생하는 힘에 의해 생성이 되고 극하는 힘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어 폭주하는 것을 막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바뀌었다.

결국 이로 인해 지배자(상극하는 힘)와 피지배자로 나뉘어 권력에 대한 욕망에 의해 투쟁이 일어나니 오미의 화에 의해 생긴 관념에 오행의 화로 인한 투쟁의 힘이 보태져 세상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제 9 부 : 부도의 역(曆)

부도의 역은 마야나 잉카의 역과 유사하다. 마야나 잉카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태양력을 사용을 한다.

우리민족도 역시 광명을 숭상하여 국가 이름도 밝음을 상징하는 환국이나 배달국이니 그들과 같은 태양력을 사용을 한다고 가정을 하고 이를 보는 것이 유사 할 것 같다.

서양 역시 태양력을 사용한다고 하나 자연의 주기에는 관계가 없이 1년이라는 단위에 날자를 끼어 맞춰 실지 자연의 주기와는 맞지 않는다.

우리의 역은 천부경의 원리에 따라 시작과 끝이 하나(시작과 끝의 주기로 여기서는 1년을 뜻한다.)이니 이것이 한번 돌아가는 것을 소력(小曆)이라 하고 소력의 1회를 사(祀)라 한다.
1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는 4요(曜)가 있고, 1요에는 7일이 있어, 1사는 52요복(13기X4요)이 있으니 합이 364일이다. 여기서 1사(년)의 시작에 단이 있으니 시작에 1을 합하여 365일이 된다.
또한 여기서 4번째 사에 다시 1을 보태니 366일이 된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1년은 13달이 있고 1달에는 4주가 있고 1주일은 7일(그러니까 1달은 28일)이고 1월달은 하루가 더 있어 29일이 있다. 그래서 1년은 365일이 되고 4년에 한번 윤년이 오면 366일이 된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1년이 13개월이 너무나 과학적인 방식이므로 2000년부터는 이 방식을 취하자 하며 주장을 하는 것으로 봤을 때 우리 조상님들은 너무나 과학적인 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 6 장 : 잃어버린 부도의 법

第二十五章

이로부터, 천산(天山) 남쪽 태원(太原)의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주인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소위 장님은 백성이 되어, 암흑이 중첩하였다. 강자는 위에 있고, 약자는 아래에 있어, 왕과 제후를 나라에 봉하고, 생민(生民)을 제압하는 풍폐(風幣)가 만연하여 고질이 되고 마침내 서로 침탈하기에 이르니, 헛되게 생령(生靈)을 죽이고, 한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하은(夏殷)이,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유호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성생(月息星生)의 땅에 들어가니, 즉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여,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마고(麻姑)의 일은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형적이 아주 없어지니, 유호씨가 두루 제족의 지역을 돌고, 마고와 천부의 이(理)를 설(說) 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 전고자(典古者)가 송구스럽게 일어나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유호씨가 본리(本理)를 술회하여, 그것을 전하였다.

第二十六章

임검씨가 유호씨의 행상(行狀)을 듣고, 그 길을 장하게 여겨, 유호씨의 족(族)에게 교부(敎部)에 취업하게 하여 살도록 하였다. 이때에, 임검씨가 하토(夏土)의 형세를 심히 걱정을 하고, 마침내 입산(入山)하여, 해혹복본(解惑復本)의 도를 전수(專修)하였다. 임검씨의 아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천지가 하나의 이치가 되는 것을 증명하여, 인생이 일족(一族)이 되어, 크게 부조(父祖)의 도를 일으키고, 널리 <천웅(天雄)의 법을 행하여, 인세 증리(證理)의 일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운해족(雲海族)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하토(夏土)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더니, 이도(異道)가 점차 성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를 아들 읍루씨(浥婁氏)에게 전하고 입산하였다. 읍루씨가 날 때부터, 대비(大悲)의 원(願)이 있어, 천부삼인을 이어받고, 하족(夏族)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진리가 사단(詐端)의 지역에 떨어진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에 천부를 봉쇄하고, 곧 입산하여, 복본의 대원(大願)을 전수(專修)하며, 백년 동안 나오지 아니하니, 유중(遺衆)이 통곡하였다.

임검씨가 후천(後天)의 말세의 초에 태여나, 사해의 장래를 미리 살피고, 부도 건설을 시범하니, 천년 사이에 그 공업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에 이르러 천부의 전해짐이 끊어져, 마고 분거(分居) 이래로, 황궁(黃穹), 유인(有因), 환인(桓因), 환웅(桓雄), 임검(壬儉), 부루(夫婁), 읍루(浥婁)의 7세에 천부가 전해진 것이 7천년이었다.




제 10 부 : 잃어버린 부도의 법

상고사에 있는 우리 고대국가를 보면 큰 의문점이 하나가 있다.
한단고기나 기타 다른 상고사에 관련된 서적을 보면 우리민족의 영토가 너무나 거대했다.
그 영토를 어떻게 관리를 했을까?

조선시대 인구 조사를 한 것을 보면 1억8천만의 인구가 있다 했다.
이것으로 봤을 때 당시의 영토는 지금의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부분을 차지를 했을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통신기기나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 중앙에 어떤 일이 있는지 알기가 힘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 지방에 어떤 세력을 지닌 지방 호족이 나쁜 마음을 먹고 은밀히 세력을 모은다면 중앙에서는 알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예를 봐도 국가의 크기가 어느 정도 이상 커지면 관리의 어려움으로 통제력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중국 같은 경우를 봐도 역사가 200년 이상 되는 나라가 없다.
앗시리아제국, 사라센제국, 원나라 같은 경우도 그렇다.

로마 같은 경우는 교통망을 엄청 강화시켜(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교통망에 엄청난 에너지를 쏳았다.)그래도 그나마 오래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고대 국가는 그러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국가가 유지를 할 수 있었을까?
당시 환국은 3301년, 배달국은 1565년, 조선은 209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잉카제국의 국가 형태를 보면 답을 알 수가 있다.
잉카제국도 우리와 같은 우리와 같은 공산주의 체제 였다.
그들은 강력한 종교의 힘으로 국민을 묶어 일을 하지 않음은 죄악 이였기에 특별한 통제 수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우리 고대국가가 공산주의 사회라는 말을 했었다.
우리는 환인, 환웅, 단군을 한얼님이란 말로 자주 불렀다.
이것은 큰 얼을 가진 님이란 뜻이니 이들이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다는 말이다.

부도의 법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에, 천손족의 문화로써 정신적으로 모두가 한 울타리안에 있었기에 국가가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고성의 시대는 본성만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이다. 그렇기에 그때는 우리 모두가 신성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오미의 화로 욕망이 생기고 관념이 생겨 본성에 막이 생겨 신성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마고성에서 나오게 되었고 12명의 천인(天人)에 의해 민족은 여럿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궁씨(黃穹氏)에 의해 그 법이 잘 지켜져 주변의 다른 나라의 정신 지도국으로 그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었다.
다시 오행의 화가 있고 이에 의해 지나족은 혼란한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이들은 안정된 조선으로 흘러 들어 오게 되고 이들에 의해 이민족의 저급한 문화에 의해 문화 침투를 당하게 되어 우리가 오히려 오행의 화를 입게 된다.

이 오행의 화에 의해 지배욕이 생기게 되고, 투쟁심이 생겨 민족을 이루고 있는 정신적 고리가 끊어지며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어 결국 부도의 법을 잃어 버리고 국가가 분열하게 된다.

고열가 단군 때에는 더 이상 통제를 하기 어려운 법이 통하지 않는 시대까지 가서 결국 법을 안고 폐관을 하게 된다.

제 7 장 : 삼한에서 삼국으로
小 符 都 誌
第二十七章

은(殷)의 망명자 기자(箕子)가, 패군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 도망하여 왔다. 명예를 위하여 당우의 법을 행하고, 오행 삼정(五行三正)을 써서, 홍범 무함(洪範巫咸)을 시행하였다. 천웅의 도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은의 군민(軍民)이 무력으로 부도의 유중(遺衆)을 억압하므로, 유중이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壇)을 봉해버리고, 동해의 물가로 피하여 살았다. 즉 옛날의 사례벌(斯禮筏)의 공지(空地)였다. 사해벌은 긴 기(長旗)니, 광야(曠野)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 먼곳에서 살면서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곧 육촌(六村)을 설치하고, 입접의 제족과 분담하여, 함께 지키되, 각각 한(韓)이라 하고, 보위(保衛)하였다. 한은 보위의 뜻이다.

북의 마한(馬韓)과, 남의 변한(卞韓)과, 동의 진한(辰韓)의 삼한이 부족의 자치를 행하고, 선세(先世)의 도를 굳게 지켜, 이후 천년 사이에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보위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여,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 때 하토(夏土)의 쟁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동요와 혼란이 삼한에 파급되므로, 육촌의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고, 서쪽의 화가 점차 임박하여, 보수(保守)하기가 장차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이 통합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마침내 경계를 정하고, 요새(要塞)를 세워,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어(統御)하는 일을 위임하였다. 남은 백제(百濟)요, 북은 고구려(高句麗)였다. 고구려가 곧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하여, 서침(西侵)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보위하였다.

제 11 부 : 열국시대로

앞에서 얘기를 한 것처럼 오행의 화에 의해 혼란진 중국의 여러 국가(夏, 殷)의 유민이 삼한으로 흘러 들어옴으로써 삼한의 백성들이 꺼꾸로 문화 침투를 당하여 부도의 법이 끊어지고 의식의 고리에 틈이 생겨 국가의 통제력의 한계를 맞게 된다.
특히 44세 단군 때부터는 삼한은 통치는 받으나 군사권은 각각 나눠 가졌으며, 47세 고열가 단군의 폐관 이후는 실질적인 법통을 잃어 삼한이 여럿으로 분열이 되니 그 여러 제후국 중 가장 강한 나라에서 단군이 나왔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법통을 가진 진한의 후예가 이러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권력 쟁탈전에 회의를 느껴 이 들의 세력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가서 나라를 세우니 이가 신라가 되었다.

그리고 삼한의 여러 나라 중 고구려와 백제가 있어 다른 여러 나라를 병합 하여 커지니 후세 사람들이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렇게 생성 되었다.

제 8 장 : 잃어버린 역사

제 12 부 : 한사군의 허구

70년대 중반 재야 사학자 임승국한사군의 명칭이 사마천의 ‘사기(史記)’ 115권 조선열전(朝鮮列傳)은 물론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지극히 단순한 이사실 하나를 발견하는데 2000년이 걸렸다면 과연 믿겨질 만한 일인가?
한말 친일어용 사학 단체인 청구학회의 공동 대표 였으며 해방 후 반세기 동안 남한 사학계의 태두였던 이병도는 사기(6권)에 한사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임승국에 의하면 사기 그 어느 곳에도 그러한 기록이 없다.
일연스님조차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한사군을 논한 것을 보고 군의 수도 명칭도 틀리다 하였으나 어찌 2000년 동안 한번의 의문도 없이 이를 받아드렸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무제가 보낸 수군제독 양복은 열수를 거슬려 올라가다 조선 수군의 습격을 받아 패전하여 배는 가라앉아 버렸고 상륙하여 도망다니는 치욕을 치렀다. 또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한무제에 의하여 사형이라는 극형을 당하고, 사체는 찢겨 사대문에 걸리는 기시(棄市)에 처해 졌던 것이다. 육군 사령관 순체(筍彘)도 같은 기시를 당했다. 이 전쟁의 주역이였던 양군의 사령관이 모두 기시에 처해 졌다는 것은 이들이 승전의 주역이 아니라 패전의 주역 이였다는 말 일 것이다.
만약 이들이 승전고를 울렸다면 이들은 승전의 영웅이지 결코 이렇게 죄를 물어 처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패전한 나라가 한사군을 설치를 할 수 있었겠는가?

실지 위만조선으로 알려진 우거 정권이 구테타로 무너진 뒤 그곳에 설치된 사군은 한나라사람이 다스리는 사군이 아니라 조선사람 참최음협이라는 네 사람이 다스리는 평주홰청추저날양이라는 4군이였다.

사기에서는 조선이 평정되어 4군이 되었다고 하며 평주홰청추저날양이라는 4군을 소개 했고, 이 사군의 행정 통치 책임자들을 조선족인 최음참협이라는 네 사람이라 했다. 또 그 4군의 위치를 발해 연안에서 산동반도까지라 했다.

그러면 우리 역사의 기록에서 흔적을 보면 낙랑국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나온다.
많은 사학자들이 낙랑군과 낙랑국을 같은 존재로 봤으나 이들 둘은 서로 다른 존재이다..

삼국사기에서의 낙랑국에 대한 이야기는 저유명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 져 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서기 32년)때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낙랑왕 최리(崔理)가 낙랑군의 태수가 아니라 왕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낙랑이 멸망을 한 시기가 강단사학자의 말을 빌리면 미천왕 14년(서기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을 하였다 하니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서기 32년)에 멸망을 한 낙랑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3년조의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하였다”는 기사 역시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이야기가 되었고, <삼국사기>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조에도 ‘낙랑은 신라와 이웃나라이다’라 했다.

이 낙랑국의 위치는 앞서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의 남쪽이라 했고 남해차차웅조에서는 신라와 이웃나라라 했으니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있는 작은 국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여러 자료에서 보듯 낙랑군은 그 이름만이 보이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유령국가 이다.

제 9 장 : 어둠속으로
第二十八章

이보다 먼저, 육부(六部)의 촌장(村長)들이 약(藥)을 캐는 날에 모여서, 선도산 단묘(仙桃山壇廟)의 성모(聖母)가 알을 낳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가서 보았다. 동쪽의 우물을 보로 덮어 가리고, 껍질을 벗겨서, 남아를 얻었다. 몸에서는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곧 박(朴)으로써 성을 삼고,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박은 단의 어음이 박달이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여 성을 삼았으며, 혁(赫)은 빛이니,

광명으로써 암흑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육촌의 사람들이 함께 양육하니, 점차 자라면서, 신기(神氣)가 수명(秀明)하고, 대인(大人)의 도가 있었다. 13살에 여러 사람이 추거(推擧)하여, 거서간(居西干)이 되니, 거(居)는 거(据)요, 간(干)은 방(防)이요, 장(長)이다. 즉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防禦長)의 뜻이다. 서방은 즉 저들 서침하여 사도(詐道)를 행하는 자들이다.

第二十九章

혁거세씨는, 천성(天性)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도 같았다. 또 현비(賢妃) 알영(閼英)을 맞이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들을 가르켜 이성(二聖)이라 하였다. 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사 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禊祓)의 의식(儀式)을 행하고, 대인(大人)으로 하여금, 금척(金尺)의 이치에 따라, 천지시원의 근본을 증리(證理)하여, 옥관(玉管)의 음을 내서, 율여화생법(律呂化生法)을 수증(修證)하였다.

 

해마다 10월에 백의제(白衣祭)를 행하였으니, 이는 황궁(黃穹)씨의 속신백모지의(束身白茅之義)를 따르는 것이었다. 달구(達丘)에 조시(朝市)를 배풀고, 율포(栗浦)에 해시(海市)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항상 순행(巡行)하여, 농상(農桑)과 방적(紡績)을 권장하니, 들에는 노적(露積)이 쌓이고, 집에는 베(布)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착한 일을 크게 일으켜, 여러 사람과 함께 그 고락(苦樂)을 같이 하고, 밖으로 방패와 창을 쓰지 아니하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보존하였다. 한 마음으로 복고(復古)하고, 중건(重建)하는 일에 전념하니, 경내가 도가 있어, 옛날과 흡하사였다. 이 때에 변진(弁辰) 제족이 합동하여 협력하니, 비록 경계를 두고 방비하나, 나라를 칭하지 아니하고, 또 왕을 칭하지 아니하였다. 경내를 다스리는 일은 선세(先世)의 법을 준수하여, 제회(祭會)에서 의결되지 아니하면, 일찍이 한가지의 일도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영수계위법(領首繼位法)이, 역시 혈계(血系)를 한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현명한 사람을 택하여 영수를 삼았다.


第三十章

남아 나이 20살이 된, 아름답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마랑(馬郞)이라는 직을 주고, 명령을 받들어 원행(遠行)하게 하였다. 혹 성생월식의 옛 땅에 나아가며, 혹 운해천산의 여러 지역에 가니, 이 원행은 부도 수신(修身)의 유제(遺制) 였다. 동해에 피하여 산 지 천여년사이에 제시의 회(祭市之會)를 열지 못하여, 서로 내왕이 오래 끊어지고, 또 봉국쟁탈(封國爭奪)의 풍조가 사해에 만연하여, 제족이 각자 나라를 칭하고, 오랜 세월에 전란이 반복하니, 겨레(族)가 종횡으로 나뉘고, 말이 잡다하게 변하였다. 천부는 거의 망각하기에 이르고, 혹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도, 다 변형(變形)하여, 음이 다르니, 마랑들의 원행이 심히 어려워, 순절(殉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랑들이 만리 원행에서도 절조를 지켜, 능히 굳은 뜻을 가지고, 백난을 극복하여 사명을 완수하니, 그 거룩한 인격이 진실로 호매(豪邁)하였다. 장하게도 귀환하면, 반드시 직사(職事)에 임명하여,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와 역수(曆數)와 박물(博物)을 공부하게 하니, 이는 즉 선세에 사해를 통화하여, 인세(人世)를 하나의 법에 맞추는 유업이었다.


第三十一章

서례벌(西禮筏)을 창도(創都) 한 후로, 어느덧 삼세(三世)를 지나니, 백여년이 되었다. 세상의 풍조가 크게 변하여 보수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왕(國王)을 세워, 대권을 행사 하게 하자는 여론이 대두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고 시끄러웠다. 그 반대자들은 선세의 유법이 밝고 밝게 천부를 비추니, 지금 비록 시대가 어려우나, 보수하고 튼튼히 방비하여,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어찌 사단(詐端)에 굴종하여 스스로 소자(小子)가 되어, 패리지중(悖理之中)에서, 모독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이와 같이 된다면, 의롭게 목숨을 바쳐, 진도(眞道)를 뚜렷하게 나타내어, 후세에 남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 찬성하는 사람들은, 외세가 긴박하여 파동이 격심하니, 어떻게 방비를 하겠는가. 담장 안에서도 이반하여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보수한단 말인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같이 경쟁하는 마당에 뛰어들어, 부강하게 된 후에, 유업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지금 사해 제족이 사도에 미쳐 날뛰어, 봉사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우리가 지금 자멸하여 버리면 누가 진도를 현창하며, 후세에 누가 있어, 이를 알 것인가. 만약 능히 방비하여, 보수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고립되면, 새 백마리 가운데 백로 한 마리가 되어, 오히려 이도(異道)가 되고 세상에 존립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장차 또 그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 같은 것은 다 옳지 못하여, 오직 택할 바는, 나라를 세우고 왕을 높여, 대권(大權)을 집행하며, 군마를 호령하여,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부도 전역을 회복하는 것 뿐이다. 부도를 다시 세워, 그 근본을 명시하면, 제족이 비록 완강하더라도, 반드시 각성하여, 근본으로 돌아올 것이다.

第三十二章

이에, 마침내 중론(衆論)이 결정되었으므로 인망(人望)이 왕국 수립을 주장하는 석(昔)씨에로 돌아 왔다. 석씨는 동보(東堡) 유배인의 후예로, 옛날부터, 해빈(海濱)에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있었으므로, 남해씨(南海氏)가 딸을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중의 여망에 따라, 자리를 이어 탈해왕(脫解王)이라 칭하니, 즉 보수(保守)의 질고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또 서라국(徐羅國)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경내(境內)를 평정하였다. 용병(用兵)을 과도하게 하여, 필경은 배척당하였다. 중론이 다시 박씨의 보수계로 돌아오니, 이에 박씨가 다시 계승하고, 왕국의 칭호를 폐지하였다. 4세를 지나, 중론이 또 석씨에게로 돌아 갔으나, 단 정벌하는 일을 원하지 않으니, 이가 벌휴씨(伐休氏)였다. 석씨 4세 사이에 정벌을 다시 시작하니, 중론이 김씨의 중화(中和)로 돌아왔다. 김씨는 원래 부도에서 동쪽으로 옮겨와 살던 비족으로, 온양덕후(溫讓德厚)하여, 지마씨(祗摩氏)가 손녀를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자리를 이으니, 이가 미추씨(味雛氏) 였다. 이 때를 당하여 서북의 환(患)이 계속해서 일어나되, 하나도 조치된 바가 없으므로, 중론이 다시 석씨에게로 복귀하였다. 이에 석씨가 다시 자리를 이어, 3세 사이에 정사(征事)가 허다하여, 민물(民物)을 탕진하므로, 크게 시대의 배척을 받았다. 중론이 다시 김씨에게로 돌아가니, 이에 김씨가 다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第三十三章

오직 우리, 근본을 지키는 족들이 동해에 피하여 살면서, 방비하고, 보수한 지 삼백여년 사이에, 중론의 번복이 이와 같으니, 가히 역외(域外) 풍운이 어떠함을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또 가히 천부의 진리가 사단의 세상에서도 의연하게 살아 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세 중론이 반드시 이 도가 무너지지 않는 것에 근거하여, 역대 영수가 오히려 중론의 소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과격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능히 조절하여, 보수를 크게 전하였으니, 마침내 오늘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히 천부의 실재를 알게 하며, 또 장차 후인으로 하여금 때를 만나 그것을 행하게 하여, 능히 부도를 다시 건설하고, 사해를 통화하며, 인세가 복본하여, 진리를 명증(明證)하게 하면, 당시 석씨의 논이 과연 불행 중에서 행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題詩
[아지랑이 초초(迢迢)하게
흐르는 걸 바라보니,
나그네의 마음도
가을처럼 지는구나.
세간(世間)의 견백(堅白)도
유유(悠悠)한 일도
징강(澄江)을 대하고 앉아
근심을 잊는다.]

觀雪堂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 계속 출간중. 편찬자 백영해 박씨 대종회

* 堅(굳을 견 ) , 澄(맑을 징)

제 13 부 : 어둠속으로

조선의 정통성을 이은 진한(眞韓)의 후예가 서라벌로 옮겨오면서 박혁거세를 거서간(居西干)으로 삼는다.
혁거세씨는 부도의 법에 맞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금척(金尺)의 이치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오행의 화가 그 주변에 미쳐 세상의 풍조가 크게 어지러워 지자 신라의 재계층 역시 따라 흔들려 여러가지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결국 박(朴),석(昔),김(金)씨로 번갈아 가면서 왕권이 바뀌어 본래의 뜻(부도의 법을 수호)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시달림에 지친 신라가 당과 연합을 하면서 많은 유학자나 심지어는 왕족 조차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오면서 부도의 법을 잊어 버리고 문화 침투를 당해 오행의 화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면서 정통은 수호 하였으나 이미 이들은 오행의 화에 노출이 되어 있었기에 결론적으로 민족의 정기에 큰 손상을 가져 온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영향을 받아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 학자는 그 뿌리를 잊어버리고 모화사상에 쌓여 우리의 역사를 왜곡을 시켜 후세 사람들이 제 역사를 알고자 해도 알 수가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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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내가 잃어버린 상고사를 회복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광역을 넓히고 역사연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2,000년대는 과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물질문명이 최고 정점을 향하여 치닫고 기후와 시대조류가 변하며 새로운 정신문명이 태동하는 등 가히 혼돈스런 계절이다.
그런데 인류문명이 최고로 발전한다고 하는데도 생활의 풍요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삶의 질은 뒷걸음질치고 오히려 출퇴근을 포함한 근무시간이 연장되고 일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보수는 넉넉하지 못하며 직업의 안정성이 줄어들어 스트레스가 증가하여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균형을 잃고 이상상태가 증가하여 질병, 범죄, 다툼이 많아지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성의 시대이기도 하다.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정서와 예의범절을 가르칠 수 있는 부모가 사라지고 아이들도 예의 같은 것을 배우고 익히려는 사람이 없게되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인성교육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결국 사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더 어지러워지고 복잡한 양상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인간들의 욕구와 불만은 점점 더 늘어나고 경제력은 한계가 있으니 정치는 더욱 어려워진다.

따라서 개인이나 사회가 미래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방향을 선택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혼란과 방황을 탈출하여 민족의 위대한 도약을 제시하는 지식과 방법이 바로 우리의 역사 속에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고사를 연구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우선 지구의 역사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살펴보자.


1. 지구는 대략 6,500년마다 변동을 일으키는 주기성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변동시점에 거의 근접되어 있는 시대다.

2. 지구변동은 대변동(개벽), 중변동, 소변동이 있는데 대변동때는 인류가 멸망했다.
그런데 이번의 변동은 대변동의 차례이다.

3. 지구는 대략 5만년마다 상극시대(動시대, 陽시대, 불시대, 칼시대)와 화합시대(靜시대, 陰시대, 물시대, 성인시대)로 교차되는데 지금은 상극시대의 끝자락이고 화합시대로 진입하려는 순간에 있다.

4. 상극시대는 권력, 무력, 명예, 지위 등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법률이 사회를 지배하지만 화합시대는 도인과 성인들이 현대인들에 비하여 초월적인 능력으로 백성을 도덕으로 보살피는 평등과 평화시대로서 도덕율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시대이다.

5. 지난 11만년동안의 지구변화 연구를 보면;

지구평균기온이 1도 변하면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2도 변하면 세계적인 홍수가 일어나며, 3도이상 변하면 지구가 변동하는데 지금은 1도정도 상승되어 있다. 지구온도변화 주기로 보면 앞으로 0.5도∼1도 더 상승하게 된다. 대략 1.5도 ∼2도 상승하게 되어있는데 여러가지 영향으로 1∼2도가 더 올라가서짧은 기간에 3∼5도로 올라가게 되면 인류는 멸망한다.

그런데 지금 지구의 오염상태는 지구가 스트레스를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데 인간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개발과 발전에만 열중하고 있다.
환경을 도외시한 지나친 개발, 각종오염의 증가는 지구의 스트레스를 높이고 지구온난화를 가중시켜 지구온도를 급격히 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고 마침내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경제가 침체되고 살기도 어려운데 환경이 밥먹여 주느냐고 하면서 경제우선을 주장하고 결국은 개발을 밀어부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니 지구변동과 인류의 멸망은 조금 빠르냐 아니면 조금 늦느냐 일뿐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있다.

6. 그러므로 머지않아 지금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며 이러한 분기점의 시대에서 예수의 백만배나 되는 큰 능력자가 와서 세상을 정리정돈하고 성인시대를 열어 도덕과 철학을 세우고 인류가 새 출발을 하게된다.
(이상 역으로부터 정으로의 혁명 2장 참조)


다음은 상고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을 몇가지 더듬어 보면;

1. 인류의 문명은 언제나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이동하여 열매맺는다.
서쪽에서 열매맺은 문명이 동쪽으로 돌아오면 한 주기 즉 6,500년의 주기가 끝난다.

2. 동쪽에서 일어난 문명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기간이 약 3,000년이고 소강상태가 약 1천년이며 서쪽에서 열매맺은 문명이 동쪽으로 오면서 셰계를 주도하는 기간이 약 2,500년이다.

3.지금은 서양문명이 동쪽까지 와서 세계를 지배하는 끝시기에 있다. 그 전환점은 2,013년인데 오차기간을 약 36년(0.5도) 쯤으로 보면 2,049년 이내에 개벽이 일어나므로 새로운 문명은 동양에서 다시 일어나게 되므로 동양인 우리가 그것을 준비할 때이다.

4. 인류문명은 물질문명의 끝이 정신문명의 시작이고 정신문명의 끝이 물질문명의 시작이다. 지금은 물질문명의 끝으로서 물질문명의 극성기에 진입할 때이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길이 갑자기 시드는 것처럼 사라지고 보이지않게 서서히 고개를 들고일어난 정신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5. 우리민족은 정신문명에 관한 한 세상에서 가장 많고 훌융한 문화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회복하면 새로운 문명의 시작은 한국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씨앗을 보자.

① 우리는 천손민족으로서 우주 창조자이신 한님(하느님, 하나님, 한얼님)을 민족의 조상으로 삼고 태양신을 신(神)으로 모셔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격하게 따지면 조상을 모시는 신앙민족이며 세상에서 조상을 가장 잘 받들고 모시는 민족이다.

② 따라서 세계 인류에서 한민족(몽골리안) 만큼 영적능력이 뛰어난 민족이 없다.

③ 하늘, 땅, 사람이 하나라는 천지인 일체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의 창조원리와 그에 따른 진리를 민족의 철학으로 가지고 있다.

④ 공자이전의 도덕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오직 한국에만 있으며 1만년의 역사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만큼 노력할 수 있느냐에 따라 한국이 선택받을 수도 있고, 북한이 선택받을 수도 있으며, 몽골이나 중국이 선택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국민들이 사상이나 종교를 초월해서 얼마나 빨리 깨어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앞으로 최소한 3,000년동안 세계를 주도하는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는 국민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나는 다만 그 중요성을 말할 뿐이다.


상고사를 연구하고 회복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천하제일의 나라로 군림하게 되니 모든 역사의 초점을 중국중심으로 바꾸었고,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당한 후 당나라가 고구려의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중요서적을 가져갔으며, 임진왜란때도 그러했고, 1910년 이후 한일합방의 일제시대는 한반도는 물론 만주까지 집집마다 수색해서 20만권의 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중요한 책들을 가져다가 연구하고 일부는 파묻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의 상고사 역사책들을 없애고 나서 일본은 우리의 상고사가 없었다고 하고 한반도에 삼국이 존재한 것처럼 꾸며서 소위 반도사관을 정립했고, 일본의 역사가 우리 나라보다 앞섰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지배만 받아온 열등민족이라고 가르쳐 왔는데 그 동안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온 역사학자들이 모두 일본의 교육을 받은 식민사학자였고 또 그들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가르쳐온 반도사관과 열등민족의 역사를 주장하고 고집하면서 우리 국민을 사실상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만들어 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해방된지 60여년이 되었는데도 지금도 그런 학자들이 역사계의 요직을 차지하고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니 우리 나라의 정치가들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알 수 있는 증명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은 한단고기같은 훌융한 책이 나오면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배척하여 왔으므로 지금도 우리 학생들이 엉터리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는 옛부터 전해오는 역사책인 조대기, 유기, 대변설, 단군세기, 삼성밀기, 고기, 밀기, 대변경, 표훈천사, 오제설, 진역유기, 삼한비기, 신지비사 등의 책들을 인용해서 기록된 것이므로 100%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믿어야 되는 책이다.

일본의 역사가 이마니시는 『고려시대 "조선유기"와 유사한 구전과 고기(古記)가 많았다』고 하고 서운관에 있었던 다음서적들을 소개하였는데 그중에 "조대기, 주남일사기, 시비집, 고조선비사, 대변설,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삼성기, 도증기, 지이성모하사량훈, 수찬기소 100여권, 동천록, 마슬록, 통부록, 호증록, 지화록, 도선 한도참기 등을 나열하고 있다."(한단고기 P39 참조)

여기에 한단고기가 인용했다는 " 조대기, 대변설, 표훈삼성밀기, 삼성기"등이 보인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우리의 상고역사 책들을 일본학자들은 보고 연구하여 우리의 상고역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우리의 상고사를 잘라내어 일본의 역사보다 늦게 만들고, 우리의 광역을 한반도로 좁혀 왜소민족으로 둔갑시켜 반도사관을 만들어 작고 힘없는 나라였기 때문에 침략과 지배만 받아온 열등민족 사상을 심어왔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이 떳떳하게 이것을 계승하여 학생들을 열등민족으로 가르쳐 왔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단군신화를 실어서 단군이 신화적인 인물이라는 혼란을 주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정통계보라고 가르치는 것이 모두 허위 날조된 식민역사이다. 이렇게 무서운 사상교육을 하고있는 일본의 잔재들을 빨리 청산해야한다.

그 세 번째 이유로는;

우리 역사자료가 없으니 중국의 기록을 참고해야 하는데 중국의 기록을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우리역사가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
중국의 기록은 너무나 일방적이고 오직 중국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사마천은 우리의 상고시대 나라이름들을 모조리 빼버렸고 소수집단의 부족 이름들만 써서 모두 오랑캐로 취급하고 중국 이외에는 나라가 없었던 것으로 만들었으며, 우리와의 전쟁에서 졌거나 우리가 중국을 침략하고 지배한 사실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기 때문에 우리 학자들이 그것을 그대로 믿으면 오히려 중국의 기록에 심취되어 우리역사를 망치고 만다. 따라서 중국의 기록은 우리역사를 위한 참고자료로만 사용해야 공평하고 바른 역사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공평하고 바르게 세워 궁극적으로는 몽골, 중국, 한반도의 역사를 통합하고 동북아시아 공영권을 형성하는데 이바지하자는 데 있다.



< 제1장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


제1절 삼황기(三皇紀)

(1) 중국기록

『먼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삼황(三皇)을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이라고 하였다. ---- 천황씨는 섭제 형제 12왕조가 각각 18,000년씩이고, 지황씨도 11왕조가 각각 18,000년씩이었다. 인황씨는 아홉 형제가 세상을 9주로 나누어 각각 성읍(城邑: 나라)을 세웠고 무릇 150여세에 총 45,600년 간 이었다. 인황씨 이후에 오룡씨(五龍氏), 수인씨(燧人氏), 대정씨(大庭氏) ---- 혁서씨(赫胥氏) ----유소씨(有巢氏), 주양씨(朱襄氏) ----는 모두 삼황 이래 천하에 군림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고서에 전하고 있지만 정론을 세우기는 불가하다.---- 춘추(春秋)에는 개벽으로부터 지금까지 3백2십7만6천년이고 10기로 나누면 지금은 70,600년의 기간이다. ---- 황제헌원 당시에는 제 9기의 기간이었다.

주(註)에 수인씨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익혀먹는 법을 가르쳤고 복희씨 이전에 존재했으며 삼황의 첫 번째다 고 했고,

황보밀은 대정씨 이하 15인은 포희씨(복희씨)를 이은 이름들이지만 확실한 기록을 보지 못하여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고 했다.』 (삼황기)

중국의 삼황기는 우리 나라의 삼성기 처럼 옛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적은 신화적인 역사서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인황씨의 45,600년이 지나고 오룡씨의 시대가 있었고 그 다음에 현세의 역사가 이어졌는데 황제헌원당시가 제 9기의 말기정도였으므로 사마천 당시는 70,600년 기간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 수인씨, 혁서씨, 유소씨는 우리나라의 삼성기와 검불본기(神市本記)에 나오는 인물들인데 시대별 순서는 맞지 않지만 한국과 중국에서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는데 그 중요함이 있다.
혁서씨는 삼성기에서 복희씨와 수인씨 이전시대의 인물이고 수인씨와 유소씨는 시조한웅이 약 6,000년 전에 압록강 건너편에서 밝달나라를 개국할때의 인물들이다.

중국의 기록에 비하면 한단고기의 기록은 구체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신뢰성이 그만큼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 기록과 고고학 등에서 같은 이야기가 서로 다른 두 지역 이상에서 나오면 실존역사로 인정할 수 있다.


(2) 한국기록

1.『우리 밝(:환, 桓)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 어느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 백산(黑水 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밝검(환인 桓仁)은 감군(監群)으로서 돌을 쳐서 불을 일으켜 날 음식을 익혀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이를 밝나라(환국 桓國)라고 하고 그를 가리켜 밝검(天帝桓仁) 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밝검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삼성기 전 상편)

2.『옛글에 말하기를,

파나류산(밝나라산의 사투리) 밑에 밝검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밝나라의 다른발음)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통틀어서 말하면 밝나라(桓國)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국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국(시위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 북해(北海: 바이칼 호)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삼성기 전 하편)


3.『조대기(朝代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밝나라(桓國)가 있었는데 무리는 풍부하고 풍족하였다. 처음 밝검(桓仁)께서 천산에 사시면서 도를 얻으시사 몸을 다스려 병도 없고 하늘을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게 하고 모두 힘써 일함으로서 부지런하여 굶주림도 추위도 없게 하였다. 혁서 밝검, 고시리 밝검, 주우양 밝검, 석제임 밝검, 구을리 밝검에 전하여 지우리 밝검에 이르니 혹은 선님(:하늘에 제사 드리는 사람)이라 한다. 7세를 전하여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도 한다. ----주(注)에 말하기를 환(桓)은 천일(天一)이며 동시에 광명이다. 천일이란 삼신(三神: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이고 광명(하느님의 빛)은 삼신(:하느님)의 참된 덕이니 곧 우주만물보다 앞선 존재(창조주)를 말한다.』(삼성기 전 하편, 환국본기)


(3) 수메르의 기록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고대도시 유적 발굴에서 나온 수메르의 왕명표에는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와 먼저 에리두에 있었다. 에리두 에서는 아루림이 왕이되어 28,800년간 통치하였다. 아라르가르는 36,000년 통치하였다. 두 왕은 64,800년 통치하였다. 대홍수가 당을 쓸어낸 뒤 왕권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니 그것은 먼저 키시에 있었다. 키시는 패하여 우르크의 성소로 옮겨졌고 태양신 우투의 아들 메스키아그 가셀이 왕과 대사제를 겸하여 324년 통치하였다. 우르크는 패하여 우르로 옮겨졌다. 우르는 메스 안내바다(파도타고 온 사람)가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네 왕은 177년 통치하였다. 우르는 싸움에 패하였다.』(대세계사)

(4) 고고학 분야

제임스 처치워드가 인도사원에서 발견한 점토판에는 7만년전에 무대륙문명이 존재하였음을 밝혓고, w. 니이븐이 멕시코 분지와 샌디에고에서 발굴한 석판은 약 6만년 전의 것이며 비취목걸이가 있는 무덤의 인골은 약 7만년 전의 것이라고 하였다.
또 처음에는 무대륙의 식민지였다가 나중에 대제국이 된 위글제국도 약 7만년 전의 역사라고 한다. (이상 7만년 하늘민족의 역사 1장2절 참조)

(5)인류의 조상 나반과 아만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고 한다. 처음 아만과 만난곳을 아이사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9환(桓)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삼성기 전 하편, 태백일사)
약 72,000년 전후에 지구변동에 의해서 그때까지 살아오던 인류가 멸망하고 한님(하나님, 하느님, 한얼님)께서 신들을 내려보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그가 바로 나반이며 지구에서 살아남은 아만과 결혼하여 자손이 퍼졌는데 그 자손들이 오늘날의 현생인류이다. 이 나반과 아만의 설화가 바로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견우와 직녀 이야기이다.

"나반과 아만은 너무나 사랑하여 세상일에 관심을 갖지않고 백성도 돌보지 않았으며 천진하고 순수하게 오직 둘만의 사랑만 즐겼기 때문에 한님의 노여움을 사서 그 벌로 죽어서 서로 멀리 떨어진 견우성과 직녀성에 각각 살게 하였는데 1년에 단 한번 음력 7월 7석 날에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서로 바라만 보며 울기만 하니 그 눈물이 비가 되어 지구에 홍수가 나서 살아가기 어렵게 되자 가장 높은데 까지 올라갈 수 있는 새들 중에서 까치와 까마귀들을 보내 은하수에 다리(오작교)를 놓아주니 두 사람은 단 하루지만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지구에는 홍수가 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견우와 직녀설화의 주인공이 바로 나반과 아만이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점은 나반과 아만의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음과 양이 화합할 때는 행복하고 음과 양이 떨어져 있을 때는 괴롭고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상극시대와 화합시대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괴로운 상극시대가 끝나고 평화로운 후천 화합시대가 열려 음과 양,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이 화합하여 홍익인간시대 즉 낙원천국시대가 온다.
여기의 까마귀는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등장하니 어쩌면 성경의 창세기 중에는 7만년전의 이야기도 섞여있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것은 전세계에서 한국사람만 7월7석을 민속절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념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은 무려 7만년이나 된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인 기념일로 지내왔다. 어째서일까?

※ 견우성은 독수리자리에서 가장 밝은 알파별이고 백색의 0.9등성이며 표면온도 섭씨 800도, 거리 16광년, 태양의 1.4배이다.
이 별의 명칭은 알타이르(ALTAIR: 앨테어, 알타이)라고 하는데 알타이어족과 상관관계가 있지만 확실한 것은 밝혀진 것이 없다.
※ 직녀성은 거문고자리 알파별로서 은하를 사이에 두고 견우성과 마주보고 있다. 이 별은 베가(VEGA)라고 하며 백색의 0.1등성, 거리 26광년, 태양의 2.4배다.

이상과 같이 다섯가지를 살펴보았다.

중국의 기록은 아직 70,600년이 되지 않았으니 현재 70,600년 이전이다.
한국의 기록은 한웅시대 이전이 밝검시대이니
63,182+5,900=69,079년 전 이 된다

수메르의 기록은 64,800년 이후에 키시의 초대왕조가 BC.2700년경에 시작되었는데 키시, 우르크, 우르의 역사가 501년 지났으므로 BC.2200년경에 왕명표가 제작된 것으로 보면 64,800+2,200 =69,000년 전 이 된다.

그러므로 기록상으로는 한국, 중국, 수메르가 똑같은 시대와 똑같은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무대륙, 멕시코, 위글문명과 나반의 설화가 모두 약 7만년 전의 것을 말하고 있으니 현생인류의 역사는 7만년이라는 학문적 이론을 정립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왜 인류역사가 7만년동안 계속해서 발전하지 못하고 자주 단절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구변동 때문이다. 지구변동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면;

1. 우주순환에 따른 변화
2. 지구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문명의 고도발전은 무자비한 개발과 오염이 지구에 강한 스트레스를 주어 견디지 못하면 지구스스로 정화운동을 한다.

지구변동에는 소변동, 중변동, 대변동이 있는데 이 대변동을 일명 개벽이라고 한다. 남북극이 이동하고 대륙의 침몰과 융기가 일어나 인류는 멸망한다.지난 7만년동안 지구기온이 5도 이상의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를 대변동으로 보면 72,000년 전후시대, 65,000년 전후시대, 58,000년 전후시대, 50,000년 전후시대, 39,000년 전후시대, 32,000년 전후시대, 19,000년 전후시대, 12,500년 전후시대 등 8회의 대변동이 일어나 인류가 멸망했다.

한단고기의 7세환인들중 맨처음 아버지(안파견)밝검(환인)은 69,000년 전∼65,000년 전후시대에 현생인류 최초로 나라를 세운 분으로서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기 위하여 태양 속에 거주하는 태양신께서 인간으로 직접 내려오셔서 나라를 세워 밝나라(桓國)라고 하고 그분을 밝검(桓仁)이라고 한 것이다. 그 뒤에 여섯분들은 태양신의 신하들이 인류의 멸망 때마다 땅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가르침을 베풀었으며 우리역사에서 첫 환웅(桓雄)이란 분은 바로 태양신의 태자가 아닌 여러 왕자중의 한 분으로서 우리민족의 시조이고 수메르민족의 시조이기도 하다. 한웅의 개국시기는 1만년 전이라고도 하나 우리 고 기록에는 6천년이라고 되어있으니 이 문제는 30년 후에 밝혀질 것이므로 우선은 고 기록대로 6천년 전의 조상으로 정리하겠다.

기록이나 고고학 연구에서 7만년 인류사동안 전 세계적으로 태양신을 숭배하여 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영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현대인보다 훨씬 뛰어난 옛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에 대한 칭호는;

천부경의 일 시무(一 始無: 한님은 어디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태초이전부터 자존하신 분)로 시작되는 한님(一任)은 우주 창조주의 본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환(桓)은 신의 빛 즉 밝음이다. 창조주의 아들은 태양신이며 우리는 태양신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할아버지이고 첫 조상이며 태양신은 조상인 아버지이다. 그러니 창조주-태양신-인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만물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천지인 일체사상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고 또 자손에게 물려준다. 이와 같이 창조주-태양신-인간은 그 근본이 같다. 우주만물의 근본이란 본성(本姓)이며 본성이란 착함과 밝음이다. 이 착함과 밝음의 본체가 하나로 어우러져 중심이 되고 그것이 나뉘어 지혜, 능력, 덕이란 삼신(三神)이 되니 이 삼신은 신의 작용이다. 그래서 창조주 한님을 삼신님이라고도 부른다. 우주만물의 골격은 다섯 가지 기본요소로 되어있는데 그것이 오행이다. 구조체의 기본원소인 셈이다.

그러므로 "한님(하나님, 하느님, 한얼님)"이라고 부르면 신의 본체를 지칭하는 칭호이고 "환님"으로 부르면 신의 빛 즉 밝음인데 한문식으로 말하면 광명(光明)이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을 한민족 또는 밝족이라고도 부른다.
"한(一)"은 또 첫머리이고 으뜸이니 땅에서는 제후 왕들이나 임금의 칭호로 쓰였으며 한님을 대신해서 그 제후왕들이나 임금들을 감찰하는 감찰관을 "검"이라고 하였으니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나라이름과 왕칭은 중국과 달리 써야하므로 밝검, 한웅, 한검, 왕검의 네 가지로 사용하여 왕조를 구분하고저 한다.

창조주 한님으로부터 왕권을 받아 한님을 대신해서 뭇 왕들을 감찰하는 왕중의 왕을 뜻한다.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란 창조주 한님을 계승하여 땅에서 조상이 되었다는 뜻이고 밝검이나 한웅의 칭호는 한님의 권한을 대신하여 인간세상을 살피는 왕중의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다. 환웅(桓雄)이란 하늘나라에서 신(神)으로 있을 때의 모습 즉 대단히 밝은상태인 대광명(大光明)을 말하고 땅에서는 가장 지혜롭고 능력과 덕이 인간을 초월하여 뛰어난 상태의 지도자로서 왕중의 왕 즉 왕들의 영웅이란 뜻으로 쓰는 왕칭(王稱)이다. 그러므로 "한웅천왕"은 "천왕천왕"이 되니 틀린 것이다. 우리민족의 시조들, 밝검(桓仁), 밝달검(桓雄), 한검(아사달검: 속칭 고조선의 시조)은 인간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아버지 밝검, 커밝 한웅(韓雄), 아사달검으로 불러야 한다.

이조 명종때 (1,500년 전후) 박세무가 지어서 모든 사람들이 배웠던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사람과 만물이 난 후 성인이 나오시어 하늘을 계승하여 나라와 가르침을 세우니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 유소씨(有巢氏), 수인씨(燧人氏)가 태고시대의 주인들인데 글이 있기 이전이야기라 참고하기 어렵다" 는 내용이 있다.
우리 나라 역사는 7만년 전, 26,000년 전, 9,200년 전, 6,000년 전, 4,300년 전 등 다섯 번의 역사기록이 있다.


참고로 26,000년 전의 기록을 보자;

한국의 신사기 치화기(神事記治化紀)에
"땅이 열린지 이미 21,900돌이니 사람이 난지가 오래다."고 하였으므로 한검(아사달 검: 속칭 고조선 시조)이 4,330년 전이므로 21,900+4,330=26,230년 전에도 우리역사 시기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 시대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들이 있었다.

① 36,000년 전부터 지속되어온 멕시코 마야 조상문명.
② 소련 블라디미르의 뼈 창과 뼈 바늘이 27,000년 전의 유물이다.
③ 알래스카 유콘주의 27,000년 전의 석기가 발견되었다.
④ AD340년 에우세비오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 역사시기는 27,225년이다.
⑤ 남미 페루의 25,000년 전의 유골과 공예품이 발견되었다.
⑥ 25,000년 전의 뼈에 역법을 표시하였다.(알렉산더 마쟈크)
⑦ 25,400년 전에 아트란티스 문명이 있었다.
(이상 유왕기저 7만년 하늘민족의 역사 참고)

세계의 기록이나 고고학에 의하여 인류의 발자취를 증거할 수 있는 시기에 우리 조상님들의 자취를 나타내는 기록이 한국에 있었다는 것은 가히 대단한 것이 아니겠는가!


☆ 재미있는 이야기; 안파견(安巴堅)

안파견은 아버지란 뜻이다.
밝나라 임금을 밝검이라고 하는데 밝검은 한밝검의 줄임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한밝검을 한배검이라고 한다. 밝고개가 배오개로 발음이 변하고 밝달나라를 배달나라라고 하고 밝달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교착어로서 서로 비슷하고 수메르어와 중국어는 문자의 변천과정과 발음의 변천이 비슷하다. 그럼 한밝검을 한자씩 살펴보자.

"한"

"한(一)"은 우주창조자의 본체를 지칭하는 말이며 태양신은 창조주의 아들이니 태양신도 역시 "한"이다.
"환인 또는 한님"이란 말이 수메르에서는 "안(AN) 닌(NIN)"으로 발음이 변했고 "안(AN)"은 수메르의 최고신인 하늘신이고 "닌(NIN)"은 왕이나 하느님께만 붙이는 최고의 호칭인데 우리말의 "님"과 같다.
따라서 중국지역에서는 "한"이 안으로 발음할 수가 얼마든지 있다.

또 인류는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대략 3,000년 전 이후시대부터 서쪽에서 동쪽으로 민족의 이동이 있었고 아사달의 22대 색불루 왕검은 지금의 서요하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 북쪽과 서쪽의 여러 족속들을 정복하여(후세의 흉노족) 그 무리를 이끌고 우리 나라의 왕검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서쪽에 있던 족속들이 동쪽으로 많이 이동했고 이에 따라 서쪽에서 쓰던 말들이 만주일대에서 혼용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만주지역에서 "한"이라고 발음하던 말이 이때 이후에 "안"으로 발음이 얼마든지 변했을 수 있다. 앞의 삼황기 1절 (2)한국기록에서 "파나류산"이나 "파나류"등의 말도 서쪽에서 온 발음들이다.
이 사람들의 후손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나타난 것이 "안", "파나류"등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말은 하늘을 본따서 만든 글자가 "ㅇ"이고 "아"라는 발음이다. 즉 "아"는 옛날의 "한"의 뜻을 대신하여 쓰는 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안"은 예날의 하늘을 뜻한다.
우리말의 발음의 변천에 따라 "한"이 "안"으로 변하고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ㄴ"이 탈락되어 "아"로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파(巴)"

우리말의 "밝"은 박(박달, 은나라 서울 박, 박씨), 발(발하시호, 발칸반도, 발해), 바(바라문, 바-로: 파라오의 원음, 바알), 파(파미르, 파라오, 파리), 평(평나, 평양) 불(불:火, 불타: 부처), 부(부도, 부처, 부루) 등의 발음으로 갈라졌으므로 파는 "밝"에서 파생된 말이다.

"견(堅)"

"견"을 한문으로 적으니 우리말로 "견"이라고 못박혀 버린다.
중국인의 발음은 "첸"과 "젠"의 중간 발음인데 이것은 "톈"과 같이 쓸 수 있는 발음권 내에 있다. 우리말에도 "텽거장"이 "정거장"으로 변한 것과 같다. "첸, 젠, 텬"등은 "겐, 겜, 검"과도 같이쓸 수 있는 발음권 내에 있다. 우리말도 인검-임검-임금으로 변했는데 동서남북의 인종이 한데 어우러져 살면 말의 변화가 심하여 정확히 추적하기가 어렵다. 한가지 예를 들면 우리말에 "엉덩이" "궁둥이" "방덩이"는 발음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지만 가리키는 것은 똑같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견"이란 발음은 옛날의 "검"을 지칭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안파견"은 "한밝검"이나 이와 비슷한 발음 또는 비슷한 뜻을 가진 말이다.
언어의 발전은 광범위하고 복잡하여 뜻이나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면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글자를 마음대로 썼으므로 그 정확한 것을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인 추정은 가능하다.

"한밝검-한박검-한박겐-하바겐- 하파겐-하바제(하바, 하베, 하비, 하브, 히비, 히브, 이비, 이브)- 아바지(아베, 아비, 아브, 아부)- 아버지(아바찌, 아파치, 아바이)등의 발음으로 얼마든지 변하고 갈라질 수 있다.
이렇게 추적해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히비리, 히브리, 이비리, 이브리, 아브라함 등의 발음들이 어디서 왔는가를 알 수 있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아파치란 영어표기 발음이 어디서 왔는가를 알 수 있다.

"한밝검"은 창조자 한님을 계승하여 땅에서 인간의 조상이며 임금이 된 분을 말한다. 인간 조상님은 한님을 계승한 것이고, 임금은 한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보살피고 교화시키는 직분이며, 한님께 제사 드리고 받드는 것은 후손으로서 조상님을 모시는 제사장의 직분이다. 그러니 창조주-해님-인간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신앙은 어떤 특별한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고 모두 조상님이므로 조상신을 받드는 민족이다. 이것이 왜곡되어 민족의 숭고하고 위대한 진리를 모르는 중국인들이나 서양인들은 귀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미신이라고 천대하고 배척했으니 가히 그들의 신앙과 진리의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로 같다.
즉 임금도 스승이요 아버지이며, 스승도 임금이나 아버지처럼 받들어야 하고, 아버지도 임금님처럼 스승님처럼 모셔야 한다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군사부일체사상이나 충효의 사상은 중국의 공자사상이 아니다. 유교가 들어와 공자를 유학의 시조로 받들고 신격화 하면서 그것이 마치 공자의 사상인 것처럼 와전된 것이지 실제로는 9,200년 전부터 전해오는 민족의 유구한 전통이고 위대한 사상인 것이다.

공자, 석가, 예수는 기껏해야 2,500년 전의 인물들이다. 인류문명의 역사가 무려 7만년이나 되는데 인류의 도덕이 어찌 겨우 2,500년 전에 생겼을까?

우리민족의 정신상태가 너무나 낮은 수준까지 떨어져 있어서 공자, 석가, 예수 이전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그들을 신격화하여 거기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훌융한 스승으로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치 태양이나 창조자처럼 신격화해서 그 속에 빠지는 것은 금물이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니 지금의 모든 종교들은 머지않아 사라지게 된다.
오래지 않아서 증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