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채널] 알렉산더 대왕 1/3
3부작 / 알렉산더 대왕 1부
[히스토리 채널]
잔인한 인간정복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누구보다 탁월한 사람이 하나 있다. 전사에서 시작해 왕으로, 신화의 주인공이 된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는 무자비한 엄마(올림피아스)에게 태어나, 위대한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을 받았고, 패권주의자인 아버지(필립 2세)에게 자극 받았다. 그는 14살에 마케도니아 전사가 되었고, 18에 장군이 되었고, 20살에 왕위에 올라서, 4만 대군을 진두지휘했다. 그의 이야기는 신화로 남아 오늘날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은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3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수세기동안 역사학자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알렉산더 사후 몇 세기 후에 4명의 기록자에 의해 알렉산더에 대한 이야기가 정리되었다(그리스의 역사가 에리안, 시칠리아의 다이오드로스, 로마의 카시오스 루퍼스, 어렸을 때를 기록하고 성격을 분석한 그리스의 철학가 플루타크).
기원전 356년 알렉산더가 태어났다. 그리스의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는 당시에 그리스인들에게는 열등한 나라로 업신여김을 당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엔 금광이 많아서 매우 부유한 나라였다. 필립 2세는 적극적으로 자원을 개발하고, 군대를 소집하고 훈련시켜, 마케도니아군을 세계 최고의 정예부대로 양성했다.
필립 2세는 전쟁에 출정할 때마다 새로운 아내를 맞아들였다. 이것은 외교적인 효과로도 한몫을 담당했다. 357년에 26세의 나이로 필립 2세 에피루스 출신의 올림피아스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올림피아스와 사랑에 빠진 필립은 올림피아스가 무자비한 면이 있고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올림피아스는 아들 알렉산더를 어떻게 해서든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만드는 것에 몰두했으며, 알렉산더의 왕위 계승에 관해서는 상당히 무자비한 면이 있었다.
필립 2세는 우연히 올림피아스가 뱀과 함께 잠자는 모습을 발견한다. 당시 최고의 신 제우스가 뱀의 모습으로 인간 세계에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필립은 신과 관계를 맺은 올림피아스가 자신에게 마법을 걸까봐 두려워서 잠자리를 피하게 되고, 점차 그녀에 대한 사랑도 식어갔다.
필립 2세는 올림피아스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자신의 아기인지 제우스의 아기인지 밝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야 했다. 기원전 356년 알렉산더가 태어나기 몇 달 전, 필립 2세는 델포이 신전을 찾았다. 신탁의 내용은 애매모호했다. 앞으로 알렉산더는 제우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우스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올림피아스가 뱀과 함께 있는 것을 엿보았기 때문에 필립 2세는 조만간 시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2년 뒤, 신탁의 내용대로 필립은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 된다.
아들 알렉산더를 낳기 전... 필립은 델포이를 방문하여 신탁을 받는다.
알렉산더가 태어난 해인 기원전 356년, 필립 2세는 한창 영토 확장을 추진하고 있었다. 4세기경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는 필립의 고향이었다. 알렉산더는 펠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호머였다.
필립 2세의 고향 펠라... 그리고 이후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된 에이지
13세 때 필립은 아들의 지혜가 자신의 용기를 능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뛰어난 말이지만 다루기 힘든 말(무세팔루스)을 알렉산더가 쉽게 다루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말이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놀랐다는 것을 알고서 태양을 향해 서도록 했다. 그리고 진정한 말을 타고 달렸다. 이때 필립은 알렉산더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너가 야망을 펼치기엔 마케도니아가 너무 작다. 더 큰 왕국을 찾아라.”
필립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긴다. 이것에 대해서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생명이라는 고귀한 선물을 주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쳤다. 그 중에서 ‘지적 호기심’을 가르쳤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억측을 하지 못하도록 모든 상황을 다루게 한 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사실을 분석하도록 가르쳤다. 이것은 타고난 영재를 천재로 만드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사춘기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귀족의 아들인 해피셔를 만났다. 많은 역사가들은 둘이 친구 이상의 관계였다고 믿는다. 알렉산더가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필립 2세와 올림피아스는 성에 눈뜨게 하기 위해서 고급 매춘부를 데려와서 알렉산더에게 여자와 성에 대해서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에게는 여자들과 지내는 것보다 전쟁터에서 전략을 짜는 것이 더 흥미있는 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운 철학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사로서의 육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신화에 대한 열정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이 탄생했다.
기원전 340년, 그리스 전체를 점령하려는 필립 2세가 원정을 떠난다. 창병을 네모꼴로 배치하는 전법을 사용하는 필립 2세. 이 전법은 보병의 수를 최소화하는 대신 각각의 보병이 기다란 창(4~5미터)을 들고 전진하는 당시로서는 최강의 전력이었다.
당시 16세의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승전보를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친구들에게 “내 아버지가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야망이 있는 인물이었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39년에 고대 마케도니아의 수도 에이지에서 필립 2세가 이룩한 공적을 살펴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필립 2세가 원정을 떠난 도중에,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대사들을 맞이했는데, 당시 페르시아 대사들은 알렉산더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스를 장악하려는 필립 2세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테베와 아테네의 연합군이었다. 특히 테베의 150명의 전사들은 무자비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페르시아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페르시아 왕은 테베와 아테네가 필립 2세의 야망을 꺾어주길 원했다. 그리스 중심의 케로니아에서 양 진영이 마지막 대결을 펼친다.
기원전 338년 8월, 당시 알렉산더는 18세였다. 필립은 알렉산더에게 기병대의 지휘권을 맡겼다. 2천명의 기병대는 필립 2세의 좌측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왔다. 케로니아 전투는 알렉산더의 데뷔전인 셈이다.
케로니아 전투
아테네군과 격돌한 필립의 창병 부대는 갑자기 후퇴하라는 지시를 받고 대열의 흐트러짐 없이 후퇴를 시작한다. 아테네군은 이러한 필립의 부대를 향해 전진했고, 테베군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 테베군과 아테네군 사이로 알렉산더의 기병대가 돌진하게 되었고, 알렉산더는 테베군을 포위하여 공격을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필립의 부대도 아테네군과 전투를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는 대승을 거두었고 그리스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필립과 알렉산더의 관계는 서서히 부자 관계에서 불신과 증오의 관계로 변하기 시작했다. 케로니아 전투 이후에 필립 2세는 새로운 신부를 맞아들였다. 상대는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의 20세의 젊은 클레오파트라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아들을 낳을 경우에 알렉산더는 왕위계승의 서열에서 밀려나게 된다.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는 에피루스 출신이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순수 마케도니아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호머의 일리아드를 즐겨 읽었던 알렉산더는 일리아드의 주인공 아킬레스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338년 가을, 필립과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감돌았다. 신부의 삼촌인 아탈루스가 왕위계승자의 탄생을 기원하며 축배를 들자고 했다. 화가 난 알렉산더는 아탈루스에게 술잔을 던졌다. 필립 2세가 칼을 뽑아들고 방을 가로질러 알렉산더에게 가려고 했지만 술에 취해 넘어졌다. 알렉산더는 그러한 필립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유럽을 건너 아시아 정복을 꿈꾸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는 테이블 하나도 건너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 사건 이후 18년 동안 쌓아왔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끊어졌다. 결혼식 사건 이후 알렉산더와 올림피아스는 추방되었다. 그러나 곧 필립 2세는 왕위계승자와 유능한 군사지휘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알렉산더를 다시 불러들인다. 그러나 올림피아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화해는 했지만 알렉산더가 왕이 되리라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한 지 1년도 안되어 아들을 낳았다. 필립이 오래 산다면 왕위는 마케도니아 순수 혈통인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 오를 확률이 커지게 된다.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한 필립은 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면서, 충실한 부하인 파메니오 장군을 먼저 소아시아로 보내 교두보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필립은 아시아 원정 이전에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신탁의 내용이 애매모호했다. 황소에게 화환을 씌우고 제물을 바칠 준비를 하라는 신탁을 받은 필립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살해되어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신탁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대규모 원정 이전에 필립 2세는 336년 10월에 에이지 왕궁 앞마당에서 성대한 축제를 벌인다. 필립은 성대한 축제를 계획한다. 모두에게 즐거운 축제였지만, 왕의 근위병 호시니우스는 달랐다.
전해지는 역사에 의하면 호시니우스와 필립은 깊은 (사랑의) 관계였다고 한다. 그런데 필립이 다른 젊은 청년에게 관심을 보이자, 호시니우스는 젊은 청년이 양성애자라고 비난했고, 이것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되었다. 호시니우스는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고, 무의식중에 술취한 왕의 마부들에게 강간을 당한다. 호시니우스는 강간당한 사실을 왕에게 알렸지만, 왕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호시니우스는 필립 2세를 칼로 찌르고 도망쳤다. 그러나 그는 다른 근위병들에게 잡혀서 살해당한다.
필립 2세는 전통에 따라 화장되어 소장품과 함께 무덤에 묻혔다. 필립 2세의 무덤은 오늘날 버기나 박물관으로 변신한다.
암살자의 배후에 다른 인물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왕의 아내인 올림피아스, 그리고 알렉산더가 연루되었다는 이야기도 제기되었다(달아나던 호시니우스는 알렉산더의 친구들에게 붙잡혀서 살해된다). 그런데 그것을 증명할만한 증거는 없었다.
왕의 장례식 이후, 알렉산더는 자신이 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6개월도 안되어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패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원정을 떠났고, 이 원정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올림피아스는 필립 2세의 갓 태어난 아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겁에 질린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일한 왕위계승자가 된 알렉산더는 본격적인 페르시아 정복의 길에 나서기 전에 아버지처럼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으려고 했다. 335년 11월, 알렉산더는 직접 신전을 방문했지만 겨울에는 신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듣는다. 신전 여사제에게 신탁을 강요하게 되고, 견디다 못해 여사제는 ‘누구도 널 정복할 수 없다’는 말을 해 준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알렉산더는 더 이상 예언을 들을 필요가 없다며 되돌아 간다.
알렉산더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신의 계시를 받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알렉산더에게 정복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올림피아스가 말해준다.
본격적으로 아시아로 원정을 떠나는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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