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채널] 알렉산더 대왕 2/3
3부작 / 알렉산더 대왕 2부
[히스토리 채널]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2세가 근위병에게 암살당한 이후, 20살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는 즉시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아버지가 추진하던 정복사업을 계속 추진했고, 페르시아를 굴복시켰다.
그는 처음부터 상대를 위협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4만 대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진출했다. 당시 페르시아 함대의 공격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운좋게도 알렉산더의 군대가 해협을 건너는 때에 페르시아의 함대는 이집트의 폭동을 진압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해협 중간쯤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황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 바다를 건너 아시아에 도착한 알렉산더는 바닥에 창을 던지며 아시아를 받았다고 소리쳤다. 그러한 알렉산더를 기다리는 것은 페르시아의 군대였다.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넌 알렉산더는 그리스 용병으로 구성된 페르시아의 4만명과 그라니쿠스에서 격돌한다.
알렉산더를 애송이라고 얕잡아본 다리우스는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신임하는 멤논 장군을 보냈다. 그리스 용병인 멤논 장군은 자신에게 유리한 지역인 그라니쿠스 강을 전투지로 선택했다. 이 강은 오늘날에 비해 3배나 넓고 깊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파메니오 장군, 절친인 해피셔, 그리고 알렉산더의 개인사를 기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와 동행했다. 강 건너편에 기병 2만, 보병 2만의 페르시아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그리스의 용병이었다. 파메니오 장군은 자칫 잘못해서 초반에 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라니쿠스 강을 건너는 것에 신중을 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한 파메니오 장군에게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헬레스폰트 해협도 건넜는데, 이 작은 강 때문에 진군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건 위험에 처했을 때 내가 대응하는 방식과 거리가 멀다.”
알렉산더는 모든 적군의 표적이 될 수 있도록 진두지휘하면서, 햐얀 깃털이 달린 투구를 썼다. 알렉산더가 그라니쿠스 강에서 사용한 전략은 아버지 필립 2세에게서 배운 전략이다. 기병대와 보병대가 강을 건너 페르시아군과 정면대결을 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기병대를 이끌고 상류를 건너 우측에서 적군을 공격하려고 했다. 무모하고 미친 것 같았지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알렉산더가 직접 앞에서 진두지휘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는 무모한 돌진으로 그라니쿠스 강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기병대로 강을 건너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결국 마케도니아 군대는 반대편 강둑에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공격의 치열함으로 알렉산더는 투구에 타격을 입고 들고 있던 창까지 잃어버린다. 페르시아 병사가 알렉산더를 찌를 수 있는 순간이 왔지만, 마케도니아 병사가 페르시아 병사의 팔을 자르면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마케도니아군은 페르시아군의 중심 대열이 약해진 틈을 타서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결국 페르시아 군대는 마케도니아의 창병부대와 알렉산더가 이끄는 기병대의 대담한 공격에 못이겨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라니쿠스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멤논 장군으로부터 참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리우스는 다음번에는 자신이 직접 페르시아군을 지휘하겠다고 다짐한다.
334년, 그라니쿠스 강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찌른 알렉산더는 진군을 계속해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고디엄 시를 함락했다. 알렉산더가 성에 도착했을 때 성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400년전 고디엄 시는 마이더스 왕의 도시였다. 알렉산더는 마이더스 왕의 전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이더스의 아버지 고디어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고디엄으로 왔다. 왕에 오른 고디어스는 소달구지를 제우스 신에게 바쳤다. 그리고 소달구지에 매듭을 매어놓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전해졌다. 당시는 신화와 전설을 믿던 시대였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매듭을 풀어야 했다. 그는 매듭을 푸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칼로 매듭의 끝이 보일 때까지 칼로 내리쳤다. 그날 밤 고디엄시에 천둥이 몰아치는 것을 본 알렉산더는 제우스 신이 자신을 인정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라니쿠스에서의 승리 이후 고디엄 시를 향한 알렉산더의 원정길.
고디엄 시의 일화는 처세술과 종교심이 강한 알렉산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기자회견에 강한 지도자였을 것이다. 여론을 형성하거나 선전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감명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특유의 쇼맨쉽을 발휘했다.
다리우스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이수스로 향하는 알렉산더...
알렉산더의 군대는 다리우스가 알렉산더를 저지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수스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고디엄 시를 떠나 남쪽으로 이동했다. 다리우스가 60만 대군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6만에서 10만으로 추정한다. 다리우스는 경험많은 장군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카리디모스는 페르시아의 군대가 공포심을 조장하기는 하지만, 마케도니아의 창병부대의 강인함에 대해서 알려준다.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 카리디모스는 화가난 다리우스에 의해서 처형당한다.
승리를 확신한 다리우스는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기습 공격을 시도하려고 한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가 남쪽에서 공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군대를 이수스 아래로 포진시켰다. 그러나 그러나 다리우스가 이수스 북쪽을 공격해서 알렉산더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북으로 향한다.
333년 11월, 지중해와 만나는 피나루스 강을 사이에 두고 페르시아군과 마케도니아군이 대치했다. 알렉산더의 보급로를 차단한 다리우스,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위치한 알렉산더 사이의 대결이 시작될 즈음, 알렉산더는 승리를 확신하지 않지만 전쟁터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다리우스는 지중해 해안가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언덕의 측면에 보병을 배치하여 알렉산더 부대를 포위하려고 했다. 알렉산더는 좌측에 파메니오 장군이 이끄는 보병을 배치했는데, 페르시아 진형을 살핀 후에 좌측에 연합군 기병대를 더 배치하여 페르시아의 기병대에 맞서게 했다.
다리우스의 보병이 언덕 위에 포진하고 있다.
페르시아 기병에 맞서기 위해 기병대를 추가로 배치한 알렉산더...
전투의 초반과 중반은 마케도니아 군대로서는 힘겨운 전투였다. 페르시아 진영 한 가운데로 진군한 마케도니아의 부대는 포위되어 맨주먹으로 싸워야 했다. 거친 지형으로 인하여 전설적인 마케도니아의 창병부대와 보병들은 육박전을 통해서 버텨야만 했다.
이때 알렉산더의 기병대가 다리우스의 전차를 향해 돌진을 시도했다. 허벅지에 상처를 입을 정도로 맹렬한 돌진을 하는 알렉산더의 기병대에 놀란 다리우스는 줄행랑을 쳤고, 이수스 전투는 알렉산더의 승리로 끝난다.
이수스 전투 이후 알렉산더는 포로들 속에 다리우스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직 미혼인 두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다리우스 왕이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들에게 다리우스가 죽지 않았다고 알려주면서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진짜 페르시아 왕이니 페르시아 귀족들은 자신에게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수스 전투를 통해서 알렉산더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 이끄는 가장 강력한 군대를 무찔렀다. 이후 알렉산더가 항구도시 페니키아와 키프로스를 점려하였을 때, 다리우스의 편지가 전해졌다. 몸값을 줄테니 포로를 석방해 달라는 요구와 함께, 유프라테스 서쪽과 딸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옆에 있던 파메니오 장군은 “내가 알렉산더였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고, 알렉산더는 “내가 파메니오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페르시아의 장부들을 물리치고 다리우스 왕과 당신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까지 물리쳤다. 이후 내게 할 말이 있으면, 대등한 어투를 쓰지 말고 아시아의 왕에게 하듯이 하라. 당신 소유의 것은 모두 다 이제 내 것이다. 왕위를 원한다면 도망가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워라. 어디에 숨어있든 내가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
이후 알렉산더는 군사적 요충지인 티루스로 향했다. 외교적으로 접수하려는 알렉산더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알렉산더는 티루스 섬의 사자에게 헤라클레스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싶다고 말했고, 알렉산더를 섬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부담된 티루스 섬의 사자들은 육지에 있는 헤라클레스 신전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화가 난 알렉산더는 티루스 섬도 육지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군사적 요충지인 티루스를 점령하려는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800미터 방파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실제로 티루스 섬은 느부갓네살 왕도 점령하지 못했었다. 알렉산더는 티루스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지만, 티루스 사람들은 사신마저 죽여버린다. 결국 알렉산더는 힘으로 티루스 섬을 점령하기로 결심한다.
방파제 건설은 쉽지 않았다. 자연조건과 싸우고, 방해하는 티루스 섬의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첫 번째 방파제가 파괴된 이후에 알렉산더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방파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7개월에 걸쳐 알렉산더는 결국 티루스에 입성하였고, 저항한 티루스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티루스 공격에 대한 성공은 아시아 전역에 퍼졌다. 알렉산더는 전략에 필요한 것이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밀어붙이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군대를 믿었던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물리치고 페르시아 전체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알렉산더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에게해의 항구도시를 모두 점령한 알렉산더는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군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왕이자 태양신 라의 아들이라는 뜻의 파라오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다(오늘날 400만명, 이집트 수출입물량의 80%에 달하는 도시).
알렉산더가 이집트에 있는 도중에 페르시아는 반격을 준비했다. 마케도니아로 가는 퇴로가 차단당하기 전에 진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여 아몬 신전으로 향했다. 갈증으로 힘들어 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 길을 잃었을 때 짐승의 안내를 받으며 그는 신이 자신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아몬 신은 모든 신들의 신인 제우스에 해당하는 신이었다. 알렉산더는 신탁을 받아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알렉산더를 맞이한 사제는 ‘나의 아들’이라는 파이디온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파이디오스’(제우스의 아들)라고 말해버렸다. 알렉산더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신탁을 받기로 했다. 지성소에서 알렉산더는 세 가지를 물었다고 한다.
‘자신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모두 처벌을 받았는가?’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인가?’
알렉산더는 그의 질문을 듣지 못한 사제로부터 대답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성소 옆에 작은 통로가 있었고 사제들이 그 통로를 통해서 알렉산더의 질문을 엿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신탁의 내용은 이러했다.
‘알렉산더가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자들은 모두 처벌 받았다.’
‘알렉산더의 아버지는 제우스 아몬 신이다.’
사제들이 알렉산더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정식으로 인정했을 때, 알렉산더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증인도 없었고 오직 알렉산더 뿐이었다. 그러나 신탁 이후에 군대에 합류한 알렉산더는 그 어떤 패배도 없다는 확신에 찼다.
이제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또 다른 사람, 다리우스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한편 다리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주력부대인 창병부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비밀무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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