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채널] 알렉산더 대왕 3/3
3부작 / 알렉산더 대왕 3부
[히스토리 채널]
기원전 331년 가을, 그라니쿠스 전투, 이수스 전투, 티루스 전투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알렉산더는 다리우스가 살아있는 한 아시아의 통치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리우스 또한 알렉산더를 물리치지 못하면 아시아를 내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우가멜라(Gaugamela)에 군대를 주둔시킨 다리우스는 병사들의 칼과 창을 예전보다 길게 만들었고, 적군들을 겁주기 위해서 커다란 낫을 단 200대의 전차를 준비했다.
전투 전날 밤, 파메니온 장군이 정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군대의 진영을 살폈다. 파메니온 장군은 대낮에 전투를 벌이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밤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승리를 훔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정정당당하게 싸울 것을 고집했다. 다리우스가 지형과 주변 여건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면 계속해서 군대를 모을 것이기 때문에 솔직하게 패배를 시인하도록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리우스와 알렉산더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가우가멜라에서 벌어진다.
평소에 알렉산더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전략을 짜기 전에는 잠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전투 당일 알렉산더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투를 통해서 누가 아시아의 통치자인지 판가름이 날 것이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역시 전투에 임하기 전에 병사들에게 격려 연설을 했다.
“오늘 위대한 제국을 강화시키든지, 아니면 위대한 제국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 이 나라의 신들을 대신해서 제군들에게 간청하는 바이다. 치욕에서 벗어나 페르시아 국민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자.”
전투가 개시되고, 바퀴에 낫을 단 전차부대가 달려오자 마케도니아의 창병부대는 두려움에 떨었다. 마케도니아의 창병부대는 적군에게 창을 던지며 전차부대의 공격을 저지했다. 대부분의 전차부대는 저지되었지만, 저지선을 뚫은 전차부대로 인해서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희생도 컸다. 알렉산더의 부대는 처음으로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이때 알렉산더는 전차를 타고 지휘하는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해 나아갔다. 자신에게 돌진하는 알렉산더의 기병대에게 자신을 보호하던 병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다리우스는 전차를 버리고 말을 타고 도망쳤다. 그때 위기에 처한 파메니온 장군이 알렉산더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다리우스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기병대는 파메니온 장군을 구하기 위해 페르시아 기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가우가멜라 전투는 전투지휘자로서 알렉산더의 천재성이 드러난 전투였다. 다리우스가 보병 대신 중무장한 기병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양쪽에 있는 기병대가 마케도니아의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도록 유도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진영에 틈이 생겨 알렉산더의 기병대가 직접 다리우스를 공격할 수 있을 때까지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버텨주기만을 바랬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전략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는 1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다리우스의 군대는 30만명의 전사자를 냈다고 알려진다.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는 페르시아를 통치할 때 다리우스를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생포하려고 했다.
기원전 330년 1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지 4개월 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장악했다. 다리우스가 소유했던 재산까지 차지한 알렉산더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세폴리스를 마음대로 약탈해도 좋다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서로 더 많은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편끼리 싸우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지나치게 술을 좋아했다. 술자리에서 매춘부가 알렉산더에게 페르시아의 수도를 불태운다면 그리스 사람들이 고마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알렉산더는 술기운에 도시를 불태워 버린다. 나중에 후회했지만 도시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이후 다리우스를 생포하기 위한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그는 합법적인 아시아의 통치자가 되고 싶어했다. 다리우스를 생포하여 그의 왕조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먼 훗날 왕위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추격하기 위한 강행군을 시도한다. 도중에 그는 다리우스가 페르시아의 지휘관 베수스에게 사로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더 빠른 속도로 행군하였다. 결국 페르시아의 베수스 군대를 따라잡았지만, 베수스의 병사들은 다리우스를 창으로 찌르고 도망쳐 버렸다. 알렉산더의 부대는 다 죽어가는 다리우스를 발견했다. 자신을 발견한 알렉산더의 부하들에게 다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불행하구나. 내 너희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보답할 길이 없도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대신 너희들에게 보답을 해 줄 것이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다리우스의 시신을 덮어주었다. 후에 다리우스를 살해한 베수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죽이면서 원수를 갚아준다. 다리우스의 장례를 치러준 알렉산더는, 이제 합법적으로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자신의 군대 안에서 새로운 적을 만나게 된다.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 군대 내부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오랜 원정으로 지친 병사들은 고향으로 가고 싶어했다. 이때, 파메니오 장군의 아들 필로타스가 상으로 받은 여인 안티고네에게 자신과 파메니오 장군이 제일 큰 공적을 세웠다고 자랑을 한다. 안티고네는 이 이야기를 알렉산더에게 했고, 알렉산더가 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다른 사람들이 필로타스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결국 필로타스는 처형되었고, 파메니오 장군도 처형된다. 평소 파메니오와 필로타스의 충성심을 의심하던 알렉산더는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해 동안 생각해 오던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기원전 330년 10월, 알렉산더는 절친인 해피셔를 기병대 합동사령관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군대는 7년 넘게 인디아를 향해 진군했다.
인도를 향해 이동하는 알렉산더의 군대...
기원전 327년, 29세에 접어든 알렉산더는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한다. 아내(록사네)를 맞아들인 것이다. 평소에 여자에게 관심이 없던 알렉산더의 마음을 한 여인이 휘어잡은 것이다. 이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전통으로 왕에게 절을 하는 행동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인에게는 신에게만 하는 행동이었다. 이때 알렉산더를 따라다닌 역사가 컬리스틴지는 이렇게 충고했다.
“그리스를 생각하라. 당신은 그리스를 위해 아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고향에 가서도 자유를 사랑하는 그리스인들에게 왕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강제할 것인가?”
알렉산더는 즉시 컬리스틴지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페르시아의 전통을 추구하려던 알렉산더는 서서히 쾌락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자신의 신의 존재로 생각하던 알렉산더는 신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렉산더를 신으로 모시길 꺼려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365명의 아름다운 후궁을 거느렸다. 알렉산더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보다 전쟁 중에 빛을 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목표를 이룬 후에 방탕한 생활에 빠진 것이다.
그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페르시아 풍속을 따르게 되자 마케도니아 국민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 그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인도 정벌을 위해 진군하던 알렉산더는 히다스페 강에서 포로스 왕과 대결하게 된다.
기원전 326년 초, 인도로 간 알렉산더는 히다스페 강에서 그를 저지하려는 포로스 왕과 전쟁을 시작했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말 대신 코끼리를 탄 부대와 싸워야 했다. 그때까지 치른 전투보다 가장 힘든 전투였다. 포로스와 전투 이후 겁에 질린 마케도니아 군대는 더 이상 인도로 진군하기를 꺼려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간청에 의해 더 이상 전진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그는 히다스페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강둑에 위치한 도시들을 점령하였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말리 시에 도착했다. 이때 한 예언자는 이번 전투에서 알렉산더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이라며 말리 시를 공격하지 말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 예언을 무시하고 알렉산더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군한다.
사다리를 통해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이 느린 것을 보고 직접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오른 알렉산더는 적에게 둘러싸이는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성밖으로 뛰어내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요새 안으로 뛰어내려 적들과 육박전을 치른다. 그 모습을 본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한꺼번에 사다리에 오르는 바람에 사다리가 부서졌고, 마케도니아 병사 3명만이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알렉산더는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게 된다. 이후 요새로 뛰어든 마케도니아 병사 중에서 트로이 방패를 든 병사가 알렉산더를 지켰다. 이 전투에서 얻은 상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병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즉시 알렉산더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병사들에게 퍼졌다. 응급조치를 취하여 생명을 건진 알렉산더는 완쾌되기 위해서 오랫동안 간호를 받아야 했다. 그 후 건강을 회복한 알렉산더는 이후 2년 동안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육로와 해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324년, 알렉산더는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해피션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사망한 것이다. 해피션의 주치의는 처방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다. 해피션이 죽은 후 알렉산더는 이틀 동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고 침대에 누워 울기만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더는 삶의 희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해피션이 죽은 후 1년 뒤 알렉산더는 아라비아 정복을 계획하며 바빌론에 머물던 중에 병에 걸린다.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는 알렉산더가 사망했는데 근위대가 사실을 숨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존재하던 세계의 모든 나라와 도시들은 알렉산더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부하 장군들은 알렉산더 사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23년 6월 9일 저녁, 장군들은 병세가 악화된 알렉산더의 침상을 지켰다. 알렉산더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또 다른 죽음을 부르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한 알렉산더에게 장군들은 누구에게 왕국을 물려줄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이에 대한 알렉산더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가장 강한 자에게 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알렉산더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수세기동안 역사학자들에게서 알콜중독, 독살, 자살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더의 사인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무리한 정복전쟁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는 위대한 전사일지는 몰라도 유능한 행정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위대함은 죽는 그 순간까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는 데 있다.
알렉산더 대왕...
살아서도 그랬지만 죽어서도 그의 영향력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묻혔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위대한 영웅의 시신을 마케도니아에 모시고 싶어했다. 그러나 도중에 이집트의 새로운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시신을 탈취했다. 이후 수백년 동안 줄리어스 시저를 포함하여 수백명이 알렉산더의 석관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망한 이후 알렉산더의 시신은 사라졌다. 오늘날 학자들은 알렉산더의 시신이 알렉산드리아 거리 어딘가에 묻혔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12년 동안 4만명의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32000km를 누볐다. 그의 제국은 그가 죽은 뒤에 20명 이상의 통치자에 의해 분할되었다.
제국의 분열...
왜 알렉산더 대왕인가?
중요한 시기에 알렉산더는 동서양의 문화를 융합시켰다. 그의 제국은 많은 사람의 희생과 파괴된 문명 위에 건설되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가 신이었다고 생각했고, 신으로 대접받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확신했고, 우리도 그 점에는 동의한다.
'17[sr]역사,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군 전쟁 [KBS-HD 다큐멘터리] (0) | 2015.08.11 |
---|---|
[스크랩] 예수님의 12제자 (0) | 2015.08.11 |
[히스토리채널] 알렉산더 대왕 2/3 (0) | 2015.08.11 |
[히스토리채널] 알렉산더 대왕 1/3 (0) | 2015.08.11 |
누가 성서를 썼나(Who Wrote The Bible?) [3/3] (0) | 2015.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