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KBS-HD 다큐멘터리]
1291년 5월 18일, 2백년을 끌어오던 분쟁의 마지막 전투가 절정에 달했다. 이날 항구도시 아크레의 함락은 기독교 성지에서 십자군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확고하고도 결정적인 사건으로 남게 된다.
1096년부터 1291년까지 중동지역은 8차례 십자군 원정으로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그 와중에 양측은 대대적인 전투와 학살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간의 충돌과 문명간의 충돌, 그리고 대륙간의 충돌을 상징하는 본보기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북부 해안에 위치한 활기찬 이슬람 도시인 아크레는 당시에는 상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항구였고, 상업의 거점이었다. 이곳을 단순히 군사적 시각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성지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졌다.
어쩌면 십자군 전쟁의 어두운 역사가 오늘날 중동 지방의 폭력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이슬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이 옛날 십자군 전쟁처럼 서양인들의 진출로 보고 있다. 천년 전 두 진영간의 전쟁은 종교의 성전을 성스럽지 못한 전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서유럽의 십자군이 월등히 나은 군사기술을 동원했기 때문에 첫 번째 십자군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십자군 지도자들을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십자군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역사가들은 사자왕 리처드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의 개인적인 대립을 조명한다. 살라딘은 관대한 성품과 훌륭한 정신을 지닌 위대한 인물이었다. 처음에 난폭한 주정꾼의 모습으로 아크레에 도착했던 리처드는 중동의 원정을 끝냄 무렵에는 성품이 바뀌었다.
십자군의 지도자 리처드와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
10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기독교 세계는 힘겨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동로마제국은 이슬람의 공격으로 시달렸고, 서유럽은 기사들의 전쟁과 다툼으로 얼룩져있었다. 이때 교황 우르반 2세가 획기적인 선언을 하게 된다. 기사들의 혈기를 좀더 고상한 명분을 위해 펼치도록 해야 하겠다는 발상을 한 것이다.
우르반 2세는 기독교도들에게 이슬람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라고 명령한다. 이에 따라 1096년 8월 첫 십자군이 원정을 준비했다. 첫 십자군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가담했기 때문이다(그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그들은 원정길에서 모든 것을 조달했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했다. 점점 통제할 수 없는 폭도로 변해갔다.
그 당시 이슬람 사람들은 서유럽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3년에 걸친 진군 끝에 1099년 5월, 십자군의 첫 부대가 예루살렘 성문에 도달한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규적인 군사훈련이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갈대를 칼로 베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칼쓰기와 말타기의 기술이 복합적으로 요구된다. 그런데 갈대가 아니라 실제 상대가 갑옷을 입은 군인이었다면 그다지 효과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 전사들은 칼이 아니라 묵직한 철퇴를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파괴력은 엄청났다.
양쪽 진영의 군사력을 면밀히 비교해 보면 이슬람 진영이 조금 더 정교하다는 점에서 유리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들은 건축가들을 보내서 예루살렘의 취약점을 알아내려고 했다. 예루살렘 도시 북부는 평평한 지형이고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방향이었다. 1099년 7월 7일, 예루살렘 전투가 시작되었고 전투 개시 8일째 되던 날 예루살렘은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을 지키던 유태인과 이슬람교도들은 광신자들의 기세에 눌리고, 십자군은 대학살을 시작한다.
“우리 십자군들의 발목은 살해된 자의 피로 물들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가차없는 살육에서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역사가들은 만명에서 2만명에 이르던 이 도시의 이슬람교도들이 살해되었다고 본다. 예루살렘에서 유태인과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한 것은 역사상 크나큰 오점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는 결국 이후의 대대적인 보복을 불러 일으킨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 45개의 교회를 세우는데, 대부분 유대교 예배당과 이슬람 사원의 폐허 위에 세웠다. 십자군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고, 자기들을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요새를 세웠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안에 세운 성채들은 같은 시기의 서유럽의 성채보다 더욱 견고하게 지어졌다. 이들 성채는 외부로부터 원조가 없더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지어졌으며, 위치는 사방을 볼 수 있는 높은 장소에 자리잡았다. 십자군이 성지를 지키는 동안 주변의 지역은 점차적으로 살라딘에 의해 통일되어갔다. 살라딘은 유력하고 독실한 이슬람교도였지만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성인이 아니었기에 전쟁을 치르면서 상대방에게 상당한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십자군은 바딤 야콥이라는 곳에 요새를 지으려고 했는데, 살라딘은 그 성이 완성되기 전에 공격했고, 점령한 이후에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살육하는 잔인성을 보여준다.
이후에 십자군이 메카로 향하는 이슬람 교도를 학살하자 살라딘은 ‘지하드’(성전)를 선포한다. 이것을 통해서 살라딘은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게 된다.
십자군은 세 손가락을 사용해서 활 시위를 당겼고, 이슬람군은 엄지손가락을 이용해서 활 시위를 당겼다(엄지손가락을 사용한 경우는 보다 정확하다고 한다). 이슬람 궁수들의 활약으로 하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이슬람군은 기독교의 성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여겨진 물건)을 빼앗는다. 이것은 기독교 쪽에서는 대단한 가치가 있었겠지만, 이슬람쪽 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살라딘은 하틴에서 대승을 거둔 후, 항구도시 아크레를 함락시킨다. 그리고 1188년 이슬람군은 궁극적인 목표인 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예루살렘과 기독교의 성물이 적에게 넘어갔다는 비보를 듣고 교황이 숨을 거둔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입성했지만 보복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의 성지인 성묘교회(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까지 안치된 무덤)를 장악한다. 살라딘은 오히려 기독교 순례자들을 받아들인다. 순례자들 사이에 경쟁적인 종파들이 있었기 때문에 파벌 경쟁을 막기 위해 교회의 열쇠를 두 이슬람 가문에게 맡긴다. 놀랍게도 그들의 후손이 이 교회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살라딘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성지를 빼앗긴 유럽의 분노는 잠재우지 못한다. 십자군은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한다. 살라딘의 호적수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의 등장이다. 그는 1191년 6월 7일, 34세의 나이로 항구도시 아크레에 도착한다. 잉글랜드의 왕이었지만 잉글랜드에 있었던 기간은 고작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그는 영어가 아닌 불어로 말했다고 한다). 그는 병사들에게 아크레 성벽의 벽돌 하나를 무너뜨릴 때마다 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아크레 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성채공격을 위한 이동식 공성탑을 사용했다. 결국 1191년 7월 12일, 아크레 성은 리처드의 손에 넘어간다.
공성탑으로 아크레를 공격하는 십자군
아크레 점령 이후에, 리처드는 이슬람인 2천 7백명을 한명씩 차례로 처형했는데, 이것은 리처드에게 명성에 오점으로 남게 된다. 아크레에서 발굴된 병원을 통하여 당시 이슬람과 기독교의 병원 체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은 당시까지 병을 고치기보다는 숙박을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환자의 치료를 위해 병원을 사용했다.
십자군의 병원으로 쓰이던 곳에서 화장실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추출한 표본으로 당시 십자군이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이전에 중동지방에서 발견되지 않은 기생충도 발견되었다(넓은 마디 촌충). 그리고 당시의 식이요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콩이 많이 든 음식을 먹었던 십자군의 식습관이 변하여 건강에 좋은 빵과 싱싱한 과일을 먹게 되었다. 이후에 중세 유럽의 병원이 발전하게 된 원인으로의 십자군 원정을 들 수 있다.
살라딘과 교착상태에 빠진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한다. 그는 살라딘에게 예루살렘과 십자가 성물을 요구했다. 살라딘의 대답은 신속했다. 그는 예루살렘은 자기들에게도 중요한 성지라고 말하며, 십자가 성물은 리처드 쪽에서 뭔가 그에 합당한 양보를 해야 돌려줄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전설에 따르면 리처드의 살과 피였다고 한다). 리처드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동생이 결혼하여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비록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양쪽이 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후 둘의 교류는 상당한 발전을 보인다. 심지어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의사까지 왕래했다고 한다. 리처드가 열병에 걸렸을 때, 주치의와 특이한 과일주까지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둘은 결국 1192년 9월 2일에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아크레가 기독교도의 거점으로 남고,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손에 남는 대신, 살라딘은 성지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리처드와 살라딘이 죽은 지 100년이 지나고 다시 전쟁의 회오리가 불어닥친다. 1290년 여름, 그때까지는 아직 리처드와 살라딘의 평화협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때 대부분 이탈리아 병사로 구성된 십자군이 아크레에 도착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도착한 이들은 오히려 평화를 깨뜨렸다. 이들의 만행을 들은 이슬람 통치자 맘누크의 군대가 아크레를 포위했다. 투석기를 통해 계속적인 공격을 하는 맘누크의 군대에 아크레는 함락되었다. 당시 포위된 아크레에서 일부 기독교도들은 지하 통로를 통해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템플기사단이 파놓은 통로였는데, 자기들만 살겠다고 빠져나간 모습은 당시의 십자군의 정신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십자군이 진심으로 서로 돕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것이 패배의 원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후로 성지는 십자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이때의 상황을 이슬람의 병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해안의 땅은 이제 우리 이슬람인에게 되돌려졌다. 뜻밖에도 유럽인은 시리아 땅과 해안지역에서 모두 쫓겨났다. 신이시여 그들이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못하게 하소서.”
유럽이 이슬람에게 끼친 영향은 미비했다. 왜냐하면 이미 이슬람 문명이 세워져 있었고, 절정기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과 십자군이 중동에 가져온 것은 전쟁과 전사, 야만적인 행위뿐이었다. 반면 이슬람의 문명은 유럽에 긍정적인 작용을 많이 주었다. 기사도 정신, 교육과 저술활동, 생활방식, 개인의 청결과 위생 같은 것에 영향을 준 것이다. 서유럽은 당시 이슬람의 발달된 수학과 천문학에 자극을 받게 된다.
7백여년 전 살라딘과 리처드는 성지의 평화를 정착시키게 되는 대화를 시작했다. 오늘날 두 대륙 사이엔 옛 평화협정이 다시금 맺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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