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과학적인東亞史

(38)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10:50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을 통합한 병민일체(兵民一體) 팔기제도를 편성 완료했다. 1621년에 심양과 요양을 점령한 이후, 명나라 정부조직을 모방한 축소판 정부행정 관료기구를 구성하여 전통적인 (전연-북위-요-금-원) 2원(二元)제도를 한층 개량시켰다. 1635년, 몽골족 팔기군(八旗軍)을 편성하여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중립외교 정책을 택했던 광해군을 좋아 낸 인조가 친명정책으로 선회하자, 홍타이지(皇太極)는 1636년에 조선을 침공하여 신복(臣服)시켰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만주족 세력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조선 사람들에 의한 후고(後顧)의 걱정거리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1642년, 요하 주변에 거주하는 한족을 동원해 한군(漢軍)팔기군 편성을 완료했다. 1644년,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으로 구성된 청 군은 항복한 오삼계의 군대와 함께 진군해 북경에 입성했다. 홍타이지의 어린 아들은 순치제(順治帝)라는 칭호로 제위에 올랐다. 청나라 황제들은 상무전통을 고취하면서 제국을 통치했고, 중국화를 저지하려 노력했다. 만주, 몽골, 신강, 티벹, 대만 등은 중국본토라고 불리는 내지와 달리, 비 한족관료 관할 하에 별도로 다스려 졌다. 만주정복자들은 그들 고유의 통치조직을 가지고 흥했고 또 망했다. 만주족은 중국의 강역을 2배 이상으로 확장했으나, 자신들의 본고장인 만주를 포함해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모두 물려준 꼴이 되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Text In PDF.../ 편집자 주

   
▲ A Manchu Warrior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만주 호랑이의 귀환(歸還)


홍원탁 (서울대 교수)


전통적 2원(二元)제도의 개선: 농병일치(農兵一致) 팔기제도(八旗制度)

누르하치(奴爾哈赤, 1559-1626)는 자신의 여진족 군대와 그 가족들을 몇 개 집단의 기병(旗兵)으로 조직했다. 1601년, 황(黃), 홍(紅), 백(白), 남(藍)의 깃발로 구별된 네 개의 기병 군단을 편성해, 자신의 친족 네 명을 이들 기병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누르하치가 스스로 후금(後金)의 칸(汗)이라 칭한 1616년, 이들 네 개의 기병 군단을 각각 양분한 다음, 황기, 백기, 남기에는 홍색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홍기에는 흰색 선을 둘러, 처음 네 개와 함께 모두 여덟 가지 깃발을 만들어 구별했다. 이들 깃발은 전투 시 병사들의 인식표지 역할을 하여 소속 식별을 용이하게 했고, 특정 팔기병(八旗兵)의 구성원 신분은 평상시 주민등록의 근거가 되었다. 1

팔기제도의 수립과 동시에 누르하치는 명나라 정부조직을 모방한 축소판 정부행정 관료기구를 구성하여 전통적인 (전연-북위-요-금-원) 2원제도를 한층 개량시켰다. 교육받은 한족들은, 항복을 하면, 급속히 팽창해가는 여진족 관료조직에 가담 해 봉사를 할 기회를 얻었다.  누르하치 편으로 넘어 온 고위 한족 관리들은 누르하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고, 명예 칭호를 받아,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한족 관료들은 만주부족들의 팔기군 군사활동에 일체 간여하지 않고, 요하 주변의 한족 정착민들을 통치하는 정부행정 만을 전담했다. 2

   
▲ The Manchu Expansion
Crossley (1999: 131)
조선 조정의 사대주의 전략

한반도에서는 선조(1567-1608)를 승계한 광해군(1608-23)이 노련한 솜씨로 외교정책을 수행하여 조선이 여진족과 명나라 사이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했다. 광해군은 수비 요충지들을 수리하고, 무기체계를 개량하고,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새로 도입하는 등, 조선의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광해군은 인조(1623-49)에 의해 쫓겨났다. 3 인조는 반 여진 친 명 정책으로 선회했다. 이기백(1984: 215)은, “사태가 이렇게 되자, 만주족은 명과의 싸움을 벌리기 전에 조선조정의 정책전환에 의해 야기된 후방의 위협을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 太宗, 1627-43)는 한족 자문관들의 도움을 받아 집권을 했다. 1635년, 내몽골 부족들이 만주족 국가에 흡수편입 되었다. 4 북방 정벌로 흑룡강 유역 생여진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1635년, 홍타이지는 공식적으로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개명하고, 다음해 1636년에는 자신을 청나라 황제라고 선언했다.

   
▲ Beijing under the Manchus was divided into eight sectors, each sector serving as the residential zone for one of the Eight Banners. Each zone was further divided into Manchu, Mongol, and Chinese banner neighborhoods.
Elliott (2001: 103)
국명을 청이라고 바꾸기 전인 1627년, 청 태조 홍타이지는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했고, 조선 조정으로부터 후금을 형님으로 모신다는 형제의 맹약(兄弟之盟約)을 받아 낸 다음 철군을 했다. 자신을 황제라 칭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바꾼 1636년, 홍타이지는 조선 조정에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이 이를 거부하자 청 태종은 (만주, 몽골, 요동한족 병사들로 편성된) 1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1637년, 인조는 항복을 하면서, 명 왕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조를 모시며, 명나라 원정을 돕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고, 두 왕자를 인질로 보내겠다는 등의 서약을 했다.

청의 한반도 침략은 단기간에 끝장이 난 것이지만, 당시 청나라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서북지역은 황폐화 되었다. 한반도 사람들이 거란족이던, 여진족이던, 몽골족이던, 한족이던 간에 강자에 신복(臣服)하고 기민하게 사대주의 외교를 실천하는 경우에는 국가가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세판단을 잘 못하고 강자에 대항했을 경우에는, 자발적이던 비자발적이던, 자세를 전환할 때까지 전국이 전화로 파괴되는 고통을 격어야만 했다. 특히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만주족 세력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한반도 사람들에 의한 후방의 위협[後顧의 걱정거리]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주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 요동한족 팔기군: 몽골족을 작은 동업자로 동원

만주족은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 몽골족들을 종속적인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1635년, 홍타이지는 만주족과 동일한 형태로 [거란족을 포함하는] 몽골족의 팔기군을 편성했다. 5 만주 국경으로부터 감숙성에 이르는 지역의 모든 몽골족은 팔기제도에 흡수편입 된 것이다.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들은 자신의 부족을 지휘하면서 청나라 조정의 직위를 수여 받았다. 청조 지배자들은 각 몽골부족에게 지정된 목초지를 고정적으로 배정해 주고, 각각 별개의 동맹자로 관리하는 방법으로, 몽골족을 효과적으로 분열시키는 동시에 기동성을 제거했다. 6 청 왕조는 내륙 아시아의 변경지역을 지키기 위해 몽골 팔기군에 크게 의존했다. 여진족이 몽골 동맹군과의 동류의식이 강했던 것은 그들의 문화전통이 대체로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7

Ledyard(1983: 328)는 “만주족의 몽골족에 대한 태도나 정책은 다른 종족에 비해 훨씬 더 우호적이었다. 만주족은 몽골족을 자신들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또 동료로서 협력을 구했다”고 말한다. Purdue(2005: 124)에 의하면, 만주족이 “몽골 귀족가문과 적극적인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두 종족간의 동맹관계는 한층 공고하게 되었다. 1612-15년 기간 중,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6명의 몽골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홍타이지는 12명의 딸들을 몽골 부족장들에게 시집을 보내, 결혼동맹 정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1637년, 청 태조 홍타이지는 요하 주변에 거주하는 한족(漢族)을 동원해 2개의 한군기병(漢軍旗兵)집단을 만들었고, 1639년에는 4개로, 1642년에는 8개로 확장해, 그로부터 2년 후의 중국대륙 정복 개시를 위한 한족 팔기군 편성을 완료했다. 한족들은 대포를 주조하고 사용할 줄 알았으며, 소총사용의 경험도 있었다. 8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한 후, 많은 수의 한족들이 비옥한 요하 유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 정착민들의 후예가 청나라 군대조직에 가담하여 한족 팔기군의 핵심을 구성했고, 여진족 청나라 지배자들이 전 중국을 정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9 고대 요동지역의 한족 정착민 후예들이 사용하는 중국어, 즉 요동한족 팔기군의 언어가 만주족 지배자들에 의해 북경으로 도입되어 후에 소위 만다린이라는 명칭으로 오늘날 중국의 공식상용어가 된 것이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1640년대 초까지, 병사들이 돌아가며 현역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고, 주민등록을 하여 가족을 보호하며, 농토의 경작을 감독할 수 있는 세습적 사회-군사 조직을 제도적으로 완성했다. 팔기군 단위부대들은 전통적인 부족 단위로 조직이 되었지만 모두 개별적으로 황제 휘하에 소속되었다. 팔기병(八旗兵) 요원들은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의 세습적 계층으로부터 선발되어, 정복과 점령 목적을 위해 군사와 행정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10 팔기병들은 전쟁 노획물을 분배 받았고, 평화시에는 쌀과 녹봉을 지급 받았으며, 팔기병 집단은 구성원 개인이 관료로 선발될 기회가 부여 된 인재 풀을 형성했다. 11 전형적인 팔기병을 군인-서기-관료 등 범 국가기능 요원으로 간주하는 정복 이전 시기의 이상(理想)은 정복 후에도 계속 청나라 교육 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12 Elliott(2001: 348)은, 황제 한 명 만을 제외하고, 만주족 남녀노소 전원이 팔기조직에 속했다고 말한다. 13 팔기제도란 고도로 군대화 한 병민일체(兵民一體, 農兵一致)의 사회조직인 것이다.

1643년, 청 태조는 동생 도르곤 친왕을 자신의 5살 난 (9번째) 아들의 섭정으로 세워놓고 급작스럽게 죽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군은 북경을 포위한 다음, 군대를 이끌고 명장 오삼계(吳三桂)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으로 진군했다.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으로 구성된 청 군은 항복한 오삼계의 군대와 함께 해안을 따라 진군해 북경에 입성했다. 어린 황제는 순치제(福臨, 世祖 順治帝, 1643-61)라는 칭호로 제위에 올랐다. 순치제의 모친은 징기스칸의 후손이었고, 강희제(康熙帝, 1661-1722)의 할머니가 된다. 14 명 황족과 그 지지자들을 모조리 색출 처단하는 데는 그로부터 18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1662년, 명나라 후계자를 자칭하는 잔당이 운남에서 모조리 처형되었다.

만주족은, 중국본토로 진입하기 10여 년 전에, 심양에 명 조정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주족, 몽골족, 한족 관리로 충원된 육부(六部) 설치했었고,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도도 도입했었다. 따라서 만주족이 북중국에 진입했을 당시, 만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식으로 통치를 할 준비가 완료되었던 것이다.

1648년 당시, 총 팔기군 중 만주족 팔기가 겨우 16% (1723년에는 23%), 몽골족 팔기가 8%, 그리고 나머지 4분지3은 모두 한족 팔기였다. 15 대다수의 한군(漢軍)팔기병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모두 구사했다. 요동한족 팔기군이 없었다면 명 제국을 정복한다는 것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16

40만 명도 안 되는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이 한족의 명 제국을 정복하고, 북경과 18개의 전략적 지방 요충지에 (소위 만주족 도시라는) 팔기 수비대를 설치하여, 팔기병들이 해당지역의 한족주민과 격리되어 가족과 함께 성안에 살수 있도록 주거지가 배정되었다. 17 Elliott (2001: 363)에 의하면, 정복 당시 (노비를 제외하고 정규 중대 만을 계산하여) 만주족 총인구는 대략 20.6만-39만 명 사이였고, 이들이 1억2천만 명의 한족 중국을 정복한 것이다.

만주족은 한족 모양 천치이던 불량배이던 장남이면 제위를 승계한다는 전통이 없었다. Elliott(2001: 356)에 의하면, 만주족은 “알타이 습속에 따라 가장 유능한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133년이라는 기간 동안,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2-36), 건륭제 (1736-96) 등, 세 명의 유능하고 근면한 황제들이 유교의 덕치를 내세워 신생 제국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강희제는 몸소 유목민 원정을 지휘하며 전쟁터의 흥분을 즐겼다. 18

   
▲ Hang-zhou
일찍이 몽골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오아시스 국가들과 달리(大理)를 정복하고, 티벹을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버마에 이르렀고, 베트남과 참파의 정복을 시도했었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몽골 정복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과거 한(漢) 왕조와 당 왕조가 성취했던 것 보다 훨씬 광대한 영토적 통일을 달성해 현대 중국에게 넘겨준 것이다. 1770년대 중반, 건륭제는 (타르바가타이 동쪽, 알타이산맥 서쪽의) 중가리아와 (천산산맥 남쪽, 곤륜산맥 북쪽의) 신강 지역을 포함하는 중앙아시아의 정복을 완료했고, 이 모든 지역을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속
   
▲ Jing-zhou (bottom) Elliott (2001: 109, 112)
받았다. 19 만주 땅 전체가 중화인민공화국에 포함된 것은 만주족에 의한 중국대륙 통치의 산물인 것이다.

1779년, 북경을 제외한 모든 만주족 수비대 도시에서 한족 팔기병이 모두 제거되었다. 20 오랜 기간에 걸친 한족 팔기병 제거 과정을 거쳐, 모든 팔기병은 마침내 만주족(혹은 몽골족)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Fairbank and Goldman(1992: 148-9)에 의하면, “공인된 존재로서의 한족 군대는 공격훈련을 받지 않고, 단지 우편물 배달 통로를 지키고 도적을 잡는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지방 군대(綠旗軍)뿐이었다.”

만주족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6부(六部)는 만주족과 한족 등 2명의 장을 가지고 있었고, 각 지방에는 한족 지사들과 만주족 총독들이 있었다.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유능한 한족관리들이 실무를 담당하고 충성스런 만주족들이 감시를 하는 제도인 것이다. 21 Fairbank and Goldman(1992: 143 and 151)에 의하면, “만주족 지배자들은 통치제도의 일부로 만주어를 보존시키면서, 거란, 여진, 몽골족들의 관행을 답습 해, 한족이 볼 수 없는 만주어 서류를 작성했다.” 즉, 중요한 내용의 서류는 만주어로만 작성이 된 것이다. 만주족을 혼혈을 금지하고 한족과 만주족의 상이한 관습을 보호 해, 자신들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다. 만주족은 그들 자신 만의 고유한 종교적 관행을 유지했고, 사찰 내에서 무속인들이 제례를 지낼 때 한족의 참관을 금했다. 22 사냥과 말 타고 활 쏘는 훈련을 통해 무술의 우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만주 글과 말을 사용하여 문화적 차별성을 강조했다. 만주족 여인들은 발을 묵지 (纏足) 않았다. 만주족 황제들은 내몽골(承德=熱河)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사냥과 말 타고 활 쏘기를 통해 신체를 단련 했다. 23

건륭제는 팔기병 에게 만주어와 군사기술을 철저하게 교육시키도록 했다. 그는 옛 만주족의 전통을, 말 타고 활 쏘는 무술 연마에 진력, 만주어를 말하고 쓰기, 샤머니즘, 근검절약, 조상숭배 등으로 정형화 했다. 건륭제는 “너희들이 사서삼경 고전을 배웠건 안 배웠건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24 여진족 금 왕조가 12세기에 송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건륭제 조정이 경축하며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만주족이 여진족 금나라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의식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25

청조 지배자들은, 온갖 노력에도 불고하고, 만주족이 중국화되는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국대륙을 정복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중국화와 민족 자멸을 의미했다. 19세기 말 이후, 전 만주대륙은 한족들의 대량 유입으로 매몰되었다. 오늘날 만주 총인구의 90% 정도가 한족이다. 26 중국대륙-몽골고원-만주라는 삼각지형에서의 진화과정은 외몽골과 한반도 만이 21세기 현재 동아시아 대륙에서의 독립적인 존재를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청나라 역사를 포함한 전 중국역사를 오로지 한족(漢族)의 관점에서만 기술하는 관행

아주 전형적인 한족 중심의 중국역사 서술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청 제국은 만주족에 의해 정치적 문화적 외형(外形)의 일부가 형성되었다; 청 제국은 만주족에 의해 규제를 받았다; 청나라는 만주족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청 지배자들은 확립된 한족 가치관에 조화를 이루도록 조정을 개조했다; 청조의 황금시대는 청나라 지배자들 중 가장 유교적이고 가장 중국화된 건륭제의 치세이었다.”Crossley(1999: 3)에 의하면, 이러한 서술이 청나라 역사를 전공한다는 학자들 모두가 수용하는 기초적 상식이라는 것이다.

명나라 황제들은 관료들에 대항 해 통치권을 장악하는 투쟁을 계속 했어야만 했다. 청나라 황제들은 직접 통치를 했다. 만주족은 제국의 영토를 2배 이상으로 확장했다.  명나라의 13개 지역단위와 2개의 수도권역은 청나라 때 18개의 지역단위로 개편되어 “중국 본토”라고 불리는 내지를 구성했다. 만주, 몽골, 신강, 티벹, 대만 등은 비 한족관리 관할 하에 별도로 다스려 졌다. 정복 지배층은 상무전통을 고취하면서 제국을 통치했고, 중국화를 저지하려 노력했다. 정복자들은 그들 고유의 통치조직을 가지고 흥했고 또 망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6 (2005. 8. 27.)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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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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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Spence (1990: 27), Crossley (1997: 207), Barfield (1989: 253) 참조. 대략 150가구가 화살(矢)이라 부르는 중대로 조직되었고, 50개의 중대가 다섯 개의 연대, 즉 [7500 가구 규모의] 한 개의 기(旗)를 이루었다. 누르하치는 항복하거나 정복한 부족들을 자신이 직할하는 세습적 초(超)부족 시기(矢旗) 군사계급으로 흡수 편입시켰다.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현(縣)과 향(鄕)으로 편성되어있다. 그러나 내몽골 자치구는 아직도 현을 깃발이라고 부르고 향을 화살이라고 부른다.

2. Spense (1990: 28) 참조.

3. 이기백 (1984: 215)

4. 홍타이지가 1935년에 막남(漠南) 몽골 찰합이부(察哈爾部)를 정복하고 전국옥새(傳國玉璽)를 획득하자 몽골 부족장들이 심양(瀋陽, 盛京)에 모여 홍타이지에게 몽골가한(蒙古可汗)의 칭호를 올렸다.

5. Spence (1990: 30-31)

6. Barfield(1989: 6)에 의하면, 몽골족 팔기군을 지휘하는 몽골 왕자들은 지정된 목초지를 이탈할 수 없는 일반 부족민들과 분리되었다. Jagchid and Symons(1989: 21)에 의하면, 청나라 지배자는 몽골 지배층에게, 귀족으로서의 신분, 세습적 권위, 청조에 대한 충성도 등을 기준으로 직위와 봉토를 하사해 주는 준 봉건제도를 실시했다.  만주족은 봉토를 인위적으로 구획하는 정책을 통해, 초원지대를 작은 조각들로 분해시켰다. 봉토의 구획이 엄수되자 유목민의 강점인 기동성이 소멸되었다. 몽골 지배층은 청조로부터 좀더 큰 영향력과 보상을 얻어내기 위해 서로 경쟁을 했다.

7. Elliot (2001: 75)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21)에 의하면, 만주족은 전 중국의 통치를 공고히 해 가면서 자신의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몽골 지원군에 크게 의존했다. Purdue(2005: 126)에 의하면, 정복 진행 초기에 동부-남부 몽골 부족들을 성공적으로 흡수편입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만주족이 후에 훨씬 서쪽에 떨어져서 독립을 유지해 온 적대적 몽골 부족들을 상대로 할 때 크게 도움을 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8. Elliot (2001: 77)

9. Crossley(1999: 56)에 의하면, (옛부터 요하 주변에 정착해 살던 한족을 지칭하는) 니칸들은 청 제국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본래부터 만리장성 아래에 살던 한족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다. 1741년 이후, 청 조정은 니칸 출신의 한족 팔기군 병사들 대부분을 만주족 팔기군으로 전속시켰고, 그 이후의 한족 팔기군은 더 이상 한족 평민들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10. Crossley (1999: 287) 참조. 간부후보생들은 말 타고 활 쏘기에 능숙해야 할 뿐 아니라, 만주어나 몽골어로 시험 논문을 작성해 제출해야만 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한족 팔기병들은 점차 관리로 전환되었다. Crossley (1999: 288-9) 참조.

11. Fairbank (1992: 146-7)

12. Crossley (1997: 127)

13. 하지만 팔기병의 지위를 포기하면 상업이나 육체 노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14. Crossley (1997: 76)

15. Fairbank and Goldman (1992: 146) 참조. Elliott(2110: 364)에 의하면, 1648-1720년 기간에 전체팔기군 중 한족 남자가 13만3천에서 60만으로 증가한 반면, 만주족 남자의 수는 대략 16만에서 45만으로, 몽골족 남자는 8만4천에서 18만으로 증가한 것으로 추계된다. 여성과 노비를 포함하면, 팔기의 총인구는 1648년의 1백90만 명에서 1720년의 3백70만 명으로 증가한다.

16. Spence (1990: 41)

17. Elliott (2001: 348, 364) 참조.

18. Fairbank and Goldman (1992: 147-8), Purdue (2005: 188), Barfield (1987: 285) 참조.

19. 동쪽의 몽골족들은 만주족에 협력하면서 하나의 국민으로 그 존재를 유지 해, 20세기에는 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서쪽 몽골족들은 사납고 용맹하게 청나라에 저항을 하다가 인종 말살의 비운을 맞았다. 중가르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Purdue (2005: 286) 참조.

20. Elliott (2001: 351) 참조.

21. Fairbank and Goldman (1992: 148-149) 참조.

22. Spence (1990: 41)

23. 청 조정은 티벹 불교의 일파인 황색 라마교가 몽골족 사이에 유포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Jagchid and Symons(1989: 21)에 의하면, 청나라 후기에 들어서면 만주족의 몽골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되기 때문에, 군복무를 위한 몽골족 주민등록이나, 티벹 불교 사원에 대한 정부 정책이 완화되었다. 완화되었다. 불교의 유행으로 몽골 남자들의 절반 가량이 속세를 떠나 라마가 되기 위해 기도원에 들어갔다. 유목생활로부터 몽골족의 이와 같은 대량 이탈은, 후손을 없애고 군사적 경험을 없앴기 때문에 중국본토에 대한 몽골군 위협의 부활 위험을 크게 감소시켰다.

24. Crossley (1999: 307-9)

25. Elliott (2001: 355)

26. 만주 총 인구는1891년에 2천2백60만 명, 1942년에 4천6백80만 명으로 추계된다. Gottschang and Lary (2000: 172-3) 참조. 1990년에 와서는 만주 총인구가 1억을 초과 했고, 내몽골 북변에도 1천만 명이 살고 있다. 1990년 현재 만주족으로 등록된 주민은 1천만 명 정도에 불과하고, 조선족으로 등록된 주민은 2백만 정도가 된다, Janhunen (1996: 39, 43. 47) 참조.

 

Return of the Manchurian Tigers: The Ruzhen Qing Dynasty

the ming conquered by the manchu qing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refining the traditional dual system

Nurhaci (1559-1626) organized his troops and their families into different groups of “banners.” He created four banners in 1601, each of a different color (either yellow, white, blue or red), and appointed four of his kinsmen the lords of these banners. Each of the four banners was split into two in 1616 (the year Nurhaci declared himself the Kahn of the Later Jin), one being the plain banner and the other being bordered. The banners served as identification devices in battle, and membership in a given banner was used as the basis for population registration in daily life.1

Nurhaci also refined the traditional dual system (of the Former Yan, Norther Wei, Liao, Jin and Yuan) with a miniature civil administration in imitation of the Ming government. Educated Chinese who surrendered were offered a chance to serve in the rapidly expanding Ruzhen bureaucracy. Senior Chinese officials who came over to Nurhaci’s side were offered marriage into his family, honorific titles, and high office. The Chinese administrators handled administrative tasks of governing the Liao River basin, without interfering in the military activities of tribal banners.2

Sa-dae (serve the greater) strategy of the Chosun

In the Korean peninsula, King Seon-jo (1567-1608) of Chosun was succeeded by Kwang-hae-gun (1608-23) whose skillful foreign policy kept the Korean peninsula from being drawn into the conflict between the Ruzhen and the Ming. In the midst of his endeavor to enhance the Chosun’s state of military preparedness (by repairing defensive strongpoints, renovating weaponry, and instituting training programs), Kwang-hae-gun was removed from the throne and succeeded by King In-jo.3 In-jo (1623-49) switched to a pro-Ming and anti-Ruzhen policy. Lee (1984: 215) notes: “The Manchus now came to feel it necessary to eliminate the threat to their rear posed by Korea … before proceeding with their campaign against Ming.”

Nurhaci’s eighth son, Hong Taiji (Tai-zong, 1627-43), was helped to power by Chinese advisers. In 1635, all of the Inner Mongolian tribes were incorporated into the Manchu state. Expeditions to the north also brought the wild Ruzhen tribes along the Amur River under control. Hong Taiji officially renamed the Ruzhens the Manchus in 1635, declared himself emperor of the Qing in 1636.

Hong Taiji had invaded Chosun in 1627 with a 30,000 man army, but withdrew his army in exchange for a Chosun’s pledge to do honor to Later Jin as would a younger to an older brother. In 1936, he demanded a suzerain-subject relationship. When the Chosun court refused to do so, Hong Taiji himself led an army of 100,000 men (consisting of the Manchu, Mongol and Chinese soldiers) and invaded Chosun. King In-jo surrendered in 1637, and vowed to sever his ties with the Ming dynasty, to pay homage to the Qing court, and to dispatch troops to assist the Manchu campaign against Ming, delivering his two sons as hostages.

The Qing invasion was of short duration, but the northwest region through which the Manchus had passed was ravaged. When the Koreans maintained an adroit Sa-dae (Serve the Greater) strategy, yielding to the Stronger, be it the Qidans, the Ruzhens, the Mongols or the Han Chinese, the Korean dynasty could maintain its independent nationhood free from the ravages of warfare. When the Koreans stood up against the Stronger, they suffered a wholesale destruction until they, voluntarily or involuntarily, changed their stance. A Manchurian force, in particular, could not leave the threat to their rear posed by the Koreans before proceeding with their campaign against mainland China.

The eight banners of the manchu, mongols and han chinese: enlisting the mongols as a junior partner

The Manchus enlisted the Mongols as a junior partner in conquering the mainland China and maintaining the empire. Hong Taiji established a parallel structure of eight Mongol banners in 1635.4 All the Mongols along the frontier, from Manchuria to Gansu, were incorporated into the banner system. The descendants of Chinggis Khan received positions of rank in the Qing administration commanding their own tribal people. The Qing rulers effectively divided and immobilized the Mongols by organizing them under separate leagues with assigned pasturage. 5 The Qing dynasty depended heavily on Mongol troops to defend its Inner Asian frontier. The Ruzhens’ sense of a shared identity with their Mongol allies was based on the broad similarities in their cultures.6

Ledyard (1983: 328) notes: “their attitude and policy toward the Mongols was much more friendly … the Manchus enlisted them as active supporters and friends.” According to Purdue (2005: 124), “intermarriage with Mongolian noble families further cemented alliance between the two peoples. … From 1612 to 1615 Nurhaci and his sons together married six Mongolian women. … Hong Taiji expanded the marriage alliance policy, marrying twelve of his daughters to Mongolian chieftains.”

Mobilizing the Han Chinese who had settled around the Liao River basin, Hong Taiji established two full Chinese banners in 1637, increasing the number to four in 1639, and then to eight in 1642, just in time for the conquest of China that began two years later. The Han Chinese knew how to cast and use cannon and were practiced with muskets.7 After Han Wu-di had conquered Old Chosun in 108 BC, a large number of Han Chinese came to settle in the fertile Liao basin area. The descendants of these original settlers joined the Qing military organization and came to constitute the core of the Chinese Eight Banners, enabling the Ruzhen Qing rulers to conquer the entire mainland China.8 The creolized Chinese language of Liao-dong or rather the language of these Chinese bannermen, was taken to Beijing by the Ruzhen-Manchu rulers and eventually became the so-called Mandarin, the official language of modern China.

By the early 1640s, the Manchu ruler finished organizing a hereditary socio-military system for soldiers to provide active combat duty on rotation, to register and protect their families, and to supervise work on their land. Banner units were organized along traditional tribal lines but were all personally attached to the emperor. The banner elites were recruited from hereditary ranks of the Manchu, Mongol and Han Chinese, and were trained to perform both military and civil tasks to further the ends of conquest and occupation.9 The bannermen enjoyed booty in warfare, and stipends of rice and cash in peacetime, and they also formed a talent pool from which individuals could be chosen as civil bureaucrats.10 The pre-conquest ideal of the bannermen as comprehensive state functionaries (soldiers, clerks, or officials) continued to shape the Qing educational policies after the conquest.11 Elliott (2001: 348) states that every Manchu man, woman, and child, with the sole exception of the emperor, belonged to the Eight Banners.12 The Eight Banners system was a highly militarized form of social organization.
 
In 1643, Hong Taiji suddenly died, leaving his younger brother Dorgon as the regent for his five-year-old (ninth) son. In 1644, the rebel Li Zi-cheng had seized the Ming capital of Beijing, and then led his army toward the Shanhai-guan pass to attack the Ming General, Wu Sangui. The Qing army of Manchu, Mongol and Chinese banners together with Wu Sangui, who threw in his lot with the Manchus, marched down the coast and entered Beijing. The boy emperor was enthroned with the reign title of Shun-zhi. His mother was a descendant of Genghis Khan, and the grandmother of the Kang-xi emperor.13 It took eighteen more years to hunt down the Ming royal families and their supporters. In 1662, the last remnants of the Ming pretenders were executed in Yunnan province.

More than a decade before the Manchu’s entrance into mainland China, they had created in Shen-yang the Six Ministries, in exact imitation of those at the Ming court, staffed by a bureaucracy in which Manchus, Mongols, and Chinese were represented. The Qing court also introduced the examination system for appointment to the civil service. By the time the Manchus entered North China, they were fully prepared to rule in the Chinese way while maintaining their Manchu identity.

The Chinese bannermen made up three quarters of the total bannermen by 1648, while 8 percent were Mongols and only 16 percent Manchus (that rose to 23 percent by 1723).14 Many of the Chinese bannermen spoke both Manchu and Chinese. Without the Han Chinese bannermen (including the Chinese bondservants), there would probably have been no conquest of the Ming Empire.15
 
Less than 400,000 (Manchu, Mongol, and Han Chinese) bannermen had taken over the Ming China, establishing banner garrisons (the so-called Manchu cities) at Beijing and 18 strategic provincial cities where soldiers were allotted a place to live with their households behind a wall that separated them from local Han Chinese.16 According to Elliott (2001: 363), the total Manchu population at the time of conquest amounted to have been between 206,000 and 390,000 (regular companies only, excluding bondservants) who took power over about 120 million Chinese.
 
The Manchus were not bound by the Chinese tradition that required the eldest son, whether an idiot or a rogue, to take the throne: “Instead, in good Altaic fashion, they were free to choose the most capable heir (Elliott, 2001, p. 356).” Over a period of 133 years, three capable and hard-working Manchu emperors extolled the Confucian virtues and consolidated the new empire: the Kang-xi (1662-1722), Yong-zheng (1722-36), and Qian-long (1736-96). Emperor Kang-xi led a major steppe campaign in person, enjoying the excitement of the war.17

The Yuan dynasty had conquered the oasis states of Islamic Central Asia and also the state of Dali, and made Tibet into a subordinate state. The Mongol armies had reached into Burma, and attempted to conquer Vietnam and Champa. The Manchu rulers were apparently inspired by the Mongol conquests, and came to provide modern China with a territorial unification of much greater extent than that achieved by the Han and Tang dynasties. By the mid-1770s, Emperor Qian-long completed the conquest of Inner Asia, specifically Zungharia (the area east of Tarbaghatai and west of Altai Mountains) and Xinjiang (the area south of Tianshan and north of Kunlun Mountains) that were all inherited by what is now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18 The inclusion of Manchuria was a direct consequence of the Manchu rule.

By 1779, the Han Chinese bannermen had been eliminated from all Manchu garrison cities save Beijing and Guang-zhou.19 After a protracted process of weeding-out the Han Chinese bannermen, all banner people eventually came to be recognized as the Manchus (or Mongols). According to Fairbank and Goldman (1992: 148-9), “the only Chinese troops given a recognized existence were provincial forces that were used mainly as a constabulary on the post routes and against bandits but which lacked any training as a striking force.”

Efforts to maintain the Manchus’ racial purity

The Six Ministries had joint Manchu and Chinese presidents, and the provinces had Manchu governors-general and Chinese governors. The capable Chinese, recruited through the examination system, did the work while the loyal Manchus checked up on them.20 According to Fairbank and Goldman (1992: 143 and 151), “as part of their system of control the Manchu rulers tried to preserve the Manchu language and followed the Qidan, Ruzhen, and Mongol examples in creating a Manchu documentation that was generally unavailable to Chinese officials.” Important documentation was written only in Manchu. The Manchu tried to maintain their racial purity by banning intermarriage and fostering separate customs between the Han Chinese and Manchu. They kept to their own private religious practices, which were conducted by shamanic priests and priestesses in temple compounds to which the Chinese were denied access.21 They tried to maintain their martial superiority by practicing hunting and mounted archery. They emphasized their cultural distinctness by using the Manchu spoken and written language. The feet of Manchu women were not bound. The Manchu emperors spent summers in Inner Mongolia (Chengde=Rehe), maintaining physical fitness by riding, hunting, and shooting.22

Emperor Qian-long prescribed rigorous study of the Manchu language and of military skills for banner education. He formalized the Old Manchu Way: immersion in military arts of riding and shooting, the speaking and writing of Manchu, shamanism, frugality, and reverence for the lineages. He stated that “whether you have studied classical literature [the Four Books] is a matter of no concern to me.”23 The performance of songs at the Qian-long court celebrating the twelfth-century victories of the Ruzhen Jin dynasty over the Song was an indication of the sense the Manchus had of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the Ruzhens. 24

No combination of efforts, however, could save the Manchus from the fate of being sinicized. Conquering China implied sinicization and ethnic self-destruction. After the late 19th century, the whole of Manchuria itself came to be engulfed by the massive influx of Han Chinese, who now constitute approximately 90 percent of the total Manchurian population.25 The evolution in the China-Mongolia-Manchuria triangle left only Outer Mongolia and Korean peninsula to maintain independent polity on the Northeast Asian continent as of the 21st century.

the sino-centric basics in writing the qing history

A typical sino-centric history of China reads as follows: the Qing empire was “given a certain political and cultural cast by the Manchus”; or the Qing empire was “controlled by the Manchus”; or the Qing empire was founded by the Manchus but the Qing rulers “remade the court to bring it into harmony with established Chinese values” and the “golden age was represented in the rule of the Qian-long emperor, the most Confucian and sinified” of the Qing rulers. According to Crossley (1999: 3), these are the “basics” that are “accepted” in the field of Qing history.

The Ming emperors had struggled for control with the civil officials. The Qing emperors ruled. The Manchu more than doubled the territory of the empire. The thirteen Ming provinces and the two metropolitan regions were restructured into eighteen provinces that constituted the inner territory, known as “China proper.” Manchuria, Mongolia, Sinkiang, Tibet, and Taiwan were administered separately under the command of non-Han Chinese. The conquest elite promoted their martial traditions, and ruled the empire. They resisted sinicization. They prospered with their system and they fell with their system.                     

BIBLIOGRAPHY

 

[각주]

 

1 See Spence (1990: 27) and Crossley (1997: 207).
About 150 families were organized into a company unit known as “arrow.” Arrow units were combined into groups of about 50 to form regiments, with five regiments to the “banner.” Nurhaci incorporated conquered or surrendered tribal groups into his own arrow-banner supra-tribal army of the hereditary military class. See also Barfield (1989: 253).

Nowadays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each province is divided into counties (xian) and townships (xiang). In the Inner Mongolian Autonomous Region, however, counties are still called banners (qi) and townships arrows (sumu).

2 See Spense (1990: 28).

3 Lee (1984: 215)

4 Spence (1990: 30-31)
5 According to Barfield (1989: 6), the Mongol “banner princes were set apart from ordinary tribesmen who were not permitted to leave the boundaries of their districts.”
According to Jagchid and Symons (1989: 21), the Qing rulers implemented a quasi-feudal system of rewarding Mongol leaders with rank and territorial domains based on their nobility, prestige, and how well they might serve Qing causes. Manchu policy fragmented the steppe by carefully delineating land holdings. As boundaries became demarcated, the mobility of the nomads, which had always been a key to their power, was impeded. The Mongol leaders became to seek greater influence and rewards from the Qing court.

6 See Elliot (2001: 75).
According to Jagchid and Symons (1989: 21), “as the Manchus consolidated their rule over China, they were highly dependent upon Mongol auxiliaries to supplement their military forces.”
Purdue (2005: 126) notes that “the successful incorporation of the Eastern and Southern Mongols during the early conquest period provided a substantial fund of experience that the Manchus could use when they confronted the more isolated, hostile, and autonomous Mongolian tribes farther west.”

7 Elliot (2001: 77)

8 According to Crossley (1999: 56), the Nikans, the Han Chinese who had lived around the Liao River basin and consequently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reation of the empire, were treated differently from those Han Chinese who lived inside the Great Wall. After 1741, the Qing state transferred most of the Nikan bannermen to the Manchu banners, and the Chinese banners were thereafter not distinguished from the Han Chinese civilian population.

9 Crossley (1999: 287)
The officer candidates were required to be proficient in horsemanship and archery and to contribute an examination essay in either Manchu or Mongolian. The Han Chinese bannermen were gradually transformed into civil servants primarily. See Crossley (1999: 288-9).

10 Fairbank (1992: 146-7)

11 Crossley (1997: 127)

12 By giving up the banner status, however, they could conduct commercial activities or manual labor.

13 Crossley (1997: 76)

14 See Fairbank and Goldman (1992: 146). According to Elliott (2110: 364), the (roughly) estimated number of male Manchus in the Eight Banners increased from (approximately) about 160,000 to 450,000 persons and that of male Mongols from 84,000 to 180,000 persons, while the total number of male Han Chinese increased from about 133,000 to 600,000 persons between 1648 and 1720. Including females and bondservants, the total population of Eight Banners increased from about 1.9 million persons in 1648 to 3.7 million persons in 1720.

15 Spence (1990: 41)

16 See Elliott (2001: 348, 364).


17 See Fairbank and Goldman (1992: 147-8), Purdue (2005: 188), and Barfield (1987: 285).

18 The Eastern Mongols cooperated with the Manchu, and survived as a people to become an independent state in the twentieth century. The Western Mongols ferociously resisted the Qing and faced ethnic extermination. The Zunghars completely disappeared. Purdue (2005: 286)

19 Elliott (2001: 351).

20 Fairbank and Goldman (1992: 148-149)

21 Spence (1990: 41)

22 The Qing court did not mind the rapid spread of the Yellow Lamaist sect of Tibetan Buddhism among the Mongols. According to Jagchid and Symons (1989: 21), “during the later Qing period, as the Manchus became less reliant on Mongol military power, the registration of Mongols for military service and governmental policies towards the Tibetan Buddhist church grew lax. As the popularity of Buddhism spread, almost half of the male Mongols renounced secular concerns to become lamas and join monasteries. This massive exodus of Mongols from nomadic life diminished the potential for a resurgent Mongol military threat to China because monks produced no offspring and they themselves were unprepared for battle.”
The Manchu somehow ordered all of the Chinese to adopt the Manchu hairstyle (of shaving foreheads and braiding hair in the back) and high-collar tight-jacket dress (instead of the loosely hanging robes of the Ming).
23 Crossley (1999: 307-9)

24 Elliott (2001: 355)

25 The total estimated population of Manchuria was 22.6 million persons in 1891, and 46.8 million in 1942. See Gottschang and Lary (2000: 172-3). It has grown to more than 100 million people by 1990 plus an additional 10 million in the northern leagues of Inner Mongolia. As of 1990, the population registered as Manchu numbered about 10 million, and Koreans about 2 million.
See Janhunen (1996: 39, 43.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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