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푸는 문화유산] 과학으로 승화된 장승과 솟대 | |||||||||||||||||||||||||||||||||||||||||||||||||||||||||||||||||||||||||||
마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 ... 신뢰와 신앙 대상 | |||||||||||||||||||||||||||||||||||||||||||||||||||||||||||||||||||||||||||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희노애락을 느낀다.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중에 특권으로 이 특권을 보다 값지게 만들거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 자체를 과학으로 본다. 그런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당연히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생존 기간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일찍 사망하게 되는 경우이다. 소위 자연사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인데 이같은 요인은 수없이 많다. 예상할 수 없는 질병이나 전염병은 물론 개인적인 고민과 불안 등 헤아릴 수가 없다. 나름대로 치료 방법이 제시되지만 의사들이 제시하는 치료방법은 대체로 유사하다. 환자가 병이 완쾌된다는 믿음을 갖고 병에 적합한 수술 또는 약을 투여 받으라고 한다. 이와 같은 조언이 효과를 보는 경우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내가 모른다고 과학성 없다는 뜻은 아니다」(2003.12.15 참조)). 열정에 의한 믿음만으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믿으면 이뤄지는 현상)’가 있다. 이와 유사한 현상으로는 인간들의 믿음이 놀라운 효과를 얻게 하는 ‘플라시보 효과(가짜 약을 투여해 심리효과 등에 의해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효과)’도 있다.
우울증의 치료에는 ‘가짜약’이 더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는데 2004년 2월 미시간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 연구팀이 실시한 뇌 반응 조사 결과 실제로 위약(僞藥, Placebo)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은 실험 대상자에게 스킨로션을 통증 억제제라고 말해주고 그것을 몸에 발라준 후 전기 충격을 가했을 때의 뇌의 반응을 자기 공명 장치(MRI)를 사용하여 조사했는데 스킨 로션을 바르지 않고 충격을 가한 경우보다 훨씬 통증을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는 것이 인간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운동선수의 예를 들어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기록이 좋지 않은 역도 선수에게 칭찬을 계속한 후에 역기를 들게 하면 놀랍게도 거뜬히 들어올리는 효과가 나타나곤 하는데, 이 역시 칭찬의 '플라시보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실험집단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약효도 없는 약을 복용시키고 그것이 두통을 일으키는 약이라고 말해 주면 실험에 응한 사람들의 70퍼센트 정도는 정말로 두통을 호소한다는 ‘노시보(Nocebo) 효과’도 있다. 노시보 효과의 반대현상도 일어나는 것은 물론이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마음과 정신의 지배 아래 움직인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긍정적인 마음과 정신을 지닐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이런 ‘심리 치료제’효과를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행위가 과학분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풍수지리나 제사, 사주팔자나 부작은 물론 장승이나 솟대 등도 과학으로 다룰 수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유산 중에는 과학적인 실험과 연구에 의해 과학성이 증빙될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정신적인 문화유산인 경우 실험으로 과학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많은 유산들이 과학적인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미신으로 치부되는 장승〉 외국인과 함께 한국의 전통 마을이나 유적지 등을 방문할 때 그들이 가장 흥미 있어 하는 것은 놀랍게도 장승이다. 재료는 돌이나 나무 아니면 자연석과 자연목들이다. 장승이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공예품이자 조각품이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장승은 ‘Devil Post’ 또는 '천하대장군'의 이름으로 외국인 사이에 가장 많이 선전된 한국 민속 유산의 하나이다. 특히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거의 모두 장승에 대해 듣거나 보았기 때문에 장승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장승을 직접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갖는 모양이다. 장승을 마을 수호신인 법수(벅수)와 분류하기도 하나 이곳에서는 모두 장승으로 통칭한다.
조선 시대 말 마을 입구에는 빠짐없이 장승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들은 길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던 장승을 한국 문화의 낙후성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고 무기력한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매달린 미신적인 우상 숭배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쓸 때였다. 그런 외국인들의 눈에 장승은 이교도의 생활 풍습으로 보였음은 물론이고, 꼭 없애 버려야 할 민속 신앙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외국인의 장승에 대한 첫 기록은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멜은 동료들과 함께 1653년 제주도 남쪽 해안에 표착했다가 1666년 일본으로 탈출한 후 『제주도 난파기』와 『조선왕국기』를 남긴다. 그가 남긴 두 편의 글은 한국인과 13년 동안 직접 접촉한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것으로 한국 주민들의 생활과 종교의식, 주거, 여성의 지위 등을 기록했다. “꼬레지엥들에게 종교는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작은 인종들은 우상 앞에서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숭상하는 것은 아니고, 어른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 자신이 우상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멜은 우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장승을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장승에 대한 명확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하멜로부터 무려 240년이 지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러 들어왔던 오페르트였다. 그는 1892년 라이프치히에서 펴낸 『조선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우상’에 대해 적었다. “사람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는 꽤 큰 마을에서 나는 벌써 여러 번이나 키가 서로 틀리지만 나무로 만든 막대기가 여러 개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이것이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중략) 자세히 보니 이것은 바로 동리의 우상신으로 사원 또는 기도소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을 보호할 특별한 조치 없이 땅 속에 그냥 박아 놓았다. (중략) 키가 대강 두 자에서 네 자 가량의 통나무로 만든 이 물건의 장식은 다음과 같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다 가장 원시적인 기술로 기분 나쁘게 찡그린 얼굴을 새긴 것이다.” 오페르트 다음에 들어온 선교사 게일도 장승에 대해 적었다. “당시 조선의 큰길이나 작은 길에서 마주치는 장승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이빨과 이글거리는 눈을 보면 무의식중에 이스라엘인들이 숭배하는 다곤, 몰록, 그모스, 발과 같은 신이나 우상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미국인들은 우상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고 박물관이나 성경책을 통해 그런 것들을 보았지만 우상을 실제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몇 년 전에 지방 자치 단체에서 장승 건립을 추진하자, 일부 종교인들이 이것을 완강히 반대하며 설치물을 훼손했다는 기사가 종종 보도되었다. 그들이 장승 설치를 반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종교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과학 기술이 발달된 시대에 미신을 의미하는 장승을 정부에서 공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인뿐만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이 힘을 더하기도 한다. 원시 신앙에는 미신이라는 요소가 깔려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부 종교에서 장승을 미신으로 몰아붙여 배척하는 운동을 펼치는 것은 서양의 문화적인 잣대에 익숙하고, 정작 우리 나라의 문화 전통에는 문외한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특히 일부 종교인들이 주관적인 생각에서 샤머니즘을 떨쳐버리고 부수어야 할 것으로 무시할 때 문제가 더 커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 민간신앙이 지니는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와 존재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보거나 원시신앙의 차원에서 다루면 여러 가지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무당이나 무속이 미신의 일환이라고 비난하더라도 그들이 한국 전통문화의 보고나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장승이 과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설치된 물건이었다는 것은 장승이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의지하는 징표인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물건이라는 뜻도 된다. 장승을 마을 입구에 세우는 것은 장승이 마을을 지켜줄 것으로 사람들이 모두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나무로 만든 장승이나 솟대를 대체로 10∼20년마다 새로 세웠다. 우리 조상들이 여러 가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수천 년 동안 계속 이것을 새로 만들어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 오랜 세월 동안 장승이나 솟대 등을 통하여 자신들의 기대에 이르는 보답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를 과학으로 다룰 수 있으며 우리 유산 가운데 과학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매우 많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비록 과학이라는 단어 자체는 알지 못했지만 과학을 생활화했다. 조상들이 믿음을 갖고 지켜 왔던 풍습이 오늘날에는 미신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중에는 그 나름대로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많다. 우리 조상들은 장승과 솟대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승은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의지한 상징인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과학적인 물건이라는 뜻도 된다. 〈장승의 기원〉 장승은 이정표나 마을의 수호신으로 동네 어귀나 길가에 세워진 사람 모양의 조각 형상물로 남녀장승이 쌍을 이뤄 세워지는데 이는 각각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불린다. 동 서 남 북 중앙에 다섯 장승이 서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음양오행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승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경기 충청 지역에서는 ‘장승’, 관서 관북지역에서는 댱승, 호남 지역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영남 지역에서는 ‘벅수’, 제주도에서는 ‘하르방’이다. 장승은 생김새에 따라 인면형, 귀면괴수형, 미륵형, 남근형, 문무관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인면형의 경우 남자 장승은 머리에 관을 쓰고 눈을 부릅뜨고 있으며 덧니와 수염을 달고 있고 몸체에 붉은 색을 칠하기도 한다. 반면 여장승은 관이 없으며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몸체에는 청색 칠을 한다. 귀면괴수형은 왕방울눈과 주먹코에 송곳니를 들어낸다. 미륵형은 불교 조각과는 다르게 질박하지만 자비스럽고 친밀감을 준다. 장승에 대한 자세한 문헌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내려왔다고 학자들은 추측하고있다. 김재일에 따르면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의 비문에 나오는 장생표주(長生標主) 이야기는 7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國長生) 이야기도 10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볼 때 장승의 기원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장승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대의 남근 숭배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고 사찰의 토지 경계표로서의 장생고표지(長生庫標識)설도 있다. 그러나 주강현은 단순한 경계표지석이 사람의 얼굴을 한 장승으로 바뀐 이유가 명료하지 않으므로 설득력이 약하다고 지적했다. 손진태는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던 소도(蘇途), 장승, 누석단(돌무더기 서낭당)과 같은 민속이 북아시아 민속과 깊은 관계 속에서 형성됐다고 밝혔다. 일본인 아끼바도 한국의 장승 솟대에 대응해 퉁구스계의 골디족, 소론족, 오로촌 족의 목우신상(나무로 사람 모습을 만든 신상), 신간(神杆), 조간(鳥杆: 나무나 쇠로 만든 새를 꼭대기에 앉힌 기둥이나 장대) 등을 소개했다. 한국의 민속과 북아시아의 민속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승이 우리나라에 매우 오래 전에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유사성으로 보아 한국인과 북방아시아인이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장승(장생의 음운이 변천된 것으로 추측됨)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장생고(長生庫) 소속의 사유전토(寺有田土)의 경계 표시로서 장생을 사용했다는 설과 신선 사상의 장생불사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김두하는 불교나 신선 사상 또는 민속에서 장생이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했다는 것을 감안하여 후자를 지목했다. 〈장승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 장승문화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민중문화로 토착화된다. 나라가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스스로 마을을 지키려는 백성들의 자위의식에서 장승이 각지에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장승의 가장 큰 역할은 마을을 지키는 것이다. 돌림병이나 흉년을 가져오는 잡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흔히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웠다. 의학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천연두(두창)나 콜레라, 수두와 같이 사망률이 높은 전염병이 돌면 사람들은 치료약도 없이 오직 하늘에 운명을 맡겼다. 영남 지방에서는 마을과 마을 간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경계지표로 장승을 세웠고 지리산 실상사나 화앙산 관룡사에서는 절 입구에 장승을 세워 절을 지키게 했다. 고려시대에 비보사찰의 승려들은 국가가 부여한 사찰 영지에 대한 면세 혜택에 힘입어 그 토지를 경작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했다. 이때 장승은 산천 비보뿐만 아니라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도 했다. 사람들은 풍수지리에 따라 땅기운이 약한 곳에 장승을 세웠고 일부 마을에서는 마을과 마을 사이의 이정(里程)로 장승을 세웠다. 마을 밖의 장승은 만남의 장소 표시로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은 또 장승이 남성 성기의 상징으로 잉태를 가능케 해준다고 믿었다. 이완 반대로 여자들은 장승의 코나 눈 부위를 갉아서 감초와 함께 삶아 낙태 비방 약으로 먹기도 했다. 장승은 기도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 사람들은 가정의 화목과 길 떠난 자식의 성공, 풍년, 풍어, 건강 등을 빌었다. 환자는 병을 낫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냈고 노총각과 노처녀는 장승 앞에 음식을 놓고 소원성취를 기원했다. 장승은 단순한 경계표나 이정표 구실뿐만 아니라 잡귀와 질병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이는 신앙의 대상으로 신성시되어 함부로 건드리거나 손을 대지 못했다. 대개 장승은 음력 정월 열나흘 날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팔도의 장승들은 거의 모두 같은 날 태어난 형제들이다. 원래 장승은 남녀 성 구별이 없었는데 후대에 부부 상으로 바뀌었다. 장승을 남녀 쌍으로 세울 때는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 하거나 사이좋게 나란히 서있게 했다. 장승을 부부로 만든 것도 행복과 안녕 추구하는 의미가 크다. 장승 부부를 마주 보게 할 때는 대장군은 동쪽에, 여장군은 서쪽에 세운다. 그래서 과거에는 과객이 장승을 보고 방향을 알 수도 있었다. 장승은 주로 마을 입구에 서 있는데 그곳을 장승배기라고 불렀다. 배기란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장승은 대개 서낭당이나 선돌이나 또는 솟대 등과 함께 세워졌다. 장승이 돌무더기 위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장승은 대부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부라린 두 눈, 툭 불거진 눈망울, 치켜든 눈썹, 뭉퉁한 코 등 장승이 이처럼 무섭고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마을에 해를 끼치려는 잡귀들에 겁을 주어 내쫒기 위해서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매우 해학적이고 자애로워 보인다. 전형적인 한국인 얼굴이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모두가 서민들의 삶의 애환과 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승 중에는 사모관대와 족도리를 한 것도 있어 서양의 사탄과는 시작부터가 다르다. 외국인들이 자신들 주관과 선입견에 따라 외형상 사탄과 유사하다고 보고 기독교 전파의 장애로 판단했고 국내의 일부 종교인들도 장승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장승을 사탄의 개념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장승과 사탄은 원천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승이 신랑 신부의 형태를 갖는 이유도 유사하다. 장승은 우리 민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해석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대를 이어 장승을 세웠다. 바로 이점이 장승을 미신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는 근거이며 과학성이 있다는 증거도 된다. 〈솟대〉 솟대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긴 장대나 돌기둥 위에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호남지방에서는 솟대를 수살대라고 한다. 솟대를 가리키는 말로 진또배기, 거릿대라고도 한다. 솟대는 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지는데 솟대가 서 있는 곳을 수살목, 솓대배기, 솔대배기, 진또배기, 짐대배기라고 한다.
솟대는 북아시아 여러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지켜온 상징물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종교 의식에 사용된 그릇에도 나뭇가지나 기둥에 새를 앉힌 조형물이나 문양이 발견된다. 솟대는 고대부터 북아시아 전 지역에 확산돼 있던 보편적인 신앙물이다. 『동이전』에 따르면 ‘소도(蘇塗)는 큰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서 귀신을 쫓는다’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서 소도란 솟대를 지칭한다. 솟대의 발생은 이른바 우주나무(Cosmic tree)와 하늘 새(Sky-Birds)의 결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우주나무는 우주층의 교통로로서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는데, 이때 각 우주 층에 왕래하는 하나의 사자(使者)로서 새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솟대는 하늘과 지상을 연결해 주는 영혼의 안테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간혹 새를 앉히지 않은 솟대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사자로서의 새의 기능이 생략된 것에 불과하다. 솟대의 새는 모두 물새이거나 철새인 물오리이다. 오리류는 다른 새와는 달리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을 그 생태의 영역으로 하고 있다. 철새는 계절의 변화와 초자연적인 세계로의 여행을 암시하며 이승과 저승을 주기적으로 넘나드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부활의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한마디로 오리는 다른 새들보다 종교적인 상징성이 강한 동물이다. 오리류는 또한 물에서 사는 새로서 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농경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는 물이다. 따라서 물오리는 풍년을 상징한다. 지방에 따라 오리 모형은 화재 예방이나 홍수방지의 상징물로 세워졌다. 수재, 풍재, 화재 등 삼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방도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급제 솟대’를 세웠다. 급제 솟대는 마을 입구나 급제자의 문 앞 또는 선산에 세웠는데 원래는 급제자의 숫자만큼 세웠기 때문에 급제자를 많이 낸 마을이나 문중에서는 솟대가 그만큼 많았다. 역대 왕들의 왕관도 새의 교통자적인 흔적을 볼 수 있다. 신라 왕관은 머리에 여러 개의 새 깃털을 꽂았는데 이는 왕이 하늘이 내려준 존재로서 백성과 하늘을 이어주는 절대적 중간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당들도 모자에 어김없이 새의 깃털을 꽂았는데 무당 역시 하늘과의 내통자요 하늘의 사제라는 뜻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솟대를 향해 빌기도 하고 더러는 솟대를 신물로 여겨 굿하고 제사를 올리기도 하는데 이것을 솟대 굿이라고 하며 장승 굿과 유사하게 치러진다. 솟대 위에 얹힌 새 모양은 간단히 Y자형 나뭇가지로 만들거나 ㄱ자형 나뭇가지를 머리와 목으로 여겨 Y자형 나뭇가지나 나무판에 연결하여 만들기도 했으나 물오리 형상은 개개 나무로 깎아 나무 위에 올렸다. 솟대는 홀로 서 있는 것도 있지만 장승, 선돌, 탑, 신목 등과 함께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새의 숫자는 세 마리, 다섯 마리 등 다양하며, 그 형태도 여러 가지이다. 솟대를 세우는 목적은 장승과 크게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솟대가 장승과 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승은 다른 어떤 신앙 대상물보다 그 성격과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승은 뭐니 뭐니 해도 마을 수호가 주요한 기능이었다. 솟대는 이러한 장승의 벽사 기능을 보강, 보조하여 솟대의 장대 자체로서 잡귀를 막으며, 솟대의 새가 풍년을 보장하는 농경 신의 구실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와 같은 장승과 솟대에 무한한 신뢰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정월대보름은 우리 세시풍속 중에서 설날만큼 큰 명절이다. 일년 중 달이 가장 크다는 이날은 예부터 당산제, 풍어제, 장승깎기, 달집태우기, 답교놀이 등을 하며 편안한 한해를 빌었는데 이중에서 가장 신명나는 것은 당산제이다. 당산굿, 등제, 당제라고도 부르는 당산제는 아직도 전라도의 많은 지방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솟대형의 돌기둥을 다듬어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돌로 깎은 오리 모양을 세운 솟대당산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특히 부안지방에는 당산나무보다 솟대당산이 일반적으로 많이 보이며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이 한 쌍으로 모셔진 곳도 있다.
400여년 전통을 이어가는 전북 부안읍 내요리 솟대 당산도 대충 다듬은 사각의 돌기둥 위에 돌로 깎은 신조(神鳥)를 앉혔는데 마을 사람들은 ‘짐대할머니’라고 부른다. 민속자료 19호로 지정된 이곳 당산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시작되는데 마을입구 양지바른 잔디밭 소나무기둥에 세 가닥의 새끼줄을 고아 한 가닥의 큰 동아줄을 만든다. 이 대 줄의 직경은 30센티미터인데 예전에는 70센티미터의 굵은 동아줄을 꼬았다고 한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모두 동아줄을 메고 마을 남쪽 입구로 나가 짐대할머니에게 작년에 입혀드린 헌옷을 벗겨내고 새로 만든 동아줄로 아래부터 감아올린다. 맨 꼭대기에 있는 돌로 만든 솟대가 보일 듯 말듯해질 때가지 감으며 이어서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차례로 나서서 술 석잔을 올리면서 경건하게 제를 끝내고 다음해를 기약한다. 우리 조상들은 아직도 이 같은 장승과 솟대에 무한한 신뢰와 신앙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04/7/17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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