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종묘 | ||||||||||||||||||||||||||||||||||||||||||||||||||||||||||||||||||||||||||||||||||||||||||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의 하나이다. 태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태조인 이성계의 묘(廟)가 있기 때문이다. 종묘는 인신을 대표하는 왕실의 선조를 제사하는 곳이고 지신인 지기를 제사하는 사직과 함께 나라를 지켜주는 신격화된 신성한 곳이기도 하다. TV 사극에서 왕이 잘못하면 가장 많이 쓰는 단골 대사 중에 하나가 있다. “전하. 이 나라 종묘사직을 버리려 하시옵니까?” 이 장면을 보더라도 종묘와 사직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왕조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조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부산항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조선반도를 점령하자 왕은 허겁지겁 의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런 황망한 시기에도 왕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종묘에 모셨던 이조 왕가들의 신위였다. 왕가의 신위는 조선 그 자체를 의미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중요한 일은 반드시 종묘에 먼저 고하는 의례 절차를 거친 다음에 의결되고 시행되었으며, 한발이나 홍수 등과 같은 국가적인 천재지변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기양제(祈禳祭)를 빈번히 올렸다. 조상의 덕을 기리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습속으로 여겨져 왔다. 잘 되고 못 되는 일은 다 조상 탓이었던 만큼 왕이 된 이들에게는 그 조상의 덕이 지대하다고 여겼고, 왕의 조상을 기리는 장소를 만들어 받들어 모셨다.
더구나 종묘는 왕권의 존엄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며 지배 이념을 재해석하는 등의 기능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 왕조는 종묘와 사직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느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왕조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종묘는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와 같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했다. 1995년 유네스코 지정, 독창성 뛰어난 건축양식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종묘는 엄밀한 의미에서 조선시대의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유네스코가 종묘를 세계유산으로 등록한 것은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으로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김봉렬은 보다 구체적으로 유네스코에서 종묘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500년 조선왕조의 신위를 그대로 모시고 종합적인 의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종묘가 유일하다. 중국에도 고대부터 종묘와 같은 태묘(太墓)가 있었으나 한 왕조가 멸망하고 새 왕조가 성립되면 가장 먼저 전복된 종묘를 없애고 신왕조의 종묘를 신축하는 것이 역사적인 통례였으므로 최후 왕조인 청 태묘만이 북경에 남아있다. 그나마 공산혁명기를 겪으면서 의례는 중단되었고 건물들도 개조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천황들을 신사에 모셨기 때문에 종묘와 같은 예제적 건축은 나타나지 않는다. 유교문화권 가운데서는 종묘가 유일하게 보존되고 운영되고 있다.’ 〈선왕에 대한 제사의 장소〉 공자는 ‘임금을 평안케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예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고대 국가에서는 의례를 백성들을 통제하고 통치자의 지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인식하였는데 조선의 군주들도 유교 국가답게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의례는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초(漢初)에 걸쳐 편찬된 삼례('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이렇게 정리된 의례는 당나라 때부터 오례(五禮)인 길례(吉禮)ㆍ흉례(凶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가례(嘉禮)를 주로 하여 각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례가 되었다. 오례를 통해서 왕실은 정치적 권위와 사회질서 안정을 구현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이범직, 송혜진, 김영숙, 방성실, 최영선, 최순권, 김봉렬 등 많은 저자들의 글을 참조하였다.
유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사람은 영혼인 혼(魂)과 육신인 백(魄)이 결합된 존재이며, 죽음이란 혼과 백이 분리되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죽은 조상을 숭배하려면 혼을 위해 사당인 묘(廟)를 세우고 백을 위해 무덤인 묘(墓)를 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초월적 신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라 볼 수 있는 유교에서 조상신은 중요한 숭배 대상이었다. 당연히 한 나라의 최고 인격체인 역대 왕들을 모신 종묘는 최고의 사당 건축이자 가장 숭고한 신전으로 건설되었다. 종묘가 고대 군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은 오례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길례를 천신(天神)ㆍ지기(地祇)ㆍ인귀(人鬼)에 제사를 지내는 예제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사(祀)’, 지기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제(祭), 인귀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향(享)’이라 한다. 길례는 제사지내는 대상의 격에 따라 대사(大祀)ㆍ중사(中祀)ㆍ소사(小祀)로 나누어 제사를 행했다. 종묘는 사직과 함께 제일 격이 높은 대사에 속한다. 종묘의 기원은 중국의 주(周)나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기'에는 ‘천자는 칠묘(七廟)로 삼소(三昭) 삼목(三穆)에 태조(太祖)의 묘를 더하여 7묘가 되며 제후는 오묘(五廟)로 이소(二昭) 이목(二穆)에 태조 묘를 더하여 5묘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목규정은 시대가 흐르면서 계속 변화되어 동당이실(同堂異室)과 서상(西上)의 제도가 나타났다. 동당이실은 건물은 같이 쓰고 그 안에 실만 따로 하여 여러 신위를 한 지붕 아래 배치한 것이다. 따라서 신위가 각각의 묘에 배치될 때 지켜지던 소목제도도 변화한다. 서상은 서쪽 끝을 제일 높은 위치로 하고 그 우측으로 차례로 신위의 순서를 정하는 것이다. 왕조가 계속되면서 봉안할 신위가 증가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송나라 때 별묘(別廟) 제도가 나타난다. 기존의 묘 외에 건물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종묘를 세웠다. 신라는 남해왕 3년(6) 봄에 시조인 박혁거세를 위한 묘를, 지증왕은 시조의 탄생지에 신궁을 세웠다. 혜공왕 12년(776)에 종묘 다섯을 정했는데 김씨의 시조인 미추왕, 태종, 문무왕과 그의 부모 묘이다.
고구려는 동명왕 14년(기원전 24) 8월에 왕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곳에 신묘(神廟)를 지었으며 신대왕 4년(169) 가을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 고구려왕들은 시조묘에 참배했다. 중국의 '북사'에는 고구려에서 부여신(扶餘神)과 고등신(高等神)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여신은 하백녀이고 고등신은 주몽이라고 전해진다. 또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한 멧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 것을 볼 때 이 역시 종묘와 같은 개념으로 추정한다. 후손들이 조상들을 열심히 받들었던 만큼 조상들도 이에 응답도 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내해 이사금 11년(164) 8월, 여우들이 금성과 시조의 사당 뜰에서 울었다. 정해 이사금 7년(253) 4월에는 큰 가뭄이 들어 조묘(祖廟)와 명산에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렸다. 내물 이사금 3년(358) 2월에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자, 자줏빛 구름이 서리고 뜰에 봉새가 날아와 앉았다. 내사금 7년(362) 4월에도 시조 사당 뜰에 있던 나무의 줄기가 다른 두 나무의 가지와 이어져서 하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소립 마립간 7년(485) 2월에 시조 사당에 사당지기 20집을 더 두었다는 내용도 보이는 것을 볼 때 삼국시대에 사당 관리에 큰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종묘 제도는 삼국시대, 고려에서도 중하게 여겼지만 본격적인 종묘제도가 틀을 갖춘 것은 고려시대부터로 볼 수 있다. 고려 인종대의 학자인 최윤의는 고려 및 중국의 의례를 참작하여 '상정고금의'를 정비 편찬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종묘와 사직 제도 확립에 힘을 썼으며 의례를 수신과 치국의 방법으로 중요시했다. 국가례(國家禮)로서의 오례가 갖는 특징은 길례 체계 속에서 잘 나타나는데 매년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종묘와 사직의 제례를 왕실의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제사로 간주했다. <종묘의 건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종묘로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가 되자 제일 먼저 세워야 할 3가지 건축물을 언급했다. ‘종묘는 조상을 받들어 효경을 숭상하는 곳이고 궁궐은 존엄을 보이고 정령을 반포하는 곳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니, 이들을 가장 먼저 건설해야 한다.’ 그는 원래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옛 터에 새 종묘를 건립하고자 했으나 태조 3년(1394) 한양을 새 도읍지로 결정하자 이를 취소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한 후 경복궁의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을 건설토록 했다. 태조 4년(1395) 9월, 한양에 동당이실의 대실 7칸에 좌우 익실 2칸이 달린 정전과 공신당, 신문, 동문, 서문, 신주 향관청 등의 건물이 완성되자 개성에 있던 태조의 4대조로 추존왕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옮겼다. 태종 10년(1410)에는 정전에서 제사지낼 때 비를 피할 수 없다 하여 동서에 월랑을 지었으며 창건 당시 정전 울타리에 밖에 있던 공신당이 정전과 멀리 떨어져 불편하게 되자 담장 안의 동쪽 계단으로 옮겼다.
그런데 세종조에 오자 7칸이 다 차 막상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태실이 없게 되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정전을 확장하던가 아니면 별도의 건물을 짓는 것이다. 결국 세종은 정전 서쪽에 영녕전을 신축하여 추존왕 4대의 신위를 옮겼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전은 동당이실제를 택했지만 영녕전이라는 별묘를 지었으므로 별묘제도 가미한 셈이다. 건물의 이름인 ‘영녕(永寧)’은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처음에 영녕전은 중앙 4칸에 좌우로 익실 각 1칸을 더한 것이다. 13대 명종조에 다시 한계에 부딪힌다. 정전과 영녕전 모두 선왕들의 신위로 꽉 차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정전의 태실은 4칸을 증축하여 총 11칸이 되었다. 그런데 무한정 정전 태실을 늘릴 수만은 없다는 여론이 일자 다음과 같은 봉안의 원칙이 세워졌다. ‘5세가 지난 왕은 원칙적으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신위를 모셔 봉안한다. 그러나 태종이나 세종과 같이 공덕이 뛰어난 선왕의 위패는 옮기지 않고 영구히 정전에 봉안한다. 덕종이나 장조와 같이 실제 보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도 추존하여 왕으로 봉안하여 영녕전에 봉안한다. 그리고 정전 내 가장 서족으로부터 선왕의 순으로 신위를 모신다.’ 어느 정도 종묘의 제도가 정착되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 갈 때도 종묘의 신위를 함께 옮겼으며 전란에 종묘가 불에 타서 사라지자 제일 먼저 재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종묘가 갖고 있는 건물의 비중 때문에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완성되었다. 헌종 2년(1834)에 정전의 신실(神室, 신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는 방) 4칸을 늘리고 영녕전 협실 4칸을 증축했다. 이것으로 현재 전해지는 종묘의 모습이 마무리된다. 현재 19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특기할 일로는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가 없다는 점이다. 종묘가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게 때문에 모든 왕들이 사후 종묘에 부묘되어 향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종묘에 부묘되려면 공덕이 있다고 평가되어야 하는데 이때 정치적 판단이 개제되므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제외된 것이다.
반면에 정종의 경우 오랫동안 묘호 없이 지내다가 숙종대에 가서야 묘호를 얻었고 인조는 반정 후 생부를 원종으로 추존한 후 부묘하기도 했다. <조선왕조 묘호의 난맥> 500여 년을 통치한 조선왕조의 각 왕들에게 추증된 묘호는 난맥상을 보여 크게 비난받는다. 조선시대의 왕의 순서 태, 정, 태, 세, 문, 단, 세...를 초등학교에서 외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왕조별 왕에 대한 호칭으로 끝에 조(祖)나 종(宗)자가 따라온다. 이들은 유교이념이나 철학이 지배했던 시대였거나 왕조자체가 유교를 기조로 하여 창건된 고대국가 일수록 어김없이 따라오는 묘호이다. 이조는 태조, 세조를 비롯하여 조(祖)가 붙은 왕은 7명이고 종(宗)이 붙은 왕은 18명이며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호 자체가 없이 군으로 불린다. 바로 이 묘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이 편파적이며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왕을 지칭하는 칭호는 시호(諡號)와 묘호(廟號)로 구분되는데 이는 왕의 사후에 부여되는 것이며 장례를 지내면 장지에는 릉호(陵號)가 붙는다. 시호는 왕, 공경대부(公卿大夫) 또는 명망 있는 유학자들에게 추증되는데 이들이 살아있을 때의 공덕을 기리고자 죽은 후에 주는 이름이다. 묘호는 왕실의 사당에 배향되는 신위의 이름으로 왕에게만 추증되는 또 다른 시호이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광개토, 백제의 무령왕의 무령, 신라의 문무왕의 문무는 사후에 추증된 시호에 해당하며 세종을 장헌대왕이라고 부를 때의 장헌도 시호이다. 시호와 묘호는 유교사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양(월남포함)사회에서 왕정이 있었던 모든 나라에 시호나 묘호에 의한 왕 이름이 있다. 조(祖)와 종(宗)의 구분을 보면 원칙적으로 나라를 창건한 사람을 조(祖)이고 그 계승자는 종(宗)이다. 왕조를 이어감에 있어 일단 창건자 조가 있은 후 종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조라는 묘호가 등장하면 또 다른 개국과 창건이 있었음을 뜻한다. 시조가 아닌데도 조(祖)자를 갖고 있는 왕은 국도 자체를 옮기고 왕조를 재 창건해 시조가 된 사람들을 의미하므로 한 왕조에서 조가 둘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당나라의 경우 고조 이후 19대 281년 동안 계속 종으로 이어졌고 후대에 조자를 붙인 왕은 없다. 송나라도 태조 조광윤 이후 모두 종이란 묘호를 사용했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개국한 후(918) 계속하여 원종(1274)까지 종이란 묘호로 이어지다가 고려가 원나라의 사위국이 된 이후 충렬왕부터는 격이 더 낮은 제후로 강등되어 묘호 없이 시호만 썼다. 그러나 원, 명, 청의 경우 창건자를 상징하는 조란 묘호가 두 사람 이상이다. 원의 경우 태조 칭기즈칸이 몽고를 세웠으나 그의 손자 쿠빌라이가 동방에 원이라는 나라를 다시 창건하여 개국자로 등장하면서 세조라는 묘호가 붙었다. 명도 태조 주원장이 홍무라는 연호를 쓰면서 지금의 남경에 국도를 정하고 명이라는 나라를 창건했으나 3대 영락대제가 수도를 지금의 북경으로 옮기고 나라를 재 창건했다 해서 성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이어 누르하치가 흥경에 도읍을 정하고 후금을 세워 태조가 되었는데 그 후 3대 순치제가 수도를 북경의 자금성으로 옮기고 나라를 재 창건해 세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제4대 강희제도 성조가 되었는데 그는 대만, 운남, 사천, 미얀마, 티벳 등을 평정하여 청조의 실질적 대륙통일을 완성했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는 무려 7명의 왕이 창건 및 개국자의 위상인 조의 묘호를 갖고 있다. 1대 태조(1392~1398) 7대 세조(1455~1468) 14대 선조(1567~1608) 16대 인조(1624~1649) 21대 영조(1724~1776) 22대 정조(1776~1800) 23대 순조(1800~1834) 태조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상대로 쿠데타에 성공하여 왕조를 창건했으므로 조(祖)란 묘호가 충분한 설득력이 있지만 나머지 6명의 왕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은 예로부터 있었다. '대륙조선사연구회’에서 지적하는 문제점을 토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 태조를 제외하고 다른 6명의 왕은 도읍을 옮겼거나 국토를 확장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거나 재 창건을 이룩한 왕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이 조라는 묘호를 받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기준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유교의 명분을 제일로 삼은 조선에서 효종의 계모가 상복을 2년 입느냐 1년을 입느냐는 명분 싸움으로 연결시켰던 조선왕조가 조라는 묘호부여에는 매우 관대했다는 것 자체가 조선왕조가 편파성을 갖고 묘호를 추증했다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문제는 조를 묘호로 갖고 있는 왕들의 행적이 결코 자랑스럽지 못하다는데 있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한 후 조카인 단종을 죽이는 등 무단정치를 실행했으며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재빨리 도망갔고 신하들의 배반이 두려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인조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청 태종에게 항복 의식을 행하여 조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영조는 당파에 휘말려 세자인 사도세자를 죽였으며 정조는 할아버지의 탕평책을 유지하여 문치위주의 개혁정치를 한 공적은 있으나 그 여파로 세도정치가 일어나게 했다. 가장 신랄하게 비난 받은 왕은 마지막 왕 '순종' 순조의 경우는 더욱 이상한 논리로 조가 붙었다. 원래 순조의 처음 묘호는 순종(純宗)이었다. 그런데 철종 8년(1857) 8월, 이학수가 상소하여 순종의 묘호는 마땅히 순조로 해야 한다고 청했다. 덕보다는 공이 앞선다는 것이다. 이에 철종은 ‘우리 순고의 성덕과 지선에 대해 경의 말이 나왔으니 미처 하지 못한 슬픔이 더욱 간절하다’하며 종(宗)을 고쳐 조(祖)로 하였다. 순조의 묘호에 대해 이론이 많은 것은 순조는 당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수많은 농민봉기와 반란이 계속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라는 묘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연산과 광해는 조정내부의 권력투쟁을 진압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외세를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수구세력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하여 묘호조차 받지 못하고 군(君)으로 강등 당했다. 연산과 광해는 반정을 일으키게 만든 당사자인데다가 폭정과 패륜으로 종묘․사직의 명분과 절의를 잃었기 때문에 폐출 되었다는 설명이지만 실제로는 조를 받은 왕들보다 더욱 조선 왕조를 위해 일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가장 신랄한 비난을 받은 왕은 일제강점기에 사망한 마지막 왕 순종의 묘호이다. 유교이념을 정치기조로 하는 왕국으로 왕실을 망하게 했거나 강압에 의해 종묘사직을 빼앗긴 왕은 묘호를 받지 못하거나 받아도 쓰지 못한다. 설사 쓸 수 있다 하더라도 망국 군주를 뜻하는 ‘애통하다’의 애(哀), ‘강제로’라는 뜻의 폐(廢), ‘쫓겨나다’의 출(出), ‘끝이다’의 말(末)을 붙여 묘호를 짓는다. 그런데 순종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사라진지 16년 후에 사망했는데도 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조선 정부가 아닌 일본식민통치 정부가 정해준 묘호를 받았음에도 버젓이 순종이라고 쓰는 것도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조를 받은 사람들의 자격에 대해서는 백 번을 눈감아준다 하더라도 마지막 왕인 순종이란 묘호는 부적절함으로 말왕(末王) 또는 출왕(出王)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돼야한다는 의견이 계속 나오고 있다. 유교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사망한 선조에 대해 비교적 후하게 묘호를 부여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가장 엄격해야 할 묘호 추증에 있어 객관성을 잃었기 때문에 조선왕조 전체의 권위가 훼손되었다는 지적은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계속) |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종묘(2) | ||||||||||||||||||||||||||||||||||||||||||||||||||||||||||||||||||||||||||||||||||||||||||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종묘(1)에서 이어집니다. 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후국의 예를 많이 참조했으나 실제로 건물을 짓고 제례를 치르는 과정에서는 조선 고유의 형식을 따랐다.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이며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격식과 장엄함의 대명사 종묘 현재의 종묘 건물이 중국과 두드러지게 다른 요소는 신실 양쪽 끝에 설치된 5칸의 월랑(月廊)과 신실 앞에 넓게 펼쳐진 월대다. 신실 양쪽 끝에 직각으로 뻗은 5칸 월랑 때문에 종묘 건물은 전체적으로 ㄷ자 형상을 하고 있다. 『태종실록』에 태종이 월랑을 짓도록 명령하자 신하가 “동서 이방에 허청(虛廳)을 짓는 것은 종묘제도가 아닙니다. 후일에 상국의 사신이 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으니, 왕은 “사신이 무엇 때문에 종묘에 오겠느냐. 혹시 그들이 온다 하더라도 조선의 법이 이런가 하고 생각하지 비난하거나 웃겠는가”하고 대답했다. 태종의 답변 속에는 중국의 제도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임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이 동서 월랑은 나중에 영녕전에도 갖추어져 조선조 종묘 건물의 독특한 형식이다. 종묘의 건축적인 특성을 보면 장엄함과 당당함을 보여주는 한편 ‘사당’이라는 용도에도 맞게 단정하고 장식과 기교에 있어 소박하면서도 단순한 면을 보인다. 그러나 종묘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의 하나로 인정받게 된 바탕에는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조선 고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종묘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유네스코의 등재 기준인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평가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종묘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으므로 대표적인 건물만 설명한다. ① 정전 - 정전은 정면 19칸, 측면 3칸의 익공계 구조의 박공지붕 건물로 정전(국보 제227호)의 각 신실은 한 칸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종묘의 정전이란 건물 한 칸 한 칸이 모여서 전체를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종묘가 최초로 건설될 때보다 왕의 신위가 늘어나면서 정전은 계속 증축되었으며 헌종 때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한 칸의 구성은 제일 뒤에 신위를 모신 감실이 있고 그 앞에 제사지낼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끝에 관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문 밖에 툇간 1칸이 추가로 있다.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 구성이자 최대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전면에는 각 칸마다 두 짝의 판문을 달았으며 문틀 아래쪽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을 조각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대 판문을 열고 발을 늘어뜨린 채 제의를 행한다. 판문의 내부 좌우에는 4개의 황색 의장(儀仗)을 둘러 장식했는데, 우산 모양의 용개와 봉개, 커튼 모양의 용선과 봉선이다. 후퇴칸에는 감실이 설치되었는데, 감실은 한 칸의 방으로 구성되고 이들 사이는 벽이 아니라 발로 구별하고 있다. 감실에는 서쪽에 왕의 신위, 동쪽에 왕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기둥은 보통 굵기가 40센티미터 정도이며 높이는 대개 굵기의 8~9배이고 약간의 배흘림을 갖고 있다. 원래 기둥의 단면 형태는 기둥 깎는 기법에 따라 원통기둥, 민흘림기둥, 배흘림기둥으로 나뉜다. 원통기둥은 기둥 위부터 아래까지 일정한 굵기를 가지는 것으로 송광사 국사전, 내소사 대웅보전이 이와 같이 건축되었고 민흘림기둥은 안정감과 착각교정을 하기 위해 기둥위보다 아래가 작은 기둥을 말한다. 개암사 대웅전, 쌍봉사 대웅전, 화엄사 각황전, 서울 남대문 등이 이런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에 배흘림기둥은 기둥 높이의 1/3정도에서 가장 굵어졌다가 다시 차츰 가늘어 시각교정 효과를 주는 기둥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등에서도 차용하고 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일본 건축학자,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 극찬 국내의 건축물 중에서 배흘림기둥을 사용한 것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무위사 극락전,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 해인사 대장경 판고,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등이 있다. 일본의 한 건축학자가 종묘 건축을 보고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극찬하여 수많은 일본의 건축가와 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둥 위의 공포는 익공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소박한 것으로 기둥과 보를 함께 붙잡아주는 구조적 기능에 충실하면서 약간의 곡선 장식이 가미되어 있다. 기둥의 배흘림은 고대 여러 나라의 건축물에 나타나지만 대부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소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건축에서 배흘림은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여 조선조 건축의 한 가지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내부 가구는 가운데 고주를 둘 세우고 그 위에 대들보를 걸고 다시 그 위에 종보를 올리고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는 평범한 것이며 서까래는 부연을 달지 않은 홑서까래이다. 당시 조선시대 거의 모든 건물들이 부연을 길게 달았던 것에 비해 종묘의 정전이 홑서까래로 되어 있다는 것은 이 건물의 용도가 제사를 지내는 용도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한다. 벽체는 전면 한 칸은 개방되었고 그 안에 아무 장식이 없는 두터운 판문 두 짝을 달았으며 문 밖에 발을 드리우도록 했다. 종묘의 건축 상의 특징은 궁궐과는 달리 극도로 색채를 절제했다는 점이다. 목재도 단청을 칠하지 않고 주칠로만 마감했다. 이러한 단순한 구성의 신실이 19칸으로 길게 연속되면서 종묘 정전의 전체 건축 형태를 이루어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지붕 역시 19칸이 옆으로 길게 늘어서는데 지붕을 덮은 수키와, 암키와의 세로로 된 골이 옆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정전 지붕의 물매가 거의 40도로 가파른 것이 크게 눈에 띈다. 정전은 건평이 1270제곱미터로 동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된다. 특히 왕에게 제사지내는 최고의 격식과 장엄함을 건축 공간에서 구현한 조선시대의 걸작품으로 이 건물 하나만으로도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갈 수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종묘 정전은 매 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그 좌우의 협실 두 칸,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② 영녕전 - 영녕전(永寧殿, 보물 제821호)은 세종 1년(1419) 제2대 정종이 사망하자 그의 신위를 봉안하기 위해 태묘, 즉 정전의 서쪽에 별묘로 세운 것이다. 영녕전 신실 하나 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큰 차이가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의 규모도 정전보다 작다. 네모난 아랫부분에 원형의 주좌를 둔 주춧돌에 둥근 기둥과 간단한 초각을 한 익공을 짜고 기둥 한 칸은 개방하고 안에는 두 짝 판문을 달았다. 부연 없는 홑처마로 서까래를 꾸미는 등 정전과 거의 같으며 표면도 단청을 생략하고 간단한 주칠로 마무리했다. 영녕전도 제사를 드리는 일종의 신전 건축이므로 구조와 장식, 색채 등에서 간결함, 장중함, 상징성 등이 강조되었다.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옮겨와 모시던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가 모셔져 있으며 16실에는 의민 황태자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또한 영녕전에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중앙에 추존조(追尊祖) 네 왕이 모셔져 있다.
③ 공신당 - 공신당(功臣堂)은 하월대 남쪽 아래에 세워져 있는데 조선 왕조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창건 때는 3칸에 불과했으나 공신들이 늘어남에 따라 16칸으로 증축되었으며 개국공신 83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제사를 지내는 칠사당과 함께 매우 간소하게 되어 있다. 한국 건축에서 가장 긴 건물 중에 하나이지만 왕의 신실과 한 경내에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 형식을 낮추어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는다.
④ 악공청 - 제례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음악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연주하던 악공들이 대기하던 곳을 별도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악공청(樂工廳)으로 영녕전 서남쪽에 있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으로 극히 간소한 형식이며 기둥도 완전히 둥글게 다듬지 않고 어떤 것은 8모, 16모로 깎았다.
⑤ 공민왕 신당 - 종묘에는 특이하게 고려 공민왕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 동쪽에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 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支堂)'이다. 종묘는 철저하게 죽은 자들을 위해 만든 신전이다. 중국의 태묘는 신위를 모신 곳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 서로 다른 건물에 있어 제사 때마다 신위를 옮겨야 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제주의 공간으로 죽은 혼들을 이동시킨, 산 자 중심의 구성이다. 반면 종묘는 신위를 모신 사당이 곧 제사의 장소가 되며 후손인 제주는 길게 연속된 사당들을 지나면서 제사를 드리는, 철저하게 죽은 자 중심의 구성이다. 종묘는 불국사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석굴암의 조각처럼 사실적이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종묘는 단순하되 지루하지 않으며 장엄하되 위압스럽지 않다. 이것이 바로 종묘의 고전적 아름다움이라고 김봉렬은 적었다. 〈착시를 고려한 건축〉 종묘를 일컬어 흔히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한다. 종묘가 동양 건축의 근본 원리들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으며, 장엄하고 정제된 동양 건축의 정신과 종교적 건축이 가져야 할 보편적인 가치들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김봉렬은 적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파르테논은 길이가 69.50미터, 폭이 30.80미터로 조화와 균형이 잡힌 도리아 식이며 대리석으로 건축되어 있다. 파르테논이 서양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그들 건축의 뿌리를 파르테논 신전으로 간주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정교한 수학적 비례 체계와 우아한 기법을 갖고 있는 등 다른 건축물의 모범이 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파르테논이 건축적으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인간의 착시 현상을 고려해 건축했다는 것이다.
눈을 통한 외부 세계의 물체나 그 변화를 탐지하는 과정을 시지각(視知覺)이라고 한다. 지각 과정에는 언제나 대상물이 존재한다. 대상물이 없는데도 지각이 된다면 흔히 말하는 환각이 된다. 이와 달리 실제 지각되는 대상이 있지만 사람의 눈으로 느낄 때 실제의 대상과 오차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착시'이다. 환각과 달리 외부 세계에 자극이 존재하는 것, 객관적인 성질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착시의 조건이다. 얼마간의 주의를 기울이거나 지각이 잘못됐음을 알더라도 계속 잘못된 채로 지각된다는 뜻이다. 파르테논을 언뜻 보면 동일한 굵기의 기둥이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된 직사각형의 '반듯한'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지어진 건물은 이와 매우 다르다. 우선 가장자리 기둥은 가운데 있는 기둥보다 좁은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가장자리는 180센티미터, 가운데는 240센티미터 간격이다. 이와 같이 불균형하게 건설한 것은 만일 동일한 굵기로 만든 기둥을 동일한 간격으로 세웠다면 건물의 모양이 우리들의 눈에 직사각형이 아니라 위나 옆으로 퍼져 보이기 때문이다. 63빌딩 앞에서 꼭대기를 쳐다 볼 때 건물이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숭례문도 이와 같은 구도로 건설되었다. 대들보의 중앙 부분도 위로 볼록하게 휘어져 있으며 가장자리의 기둥은 안쪽으로 약간 휘어져 있다. 기둥은 위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이와 같은 배불림은 커다란 건물의 기둥이 보여주는 착시 현상을 교정하게 해주는데 종묘의 기둥도 바로 이런 원리로 건설된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바닥 부분의 지름은 약 180센티미터이지만 꼭대기 부분의 지름은 120센티미터밖에 안 된다.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건설된 수평선은 실제로는 중앙 부분이 처진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돌들을 맞추어 나가면서 중앙부를 약간 들어 올린 것이다. 건축가들이 일부러 기하학적 정확성을 다소 변형시킨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첫째는 인간의 둥근 눈에는 정확한 직선이 오히려 휘어져 보이며 두 번째는 기하학적 정확성이 다소 딱딱하고 메마른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착시현상을 이용하는 것이 인간의 눈에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여하튼 고대 그리스 화가나 건축가들이 착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이를 작품에 응용했다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놀라며 극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대 한국의 건축에 과학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쟁도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국의 종묘나 숭례문 등 전통 건축물도 이와 못지않은 기술력을 고려하여 건설했다는 것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토지와 곡식의 신을 위한 사직단〉 사직은 종묘와 같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나 종묘와 사직은 불가분한 관계가 있으므로 사직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한다.
국가가 구성되려면 영토와 백성 그리고 통치권의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현대 국가도 이들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함은 같으나 고대 국가가 현대 국가와 다른 점은 삶의 터전인 현세와 이승을 주재하는 주재자가 달리 있다고 상상한 것이다. 하늘에 주재자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에 고대에서 영고, 동맹, 제천과 같은 제천의식을 비롯하여 기우제 등이 존재했으며, 땅에도 주재자를 상정했기 때문에 사직단(社稷檀, 사(社)는 토지신을 의미하며 직(稷)은 곡물신을 뜻함)을 두어 제사를 지냈다. 사직은 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라가 있으므로 왕이 사직의 제사를 행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직은 바로 국가 그 자체와 같이 생각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예제에서도 사직은 종묘와 함께 가장 중요한 대사로 치러졌다. 사직이 종묘와 다른 점은 수도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중심지마다 사직을 두었다는 점이다. 각 지방의 사직은 수령이 왕을 대신해 제례를 지냈는데 부산의 ‘사직동’, ‘사직운동장’ 이름도 사직단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범용성을 감안할 때 엄밀한 의미에서 사직이 종묘보다 더 비중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사직에 제사를 지낸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선덕왕 대에 사직단을 세웠고 고구려는 고국양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국사를 세우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에 사직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여러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신라 문무왕 12년(672) 9월 당나라 황제에게 보낸 글 가운데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을 헐어 못을 만들고 신의 몸을 죽여서 찢는 한이 있더라도’ 라는 대목이 있다. 백제 시조 온조왕 38년(20)에 큰 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자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는 기록이 있고 고이왕 10년(243) 정월에 천지와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사직도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넘어왔는데 제5대 성종이 사직을 제도화하였고 이후 각종의 제의와 기우제, 기곡제 등을 여기서 거행했다. 그러나 사직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조선 건국부터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종묘와 사직을 중요시하여 현재 종로구 사직공원 안에 있는 사직단을 축조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종 때 개경 환도로 공사가 일시 중단되고 또 궁궐이나 종묘, 성곽 등의 대규모 공사로 인해 백성들의 징발이 여의치 않아 태종 7년(1407)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가운데 2좌의 사직단이 있는데 일반인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높은 돌로 한 단씩 담을 쌓고 정문을 세워 성지로서 위엄을 세웠다. 동쪽에 있는 사(社)는 사직이라는 말답게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서쪽에 있는 직(稷)은 곡물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종 16년에는 사직단 주변에 재실을 마련했는데 이는 사직에 재실을 두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관행과는 다른 일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종묘와 사직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지만 새로운 국가 체제에서는 종묘?사직의 제향에 왕이 직접 임해서 제사를 지내게 됨으로써 새로운 제도를 준수하기 위한 조처로 여겨진다. 세종 8년(1426)에는 사직단을 관리하는 관아로 사직서를 설립하였는데 『사직서의궤』에 사직서 관아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관아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종묘와 사직단은 그 의미부터 다르므로 형식도 다르다. ‘묘(廟)’란 집을 짓고 그 속에 신(神)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하나의 사당이다. 그러나 ‘단(檀)’이란 그 자리에서 직접 신과 통할 수 있는 제단의 의미이므로 집이나 위패의 형식을 갖추지 않는다. 서울의 사직단이나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 또는 중국의 천단(天檀) 등이 그 예이다. 김삼웅에 의할 경우 고려의 성종이 정의한 사직단은 다음과 같다. ‘사(社)는 토지의 신으로 땅이 넓어 다 공경할 수 없으므로 흙을 모아 사로 삼음은 그 공에 보답하고자 함이요, 직(稷)은 오곡의 장이나 곡식이 많아 널리 제사지낼 수 없으므로 직신을 세워 이를 제사하는 것이다. 『예』에 말하기를 왕이 군성을 위하여 사를 세우는 것을 대사라 하고, 스스로를 위하여 사를 세움은 왕사라 하며, 제후가 백성을 위하여 사를 세움은 국사라 하고, 스스로를 위하여 사를 세움은 후사라 하며, 대부 이하는 여러 사람이 모여 사를 세워 치사라고 하니, 국가를 가진 자는 사직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대부에 이르기까지 근본을 보이고 공에 보답함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사직단의 형태는 직사각형이다. 고대 중국에서 방형은 땅을 상징하고 원형은 하늘을 상징했다. 중국의 천단은 하늘을 제사지내므로 원형이다. 사직의 제사는 종묘와 함께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식이므로 제례 절차는 거의 종묘 제례와 유사했다. 다만 신위가 국사, 국직, 후토, 후직으로 한정되었으므로 제사 인원이 종묘보다 적었다. 사직단의 제사는 조선시대 최고의 국가의례인 대사(大祀)로 거행되었고 왕이 직접 올렸다. 국사와 국직의 신위에는 나라의 안위를 좌우하는 토지와 곡식의 신이 계신 것으로 간주하여 보호에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다. 따라서 국사와 국직의 신주를 건드리는 사람은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역적으로 간주하였다. 실제로 선조 18년에 주홍(朱洪)이라는 종이 국직(國稷) 신주를 훔쳤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주홍은 대역죄로 간주되어 참형을 당하고 그의 처자식들도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리자 사직단에서 드리던 제례도 종막을 고했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자마자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민족의 얼을 훼손하기 위해 사직단의 격을 낮추는 일이었다. 1924년 조선총독부가 사직단을 공원으로 만들었으며 1940년 3월 총독부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 제35호에 따라 정식으로 도시공원을 조성했다. 경희궁에 있던 황학정이 사직단 뒤로 옮겨져 활 쏘는 터가 되었고, 소나무로 울창하던 사직단 뒤편에는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이식되었다. 국권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직단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85년에야 비로소 사직단을 복원하기 위한 조사가 이루어져 단과 그 주변이 일부 복원되었지만 사직단 고유의 신성한 분위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현재 사직공원에는 사직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동상이 서 있으며 그 뒤에 단군 성전과 김동인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05/7/4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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