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인(天符印)과 한민족(韓民族)의 기원
천부인. 동경, 동검, 방울.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者) 환웅(桓雄)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니, 가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 360여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무리를 교화시켰다."
한민족(韓民族)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었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단군신화(檀君神話)〉의 전반부 내용이다. 이 부분은 보다 엄격히 말하자면 '환웅'에 관한 기록이므로〈환웅신화(桓雄神話)〉라 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중국의 《위서(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기이편(紀異篇)〉에 '환웅' 전거를 싣고 있는데, 저자 일연스님이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라고 말했듯이, '환웅'에 대한 내용이 현재의 시각에서 다소 신비스럽고 비상식적으로 보여진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가 '신화(神話)'라고 매도하지 않는 열린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
신화에 대한 논란은 차후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받아 왔다는 '천부인(天符印)' 세가지에 주목해 보자. 천부인은 분명 세상을 다스리는데 용이한 신물(神物)임에 틀림없는데, 우리는 이 세가지 보물이라 할 천부인의 존재에 대해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었다. 어쩌면 우리 '한민족의 기원과 미래'에 대한 비밀이 바로 이 천부인 세가지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신화니 역사니" 하는 논쟁에만 정열을 낭비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천부인'이 왜 중요한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나 건국이나 기원에 관련된 신화가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물증과 서로 연결되어 지면 그것은 이미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질 확률이 많다. 구체적인 물증이라 함은 물론 고고학적인 발굴과 여러 실증적인 기물발견 등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트로이전쟁'인데 '신화'가 '사실'로 변한 결정적인 계기가 고고학 발굴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단군신화도 천부인이라는 신화적 기물이 고고학적인 중요한 표지적 유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부인 세가지 기물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거울'·'칼'·'방울' 등이라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물론 천부인 기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검증된 자료는 없지만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주지역 등지에서 공통적으로 출토된 청동기시대 유물인 '청동검(銅劍)과 청동거울(銅鏡)' 및 '청동방울(銅鈴)' 등을 천부인에 대한 표지적 유물로 삼은 것일 뿐이다. 동검의 경우 한반도에서는 후기형인 '세형동검(細形銅劍)'이 출토되었고 만주지역에서는 전기형인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출토되었다는 점이 다르고, 청동방울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주로 세형동검과 함께 출토되었고 만주지역에서는 방울보다는 이른바 '타동기(打銅器:두드려 소리를 내는 동기)'가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 이는 청동기문화의 시기적인 발전단계와 지역성으로 인한 차이일 뿐 세가지 조합이 의미있는 유물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천부인과 관련된 표지적인 유물이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학계는 단군신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내용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전히 신화로만 남겨 놓은 채 유물출토에 대해 별개의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증사학 답게 천부인에 대한 구체적인 전거를 기록한 사서가 없다는 것인데,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을 참고하면 그러한 전거가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눈여겨 봐야 한다. 비록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정식 사료(史料)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은 단순히 위서(僞書)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완벽한 짜맞추기로 보여 도저히 위서라고 판정할 수가 없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편을 보자.
-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고 높게 斐西甲의 경내에 우뚝 서 있다.
水를 뒤로 업고 山을 안고 있는데 크고 둥그렇게 돌아가는 곳(四焉之處)이
있는데 大日王이 祭天하는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桓雄天王'이 이 곳까지
순수하시어 사냥하시고 제사를 지낸 곳'이라 한다. 風伯은 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雨師는 북을 치면서 환무하고 雲師는 佰劒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 의식은 장중하고 위엄있었다. -
이렇도록 천부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내 준 기록은 없다. 설사 위서라고 치더라도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 이전에 서술한 고려시대의 저자가 어떻게 천부인의 표지적인 유물을 상상해내었단 말인가? 또는 이런 책들을 묶어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펴냈다는 구한말의 엮자는 어떻게 발굴결과를 참고하였단 말인가? 이는 위작이라기 보다는 분명 어떤 기록을 참고하여 서술한 것으로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내용은 참고할 만하다. 천부인으로 '거울'·'북'·'백검' 세가지를 언급하였다. '거울'은 고대에는 용모를 비춰 보는 생활기물이 아니라 '신명(神命)'을 전달하는 제사의식 등에서 상징기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으며, '북'은 소리를 내는 악기로써 잡귀를 쫓고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역시 제사의식 등에서 적극 활용한 기물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으며, '백검'이란 '백명 사람들의 우두머리 검'이라는 뜻처럼 집단을 대표하는 수장(首長)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로 수긍할 수 있다. 완벽한 천부인의 세 가지 기물로써 조합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문제를 삼는다면, 왜 방울이 아니라 북인가 하는 점인데 이는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가 간다. 고조선시대는 청동기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국가 단계이므로 제사의식용 악기로서 타동기나 청동제 방울이 등장하고 있지만, 환웅시대는 청동기시대 이전단계인 최소한 구석기시대 말기나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로 봐야하므로 아직 청동제 악기가 나타날 수 없었다. 천연재료를 사용한 '북'과 같은 원시적인 악기를 사용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백검'도 마찬가지이다. 청동제 검(劍)이라기 보다는 돌을 갈아 만든 '마제석검(색상 때문에 白劍이라고도 함)'을 지칭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기물은 '거울(鏡)'이다. 고대의 '거울(鏡)'이라 함은 글자의 의미가 말해주듯이 청동(金)으로 만들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이는 청동기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글자이기 때문이고 원래의 의미는 달랐다. '거울(경:鏡)'이란 의미에 대해 중국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鏡景也 從金聲'이라 되어 있다. 이는 "거울(鏡)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을 뜻하는데, 청동제품의 경우 후대에 가서는 표면반사광을 통한 사물을 비추기 위한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석명(釋明)의 주(註)에서처럼 '鏡景也 言有光景也'라 하여 '光景'인 거울(鏡)에는 '선명히 알 수 있는 어떤 해답이 들어 있다'는 의미에서 보듯이 거울은 '신(神)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종의 '신탁(神託)의 매개체'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대(古代)의 거울(鏡)이란 '옛글(古文)에서 신령스런 기물인 신기(神器)를 상징하고 인간의 질문에 대한 신의 뜻(神意)을 전달받는 도구'를 뜻하는 것으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에서는 군장이나 제사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의기(儀器:제사용구)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청동으로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돌판을 갈아 만든 재질의 거울이 존재하였었고 이런 유물이 출토된 사례도 있다.
천부인은 확실히 존재하였고 이는 '단군신화'의 내용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천부인은 왜 환웅에게 전달되었을까?' 하는 의문아닌 의문이 하나 생긴다. 바로 이 의문이 우리가 풀어야 할 미스테리이자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비밀이 담겨 있는 과제이다. 이제 그 기나긴 여정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천부인은 정치적 군장의 상징으로서의 '검',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의기로서의 '북', 신명을 전수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신표로서의 '거울' 등으로 구성되어졌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이 거울이라 하였는데, 특히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거울의 양식을 살펴보면 한민족 기원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초를 엿볼 수 있다.
비교적 청동기시대 후반기에 속하는 세형동검(細形銅劍)과 함께 동반하는 청동으로 만든 동경(銅鏡)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이른바 '다뉴세문경(多뉴細文鏡)'이라 하는 섬세한 빗살무늬와 같은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가 두 개 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중국지역에서 만들어진 동물양식 문양이나 구름양식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가 한 개 달린 '단뉴화수문경(單뉴花獸文鏡)'과는 분명히 다른 형태인데 고조선과 그 후대의 특징적인 양식으로 문화적으로도 중국과는 다른 독립된 양상을 보여 준다.
다뉴세문경은 마치 빗살무늬 같기도 하고 혹은 태양광을 상징하는 듯한 기하학적인 문양이 거울의 뒷면인 배면(背面)에 새겨져 있고 손잡이같은 뉴(뉴)가 중앙부분에서 약간 위쪽으로 달려 있는데, 뉴 안쪽 구멍에 끈을 매단 흔적이 있어 의례 때 패식으로 목에 걸었든지 어딘가에 걸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시 중국지역에서 사용된 뉴가 중앙에 한 개가 있어 끈을 엮어 손가락에 끼워 사용한 형태와는 다르다. 이 말은 중국지역에서는 이미 동경이 제기로 사용하기 보다는 지배계층에서 신분과시의 생활용구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통상 고고학에서는 출토된 유물의 형식분류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하는데 유물의 계통과 그 유물을 사용한 집단의 소속을 밝히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뉴세문경의 삼각무늬나 빗살무늬 같은 기하학적 무늬는 이전시기의 이른바 '번개무늬(電文)' 거울인 '다뉴조문경(粗文鏡)' 혹은 '다뉴전문경(多뉴電文鏡)'이라 불리는 문양의 변형되고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되었다고 본다. 번개무늬거울은 세형동검과 동반하여 출토되지 않고 주로 비파형동검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역사상의 고조선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고조선식동검(古朝鮮式銅劍)'이라 불리기도 한다. 즉, 번개무늬거울은 고조선시대의 거울인 셈이다. 이러한 비파형동검과 다뉴전문경의 조합은 고대에서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기 전인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모습을 알려 주는데 또한 소속집단의 정치적인 영향권을 나타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세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이 기원전 8~7세기부터 기원전 5~4세기 철검이 등장하기 전까지 주로 한반도전역과 간도일부에만 나타나고 있고, 비파형동검과 다뉴전문경은 기원전 12~11세기부터 기원전 8~7세기까지 주로 만주지역(요녕성, 길림성, 송화강중상류)을 중심으로 하고 한반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권역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고조선이 청동기를 사용한 청동기시대를 거쳤다고 본다면, 역사상에서 그 이전단계에 해당하는 환웅시대는 청동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신석기시대였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돌을 연마하여 사용하였는데 돌칼(마제석검)이나 돌거울(상징물)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다뉴전문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도록 하자. 그림에서 보듯이 지역별로 출토된 다뉴전문경(다뉴조문경이라고도 한다)은 거울뒷면의 문양이 번개무늬처럼 새겨져 있는데 공통계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늬의 정교함이나 거울의 형태가 조금 다르다. 이는 세 거울의 지역적인 특성이 스며들었거나 시기적으로 다르게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림]에서 보면 요하 동쪽에 위치한 요녕성 심양 정가와자라는 곳에서 출토된 동경이 두꺼우면서 손잡이격인 뉴도 약간 삐뚤어져 있으며 특히 번개무늬가 조잡하게 새겨져 있어 세 동경 중에 가장 오래된 초기제품처럼 보인다. 동경이란 존재의 가치가 대단히 중요한 신물(神物)로 여겨진 시대인 만큼 같은 시대에 어떤 것은 훌륭하게 어떤 것은 조잡하게 만들었을 리는 없으므로 세 동경의 차이는 크기와 거울두께별로 보더라도 시기적으로 구분되어 지는 것이 옳다.
심양 출토의 동경 다음으로는 역시 요하 동쪽에 위치한 본계 양가촌 출토의 동경이 좀 더 발전된 모습이고 대능하 동쪽에 위치한 조양 십이대영자에서 출토된 동경은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가장 후대에 만들어진 동경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심양에서 출토된 동경이 가장 오래된 고식(古式)으로 보이는데 요동에서 발원한 비파형동검 세력인 고조선이 요하를 건너 요서 방면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는 정황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비파형동검과 동반하여 출토된 기타 유물들의 정황에서도 알 수 있는데, 심양 정가와자의 경우는 조양 십이대영자의 경우처럼 비교적 후대의 유적이지만 심양지역의 다른 유적들에서 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들이 발굴되어 이 지역이 다른 지역들보다 더 오래되었음을 보여 준다. 심양의 경우는 고고학에서 '전세경(傳世鏡)'이라 칭하는데 이전부터 전래되어 왔다는 의미이다. 즉, 심양지역이 초기 발원지라면 처음 만든 거울이 후대로 계속 물려져 전해졌다는 뜻이다.
심양의 동경은 과연 어디서 기원하였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문양의 상징성과 계통을 추적하여 밝혀야 하는데 타 유물과의 관계를 함께 연구하여야 함이 물론이겠지만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동경을 중심으로만 서술하도록 하겠다. 동경(銅鏡)에 채용된 동일한 모티브로서의 기하문(幾何文)이 변화하는 양식을 살펴보면 이러한 변화의 속성을 지닌 집단의 성격에 대해서도 추론해 볼 수 있다. 우선, 요동지역에서 발원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문화의 주인공들이 번개무늬 동경을 창출하였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이러한 문양의 구성을 가져오게 한 모티브는 어디서부터 인가?
'번개무늬거울', '다뉴전문경'이라 이름 붙인 이후 학계에서는 늘 그렇게 불러왔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번개무늬를 연상한 것은 동경의 성격이 제사를 위한 의기(儀器)라는 데 착안하여 하늘로부터의 전언(傳言)을 번개에 빗대어 생각한 것으로 일견 타당성이 있는 듯 보인다. 조양 십이대영자의 문양을 보면 예술적인 감각이 가미되어 있지만 고식 문양으로 갈수록 지그재그모양이 단순화되고 있다. [그림]에서 평양출토의 동경과 충남지역 출토의 동경을 보면 그러한 모습이 일반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평양이나 충남처럼 한반도에서 출토된 번개무늬 동경을 문양이 조잡하고 크기도 작다고 하여 '모방제품(模倣製品)'이라고 하는데 동경을 제작할 수준의 문화단계에서 조잡한 문양을 모방하여 새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유물에는 정교한 문양이 들어 있지만 유독 동경에만 조잡하게 보이는 문양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문양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잡하게 보이더라도 그대로 새기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여지가 없다. 결국 번개무늬 문양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지그재그무늬로 단순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로 번개무늬의 기원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데, 이러한 지그재그무늬가 동경(銅鏡)뿐만 아니라 다른 유물들에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번개무늬의 기하문은 심양이나 평양 및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문양에서 보면 일종의 '뱀무늬(蛇文)'를 모티브로 하여 그 원형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뱀을 형상화한 무늬'라고 보는 이유는 일단 무늬가 수직으로 지그재그형태를 보인다는 점과 지그재그가 일정두께를 지니면서 두 줄로 그어졌고 무늬들 사이에는 잔잔한 줄무늬로 채웠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동일간격으로 그어진 빗살무늬와는 차별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뱀무늬(蛇文)는 발해만북안 지역의 신석기시대(B.C.4000~B.C.2500년대) 홍산문화(紅山文化) 말기에 속하는 발이 3개 달린 삼족토기(三足土器)에서부터 새겨져 있다. 토기에 뱀무늬(蛇文)가 수직으로 새겨진 양상은 감숙성(甘肅省) 파촉(巴蜀)문화지역과 만리장성 이북에서만 보이고 있고 중국내륙에는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문화양식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모두가 중국의 하(夏)·은(殷) 시기인 기원전 2천년전의 신석기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남부시베리아 바이칼지역까지 그 분포가 확인된다.
신석기시대 말기의 바이칼지역은 이미 중국 발해만북안의 홍산문화人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중국내륙의 삼족토기가 바이칼지역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과 바이칼지역의 연옥(軟玉)가공술이 구석기시대 말기에 전해진 흔적이라든가 하는 등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바이칼지역의 구석기시대 말기 기원전 1만년이전에 해당하는 이르쿠츠크시 서쪽 말타(Malta)유적에서 편평하게 다듬은 판석(板石)이 발굴되었는데, 평판석의 가운데는 섬유질의 줄에 의해 어딘가 건 듯한 흔적이 남아 있는 구멍이 뚫려 있고 그 한쪽 면에는 머리가 달린 뱀 형태의 문양이 지그재그로 흐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점으로 구성된 회오리같은 모양의 태양이나 우주의 달 및 기타 별같은 회문(廻文)이 새겨진 주술적인 상징의 유물이다. 특히 말타(Malta) 유적은 홍산문화와 같이 지모신(地母神) 숭배사상이나 여신상(女神像) 등이 출토되어 상호간에 사상적 전통도 유사한 곳이다. 말타에서 출토된 평판석은 분명 제사의식에 사용한 의기(儀器)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고조선시대의 동경(銅鏡)에까지 연결된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증거가 불충분하게 보이나, 바이칼지역의 신석기문화와 발해만지역의 신석기문화와의 연계성을 고려해보면 충분히 설명되어질 수 있다.
시베리아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전부터 시작되는데, 많은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러시아內 아시아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대다수가 예니세이(Yenisey)강 중류 특히 일찍부터 철을 채취한 야철술이 발달한 미누신스크분지(Minusinsk Basin)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이후 아파나시에보(Afanasyev), 안드로노보(Andronovo), 까라수끄(Karasuk) 등으로 이어지는 청동기문화에 계승되는데 청동기유적들이 신석기유적들보다 수자가 월등히 많다. 이 시기에는 신석기시대의 특징이라 할 토기가 만들어졌고 원시적인 농경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자연동물의 가축화가 본격적으로 행하여졌다. 토기의 모양은 처음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토기(平底土器)였으나 모닥불에 얹어 사용하기 편하도록 밑이 뾰족한 원저토기(圓底土器) 형태로 변하게 되는데, 특히 바이칼지역에는 원저토기 즉 '둥근밑토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졌다.
토기는 시베리아서부지역 즉 유럽 쪽에서 다양한 채색문양을 채용한 채문토기(彩文土器)가 일반화되었으나 바이칼지역만은 기하문의 토기가 유행하였다. 기하문토기의 시발은 세로로 점을 찍다시피 한 문양에서 점차 빗살처럼 빗어 내리는 형태로 변하다가, 아무르강 지역으로 이동한 신석기문화권에서는 어로(漁撈)생활의 지역적인 특성을 살려 그물망무늬가 채용되고 발해만지역에는 ‘之’자나 '人'자 문양의 기하문으로 변하게 된다. 아무르지역에서 북만주일대 송화강과 눈강지역으로 남하하면서 기하무늬 문양술은 최대의 전성기를 맞아 다양한 기하문이 새겨지고, 복합적으로 발전되어 이후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기하문토기는 처음 밑이 둥근 형태로 바이칼지역과 만주를 거쳐 한반도서북부 한반도남부 및 일본에 영향을 주고 아무르강 유역의 그물무늬는 북만주를 통해 한반도 동북부에 전파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분명 남부시베리아 바이칼지역은 발해만지역과 한반도북부지역과 문화적 친연관계가 깊다. 발해만지역의 홍산문화가 시기적으로나 문화적 특수성으로나 바이칼지역의 신석기문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일단의 무리들이 바이칼에서 남하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는데, 홍산문화의 석묘계 장묘문화나 다양한 옥기(玉器) 제작 등을 감안하면 바이칼에서 집단의 이주가 있었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높다. 즉, 역사에서 말하는 환웅천왕의 삼위태백으로의 하강을 그 전거(典據)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뉴기하문동경(多뉴幾何文銅鏡)에 새겨진 번개무늬가 뱀무늬이고 그 기원이 바이칼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바이칼지역의 후기구석기와 신석기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몽골리안 계통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지역의 몽골리안들은 신석기시대를 축으로 북동부 아무르강지역과 동북아시아 내몽골·만주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이들 몽골리안들의 이동은 사냥을 중심으로 한 수렵위주의 경제형태에서 기후의 변화와 함께 사냥대상이 줄어드는데 따른 어로중심과 원시농경을 시작하면서 적이한 기후와 강가 및 토양을 찾아 남하하게 되는 게 이유이다. 일부는 아무르강을 따라 북만주지역으로 들어오고 일부는 몽고초원을 경유하여 중국동북부 발해지역과 중국서북부 등으로 남하하게 되는 것이다.
전세계 인류 중에서 한민족이 차지하는 위치와 민족의 계통분류 및 그들의 이동역사에 따르면 한민족의 형성시기는 훨씬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체적 형질의 특징으로 볼 때, 세계의 3대인종인 황색 몽골인종(Mongloid), 백색 코카서스인종(Coca-soid), 흑색 니그로인종(Negroid) 中에서 한민족은 몽골 인종에 속한다.
한민족은 피부 색깔뿐만 아니라 곧은 머리카락과 짧은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풀이 겹쳐져 있으며, 둔부에 몽골반점이 있는 등 몽골인종의 공통된 신체적 형질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몽골인종은 그들의 집단이동과 지역분포에 따라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체적 형질과 생활양식에 차이가 생겨서 古시베리아족(Paleo-Siberians)과 新시베리아족(Neo-Siberians)으로 구분되는데, 그 중에서 한민족은 신시베리아족에 속한다. 또한, 언어의 특성에 따른 알타이어족(Altaic language family)과 우랄어족(Uralic language family) 간의 구분에서 한민족의 언어는 터키족·몽골족·퉁구스족의 언어와 더불어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민족들은 제4빙하기의 후기구석기시대까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Yenisei) 강과 알타이 산 기슭에 살고 있었다. 그 후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으면서 후기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 때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했다.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북쪽까지, 몽골족은 지금의 外몽골을 거쳐 중국의 장성 및 만주북쪽까지, 퉁구스족은 흑룡강유역까지, 그리고 한민족은 중국동북부인 만주서남부의 요녕(遼寧)지방을 거쳐 한반도남부까지 이동하여 하나의 단일민족으로서 초기농경시대에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한민족의 형성 및 이동 과정에서 발전된 문화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후기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역사상 고대의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숙신(肅愼)·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東夷) 등의 여러 민족들은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우리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요녕지방의 한민족은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목축을 하는 한편 남부의 평야지대에서 농경을 주로 하면서 농경·목축 혼합문화를 발전시켰고,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한민족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목축을 버리고 농경에만 집중하면서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오늘의 중국 요녕지방과 한반도에서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킨 한민족이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부족연맹체의 족장사회를 통합하여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것이 바로 고조선(古朝鮮)이다. 그 이후 국가가 나누어져서 몇 개의 새로운 독립국가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 역사적 과정은 매우 복잡했지만 민족은 하나의 단일민족으로서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부인(天符印) 세 가지 中 가장 상징성이 높은 다뉴기하문동경의 무늬는 '뱀무늬'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동경에 새겨진 뱀무늬들 사이사이에 가는 줄무늬가 그어져 있음이 주목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인 뱀무늬와의 연관성을 검토하여 밝혀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유포된 과거에 대한 신화들 중에는 대홍수와 관련된 설화가 보편화되어 있다. 대홍수 설화는 기독교의 성서에서부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원주민, 태평양지역 섬들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어 고대문명 이전의 超고대문명에 대한 흔적으로 연구 중에 있는데 대홍수설화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뱀'과 '새'와 '나무' 등이 있다. 현대 인류문명이 태동하기 이전에 존재했다가 대이변의 희생으로 사라진 초고대문명에 대한 가설은 이제 가설의 단계를 넘어 세계각지에 산재한 유적발굴로 인해 보다 가시화되고 있어 조만간 그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진 거석(巨石)문화를 중심으로 한 초고대문명이 대략 1만2천년전 대홍수에 의해 멸망하였다는 논란은 항공산업의 발전과 함께 바다속에 잠겨 있었던 건축구조물들의 발견으로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또한, 각 민족들의 기억속에 남아 전해진 대홍수설화와 늘 함께 등장하는 '뱀'과 '새'에 대한 이야기들도 이제는 단순한 설화차원이 아닌 구체적인 상징적 의미로 연구되고 있다. 바로 이 '뱀'에 대한 구체적 상징성에서 단군신화(환웅신화)에 등장한 천부인 중 다뉴기하문동경에서의 '뱀무늬'와 공통적인 모티브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에서의 '뱀'이 지니고 있는 모티브는 '파괴', '조상', '생명력', '창조', '재탄생' 등으로 나타난다. 대홍수와 관련된 '뱀'의 1차적인 상징성은 바로 '물'이고, 2차적인 상징성은 '홍수의 신(神)' 혹은 '물의 신(神)'이다. 그런데, 고대의 유물에 나타난 '뱀'의 도안은 때때로 뱀무늬 주위로 가는 줄무늬가 함께 하는데 이는 '물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즉 다뉴기하문동경에서의 기하문 구성은 '뱀무늬'와 '물결무늬'의 조합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다뉴기하문동경의 상징성은 '대홍수설화'에 대한 구체화된 흔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고고인류학자나 점성술가, 기타 예언가들 사이에는 '지구격변설'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지구표면을 완전 변모시키고, 그 위에 터전을 두고 살던 생명체를 죽음으로 내몰면서 기후대를 바꾸는 등의 지각변동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반복된다는 가설이다. '점진적 대륙변동설'이 과거의 주류이었으나 최근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가 등장하면서 '궤멸적 격변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주기적 대이변에 대한 근거로는 지축변동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지받고 있는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지축의 변동이 만년빙설을 증대시켰다는 것으로 현대문명이 또 다시 지축변동의 시기에 가까이 접근해 있다고 한다.
세계 도처에 전해지는 여러 전설이나 신화 중에 그 기본적인 내용이 상당히 유사하여 공통된 기원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볼 것들이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홍수와 관련된 전설이다. 그것은 인류문명의 사악함을 창조주를 포함한 신들이 파괴시킨다는 내용으로서, 모든 전설은 그 파괴의 징벌 속에서도 반드시 뒤를 이을 일부후손들에게 미리 경고하여 대재앙을 피하도록 사전에 알려 주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종족에 남아있는 태고의 기억'이라 부르는데 우리 한민족에게는 그러한 '태고의 기억'이 다뉴기하문동경에 남겨져 전해진 것이다. 이것이 기원後 고대국가에까지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것이 놀랍다. 그것도 천부인(天符印)이라는 특징적인 신화적 상징유물의 하나로 전해져 온 것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교훈적인 메세지를 남기기 위한 무의식적 행위의 하나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천부인과 같은 상징기물을 통해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인류문명의 오만함으로 인한 재앙초래에 대한 경고와 교훈의 함축적인 의미이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과 다양한 경험축적을 거치면서 그러한 경고와 교훈을 서서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또 다시 반복될 지도 모르는 대재앙에로의 연민 어린 지연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뱀과 대홍수에 대한 유물이 존재하지만 천부인과 같은 정치군장이나 제사장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전래되면서 후세에 교훈으로 남겨진 사례는 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천부인을 세상을 다스리는 치세의 도구로 남긴다는 것은 그만큼 이전문명과의 연계성을 잃기 싫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불과 일이 천년 전까지만 해도 치세의 상징으로 존재했던 천부인과 그 속에 담긴 대홍수의 교훈은 우리 한민족에게 어떤 사명을 남겨 주었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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