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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에서 내려다 본 풍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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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검안산 아래 자리잡은 동구릉은 천하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근자에 와서 구릉산으로도 불리나, 건원릉지에 나온 지명은 검안산이 정확하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은 천작지구(天作地區)가 있는가 필시 조산(造山)일 것'이라고 찬탄했을 정도로 뛰어난 명당자리다. 동구릉 안내도를 보면 9개 왕릉이 들어선 검안산 모롱이마다 실한 열매가 조롱조롱 맺혀 있는 모습이다. 풍수에서 명당이란 산세에서 열매가 맺는 자리에 자리하게 된다하니 동구릉도 그런 것인가 싶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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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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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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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구릉의 최고봉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태조 이성계(1335∼1408)의 건원릉이다. 9개의 왕릉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1392년 7월 17일 조선 500년 왕조를 개국한 이성계의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 특이하게 다른 점이 있다. 능상 위에 잔디 대신 무수히 솟은 함흥 갈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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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0년 함흥 갈대의 새싹이 돋아나는 건원릉 능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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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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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내려온 이 갈대를 보려면 가을에 필히 동구릉을 다시 찾아야 한다. 왕조를 개국한 왕답게 600여 년을 태조의 능 위에 살아온 갈대도 기이하지만 전해오는 전설도 기이하다. 함흥의 갈대 외엔 다른 지역의 갈대는 이곳에선 결코 살지 못하다는. 건원릉은 일년에 딱 한 번 벌초를 해야 한다. 방원이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비의 소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태조는 정치에 완전히 뜻을 잃고 한씨의 소생인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무학대사의 청으로 다시 한양에 돌아오지만 태종에 대한 증오는 컸다. 신덕왕후 강씨(?~1396)는 태조가 총애하던 여인이었고 강비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으니 자신의 아들들이 이복형인 방원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보지 못해 운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6백년 전 시대로 되돌아 가보면
고려의 개혁파였던 신진사대부들과 혁명의 왕국을 일으킨 풍운아였던 이성계도 결국 여인을 잘못 다스려서 이런 비극을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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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초기의 혼유석 북석은 4개가 아닌 5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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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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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은 겉으로는 태조가 총애한 여인의 소생인 11살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실수를 저질러서 일어난 비극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림으로 개혁의 왕국을 꿈꿨던 사림파 정도전과 남온, 방원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싸움이었다.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남온은 유학의 이상주의 국가를 꿈꾸던 개혁주의자였고 그들이 방원의 편에 서지 않던 이유는 방원을 왕으로 앉히면 유교를 바탕으로 세운 개혁 왕국을 이룰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다. 방원이 누구인가?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문무를 겸했고 막강한 카리스마를 갖춘, 왕자 중 인중지룡이었다. 정도전과 남온의 계산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신권(臣權)이 주도권을 잡는 국가가 목표였는데 방원에겐 도저히 씨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을 것으로 봤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그래서 이성계가 총애하는 강비에게 붙었고 강비 소생의 어린애 방석을 세자로 앉혀 자신들의 꿈을 이루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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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 정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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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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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과 신권이 권력을 나누는 이상주의 국가가 이들의 목표였다. 실상 그들의 목표대로 이뤄졌다면 우리 나라의 정치는 몇 단계 시대를 뛰어넘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들 사림이 없어졌어야 할 조선 후기에 이런 정치환경이 이뤄졌고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 된 건 유감이지만 이상과 현실은 항상 괴리감이 있는 법. 조선시대 내내 장식했던 사림과 훈구의 대립은 조선초기부터 이렇게 피가 튀었다. 방원이 승리함으로 조선초기는 훈구파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사실 쿠데타라 평하는 조선의 시조 이성계는 일반적인 주입식 역사공부를 배운 현대의 시각에서 벗어나 냉정한 눈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눈으로 보면 이성계는 진보 개혁사상으로 무장된 혁명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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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을 열었던 태조 이성계도 원했던 강비와 잠즐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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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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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원파였던 최영 장군에 대해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고 무덤에 풀이 안 난다는 둥의 전설로 충신이라고 한 미화도 이성계의 현명한 현실적응에 물타기 역할을 한 것이라 본다. 솔직히 다시 보라. 고려를 망친 원나라에 대한 친원은 애국이고 충이며 친명은 불충이란 논리가 이해 가는가? 이성계가 친명을 택한 것은 원나라에게 지배당했던 약소국이 시들어 가는 원 대신 신진 강대국인 명나라를 택한 솔직한 계산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개혁주의자 풍운아 이성계는 집안을 잘못 다스려서 골육상쟁의 비극을 불러일으켰고 죽을 무렵에 풍운아답지 않게 인생의 허망함을 느꼈는지 불교에 귀의했고 자신을 고향에 묻어달라고 한다. 방원은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이었지만 절대로 조선개국의 왕을 함흥에 묻어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공수해온 것이 함흥의 갈대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조라는 불신 때문에 정통성에 위협받고 있었다. 고려의 왕들이 전부 개풍에 묻혀 있는데, 태조의 운구를 함흥으로 보낸다는 것은 조선의 정통성을 흔들 위험이 있었고 자신이 일으킨 골육상쟁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원래 태조의 수릉(살아서 미리 잡아놓은 능)은 강비가 묻힌 정릉이었다. 당시 도성 안에 있었고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태조가 마련한 정릉은 방원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태종이 정릉 앞 100보(160m)까지 집을 지을 허가를 내주자 권문 세도가들은 신이 나서 너도나도 수백 년 수령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태조가 원했던 정릉의 성지는 무너지고 만다. 사랑했던 여인과 나란히 잠들려고 계획했던 태상왕 태조는 이 꼴을 보고 늙은 눈에 눈물을 줄줄 흘린다. 물론 태종은 태조가 죽자마자 정릉을 현재 자리로 이장시켜버리고 봉분을 깎았으며 묘로 강등해서 강비를 후궁으로 격하시켜버리고 만다. 정릉에 있던 병풍석의 석물은 다리를 고치는데 쓰였고 목재는 중국사신을 맞는 태평관을 짓는데 이용했다. 정릉이 다시 종묘에 왕비로 올라가기까지 300여년의 세월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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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에 올라가려면 숨 크게 쉬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간다는 각오로 올라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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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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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을 두고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미리 잡은 명당이며 태조가 이곳을 얻고 기뻐서 근심을 잊었다해서 망우리(忘憂里)라는 지명이 유래됐다는 그럴싸한 야사가 전해오고 있으나 이것은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전설에 불과하다.
이성계가 자신의 수릉으로 잡았던 것은 정릉이고 현재의 동구릉은 태종 방원이 잡은 자리다. 당시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길지를 물색하던 중 김인귀가 이곳의 길지를 추천해 영의정부사 하륜 등에 의해 정해진 곳이 지금의 동구릉이다.
천재 건축가 박자청
이성계의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의 현릉(玄陵)을 본 따서 박자청이 주도해 만든 능이다. 조선초기의 능인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은 조선왕릉의 기본제도를 마련한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의 작품이다. 북한 개풍에 있는 태조의 원비 한씨의 제릉도 박자청이 지휘한 건축이고, 북한 개풍군 정종의 후릉도 석물이 태종의 헌릉과 똑같은 것으로 보아 박자청의 작품으로 보인다. 뛰어난 궁중건축가였던 박자청은 무신출신이었으나 공조판서로 세종대까지 조선초기의 중요 건축에 빠지지 않던 인물이다. 당시의 건축기술로는 난공사였던 연못 위에 건물을 짓는 경회루를 완성한 것도 박자청이고 창덕궁의 인정전도 박자청이 총 지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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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초기 천재 건축가 박자청의 건축 습관은 건원릉과 후릉, 헌릉의 석물을 보면 동일한 잣대가 드러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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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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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의 사부가 김사행이고 김사행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왕릉을 호화판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원성을 들은 건축가이다. 김사행은 강비의 정릉 공사를 맡았지만 왕자의 난에 연루돼 사사 당한다. 잠시 생각해보지만 역사란 아이러니하다. 호화판 건축으로 백성 등골 뺀 건축들은 거의가 중요 문화재로 남아있다. 우리 나라뿐만 아니다. 멀리는 이집트 피라미드가 그렇고 인도의 타지마할이 그렇고 진시황의 무덤도 그렇다. 조상들이 피땀 바친 건축물로 후손이 덕본다고 생각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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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건원릉에만 나타나는 네모난 돌 정중석은 불교 양식으로 절을 하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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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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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자연히 고려와 조선을 잇는 천재 건축가 박자청에 의해 조성된 태조의 왕릉은 고려의 양식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국교가 불교이니 불교의 흔적이 초기의 조선왕릉에 남아 있다. 장명등만 해도 사실 불교의 석탑에서 나온 석물이다. 나중에 이 장명등에 대한 해석을 왕릉은 사후의 대궐로 보아 등불을 밝히는 역할이라 억지를 부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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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신도비가 있는 비각. 신도비는 조선 왕릉 초기 양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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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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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에 남아 있는 신도비는 문종 때부터 왕은 국사에 기록되니 신도비를 세울 필요 없다고 해서 이후 사라진다. 문종 이후의 조선왕릉에 신도비는 볼 수 없다. 아들과 원수처럼 극적인 갈등을 보였던 태조 이성계. 어쩐지 아들 방원보다는 이성계가 나약하고 감성적인 인물로 느껴진다. 이성계에 대한 평가는 개개인에게 달렸지만 냉혹한 철의 남자인 방원과 달리 버들잎 따서 물바가지에 띄워준 강비에게 반한 이성계에게 연민을 느낀다. 인간적인 입장에서야 이성계나 이방원이나 용서가 안 되지만 용은 오직 한 사람이지 둘이 나눌 수 없는 것. 가끔씩 이성계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이유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잉태한 왕조라는 감상적인 이유 때문이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세종대왕이라서, 그리고 우리를 문맹의 구덩이에서 구해준 왕이기에, 또한 수백 년 후 인터넷 시대를 내다보고 자음모음으로 구성된 과학적인 이진법 언어를 세종대왕이 반포하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가 아이티 강국이 되지 못했을 거라는 놀라운 혜안이기에. /한성희 기자 - ⓒ 2005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