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아차산의 고구려 유적은 살아있었다.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8. 14:31

5세기 전후,서울의 고구려 유적. 1500년만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고구려의 흔적들.서울 아차산 자락 홍련봉 제1보루 발굴이 1백일간 진행돼 중간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한강 남쪽으로는 백제의 몽촌토성 풍납토성이 자리잡은 천혜의 고구려 최남단 전초군사기지였다. 현재 남한에는 아차산지역과 임진강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따라서 고대고구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도 흔치않은 현실이다. 부족하나마 현장 모습과 발굴 토기등을 생생하게 공개합니다.(고려대 매장문화재연구소  최종택교수님 발굴) 

아차산 유적중 유일하게 가장 많은 기와 파편이 나왔습니다.아마 고구려군 지휘소 자리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위사진 세장은 흔적없이 폐기해버린 구의동 현대아파트 자리에 있던 구의보루성 당시(70년대)사진과 모형도 입니다

홍련봉 제1보루성/ 연화문 기와가 발굴돼 현장 학자들을 흥분시켰습니다

 홍련봉 제1보루성/ 연화문 기와2

홍련봉 제1보루성/ 연화문 기와3 

홍련봉 제1보루성/ 각기 다른 '부'자 가 선명한 명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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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봉 제1보루성/ 군지휘소임을 암시하는 막새기와, 고구려 시대에는 기와가 지배계층에서만 사용되었다함.

홍련봉 제1보루성/발굴작업중인 할아버지옆에 동네아이들이 눈을 동그라니 뜨고 지켜보고있다.어른 보다 훌륭한 아이들 

홍련봉 제1보루성/ 발굴된 각종 도기 기와 파편들.

홍련봉 제1보루성/ 화살촉등 각종 철제류 발굴품들, 1500년 이란 세월을 견뎌내고 했빛을 보게됐다.

가슴아픈 강돌- 현장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갓 제대한 예비역학생은 이 강돌이 가장 가슴아프다고 했습니다.

그 옛날 장비도 없고 배고픈 장졸 사병들이 멀리 한강까지 내려가 수많은 다지기용 강돌을 운반해오기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을까라는 생각때문입니다. 아차산성 주변에는 산성을 비롯해 최소한 16곳의 보루성이 있습니다.성을 쌓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다듬어지지 않은 막돌인 성돌과 성벽 안을 다지는데 사용한 강돌이 현장에

함께 놓여있다.    

P.S. 최근 문화재청이 홍련봉지역을 문화재보호 구역으로 정식 지정했습니다.정말 잘 된 일입니다.

       2004년 11월 초순   -파랑새지기-

 

 

등산객 발길에 차여 발굴된 고구려 방앗간.

 

1500년 전 고구려군사들의 병영인 보루가 등산객들의 발길에 의해 새로 발견됐다.  고구려 제6보루로 새로 명명된 이 보루는 구리시 아차산 3보루(堡壘·산성보다 조그만 규모의 6세기 고구려군의 방어 시설) 근처 1백미터 지점에서 고구려의 디딜방아 시설인 돌(볼씨)이 최근 확인됐다. 지난달 아차산 3보루에서 사상 첫 고구려 디딜방아 유물(조선일보11월29일자)이 발굴된 데 이어 두번째로 햇빛을 보게됐다. 순전히 등산객들의 등산화 발길에 의해 보루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 등산객들의 발길에 등산로 흙이 파이면서‘발굴’된 1500년 전 고구려 디딜방아 부속구인 볼씨. 방아채를 받치는 쌀개를 지지하는 돌이다. 그러나 당국의 무관심으로 여전히 등산객들의 발길에 짓밟히고 있다.
이기원기자 kiwiyi@chosun.com

 

최종택 고려대 교수(고구려고고학)는 22일 “아차산 팔각정에서 그네터로 오르는 등산로에서 디딜방아 볼씨(방아를 받치는 쌀개를 지지하기 위해 박아 놓은 돌)를 발견했다”며 “주변을 발굴하면 방아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화강암을 둥그렇게 다듬은 볼씨는 길이 25㎝, 홈 길이 5㎝로, 두 볼씨의 간격은 약 25㎝이다. 그러나 1500년을 견뎌 온 이 디딜방아 유물은 정식 발굴로 출토되지 않았다. 숱한 등산객들이 산길을 다닌 결과, 흙이 파이면서 드러났다. 등산객들이 발로 ‘발굴’한 셈이다. 1500년 전 고구려 병사들의 숨결이 담긴 디딜방아는 오늘도 등산객 발길에 짓밟히고 있다.

 

최 교수가 이 유물을 찾은 것은 이달 초. 지난달 아차산 3보루에서 사상 최초로 고구려 디딜방아를 찾았던 최 교수에게 발굴작업 반장 장동오씨가 “주변 등산로에도 이와 비슷한 돌이 있다”고 알렸다. 현장 인부인 장씨는 지난 9년 동안 최 교수의 고구려 보루 발굴에 참여해 왔으며, 최 교수가 ‘발굴 베테랑’이라고 인정할 정도다.

최 교수는 “디딜방아와 주변 지형 등을 종합할 때 등산로 주변이 고구려 보루였음을 알 수 있다”며 이곳을 ‘아차산 6보루’로 이름 붙였다. 아차산 6보루는 성벽 둘레 70~80m의 조그만 보루로, 주둔 병사는 10여명 정도일 것으로 최 교수는 추정했다.

 

새로 발견된 아차산 고구려 제6보루에서 동쪽으로 본 전망...강 남쪽 강동과 하남이 보인다.

 

제6보루 서편 전망. 멀리 뚝섬과 중랑천등이 한눈에 보이는 천혜의 요새이다.
 


 

최 교수는 “등산로 한가운데에 있는 아차산 6보루의 발견은 현재 사용 중인 아차산 등산로가 사실은 크고 작은 고구려 보루들의 연결로이자, 장군들의 마도(馬道)였음을 증명한다”며 “등산객들의 발길에 ‘발굴’될 정도로 아차산 일대 고구려 유적은 훼손·방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학계는 “문화재청 등 중앙 정부가 나서서 이 지역 고구려 유적을 보존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서울과 경기도에 접한 아차산 일대에는 이번에 발견된 아차산 6보루를 포함, 18개의 고구려 보루가 있다. 고구려 보루는 모두 사적 455호로 지정됐지만, 등산로와 체육시설, 군사시설 등으로 훼손되어 가고 있다.

 

<아래는, 지난번 소개한 아차산 3보루-첫 방앗간이 발견된곳-의 눈내린 최근 모습입니다>

 

 

 

 

 

지난번 처음 발견되어 보도된 고구려 방앗간 발굴 현장의 모습, 하얀 눈을 이고 있어 1500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차가운 북풍이 매섭던 12월말 고구려군 보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