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 갈대가 6백년 자란 이성계의 건원릉 | |||||||||||||||||||||||||||||||||||||||||||||||||||||||||||||
[오마이뉴스 2005-05-14 14:42] | |||||||||||||||||||||||||||||||||||||||||||||||||||||||||||||
6백년 전 시대로 되돌아 가보면
고려의 개혁파였던 신진사대부들과 혁명의 왕국을 일으킨 풍운아였던 이성계도 결국 여인을 잘못 다스려서 이런 비극을 맞은 것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수릉으로 잡았던 것은 정릉이고 현재의 동구릉은 태종 방원이 잡은 자리다. 당시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길지를 물색하던 중 김인귀가 이곳의 길지를 추천해 영의정부사 하륜 등에 의해 정해진 곳이 지금의 동구릉이다.
천재 건축가 박자청
이성계의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의 현릉(玄陵)을 본 따서 박자청이 주도해 만든 능이다. 조선초기의 능인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은 조선왕릉의 기본제도를 마련한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의 작품이다. 북한 개풍에 있는 태조의 원비 한씨의 제릉도 박자청이 지휘한 건축이고, 북한 개풍군 정종의 후릉도 석물이 태종의 헌릉과 똑같은 것으로 보아 박자청의 작품으로 보인다. 뛰어난 궁중건축가였던 박자청은 무신출신이었으나 공조판서로 세종대까지 조선초기의 중요 건축에 빠지지 않던 인물이다. 당시의 건축기술로는 난공사였던 연못 위에 건물을 짓는 경회루를 완성한 것도 박자청이고 창덕궁의 인정전도 박자청이 총 지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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