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희문(光熙門)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한다. 동대문과 남대문의 사이, 즉 도성의 동남쪽에 있는데 1396년(태조 5)에 도성을 쌓을 때 창건되었으며, 1711년(숙종 37)에 고쳐 쌓았다. 1719년(숙종 45)에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光熙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며,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에 복원할 때 홍예석축(虹霓石築)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옮겼고, 문루 12평을 새로 지었으며, 주변의 2백평을 녹지화하였다. 수구문이란 청계천(오간수문)·이간수문이 가까워 수구문이라고 했고,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시구문이라고도 했다. 당시 도성의 상여는 반드시 동쪽으로는 이 광희문(남소문)으로, 서쪽으로는 소의문(서소문) 두 곳으로만 성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오간수교(五間水橋)
종 목 : 사적 제461호 위 치 : 중구 을지로 6가 18-214번지, 신당동 217-118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오간수문지는 청계6가 사거리의 동편, 동대문에서 남으로 약 100m 지점에 해당한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조선초 도성을 지으면서 물길을 성밖으로 빼기 위해 지은 5칸의 수문을 말한다. 개축시에 물길을 고려하여 청계천에 놓은 성벽의 하부구조물로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되어 있었으며, 다섯칸의 홍예문으로 되어 있어 ‘오간수문’이라 하였다.또 오간수문 위로는 성벽을 쌓아올렸고, 바로 앞에는 3미터 정도의 화강석을 연결시켜 사람들이 건너다니게 하였다. '지저분하기는 오간수다리‘라는 말이 있듯이 서울 장안의 온갖 오물은 이 오간수문을 통해 중랑천으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였다. 초창기엔 이곳을 통해 범죄자가 도망가거나 도성에 잠입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수문에 쇠창살을 촘촘이 박았으니 바로 5척의 철문이었다. 명종조 의적 임걱정(林巨正)이 한양에서 관군에게 쫓겨 달아날 때 오간수문의 쇠창살을 자르고 달아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준설이 되지 않아 모래와 쓰레기가 쌓이는 등 제 기능을 할 수 없자 2척의 나무문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후 영조 36년(1760) 경진년 준천시에는 이것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토사를 걷어내고 철문으로 교체함과 아울러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의 유출을 방지하였다. 오간수문은 그 후 오랫동안 한양의 명물로 남았다. 그러나 융희 1년(1907) 중추원에서 쓰레기가 걸려 물길이 막힌다며 하천수의 원활한 흐름을 위한다는 핑계로 수문을 뜯어내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동대문 북쪽 성벽과 함께 남쪽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없애버렸다. 대신 같은 자리에는 콘크리트 다리를 세우고 오간수교, 오간수문교라고 불렀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다. 1926년에는 순종의 장례행렬이 유릉으로 가기 위해 오간수교를 건너감에 따라 두 칸 반이던 다리를 네칸 반으로 확장하였다. 2003년 시굴조사 당시 홍예기초부 주변에서 석수(거북) 2점과 수문부에서 철문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수문주 바닥석 사이 틈에서 상평통보를 포함한 조선시대 동전 600여개가 꾸러미로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공사 때 금괴가 발견되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는데, 실은 이 동전 꾸러미 발견 사실이 와전된 것이다. 출토된 동전은 조선시대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로 당이전과 천자문전, 오행전 등이 포함돼 있었다. 중앙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당이전이 들어 있고 당백전이나 당오전 등이 포함돼 있지 않은 점으로 미뤄 1809∼1866년 사이에 동전이 땅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이 동전들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현재 시세로 따지면 600만 원 정도의 값어치라고 한다. 영조 36년(1760) 57일간의 준설작업이 이 오간수문 일대에서 있었는데, 행사를 마친 왕은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려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 당시 영조가 친히 지은 어제(御製)는 이번 복원공사시 벽에 부조하여 게제했다.
濬川功訖 준천 역사를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 卿等竭誠 경들이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予聞光武 내가 듣건대 후한 광무제가 말하기를, 有志竟成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
현재 이곳 오간수문 아래 북벽에는 검정석 대리석 위에 영조 36년(1760년) 실시된 청계천 준천의 과정과 의미 등을 노래한 준천가(濬川歌)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준천가(濬川歌)>의 濬은 팔 준, 川은 내 천, 歌는 노래가로 모래와 흙으로 매워진 청계천을 파서 치워내는 과정과 모습을 당시의 문신이자 학자인 채제공(蔡濟恭)이 역사의 고사와 곁들여 지은 시이다. 이 시는 그의 문집『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제9권「시(詩)」편에 수록되어 전하는데, 청계천이 복원 되면서 이곳에 당시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뜻에서 기록한 것이다. 노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濬川歌 준천가
天有銀河水 하늘에 은하수 있어 文采昭回九萬里 문채가 구만리 빛나고 地有淸渭水 땅에 맑은 위수가 있어 貫穿長安流不已 장안을 꿰뚫어 그치지 않고 흐르네
漢陽包絡大山川 한양은 큰 산천에 싸여 左祖右社萬年址 종묘사직 만년의 터전 衆水發源西北隅 뭇 물줄기 서북 모퉁이에서 발원하여 一道鋪練王城裏 왕도 안에 명주 하나 펼쳤네
五間鐵鎖束其東 오간 자물쇠는 그 동쪽을 묶어 開閉惟視衰盛水 여닫는 건 물의 성쇠를 본다 國初陶勻大費力 개국 초에 나라 다스림에 크게 힘을 써 虹橋十二晴空起 열두 홍예다리 맑은 공중에 일어났다
邇來定鼎四百載 그 이후로 도읍을 정한 지 사백 년 崩沙塌下無時止 모래 무너지고 떨어져 내려 무시로 그쳐 一經潦過增一閼 한번 큰물이 지면 막힘 한번 더해 厥坎往往平地似 그 구덩이 왕왕 평지 같았다
有時莊嶽六七月 이따금 장마 육칠 월 地上水高深沒膝 땅 위 물 높아 깊이 무릎을 빠지게 하여 廟議紛紛苦不齊 조정 의론 분분하여 같지 아니하자 聖斷揮霍無遺失 임금님 결단 재빨라 빠트림이 없네
府庫金帛散不計 창고의 재물 헤아리지 않고 흩뜨렸고 萬夫勇趨如箭疾 수많은 인부 용감하게 달려오는 게 화살같이 빨랐다 畚鍤騰騰直到底 삼태기질 가래질 떵떵 곧장 밑바닥에 이르러 標刻重出舊年月 표시 눈금이 다시 나온 건 옛 시간 移沙作阜高萬丈 모래 옮겨 언덕을 만들어 높이 만 길 大車小舟相磨戛 큰 수레 작은 배 잇닿아 부딪치네 鸞輿臨視不知疲 거둥하신 임금 내려다보니 피로한 줄 모르고 水順舊軌何秩秩 물은 옛 길에 순하여 어찌 차례 있는지
兩岸十里如弦直 양안 십리 활시위 같이 곧고 三營築石無虧缺 삼영이 돌을 쌓아 이지러진 게 없네 澄波演漾蔭楊柳 맑은 물결 출렁출렁 버들에 그늘 지우고 灝氣虛明照城闕 천지 가득 청명한 달빛 성궐을 비춘다
豈徒邦人免墊溺 그래 나라 사람만 빠지는 걸 면하겠는가 惟應地氣善疏洩 응당 땅 기운도 잘 트일 것 夏禹鑿之我后濬 하나라 우임금이 뚫고 우리 임금이 쳤으니 事有大小功則一 일에는 크고 작은 게 있으나 그 공은 하나
聖世爲政可反三 성세의 정사는 유추할 수 있으니 隨處疏通兼導達 곳곳 소통되고 겸하여 의사를 드러낸다 美哉洋洋若不斷 훌륭하다! 성대히 흘러가 끊임없는 것 같으니 磐泰宗祊寧且謐 굳건한 종묘 편안하고도 고요하다
◈ 가산 터(假山址)
을지로 6가 18번지 동쪽 끝으로부터 방산동 4번지 서북쪽 끝까지 청계천 양쪽으로 이어진 언덕을 가리킨다. 영조 36년(1760)에 한성판윤 홍계희와 호조판서 홍봉한(洪鳳漢) 등의 주장에 따라 경중 오부(京中五部)의 방민(坊民) 연 15만 명과 품삯을 주고 채용한 인부(雇丁) 연 5만 명을 동원하고 전(錢) 35,000여 민(緡), 쌀 2,300여 석 등을 들여서 청계천의 모래를 파내어 이곳에 산같이 쌓았는데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 간에 걸쳐 대역사(大役事)를 진행시켰다. 당시 청계천이 막혀 홍수 피해를 입어 오던 성내외의 전 방민들은 대역사에 기꺼이 응했으며 당시 부호들은 많은 역부를 바쳤고 또 경기도 주민까지 참가하였다. 준설작업에는 가래와 소를 이용하여 작업 능률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때 나온 모래를 쌓은 것을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 불렀는데, 이곳 가산에는 거지들이 움집을 파고 살았다고 한다. 이곳 가산 거지촌에는 한때 수백 명의 거지들이 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거지를 깍정이, 그 두목은 꼭지딴이라 불렀는데, 꼭지딴은 동냥을 나가지 않고 거지들이 얻어오는 음식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이들 거지들은 땅을 파고 움집에 살았으므로 땅꾼이라 불렸다. 이들 땅꾼들이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한데, 뱀, 두더지, 지네, 두꺼비, 땅강아지, 고슴도치 등을 잡아 포청의 주문에 응하는 일, 상여(喪輿)를 메는 일, 초혼(招魂)을 부르는 일, 행려(行旅) 사망자의 시체 처리와 방상수(方相手) 노릇 등이다. 이렇게 땅꾼으로 돈을 번 거지는 나중에 상여도가(장의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준천작업은 2, 3년 간격으로 190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가산의 모래는 광무 2년(1898)에 전기회사 전차 차고를 만들기 위해 대부분 없애고 그 서쪽에만 조금 남아 있었으며 남쪽에 있는 언덕은 1917년에 동대문초등학교를 세울 때 써버리고 그 이듬해인 1918년에는 조선약학교(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설립을 위해서 쓰고, 1922년에 경성사범학교(현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를 설립할 때 모두 써버렸다. 현재 중구 방산동(芳山洞)은 당시 이 곳 가산 위에 심은 무궁화 향기가 이 마을로 흩어져 퍼진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현재 가산터가 있던 자리에는 서울시에서 설치한 문화유적 표석이 남아 있어 당시를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글쓴이:박상진 은평향토사학회 부회장(역사물 작가) , (사)서울문화사학회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