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사생아로 태어나 시클그루버라는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다가 1876년 히틀러로 성을 바꾸었다. 알로이스는 국민학교를 나왔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오스트리아 재무부의 세관원이 되었다. 아버지가 퇴직한 후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수도인 린츠 근교로 이사하여 아돌프 히틀러는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히틀러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레알슐레(실업계중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불량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1906년 16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동안 린츠에서 방황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어머니도 이에 찬성했다. 1903, 1908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죽었지만 히틀러는 부모의 유산과 국가의 고아연금이 있었으므로 생활에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에 있는 미술학교에 2차례(1907, 1908)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그후 몇 년 간 빈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책과 신문, 소책자를 읽었고, 역사·정치·민족 문제에 대해 공부했다. 엽서나 광고의 그림을 그려서 버는 수입은 불안정했으므로 여러 하숙집을 옮겨 다녔다. 그러나 1911년 부모의 유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숙모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되자 고아연금은 여동생에게 양보했다. 그는 술·담배·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생활은 검소했다.
히틀러의 예술 : 그의 화가 생활중의 그림들
2. 청년기 히틀러의 사회관과 사회상황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절대주의 국가로서 당시 민족문제로 고심했다. 독일인 대귀족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했고, 관료·군인·대지주·자본가·교원·지식인의 대부분은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력을 확장한 마자르인·체코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남슬라브인은 민족자치와 생활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특히 20세기초에는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 간에 격렬한 민족투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아리아인의 민족적 우월감을 기초로 한 그의 반유대주의는 중소상공업자와 중소농민으로 구성된 독일인 중산계급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한이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독일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입장에서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이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전활동과 직장조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독신자 합숙소에서는 하층시민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독일민족지상주의자이며 반가톨릭 교회주의자인 쇠네르(1843-1921)파에 동조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이 제국 내에 있는 독일인 거주지역의 독일합병을 지지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이미 히틀러는 자신의 성격적 특성, 즉 원만한 대인관계의 실패, 기존 부르주아 사회와 비게르만인(특히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감, 성급하며 위협적인 격정, 가난과 실패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등을 보였다.
3. 히틀러 정치활동의 시작점 세계1차대전의 패배
1913년 5월 26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입대하지 않기 위해 독일의 뮌헨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14년 2월에 오스트리아로 소환되어 징집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다. 그 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바이에른 보병 제16예비연대에 배치되었고, 플랑드르 지방에서 주로 영국군과 싸웠다. 전령병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4, 1918년에 각각 2급과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는데, 히틀러는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만년에까지 가슴에 달고 다녔다. 1918년 11월 독일이 패배했을 때 히틀러는 대단히 낙담했다. 군대생활은 그에게 전우애를 가르쳤고, '참호의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공동생활을 체험하게 했으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해주었다. 그는 단순하고 행동본위인 군대를 좋아했고, 황량하고 처량한 전선생활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패전에 따른 독일 군대의 해체, 유럽에서 독일 패권의 실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슬라브 민족들의 독립과 강화, 중유럽으로 부터 독일의 후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 금지 등은 히틀러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독일의 11월혁명과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자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4. 동유럽의 제국주위의 붕괴 세계1차대전
5. 동 유럽의 변화 제국주위 붕괴 , 히틀러의 본격적인 정치입문
1918년 11월 7-8일 독일에서는 혁명이 발발하여 빌헬름 2세가 망명하고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가 새 총리로 취임했으며, 11월 11일에 독일 대표는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1919년 4월 13일부터 5월초까지 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자·병사 위원회가 뮌헨과 그 주변지역을 지배했으나, 이 위원회는 반혁명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은 반혁명적 왕당파와 반동적 군부가 세력을 장악한 유일한 반동지역이 되었다. 히틀러는 군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위원회에서 일하다가 보수적인 국방사상을 일반사병에게 교육시킬 인물을 양성하는 강습회에 참여했다. 1919년 6-8월 이 강습회에서 히틀러는 보수파의 우수한 학자와 정치가의 강의를 듣고, 토론과 연설 훈련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상관에게 탁월한 연설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정치·경제·역사 등 다방면의 강의를 들음으로써 자신의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 1919년 9월 12일 히틀러는 뮌헨에 있는 독일노동당 집회에 참석했다. 독일노동당은 반유대주의에 기반을 둔 반혁명정당으로서 사회주의적 정책과 애국주의를 결합시킨 중간계급 위주의 정강을 채택하여 대자본과 귀족특권계급에 반대했다. 이 집회의 토론에 참여한 히틀러는 당간부인 드렉슬러의 주목을 끌었고, 며칠 뒤 "귀하의 입당을 허가함. 9월 16일에 열리는 독일노동당 위원회에 출석하기 바람"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히틀러는 심사숙고한 끝에 이 위원회에 출석하여 555라는 당원번호(당원번호는 501번부터 시작되므로 히틀러는 55번째로 입당했음)를 받았고, 제7당위원이 되었다. 당시 거의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독일노동당은 히틀러의 노력으로 공공연한 대중활동을 강화했다. 히틀러는 군대 동료들을 입당시키고, 잇달아 공개연설회를 개최하여 당세확장에 노력했다. 그의 뛰어난 연설 솜씨도 당의 명성에 일조했다. 또한 그는 연설회장에서 입장료를 받고 기부금을 모아 당 재정 확보에 기여했다.
1920년초 히틀러는 우익단체와 당과의 연락을 담당하던 당의장 하러를 축출하고, 드렉슬러를 당의 총서기로 추대했으며, 자신은 당 선전부장이 되었다. 당조직을 개편한 독일노동당의 당세는 1920년 2월 뮌헨의 한 맥주 홀에서 2,000명 이상의 청중을 모으는 대중집회를 개최할 정도로 신장되었다. 이 날 집회에서 25개조의 당강령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와 독일의 영토확장이 포함되었다. 이 강령은 대부분 드렉슬러·에카르트·페더 등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이후 나치의 '불변의 강령'으로 존중되었다. 다만 강령 제17조의 '공공의 이익을 위한 토지의 무상몰수'는 1928년 4월 13일 히틀러의 성명에 의해 "무상몰수란 불법으로 획득한 토지와 국민복지에 위배되게 관리되고 있는 토지에 대하여 필요한 경우에 법률에 따라 이를 몰수하는 것이며, 이 무상몰수의 첫 대상은 유대인 토지투기회사이다"라고 수정되었다. 이후 당명도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Nat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로 변경되었다. 독일노동당의 집회가 대규모화함에 따라 당에 대한 반대도 격렬해졌으므로 히틀러는 '집회장소방위반'(나중에 이것은 나치 돌격대로 강화되었음)을 설치하여 회장에서 방해행위를 하는 반대파를 폭력으로 축출했다. 히틀러는 초기의 집회에서 항상 유대인 배척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패전 후 독일공화국의 나약함과 내부분열 및 부패를 공격했다. 또한 독일의 강력한 국민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베르사유 조약의 불합리성과 잔혹성을 강조했다.
7. 베르샤유 조약 이란?
1919년 6월 28일 파리 평화회의의 결과로 31개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강화조약이다. 집회 장소는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조인된 것으로, 전체 440조로 이루어졌다.
아래사진 베르샤유 궁전 거울의방
8. 사람의 마음을 잡는 뛰어난 웅변가 히틀러
당집회에서 히틀러는 기본주제별로 문제점을 정리하여 청중에게 호소함으로써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고 청중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히틀러가 연단 위에서 증오와 복수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중이 지닌 고귀한 감정에 호소하여 전독일인의 결집, 국내외 압력으로부터 독일 국민의 해방,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일 및 조화, 중산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생활안정 및 향상, 용병제도의 폐지와 국민군의 창설, 독일 국민의 강인함과 능력에 대한 신뢰, 자유라는 대이상에 대한 빛나는 희망 등을 역설했다. 1920년 3월 군에서 제대한 히틀러는 나치 운동에 전념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갈고리십자가 모양의 당기를 만들었다. 갈고리십자가의 적색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백색은 민족주의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리아인의 승리를 의미했다. 히틀러가 당의 독재자로 부상한 것은 1921년 7월 29일 나치당의 임시당대회에서였다. 그는 드렉슬러 등 옛 당간부들의 운동방침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 드렉슬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당의 총서기가 됨으로써 당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당위원회를 무력화하고 당내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히틀러는 정계와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류하면서 자금을 조달했고 학생과 군부관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드렉슬러파가 합법주의와 사회주의를 제창한 데 반해 히틀러파는 폭력주의와 군부·관료에의 접근을 주장했다. 또한 이때부터 히틀러의 신격화가 시작되어 그는 동지가 아니라 '우리들의 지도자'(Führer : 나중의 총통)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당기관지 <민족의 관찰자 Volkischer Beobachter>를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그의 주변에는 나중의 유명한 나치 지도자가 된 로젠베르크, 헤스, 괴링, 슈트라이허 등이 집결했다. 1921년 이후 나치당의 당세는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특히 바이에른의 군부와 경찰, 그리고 왕당파가 나치를 보호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나치는 바이에른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바이에른 동맹을 폭력으로 습격하여 집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바이에른 정부는 나치당을 탄압했고 히틀러는 1922년 6월 24일부터 7월 27일까지 수감되었다. 1923년 1월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에서는 이에 대한 수동적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심각한 물가상승현상이 초래되었다.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독일인이 소극적 저항에 동조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투쟁과 베를린의 민주공화정부에 대한 투쟁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나치당 내에도 반프랑스 투쟁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히틀러도 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민주공화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공격했다. 1923년 9월 26일 독일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중지하고 독일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결정에 반대한 극우파는 공화정의 타도를 외쳤다. 바이에른에 있는 극우운동의 공동단체인 '독일투쟁동맹'을 이끌고 있던 히틀러는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의한 베를린으로의 진격, 전독일 우익독재정부의 수립을 제창했으나, 그는 나치당만의 단독정권을 세우거나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반역하여 봉기를 일으킬 의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당이 바이에른 정부에 이용당하고 있으며, 나치당을 전독일 우익독재정권의 수뇌부에서 배제할 의도임을 깨닫자, 1923년 11월 8일 히틀러의 투쟁동맹은 뮌헨에 있는 한 맥주 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의 목적은 바이에른 정부 수뇌를 포섭하여 지연되고 있던 전독일 우익독재정권 수립에 나치당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바이에른 정부는 처음에는 히틀러에게 협력을 약속했으나 군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봉기를 진압하는 쪽으로 돌아서 이 비어 홀 폭동은 실패로 끝났다. 봉기의 주동자였던 히틀러는 같은 해 11월 11일 은신처에서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히틀러는 모든 책임을 혼자 떠맡고 봉기의 의도를 뚜렷이 표명하는 등 결연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가 높아졌고, 봉기의 유일한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또한 그는 이 봉기로부터 운동의 목적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9개월 동안 란츠베르크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생활은 자유로워서 방문객들과 담화도 하고, 동지들과 식사도 했으며, 마음대로 독서할 수도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반(半)자서전 겸 나치 사상의 해설서인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모리츠와 헤스가 히틀러의 구술을 필기했고, 이것을 매주 토요일 저녁 감옥 내의 나치 동료들이 개최하는 공동집회에서 발표했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석방될 무렵 <나의 투쟁>의 상권은 거의 완성되어 1925년에 출판되었고, 하권은 막스 아만의 도움을 받아 1927년에 발표되었다. 1930년에는 합본판이 나왔고 1943년까지 총 984만 부가 판매되었다.
히틀러의 사상은 대부분 이전의 저작이나 그가 빈에서 생활할 때 배운 우파의 급진주의에서 채용한 것들로서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인종이나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은 불변적인 자연의 질서이며 아리아인은 인류에서 유일한 창조적 인종이다. 인류의 자연적 단위는 민족이며, 독일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다. 또한 국가는 민족에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러한 국가의 사명을 저버렸다. 모든 도덕성과 진리의 판단기준은 민족의 보호와 그 이익에 있다. 이러한 기준에 근거할 때 민주주의적 정부는 첫째, 있지도 않은 민족간의 평등을 상정하기 때문에, 둘째, 민족의 이익을 투표나 토론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민족의 통일성은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지도자에게서 그 화신을 찾을 수 있다. 지도자 아래에서 당(히틀러는 민주적 정당들과 나치당을 구분하기 위해 '운동'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음)은 민족의 가장 위대한 요소를 찾아내야 하며,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 즉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독일민족지상주의, 사회적 다원주의와 민족생존권의 확보, 민족공동체 사상, 의회정치와 계급투쟁에 대한 반대 등을 피력했다. 히틀러에 의하면 나치즘의 주된 적은 이미 붕괴 직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여기에는 민주사회주의도 포함됨)였다. 또한 그에게 유대인은 모든 악의 구현체였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치당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그는 나치당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1923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속출했다. 독일의 경제는 통화개혁과 도스 안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평판도 좋아졌다. 1925년 3월 9일 바이에른에서 시작된 히틀러에 대한 연설금지조치는 프로이센·작센·바덴 등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나치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1926년 2월 당간부회의에서 히틀러는 북부 독일에서 경쟁조직을 이끌고 있던 슈트라서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1926년 1월 히틀러는 친위대(Schutzstaffel)를 설립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돌격대의 재건을 완료했다. 이 무렵 도시와 농촌에서 중산계급의 지지를 확보한 나치당은 의회를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의해 대중정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으면 민주공화제를 전복할 생각이었다. 1929년 7월에 시작되는 배상에 관한 영 안(Young Plan)에 반대하여 히틀러는 국가주의자인 알브레히트 후겐베르크와 협력했다. 후겐베르크의 국가당 조직과 그 기관지의 도움을 받은 히틀러는 최초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천부적인 선동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정치자금을 통제하고 있는 중공업계의 대자본가들에게 접근했으며, 그들을 이용하여 정부에 대항하는 강력한 우파노동조직을 설립하고자 했다. 또한 이들에게서 나온 정치자금으로 히틀러는 나치당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중하층과 실업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중산계층(특히 대정당이나 압력단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는 계층)·청년·부인들이 무리를 지어 나치당에 입당했는데 이것은 관료와 군부, 그리고 자본가에게 접근하려던 히틀러의 방침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 5월 사회주의적 요구를 정면에 내세우며 히틀러에 대항하던 슈트라서는 당에서 추방되었다.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공격과 대중선동으로 1930년 9월 14일의 총선에서 600만 표 이상을 득표하면서 독일의 제2당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선거직전 라이프치히 최고법정에서는 군대에서 나치 세포를 조직하려다가 체포된 장교들의 군사재판이 있었다. 9월 13일 법정에 출두한 히틀러는 "나치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을 계획이므로 폭력이 필요없다. 나치는 군부를 붕괴시킨다든가, 군부를 대신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치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잡는다면 합법적 수단을 통하여 당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개조할 것이며, 11월혁명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증언하여 군 간부와 독일 지배세력의 호의를 얻었다. 곧이어 독일 금융자본가의 중심 인물 샤흐트도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9. 껍데기뿐인 대통령 힌덴부르크, 숨겨진 실권자 아돌프 히틀러
1930년 가을 이후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와 연설력에 힘입어 나치당의 당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1932년 1월 27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히틀러와 대자본가들의 회담은 나치와 독일 지배세력의 결합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1932년 3월 13일의 대통령선거에서 31.1%, 4월 11일의 결선투표에서는 36.8%의 지지를 얻었으나,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7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를 했고 히틀러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파펜의 연립내각에서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했다. 1932년 11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3.1%를 득표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했고, 1933년 1월 그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1933년 2월 그는 육·해군 수뇌부와 회담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인했고, 이후 자본가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또한 같은 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짐)을 이용하여 공산당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들에게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1933년 3월 5일 이러한 상황 속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했다. 같은 해 7월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절대적인 독재권을 확립시켜 나갔다. 먼저 나치 돌격대 대장으로서 군의 불신임을 받고 있던 에른스트 룀을 체포하여 1934년 6월 29일 재판 없이 처형했다. 또한 슈트라서·슐라이허 등도 함께 숙청했다. 나치 돌격대의 붕괴에 만족한 군부도 히틀러를 지지했다. 이때부터 독일 제3제국은 지배세력과 혼연일체가 되어 군비의 급격한 대확장과 군수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독일의 국력은 순식간에 유럽 제일이 되었다.
1934년 8월 2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으로 취임했다. 히틀러의 지배 아래 독일은 준전시경제체제를 수립하여 대자본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 자급자족정책의 확립, 실업자의 감소, 사회보장정책의 실시, 특히 신분제적 특권의 소멸과 각종 구습 및 제도의 폐지, 그리고 중하계급 출신 청년들의 지배기구로의 충원 등의 혁신에 성공함으로써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올라갔다. 히틀러가 나타나면 독일 국민은 열광하며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독재정치가 진행되어 국민생활은 획일화되었고, 언론·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사라졌으며, 히틀러의 반대파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살해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눈부신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한 독일은 1934년 1월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1935년 1월에는 자르 지방의 국민투표에서 대승하여 자르의 영유권을 회복했다. 같은 해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며, 6월에는 영국-독일 해군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을 증강시켰다. 1936년 3월에는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지역의 재무장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반히틀러 운동은 지지자를 잃었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뮌헨 협정으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고, 그는 '불세출의 영웅', '일찍이 없었던 위인'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외교적 성공의 배후에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영국·프랑스 등의 지지 또는 묵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1937년 11월 5일 히틀러는 군부와 정부의 수뇌들을 모아 은밀히 전쟁의지를 표명했다. 1938년 2월 4일 이들 가운데 전쟁개시를 주저하는 자를 파면한 히틀러는 자신이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10. 나치스 돌격대란 ?
SA라고도 한다. 별칭은 Sturmtruppen 또는 Braunhemden. 1921년 나치스 대중집회의 경호원 모임이 조직화된 단체이다. 반나치스 세력에 대한 실력 행사와 나치즘을 선전하는 중심체 역할을 하였다. 또 당 대회 보호, 나치스 대회에서 행진, 정적 공격 등의 임무를 맡았다. 초창기 대원들은 주로 바이마르 공화정 초기에 좌파들과 대립했던 예비역 군인들로 이루어진 자유군단(Freikorps)에서 뽑았다. 1923년 히틀러가 일으킨 뮌헨반란이 실패하자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였으나 1925년에 재조직하였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을 위협하는 등 여전히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며 나치스혁명의 선봉대로 활약하였다. 1931년 1월부터는 에른스트 룀(Ernst Rohm)이 지휘를 맡았다. 과격한 반자본주의자인 그는 이 단체를 독일 군사의 중심으로 키우려하였다. 한편 대공황으로 늘어난 실업자들이 대거 입단함으로써 대원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1932년에는 40만 명, 히틀러가 권력을 잡게 된 1933년 무렵에는 200만 명 정도로 늘어나 정규군의 20배가 넘었다. 그러나 노상에서 유대인과 나치 반대자들을 폭행하는 등 지나친 과격함이 문제가 되었고 정규군과 부유한 실업가들은 그런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려 노력했던 히틀러는 1934년 6월 30일 밤 나치스 친위대(SS)를 동원해 숙청을 실시하였다. 룀을 비롯한 수백 명의 지도자들을 즉결 처형했다. 숙청후 단체는 남아있었지만 SS에 정치적 지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1939년부터는 조국수호대 소속 대원들에게 예비적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단체로 전락하였다.
히틀러 그는 그당시 연합국 언론의 말처럼 미친사람도 성격 파탄자도 아니다.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개인생활은 검소했다.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는 정상적인 체질의 소유자였다. 히틀러의 일상생활은 색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매일 한낮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운 채 조간신문을 훑어본 후 직무를 시작했으며, 이튿날 동틀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예술에 애착을 느낀 그는 특히 제3제국의 기념비로 남을 만한 공공건축물의 건립을 소원했다. 사치나 여성편력 또는 미식가로서의 기질은 전혀 없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던 산장에 가서 자신의 사진사·의사·운전수·비서에 둘러싸여 마음 편히 담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이때의 화제는 대개 개 사육법, 최신유행, 예술계의 이야기, 개인생활의 사소한 사건 등 다양했는데, 오페라의 노래를 듣고 여가수의 이름을 알아 맞추기 게임을 즐겨 했다. 이 산장에서 각종 정치적 구상을 다듬는 경우도 있었다. 히틀러는 기억력과 직관력이 뛰어났고,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여 능력을 발휘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특정 인물의 지나친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2명 이상의 인물에게 같은 일을 배당하여 충성 경쟁을 유발시켰다. 그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독일제국주의의 극단적인 반영이었고, 그 자신은 세간의 평처럼 미친 사람도 성격이상자도 아니었다
11. 히틀러의 가혹한 점령정책
히틀러의 점령지정책은 매우 가혹했으며, 포로와 점령지 주민, 그리고 유대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거나 강제수용소로 이송·살해했다. 또한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물자를 무자비하게 탈취했고, 슬라브 민족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반(反)나치 저항운동이 전유럽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히틀러의 이민족 억압 및 착취 정책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일의 주요지배계급은 전쟁 말기까지 히틀러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더욱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의 암살을 기도한 반란조직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히틀러보다 더 반동적이어서 구체제로의 복귀를 희망했다. 즉 독일에서 히틀러 반대세력은 나치가 멸망하는 날까지 극히 적었다.
12. 히틀러는 유대인 대량 학살한 19세기 가장 악랄한 악마인가?
2차대전이 끝나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유태인학살문제는 단연 화두였다. 사실 동서유럽을 통틀어 꽤 많은 수의 유태인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죽었고, 짧은 시간 동안에 대량으로 죽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외에도 주요한 나치스의 죄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유대인의 학살을 직접적으로 지시했다거나,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조차 유대인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후대 학자들의 견해라고 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공군 총사령관이자, 게쉬타포의 창설자,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괴링은 유태인학살을 몰랐다고 대답했다. 많은 국방군(정규군) 및 나치당의 고위 간부들 중에서도 유태인 학살을 몰랐다고 대답한 경우가 많았다. 정말로 몰랐을까, 아니면 알았어도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던 것일까.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괴링은 유태인 학살을 전혀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전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괴링은 1934년 이후에는 독일공군에만 매달렸고, 비밀경찰 게쉬타포에는 손을 떼었다. 게쉬타포를 지휘하면서 비밀경찰의 대명사로 게쉬타포의 악명을 드높인 자는 SS(친위대) 국가지도자 Heinrich Himler. 히믈러는 원래 SS와는 상관이 없이 괴링의 사설경찰이나 다름없던 게쉬타포에 SS를 파견하여 점차 게쉬타포와 SS의 구분을 없애가면서 국가기관화하였다.
13. 이 SS가 유태인학살을 전담하였는데, SS 및 게쉬타포의 철칙 중에는 "알 필요없는 자에게는 알리지 말며, 알 필요가 없는 일에는 관심도 갖지 말라"라는 것이 있다. 괴링은 이에 해당한다.
나치당 초기 멤버인 괴링은 물론 유태인 탄압을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괴링은 1차대전때 리히트호벤전투기편대 소속이었던 유태인을 보호한 적이 있다. 이유는 그의 전우였기 때문이라는 것), 학살은 몰랐다는 괴링의 증언은 진실성이 있다. 또한 자기국가에 이민족이 들어와서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고스란히 지키며 동화되지도 않는데 원래 국민들보다 더 잘 살고 부를 독점하고 잇다면? 내가 독일 입장이었더라도 청소했을 것이다. 더욱 이상한 점은 유럽인들이 세계대전이 종결된후에야 히틀러가 유태인학살을 한 악마같은 존재라고 말하고있지만 유태인 청소를 할때 유럽 다른 국가들에서는 묵인하였다. 그들도 유태인들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민들로부터 지지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동정심도 유발하지 못햇던 것이다. 또한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그들은 자신들의 학살행위의 대한 일들을 숨기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 바로 세계2차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를 정신적인 이상자, 바로 피의 굷주린 악마로 묘사한다.
흔히 유럽인들은 오스만제국의 이라크 지배를 폭정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오스만제국 지배 시기에 이라크가 지속적으로 발전한 반면 영국의 이라크 통치야말로 유례없이 가혹한 것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영국군은 이라크에 진입하면서 독립을 약속했다. 물론 약속을 이행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가혹한 조세정책과 토종산업 말살 등 영국의 폭정이 극심해지면서 독립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던 이라크인들은 1920년 대대적 폭동(아랍민족 무장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영국의 대응은 가혹했다. 몇달 만에 1만명 이상을 학살한 영국은 저항이 계속되자 이라크에 대량 폭격을 가했으며, 아임러 핼대인 영국군 사령관은 독가스 공급을 요청했다. 영국은 이렇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복수심을 이라크인들에게 심어놓았다. 이라크인들의 저항을 경험한 독립 약속을 영국군은 이때부터 대량 폭격을 일상적인 치안유지 수단으로 삼았다. 역사는 이를 유례없는 '폭격 통치' 시대로 칭하고 있다.
현재 영국과 미국이 후세인 정권의 폭압으로부터 구출해야 한다고 선전하는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은 당시 영국군 폭격의 대표적 타깃이었다. 이 지역의 유전을 강탈한 영국으로서는 쿠르드족의 자치·독립 요구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국이 이라크를 통치하는 동안 미래의 분쟁은 확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영국의 식민지배는 결국 이라크에 독재와 학살,공포정치를 유산으로 남겼다. 또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보통 400만의 유태인이 죽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처음부터 유태인을 죽이기 위해 건설된 수용소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들이 잡혀들어왔고, 집시, 유태인, 폴란드 레지스탕스 용사들을 비롯한 숱한 반나치 활동을 했거나, 나치에 의해 '생존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인종들이 끌려들어왔다. 그렇게 끌려들어온 자들은 처음에는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문제는, 학살된 유태인 숫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는 400만을 포함해서 60년대까지는 800만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600만으로 하향조정되었다. 왜? 또한 95년 2월자 뉴스위크지의 기사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는 여섯 개나 되는 나치의 학살 수용소중 가장 큰 것에 불과했을 뿐이고, 사실 그곳이 최악이었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다. 이어서 이 기사는, ' 과장되고 꾸며낸 이야기 많다. 아우슈비츠에 처음 수용된 사람들은 정치범. 사망자도 400만명 아닌 110만∼150만'라고 제목을 달았다. 초기 수용자들은 폴란드인들로서 카톨릭신자였고, 그 이후 독소전이 전개되면서 소련군 포로들이 끌려들어왔다. 이어서 들어온 자들이 유태인들이었던 것이다. 원래 유태인이라는 인종은 로마제국에 의해 추방된 이후 지금까지 2000여년을 나라없이 떠돌면서 유럽에서는 철저히 박해받아왔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시시민들에 의해 유태인 학살이 있었고, 20세기 초 러시아에서도 유태인 학살이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 유태인들이 대거 가담한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이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0여년 동안 정착하여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민족을 나치 못지 않은 방식으로 학살하며 몰아내고 그 땅에 정착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들은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빌미삼아 서구 세계의 보호와 묵인 하에 팔레스타인 민족을 나치가 했던 방식으로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조금의 주저도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방패막을 나치의 유태인학살로 돌려 서구의 눈을 감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다.
참조 : 아우슈비츠 대학살 (Auschwitz Holocaust) |
나치스의 돌격대 장교가 유태인 남자를 총살하는 장면
14. 히틀러라는 방패뒤에 숨은 진정한 전쟁광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태평양 전쟁이 끝 나기 9일전 1945년 8 월 6일에 B-29폭격기로부터 TNT 20,000톤의 위력을 가진 U-235가 든 폭탄이 히로시마의 오타강 위쪽 도심에 떨어졌다. 0.6초후 직경 180미터의 온도 300,00도의 불덩이가 섬광과 같이 나타났다. 지열은 곧바로 6,000도가 되었고 모든 구조물들은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집들은 곧 불에 타 버렸고, 도시 7Km 지역 내 모든 것들이 황폐 화되었다. 남녀노소 포함한 인구 400,000명중 25%가 하루만에 죽었다. 도시에서 달아난 사람들 중 50,000명이 방사선 때문에 죽었다. 폭심에서 5,0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사람은 오렌지색 섬광과 함꼐 수 많은 유리조각이 사람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또한 건물이 붕괴되어지는 것과 사람들이 쓰러지고 불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10,000rad의 방사선이 뚫고 지나가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부근에 있던 사람중 대부분이 삼일에서 사일 안에 죽었다. 시내의 집들은 차례로 붕괴되어 내려앉아 버렸고 이 집들은 곧 불이 붙었다. 몇몇 사람들은 집안의 사랍들을 구하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내의 전차는 핵폭발로 인한 폭풍으로 인해 넘어지고 시내 곳 곳에는 불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거나 이미 죽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강 속으로 뛰어 들었다. 핵폭발 후 먼지와 핵 분열 생성물이 하늘로 올라갔고 낙진으로 인한 두 번째 방사선 피폭이 시민들에게 내려 앉았다. 병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응급처치와 사망자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하루가 지난 뒤 도시에 들어간 사람들은 곳 곳에 불에 탄 시체를 볼 수 있었고, 어떤 시체는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불길을 막다 죽어간 어머니도 보였다. 핵 폭발 후 2주가 지난 후 핵 폭발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었던 사랃중 0.8 마일 내 사람들이 방사선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반수가 나중에 죽었다. 같은 시간 적색반점 "홍반"이 희생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피는 더 이상 응고가 되지 않았다. 이 것은 죽음의 반점이라 불렸고, 매일 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30여년이 경과했을때 약 250,000명이 방사능으로 인한 심각한 후휴증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폭격에 사용된 B29 폭격기 - 애칭은 에놀라 게이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지역 표시
15. 끝으로 아돌프 히틀러란 인물은?
히틀러는 인류사에 커다란 획을 그어놓았다. 그리고 히틀러는 어떻게 보면 2차대전 후에 서독이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배경도 만들어놓기까지 했다. 1차대전 이후에도 엄연히 남아있던 구체제적인 신분제도를 전쟁 전과 전쟁 기간 동안 쓸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히틀러는 전혀 허영심도, 재산축적에도 관심이 없는 희한한 독재자였다. 사진을 보라. 히틀러가 그의 제복을 치장하는데에 어떤 장식을 썼는지를 그의 부하들 및 군 장교들의 제복과 비교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인류역사상 1000년한번 나오는 한 인물을 우린 보았다. 그리고 비난하였다. "유태인을 학살한 살인자 , 연합군 군인들의 인질들을 무차별 죽인 제너바협정을 무시한 비정한남자"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한다. 역사는 승리한 국가가 바꾸는법! 히틀러의 대한 연합군의 주장은 현재 후대 학자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히틀러는 우리가 아는 히틀러는 오랜 미국주위가 만든 살인마이다. 유럽의 나라들과 소련외 서양의 나라들은 세계대전 전부터 유태인들을 대량학살하였다. 일본의 히로시마 원폭투하는 비인간적인 행동이다. 허나 그때 그들은 모든걸 숨겼다. 히틀러라는 희생양이 생긴것이다.
독일인들은 냉정한 판단력을 지낸 동유럽 1위에 두뇌를 갖고있다. 그런그들이 히틀러를 따랐던 이유는 단지 민족 우월주위인 나치주의때문일까? 세계역사를 바꾼 독일 현재우리의 편안한 생활은 사실 세계1차 제국주위의 붕괴로인해 세계는 좀더 진보적인 단계로 나갈수있었고 2차대전때문에 최첨단 과학의 발달했다. 원자력시대를 맞아하게 해준 독일은 어쩌면 세계사에서 꼭 필요했던 필수요수일것이다. 독일을 비인간적인 나라라며 비난하던 미국 또 유럽의 국가들 그들은 지금 세계평화를 위해 일을 하는가? 자유국가의 상징인 미국 그들은 지금 세계평화라는 이름아래서 학살을 계속하고있다. 어쩌면 이들의 말하는 평화는 제3세대를 위한 희생양을 찾는 전쟁인지도 모른다 ......
히틀러 [Hitler, Adolf, 1889.4.20~1945.4.30]
오스트리아의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13세에 아버지를, 18세에 어머니를 잃었다. 빈에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으나 실패하였고, 독신자합숙소의 공영시설(公營施設)에서 숙박하면서 유산과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갔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帝國) 내의 격렬한 민족투쟁의 와중에서 독일민족지상주의자가 되어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하였으며,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증오하였다. 1913년 병역을 기피하여 뮌헨으로 피신했지만 생활은 더욱 나빠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고 무공을 세워 1급 철십자장(鐵十字章)을 받았다. 독일이 패전한 후 뮌헨에서 공산혁명이 실패하였는데, 그 직후에 히틀러는 군대에서 정치교육을 받고 반(反)혁명사상으로 정신을 무장하였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후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스)이라는 반(反)유대주의적인 작은 정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웅변에 능하였고, 그 웅변의 힘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당세를 확장하였으며, 1920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하여 당의 선동가로서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이어 당내(黨內)의 독재자가 된 그는 군부 ·보수파(保守派)와 손잡고 민족공동체의 건설, 강대한 독일의 재건, 사회정책의 대대적인 확장, 베르사유조약의 타파, 민주공화제의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유대인의 배척 등을 역설하였고, 특히 대중집회를 자주 열어 일반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1923년 11월 8∼9일 뮌헨에서 봉기(히틀러의 봉기)를 획책했으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육군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출옥 후 와해된 당의 조직을 재편하고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것을 꾀하였다. 옥중에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출판하여,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내의 여러 가지 경향을 종합 ·정리하고, 1930년 9월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18.3 %의 득표율로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일생이 바로 나치스의 역사가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독재지배를 요구하였는데,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 %)까지 득표하였으나 P.힌덴부르크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 %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 %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자본가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大生存圈)을 수립하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하여 패전을 거듭하였다. 1944년 7월 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保守帝政派)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반란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고,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그는 독신생활을 하였으나 그 동안에 질녀(姪女) 안겔라 라우발(1908∼1931)을 사랑하였고 그녀가 1931년 자살한 후로는 에바 브라운(1912∼1945)을 사랑하여, 그의 자살 전날에 결혼하였다. 또 그는 채식주의자이며 담배와 술도 하지 않았다. 밤에는 새벽 3,4시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며 아침에는 정오에 가까운 시간까지 침대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면서 현대문학이나 현대회화를 억압하였고, 19세기적 예술을 애호하여, 특히 각종의 장려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자기 주위에는 의사 ·사진사 ·운전기사 ·비서, 기타 정치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모아 두었으며, 개인생활에서는 정치관계자와 교제하지 않았다. 매사에 우왕좌왕하는 타입이었고, 그의 일이 순조롭게 되어갈 때에는 남의 의견도 잘 들었으나, 일단 결정된 방침은 결코 바꾸지 않는 옹고집이었다. 사상적으로는 인종론자이었는데, 모든 인종은 우열(優劣)이 분명하여 열등인종은 아무리 교육을 하고 환경을 개선해 주어도 열악한 성격이 바꾸어지지 않으므로 멸종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인종의 성격은 유전적으로 확정되어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우수한 인종도 생존권을 확장하지 않거나 열등한 인종과 혼혈이 되면 몰락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 러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을 지배한 다음에는 미국을 타도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생각하였다.
참조] http://members.nate.com/nsd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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