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칭기스칸 운구행렬 본 생물체는 모두 죽었다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8. 15:07



(로컬 비행기에서 바라본 몽골의 산맥, 촬영 강종진)


서몽골 황금산맥을 따라서

몽골은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동몽골은 광활한 초원, 남쪽은 막막한 사막이다.  북쪽은 아름다운 호수와 침엽수림이 어우러진 천혜의 풍광이다. 오늘은 서몽골을 여행해보자.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서쪽으로 1500킬로미터, 수도와 1시간 시차가 날만큼 먼 곳에 웅장한 산맥 하나가 있다. 우리말로 ‘황금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를 가진 ‘알타이 산맥’이다.  몽골의 서부를 가로지르는 산맥이다.  우랄 알타이 어족이란 이름으로, 신라 김알지왕의 이름중 ‘금’도 ‘알’도 모두 ‘황금’을 뜻한다는 어원적 해석으로, 우리에게 꽤 친숙해진 지명이다.


이 알타이산맥을 따라 가노라면 아직도 매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바양울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만년설  산이 하르 호수에 비쳐 엽서 그림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땅 홉뜨 아이막(아이막은 광역자치단체, 우리말로 치면 道에 해당한다)도 만날 수 있고, 검은 산맥과 하얀 모래사막이 쌍을 이루어 달리고 있는 고비알타이 아이막과 우문고비 아이막에 닿는다. 길을 따라가며 몽골을 느끼기에 알타이산맥은 숨은 보배 중 보배이다. 


알타이산맥에는 해발 4000미터가 넘어 항시 눈이 쌓여있는 만년설이 두 개 있다. 그중 최고봉은  홉뜨 아이막에 있는 산 뭉크 하이르항이다. 4700미터가 넘는 이 ‘영원한 산’은 홉뜨의 입구에 펼쳐진 하르 호수에 비쳐 신비로운 화면을 만든다. 그 동네 출신 교수도 이름의 뜻을 모르는 참바 가라우산도 아름다운 만년설이다.(몽골인들이 쓰는 명칭 중에는 티벳어나 산스크리트어가 많은데, 그럴 경우 뜻을 알지 못하는 말이 많다고 한다. 유명한 호수인 흡수굴, 칭기스칸의 고향인 헨티 같은 이름들도 뜻을 알 수 없다). 이 두개의 산은 자황아이막(몽골의 서북쪽 고비알타이와 흡스굴 중간에 위치)에 있는 항가이산맥의 오트공 텡게린 산(막내의 하늘이란 뜻)과 함께 몽골의 3대 만년설을 이룬다.


산은 사람을 용맹스럽게 기른다. 알타이 산맥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오이라트족으로 대표되는 용맹스러운 전사들의 고향으로 더 유명하다. 오이라트는 오이와 아라트가 결합되 만들어진 말인데, 오이는 산림을 의미하고 아라트는 인민이라는 뜻으로 오이라트는 산사람들, 산림부족이라 할 수 있다. 오이라트족에는 칭기스칸과 안다였던 네명의 장수의 후손이란 뜻의 두르브드족, 부자들이라는 뜻의 바야드족, 국경을 지키는 사람이란 뜻의 자흐칭족 등이 살고 있다. 하지만 오이라트족을 대표하는 최고의 부족은 오랑캐란 말의 어원을 낳은  오리앙카이족이다.  ‘오리야’는 전쟁을 할 때 큰 소리를 지르며 뛰어간다는 뜻인데, 여기에 '유명하다'는 뜻의 앙카이가 붙어 만들어진 부족명이다. 종족의 명칭부터가 전쟁에 앞장선 사람, 용감한 사람이란 뜻이니 그들의 용맹은 자타가  공인했던 것 같다. 여기서 비롯된 오랑캐란 말은, 그러나 중국사람들에게 주변민족을 업수이 여기는 보통명사가 돼버렸다.


알타이산맥에 위치한 가장 유명한 지역은 역시 홉뜨 아이막이다. 그러나 서몽골의 대표지역 홉뜨는 즐거움이 많은만큼 쉽게 접근하기도 어렵다. 모기가 하늘을 가렸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만큼 무섭고 공포스러운 모기의 천국이기도 하다. 동몽골에 가면  파리떼(등에)의 공격에 시달리게 되는데, 서몽골의 모기떼도 동몽골의 파리떼 못지않다. 초원에 발을 내디디면 풀잎에 붙어있던 모기들이 일제히 무릎 높이까지 웅 하고 날아오르는데 마치 새까만 포장을 흔드는 것 같다. 매섭기는 또 얼마나 매서운지. 서몽골도 대개의 지역은 찬바람이 많고 건조해서 모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지만, 입구인 홉뜨 공항이 모기 천국이다보니 방문자들에겐 모기 도시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만항솜에 있는 호이트 쳉헤린 동굴, 이 안에 수많은 고대 그림이 숨어있다. 촬영 김호석)

큰 출혈 없이 모기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면 절반은 성공이다. 이제 홉뜨의 진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버스를 타고, 아니면 러시아제 '풍뎅이 봉고차'를 타고 남쪽으로 90킬로미터쯤 달리면 만항솜이 나오고, 그곳에  호이트 쳉헤린 아고이가 있다. '북쪽의 푸른 동굴'이란 뜻을 가진 고대 그림이 모여있는 곳이다. 정착민이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만들었을 당시 유목민들이 남긴 그림들로, 양을 치던 어린 목동이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관리가 소홀해 새들의 분비물이 많이 쌓여 있지만, 벽면에 그려진 소나 말, 낙타, 사람 등의 그림을 보면 수십만년의 세월을 버텨온 유목민의 문화가 절절히 느껴진다. 동굴 아래로 흐르는  쳉헤린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10만 점이 훨씬 넘는 바위그림들을 볼 수 있다. 바위에 동물들의 모양이나 자신들의 소망을 새겨 그린 암각화는 몽골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중 만항솜의 바위그림은 학계에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대개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그림들이다.




(호이트 쳉헤린 동굴에 있는 고대 그림, 말과 소, 사슴과 낙타 그림이 산재해있다, 촬영 한희덕)

산맥을 따라 홉뜨의 남쪽 고비알타이 아이막을 가보는 것도 좋다. 알타이 산맥이 그쯤에서 낮아져 백두산만한 고개(해발 2750m)를 넘어서면 작은 개울이 나오고, 그 계곡을 따라 찬바람이 분다. 여름이 우리의 겨울만큼 시원한 계곡, 한탄실이다. 그 계곡이 유명한 것은 여행객을 위한 단촐하고 편안한 겔 리조트 때문만은 아니다.




(고비알타이에서 한탄실로 가는 길, 해발 2750미터의 알타이산맥 정상이다. 촬영 박종순)

1227년, 서하를 재정벌하러 가던 칭기스칸이 사냥을 하다 낙마해 입은 내상으로 목숨을 다했을 때, 그 운구행렬이 지난 곳이 바로 한탄실였다고 한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운구행렬과 마주치는 모든 생명체는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마르코폴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칸의 시신을 운구하던 자들이 도중에 마주친 모든 사람을, “다른 세계로 가거라. 그리고 그곳에서 너희들이 돌아가신 군주를 모셔라”라고 말하며 쳐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내세에서 그의 하인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칸이 타던 말들도 비슷하게 처리되었다. -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중 [베네치아에서 중국으로]


한탄실 계곡을 넘어선 칭기스칸의 시신은 오논강 상류에 안치되었다고도 하고, 보르칸 칼돈산으로 옮겨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 중국의 내몽골에 있는 가묘를 포함해 어느 지역도 칭기스칸의 무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지금도 한탄실 계곡에 가면 산 위에 커다란 오보가 있어 지나는 과객을 맞는다.


알타이 산맥의 끝자락인 우문고비(남쪽 사막), 두 개의 산이 우뚝 솟아 5천리를 달려온 산맥의 소멸을 아쉬워한다. 보그드산이다. 두 산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바른 보그드(오른쪽 보그드산)와 준 보그드(왼쪽 보그드산)라 부른다. 이 곳에서 보는 비경은 알타이 산맥과 나란히 선 하얀 모래 산맥이다. 북풍에 실려온 모래 알갱이가 알타이산맥에 부딪쳐 하늘을 유영하다 머문 곳, 그곳이 바로 홍고린 엘스부터 시작해 300킬로미터나 뻗어있는 웅장한 모래산맥이다. 높은 곳은 800미터까지 이르니 모래로 된 태백산맥이라 할 만하다.

 

 

[문화비젼] 몽골 드라마 '칭기즈칸' 유감  (조선)

오성찬 작가
입력 : 2005.11.11 18:47 49' / 수정 : 2005.11.11 21:57 59'


 


▲ 오성찬 작가
“몽곳 놈 ×로 맹그라분 거!”

내가 사는 제주에는 예부터 이런 욕설이 전해 내려온다. 아직도 더러 쓰이는 이 욕설의 내용은 “몽골 놈의 그 물건으로 만들어버린 자식”이라는 것이니 “몽골 놈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어려서는 그 욕설의 의미를 잘 모르고, 그저 아주 나쁜 욕이로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러다가 차츰 지역사(地域史)에 눈뜨면서 그런 욕 몇 마디에 역사적 일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몽골의 침략과 성화에 견디다 못하여 개경(開京)에 있던 고려 조정과 무신정권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했다. 이들 중 삼별초(三別抄)가 1000여척의 배에 나눠 타고 서해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 1270년 6월의 일이었다. 그들은 쫓기며 서해를 거쳐 진도(珍島)로 내려와 이 섬에서 용장성(龍藏城)을 쌓고 버티다가 다시 한번 여(麗)·몽(蒙) 연합군에게 호되게 깨진 다음 이듬해 5월 마지막 장수 김통정(金通精)을 앞세우고 제주로 들어온다. 그리고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버텼다. 그러나 1273년, 고려와 몽골, 그리고 한군(漢軍) 등 1만 연합군이 쳐들어오면서 1300명은 포로로 잡혀가고, 나머지는 싸우는 중에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다.

이후 몽골군은 군사 500명을 제주 섬에 남기고, 자기들의 목장으로 달라고 억지를 부린다. 일본 정벌을 위한 교두보로 이곳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제주는 최영 장군이 목호(牧胡)를 토벌할 때까지 거의 100년 동안 몽골에 말을 길러 바쳐야 하는 목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은 성산읍 수산평에 160필의 말을 들여다 풀어놨고, 그것이 제주가 몽골의 목장화하는 상황의 시초가 되었다.

그들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지방관리인 다루가치와 유배인들을 제주로 들여오기도 했다. 유목민들이었던 그들의 습속이 제주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났을 것인가는 불 보듯 뻔하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대원(大元)’본관인 성씨(姓氏)가 열 개쯤 됐었다. 모두 몽골 100년 이후 제주에 귀화한 이들이 새로 만든 본관이었다.

제주에 들어오기 전에도 몽골은 무려 일곱 차례나 고려를 침공했다. 그들에게 쫓긴 거란인들이 압록강을 건너온 것을 기화로 1218년 1월부터 쳐들어오기 시작했고, 1254년 막판에 쳐들어온 몽골 장수 차라타이(車羅大)가 이끄는 군대는 광주와 목포·신안 등 남쪽 지방까지 내려오며 전국토를 유린했다. 이때 포로로 붙잡혀간 고려인만도 20만명이 넘었다. 난리 통에 죽은 고려 백성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처럼 새삼스럽게 몽골의 한반도 침략사를 되새기게 된 것은 주말 밤마다 KBS에서 방영하는 몽골 드라마 ‘칭기즈칸’ 때문이다. ‘불멸의 이순신’이 아쉬움 속에 막을 내린 직후, 그 후속 작품이 하필 ‘칭기즈칸’이라니.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공영방송이 선택한 그 작품에 대해 나는 의아했고,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이 작품은 몽골이 대표작으로 자랑하는 드라마를 들여다가 우리 말을 입혀 방영하고 있다. ‘칭기즈칸’을 우리 눈으로 재해석한 것이 아니니, 그의 군사에게 유린당했던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을 리 없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그의 뒤를 이은 일본 역사의 영웅 드라마를 지금 우리 TV가 방영할 수 있을까? 1218년 칭기즈 칸의 군대, 1270년 쿠빌라이 칸의 군대에 침략당한 역사적 경험은 그 후 700년이 넘도록 욕으로 남아 있었다. 적 수장(首長)의 영웅담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