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허구적인 종교 개혁과 잔악한 살상을 밝히며 | ||||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 의한 인간 사냥의 역사 | ||||
1장 칼빈이 제네바 시에서 자행한 참혹한 인간사냥의 실상 왜곡된 주장에 의해 발생된 잘못된 역사가 정통으로 남아 있다면 이는 반드시 바로 잡아져야만 한다. 단추가 잘못 꿰어져 있다면 풀어서 처음부터 다시 기워야 하듯이 역사 또한 그러하다. 칼빈에 대한 역사평가는 그러한 요구를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의 잔악한 행위들과 교리적 오류들이 진리의 이름으로, 성경의 이름으로 지지된다는 것은 더욱 황당한 일이다. 칼빈이 이론적으로 무엇을 주장했느냐 하는 것은 그 허구가 분명하지만 역사과 정통이라는 가면에 의해 뒤덮여져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며 기만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위장된 정통을 의심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위에 안주하며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칼빈주의 사상체계는 형이상학도 아니고, 증명이 불가능한 교리적 이론도 아니다. 그렇다고 성경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다. 정당화 될 수 없는 증명 가능한 허구이며 위장된 거짓체계일 따름이다. 왜 칼빈의 교리내지 세계관적 이론이 허구냐 하는 것은 다음 책에서 밝히기로 하고 본 서에서는 그 허구에서 나온 만행적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나쁜 나무에서 비롯된 허구적인 열매라는 것을 증명함으로 그리스도와 무관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1. 칼빈주의 자들의 위선적 주장과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예수님의 교훈 3가지 1) 칼빈의 실체를 밝히는 예수님의 교훈 3가지 (1) 그리스도의 특별한 세 가지 교훈 예수 그리스도는 겉과 속이 다른 겉과 다른 속의 본질이 사악한 존재에 대하여 몇 가지 의미있는 교훈을 전했다. 기독교 정통이라는 이름 하에 그 역사와 위장된 사상적 본질을 덮어두고 있는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이 그것을 말해 준다. 첫째는 양의 옷을 입은 거짓 선지자의 교훈이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양의 옷을 입은 선지자로 비유하셨다.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바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8:18-20]고 하셨다. 역시 사람이 어떤 교리나 사상을 지녔느냐에 따라 그 행위나 행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교리도 그렇지만 그 행실도 그것을 말해 준다. 나무와 열매의 관계는 필연적인 관계이며 드러나지 아니한 양자는 서로간에 드러내지 아니한 내면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방법이다. 두번째 교훈은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거짓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교훈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3]고 하셨다. 1항이 나무에 비유하였다면 후자의 이 말씀은 사람을 직접 겨냥해서 말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속에 무슨 생각을 지니고 있느냐, 어떤 의식을 지니고 있느냐, 어떤 교리와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곧 그의 행실로 표출되어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과 그의 후예들이 저지른 만행적인 역사는 그들의 교리적 내면의 허구가 어떠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내면적 허구를 반영해 주는 것이다. 못된 나무가 맺은 나쁜 열매라는 행실로 드러난 결과들을 아무리 거룩한 가면으로 포장 내지 도배를 한다 해도 내면의 본질을 감출 수도 속일 수도 없는 것이다. 세번째는 ‘거짓을 말하는 자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8:44]라는 교훈이 그것이다. 거짓된 자들이 진리를 위장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 때 사용되는 진리는 이용당하는 수단으로서 ‘제것으로 말한다’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요8:44]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진리를 ‘제 것으로 말하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여기에 대한 역사적 증거로 가장 돋보이는 존재는 역시 칼빈과 칼빈주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진리를 제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외면적으로 보았을 때는 철저하게 진리로 보이나 실은 진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용되는 진리는 수단화되어진 거짓으로 그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 실상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도둑질되어진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이 저지른 무자비한 살상이 그것을 말해준다. 칼빈과 칼빈주의 자들이 성경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배경에는 바로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마하면서 살인행각을 일삼은 것이다. 칼빈의 교리는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아 말하는 기만의 대명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칼빌이 자행한 무자비한 행위들을 그에 대해 진정한 재평가를 내려야 한다. (2)본 글의 목적과 방향 본 글은 칼빈의 교리 내지 사상을 분석한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이 저지른 수많은 살상적 만행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옷을 입고 진리로 가장했다고 해도 살인자는 어디까지나 살인자이다. 소위, 신교는 카톨릭의 만행과 부패를 저항하고 나온 종교개혁 집단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신교는 카톨릭에 대한 염증이 곪을 때로 곪은 상황에 편승하여 카톨릭의 근간을 그대로 유지한 가면적인 시류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개신교의 역사나 교리를 돌이켜 보면, 카톨릭의 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리와 세계관 및 신학체계의 근간이 그러하며 수많은 살상과 부패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사고체계가 그러하다. 단지 기독교 초기에 수많은 타협에서 나온 카톨릭의 비 성경적인 요소들을 제거했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으나 정작 먼저 배척하고 버렸어야만 하는 핵심적인 것들은 그대로 유지한 채 인류를 기만하는 카톨릭적인 행위들은 신교지도자들, 특히 칼빈과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그대로 유지되고 그 행위로 나온 것이다. (3) 칼빈의 잔악한 살인 행각이 밝혀져야만 하는 이유 일반적으로 일컫기를 칼빈의 교리와 사상을 기독교의 정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정통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에게만 정통이지 성경과는 무관한 정통이라는 것을 유념에 둘 필요가 있다. 다만 그 정통이 성경의 정통인 것처럼 간주해 왔던 것은 아직까지도 인류가 그들이 어떤 허구와 거짓된 교리 속에 있는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간주되었을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전력을 다해서 칼빈과 그의 후예들이 주장하는 칼빈의 사상이 어떤 허구속에 있는 거짓된 교설인가를 명백하게 가려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칼빈의 사상과 교리가 허구이기 이전에 칼빈과 그의 후예들이 벌인 참혹스러운 이와 무차별적인 살상의 실상을 먼저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자행한 행위만으로도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반그리스도적 행위라는 것이 얼마든지 증명 가능한 일임에도 아직 역사는 여기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맹신하고 쫓고 있다. 또한 그와같은 사상과 행위로 인하여 교회가 심각한 몰락의 현상을 초래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소경을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2)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칼빈의 개혁과 인권에 대한 찬사들 (1) 칼빈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칼빈의 개혁에 대한 찬사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장로교인들이나 그를 개인적으로 추종하는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이야말로 종교개혁을 이룩한 사람으로써 그가 스위스 제네바시를 개혁한 것을 두고 대단한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주의 자들은 주장하기를 '칼빈의 개혁으로 인해 가장 질서있고, 가장 깨끗하고 모범적인 도시가 되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의 산실이 되지 않았던가?('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한경철, 1992중판, 한국문서선교회, p.260) 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흔히 개신교들 특히 칼빈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해 내는데 대단히 공헌한 종교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칼빈이 이룩했다는 개혁 이전에 그가 자행했던 무자비하고 잔혹한 행위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빈에게는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자행했던 역사적 진실에 대한 원인과 과정, 특히 화려한 가면으로 덮어버린 선전적인 결과만 가지고 평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의 소기자 많다. (2)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칼빈의 인권에 대한 찬사 한국에서 칼빈의 사상에 가장 정통하다는 총신대학교의 정성구 총장은 '칼빈주의 사상대계'란 저서에서 '칼빈주의의 원리에서 세운 나라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높이 보지 않는 나라가 없다'('칼빈주의 思想大系', 정성구, 총신대학출판부, p.288)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존엄성이란,...이웃을 사랑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보호하는 것 뿐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에 대한 보상, 개인이나 사회에 높은 도덕을 유지할 수 있는 것 등은 모름지기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였다'('칼빈주의 思想大系', 정성구, 총신대학출판부, p.288)라고 하였다. 하지만 칼빈이 자행한 만행을 보면 과연 그러한가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칼빈과 칼빈의 후예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드높였으며 다른 사람의 재산을 보호해 주었는가에 대하여 냉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덮어 둔 역사를 다시 꺼내어 살펴보면 사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으며 무고하게 탈취했는냐 하는 것에 대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만행을 돌이켜 보면 정성구 교수의 주장이야말로 얼마나 가증스러운 위선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칼빈과 칼빈주의 자들의 만행적인 역사를 과감히 드러내 그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저 멀리 떨어져 있어 칼빈주의 자들이 외치는 기만적인 선전에 우롱당할 여지가 적지 않다. 따라서 문제의 실상을 바로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칼빈이 다스린 제네바 시의 규모와 정책 1) 제네바 시의 규모와 칼빈의 인간사냥 (1) 칼빈이 다스렸다는 불과 1만 3천명의 제네바 시 칼빈주의자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칼빈이 개혁했다는 당시 스위스 제네바 시는 그 명성에 걸맞는 규모와 달리 전체 인구는 불과 1만 3천명에 불과하였다. 1만 3천명이라고 하면 우선 칼빈이 개혁했다는 제네바 시의 규모에 대한 환상부터 깨야만 한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불과 1만 3천명을 장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규모는 오늘날 서울로 말하면 한 아파트 단지 만도 못한 인구의 아주 작은 한 시골에 지나지 않는 도시였다. 칼빈이 제네바시를 종교 개혁시켰다고 하는 거대한 선전에 기만당해 칼빈이 제네바 시를 개혁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그가 대단한 세계, 대단한 국가, 대단한 나라를 개혁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그 규모도 그렇거니와 그 개혁의 방법론은 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죽이고 칼을 앞세워 탄압하고 살육하는 방식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도시를 군사력으로 동반한 권력자가 장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사 1만 3천명 되는 소도시에서 누군가가 칼빈에게 반란을 일으킨다손 치더라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칼을 앞세운 질서라면 결과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세상에는 칼빈보다 더 위대한 개혁가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그야말로 1만 3천명 밖에 되지 않는 제네바를 칼이라는 무력의 강제 수단으로 질서를 잡아 놓고 그것을 개혁이라고 외치는 실상과 그가 벌린 인간 사냥의 역사는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만 한다. 심상용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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