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어느 사이트에 이런 글이 메인으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한국 공주와 일본 공주의 비교"
호기심에 글을 클릭해 보았는데 한국 공주와 일본 공주의 사진을 올려 놓고 외모를 비교하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국 공주에는 가수 이석씨의 딸을, 일본 공주로는 아키히토의 딸인 노리노미아 공주를 올렸습니다.
사실 이석씨의 딸은 공주가 아니므로 그런 비교가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지만 굳이 비교를 한다하더라도 방법이 틀린 것입니다.
우선 두사람의 외모를 비교하여 우열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이 한심한 것이지요.
미스코리아와 미스 일본을 비교하는게 아니쟎습니까.
공주의 덕목으로는 인품, 지식, 교양, 분위기, 사회활동, 봉사활동등도 있을터인데 오로지 사진에 표현된 얼굴 외모만으로 어디가 났다 못하다라고 이야기 하는게 문제지요.
두번째 문제는 그 두사람의 비교를 전체 한국여성과 전체 일본 여성의 비교로 비약시킨 댓글들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토를 달았는지 모르겠으나 내용이 한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원래 일본 여자들은 못났다든지 한국 여자가 제일 낫다는등의 입증하기 곤란한 주관적이고 편협한 주장들이 객관적 사실처럼 혼동되어 기술되고 있었습니다.
자~ 논리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한국 여자라는 개념과 일본여자라는 개념은 집합 개념입니다.
그러면 일본여자와 한국 여자의 비교는 두 집합간의 비교입니다.
그러자면 대표값의 비교가 이루어져야 하고 보다 더 상세한 비교를 하자면 분포도와 편차등의 개념을 동원해야 할것입니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무시하고 수천만의 원소중 하나와 또 다른 수천만의 원소중 하나를 대비해서 이 집단이 낫느니 마느니 하는 판단은 틀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외모란 것은 개인적인 판단이며 외모의 가치는 수치화할 수 없으므로 애당초 비교가 불가능한것입니다.
결국 두 개인의 사진만 보고 한국 여자와 일본여자의 비교로 비약하는 것은 한마디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오류지요.
가장 큰 문제는 그런 무식한 의견들이 아무런 견제를 받지않고 수십개의 비슷한 댓글들이 줄줄히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집합간의 비교 방법을 모를까요? 외모를 계량화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를까요?
공주이건 평민이건 외모외에 다른 중요한 평가 요소는 없다고 생각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시험치면 좋은 답안들 써낼 사람들이고 외모를 계량화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고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서도 평소 비판해 오던 사람들이 대부분일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댓글을 쓸까요?
상대가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 글이 만들어 놓은 장(場)에서 일본은 적이고 한국은 아군입니다.
한국은 다 좋고 일본은 다 나빠야 합니다.
대개 좋은 편 나쁜 편 다툼에서는 매우 유치하고 원초적인 지표들이 비교대상으로 부상합니다.
우리 아버지 힘이 너거 아부지보다 더 쎄다. 우리 엄마다 더 이뿌다.. 우리 집에 돈이 더 많다.
우리 삼촌 판사다. 내 팔뚝이 더 굵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도 매우 저열하게 진행됩니다.
너거 아부지 거지다. 너거 엄마 창녀다. 너거 할배 절뚝발이다.
아이들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저렇게 합니다.
일단 진영대결의 장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천박해지고 논리는 무력화됩니다.
예전에 제가 예로 든것이 있습니다.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군의 말싸움꾼은 신라군의 장수에 대해서 사생아 출신이라고 놀리는 욕을 하는데 거기에 대해 백제군 모든 병사들이 하하 웃으며 박수를 치며 좋아합니다.
제 생각에는 손뼉을 치며 웃는 병사중에도 사생아가 몇명 있을 겁니다. 그들 사생아 출신 입장에서는 전쟁터에서의 사생아에 대한 비난을 치사한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얼굴이 굳어져야 정상일 터인데 오히려 같이 웃고 박수칩니다.
진영대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영대결에서는 논리가 무너지고 가치가 뒤집어집니다.
과거 70년대 80년대 김정일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의 엽색행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엽색행각을 비판하는 그런 체제에서 박대통령의 호색은 남자의 아랫도리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논리로 눈감아 주었습니다.
즉 진영 대결에서 가치는 어차피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위에서 살폈듯이 논리도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노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공격하는 조선일보나, 한나라당이나, 일부 시민들의 글이나 말에서 그런 진영대결적 접근을 보고 있습니다.
논리적 접근은 무시하고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가치의 일관성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인 반대로 일관해서 그 반대의 근거는 즉홍적으로 아무데서나 끌어옵니다.
마치 일본 공주에 대해서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저급한 비교기준을 들이대며 비난하는 일부 아이들처럼 말이지요.
비판은 좋은 겁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영대결의 병사들 방식으로 접근 할것이 아니라 가치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사실의 확인에 바탕하며 논리적 정합성을 갖춘 상태에서의 비판을 청하고 싶습니다.
조선일보는 그런 면에서 비판 받을 부분이 언제나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진영논리로 접근합니다.
이번 강정구 사건도 검찰을 비롯한 국민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던 발언을 조선일보가 며칠간 꾸준히 기획보도로 대서특필하여 문제화 시켜나갔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것이지요.
세력다툼의 논리가 바로 진영논리와 같은 것이지요.
그나마 야당의 한나라당 의원들 중에는 논리적 가치적 일관성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소신 발언을 하는 이들이 제법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강정구 사태에 대한 손학규의 논평은 자신의 진영 이익과 논리적 일관성을 조화시키려고 한 노력이 돋보입니다.
일부 사실 왜곡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 정도의 소신을 가진 사람이 야당에 있다는 것은 차후 정권이 야당에 넘어가더라도 안도를 할만한 것입니다.
누가 이기고 지는것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믿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탈세가 잘못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 진영측이건 상대 진영측이건 탈세하는 사람이라면 비판해야 하고,
도덕적 문란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우리 진영이건 상대 진영이건 도덕적 문란에는 다 같이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 편이라고 눈감아주고 상대편이라고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사이에 누가 이기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다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게 더 중요한것 아닙니까?
물론 저의 이런 주장은 정부 여당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대상으로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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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의 글 일부 인용)
자유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참고 인내하는 제도이다.
강정구 교수가 한국전쟁을 어떻게 해석했건 찻잔속의 태풍에 불과하다. 별난 사람이 이치에 닿지 않는 발언을 했구나 하는 정도로 치부하고 지나치면 그 뿐이다. 세상엔 별난 사람도 많은데 교수가 인터넷 신문에 쓴 말도 안되는 글 하나로 왜 이렇게 온 나라가 시끄러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강정구 교수가 정부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비중있는 학자도 아닌데 말이다.
학문적인 비중은 없어도 학생들을 선동할 수 있다고? 그럴 염려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신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런 정도의 충격은 충분히 흡수할 사회적 역량을 갖고 있다.
과거 영국같은 선진 사회에서도 멀쩡한 옥스퍼드 대학생들이 트로츠키주의 선전물을 길거리에서 배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행인들은 그저 무표정하게 선전물을 받아서 조용히 휴지통에 집어넣는다. 그 학생은 조금 뒤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이 강의실에 들어가 수업을 듣는다. 그 학생은 아마 다음해 졸업해서 깔끔하게 넥타이를 매고 런던의 은행가에 취직해 다니며 사회에 적응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별의별 사람들이 많고 별의별 이론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게 마련이다. 이런 것들 가지고 호떡집에 불난 것 같이 떠드는 것은 성숙한 사회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에 휘둘릴 사회가 아니다. 이정도의 궤변은 충분히 인내하고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성숙한 사회이다. 어른이 아이들 장난 좀 친다고 큰소리 치고 흥분하면 그 어른이 우스운 꼴이 된다. 형법에서도 정신이상자는 처벌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강정구 교수 문제를 갖고 온 사회가 떠들썩한 것은 강정구 사태를 즐기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념논쟁, 색깔논쟁에 불붙여 편가르고 패거리지어 지지층을 묶겠다는, 정치적으로 재미 좀 보자는 심뽀다.
강정구 교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결과적으로 강정구 영웅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20-30명의 학생들이 학점 때문에 억지로 앉아 시큰둥 듣고 있는 강의를 2-30 명의 취재진이 몰려가 취재에 열을 올리고 대문짝 만하게 사진을 올리는 한국의 언론, 지구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모를 이름 없는 교수의 되지도 않는 글을 갖고 사설까지 써대며 열을 올리고 있는 유력 언론들의 모습도 한심하기는 매 한가지다.
소모적인 이념논쟁, 또 이것을 이용한 편가르기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그럴 시간에 그런 에너지 갖고 경제 살리고 일자리 하나라도 더 만드는데 힘써야 한다. 공장 앞에 길이라도 하나 더 내주고, 자금난 해소를 위한 금융지원책을 강구하고, 외국의 첨단기술 유치하기 위해 한가지 조건이라도 더 충족시켜줄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 시간에 기술개발해서 10년 20년 후 먹고 살 길을 준비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닦는 일에 치중해야 한다. 일자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고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해야 한다.
공허한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의 실학정신으로 우리자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민생을 챙기고 실질을 숭상하는 경세치용의 정신으로 우리 정치를 혁신해야 한다. 지금 남양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에 서 개최되고 있는 실학축전의 뜻도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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