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242년 이후 고구려가 위, 연 등을 공격하며 요동경략에 나서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해(발해만)를 건너 중국의 남부 및 요서지방으로 진출한다. 246년 고이왕(古爾王) 13년 서한(西漢)의 낙랑(당시 낙랑군은 북경 부근의 서한의 낙랑, 평양의 최리의 낙랑국이 있다)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분서왕(汾西王) 7년(298) 낙랑군의 서현을 취한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조 및 분서왕 7년조) 이어 346년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여현과 북경 사이를 정복, 요서(遼西), 진평(晋平) 두 직할군을 설치하여 660년 백제 멸망때까지 250여년 간 통치하였음이 당시 중국의 여러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데, 주요 전거(典據)는 다음과 같다.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있다. 후에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를 취했다. 백제가 다스리던 지역을 진평군과 진평현으로 불렀다." 『송서』 「백제전」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에 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두었다. 백제의 자치군이었다." 『양서』 「백제전」
"백제는 처음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통전』
이외에도 백제의 요서경략 기록은 『남제서』, 『남사』 등 동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사서들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백제의 요서경략사에 대하여 일본 및 중국의 일부 학계에서는 관련 전거가 남조계 사서들에만 있고, 북조계 사서인 『수서』, 『북사』 등에는 없는 점과 우리 정사인 『삼국사기』 등에 자세한 내용이 없는 점을 들어 이를 회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이들은 이 당시 송, 제, 양, 진 등 남조계 왕조들이 중국내에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백제의 관할지로 오인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굳이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의문은 다음의 다른 자료들을 함께 고찰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먼저 618~628년 당의 영고 등이 주(周)의 효문제~정제(557~581)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 「백제전」에는 당시 백제와 송, 제, 양, 진 등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설명ㅎ는 가운데 양자강을 사이에 두었다는 대목(自晋, 宋, 齊, 梁 居江左)이 나온다. 이 당시 백제의 강역이 양자강 유역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또 『구당서』 「백제국전」에는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는 가운데 東北室新羅, 西渡海室越州, 南渡海室倭라 하여 서쪽 경계가 옛날 오(吳), 월(越)이 있던 양자강 유역(월주)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남제서』 「백제국전」에는
"이 때(490) 흉노와 돌궐이 또 다시 수 십만명의 기병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파견한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에게 대패하였다."
는 대목이 있어 이 당시 백제가 중원 땅에서 저 북쪽의 흉노 돌궐족과 대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같은 책 권 58 <열전>39에 보면 백제 동성왕이 제나라에 대해 이 때 큰 공을 세운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등을 각기 왕 또는 제후로 임명해 주도록 요청하는 한편 490~495년)간 중국내 백제 7군인 광양(光陽), 조선(朝鮮), 낙랑(樂浪), 성양(城陽)을 다스리는 장군을 태수(太守)로 봉해 줄 것을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미송위사(未松偉私) 등 일본 학자와 이병도 등 국내 일부 학자들은 이 때의 백제 7군이 광주, 나주, 신안, 고흥, 옥구 등 전라도 일대에 있었으며, 이 때 책봉된 왕 또는 제후, 태수들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4~6세기 당시 동북아시아 일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어불성설의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당시 거대한 제국이나 패권국이 아니고서야 어찌 왕 또는 제후를 임명할 수 있으며, 직할지를 통치하는 태수를 둘 수 있단 말인가? 특히 국내외 많은 학자들이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에 백제의 대륙진출과 일본지배 기록이 분명치 않은 점 때문에 소극적 해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분명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백제 전성시대에는 강병이 100만이었다. 남으로 월을 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경계로 하였다. 커다란 중원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렇듯 백제는 통전과 북사, 수서에 기록된 이름 그대로 100개 부족이 연합하여 널리 바다를 다스리는 나라(百家濟海)였으며, 이를 꽃피운 동성왕 이후에는 중국 요서 지역과 양자강 유역, 일본의 대마도 구주 일대에 22명의 담로(憺魯: 백제의 행정구역 또는 봉건영지로 해석되고 있으며 왕족들이 파견되어 통치했다함.'담을 두르다'→'다무르다'→'담로'→'다물'로 어휘가 변화하였다는 설도 있다)를 파견하여 250년 이상 동북아시아 남서부를 지배하는 거대한 해상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