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밝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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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한웅시대의 중국기록과 한국기록 >
제1절 한웅, 반고, 수인씨
앞의 1장 1절 중국의 삼황기에 나오는 수인씨(燧人氏)와 유소씨(有巢氏)는 이조시대(1,500년 전후 명종때) 박세무가 지어서 모든 백성이 다 배웠던 동몽선습에도 나온다.
"사람과 만물이 난 후 성인이 나오시어 하늘을 계승하여 나라를 세우니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 유소씨, 수인씨가 태고시대의 주인들인데 글이 있기 전이라 참고하기 어렵다 ----" 이다.
한국의 고기록에는;
"한웅씨가 무리 3,000을 이끌고 (일종의 근위부대) 백산과 흑수사이의 검불터(神市)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밝달이라 하였다. 사람이 모이는 곳을 천평(天坪:넓은 들)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丘:맑고 아름다운 땅: 압록강 건너)로 정했다." (삼성기전상편)
"---- 이때에 반고가 술법을 즐기며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한 지역을 떼어주기를 청하매) 허락하니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의 신장(수호장수)들을 이끌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돈황: 천산동쪽, 감숙성 서북)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諸 :견족의 군주)이라 하고 반고가한(盤固可汗: 밝달나라의 제후)이라 한다."
(삼성기전하편)
※ 공공은 복희씨 다음의 임금인 여와씨 때는 형벌을 담당한 대신이었으며 훗날 요임금, 순임금때의 치수관리의 관직명이 되었고, 유묘는 묘족출신이었음이 나타나며, 유소씨와 수인씨는 중국의 임금이 된 사람들로서 그들이 중국쪽의 조상이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다만 반고와 한웅의 이야기는 중국지역(주로 하남, 산서지역)과 관련이 없음으로 의도적으로 뺀 것으로 보인다.
한웅과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 한국과 중국의 역사기록에 다 나오는 것은 우리의 옛 기록들이 정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밝달나라를 한문으로 박달나무 단자(檀)를 써서 단국(檀國)이라고 했고, 옛날에는 중국에서 임금을 군(君)이라고 했으므로 단국의 임금을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원래 시조 단군은 밝달나라를 개국한 시조한웅을 말하고 곰설화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중국이 4333년 전에 아사달을 세운 분을 단군이라고 적고 그 이전의 역사는 문자가 없었던 시대의 이야기라 참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없었던 것으로 했고, 또 조선시대에는 사대주의가 판을 쳐서 중국의 기록을 진실이라고 찬양까지 하면서 받들어서 아시아 전체를 지배했던 시기의 우리역사 1,600년을 잘라내고 중국에 아부한 것이 오늘날까지 고착화되어 회복하지 못한 채 지금도 사대 식민사학을 배우고 있는 것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아니한가!
< BC.4,000년경 한웅의 밝달나라 건국 그림 >
제2절 태호 복희씨
(1) 중국기록
1. 태호 포희씨(太 犧氏)는 성이 풍씨(風氏)이고 수인씨(燧人氏)를 이어 왕이 되었다.
2. 뇌택(雷澤: 산동성)에서 태어났다.
3.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만들고 신통하여 만물의 덕을 밝혔다.
4. 주(注)에 이르기를; 동방에 있으면서 해처럼 밝아서 태호(太 )임금이라고 했다.
5. 도읍을 진(陳:하남성 개봉 동남쪽)의 동쪽 태산에 세우고 재위 111년만에 붕어했다. 용의 이름으로 관직을 삼아서 이를 용사(龍師)라고 했다.
6. 포희( 犧) 또는 밀희씨(密犧氏) 라고도 하는데 밀희는 복희(伏犧)로 발음 한다.
7. 그 후예가 주(周)나라 춘추(春秋)시대에 있었는데 임(任), 숙(宿), 수(須),구(句), 전유( 臾)의 나라는 다 풍성(風姓)을 받드는 자손이다.
8. 여와씨(女와氏) 역시 풍성으로 성덕이 있어 복희를 이었는데 여희씨(女希氏)라고도 한다.
9. 제후가 있었는데 공공씨(共工氏)에게 형벌을 주관하는 임무를 주었다. 축융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노하여 머리를 부딪쳐 죽으니 부주산 (不周山)에서 붕어했다.
(이상 삼황기)
10. 복희 후예가 여러 세대를 지나서 주(周)나라 때 다시 크게 일나기 시작했다.
(2) 한국기록
1. "시조 한웅으로부터 다섯 번 전하여 태우의 한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묵념하여 마음을 맑게하고 조식보정(調息保精: 호흡수련으로 기운을 증강시킴)케 하니 이것이야말로 장생구시(長生久視: 오래살고 영능력을 사용하는 것)의 방법이다. 아들 열둘 중 맏이가 다의발 한웅(6세)이고 막내가 태호(太 )라 하니 또는 복희(伏犧)라고 한다. 어느날 삼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어 만가지 이치를 통철하고 삼신산(백두산)에 가서 하느님께 제사드리고 괘도(卦圖)를 천하(天河:황하로 봄)에서 얻으니 그 획을 세 번 끊기고 세 번 이어져 있어서 자리를 바꾸면 이치를 나타내는 묘가 있고 삼극을 포함하여 변화가 무궁하였다." (검불본기)
2. "밀기에 이르기를;
복희는 검불(神市: 신의 광명이 비치는 밝은 땅)에서 태어나 우사(雨師:三韓의 하나: 보좌 왕)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당시는 만주)와 낙랑(후세의 북경지역)을 거쳐 마침내 진(陳: 하남성)에 옮겨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중국)에 빛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風山: 산동성 밝산)에 살았으니 역시 풍씨를 가졌다. 뒤에 갈리어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 ), 이(理), 사( ), 팽(彭)의 여덟 가지 성이 되었다.
지금 산동성 제수(濟水)에 희족의 옛 거처가 있다. 임, 숙, 수, 구, 수유(須臾)의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검불본기)
※ 사씨( 氏)는 황제헌원,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하나라 왕조)의 성씨이다. 임, 숙, 수 등은 주나라 말끼까지 산동성 서부지역에 살았으며 수유(須臾)는 산동성과 접경지대인 황하하류 건너 하북성 지역의 밝한-변한-번조선의 땅이었다. BC.238년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가 번조선의 제후였던 수유후(須臾候) 기비(箕丕)를 번조선 왕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번조선을 일명 기자조선이라 불렀다.
3. "대변경에 이르기를;
복희는 검불에서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용(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검불(밝달나라)의 계해(癸亥)를 바꾸어 갑자(甲子)를 첫머리로 하였다.
여와(女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받았다. 주양(朱襄)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를 전했다. 복희의 능은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검불본기)
4. "삼한비기에 이르기를;
복희는 서쪽 변방에 봉토를 받더니 직(職)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무기를 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씨를 대신하여 지역 밖까지 명령을 내렸다."(검불본기)
※ 중국은 자기네 조상이 된 복희를 산동성에서 낳았다고 썼고 한국은 만주의 본국에서 태어나 밝검의 동생으로서 우사를 지내고 서쪽 산동성을 거쳐 (산동성에서 살다가) 마지막에는 수인씨의 치소였던 진(陳)에 들어가 중국의 임금이 되었다고 했다. 중국인들의 역사기록 수법으로 보아서 우리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뒤에 순임금도 동이족 출신인데 동이족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 BC.3,400년 전후시대(복희시대) 그림 >
제3절.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1) 중국기록(삼황기)
1. 여와씨가 몰락하니 신농씨가(자력으로) 일어났다(임금이 되었다)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강수(姜水)에서 자라서 강씨(姜氏)로 성을 삼았다.
2. 염제신농, 황제헌원은 다 소전(나라)의 아들이다.
3.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서 신농이라 했다. 많은 약초를 혀로 맛보고 약을 만들었다.
4. 도읍을 진(陳: 하남성)에 있다가 후에 곡부(산동성)로 옮겼다. 재위 120년에 붕어했다.
5. 본래 신농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나서 열산씨(列山氏)라고도 한다. 또 여산씨( 山氏)라고도 한다. 괄지지에 여산은 호북성 수현(隨縣)이고 북쪽 백리의 동쪽 산 석굴에서 낳았다. 춘추시대의 여국( 國)이다.
6. 신농으로부터 유망까지 8대 530년만에 헌원이 일어났다.
7. 제(齊)나라 기록에 이(怡), 향(向), 신(申), 여(呂: 呂尙 강태공, 진시황 친부 여불위)씨는 모두 강씨성(姜氏姓)의 후예다.
제후, 사악(四嶽: 4대신), 주(周)나라 기둥인 신백(申伯)등 왕, 어진 재상, 제나라 제후 왕등 중국의 패자들로서 성덕이 대단히 넓어 복을 짓고 번창했다.
(2) 한국기록
1.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온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少典)은 소호(少 )와 함께 고시씨(高矢氏: 한반도의 조상: 밝달나라 농업장관)의 방계(: 첩의 아들 또는 둘째아들 이하의 혈통)이다." (검불본기)
2. "뒤에 갈고한웅(밝달나라 10세한웅)이 신농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획정하여 공상(空桑: 하남성 陳留)의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 (검불본기)
3. "한웅의 자손 중에 소전(少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 8세한웅)의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한(韓: 汗: 소전나라 군주)의 아들 신농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列山)으로 이사했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을 편리하게 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 중국의 기록은 중국에서 일어난 일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기록은 태호복희나 염제신농의 혈통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는 우리의 기록이 맞다고 본다. 그러니까 상고시대의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정황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제4절 황제헌원(黃帝軒轅)과 치우한웅(蚩尤韓雄)
(1) 중국기록(五帝紀)
1. 서광이 말하기를 "호(號)가 유웅(有雄)"이라고 했다.
색은(索隱), 대대례(大戴禮), 주송균(周宋均)은 "다섯제왕중의 첫 번째"라고 했고 공안국(孔安國), 황보밀(皇甫謐), 제왕대기(帝王代紀)등은 "복희, 신농, 황제는 삼황(三皇)이고 소호(少 ), 고양(高陽),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이 다섯 제왕이다"고 하였다.
주(註)에 이르기를 "호는 유웅이고 유웅국군(有熊國君)의 아들이다"고 했다.
2. 헌원(軒轅)의 언덕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헌원이란 이름과 호로 삼았다.
3. 여지지에는 "탁록( 鹿)이 본명이고 팽성(彭城)이 황제의 첫 도읍지인데 유웅으로 천도했다."고 했다.
4. 황제는 유웅국(有熊國: 웅족 즉 곰족의 나라: 후세의 초나라 민족) 임금이고 소전나라 임금의 둘째 아들이라서 유웅씨를 호로 삼았다. 진운씨(縉雲氏), 제홍씨(帝鴻氏), 제헌씨(帝軒氏)라고도 한다.
5. 유웅국 임금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少典)은 제후국호(諸侯國號 :밝달나라 의 제후국) 이다.
6. 염제(炎帝神農)도 역시 소전의 아들이다.
7. 황제는 수구(壽丘)에서 출생했는데 수구는 노(魯: 산동성)나라 동문(東門) 북쪽 지금의 연주( 州) 곡부현 동북 6리에서 태어났다. 수구에서 나고 희수(姬水)에서 자라서 희씨(姬氏: 周나라 왕실성씨)라고도 하며 헌원의 언덕에서 살아서 헌원이라고도 한다. 본래의 성은 공손(公孫)인데 희수에서 자라고 살았기 때문에 희씨로 고쳤다.
8. 유웅국 임금 유망(楡罔)에 이르러 쇠약해지니 제후들이 서로 침략하고 백성들을 학대했다. 신농국(유망정권)은 정벌할 힘이 없어 헌원이 창칼 쓰는 법을 익혀서 임금을 받들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했다.
9. 제후들이 다 복종했는데 치우(蚩尤)가 가장 난폭하여 벌할 자가 없었다.
주(註)에 응소(應 )는 "치우는 옛 천자(天子)다"고 했는데 공자(孔子)는 "치우가 서인(庶人:일반백성)으로서 탐욕자다"고 했다.
10. 염제(:유망)가 제후들을 정벌하려 하니 제후들이 헌원에게 귀의하였다.
11.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 치우는 노산에서 철을 캐서 다섯병기를 만들었고 서인(庶人)이 아니라 제후(諸候)의 이름이다."고 했다.
12. 정의(正義)가 말하기를;
"황제 섭정시에 치우 81인이 짐승의 몸(갑옷 입은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였다. 동(銅:구리)으로 된 머리와 철로 감싼 얼굴을 하고 (: 銅頭鐵額) 모래를 먹고(전술상의 속임수) 장(丈), 도극(刀戟), 대노(大弩)등 다섯 병기를 만들어 그 위세가 천하에 떨치고 만민을 주살 하는 무도한 짓을 저지르니 황제가 인의(仁義)로서는 그치게 하기 어려워 천자(天子)를 대신하여 정벌했다. 치우는 풍백(風伯),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큰바람과 비를 일으켰다.
13. 공안국이 말하기를 " 구려(九黎) 임금의 호(號)가 치우다"라고 했다.
14. 황제는 염제신농의 나라(황제당시의 천자 유망)와 판천(坂泉)의 들에서 세 번 싸운 뒤에야 그(자기가 천자 될) 뜻을 얻을 수가 있었다.
판천은 상곡(上谷)에 있다. 또 규주( 州) 회융현(懷戎縣) 동쪽 56리에서 5리쯤 나가면 탁록에 이르고 동북은 탁수( 水)가 합류한다. 또 탁록의 옛 성은 규주 동남 50리에 있다. 본래 황제가 도읍한 곳이다.
지리지에 "탁록성 동쪽 1리에 판천이 있고 그 위에 황제의 사당이 있다"고 했다.
15. 치우가 난을 일으켜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제후들을 거느리고 탁록의 들에서 싸웠다.
주(註)에 "탁록은 산의 이름이고 탁군( 郡)에 있다. 탁록은 상곡에 있다. 상곡은 탁록현에 있다"고 하였다.
16. 치우를 잡아 죽였다. 치우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東平郡 壽張縣 關鄕城: 산동성) 가운데 있고 높이가 7장(丈)인데 사람들이 10월이면 제사지낸다. 빨강기운이 솟구치는데 비단깃발 같아서 치우기(蚩尤旗)라 한다.
황보밀은 "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도 하고 또 황제가 참수한 사람은 치우중(81명중) 다른 사람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17. 황제가 동쪽에 이르러 바다로 해서 환산(丸山)에 올랐다. 환산은 낭야(郎耶) 주허현(朱虛縣)에 있다. 이어 태산에 오르고 서쪽으로 공동산(감숙성)에 오르고 남쪽으로는 웅상(熊湘: 호남성)에 오르고 북쪽으로 훈육( 育:북경북쪽의 동이족)을 쫓아냈다.
흉노전(凶奴傳)에 이르기를 " 요임금, 순임금 이전부터 산융(山戎), 험윤( ), 훈육( 育)이 살았는데 모두 북쪽 오랑캐(北蠻)다" 고 했다.
색은(索隱)에 " 흉노의 별명이라고 했고 요임금, 순임금 이전에는 산융 또는 훈육이라고 했고 하(夏)나라 때는 순유(淳維), 은나라 때는 귀방(鬼方), 주(周)나라 때는 험윤( ), 한(漢)나라 때는 흉노(凶奴)라고 했다."
※① 여기의 여러 족속의 이름들은 모두 현재의 요하 서쪽으로부터 티베트 지역까지 분포하여 중국 북쪽 전지역에 살던 우리민족이며 시대에 따라 이름만 달리한 것이다. 대체로 중국 북쪽인 하북성, 산서성 북쪽지역은 산융, 험윤, 훈육, 북적(北狄)이라 하고 , 섬서성, 감숙성 북쪽지역은 흉노라고 하였으며 산서성 서쪽, 감숙성 서쪽, 그리고 돈황지역까지는 서이(西夷), 서융(西戎), 견융(犬戎), 융적(戎翟)이라고 하였다. 특히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 북쪽의 민족을 전부 흉노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아서 흉노가 우리민족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 왔고, 이러한 전체지역이 모두 우리나라 즉 밝달나라와 뒤를 이은 아사달의 백성인 것을 숨기고 우리 나라 이름을 깡그리 빼버리고 각개의 부족이름만 기록하여 중국 외에는 나라가 없었고 보잘 것 없는 부족들만 살아온 것으로 왜곡하여 동북아시아의 주인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이 이런 수법에 속아서 중국의 역사만을 인정하는 사대식민학자가 된 것이다.
② 흉노족은 먼저 살던 우리민족과 후에 북쪽 몽골에서 내려온 몽골족과 합류해서 이루어진 족속이며 후세의 동호, 선비, 말갈(서요하 상류지역), 거란족이 모두 이들의 후손들이다. 후세에 나라가 각각 다르게 되어서 마치 다른 민족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모두 우리민족의 후손들로서 우리민족에 포함된다. 따라서 상고시대의 우리 나라 관경은 만주 동부로부터 티베트 지역까지이고 종주국으로서의 영향권은 천산- 파미르- 인더스강 유역까지 확대된다. 더 나아가면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로 확대된다.
③ 중국 동쪽과 양자강을 따라 호남성, 호북성 전지역에 이미 상고시대 이전부터 묘족(후세의 웅족, 남이, 남만)또는 여족의 터전이었고 계속해서 하남성 진류 동쪽을 우리가 점유하여 왔으므로 중국인의 중심세력은 하남성과 산서성 중남부의 아주 적은 지역에 국한되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하고, 중국민족의 구성이 이전의 묘족인 웅족(熊族)이며, 중국 왕조의 성립은 언제나 동이(東夷: 은나라, 한나라) 아니면 융적이라고 부르는 서이(西夷: 하나라, 주나라, 진나라 )를 기반으로 일어났는데 일단 일어난 후에는 왕실의 중심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족속 즉 동이나 서이 또는 남이 등을 모두 오랑캐로 취급하여 천대한 비열한 정책을 사용하여 왔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④ 중국인들이 부르는 주변민족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산적같은 놈들(산융), 풀잎같은 존재(훈육), 사나운 놈들(융,戎), 사나운 오랑캐(융적), 흉악하고 천한놈들(흉노), 오랑캐(동이, 서이, 남이, 북적, 남만),여(黎:천손족의 반대 땅의민족), 조선(朝鮮: 작은 생선처럼 손바닥만한 나라)등 인간이하의 아주 나쁜 이름들이다. 중국인들이 사용하고 붙여준 이름 중에 한가지도 좋은 뜻의 이름이 없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우리나라사람들은 그런 이름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여 왔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자기들만이 훌융한 인간이라는 주인의식에서 나온 것이지만 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상대를 밟아버리는 것은 우리민족에 대한 열등의식과 함께 역사를 뒤집는 하극상(下克上)에서 일종의 의도적인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우리민족들은 황제헌원때부터 요임금, 순임금, 주나라, 진시황의 통일제국등 언제나 중국의 왕조에 대하여 반항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민족과 중국의 대립성향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중국의 국가형성을 이해하게 된다.
18. 탁록의 물가에 도읍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병사들로 하여금 병영을 지키게 했다.
※ 도읍을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고 다니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은 치우가 얼마나 무서운 적이었는가를 반증하는 대목이다.
19. 관직이름을 청운(靑雲: 봄), 진운(縉雲: 여름), 백운(白雲: 가을), 흑운(黑雲: 겨울), 황운(黃雲: 중앙)등 구름의 이름으로 삼았는데 이를 운사(雲師)라 했다.
좌우에 대감(大監)을 두고 만국을 감찰하게 했다. 만국이 화평하게 되니 귀신(조상신)과 산천에 제사지내게 하니 크게 행해졌다. 봉선(封禪)은 옛부터 임금의 중추적인 일이었는데 황제가 크게 시행하게 되었다.
20. 공손(公孫)이란 이름은 헌원(軒轅)을 말한다. 재위 100년만에 붕어 했는데 능은 상군(上群) 교산(橋山: 섬서성)에 있다.
(이상 오제기)
21. 여(黎)는 동이국(東夷國) 이름이다. 구려(九黎)의 군주는 치우(蚩尤)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다. (사기권 1)
묘족(苗族)의 나라이름은 구려(九黎)이고 군주는 치우다.(중국민족사 P4)
22. 중국 갈홍(葛弘: 진나라 도사: 283- 343년)의 포박자(抱朴子)란 책에;
"옛날에 황제헌원이 있었다. 그가 동쪽으로 청구(靑丘)에 이르러 풍산(風山
: 산동성 밝산)을 지나 자부선생을 뵙고 삼황내문을 받아 이를 깨우쳐서 만가지 신을 부렸다.(昔有黃帝 東到靑丘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刻召萬神)
23. 서경(書經)은 4,000년 전에서 2,600년 전까지(순임금,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역사)의 역사서이며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에 자료가 되었다.
서경 상서(商書) 여형(呂刑)편에 치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형이란 주나라 목왕때 하남성 남양현 서쪽에 있던 여나라(呂國) 군주가 하나라의 법을 근간으로 하여 형법을 만들어 왕명으로 공포한 법이다.
그러나 목왕은 치우가 형벌을 남용하여 멸망을 당한 전설을 예로 들어 백성을 혹독하게 다스리지 말 것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백성들에게 미치었는데 남을 치고 살인하고 사악하여 안팎으로 난을 일으키어 강탈하고 훔치고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자가 없었소. 묘족 백성(苗民)들이 정령(政令)을 따르지 않으니 형벌로서 제재하고 다섯 가지 잔혹한 형법을 만들어 죄 없는 사람을 죽였소. 이에 코 베고, 귀 베고, 불알 까고, 얼굴에 먹칠 새기는 형벌을 과도하게 만들고 이 법과 형벌로 제재하여 죄상이 있는 자는 택하지 않았소.
백성들이 서로 속여 어수선하고 어지러워졌으며 신용스러움이 없으며 약속을 뒤집었소. 잔학한 형벌을 당해 치욕을 당한 여러 사람들이 하늘에 죄 없음을 고하였소. 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살펴보시니 아름다운 덕은 없고 형벌에서 발산하는 비린내뿐이었소. 위대한 하느님께서 여러 욕을 당한 사람들의 죄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잔학한 자에게 징벌로서 보복하시고 묘족 백성들을 대를 잇지 못하게 하셨소. 이에 하늘을 관장하며 신(神)과 연락을 담당한 중(重)과 땅을 관장하며 백성들과 연락하는 여(黎)에게 명하여 땅과 하늘의 통로를 끊게 하시니 강림하시는 일이 없게 되었소.----"
※ 중국인들은 황제헌원이 자기들의 조상이니 치우가 대단히 포악 무도하여 황제헌원이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치우의 존재를 사실로서 인정하고 있다.
24. 진시황의 진(秦)나라를 멸망시키고 한(漢)제국을 건설한 한고조(漢高祖)유계(劉季: 황제즉위 후에 劉邦으로 바꿈)는 "강소성 패현(沛縣)에서 군대를 출사(出師)하면서 황제(黃帝軒轅)와 치우(蚩尤)에게 제사지내고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북에 바르는 의식을 행했다."
(사마천의 사기권8 고조본기)
(2) 한국기록
1. 밝달나라 시조 커밝한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형벌, 병, 선악을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치우씨, 고시씨, 신지씨의 후손들은 지극히 왕성하여 번영하였다.
검불(밝달나라 도읍)의 후기에 치우한웅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다.
(삼성기전하편)
※ 치우씨(:중국쪽에 봉지를 받음), 고시씨(한반도), 신지씨(만주동부)는 풍백, 우사, 운사의 삼한( 三韓: 세 보좌 왕)이며 세 족속의 후손은 나뉘어 9파로 갈라졌으니 후한서 동이전(後漢書東夷傳)에 나오는 견이( 夷), 우이( 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暘夷)의 족속으로 퍼져서 지손(支孫)은 다르되 원래의 조상은 같다. 후세에 견이와 풍이가 서남(중국 동해안)에 나누어 옮긴 것이며 풍이란 곧 치우의 일족이다.
(규원사화 태시기)
2. 소전(少典)의 별고(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3. 자부선생(紫府先生)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 일월화수목금토)의 책력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 태고시대부터 전해지던 우주철학과 수도법인 仙法)을 한웅께 진상하니 이를 칭찬하셨다.
삼청궁을 세우고 살으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 ),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여기에서 배웠다.
(마한세가 상)
4. 치우씨가 있었는데 구야(九冶)를 만들어 광석을 캐어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같은 시기에 헌구(軒丘)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정벌하고자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 대동부(大同府)이다. 싸우기 위하여 격문을 만들어 81종당(宗黨)의 대인들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니 목숨바칠 것을 맹세하고 가로대;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게 들어라.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사람 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의로움을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륜구서(三倫九誓)의 행함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하느님)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대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지어다. 네 성품은 너에게서 찾으면 바로 너의 뇌 속에 있음이로다.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마한세가 상)
5. 치우한웅이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병사를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산동성 동남쪽 女水의 남쪽 성)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垈: 산동성-안휘성)의 사이에 웅거했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탁록의 벌판에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훗날에 오장군(吳將軍)을 보내 제곡고신(황제의 증손)을 쳐서 공을 세우게 했다.
(삼성기전하편)
< BC.2,700년 전후시대(치우시대) 그림 >
6. 탁( )의 북쪽(산서성 북쪽)에는 대요(大撓)가 있고, 동쪽(북경동쪽)에는 창힐(倉 )이 있었으며 서쪽(북경서쪽)에는 황제 헌원이 있었다. 처음 황제헌원은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요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뜻대로 안되었으니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요는 일찍이 간지(干支: 易法과 占)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符圖: 易法과 수련법)를 배웠다.
(삼성기전하편)
7. 치우한웅의 등극에 이르러 구야(九冶)를 만들어 구리와 철을 채취하고 철을 단련함으로서 도극(刀戟), 대궁(大弓)을 만들고 사냥, 정벌, 전쟁의 무기로 삼았다. 때문에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큰활을 쓰는 동쪽사람이란 뜻이다.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에서 이족(夷族)을 융적(戎狄)과 나란히 오랑캐의 호칭이라 했는데 애석한 일이다.(공자 이후부터 완전히 오랑캐 취급을 받았음)
(태백일사 검불본기)
8. 치우한웅은 유망(楡罔: 신농의 나라 유웅국 임금)의 정권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 정벌했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 인재 81인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서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大弓), 호시( 矢)를 만들어 탁록( 鹿)을 함락시키고 구혼(九渾)에 올랐다.
한해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웅거하며 구야(九冶)로서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개발하여 예과(芮戈)와 옹호(雍狐)의 창을 만들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양수(洋水: 황하로 봄)를 건너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 하남성 개봉 동남쪽)이며 유망이 도읍 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시체가 들판을 메웠다. 때에 유망은 소호(少昊: 金天氏나라)로 하여금 마주 싸우게 했으나 한웅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안개를 일으켜 적병을 혼미하게 하니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쳤다. 치우한웅은 하느님께 제사 드리고 천하평정을 맹세했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멸망시켰다.
(태백일사 검불본기)
9. 치우한웅은 서쪽으로 탁예( 汭: 산서성 대동부 근처로 봄)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垈)를 평정했다. 산을 뚫고 길을 내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렀다.
(번한세가 상)
10.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백성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한웅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저 혼자 천자가 될 뜻을 갖고 병마를 일으켜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한웅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 에워싸 전멸시켰다.
헌원은 굴복치 않고 백번이나 싸워 오는지라 치우한웅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헌원과 탁록의 유웅(有熊: 헌원이 유망을 이기고 유웅국 도읍을 옮긴곳)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는 셀 수도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하여 숨고 달아나니 백리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연( )의 회대(淮垈)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당시의 서쪽 사람들은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한웅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매우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중국의 운급헌원기(雲 軒轅記)라는 책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라고 치우를 말한다"라고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보면 알 것이다.
10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였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사는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 검불(神市)을 본따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차(指南車)도 만들어 싸움마다 출전하는지라 치우한응이 불같이 노하여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 헌원군이 감히 공격해올 뜻을 품지도 못하게 하였다.
한바탕 크게 싸움이 일어나자 한 무리를 전멸시킨 후에야 비로소 멈추었는데 이 싸움에서 우리장수 치우비(蚩尤飛)가 공을 서둘다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중국사기에서 "치우를 잡아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듯 하다.
치우한웅은 크게 화가 나서 새로이 돌을 날려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공격하니 적들은 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 )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하고 헌원의 동쪽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치우한웅이 돌아 가신지 수 천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광열(光烈)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 하다. 지금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의하면 치우한웅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장으로 진(秦), 한(漢)때 주민들은 10월에 늘 여기에 제사지냈다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疋絳: 띠모양의 붉은 색)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중국사기에 " 산을 뚫어 길을 내고 한번도 편안히 있은 적이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또 상서(尙書) 여형(呂刑: 書經商書呂刑)에서는 "고훈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 라고 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氣)를 빼앗긴 탓이기 때문이다. 그 뒤 300여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 頊高陽)과 한번 싸워 이겼을 뿐이다.
(검불본기)
11. (갈고한웅(10세)이 신농국과 경계를 공상동쪽을 우리에게 속하게 한 후)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한웅(慈烏支韓雄: 14세)에 이르렀다. 자오지한웅은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고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감았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야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를 만들었다. 천하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고 함께 떠받들어 천제(하느님)의 아들 치우라 하였다.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와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것을 뜻한다.
치우한웅은 신농씨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뜻을 크게 품고 여러 차례 병사를 서쪽으로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의 사이에 웅거했다. 황제헌원이 즉위함에 이르자 즉시 탁록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신하로 삼았다. 후세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 고신씨(高辛氏)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했다.
(검불본기)
12. 진나라 천문지(晉天文志)에;
"치우기(蚩尤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한웅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또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에는;
" 치씨는 치우의 후예다"라고 했고 혹은 "창힐(倉 )은 고신(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산동(山東)의 회북(淮北)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한웅의 영풍위열(英風偉烈)함이 먼 나라의 깊숙한 곳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서 미루어 알 수 있다.
(태백일사 검불본기)
※ 황제헌원과 치우한웅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신농이 세운 유웅국 마지막 임금인 유망때 나라가 쇠약해지자 중앙통제권이 약화되어 여러 제후들이 서로 침범해도 단속하지 못했다.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지자 여러 군웅들이 일어날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② 이때 밝나라 제후였던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의 중국 동해안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③ 치우보다 조금 늦게 신농의 유웅국 제후였던 헌원이 무술을 익히고 군사를 훈련시켜 왕권을 바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제후들을 정벌하여 굴복시켜 나갔고 임금을 대신하여 명령을 내리는 섭정의 역할을 하게 된다.
④ 나라전체가 어지러워지자 뒤늦게 유웅국 임금 유망이 자기를 따르는 제후들을 거느리고 여러 제후들을 정벌하려 하니 여러 제후들이 임금을 등지고 새로 일어난 헌원에게 귀의하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유웅국은 임금편과 헌원편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도 임금이 되고싶은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⑤ 치우가 점점 강해지자 헌원은 치우를 정벌하려 했지만 싸움마다 패하여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⑥ 북경서쪽의 탁록의 벌판에서 헌원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치우는 성을 쌓고 헌원을 방비하면서 곡창지대인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의 회대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고 하남성 동부 진류에 있는 유망을 몰아내고 드디어 밝달나라의 한웅에 즉위하니 14세 한웅이 되었다.
⑦ 치우에게 밀려난 유망은 산서성 남부에 있게되고 헌원은 산서성 북부에 있게 되니 마침내 임금인 유망은 황제헌원을 공격하나 판천의 들에서 세 번이나 싸워 헌원이 승기(勝氣)를 잡으니 임금이 될 뜻을 얻게 되었다.
⑧ 군사, 무기, 전쟁 수행능력등 모든 것이 앞선 치우는 주로 공격자이고, 헌원은 공격회수보다 주로 방어적이었고 계속해서 패하였지만 이리저리 잘 피하면서 정복당하지 않고 항상 준비를 하여 10년 동안 무려 73회나 싸우게 된다. 이렇게 되니 양쪽 다 나라가 피폐해지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강력한 형법을 만들어 형벌로서 질서를 유지시키기에 이르렀다.
⑨ 치우한웅과 황제헌원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기록은 거의 일치한다. 다만 중국은 치우를 죽였다 또는 아니다 로 의견이 엇갈리지만 결국 헌원이 치우를 죽인 것으로 하여 천하통일을 하고 태산에 올라 봉선(하늘과 땅에 제사지냄)한 것으로 꾸몄고, 한국은 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ㄱ). 10년 이상이나 싸워온 적장이고 적국의 임금을 잡았는데 죽이지 않고 신하로 삼았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므로 과장되었거나 틀린 것이다.
(ㄴ). 헌원이 치우를 죽였다면 치우가 109년간이나 재위에 있지 못했을 것이고 헌원 시대 이후에 300여 년간이나 산동반도에 도읍을 둘 수가 없었으니 중국기록도 틀린 것이며 역사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다.
(ㄷ). 그러므로 필자의 견해는;
오랫동안 서로 싸웠으나 헌원은 항상 패하여 쫓겨다녔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나는 불굴의 사나이였으니 나중에는 둘 다 나라가 어려워지고 지치게 되어 헌원이 나라를 보존하고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항복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신하로 복속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강화조약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매년 조공을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치우의 나라를 상국의 예로 대했다. 이렇게 해서 태행산맥을 경계로 동과 서에서 전쟁 없는 300여 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중국사기에 헌원을 오제기(五帝紀)의 첫머리에 등장시키고 헌원이 치우를 죽이고 중국의 명실상부한 제왕이 되었다고 역사를 뒤집어 주장하는 것은 사살상 중국시조라고 할 수 있는 요임금의 전거를 마련하고 중국이 천하의 주인으로 자처해야 했으므로 중국인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뒤집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ㄹ). 중국의 요임금 때에 이르러 중국이 강성해지자 우리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런 전쟁에서 밝달나라 마지막 한웅인 거불단이 죽게되자 섭정을 보던 한검이 산동반도의 도읍이 불안하므로 도읍을 만주 하르빈 지역의 아사달로 옮기게 된다. 도읍이 안정되자 나라를 정돈하여 끊임없이 중국을 압박하니 요임금이 견디기 어려워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섭정을 맡기고 왕권을 대행하게 한 후 휴식한다는 핑계로 도읍을 떠나 천하를 주유 한다.
이조시대부터 요순시대는 성인정치를 하였고 천하태평시대라고 떠들면서 침 이 마르게 칭찬해 왔는데 실제로는 무력전쟁 회수만 적었지 한국과 중국의 힘 대결이 엄청나게 진행된 시대였다. 더구나 기상재난과 홍수 등으로 백성들의 생할이 어려운 시기가 수십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임금도 우리의 은혜를 배반하고 12주를 설치하여 우리의 관경을 모두 중국영토로 편입하여 결국은 무력으로 국경을 되돌려 놓은 시기이다. 이런 시기를 어찌 태평시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천하태평시대란 공자를 유학의 대성으로 받들면서 사대주의가 지나치게 팽배하여 저질러진 엉뚱한 사상이지 역사적 진실은 아니다.
역사란 조상의 얼을 이어받고 민족의 자존을 확립하는 요체이다. 진실이 왜곡되면 민족의 사상이 달라진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 밝달나라 역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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