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中世의 카톨릭 교회에서 무시무시한 이단자 심문 (Inquisition)을 오랫동안 해왔다는 것을 잘안다. 그러나 新敎 (Reformed Church)에서도 Inquisition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Michael Servetus
16세기 스페인 사람 (왼편 초상화) Michael Servetus (1511-1553)이 그당시 정통적인 교리(Dogma)에 반론을 내는 책들을 쓰자 종교개혁의 거두였으며 칼빈주의의 원조 Jean Calvin에 의해서 혹독한 이단자 심문을 받았으며 사형선고를 받고 잔혹한 火刑을 (Slow Death by Fire) 받고 죽었다. Servetus는 그당시의 인문주의자 (Humanist)로서 지리학자요, 법율가였고, 무엇보다 개혁적인 신학자였고, 또한 역사상 제일 처음으로 허파가 혈액순환에 중요한 역활을 한다는 것을 주장한 의사였다.
이제 그의 일생을 찬찬히 간추려 보며 어찌하여 칼빈에게 Inquisition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와 함께 그 유명한 복음주의자 칼빈의 또다른 면모와 함께 잔인한 종교개혁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시 찾아보자.
변호사인 아버지를 둔 Servetus는 총명하여 13세에 대학을 들어갔으며 라틴어, 희랍어, 및 히브리어에 능통하여 구약 신약을 통틀어 번역판이 아닌 原文으로 읽었다고 한다. 그는 17세에 법율가인 아버지의 강청에 못이겨 법학 공부를 하며 틈틈이 신학공부를 하면서 삼위일체론(Trinity)의 성경적 근거를 아무리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여기서 부터 그의 비극적인(?) 생애가 시작된다.
카톨릭 신자인 그는 찰스 5세 황제(Emperor Chales V.)의 고해신부가 된 Franciscan 수도사 Quintana 의 측근으로 뽑혀 그를 따라 이태리 로마로 가서 황제 즉의식에 참가 했다. 그곳에서 교회의 흥청망청한 富와 지극히 세속적인 성직자들의 행위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교황의 거동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곧 바로 그는 로마를 떠나 스위스의 바젤 (Basel)에 가서 新敎人들과 (Protestants)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즈음 (그의 나이 20세-서기1531년) 그는 "삼위일체 도그마의 오류들" (On the Errors of the Trinity)과 "삼위일체 도그마에 대한 대화들" (Dialogues on the Trinity)이라는 제목의 책들을 써서 자기의 의견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글은 Protestants 들의 배척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책들은 모두 압수 당하였고 또한 경고를 받았다.
Inquisition Court (이단자 재판)
설상가상으로 그의 고향 스페인 Catholic 교회에서도 Inquisition 회의 (Council of Spanish Inquisition) 는 Servetus에게 Inquisition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렇치 않으면 체포할것이라는 경고를 했다. 곧이어 카톨릭 교회는 신부로 있는 바로 Servetus의 형 Juan을 그에게 보내 법정출두를 종용했으나 그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불란서의 파리로 도망 간다.
그는 파리에서 이름을 Michel de Villeneuve로 바꾸고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특히 인체 해부학에 뛰어나 그의 지도 교수 Hans Gunther는 "세상에서 Villeneuve를 따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는 평을 들었다. 그당시 권위 있는 교수들은 심장에서 혈액이 정화 된다 (Aeration 즉 정맥에서 동맥으로 바뀜) 는 것을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Servetus는 심장이 아니라 허파에서 Aeration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여 여러 교수들로 부터 미움과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 Servetus의 반론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혈액순환에 있어서 허파의 기능을 밝혀 낸 것이지만 결국 그는 빛을 보지 못하고 비엔나로 떠나 버린다.
그는 비엔나에서 12년동안 의사생활을 하면서 비엔나의 주교인 Palmier와 그 밖의 유명인사들의 주치의가 되어 명성을 떨친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행로에서 이 12년간의 비엔나 의사생활이 제일 평온한 때였다고 봐야 겠다.
그러나 그의 신학에 대한 열의는 더욱 불타올라 그는 1546년부터 칼빈과 편지로 신학 논쟁을 시작한다. 논쟁이 열이 붙으면서 칼빈은 고집불통이고 자만스러운 글을 보내오는 세르베테스에 대한 증오감을 키우게 된다. 드디어 1553년 초에 세르베테스는 운명의 저서 "기독교의 회복" (The Restoration of Christianity)이란 제목의 책을 쓰고, 부록으로 삼위일체, 예정론, 유아세례등 에 대한 칼빈과의 편지 토론의 기록도 포함 시켰다고 한다.
순진한 세르베테스는 책의 원본을 칼빈에게 보내 자기 책에대한 논평을 청한다. 서로 의견이 상반하지만 같은 인문 주의자이고 종교개혁의 일로 박해를 받던 칼빈에게 그는 어떤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책에 내용이 자기의 예정론 및 삼위일체 도그마를 짓밟는다는 것을 아는 칼빈은 일부러 논평을 하지 않고 책을 돌려 보내지도 않았다 (이는 세르베테스가 카톨릭 교회에게서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파인 칼빈에게 까지, 즉 모두에게 이단자로 여겨 졌다는 말이다).
Jean Kalvin
세르베테스의 책 내용은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물론 카톨릭의 Inquisition감이였다. 칼빈은 세르베테스 몰래 이 책을 지은 Villeneuve가 바로 이단자 Servetus라는 것을 카톨릭 Inquisition 당국에 은밀히 알려 준다.
칼빈은 세르베테스의 반론을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근거에 입각하여 토론/설득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카톨릭 Inquisition 당국에 세르베테스를 밀고 해 버렸다. 생각을 다르게 하는 인사들에게 칼빈은 비겁한 행위를 자행한 것이고 또한 학자로서 부끄러운 일을 한것이다.
카톨릭 당국에게 체포된 세르베테스는 Inquisition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그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칼빈의 밀고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세르베테스는 몇달동안 몸을 감추고 있다가 이태리로 가는 길에 제네바에 있는 칼빈이 설교를 하고 있는 교회로 가서 예배를 보게된다. 순식간에 교인들과 칼빈에 의해서 그가 세르베테스라는 것이 발각되고 그는 곧 체포되어 新敎의 Inquisition에 해당되는 제네바 이단재판에 회부된다. 그 당시 칼빈은 제네바에서 최대의 권력자로 神權정치를 펴고 있었으며 그의 교리에 벗어나는 자들은 혹독한 방법으로 제거 하고 있었다.
생나무 불에 천천히 타죽는 용감한 이단자
그는 결국 이단자로 판결되어 (反 삼위일체 및 反 유아세례) 사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 도중 그는 한번도 자기의 소견을 굽히지 않고 당당히 심문자에게 맞섰다고 한다 (그 문답들의 내용이 멋있는게 많치만 얘기가 길어지므로 여기에선 생략합니다). 사형집행도 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나무기둥(火刑柱)에 묶여 생나무를 태워 천천히 고통을 받으며 죽는 火刑"을 받았다고 한다.
머리에 유황을 뒤집어쓰고 탁탁 튀기는 생나무 불꽃에 쌓여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칼빈의 잔인성에 머리를 저었고, 죽음을 향한 Servetus의 "용감한 이단자"의 모습에 감동했다고 한다. 그후 몇달후 세르베테스는 카톨릭 교회로 부터 다시한번 사형 집행을 당한다. 그의 형상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처형했다.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처사에 대해 비난을 하기 시작하자 그는 "교리(도그마)를 방어"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었다고 했다. 불에 타죽는 세르베테스를 목격한 Castellio라는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도그마를 방어하기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하지만 실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목적이 있었든 것이지 도그마를 방어한 것은 아니였다. Servetus가 합리적인 글로 칼빈에게 도전 했다면, 그도 합리적인 글의 주장으로 Servetus를 물리쳤어야 한다" 라고... 즉 칼빈이 개인적 감정으로 세르베테스를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주제 넘지만 나의 소견을 슬적(?) 삽입하고 싶다.
첫째: 어느 종교에나 교리 (Dogma)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교리를 열심히 붙잡고 늘어졌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구원엔 사람이 만든 날카로운 교리들이 정의하지 못하는 주께 향한 믿음의 영역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는 사람을 죽이는 괴력(?)을 감추고 있다고 본다. 16세기 중반엔 교리에 대한 일로 소용돌이 치던 시대였고 죽고 사는 것을 가르는 흑백 논리가 횡행했으리라 믿는다. (좀 싱거운 얘기지만 그때 예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제네바 혹은 로마에 오셔서 한마디 했다면 예수님도 Inquisition 당했으리라 싶다. 신학자가 아닌 예수님은 삼위일체니 예정론이니 듣곤 하도 복잡해서 머리가 뽀개지는 듯한 두통을 겪었으리라 싶다)
둘째: Servetus를 사형시킨 칼빈에게도 단순 분노에 의한 살인자의 누명을 씌우고 싶지 않다. 칼빈 뿐만 아니라 카톨릭교회, 제네바에 있는 절대다수의 목회자들, 심지어 종교개혁의 선봉자 마틴 루터도 그를 사형 시켜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Servetus는 잔인한 역사의 희생자라고 보고 싶다.
셋째: 그는 역사의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사의 승리자요 인간 역사에 귀중한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보고 싶다. 그는 발랄한 인문주의자로서 자기의 주장을 폈고 자기의 의심에 대한 답을 성경속에서 찾으려 했지만 찾을수 없어 수많은 질문을 했을 뿐이다. 그리곤 용감한 이단자로 사형장에서 불타죽었다. 그의 휴머니스틱한 자세, 두려움 없는 주장, 근거있는 질문들... 이 모두가 현대인이 누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역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본다. 오늘날 칼빈 스타일의 절대적인 권력과 엄격한 교리에 근거를 둔 신정정치와 사람의 생각을 포로로 삼는 교리는 거의 간데온데 없어 졌다.
Servetus의 사형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생각에 대한 공감이 퍼지면서 오늘날의 Unitarian 교회가 시작 되었다고 한다. 특히 미국엔 Unitarian 교회가 많다. 유명한 미국의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도 Unitarian 교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 여러 곳에 Servetus의 동상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실은 학교, 교회, 병원, 박물관, 심지어 스페인엔 그의 이름을 빌린 도로가 수없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만은 그의 대한 유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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