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황제는 티투스
서기 66년 여름에 시작하여 70년대에 그 절정을 이르고
마침내 73년 봄의 맛사다의 비극으로
유대전쟁을 끝낸 당시의 로마제국
79년 여름에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배몰된다
본국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대형재해로서
엄청난 피해였지만
당시 천여년동안 이어오면서 맞은
다른 재앙중 하나로 여기며 이겨냈다
오히려 1800년이 지난 후세에
발굴 작업을 통해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포로 로마노는 몰라도
폼페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유명한 역사학자 타키투스의 기술에도
폼페이라는 이름초자 남아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역사학자에게는 작은 한 도시의 사건으로 그쳤지만
외삼촌의 근무지를 따라
나폴리만을 사이에 두고 베수비오 화산과 마주 선
군항 미세노에 머물고 있던 플리니우스가
리포터의 형식으로 이상황을
타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쓴글이 남아있어
그나마의 상황을 동시대인의 눈으로 볼 수 있다.
이틀 후의 이 재난이 알려진 로마
당시 티투스황제는 이재민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진두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더 참담했다
4.5미터 높이로 쌓인 돌멩이와 화산재로 파뭍힌데다가
화삭폭발 후에 내린 비로 인해
그만 굳어져 버려 시신발굴조차도 힘들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신전의 원기둥이나
원형경지장의 윗부분은 아직 지표면 위에 있었을 것이나
세월이 지나며 흙에 덮히고 식물에 덮힌 모습으로
근대 발굴 되기 전까지
당시 황제의 티투스의 선의와는 관계없이
폼페이와 페르쿨라네움을 비롯한'
베수비오 분화로 배몰된 도시와 마을은
서기 79년 당시 그대로 방치해 있었다
900년동안
한번도 분화가 없었기고
휴화산 특유의 바위나 흙이 그대로 노출 되어있지도 않기에
당시 사람들은 사화산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산세 또한 능선까지 빽빽히 들어선 나무들로 인해
어느 산보다도 울창한 숲의 산이었다
어느정도였는가 하면
기원전 1세기 그 유명한 스파르타쿠스 난에는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통해 도망한 많은 노예들이
이산으로 숨어 들었다 한다.
그날 역시 작은 진동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곧 가라앉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집안에서 가만히 기다렸을 것이다
이때문에
더욱더 피해는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평소와 다르게 진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진동뒤에
곧바로 불덩어리같은 돌멩이가 비오듯이 쏟아지며
건물은 서서히 내려 앉았을 터
그제서야 탈출을 결심하고 나서지만
더 무서운 것이 그곳을 덮었으니
바로 화산재를 잔뜩 머금은 안개 구름이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의 호흡을 막았다
한 연구결과로 보면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의 사망원인이
이 안개구름에 의한
질식사가 더 많았다고 한다.
단순간에 도시를 뒤엎은
베비우스 화산 폭발은
그 다음날 아침에는 이미 그쳤다고 하니
8월24일 오후 1시에 시작된 쏟아낸 재앙을
15시간도였다는 결론인데.
자연재해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하긴..
카트리나 재해도 단순간에 일어난 일이며
쓰나미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인간은
자연앞에 한없이 한없이
나약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베수비우스 화산.
그 당시 광경을 컴퓨터 그래픽로 담아 낸 모습이다
잿더미를 걷어낸 폼페이 중심가. Vesuvious 화산이 뒤로 해있다.
원형 극장 전경
수용 인원은 약 8,000명 정도라는 기록이지만
20,000명도 넘게 들어 가는 수준이다
발굴에 최대 공헌자는
독일 고고학자 "요한 요하임 빙겔만이다.
1764년 "로마고대 미술사"를 편찬하여
학문적 체제확립을 하였고,
그 영향이 세계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건축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세계 제 1, 2차 대전으로 발굴 작업이 중단 되었다가
1951년 아메마데오 마이우리의 지휘감독 아래
발굴작업이 다시 활기를 띠어 금일에 이르고 있으나
아직 3/5 정도 밖에 발굴이 안 되었다고 한다
황금시대를 구가한 화려한 벽화!
현대식 이름으로 최고급 콘도 휴양지
휴양지 전면 풍경
귀빈용 휴양지 입구
졸지에 최후를 맞은 의식 끝자락엔
과연 무슨 생각들이 숨어 있었을까?
앉아서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돌히 하다 그 재앙을 만났을까....???
人道와 車(마차)도의 구분이 명확하다
마차 바퀴가 할퀴고 간 자욱 깊이로
년대를 추정한 고고학자에 따르면
BC2500년의 유구한 도시였다는 설이다
현대 최고급 일류 호델 사우나 보다
더 우아하고 훌륭한 사우나 시설이 놀랍다
우리는 이때 신석기 시대로서
우리나라 선조가 몽촌토성 움막에 기거할때 쯤일 것이다
간접비교가 되고도 남는다
언제 그런 재앙이 있었더냐?
비웃기나 하듯
베수비우스 턱밑에 평온히 살아가고 있는 마을 풍경
이태리 남부 나포리만 연안 항구도시 Pompeii를
끼고 도는 사르누스 강은
베수비우스 활화산을 비웃기나 하듯
지금도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Franz Joseph Haydn
- Die Sieben Letzten Worte / Requiem "Opus Ultimum" -
INTRODUZION
[사이언스카페] 지진 피해 왔다가 화산 폭발 맞아.. 폼페이의 박제된 거북이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입력 2022. 06. 27. 07:00 수정 2022. 06. 27. 08:14 댓글 1개2000년 전에 시간이 멈춘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지에서 몸 안에 알을 간직한 거북이 발굴됐다. 화산재가 폼페이 시민뿐 아니라 그곳에 살던 동식물까지 당시 모습 그대로 박제로 만든 것이다. 이탈리아 폼페이 고고학 공원은 지난 24일(현지 시각) 소셜미디어에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분출된 화산재에 덮여 지금까지 모습이 유지된 거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거북 몸 안에서는 미처 낳지 못한 알들도 나왔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근처에 있는 폼페이는 고대 로마 귀족의 휴양지로 유명했지만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인근의 헤르쿨라네움 등과 함께 화산재와 분석에 묻혀 파괴됐다. 폼페이 유적지에는 당시 사람들이 화산재에 덮인 채 그대로 남아있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고고학자가 거북의 몸에서 흙을 털어내고 있다. 거북 몸 안에서는 미처 낳지 못한 알까지 발견됐다./폼페이 고고학공원이번에 발견된 헤르만 거북은 몸길이 14cm로, 건물 바닥의 작은 굴에서 발굴됐다. 연구진은 거북이 앞서 서기 62년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을 찾아왔다가 화산폭발을 맞은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진은 “거북이 굴을 파고 알을 낳으려다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폼페이 유적지에서는 이전에도 거북이 발견됐다. 2002년 폼페이에서 거북을 발견했던 옥스퍼드대의 마크 로빈슨 교수는 BBC방송에 “사람이 키우던 거북이 탈출해 지진으로 무너진 폐허로 갔을 수도 있다”면서도 “그보다는 근처 시골에 살던 야생거북이 고대 도시의 폐허를 돌아다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밝혔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거북에서는 미처 낳지 못한 알까지 발견됐다./폼페이 고고학공원폼페이 고고학 공원의 가브리엘 주흐트리겔 소장은 “이번 발굴은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기 전까지 폼페이는 도시 전체가 무너진 집을 새로 짓는 건축 현장이었음을 알려준다”며 “야생동물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 공간을 돌아다니며 알을 낳으러 들어갔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거북 발견은 고대 폼페이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와 자연, 공동체와 환경 사이의 모자이크 관계를 추가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발굴은 독일 베를린 자유대, 이탈리아 나폴리대, 영국 옥스퍼드대가 공동으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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