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집필자 : boolingoo (2006-09-18 12:28)
지난 1999년경 공중파 TV에서 추석 특집 프로그램으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일대기를 다룬 단편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을 시청한 적이 있다. 그 드라마에서 김정호가 평생을 바쳐 만든 대동여지도를 관청에 바쳤더니 오히려 국가 기밀을 누설한 죄로 체포되어 옥사하는 내용을 보고 정말 비상식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상당히 분개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멍청한 조상들이 살았던 나라였으니 일제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 지배를 받는 치욕의 역사를 겪었던 것이고 현재 우리 후손들이 국력이 약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불행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호는 19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한국 역사상 대표적인 지도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출생시기와 삶과 경력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생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만 작업에 임하던 그의 모습이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 그 위대한 업적에 비하면 기록이 지극히 적다. 그러나 전설 같은 일화가 많아서, 현대에 와서 많은 문학인들이 그의 삶을 추측하여 작품으로 쓰고 있어 그의 이름은 해가 거듭될수록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혹시 김정호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이 없는 것은 조선 정부가 무고한 그를 사형에 처한 잘못을 숨기기 위하여 그에 관한 모든 기록을 없애버린 탓이 아닐까? 정말 그가 반역자로 몰려 옥고를 치르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면 그의 아내와 딸도 당연히 노비가 되거나 해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김정호는 황해도 출신이라고 하며, 젊은 시절에 군교(軍校)였다고도 하고 그의 집안이 대대로 군교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군교라면 양반 출신일 터인데, 양반 집안이라면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리가 없을 터이므로 어떤 사정이 있어서 집안이 파멸하였는지도 모른다. 일설에는 당시 지방의 군교는 양반이 아니었으며, 그는 이름없는 서민 출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면학에 힘써서 학자로 대성한 것으로 보아 소년 시절부터 공부할 수 있을 만한 가정에서 자라고 재산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그가 1834년에 청구도(靑邱圖)를 만들 당시에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이 어른이 된 뒤에 서로 알게 되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서로 학문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만큼 최한기의 경력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여 근대적 개화사상에 연결시킨 최한기
최한기는 조선 초기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기여했던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후에 영의정에 오른 최항(崔恒)의 후손으로 1803년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물세 살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관리로서 영달의 길로 나서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천문학, 지리학, 물리학, 수학 등 자연과학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 연구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철학자로서 매우 진보적인 이론을 전개한 사람이었다.
그는 명남루전집(明南樓全集)이라는 천여 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또한 지구전요(地球典要), 조선지리도(朝鮮地理圖) 등 지리학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가 있고, 특히 신기통(神氣通), 추측록(推測錄) 등 철학 이론서는 우리나라의 철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봉건적인 관념론과 신분 차별을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그는 선악의 판단도 자연의 법칙과 대중의 토의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선악과 이해는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며, 사회의 진보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국강병을 이루는 길은 예의와 도덕과 재래의 풍속을 수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용에 힘을 쏟고 산업을 발전시켜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이를 위하여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응용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계급 차별을 타파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진보적인 사상 때문에 그가 평민 출신인 김정호와 신분의 차이를 무릅쓰고 친숙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김정호가 그와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지위와 처지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그는 지리학 연구에서 김정호를 둘도 없는 친구로 대하며 서로 협력하였고, 김정호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든 해에 최한기는 청나라에서 낸 지구도(地球圖)를 중간(重刊)하였다. 그때 판목을 김정호가 새겼다고 한다. 아마 최한기는 김정호에게 이러한 작업을 하게 하여 김정호의 생활비를 대줌으로써 김정호의 작업을 거들어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최한기는 학자로서 오로지 연구에 전념하였다. 1872년 그의 아들 최병대(崔炳大)가 국왕의 시종이 되자 조정은 그의 업적을 인정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지위와 함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라는 명예직을 내렸다. 이때 그는 일흔의 고령이었는데, 그 7년 뒤에 생애를 마쳤다. 그때 김정호가 생존해 있었는지 어떤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김정호와 최한기가 대략 같은 연배였으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통설로 되어 있다.
김정호가 몇 살 때 서울로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집은 남대문 밖 만리재(萬里滓)라고도 하며 서대문 밖 공덕리(孔德里)였다고 한다. 어쨌든 중심가에서 덜어진 가난한 빈촌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우리나라의 지리를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를 샅샅이 걸어다녔고, 백두산도 여러 차례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불편한 교통 사정을 감안하면 전국을 답사하거나 백두산에 올라가려면 상당한 여비가 필요했을 터이므로 매우 가난했던 김정호로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린 지도는 지극히 정확하여 현지 답사를 하지 않고서 문헌 지리학서만 연구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정호의 지도 제작 과정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우선 우리 나라의 지적 측량은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해 왔는지 살펴보자.
지리측량(地理測量)의 역사
고구려는 영토 확장 사업과 주변국의 잦은 침입 때문에 국토에 대한 지리학적 고찰과 지도 작성이 매우 발달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7세기 초에 고구려의 전국적인 지도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지만 평안남도 순천시 용봉리에 있는 요동성 무덤의 벽화에 있는 요동성총도(遼東城總圖)를 보면 성의 테두리, 내성과 외성의 시설, 성과 외부와의 통로, 성과 하천과의 관계, 하천의 흐름 등은 물론 건물들도 유형별로 도식화되어 있음을 볼 때 고구려인들이 지리적 환경에 대한 지식을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는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와 지도책 도적(圖積)이 있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반영된 지리학 관계의 기록에 비추어 보아 상당히 상세한 지식을 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시대에는 길이를 측정하여 면적을 산출하지 않고 수확량으로 바닥 면적을 계산하는 결부법(結負法)을 사용하였다. 결부법에서는 1척 사방을 1파, 1파를 1속, 10속을 1부, 100부를 1결이라고 한다. 파는 손바닥에 들어오는 벼 한 아름, 속은 묶음 부는 지게 한 짐이라는 수확량을 표시하다가 그것이 바닥 면적을 표시하게 변한다.
발해의 건국자 고제(高帝)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 의하면 고조선 제2대 단군 부루(夫婁)는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고 '두 점 간의 직선은 하나다' 라고 주장하였으며 제12대 단군 도계(道溪)는 측천기와 양해기를 발명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제14대 단군 고불(古弗)은 산야를 측량하여 조세율을 개정하였고, 제20대 단군 고흘(固忽) 때의 공을홀(工乙忽)은 천하의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때에 행한 측량은 과세를 위한 것으로 지적(地籍) 측량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지적이 단군시대부터 이용되어 왔다.
한편 표준 도형을 만들어 전답을 측량할 때 이 형태에 맞추어 면적을 측정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각형, 삼각형 등이 근대 서구 문명에서 도입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미 삼국시대에 우리 선조들도 활용하고 있었다.
고려도 10세기에 이르러 지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여 고려도(高麗圖)를 제작한다ㅣ 고려도는 15세기 말까지 국가 기본 지도로 이용하였는데 이곳에는 고려 전 국토의 지리적 조건과 정치, 경제, 군사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 금강산, 태박산을 비롯한 이름난 산들과 철령, 죽령 등의 고개들과 고원들을 표시하고 중요한 강, 군 현들의 경계까지 상세히 표시하였다. 특히 산의 높이와 험준 정도를 대비적으로 표시하고 산의 모양과 위치를 가릴 수 있도록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世宗)이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라는 전답에 관한 법률 제정소를 창설하였고, 효종(孝宗)은 전제상정소 준수조하라는 측량 규정을 제정 공포하였다. 세조(世祖)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하여 영전소에 20년마다 측량하여 장부를 만든다고 명기하였다. 또 숙종(肅宗)은 지적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지적 측량 중앙 관서인 양전청을 설치하고 교육과 실무를 수행하였다.
여기에서 길이의 측량을 어떻게 했느냐가 가장 관심거리로 더오른다. 세계적으로 길이 측량은 가장 먼저 인체의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체를 사용한 것은 동서양이 모두 같고 그것이 후세 척기(尺器)의 무체가 되었다. 중국 후한 때에 허진이 쓴 기록에 지(咫)라는 단위가 나오는데 그 길이는 몸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몸집을 가진 부인의 손길이와 같다고 쓰여 있다. 또 '한 자, 두 자' 할 때의 '자[尺]' 라는 단위도 있다. 자는 지척이라고도 하였는데, 주된 기준은 손가락을 나란히 한 상태에서의 네 손가락의 폭을 말한다. 길이가 긴 경우에는 긴 나무를 이용하여 거리를 재었지만 한계에 다다르자 새 끼를 길게 늘여서 측정했다. 그러나 새 끼는 신축이 심하여 부정확하고 재는 사람에 따라 거리가 다르게 나오기 십상이므로 대나무를 조개서 연결한 죽척(竹尺)을 사용하였다. 이 죽척은 신축이 적어서 일제강점기의 토지 조사는 물론 1970년대 건설 현장에서까지 사용되었다.
등나무 껍질로 만든 마(麻)를 소재로 한 간승(間繩)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는데, 간승은 죽척보다는 신축이 심하지만 가늘게 제작할 수 있어 휴대에 편리하고 200미터 이상 측정이 가능한 이점이 있었다. 특히 해안이나 낭더러지 등 함준한 산악지대 측량에는 이 간승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간승이 질겨서 잘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기리고차(記里鼓車)라는 거리 측정을 위한 반자동 기구를 우리 선조들이 개발하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1441년에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홍대용(洪大容)의 주해수용(籌解需用)에 그 구조가 나와 있다. 기리고차는 말이 끄는데, 바퀴의 회전수에 따라 울리게 되어 있는 종과 북의 소리를 헤아려 거리를 측정한다. 수레가 반 리를 가면 종을 한 번 치게 하고 수레가 1리를 갔을 때는 종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으며 수레가 5리를 가면 북을 울리게 하고 10리를 갔을 때는 북이 여러 번 울렸다. 사람은 수레 위에 앉아서 종과 북 소리를 듣고 거리를 기록하였다.
기리고차로 경도 1도의 거리를 측정하였는데 108킬로미터라고 하였다. 현재 그 값이 110.95킬로미터이므로 측정값의 오치가 3% 미만이었다. 기리고차는 반자동화한 세계 최초의 고리 측정 기계로서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지도가 체계적인 실측에 의하였음을 알려준다.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제작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보려면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에서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안으로는 자아에 대한 새로운 반성과 비판이 샘솟고, 밖으로는 청나라의 실학풍과 함께 들어온 서양으 과학사상에 영향을 받아 지식층들 사이에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식자 사이에는 나라의 경제를 살리려는 여러 가지 개선책이 제시되고 농업, 역사, 지리, 지도, 수리(數理), 역상(曆象), 어문(語文), 금석학 등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실증적인 연구가 일어났다.
특히 지도에 있어서 두 차례의 획기적인 과학적 혁신이 불었는데 제1차 혁신은 숙종으로부터 영조에 이르는 시기(1678년~1752년)에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東國地圖)에 의하여 실현되었고 제2차 혁신은 바로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靑邱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정상기의 지도는 정밀도에 있어서 김정호의 지도에는 견줄 수 없으나 사용하기가 간편하므로 널리 유포되었다. 정상기는 실학파인 이익(李瀷)의 친구로서 여지(與地)에 큰 관심을 갖고 백리축척(百里縮尺)으로 원형에 가까운 동국전도(東國全圖)와 도별분도(道別分圖)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정상기의 지도에도 독창적인 연구를 더하여 본격적인 지도를 제작한 사람이 바로 김정호이다.
그러나 김정호에 대한 개인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 김정호의 생애와 성격에 대해서는 몇 줄 안되는 기사와 약간의 구전이 전하고 있으나 그의 가계와 내력, 심지어는 김정호가 출생한 해와 죽은 해까지도 분명히 알 수 없다. 김정호에 대한 기록으로는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 있고 김정호의 친구였던 최한기가 1834년에 김정호를 위하여 청구도에 제언을 쓴 것이 전부이다.
'김정호는 소년 때부터 깊이 지지(地志)에 듯을 두고 오랫동안 섭렵하였다.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피며 한가한 때에 사색을 하여 간편한 집람식(輯覽式)을 발견하였다. 김정호는 방안(方眼)을 획성(劃成)하여 산수(山水)를 끊고 주현(州縣)을 배열하였는데 표선(表線)에 의하여 결계를 살피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전폭을 구분하되 가장자리에 선을 긋고 본조(本朝)의 역산표(歷算表)를 보망하여 한쪽은 위로, 한쪽은 아래로 하여 길고 넓은 형세가 제 강역대로 접하게 되고 반청반홍(半靑半紅)으로 수놓은 듯한 강산이 같은 색을 따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김정호의 청구도에 대한 간단한 해설로 그 형식과 내용을 가장 함축성 있게 설명한 것이다. 김정호에 대한 기사로는 이상에서 든 문헌 이외에 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가 지체 높은 계급이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남의 눈에 잘 듸지 않는 지도 제작에 온 힘을 기울였을 것 같지 않다. 또 그런 좋은 환경에서 그러한 위업을 달성했다면 그의 생애에 관한 전기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자손도 몹시 궁핍하고 영락하여 그들의 소재라든가 그 유무조차도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단지 그가 최한기와 막역한 친구였다는 것으로 보아 연령이 서로 비슷하였던 것 같다. 또 대동여지도의 재간(再刊)과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완성이 모두 1864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순조(純組),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 초의 4대에 걸쳐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사망할 때는 적어도 60여세는 되었을 것이다.
김정호의 지도는 어느 것이나 방안(方眼)을 기본으로 하여 정확성과 정밀성을 나타내었다. 청구도에는 지도 제작법에 관해서도 기록하였는데 기하학의 동심원적 방법의 준례를 들었으며 방안에 의한 지도의 확대 및 축소법을 예시하였다. 김정호가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근대 과학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준다.
김정호는 이러한 과학적 지식의 토대 위에서 축척의 성질을 가진 방안을 사용했지만 그의 방안은 도면 전체에 종횡성을 긋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위(四圍)에 쌍선광곽(雙線匡廓)을 베풀고 그 쌍선 안에 일정한 간격을 듸어 가며 단획(短劃)을 그었다. 즉 상하 양변의 단획을 종으로 좌우 양변은 횡으로 하고 각 양변의 단획을 안으로 향해 연장시키면 저절로 경위교착(經緯交錯)한 방안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다시 말하자면 각 페이지[面]마다 방안의 둘레선만을 남기고 공백인 내부에 해면을 포함한 지도를 나타냈다.
김정호의 역작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된 것이 청구도로 이것이 완성된 시기는 최한기의 제언을 볼 때 1834년으로 보인다. 청구도의 내용은 범례와 지도식을 비롯하여 본조팔도주현도(本朝八道州縣圖), 도성전도(都城全圖) 및 다른 여러 주현도를 싣고, 부록으로 신라구주군현총도(新羅九州郡縣總圖)를 비롯한 역사지도를 첨부하였다.
이와 같이 청구도는 지도(地圖)와 지지(地志)를 합쳐 놓은 것이다. 그러나 지도는 지도대로의 생명을 갖고 지지는 지지대로의 특색을 갖고 있으므로 지지를 완전히 지도에 나타낼 수는 없다. 그래서 김정호는 지지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청구도의 범례 가운데서 각 주현 중심의 읍지(邑誌) 편찬을 위한 요목형식(要目形式)을 제시하였다.
"지지는 지도의 미진한 곳을 밝히고자 함이니 제읍(諸邑)으로 하여금 제시요목(提示要目)에 의하되 그 항목 중에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적고, 없는 것은 없는 대로 빼어 이 방식에 어긋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 그리하여 지지와 지도가 병행하도록 한 것이다."
김정호는 지지편찬은 어느 개인 한 사람의 힘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무엇보다도 국가가 솔선하여 여러 주현으로 하여금 일정한 방식에 의하여 몇 해에 한 번씩 읍지를 편찬하도록 하여 그것을 중앙에 보내어 종합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국가에 대한 일종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그의 만년의 대작인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는 모두가 청구도의 자매편으로서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의 지도적인 면을 다시 정리하여 좀 더 간편하고 실용적이며 정확성을 띠게 한 것이고, 대동지지는 청구도의 지지적인 면을 한층 더 확대하고 보충한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김정호가 손수 판각하여 세상여 세상에 인포(印浦)하고 다시 3년 후인 1864년에 재간하였다. 모두 22첩으로 분리되고 첩은 연폭을 접어 책자와 같도록 만들었다.
대동여지도가 청구도와 다른 것은 도로망과 아울러 산천의 본지(本支) 형태를 보여주는데 심혈을 기울인 점이다. 도면에 나타나 있는 도로망은 그물을 친 것과 같이 종횡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십리 간격의 이정점(里程點)을 더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멀고 가까운 거리를 금방 알게 했다.
김정호의 지도 제작이론은 중국의 역대 지리학 문헌에 나타난 이론을 완전히 소화, 자기 식대로 전개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국인의 지도제작 이론과 수법이 펼쳐지고 있다. 산맥과 하천의 묘사에 관한 부분에서 한국인의 독특한 지형 묘사법을 계승했다고 김정호 스스로가 말했다. 실제로 그가 그린 산맥은 한국의 풍수가들이 그린 지형도인 묘도(墓圖)의 독특한 묘사법과 매우 비슷하다.
김정호의 지도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즉 조선시대에는 10리가 4.5킬로미터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4킬로미터가 아니었다. 4킬로미터로 환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제의 잔재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1리를 4킬로미터로 환산해 사용했다. 그 후 한국을 식민통치하면서 10리를 4킬로미터로 쓰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문헌에 등장하는 거리를 미터 단위로 계산할 때는 10리를 4.5킬로미터로 환산해야 한다.
김정호의 옥사설은 과연 진실인가?
이제 서두에서 말한 김정호에 대한 여러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자. 사실 김정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거의 없는데도 구전되는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다.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그가 대동여지도의 인본을 조정에 바치자, 나라의 기밀이 누설될 위험이 있다고 여긴 조정 대신들이 그를 옥에 가두어 잔혹한 고문 끝에 죽이고 판각(板刻)을 몰수하여 소각했다는 것이다.
1993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국어 읽기 교과서의 '김정호'라는 단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 나라를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그 지도를 보고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 주는 것으로 오해를 했가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김정호의 피땀이 어린 지도의 판목까지 압수하여 불사르고 말았으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외국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호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쓰여 있었던 김정호 옥사설은 허무맹랑하게 날조된 이야기이다. 김정호의 옥사설이 날조되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김정호가 죄인으로 체포되었다면 대동여지도의 판각 뿐만 아니라 그 인본(印本)이나 전사본(轉寫本)까지 모두 압수당하는 것이 정상이다. 물론 이미 모사(模寫)되어 널리 퍼진 청구도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에 걸친 인본과 사본 및 청구도의 전사본 등이 아무런 수난을 겪은 흔적이 없이 잘 전해오고 있다.
현재 대동여지도의 판목 한 장이 숭실대학교에 전시되어 있고 일본인이 대동여지도 판목 수십 장을 비장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김정호와 가까웠던 최성환(崔成煥) 후손들도 대동여지도의 판목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화재로 없어졌다고 증언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죄인으로 몰려 옥사했다면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발행된 이향견문록에 김정호에 관련된 기록이 실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김정호와 가까웠던 최한기, 최성환, 그리고 국가 기밀 지도를 제공해 주었다는 무관(武官) 신헌(申櫶) 등이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야 했을 텐데, 그러한 기록이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신헌은 오히려 대원군 시절에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김정호가 죄인이었다면 신헌이 문집 속에 김정호로 하여금 자기와 협력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신헌은 대동방여도(大東方旅圖)의 서문에서 "나는 우리나라 지도 제작에 뜻이 있어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고가에 좀 먹다 남은 지도들을 널리 수집하고, 이를 서로 비교하고 또 지리서를 참고하여 이들 지도를 합쳐서 하나의 지도를 만들고자 했으며, 이 일을 김정호에게 위촉하여 완성시켰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김정호가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는 설화가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과 우수성을 깎아 내림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일제의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자들은 말한다. 김정호의 옥사설이 공식적으로 처음 나온 것은 1939년 일제가 발행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이다.
'대원군의 명령으로 김정호 부녀를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부녀는 그 후 얼마 아니 가서 옥중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통한을 품은 채 사라지고 말았다. 아아, 비통한지고! 때를 만나지 못한 정호... 그 신고와 공로의 큼에 반하여 생전의 보수가 그 같이도 참혹할 것인가? 비록 그러하나 옥이 어찌 영영 진흙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랴. 명치 37년에 일로전쟁(日露戰爭)이 시작되자 대동여지도는 정예 황군에게 지대한 공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총독부에서 토지 조사 사업을 착수할 때에도 둘도 없는 좋은 자료로 그 상세하고도 정확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하게 하였다.'
왜 일본인들은 김정호가 국가 기밀 누설죄로 단죄받았다는 전설을 창조해 냈을까?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한국은 중국 및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대고 있는 221,000제곱미터 면적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소규모 국가이다. 한국의 장구한 역사 동안에 수없이 많은 외침이 있었고 점령 혹은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지만 한국 왕조의 국왕이 외적에 의해 살해되는 일은 없었다. 한국을 침략한 모든 나라들이 한국 왕조의 국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후에 점령 통치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군대를 철수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침략자들이 한국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지형은 산이 많고 길이 복잡하다. 그러므로 외국의 군대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한국 민족이 유격전을 벌여 퇴로를 차단한다면 꼼짝없이 갇히게 되는 형편이었다. 한국을 공격하고자 한반도에 들어왔을 경우 설사 점령하도라도 전술상 보급로가 길어지므로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과 같은 나라는 점령보다는 복속시켜 소란을 피우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최고 통치 방법은 무도측안전(無道測安全)이었다. 즉 한반도의 지형이 적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 국가 방위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지도가 전혀 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통치를 이하여 정밀지도와 지지를 제작하였음은 이미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안보상 극비로 정부에서 비밀리에 수행하는 업무였다.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은 김정호가 당시로서는 한국 최고의 통치비밀을 스스로 만들어 국가에 헌납하였다면 위정자로 보아서 깜짝 놀랐다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김정호는 신헌의 서문처럼 신헌 장군으로부터 직접 지도 제작을 위촉받아 만든 것이다. 김정호가 단죄되었다는 말이 허구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김정호보다 훨씬 선대의 사람이 김정호에 대한 전설과 같이 독자적으로 지도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그 사람은 국가의 일급 비밀을 누설한 죄로 사형을 당했음이 틀림없다고 지적한다.
조선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조선을 보다 효울적으로 식민통치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고는 있지만 조선 민족의 저항이 남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명분은 조선이 어리석은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당연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했도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한 조선 강토의 측지사업에 많은 도움을 준 김정호는 가장 구미에 맞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김정호가 옥사하였다는 전설을 만들어 한국 정부의 무능과 김정호에 대한 고마움을 토로한 것이다. 한 마디로 한국을 식민지배하는데 김정호처럼 좋은 명분은 없었다는 뜻이다.
여하튼 김정호가 필생의 정력을 기울여 만든 청구도, 대동지지, 대동여지도의 세 금자탑은 다행히도 오늘날가지 전해지고 있다. 만일에 이런 저작물까지도 인멸되었다면 김정호의 존재와 업적은 영원히 파묻혀 없어졌을 것이다. 국가에서는 김정호에게 아무런 보답이나 상을 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우리나라 과학사에 길이 불멸의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대동여지도는 판본인 관계로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보물 제8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건설부 국립지리원 내에 김정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서소문 밖 약현성당 구내에 기념비가 1991년에 건립되었다.
다행하게도 개정된 1999년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 읽기 교과서의 '김정호' 단원을 보면 억울한 죽음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었다. 그가 대동여지도의 제1집 지도유설에서 '지도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적을 격파하고 난폭한 무리들을 토벌하여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평화시에는 정치를 수행하고 사회의 모든 일을 다스리는 경제 정책을 시행 조절하는 데 모두 나의 지도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라고 지도를 제작한 취지를 밝혔듯이 김정호의 애국애민(愛國愛民) 정신은 새삼 우리의 고개를 절로 숙여지게 한다.
▶참고서적: 이종호 저술『현대 과학으로 다시 보는 한국의 유산 21가지』새로운 사람들 (1999년), 이현희 저술『이야기 인물 한국사』청아출판사 (2003년), 양보경 저술『대동여지도』한국사 시민강좌 제23집 (1998년), 최두환 저술『대동여지도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집문당 (2003년), 김경수 저술『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동방미디어 (2001년). |
내용출처 : [기타] http://www.korea9000.net/zboard/zboard.php?id=bbs_data_mojip&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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